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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19일 일요일

[책 리뷰] 생명과 죽음을 관장하는 원소계의 야누스 ~ 산소(닉 레인)

OXYGEN-book-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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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죽음을 관장하는 원소계의 야누스

Original Title: Oxygen: The Molecule That Made the World by Nick Lane
장수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는 것이라는 점이다. 앞서도 보았듯이, 미토콘드리아는 난자로만 전해지며 따라서 미토콘드리아 유전자 열세 개도 모두 어머니한테서 물려받는다. 만일 이 유전자들이 정말로 수명에 영향을 미친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머니한테서 물려받을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우리는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의 수명을 따라가게 된다. (『산소(OXYGEN)』, p455)

노화와 죽음을 불러들이는 주범, 산소

람을 포함하여 지구상에 존재하는 많은 동물이 산소(酸素, oxygen) 없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확고부동한 사실이다. 그런데 생명의 원동력으로 알려진 산소가 노화와 죽음을 불러들이는 주범이라면 당신은 믿을 수 있겠는가? 사람의 세포는 산소 덕분에 숨을 쉬고 에너지를 얻고 있지만, 호흡 과정에서 생기는 자유라디칼(free radical) 때문에 - 산소가 철을 부식시키는 것처럼 - 세포는 녹슬고 있다. 세포는 호흡과 동시에 산소의 강력한 산화 작용으로 서서히 노화되어 가는 것이다. 우리는 산소에서 생명력을 얻으며 산소와 함께 진화했다는 사실 때문에 산소가 우리에게 어떠한 해를 끼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것도 사람에 따라선 몸서리치도록 두렵고 마냥 미루고만 싶은 노화의 주범이라니, 어디 될법한 말인가.

사람이 산소에 적응하도록 진화됐다는 것과 다른 포유류에 비해 비교적 긴 수명을 가졌다는 것, 그럼으로써 지금까지 (리처드 도킨스 Richard Dawkins의 말을 빌리면)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의 운반체 노릇을 성공적으로 해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종족의 번식’을 최우선으로 삼는 유구한 진화사에서 다른 동물과는 달리 그 이상의 뭔가를 더 갈망하고 욕구하는 사람에겐 100세도 짧게 느껴진다. 그뿐만 아니라 죽음과 소외, 질병을 예고하는 노화는 피할 수 없는 현실임에도 인류는 지금까지 (비도덕적이고 악랄한 방법을 포함하여) 온갖 수단으로 노화와 죽음에 대항해 왔다. 현대 의학은 인간의 한계 수명을 115세로 가정하고 있지만, 알다시피 대부분 사람은 100세는커녕 90세도 넘기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살아갈 에너지를 공급하는 산소가 한편으로는 우리를 곱게 늙도록 가만 놔두지 않기 때문이다. 산소는 생명과 죽음을 관장하는 원소계의 야누스 같은 존재다.

사람의 몸도 산소가 독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소가 독성이라는 사실은 사람의 신체 구성에서도 나타난다. 사람의 체액 구성이 조상인 단세포 생물들이 예전에 살았던 바닷물과 똑같은 것처럼 사람 몸의 산소 농도는 호흡효소가 처음 생겼을 당시의 산소 농도(대기 중 산소 압력의 0.3% 미만)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은 몸 안팎의 산소 농도 차이로 말미암은 부담이나 부작용을 처리하고자 다양한 방법으로 항산화제 평형을 유지하는 쪽으로 진화해 왔다. 그러나 그 평형이 언제까지나 지속하는 것은 아니다(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영원한 젊음을 얻게 될 것이다). 평형은 개체가 번식이 끝나는 시기를 지나면서 서서히 깨지는데,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노화 현상으로 나타난다. 번식을 마친 개체는 자신의 소임(유전자를 후세에 전달하는 것)을 다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선택 압력이 낮아진다. 그것은 자유라디칼로 말미암은 세포와 유전자 손상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면, 적당한 시기에 번식을 통해 건강한 유전자를 남기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진화상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화는 한 개체의 일생 중에서 비교적 뒤늦게 찾아온다. 만약 번식을 마치기도 전에 노화가 먼저 오는 종이 있다면, 그 종은 자연 선택으로 일찌감치 도태되었을 것이다. 노화나 노인병이 인생 말기에 찾아오는 것에는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비록 산소가 야누스처럼 두 얼굴을 가졌지만, 진화를 산소라는 프리즘을 통해 들여다보면 우리는 산소를 미워하기보다는 마땅히 감사하는 마음을 더 가져야 할 것 같다. 바다와 토양이 생명이 자랄 수 있는 든든한 기반을 제공했다면, 산소는 생명력이라는 오묘한 에너지를 생산하는 엔진이다. 지구상의 생물 다양성은 산소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생물 다양성이 활짝 만개한 덕분에 그 틈새를 통해서 인류가 진화할 수 있었는데, 만약 생물 다양성을 이루어낼 수 없었다면 지구는 일찌감치 화성처럼 불모의 땅이 되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산소(OXYGEN)』의 저자 닉 레인(Nick Lane)은 산소가 있었기에 생물 다양성뿐만 아니라 유성생식, 성별, 인간의 의식 자체가 존재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한마디로 지구 생명의 역사는 산소의 역사와 길을 같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흔히 말하는 장수 비법, 다 과학적 근거가 있다?

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35억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산소의 기원을 밝히는 일보다는 앞서 언급한 대로 산소와 노화의 관계를 밝히는 일에 더 관심이 많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대부분이 아직 가설 수준에 머물러 있고, 실험적으로 증명된 사실은 많지 않지만, 닉 레인의 『산소(OXYGEN)』는 노화가 진행되는 전반적인 흐름이나 원인에 대해 대략적인 개념을 잡을 수 있는 (TV 속 쇼닥터의 약장수 같은 광고성 궤변과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과학적 지식과 조언으로 충만한 책이다. 지질학, 고생물학, 화학, 의학, 생물학, 유전학 등 서로 다른 분야를 넘나들면서 이해의 연결고리를 제공하는 다양한 학문적 성과, 실험적 증거, 논리적 가설을 바탕으로 충분히 설득력 있게, 그리고 약장수처럼 장황하게 밀어붙이지 않는 닉 레인의 친절한 설명은 다소 깊이가 있는 이 책을 읽는 부담감을 어느 정도 덜어줄 뿐만 아니라 독자가 자연스럽게 흐름을 따라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주인공이 ‘산소’이듯 때때로 설명이나 가설은 세포, 세균, 유전자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화학적 분석과 함께 진행되기 때문에 오래전에 학교를 졸업한 (나 같은) 독자에겐 다소 난감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으나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을 조망하는 데 큰 무리는 없다. 그리고 이 책 막바지에 등장하는 ‘미토콘드리아 노화’ 이론은 닉 레인의 또 다른 책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책 리뷰] 세상을 지배할 단 한 번의 진화 ~ 미토콘드리아(닉 레인)」)에서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진다.

아직 현대 의학 기술로는 노화와 관련된 유전자들을 직접 조작하여 수명을 연장시킬 수는 없지만, 노화를 서서히 진행시킬 수 있는 방법은 분명히 존재하며 그것은 장수하는 사람들의 생활 습관에서도 잘 나타난다. 사람이 장수하려면 음식을 적게 먹고 - 그중에서도 채소와 과일을 풍부히 섭취하고 - 적당히 운동하고, 스트레스를 적게 받는 낙관적인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흔히 말한다. 예전에는 그것이 그저 교과서적인 공허한 말로만 들렸다면, 『산소(OXYGEN)』를 제대로 읽었다면 왜 그러한 생활 태도가 젊음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노화를 늦추는데 어떻게,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되는지 세포적인 수준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으면 음식을 적게 먹으면 대사 스트레스를 낮춰 미토콘드리아에서 자유라디칼이 새어 나와 건강한 세포를 공격하는 일을 줄일 수 있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덤으로 이 책을 읽고 나면 적게나마 돈도 절약할 수 있다. 왜냐하면, 널리 선전하는 항산화제 건강보조식품들이 실제로는 노화 예방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과학적 근거도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놀이터에 흙이 사라진 오늘날,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은 지나치게 깨끗한 환경에서 성장하는 것이 면역력을 약화시켜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설명은 반드시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마치면서...

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계에 의존하면서까지 의식 없는 삶을 연장하는 것을 생명에 대한 모욕으로 생각하는 나 같은 사람에겐) 말년을 얼마만큼 건강하게 보낼 수 있느냐는 더더욱 중요하다. 그러려면 흔히 비꼬면서 말하기도 하는, 이른바 ‘바른 생활 태도’가 필요하다. 음식을 적게 먹고, 채소와 과일을 포함하여 골고루 먹고, 적당히 운동하고, 스트레스를 피하고, 삶의 속도를 느리게 유지한다. 이것이 신체의 노화를 예방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면, 사람의 정신 건강과 깊은 관련이 있는 뇌의 노화를 – 치매나 알츠하이머 등 - 예방하려면 독서를 통해 꾸준히 뇌를 운동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운동으로 근육을 단련하듯 독서로 뇌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내 믿음에서 착안한 의견이다.

이 모든 일은 사람의 육체를 구성하는 세포가 산소로부터 산화되는 것을 조금이라도 늦추려는 최선이자 최소한의 시도다. 『산소(OXYGEN)』를 읽고 나면 예전에는 의사들이나 장수하는 사람들이 으레 내뱉는 말로만 들렸던, 그래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 진부한 조언들이 진지하다 못해 심각하게 들린다. 먹는 것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고, 자칫 잘못하면 운동에 대한 강박관념에도 시달릴 수 있다. 그럼에도 건강한 삶과 노화를 조금이라도 늦추는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원초적인 희망이라는 점에서 닉 레인은 많은 것을 알려준다. 노화를 인문학적으로 다룬 다른 책들과는 달리 노화의 주범인 ‘산소’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노화를 직설적이자 직접적으로 다룬 이 책은 단지 과학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생활 방식을 어떻게 가져야 할지에 대한 조언도 은근슬쩍 내비친다. 산소와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겐 ‘산소’라는 분자를 통해 생명의 비밀을 캐내려는 이 책은 사람의 삶과 죽음의 언저리를 둘러싼 베일을 걷어내려는 야심 찬 시도다. 생명의 기원과 진화, 우리의 삶과 죽음에는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 같은 동반자 ‘산소’가 늘 함께하고 있다.

참고로 이 책을 읽었다면 다음 책으로는 닉 레인의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와 피터 워드(Peter Ward)의 『진화의 키 산소 농도(Out of thin air)』를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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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12일 일요일

[책 리뷰] 먼뎃불빛 같은 추억 속에 잠긴 비운의 사랑 ~ 백발마녀전(양우생)

White Haired Witch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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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뎃불빛 같은 추억 속에 잠긴 비운의 사랑

Original Title: 白髮魔女傳 by 梁羽生
옥나찰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절세의 용모를 지니고 태어난 몸이었다. 그리고 자기의 미모를 가장 사랑하고 아꼈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소녀가 백발의 여인으로 변하고 만 것이었다. 얼굴이 쭈글쭈글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백발 노파가 된 것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이 당한 괴로움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그저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다. (백발마녀전(白髮魔女傳) 중에서)

오래간만에 무협 소설을 찾은 변변치 않은 이유

릿속이 실타래가 엉킨 것처럼 잡다한 상념과 고민으로 복잡하게 꼬여 있을 때,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을 때, 지속해서 책을 읽는다는 것에 회의를 느끼거나 독서 자체에 염증을 느낄 때, 이럴 때 나는 무협 소설을 찾는다. 재충전 안 되는 일회용 건전지가 하릴없이 방전되는 것처럼 남은 삶의 하루하루가 무기력하게 소모되는 나의 삶에서 번뇌와 자책감에 빠지는 것마저 때론 사치로 느껴질 때, 무협 소설은 이 모든 상념과 번뇌에서 잠시라도 벗어나는 해방감을 만끽하게 해준다. 삶의 중압감으로 빈대떡처럼 납작하게 짓눌려 있었던 꿈을 풍선처럼 다시 부풀어 오르게 하고, 냉혹한 현실주의로 기가 팍 죽어 있던 공상의 금빛 날개를 다시금 펼치게 하는 무림의 세계는 엄연히 비현실적이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매혹적이다. 마음과 머릿속에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던 번뇌의 실타래를 한올 한올 풀어주는 시원스럽고 통쾌한 무공 대결, 부족한 용기와 타고난 소심함으로 포효해내지 못했던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울분을 삭여주는 의협심이 활활 타오르는 크고 작은 영웅들의 이야기는 감개무량하다. 여기에 난독증으로 고생하는 사람, 책만 보면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사람, 아니면 나처럼 즐겨 책을 읽던 사람 등 책과 친하고 친하지 않고에 상관없이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든 이에게 폭풍 같은 흡입력을 발휘하는 조악하면서도 단순하고 명확하고 간결한 문체도 무겁고 심란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주는 데 한몫한다. 그렇다고 무협/판타지 소설이 독서 세계의 주요 장르가 되어서는 아니 되지만, 앞서 거론한 몇 가지 이유와 기타 이런저런 이유로 가끔은 기분 전환 삼아 빠져들 만하다. 그래서 찾은 작품이 영화로도 유명한 양우생(梁羽生)의 무협 소설 「백발마녀전(白髮魔女傳)」이다. 한국에서는 『여도 옥나찰(女盜 玉羅刹_』이란 제목으로 소개되었지만, 중국어 위키백과를 찾아보니 ‘백발마녀전’이 원제다.

내가 만난 최고의 女고수이자 최고의 女영웅

금까지 내가 읽어본 무협 소설이라 해봤자 김용(金庸)과 고룡(古龍)의 몇몇 작품들로 한정되지만, 사실 무협 소설 중에서 굳이 찾아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내 생각으론 무협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김용을 제외하면, 고룡, 양우생, 와룡생(臥龍生) 정도 언급하고 싶을 뿐이다. 보통 무협 소설 한 작품의 분량이 일반 소설보다 훨씬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앞에 거론한 작가들의 작품을 고루고루 돌려 읽는다면 평생 우려먹을 수 있으므로 기타 무협 소설을 읽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 낭비다.

그런데 지금까지 읽어본 무협 소설의 주인공들은 전부 다 남자 영웅이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女영웅을, 그것도 정파와 대립하는 녹림에 몸을 담은 女고수를 만났다. 무림인들은 그녀가 없는 곳에서는 그녀를 옥나찰(玉羅刹)이라 부르지만, 그녀의 본명은 연예상(練霓霜)이다. ‘나찰’은 사람을 잡아먹는 귀신을 뜻하는데 이 앞에 아름다움을 뜻하는 구슬 ‘옥’자가 붙었으니,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박거리지 않는 절세미녀를 이처럼 잘 표현한 별호는 없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보통의 무협 소설에서 남자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미녀를 빼놓을 수 없듯, 옥나찰 역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난다. 다만, 다른 무협지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강호를 유람하다 인연을 맺게 된 여러 명의 미녀 사이에서 애증의 굴레에 빠지고, 사랑의 달콤한 갈등을 거듭하는 것에 반해 옥나찰은 단 한 명의 남자와 처음이자 마지막인 운명적 사랑에 빠진다. 매초 악랄한 초식을 구사하면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독한 마음의 소유자이자, 무공이 고강한 만큼이나 호승심도 강한 그녀의 아찔한 애정의 과녁이 된 행운(?)의 남자는 장차 무당파의 장문인이 될 장문제자 탁일항(卓一航)이다./p>

먼뎃불빛 같은 추억으로 남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자는 녹림을 주름잡는 대도 중의 대도, 남자는 강호에서 소림사와 함께 정파를 대표하는 무당파의 장문제자. 두 사람의 배경부터 흑과 백의 구별이 선명하지만, 두 사람의 성격 차이도 그에 못지않다. 옥나찰은 자신의 무공과 미모에 대하여 자부심으로 가득 찬만큼 어떤 상황에서도 안하무인 격으로 거칠 것 없이 행동한다. 또한, 그녀는 심보가 악독하기로 정평이 나 있고, 그녀의 하얀 섬섬옥수가 내지르는 수단 하나하나가 매섭기 그지없지만, 흑백을 가릴 줄 알고 시비를 분간할 줄 아는 호탕한 협녀다. 반면에 탁일항은 무협 소설에서는 보기 드물게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옥나찰과의 애정 문제에서는 매사 우유부단한 태도를 선보이며 영 시원스럽지가 못하다. 한마디로 시종일관 답답한 모습을 보이면서 독자의 짜증을 부채질한다. 그뿐만 아니라 옥나찰의 걸출한 무공과 눈부신 외모에 비하면 탁일항의 무공은 그저 그렇고 외모는 고만고만하다. 한마디로 무협 소설의 남자 주인공치곤 매우 변변치 못한 인물이 바로 탁일항이다. 이런 두 사람의 대비되는 배경과 성격에서 짐작해 볼 수 있듯 두 사람의 줄타기 같았던 아슬아슬한 사랑은 결국 가슴에 사뭇 치는 처연하고 쓸쓸한 감정만 남긴 채 미완성으로 마무리된다.

옥나찰이 처음으로 탁일항을 만나게 되는 철이 없을 무렵, 그녀는 탁일항과 결합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어려움도 무릅쓸 각오가 되어 있었고, 두 사람 사이를 방해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지위나 무공의 고하 따위는 상관없었다. 그녀에겐 두 사람의 앞길을 훼방 놓는 사람은 모두가 적이었다. 그것은 세상 규칙 따윈 거들떠보지도 않는 호방하고 방종한 그녀의 성격과도 일치했다. 그렇게 그녀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일편단심으로 두 사람의 인연을 완성하려고 했지만, 관습과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는 소심하고 답답한 탁일항의 모습에서 사랑을 확신하지 못한 옥나찰은 좌절에 좌절을 거듭한 나머지 꼭 탁일항과 함께 사는 것만이 최선은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때는 이미 사랑의 번뇌가 가져다준 상심과 피로, 사랑과 미움의 반복이라는 시련이 극에 달한 나머지 그녀의 머리가 허옇게 세어버렸을 때이기도 하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자 그녀는 두 사람의 사랑을 하늘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여겼던 것일까? 탁일항의 모든 것을 희생시키고 자기 혼자만 그를 독차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차라리 한 가닥 애련한 추억을 남기고 그것을 기억하며 살기로 마음먹는다. 아쉽게도 두 사람의 사랑은 밤하늘을 수놓은 별처럼 서로 마주 보면서도 결코 가까이 다가설 수 없는 아득하고 아련한 먼뎃불빛 같은 추억으로 남게 되고,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애틋함과 쓸쓸함은 예리한 면도날이 오장육부를 스쳐 가듯 가슴 한구석을 아려 온다.

마치면서 무협 소설에 대해 한 마디

협 소설에서 무지개처럼 화려하고 번개처럼 날렵하며 태풍처럼 웅장한 무공 대결만큼이나 볼만한 것이 남녀 주인공의 기구한 사랑의 운명이다. 하지만, 보통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는 우여곡절을 거듭하고 다사다난한 역정을 거치면서도 끝내는 해피엔딩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또한, 그런 해피엔딩이 가져다주는 냉장고에서 막 꺼낸 사이다 같은 청량감이 텁텁한 마음을 시원하게 적셔주는 통쾌하고 개운한 맛에 보는 것이 또 무협 소설 아닌가? 하지만,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두 사람의 사랑이 태우다 남긴 시커먼 숯등걸 조각들을 보면, 『백발마녀전』 의 서글픈 결말은 울적하고 소침한 기분을 풀고자 이 소설을 탐독한 나에게 불난 데 오히려 부채질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옥나찰과 함께 한 절대 짧지 않았던 그 시간만큼은 온갖 잡다한 세상만사와 시름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홀가분한 시간이었다고 감히 말하 수 있으리라.

마지막으로 몇 마디 더 한다면 무척이나 긴 내용에 비해 읽고 나면 남는 것이 별로 없는 것이 무협 소설이다. 이것은 무협 소설만이 가지는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다. 아무 생각, 아무 걱정 없이 텅 빈 마음과 텅 빈 정신으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지만, 긴 시간을 할애하고도 영양가 없는 독서를 했다는 자괴감이 들 수도 있다는 점에서 단점이다. 하지만, 독서라는 것이 지식이나 지혜, 하다못해 감수성을 자극한다거나 감개무량한 뭔가를 얻고자 하는 목적으로 행해지는 것만은 아니다. 중과부적으로 우리를 압박해오는 지루한 시간의 중압감과 고리타분한 일상의 막막함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시간과 삶의 굴레에서 잠시 비껴갈 수 있는 짬을 얻어낼 수 있는 취미 중의 하나가 바로 독서다. 그래서 독서는 고상하면서도 천박한 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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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5일 일요일

[책 리뷰] ‘동화’라는 포장지에 싸인 ‘불량 식품’ 같은 ~ 암흑 동화(오츠이치)

Ankoku Dowa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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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라는 포장지에 싸인 ‘불량 식품’ 같은 이야기

Original Title: 暗黑童話 by Otsuichi
“그래, 여기 온 인간은 모두 수술을 받아. 행복한 수술이야. 그리고 갇히는 거야. 신기하게도 그것은 고통이 아니야.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모든 것에서 해방된 기분이 돼.” (『암흑 동화』, P348)

눈을 잃은 소녀, 그리고 눈이 기억하는 것

‘당신은 세포 기억설(Cellular Memory)을 믿습니까?’, 대뜸 이런 식으로 질문을 들이대니까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나 붙잡은 다음 다짜고짜 ‘도를 믿습니까?’라고 물고 늘어지던 사람들이 생각난다. 내 질문 역시 그런 뜬금없는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세포 기억설은 아직 과학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가설에 불과함에도 놀라운 실제 사례들이 존재하는 미지의 세계다. 태국 공포 영화 「디 아이(見鬼: The Eye, 2002」에서는 각막이식수술로 19년 만에 처음으로 눈을 뜬 주인공이 거리를 떠도는 귀신과 죽음의 그림자를 보게 된다.

그렇다면 이런 이야기도 가능할까? 사람이 살아생전에 보게 되는 모든 광경은 오직 눈을 통해서만 뇌로 흘러 들어간다. 무엇을 보든 ‘본다는’ 것의 시작은 언제나 눈이다. 쉽게 말해 눈이 없거나 손상되면 사람은 주변을 볼 수 없다. 빛과 사람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가 눈이다. 그런데 만약 눈이 단순히 영상을 뇌로 전달해주는 도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기억처럼 영상을 저장할 수 있다고 한다면 다른 이의 안구를 기증받은 사람에겐 어떤 일이 일어날까?

두 눈을 잃은 소녀는 까마귀가 선물해주는 다른 사람의 눈들을 통해 암흑으로 채워졌던 무서운 꿈 대신 눈 주인이 살아생전에 보았던 생생한 현실을 꿈속에서 본다. 한쪽 눈을 잃은 충격으로 과거의 모든 기억을 잃은 어느 한 소녀는 기증받은 눈의 주인이 보았던 과거를 자신의 텅 빈 기억 속으로 채워 넣는다. 두 이야기 모두 누군가에는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오츠이치(Otsuichi)의 『암흑동화(暗黑童話, Ankoku Dowa)』에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 까마귀가 가져다준 부드럽고 촉촉한 둥근 눈을 해골처럼 텅 빈 동공에 끼워 넣으면 눈 주인이 보았던 세상을 꿈속에서 경험한다는 두 눈을 잃은 소녀와 안구 기증자가 살아생전에 본 것을 현실 속 환영을 통해 보게 된다는 소녀 나미의 이야기는 ‘동화’라는 제목에 걸맞은 환상적이며 어딘지 모르게 가슴 뭉클한 아름다운 이야기처럼 들린다.

암흑 속에 갇힌 잔혹한 동화

눈을 잃은 소녀는 자신에게 둥근 것을 성실하게 가져다주는 말하는 까마귀가 진짜 누구인 줄 몰랐다. 소녀는 자신에게 사라진 꿈과 색깔을 찾아준 부드럽고 촉촉한 둥근 것이 다른 사람의 눈인 줄 몰랐다. 소녀는 사람의 얼굴에서 방금 뽑아낸 것 같은 촉촉한 눈알이 까마귀가 다른 사람을 무자비하게 공격해서 얻게 된 것인 줄은 더더욱 몰랐다. 마지막으로 소녀는 꿈이 끝나는 마지막에 항상 나타나는 검은 괴물이 까마귀인 것을, 그리고 그 검은 짐승이 자신을 덮치는 모습이 사실은 까마귀가 눈의 주인을 공격해서 눈을 빼앗는 그 순간인 것을 몰랐다. 소녀는 자신이 다시 꿈을 꾸게 된 잔혹한 내력을 몰랐기 때문에 까마귀의 선물 덕분에 행복했고, 까마귀는 소녀가 자신이 준 선물 때문에 우울함과 암흑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기뻤다. 소녀가 전지전능한 신이나 줄 수 있을 법한 선물 덕분에 달콤한 꿈을 꾸며 행복에 젖어 있을 때 이처럼 잔혹한 내막이 소녀의 주위를 암흑처럼 드리우고 있었다. 소녀는 그 사실을 죽을 때까지도 몰랐기에 자신에게 일어난 앨리스가 방문한 이상한 나라에서나 있을법한 신비한 일을 동화 속 이야기처럼 마냥 행복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한편으론 까마귀는 이 모든 사실을 알았고 그것이 나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오직 소녀를 기쁘게 해주고자 하는 일념으로 다른 사람을 공격해서 눈을 빼앗았기 때문에 소녀가 겪은 동화 같은 이야기에 지워지지 않는 짙은 암흑을 남겨놓는다.

한편, 나미는 기증받은 왼쪽 눈이 현실이라는 스크린에 기증자의 과거를 영사기처럼 낱낱이 투영해주는 환영을 마치 불행한 사고로 잃어버린 자신의 기억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처럼 낱낱이 기록하다가 어느 날 기증자가 죽는 과정을 보게 된다. 하지만, 기증자의 죽음은 평범한 죽음이 아니었다. 기증자는 우연히 발견한 납치당한 소녀를 구하려다 납치범에게 들킨다. 그는 다급하게 납치범에게 벗어나려다 그만 달려오던 차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교통사고로 죽는다. 기증자가 본 실종된 소녀는 나미도 언젠가 뉴스에서 본 적이 있는 소녀였다. 사고로 기억을 잃어 텅 빈 과거를 가지게 된 나미는 메마른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기증자의 과거를 빠르게 흡수하면서 마치 자신이 기증자가 된 것 같은 착각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기증자의 예사롭지 않은 죽음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결국, 나미는 집을 나와 기증자가 살던 산골 마을로 무작정 길을 떠난다. 납치범을 잡아 기증자의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말이다.

사실 나미가 추적하는 납치범은 평범한 납치범이 아니다. 그는 어떤 생명체라도 손길만 닿으면 죽음과 고통, 생존의 족쇄에서 벗어난 현실과는 차원이 다른 평온을 느끼게 해주는 마법 같은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난도질 된 육체에 생명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간달프 같은 백색 마법사지만, 그는 악의도 살의도 없이 마주치는 사람들을 해부실의 실험용 시체처럼 팔다리를 절단하고 장기들을 뽑아내거나 마구 휘저어 놓는다는 점에서 순수한 악마다. 그의 잔인한 유흥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좀비가 마구 파헤친 것처럼 내장이 드러나고 팔다리가 잘려나가지만, 그의 신비한 힘 때문에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죽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현실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금지된 평온과 행복 같은 이상야릇한 도취감에 사로잡힌다. 그의 손이 미치는 곳이 곧 고통과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지만, 그의 손길이 닿은 인간의 육체는 이미 괴물 아닌 괴물로 변해버린다.

사고로 한쪽 눈도 잃고, 기억도 잃고, 과거도 잊고, 그뿐만 아니라 정체성까지 잃고 방황하던 소녀가 기증받은 눈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삶에 애착을 갖게 되면서 비로소 이전의 ‘나’와는 다른 길을 걷는 새로운 나를 발견해간다는 우울한 동화 같은 이야기에 기증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기괴한 힘을 가진 납치범이 끼어들면서 동화는 빛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암흑 속에 갇히게 된다.

‘동화’라는 포장지에 싸인 ‘불량 식품’ 같은 이야기

‘정말 지금까지 내가 본 모든 것들을 내 눈도 기억하고 있을까?’, 언젠가는 이 질문에 대한 과학적 진실이 명확하게 밝혀지겠지만, 지금은 불가사의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낭만적이고, 한편으로는 소름 끼치는 이야기로 들린다. 그래서 ‘눈의 기억’이란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오츠이치(Otsuichi)의 『암흑동화(Ankoku Dowa)』도 불가사의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낭만적이고, 한편으로는 소름 끼친다. 외르겐 브레케(Jorgen Brekke)의 『우아한 제국(Nadens Omkrets)』에 등장하는 연쇄살인범이 섬뜩한 예술적 광기를 번득이며 피해자의 피부를 벗겨 내듯 광기가 번득이는 창의성으로 동화가 품은 낭만과 아름다움을 벗겨 내 검붉은 징그러움을 드러내는 잔혹한 이야기는 악마적인 흥미로움과 구역질 나는 애잔함이 담겨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의 어둡고 자극적인 이야기를 싸고도는 섬뜩한 매력은 누군가에게는 불량 식품 같은 금단의 열매가 될 수도, 또 다는 누군가에는 게워내야 할 상한 음식이 될 수도 있다. 감히 추천하기에는 불편한 작품이지만, 감히 불량 식품의 맛이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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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27일 토요일

[책 리뷰] ‘디자인 원리’가 꿈꾸는 또 다른 미래 ~ 공유의 비극을 넘어(엘리너 오스트롬)

Governing the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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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원리’가 꿈꾸는 또 다른 미래

Original Title: Governing the Commons: The Evolution of Institutions for Collective Action by Elinor Ostrom
필자 주장의 핵심은 공유재의 딜레마라는 함정에 갇혀 자신들의 자원을 파괴해 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함정에서 성공적으로 빠져나오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공유의 비극을 넘어』, p53)

인간의 문제 해결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공유재의 비극’

간의 문제 해결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공유재의 비극’ 자세한 내용은 몰라도 ‘공유지(공유재)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이란 말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이 개념을 1968년 사이언스지 논문에 발표해 주목을 받았던 개럿 하딘(Garrett Hardin)은 ‘공유지의 비극’을 쉽게 설명하고자 ‘모두에게 열려 있는’ 목초지를 예로 들었다. 이 예에서는 목동들의 과잉 방목이 목초지의 황폐화를 불러와 결국 그들 모두가 파국적인 결말로 치닫게 된다고 예측한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과잉 방목할까? 목동 각자는 목초지에 풀어놓은 자신의 가축들로부터 직접적인 이익을 얻지만, 과잉 방목으로 말미암은 손실은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그 손실에 대한 부담도 그 일부만 짊어진다. 한 사람의 목동에게는 최선의 수익을 안겨준다는 점에서 그들의 개인적 선택은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는 비합리적인 결말에 이르게 된다는 역설을 개념화한 것이 바로 ‘공유지의 비극’이다 . 하딘의 모델은 흔히 죄수의 딜레마 게임으로 불리는 게임 이론으로 정형화되었고, 여러 사람에게 개별적 복지 추구 대신 집단적 복지를 추구하게 하는 일이 어렵다는 관점은 맨슈어 올슨(Mancur Olson)의 책 『집합 행동의 논리(The Logic of Collective Action)』(1965)에도 개진되어 있다.

이러한 개념을 기반으로 세워진 모델은 복잡한 것을 인위적으로 단순화시킴으로써 특정한 상황에 대해서만 분석과 예측할 수 있고, 불확실하고 복잡한 현실은 반영하지도 예측하지도 못해 실제적인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자들이 공유 자원 문제의 분석에 이용하고자 했던 개념들에는 인류의 문제 해결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선입관이 작용하고 있다. 하딘의 개념은 인간을 오로지 이기적이고, 경험으로부터 아무것도 학습하지 못하고, 오직 눈앞의 이익만 좇는 정형화된 틀에 묶어 두고 있다. 여기서 인간은 스스로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할 능력이 없고, 자발적으로 조직을 만들어 토착 환경에 적실한 제도를 디자인할 능력도 없다 . 오로지 정부라는 외부의 강력한 개입에 의해서면 공유 자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대부분의 공유재가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어촌, 농촌, 산촌 등에 산재해 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학자들이 교육이나 문화 수준이 도시보다 낮다는 이유로 지방 사람들의 문제 해결 능력을 평가절하하는 엘리트 의식도 다분히 느껴진다. 자신들의 게임 이론에서 전제한 인간처럼 고지식한 사회과학자들이 공유 자원 문제에서 선호하는 중앙집권적인 해결책은 명료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들이 제시한 해결책은 전지전능한 정부와 인격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완벽한 관리라는, 유토피아에서나 가능한 조건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공적인 공유 자원 관리를 위한 ‘디자인 원리’

2009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은 자신의 책 『공유의 비극을 넘어: 공유 자원 관리를 위한 제도의 진화(Governing the commons)』을 통해 현실은 그렇지 않음을 방증한다. 즉, 사회과학자들이 간과한 것처럼 인류의 문제 해결 능력은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 책은 공유 자원을 장기간에 걸쳐 성공적으로 관리한 집단을 제시하고 분석함으로써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제도의 디자인 원리(design principle)를 찾아 나선다 . 어떻게 디자인 원리가 자원 공유자의 행위 동기에 영향을 미쳐 공유 자원 체계 자체와 그 체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제도 모두가 오래 존속될 수 있었는지, 또한 그러한 제도 디자인 원리들이 사람들에게 어떠한 유인을 제공하여 공유 자원의 관리를 위해 지속적으로 시간과 노력을 들이도록 했는지를 밝힌다. 또한, 실패한 사례들에서 사용된 제도들과 성공한 사례들에서 사용된 제도들을 비교하고 분석함으로써 공유 자원을 활용 • 관리해 나갈 수 있는 개인들의 능력을 신장시키거나 가로막는 내외적 요인들도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다.

오스트롬이 실제 상황에서 작동하는 제도로부터 산출한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공유 자원 제도의 디자인 원리 8가지는 다음과 같다.

1. 명확하게 정의된 경계

2. 사용 및 제공 규칙의 현지 조건과의 부합성

3. 집합적 선택 장치

4. 감시 활동

5. 점증적 제재 조치

6. 갈등 해결 장치

7. 최소한의 자치 조직권 보장

8. 중층의 정합적 사업 단위(nested enterprises)

(『공유의 비극을 넘어』, p175)

공유 자원 사용자들이 자신들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례들에서는 앞에 제시된 8가지 디자인 원리 가운데 세 가지 이상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에서 오스트롬이 밝혀낸 디자인 원리는 현실적이고 경험적이며, 실제적인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하는데 매우 적실한 개념이다.

공유 자원 관리의 성공 여부와 외부 개입

통 사람들은 연안 어장, 지역 산림, 지하수, 목초지, 관개 시설 등의 공유재는 정부 같은 중앙집권적인 기구가 총괄해서 관리해야 자원의 낭비를 막고, 사익이 충돌하여 생기는 분쟁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나도 그런 선입관을 가진 사람 중 하나다. 하지만, 오스트롬이 제시한 사례에서 정부의 권위적인 개입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다. 캐나다의 뉴펀들랜드에서는 소규모의 현지 어부 집단이 그들 고유의 규칙을 디자인하고 유지해 올 수 있었지만, 중앙 정부 당국이 이들의 공유 자원 제도를 승인하지 않고 거부하는 바람에 ‘공유지의 비극’을 불러오는 결과를 만들었다. 대신 캐나다 정부는 지역 특성을 무시하고 전국적으로 통용되는 획일적 규제 방안을 강요함으로써 (이전에는 없었던) 문제들을 만들었다. 그렇다고 정부나 공공 기관의 개입이 언제나 문제 해결에 방해되는 것만은 아니다. 캘리포니아 남부 지하수 생산자들의 성공적인 사례는 지방 정부나 중앙 정부가 현지 사용자들의 효과적인 제도적 디자인 능력 제고를 돕는 여러 형태의 편의 장치를 마련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해나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한편, 실패 사례에서 성공 사례로 극적인 반전을 이루어낸 곳도 있었는데 바로 스리랑카의 갈오야(Gal Oya) 프로젝트다. 본래의 사업 계획안은 외부 규칙을 강제로 획일적으로 적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방침을 변경해 교육을 받은 ‘제도 조직자’를 투입해 농민들 스스로 기술과 문제 해결 능력을 계속 발전시켜 갈 수 있는 능력을 배양시키고, 농민들에게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자치 조직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농민들 스스로 이러한 제도가 지속하는 것에 대한 동기를 깨닫게 함으로써 성공적인 사례로 거듭날 수 있었다. 갈오야 프로젝트는 상호 불신과 적개심의 전통이 수세대에 걸쳐 재생산되어 온 경우라 할지라도, 외부 대행자의 도움으로 사용자들이 최적 이하의 결과를 가져오는 완고한 동기 유인을 극복해 나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 예시하는 소규모의 공공 자원 관리에 있어서 현지 역사나 문화, 기타 사정을 고려하지 않는 정부나 공공 기관 등 외부의 지배적이고 일률적인 개입은 상황을 악화시키지만, 공유 자원 사용자들의 자발적인 자치 제도를 지원하는 방식의 다층적인 개입은 거꾸로 상황을 개선해나가는 데 효과적임을 알 수 있다 .

마무리: 공유 자원을 바라보는 두 시선

리스토텔레스는 최대 다수가 공유하는 것에는 최소한의 배려만이 주어질 뿐이며, 모두 공익을 생각하기보다는 자기의 이익을 생각하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찌감치 인류의 이기적이고 근시안적인 성정에 일침을 가했던 것이다. 사회과학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을 때, 오스트롬은 자신만의 세밀하고 경험적인 연구 방법으로 지속가능한 공유 자원 관리의 가능성을 열었다 . 그녀는 성공적인 사례들에서 지속가능한 공유 자원 제도의 디자인 원리를 추려내었고, 그럼으로써 인류에게 불확실하고 복잡한 환경에서도 지속가능한 공유 자원 관리가 가능함을 일깨워주었다. 그것은 곧 그동안 공유 자원 관리에 회의적이었던 인류에게 새로운 희망을 선물한 것이나 다름없다. 앞으로 그녀가 개괄한 디자인 원리가 공유 자원 관리에 있어서 더욱더 많은 성공적인 사례들을 끌어낼 수 있다면 인류의 크나큰 짐 하나를 던 꼴이 될 것이다.

긴 책은 아니지만, 길게 느껴지는 책이 있는데, 바로 이런 학술적인 책들이 그러하다. ‘공유재의 비극’, ‘게임 이론’ 등 말로만 들어왔던 사회과학 용어들이 열심히도 나의 빈약한 뇌세포들을 교란하며 혼란을 부추겼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실제 사례를 이론에 접목시킨 그녀의 연구 방법론 때문일 것이다. 아무래도 나 같은 무지한 독자에겐 구체적인 실례만큼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없다. 그런 이유로 꽤 긴 리뷰였지만, 대부분 앵무새처럼 저자가 했던 말들의 반복이나 그것들의 짜 맞추기나 다름없다. 오스트롬에게 미안하고, 나의 무지와 몰이해도 부끄럽다.

공유 자원을 대할 때 왜 사람들은 그렇게도 몰상식하고 이기적이고 근시안적으로만 사익을 취하려고만 할까? 그것은 서로 간의, 그리고 세대 간의 깊은 단절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예를 들어 공유 자원을 사용하는, 그곳에서 대대손손 살아온 현지인들은 독자적인 제도를 고안해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유재의 비극’을 피하려고 나름의 노력을 다한다. 그들은 과거를 함께했고 미래도 함께할 것으로 기대하기에 사려 깊게 장기적 이익을 고려하는 것이 그들에겐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곧 현지인들에겐 공유 자원이 삶이고 인생 전부이다. 하지만, 외지인은 그 반대다. 그들은 현지인들과 과거를 공유하지도 않고 미래도 공유할 가능성은 희박하고 불확실하다. 그래서 그들에겐 ‘공유재의 비극’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목동처럼 단기적으로 이익을 최대한 뽑아내는 ‘지배 전략(dominant strategy)’이 합리적이다. 만약 공유 자원이 바닥을 드러내면 처음에 어딘가에서 그곳으로 왔던 것처럼 그렇게 그곳을 떠나 다른 곳에 정착하면 그만이다. 공유 자원을 둘러싼 반목과 갈등이 주로 현지인과 외지인 사이의 다툼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내 생각이 그렇게 부질없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외지인들의 정착을 방해하는 텃세를 해결하려는 현지인들의 노력과 오랫동안 한곳에 정착해온 현지인들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려는 외지인의 노력이 동반된다면, 그들이 공유 자원을 바라보는 시각도 조금씩 일치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끝으로 긴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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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20일 토요일

[책 리뷰] ‘지식인’을 게워내고 ‘시경’을 몰라도 매력적인 작품 ~ 풍아송(옌롄커)

The Odes of Songs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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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을 게워내고 ‘시경’을 몰라도 매력적인 작품

Original Title: 风雅颂 by 阎连科
나는 소리치고 싶었다. 소리내어 노래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방을 나서서 밖으로 나온 나는 수많은 연구실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모습을 보고 또 보다가 공중화장실에 가서 기지개를 켜며 소변 한 번 본 것이 전부였다. (『풍아송(風雅頌)』, p58)

솔직히 밝히지 못한 집필 목적

책이 중국에서 출판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2013년에 쓴 한국어판 서문에는 『풍아송(風雅頌, The Odes of Songs)』은 대학에 대해, 교수들에 대해, 오늘날 중국 지식인들의 나약함과 무력함, 비열함과 불쌍함, 물질, 금전, 권력에 대한 그들의 타협과 숭배, 이상과 욕망의 이율배반, 저항과 탈피의 불화, 기개와 교태의 갈등 같은 것에 관해 쓴 작품이라고, 그제야 작가 옌롄커(阎连科, Yan Lianke)는 자신의 작품이 지향하는 메시지를 솔직하게 밝혔다. 그러나 중국에서 이 책이 처음 출판되고 나서 벌떼 같은 비평과 비판, 쟁론에 부딪혔을 때 옌롄커는 한국어판 서문처럼 솔직하게 집필 목적을 감히 밝힐 수는 없었다. 그도 우리처럼 명확한 한계를 지닌 사람이자 마치 고수가 초수를 펼치듯 복잡다단하고 변화무쌍하게 펼쳐지는 사회적 그물망이 옭아매는 족쇄에서 벗어날 수도, 아니면 도도한 학처럼 마냥 외면할 수도 없는 나약한 동물인지라 차마 스스로 고립되는 길을 고집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는 그저 『풍아송』은 내 정신적 자서전이자 나에 대한 따돌림이고 비판이라고, 누가 봐도 궁색한 변명을 둘러댐으로써 또다시 자신의 작품이 ‘금서’ 목록에 추가되는 명예스러운 불행을 미리 방지할 수 있었다.

옌롄커, 스스로 지식인임을 부정하다

손해서 그런 것인지 진짜로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옌롄커는 책 뒷부분의 「저자 후기」에서 스스로 지식인임을 부정한다. 그러나 그의 필력이 가진 영향력과 오랫동안 노벨상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아온 중국의 대표 작가임을 고려해보면 (내 생각이지만 머지않아 그는 노벨상을 받을 것이다!) 그 역시 작가라는 지식인의 한 부류임을 부정할 수 없다. 고로 자신이 지식인이 아니라는 옌롄커의 부정은 지나친 겸손이다.

그렇다면, 왜 그는 자신을 지식인이 아니라고 부정했을까? 아마도 그 이유는 지식인으로서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시류에 영합하고 현실에 타협한 자신의 무능과 무능력, 그리고 비겁함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저자 후기」에서 밝히듯 『풍아송』은 자신의 무능과 무력감에 대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혐오감을 표현한 것이라는, 얼핏 보면 지식인으로서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자신의 잘못에 대한 책망이자 질타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거 유행처럼 중국을 휩쓸었던 정풍 운동의 덫에 걸린 지식인이 마지못해 토해내는 자아비판처럼 들리기도 하는 옌롄커의 변명은 누군가 시키지 않아도 지식인 스스로가 알아서 자신을 탄압하고 억압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시스템을 겨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편, 중국 문단의 문제아이자 금서(禁書) 전문 작가라는 수식어를 꼬리처럼 달고 살았던 옌롄커의 소설 『풍아송』이 금서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그가 시류에 영합하는 고만고만한 지식인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출판 후 폭우처럼 퍼부을 비난을 예감한 옌롄커가 그것에 대한 변명을 미리 「저자 후기」에 실었다는 것 자체가 그의 무력감을 방증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 지식인의 성찰로 모든 지식인의 성찰을 요구하다

지만,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오랫동안 노벨상 후보로 거론된 세계적인 작가 옌롄커가 자신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소심하다 못해 무력하고 체면치레하느라고 허세를 부리고, 한편으론 질투에 집어삼켜 지는 옹졸한 지식인의 모습을 아무리 자신에 대한 성찰이라고 피력해도 그것을 (중국을 제외한 전 세계가)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질 리는 만무하다. 그의 영향력은 그의 의지와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미 중국을 벗어나 버릴 대로 벗어나 버렸고, 그의 문장이 미치는 파급력은 황하를 범람하게 할 정도로 막대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현실에서 그가 소설에 등장시킨 한 지식인의 비굴하고 무력하고 염치없는 모습을 자신의 이야기라고 빗대어 거침없이 형상화했다는 것은 중국 지식인에 대한 결연한 도전이자 겸허한 비판이면서, 한편으론 그들의 근원적 성찰을 촉구하는 강력한 메시지나 다름없다. 쉽게 말해 추기경이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고 속죄하고 있는데, 그 광경을 지켜보는 사제들이 어찌 뻔뻔하게 자신들은 눈처럼 깨끗하다고 시치미 뚝 떼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뿐만 아니라 참회하는 추기경을 보는 사제들의 심기는 어찌 불편하지 않겠는가? 아마 당시 『풍아송』을 읽은 중국 지식인들의 마음이 그러한 사제들의 좌불안석 불편한 마음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어쩌면 이것은 거대한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중국의 지식인이 지식인이라면 응당 지켜야 할 의무와 스스로 짊어진 책무에 충실할 수 없게 하는 강력한 무언의 압력이 중국 사회에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얼마 전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중국 인터넷에서 하루아침에 말살된 가수 리지(李志)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니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텍스트를 읽는 재미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러나 꼭 이렇게 물귀신처럼 지식인을 물고 늘어지지 않더라도, 소설 제목이 의미하고 소설 속 주인공 양 교수가 연구하는 소재이기도 한 「시경(詩經, the book of Songs)」을 전혀 몰라도 『풍아송』은 시종일관 부드럽고 청순한 우윳빛 흡입력을 발산하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옥수수 껍질 벗겨내듯 작품에서 ‘지식인’이라는 거칠고 모난 껍질을 한 꺼풀 벗겨내면 차지고 노랗게 영근 옥수수알 같은 구수하면서도 달곰한 문장들이 읽는 이로 하여금 무한한 희열을 느끼게 한다. 과장되면서도 지나치지 않고, 원색적이면서도 운치 있고, 생동감이 넘치면서도 경박하지 않은 옌롄커만의 색깔을 지닌 독특한 문장은 예전 작품들에서 보여준 필력보다 더 원숙해지고 숙달된 경지를 보여준다. 그가 자유자재로 붓을 휘두르고 문장으로 천지를 호령하는 모습은 신이 들린 지휘자가 종이, 붓, 먹, 벼루를 진두지휘하여 하늘과 땅을 글로써 종이에 담아내고, 그럼으로써 세상의 이치와 역사와 삶을 설명하려는 것처럼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철학과 의지의 발로이다. 또한, 그의 문장에는 눈이 있고 귀가 있고 코가 있어 변화무쌍하면서도 오묘한 세상 만물의 미묘한 움직임이나 변화도 능히 잡아내기 때문에 보지 않으려야 보지 않을 수가 없고, 듣지 않으려야 듣지 않을 수가 없고, 맡지 않으려야 맡지 않을 수가 없다. 이렇게 그의 작품은 굳이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무게를 두지 않더라도 텍스트를 읽는 재미만으로도 충분히 독자를 무아지경에 빠트릴 수 있는 수준 높은 소설이자 진짜 문학이다.

정말로 진정한 지식인은 모두 죽었는가?

실 『풍아송』이 사유하고 고찰하고자 하는 지식인에 대한 비판적인 메시지는 별로 그렇게 와닿지 않았다. 이미 내 마음속에는 오래전부터 지식인에 대한 믿음과 존경과 공감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을 정도로 그들이 권력에 영합하고 권위를 추종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작위적이고 속물적인 작태에 신물이 났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좀 더 안다고, 배웠다고, 그래서 좀 유명하다고 우쭐대는 지식인 같지 않은 지식인들이 다양한 대중매체에서 설쳐대는 모습은 꼴사납기 그지없다. 그들이 대중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교수가 이제 막 입학한 신입생을 바라보는 것 같은 적당히 꾸며진 자애와 숨기지 않는 우월함이 번득인다. 더 가관인 것은 그들의 말이라면 무조건 진실이라고 믿는, 마치 약장수의 번지르르한 혓바닥에 놀아난 관객이나 사이비 교주의 간사한 능변에 이성을 잃은 신도를 연상시키는 대중들의 우매함이다.

어쩌면 누구의 말대로 진정한 지식인은 모두 죽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약삭빠른 사람들만이 생존할 수 있는 무한 경쟁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신이 할 도리를 운명이 부여한 의무처럼 기필코 완수하려는 정의롭고 책임 있고 용기 있는 지식인의 설 자리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부처님이나 예수님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품위 있는 교양과 자애로운 성정과 강직한 품격을 지식인에게 무리하게 강요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그들이 무슨 초능력이라도 타고 난 영웅이 아니라 우리처럼 그저 묵묵히 자기 삶에 충실해지려는 수많은 사람 중 한 사람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비록 지식인에게 실망을 금치 못했을지 망정 그렇다고 지식인의 필요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인간의 역사에는 위대한 지식인들이 존재했었고 그들이 문화, 사회, 정치, 경제 등 인류 문명에 끼친 긍정적인 영향력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자질 미달의 지식인이 설쳐대는 것이 문제일까? 그래서 크고 작은 뜻을 품은 진짜 지식인이 설 자리가 없는 것이 문제인가? 아니면, 지식인이 설 자리를 스스로 찾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가? 우리 사회가 지식인의 존재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것일까? 이것도 아니면 대중이 진짜 지식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일까? 한 번쯤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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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14일 일요일

[책 리뷰] 유토피아가 인도한 생지옥 ~ 마오의 대기근(프랑크 디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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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가 인도한 생지옥

Original Title: Mao's Great Famine: The History of China's Most Devastating Catastrophe, 1958-1962 by Frank Dikötter
국가가 전부이고, 개인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개인의 가치는 노동 점수에 의해 끊임없이 평가되고, 흙을 나르거나 벼를 심을 수 있는 능력으로 결정되었다. 농촌에서 농민들은 가축처럼 취급되었다. 그들은 먹이고, 입히고, 재워야 할 존재였고 그 모든 것은 공사에 대가가 따랐다. 이 음울한 계산의 논리적 귀결은 살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 이들을 도태시키는 것이었다. 굼뜬 사람, 비실비실한 사람, 여타 비생산적 분자들의 무차별적 살해는 노동을 통해 정권에 기여하는 사람들에 대한 전체적 식량 공급을 증가시켰다. 폭력은 식량 부족을 다루는 한 가지 방식이었다. (『마오의 대기근(Mao's Great Famine)』, p438)

인류 정치사상 최악의 인재, 대기근

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남긴 가장 파괴적인 전쟁이었던 2차 세계대전에서 민간인을 포함한 총 사상자는 대략 5,000만 명에서 7,000만 명으로 잡고 있다. 전쟁 기간은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1939년 9월 1일부터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항복한 1945년 9월 2일까지로 대략 5년이었다. 그런데 전쟁도 없었고 내전도 없었음에도 4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민간인만 4,500만 정도가 사망한, 아마도 인류 정치사에서 최악의 인재(man-made calamity)라고 불릴만한 사건이 있었다. 바로 마오쩌둥(毛澤東)의 야심 찬 프로젝트 대약진(大跃进: Great Leap Forward)이 불러들인 대기근(大饥荒: Great famine)이다.

15년 안에 영국을 추월하겠다는 마오쩌둥의 공산주의적 공상에서 발아한 대약진은 한마디로 중국에서 가장 남아도는 자원인 6억의 노동력으로 자본을 대체하여 소련처럼 급진적인 산업화를 이루어내겠다는 마오쩌둥의 의지였다. 그러나 동방원정과 유대 볼셰비즘 말살로 아리아 민족을 위한 지상 천국을 건설하겠다는 히틀러의 지독한 ‘의지’가 독일에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을 불러온 온 것처럼, 자신의 생애에 공산주의적 유토피아를 기필코 건설하겠다는 마오쩌둥의 의지에서 싹튼 대약진 역시 중국에 전무후무한 파괴를 가져왔다. 대약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대량 살상을 낳았을 뿐 아니라 그 목적에 반하게도 농업과 무역, 공업, 운송 등 중국의 산업과 경제에도 유례없는 피해를 줬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4,500만 명이 아사해가고 있을 때 권력의 중심부 사이를 비밀스럽게 오간 말과 그 당사자들의 냉혹한 행위들에 대한 완전한 그림이 담겨 있을 것으로 예상하는 베이징의 중앙당 기록 보관소는 여전히 굳게 닫혀 있다. 지금까지 국가나 중국 공산당의 위신을 실추시키고 체면을 깎아내리는 크고 작은 불쾌한 사건들이 철저하게 은폐되어 온 것처럼 중국 공산당은 여전히 진실을 호도하거나 감추기에 바쁜 것 같다. 역사와 인민 앞에 공산당의 책임을 온전히, 그리고 떳떳하게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4,500만 명을 조기 사망시킨 대기근과 수억 인민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준 문화대혁명의 절대적 책임을 공산당이 인정한다는 것 자체가 계급 사회를 타파하고 억압으로부터 인민을 해방시키겠다는 혁명 이념으로 정권을 장악한 공산당의 정당성을 스스로 부인하는 꼴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그들은 참혹한 결과 앞에 울며 겨자 먹기로 오류는 인정하면서도 히틀러나 마오쩌둥이 그랬던 것처럼 교묘하게 책임은 회피한다.

감춰진 잔혹사를 폭로하다

랑크 디쾨터(Frank Dikoter)의 인민 3부작 중 두 번째인 『마오의 대기근(Mao's Great Famine): 중국 참극의 역사 1958~1962』은 역사학자가 접근할 수 있는 최상, 최신의 자료로 완성된 수작이다. 이 책은 대기근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참상뿐만 아니라 중국 전체를 파괴했던 대약진의 구조적인 토대가 어떻게 세워지고 어떻게 지속하였는지를, 그리고 그렇게 자리 잡은 토대 위에서 파괴 위에 파괴를 거듭하고 시체 위에 시체를 쌓아가면서도 무오류를 확신하는 마오쩌둥의 의지와 그를 숭배하는 당원과 인민으로부터 광적으로 뿜어져 나온 동력이 어떻게 대약진을 유지시켰는지를 면밀하게 파헤친다. 또한,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제시된 증거들은 사회주의 중국을 건설하겠다는 다수의 ‘자발적인’ 의지가 아니라 소수의 권력과 권위, 그리고 이들의 야심과 맹목, 탐욕에서 출발한 강압과 공포, 체계적인 폭력이 대약진 운동의 토대였음을 밝힌다. 그럼으로써 대기근은 인재(人災)였을 뿐만 아니라 조기 사망자 대다수가 기존에 알려진 사실대로 아사, 혹은 굶주림과 관련된 질병으로 죽은 것은 확실하지만, 그밖에 알려지지 않은 사망원인 즉, 대약진 동안 100만 명에서 300만 명이 자살로, 그리고 적어도 250만 명은 맞아 죽거나 고문을 당해 죽었다는 감춰진 잔혹사(残酷史)를 드러낸다.

20세기 ‘위대한 독재자들’의 지독한 공통점

실 히틀러, 마오쩌둥, 스탈린 등 20세기 ‘위대한 독재자’들은 그 누구보다 인민들의 목숨을 파리목숨보다 더 하찮게 여겼다. 아마 그러한 절대온도 같은 냉혹한 성정이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는 불가결한 자질일지도 모르겠다. 특히 이 책 『마오의 대기근(Mao's Great Famine)』을 읽는 내내 나의 머릿속에서는 마오쩌둥과 히틀러는 참으로 닳은 점이 많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각자 상정한 유토피아를 향한 두 사람의 꺾일 수 없는 ‘의지’와 ‘집념’은 현실을 생지옥으로 탈바꿈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과정에서 치러지는 희생 역시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히틀러가 수많은 병사의 죽음을 민족의 생존을 위한 ‘영웅적 투쟁’에서 불가피하게 치러야 하는 희생이자 대가라고 주장했듯, 마오쩌둥 역시 대약진의 희생자들을 혁명의 대의를 위해, 미래에 약속된 유토피아를 위해, 전체를 유지하기 위해 당연히 희생되어야 할 소모품으로 여겼다. 두 사람 다 끝까지 책임을 회피하고자 했으며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편집증적으로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기에 바빴다. 히틀러가 모든 잘못을 유대인 탓으로 돌린 것처럼 마오쩌둥은 봉건 세력, 수정주의자, 반동분자, 반혁명 분자 등 (거듭된 숙청으로 이제는 존재하지도 않는) 적성 계급 탓으로 돌렸다. 또한, 아랫사람들이 등 뒤에서 벌이는 짓들을 히틀러는 모른다고 믿는 ‘지도자 신화’라는 후광 속에서 (적어도 스탈린그라드 전투 전까지는) 히틀러가 비난의 화살을 비껴갈 수 있었던 것처럼 마오 역시 ‘위대한 조타수’로서 오직 인민의 복지만을 염려하는 인자한 지도자로 그려지는 데 성공했다. 결정적으로 두 사람은 자신들의 천재성과 무오류성을 확신했다. 그래서 제아무리 논리적이고 현실을 반영한다고 할지라도 두 사람의 언행과 정책에 대한 비판은 전혀 먹혀들지가 않았고, 감히 지도자의 심기를 건드린 비판자들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래도 마오쩌둥이 히틀러보다 나았던 점이 있다면 철저하게 자국민들에 (비록 그들은 세상 그 누구도 겪지 못한 공포에 떨고 고통에 짓눌리며 하루하루를 살아야 했지만) 한해서 만행을 저질렀다는 점이다. 마오쩌둥이 중국 공산당과 6억 인민을 가지고 사회주의 실험 놀이에 한창 빠져있었던 덕분에, 이 기회를 틈타 대만과 한국은 경제 발전을 가속할 수 있었다.

한편, 제3제국의 모든 층위에서 이루어진 의사소통에 구조적으로 진실이 왜곡되었던 것처럼 중국은 대약진 시기에 망령에 가까운 마오쩌둥 실험에 장단을 맞춰주느냐 온 나라가 오로지 규정량, 할당치, 목표량 등의 수치를 날조하고 조작하는 데만 혈안이 되었다. 나치당원들이 히틀러의 직접적인 명령이 없었어도 히틀러가 원하고 좋아할 만한 일들을 알아서 계획하고 추진한 것이 나치의 동력원이었다면, 규정량, 할당치, 목표량 경쟁에서 뒤지지 않고 정치적 생명력을 이어가겠다는 공산당원들의 잔인한 보신(補身) 의지가 대약진의 동력원이었다. 나치가 국가에 짐이 되고 밥만 축낸다는 잔혹한 논리로 불치병, 정신병, 선천적 질병을 앓는 환자를 안락사시킨 것처럼 대약진 시기에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라는 엄혹한 논리로 아이, 병자, 노인은 잔학무도한 생존경쟁에서 학대를 피할 수 없었다. (다른 점도 많겠지만) 어딘가 닮은 점이 있는 두 독재자 밑에서 인류사에 지워지지 않을, 그리고 지워져서도 안 될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파괴적인 재앙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은 오싹하기 짝이 없다.

한국 전쟁의 영웅 펑더화이의 몰락을 불러온 대약진

약진이 모든 지도층 당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1957년 하반기에 시작된 치수 사업 맥락에서 처음 사용된 용어 ‘대약진’이 막상 시작되었을 때 당의 제2인자인 류사오치는 마오쩌둥의 비전을 받아들였지만, 중국에서 마오쩌둥 다음가는 권위를 가진 저우언라이와 경제 전문가 천윈(陳雲)은 마오쩌둥의 경제 정책을 반대했다. 하지만, (권위와 보신 앞에 장사가 없듯) 두 사람은 자리를 보전하고자 마오쩌둥의 끈질긴 압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 1959년 루산 회의에서 한국 전쟁의 영웅이자 국방부장이었던 펑더화이(彭德怀)는 마오쩌둥에게 조심스럽게 대약진의 참상을 알리고 비판하는 편지를 전했다가 불명예스럽게 자리에서 쫓겨나고, 루산 회의에서 펑더화이를 지지했던 다른 이들도 비참한 결과를 맞이했다.

한편, 1961년 4월 류사오치는 거의 40여 년 만에 고향을 방문했다가 실제로 목격한 참상에 충격을 받고는 (아마 그는 참상을 눈앞에서 보고도 외면할 정도로 모진 사람은 못 되었나 보다!) 이때부터 대약진에 대한 태도를 180도 바꾼다. 이후 류사오치는 농민들은 ‘30퍼센트는 천재요, 70퍼센트는 인재’라고 말한다며 대기근의 원인을 명확하게 중앙 지도부로 지목하면서 마오쩌둥의 심기를 건드린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대기근의 참상이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뒤였기에 마오쩌둥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의 침묵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거나 상대를 용서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대약진의 참담한 실패로 그는 어쩔 수 없이 잠시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곧 실추된 자신의 위신과 권위를 회복하고 실패로 끝난 공산주의적 유토피아 건설을 위한 또 하나의 거대한 실험을 일으킨다. 그로 말미암아 중국은 대약진의 충격에서 미처 회복되기도 전에 또 한 번 혼란과 고난의 수렁 속으로 빠져든다. 이번에는 대약진의 실패를 거울삼아 급진적인 산업화가 아니라 대중 선동을 선택한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을 일으킨 것이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아이가 겨우 일어서려는 찰나에 다시 크게 한방 얻어맞고 진흙탕 속으로 굴러떨어진 격이니, 어찌 인민들에게 잠시의 평안함이 허락될 수 있었겠는가? 이때는 감히 ‘위대한 조타수’에게 반기를 든 펑더화이와 류사오치도 죽음을 면치 못할 터였다.

파국의 시대에 드러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적나라함

지막으로 파국의 시대에 인간 행동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것 역시 이 책 『마오의 대기근(Mao's Great Famine)』의 목표 가운데 하나라고 프랑크 디쾨터는 설명한다. 그 어떤 공포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사람이 사람에게 행하는 잔혹한 짓들이 이 책에는 끊임없이 등장한다. 굶주린 아이가 먹을 것 좀 훔쳤다고 우물에 빠트려 죽이고, 먹을 것을 훔친 소년의 아버지에게 자식을 산 채로 땅에 파묻게 하고, 어느 엄마는 여덟 살 딸아이 몫의 배급 식량을 빼앗아 자기 자식을 굶겨 죽이기도 했다.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것은 죽은 사람조차 그냥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죽어서 땅에 묻히면 천운이었고 길거리에 그냥 방치되는 것은 보통이었으며, 앞에서 말한 소년처럼 사소한 경범죄를 저질러 맞아 죽은 사람들은 다른 재료와 함께 솥에 넣고 끓여진 다음 거름으로 재활용되었다.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적군도 아닌, 같은 동네에 사는 이웃에게 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이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런 만행이 한 두 마을에서만 있었던 특이 사례가 아니라 중국 전역에 걸쳐 비일비재하게 일어난 일상사의 하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면, 우리는 숙연한 역사 앞에서 인간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위기 앞에 또다시 서게 된다. 한편으론 훗날 문화대혁명 중에 일어나게 될 만행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는 이 책을 통해 명확하게 드러난 셈이다.

전쟁이나 내전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대한민국 정도의 인구가 단 4년 만에, 그것도 단 한 사람의 의지와 그를 뒤따르는 어떻게든 정치적 생명을 이어가고 자리를 보전해 보겠다는 사람들의 흉물스럽고 천박한 탐욕으로 말미암아 조기 사망했다는 무참한 진실 앞에선 끊임없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와 역정조차 곧바로 허탈한 감정으로 식어버린다. 마주해야 할 진실이 너무나 참혹했을 때, 그래서 당황할 수밖에 없을 때 우리는 무정하게도 그 저주받은 시기에 태어난 그 사람들의 저주받은 운명을 탓하고야 마는, 생각하기를 멈추고 논리와 이성이 마비된 무상함에 빠져든다. 이런 복잡한 감정을 조금이나마 다스리고 분노를 풀어보고자 제법 긴 글의 리뷰를 쓰고 난 지금이지만, 그럼에도 심란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 한마디로 그것은 엄청난 일이었고, 지금까지 그 누구도 밝히기를 꺼렸던 진실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고자 노력한 흔적이 역력한 『마오의 대기근(Mao's Great Famine)』도 엄청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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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7일 일요일

[책 리뷰] ‘빵 맛’을 잃고 ‘숲 전체’를 놓친 나, 그래도 ~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우타노 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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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맛’을 잃고 ‘숲 전체’를 놓친 나, 그래도 만족스러운 감동

Original Title: 春から夏、やがて冬 by 歌野 晶午
내선전화가 울렸다. 히라타가 수화기를 들어 두세 마디 응대했다. “현실이란 것은 이런 식으로 인정사정없어. 한참 심각한 얘기 중에 ‘십 분 남았는데 연장하시겠습니까?’라는군.” 스에나가 마스미는 움쩍도 하지 않았다.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春から夏,やがて冬)』, p189)

나무가 아니라 숲을 봐야 ‘세계가 반전’한다!

표지 바로 뒷면에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春から夏,やがて冬)』의 저자 우타노 쇼고(歌野 晶午)를 간략하게 소개하는 페이지에는 ‘마지막 5페이지에서 세계가 반전한다!’라는 강렬한 문구가 쓰여 있다. 실로 엄청난 자신감이 내포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는 이 문구는 독자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엄청난 기대감을 품게 하면서도 과연 얼마나 대단하기에 그런 자극적인 문구로 선전하는지 비판의 날을 세우게 한다. 마치 어느 제과점에서 세계 어느 빵집에서도 맛볼 수 없는 새로운 빵이라고 신제품을 선전하는 것이 거뜬히 세 끼 식사는 꼬박꼬박 챙겨 먹으면서도 늘 굶주려 있는 사람들의 탐욕스러운 입을 걸쭉한 침의 바다로 만듦과 동시에 이들의 세련될 대로 세련된 미각의 경계심을 곧추세우는 것과 같다. 결국엔 기대 반 호기심 반으로 지갑을 털어 신제품 빵을 한입 베어먹는다. 약간의 놀람 속에서 ‘그럼 그렇지.’ 귀신처럼 익숙한 맛을 찾아낸다. 그러면서 뭔가 대단한 것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우쭐대는 것이 이들의 취미다. 만약 아무것도 모르는 배고픈 사람이 그 빵을 먹었더라면 아마 세계 최고의 빵이라는데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겠지만, 그들은 지금까지 수많은 빵을 먹어치운 미식가답게 조금은 젠체하며 맛을 꼼꼼하게 음미하려다 보니 전체적인 ‘빵 맛’을 놓쳐버린 것이다. 그것은 빵을 먹는 것이 아니라 실험실의 연구원처럼 분석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너무 세심한데 신경 쓰다 보니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세계가 반전’하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숲을 봐야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즉, 너무 기대한 나머지 잔뜩 긴장한 채 꼼꼼하게 분석하면서 이 책을 읽다 보면 ‘세계가 반전’해야 할 것이 그냥 어느 동네 한구석이 반전해 버리는 시시콜콜한 일로 끝날 수도 있다.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바로 그런 경우였기 때문이리라.

내가 좋아하는 추리 소설 작가 중 한 사람

타노 쇼고는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반전을 안겨준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葉桜の季節に君を想うということ)』라는 소설로 단박에 내가 좋아하는 추리 소설 작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잠시 다른 책들은 젖혀두고 도서관에 있는 우타노 쇼고의 작품들로만 독서 욕구를 연달아 충족시켰던 기억이 아직도 머릿속에 선하다. 『시체를 사는 남자』,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 『여왕님과 나』, 『밀실살인게임』, 『해피엔드에 안녕을』, 『밀실살인게임 2.0』, 『긴 집의 살인』, 『흰 집의 살인』, 『움직이는 집의 살인』까지 단숨에 탐독했었다. 여기서 그친 것은 도서관에 있던 우타노 쇼고의 소설이 그땐 그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벌써 수년 전 이야기지만, 그렇게 시간이 흘러 잠시 잊고 있다가 오래간만에 괜찮은 추리 소설이 읽고 싶어 그를 찾았고, 역시 그는 나를 실망시키지는 않았다.

때론 생각이 지나치게 많으면 재미가 반감된다!

러나 ‘마지막 5페이지에서 세계가 반전한다!’에 너무 현혹된 나머지 전체를 놓치고 말았다. 이번엔 나도 작가가 준비한 트릭이나 구성에 쉽게 속지 않고자 나름의 각오를 다졌다. 그리하여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고 꼼꼼하게 추려내어 뭔가 성과를 올려보겠다는, 되지도 않는 오기와 공염불한 의지가 발동된 것이다. 그런 시기적절하지 않은 의지와 오기 덕분에 작가가 준비한 떡밥을 (물론 이 모든 것이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덥석 물지 못했던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런 각오에도, 끝내 마지막 반전의 묘수는 완벽하게 간과하지는 못했다. 결말을 봤지만 (이해가 부족해서 일지도 모르겠지만) 잠을 푹 자고 난 것 같은 개운함보다는 자는 도중에 갑자기 깬 것 같은 찌뿌둥함과 ‘이것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고로 이것이 끝이 아니다, 뭔가 더 있다!’라는 석연치 않은 의심이 여전히 남아 있었기에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같은 뒤통수를 냅다 후려갈기는 기막힌 반전은 만끽하지 못했다. 독자의 지나친 의심과 경계가 추리 소설의 묘미를 맛보는데 제약이 된 경우였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런 독자의 의심과 경계를 예상하지 못했거나 예상했더라도 의심과 경계를 흐트러트릴 수 있는 적절한 방책을 마련하지 못한 작가의 실수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런 연유로 ‘세계의 반전’은 만끽하지 못했지만, 그 대신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빵이 아닌 세계에서 가장 슬픈 빵을 먹은 것 같은 가슴 언저리에 뭔가 묵직한 비극의 체증을 맛보았다. 그것은 보은의 도리가 낳은 거짓말이 예기치 않게 불러온 오해와 그 오해로 말미암은 흘리게 된 눈물과 피에 젖은 빵이었다.

내가 본 ‘두 개의 떡밥’, 그리고 놓친 ‘세계의 반전’

가 보기엔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에는 커다란 두 개의 떡밥이 나온다. 첫 번째는 보통 사람이 그렇게 다급한 상황에서 어떻게 그렇게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는지였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초등학생이 다리를 건너다 무심결에 지나가는 사람을 건드렸는데 어쩌다 보니 그 사람이 다리 밑으로 떨어져 죽은 것이다. 그런데 초등학생은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지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침착하게 행동한다. 초등학생은 숙련된 범죄자처럼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주변을 살핀다. 목격자가 없는 것을 확인한 초등학생은 죽은 사람을 사고가 아닌 자살로 죽은 것으로 교묘하게 꾸민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설정이다. 두 번째는 추리 소설에서 잘못 사용하거나 지나치면 재미와 트릭의 질을 떨어트리면서 개연성까지 잃게 하는 지나친 우연성이다.

이 두 경우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떡밥일 수도 있다. 그것은 상대가 우타노 쇼고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설마 그가 이런 허술한 설정으로 독자를 속여 넘길 생각은 아니겠지?’ 하는 이유 있는 경계심이 내 의심의 촉각을 더욱 곤두세웠고, 그로 말미암아 끝까지 경계와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던 나는 ‘세계의 반전’을 놓치고 만 것이다. 만약 내가 우타노 쇼고를 전혀 모르는 독자였다면 지금까지 남아 있을 강렬한 반전이 일으킨 흥분에 휩싸여 횡설수설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현실은 안타깝게도 그렇게 흘러가지는 않았다. 반면에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떡밥이 작가의 준비성 부족이거나 반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불성실의 결과였다면 그것은 한마디로 치명적인 실수다.

마치면서...

래도 추리 소설에서는 전혀 기대하지 못한 서늘한 바람이 가슴 한구석을 휑하니 휘젓고 지나간 것 같은 가슴을 아련히 시리게 하는 씁쓸하고 서글픈 감동은 ‘빵 맛’을 잃고 ‘숲 전체’를 놓친 나에게 그나마 다행이고 위안으로 다가온다. 또한,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은 내 독서 인생 중 단 몇 시간 만에 일독한 아주 소수의 책 중 하나다. 초반엔 그 흔한 살인도 없고, 그래서 범인을 추리하는 전개도 없는 전혀 추리 소설 같지 않은 전개가 당황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언제까지나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고 난 다음의 회상이지 정말이지 그땐 그런 것조차 생각할 정황이 없었을 정도로 나도 모르게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었었다. 막상 다 읽고 나면 별것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반전은 둘째치고 단순 명쾌한 문장으로 직선적으로 밀어붙이는 이야기 자체의 흡입력이 상당하다 보니 그것만으로도 이 소설을 추천하고 싶을 정도다. 요즘 후덥지근한 장마철 날씨에 시달리던 빈약한 육체였지만, 이 책 덕분에 잠시나마 더위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말한다면 과언일까(이 리뷰는 2018년 여름에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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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31일 일요일

[책 리뷰] 특별함은 없지만, 모호함이 암시하는 가능성의 미학 ~ 위미(비페이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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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함은 없지만, 모호함이 암시하는 가능성의 미학

Original Title: 玉米 by 畢飛宇
마음이 차가워진 것이다. 마음이 한번 얼면 그만큼 더 자라는 법이다. 사람이란 이런 식으로 한 차례 한 차례 나이를 먹어가고, 마음도 한 차례 한차례 죽어간다. 세월과는 아무 상관 없이. (『위미(玉米)』, p105)

당당히, 그리고 교묘히 나를 압박하는 세 자매

먹기 전에는 배고픔을 느끼고, 배불리 먹고 나서는 만족스러운 포만감을 느끼면서도 다음 식사는 또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걱정 아닌 걱정이 옹졸하고 탐욕스러운 새가슴을 살짝 긴장시키는 것처럼 새로운 책을 읽기 전에는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기대감과 호기심으로 들끓는 문학적 배고픔에 시달리고, 읽고 나서는 문학적 성취감으로 한껏 고양된 지적 포만감으로 알량한 거드름을 피우면서도 ‘어떤 이야기로 리뷰를 시작해야 할까?’라는 하는 의무 아닌 의무에 부담을 느끼곤 한다. 그런데 오늘은 이런 부담에 앞서 당혹감이 먼저 나를 찾아왔다.

마지막 페이지는 이미 넘겨졌고, 그렇게 이야기가 끝났음에도 내가 만났던 세 자매는 못내 나를 닦달하는 것이다. 똑똑하고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아는 셋째 위슈(玉秀)는 쌍꺼풀진 큰 눈을 치켜뜨고 ‘당신이 고작 책 한 권 읽은 거로 우리에 대해 뭘 안다고 떠든다는 거예요?’라고 내가 이제 막 뭔가를 쓰기도 전에 시퍼런 날을 세운다. 평소엔 침묵으로 차분함과 위엄을 두루 자아냈던 첫째 위미(玉米)는 어찌 된 일인지 침묵을 깨고 ‘우리에 대해 쓰고 싶으면 실컷 써보세요’라고 오만과 자신감을 분간하기 어려운 당당한 어투로 격려인지 협박인지 모를 한마디를 내뱉는다. 위미의 말은 위슈가 세운 날 위에 묵직한 돌을 얹어놓은 것처럼 나의 폐부를 깊이 파고든다. 언니들과는 달리 땅딸막하지만 튼튼한 체구를 지닌 막내 위양(玉秧)은 고양이처럼 얌전히 웅크린 채 나를 말끄러미 쳐다본다. 나를 올려다보는 위양의 순진한 눈동자 속에는 자신들에 대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를 사뭇 기대하는 어린이 같은 순진한 호기심이 언뜻 비치면서도, 실수인 척하면서 바퀴벌레를 짓밟아 죽인 요조숙녀의 가식적인 놀람 속에 가려진 냉소도 숨겨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자괴감이 집 지키던 강아지가 도둑놈 바짓가랑이를 물듯이 나를 물고 늘어지고, 지금까지 힘겹게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던 손가락에는 풍선에 바람 빠지듯 힘이 빠지고, 세 자매의 협박 아닌 협박에 머릿속은 쓰레기통 비워지듯 깨끗하게 텅 비워진다. 천지를 진동시키고 태산을 쓸어버릴 듯한 그녀들의 기세에 눌려 쥐포처럼 납작해지지 않는다면, 기껏해야 산산이 부서져 그녀들의 콧방귀 장단에 맞춰 아지랑이 춤을 춰야 하는 한 줌의 먼지가 되리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나는 써야 한다. 그녀들도 알고 있다. 그러하기에 내가 아직 살아있다.

삶을 밀어붙이는 강력한 동력원, 복수와 증오

루아침에 몰락한 집안의 권위와 가세를 세우고, 한편으론 파혼의 수치를 씻고자 간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버지뻘 되는 사람에게 시집간 위미는 철저하게 권력을 추구한다. 반면에 윤간의 치욕과 아픔을 뒤로하고, 그리고 위미와 대립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구미호 같은 기질을 살려 한몫 잡으려는 위슈는 악의 없는 꽃뱀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10년 후, 모든 사람에게 평범하고 평범한 아이로만 보였던 위양은 신통방통하게도 사범학교에 진학하고, 그곳에서 평범한 속에 빛을 내는 방법을 발견한다. 그것은 어둠 속에 숨어 동료를 감시하고 밀고하는 첩자가 되는 일이었다.

위미의 권력 추구가 자신의 가족을 업신여긴 고향 사람들에 대한 복수심에서 기인한 것일까? 위슈가 전심전력으로 여우 짓을 했을 뿐 아니라 꽃뱀 짓을 한 것은 윤간의 통한을 씻고자 하는 복수심에서 기인한 것일까? 위양이 룸메이트를 밀고한 것이 누군가 자신을 무고(誣告)한 것에 대한 복수였을까? 물론 그녀들은 ‘아니야’라고 앙칼지게 소리 지르고 고개를 좌우로 연방 흔들며 강력하게 부인한다. 위미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약간의 권력을 누리며 예전 권위를 조금이나마 되찾아 가족들이 안락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라고, 위슈는 나중에야 그것이 진정 사랑이었음을 깨달았다고, 위양은 당의 가르침대로 충실하게 공작했을 뿐이라고 발뺌한다.

그녀들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우리는 복수심과 증오가 삶을 밀어붙이는 강력한 동력원이자 동기라는 것을 안다. 복수심과 증오심은 한 사람이 가진 천부적인 기질에 의해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되어 가공할만한 힘으로 성장하기도 하고, 평생 그대로 묻히고 말 수도 있었던 잠재력이 복수심이나 증오심에 자극받아 봇물 터지듯 터지면서 무시무시한 의지력으로 그 사람의 삶을 장악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자신은 충실하게 사회가 지향하는 원칙을 지켰을 따름인데 본의 아니게 타인의 삶을 짓밟는 일도 있다. 그리고 이 모든 복잡한 감정 문제와 삶의 원칙과 인생의 목적은 결국 ‘행복’이라는 보편타당한 단어 하나로 귀결된다. 복수를 하든, 권력을 추구하든, 남자를 홀리든, 동료를 밀고하든 그 자신이 행복하다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지금까지 행해진 그 모든 행위가 정당하든 정당하지 않든, 합법이든 위법이건, 도덕적이든 비도덕적이든 등등에 개의치 않고 자기합리화 속에 정당화된다. 그러나 이러란 자기합리화도 그 사람이 행복을 느낄 때야 가능성이 있고 타당성이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그래서 그녀들은 행복할까?’라고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녀들은 행복할까?

렇게나 기세등등했던 위미도 어딘가 불편한 모양인지, 아니면 하등 대답할 가치가 없는지 이 질문에는 학처럼 가녀린 목선을 드러내며 도도하게 고개를 외로 틀뿐이다. 위슈의 매혹적으로 빛나던 쌍꺼풀진 큰 눈의 초점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어딘가 위태롭다. 간망한 눈빛으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위양의 의기소침한 표정은 마치 내가 내리는 대답에 따라 자신들의 행복이 결정되는 양 민망하기 그지없다. 그녀들의 가련하면서도 안절부절못한 태도는 나를 부담의 늪으로 미끄러트리는 것도 모자라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떨게 한다.

나는 그녀들의 행복을 운운하는 것을 떠나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되묻고 싶다. 가족의 급격한 몰락을 겪고 그로 말미암아 주변 사람들부터 천시당하고 괄시받는 한창 예민할 나이의 소녀가 앞으로 어떻게 삶을 헤쳐나가야 할까? 위슈처럼 한창 꽃 피울 나이에 집단 강간이라는 끔찍한 경험을 겪은 여자가 남은 삶을 과연 행복하게 보낼 수 있을까? 하지만, 세월이 약이라고 그 어떤 트라우마라도 세월의 녹이 스며들면 완전치는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녹에 가려지면서 조금씩 치유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그 어느 정도라도 치유가 되는 데 필요한 세월은 얼마이며, 그 시기 동안 받는 고통은 누가 어떻게 보상해줄까?

민주적 법치가 정비된 국가라 할지라도 범죄를 당한 피해자에게 국가가 해줄 수 있는 일이란 이른 시일 안에 범인을 잡아 감옥에 가두는 것 외엔 이렇다 할 보상을 해줄 수 없듯, 결국 이 모든 것들은 한 사람이 평생 짊어져야 할 지극히 개인적인 짐으로 남는다. 그것은 마음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고 죽을 때까지 안고 살아가야 할 응어리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위슈처럼 집단 강간을 당하거나 위미나 위양처럼 마을 사람들에게 괄시당하고 업신여겨지는 그런 비극적인 일을 겪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치열한 경쟁 속에 휘말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크고 작은 충돌과 마찰을 겪게 되고, 그럼으로써 증오와 분노, 수치와 원한, 실패와 좌절이라는 격한 감정의 가시는 정신과 육체 속으로 깊숙이 침투해 들어온다. 가시는 생각하고 움직일 때마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듯 상처를 들쑤시면서 우리를 고통의 열반 속으로 인도한다. 여기에 슬픔과 고통의 경중은 상대적이라는 점을 고려하고, 사람은 어떤 동물보다 감정 이입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세 자매의 일이 결코 그녀들만의 일이 아니라는 참담한 현실에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그녀들이 행복하냐고 묻고 있다면, 할 말 못 할 말 다 쏟아낸 지금의 나로선 그녀들에게 직접 물어보라는 말 이외엔 더 토해낼 말이 없다.

인류사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집단 광기로부터의 치유

지막으로 중국 인민을 정신적으로 강간했던 문화대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배경이 어떻게 반영되어 있으며, 또한 세 자매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어떤 식으로 투영된 작품인지 묻는다면, 1970년 봄에 시작된 일타삼반(一打三反)과 ‘5 • 16’ 분자 색출 운동이라는 두 가지 운동이 진행됨에 따라 조반파의 핵심 분자들이 잇달아 숙청되고 탄압받으면서 1971년이면 사실상 문화대혁명의 혼돈, 혼란, 파괴가 어느 정도 정리되어 가는 시점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소설에서는 문화대혁명 초기의 과격했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비페이위(畢飛宇)의 『위미(玉米)』는 (특히 과격했던) 문화대혁명 초기의 혼란과 파괴를 몸소 체험한 작가들이 문화대혁명이 쓸고 지나간 잔해와 상처를 다룬 ‘상흔 문학’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고, 그렇다고 문화대혁명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1980년대 이후 출생한 작가들이 내놓은 새로운 중국을 대표하는 문학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석연치가 않다. 천지를 진동시켰던 문화대혁명 초기는 아슬아슬하게 비껴가고, 그 진동이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가라앉고 평온을 되찾으려 하는 197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옛 상처를 파헤쳐 고름을 짜내려는 ‘상흔 문학’에서 조금씩 벗어나려는 과도기적인 소설이라고 굳이 분류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사실상 문화대혁명은 그녀들의 성장이나 인격 형성 과정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는 것이 내 견해다. 그것보다는 초기 산업사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도시에 대한 농촌 사람들의 막연한 선망, 경외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러한 경향은 옌롄커(閣連科)의 『여름 해가 지다(夏日落)』와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爲人民服務)』에서 어떻게든 가족의 호구를 도시로 입적시키고자 하는 군인들의 발악과도 같은 집착에서도 잘 나타난다. 『위미』에서도 농촌을 벗어나 도시에 거주하는 것 자체가 농촌 사람들이 볼 땐 반은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며 부러움의 대상이다. 때론 위미처럼 뛰어난 외모와 젊다는 것 외엔 특별하게 내세울 것이 없는 농촌 여성들도 도시에 사는 간부 남편을 만나 단박에 신분 상승을 노릴 수 있다는 점에서 ‘신데렐라 콤플렉스’ 같은 심리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복수심에서든 그보다는 조금 단순하고 보편적이라 할 수 있는 출세욕에서든, 어찌 되었든 성공을 꿈꾸고 야심을 불태우는 대담한 여성은 어느 시대를 가나 존재한다는 점에서 세 자매의 이야기는 경제 대국으로 부상한 현재의 중국에서도 성립될 수 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태어나 성장했지만, 혁명적 대의와 과업을 거창하게 운운하기보다는 그보다는 세속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출세와 복수, 애증 등 혁명 과업에서는 금기시되는 개인적 감정과 야욕에 더 긴밀하게 엮여 있는 이 소설은 문화대혁명이 이제는 창작의 중심에서 벗어나 변두리나 풍경 정도로 이완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중국이 인류사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집단 광기가 일으킨 대혼란에서 어느덧 자가 치유되는 단계에 진입했음을 방증한다.

마치면서...

제 슬슬 마무리를 지어야 할 시간이다. 지금까지 혼자 잘도 주절대고 떠들어댔지만, 결국 두서없는 지루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나의 형편없는 리뷰로 말미암아 비페이위의 『위미』도 지루하다고 지레짐작해서는 안 된다. 굴욕과 치욕을 겪은 세 자매의 혁명적 이상 같은 모호한 지향성을 지닌 복수심을 다뤘다는 점에서 특별히 우아하고, 특별히 아름다운 감동도, 그리고 특별한 통쾌함도 없지만, 재치가 깨알처럼 쏟아져 나오는 유쾌한 문장과 100m 달리기에는 못 미치지만 10,000m 달리기보다는 빠른, 즉 3,000m 달리기 정도에서 느낄 수 있는 속도감이 독자를 사로잡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어딘지 모르게 마무리가 미적지근하고 막연하지만, 그 모호함 속에 세 자매 인생의 격류가 거침없이 흐르고 있다는 점에서, 그 모호함은 독자가 추리하고 분석해야 할 그 무엇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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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25일 월요일

[책 리뷰] 정직하지만 교묘한 ‘심리 트릭’에 매혹되다 ~ 불연속 살인사건(사카구치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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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하지만 교묘한 ‘심리 트릭’에 매혹되다

Original Title: 不連続殺人事件 by 坂口 安吾
“ … 문에 끈을 달아 저절로 닫히게 한다거나 밀실살인을 가장하는 그런 잔재주는 그 자체로 결국 흔적을 남기고 마니까요 잔재주를 일체 배제한 점이 바로 범인의 어떤 한 심리를 드러내고 있는 셈이지요. 그는 자기의 속마음이 드러나는 걸 무엇보다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조심조심하고 있지요 그런 침착성과 침묵은 범인이 천재적인 살인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범인의 진짜 동기는 무엇일까요? 어떤 살인이 범인의 진짜 목적일까요? … ” - 교세이 (『불연속 살인사건(不連続殺人事件)』, p186)

오기(?) 때문에 탄생할 수 있었던

1947년 9월호부터 다음 해 8월호까지 잡지에 연재된 『불연속 살인사건(不連続殺人事件)』은 사카구치 안고(坂口 安吾)의 첫 추리 소설이다. 소년 시절부터 반 다인(S.S. Van Dine)과 엘러리 퀸(Ellery Queen), 그리고 애거사 크리스티(Dame Agatha Christie) 등의 추리 소설을 즐겨 읽었던 사카구치는 성인이 되어 문인 생활을 하면서도 종종 동료 문인들과 함께 추리 소설의 범인 맞추기 게임을 했는데, 그는 누구보다 게임에 열심히 임했음에도 범인을 맞춘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범인 맞추기 게임에서 매번 지기만 해서 오기가 발동했는지, 아무튼 그는 ‘자네들이 절대 알아맞히지 못할 추리 소설을 내가 꼭 쓸 테니까, 어디 두고 보게’라는 전설 같은 말을 남기고 훌쩍 사라졌다가 어느 날 약 350장의 원고용지 묶음을 가지고 잡지 편집부에 나타났고, 그렇게 탄생한 소설이 바로 『불연속 살인사건』이다. 또한, 이 소설이 잡지에 연재되기 시작했을 때 엘러리 퀸(Ellery Queen) 추리 소설만의 별미인 ‘독자에게 도전’을 본떠 범인 맞추기 현상금 대회를 열었다고 한다. 이 범인 맞추기 대회에는 우리도 익히 그 명성을 아는 에도가와 란포(江戸川 乱歩) 등 쟁쟁한 문인들이 도전했는데, 뜻밖에도 1등은 도쿄 물리 학교의 한 학생이 차지했다고 전설처럼 전해진다.

탐정 교세이와 긴다이치

렸을 때부터 추리 소설을 즐겨 읽었음에도 동료와의 범인 맞추기 게임에서는 번번이 실력 발휘를 못 한 한이 맺혔던지 『불연속 살인사건』에서 활약하는 탐정 교세이(巨勢)는 사카구치처럼 문인일 뿐만 아니라 소설이 엉성하니까 범죄를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즉 소설을 쓰지 못하기 때문에 탐정의 자질이 있다는 어딘가 역설적인 능력을 갖춘 인물이다. 이것은 마치 사카구치 자신은 범인 맞추기 게임을 잘하지 못하기 때문에 추리 소설은 잘 쓸 수 있다고 동료에게 해명하면서도, 한편으론 늘 범인 맞추기 게임에서 패배의 쓴잔을 마신 자신을 위로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식의 구차한 해명을 굳이 늘어놓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 소설은 ‘심리 트릭’을 기가 막히게 활용했다.

탐정 교세이 이야기가 나왔으니 짚고 넘어갈 것이 있는데, 이 소설이 연재되기 바로 1년 전에 요코미조 세이시(横溝 正史)의 긴다이치 코스케(金田一 耕助) 시리즈 첫 소설인 혼징 살인사건(本陣殺人事件)이 나왔다는 점이다.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두 소설 모두 살인 잔치라도 벌이듯 대량 살인이 처참하게 벌어진다는 점과 얄궂게도 범인이 계획한 모든 살인이 다 끝나고 난 후에야 진상이 밝혀진다는 점(대부분의 추리 소설 이야기 구성이 이와 비슷하겠지만)이 비슷할 뿐만 아니라 긴다이치와 교세이 역시 어딘지 모르게 비슷한 면모를 풍긴다는 점이다. 앞으로 나서서 적극적으로 활약하기보다는 좋게 말하면 겸손하게,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소심하게 경찰 수사 뒤에서 사태를 관망하는 한편, 어딘지 미덥지 못한 어수룩하고 능청 떠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다가 죽을 사람이 다 죽고 난 후에야 마침 기다렸다는 듯 진상을 밝힌다. 아마도 추리 소설 마니아였던 사카구치로서는 『불연속 살인사건』을 준비하면서 요코미조 세이시의 소설을 읽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것이 첫 추리 소설을 쓰는 부담감을 조금 덜어주는 의미에서 약간의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산장을 애욕의 산란장으로 전락시키는 문인들

시에서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있는 산장에서 무려 8번이나 일어나는 연쇄 살인사건을 다룬 이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퇴폐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문인들이다. 이 소설 속에서 문인들은 서로 노골적으로 야유하고 조롱하고 경멸하고 비꼬고 업신여기고 놀리고 모독하고 험담하는 등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주 무대가 되는 산장을 애욕의 산란장으로 전락시키는 등 문명과 문화를 대변한다는 문인들이 홍등가에서조차 보고 듣기 어려운 파렴치한 짓거리를 서슴없이 행한다. 패전의 영향으로 치부하기엔 정도가 지나친 경향이 있는데 아마도 문인들 사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경쟁의식과 각자의 작품특성이나 성격을 두고 일어나는 논쟁에서 비롯한 날카로운 대립의식 때문에 문인들이 받는 스트레스와 그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픈 자포자기적인 심정을 반영한 것은 아닌가 싶다. 그렇지만, 별생각 없이 보면 마구 내뱉는 말처럼 보이는 거칠게 오가는 설전 속에 의미심장한 가시를 심어두는 문인들의 그럴듯한 말재주를 음미하는 재미도 가히 쏠쏠하고, 그런 설전 속에서 뒤틀리고 왜곡된 인간의 심성을 은연중에 부각시키는 것이 이 소설의 특징이 아닌가 싶다.

‘심리 트릭’에 푹 빠지다

지막으로 『불연속 살인사건』은 연재를 시작하자마자 범인 맞추기 현상금 대회를 시작했을 정도로 독자 앞에 정직하고 공정한 소설이다. 고로 눈치 빠른 독자는 네 번째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때쯤 심증만으로 진범을 추려낼 수 있지만, 그렇다고 만만하게 볼 트릭은 아니다. 왜냐하면, 불연속적인 일곱 번의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동안 알리바이 조사를 통한 공통된 용의자도, 살해된 사람들의 신상 관계를 통한 공통된 동기를 가진 용의자도 추려내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독자는 이 일곱 사건이 서로 다른 범인에 의해 계획된 개별적인 사건인지, 아니면 같은 범인에 의해 계획된 연쇄 살인인지 혼란에 빠진다. 아니면 일곱 사건 중 그중 몇 가지는 범인의 진짜 목적과 들어맞는 살인이고 나머지 살인은 잔악하게도 그 목적을 숨기기 위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설정도 떠올려볼 수 있다. 힌트를 주자면 이 소설이 준비한 트릭은 밀실이나 알리바이 같은 물리적이고 시간적인 트릭이 아니라 매우 교묘한 심리적인 트릭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에는 자연스러워 보여도 막상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언행이 바로 정답이다. 그 매혹적인 ‘심리 트릭’에 푹 빠져버리지 못한 당신은 더는 추리 소설을 읽을 자격이 없다는 말을 끝으로 지루한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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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17일 일요일

[책 리뷰] 무엇이 파괴와 절멸의 유산을 받들었나? ~ 히틀러 2(이언 커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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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파괴와 절멸의 유산을 받들었나?

Original Title: Hitler: 1936-1945 Nemesis by Ian Kershaw
제대로 못 배운 술집 선동가에 고집불통의 인종주의자였고 자기도취와 과대망상에 젖었으며 민족의 구세주를 자처했던 사람이 철학자와 시인의 나라로 알려졌고 발달된 경제를 가진 현대 문명국에서 휘두를 수 있었던 극단적 형태의 개인 통치는 그 운명의 12년 동안 끔찍한 사건들이 펼쳐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히틀러 2(Hitler: 1936-1945 Nemesis)』, p1,023)

나치 체제는 히틀러의 교묘한 전략? 아니면 우연?

틀러는 교활한 악마다. 그는 그토록 많은 학살에 책임이 있으면서도 결코 소름 끼치도록 하얀 자기 손에는 피 한 방울 안 묻혔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을 ‘위대한 지도자’로 받드는 수하들에게 학살 명령을 직접 내릴 필요도 없었다. 그는 신처럼 하늘 높은 곳에 앉아 수하들이 자신이 추구하는 신념을 종교처럼 따르도록 단단히 혼을 빼놨으며, 히틀러를 따르는 수하들은 주인 앞에서 칭찬받고 싶어 하는 강아지처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히틀러가 좋아할 만한 행동을 스스로 찾아낸 다음 충실하게 실행으로 옮겼다. 한때 화가 지망생이었던 히틀러가 스케치하듯 대충 큰 그림을 그려놓으면, 그를 추종하는 수하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어떻게든 나머지 공간을 채워 넣는, 그런 형태였다. 그는 직접 명령을 내릴 필요도 없었고, 자신의 손에 더러운 것을 묻힐 필요는 더더욱 없었을뿐더러, 그래서 어딘가 일이 잘못되어도 독일 국민의 경외하는 ‘위대한 지도자’라는 강철처럼 견고하고 새 자동차의 후드처럼 매끄러운 명성에 흠집이 날 일도 없었다. 권력의 최고 정점에 선 히틀러의 후광이 비치는 범위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려고 수하들은 치열하게 경쟁했다. 그들은 히틀러의 총애가 보장하는 달콤한 권력의 한 조각을 받아내려고 히틀러가 좋아할 만한 일들을 알아서 계획하고 추진했다.

느슨하면서도 꽤 견고하게 지속했던 나치 체제와 히틀러 주위를 배회하는 권력 게임 시스템이 확답보다는 두루뭉술하게 넌지시 언급하기를 즐기고, 그런 식으로 결정을 회피하려 드는 히틀러 개인의 우유부단하고 폐쇄적인 성격적 특성에서 기인한 우연일까? 아니면 히틀러가 의도한 교묘한 전략이었을까? 만약 우연이었다면 1차 세계 대전 직후 정치계에 우연히 발을 들여놓으며 자신의 숨은 재능을 발견했던 것처럼, 두 번 시도된 폭탄 암살에서 크게 다치지 않고 멀쩡하게 살아남았던 것처럼 히틀러는 타고난 행운아다. 다만, 그것은 독일을 몰락으로 이끌고 전 세계를 참혹한 전쟁의 늪으로 물귀신처럼 잡아 끌어들인 악마의 행운이다. 반면에 그것이 히틀러의 의도적인 계획으로 나타난 전략적 결과였다면 그는 메피스토펠레스도 울고 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천재이며 악마 중의 악마다.

히틀러를 지지하는 그들은 ‘좀비’가 아니었다

마 진실은 그 중간쯤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히틀러는 악마라는,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구분 짓는 것만큼 위험천만한 일은 없다. 그것은 전부 아니면 전무, 아리아인과 유대인이라는 선악 세력의 결전, 승리가 아니면 완전한 파멸이라는, 즉 모든 문제를 ‘흑백’의 단순 명쾌한 논리로 환원해 사람들의 정신을 단숨에 빨아들이는 재주가 탁월했던 히틀러의 전철을 따라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주창한 흑백 논리에 스며든 못 말리는 자기 파괴 경향이 어떠한 결말을 가져왔는지 명백하게 드러난 시점에서 또다시 흑백 논리의 유혹에 빠져든다는 것만큼 어리석고 바보 같은 일은 없다. 제아무리 그것이 단순하고 명쾌해서 많은 사람을 아주 쉽게 현혹하고 설득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극과 극을 가르는 흑백 논리가 가져올 자기 파괴적이고 공허한 결말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지만, 그런 식으로 히틀러를 꾸짖고 비난한다고 해서,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그저 그런 보통 사람들이었던 그 수많았던 독일 국민이, 문명의 혜택과 교육을 받으며 교양을 쌓을 수 있었던 선진 시민이, 특별히 악하게 태어난 것도 아니고 세상 모든 사람이 그러듯 자기 한 몸과 가족이 무탈하게 살아가는 것을 낙으로 알고 삼았던 평범한 사람들이, 히틀러의 뛰어난 언변술에 현혹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좀비처럼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완전히 얼이 빠진 상태도 아니었던 사람들이, 그런 평범하고 교육도 받을 만큼 받은 사람들이 좌파나 반체제 세력, 유대인 등 일부 사람들에 한해 막강한 파괴력을 발휘한 나치의 무자비한 탄압에 굴복한 것도 아니면서, 히틀러를 마치 하느님처럼 받들면서 전 세계의 힘센 나라들을 모두 적으로 삼고 싸우는 가망 없는 전쟁에서 왜 필사적으로 싸우려 했는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추천할 수밖에 없는 20세기 인류사의 역작

틀러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라 불리는 이언 커쇼(Ian Kershaw)의 히틀러 전기 『히틀러 2(Hitler: 1936-1945 Nemesis)』는 이해관계가 나치와 직접적으로 얽히고설킨 대기업, 자본가, 정치인 등 기존의 권력 계층뿐만 아니라 고위 장성, 고급 관리, 변호사, 기업가 등의 상층 부르주아와 상인, 숙련공, 소농, 하위 공무원, 노동자 같은 중하류층에 이르는 다양한 계층과 남녀노소를 불문하는 다양한 연령층의 완전무결한 지지가 어떻게 단 한 사람의 의지와 결합하고, 더 나아가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가지고 주사위를 굴리려고 하는 한 사람의 손아귀에 어떻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고, 그럼으로써 지도자 신화가 탄생하고 그 신화가 독일과 전 세계를 지옥의 구렁텅이로 끌고 들어가는 모든 과정을 아우르며 통찰하는 전무후무한 책이다.

히틀러를 알고 싶고, 2차 세계 대전을 알고 싶고, 한 걸음 더 나아가 20세기 인류를 알고 싶으면 절대 빠트릴 수 없는, 히틀러가 인류에 미친 어마어마한 영향력만큼이나 두 권 합쳐 2천 페이지가 넘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책이다. 한 권의 무게가 무려 2kg이 넘으니 급할 땐 아령으로 써도 부족함이 없는 무게 때문에 괴력의 보유자가 아닌 이상 두 손으로 받쳐 읽기는 불가능하고, 웬만한 독서대로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두께도 무지막지하다. 2천 페이지 넘는 책을 일일이 스캔해서 전자책으로 만드는 위대한 과업을 고단하게 달성한 나 자신이 뿌듯하게 느껴질 정도다. 괴물 같은 책의 부피 때문에 섣불리 선택하기는 어려운 책이지만, 그럼에도 감히 추천할 수밖에 없는 20세기 인류사의 역작이다.

그도 우리처럼 꿈을 꾸는 인간이었다는 섬뜩한 사실

무튼, 나도 괴짜인 것이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패색이 짙어져 가는 상황에서 하루하루가 다르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망가져 가는, 그리고 린츠 재건축 모형을 보며 좋아하는 히틀러를 보면서 일말의 난감한 연민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만큼 히틀러의 일생을 다룬 커쇼의 문학적 필치가 뛰어났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히틀러는 생전에 고향 도시 린츠를 재건축하고 싶어 했다. 린츠를 재건축하는 공상은 종일 우울한 소식만 날아들며 히틀러의 골치를 지끈지끈 썩일 때, 그의 유일한 현실 도피처였다. 전쟁이 끝나면 고향 린츠로 돌아가 살려고 했던 히틀러는 암묵적으로 전쟁의 패배가 확실시되던 1945년 2월이 되어서야 린츠 재건축 모형을 보게 된다. 그리고는 어린아이처럼 마냥 기뻐서 어쩔 줄 모른다.

결코, 지어지지 못하리라는 것을 스스로 뻔히 아는 모형을 내려다보면서 히틀러는 몽상에 잠겼고 친구 쿠비체크와 린츠를 다시 짓는 꿈을 꾸던 젊은 시절의 환상으로 돌아갔다. 벌써 아득한 옛날이었다. 그러고는 가혹한 현실로 돌아왔다. (『히틀러 2(Hitler: 1936-1945 Nemesis)』, p948)

이때 히틀터의 외모는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전보다 더 수척했고 전보다 더 늙었다. 허리는 구부정했으며 걸음도 제대로 못 걸었다. 왼손과 왼팔은 수전증 환자처럼 수습 못 할 정도로 떨었다. 얼굴에서 핏기는 사라졌고 눈은 충혈되었으며 눈가는 축 처졌다. 입가에서는 치매 걸린 노인네처럼 때때로 침이 흘러내렸다. 홀로코스트를 일으킨 장본이었던 그도 때론 (자기도취적이지만) 꿈을 꾸는 사람이었고, (대부분 자업자득이지만)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 쇠약해지고 늙어가는 한 인간일 뿐이었다. 이런 히틀러의 마지막 모습이 혹시라도 관객의 동정을 살까봐, 히틀러에게 연민을 불러일으켜 그에 대한 역사적 판결을 완화시키려는 수작 아니냐는 비난의 화근이 될까 봐, 영화에서는 히틀러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기 어렵다.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으로 고민한 흔적이 역력히 없는 뻔뻔하고 거만한 얼굴로 등을 꼿꼿이 세운 채 벙커를 활보하고 다닌 의지의 사나이만은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짙은 패색이 안개처럼 전장에 무겁게 드리우고 패배가 눈앞으로 바짝 다가와도 승리에 대한 확신을 버리지 않았던 자기기만적이고 자기도취적인 낙관의 화신 히틀러가 간혹 최측근들 앞에서 우울하고 절망에 빠진 침울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면 믿어지는가? 하지만, 그런 모습은 찰나였을 뿐이고, 그는 곧 전쟁의 승리를 확신하는 의지와 투쟁을 불사르는 무대 위의 히틀러로 다시 돌아왔다. 어떤 모습이 진짜 히틀러의 모습이고 진짜 히틀러의 심정인지 우리는 영영 알 수 없지만, 말년에 그가 보여준 순진하고 어리석을 정도로 승리를 낙관하고 그러한 심지를 끝까지 지키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스트레스와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그것을 내색하지 않으려는, 그리고 기필코 한 줌의 권력조차 놓지 않으려는 의지는 정말이지 애처로울 정도로 눈물겹다. 그런 면에서 그는 정말 ‘의지의 화신’이었다. 한편으론, 부랑아, 낙오자 등 별 볼 일 없는 존재에서 세계를 처참하게 짓밟는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는 점은 가히 인상적이다.

마치면서...

런 값싼 동정은 그저 한낱 스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저질 감상일 뿐, 히틀러가 잔악무도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없다. 그는 독일이 전쟁에서 지고, 그로 말미암아 독일 민족이 절멸하는 것조차 사회다윈주의 관점에서 해석했다. 철저하게 의도된 연기였든, 아니면 타고난 천성이었든 정치적 무대에서 그는 따뜻한 인간적 감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가 살인과 학살을 즐기는 사이코패스였든 아니든, 그는 유대인의 학살을 당연시했다. 그런데 이런 히틀러를 보면서 우리의 무관심과 침묵이 일으킨 ‘지속적인 테러(ENDURING TERRORS)’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을 떠올린다면 황당무계한 비약(飛躍)이 될까? 지금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기아로, 설사병으로, 홍역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보면서 ‘내가 과연 히틀러를 악마라고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무고한 인명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의 인생을 황폐화시킨 히틀러가 악마라면, 5초마다 아이들이 굶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관심과 침묵으로 일관하는 우리는 도대체 무엇인가? 히틀러로 시작해서 이런 말로 끝을 맺다니, 역시 하고 싶은 대로 막 나가는 리뷰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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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10일 일요일

[책 리뷰] 기회주의자? 의지의 사나이? 아니면 행운아? ~ 히틀러 1(이언 커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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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주의자? 의지의 사나이? 아니면 행운아?

Original Title: Hitler: 1889-1936 Hubris: 1889-1936: Hubris by Ian Kershaw
하지만 히틀러가 독일 역사에서 그저 ‘우연’히 나타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히틀러를 부각시킨 특별한 상황이 없었더라면 히틀러는 무명인으로 남았을 것이다. 히틀러가 다른 시대로 훌쩍 뛰어넘어 가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히틀러의 개성, 히틀러의 말투는 그런 특별한 상황이 없었더라면 눈길을 끌지 못했을 것이다. 전쟁, 혁명, 민족적 수모, 볼셰비즘에 대한 공포는 워낙 광범위한 독일 국민을 뒤흔들었고 히틀러는 그런 상황을 발판으로 삼았다. 그는 상황을 기가 막히게 활용했다. (『히틀러Ⅰ(Hitler: 1889-1936 Hubris)』, p603)

‘의지의 승리’가 아니라 ‘기회의 승리’?

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 감독이 1934년 9월 나치당의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를 촬영한 다큐멘터리에 히틀러(Hitler)는 「의지의 승리(Triumph des Willens)」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제목은 히틀러가 자신을 맨주먹으로 시작해서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력으로 앞길을 헤쳐나간 영웅적 정치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과 히틀러의 그러한 불굴의 오만과 위대한 착각에 비위를 맞추듯 히틀러를 미화하려고 애썼던 나치 신화의 한 요소를 대변해 준다. 하지만, 이언 커쇼(Ian Kershaw)는 히틀러 전기 『히틀러Ⅰ(Hitler: 1889-1936 Hubris)』을 통해 히틀러가 끝내 정권을 차지하게 된 원인은 의지보다는 기회주의와 약간의 행운이 더 크게 작용했음을 설득력 있게 설파한다. 사실 히틀러 하면 떠오르는 것은 타고난 연설가로서의 천재적인 대중 선동 능력과 단호한 의지다. 커쇼 역시 연설가로서 히틀러 능력은 부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히틀러의 대중 선동 능력이 나치당의 성장과 히틀러의 정치적 삶에 크게 이바지한 점까지도 인정하지만, 히틀러가 끝내 정권을 차지하게 된 이런 저러한 복합적인 이유 중에 히틀러의 의지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기존의 해석에는 단호한 비판의 날을 세운다.

권력의 심장부에 있었던 사람들의 계산 착오

사학자에게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 원인에 관해 물어본다면 그 누구도 객관식 문제를 풀어내는 것처럼 명확한 대답을 내놓지는 못한다. 그것은 히틀러가 부상하는데 히틀러의 개인적 요소와 주변적 요소, 그리고 시대적 배경이 서로 복잡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히틀러가 권력을 차지하게 된 출발점을 총리가 된 시점으로 본다면, 그 대답은 몇 가지로 간추려볼 수는 있을 것 같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것은 결코 필연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커쇼는 히틀러가 총리 자리에 오른 것은 히틀러의 활약보다는 권력의 심장부에 있었던 사람들의 계산 착오에 있었다고 본다. 권력의 심장부에 있었던 사람이란 다름 아닌 민주주의를 파계하려는 우익 보수 세력이었고, 그들은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데 혈안이 된 나머지 히틀러를 충분히 자신들의 의지대로 다룰 수 있는 만만한 인물로 보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 히틀러에 대한 과소평가는 1923년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히틀러를 정치계에서 완전히 쫓아낼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히틀러가 총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정권을 잡으려는 나치당의 노력이 주효했다기보다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세력이 그만큼 밀어주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권위주의 체제에 자기들 이해관계가 걸려 있었던 대지주와 군부는 히틀러의 권력 쟁취를 도운 일등 공신이었고, 대기업은 비록 정치적으로는 근시안적이었고 자기 이익만을 추구했지만,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마지막으로 패전, 실패한 혁명, 대공황 등으로 말미암아 총체적 난국과 빈곤에 시달리면서 민주주의에 대해 뼛속까지 염증을 느끼고 있었던 독일 국민도 히틀러를 선택함으로써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데 한몫 거들었다.

여기에 히틀러가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커쇼는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이어지는 독일 정치 문화의 중요한 줄기들을 거론한다. 그것은 폐쇄적 민족주의, 제국주의, 인종주의, 반마르크스주의, 전쟁 미화, 자유보다는 질서를 강조하는 전통, 강한 권위에 끌리는 마음이었고, 아울러 단기적으로는 바이마르 민주주의가 출범할 때부터 부딪쳤던 첩첩이 쌓인 위기들이었다. 여기에 주어진 상황을 잘 활용하면서 시류에 영합하는 기회주의적이면서도 영악한 히틀러의 상황 대처 능력이 ‘지도자 히틀러’의 탄생을 ‘우연’이 아닌 무언가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히틀러가 군대에서 연설할 수 있는 재능을 발견하여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이 순전히 우연이었음을 고려해보면 ‘지도자 히틀러’ 탄생에 우연성이나 우발성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우물쭈물하고 자꾸 뒤로 미루는 히틀러의 우유부단한 통치 방식이 오히려 나치당과 관료 체제의 느슨한 통합을 이끌었다는 점과 시의적절하게 터진 의사당 방화 사건이나 힌덴부르크의 사망, 1차 세계대전 참전 등 히틀러는 운도 꽤 따랐다.

히틀러는 기회주의자인가? 행운아인가? 아니면 비범한 능력의 소유자인가?

렇다면 ‘지도자 히틀러’ 탄생에서 얼마만큼을 우발성 내지는 심지어 역사의 우연 탓으로 돌려야 하는가? 얼마만큼을 당시 독일을 다스렸던 비범한 남자의 행동과 동기 탓으로 돌려야 하는가? 얼마만큼을 민주주의에 적대적인 세력 탓으로 돌려야 하는가? 또 얼마만큼을 히틀러를 스치고 지나갔던 행운 탓으로 돌려야 하는가? 또 얼마만큼을 광신적으로 히틀러를 숭배했던 나치 일당과 독일 국민 탓으로 돌려야 하는가? 이 책은 바로 이런 물음에 답을 구하려는 진중한 노력의 결과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간단히 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분명한 것은 이 모든 요소가 의도적이든 우연히든 서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기도 하고 부족한 부문을 서로 메워주기도 하면서, 그렇게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는데 각자 나름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것들은 둘째치고 정권을 장악하는데 히틀러의 의지는 얼마나 도움이 되었던 것일까? 연설이나 선동 분야를 제외하고는 히틀러의 개인적 능력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으로 보는 커쇼의 답은 당연히 부정적이다. 커쇼는 히틀러의 의지보다는 다분히 기회주의적인 면을 부각시킨다.

부랑자보다 약간 나았던 청년 시절

실 1차 세계대전 전에 그림을 팔아 생활비를 벌 수 있었다는 점에서 부랑자보다 약간 나은 생활을 했던 히틀러의 청년 시절을 돌이켜보면 과연 히틀러가 뭐라도 이루어보겠다는 약간의 의지가, 아니 그러한 의지가 존재했는지조차 의심이 들 정도로 게으르고 방만하고 나태한 삶을 살았다. 그나마 재능이라 할 수 있는 그림 실력을 부지런히 발휘해 돈을 열심히 벌려고 하지도 않았고, 사교성이 좋아 인맥을 두루 넓힌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어렸을 때부터 꿈꾸던 예술가가 되겠다고 열심히 공부한 것도 아니었다. 낮에는 반쯤은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하루하루 먹고살 궁리를 해야 했고, 밤이면 바그너의 음악에 빠져 공상과 망상의 바다에 자신을 질식시켰다(마치 세상을 등진 채 책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나 자신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 그 당시 히틀러의 삶은 그가 지독히도 경멸하던 막노동꾼의 삶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히틀러는 삽 대신 붓을 들었고, 술과 담배 대신 독서와 음악에 취했을 뿐이다. 말 그대로 그냥 되는대로 살았던 히틀러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전쟁터에서 제 세상을 찾은 듯 보였지만, 그것도 금방 끝나고 말았다.

뜻밖에 군대에서 깨달은 연설 능력

틀러는 어떻게든 제대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군대에서 공짜로 재워주고 먹여주고 월급까지 주었기 때문이다. 학력이 출중한 것도 아니고, 연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매우 뛰어나지는 않지만 보통 이상은 하는 그림 실력을 제외하곤 아무 기술도 없는 상태에서 패전으로 엉망진창이 된 독일 경제의 폐허 한복판으로 내몰린다는 것은 예전의 부랑자와 다를 바 없는 삶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 히틀러가 군대에서 정치에 발을 내디디면서 처음 맡은 임무는 훗날 등에다 칼을 박았다는 배신자로 부르게 될 사회주의 세력이 이끌던 혁명 정부의 일을 도운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히틀러는 좌파 정권이 집권하는 동안 소속 대대의 대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사회주의 정부의 홍보 부처를 도와 부대원들에게 ‘교육’ 자료를 배포하는 일을 맡았다.

이때부터 이미 기회주의적인 히틀러의 특성이 드러난다. 히틀러가 사회주의에 반감을 품지 않았을 리는 만무하지만, 히틀러는 단지 생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군대에 남고 싶었다. 군대에 남는 것이라는 (훗날에는 권력 쟁취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다면 비록 신념에 어긋나더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히틀러의 특성이다. 훗날 히틀러는 나치당을 이끌면서 권력 쟁취라는 목적 아래 나치당과는 다른 이념을 가진 여러 사회 집단을 받아들이는데, 좋게 말하면 유연성 있는 상황 대처 능력이라 할 수 있고 달리 말하면 기회주의적인 처사라고 볼 수 있다.

1919년 5월 혁명 정부가 무너지고 키를 마이어(Karl Mayr) 대위를 통해 군대를 反볼셰비즘과 민족주의 방향으로 올바르게 교육하는 선전요원으로 선택되고 나서야 히틀러는 자신이 연설할 수 있다는 재능을 깨닫게 된다. 히틀러가 자발적으로 선전요원으로 나섰다기보다는 선택되었다는 점에서 다분히 기회주의적인 냄새가 풍긴다.

‘북 치는 사람’ 히틀러

렇다고 히틀러가 자신의 연설 능력과 대중 선동 능력을 깨닫게 되면서 바로 권력으로 향한 의지를 드러낸 것도 아니다. 1923년 11월 쿠데타 실패로 란츠베르크 감옥에 갇히기까지 히틀러는 위대한 지도자의 앞길을 닦아놓는 북 치는 사람이라는 역할로 만족했다. 그것은 예전에 품었던 위대한 화가나 건축가가 되겠다는 꿈 대신에 히틀러가 새로 발견한 천직이었다. 하지만, 란츠베르크 감옥에서 『나의 투쟁(Mein Kampf )』을 집필하고 세계관의 틀이 다져지면서 그는 이제 ‘북 치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지도자가 되어야 할 운명을 짊어진 사람으로 인식한다. 이때부터 구렁텅이에 빠진 독일을 이끌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자기도취적인 사명감에 불타올랐고, 이때서야 비로소 권력을 쟁취해 지도자가 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맨 앞에서 설명했듯 히틀러가 총리에 오르는 과정은 절대로 히틀러의 의지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이후 독일에서 전개되는 정치 전개 과정을 봐도 히틀러의 의지력 하나보다는 고집, 우유부단함, 도박사 기질 등 그의 다른 성격적인 요소가 독일의 운명에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 것이 아닌가 싶다.

마치면서...

『히틀러Ⅰ(Hitler: 1889-1936 Hubris)』은 히틀러의 일대기 중 히틀러의 할아버지부터 시작하여 독일의 라인란트 재점령으로 히틀러의 지도자적 위치가 완벽하게 확립되는 1936년 봄까지를 담고 있다. 어마어마한 책 두께만큼 히틀러에 대해 밝혀진 모든 자료를 담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책이지만, 다른 독재자들의 과거처럼 젊은 시절의 기록은 이 빠진 것처럼 군데군데 빈자리가 많이 보이고, 사용된 자료의 신빙성도 미덥지 못하다. 젊은 시절의 히틀러에게 좀 더 가깝고 투명하게 다가갈 수 없다는 점이 아쉽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은 히틀러의 성장 과정과 히틀러의 개인적 기질과 우연과 행운이 어떻게 독일의 정치 • 사회 • 경제와 상호 작용하고, 그 비상한 맞물림 속에서 어떻게 위대한 선동가가 탄생했고 어떻게 위대한 지도자가 만들어질 수 있는지를 세밀하게 통찰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자료다. 어마어마한 분량의 책이니만큼 책 무게는 가벼운 운동기구로 사용해도 될 만큼 상당히 부담스럽지만,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시종일관 흡입력을 잃지 않는 명쾌한 문장력 때문에 읽기는 전혀 부담스럽지는 않다. 이 덕분에 지루할 새도 없이 독파할 수 있었다. 두께 때문에 감히 추천하기는 어려운 책이지만, 두께를 훨씬 뛰어넘는 지적 충만감과 역사적 혜안을 안겨줄 수 있는 역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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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3일 일요일

[책 리뷰] 지성조차 이기심에 묶여야만 하는가 ~ 산둥 수용소(랭던 길키)

Shantung-Compound-book-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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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조차 이기심에 묶여야만 하는가

Original Title: Shantung Compound by Langdon Gilkey
과연 우리는 지혜와 명철, 도덕적 힘을 최대한도로 발휘하여 굶주리는 세상과 우리의 것을 나눌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우리를 위해 쌓아놓고 자기 배만 불리며, 인간성과 평화로운 세계 공동체를 얻을 수 있는 희망을 다 던져버릴 것인가? (『산둥 수용소(Shantung Compound)』, p445)

젊은이답지 않은 지적 날카로움으로 완성한 회고록

2차대전 때 일본은 중국 점령지역에 있던 영국인, 미국인 등의 외국인들을 위현(현재는 산둥)에 있는 포로수용소에 수용했다. 당시 북경 연경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랭던 길키(Langdon Gilkey) 역시 2년 반 동안 수용소 생활을 경험한다. 남부럽지 않은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으로 안정된 환경에서 자랐던 그에게 수용소 생활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난의 나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비참하고 고단했던 수용소의 일상 속에서 젊은이다운 왕성한 호기심, 그리고 젊은이답지 않은 지적 날카로움이라는 혜안과 통찰력을 발휘하여 인간의 성품과 도덕성에 대한 예리한 성찰을 남겼는데, 그것이 바로 이 책 『산둥 수용소(Shantung Compound)』이다. 길키는 수용소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현대적 낙관주의에 자부심을 느끼고 인간의 합리성과 도덕성을 낙관적으로 확신했다. 하지만, 그는 수용소 경험을 통해 지금까지 자신이 믿었던 낙관주의가 도를 넘어선 순진함과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에 입각한 터무니없는 망상이었음을 깨닫는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인간의 성품과 도덕성에 대한 흠집 정도를 넘어서 그 존재 자체와 근원적인 본질에 대해 뇌 속까지 파고들 정도로 깊은 회의를 품게 하였을까? 그것은 바로 인간의 ‘이기심’이다.

굶주림은 문명의 모든 가면을 벗겨버린다

소에 누렸던 물질적 풍요와 안락함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수용소 사람들은 입소 당시만 해도 그토록 끔찍하게 여겨졌던 환경에 놀랍게도 몇 개월 만에 적응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 특유의 창조적인 활력을 발휘하여 쓰레기장 같았던 수용소를 사람이 살 만한 그럴듯한 공간으로 여겨지게끔 탈바꿈시킴으로써 이들은 바깥세상과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일상’을 만들어낸다. 그들이 수용소에서 창출한 ‘일상’은 어떤 환경에도 굴복하지 않고 적응하고 더 나아가 개척하려는 인간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증명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수용소의 식량 부족 문제가 표면적으로 불거지면서, 그리고 식량 문제가 앞으로 개선될 여지는커녕 현재의 배고픔이 지속적으로 장기화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각자의 마음속에 자리 잡자 수용소 사람들의 이기심은 폭발해버리고 만다.

군자도 굶주리면 붓을 내팽개치고 이빨을 드러내며 짐승으로 변하듯, 수용소에 전염병처럼 퍼지는 굶주림은 그동안 인류 문명이 줄기차게 부르짖었던 지적 우월함, 교양, 민주주의, 그리고 도덕과 정의가 개미가 뀐 방귀에도 흩어지는 뜬구름 같은 환상이었음을 폭로한다. 특히 길키가 수용된 수용소는 필리핀이나 싱가포르 수용소에 있는 군인 포로들의 상황과는 천지 차이였다. 일본군의 잔혹한 통치 아래에서 하루하루 죽음의 임박함을 느꼈을 군인 포로들과는 달리 산둥 수용소에는 고문 • 폭력도 없었으며 굶어 죽는 사람도 없었다. 길키의 경험은 인류 문명의 도덕적 견고함이 약간의 빈곤만으로도 너무 쉽게 무너졌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사람이 굶주리면 얼마나 파렴치해질 수 있는지는 미국 적십자에서 보낸 구호품 배분 사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미국 적십자가 수용소에 보낸 (따로 수령인은 지정되어 있지 않은) 엄청난 양의 구호품은 수용소 사람들에게 골고루 분배된다면 최소 몇 개월 이상은 배고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상당한 양이었다. 현명하게도 일본인 수용소 사령관은 미국인에게는 꾸러미 1.5개, 다른 국적 사람들에게는 꾸러미 1개씩을 배분함으로써 미국인의 자부심도 세워주고 다른 국적 사람들에게도 공정하게 분배되도록 하는, 누가 봐도 탁월한 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7명의 젊은 미국인이 수용소 사령관을 찾아가서 미국 적십자가 보낸 물품을 미국 시민이 아닌 다른 국적 수감자들에게 배포하는 것은 직권 남용이라고 항변한다. 만약 미국인에게만 구호품이 배분된다면 미국인 한 사람당 꾸러미 7개씩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7명의 젊은이가 어떠한 마음에서 수용소 사령관을 찾아간 것인지는 굳이 밝히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의제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수용소 사령관은 심사숙고 끝에 모든 사람에게 꾸러미 1개씩을 배분하고 나머지는 다른 수용소로 보내기로 한다. 7명의 미국인 때문에 200명의 미국인은 꾸러미 반 개씩을 잃은 꼴이 되고 만 것이다. 나머지 193명은 억울했을까?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7명의 미국인 행동이 비도덕적이고 탐욕적인 행동이었다고 생각했던 길키(길키 역시 미국인이다)가 수용소 사령관의 최종 판결이 나기 전에 다른 미국인을 두루 만나며 의향을 타진해 본 결과 그들도 7명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고는 크게 실망하기 때문이다.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다만 이기적일 뿐이다

사와 관련된 책들을 좀 읽은 사람이라면 맹자 말씀대로 사람은 선천적으로 착하다고 보는 사람은 드물 것 같다. 그렇다고 사람이 마냥 악하다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고 다만 이기적일 뿐이다. 그리고 인류가 자부하는 도덕심 역시 이기심이라는 변덕스러운 바다 위에 표류하는 뗏목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때 도덕적 기준은 표류하는 뗏목 위에 위태롭게 매달린 깃발이 된다. 바람 따라 물결 따라 이리저리 나부끼고 떠다니는, 때론 송두리째 날아가 버리거나 바닷속으로 가라앉아 버리는 깃발과 뗏목 말이다. 만약 이처럼 고정된 도덕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말은 보편적인 도덕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도덕이 사람이 처한 환경과 상황에 따라 멋대로 변용되고 변질할 수 있다면 도덕의 존재 자체를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세상을 축소해 놓은 듯한 수용소의 ‘일상’을 다룬 길키의 『산둥 수용소』는 사람이 물질적인 궁핍함에 처하면 바깥세상에서 쌓아 올린 명예, 명성, 부,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이성, 합리성, 도덕, 양심, 정의 등 인류 문명을 빛낸다고 여겨졌던 보편적 가치관이 하루아침에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해 준다. 그래서 국가가 경제성장에 목매다는 것도 최소한의 인간적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경제적 풍요와 만족을 국민에게 제공함으로써 사회에 보편적인 도덕적 가치관이 설 자리를 제공해주려는 의지와 다름없다. 하지만, 우리는 경제성장에 발맞추어 사람의 탐욕과 이기심도 증가하거나 다양해지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편중된 부는 또 다른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문제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공산주의 사회가 해답이 될 수 있을까? 이 역시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이 사람을 도덕적으로 개조할 수 있다는 믿음을 막상 행동으로 옮겼을 때 국가와 사회에 어떠한 재앙과 혼란이 일어날 수 있는지 통한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배웠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치 않을 보편적인 도덕적 가치관을 인류 문명 위에 확고하게 세운다는 것은 유토피아 사회에서나 가능한 것일까. 혹자는 길키처럼 영적인 무언가에서 찾을 수 있지만, 당연히 난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지성조차 이기심에 묶여야만 하는가

『산둥 수용소(Shantung Compound by Langdon Gilkey)』를 읽으며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약간의 물질적 빈곤만으로도 너무나도 쉽게 무너져버리는 양심과 도덕의 허술함보다는 제삼자 처지에선 명백히 도덕적으로 지탄받아야 할 사람들이 어떻게든 자신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변명하고 온갖 잡다한 지식을 총동원하여 합리화하려는 의지다. 종교인은 종교적으로, 변호사는 법적으로, 그 밖의 사람들도 바깥세상에서 쌓아온 경험, 지식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든 합리화하려는 집요함은 역겹다 못해 구역질이 다 난다. 인간의 이기심은 단지 생존과 직결된, 혹은 탐욕을 부채질하는 물질적인 문제에서만 그 잔인한 이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자신이 하는 어떠한 행동도 도덕적으로 정당하고 떳떳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합리화 의지로서도 나타난다.

암울하고도 참혹한 상황에서도 인류를 구원해 낼 것이라 믿었던 지성과 의지조차 이기심을 위해 헌신하는 꼴을 보면, 정말 길키의 깨달음대로 우리는 신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나약하고도 나약하며 어리석고도 어리석은 동물일지 모르겠다. 나 역시 이 책을 덮고, 그리고 오늘의 깨달음을 뒤로하고 내일이 오면 어느새 본연의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인간으로 돌아가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신에게 의지하는 것이 정말 만족스러운 해결책이 될까? 지난 2,000년 동안 종교가 신의 이름으로 인류와 그 이웃에게 자행한 온갖 잡다한 악행을 떠올려보면 종교 역시 인류처럼 미덥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어쩌면 길키가 고찰하고 성찰한 인류의 문제는 인류가 영원히 풀어야 할 숙제이자, 영원히 풀 수 없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다소 희망적인 것은 인류는 이러한 문제들을 인지하고 풀어낼 수 있는 지성이 있다는 것이다. 비록 그 지성조차 이기심에 묶여 있을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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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24일 일요일

[책 리뷰] 부패할 수 없는 혁명의 파수꾼 ~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장 마생)

Robespierre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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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할 수 없는 혁명의 파수꾼

Original Title: Robespierre by Jean Massin
나는 충분히 살았습니다. 나는 프랑스 민중이 비천함과 예속의 한 가운데에서 영광과 자유의 정점으로 도약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민중들의 족쇄가 깨지고 세상을 짓누르는 비난받아 마땅한 왕좌들이 승리한 민중들의 손 아래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Robespierre)』, p599)

부패할 수 없는 혁명의 파수꾼

패할 수 없는,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는 파수꾼이자 자유의 사도로 불린 사람. 헌법의 서문인 인권선언의 이름으로 3년 동안 헌법의 해악들에 대항해 투쟁했던 사람.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사상의 아들로 자유를 얻은 위대한 민중의 한가운데에서 자연의 선의를 찬양하는 꿈을 꾸고 있던 사람. 그 사람은 바로 프랑스 혁명이 나은 부르주아 혁명가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다. 그가 민중으로부터 ‘혁명의 파수꾼’이라는 찬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부르주아로서 혁명의 소용돌이에 발을 막 들여놓았을 때 다른 부르주아들이 보려고도, 결코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을 로베스피에르만은 보았기 때문이다. 바스티유 함락은 만 명에 이르는 생탕투안 포부르(faubourg Saint-Antoine)의 가난한 노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장 폴 마라(Jean-Paul Marat)의 일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은 오직 민중을 신뢰할 때에만, 그리고 혁명 수호에 그들을 참여시킬 수 있을 때만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혁명의 불씨가 본의 아니게 부르주아에서 민중으로 튄 꼴이 되었을지라도 로베스피에르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이미 민중 속으로 파고든 혁명의 불씨가 활활 타오르는 혁명의 용광로로 진화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연료를 공급하는데 자신의 젊음과 나머지 생애를 기꺼이 바치기로 다짐했기 때문이다.

커피를 마시는 것 같은 진한 혁명의 체취와 온기

스티유 습격으로 프랑스 혁명이 이제 막 동이 틀 무렵, 이로부터 권총 자살이 불운으로 실패하고 단두대에서 생애를 마감하기까지 그에게 남은 시간은 달랑 5년뿐이었다. 이 시기에 로베스피에르는 전력 질주와 휴식을 반복하며 훈련하는 육상 선수처럼 때론 왕성한 활동력과 열정을 보여주기도 하고 때론 신중하고 병약한 침체기를 보여주기도 하는 등 심하지는 않지만 비교적 뚜렷한 기복을 보여준다. 하지만, 결코 그는 다른 부르주아들처럼 혁명과 반혁명 사이를 줏대 없이 천방지축 날뛰며 오락가락하지 않았다. 지레 겁먹고 주춤주춤 후퇴하는 법은 더더욱 없었다. 험난하고 외롭고 쓸쓸한 혁명의 길을 나홀로 묵묵히 걸어간 그가 남긴 발자취를 두고 훗날의 사람들은 공상가, 유토피아주의자, 냉철한 현실주의자, 순진한 혁명가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것을 인정하고, 또한 그가 혁명 활동 중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오류를 적지 않게 범하며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드러냈다는 사실 역시 인정하더라도, 로베스피에르가 남긴 부정할 수 없는 업적이 있다. 그는 당시 혁명가 중 모호함과 장황함이 가장 적은 인물이었고, 혁명이 발발했을 때의 그 격렬함과 열정을 생생하게 피부와 호흡으로 흡수했던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고, 또한 그는 혁명의 원칙과 신념을 끝까지 고수했다. 이로써 그는 상퀼로트 민중을 정치적 활동의 경험 속으로 인도한, 그리고 정치 권력의 행사와 결합한 첫 부르주아 혁명가였다.

장 마생(Jean Massin)은 자칫 역사의 무심함과 역사가들의 편협함 속에 묻힐뻔했던 로베스피에르의 참모습을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Robespierre)』으로 복원했다. 기존 해석과 어긋나기도 하고 대치되기도 하는 복원된 그의 모습이 마음에 드는 사람도 있을 테고, 내키지 않거나 껄끄러운 사람도 있겠지만, 이 책에는 민중을 향한 로베스피에르의 식지 않는 뜨거운 열정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온기가 마치 보온병에 담긴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시는 것처럼 진한 혁명의 체취와 함께 전해진다. 두툼한 이 책을 가슴에 안고 있노라면 마치 강아지를 품에 안은 것처럼 따뜻한 혁명적 온기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전해져 오는 것 같다.

로베스피에르는 민중이 혁명의 심장이자 팔이라며 믿었을지는 몰라도, 산악파 부르주아지가 여전히 혁명의 두뇌여야 한다는, 훗날의 엘리트 의식이라 불리게 될 한계를 명백히 드러내기도 한다. 민중(프롤레타리아)을 계몽하고 자극하고 선동하여 혁명 전차를 이끌게 하되, 전차 부대 지휘는 직업 혁명가가 맡아야 한다는 엘리트 의식은 훗날 러시아와 중국 혁명에서 그대로 실현된다. 그럼에도, 당시 부르주아 대부분이 민중을 멸시하거나 적당히 꼬드겨 이용할 먹을 생각만 하고 있었을 때, 그리고 민중은 이러한 부르주아를 불신하고 있었을 때, 이 거대한 두 힘이 충돌하여 혁명이 자폭하지 않도록 그 사이에서 고독한 완충재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이 바로 로베스피에르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공포 정치가 시작되기도 전에 혁명의 불씨가 일찌감치 꺼졌거나 반동적인 부르주아의 민중 학살이 공포 정치를 대신했을지도 모른다.

마치면서...

책에 대해 가장 아쉬운 점은 불충분한 자료가 가져온 한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상적이거나 의회 연설을 제외한 다른 혁명 활동, 민중과의 교류 등 로베스피에르의 구체적인 동선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연설이나 글, 그리고 그것에 대한 장 마생의 분석과 해석이 주를 이루다 보니, 다시 말해 액션 영화를 보는데 액션 장면은 없고 대신 현학적인 해설자가 생략된 액션 장면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을 듣는 꼴이라 좀 지루하고 곤혹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인권선언, 기본권, 자유, 평등, 우애, 혁명, 국민, 국민국가, 국민주권, 시민권, 헌법, 대의제, 정교분리, 의무교육, 국민군, 입헌주의, 자유민주주의 등 현재도 여전히 유효한 민주주의적인 키워드 전부가 프랑스 혁명에서 탄생한 것도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프랑스 혁명을 통해 유토피아적 이상에서 현실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실재적인 무언가로 윤곽을 드러냈고, 그럼으로써 근대 사회의 민주주의적 가치관이 꽃 피울 수 있도록 씨앗과 영양분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로베스피에르가 프랑스 혁명에서 이룬 과업과 부닥친 한계를 명확히 밝힌 이 책의 가치는 유효하다. 또한, 혁명의 도덕군자 로베스피에르가 완고하게 강조했던 혁명의 덕성이 비록 그의 순진성을 드러낼지라도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조차 보편적인 도덕성이 날로 희미해져 가는 요즘 우리는 ‘부패할 수 없는’ 그의 강직함에서 더 높은 민주주의와 자유로의 도약을 기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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