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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2020

[책 리뷰] 무엇이 보통 사람을 돌이킬 수 없는 검은 강(핑루)을 건너게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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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보통 사람을 돌이킬 수 없는 검은 강을 건너게 하는 것일까?

Original Title: 黑水 by 平路

자전의 곁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녀의 속마음을 들여다보았다면 어쩌면 그녀가 하려는 말을 들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사랑이란 게 뭔지 몰라요. 수건으로 내 몸을 닦아주는 게 사랑인가요? 내 겨드랑이를 간지럽히고 아랫배를 쓰다듬고 아무도 만진 적 없는 곳을 만지는 것이 사랑인가요? 세상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엄마도 날 사랑하지 않았고 아빠도 일찍 날 떠났어요. 그는 번들거리는 머리를 내게 들이대고 더러운 손으로 날 만지고 역겨운 냄새를 풍기며 나를 따라왔어요.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이 세상에 없다면 나는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요? 내 과거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내게도 사랑할 기회가 있지 않을까요?” (『검은 강(黑水)』, p198)

특별할 것 없는 특별함, 살인

살인 사건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별하지만, 살인자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 역시 다른 범죄자를 바라보는 것과는 어딘지 모르게 특별하다. 그리고 무심하다.

무엇이 특별한가 하면 마치 자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전혀 그럴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마치 자신은 오래전부터 ‘선(善) ’의 가치를 존중하며 살아온 군자라도 되는 것처럼 으스댄다. 이들이 살인자를 향해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드는 모습은 굶주린 하이에나가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는 안전한 먹잇감을 얻고 나서 곧 만끽하게 될 포만감을 기대하며 우렁차게 포효하는 것과 같다. 평소에는 직장 상사의 부당한 대우나 모욕적이고 비인간적인 언행에는 찍소리도 못하는 사람도 이 때문만큼은 기세등등한 장군감이다. 만약 대중의 야멸스러운 세 치 혀끝에서 놀아나는 그 대상이, 즉 이 경우에는 살인자가 어떠한 구속 없이 눈앞에 척 버티고 있다 해도 과연 그렇게 혀를 방자하게 놀릴 수 있을지 의문스럽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무엇이 무심한가 하면 가차 없는 비난을 퍼부으면서도 언론을 통해 드러난 가십거리 정도 수준의 이야기와는 매우 다를 수 있는, 살인자가 막상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그 절박한 사정이나 상황 등 사건의 진짜 동기나 가해자의 말 못 할 속사정에 대해서는 전혀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사는데 전혀 보탬이 안 될 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연예인들의 시시콜콜한 사생활은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인간의 불완전함과 더불어 인간 사회의 미성숙함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이 절호의 기회는 무심하게 그냥 흘려보낸다. 돈이나 자극적인 저질 오락거리가 될만한 것을 제외한 다른 일에 머리를 굴린다는 것은 부질없는 낭비라고 굳게 믿으며 사는 속물 중의 속물들이다. 아직도 아파트 투기와 프랜차이즈가 만연한 것을 보면 딱히 돈 굴리는데도 머리를 쓰려고 애쓰는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것 아는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에는 살인을 위해 특별히 태어난 특별한 사람도 없고, 살인이 일어나기에 딱 좋은 특별한 상황도 필요 없다는 것을. 즉 특별한 사람이 특별한 상황에 맞닥트린 이유로 반드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살인 사건을 완성하는 최후의 행동이라 할 수 있는 살인이 행해지는 그 마지막 장면만 제외한다면, 사건의 시작부터 살인으로 끝나기 전까지의 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는 그 과정은 그리 특별할 것도 없다. 누구나 겪는 일은 아니겠지만, 많은 사람이 겪는 일이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런 사람들 모두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다. 대부분 사람은 타인과의 대립이나 마찰로 생긴 긴장감을 해소하고자 대화나 법률에 의지한다. 아니면 약간의 쓰라림을 감수하고 그냥 포기해 버린다. 그중에서 소수만이 소소한 폭력에 의지하려 들고, 그중에서도 극소수만이 끝내 사람을 죽인다.

왜 비슷한 상황에서 누구는 뒤로 물러서는가 하면 ─ 비록 극소수지만 ─ 누구는 사람을 죽이는가? 무엇이 사람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가는가? 무엇이 사람이 사람을 죽이게 만드는가? 인류 문명이 개화한 이래 수많은 석학이 이 간단하면서도 풀기 어려운 문제로 말미암아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지만, 진실은 여전히 소원하다. 우리 같은 범인들은 ‘천성’ 탓으로 돌리며 석학들이 풀지 못한 난제에 대해 콧방귀를 뀌겠지만 말이다.

장황한 서론을 마치고

역시나 책과는 별 상관없는 서론이 쓸데없이 길었지만, 아무튼 핑루(平路)의 『검은 강(黑水)』은 얼마 전에 읽은 마치다 고(町田康)의 『살인의 고백(告白)』처럼 실화를 기반으로 재구성한 범죄 실화 소설이다. 두 소설 다 ‘살인’보다는 한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죽이도록 몰아가는 그 쓸쓸하고 서글픈 ‘살인의 역사’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알다시피 누구나 살면서 여러 번 살의를 품을 수 있지만, 그 살의를 품을 때마다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다. 아마 그랬다가는 진즉에 호모 사피엔스는 멸종했을 것이다. 다만, 사람이 살아가면서, 여러 사람과 부대끼다 보면 인생에 있어서 최소 한 번 이상 살의를 품을 수 있다는 데 동의한다면, 살인자의 고백 같은 이 두 책을 남의 이야기처럼 한 귀로 흘려듣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개운치가 않다. 거창하게 인간의 불완전함과 나약함에 천착한다는 문학의 사명까지 언급하고 싶지는 않고, 다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카페에서 일하는 27세의 여성이 단골손님으로 알고 지내던 사업가와 여교수 부부를 계획적으로 살해한 이유에 대해 나는 알고 싶을 뿐이다.

무관심과 오해 속에 영원히 묻힌 진실

가해자 자전은 무기징역수로 복역 중이다. 이 살인 사건은 이미 법적으로 결말이 난 사건이고, 피해자를 알고 지낸 가족들 역시 버젓이 살고 있다. 그녀가 그 두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하기에 그녀는 전혀 무고하지 않다. 하나 분명한 것은 그녀가 왜 두 사람을 죽였는지, 왜 두 사람을 죽여야 했는지 그 동기와 연유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것은 남에게 자신의 심중을 털어놓기를 꺼리는 가해자의 성격 때문일 수도 있지만, 사람을 죽인 자는 ‘악인’이고 ‘악인’이 하는 말은 모두 거짓말이라는 선입관으로 무장한 사회와 대중이 자신들의 억측으로 가해자의 입을 봉해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 사건을 금품을 노린 살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자전의 말은 다르다. 그녀는 복잡한 심리적인 상황이 이 사건에 얽혀있음을 담담하게 진술한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말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자전의 말을 증명해 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자전이 그러한 점을 역이용해 자신의 죄를 회피하려고 거짓말을 꾸며낸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진실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사건이 일으킨 사회적 파장이 완전히 가라앉기도 전에 용감하게 사건을 재구성한 작가 핑루도, 그리고 사건을 재판하면서 공정성을 지키지 못하고 개인적 심증을 재판에 개입시킨 심히 자질이 의심스러운 판사와 피해자를 잔악무도한 살인자로 몰아간 검사, 그리고 그녀의 굳게 닫힌 마음을 여는데 고심했던 그녀의 변호사도 알 수 없다. 진실은 오직 자전만이 알고 있지만, 그녀의 주장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를 판별해낼 수 있는 증거는 이미 연기처럼 사라졌다는 점에서 이 사건의 진짜 원인은 영원히 묻히게 되고 말았다.

누구도 되묻지 않은 질문

가해자를 아니꼽게 보는 누군가에겐 『검은 강(黑水)』은 가해자를 두둔하는 당치않은 소설로 보일 수도 있다. 그들은 소설이 묘사하는 그녀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과 현재의 가난, 그리고 그녀와 피해 남성 사이에 오갔던 혼란스러웠던 감정적 • 육체적 교류가 그녀의 살인을 변명해주고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범죄자들이 불행한 과거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종종 발견되고, 때론 가난과 불륜이 살인 사건을 일으키는 주요한 배경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 소설 『검은 강』을 마녀사냥당한 가해자를 동정하는 마음으로 지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 책을 진지하게 읽은 독자라면, 그리고 약간의 상식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독자라면 그런 주장이 허무맹랑한 억측임을 간파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법과 사회는 가해자의 진술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들 편한 대로 금품을 노린 살인 사건이라고 결정했다는 점이다. 이 살인 동기에 대해 가해자는 끝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형을 받았다. 다만 그녀는 억울했다. 자신이 두 사람을 죽였다는 죄를 짊어진 것이 억울한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을 죽인 이유에 대해 법과 사회가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도 되묻지 않았다. 치정에 얽힌 감정적 살인보다는 금품을 노린 탐욕적 살인이 더 죄악스러워 보이고, 그것이 마녀사냥의 대상으로 더 적합해서일까? 아니면 살인자라는 극악무도한 범법자에 대해 그 이상의 관심을 가지는 것은 관용의 낭비라고 생각해서일까? 만약 자전의 진술 전부가 거짓말이 아니고 그 속에 조금이라도 사실이 섞여 있다면, 그녀가 단순히 금품을 목적으로 두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은 지극히 의심스럽다.

어쩌면, 범죄 동기를 세상 사람들이 범죄에 대해 자신을 스스로 이해시키고 만족시키기 위한 환상으로 치부하는 교고쿠도(교고쿠 나쓰히코(京極 夏彦)의 ‘백귀야행(百鬼夜行)’ 시리즈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말처럼 동기는 중요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누구나 살의를 품을 수 있는 만큼 ‘동기’ 역시 누구에게나 있다. 자전의 경우 검사의 주장이 맞는다면, 그것은 탐욕이다. 하지만, 자전의 주장이 맞는다면 그것은 자신의 비밀을 지키고 싶어 했던 한 여자의 방어 본능이 살의를 일으킨 것이 된다. 아니면 진실은 그 중간 어디에 있을지도 모른다. 돈도 갖고 싶었고, 비밀도 지키고 싶었다.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어찌 되었든 두 이유 다 살인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참작의 여지는 분명하게 갈린다. 자신의 비밀이 세상에 밝혀지는 것을 병적으로 꺼렸던 여자가, 사회의 손가락질까지 받을 가능성이 농후했던 어두운 비밀이 남에게 까발려질 것 같은 절망적인 순간은 심리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몰린 것과 다름없다. 이런 가해자의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심정을 모르고서는 사건의 본질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기에 핑루는 과감히 붓을 들었던 것이리라.

무엇이 우리가 돌이킬 수 없는 검은 강을 건너게 하는 것일까?

이 소설이 비교적 짧은 분량이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이유는 피해 여성과 가해 여성을 대비시키는 이중의 서술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사건의 진범은 확정되었기에 추리소설처럼 막판에 범인이 뒤바뀌는 반전이나 트릭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물속에 반쯤 잠긴 채 남편의 시신 옆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피해 여성의 회상 같은 독백과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타인을 죽여야 자신이 자유로울 것으로 믿었을 뿐만 아니라 결국 그것을 실행에 옮겼을 정도로 타인에게 비밀을 밝히기를 극히 꺼리던 가해 여성의 넋두리 같은 독백이야말로 『검은 강(黑水)』에서 독자의 눈길을 지속해서 붙잡아 둘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이 두 여성의 심정을 대비적으로 재구성한 독백 때문에 『검은 강』은 감히 인간의 불완전함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이다. ─ 문명의 시대에서 ─ 사람은 왜 사람을 죽이는가? 왜 사람은 죽임을 당하는가? 영원히 풀 수 없을 것 같은 이 수수께끼에 대해 가해 여성과 피해 여성은 자신들의 인생으로써 답하고 있다. 한 사람은 죽음으로써 이미 답변을 완료했고, 또 한 사람은 사회와 영원히 격리되는 것으로서 답변을 대신했다.

결혼에 실패했음에도 남들 앞에서는 금실 좋은 부부처럼 행동했던 피해 여성과 드라마를 보며 행복한 미래를 다짐했던 가해 여성은 부유층과 하층민, 그리고 교수와 변두리 커피점 점장이라는 경제 • 사회적 계층으로도 대비된다. 얼핏 봐서는 서로 전혀 인연이 닿지 않을 것 같았던 이 두 사람은 또 다른 피해자인 교수의 남편을 매개 점으로 악연이 형성된다. 가해 여성과 교수 남편이 불륜 관계였는지는 검사의 주장대로 가해 여성의 진술을 제외하고는 입증할 만한 자료가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가해 여성과 피해 여성의 독백을 돌이켜보면 얼마든지 돌이킬 수 있는 지점이 있었다. 이것은 『살인의 고백(告白)』에서 마을 사람들을 잔인하게 살육한 구마타로 역시 마찬가지였다. 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지 물어보기에 앞서 무엇이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돌이킬 수 없는 지점으로까지 몰아붙이지를 먼저 물어봐야 하지는 않을까? 그것은 상대적 빈곤이라는 부의 불평등이 가져온 박탈감일까? 두 명의 피해자에게서 받은 치욕적인 대우가 남긴 모욕감일까? 아니면 트라우마가 일으킨 심리적 압박의 결과일까?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돌이킬 수 없는 검은 강을 건너게 하여 살인자로 만들었을까?

‘살의’는 살인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세 사람의 악연을 맺어낸 대만 사회는 응당 이 모든 질문에 답하도록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기에 저자 핑루는 사건을 재구성하는 모험에 뛰어들었다. 그렇다면 『검은 강(黑水)』은 온전한 답을 제시하는가? 이에 대한 내 대답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하고 싶다. 성의 없는 대답처럼 들리겠지만 이 소설은 추리소설이 아니다. 세상은 추리소설처럼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하게 나뉘는 것도 아니고, 동기 역시 몇 개의 문장으로 간단명료하게 이해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현실에서는 단서 몇 개만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명탐정도 없고, 명확한 목적의식으로 현란한 트릭을 선보이며 익스트림 스포츠라도 되는 살인을 즐기고 선전하는 사람도 없다. ─ 살인을 즐기는 연쇄살인범을 제외한다면 ─ 단지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그리 특별하지 않은 이유로 그저 그런 살인을 저지를 뿐이다.

자전이 안고 살았던 불행과 고통, 빈곤은 그녀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살의 역시 살인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렇지만 누구는 사람을 죽이고 누구는 그냥 참고 넘어간다. 층간 소음이 평범한 이웃을 살인자로 만들기도 하지만, 층간 소음에 시달리는 사람 모두 살인자가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크나큰 천운일지도 모른다. 살인은 기껏해야 인생에서 한 번 정도 맞닥트리게 되는 엄청난 불행일 수도, 아니면 엄청난 불운일 수도 있지만, 『검은 강』은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 그리고 살해당하는 사람이 결코 드라마틱하고 전율적인 ‘살인 사건’을 위해 태어난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부각함으로써 사람의 불완전한 인성과 그런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미성숙한 사회에 모종의 경고를 보내고 있는 셈이다. 다음 살인자는, 혹은 다음 피해자는 바로 당신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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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020

[책 리뷰] 우리를 악마로 둔갑시키는 상황의 힘 ~ 루시퍼 이펙트(필립 짐바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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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악마로 둔갑시키는 상황의 힘

Original Title: The Lucifer Effect: Understanding How Good People Turn Evil by Philip G. Zimbardo
SPE가 몇십 년이 지나도록 계속해서 사람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이 실험이 ‘성격의 변환’,착한 사람이 갑자기 상황의 힘에 대한 반응으로 악을 저지르는 교도관이나 병적으로 수동적인 희생자 모습의 수감자로 돌변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루시퍼 이펙트(The Lucifer Effect)』, p339)

당신은 ‘기본적 귀인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한편으로는 진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끝이 없을 것 같은 인류의 영원한 논쟁거리는 다름 아닌 ‘선과 악’이다. ‘선과 악이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존재론적 고찰부터 ‘왜 신은 악을 허용하는가?’라는 종교적 고찰, ‘선과 악의 경계를 구분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사회학적 고찰, 그리고 ‘선과 악은 사람의 타고난 본성인가?’ 하는 철학적 고찰, 그리고 사람은 착하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고 단지 이기적일 뿐이라는 실리적 고찰까지, 인류는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에 자신을 굴비처럼 엮어 왔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을 던져보는 것은 어떨까?

‘평범한 사람을 나쁜 길로 밀어붙이는 상황은 전혀 고려할 가치가 없는 것일까?’

이렇게 대놓고 질문을 던져놓고 보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법체제나 우리 사회는 악행을 전적으로 개인의 ‘기질적’ 문제로 돌리는 강한 심적 편향을 가지고 있다. 이른바 심리학에서 말하는 기본적 귀인 오류(fundamental attribution error)라고 부르는 것 말이다. 이것은 어떤 행동의 원인을 추론할 때 상황적인 요소나 외부 요소를 고려하지 않거나 과소평가하는 대신, 그 사람의 성격, 태도, 가치관 등과 같은 사람의 내부적 성향에서 원인을 찾는 경향을 말한다.

이렇게 글로 설명하면 우리 자신은 그렇게까지 비합리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을 것 같다. 더군다나 사람은 그 어떤 동물보다 합리적인 동물 아닌가? 그러나 당신은 지금까지 살면서 누군가의 사소한 실수나 잘못 한두 가지만으로 그 사람을 어떤 사람이라고 쉽게 결론 내렸던 적이 없었다고는 말 못 할 것이다. 직장이든 학교든 지각 몇 번만 해도 게으른 사람이라고 낙인찍히기는 쉽지만, 한번 그렇게 찍힌 낙인은 좀처럼 벗겨내기 어렵다. 그 사람이 정말 게으름을 피워서 지각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교통 환경이 매우 열악할 수도 있고 약을 먹이고 체온을 재는 등 이런저런 병증을 확인해야 할 환자를 돌보는 일도 있을 수 있다. 지각한 이유에는 이외에도 매우 다양한 원인이 있을 수 있지만,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을 싫어해서인지 (혹은 여기에도 ‘오컴의 면도날’이 작용하는 것일까?) 보통은 간단하고 편리하게 그 사람의 성격이 게으른 탓이라고 판결한다. ─ 만약 지각한 사람이 당신이라면 ─ 말 못 할 사연이 있는 당신으로서는 억울할 수도 있지만, 가는 말이 고아와 오는 말이 곱다는 말이 있다. 반대로 당신이 타인의 대수롭지 않은 언행으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하는 짧은 사고 과정도 이와 같기에 ─ 사람들이 한두 번 지각한 당신을 두고 게으름뱅이라고 놀린다 해도 ─ 그렇게 억울할 것은 없다.

이뿐만 아니다. 무단횡단하는 보행자, 과속 운전하는 운전자, 신호를 위반하는 운전자, 노약자석에 앉은 젊은이 등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마주치는 불쾌한 행동들이다. 분명 좋은 행동은 아니지만, ‘악인’으로 낙인찍어야 할 정도로 나쁜 행동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책임하게도 그 사람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 사람의 한두 가지 결점이나 실수만 보고 되먹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일쑤다. 이렇게 그 사람에 대해 잘못된 첫인상을 갖게 되면, 그 사람이 나에게 대단한 친절을 베풀지 않는 이상이 첫인상을 뒤집기는 축구 주심의 판정을 뒤집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다. 사람은 놀랍도록 복잡한 동물이지만,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는 과정만큼은 놀랍도록 단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단순한 동물이다.

‘썩은 상자’ 안의 ‘썩은 사과’

기본적 귀인 오류는 범죄 같은 악행을 바라보는 태도에도 고스란히 묻어나온다. 우리는 살인, 고문, 학살, 학대, 테러 등 인류를 경악시키고 분노케 하는 가공할만한 악행을 저지른 자에게 서슴없이 ‘악당’, ‘악마’라고 부를 준비가 되어 있다. 평소에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일지라도 이때만큼은 잠시 이성과 지성은 어딘가로 자취를 감춘다. ‘홀로코스트’나 ‘난징 대학살’ 등 인류사에 전례 없던 무자비한 악행을 책으로 읽거나 다큐멘터리 같은 영상으로 시청할 땐 끓는 냄비처럼 분노로 펄펄 끓어오른다. 감정이 새벽이슬처럼 순수한 사람은 비탄에 잠겨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우리는 이웃이나 인류의 악행을 대할 땐 자신도 모르게 ‘욱’하는 감정적인 판단이 앞장서고, 그 당면한 결과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가차 없이 ‘악당’으로 낙인찍어 버린다. 그들은 애초에 무시무시한 범죄 유전자를 품고 태어난 ‘악당’인 것이고, 썩어도 한참 썩은 사과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인 것이다. ET처럼 쭈글쭈글 못생긴 외계인 쳐다보듯, 혹은 사람을 잡아먹는 무시무시한 괴물을 쳐다보듯, 사람들은 ‘악당’을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흘낏흘낏 쳐다보며 선과 악의 경계를 확실하게 구분 지으려고 애쓴다. 그러면서 내심으로는 나 자신은 선의 세계에 있음을, 어떤 상황이 닥쳐도 자신만큼은 선의 가치를 지킬 수 있다고 자부한다. 그토록 당신은 정말 선량한 사람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사람은 보통 자신은 타인보다 좀 더 인간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하지만, 필립 짐바르도(Philip Zimbardo)의 유명한 사회심리학 실험인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SPE: Stanford Prison Experiment)은 그 모든 것이 우리만의 착각임을 실험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1971년 여름, 스탠퍼드 대학교 심리학과 건물 지하에 임시로 만들어진 교도소에서 진행된 이 모의 교도소 실험의 참가자들은 고작 닷새 만에 성적 수치심을 주는 학대 행위를 일으켰다. 고작 닷새 만이다. 수학여행보다 조금 긴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그들은 진짜 수감자가 되어버렸고, 진짜 교도관이 되어버렸다. 참가자들은 실험 시작 전 전문가들에 의해 진행된 육체와 정신 감정 결과에서 모두 정상임을 판정받은, 대학 이상의 학력과 중상층 이상의 경제력을 갖춘 가정에서 자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한마디로 참가자들은 실험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다. 교도관과 수감자라는 역할도 무작위로 배정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실험이 시작되자 놀랍게도 자신들이 맡은 역할에 메소드 연기를 하는 명배우처럼 빠르게 녹아 들어갔다. 그뿐만 아니라 이 실험을 계획하고 주관한 짐바르도 역시 단지 ‘실험’일뿐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매우 훌륭하고 진지하게 교도관 책임자 역할에 빠져들었다. 짐바르도는 수감자들이 탈옥할 수도 있다는 걱정과 불안감에 휩싸인 나머지 수감자들을 비어 있는 진짜 교도소로 옮기려고 경찰서와 협의까지 했다! 또한, 그는 갑자기 들이닥친 감옥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정신적으로 괴로워하는 수감자들을 관찰하며 수감자들의 나약한 기질을 들먹이지 않았던가! 실험 주체자인 그조차 어떤 일이 일어나든 무조건 기질을 탓하고 보는 사람들의 무책임함에 반기를 들고, 상황의 힘이 ─ 그 사람의 가치관이나 성격, 기질에 크게 상관없이 ─ 사람의 언행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매우 강력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이 모의 교도소 실험하고 있다는 현실을 잊었다. 이 사실은 짐바르도 역시 교도소 감독관 역할이라는 자신이 만든 시스템의 힘에 압도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교도관들의 학대와 갇혀 있다는 압박감을 못 견디고 심각한 우울증 증상을 보이는 수감자들도 나왔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 실험을 포기하고 밖으로 나갈 수 있었음에도 그러하지 않았다. 그들은 감옥 밖으로 나갈 수 있다면 보수도 포기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아무도 그것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이 실험은 교도관이나 수감자들은 ─ 그리고 실험 주체자이자 교도소 감독관인 짐바르도도 포함하여 ─ 교도소라는 ‘썩은 상자’와 그 ‘썩은 상자’를 운영하고 지지하는 시스템의 강력한 영향을 받기 전까지는 그 어느 쪽도 ‘썩은 사과’로 간주할 수 없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또한, 이 실험은 2004년 한 용감한 내부고발자의 결단으로 폭로된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에서 일어난 학대 사건으로 확장 적용될 수 있다.

대부분이 결백한 이라크인으로 추정되지만, 설령 그들이 죄를 지은 범죄자라고 해도 수감자들에 대한 미군의 고문과 학대 행위는 절대 용납할 수 없고 국제법에 위반되는 반인륜적 행위다. 그런 일이 21세기에, 그것도 자칭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국가의 보호 아래 벌어졌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지만, 미군들이 자신들의 학대 행위를 찍은 사진에는 그 시간을 즐기는 듯한, 마치 유원지에 놀러 간 사람들이 기념 촬영하듯 미소가 꽃처럼 활짝 피어 있어 더욱 충격적이다. 이 충격적인 사진을 보면 그 누구도 그들이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일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뿐더러, 그런 상상을 한다는 것 자체를 인류와 우리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서 매우 불쾌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는 이 ‘7인의 썩은 사과’를 가리키며 단호하게 장담할 것이다. 아무리 근무 환경이 열악하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큼은 저 같은 상황에서 학대나 고문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그것 아는가? 그런 근거 없는 믿음을 고수하는 것은 상황의 힘에 충분한 경계와 주의를 기울이지 않도록 우리를 내몰면서 그 결과 우리 자신을 위험에 빠뜨린다는 것을. 또한, 그 ‘7인의 썩은 사과’도 군인이 아니었을 때 이와 비슷한 사건을 접했더라면 당신과 똑같은 생각을 했었을 것이라고 감히 장담할 수 있다.

악행보다 더 무서운 ‘악의 평범성’

애초부터 ‘썩은 사과’는 없었다. 다만, 신선한 사과를 썩게 하는 ‘썩은 상자’만이 존재할 뿐이다. 선량하고 평범한 사람을 악의 길로 내모는 것은 그 사람의 타고난 ─ 만약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 범죄 유전자 때문도 아니고, 그 사람의 성격이나 기질 때문도 아니다. 신선한 사과를 고문과 학대를 일삼고 즐기는 ‘썩은 사과’로 변질시키는 것은 강력한 상황의 힘과 그 상황의 힘을 연출하고 조장하는 시스템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심리적 과정을 『루시퍼 이펙트(The Lucifer Effect)』라고 할 수 있겠다. 강력한 상황의 힘이 그 누구라도 악의 길로 내몰 수 있다면, 선과 악의 경계는 우리의 바람만큼 그렇게 명확한 것은 아니다. 그런 만큼 당신이 제아무리 확신하고 자신만만하더라도 나는 당신이 저 ‘7인의 썩은 사과’가 근무했던 아부그라이브 수용소라는, ─ 수감자나, 그 수감자를 감시하는 군인 모두에게 ─ 가혹하고 혼란스럽고 통제되지 않는 환경에서 군인이자 교도관으로서 근무하게 된다면, 지금의 신선함을 유지하며 썩지 않는다는 것에 돈을 걸기보다는 그 반대에 돈을 걸겠다. 그것은 당신이 못 미덥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미치지 않고 못 배기는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 자신의 권위에 절대적으로 복종할 수밖에 없는 먹잇감이 존재하고, 시스템이 가해자에게 익명성을 부여하는 탈개인화와 희생자의 인간성을 박탈하는 비인간화를 보장했을 때, 과연 그 누가 이 손쉬운 먹잇감을 그냥 놔둘 수 있겠는가? 잘해야 동료의 악행에 가담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는 수준 정도에서 머무르리라. 하지만, 이런 ‘행동하지 않는 악’은 결국 ‘썩은 사과’를 양산해내는 시스템을 마지못해 인정하는 꼴이나 다름없다. ‘행동하지 않는 악’은 악행에는 직접 가담하지는 않지만, 그 악행이 악화일로로 치닫는 것을 수수방관한다는 점에서 선행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독일 나치스의 친위대 중령이자 제2차 세계 대전 중 유대인을 대량 학살한 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의 재판을 관찰하고서 가히 충격적인 개념을 내놓았는데, 그것은 바로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다. 이 말은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예외적인 사람, 괴물, 도착적인 사디스트로 보아서는 안 되며, 아이히만과 그와 비슷한 다른 사람들의 평범한 모습 그대로를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인식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이 모든 사회에 숨어 있는 만연한 위험이란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상황과 시스템의 힘을 과소평가하거나 간과한다면 우리 중 누구라도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믿기지 않게도 아이히만을 검사한 6명의 심리학자 모두 그가 ‘정상’이라고 진단했다. 그가 제복을 입지 않았을 땐,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에 참여한 대학생들처럼 좋은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아이히만뿐만 아니라 학살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무고한 사람을 학살한 두 손으로 집에서는 아내와 딸을 어루만지고, 무고한 사람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입으로 가족들과는 친근한, 연인과는 달콤한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류가 저지른 온갖 만행에 가담한 사람들은 그 상황을 벗어나면 우리처럼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곧 깨닫고는 한 번 더 소름이 돋는다. 이것은 난징 대학살을 자행한 일본 군인도, 한국 전쟁 시기와 제주 4 • 3 사건 때 일어난 갖가지 만행에 참가한 사람들도, 그런 거지 같은 상황만 맞닥트리지 않았다면, 그래서 좀 더 좋은 시기에 태어났더라면, 모두가 좋은 사람들, 아니 최소한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로 남았을 가능성이 매우 컸을 것이라는 말이다.

악행의 숨은 연결고리

내가 얼마 전에 읽은 핑루(平路)의 『검은 강(黑水)』과 마치다 고(町田康)의 『살인의 고백(告白)』은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은 돌연변이 같은 괴물이 아니라 우리처럼 평범할 사람일 수도 있음을 명확하게 내비쳤다. 『루시퍼 이펙트(The Lucifer Effect)』 역시 사람은 상황과 환경의 힘에 좌지우지될 수 있음을 강력하게 경고한다. 재수 없게 겪게 된 층간 소음이 평범한 이웃을 범죄자로 만든 것처럼, 우리가 아직 죄를 짓지 않은 것은 어쩌면 그런 상황과 마주치지 않은 행운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사람이 상황의 강력한 힘에 지배될 수 있다는 이 책의 연구가 범죄를 두둔하고자 나온 것은 절대 아니다. 평소에는 얌전하고 착하게만 보였던 사람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감쪽같이 살인 기계로 둔갑하고, 국가나 사회는 적군에 대한 살인을 장려한다. 이런 경우처럼 사람이 저지르는 악행을 제대로 인식하고자 한다면, 그 악행이 일어난 전후의 심리적 상황과 그 상황을 유발한 시스템의 힘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한번 작동하기 시작하면 자신을 방어하고 유지하려는 자생력을 갖추기도 하는 시스템과 그 시스템에서 파생하는 상황의 힘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서는 ‘악의 평범성’을 절대 이해할 수 없으며, ‘악의 평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악행의 악순환을 끊을 수도 없다. ‘악의 평범성’을 인정한다면, 그래서 우리 누구라도 상황의 힘의 지배되어 자신의 신념을 배반하고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한다면, 그럴 수 있을 때만 우리는 상황의 힘을 더는 간과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만 우리는 악행의 이면 속에 숨은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다.

우리의 불편한 진실 중 하나는 문명이 발달하면서 교육 수준도 높아지고 경제적 상황도 나아졌음에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각종 범죄로 몸살을 앓는다는 것이다. 분명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우리는 잘 먹고 잘살 뿐만 아니라 부유하다. 그럴 뿐만 아니라 과거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과학과 기술의 혜택을 받으며 편리함과 안락함까지 만끽하고 있다. 그런데도 왜 범죄는 소멸하지 않는 것일까? 이것은 단순히 사람의 끝없는 탐욕과 지치지 않는 이기심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를 범죄자로 밀어붙이는 상황의 강력한 힘과 그 이면에 숨어 마리오네트처럼 상황을 조정하는 시스템의 힘을 우리가 너무 얕보고 있기 때문일까?

1%의 악당, 1%의 영웅, 그리고 나머지 98%의 중립적인 사람들

때론 잘 쓰인 교양 도서가 웬만한 추리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하게 읽힐 때가 있는데, 바로 『루시퍼 이펙트(The Lucifer Effect)』가 그런 책이다. 특히 앞에 잠깐 언급한 두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내 생각, 즉 ‘사람이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막연한 의구심을 시원하게 퍼붓는 소나기처럼 해갈해주는 명쾌한 해설이 담뿍 담겨 있어 읽으면서 신명이 나기까지 했다. 또한, 다양하게 소개되는 사회심리학 실험 결과들은 우리가 그동안 인지하고 있었던 사람의 본성에 대한 믿음을 단숨에 깨고도 남을 만하다. 교묘하게 조정된 권위와 상황의 힘으로 평범한 사람을 너무나도 쉽게 악행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는 놀라운 실험 결과들은 우리에게 과연 선한 마음이 있기라도 한 것인지 의심케 할 정도로 충격적이다. 그럼에도 일말의 위안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상황의 힘이라고 해서 반드시 악행의 길로만 안내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세월호 같은 사고 속에서 평범한 영웅들을 발견하게 된다. 즉, 사람은 상황에 따라 악인이 될 수도 있지만, 그 반대로 영웅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과 시스템의 힘이 사람의 본성에 미치는 영향을 제대로 반영한 영화가 있으니 바로 「퍼지(The Purge)」다. 영화에서 ‘퍼지의 날’에는 살인을 포함한 모든 범죄가 허용된다. ‘퍼지’가 실시되는 날에는 대다수가 집에 은둔하며 안전을 기하지만, 또 다른 다수는 조직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살인과 폭력의 향유를 마음껏 누린다. 그리고 현실에서도 그러하듯,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 중에 시스템에 대항하는 사람은 소수이며 자신의 목숨을 걸고 타인의 생명을 지키려는 영웅 역시 소수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이 영화는 그저 자극적이고 통쾌한 액션이 볼만한 그저 그런 영화로 생각되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영화적 상황이 사회심리학적으로 꽤 타당성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즉 ‘퍼지’ 같은 상황이 실제로 발생한다면 사람들이 영화에서처럼 얼마든지 폭력적으로 급변할 수 있다는 불량한 믿음 쪽으로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이 기운다.

같은 상황에서도 어떤 사람은 악행을 저지르고, 어떤 사람은 ‘행동하지 않는 악’으로 일관하며, 어떤 사람은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상황과 그 상황을 유발한 시스템에 대항한다. 우리는 무엇이 그런 차이점을 만들어 내는지 아직 모른다. 그것이야말로 그 사람의 타고난 천성일 수도 있고, 성격이나 기질일 수도 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비록 그 사람이 그 상황에서 악행을 저질렀다 해도 만약 그 사람이 그 상황과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악인으로 낙인찍히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아직 범죄자가 되지 않은 것은 범죄를 일으킬 수 있는 불행한 상황과 아직 맞닥트리지 않은 행운 덕분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교도소에 갇힌 수많은 죄수가 범죄를 일으켰던 상황을 비껴갈 수 있었더라면, 여전히 평범한 사람으로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많은 가능성과 자유와 구속의 갈림길을 결정하는, 또한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기도 하는 상황의 강력한 힘을 이제라도 알게 되어 천만다행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천만다행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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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2020

[책 리뷰] 사회는 ‘형제 투쟁’의 역사 ~ 타고난 반항아(프랭크 설로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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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ginal Title: Born to Rebel: Birth Order, Family Dynamics and Creative Lives by Frank J. Sulloway
출생 순서는 세계를 이해하는 상이한 전략을 조장한다. 다윈의 진화가 다채롭고 예측 불가능한 환경에서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대다수의 종에서 폭넓은 다양성을 장려하는 것처럼 인간 가족 내부의 관계도 개체 발생적으로 이 과정을 되풀이한다. (『타고난 반항아』 , p461)

사회는 계급 투쟁의 역사가 아니라 형제 투쟁의 역사다!

누군가는 혁명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진보적인 후보자에게 표를 던지면서 기성 체제에 반항적인 태도로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혁명에 반동하는 데 목숨을 바치고, 보수적인 후보자에게 표를 던지면서 기성 체제에 순종적인 삶을 살아간다. 굳이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더라도 보통은 진보와 보수, 혁명과 반동, 반항과 순종을 가르는 근본적인 이유를 사회 • 경제 계급에서 찾으려고 한다. 공산당 선언은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도 지금까지 여러 책을 읽어오면서 사회 • 경제 계급의 대립과 갈등이 역사 발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별다른 의혹을 품지는 않았다. 내가 가진 약간의 반사회적인 경향이나 염세적이고 이단적인 면도 사회 • 경제적인 내 위치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은연중에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많은 사회적 문제의 잠재적 원인으로 여겨져 왔던 계급 의식이 혁명과 반동을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한 사람이 자신의 삶에서 혁명적인 삶을 선택하거나 반동적인 삶을 선택하는 것은 계급 의식이 싹트기 훨씬 전인 유년기에 발달된 성격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그 성격은 바로 출생 순서에 따른 형제간의 갈등과 대립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프랭크 설로웨이(Frank J. Sulloway)의 『타고난 반항아: 출생 순서, 가족 관계 그리고 창조성(Born to Rebel: Birth Order, Family Dynamics, and Creative Lives)』은 개인들이 보이는 사회적 태도의 차이 대부분은 가족 내부에서 발생하며, 그중에서도 출생 순서야말로 개인들의 개념적 선호와 성격을 알려 주는 훌륭한 예보라고 말한다. 형제들의 출생 순서에 따른 생존 경쟁과 이에 뒤따르는 생존 전략이 진보와 보수, 혁명과 반동, 반항과 순종을 가르는 개인의 성격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진화심리학적인 면에서 볼 때는 지금까지의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가 아니라 형제 투쟁의 역사라는 말이 된다.

즉, 다윈주의 관점에서 볼 때 성격은 개인이 유년기를 보내면서 형제간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개발하는 전략이며, 이것이 바로 형제 전략 이론이다. 이에 따르면, 역사의 원동력은 마르크스의 주장처럼 계급 갈등이 아니라 형제 갈등이다. 형제들은 한 부모를 독차지하고자 다른 부모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 자식을 향한 ─ 한정된 투자와 ─ 형제가 사용할 수 있는 ─ 자원을 놓고 형제와 대립하고 투쟁하는 것이기에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개념도 당연히 무력화될 수밖에 없다.

형제 투쟁이 ‘타고난 반항아’를 만든다!

그렇다면 내가 가진 반항적이고 이단적인 성향의 근본 원인은 막내라는 가족 내 지위에서 찾아야 하는 셈이다. ─ 형제 중에서 장자가 아니라면 대부분이 공감할법한 ─ 부모의 불공한 자원 분배가 자신도 모르게 권위에 대한 존경심을 훼손하고, 나아가 혁명적 성격의 토대가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성경 최초의 살인이 형제 살인이었던 이유도 진화심리학적인 면에서 충분히 이해할만한 이야기다. 또한, 군주나 왕, 그리고 귀족들이 보수적인 면이 많은 이유도 장자 계승으로 설명할 수 있다.

부모의 관심과 자원을 거의 독차지할 가능성이 큰 첫째들은 부모를 원망할 일이 없다. 부모의 총애를 받는 이들은 부모를 모방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권위, 법, 질서의 중요성을 배우게 된다. 형제 중에서 가장 많은 자원과 투자를 얻어낸 이들은 응당 지켜야 할 것도 많게 된다. 새로운 것이나 급진적인 변화에 과감히 도전하기에는 잃을 것이 많다. 고로 이들의 성격은 보수적이고 권위적으로 발전할 확률이 높다. 반면에 뒷순위(후순위) 출생자들은 이미 자신들보다 지위도 확고하고, 덩치도 큰 첫째들을 이기려면 그들과 다른 길을 선택하며 다양성을 극대화하는 길이 최선이다. 그래서 뒷순위 출생자들은 경험과 지식에 대한 개방성과 융통성이 높다. 경험과 지식에 대한 개방성과 융통성이 높기에 여행도 자주 하고 새로운 사상이나 학문도 적극적으로, 그리고 첫째들보다 매우 빠르게 받아들인다. 고로 이런 뒷순위 출생자들에게서 ‘타고난 반항아’가 나올 확률이 매우 높다.

참고로 『타고난 반항아』 제시한 통계 자료를 살펴보면, 급진적 이데올로기 혁명에서 뒷순위 출생자들이 이단적 대안을 지지할 확률은 첫째들보다 4.8배 더 높았다. 기술적 혁명에서는 뒷순위 출생자들이 첫째들보다 2.2배 더 높았다. 급진적 혁명의 초기 단계에서 뒷순위 출생자들이 이단적 관점을 채택할 확률은 첫째들보다 5~15배 더 높았다. 기술적 혁명 과정에서 뒷순위 출생자들의 지지 가능성은 첫째들보다 2~3배 더 높았다. 확실히 첫째들은 반동적 혁신에 이끌렸다. 지난 2세기 동안 미국의 민주당 출신 대통령들은 뒷순위 출생자들을 대법관으로 지명하는 시종일관한 경향을 보여주었으며, 반면에 닉슨, 포드, 레이건, 부시 이 네 명의 공화당 출신 대통령들은 10번의 지명 기회를 통해 전부 여섯 명의 첫째를 연방 대법원에 투입했다. 정말이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 이론에 비추어보면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막내라는 사실은 참으로 미스터리다. 만약 나머지 형제들이(특히 부모나 첫째가) 진보적이라면 말이 되지만 말이다).

세상에 우연은 없다는 점에서 이러한 통계가 시사하는 바를 그냥 간과한다는 것은 지식과 학문에 대한 무지막지한 불경이다. 생각하고 고뇌하는 사람이기를 포기한 좀비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특히 프랭크 설로웨이의 발견은 사람의 행동 발달과 성격의 기원을 연구하는 여러 학문에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사회적 • 정치적 • 경제적 대립과 갈등의 원인을 근원적으로 설명하려는 의도에서 다분히 남발된 경향이 있었던 ‘사회 계급’이라는 단어는 이제 그 역량이 한껏 퇴색된 느낌이다. 조만간 사회과학 분야에 ‘형제 계급’, ‘형제 대립’이라는 말이 유행할 날도 올지 모르겠다.

사람의 성격을 결정 짓는 형제 투쟁

한마디로 자라는 아이들은 가정에서 각자의 지위를 구축하려고 노력하면서 일종의 ‘적응 방산’을 경험하는 셈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맞닥트리는 생존 경쟁의 상대가 다름 아닌 형제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생존 경쟁의 최종 결과로써 성격이 형성된다고 하니 참말로 충격적이면서도 뭔가 확 깨는 기분이다. 이런 양상은 계급, 국적, 성별, 시대를 초월해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고 하니 당신이나 당신이 아는 사람들의 출생 순서를 고려하여 그들의 진보 • 보수 성향을 판단해보면 웬만한 점쟁이는 얼굴도 들이밀지 못할 만큼 잘 들어맞을 것이다.

당신이 나처럼 하나 이상의 형제를 가진 사람이라면, 『타고난 반항아』에서 역설하는 ‘형제 전략 이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형제 전략 이론에 따르면, 얼핏 봐선 좀스럽고 치졸해 보이는 형제간의 먹는 것, 입는 것, 배우는 것, 가지고 노는 것 등을 두고 싸우는 것이 단순히 아이들의 치기 어린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한정된 자원을 놓고 다투는 엄연한 생존 경쟁의 한 장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경쟁에서 어떠한 전략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성격이 좌지우지되고 더 나아가 진보와 보수, 혁명과 반동, 반항과 순종이라는 사회적 성향까지 결정된다. 생소하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겠지만, 앞으로 사람의 행동과 성격을 깊이 이해하고 그 뿌리를 밝히는 데 있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이론이다. 갓난아기들 사이의 보잘것없는 다툼과 눈치 싸움이 적응 방산이라는 진화론적인 발달을 위한 출발점이라니 놀랍기 짝이 없다.

물론 한 사람의 성격이나 사회적 성향이 완성되기까지는 출생 순서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 간이 갈등과 대립, 형제의 수, 성별, 형제들의 나이 격차, 부모 사망 시의 나이, 사회 계급, 기질 등이 상호 복잡하게 작용하는 창발적인 특성을 수반하기에 출생 순서만 가지고 한 사람의 성향을 예보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일 수 있다. 그러나 20여 년간의 연구 업적이 축적된 『타고난 반항아』는 출생 순서만 가지고도 한 사람의 성격이나 성향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음을 수많은 역사적 인물을 통해서 충분히 예증하고 있다.

사실 이 책을 선택한 것은 두 권의 스티브 잡스 전기를 읽고 난 영향이 컸다. 스티브 잡스 같은 반항아는 어떻게 해서 탄생했을까? 타고난 것일까? 아니면 성장하면서 만들어지는 것일까? 그런데 하필 프랭크 설로웨이조차 잡스처럼 외아들이나 입양아 같은 경우는 출생 순서만으로는 성격이나 성향을 파악하기가 어렵다고 하니, 나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다. 출생 순서로만 보면 스티브 잡스는 기능적 첫째이니 보수적이고 지배적이고 고집스러운 경향이 강해야 했다. 그는 고집스럽고 다분히 지배적이었지만, 보수적인지까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스티브 잡스의 반항아 기질은 어디서 온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그 자신이 인정했듯, 입양 사실을 어렸을 때 알게 되면서 얻은 트라우마일 수도 있다. 프랭크 설로웨이는 비록 첫째일지라도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은 반항적인 성격을 키울 수 있다고 말한다.

형제니까 그렇게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성격뿐만 아니라 습관까지도 진화론적으로 설명 가능한 것이 무궁무진하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는 식습관이 있다. 본성과 양육에서 식습관은 양육으로 결정되는 대표적인 요소 중 하나다. 부모의 총애를 받고 자라는 첫째는 먹고 싶은 것만 골라 먹을 수 있기에 편식할 가능성이 크다. 반면에 그 밑의 형제는 첫째와 똑같이 편식하게 되면 부모로부터 눈총을 받거나 자칫 잘못하다간 제대로 먹지 못할 수가 있다. 생존 경쟁에서, 그것도 한창 자라나는 유년기에 먹는 것이 소홀하다면 성장하기도 전에 도태할 수도 있는 아주 심각한 문제다. 고로 이들은 아무거나 잘 먹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내 형이 편식이 아주 심하지만 나는 사람이 먹는 것이라면 아무거나 다 먹을 수 있다는 호기로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다식한다는 말은 아니다. 사실 많이 먹고 다 소화할 수 있다면 오죽 좋으냐.

또한, 형제 전략 이론은 그동안 혁명 시기의 비극적인 가족사 정도로만 치부됐던, 같은 울타리에서 자랐음에도 누구는 혁명을 지지하고, 누구는 혁명에 반동하는 등의 형제들 간에 보이는 유별난 차이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말하지 않던가? 형제인데 어떻게 그렇게 다를 수가 있냐고? 사실은 형제니까 그렇게 다를 수밖에 없고, 그렇게 다르기 때문에 서로 생존할 수 있었던 것임을 우리는 ‘형제’로 살아오면서도 몰랐던 것이다!

한 사람의 성격이나 성향조차 결국 진화의 결과라니, 당신은 믿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 책이 예증하는 수많은 사례와 엄밀한 과학적 통계 자료를 보면 믿지 않을 수가 없다. 자신의 가치관이나 경험과 대립하는 새로운 이론이나 사상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 『타고난 반항아』는 말한다. 만약 형제 중 첫째라면 지지하지 않을 공산이 크고, 뒷순위 출생자라면 지지할 공산이 크다고. 나는 당연히 지지한다. 왜냐하면, 나는 막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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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020

[책 리뷰] ‘분노 범죄’, 그것은 오늘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 살인의 고백(마치다 고)

Kokuha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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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범죄’, 그것은 오늘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Original Title: 告白 by 町田康

아무런 말도 없었다.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눈물만 흐를 뿐이었다.

구마타로의 입에서 한숨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어.”

총소리가 메아리쳤다.

흰 연기가 푸른 하늘로 솟아오르다 이내 사라졌다. (『살인의 고백(告白)』 下권, p462)

‘평범한 농사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극히 평범한 사람도 아닌

우선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살인의 고백(告白)』 뒤표지에 실린 간략한 소개글 중 기도 구마타로가 ‘평범한 농사꾼’이라고 설명한 대목이다. 구마타로가 ‘평범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또래들이 부모의 농사일을 조금씩 거들기 시작할 때부터 요즘 일본인들이 에어 기타를 연주하듯 피리도 없이 피리 부는 시늉을 하며 허공을 향해 뱃구레를 들썩이며 농사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위인이다. 그는 농사꾼의 자식이지만, 밭도 갈 줄 모를 뿐만 아니라 소 발톱을 잘라주는 일을 일컫는 ‘요조코’라는 말의 의미조차 모른다. 그는 소년티를 벗자마자 이때다 싶어 서둘러 주색잡기 흠뻑 빠져든 허랑방탕한 남자다.

내가 볼 때 체면에 살고 허세에 죽는 협객 망상에 지독히도 빠진 구마타로를 ‘평범한 농사꾼’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인생 아무렇게나 사는 괴짜에게 ‘평범한 농사꾼’이라니 당치도 않은 말이다. 그렇다고 그에게 뭔가 영웅적인 면이 있거나, 아니면 그가 남다른 의협심을 품은 진짜 협객이라는 말은 아니다. 즉, 구마타로가 농사꾼의 아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농사일은 전혀 못 하고 일찌감치 주색잡기에 빠져 허랑방탕한 세월을 보내면서도, 이 모든 비난을 얼버무리고자 간간이 협객인 척 행세하는, 대단치는 않지만, 그렇다고 지극히 평범한 사람도 아닌, 그런 별난 사람이다. 저승에서든, 지옥에서든, 아니면 천국에서든 아무튼 어딘가에서 자신을 ‘평범한 농사꾼’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구마타로가 듣는다면 기뻐할지 화를 낼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가 볼 때는 그렇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책 소개에 구마타로를 ‘평범한 농사꾼’이라고 굳이 지칭한 이유는 아마도 홍보 효과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이것은 일도 하지 않는 주색잡기에 빠진 괴짜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말보다는 ‘평범한 농사꾼’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말이 더 극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리라. 이 말은 마치 당신이나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언제 어느 때고 여차하면 살인마로 둔갑할 수 있다는, 무지막지하면서도 자극적인 연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 지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요즘 유행하는 ‘분노 살인’이라는 주제와도 꽤 상통하기에 꽤 자극적이다.

인간은 왜 인간을 죽이는가?

그렇지만 뒤표지에 실린 소개글 중 ‘인간은 왜 인간을 죽이는가?’라는 화두를 언급한 것은 매우 지당한 표현이다. 왜 그 사람을 죽였나? 그 사람을 죽이고 싶었기 때문에 죽였다. 왜 그 사람을 죽이고 싶었나? 이에 대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살인 동기는, 대부분 분노, 원한, 질투, 증오, 복수, 쾌락, 애증, 사랑, 탐욕, 배신 혹은, 이들 중 두 가지 이상이 서로 얽히고설켜 빚어낸 다소 복잡한 감정들로 대부분은 설명할 수 있다. 하룻밤 만에 마을 사람 10명을 무참히 죽인 구마타로와 그의 의동생 다니 야고로의 살해 동기도 앞서 언급한 감정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즉 겉으로 드러난 동기 면에서는 보통의 살인과 크게 다른 점은 없다. 다만, 그들은 하룻밤 만에 사람을 많이 죽였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만 하다.

그렇다면 그것이 끝인가? 사람이 살다 보면 여러 사람에게 이리저리 치이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이 타인을 내치기도 한다. 한정된 지역에 한정된 자원을 사이에 두고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살다 보면 마찰과 충돌이 일어나는 것은 일상다반사다(그래서 누군가는 사람의 삶을 ‘갈등’이라는 한 단어로 집약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다 보면 크든 작든 분노와 원한을 품기도 하고, 자신도 모르게 혹은 의도적으로 타인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거나, 타인에게 원한을 사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때마다 살인이 일어난다면 과연 세상에 몇 사람이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 같아도 하루에도 여러 명을 죽어야 했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여러 명에게 죽임을 당했을 수도 있다. 사람이 섣불리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 이유에는 법의 처벌이 두려워서, 사람을 죽일 만큼 용기가 없거나 대범하지 못해서, 사람들의 비난이 두려워서, 보복이 두려워서, 뭔가 잃을 것이 두려워서 등 나름 합리적인 설명을 둘러댈 수 있지만, 이런 것들을 고려하기에 앞서 우선 적으로 작용하는 뭔가가 우리가 살인을 저지르는 것을 댐처럼 막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까?

만약 어떠한 일로 자기도 모르게 눈깔이 뒤집힐 정도로 분노가 확 치밀어오르면서 ‘저 새끼, 확 죽여버릴까!’ 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머리를 강타하고, 이러한 분노가 순간적으로 나의 모든 것을 압도하려는 순간, 앞으로 남은 인생의 모든 것이 걸린 그 순간에 앞서 언급한 이유를 차근차근 심사숙고하며 살인을 할지 말지 결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우리가 살인자가 되는 것을 막는가? 그것은 도덕이라고 불릴 수도 있고, 양심이라고 불릴 수도 있으며, 정의와 관계되는 일일 수도 있다. 무엇으로 불리든 간에 위기일발의 순간에 무언가 견고한 것이 우리의 육체와 정신을 다잡는 안전장치 역할을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살인은 나쁜 일이니, 좋은 일이니 라는 것을 떠나서 그 안전장치가 대부분 사람에게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기에 우리는 겉으로나마 꽤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가끔은 이런 안전장치가 쓸모없을 때가 있다. 결국, 사람은 사람을 죽이게 된다는 말이다. 갑자기 불어난 물 때문에 급격하게 무너지는 댐처럼 그런 일이 부지불식 간에 일어난다면 우발적인 살인이 될 가능성이 크다. 반면에 조금씩 조금씩 불어나는 물에 저항하던 댐에 금이 가기 시작하고, 그 틈새로 물이 새다가 결국 무너져 내린다면 계획적인 살인이 될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구마타로의 계획적인 살인은 그에게 쌓이고 쌓인 게 참으로 많았다는 이야기다.

과도한 사색에서 비롯한 허세, 체면, 그리고 망상

여기서 우리는 무엇이 그토록 집요하게 구마타로를 살인자로 내몰았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신에게 한번 물어보자. 당신은 어떨 때 계획적인 살인을 망상 속에서 실천으로 옮길 수 있겠는가? 원한이든, 증오든, 분노든 이런 것들이 얼마만큼이나 쌓이고 쌓여야 당신을 지탱하는 댐이 무너지겠는가? 물론 사람마다 댐의 강도와 높이도 다르다. 댐의 강도는 강하지만 높이가 낮다면 일시적으로 불어난 물살에 범람 될 가능성이 크기에 살인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우발적인 살인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반면에 강도는 약하지만, 높이가 높은 댐을 가지고 있다면 일시적으로 불어난 물살은 견딜 수 있겠지만, 지속해서 불어나는 수압을 견디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속해서 늘어나는 수압에 댐이 금이 가고 금이 간 곳에서 물이 새고 있다는 것은 당사자는 엄청난 번뇌와 고통에 휩싸여 있다는 말이다.

사회생활로부터 파생되는 갖가지 마찰, 충돌, 그리고 압박, 그리고 그러한 외압으로부터 일어난 내면의 갈등이 우리의 댐을 훼손한다고 볼 때, 허랑방탕한 건달 생활로 일관하던 구마타로가 마을 사람들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으면서 무시당하는 일, 순진한 바보처럼 타인의 의도적인 거짓말에 농락당한 일, 사기를 당해 돈을 뜯긴 일, 아내가 평소에 자신을 형처럼 따르던 남자와 바람난 일은 사회로부터 받은 외압이다. 반면에 이런 일들로 마음의 상처를 받고, 분노하고, 의기소침해지고, 자괴감에 빠지는 일은 외압으로부터 기인한 내면의 갈등이다.

그런데 구마타로는 ‘평범한 농사꾼’의 아들답지 않게 매우 사변적이고 사색적이다. 그렇다고 생각의 깊이가 중후하다거나 사고가 고상한 것은 아니다. 이치에 맞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그는 생각이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그의 머릿속은 마치 쉴 틈 없이 쓰레기장으로 꾸역꾸역 밀려오는 도시의 온갖 쓰레기처럼 잡다하고 쓸데없는 생각과 몽상들로 가득 찼다.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못할 정도로 그는 생각이 많다. 그래서 간단한 일상 대화조차 매끄럽게 이어나가질 못해 곤란하다. 로봇처럼 정해진 일과대로 일하는 농사꾼의 단순함과 성실함이 미덕인 시대에 머릿속이 잡다한 생각으로 가득 찬 것은 독이나 다름없다. 이것이 구마타로 인생에 있어서 불행의 시작이었다면, 여기에 허세와 체면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웃기지도 않는 협객 망상이 더해져 비극의 완성을 위한 삼위일체가 완성되었다.

자기가 손해 볼 것을 뻔히 알면서도 체면 때문에 거절을 못 한다. 한두 번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것이 계속 누적되고 버릇이 되면 멍청이 취급당하기 딱 좋다. 사람들로부터 멍청이 취급당하는 그 자신은 자신이 한 짓은 생각 못 하고 사람들이 자기를 배척하고 멍청이 취급한다고 증오한다. 시간으로 해소되는 증오심보다 쌓이는 증오심이 더 많다면, 그 사람의 정신은 피폐해지기에 십상이다. 댐에 균열이 생긴다. 한편, 자신을 툭하면 무시하고 속여 먹으려고 드는 원수 같은 놈에게 아량을 베풀어 상대를 관대함으로 굴복시키겠다는 허세는 표면적으로는 그럴듯해 보이기는 하나 진짜 악질에게 걸리면 바보천치라는 비웃음을 사기에 딱 좋다.

사정이 이러하니 자기만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쓸쓸하다. 쓸쓸함을 달래고자 술과 노름에 더 빠져들고,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고자 더욱더 폭력적인 행동을 일삼는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구마타로는 결국 자승자박의 본보기가 되고 말았다.

살인을 일으키게 된 심리를 파고들다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가와치 10인 살해사건(河内十人斬り)’의 원인은 ‘금전 · 교제 문제’라고 표기되어 있다. 사실 모든 살인 사건이 혼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다는 명백한 점을 고려하면 (자살이 아닌 이상 죽는 사람 한 사람, 죽이는 사람 한 사람, 이렇게 최소한 두 사람이 필요하다) 사건의 원인을 ‘교제 문제’라고 표기한 것은 역시 일본인다운 교묘한 발상이다. 그러나 마치다 고(町田康)는 참혹한 결과치곤 너무나 간결한 사건 설명이 마뜩잖았는지 이미 오래전에 끝난 사건을 다시 들고 일어섰다. 그렇다고 그가 사건을 재수사한 것은 아니고 결과만 덩그러니 남은 사건을 ‘기승전결’과 ‘육하원칙’에 충실한 온전한 이야기로 재구성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역사이며, 그 사람의 말로가 무자비한 살인마였다는 점에서 ‘살인’의 역사이기도 하다. 바로 여기서 책 뒤표지의 실린 ‘작가는 살인의 역사를 철저히 고증하며 그 심리를 파고든다’라는 말의 진짜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마치다 고(町田康)는 ‘교제 문제’라는 모호함이 의미하는 모든 것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여기에 단 한 줄의 사실만 가지고도 오롯한 한 권의 책을 완성할 수 있는 왕성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구마타로가 왜 ‘교제 문제’를 겪어야 했는지를 밝혀낸다. 결말만 놓고 보면 범죄소설이지만, 그 범죄가 완성되기까지의 기나긴 여정은 심리소설이라고 불리어도 좋을 만큼 구마타로의 내면을 잠식한 사변의 흐름에 대한 징그러울 정도의 천착은 도스토옙스키를 연상시킬 정도로 탁월하다. 또한, 진공청소기 같은 대단한 흡입력을 발휘하는 군더더기 없는 텍스트 또한 나쁘지 않다. 덕분에 독자는 마치 김용의 무협 소설을 읽듯 너무나도 안일하게 소설 속으로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충고하건대, 『살인의 고백(告白)』 역시 김용의 무협 소설처럼 독자의 감정을 심히 농락하지만, 다만 그 감정의 기복이 ‘애락(哀樂)’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로 분노 조절 장애가 있는 독자는 책이 파손되지 않도록 반드시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 책이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이라면 아예 두 팔을 단단히 묶고 책을 보도록 하자. 아차, 이러면 책장을 넘길 수가 없겠구나. 아, 이 썰렁함이란!

‘분노 살인’의 과거형, 구마타로

이 책은 한 사람이 계획적인 살인을 단행하기로 굳은 결심을 하기까지의 그 길고도 긴 역사를 말하고 있다. 구마타로가 살인을 계획하게 된 연유에 대해 한 마디로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다. 위키백과에서 ‘교제 문제’라고 언급한 것처럼 이것은 한 사람과 그 사람을 포함한 사회와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고질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사람을 죽인 구마타로가 문제인가? 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문제인가? 그러한 원인이 발생하도록 수수방관한 사회에도 책임이 있는가? 또한, 한 사람이 살인을 계획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의 번뇌에 휩싸인 채 고통받는지 우리는 무책임하게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구마타로의 삶이 평범함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그는 절대 악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보살님께 자신의 죄를 빌고 구원받았다고 믿을 정도로 순박했으며, 자신이 밟은 풀 한 포기를 가엾어할 정도로 마음이 여렸다. 여자 앞에선 부끄러워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할 정도로 순진했고, 불의를 보면 앞뒤 제지 않고 일단 뛰어들고 보는 의협심도 다분히 있었다. 그가 비록 술과 여자, 노름에 빠진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로 말미암아 ─ 그의 부모를 제외하고는 ─ 누군가에게 커다란 피해를 준 일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본의와는 다르게 일을 엉망으로 그르치면서도 내심 착하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협객처럼 활개를 쭉 펴면서 걷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의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세상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 비록 구마타로의 어리숙해 보이는 언행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복잡하면서도 나름의 논리적인 정합성을 가진 결과물이었다고 해도 다른 사람의 내면을 그렇게까지 자세히 관찰할 만큼 세상은 한가하지 않다.

그러하기에 무정한 세상은 이런 구마타로를 어리숙한 바보로, 철없는 어른으로 낙인찍어 버린다. 그가 허세와 체면을 내세우는 점을 역이용해 실컷 부려먹고 골려 먹는다. 사람을 곧이곧대로 믿는 아이처럼 순진한 구마타로가 잘못한 것일까? 이러한 그의 단점을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그들이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이런 잘못된 연결고리를 방치한 사회가 잘못한 것일까?

요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분노 살인’을 보면 이런 악순환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으며 그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구마타로는 ‘분노 살인’의 과거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한편으론 현대 사회의 법체제는 사람을 죽인 자만을 처벌할 수 있다는 점에서 모든 범죄를 한 사람의 기질적 문제로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분노형 범죄’가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요즘, 그리고 상황이 기질을 압도하여 평범한 사람을 악인으로 몰고 간다는 필립 짐바르도(Philip Zimbardo)의 『루시퍼 이펙트(Lucifer effect)』를 읽어보면, 범죄를 일어나게 하는 상황이나 요인이 범죄를 일으키는 사람의 기질보다 더욱 중요함을 알 수 있는데, 우리는 이러한 점을 너무 쉽게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마치면서...

구마타로는 죽기 전에 말한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어’라고. 무엇이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을까? 애초에 농사일을 내팽개치는 것이 안 되는 거였을까? 그랬더라면 특별한 것은 없지만, 남들처럼 먹고사는 문제 정도는 자기 손으로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마을 사람들로부터 괄시받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살인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구마타로의 처지에서 되돌아보면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어’라고 되짚어볼 수 있는 삶의 무수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한두 가지 정도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그랬더라면 이 책은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다리 타기 같은 선택의 연속에서 그 끝이 살인마일지라도 우리는 앞일을 내다볼 수 없기에 자신이 선택한 그 길을 가야만 한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어’라고 말할 땐 이미 늦었다. 되돌릴 수도 없고, 되돌아갈 수도 없다.

그렇다고 선택이 오로지 나 혼자만의 능력으로 결정되는 것인가? 때론 막다른 길에 몰려, 때론 누군가의 음모에 말려들어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 상황에 따라, 자신이 가진 것의 명확한 한계에 따라 선택의 폭은 엿가락처럼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 현재 당신이 가고자 하는 길이 오직 당신의 의지만으로 선택한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구마타로가 살아온 길이 오로지 자신의 의지만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기도 하다. 무엇이 그를 그 지경으로까지 몰고 갔을까? 당사자가 아닌 이상 우리는 구마타로의 심정을 영영 알 수 없지만, 자신을 괄시하고 무시한 사회에 대한 구마타로의 질책이자 자신을 살인마로 몰고 간 구마타로의 하소연 같기도 한 『살인의 고백(告白)』을 읽다 보면 어렴풋이나마, 그리고 인제야 나마 우리는 그의 복잡한 심경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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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9/2019

[책 리뷰] 유럽 대륙이 통째로 상(喪)을 당하다 ~ 흑사병(필립 지글러)

The-Black-De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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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대륙이 통째로 상(喪)을 당하다

Original Title: The Black Death by Philip Ziegler
방탕과 방종은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이 원기를 돋우기 위해 어둠 속에서 휘파람을 불고 술을 마시는 방어적인 장치였다. 이들의 광란적인 기쁨은 그 기저의 우울을 더욱 강조할 따름이었다. “먹고 마시고 즐겨라. 내일이면 우리는 죽는다.” 그러나 내일은 매우 가까워 보였으며 먹을 것과 마실 것은 죽음의 공포를 오랫동안 억누를 수 없었다. (『흑사병(The Black Death)』, p338)

14세기 유럽에서 태어나고 싶은 사람 손!

누군가는 이 넓고 넓은 우주에서 지구라는 행성에, 그것도 사람으로 태어난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한다. 현재 삶이 그럭저럭 만족스럽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삶에 달관한 사람이라면 이 공허한 겸손의 말에 공감할 수 있겠지만, 삶이 고달플 뿐만 아니라 그 고달픔의 늪에서 벗어날 희망을 꿈꾸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는 최악의 환경에 처해있는 사람, 그래서 깨어 있는 시간 대부분을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죽음을 맞이해야 할 암담한 운명을 짊어진 사람이라면 심히 불쾌하고 못마땅할 것이다.

이쯤에서 한 가지 물어본다면, 만약 당신이 흑사병(黑死病, Black Death)이 맹위를 떨쳤던 중세 유럽 14세기에 태어났더라면, 이 넓고 넓은 우주에서 지구라는 행성에, 그것도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축복으로 받아들였을까? 아니면 저주라고 받아들였을까? 난 당신이 어디에 사는 누구며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것만은 확실할 수 있다. 당신에게 흑사병이 창궐한 유럽 14세기에서의 삶과 현재의 삶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제아무리 현실이 엿 같더라도 열에 아홉은 현재를 선택하리라는 것을.

비단 흑사병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14세기 유럽은 중세 기후의 최적기가 막을 내려 생산성이 하락하고 수요가 공급을 앞지르면서 굶주림이 들불처럼 번져가는, 불안정한 기후로 말미암아 기근이 뿌리내리고 인구 압박으로 노동의 가치가 떨어지는, 그래서 경기는 장기적인 침체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고, 기근으로 사람들의 영양 상태는 엉망진창인, 아무리 낙관하려 해도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삶을 비관할 정도로 충분히 암울한 상태였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흑사병까지 맞아들여야 했으니, 누군가의 말대로 정말 ‘재난의 시대’였다.

‘소작인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만약 당신이 성인이나 군자의 반열까지 오를 정도는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양심 정도는 갖춘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치자. 그런데 그 도덕성과 양심의 미덕이 가차 없이 파괴된다. 그리고 당신은 광란과 방종과 악덕의 화신으로 타락한다. 당신에게 어떠한 압박이 어느 정도 가해져야 그것이 가능해질까?

사업이 실패해서 가족이 당장 거리로 쫓겨나고 굶주려야 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당신의 양심과 도덕성은 안전한 수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다면, 가족을 더 큰 위험이나 슬픔에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당신은 인내심과 자제심을 부단히 발휘하여 새 출발을 각오할 것이다. 설령 당신은 혼자일지라도 경제적인 실패나 사회적인 실패가 파도처럼 몰고 온 좌절감과 절망감에 빠져 잠시 자살을 고려할망정 타인의 비웃음거리가 될 방종과 타락의 늪으로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인생에서 겪게 되는 참담한 실패가 당신을 뒤흔들 수는 있지만, 그것 때문에 삶의 궤적에서 완전히 이탈할 정도로 당신은 나약하지 않다. 당신은 충분히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내 장담하건대, 그런 당신의 충성스러운 이성과 감정을 마비시키고 동물적인 방탕과 방종의 길로 내모는 확실하면서도 기가 막힌 방법이 있다. 바로 당신을 지구를 가득 채운 공기처럼 사방팔방에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으로 가득 찬 흑사병의 시대로 보내는 것이다. 누군가 인류의 종말을 진지하게 고려하며 최후의 글을 남기려 했던 곳, 죽음이 내일보다 더 가까웠던 곳, “소작인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라는 간결한 표현 뒤에 수많은 개인적인 비극이 숨겨져 있는 곳, 홍수가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쓰레기를 휩쓸어 가듯 죽음이 신에게 버림받은 인류를 무참히 휩쓸어 가던 시대. 그곳에서 내 가족과 이웃이 고통스럽고 역겨운 원인 모를 병에 하루하루 쓰러져간다면, 그리고 내일은 바로 당신이나 내가 마땅히 죽어야 할 것 같은, 오직 죽음만이 유일한 벗인 그런 세상에서 과연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이유 있는 타락

다행스럽게도 현대인은 그렇게 쉽게 타락하지 않는다. 그 이유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알 만큼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흑사병이 돌던 중세 유럽에 사는 사람들은 그러하지 못했다. 그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흑사병을 타락한 인류에 대해 신이 내린 징벌로 받아들였다. 의사는 신부보다 훨씬 뒷전이었다. 그렇다고 의사에게 뾰족한 수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기껏해야 더러운 피를 몸에서 뽑아내고자 하는 심히 우려스러운 의도에서 방혈을 해주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매우 운이 좋게도 신의 징벌을 피한 마을도 있었지만, 대부분 도시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운이 좋지는 못했다. 어떤 마을은 그 이후 지도와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진 마을도 있었다. 학자마다 차이가 있지만, 당시 유럽 인구의 1/3, 혹은 1억 명에 가까운 사람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전염병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뭔가를 단정하기엔 당시 기록들은 충분치도 않고 명확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부족하지만 충분히 의미심장한 기록들을 통해 중세인들은 가늠할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에 오돌오돌 떨면서 살아야 했으며, 그러한 하루하루 삶이 심히 편치 않았으리라는 것 정도는 바보라도 짐작할 수 있다. 고로 중세인이 현대인보다 타락했다고 해서 그들이 특히 도덕적으로 나빴다고 비난하는 것은 지나치게 불공평하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모든 사람이 사과나무를 심을 수는 없는 것처럼 눈앞으로 바짝 다가온 죽음의 공포는 중세인이건 현대인이건 이성을 마비시키고도 남을 만하다.

'대강'으로도 감춰지지 않은 공포

좀 더 연구가 진정되고 그럼으로써 지금까지 몰랐던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진다고 해도 중세인에게 흑사병이 정확히 어떤 의미였고 어떤 경험이었는지 아마 우리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전장의 한복판에 선 병사와 평화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죽음에 대한 의미가 각각 다른 이유와 비슷하다. 하지만, 과학사가인 코이레(Koyre)의 말처럼 중세가 아무리 ‘대강’(a peu pres)의 시대였다고 해도, 당시의 자료가 불충분하고 막연하다고 해도, 우리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단테(Dante)가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에서 상상 속의 지옥을 묘사한 것처럼 당시 많은 지식인은 각자 나름의 방법으로 현실 속의 지옥을 생생하게 그려놓았다. 그렇게 뜻하지 않은 흑사병이 중세인에게 선물한 아비규환을 집대성한 책이 바로 필립 지글러(Philip Ziegler)의 『흑사병(The Black Death)』이다. 스스로 아마추어 학자라고 칭한 저자가 학술적인 면은 의도적으로 피한 책이니만큼 읽기도 쉽지만, 재난 영화가 잔인한 재미를 선사하는 것처럼 ─ 중세인에게는 굉장히 미안한 일이지만 ─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사실 이 책을 선택한 계기는 발터 샤이델(Walter Scheidel)의 『불평등의 역사(The Great Leveler)』에서 급격한 부의 평준화를 가져온 대압착(Great Compression, 大壓搾) 시대를 불러온 ‘평준화의 네 기사(騎士)’ 중 하나가 대유행병이며, 그중에서도 가장 큰 대압착을 불러온 것은 14세기의 흑사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립 지글러의 『흑사병(The Black Death)』에서는 발터 샤이델이 언급한 ‘대압착’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사회 • 경제적 변화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다만, 노동자 수의 급격한 감소로 그들의 임금이 다소 오르고, 지대나 토지 상황이 그들에게 다소간 유리하게 적용되었다는 정황은 포착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페스트의 극적인 효과를 예시하기 위해 이미 인용된 모든 사례는 그 효과가 얼마나 빨리 지나갔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고 필립 지글러는 말한다. 흑사병으로 우연히 찾아온 노동자 시대가 생각보다 빨리 과거로 회귀한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견해 차이는 『흑사병(The Black Death)』과 『불평등의 역사(The Great Leveler)』의 50년이라는 나이 차이와 그에 따른 누적된 연구 성과를 고려하면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인 것 같다.

'흑사병'이름의 기원

흥미로운 점은 ‘흑사병’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한 견해차다. 위키백과에는 흑사병이라는 이름은 1883년에 붙여졌는데, 피부의 혈소 침전에 의해 피부가 검게 변하는 증상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반면에 필립 지글러는 전염병의 이름이 피해자의 외양에서 파생되었다면 전염병 당시에도 그런 이름으로 통용되어야 했는데, 그러했다는 증거는 없다는 점을 언급하며 위키백과의 견해와는 다른 의견을 피력한다. 필립 지글러는 ‘흑사병’ 이름의 유래를 라틴어에서 찾는데, 페스티스 아트라(pestis atra) 또는, 아트라 모르스(atra mors)를 영어나 스칸디나비아어로 곧이곧대로 직역했다는 것이다. 14세기에 ‘아트라’는 ‘검은’이라는 의미 외에도 ‘지독한’이나 ‘무서운’이라는 의미를 함축했다고 한다. 내 생각에는 위키백과의 설명보다는 필립 지글러의 설명이 더 그럴듯해 보인다.

'체념'의 시대, 그리고 '인고'의 시대

사실 평화로운 시대를 사는 것처럼 보이는 현대인의 안일한 시선으로 보면 중세 유럽인은 재난의 시대를 살았다고 해도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더군다나 자신의 삶을 자신의 의지로 개척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의지를 갖는 것조차 발칙하다는 이유로 절대 용납되지 않았던 불관용의 시대를 살았던 중세인은 모든 불행과 고통을 얄궂은 운명의 여신이나 잔인한 신의 의지로 돌림으로써 체념의 미덕 하나만은 현대인을 압도하고도 남을 것이다.

누군가는 내일의 죽음을 애도하며 절망의 노래를 불렀고, 누군가는 내일의 죽음에 맞서 방탕과 방종으로 저항했고, 누군가는 인류에 내려진 신의 형벌을 조금이라도 덜까 하는 기특한 희망을 품고 스스로 고행의 길로 들어섰다. 14세기까지 인류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신앙이나 사회 기반이 된 상식과 추론이 무너졌다. 하지만, 중세인은 전무후무했던 죽음의 시대에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무덤 앞에서도, 공포와 두려움을 끌어안은 채 담담하게 일상을 이어나갔다. 그것은 그들이 특별히 용감무쌍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고, 삶을 초월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무지(無智)라는 시대의 표상과 체념이라는 경험적 교훈에 어떻게든 삶의 굴레 바퀴를 굴려야 한다는 원시적 본능이 삼위일체로써 결합한 그 알 수 없는 추진력에 떠밀린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한, 그것은 지옥 같은 현실을 저주하고, 절대 오지 않을 희망찬 미래로 자신을 고문하면서 꾸역꾸역 오늘날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비참한 현실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단지 차이가 있다면, 죽음과 얼마나 가까우냐 하는 정도가 아닐까?

극단적인 공포와 극단적인 절망, 걷잡을 수 없는 사회의 붕괴와 침체, 그리고 그 이후 몇 세기에 걸쳐 인간의 정신과 문화, 도덕성에 지속해서 영향을 끼친 치유할 수 없는 상처와 슬픔, 그리고 죽음과도 같은 음침한 고통의 잔해 속에 가냘프지만 선명하게 남겨진 중세인의 흔적이 『흑사병(The Black Death)』 곳곳에 누덕누덕 기워져 있다. 운명과 신이 내린 날벼락 같은 저주에 맞서기보다는 체념과 순종으로 묵묵히 일관했던 중세인의 삶이 비록 우리의 눈에는 고되고 비참하고 어리석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든다. 체념과 순종을 미덕으로 여겼던 중세인의 삶과 사회의 부당한 대우와 굴욕적인 갑질에 항거하기보다는 쓰디쓴 인고와 좌절의 눈물로 견뎌야 하는 우리의 삶이 과연 그들보다 낫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마치면서...

역시 책과는 별반 상관없는 리뷰가 되고 말았다. 요즘 리뷰는 그냥 내 몸속의 찌꺼기를 배출하듯, 내 머릿속의 불순물을 짜내듯, 그런 불손한 글쓰기가 되어 가고 있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글쓰기의 궁극적 목적은 나를 위한 것이니까. '흑사병' 시대를 살아야만 했던 중세인의 비참한 삶이 ─ 그들의 눈에는 가소롭게 비칠 ─ 나의 비참한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니, 자연스럽게 리뷰도 칙칙하고 음울한 분위기에 젖어 든 것 같다. 그렇다 해도 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어떻게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죽음도 그들을 끝내 굴복시키지 못했는데 하물며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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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5/2019

[책 리뷰] 교묘하고 놀랍고 환상적인 다차원 미스터리 ~ 무당 거미의 이치(교고쿠 나쓰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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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묘하고 놀랍고 환상적인 다차원 미스터리

Original Title: 絡新婦の理 by 京極 夏言
“진범은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물을 주기는 하지만 무엇이 열릴지, 누가 베어낼지까지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게 적의 방식입니다. 무용수는 흥행주를 모른 채 춤추고, 배우는 무슨 연극인지도 모르고 연기하지요. 소설 등장인물의 대부분은 그 소설의 제목을 알 수 없어요— 우리는 무용수이고, 배우이고, 등장인물입니다.” (『무당거미의 이치(絡新婦の理)』 下, p119)

가장 범인 같지 않은 인물이 범인이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라고 했던가. 밥도 지을 줄 몰랐던 새색시가 어느 날 문득 저녁 찬거리를 손수 장만하면서 알뜰한 주부로 거듭나듯, 나는 도서관에서 열심히 장을 보며 나만의 직감을 발달시켰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불평등의 역사』 리뷰에서도 밝혔듯 읽을만한 책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만큼은 믿을만한 실력을 발휘하는 직감이다.

왜 오늘도 초장부터 되먹지도 않은 직감 이야기를 꺼내 들었는가 하면, 비슷한 이유로 추리 소설에서 범인을 지목하는 직감도 꽤 믿을만하기 때문이다. 세키구치처럼 정신이 흐리멍덩한 독자에겐 이론물리학의 정수 ‘양자역학’을 접하는 것만큼이나 난해하고 아리송하기 그지없는 것이 『무당거미의 이치(絡新婦の理)』지만, 나의 날렵한 두뇌는 꼬일 대로 꼬인 복잡한 사건 구성에서 진짜 범인인 ‘거미’를 단박에, 그것도 초장에 알아봤다는 것이다. 물론 이건 순전히 내 직감(친숙한 말로 표현하자면 답을 ‘찍은’ 것?)에 의존한 것이기에 그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한 것에 대한 자질구레한 설명이나 논리적인 과정을 밝힐 수는 없다. 굳이 변명하자면, 신이 내린 명탐정 에노키즈가 타인의 뒤통수 너머로 과거를 보는 신비하면서도 버르장머리 없는 눈으로 진범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으면서도 그가 왜 진범인지를 설명하지 못하는 이유와 같다고나 할까나?

하지만, 솔직히 말해 내가 운이 좋게도 진범을 대뜸 알아맞힐 수 있었던 것은 추리소설을 좀 읽어본 독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평범한 진리, 즉 진짜 범인은 가장 범인 같지 않은 인물이라는 원칙을 충실하게 따른 직감에서 온 것이다. 그에 따라 보통은 평범하거나 나약하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존재감 없는 인물이 마지막에 ‘짠~’하고 반전의 팡파르를 올리며 등장하는 진범일 확률이 높다. 교고쿠 나쓰히코(京極 夏言)의 『무당거미의 이치』 는 전체적으로 보면 지금까지 내가 읽어본 추리소설이나 미스터리소설 중에서는 결코 만나보지 못했던, ‘치밀함’이라는 말이 왜소하게 보일 정도로 거미줄처럼 완벽하고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범죄 구성에 ─ 내가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서는 처음이라 할 수 있는 ─ 다차원 미스터리를 환상적으로 접목한 실로 놀랍고도 엄청난 소설이다. 읽은 내내 ‘추리 소설도 이렇게 훌륭할 수가 있구나’하는 감탄을 절로 자아내게 한다. 그럼에도 사건의 진짜 범인이라고 할 수 있는 ‘거미’는 등장인물 중 가장 범인 같지 않은 인물이라는, 기존의 판에 박힌 원칙을 크게 빗겨나가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조금 남는다. 물론 이 아쉬움은 작품의 놀라운 내용에 비하면 깨알처럼 작은 흠이지만, 그래도 굳이 걸고넘어지자면 흠이라면 흠이다.

실로 교묘하고 놀랍고 환상적인 다차원 미스터리

『무당거미의 이치(絡新婦の理)』에서 사건은 크게 두 개의 차원으로 분리된 채, 그러나 미묘하게 병행된 상태로 진행된다. 눈알 살인마 사건과 교살마 사건이 그것이다. 두 사건은 언뜻 보면 별개 사건처럼 듯 보인다. 사실 속을 파 보아도 두 사건의 연관성은 딱히 찾아보기 어렵다. 두 살인마 역시 별개의 인물이며, 살인 동기 역시 제각각이다.

구조는 똑같은데 구성요소가 다르다. 교차하고 있는 것 같은데 괴리되어 있다. 점으로 엇갈리는 것 이외에는 전혀 겹치지 않는다. 그런데도 아마 이 두 사건은 같은 뿌리를 갖고 있을 것이다. (『무당거미의 이치(絡新婦の理)』, 中, p452)

이것은 마치 평행우주의 서로 다른 현실에서 같은 사건이, 등장인물과 배경만 약간 바뀐 채 그대로 재현되는 것처럼 보인다(마치 영화 「평행이론: 도플갱어 살인(Coherence, 2013)」에서 벌어진 일처럼?). 두 사건은 거미줄의 나선실처럼 중심으로부터 동심원을 그리며 서로 약간 떨어진 채 존재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거미줄을 친 거미가 유유자적하게 거미줄 사이를 오가며 그물에 걸린 먹이를 여유만만하게 노려보고 있다.

세상을 창조한 신만이 세상의 이치를 통달할 수 있듯, 두 차원의 사건을 창조한 거미만이 그 이치를 알 수 있다. 그러하기에 모든 이가 그물에 걸려들 수밖에 없다. 심지어 세 치의 혀로 세상을 말아먹듯 현혹하는 교고쿠도도 그것이 거미가 친 그물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발적으로 걸려든다.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거미가 친 그물은 견고하고 예상을 뛰어넘으며 완벽할 정도로 치밀하고 조조처럼 교활하기 짝이 없다. 교고쿠도의 주술도 두 차원을 그리며 교묘하게 병행하던 두 사건에 씐 사악한 기운을 떼지는 못한다. 하물며 폭주하는 형사 기바와 모난 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에노키즈 탐정은 무기력하게 거미로부터 부여받은 각자의 역할을 다 할 뿐이다. 무려 15명의 희생자를 낸 이번 사건에서 교고쿠도는 그저 수수께끼를 설명하는, 무성영화의 변사 노릇 정도밖에는 못 하고 만 것이다. 물론 그 어떤 변사보다 뛰어난 현학적인 언변을 갖춘 달변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등장인물이 작자(作者)를 지탄할 수는 없다!

어찌 되었든 거미는 추리소설에서 소위 말하는 ‘진범’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거미는 구체적인 범죄 계획에는 일절 가담하지 않았고, 법률에 저촉되는 행위에도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그저 거미는 덫에 걸린 자를 몇 마디의 정보 조작으로 조종하고, 범죄를 저지르도록 유도해서 자멸로 몰아넣을 뿐이다. 그런 거미를 ‘범인’이라고 지목할 수 있을까? 거미가 과연 ‘범인’이기는 한 것일까? 교고쿠도의 주술이 이번에는 보기 좋게 빗나간 것은 아닐까? 이 모든 사건을 꾸미고 덫을 놓았다고 하는 거미 같은 것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고, 두 사건은 정말 말 그대로 별개의 사건이었던 것은 아닐까? 두 사건에서 약간의 접합점이 발생했던 것은 억지이자 우연이었던 것은 아닐까?

내가 어떤 일로 복수심에 불타는 친구에게 화를 좀 식히라면서 시원한 배와 배 껍질을 깎는데 쓸 사시미칼처럼 날카로운 과도를 건네준다. 이때 친구의 원수가 우연히 친구 앞을 지나간다. 나 외에는 이 둘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순간 분노를 참지 못한 친구는 과도로 원수를 찌른다. 친구가 원수를 찔러 죽인다, 이것이 내가 노린 것이다. 과일 껍질을 과도로 깎으려는 그때 때맞춰 원수가 나타난 것도, 그 자리에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도 모두 우연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이 나의 계획이었다 하더라도 법적으로 난 아무 잘못이 없다. 나의 음흉한 계획을 모르는 이상 도덕적으로도 날 지탄하기 어렵다.

그래도 이 구성은 거미가 친 그물에 비하면 매우 단순한 구성이다. 거미는 이런 구성을 거미줄처럼 이중, 삼중, 사중으로 쳐놓는다. 거미는 운명의 신처럼 우연도 연출한다. 거미는 사람의 존엄성으로 상징되던 자유의지도 무력화시킨다. ‘무당거미의 이치’가 통하는 차원에서만큼은 거미는 신이나 진배없다. 신이 세상을 창조하듯, 거미는 ‘무당거미의 이치’로만 이해할 수 있는 범죄 비슷한 것을 창조했다. 교고쿠도를 비롯한 인물들은 그저 연극 무대에 올려지는, 혹은 소설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일 따름이다. 이들은 대본 없는 즉흥극에 출연한 배우들처럼 작자(作者) 거미가 연출한 큰 줄기를 빗겨나가지 않으면서, 하지만 무슨 연극인지는 모르고 소설의 제목도 알지 못한 채 시종일관 애드리브로 제 몫을 다한다. 이들은 격류에 휩쓸린 사람이 자연스럽게,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발버둥 치듯 이야기에 휩쓸려 자유의지라고 착각한 채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듣기 좋게 말해 노래와 춤이지, 그것은 때론 살인이고 죽음이 될 수도 있다.

지금까지의 수많은 이야기 속 등장인물이 그 이야기를 쓴 작자를 뛰어넘을 수 있었던 예는 없었다. 이 말은 거미의 계획을 아무도 저지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까지 그 모습을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범죄소설에서 진범이 끝내 법망에 잡히지 않는 경우는 종종 볼 수 있지만, 그렇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죗값을 치르기 마련인데, 이처럼 진범의 계획이 깔끔하게 마무리될 뿐만 아니라 의젓하게 살아있는 채로 끝나는 당혹스러운 경우는 이번이 참말로 처음인 것 같다.

그렇지만, 진범의 놀라운 수완이 기가 막힐 정도로 흥미롭고 놀라운 다차원의 미스터리로 안내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에 왠지 밉지는 않다. 어떤 면에서는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소설에 흠뻑 취해 있을 땐 진범의 조종을 받는 괴물이 될지라도 세상을 미련 없이 내던지고 작품 속으로 녹아 들어가고 싶어진다. 교고쿠도도 어찌하지 못하는, 세상을 유린하고 농락하는 뛰어난 지성과 추진력을 갖춘 인물을 주인으로 받드는 것은, 그저 그런 삶을 사는 것보다는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치’라는 것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이치는 하나가 아니다. 하나의 사상도 각각 다른 이치로 해석할 수 있다. 반대로 하나의 이치도 다른 사상으로 풀어쓸 수 있다. 자신이 아는 이치 몇 가지로 잘난 척하며 넘겨짚으려다가 망신을 당한 경험은 없는가? 한 사람이 얻을 수 있는 지식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듯, 한 사람이 터득할 수 있는 이치에도 한계가 있다. 한 사람이 세상에 혼재하는 이치들을 전부 이해하기는 벅찰 뿐만 아니라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한 사람이 터득한 이치만으로 무리하게 세상만사 온갖 일에 들이대면, 세상은 이치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무당거미의 이치’ 역시 세상에 혼재하는 수많은 이치 중 하나다. 죽을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다. 버려져야 할 사람은 버려야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무당거미의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해하지 못하니까 인정할 수가 없다. 인정할 수가 없으니까 반발이 생기고 반발이 생기니까 억지로라도 사건에 개입한다. 하지만, 사건에 개입함으로써 거미줄에 걸린 셈이 되고, 거미줄에 걸린 이상 옴짝달싹 못 하게 된다. 결국, 자신이 아는 이치대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도 없게 된다.

거미줄에 걸려들었으니, 응당 거미줄의 이치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학교생활과 군대 생활의 이치가 따로 있듯, 거미줄에 걸린 그들은 ‘무당거미의 이치’에 순응해야 했음에도, 사건에 개입한 이상 어떻게 해서라도 사건을 장악하려는 객기를 부렸으니 응당 그 대가를 치렀다. 그것은 무참히 살해된 15명의 희생자다. 그렇다면, ‘무당거미의 이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거치적거리는 것은 제거해서라도 내 자리를 찾겠다는 의지의 발로인가? 하지만, 교고쿠도의 말을 빌리자면, 그 이치를 발동시킨 거미 그 자신조차 몰랐기 때문에 멈출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가?

교고쿠 나쓰히코 소설 중 최고의 작품으로 남을

오늘까지 읽은 교고쿠 나쓰히코 소설 중 가히 최고의 작품이자, 내가 지금까지 읽어본 추리 소설 중 (기억나는 순서대로) 우타노 쇼고의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 찬호께이의 『기억나지 않음, 형사』, 류츠신의 『삼체 2』, 미야베 미유키의 『이유』와 더불어 최고로 꼽고 싶은 작품인 『무당거미의 이치』는 재밌게도 거미줄의 중심을 둘러싼 동심원처럼 이야기의 끝부분과 시작 부분이 이어지는 구성이다.

上권 첫 장은 만개한 벚꽃 나무 아래서 펼쳐지는 교고쿠도와 거미와의 대화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 대화에서 알 듯 모를 듯한 ‘무당거미의 이치’가 설명된다. 처음 읽었을 땐 이 두 사람이 도통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세 권을 다 읽고 나면 누군가를 이해시킬 정도로 도통하지는 못하더라도 ‘아하~’하는 짧은 감탄사 정도는 내뱉을 수 있을 정도로 머리를 순식간에 강타하고 지나가는 뭔가는 느끼기 마련이다. 이쯤 되면 만개한 벚꽃 나무 아래서 펼쳐진 교고쿠도와 거미와의 대화가 매우 의미심장했다는 것을, 다시 눈앞에 펼친 上권을 읽으면서 무한한 감개와 더불어 깨닫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만개한 벚꽃 나무 아래서 펼쳐진 교고쿠도와 거미와의 대화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이 대화에서 짤막하게 언급된 ‘무당거미의 이치’를 부연 설명하는 부록 같은 것이다. 한마디로 대단하고 대범한 소설이다.

어떠한 이치도 내세우지 못한, 쓸데없이 길기만 하고 지루한 리뷰였다. 그래도 여기에 마지막으로 몇 마디 덧붙이자면, 사악한 교고쿠도, 철없는 에노키즈, 험악한 기바, 덧없는 이사마, 못생긴 이마가와, 바보 원숭이 세키구치(이번 사건은 너무 어려워서일까? 이번 편에서는 아쉽게도 마지막에만 잠깐 등장하는) 등 이들이 서로 주고받는 악의 없는 말장난은 틈틈이 실소를 자아내며 ‘무당거미의 이치’의 난해함으로 말미암은 긴장뿐만 아니라 현실의 삶에 엉겨 붙은 찌든 때도 시원하게 털어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오랜 친구와 농을 주고받는 것처럼 정겹다. 웃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는 묘한 악담을 주고받는 그들이 정말 부럽다. 정말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비록 세키구치처럼 완전한 바보 취급을 당하고 매 일분일초 구박을 당하더라도 그들의 세계로 뛰어들어 그들과 합세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아무튼, 교고쿠 나쓰히코의 소설을 전부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무당거미의 이치』는 그의 최고의 작품으로 남을 것이 분명할 뿐만 아니라, 추리소설을 애독하는 독자라면 응당 경험해야 할 대작 중 하나임을 감히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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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8/2019

[책 리뷰] 세계대전이 나은 불편한 진실, ‘대평준화’ ~ 불평등의 역사(발터 샤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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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전이 나은 불편한 진실, ‘대평준화’

Original Title: The Great Leveler: Violence and the History of Inequality from the Stone Age to the Twenty-First Century by Walter Scheidel
제국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 게 일반적이고, 전염병은 어느 시점이건 한때 발병하게 마련이었다. 끝없는 로마 제국이나 전염병 없는 세상은 현실적인 반사실이 아니다. 실제 충격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결국에는 다른 충격이 그 자리를 대신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아주 최근까지도 주기적인 폭력적 평준화에 대한 그럴듯한 대안은 없었다. (『불평등의 역사(The Great Leveler)』, p518)

나의 독서 습관과 그 흐름에 대하여

사실 난 뭔가 내세우기 위해, 혹은 남다른 특별한 목적으로 책을 읽지는 않는다. 도박이나 게임에 중독되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하고 생각하면서 독서에 중독되면 ‘할 일 되게 없나 보네’라고 비웃는 요즘, 그리고 일 중독이 만연한 요즘에는 독서는 그저 시간이 남아도는, 혹은 백수들의 알량한 취미 정도로 보는 사람도 많다. 그들은 책을 읽지 않으니 독서의 가치 또한 알지 못한다. 나 같은 경우는 그저 사는 게 지루하고, 지루하지 않더라도 죽을 날을 하릴없이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어 선택한 ‘시간 보내기’ 놀이가 독서다. 그렇게 발을 붙인 취미가 뜻밖에 죽은 듯이 잠자던 나의 지적 호기심을 깨우며 느슨한 중독을 일으켰고, 그 덕분에 안중근 선생의 유명한 경구인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의 체험적 의미까지 어렴풋이나마 깨우치면서 지금까지 유지해 온 것이다.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킨다는 그럴싸한 이유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목적 없이 책을 읽다 보니, 어떤 책을 읽을 것에 대한 목적의식도 희미할 때가 있다. 주식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지적 호기심이 다행스럽게 상승 분위기를 유지하고, 여기에 조금 전 읽은 책이 다음에는 어떤 책을 읽어야 하겠다는 ‘독서 릴레이’의 충실한 조언자 역할을 제대로 해낸다면, 다음에 읽어야 할 책을 굳이 고민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런 권장할만한 분위기가 늘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주식이 급락하는 것처럼 지적 호기심이 바닥을 쳐 독서에 흥미를 잃을 때도 있고, 침몰한 배처럼 지적 호기심이 지향해야 할 방향성을 잃기도 한다. 두 권을 고른다고 할 때 한 권 정도는 부담 없이 시원스럽게 읽을 수 있는 ─ 내가 좋아하는 작가나 작풍 위주의 ─ 장르소설이나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문학을 선택함으로써 독서 자체에 흥미를 잃는 것은 미리 방지할 수 있지만, 지적 호기심이나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는 선택하기 어려운 ─ 소설을 제외한 ─ 교양 도서는 그런 식으로 문제를 넘길 수가 없다. 꼭 교양 도서를 읽어야만 하는 이유나 의무는 없지만, 좋은 주제로 잘 쓰인 교양 도서는 웬만한 소설만큼이나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소설에서는 맛볼 수 없는 ─ 읽어본 사람만이 아는 ─ 짜릿한 지적 충만감을 경험하게 해준다. 나의 대출 습관이 어렴풋이 소설 1~2권, 교양 도서 1권의 비율로 자리 잡은 것도 그런 연유에서이다.

아무튼, 나의 본받을만한 식성처럼 책을 선택함에서도 종교 분야 정도를 제외하고는 특별히 구애받는 것은 없다. 이런 나이지만, 막상 목적의식이나 내 구미를 자극하는 지적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을 때는 무엇을 골라야 할지 난감하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막연하다. 이럴 땐 옛 골목처럼 더럽게 비좁은 도서관의 책장 사이를 유령처럼 돌아다니며 헤매기 일쑤다. 마치 마트에서 수많은 반찬거리를 앞에 두고 오늘 저녁에는 어떤 반찬을 식탁 위에 올려야 할지 망설이는 알뜰살뜰한 주부의 마음이랄까?

참고로 사람마다 제각각인 식성처럼 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난 ‘추천 도서’나 ‘권장 도서’를 그다지 신용하지 않는다. 남이 권해주는 반찬이나 음식이 언제나 맛있는 것은 아니고, 가족이 먹을 음식은 오로지 자신이 직접 선택해야 안심할 수 있는 성실한 주부처럼 책 역시 나의 입맛과 나의 지적 나침반이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선택해야 후회가 없다. 후회한다고 해도 오로지 내 잘못이니 선택의 실패로부터 교훈도 배울 수 있다.

세계대전이 나은 불편한 진실

역시나 서론이 쓸데없이 길었는데, 그렇게 뭘 골라야 할지 망설이며 시간을 낭비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선택한 책이 바로 발터 샤이델(Walter Scheidel)의 『불평등의 역사(The Great Leveler)』이다. 사람은 지구상의 그 어떤 동물보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자부한다. 하지만, 살아온 날이 살아갈 날보다 많아질수록, 시간이 오래 걸리는 신중에 신중을 기한 선택보다 직감에 따른 신속한 선택이 때론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고로 난 직감에 따라 두툼한 것이 뭔가 품위 있어 보이는 양장이라는 겉모양에 현혹되어 이 책을 선택했는데, 결과적으로 ─ 자화자찬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물론 아주 가끔은 고루하기 이룰 데 없는 책을 고를 때도 있지만, 책을 선택하는 것에서만큼은 나의 직감은 매우 훌륭하게 작동해 왔음을 『불평등의 역사(The Great Leveler)』가 다시 한번 증명해 준 셈이다. 내가 읽은 책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사전 지식 없이 오로지 나의 직감과 ─ 책을 고를 때만 발동하는 듯한 ─ 사려 깊은 판단력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여 선택한 책들이다.

읽기 전에는 몰랐지만, 『불평등의 역사』을 읽으니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의 『21세기 자본(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이 떠오른다. 둘 다 부와 소득분배의 불평등이라는, 인류가 농경, 가축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떠오른 고질적인 문제이자 ─ 내 생각엔 상위 10% 정도를 제외한 ─ 다수의 관심을 끌만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피케티가 20세기 유럽의 심상치 않은 부, 소득분배, 자본의 불평등을 도식적으로 표시한 여러 등락 곡선을 처음 봤을 때 눈에 띄었던 것은 세계대전이 가져온 곡선의 급락, 즉 부의 소득분배의 급작스러운 평준화이다. 샤이델은 이처럼 세계대전 시기에 이룩한 급격한 부의 평준화를 ‘대압착(Great Compression, 大壓搾)’이라고 지칭한다.

아무튼,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읽는 내내 내 머릿속을 불편하게 했던 것은 다름 아니라 대규모 전쟁이 이런 대압착을 불러온 결정적인 원인은 아니었을까 하는 불손한 생각이었다. 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이 인류 문헌에 기록된 역사에서 불평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유일무이한 시기였다고 해서, 더는 다다를 때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극심한 부의 불평등이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라고 딱 부러지게 지적할 수는 없지만, 세계대전의 결과만을 놓고 보면 전쟁이 부의 불평등을 완화하는 어떤 극적인 요소로 작용한다고는 볼 수 있다. 피케티의 책을 읽는 내내 그런 불안한 생각들이 길 잃은 파리처럼 왱왱거리며 머릿속을 맴돌았는데, 친절하게도 샤이델은 나의 그런 불손한 생각에 종지부를 찍어주었다. 나의 의심이 전혀 허튼 것이 아니었을뿐더러 오히려 정곡을 찔렀다는 점에서 약간의 자부심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인류사에서 대규모 전쟁만이 부를 거머쥔 소수를 거덜 내는 평준화를 이룰 수 있다면, 세계대전 이후로 30~40년 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된 평준화 시기가 1980년대 전후로 반등하여 다시 20세기 초 상황으로 치닫는 지금, 이 부의 불평등이 깨지려면 세계대전 같은 파멸적인 총력전을 바라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두려움과 망측함이 나를 당혹스럽게 한다.

대규모 폭력만이 괄목할만한 평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샤이델이 개괄하는 ‘불평등의 역사’는 수렵 • 채집 생활에 바탕을 둔 선사 시대부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이후 최초의 잉여 자원을 생산하고 권력을 등에 업은 소수가 잉여 자원을 축적할 수 있게 된 농사 • 가축 생활로 시작된 인류의 ‘불평등의 역사’는 찡하게도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유지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최근의 부와 소득분배 불평등의 심상치 않은 증가 추세는 최고 정점을 찍었던 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으로 회귀하는 듯하다. 그렇다고 ‘불평등의 역사’에서 부의 불평등이 언제나 상승 곡선을 달렸던 것은 아니다. 놀랍게도 끝없이 치솟을 것 같았던 불평등이 ─ 드물지만 ─ 대폭 감소하여 잠시 평준화가 이루어졌던 시기가 있었다. 무엇이 그런 급작스러운 평준화, 즉 대압착 시대를 불러왔을까? 그것은 성장지상주의자의 희망대로 경제 성장의 성과도 아니었고, 민주주의의 허울뿐인 경제정의도 아니었다. 신의 계시는 더더욱 아니었으며, 우연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자본과 자원의 가공할만한 물리적 파괴와 대량의 인명 살상을 불러온 엄청난 규모의 폭력이었다. 대평준화는 대규모 폭력에 대한 두려움을 동반한 대규모 폭력만이 유일무이한 원인이었다. 샤이델은 대압착 시대를 불러온 네 가지의 대규모 폭력으로 대중 동원 전쟁, 변혁적 혁명, 국가 실패 그리고 치명적 대유행병을 언급하며 이들을 당당히 ‘평준화의 네 기사(騎士)’라 부른다.

이 사총사(四銃士) 중 단연코 효과가 제일이었던 것은 대중 동원 전쟁, 즉 세계대전이다. 세계대전이 폭풍처럼 일으킨 총력전은 전쟁에 소요되는 모든 자원을 끄집어내는데 필요한 급진적 몰수와 ─ 현재처럼 평화롭고 안정적인 시기에는 불가능에 가까운 ─ 급진적인 재분배 정책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수월하게 끌어냈다. 그뿐만 아니라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는 세계대전에 대한 경각심과 전쟁만큼이나 무자비한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두려움이 전쟁 중에 도출된 재분배 정책에 대한 합의를 유지해나가는 의지와 동기가 되었다. 하지만, 냉전이 종식되고, 공산주의 진영의 두 거두 중국과 소련이 각기 다른 이유로 시장 경제를 받아들이면서 세상은 또다시 평화와 안정의 시기를 보내게 되었고, 그 결과 아직 번영을 구가하고 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기특했던 평준화 시대도 종식을 고했다.

이로써 다시 부의 소득분배의 불평등 곡선이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것도, 그리고 일말의 주저 없이 작금의 불평등 곡선의 상승 추세가 불평등의 역사상 부의 분배가 가장 불평등했던 20세기 초에 근접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20세기 전과 비교하면 세계대전 이후 많은 국가가 괄목할만한 경제 성장으로 GDP가 최저 생계 비용을 웃돌면서 극빈층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로써 1세기 전과 비교하면 잃을 것이 훨씬 많아지고 나름대로 살만해진 저소득층이 대중 동원 전쟁이나 공산주의 혁명 같은 피비린내 진동하고 파괴적인 폭력을 선호할 이유는 지극히 낮아졌다. 설령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 현재의 눈으로는 얻는 것보다 잃을 것이 더 많아 보이는 ─ 대중 동원 전쟁보다는 드론과 정교한 무기, 로봇 등이 활개 치는 최첨단 기술의 실험장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국지전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더 크다. 그리고 세계대전 시절보다 점잖아지고 가진 것도 더 많아진 국민은 재분배 정책에도 급진적인 혁명보다는 점진적인 개혁을 선호한다. 하지만, 현실과 역사는 이런 식의 점잖은 개혁이나 허울뿐인 정책만으로는 부와 소득분배의 불평등이 상승하는 것을 반등시키기는 하늘의 별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고 말한다.

경제적 평준화에 대한 필요성

경제학자들이 자신만만하게 내놓은 불평등을 억제하고 감소시킬 수 있는 정책들은 넘쳐나다 못해 썩어 문드러질 지경이다. 하지만, 그런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사람들은 부와 소득분배 곡선에서 최상위층에 존재하는, 소위 ‘엘리트들’, 혹은 ‘사회지도층’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재발로 자신들의 재산을 깎아 먹을 칭찬받을 짓을 할 리는 없다. 그것이 가능해지려면 그들을 대단히 압박하는 사회적 합의나 민주적인 추진력이 필요하다. 평준화를 지향하는 사회적 합의와 민주적인 추진력을 국민으로부터 끌어내려면 평준화를 기필코 실현하고자 하는 국민의 강력한 의지가 발동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의지는 평준화 필요성에 대한 동기가 인지되어야만 비로소 발효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이런 질문을 한번 곱씹어보자.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따지고 들어가야 할 정도로 경제적 불평등, 그리고 평준화가 그렇게 중요한가? 이에 대해 샤이델은 소득과 부의 불균형과 연관되어 있을지 모를 빈곤이나 막대한 부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것이 우리 삶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있다고 설명한다. 참으로 성의 없고 모호한 대답이다. 당연히 나라고 뾰족한 대답이 있는 것도 아니다. ─ 여전히 상당한 비율로 존재하지만 ─ 극빈층이 점점 사라져 가는 것처럼 보이고, 저소득층이라 할지라도 한 세기 전과 비교하면 눈부시도록 향상된 물질적 혜택으로 소시민적인 만족을 불러일으키는 요즘, 그래서 가식적이고 위선적일지라도 대다수가 살만해졌다고 말하는 요즘 부의 불평등이나 평준화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의식이 깨어 있는 시민이 과연 몇이나 될까? 어쩌면 경제 성장이 평준화를 불러일으키기는커녕 부의 불평등을 가속하는 암울한 현실 그 자체가 가장 적절한 대답이 될지도 모르겠다. 대다수 사람은 부와 소득분배의 불평등을 확고하게 인식하지도 못하고, 그것을 개선할 의지도 없을뿐더러 평준화 필요성에 대한 동기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먹고살 만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먹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말이다.

無대책이 암시하는 미래의 불평등을 그려본다

발터 샤이델(Walter Scheidel)의 『불평등의 역사(The Great Leveler)』는 정말 우연한 선택이, 그리고 나의 훌륭한 직감이 뜻밖의 기쁨을 안겨준 경우라 할 수 있다. 비록 통계학이나 경제학에 대한 지식이 좀 필요한 부분에서는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꽤 있었지만, 그 밖은 역사를 읽어나가듯 무난하게 책장을 넘길 수가 있었다. 불평등의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토마 피케티의 책과 더불어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아쉬운 것은 샤이델마저도 평준화의 미래에 대한 뾰족한 대안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정책상의 부재라기보다는 피케티도 시인했듯 의지의 문제다. 평준화 정책들은 국가, 정치, 권력, 경제, 시민의 의지가 일심동체가 되어야만 실행될 수 있다. 현재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국가들이 그나마 가장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의 경우는 이것마저 따라 할 의지는 없어 보인다. 이미 엘리트들이 권력과 정치, 경제, 사회 곳곳을 장악한 상태에서 몰수나 다름없는 상속세 같은 것들이 실행되기를 바라는 것은 생선을 앞에 둔 고양이가 스님처럼 묵묵히 명상에만 잠겨있기를 희망하는 것과 진배없다. 그런 일은 단 한 번의 경우를 제외하곤 전무후무했다. 그 단 한 번이란 바로 부의 불평등과 평준화 역사에서 홍일점과도 같았던 세계대전이다. 그렇다고 평준화를 위해 전쟁을 기도해야만 하는가? 물론 이것은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얼토당토않은 말이다. 하지만, 역사는 말한다. 세상을 초토화하는 대규모 폭력만이 평준화라는 위대한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고 말이다.

디스토피아적인 SF영화에 등장하는 것처럼 미래에는 유전 공학과 로봇 공학 등 최첨단 기술을 독차지한 덕분에 인류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육체적, 정신적 힘을 보유하고 영생을 얻은 엘리트층이 전 세계를 지배할 수도 있다. 로봇이 노동자를 대체한 덕분에 나 같은 자연인들은 할 일이 없어지고, 자연스럽게 극빈층으로 떨어진다. 로봇 군단에 대항할 수 없는 자연인 무리는 과거 순박했지만, 한편으론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면 분노를 표출할 줄 알았던 농민들처럼 반란도, 봉기조차 일으킬 수 없다. 이런 미래는 부의 불평등뿐만 아니라 기술의 불평등도, 그리고 영화 「인 타임(In Time, 2011)」처럼 수명의 불평등도 극대화된 암울한 미래다. 반대로 모두가 기술을 공유하고 로봇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유토피아적인 사회를 꿈꿀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전쟁은 들어갈 틈이 없다. ─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 또다시 세계대전 같은 적의로 가득한 대중 동원 전쟁이 일어났다간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공할만한 파괴력을 지닌 무기들의 향연으로 사람이 살만한 곳은 초토화될 것이다. 그랬다가는 대평준화가 아니라 대빈곤화로 인류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을 것이다.

뾰족한 대책이 없다는 것을 희망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만큼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인류의 미래에는 많은 가능성이 있다. 그 많은 가능성 덕분에 문명은 꽃을 피웠고,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그 꽃을 후대에 무사히 넘겨줄 수 있었다. 여전히 진행 중인 ‘불평등의 역사’에서 과연 어떤 미래가 우리를 기쁘게 반길지, 아니면 우리의 모든 낙관적 기대와 믿음을 가혹하게 내동댕이칠지는 지금으로서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아무도 알 수 없기에 진지하게 고민할 가치가 있으며 흥미롭기까지 하다. 과연 당신이 바라는, 혹은 예견하는 미래에 전개될 ‘불평등의 역사’는 무엇인가? 그리고 당신이 바라고 생각하는 평준화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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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4/2019

[책 리뷰] 탈선? 아니면 넘치는 박식함의 산물? ~ 광골의 꿈(교고쿠 나쓰히코)

a dream of madness book cover
review rating

탈선? 아니면 넘치는 박식함의 산물?

Original Title: 狂骨の夢 by 京極 夏彦
“그렇습니다. 이 뼈의 주인이 이번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의 진짜 범인이에요.” (『광골의 꿈(狂骨の夢) 下』, p256)

탈선인가? 아니면 넘치는 박식함인가?

민간에 전승되는 요괴나 설화 등의 기괴한 이야기를 소재로 삼는 것으로 유명한 교고쿠 나쓰히코(京極 夏彦)지만 소재가 바닥난 것일까? 민속학과 종교학에 박학한 요괴 연구가인 그가 결국 일본서기(日本書紀)와 고사기(古事記)에 등장하는 신화적 인물까지 끄집어내고 말았다. 엑스트라도 아니고 조연도 아닌 당당히 주연 격으로 말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등장인물들이 500년 묶은 숙원이니 1500년 묶은 숙원이라고 씨부렁대는 것도 과히 지나치지 않다. 분명히 독자는 (나처럼) 미스터리한 소설이나 추리소설을 읽는 가볍고 신선한 기대감으로 이 책을 선택했을 터인데, 그런 기대감은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 고대사 이야기는 따발총처럼 날아든다. 사건을 이해하려면 선택의 여지 없이 그런 이야기를 울며 겨자 먹기로라도 새겨들어야 하니 독자는 기겁할 수밖에 없다. 눈에 잘 들어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뱀처럼 길고 징그럽기만 한 인명은 읽는 것조차 부담스럽다. 유령이나 요괴의 차이도 구분할 줄 모르는 나의 얕은 지식으로는 ─ 일본 사람들도 별로 관심 없거나 잘 알지 못할 것 같은 ─ 일본의 고대 신화를 앞세우는 교고쿠도의 세 치의 혀에 금세 넌더리가 날 수밖에 없다. 알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알고자 했던 것도 아닌 지식을 부지불식간에 받아들여만 하는 독자로서는 지리멸렬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단군 신화’에나 나올법한 인물을 대뜸 범인이라고 지목하니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번에는 사신 같은 사악한 풍모의 교고쿠도에게 제대로 걸린 것 같다. 좀 더 과장하면, 과연 이러한 이야기들이 일반인에게 얼마나 친숙한 이야기일지 의문까지 드는 지경이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지만, ‘꿈의 해석’이나 ‘정신분석’, ‘종교적 회심’, ‘프로이트’, ‘정신분열’, ‘신경증’, ‘광신’, ‘양광’ 등을 운운하는 설교성 텍스트는 조금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사실 이 정도 선에서만 유지해 줬으면 이전 작품처럼 현란한 교고쿠도의 말발에 호방하게 넘어갈 주었을 뿐만 아니라 ‘설교’인지 ‘현학’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그의 말발이 여전히 매력적으로 남았을 텐데, 이번에는 도가 지나친 것 같다. 지루한 일상을 잠시나마 잊고자 선택한 책이 다짜고짜 일본 고사를 들이대니, 마치 따분한 옛 교과서를 보는 것 같아 낭패다. 지루함을 넘어서 짜증스럽기까지 하다. 당황스러운 것은 둘째치고 괜히 시간만 낭비한 것 같아 불쾌하다. 홍수 난 강처럼 철철 넘치는 작가의 박식함을 감당해내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간혹 일어날 수 있는 탈선일까? 나로서는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광골의 꿈(狂骨の夢)』은 이전에 읽었던 교고쿠 나쓰히코의 세 작품(우무베의 여름, 망령의 상자, 엿보는 고헤이지)보다 지루하고도 한편으로는 실망스러운, 인스턴트 라면이나 패스트푸드처럼 배가 고파 먹을 때는 그럭저럭 삼킬 만했지만, 막상 먹고 나면 왜 먹었을까 하고 후회할 수도 있는 그런 소설이 되어버렸다.

‘뼈’로 시작해서 ‘뼈’ 끝나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 진지하게 결딴나는 이번 작품의 주요 모티브는 ‘꿈’과 ‘뼈’다. 하나가 정신적 모티브를 제공한다면 다른 하나는 물질적 모티브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여기저기 널브러진 사건들을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하나의 큰 사건으로 뭉뚱그리고, 그 사건들 속에 철두철미하게 숨은 (오로지 교고쿠도만이 해독할 수 있는) 오래 묵은 숙원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혜안이자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1500년이나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다. 이 신화를 알지 못하고는 엉망진창으로 뒤섞인 사건들을 이해하지도, 해결할 수도 없다는 사실 그 자체가 『광골의 꿈(狂骨の夢)』이 다소 지루하고 고루하게 다가올 수 있음을 예견하고 있다.

‘꿈’이니 ‘뼈’니, 그리고 여기에 ‘신화’까지 들먹이니 ‘이번엔 정말로 범인이 요괴나 유령이라도 되는 건가?’ 하고 세키구치 같은 흐리멍덩한 의심이 들 수도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런 것은 아니다. 그것은 결정적인 순간이면, “세상에는 말이지요, 이상한 일이라고는 무엇 하나 없어요. 그렇지, 세키구치 군?”이라고 능글맞게 말하는 교고쿠도의 여유만만한고 오만한 말로 대신 대답할 수 있다. 만약 그랬다면 정말 멍청한 요괴 소설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신화나 전설, 요괴 이야기의 신비롭고도 기괴한 점을 현재 펼쳐지는 사건을 해결하는 논리적인 열쇠로 변형하여 그럴듯하게 끼어맞추는 것이 교고쿠 나쓰히코의 소설을 읽는 현학적인 맛이 아니었던가? 또한, 추리소설에서는 드물게 종교와 철학, 그리고 이번에는 정신분석까지 끌어들이는 지적인 탐구 역시 교고쿠 나쓰히코의 소설에서나 맛볼 수 있는 강점이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신화에 깊게 천착했다는 점이 다소 지루하게 다가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의 강점이 묻힌 것도 소멸한 것도 아니다. 다만 이번에는 너무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아 있고, 그 주제가 나 같은 일반인이 다가가기에는 너무 먼 주제가 아니었던가 싶다.

아무튼, 유괴하는 스님, 뼈를 파내는 신주, 되살아나는 사자나 전생의 기억, 살이 붙어 가는 해골, 바다에 떠오른 금색 해골, 젊은 남녀의 집단 자살, 머리가 잘린 병역기피자 등 현실에서 일어난 서로 연관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해괴망측한 사건들과 불꽃 속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해골 앞에서 교접하는 남녀를 보는 꿈, 바닷속에 빠졌다가 머리뼈만 기세 좋게 수면으로 떠 오르는 꿈, 어릴 적 기괴한 체험으로 뼈를 무서워하게 된 목사가 서로 뭐가 어떻게 관련된 건지 복잡해서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쓸데없이 말발이 서는 교고쿠도처럼 쓸데없이 복잡한 인물과 사건 관계 때문에 나중에는 아예 이해하기를 포기하게 될 수도 있다. 마치 독자를 은근슬쩍 세키구치로 둔갑시키려는 것 같다. 그래도 결국 사건은 해결된다. 당연히 교고쿠도의 그 휘황찬란한 세 치의 혀와 특정 분야에서만큼은 브리태니커 뺨치는 그 박식함으로 말이다.

하지만, 신화까지 들먹어야 해결이 되는 것은 너무 멀리 나간 것 같고, 작가 혼자만 알고 있는 사실들만으로 추리를 완성하는 것은 치사하고 시시하다. 또한, 반전을 짜내고자 비겁한 속임수를 사용하는 것은 여태껏 작가의 추리와 논리대로 잘 따라온 독자를 배신하는 짓이자 독자의 기대를 한순간에 내동댕이치는 짓이다. 지난 작품을 재밌게 읽었고, 교고쿠도의 장광설 같은 궤변에 나름 맛을 들였던지라, 기대감이 너무 지나쳤나 보다. 너무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겠지만, 『광골의 꿈(狂骨の夢)』은 마쓰모토 세이초(松本 清張)의 소설 『푸른 묘점(蒼い描点)』처럼 유명 작가의 평작으로 남을만한 소설일지도 모르겠다.

여전한 교고쿠도의 못 말리는 친구들

그래도 다행스러운 점은 서로를 마구잡이로 바보 취급하는 교고쿠도의 들러리 같은 존재이자 못 말리는 친구들인 에노키즈, 세키구치, 기노가 여전히 간헐적인 유쾌함을 선사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사건을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혼란과 혼선을 부추기는 경우가 더 많은 교고쿠도의 친구들은 실로 추리소설뿐만 아니라 보통의 소설에서도 보기 드문 범상치 않은 인물들이다. 이들은 상식적인 인물이라고 말하기는 당연히 어렵고, 일반적인 지인이라고도 하기에는 너무 유별나고, 기인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그렇다고 재능이 특출난 것도 아니고, 모자란 재능을 덮어줄 의욕이 왕성한 것도 아니다.

에노키즈는 사람들이 모여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는 자리에서도 태평하게 잠이 들 수 있을 정도로 방약무인이다. 세키쿠치는 원숭이라고 놀림당하는 것이 하나도 불쌍하지 않을 정도로 칭찬하는 보람보다는 헐뜯는 보람이 더 큰 얼뜨기다. 범죄를 좋아하는 대불(伏佛) 같은 얼굴의 남자 기바는 머리보다 몸이 앞서야만 하는 형사이니 어려운 고사를 들먹어야만 실마리가 겨우 풀리는 교고쿠 나쓰히코가 창조한 사건에서는 더더욱 도움이 안 된다. 이들은 서로를 악연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우정을 유지하는 특이한 친구들이지만, 그런 해괴망측한 우정 속에서도 그럭저럭 의리를 견지하는 것이야말로 실로 미스터리다. 이들이 훌륭하게 조연 역할을 해주고 있기에 지루하고 방만하게 느껴지는 이번 작품도 나름 볼만하다고 우길 수가 있는 것이다.

아무튼, 교고쿠 나쓰히코의 지난 세 작품이 무미건조한 세상을 재밌게 해주는 많은 소설 중 하나인 것은 분명했지만, 『광골의 꿈(狂骨の夢)』에게 그러한 명예를 짊어주는 것은 당분간은 유보하고 싶다. 막상 이러한 글을 쓰고 보니 교고쿠 나쓰히코의 다음 작품을 선택하기가 망설여진다. 고민이다. 도서관에 비치된 교고쿠 나쓰히코의 소설 중 읽지 않은 작품은 다 읽으려고 마음먹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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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2019

[책 리뷰] 유령만큼이나 무섭고 기이한 인연에 대하여 ~ 엿보는 고헤이지(교고쿠 나쓰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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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만큼이나 무섭고 기이한 인연에 대하여

Original Title: 覘き小平次 by 京極 夏彦
“그래. 무엇이든 이야기해야만 비로소 존재가 되네. 이야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어. 거짓말이든 허풍이든 입 밖에 내면 낸 만큼 존재가 되는 거야. 자네가 얄팍한 것도, 내 속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도, 둘 다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겠지. 얄팍하다고 생각하는지 몰라도 자네에게는 두께가 있을 것일세. 텅 비었다고 여기지만 피도 있고 살도 있잖은가. 밥도 먹고 똥도 눈단 말이지. 사람이란 누구나 약간은 한심한 법이야.” (『엿보는 고헤이지』, p233)

살아 있는 유령, 얼뜨기 고헤이지

유명한 요괴 연구가, 하지만 고서점 주인 교고쿠도의 능란한 화술을 빌려 유령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못을 박았던 작가 교고쿠 나쓰히코(講談社文庫)가 ‘유령’ 추리소설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엿보는 고헤이지(のぞき小平次)』에는 한국의 전설적인 공포 드라마 ‘전설의 고향’처럼 진짜 유령이 등장할까? 민속학과 종교학에 박학한 요괴 연구가인 교고쿠 나쓰히코가 갑작스럽게 생각을 바꿔 유령의 존재를 인정할 리는 만무하다. 대신 독자를 한껏 홀릴 어처구니없는 인물을, 그것도 지금까지 읽지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그런 유일무이한 인물을 창조해냈다.

그는 유령 같은 외모와 행동 때문에 막무가내로 유령 취급당하지만 그렇다고 유령은 아니다. 무엇보다 칠흑처럼 캄캄한 것을 두려워한다는 점에서 그는 유령 자격 미달이다. 하지만, 그는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귀가 있어도 듣지 않고, 코가 있어도 냄새를 맡지 않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않는 영락없는 유령이다. 그는 땅거미 질 무렵의 어둑어둑함에 자신의 엷고 얇은, 그래서 아지랑이처럼 흐릿하고 수육처럼 흐물흐물한 육체를 묻어버리기를 좋아한다. 그렇다고 투명 인간처럼 존재감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이 소설 또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존재감은 눈앞에 확연히 드러나는 육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근처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눈에 띄지 않는 괴상한 존재가 몰래 자신을 훔쳐보고 있음을 자각할 때나 느낄법한 그 소름 끼치는 섬뜩함에서 나온다. 그래서 그가 가까이에 있다면, 불편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불편할 뿐만 아니라 어딘가에서 반드시 엿보고 있다는 음산한 상상에 기분도 나빠진다. 그는 유령처럼 흐릿하면서도 섬뜩한 존재감 때문에 아내처럼 보이는 여자에게나 그의 단 하나뿐인 친구처럼 행세하는 무뢰한에게나 반푼이 취급당한다. 툭하면 죽어버리라는 악담을 견뎌야 한다. 그가 바로 얼뜨기 배우 ‘고헤이지’다.

형편없는 인물이 내뿜는 유령 같은 음산한 매력

그는 아내로 보이는 여자와 친구처럼 행세하는 무뢰한으로부터 기관총처럼 사정없이 퍼부어대는 악담과 싸늘한 시선을 묵묵히 견딘다. 집중포화를 피해 참호로 기어들어 가는 다친 병사처럼 고헤이지는 악담과 냉대를 피해 어둑한 헛방 속으로 스멀스멀 소리 없이 기어들어 간다. 그리고는 자궁 속 태아처럼 몸을 잔뜩 웅크리고 하릴없이 발꿈치를 문지르면서, 한 치 반 틈 사이로 열린 문틈으로 세상을 엿본다. 아내 같은 여자를 엿본다. 아내 같은 여자가 자신의 친구인 척하는 무뢰한과 한껏 놀아나는 것을 엿본다. 고헤이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고헤이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니 아무 감정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도 이래저래 사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이 괴롭기는 하다. 하지만, 무리해서 괴로움을 벗어나기보다는 괴로움을 견딘다. 괴로움을 벗어난다고 편안함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괴로움을 견디는 것이 꼭 나쁜 일도 아니다. 그것이 그가 존재하는 방식, 아니 유일하게 존재할 수 있는 방식이다.

‘엿보는 고헤이지’는 그 어떤 소설에서도 보기 어려운 정말 형편없는 주인공이다. 쓸모도 없고, 근성도 없다. 그 누구에게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 얼뜨기 중의 얼뜨기다. 우울하고 음산한 존재로서 살아 있는 유령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에게서 살아 있는 반푼이 유령 취급당한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외면할 수가 없다.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는 심통을 부리며 애써 텍스트를 외면해 보지만, 한껏 돌 다 멈춘 눈알의 초점은 무심하게도 텍스트에 맞춰져 있다.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파렴치하게도 침까지 질질 흘리는 무아지경에 빠진 채 텍스트를 읽고 있다. 고헤이지를 읽고 있다. 고헤이지를 상상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야심한 밤에 혼자 숲을 산책하다 유령과 딱 마주쳤을 때, 유령이 내뿜는 음산한 공포에 사로잡혀 얼음처럼 얼어붙은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유령이 내뱉는 말을 따라 하고 유령이 시키는 대로 하는 둥, 유령이 발산하는 음산하고 어두운 기운에 유혹되어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조종당하고 있는 것이니라. 이런 연유가 아니라면, 나만큼이나 형편없는 고헤이지를 왜 읽고 있단 말인가! 그것도 아주 재미있게.

유령만큼이나 무섭고 기이한 인연에 대하여

굳이 『엿보는 고헤이지(のぞき小平次)』의 장르를 구분 짓는다면,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미스터리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일반적인 미스터리소설과는 달리 교고쿠 나쓰히코 특유의 현학적인 텍스트에서 송진처럼 끈적하게 묻어나오는 퇴폐적이고 염세적인, 그리고 고헤이지만큼이나 음산한 기운이 듬뿍 보태진 철학적 분위기가 묘한 중독성을 발휘한다. 이번 작품은 고헤이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유령만큼이나 무섭고 기이한 인연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왜 고헤이지는 유령 같은 음산한 은둔 생활을 하게 되었을까? 오쓰카라고 불리는 여자는 왜 죽도록 싫어하는 무능한 남자 고헤이지와 함께 사는 것일까? 무뢰한 다구로는 어떤 도움도 안 되는 고헤이지의 유일한 친구 행세를 왜 5년 동안이나 해왔던 것일까? 한때 미소년이라 칭송받았던 가센을 비롯해 14살 때 자신의 부모를 죽인 살인마 운페이와 다구로는 왜 아무런 존재감 없는 고헤이지를 죽일 마음을 먹었을까? 단지 무대 위에서 평소처럼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 유령 역할을 멋들어지게 소화해내는 것이 유일무이한 쓸모인 고헤이지의 무엇이 그들의 살의를 부추겼을까? 한편, 아홉 번 둔갑한다는 도적 지헤이는 위험에 빠진 고헤이지를 왜 굳이 도우려고 마음먹었을까?

이 모든 질문의 해답을 구하고자 한다면 등장인물들 사이를 그물처럼 얽히고설킨 인연과 관계의 실타래를 하나하나씩 풀어나가는 길뿐이다. 하지만, 살해, 살인, 죽음, 인신매매, 남창, 윤간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온갖 슬픔과 고통으로 얼룩진 과거를 가진 사람이 비슷한 과거를 가진 사람과 좋든 싫든, 그리고 크고 작든 인연을 맺게 되었을 때, 그 파장은 실로 엄청나다. 마이너스 더하기 마이너스가 더 큰 마이너스를 내놓는 것처럼 끔찍한 상처를 앓는 누군가가 비슷한 상처를 앓는 누군가와 인연을 맺을 때, 그들의 상처는 서로 상쇄되어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의 상처에 또 다른 상처를 보태주는 최악의 상황을 연출한다. 이것은 마치 누군가를 진정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가진 모든 상처까지도 안아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경구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보통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서로의 과거를 숨기지 않는다. 숨기지 않기에 그들 모르게 상처끼리 맞부딪혀 덧나거나 악화되는 것 역시 어느 정도 대비할 수 있다. 반대로 새로운 인연은 새로운 출발을 이야기한다. 보통 새로운 출발은 그때까지의 과거를 묻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전제로 시작한다. 인연이 깊지 않을 땐 더더욱 그러하다. 때에 따라선 과거가 새로운 출발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인연은 과거를 묻지 않는다. 과거를 묻지 않기에 그 사람이 어떤 상처와 고통을 안고 사는지 알 턱이 없다. 언제 어느 날, 서로의 과거가 남몰래 안고 온 상처와 고통이 두 사람 모르게 얽히고, 맞물리고, 결합하고, 반응하여 현재의 관계를 뒤틀고 뒤흔들 때, 그들은 모르고 당할 수밖에 없기에 그 파장과 충격은 알고 당하는 것보다 더 클 수밖에 없다.

깊던 얕든, 두껍든 얇든 인연이 한 번 맺어지면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영광스럽지 못한 과거의 상처와 고통이 전염병처럼 스멀스멀 퍼져나가 인연이라는 희미한 줄을 타고 상대에게 옮겨붙어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그리고 그 누구도 원하지 않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음을 『엿보는 고헤이지』는 긴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누군가와 새로운 인연을 맺는다는 것은, 언제 어느 날 상대가 짊어진 짐 중 하나가 어떤 계기를 통해 부지불식 간에 나에게로 굴러떨어져 발등을 찍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이야기한다. 고로 존재한다!

저마다 소름 끼치는 과거 한두 개씩 짊어지고 사는 등장인물들도 기이하지만, 더욱 기이한 것은 그들은 이름을 고침으로써 과거와의 단절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과론적이지만, 무수한 인연의 매듭으로부터 불거져 낳은 파괴적인 결말을 고려하면, 마치 벌레가 허물을 벗으려는 듯한 그들의 개명은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운 출발을 시도하려는 그들의 처절한 몸부림 정도로만 치부될 뿐이다. 그 누구도 완전히 허물을 벗지 못했을뿐더러, 무리하게 허물을 벗으려는 시도가 오히려 각자 짊어진 상처를 덧나게 한 격이 되고 말았다. 인간은 허물을 던져버림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벌레가 아니며, 벌레가 아니기에 과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가 없다. 만약 그들 서로가 인연으로만 그치지 않고, 서로의 과거를 허심탄회하게 밝힐 수 있는 진지한 관계로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면, 그런 비극적이고 치명적인 결말이 연출될 수 있었을까?

한때 도둑이었던 지헤이가 유령 고헤이지에게 한 충고처럼 이야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다. 이야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은 거짓말이든 허풍이든 이야기한 것만큼 두께가 생기고 부피가 생긴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진득하게 듣는 사람의 머리와 마음속으로 흘러 들어가 누군가의 기억 속에 새로 심은 치아처럼 단단히 자리 잡을 때 비로소 이야기한 사람의 존재감은 완성된다. 하지만, 『엿보는 고헤이지(のぞき小平次)』의 등장인물들은 인연은 맺지만,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이야기하더라도 자기 이야기만 실컷 떠들 뿐 진지하게 듣는 이가 없다. 그들 모두 고헤이지가 유령 같다고 하지만, 사실 그들 모두 유령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고무줄 같은 팽팽한 인연의 연결고리를 통해 서로 끌어당기고, 물렁물렁하고 흐릿한 존재감으로 말미암아 본의 아니게 서로 겹쳐지고 포개지다 보니 벼룩이 옮는 것처럼 서로의 상처와 고통까지 사이좋게 옮겨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런 연유로 현대인은 그렇게 미치도록 SNS에 매달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나를 세상에 이야기함으로써 미약한 존재감을 어떻게든 극복하고 싶은 허영으로 부푼 열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 치 반 틈 사이로...

기괴한 인물이다. 그리고 기구한 인연이다. 무슨 심보로 이런 소설을 내놓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 아무리 실화를 참고했다지만 ─ 정말 무지막지한 인물과 으스스한 이야기를 창조하고 말았다. 이미 세상에 내놓은 이상 어찌 손 쓸 도리도 없다. 그런 곤란한 말을 지껄이면서도 다음 이야기가 또 있을까 하는 기대감이 유령처럼 스르르 싹 트는 이유는 무엇일까? 살아 있는 유령처럼 살아가는 고헤이지에게서 얼뜨기 같은 나를 봐서일까? 아니면 이런 얼뜨기 같은 인물도 나름대로 존재의 법칙을 유지하며 흐릿하게나마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서 보잘것없는 삶의 위안을 받았기 때문일까? 아무튼, 나도 한 치 반 틈 사이로 세상을 내다보고 싶다. 과연 무엇을 볼 수 있을까? 그것이 문제로다.

살다 보면 별것도 아닌 것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가 있다. 살다 보면 별로 대단치 아니한 것들이 사람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뒤집어 놓을 때가 있다. 『엿보는 고헤이지(のぞき小平次)』가 대단한 소설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지만, 교고쿠 나쓰히코의 다른 작품들이 그렇듯이, 정치가가 유세하는 것 같은 능변과 종교인이 설교하는 것 같은 초월적인 무언가가 고명처럼 얹어지고, 여기에 교수가 강의하는 것 같은 현학적이고 선문답 같은 양념이 뿌려지면서, 신들린 약장수가 선전하는 것처럼 어딘가 미심쩍으면서도 왠지 믿고 싶어지는 텍스트가 완성된다. 하지만, 그것은 뻔히 알고도 속아 주는, 그것도 그냥 우울하게 속아 주는 것이 아니라 기껍게 속아 주는 거역하기 어려운 기괴한 매력을 발산한다. 교고쿠 나쓰히코의 텍스트를 읽노라면 마치 불량식품을 앞에 놓고 인생 최고의 고민에 빠진 나머지 침과 땀으로 범벅된 손가락을 쪽쪽 빠는 아이가 된 듯한 기분이다. 그런데 그거 아는가? 지금 한 치 반 틈 사이로 열린 문틈으로 누군가 당신을 엿보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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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2019

[책 리뷰] 성공 신화가 아닌 한 사람의 성장 이야기 ~ 비커밍 스티브 잡스(브렌트 슐렌더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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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 신화가 아닌 한 사람의 성장 이야기

Original Title: Becoming Steve Jobs by by Brent Schlender, Rick Tetzeli
게이츠는 잡스의 경영방식이 왜 표준이 되기에는 그 적용에 한계가 있는 독특한 사례인지 설명했다. “어쩌면 당신 책은 ‘모방하지 말아야 할 비법(Don’t Try This at Home)’이라고 제목을 붙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게이츠가 농담조로 한 말이다. “결국, 스티브처럼 되고자 하는 많은 사람이 ‘개자식’ 측면을 마스터하는 셈이에요. 다만 ‘천재’ 측면은 놓치고 있다는 게 문제지요.” 그리고 스티브 잡스의 방식으로 회사를 경영할 때의 한 가지 단점에 대해 이렇게 덧붙였다. “저지와 제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조직이 되기에 십상이죠.” (『비커밍 스티브 잡스』, p589)

죽음이 불러오는 관용

조금이라도 인정이 남아 있는 사람이라면 죽은 사람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것은 불편한 감정을 일으킨다. 헐뜯거나 비방한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앙갚음할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죽은 사람의 결점을 들춰내는 것은 왠지 모르게 꺼림칙하다. ‘좋은 사람’이 할 짓이 못 되는 것 같다. 죽은 사람의 단점과 결점을 감싸주기는커녕 그것을 굳이 들추어내는 자신이 옹졸하고 비겁해 보인다. 설령 죽은 사람이 생전에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할지라도 죽은 사람의 잘못을 산 사람이 물고 늘어지는 것은 너그럽지 못하고 관용이 부족한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 같아 추하다. 죽은 사람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일지라도 그 대상이 이미 죽었음에도 죽은 사람에 대한 증오심을 공공연하게 표출하는 것은 스스로 소인배임을 만천 한에 알리는 것과 다름없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도 있듯, 사람은 죽은 사람의 잘못이나 결점은 보통은 육신과 함께 땅속에 묻어두기를 원하고, 대신 죽은 사람과 가깝게 지낸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좋은 점만, 혹은 죽은 사람과 좋은 시간을 보냈던 것만을 기억하려 한다. 그것은 죽은 사람을 비난함으로써 앞으로 살아야 할 시간이 꽤 남은 산 사람의 명예나 입이 더럽혀지는 것을 예방하는 것은 물론이고, 죽은 사람과 함께 했던 사람들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히틀러 같은 인류의 적은 예외지만 말이다.

한마디로 기본적인 소양을 갖춘 사람이라면 죽은 사람에 대해 말할 때 어느 정도는 너그러워지는 법이다. 특히 죽은 사람과 함께 많은 일을 하면서 좋은 감정 나쁜 감정 다 맛본 사람들은 죽은 사람에 대한 추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기 마련이고, 죽은 사람이 유명인이라면 그런 심정은 더욱 깊어지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쁜 감정보다는 좋은 감정을 기억하기 마련이다. 추억은 아름다운 것이고 아름다워야 추억이라 말할 만하며, 그러하기에 죽은 사람과 핏발을 세워가며 논쟁했던 일이나, 서로 욕을 주고받으며 격렬하게 말싸움을 했던 일도 시간이 지나면 나름의 정당성을 가지고 공공연하게 미화된다. 죽음으로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고, 죽음은 공공연하게 동정과 관용을 불러온다.

오해에 대한 해명인가? 아니면 감상적인 미화인가?

내가 굳이 이런 졸렬한 소견을 밝힌 이유는 브렌트 슐렌더(Brent Schlender), 릭 테트젤리(Rick Tetzeli)가 『비커밍 스티브 잡스(Becoming Steve Jobs)』를 공저하면서 참고한 자료 중 상당 부분이 스티브 잡스 사후에 진행된 인터뷰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죽은 사람, 그것도 잡스와 함께 성공의 샴페인을 함께 터트리고 일부는 실패의 쓴잔을 함께 마신, 그래서 그들 스스로 위대한 사람이라고 평가내리는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은 잡스와 죽이 잘 맞았던 사람들이고, 몇몇은 잡스에게 재능을 인정받은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잡스와 함께 창의적인 일을 해낸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이 만약 잡스를 얼간이라고, 개자식이었다고 비판하는 것은 자식이 죽은 부모를 비난하는 것처럼 께름칙한 일이다. 설령 정당한 비판일지라도 그 대상이 일부에서는 영웅처럼 떠받들어지는 대단한 인물이라면 웬만한 용기와 각오 없이는 어렵다. 한편으로 그들은 잡스와 함께, 혹은 잡스 밑에서 세상이 놀랄 일을 해낸 사람들이고, 덕분에 명성과 부도 거머쥔 사람들이다. 그 자부심은 비할 데 없으며, 그 자부심은 잡스에 대한 추억과 기억에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영향력을 끼쳤을 것이다.

또한, 브렌트 슐렌더가 프롤로그에서도 밝혔듯, 『비커밍 스티브 잡스』는 스티브 잡스를 ‘반은 천재, 반은 얼간이로 살다간’ 인물로 각인시켰다고 여겨지는 월터 아이작슨(Walter Isaacson)이 쓴 『스티브 잡스(Steve Jobs)』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기를 든 책이다. 고로 독자는 이런 점들을 충분히 고려해 이 책을 읽어야 할 것을 당부시키고자 변변치 않은 변론을 펼쳐보았다. 사실 내가 보기에는 아이작슨의 책보다 슐렌더의 책이 잡스를 신격화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치 세상을 위기에서 구한 영웅처럼 띄워주는 눈꼴 시린 면이 더 많다고 여겨진다. 물론 이 모든 판단은 독자의 몫이지만, 만약 이 두 책을 모두 읽어볼 요량이라면 아이작슨과 슐렌더의 책을 모두 읽어본 나로서는 아이작슨의 공식 전기를 먼저 읽고 슐렌더의 책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아무래도 잡스가 살아생전에 집필을 부탁한 아이작슨의 공식 전기가 잡스에 대한 미화와 감상적인 추억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운 것 같다.

성공 신화가 아닌 한 인간의 성장 이야기

공식 전기(아이작슨)에 등장하는 스티브 잡스는 진짜 잡스가 아니라는 기치 아래 쓰인 『비커밍 스티브 잡스』는 스티브 잡스와 함께했던 동료들이 기억하는 잡스를 최대한 살리려는 노력의 하나이자, 한편으로는 공식 전기의 등장하는 강박적인 통제 욕구를 지닌 독재자 같은 잡스가 아니라 협력과 상호소통을 중시하는 지휘자로서 잡스를 기억하려는 시도다. 비록 잡스가 혈기왕성했던 청년 시절, 그리고 애플에서 쫓겨나기 전까지 ‘개자식’ 같은 면모를 보여준 것은 사실이고, 그런 개인적 성품의 결점을 그대로 이어갔던 넥스트(NeXT)에서의 실패도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 개인의 인간적 결점을 집요하게 들춰내는 것만으로는 훗날 침몰해가는 애플을 위기에서 건져 올릴 뿐만 아니라 이제 막 기사회생한 애플을 재조직하고 조련해 세계 최고의 혁신 기업으로 이끌게 될 잡스의 놀랍고도 성공적인, 누군가는 ‘신화’라고도 칭송하는 그런 이야기를 설명할 수 없다. ‘개자식’처럼 굴었던 청년 시절의 잡스라면 당연히 천지가 개벽할 그런 일을 일궈내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잡스는 기어이 해냈다. 그것은 잡스가 똑같은 실패를 거듭하는 얼간이가 아니라 실패의 교훈을 깊이 새길 줄 아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뜻이다.

애플에서 자신을 쫓아낸 사람들에게 복수하겠다는 집념이 다소 엿보이는 회사였던 넥스트의 실패를 통해서, 그리고 심드렁하게 인수한 픽사에서 자신의 ‘현실 왜곡장’을 간단히 물리치고 창의적 사고를 최상으로 운영하는 자신들만의 문화로 똘똘 뭉친 픽사 팀원들을 경험하면서 잡스는 많은 것을 깨달았다. 슐렌더는 그런 교훈이 없었다면 훗날 애플에서 펼쳐진 위대한 2막도 없었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슐렌더는 잡스가 넥스트를 직접 경영하면서 실패를 맛보고, 픽사가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로 창의성을 극대화하는 현장을 지켜보면서 조금씩 조금씩, 그렇지만 현실에 큰 영향력을 미칠 정도로 확실하게 변화해 나갔고, 그럼으로써 위대한 기업가의 자질을 갖출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잡스는 창의적인 사람들을 위한 창의적인 도구를 생산한다는 대의를 추구하는 이상적인 기업을 만들겠다는 열정은 그대로 간직한 채, 좀 더 신중해졌고, 기꺼이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했으며, 급진적인 방법이 아니라 점진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일이 더 많아졌으며, 예전처럼 팀원들의 갈등을 부추기기보다는 조화와 화합을 끌어내려고 노력했다. 쉽게 말해 잡스는 고단한 여정 속에서 엄청나게 성장하고 변했으며, 이러한 변화가 가능했기에 애플의 느리면서도 조심스러운 부활도 가능했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다. 그래서 한 사람의 성공 신화가 아니라 ─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법한 ─ 한 사람의 성장 이야기로써 『비커밍 스티브 잡스』를 어필하고 있다.

잡스의 인간적인 매력이 미치는 경계선

보기에 따라서는 잡스의 변화는 사람이 나이를 먹게 되었을 때 응당 갖추게 되는 성숙함과 노련미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슐렌더도 인정하듯 잡스가 애플 복귀 이후에도 감정적 충동이나 변덕, 무례한 언동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그리고 한 사람이 허물을 벗듯 자신의 천성을 온전히 벗어던질 수는 없다고 믿는 나는 잡스가 개과천선했다기보다는 노련해졌다고 본다. 하지만, 그것은 보통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서 응당 얻게 되는 평범한 노련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 정도로는 침몰하는 애플을 구해낼 수는 없다. 내가 볼 때 그 노련함은 어차피 약점을 완전히 벗어던질 수 없다면, 장점을 극대화하여 약점으로 말미암은 피해를 극복하거나 최소화하려는 의지를 압착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작가 짐 콜린스(Jim Collins)가 언급한 잡스의 가장 큰 장점인 ‘쉼 없는 몰두’가 마음껏 발휘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참고로 콜린스는 쉼 없는 몰두는 회복력의 원천이며, 자기 동기부여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제대로 알고자 하는 탐구심,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해내겠다는 열망, 그리고 최선을 다해 삶을 살겠다는 목적의식을 연료로 삼는다.

잡스의 ‘쉼 없는 몰두’가 가장 열정적으로, 그리고 가장 빈번하게 작용했던 곳은 당연히 그의 일터다. 잡스는 진정 자신이 하는 일을, 그리고 그 일과 관계된 모든 것을 사랑한 남자다. 안타까운 점은 그 경계가 지독히도 확실하게 그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즉, ─ 사람이건 물건이건 ─ 일에 도움이 되는 모든 것에는 자상하고 친절한 잡스가 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판단이 들면 소름 끼치도록 잔인한 잡스가 될 수도 있다. 애플로 복귀한 잡스를 도와 함께 성공 신화를 이끌었던 동료들이 시간이 흘러 쓸모가 없어지거나 재능이 고갈되는 것처럼 보이자 그들과 거리를 두면서 소원한 관계를 끌어낸 것도 잡스였고, 초창기 차고 모임에서부터 애플에 합류한 친구이자 애플 창업구성원인 대니얼 콧키가 정직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스톡옵션을 받지 못하게 한 것도 잡스였다. 그리고 잡스의 마케팅과 비즈니스 실력을 발동시킨 장본인이자, 어쩌면 두 사람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애플도 없었을 가능성이 농후했던 천재 엔지니어링 워즈니악과 서로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는 이유로 소원한 관계를 이어나간 것 역시 잡스다. 이런 점을 보면 잡스의 인간적인 매력이 미치는 범위가 극히 제한적임을 알 수 있다. 즉, 잡스에게 재능을 인정받거나, 혹은 잡스의 인간적 결점을 요령껏 피해가거나 인내할 수 있었던 사람들, 그래서 잡스와 함께 애플의 성공 이야기를 완성해나갈 수 있었던 사람들이 기억하는 잡스와 잡스의 배려와 관심이 미치는 경계선 밖으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이 기억하는 잡스가 같을 수는 없다. 전자의 사람들은 잡스를 자신에게 기회와 더불어 명성과 부를 가져다준 영웅이자 친구로서 추억될 것이고, 후자의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무시하거나 능력을 입증할 기회마저 박탈한 ‘개자식’으로 잡스를 기억할 것이다. 아마 이 중간 어디쯤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잡스의 진짜 모습이 어려있을 것이다.

성공한 사람의 발자취를 더듬어간다는 것

그 사람의 됨됨이를 몇 마디만으로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순하고 명확한 사람이 있고, 긴 설명으로도 부족한 복잡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있다. 이 중 어떤 사람이 좋고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잡스는 복잡한 성격과 더불어 그 복잡성을 배가시키는 변덕과 기벽까지 갖춘 사람이니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잡스를 읽고 있노라면 잡스만큼이나 변화무쌍한 성격을 가진 기인이자 간웅인 조조(曹魏)가 떠오른다. 자신이 필요로 하는 인재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웠지만, 그러한 인재라도 서로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이 드러나면 순욱 같은 공신이라도 내치는 조조의 몰인정은 앞서 얘기했던 잡스와 워즈니악 등의 소원한 관계를 보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몇몇 인물에 대한 분노나 복수심을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누그러트리지 못하는 질긴 적개심을 보면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江靑)이 떠오르기도 한다.

사실 잡스의 성격이 어떠한지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그런 것은 잡스의 비범한 재능을 부러워하고 시기하는 나 같은 소인배가 성공한 사람을 씹으면서 위안으로 삼을 때 써먹는 가십거리 정도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리고 『비커밍 스티브 잡스(Becoming Steve Jobs)』가 강조하는 것은 잡스가 실패와 좌절을 겪은 후에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이상을 끝까지 견지할 수 있었던 자신감과 자기 확신, 그리고 그것을 모종의 창의적인 과정을 거쳐 현실에 투영해 우리가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마음으로 느낄 수 있고, 두뇌로 작용할 수 있는, 지금까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놀라운 뭔가를 창출할 수 있게 만든 창조력과 부단한 열정을 돋보이게 하는 비범함이다. 또한, 여기저기 널린 소소한 아이디어들에서 미처 남들이 보지 못한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러한 아이디어들을 한데 모은 다음 그것들을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갈고 닦고 집대성해 엄청난 결과물을 창조해내는 창의적인 과정과 능력이야말로 잡스만이 할 수 있는 특출난 재능이다. 이런 재능에 비하면 그의 인간적 결점은 사소한 문제이고, 실재로도 사소한 문제였기에 잡스는 만인이 기억하는 혁신가이자 위대한 기업가로 남을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개자식’이겠지만 말이다.

자신보다 월등히 뛰어난 사람의 발자취를 더듬어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보통 사람의 배짱과 포부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언동과 결단력, 부럽고 시기심을 유발시키고도 남는 재능, 여기에 남부럽지 않은 가족 관계와 훌륭한 인간관계를 가진 누군가의 전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소갈머리 좁은 나의 마음은 부러움과 시기심으로 끓어오르고 황당하게 부아까지도 치민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그러고 싶지는 않지만, 전기적 삶을 살아간 사람의 발자취와 공적이 투영된 폭넓고 화려한 스펙트럼 위로 바퀴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보잘것없는 자신의 삶이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난 기업가도 아니고, 그런 것은 꿈도 꾸지 않지만, 짧고 굵직한 삶을 살아간 잡스의 삶은 쓸쓸한 뒤안길 같은 나의 초라한 삶을 반추시킨다. 잡스만큼 분명하지는 않을 것이고, 잡스만큼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나에게도 내 인생에 크고 작은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난 그것을 찾지 못했다. 아니면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일까? 어쩌면 영영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염치 불고하고 꿋꿋하게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리라고 여기며 나는 오늘도 자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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