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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8.

[책 리뷰] 세계대전이 나은 불편한 진실, ‘대평준화’ ~ 불평등의 역사(발터 샤이델)

The-Great-Leve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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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전이 나은 불편한 진실, ‘대평준화’

Original Title: The Great Leveler: Violence and the History of Inequality from the Stone Age to the Twenty-First Century by Walter Scheidel
제국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 게 일반적이고, 전염병은 어느 시점이건 한때 발병하게 마련이었다. 끝없는 로마 제국이나 전염병 없는 세상은 현실적인 반사실이 아니다. 실제 충격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결국에는 다른 충격이 그 자리를 대신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아주 최근까지도 주기적인 폭력적 평준화에 대한 그럴듯한 대안은 없었다. (『불평등의 역사(The Great Leveler)』, p518)

나의 독서 습관과 그 흐름에 대하여

사실 난 뭔가 내세우기 위해, 혹은 남다른 특별한 목적으로 책을 읽지는 않는다. 도박이나 게임에 중독되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하고 생각하면서 독서에 중독되면 ‘할 일 되게 없나 보네’라고 비웃는 요즘, 그리고 일 중독이 만연한 요즘에는 독서는 그저 시간이 남아도는, 혹은 백수들의 알량한 취미 정도로 보는 사람도 많다. 그들은 책을 읽지 않으니 독서의 가치 또한 알지 못한다. 나 같은 경우는 그저 사는 게 지루하고, 지루하지 않더라도 죽을 날을 하릴없이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어 선택한 ‘시간 보내기’ 놀이가 독서다. 그렇게 발을 붙인 취미가 뜻밖에 죽은 듯이 잠자던 나의 지적 호기심을 깨우며 느슨한 중독을 일으켰고, 그 덕분에 안중근 선생의 유명한 경구인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의 체험적 의미까지 어렴풋이나마 깨우치면서 지금까지 유지해 온 것이다.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킨다는 그럴싸한 이유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목적 없이 책을 읽다 보니, 어떤 책을 읽을 것에 대한 목적의식도 희미할 때가 있다. 주식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지적 호기심이 다행스럽게 상승 분위기를 유지하고, 여기에 조금 전 읽은 책이 다음에는 어떤 책을 읽어야 하겠다는 ‘독서 릴레이’의 충실한 조언자 역할을 제대로 해낸다면, 다음에 읽어야 할 책을 굳이 고민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런 권장할만한 분위기가 늘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주식이 급락하는 것처럼 지적 호기심이 바닥을 쳐 독서에 흥미를 잃을 때도 있고, 침몰한 배처럼 지적 호기심이 지향해야 할 방향성을 잃기도 한다. 두 권을 고른다고 할 때 한 권 정도는 부담 없이 시원스럽게 읽을 수 있는 ─ 내가 좋아하는 작가나 작풍 위주의 ─ 장르소설이나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문학을 선택함으로써 독서 자체에 흥미를 잃는 것은 미리 방지할 수 있지만, 지적 호기심이나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는 선택하기 어려운 ─ 소설을 제외한 ─ 교양 도서는 그런 식으로 문제를 넘길 수가 없다. 꼭 교양 도서를 읽어야만 하는 이유나 의무는 없지만, 좋은 주제로 잘 쓰인 교양 도서는 웬만한 소설만큼이나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소설에서는 맛볼 수 없는 ─ 읽어본 사람만이 아는 ─ 짜릿한 지적 충만감을 경험하게 해준다. 나의 대출 습관이 어렴풋이 소설 1~2권, 교양 도서 1권의 비율로 자리 잡은 것도 그런 연유에서이다.

아무튼, 나의 본받을만한 식성처럼 책을 선택함에서도 종교 분야 정도를 제외하고는 특별히 구애받는 것은 없다. 이런 나이지만, 막상 목적의식이나 내 구미를 자극하는 지적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을 때는 무엇을 골라야 할지 난감하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막연하다. 이럴 땐 옛 골목처럼 더럽게 비좁은 도서관의 책장 사이를 유령처럼 돌아다니며 헤매기 일쑤다. 마치 마트에서 수많은 반찬거리를 앞에 두고 오늘 저녁에는 어떤 반찬을 식탁 위에 올려야 할지 망설이는 알뜰살뜰한 주부의 마음이랄까?

참고로 사람마다 제각각인 식성처럼 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난 ‘추천 도서’나 ‘권장 도서’를 그다지 신용하지 않는다. 남이 권해주는 반찬이나 음식이 언제나 맛있는 것은 아니고, 가족이 먹을 음식은 오로지 자신이 직접 선택해야 안심할 수 있는 성실한 주부처럼 책 역시 나의 입맛과 나의 지적 나침반이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선택해야 후회가 없다. 후회한다고 해도 오로지 내 잘못이니 선택의 실패로부터 교훈도 배울 수 있다.

세계대전이 나은 불편한 진실

역시나 서론이 쓸데없이 길었는데, 그렇게 뭘 골라야 할지 망설이며 시간을 낭비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선택한 책이 바로 발터 샤이델(Walter Scheidel)의 『불평등의 역사(The Great Leveler)』이다. 사람은 지구상의 그 어떤 동물보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자부한다. 하지만, 살아온 날이 살아갈 날보다 많아질수록, 시간이 오래 걸리는 신중에 신중을 기한 선택보다 직감에 따른 신속한 선택이 때론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고로 난 직감에 따라 두툼한 것이 뭔가 품위 있어 보이는 양장이라는 겉모양에 현혹되어 이 책을 선택했는데, 결과적으로 ─ 자화자찬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물론 아주 가끔은 고루하기 이룰 데 없는 책을 고를 때도 있지만, 책을 선택하는 것에서만큼은 나의 직감은 매우 훌륭하게 작동해 왔음을 『불평등의 역사(The Great Leveler)』가 다시 한번 증명해 준 셈이다. 내가 읽은 책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사전 지식 없이 오로지 나의 직감과 ─ 책을 고를 때만 발동하는 듯한 ─ 사려 깊은 판단력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여 선택한 책들이다.

읽기 전에는 몰랐지만, 『불평등의 역사』을 읽으니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의 『21세기 자본(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이 떠오른다. 둘 다 부와 소득분배의 불평등이라는, 인류가 농경, 가축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떠오른 고질적인 문제이자 ─ 내 생각엔 상위 10% 정도를 제외한 ─ 다수의 관심을 끌만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피케티가 20세기 유럽의 심상치 않은 부, 소득분배, 자본의 불평등을 도식적으로 표시한 여러 등락 곡선을 처음 봤을 때 눈에 띄었던 것은 세계대전이 가져온 곡선의 급락, 즉 부의 소득분배의 급작스러운 평준화이다. 샤이델은 이처럼 세계대전 시기에 이룩한 급격한 부의 평준화를 ‘대압착(Great Compression, 大壓搾)’이라고 지칭한다.

아무튼,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읽는 내내 내 머릿속을 불편하게 했던 것은 다름 아니라 대규모 전쟁이 이런 대압착을 불러온 결정적인 원인은 아니었을까 하는 불손한 생각이었다. 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이 인류 문헌에 기록된 역사에서 불평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유일무이한 시기였다고 해서, 더는 다다를 때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극심한 부의 불평등이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라고 딱 부러지게 지적할 수는 없지만, 세계대전의 결과만을 놓고 보면 전쟁이 부의 불평등을 완화하는 어떤 극적인 요소로 작용한다고는 볼 수 있다. 피케티의 책을 읽는 내내 그런 불안한 생각들이 길 잃은 파리처럼 왱왱거리며 머릿속을 맴돌았는데, 친절하게도 샤이델은 나의 그런 불손한 생각에 종지부를 찍어주었다. 나의 의심이 전혀 허튼 것이 아니었을뿐더러 오히려 정곡을 찔렀다는 점에서 약간의 자부심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인류사에서 대규모 전쟁만이 부를 거머쥔 소수를 거덜 내는 평준화를 이룰 수 있다면, 세계대전 이후로 30~40년 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된 평준화 시기가 1980년대 전후로 반등하여 다시 20세기 초 상황으로 치닫는 지금, 이 부의 불평등이 깨지려면 세계대전 같은 파멸적인 총력전을 바라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두려움과 망측함이 나를 당혹스럽게 한다.

대규모 폭력만이 괄목할만한 평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샤이델이 개괄하는 ‘불평등의 역사’는 수렵 • 채집 생활에 바탕을 둔 선사 시대부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이후 최초의 잉여 자원을 생산하고 권력을 등에 업은 소수가 잉여 자원을 축적할 수 있게 된 농사 • 가축 생활로 시작된 인류의 ‘불평등의 역사’는 찡하게도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유지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최근의 부와 소득분배 불평등의 심상치 않은 증가 추세는 최고 정점을 찍었던 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으로 회귀하는 듯하다. 그렇다고 ‘불평등의 역사’에서 부의 불평등이 언제나 상승 곡선을 달렸던 것은 아니다. 놀랍게도 끝없이 치솟을 것 같았던 불평등이 ─ 드물지만 ─ 대폭 감소하여 잠시 평준화가 이루어졌던 시기가 있었다. 무엇이 그런 급작스러운 평준화, 즉 대압착 시대를 불러왔을까? 그것은 성장지상주의자의 희망대로 경제 성장의 성과도 아니었고, 민주주의의 허울뿐인 경제정의도 아니었다. 신의 계시는 더더욱 아니었으며, 우연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자본과 자원의 가공할만한 물리적 파괴와 대량의 인명 살상을 불러온 엄청난 규모의 폭력이었다. 대평준화는 대규모 폭력에 대한 두려움을 동반한 대규모 폭력만이 유일무이한 원인이었다. 샤이델은 대압착 시대를 불러온 네 가지의 대규모 폭력으로 대중 동원 전쟁, 변혁적 혁명, 국가 실패 그리고 치명적 대유행병을 언급하며 이들을 당당히 ‘평준화의 네 기사(騎士)’라 부른다.

이 사총사(四銃士) 중 단연코 효과가 제일이었던 것은 대중 동원 전쟁, 즉 세계대전이다. 세계대전이 폭풍처럼 일으킨 총력전은 전쟁에 소요되는 모든 자원을 끄집어내는데 필요한 급진적 몰수와 ─ 현재처럼 평화롭고 안정적인 시기에는 불가능에 가까운 ─ 급진적인 재분배 정책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수월하게 끌어냈다. 그뿐만 아니라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는 세계대전에 대한 경각심과 전쟁만큼이나 무자비한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두려움이 전쟁 중에 도출된 재분배 정책에 대한 합의를 유지해나가는 의지와 동기가 되었다. 하지만, 냉전이 종식되고, 공산주의 진영의 두 거두 중국과 소련이 각기 다른 이유로 시장 경제를 받아들이면서 세상은 또다시 평화와 안정의 시기를 보내게 되었고, 그 결과 아직 번영을 구가하고 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기특했던 평준화 시대도 종식을 고했다.

이로써 다시 부의 소득분배의 불평등 곡선이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것도, 그리고 일말의 주저 없이 작금의 불평등 곡선의 상승 추세가 불평등의 역사상 부의 분배가 가장 불평등했던 20세기 초에 근접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20세기 전과 비교하면 세계대전 이후 많은 국가가 괄목할만한 경제 성장으로 GDP가 최저 생계 비용을 웃돌면서 극빈층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로써 1세기 전과 비교하면 잃을 것이 훨씬 많아지고 나름대로 살만해진 저소득층이 대중 동원 전쟁이나 공산주의 혁명 같은 피비린내 진동하고 파괴적인 폭력을 선호할 이유는 지극히 낮아졌다. 설령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 현재의 눈으로는 얻는 것보다 잃을 것이 더 많아 보이는 ─ 대중 동원 전쟁보다는 드론과 정교한 무기, 로봇 등이 활개 치는 최첨단 기술의 실험장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국지전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더 크다. 그리고 세계대전 시절보다 점잖아지고 가진 것도 더 많아진 국민은 재분배 정책에도 급진적인 혁명보다는 점진적인 개혁을 선호한다. 하지만, 현실과 역사는 이런 식의 점잖은 개혁이나 허울뿐인 정책만으로는 부와 소득분배의 불평등이 상승하는 것을 반등시키기는 하늘의 별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고 말한다.

경제적 평준화에 대한 필요성

경제학자들이 자신만만하게 내놓은 불평등을 억제하고 감소시킬 수 있는 정책들은 넘쳐나다 못해 썩어 문드러질 지경이다. 하지만, 그런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사람들은 부와 소득분배 곡선에서 최상위층에 존재하는, 소위 ‘엘리트들’, 혹은 ‘사회지도층’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재발로 자신들의 재산을 깎아 먹을 칭찬받을 짓을 할 리는 없다. 그것이 가능해지려면 그들을 대단히 압박하는 사회적 합의나 민주적인 추진력이 필요하다. 평준화를 지향하는 사회적 합의와 민주적인 추진력을 국민으로부터 끌어내려면 평준화를 기필코 실현하고자 하는 국민의 강력한 의지가 발동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의지는 평준화 필요성에 대한 동기가 인지되어야만 비로소 발효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이런 질문을 한번 곱씹어보자.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따지고 들어가야 할 정도로 경제적 불평등, 그리고 평준화가 그렇게 중요한가? 이에 대해 샤이델은 소득과 부의 불균형과 연관되어 있을지 모를 빈곤이나 막대한 부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것이 우리 삶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있다고 설명한다. 참으로 성의 없고 모호한 대답이다. 당연히 나라고 뾰족한 대답이 있는 것도 아니다. ─ 여전히 상당한 비율로 존재하지만 ─ 극빈층이 점점 사라져 가는 것처럼 보이고, 저소득층이라 할지라도 한 세기 전과 비교하면 눈부시도록 향상된 물질적 혜택으로 소시민적인 만족을 불러일으키는 요즘, 그래서 가식적이고 위선적일지라도 대다수가 살만해졌다고 말하는 요즘 부의 불평등이나 평준화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의식이 깨어 있는 시민이 과연 몇이나 될까? 어쩌면 경제 성장이 평준화를 불러일으키기는커녕 부의 불평등을 가속하는 암울한 현실 그 자체가 가장 적절한 대답이 될지도 모르겠다. 대다수 사람은 부와 소득분배의 불평등을 확고하게 인식하지도 못하고, 그것을 개선할 의지도 없을뿐더러 평준화 필요성에 대한 동기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먹고살 만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먹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말이다.

無대책이 암시하는 미래의 불평등을 그려본다

발터 샤이델(Walter Scheidel)의 『불평등의 역사(The Great Leveler)』는 정말 우연한 선택이, 그리고 나의 훌륭한 직감이 뜻밖의 기쁨을 안겨준 경우라 할 수 있다. 비록 통계학이나 경제학에 대한 지식이 좀 필요한 부분에서는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꽤 있었지만, 그 밖은 역사를 읽어나가듯 무난하게 책장을 넘길 수가 있었다. 불평등의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토마 피케티의 책과 더불어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아쉬운 것은 샤이델마저도 평준화의 미래에 대한 뾰족한 대안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정책상의 부재라기보다는 피케티도 시인했듯 의지의 문제다. 평준화 정책들은 국가, 정치, 권력, 경제, 시민의 의지가 일심동체가 되어야만 실행될 수 있다. 현재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국가들이 그나마 가장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의 경우는 이것마저 따라 할 의지는 없어 보인다. 이미 엘리트들이 권력과 정치, 경제, 사회 곳곳을 장악한 상태에서 몰수나 다름없는 상속세 같은 것들이 실행되기를 바라는 것은 생선을 앞에 둔 고양이가 스님처럼 묵묵히 명상에만 잠겨있기를 희망하는 것과 진배없다. 그런 일은 단 한 번의 경우를 제외하곤 전무후무했다. 그 단 한 번이란 바로 부의 불평등과 평준화 역사에서 홍일점과도 같았던 세계대전이다. 그렇다고 평준화를 위해 전쟁을 기도해야만 하는가? 물론 이것은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얼토당토않은 말이다. 하지만, 역사는 말한다. 세상을 초토화하는 대규모 폭력만이 평준화라는 위대한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고 말이다.

디스토피아적인 SF영화에 등장하는 것처럼 미래에는 유전 공학과 로봇 공학 등 최첨단 기술을 독차지한 덕분에 인류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육체적, 정신적 힘을 보유하고 영생을 얻은 엘리트층이 전 세계를 지배할 수도 있다. 로봇이 노동자를 대체한 덕분에 나 같은 자연인들은 할 일이 없어지고, 자연스럽게 극빈층으로 떨어진다. 로봇 군단에 대항할 수 없는 자연인 무리는 과거 순박했지만, 한편으론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면 분노를 표출할 줄 알았던 농민들처럼 반란도, 봉기조차 일으킬 수 없다. 이런 미래는 부의 불평등뿐만 아니라 기술의 불평등도, 그리고 영화 「인 타임(In Time, 2011)」처럼 수명의 불평등도 극대화된 암울한 미래다. 반대로 모두가 기술을 공유하고 로봇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유토피아적인 사회를 꿈꿀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전쟁은 들어갈 틈이 없다. ─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 또다시 세계대전 같은 적의로 가득한 대중 동원 전쟁이 일어났다간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공할만한 파괴력을 지닌 무기들의 향연으로 사람이 살만한 곳은 초토화될 것이다. 그랬다가는 대평준화가 아니라 대빈곤화로 인류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을 것이다.

뾰족한 대책이 없다는 것을 희망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만큼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인류의 미래에는 많은 가능성이 있다. 그 많은 가능성 덕분에 문명은 꽃을 피웠고,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그 꽃을 후대에 무사히 넘겨줄 수 있었다. 여전히 진행 중인 ‘불평등의 역사’에서 과연 어떤 미래가 우리를 기쁘게 반길지, 아니면 우리의 모든 낙관적 기대와 믿음을 가혹하게 내동댕이칠지는 지금으로서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아무도 알 수 없기에 진지하게 고민할 가치가 있으며 흥미롭기까지 하다. 과연 당신이 바라는, 혹은 예견하는 미래에 전개될 ‘불평등의 역사’는 무엇인가? 그리고 당신이 바라고 생각하는 평준화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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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4.

[책 리뷰] 탈선? 아니면 넘치는 박식함의 산물? ~ 광골의 꿈(교고쿠 나쓰히코)

a dream of madness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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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선? 아니면 넘치는 박식함의 산물?

Original Title: 狂骨の夢 by 京極 夏彦
“그렇습니다. 이 뼈의 주인이 이번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의 진짜 범인이에요.” (『광골의 꿈(狂骨の夢) 下』, p256)

탈선인가? 아니면 넘치는 박식함인가?

민간에 전승되는 요괴나 설화 등의 기괴한 이야기를 소재로 삼는 것으로 유명한 교고쿠 나쓰히코(京極 夏彦)지만 소재가 바닥난 것일까? 민속학과 종교학에 박학한 요괴 연구가인 그가 결국 일본서기(日本書紀)와 고사기(古事記)에 등장하는 신화적 인물까지 끄집어내고 말았다. 엑스트라도 아니고 조연도 아닌 당당히 주연 격으로 말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등장인물들이 500년 묶은 숙원이니 1500년 묶은 숙원이라고 씨부렁대는 것도 과히 지나치지 않다. 분명히 독자는 (나처럼) 미스터리한 소설이나 추리소설을 읽는 가볍고 신선한 기대감으로 이 책을 선택했을 터인데, 그런 기대감은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 고대사 이야기는 따발총처럼 날아든다. 사건을 이해하려면 선택의 여지 없이 그런 이야기를 울며 겨자 먹기로라도 새겨들어야 하니 독자는 기겁할 수밖에 없다. 눈에 잘 들어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뱀처럼 길고 징그럽기만 한 인명은 읽는 것조차 부담스럽다. 유령이나 요괴의 차이도 구분할 줄 모르는 나의 얕은 지식으로는 ─ 일본 사람들도 별로 관심 없거나 잘 알지 못할 것 같은 ─ 일본의 고대 신화를 앞세우는 교고쿠도의 세 치의 혀에 금세 넌더리가 날 수밖에 없다. 알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알고자 했던 것도 아닌 지식을 부지불식간에 받아들여만 하는 독자로서는 지리멸렬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단군 신화’에나 나올법한 인물을 대뜸 범인이라고 지목하니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번에는 사신 같은 사악한 풍모의 교고쿠도에게 제대로 걸린 것 같다. 좀 더 과장하면, 과연 이러한 이야기들이 일반인에게 얼마나 친숙한 이야기일지 의문까지 드는 지경이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지만, ‘꿈의 해석’이나 ‘정신분석’, ‘종교적 회심’, ‘프로이트’, ‘정신분열’, ‘신경증’, ‘광신’, ‘양광’ 등을 운운하는 설교성 텍스트는 조금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사실 이 정도 선에서만 유지해 줬으면 이전 작품처럼 현란한 교고쿠도의 말발에 호방하게 넘어갈 주었을 뿐만 아니라 ‘설교’인지 ‘현학’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그의 말발이 여전히 매력적으로 남았을 텐데, 이번에는 도가 지나친 것 같다. 지루한 일상을 잠시나마 잊고자 선택한 책이 다짜고짜 일본 고사를 들이대니, 마치 따분한 옛 교과서를 보는 것 같아 낭패다. 지루함을 넘어서 짜증스럽기까지 하다. 당황스러운 것은 둘째치고 괜히 시간만 낭비한 것 같아 불쾌하다. 홍수 난 강처럼 철철 넘치는 작가의 박식함을 감당해내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간혹 일어날 수 있는 탈선일까? 나로서는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광골의 꿈(狂骨の夢)』은 이전에 읽었던 교고쿠 나쓰히코의 세 작품(우무베의 여름, 망령의 상자, 엿보는 고헤이지)보다 지루하고도 한편으로는 실망스러운, 인스턴트 라면이나 패스트푸드처럼 배가 고파 먹을 때는 그럭저럭 삼킬 만했지만, 막상 먹고 나면 왜 먹었을까 하고 후회할 수도 있는 그런 소설이 되어버렸다.

‘뼈’로 시작해서 ‘뼈’ 끝나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 진지하게 결딴나는 이번 작품의 주요 모티브는 ‘꿈’과 ‘뼈’다. 하나가 정신적 모티브를 제공한다면 다른 하나는 물질적 모티브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여기저기 널브러진 사건들을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하나의 큰 사건으로 뭉뚱그리고, 그 사건들 속에 철두철미하게 숨은 (오로지 교고쿠도만이 해독할 수 있는) 오래 묵은 숙원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혜안이자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1500년이나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다. 이 신화를 알지 못하고는 엉망진창으로 뒤섞인 사건들을 이해하지도, 해결할 수도 없다는 사실 그 자체가 『광골의 꿈(狂骨の夢)』이 다소 지루하고 고루하게 다가올 수 있음을 예견하고 있다.

‘꿈’이니 ‘뼈’니, 그리고 여기에 ‘신화’까지 들먹이니 ‘이번엔 정말로 범인이 요괴나 유령이라도 되는 건가?’ 하고 세키구치 같은 흐리멍덩한 의심이 들 수도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런 것은 아니다. 그것은 결정적인 순간이면, “세상에는 말이지요, 이상한 일이라고는 무엇 하나 없어요. 그렇지, 세키구치 군?”이라고 능글맞게 말하는 교고쿠도의 여유만만한고 오만한 말로 대신 대답할 수 있다. 만약 그랬다면 정말 멍청한 요괴 소설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신화나 전설, 요괴 이야기의 신비롭고도 기괴한 점을 현재 펼쳐지는 사건을 해결하는 논리적인 열쇠로 변형하여 그럴듯하게 끼어맞추는 것이 교고쿠 나쓰히코의 소설을 읽는 현학적인 맛이 아니었던가? 또한, 추리소설에서는 드물게 종교와 철학, 그리고 이번에는 정신분석까지 끌어들이는 지적인 탐구 역시 교고쿠 나쓰히코의 소설에서나 맛볼 수 있는 강점이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신화에 깊게 천착했다는 점이 다소 지루하게 다가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의 강점이 묻힌 것도 소멸한 것도 아니다. 다만 이번에는 너무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아 있고, 그 주제가 나 같은 일반인이 다가가기에는 너무 먼 주제가 아니었던가 싶다.

아무튼, 유괴하는 스님, 뼈를 파내는 신주, 되살아나는 사자나 전생의 기억, 살이 붙어 가는 해골, 바다에 떠오른 금색 해골, 젊은 남녀의 집단 자살, 머리가 잘린 병역기피자 등 현실에서 일어난 서로 연관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해괴망측한 사건들과 불꽃 속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해골 앞에서 교접하는 남녀를 보는 꿈, 바닷속에 빠졌다가 머리뼈만 기세 좋게 수면으로 떠 오르는 꿈, 어릴 적 기괴한 체험으로 뼈를 무서워하게 된 목사가 서로 뭐가 어떻게 관련된 건지 복잡해서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쓸데없이 말발이 서는 교고쿠도처럼 쓸데없이 복잡한 인물과 사건 관계 때문에 나중에는 아예 이해하기를 포기하게 될 수도 있다. 마치 독자를 은근슬쩍 세키구치로 둔갑시키려는 것 같다. 그래도 결국 사건은 해결된다. 당연히 교고쿠도의 그 휘황찬란한 세 치의 혀와 특정 분야에서만큼은 브리태니커 뺨치는 그 박식함으로 말이다.

하지만, 신화까지 들먹어야 해결이 되는 것은 너무 멀리 나간 것 같고, 작가 혼자만 알고 있는 사실들만으로 추리를 완성하는 것은 치사하고 시시하다. 또한, 반전을 짜내고자 비겁한 속임수를 사용하는 것은 여태껏 작가의 추리와 논리대로 잘 따라온 독자를 배신하는 짓이자 독자의 기대를 한순간에 내동댕이치는 짓이다. 지난 작품을 재밌게 읽었고, 교고쿠도의 장광설 같은 궤변에 나름 맛을 들였던지라, 기대감이 너무 지나쳤나 보다. 너무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겠지만, 『광골의 꿈(狂骨の夢)』은 마쓰모토 세이초(松本 清張)의 소설 『푸른 묘점(蒼い描点)』처럼 유명 작가의 평작으로 남을만한 소설일지도 모르겠다.

여전한 교고쿠도의 못 말리는 친구들

그래도 다행스러운 점은 서로를 마구잡이로 바보 취급하는 교고쿠도의 들러리 같은 존재이자 못 말리는 친구들인 에노키즈, 세키구치, 기노가 여전히 간헐적인 유쾌함을 선사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사건을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혼란과 혼선을 부추기는 경우가 더 많은 교고쿠도의 친구들은 실로 추리소설뿐만 아니라 보통의 소설에서도 보기 드문 범상치 않은 인물들이다. 이들은 상식적인 인물이라고 말하기는 당연히 어렵고, 일반적인 지인이라고도 하기에는 너무 유별나고, 기인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그렇다고 재능이 특출난 것도 아니고, 모자란 재능을 덮어줄 의욕이 왕성한 것도 아니다.

에노키즈는 사람들이 모여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는 자리에서도 태평하게 잠이 들 수 있을 정도로 방약무인이다. 세키쿠치는 원숭이라고 놀림당하는 것이 하나도 불쌍하지 않을 정도로 칭찬하는 보람보다는 헐뜯는 보람이 더 큰 얼뜨기다. 범죄를 좋아하는 대불(伏佛) 같은 얼굴의 남자 기바는 머리보다 몸이 앞서야만 하는 형사이니 어려운 고사를 들먹어야만 실마리가 겨우 풀리는 교고쿠 나쓰히코가 창조한 사건에서는 더더욱 도움이 안 된다. 이들은 서로를 악연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우정을 유지하는 특이한 친구들이지만, 그런 해괴망측한 우정 속에서도 그럭저럭 의리를 견지하는 것이야말로 실로 미스터리다. 이들이 훌륭하게 조연 역할을 해주고 있기에 지루하고 방만하게 느껴지는 이번 작품도 나름 볼만하다고 우길 수가 있는 것이다.

아무튼, 교고쿠 나쓰히코의 지난 세 작품이 무미건조한 세상을 재밌게 해주는 많은 소설 중 하나인 것은 분명했지만, 『광골의 꿈(狂骨の夢)』에게 그러한 명예를 짊어주는 것은 당분간은 유보하고 싶다. 막상 이러한 글을 쓰고 보니 교고쿠 나쓰히코의 다음 작품을 선택하기가 망설여진다. 고민이다. 도서관에 비치된 교고쿠 나쓰히코의 소설 중 읽지 않은 작품은 다 읽으려고 마음먹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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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1. 24.

[책 리뷰] 유령만큼이나 무섭고 기이한 인연에 대하여 ~ 엿보는 고헤이지(교고쿠 나쓰히코)

Nozoki Koheiji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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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만큼이나 무섭고 기이한 인연에 대하여

Original Title: 覘き小平次 by 京極 夏彦
“그래. 무엇이든 이야기해야만 비로소 존재가 되네. 이야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어. 거짓말이든 허풍이든 입 밖에 내면 낸 만큼 존재가 되는 거야. 자네가 얄팍한 것도, 내 속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도, 둘 다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겠지. 얄팍하다고 생각하는지 몰라도 자네에게는 두께가 있을 것일세. 텅 비었다고 여기지만 피도 있고 살도 있잖은가. 밥도 먹고 똥도 눈단 말이지. 사람이란 누구나 약간은 한심한 법이야.” (『엿보는 고헤이지』, p233)

살아 있는 유령, 얼뜨기 고헤이지

유명한 요괴 연구가, 하지만 고서점 주인 교고쿠도의 능란한 화술을 빌려 유령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못을 박았던 작가 교고쿠 나쓰히코(講談社文庫)가 ‘유령’ 추리소설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엿보는 고헤이지(のぞき小平次)』에는 한국의 전설적인 공포 드라마 ‘전설의 고향’처럼 진짜 유령이 등장할까? 민속학과 종교학에 박학한 요괴 연구가인 교고쿠 나쓰히코가 갑작스럽게 생각을 바꿔 유령의 존재를 인정할 리는 만무하다. 대신 독자를 한껏 홀릴 어처구니없는 인물을, 그것도 지금까지 읽지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그런 유일무이한 인물을 창조해냈다.

그는 유령 같은 외모와 행동 때문에 막무가내로 유령 취급당하지만 그렇다고 유령은 아니다. 무엇보다 칠흑처럼 캄캄한 것을 두려워한다는 점에서 그는 유령 자격 미달이다. 하지만, 그는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귀가 있어도 듣지 않고, 코가 있어도 냄새를 맡지 않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않는 영락없는 유령이다. 그는 땅거미 질 무렵의 어둑어둑함에 자신의 엷고 얇은, 그래서 아지랑이처럼 흐릿하고 수육처럼 흐물흐물한 육체를 묻어버리기를 좋아한다. 그렇다고 투명 인간처럼 존재감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이 소설 또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존재감은 눈앞에 확연히 드러나는 육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근처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눈에 띄지 않는 괴상한 존재가 몰래 자신을 훔쳐보고 있음을 자각할 때나 느낄법한 그 소름 끼치는 섬뜩함에서 나온다. 그래서 그가 가까이에 있다면, 불편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불편할 뿐만 아니라 어딘가에서 반드시 엿보고 있다는 음산한 상상에 기분도 나빠진다. 그는 유령처럼 흐릿하면서도 섬뜩한 존재감 때문에 아내처럼 보이는 여자에게나 그의 단 하나뿐인 친구처럼 행세하는 무뢰한에게나 반푼이 취급당한다. 툭하면 죽어버리라는 악담을 견뎌야 한다. 그가 바로 얼뜨기 배우 ‘고헤이지’다.

형편없는 인물이 내뿜는 유령 같은 음산한 매력

그는 아내로 보이는 여자와 친구처럼 행세하는 무뢰한으로부터 기관총처럼 사정없이 퍼부어대는 악담과 싸늘한 시선을 묵묵히 견딘다. 집중포화를 피해 참호로 기어들어 가는 다친 병사처럼 고헤이지는 악담과 냉대를 피해 어둑한 헛방 속으로 스멀스멀 소리 없이 기어들어 간다. 그리고는 자궁 속 태아처럼 몸을 잔뜩 웅크리고 하릴없이 발꿈치를 문지르면서, 한 치 반 틈 사이로 열린 문틈으로 세상을 엿본다. 아내 같은 여자를 엿본다. 아내 같은 여자가 자신의 친구인 척하는 무뢰한과 한껏 놀아나는 것을 엿본다. 고헤이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고헤이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니 아무 감정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도 이래저래 사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이 괴롭기는 하다. 하지만, 무리해서 괴로움을 벗어나기보다는 괴로움을 견딘다. 괴로움을 벗어난다고 편안함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괴로움을 견디는 것이 꼭 나쁜 일도 아니다. 그것이 그가 존재하는 방식, 아니 유일하게 존재할 수 있는 방식이다.

‘엿보는 고헤이지’는 그 어떤 소설에서도 보기 어려운 정말 형편없는 주인공이다. 쓸모도 없고, 근성도 없다. 그 누구에게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 얼뜨기 중의 얼뜨기다. 우울하고 음산한 존재로서 살아 있는 유령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에게서 살아 있는 반푼이 유령 취급당한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외면할 수가 없다.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는 심통을 부리며 애써 텍스트를 외면해 보지만, 한껏 돌 다 멈춘 눈알의 초점은 무심하게도 텍스트에 맞춰져 있다.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파렴치하게도 침까지 질질 흘리는 무아지경에 빠진 채 텍스트를 읽고 있다. 고헤이지를 읽고 있다. 고헤이지를 상상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야심한 밤에 혼자 숲을 산책하다 유령과 딱 마주쳤을 때, 유령이 내뿜는 음산한 공포에 사로잡혀 얼음처럼 얼어붙은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유령이 내뱉는 말을 따라 하고 유령이 시키는 대로 하는 둥, 유령이 발산하는 음산하고 어두운 기운에 유혹되어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조종당하고 있는 것이니라. 이런 연유가 아니라면, 나만큼이나 형편없는 고헤이지를 왜 읽고 있단 말인가! 그것도 아주 재미있게.

유령만큼이나 무섭고 기이한 인연에 대하여

굳이 『엿보는 고헤이지(のぞき小平次)』의 장르를 구분 짓는다면,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미스터리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일반적인 미스터리소설과는 달리 교고쿠 나쓰히코 특유의 현학적인 텍스트에서 송진처럼 끈적하게 묻어나오는 퇴폐적이고 염세적인, 그리고 고헤이지만큼이나 음산한 기운이 듬뿍 보태진 철학적 분위기가 묘한 중독성을 발휘한다. 이번 작품은 고헤이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유령만큼이나 무섭고 기이한 인연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왜 고헤이지는 유령 같은 음산한 은둔 생활을 하게 되었을까? 오쓰카라고 불리는 여자는 왜 죽도록 싫어하는 무능한 남자 고헤이지와 함께 사는 것일까? 무뢰한 다구로는 어떤 도움도 안 되는 고헤이지의 유일한 친구 행세를 왜 5년 동안이나 해왔던 것일까? 한때 미소년이라 칭송받았던 가센을 비롯해 14살 때 자신의 부모를 죽인 살인마 운페이와 다구로는 왜 아무런 존재감 없는 고헤이지를 죽일 마음을 먹었을까? 단지 무대 위에서 평소처럼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 유령 역할을 멋들어지게 소화해내는 것이 유일무이한 쓸모인 고헤이지의 무엇이 그들의 살의를 부추겼을까? 한편, 아홉 번 둔갑한다는 도적 지헤이는 위험에 빠진 고헤이지를 왜 굳이 도우려고 마음먹었을까?

이 모든 질문의 해답을 구하고자 한다면 등장인물들 사이를 그물처럼 얽히고설킨 인연과 관계의 실타래를 하나하나씩 풀어나가는 길뿐이다. 하지만, 살해, 살인, 죽음, 인신매매, 남창, 윤간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온갖 슬픔과 고통으로 얼룩진 과거를 가진 사람이 비슷한 과거를 가진 사람과 좋든 싫든, 그리고 크고 작든 인연을 맺게 되었을 때, 그 파장은 실로 엄청나다. 마이너스 더하기 마이너스가 더 큰 마이너스를 내놓는 것처럼 끔찍한 상처를 앓는 누군가가 비슷한 상처를 앓는 누군가와 인연을 맺을 때, 그들의 상처는 서로 상쇄되어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의 상처에 또 다른 상처를 보태주는 최악의 상황을 연출한다. 이것은 마치 누군가를 진정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가진 모든 상처까지도 안아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경구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보통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서로의 과거를 숨기지 않는다. 숨기지 않기에 그들 모르게 상처끼리 맞부딪혀 덧나거나 악화되는 것 역시 어느 정도 대비할 수 있다. 반대로 새로운 인연은 새로운 출발을 이야기한다. 보통 새로운 출발은 그때까지의 과거를 묻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전제로 시작한다. 인연이 깊지 않을 땐 더더욱 그러하다. 때에 따라선 과거가 새로운 출발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인연은 과거를 묻지 않는다. 과거를 묻지 않기에 그 사람이 어떤 상처와 고통을 안고 사는지 알 턱이 없다. 언제 어느 날, 서로의 과거가 남몰래 안고 온 상처와 고통이 두 사람 모르게 얽히고, 맞물리고, 결합하고, 반응하여 현재의 관계를 뒤틀고 뒤흔들 때, 그들은 모르고 당할 수밖에 없기에 그 파장과 충격은 알고 당하는 것보다 더 클 수밖에 없다.

깊던 얕든, 두껍든 얇든 인연이 한 번 맺어지면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영광스럽지 못한 과거의 상처와 고통이 전염병처럼 스멀스멀 퍼져나가 인연이라는 희미한 줄을 타고 상대에게 옮겨붙어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그리고 그 누구도 원하지 않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음을 『엿보는 고헤이지』는 긴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누군가와 새로운 인연을 맺는다는 것은, 언제 어느 날 상대가 짊어진 짐 중 하나가 어떤 계기를 통해 부지불식 간에 나에게로 굴러떨어져 발등을 찍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이야기한다. 고로 존재한다!

저마다 소름 끼치는 과거 한두 개씩 짊어지고 사는 등장인물들도 기이하지만, 더욱 기이한 것은 그들은 이름을 고침으로써 과거와의 단절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과론적이지만, 무수한 인연의 매듭으로부터 불거져 낳은 파괴적인 결말을 고려하면, 마치 벌레가 허물을 벗으려는 듯한 그들의 개명은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운 출발을 시도하려는 그들의 처절한 몸부림 정도로만 치부될 뿐이다. 그 누구도 완전히 허물을 벗지 못했을뿐더러, 무리하게 허물을 벗으려는 시도가 오히려 각자 짊어진 상처를 덧나게 한 격이 되고 말았다. 인간은 허물을 던져버림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벌레가 아니며, 벌레가 아니기에 과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가 없다. 만약 그들 서로가 인연으로만 그치지 않고, 서로의 과거를 허심탄회하게 밝힐 수 있는 진지한 관계로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면, 그런 비극적이고 치명적인 결말이 연출될 수 있었을까?

한때 도둑이었던 지헤이가 유령 고헤이지에게 한 충고처럼 이야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다. 이야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은 거짓말이든 허풍이든 이야기한 것만큼 두께가 생기고 부피가 생긴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진득하게 듣는 사람의 머리와 마음속으로 흘러 들어가 누군가의 기억 속에 새로 심은 치아처럼 단단히 자리 잡을 때 비로소 이야기한 사람의 존재감은 완성된다. 하지만, 『엿보는 고헤이지(のぞき小平次)』의 등장인물들은 인연은 맺지만,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이야기하더라도 자기 이야기만 실컷 떠들 뿐 진지하게 듣는 이가 없다. 그들 모두 고헤이지가 유령 같다고 하지만, 사실 그들 모두 유령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고무줄 같은 팽팽한 인연의 연결고리를 통해 서로 끌어당기고, 물렁물렁하고 흐릿한 존재감으로 말미암아 본의 아니게 서로 겹쳐지고 포개지다 보니 벼룩이 옮는 것처럼 서로의 상처와 고통까지 사이좋게 옮겨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런 연유로 현대인은 그렇게 미치도록 SNS에 매달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나를 세상에 이야기함으로써 미약한 존재감을 어떻게든 극복하고 싶은 허영으로 부푼 열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 치 반 틈 사이로...

기괴한 인물이다. 그리고 기구한 인연이다. 무슨 심보로 이런 소설을 내놓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 아무리 실화를 참고했다지만 ─ 정말 무지막지한 인물과 으스스한 이야기를 창조하고 말았다. 이미 세상에 내놓은 이상 어찌 손 쓸 도리도 없다. 그런 곤란한 말을 지껄이면서도 다음 이야기가 또 있을까 하는 기대감이 유령처럼 스르르 싹 트는 이유는 무엇일까? 살아 있는 유령처럼 살아가는 고헤이지에게서 얼뜨기 같은 나를 봐서일까? 아니면 이런 얼뜨기 같은 인물도 나름대로 존재의 법칙을 유지하며 흐릿하게나마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서 보잘것없는 삶의 위안을 받았기 때문일까? 아무튼, 나도 한 치 반 틈 사이로 세상을 내다보고 싶다. 과연 무엇을 볼 수 있을까? 그것이 문제로다.

살다 보면 별것도 아닌 것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가 있다. 살다 보면 별로 대단치 아니한 것들이 사람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뒤집어 놓을 때가 있다. 『엿보는 고헤이지(のぞき小平次)』가 대단한 소설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지만, 교고쿠 나쓰히코의 다른 작품들이 그렇듯이, 정치가가 유세하는 것 같은 능변과 종교인이 설교하는 것 같은 초월적인 무언가가 고명처럼 얹어지고, 여기에 교수가 강의하는 것 같은 현학적이고 선문답 같은 양념이 뿌려지면서, 신들린 약장수가 선전하는 것처럼 어딘가 미심쩍으면서도 왠지 믿고 싶어지는 텍스트가 완성된다. 하지만, 그것은 뻔히 알고도 속아 주는, 그것도 그냥 우울하게 속아 주는 것이 아니라 기껍게 속아 주는 거역하기 어려운 기괴한 매력을 발산한다. 교고쿠 나쓰히코의 텍스트를 읽노라면 마치 불량식품을 앞에 놓고 인생 최고의 고민에 빠진 나머지 침과 땀으로 범벅된 손가락을 쪽쪽 빠는 아이가 된 듯한 기분이다. 그런데 그거 아는가? 지금 한 치 반 틈 사이로 열린 문틈으로 누군가 당신을 엿보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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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1. 17.

[책 리뷰] 성공 신화가 아닌 한 사람의 성장 이야기 ~ 비커밍 스티브 잡스(브렌트 슐렌더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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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 신화가 아닌 한 사람의 성장 이야기

Original Title: Becoming Steve Jobs by by Brent Schlender, Rick Tetzeli
게이츠는 잡스의 경영방식이 왜 표준이 되기에는 그 적용에 한계가 있는 독특한 사례인지 설명했다. “어쩌면 당신 책은 ‘모방하지 말아야 할 비법(Don’t Try This at Home)’이라고 제목을 붙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게이츠가 농담조로 한 말이다. “결국, 스티브처럼 되고자 하는 많은 사람이 ‘개자식’ 측면을 마스터하는 셈이에요. 다만 ‘천재’ 측면은 놓치고 있다는 게 문제지요.” 그리고 스티브 잡스의 방식으로 회사를 경영할 때의 한 가지 단점에 대해 이렇게 덧붙였다. “저지와 제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조직이 되기에 십상이죠.” (『비커밍 스티브 잡스』, p589)

죽음이 불러오는 관용

조금이라도 인정이 남아 있는 사람이라면 죽은 사람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것은 불편한 감정을 일으킨다. 헐뜯거나 비방한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앙갚음할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죽은 사람의 결점을 들춰내는 것은 왠지 모르게 꺼림칙하다. ‘좋은 사람’이 할 짓이 못 되는 것 같다. 죽은 사람의 단점과 결점을 감싸주기는커녕 그것을 굳이 들추어내는 자신이 옹졸하고 비겁해 보인다. 설령 죽은 사람이 생전에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할지라도 죽은 사람의 잘못을 산 사람이 물고 늘어지는 것은 너그럽지 못하고 관용이 부족한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 같아 추하다. 죽은 사람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일지라도 그 대상이 이미 죽었음에도 죽은 사람에 대한 증오심을 공공연하게 표출하는 것은 스스로 소인배임을 만천 한에 알리는 것과 다름없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도 있듯, 사람은 죽은 사람의 잘못이나 결점은 보통은 육신과 함께 땅속에 묻어두기를 원하고, 대신 죽은 사람과 가깝게 지낸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좋은 점만, 혹은 죽은 사람과 좋은 시간을 보냈던 것만을 기억하려 한다. 그것은 죽은 사람을 비난함으로써 앞으로 살아야 할 시간이 꽤 남은 산 사람의 명예나 입이 더럽혀지는 것을 예방하는 것은 물론이고, 죽은 사람과 함께 했던 사람들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히틀러 같은 인류의 적은 예외지만 말이다.

한마디로 기본적인 소양을 갖춘 사람이라면 죽은 사람에 대해 말할 때 어느 정도는 너그러워지는 법이다. 특히 죽은 사람과 함께 많은 일을 하면서 좋은 감정 나쁜 감정 다 맛본 사람들은 죽은 사람에 대한 추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기 마련이고, 죽은 사람이 유명인이라면 그런 심정은 더욱 깊어지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쁜 감정보다는 좋은 감정을 기억하기 마련이다. 추억은 아름다운 것이고 아름다워야 추억이라 말할 만하며, 그러하기에 죽은 사람과 핏발을 세워가며 논쟁했던 일이나, 서로 욕을 주고받으며 격렬하게 말싸움을 했던 일도 시간이 지나면 나름의 정당성을 가지고 공공연하게 미화된다. 죽음으로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고, 죽음은 공공연하게 동정과 관용을 불러온다.

오해에 대한 해명인가? 아니면 감상적인 미화인가?

내가 굳이 이런 졸렬한 소견을 밝힌 이유는 브렌트 슐렌더(Brent Schlender), 릭 테트젤리(Rick Tetzeli)가 『비커밍 스티브 잡스(Becoming Steve Jobs)』를 공저하면서 참고한 자료 중 상당 부분이 스티브 잡스 사후에 진행된 인터뷰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죽은 사람, 그것도 잡스와 함께 성공의 샴페인을 함께 터트리고 일부는 실패의 쓴잔을 함께 마신, 그래서 그들 스스로 위대한 사람이라고 평가내리는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은 잡스와 죽이 잘 맞았던 사람들이고, 몇몇은 잡스에게 재능을 인정받은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잡스와 함께 창의적인 일을 해낸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이 만약 잡스를 얼간이라고, 개자식이었다고 비판하는 것은 자식이 죽은 부모를 비난하는 것처럼 께름칙한 일이다. 설령 정당한 비판일지라도 그 대상이 일부에서는 영웅처럼 떠받들어지는 대단한 인물이라면 웬만한 용기와 각오 없이는 어렵다. 한편으로 그들은 잡스와 함께, 혹은 잡스 밑에서 세상이 놀랄 일을 해낸 사람들이고, 덕분에 명성과 부도 거머쥔 사람들이다. 그 자부심은 비할 데 없으며, 그 자부심은 잡스에 대한 추억과 기억에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영향력을 끼쳤을 것이다.

또한, 브렌트 슐렌더가 프롤로그에서도 밝혔듯, 『비커밍 스티브 잡스』는 스티브 잡스를 ‘반은 천재, 반은 얼간이로 살다간’ 인물로 각인시켰다고 여겨지는 월터 아이작슨(Walter Isaacson)이 쓴 『스티브 잡스(Steve Jobs)』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기를 든 책이다. 고로 독자는 이런 점들을 충분히 고려해 이 책을 읽어야 할 것을 당부시키고자 변변치 않은 변론을 펼쳐보았다. 사실 내가 보기에는 아이작슨의 책보다 슐렌더의 책이 잡스를 신격화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치 세상을 위기에서 구한 영웅처럼 띄워주는 눈꼴 시린 면이 더 많다고 여겨진다. 물론 이 모든 판단은 독자의 몫이지만, 만약 이 두 책을 모두 읽어볼 요량이라면 아이작슨과 슐렌더의 책을 모두 읽어본 나로서는 아이작슨의 공식 전기를 먼저 읽고 슐렌더의 책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아무래도 잡스가 살아생전에 집필을 부탁한 아이작슨의 공식 전기가 잡스에 대한 미화와 감상적인 추억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운 것 같다.

성공 신화가 아닌 한 인간의 성장 이야기

공식 전기(아이작슨)에 등장하는 스티브 잡스는 진짜 잡스가 아니라는 기치 아래 쓰인 『비커밍 스티브 잡스』는 스티브 잡스와 함께했던 동료들이 기억하는 잡스를 최대한 살리려는 노력의 하나이자, 한편으로는 공식 전기의 등장하는 강박적인 통제 욕구를 지닌 독재자 같은 잡스가 아니라 협력과 상호소통을 중시하는 지휘자로서 잡스를 기억하려는 시도다. 비록 잡스가 혈기왕성했던 청년 시절, 그리고 애플에서 쫓겨나기 전까지 ‘개자식’ 같은 면모를 보여준 것은 사실이고, 그런 개인적 성품의 결점을 그대로 이어갔던 넥스트(NeXT)에서의 실패도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 개인의 인간적 결점을 집요하게 들춰내는 것만으로는 훗날 침몰해가는 애플을 위기에서 건져 올릴 뿐만 아니라 이제 막 기사회생한 애플을 재조직하고 조련해 세계 최고의 혁신 기업으로 이끌게 될 잡스의 놀랍고도 성공적인, 누군가는 ‘신화’라고도 칭송하는 그런 이야기를 설명할 수 없다. ‘개자식’처럼 굴었던 청년 시절의 잡스라면 당연히 천지가 개벽할 그런 일을 일궈내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잡스는 기어이 해냈다. 그것은 잡스가 똑같은 실패를 거듭하는 얼간이가 아니라 실패의 교훈을 깊이 새길 줄 아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뜻이다.

애플에서 자신을 쫓아낸 사람들에게 복수하겠다는 집념이 다소 엿보이는 회사였던 넥스트의 실패를 통해서, 그리고 심드렁하게 인수한 픽사에서 자신의 ‘현실 왜곡장’을 간단히 물리치고 창의적 사고를 최상으로 운영하는 자신들만의 문화로 똘똘 뭉친 픽사 팀원들을 경험하면서 잡스는 많은 것을 깨달았다. 슐렌더는 그런 교훈이 없었다면 훗날 애플에서 펼쳐진 위대한 2막도 없었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슐렌더는 잡스가 넥스트를 직접 경영하면서 실패를 맛보고, 픽사가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로 창의성을 극대화하는 현장을 지켜보면서 조금씩 조금씩, 그렇지만 현실에 큰 영향력을 미칠 정도로 확실하게 변화해 나갔고, 그럼으로써 위대한 기업가의 자질을 갖출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잡스는 창의적인 사람들을 위한 창의적인 도구를 생산한다는 대의를 추구하는 이상적인 기업을 만들겠다는 열정은 그대로 간직한 채, 좀 더 신중해졌고, 기꺼이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했으며, 급진적인 방법이 아니라 점진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일이 더 많아졌으며, 예전처럼 팀원들의 갈등을 부추기기보다는 조화와 화합을 끌어내려고 노력했다. 쉽게 말해 잡스는 고단한 여정 속에서 엄청나게 성장하고 변했으며, 이러한 변화가 가능했기에 애플의 느리면서도 조심스러운 부활도 가능했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다. 그래서 한 사람의 성공 신화가 아니라 ─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법한 ─ 한 사람의 성장 이야기로써 『비커밍 스티브 잡스』를 어필하고 있다.

잡스의 인간적인 매력이 미치는 경계선

보기에 따라서는 잡스의 변화는 사람이 나이를 먹게 되었을 때 응당 갖추게 되는 성숙함과 노련미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슐렌더도 인정하듯 잡스가 애플 복귀 이후에도 감정적 충동이나 변덕, 무례한 언동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그리고 한 사람이 허물을 벗듯 자신의 천성을 온전히 벗어던질 수는 없다고 믿는 나는 잡스가 개과천선했다기보다는 노련해졌다고 본다. 하지만, 그것은 보통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서 응당 얻게 되는 평범한 노련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 정도로는 침몰하는 애플을 구해낼 수는 없다. 내가 볼 때 그 노련함은 어차피 약점을 완전히 벗어던질 수 없다면, 장점을 극대화하여 약점으로 말미암은 피해를 극복하거나 최소화하려는 의지를 압착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작가 짐 콜린스(Jim Collins)가 언급한 잡스의 가장 큰 장점인 ‘쉼 없는 몰두’가 마음껏 발휘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참고로 콜린스는 쉼 없는 몰두는 회복력의 원천이며, 자기 동기부여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제대로 알고자 하는 탐구심,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해내겠다는 열망, 그리고 최선을 다해 삶을 살겠다는 목적의식을 연료로 삼는다.

잡스의 ‘쉼 없는 몰두’가 가장 열정적으로, 그리고 가장 빈번하게 작용했던 곳은 당연히 그의 일터다. 잡스는 진정 자신이 하는 일을, 그리고 그 일과 관계된 모든 것을 사랑한 남자다. 안타까운 점은 그 경계가 지독히도 확실하게 그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즉, ─ 사람이건 물건이건 ─ 일에 도움이 되는 모든 것에는 자상하고 친절한 잡스가 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판단이 들면 소름 끼치도록 잔인한 잡스가 될 수도 있다. 애플로 복귀한 잡스를 도와 함께 성공 신화를 이끌었던 동료들이 시간이 흘러 쓸모가 없어지거나 재능이 고갈되는 것처럼 보이자 그들과 거리를 두면서 소원한 관계를 끌어낸 것도 잡스였고, 초창기 차고 모임에서부터 애플에 합류한 친구이자 애플 창업구성원인 대니얼 콧키가 정직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스톡옵션을 받지 못하게 한 것도 잡스였다. 그리고 잡스의 마케팅과 비즈니스 실력을 발동시킨 장본인이자, 어쩌면 두 사람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애플도 없었을 가능성이 농후했던 천재 엔지니어링 워즈니악과 서로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는 이유로 소원한 관계를 이어나간 것 역시 잡스다. 이런 점을 보면 잡스의 인간적인 매력이 미치는 범위가 극히 제한적임을 알 수 있다. 즉, 잡스에게 재능을 인정받거나, 혹은 잡스의 인간적 결점을 요령껏 피해가거나 인내할 수 있었던 사람들, 그래서 잡스와 함께 애플의 성공 이야기를 완성해나갈 수 있었던 사람들이 기억하는 잡스와 잡스의 배려와 관심이 미치는 경계선 밖으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이 기억하는 잡스가 같을 수는 없다. 전자의 사람들은 잡스를 자신에게 기회와 더불어 명성과 부를 가져다준 영웅이자 친구로서 추억될 것이고, 후자의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무시하거나 능력을 입증할 기회마저 박탈한 ‘개자식’으로 잡스를 기억할 것이다. 아마 이 중간 어디쯤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잡스의 진짜 모습이 어려있을 것이다.

성공한 사람의 발자취를 더듬어간다는 것

그 사람의 됨됨이를 몇 마디만으로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순하고 명확한 사람이 있고, 긴 설명으로도 부족한 복잡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있다. 이 중 어떤 사람이 좋고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잡스는 복잡한 성격과 더불어 그 복잡성을 배가시키는 변덕과 기벽까지 갖춘 사람이니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잡스를 읽고 있노라면 잡스만큼이나 변화무쌍한 성격을 가진 기인이자 간웅인 조조(曹魏)가 떠오른다. 자신이 필요로 하는 인재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웠지만, 그러한 인재라도 서로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이 드러나면 순욱 같은 공신이라도 내치는 조조의 몰인정은 앞서 얘기했던 잡스와 워즈니악 등의 소원한 관계를 보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몇몇 인물에 대한 분노나 복수심을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누그러트리지 못하는 질긴 적개심을 보면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江靑)이 떠오르기도 한다.

사실 잡스의 성격이 어떠한지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그런 것은 잡스의 비범한 재능을 부러워하고 시기하는 나 같은 소인배가 성공한 사람을 씹으면서 위안으로 삼을 때 써먹는 가십거리 정도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리고 『비커밍 스티브 잡스(Becoming Steve Jobs)』가 강조하는 것은 잡스가 실패와 좌절을 겪은 후에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이상을 끝까지 견지할 수 있었던 자신감과 자기 확신, 그리고 그것을 모종의 창의적인 과정을 거쳐 현실에 투영해 우리가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마음으로 느낄 수 있고, 두뇌로 작용할 수 있는, 지금까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놀라운 뭔가를 창출할 수 있게 만든 창조력과 부단한 열정을 돋보이게 하는 비범함이다. 또한, 여기저기 널린 소소한 아이디어들에서 미처 남들이 보지 못한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러한 아이디어들을 한데 모은 다음 그것들을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갈고 닦고 집대성해 엄청난 결과물을 창조해내는 창의적인 과정과 능력이야말로 잡스만이 할 수 있는 특출난 재능이다. 이런 재능에 비하면 그의 인간적 결점은 사소한 문제이고, 실재로도 사소한 문제였기에 잡스는 만인이 기억하는 혁신가이자 위대한 기업가로 남을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개자식’이겠지만 말이다.

자신보다 월등히 뛰어난 사람의 발자취를 더듬어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보통 사람의 배짱과 포부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언동과 결단력, 부럽고 시기심을 유발시키고도 남는 재능, 여기에 남부럽지 않은 가족 관계와 훌륭한 인간관계를 가진 누군가의 전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소갈머리 좁은 나의 마음은 부러움과 시기심으로 끓어오르고 황당하게 부아까지도 치민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그러고 싶지는 않지만, 전기적 삶을 살아간 사람의 발자취와 공적이 투영된 폭넓고 화려한 스펙트럼 위로 바퀴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보잘것없는 자신의 삶이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난 기업가도 아니고, 그런 것은 꿈도 꾸지 않지만, 짧고 굵직한 삶을 살아간 잡스의 삶은 쓸쓸한 뒤안길 같은 나의 초라한 삶을 반추시킨다. 잡스만큼 분명하지는 않을 것이고, 잡스만큼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나에게도 내 인생에 크고 작은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난 그것을 찾지 못했다. 아니면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일까? 어쩌면 영영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염치 불고하고 꿋꿋하게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리라고 여기며 나는 오늘도 자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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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1. 13.

[책 리뷰] 전통적 삶과 혁명적 삶의 수선스러운 공존 ~ 바보 웃음(라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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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 삶과 혁명적 삶의 수선스러운 공존

Original Title: 傻笑 by 勞馬
후루진 주민들의 모든 주의력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하나의 목적에만 쏠려 있었다. 후루진 주민들의 생각과 행위는 전부 돈을 에워싸고 움직였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사고나 이야기는 모두 돈과 관련되어 있었다. (『바보 웃음(傻笑)』, p134)

중국의 경제 개혁, 과연 누가 이끌었나?

역사학자 프랑크 디쾨터(Frank Dikoter)는 심혈을 기울인 자신의 역작 ‘인민 3부작’ 중 마지막 저서인 『문화 대혁명(The Cultural Revolution)』을 통해 주류 역사관을 뒤집어 엎을만한 충격적인 가설을 제시한다. 그것은 중국의 경제 개혁을 이끈 원동력은 ─ 보통 알려진 대로 ─ 개혁 • 개방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덩샤오핑(鄧小平)이 아니라 그저 우리처럼 평범하고 범용한 보통의 인민들, 그중에서도 농민들이었다는 것이다.

오로지 선전과 선동만으로도 내전과 전쟁을 뛰어넘는 대혼돈과 대파괴를 가져올 수 있다는 무서운 사실을 인류사에 남긴 마오쩌둥의 위대한 공산주의 실험의 연속조차 농민들의 순박함과 우둔함 속에 숨겨진 삶에 대한 끈질긴 애착을 소멸시키지는 못했다. 마오쩌둥의 공상적 이상주의의 실현이라는 그럴싸한 이데올로기의 실체는 망령이 난 노인의 과대망상과 변덕이 곤죽처럼 섞인 혼돈 그 자체였음이 뒤늦게 밝혀지긴 했지만, 그것들이 대세를 장악하며 중국을 평정하고 있었을 땐 어느 누가 감히 진실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을까? 설령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그것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 있었을까?

해방 이후 혼돈과 파괴가 갈마돌며 정신없이 몰아치는 시련의 연속에서 생존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확보하고자 그 어느 때보다 전투적으로 매달려야 했던 농민들은 그러한 사실을 꿰뚫어 볼 틈도, 능력도 없었거니와 설령 그럴 수 있다 해도 당연히 누설할 수 없었다. 위대한 조타수의 위대한 실험 속에서 수천만 명이 기아로, 혹은 그와 관련된 질병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에 한 점의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음으로 내몰렸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이 대다수 인민은 살아남았다.

이것은 위대한 조타수가 안내한 길은 혹독하고 가혹했지만, 그에 맞서는 인민들의 인내심과 처세술도 만만치 않았다는 방증이다. 그들의 생명력은 바퀴벌레처럼 질겼으며, 그들의 처세술은 최고의 여배우로서 아카데미상을 받은 오드리 헵번 뺨쳤다. 겉으로는 순박하고 우둔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생존을 향한 야수 같은 본능과 전통적으로 물려받은 돈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열망이 있었다(역시 상인의 나라답다!). 이 둘에 스스로 궁색한 삶을 개척하고자 하는 삶에 대한 끈덕진 애착이 더해져 모종의 시너지 효과를 발휘해 소리 없는 혁명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완고한 보수주의자였던 덩샤오핑조차 거스를 수 없었던 대세, 즉 시장 경제를 향한 조용하면서도 굳센 의지가 서린 물결이었다.

바보가 특산물인 마을

쓸데없이 거창한 서문도 봐주기 어려운데, 그것조차 삼천포로 빠지고 말았으니 정말이지 면목이 없다. 그렇다고 이쯤에서 내 블로그를 떠나면 글을 쓴 내 성의가 완전히 무시되고 마는 꼴이니 내 처지에서는 당연히 곤란하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끝까지 읽어보면 내 감히 장담하건대 안 읽은 것보단 나으리라. 아무튼, 『바보 웃음(傻笑)』은 장편이 아니고 단편과 중편 사이를 오가는 작품들의 모음집이다 보니 와닿는 느낌이 약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 나로서는 이런 모음집이 리뷰를 쓰기에는 가장 난감하다. 그래서 오늘의 리뷰는 횡설수설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미 시작부터 멋지게 삼천포로 빠지지 않았는가?

중국 작가 라오마(勞馬)의 중편 모음집 『바보 웃음』은 정치적으로 역사적으로 복잡하게 얽힌 중국 현대사를 집요하게 거들먹거리는 정치적 색채가 짙은 소설은 절대 아니다. 다만, 중국의 개혁 • 개방 시기를 전후로 펼쳐지는 젊은 세대와 구세대 간의 세대 차이와 그로 말미암은 갈등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와중에서도 돈에 대한 열망만큼은 세대 차이를 뛰어넘어 농촌의 활기차고 역동적인 모습에 활력소로 작용하는 모습에서, 개혁 • 개방의 원동력을 농민에게서 찾은 프랑크 디쾨터의 책들이 생각나 몇 자 끄적거려 본다는 것이 이도 저도 아닌 서두가 되어버렸다고나 할까나.

아무튼, 남자는 마누라에게 손찌검하고, 마누라는 애를 때리고, 애는 개를 때리고, 개는 남자를 문다. 제구실을 못 하는 남편을 둔 아내는 마을 사람들 몰래 바보를 유혹해 씨를 받아 아이를 낳는다. 초등학교는 바보의 집요한 요청에 못 이겨 ‘바보증명서’를 발급한다. 돌잡이를 바라보는 가족들은 아이가 1위안짜리 지폐를 잡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린다. 농민들은 도시에서 하방한 청년이 거품을 일으키며 이를 닦는 모습도 이해하지 못한다. 바보가 집마다 한 명씩은 꼭 있는 바보가 특산물인 마을이 있다. 누군가는 도시처럼 번지르르해지는 고향의 변화를 반가워하고, 누군가는 무분별한 개발에 황폐해져 가는 고향을 바라보며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해방 이후 반강제적으로 주입된 혁명적인 삶 속에 여전히 가부장적이고 전통적인 가치관이 아슬아슬하게 기생하는 독특한 생활 풍속을 보여주는 『바보 웃음』 속에 등장하는 농촌 마을의 진풍경이다.

소박하고 우직한 농민들의 수선스러운 일상

궁핍하고 외진 농촌이다 보니 도시로부터 불어오는 광풍의 직격탄은 피해갈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100% 안전한 것은 아니다. 이(李) 괴물의 첫째 아들 이스가 생과부의 유혹에 넘어가 씨를 제공하는 망나니가 되고, 나중에는 말 한마디 잘못 내뱉은 대가로 정치범으로 끌려간다. 백치가 정치범으로 둔갑한다는 웃지 못할 여정은 아무리 외진 시골일지라도, 아무리 정치적 격변 지역의 변두리라 할지라도 위대한 조타수의 실험이 내뻗는 마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해준다. 그래도 이 정도면 약과라고 볼 수 있다. 최소한 『바보 웃음(傻笑)』에서는 ‘문화대혁명’을 소재로 한 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간성에 대한 환멸적인 탄식을 자아내는 잔혹한 광경이나 가족끼리, 혹은 이웃끼리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하는 아귀다툼은 일어나지 않는다. 소설 제목처럼 바보스러운 웃음을 절로 짓게 하는 바보들의 언동과 소박하고 우직한 농민들의 수선스러운 일상의 왁자지껄한 조합이 정치적, 사회적 격변을 애써 우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중국의 온 도시를 휩쓴 정치적 광풍이 모든 농촌을 집어삼키지는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중국이 오죽 넓으랴. 그리고 중국 농민 역시 오죽할까? 춘추전국시대부터 진시황제를 거쳐, 그리고 군웅할거의 삼국 시대와 청나라 말기의 열강 침략과 항일전과 국공내전을 거쳐 공산 혁명으로 종결된 파란만장한 역사의 산증인이자 그럼으로써 각종 재난과 풍파에 단련될 때로 단련된 그들이 아니었던가?

『바보 웃음』을 읽고 있노라면, 그런 잔혹의 시대를 견뎌온 농민들의 억척스러운 모습이 은연중에 내비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삶을 향한 순박한 의지와 애착이 의도치 않게 자아내는 해학과 풍자이다. 바보가 한 말은 모두 엉터리라 여기기에 여기저기에 얽힌 복잡한 책임 관계에서 벗어나듯 그들의 순박함과 고지지식함이 의도치 않게 자아내는 해학과 풍자 역시 변화무쌍한 정치적 격변에서 살짝 어긋나 있다. 약간은 아쉬우면서도, 약간은 더 시원하게 꼬집어주기를 원하면서도, 약간은 더 과감하게 밀어 붙어주기를 원하면서도, 그 약간의 기대감을 ‘바보 웃음’으로 하나씩 떨쳐내는 필설이야말로 이 책의 묘미라면 묘미다.

돈, 돈, 돈, 모두가 ‘돈’을 바란다

농민들의 삶을 향한 순박한 의지와 애착을 간단하게 종합해보면 ‘돈’으로 마무리할 수 있다. 아무리 무지하고 소박한 농민일지라도 그들 역시 소망하고 꿈꾸는 삶이 있다. 그것은 돈을 벌어 부자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처럼 부자를 선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부자를 비난하고 시기하는 모순된 감정을 안은 채 자신들도 언젠가는 그런 부자가 되기를 갈망한다.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돌잡이 풍습에서 갓 돌을 맞은 아기가 지폐를 잡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는 가족들의 모습에서 돈을 향한 그들의 열정이 얼마나 애타고 간절한지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열망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정부와 공산당이 제대로 일을 못 하니 스스로 돈을 벌어보겠다는 농민들의 의지가 모이고 모여 시냇물을 이루고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룬 덕분에 중국 경제가 물꼬를 틀 수 있었다고 디쾨터는 해석하지 않던가.

『바보 웃음(傻笑)』에서는 바보조차 돈을 벌고자 작심하고, 부패한 관리들은 서민들 앞에서 어깃장을 놓으며 삥을 뜯는다. 계층이 다르고 사는 곳은 다를지라도 모두가 돈을 향한 열정만은 일맥상통한다. 욕을 먹든 배가 고프던 바보는 바보니까 웃고, 돈을 번 사람은 돈을 벌었으니까 웃고, 인민에게서 삥을 뜯은 관리는 체면을 차렸으니까 웃는다. 이래저래 돈을 잃은 사람도 부자가 될 내일을 기약하며 웃는다. 돈이 윤활유가 되어 군상들 사이를 뱀처럼 요리조리 헤쳐나가 겨드랑이를 간지럽히듯 사람들을 자극하고, 그래서 그들을 웃음 짓게 한다. 삶이 아무리 구차하고 고단하더라도 그들은 누군가의 돈을 바라보고, 또는 언제가 내 손으로 만지게 될 ─ 한편으로는 기약 없는 ─ 돈을 상상하며 바보처럼 웃음 짓는다. 누구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갈지 모르는 돈을 사이에 두고 그들은 서로 다른 욕심과 이해로 모두 바보처럼 웃는다.

어쩌면 중국 농민들이 그렇게 숱한 역경을 겪고도 때마다 오뚜기처럼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삶에 대한 끈질긴 애착과 더불어 돈을 벌고자 하는 타고난 장사꾼 기질이 끈질기게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확실하고 뚜렷한 목적이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역경과 고난을 더 잘 이겨내는 것처럼 말이다.

태풍의 눈 같은, 하지만 가볼 수 없는 고향

『바보 웃음(傻笑)』의 이야기 대부분은 우여곡절 끝에 해피 엔딩으로 귀결된다. 아마 개혁 개방 당시 중국 농민의 현실은 그것보다는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집요하게 주요 인물들의 삶이 안정적인 궤도에 안착하는 것으로 마무리한 것을 보면 중국 농민들의 행복을 염원하는 작가 라오마의 바람이 기대 이상으로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비극적인 현실을 노예가 짐수레를 끌고 가듯 해피 엔딩으로 강제적으로 끌고 가버림으로써 교묘하게 풍자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도 아니면 당시 중국 농민들의 실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꽤 괜찮은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도시가 정치적 풍파로 혼란과 파괴가 불규칙하게 어우러진 몸살을 대단히 앓고 있을 때, 『바보 웃음』의 농민들만큼은 그들 특유의 소박하면서도 평온한 일상을 꽤 유지하고 있었다. 간혹 누군가 일으킨 웃지 못할 비화로 일상에 잠깐 금이 가곤 했지만, 결코 도시처럼 삶 자체가 풍비박산 나는 지경으로까지는 치닫지는 않았다. 이는 그들에게 있어선 참말로 다행이자 복이 아니지 않을 수 없다. 그곳은 마치 태풍의 눈 같은 곳이라고 할까나.

도시를 무너뜨린 광풍이 언제 휘몰아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도 전통과 혁명적인 삶이 요상하게 공존하는, 그리고 고향의 옛 모습이 뜨거운 개발 열기로 녹아내리는 밀랍 인형처럼 서서히 윤곽을 잃어가는 그곳 농민들의 삶과 풍습을 작가 라오마는 마치 독자가 살아본 적 없고, 살아볼 수 없었던, 그럼에도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어느 먼 고향 마을처럼 단아하게 그려내고 있다. 격정은 없지만, 대신 활기가 있고, 비극은 없지만, 대신 ‘바보 웃음’이 존재하고, 망각과 희망이 엇비슷하게 대치하는 그런 고향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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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1. 6.

[책 리뷰] 최고가 아니면 쓰레기! ~ 스티브 잡스(월터 아이작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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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가 아니면 쓰레기!

Original Title: Steve Jobs by Walter Isaacson
“그의 인생과 성격에는 극도로 지저분한 부분도 있어요. 그게 진실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그런 것들을 눈가림하려 해서는 안 돼요. 스티브는 조작이나 왜곡에 능하긴 하지만 놀라운 이야기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 것들을 다 있는 그대로 얘기했으면 좋겠어요.” (『스티브 잡스(Steve Jobs)』, p11)

대비되는 두 개의 전기

한국어로 번역된 스티브 잡스(Steve Jobs)의 전기는 두 책이 있다. 하나는 오늘 리뷰를 쓰는 책이자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난 그해에 출판된 월터 아이작슨(Walter Isaacson)이 쓴 『스티브 잡스(Steve Jobs)』, 다른 하나는 브렌트 슐렌더(Brent Schlender), 릭 테트젤리(Rick Tetzeli)가 공저하고 비교적 최근인 2016년에 나온 『비커밍 스티브 잡스(Becoming Steve Jobs)』다. 사후 5년 사이에 두 권의 전기가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 살아생전이나 사후에나 ─ 스티브 잡스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이 가고도 남지만, 무척이나 두툼한 두께의 책으로 전기가 출판되었음에도 5년 후 또 다른 전기가 나왔다는 점은 첫 번째 전기를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즉, ─ 스티브 잡스가 어딘가에서 벌떡 일어나 ‘쓰레기’라고 고함치며 태클을 걸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확신하면 그를 제외하고 ─ 유가족이나 애플의 처지에서 월터 아이작슨의 전기가 뭔가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었나 하는 의구심을 들게 한다. 아니나 다를까. 두 책의 대비되는 선전 문구가 이러한 추측에 힘을 더해주고 있었다.

아이작슨 책의 광고 문구는 ‘스티브 잡스의 육성이 담긴 유일한 공식 전기’라고 선전하고 있으며, 슐렌더와 테트젤리의 책은 ‘스티브 잡스의 가족과 애플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유일한 자서전!’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사실 아이작슨의 전기는 2004년부터 시작되어 2009년까지 이어진 잡스의 끈질긴 요청 끝에 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책을 잡스의 ‘공식 전기’라고 인정하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광고 문구 속에 버젓이 ‘공식 전기’란 말을 쓸 수 있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아이작슨의 책에 묘사된 잡스의 이미지가 잡스를 곁에서 지켜보아 왔던 가족이나 동료들에게는 영 탐탁지가 않았나 보다. 그래서 그 반대의 목소리, 혹은 아이작슨의 책에 묘사된 잡스와는 뭔가 다른 잡스의 이미지(유가족이나 동료들이 보기엔 잡스의 진짜 모습에 더 가까운)를 담은 것이 『비커밍 스티브 잡스』라고 볼 수 있다.

고로 아이작슨이 쓴 전기에는 잡스의 부탁으로, 그리고 작가와 잡스의 대화를 토대로 지어진 자서전에 가까운 전기라는 점에서 스티브 잡스가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고, 『비커밍 스티브 잡스』에는 스티브 잡스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간직된 잡스의 모습이 담겨 있을 것이라는 추측하에, 먼저 출판된, 그리고 잡스의 직접적인 요청으로 완성된 아이작슨의 책을 먼저 선택했다.

우연히 잡스의 전기를 찾게 된 이유

불행인지 행운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애플 제품을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을뿐더러 가까이서 구경하는 일조차 없었던 내가, 그리고 지금까지 애플 제품의 폐쇄성을 심술궂은 노인네의 똥고집으로 넘겨짚어 왔던 내가, 애플 제품의 혁신성이나 창조성을 거론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에 겨운 일이자 재미도 없는 일이다. 몇 자 적어보려고 손가락과 머리를 쥐어짜도 한 마디조차 끄집어내기 어려울 정도로 애플 제품에 대한 지식 역시 없다. 아, 그러고 보니 한 10여 년 전쯤에 AMD 샘프론 시스템에 해킨토시를 잠깐 사용해 본 기억이 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 솔직히 난 이 책을 접하기 전까진 스티브 잡스가 죽은 줄도 몰랐다!

그렇다면, 애플 제품을 사용해 본 적도 없고, 애플의 폐쇄성을 탐탁지 않게 여겨 왔던 내가 왜 이 책을 읽게 되었을까? 그 직접적인 원인은 시답지 않게도 스위즈(石毓智)의 『중국, 엄청나게 가깝지만 놀라울 만큼 낯선』이라는 책 때문이다. 이 책에서 스위즈는 중국인에게 특히 부족한 창의성, 창조력을 거론하면서 툭하면 그 비교 대상으로 스티브 잡스를 왕왕 거론하는데, 그런 식으로 스위즈의 책 속에서 스티브 잡스를 엄청 대단한 인물인 양 언급하는 것을 계속 읽다 보니 주책없는 호기심이 여지없이 발동해버렸다. 그렇게 해서 앞에서 거론한 스티브 잡스의 전기 두 책을 만나게 되었고, 이 책을 읽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된 것이다. 참 단순한 이유이지만, 이처럼 생각지도 못했던 호기심을 자극하고 그 호기심을 이어주고 지속시켜 주는 지적인 맛과 그 지적인 맛이 간혹 일깨워주는 지적인 유쾌함 때문에 난 책을 읽는다.

인간적으로 스티브 잡스는 어떤 사람일까?

50살이나 먹은 남자가 마트에서 스무디를 파는 할머니에게 스무디가 형편없다며 계속 잔소리를 퍼붓는다면, 당신은 그 남자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만약 당신이 정의감이 넘치면서도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라면 그 남자가 어떤 사람이라고 평가하기도 전에 바람처럼 달려가 할머니 편을 들면서 용감하게 그 남자와 맞설 수도 있다. 한국 사람이라면 ‘진상부리는’ 재수 없는 손님이라고 ‘퉤’하고 침을 뱉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진상부리는’ 사람 중 하나가 스티브 잡스다. 물론 이 한 편의 일화로 잡스의 인품을 무엇이라고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일화는 잡스의 괴팍한 성질이 한번 발동되면 상대를 매우 잔인하게 몰아붙인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무튼, 더욱 가관인 것은 그러고 나서 조금 있다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정색하며 ‘노인네가 일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겠냐’라고 말하며 할머니를 동정한다. 애초에 할머니를 동정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아무리 스무디가 맛이 없을지라도 그렇게 함부로 굴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항상 ‘최고의 것’ 아니면 ‘쓰레기’라는 엄격한 이분법적 사고로 일관됐던 잡스에겐 당연히 어느 마트에서나 팔 법한 고만고만한 스무디가 마음에 들 리가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평소대로 솔직하게 ─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생각을 배출하지 못하도록 막는 필터가 자신에게는 아예 없다고 잡스가 인정한 것처럼 ─ 형편없다고 말했을 뿐이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형편없는 제품, 혹은 형편없는 사람을 그 당사자 앞에서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형편없다고, 혹은 쓰레기라고 말하는 사람이 바로 잡스다. 가식과 체면치레에 신경 쓰느냐 솔직할 기회를 놓쳐 나중에 더 큰 화를 불러오는 일이 왕왕 있다는 것을 깨우친다면 잡스의 무정할 정도로 솔직한 성정은 눈여겨볼 만하다.

형편없는 스무디 이야기에 한때 동거했던 여자가 낳은 딸을 자신의 딸이 아니라고 잡아뗀 이야기, 그리고 그 딸이 어느덧 성장하여 대학을 졸업할 때, 단지 초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참석하지 않은 이야기까지 보태면 잡스의 잔인하고 매몰찬 성품이 어느 정도인지 대충이나마 짐작이 간다. 아이작슨의 책을 읽고 있노라면, 옹졸하고 무례하고 자기중심이고 잔인하고 심술궂고 버르장머리 없는 잡스의 괴팍한 성격에 치를 떠는 몇몇 순간이 있다. 정도가 심할 때는 역겹기도 하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지만, 이런 고약한 인간의 도움까지 받아야 할 정도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 형편없는 것일까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한다.

아무튼, 세계적인 명성과 거대한 부를 거머쥔, 그리고 끝내주게 잘 나가는 IT 기업인 애플의 CEO가 고작 마트에서 파는 스무디 품질 때문에 마치 한국의 지긋지긋한 진상 손님처럼 할머니에게 잔소리를 퍼붓는 모습은 인간적으로 참기 어려운 장면이다. 이 책에는 잡스의 괴팍한 성격에 곤혹스러워하는 아이작슨의 심정과 그래서 잡스의 모난 성격을 조금이라도 둥글게 빚어 보이려는 노력의 흔적이 간혹 엿보이기는 하지만,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살려야 하는 전기인 이상 더 이상의 덧칠이나 각색은 작가 자신도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워낙 잡스라는 인물이 더없이 괴팍하고 복잡하고 변덕스러운 심정을 소유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다 보니 그런 잡스의 성격을 미화하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은 것보다 반발이 더 거셀 것이다. 스티브 잡스의 극단적인 성격을 하릴없이 바라보면 자기애성 성격장애, 조울증, 사이코패스 등등 각종 정신병명을 떠올리게 한다. 그나마 이런 잡스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무례하고 거칠고 잔인하게 보이는 잡스의 언동에는 결코 악의가 담겨 있지는 않았다는 것, 그래서 남에게 일부러 상처를 주고 그것을 즐겁게 지켜보는 심술궂은 사람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잡스의 처지에서는 순진한 소년처럼 자신의 심정이나 느낌을 솔직하게 말했던 것뿐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점을 일찌감치 간파했던 동료들이 있었기에 그들과 함께 잡스는 놀라운 일을 해낼 수 있었으리라.

잡스의 재능은 분명 비범하지만, 다른 위인들도 그러했던 것처럼 그 역시 모든 영역에서 비범할 수는 없다. 잡스의 아내 로렌 파월이 한 말처럼 잡스는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본다거나 하는 사회적 배려는 없다. 그 점은 아이작슨 역시 숨기지 않는다. 대신 잡스는 인류에게 권능을 부여하는 일이나 인류의 진보, 인간의 손에 훌륭한 도구를 들려주는 일에 깊이 관심을 쏟았다. 그것이 잡스가 남기고 싶어 한 유산이었고, 우리가 잡스의 전기를 읽어야 하는 대단한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이기도 하다.

‘현실 왜곡장’, 매력? 아니면 비난?

어찌 되었든 그는 ‘미학과 기술’, 그리고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교차점에서 한발도 양보하지 않은 채 자신의 우아하고 놀라운 창의성에 과학기술, 예술적 감각, 그리고 완벽주의를 접목해 엄청난 일을 저지른 장본인이 되고 말았다. 그의 수많은 인간적 결점에도 그가 그토록 놀라운 업적으로 세상을 혁신시키며 인류를 놀라게 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완벽함에 대한 지고한 열정과 아이디어를 현실화시키는 맹렬한 추진력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천려일득(千慮一得)이라는 사자성어가 나온다.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천 번을 생각하면 한 번은 쓸모가 있다는 말이다. 고로 이 세상에는 무수한 아이디어가 무수한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하늘 저 멀리 반짝이는 별빛처럼 점멸하고 있으며, 그중에는 분명 애플 제품 같은 혁신적인 제품에 깊이 새겨진 창의성에 버금가는 아이디어들도 번득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살다 보면 누구나 괜찮은 아이디어 한두 개쯤은 생각해 낼 수는 있지만, 그것을 현실화시키는 것은 또 다른 일인과 동시에 정말로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잡스가 애플에서 비난과 욕을 먹어가면서, 즉 온갖 갑질과 진상을 부리면서도 그의 혁신적이면서도 도발적인 창의성으로 응축된 아이디어가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조금씩 윤곽이 잡혀가고, 그러다 어느덧 손으로 느끼고 눈으로 감상할 수 있는 하나의 온전한 제품이자 가전제품이라고 하기엔 너무 격이 떨어지고 예술품이라고 하기엔 너무 실용적인 미니멀리즘의 극치를 이룬 제품이 갓 태어난 아이처럼 순수하고 순결한 광채를 뽐내며 세상에 막 태어나는, 드라마처럼 가슴 뭉클한 장면은 애플 제품을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한 나로서도 정말 잊지 못할 감격을 안겨주었다. 그런 감개에 젖어 들 땐 나모 모르게 (자존심 상하게도) 평소 애플에 가졌던 못마땅한 점들은 몽땅 잊어버리고 그저 아직 애플 제품을 한 번도 써보지 못한 나의 한심한 인생에 한탄을 내뿜을 따름이다.

때론 독재자처럼 밀어붙이고, 때론 사디스트처럼 직원들을 못 살게 닦달하는 잡스였지만, 세상을 뒤집어 엎을만한, 그렇게 우주 전체에 거대한 파장을 일으킬만한, 그래서 신나는 일이 되는 제품을 만들고자 하는 개구쟁이 같은 열망과 모든 면에서 완벽을 추구하고자 하는 예술적 열정에 블랙홀처럼 빨려들 수밖에 없었던 잡스의 동료들은 그것이야말로 잡스의 매력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히틀러 같은 자신감 넘치는 카리스마로 상대가 정신을 못 차리게 온갖 거짓과 진실, 압박과 회유, 비난과 칭찬으로 상대나 팀원을 요리하면서 순간의 현실을 자기 뜻대로 왜곡하는 ‘현실 왜곡장(reality distortion field)’이라고 하는 잡스만의 독특한 매력이다. ‘현실 왜곡장’은 잡스를 괴팍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자 때론 사기꾼처럼 비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오로지 한 가지 일에 무섭도록 집중하도록 만드는 무시무시한 집중력을 낳기도 했다.

그 집중력에 소비자의 욕구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통제하려고까지 드는 잡스의 ‘빅브라더’ 같은 성향이 강력하게 결합하여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와 콘텐츠가 엔드투엔드 방식으로 통합된 간단하면서도 엄청난 제품을 완성했다.

최고가 아니면 쓰레기!

사실 아이디어라고 하는 것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혹은 책을 읽는 도중에, 혹은 꿈꾸는 것처럼 멍하게 딴생각을 하고 있을 때 등등 (잡스는 회의 중에 파워포인트를 펼치는 것은 얼간이 같은 짓이라며 대화를 강조했다는 점을 잊지 말자!) 어느 순간 반짝하고 떠오를 때가 많다.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머리를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쥐어 짜낸다고 해서 기발한 뭔가가 쉽게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런 면에서 잡스의 예술가적인 직관력은 그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앞서 잠깐 언급한 『중국, 엄청나게 가깝지만 놀라울 만큼 낯선』에서 스위즈(石毓智)는 중국인은 직관적 사고력이 좋아 문학, 역사, 철학 방면 분야는 나름 발전할 수 있었지만, 번뜩이는 생각이나 제품이 적지 않았음에도 추상적 • 논리적인 과학 체계가 만들어지기 어려웠던 까닭에 현대 과학기술 분야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없다고 지적했는데, 이와는 달리 잡스의 성공에는 직관력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잡스의 혁신 철학은 추상적인 면에서도 월등했다. 하지만, 애플 Ⅲ에 순전히 미적인 이유와 자신이 소음을 싫어한다는 이유로 냉각팬을 달지 않아 토스터로 만든 것이나 넥스트의 참담한 실패 사례를 보면 잡스의 직관력이 언제나 성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었다. 한마디로 잡스의 창의적인 고집대로 일을 밀어붙여 성공할 때도 있었지만, 넥스트의 사례처럼 실패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잡스는 그 자신이 누군가 발명해 놓은 제품들로 이로움을 만끽했던 것처럼 자신도 세상에 이로운 유산을 남기고 싶다는 고상한 동기와 그것을 현실화시키고자 하는 열망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기 때문에 거듭된 실패와 추락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자신의 아이디어로 이제까지 보지 못한 색깔로 세상을 밝히는 빛을 만들 수 있었다. 반면에 중국인이 과학기술 분야에서 뒤진 것은 번뜩이는 생각이나 아이디어를 현실화시킬 수 있는 동기와 열정과 열망이 개인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부족했던 것이리라.

흥미롭게도 잡스의 괴팍한 성벽 중에 잡스가 혁신을 이뤄낼 수 있게 공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놀랍게도 이분법적 사고관이라 할 수 있다. 일명 흑백논리다. 간단하게 말해 잡스에게 세상 모든 것은 ‘최고가 아니면 쓰레기’로 아주 간단하게 분류할 수 있다. 사람도, 물건도, 음식도, 아이디어도 그런 기준으로 평가했다. 그런 연유로 마트에서 할머니가 팔던 스무디는 당연히 ‘쓰레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을 ‘최고’와 ‘쓰레기’로 분류하는 극단적인 사고방식이 오직 애플만이 보여줄 수 있는, 다시 말해 예술과 과학기술의 교차점에 선 채로 완벽을 추구하는 우아한 제품을 잉태하는데 톡톡히 한몫해낼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만약 어떤 제품을 출시하려는데, 예정된 기능을 모두 넣고 예정된 가격으로 제날짜에 맞춰 출시하기가 어렵다고 할 때, 보통은 트레이드오프(Trade-off)라고 부르는 타협을 한다. 즉 몇 가지 기능을 제거해 가격을 낮추는 동시에 출시 날짜와 적정 가격에도 맞추는 것이다. 하지만, 잡스의 철칙은 ‘타협하지 마라’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아주 사소하고 자질구레한 것까지 관여했으며 작은 나사에까지 완벽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지나칠 땐 애플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은 바닥에 음식을 놓고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해야 한다고 요구하기도 했다. 누군가 가져오는 것마다 끊임없이 ‘쓰레기’라고 질타했고, 그럴 때마다 누군가는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공방 같았지만, 완벽한 제품을 세상에 내놓겠다는 잡스의 열망에 공감할 수 있었던 애플 직원들은 결국에는 견뎌냈고(당연히 견디지 못한 직원들은 짐을 싸고 떠났다), 잡스의 울타리 안에서 잡스의 지휘와 통제를 받으며, 그리고 잡스의 철칙과 철학, 열정까지 전수 받으며 온 힘을 다한 끝에 그들은 최고의 영예를 얻을 수 있었다.

평범함과 비범함을 가르는 것

잡스가 성공한 사례들을 보면 재밌게도 사람들이 그토록 집요하게 집착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방식이나 판단이 언제나 최고의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 재밌는 것은 과학과 기술로 먹고사는 업계에 몸담았던 잡스의 삶도 이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점이다.

적절한 식단과 박하 카스티야 비누만 있으면 땀도 나지 않고 냄새도 나지 않는다고 믿었던 잡스는 쓰레기 주위를 윙윙거리는 파리처럼 자신의 주변을 감싸도 도는 고약한 냄새에 주변 사람들이 곤욕을 치를 정도로, 어떤 기업인은 잡스가 씻고 오기 전엔 만나지 않겠다고 모욕할 정도로 목욕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세상이 자기 것인 것처럼 세계의 규칙은 개의치 않고 자기의 아이디어를 밀어붙였다. 처음으로 췌장암 진단을 받았을 때는 수술과 화학요법을 거부하고 민간 치료에만 의존했는데, 그러한 민간 치료 중에는 놀랍게도 심령술도 있었다. 잡스는 의사들이 자신의 몸을 열어보는 것이 싫었다고 밝혔는데, 이것은 보통 사람이 통상적으로 외과수술을 겁내는 그런 종류의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지나친 통제 욕구에서 기인한 복잡한 심리가 적용된 일종의 거부감은 아니었을까? 의사들은 확신하지 못했지만, 이때 바로 수술을 받았다면 암의 전이도 막고 잡스도 아직 살아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히피, 반문화, 반항아, 밥 딜런, LSD, 선불교와 명상, 금식과 극단적 채식주의, 맨발 등등 이러한 모든 것들이 그의 기벽과 괴팍하면서도 독특한 사고방식을 말해주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평범하지 않은 삶과 평범하지 않은 사고방식이 잡스를 평범하지 않은 길로 이끌었던 것일까?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잡스의 성공과 실패는 스파크처럼 번쩍 일어난 직감을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무모해 보일 정도로 저돌적인 추진력이 섣부른 도전으로 이어져 실패를 불러오기도 하지만, 때로는 평범함과 비범함을 가르는 주요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얻은 성공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데, 한 개인으로서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사회, 국가가 실패를 두려워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흔아홉 번의 실패 후라도 단 한 번의 혁신이 먹혀들어 간다면 그 모든 실패를 보상하고도 남는다는 점에서 우리, 그리고 우리 사회는 좀 더 과감해질 필요가 있다(이것이 네이버가 구글이 될 수 없었던 이유다!).

당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은?

혁신적인 분야에서 뭔가 엄청난 일을 해낸 사람들은 우리와 뭐가 다를까. 물론 그들은 머리도 좋고 (흥미롭게도 그들의 부모들은 박사, 변호사, 의사, 교수 등 지적인 분야에서 활동하는 경우가 많다), 특정 분야에 대한 열정, 그리고 미래를 내 손으로 창조하고 싶은 열망, 그리고 아이디어를 현실화시키는 추진력이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차이를 보이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이다. 한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은 그 사람조차도 명확하게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기준이야말로 세상을 뒤집어엎을 만한 뭔가를 창조하는 사람과 그것을 그저 사용하고 소비하는 평범한 사람으로 구분 짓는 것은 아닐까? 그 기준이 일반적인 상식과 일맥상통한다면 인간적으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평가받을 수는 있을망정 혁신가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세상을 남들과 다르게 보지 않는 이상 그 세상을 뒤집어엎을 수 있는 뭔가를 생각하거나 창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기가 사는 세상을 상식적인 수준에서밖에 보지 못하고 상식적인 수준에서밖에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그래서 현실이 만족스럽고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것을 뒤집어엎고 뛰어넘을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할 수 있더라도 무슨 용기로, 무슨 열정으로 실행으로 옮길 수 있겠는가?

진정한 혁신은 세상에 통용되는 상식과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과감한 창의성과 그것을 현실화하는 기지와 용기가 발휘할 때 가능하다는 점에서 혁신가는 반항아이자 혁명가이자 이단아자 도전자이다. 그래서 이 방면에는 성공한 사람이 극히 드물 수밖에 없다. 어느 사회든 반항아로, 혹은 혁명가로, 혹은 이단아로 사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이거니와 문화에 따라서는 사회적으로 매장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도전이 매번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잡스가 중국에서, 혹은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툭하면 능력이나 업무와는 상관없는 개인적이거나 도덕적인 결점까지 시시콜콜하게 들춰내어 인신공격을 가하는 한국과 중국의 문화로 볼 때, 마트에서 일하는 할머니에게 잔소리를 퍼붓고 결혼도 하지 않고 낳은 딸을 인정하지 않는 잡스를 몰인정하고 파렴치한 자로 낙인찍은 나머지 재능을 펼칠 기회조차 박탈하지는 않았을까?

아이작슨의 책을 읽으며 내내 부러웠던 점은 잡스가 엄청난 인간적 결점과 기벽을 안고 있었음에도 잡스의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허용했던 미국 사회의 관용이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사람의 도덕적 인간적 결점이 기업 경영에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이상, 또한 이익을 창출할 수 있다면 능력을 우선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조조도 사소한 결점 때문에 인재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지 않았던가? 그렇게 변명한다고 해도, 설령 능력주의가 대세라고 해도 인간적으로 망나니 같은 모습을 자주 보인 잡스가 크고 작은 불똥을 일으키면서 자신의 철학을 완성해 가는, 마치 고집 센 수도자가 고행을 쌓아가는 것 같은 모습은 인재를 배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인재가 가진 인간적 결점과는 별개로 그의 재능을 인정하고 받아줄 줄 아는 사회의 포용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스레 일깨워준다. 제갈량처럼 능력과 성품을 고루 갖춘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지만, 그런 사람이 혁신적인 일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보장도 없다는 점에서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잡스가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거기에도 이분법적 사고가 작용했을까? 그렇다면 잡스의 눈에는 우리가 살고 그가 살고 그의 가족과 동료가 사는 이 세상이 ‘최고’로 멋지게 보였을까? 아니면 ‘쓰레기’처럼 최악으로 보였을까? 애플이라는 회사가 건재하고, 또한 그 회사가 생산한 최고의 제품이 있었기 때문에 잡스가 세상을 떠날 무렵엔 이 세상이 ‘최고’로 멋지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한편, 『비커밍 스티브 잡스』에서 잡스는 어떤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날까? 스티브 잡스, 다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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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0. 30.

[책 리뷰] 창의력 부족을 민족성에서 찾다 ~ 중국, 엄청나게 가깝지만 놀라울 만큼 낯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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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력 부족을 민족성에서 찾다

Original Title: 中國人的邏辑 by 石毓智
이 책을 쓰게 된 목적은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중화민족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사고습관을 알고, 그것의 득실을 이해하여 다른 각도로 세상을 바라보길 바라서다. 그것을 토대로 지혜를 넓히고 경쟁력을 높여 인류의 과학 문화 발전에 공헌하길 바라서다. (『중국, 엄청나게 가깝지만 놀라울 만큼 낯선』, 6p)

책을 읽고 보니 책 제목이 눈에 거슬리다

오늘 리뷰하는 책의 한국어판 제목은 부제까지 포함하면 책 제목치고는 무지하게 긴 『중국, 엄청나게 가깝지만 놀라울 만큼 낯선: 의외로 낯선 중국 문화와 사유의 인문학』이지만, 원제는 이보다는 훨씬 간략한 ‘中國人的邏辑’이다. 구글 번역이 아니라 바이두 번역을 이용하여 한국어로 번역하면 ‘중국인의 논리’다. 간혹 외국책이나 외국영화의 제목을 한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원제나 작품의 내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한, 그래서 원제와 동떨어진 감이 없지 않은 한국어 제목이 탄생하곤 하는데, 이 책의 제목도 그런 생뚱맞은 제목 중 하나라고 말하고 싶다. ‘중국인의 논리’라는 제목이 어떤 우여곡절을 거쳐 『중국, 엄청나게 가깝지만 놀라울 만큼 낯선』으로 재탄생했는지 그 오묘한 이치를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책을 읽고 나면, 그래서 내용을 알고 나면 한국어 제목이 상당히 놀라울 만큼 낯설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별로 의미심장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책 내용을 성의있게 암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기차처럼 길어 보이기만 하는 제목은 한국인의 입장을 고려해서 나온 듯한 추측이 들기는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 영화나 책이나 ─ 가능한 한 원제를 충실하게 반영하는 제목을 선호하는 나로서는 원제는 직역하고, 현재의 한국어 제목을 부제로 덧붙이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즉, 『중국인의 논리: 중국, 엄청나게 가깝지만 놀라울 만큼 낯선』처럼 말이다.

낯설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고

뜬금없이 되지도 않는 억지를 부려가며 제목에 시비를 건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중국, 엄청나게 가깝지만’이라는 말에는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말이지만, 그 뒤에 붙은 ‘놀라울 만큼 낯선’이라는 말은 독자의 소양에 따라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중국이 낯설게 느껴졌을지 몰라도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어찌 된 일인지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중국의 민족성에서 놀랍게도 한국의 민족성과 유사한 면을 많이 발견하면 할수록 더욱더 중국인이 가깝게 느껴진다. 물론 독자의 가치관이나 쌓아온 역사 지식이나 살아온 경험에 따라, 그래서 한국의 민족성을 어떻게 보고 이해하는지에 따라 이와는 반대로 작용할 수도 있다.

즉, 이 책을 읽으면서 중국의 낯선 모습에 더 많은 의미를 둘 수도 있고, 이 책의 한국어 제목도 그러한 연유로 지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최소한 나는 저자 스위즈(石毓智)가 조목조목 일목요연하게 지적한 중국의 민족성에서 중국인의 특성뿐만 아니라 한국의 민족성 또한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이, 그래서 어떻게 보면 두 민족이 쌍둥이처럼 보이기도 했다는 점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물론 같은 부모, 같은 환경 아래에서 서로 사이좋게 성장한 화목한 쌍둥이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부모와 환경 아래에서 자라면서 일찌감치 사이가 틀어져 어쩌다 만나기만 하면 원수처럼 으르렁거리는, 일란성보다는 이란성 쌍둥이에 더 가깝지만 말이다. 한국인의 유전자는 중국 남방에 사는 한족보다는 북방에 사는 조선족이나 만주족과 더 가깝다고는 하지만, 문화 유전자인 밈(Meme)으로만 따지면, 중국 문화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점에서 문화적으로도 이란성 쌍둥이 정도는 될 것 같다.

중국의 민족성에서 발견한 한국의 민족성

그렇다면 이쯤에서는 『중국, 엄청나게 가깝지만 놀라울 만큼 낯선』에서 스위즈가 통찰한 전 세계 중국인을 망라하는 민족성에서 한국인의 민족성과 유사한 점을 (이것은 순전히 내 주관적인 관점이다!) 꼽아보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그 첫 포문은 먹는 행위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중국인처럼 ─ 나를 포함한 ─ 한국인도 먹는 모습으로 그 사람의 인품을 가름하거나 첫인상을 결정하는 사람이 꽤 있다. 누군가와 첫 식사 자리를 같이하는데 먹는 둥 마는 둥 깨작깨작 밥을 먹는 사람, 심술 난 아이처럼 편식하는 사람, 음식을 터무니없이 남기는 사람, 밥 한 알도 남기지 않고 맛있게 먹는 사람 등 이들의 첫인상은 같을 수가 없다. 또한, ‘밥은 잘 먹고 다니니?’, ‘밥 먹었어?’, ‘식사하셨어요?’ 등은 가족, 친구, 지인, 혹은 처음 만난 사이에서도 안부를 묻고 인사를 나눌 때 가장 흔히 주고받는 말이다. 옛 시절을 회상하며 추억의 음식에 집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중국인은 날짐승이나 들짐승을 봤을 때 가장 먼저 '잡아먹어야겠다'라는 생각부터 한다고 하는데, 한국인이라고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다. 아무튼, 그런 연유로 중국인은 빈 땅을 보면 먹을거리를 심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서양인은 무엇을 심어야 아름다운 환경을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어떨까? 아마 요즘 사람들은 빈 땅을 보면 집을 짓거나 상가를 올려 세를 받아먹을 생각을 할 것 같다. 동양화의 매력은 여백인데, 빈 땅을 그냥 놔두질 못하니 도시 공간의 여백이 모두 죽어가는 덕분에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숨 막혀 죽을 지경인 것이 한국의 실정이다.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교육 부분이다. 스위즈는 중국의 교육 시스템이나 부모는 개성이 강하고 독립적이거나 권위와 전통에 도전하는 아이보다는 기존 질서에 순응하고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평범한 사람을 길러낸다고 (한국이랑 너무 비슷하지 않은가?) 말한다. 부모는 자식이 사회에 큰 공헌을 하기보다는 평생 안정되고 편안하게 살기를 바라거나, 아니면 자녀의 성공이나 출세를 등에 업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닐 수 있는 위세 등등한 부모가 되기를 꿈꾼다. 그래서 중국이나 한국의 젊은이들은 창업이라는 모험과 도전의 길로 들어서기보다는 대기업이나 공무원이나 교직 등 안정된 울타리 안에서 일하기를 바란다. 또한, 지나치게 기초와 준비를 강조하는 나머지 창업과 혁신에 가장 필요한 모험 정신과 기회를 놓치기 일쑤다.

이렇게 모험 정신이 부족한 상태에서 안정적인 것만을 찾는 데다가 모방 정신까지 투철하다 보니 가게를 열어도 뭔가 새로운 것을 모색하기보다는 장사가 잘되어 보이는 업종을 유행처럼 따라 하다가 결국 자멸한다. 그래서 한 중국인이 가게를 열어 돈을 엄청나게 벌면, 얼마 안 가서 다른 중국인이 같은 지역에 하나둘씩 같은 가게를 연다. 그런 식으로 제 살 깎는 경쟁이 시작되고, 다들 돈을 못 벌다가 결국은 하나둘 문을 닫는다. 스위즈는 이 이야기를 중국인의 특징을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소개하는데, 한국도 남 따라 하기는 뒤지지 않는다. 1990년대 말 우리 동네에서 최초로 PC방을 개업한 입장으로서는 소름 끼치도록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세 번째로 살펴봐야 할 것은 유교 문화에서 비롯된 폐해다. 직업에 대한 편견, 공정함에 대한 이해 부족, 어떤 일에 대해 옮고 그름을 따질 때 사람의 지위나 명성, 부를 보고 판단하는 관본위(官本位) 사상, 질서와 권위에 대한 복종을 미덕으로 여기는 전통, 지나치게 인내를 강요하는 사회 등 한때 유교를 광신했던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구구절절한 말들이다.

마지막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바는 직관적 사고방식이다. 스위즈는 중국의 과학기술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로 중국인의 수많은 발견이 직관적 관찰에만 그치고, 이것을 계승하고 발전시킬 논리적이고 수학적으로 사고하는 부분이 약했다고 분석한다. 그로 말미암아 문학, 역사, 철학 방면의 직관적 사유 분야는 나름 발전할 수 있었지만, 번뜩이는 생각이나 제품이 적지 않았음에도 추상적 • 논리적인 과학 체계가 만들어지기 어려웠던 까닭에 현대 과학기술 분야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없다고 지적한다. 중국인이 논리적이고 추상적인 사고가 발달하지 못하고 대신 직관적 사유가 발달한 근원에 대해 스위즈는 기호화되기 어려운 한자의 특성을 언급한다. 세계적인 발명이라 할 수 있는 측우기나 금속활자를 개발할 능력이 있었음에도 이런 발명품들을 통해 어떤 과학적인 이론이나 기술 체제를 확립하여 지속적인 개량과 발전으로 이어지지 못한 나머지 이제는 중국에까지 뒤처질 위기에 처한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큰 일리 있는 분석이다.

이밖에도 낯선 이를 차갑게 바라보는 폐쇄성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담장, 울타리 문화, 성격적 특성과 습성을 지역화하는 경향, 쉽게 감동하고 쉽게 감정에 휩쓸리는 냄비 근성, 자신의 잘못을 어떻게든 상대의 잘못으로 덮어보려는 행동, 개인의 능력과 도덕성을 집요하게 연결 짓는 것, ‘나 하나쯤이야.’ 하는 이기주의 등 중국인의 민족성에서 우리의 새가슴을 뜨끔하게 할 항목은 한둘이 아니다. 반면에 짝퉁에 지나칠 정도로 관대한 것과 목숨보다 더 체면을 중시하는 풍조, 오직 돈으로만 성공을 판단하고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는 돈에 대한 맹신과 지나친 탐욕, 불신이 난무하는 교육계, 연줄과 인맥이 없으면 아주 간단한 일조차 복잡하게 변해버리는 이상한 사회 등 어딘지 모르게 우리와 비슷하면서도 이질적인 성향을 보여주는 중국은 놀라울 만큼까지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낯설 수 있다.

창의력을 죽이는 중국인의 민족성

원제 ‘中國人的邏辑’를 직역한 그대로 중국인의 논리와 사고방식을 허심탄회하게 토로하는 한편, 그로 말미암은 부작용과 폐해를 진지하게 질책하는 책이다. 부끄럽게도 남의 험담을 듣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고, 그 대상이 우리를 위협하는 경쟁 상대라면 즐겁다 못해 고소하기까지 하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이러니까 중국은 더는 발전할 수 없는 거야’, ‘이래서 중국은 안 되는 거야’ 등의 안일한 생각을 품는 안일한 사람이 있을 수 있겠으니, 이 책은 그런 안일한 한국 독자들의 안일한 기대와 희망을 충족시키고자 쓰인 안일한 책은 절대 아니다. 그런 생각으로 가볍고 만만하게 이 책을 읽은 나머지 오히려 중국을 더 얕잡아 보는 우를 범하게 될까 봐 걱정이 태산이다. 중국을 상대해야 하는 우리에겐 부담스럽게도 『중국, 엄청나게 가깝지만 놀라울 만큼 낯선』은 중국인의 습관성 사고의 폐단과 이해득실을 따져보고 반성하기 위해 쓰인, 지혜롭고 근면한 민족인 중국인을 각성시켜 한 단계 더 나아가고자 하는 원대한 포부를 품고 쓰인 책이다. 그렇다고 중국인이 당장 이 책을 읽고 뜨거운 반성의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깊은 감명을 받은 나머지 ‘아, 이래선 안 되겠구나’라고 뉘우치면서 곧바로 자기성찰의 길로 이어질 거라는 기대는 성급한 판단이지만, 체면에 죽고 체면에 사는 중국인 스스로가 외부 세계에 드러내기 껄끄러워하는 민낯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그럼으로써 각성을 촉구한다는 것은 마치 루쉰이 살아 돌아온 것 같은 착각을 일게 할 정도로 섬뜩하면서도 충격적인 일이다.

스위즈는 총 10장에 걸쳐 중국인의 사고방식을 논하면서, 그리고 유구한 문화와 전통에서 현대 사회에 맞지 않거나 오히려 현대 사회 발전에 해가 되는 민족성의 단점들을 대중이 알기 쉽게 요목조목 따지면서 일관되게 강조하는 능력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창의력이다. 스위즈는 ‘왜 오늘날의 뛰어난 과학기술은 중국인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가?’라는 질문의 답으로 중국인의 부족한 창의력을 제일로 꼽고 있다. 중국 민족성의 단점들을 총 10장에 걸쳐 나열한 이유도, 뒷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천박한 호기심이나 만족시켜줄 가십거리를 제공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중국인의 민낯을 드러내어 전 세계인의 비웃음거리로 만들기 위해서도 아니다. 바로 중국인에게 있어 가장 치명적인 단점이라 할 수 있는 창의력이 부족한 근원을 중국인의 민족성에서 찾고자 함이다.

정말로 창의력의 부족이 민족성에 있고, ─ 쉽지는 않겠지만 ─ 창의력에 해가 되는 민족적 특성을 점차 개선해나갈 수 있다면, 그리고 중국이 정말 그럴 의도와 의지가 있다면 이 책은 중국인에게는 정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잠재력이다. 스위즈의 바람대로 중국인이 각성과 반성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고갈된 민주 의식도 싹이 터 그것을 토대로 인류의 과학 문화 발전에 공헌하는 방향으로 진보한다면야 천만다행일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겠지만, 지금처럼 공산당이 배출한 제3대 황제 시진핑을 필두로 고약한 공산당이 모든 걸 좌지우지한다면 우리에겐 득보다 실이 많을 것 같다. 중국의 어마어마한 경제력에 창의력까지 더해져 과학기술과 혁신 분야에서도 중국이 성큼 나아갈 수 있다면, 중국의 국가경쟁력은 세계 최고가 될 것이며, 그로 말미암은 전 세계적 여파는 상상하기조차 하기 싫을 정도로 충격적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무튼, 이 책이 지금의 중국에 당장 큰 영향을 끼칠 리는 없겠지만, 깨어 있는 중국인이 많을수록, 그리고 그들의 외침이 더욱더 커질수록 중국의 미래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지도 모른다. 물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인류에 유익한 방향으로만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지만 말이다.

우리도 부족한 것이 창의력인데

의도적이지 않게도 이 책은 중국처럼 창의력에 목말라 허덕이는 우리에게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사가 지나온 성장 지상주의의 씁쓸한 뒤안길을 다시금 뒤돌아보게 한다. 투기와 과대광고가 유행하는 것은 그 사회에 창조력이 부족함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중국인은 자연 앞에서 시나 노래를 지으면서 아름다운 문학을 얻었고, 유럽인은 자연 앞에서 거대한 돌의 이동 원리를 생각하여 새로운 과학 시대를 열었다고 한다면, 한국인은 자연 앞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고 그로 말미암아 무엇을 남겼나? 사고습관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낸다면, 한국인의 사고습관은 어떠한 논리와 이치에 맞물려 돌아가고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우리 사회에 투영되고 있을까? 물론, 스위즈의 이 책처럼 ‘한국인의 논리’나 민족성을 분석한 책이 어딘가에 있겠지만, 막상 펼쳐보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스위즈의 책은 다른 나라 이야기니 그러려니 하고 읽을 수 있었지만, 내가 만약 중국인이라면 나의 속내나 치부를 끄집어내는 『중국, 엄청나게 가깝지만 놀라울 만큼 낯선』을 읽고자 한다면 상당한 각오 없이는 어렵지 않을까? 아마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불편한 마음을 억누르는 인내심과 진정시킬 수 있는 냉정함이 꽤 많이 필요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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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0. 23.

[책 리뷰] ‘험담’이라는 가학성 취미를 부추기는 인터넷 ~ 망내인(찬호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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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담’이라는 가학성 취미를 부추기는 인터넷

Original Title: 网内人 by 陳浩基
자신의 비참한 운명을, 불행을 타인에게 전가한다면 다시는 행복할 수 없을 것 같다. 복수는 오히려 불행을 지속시키고 또 다른 형태로 세상에 원한을 남겨놓을 뿐이다. (『망내인(网内人)』, p625)

재능과 재력 모두 역대급 탐정

아마 찬호께이(陳浩基)의 『망내인(网内人)』을 선택한 독자가 거쳐온 별로 특별할 것 없는 과정은 나와 비슷하리라 본다. 2011년 제2회 시마다 소지 추리소설상을 받으면서 일본 추리소설계의 거장 시마다 소지(島田荘司)로부터는 “무한대의 재능”이라는 찬사를 끌어낸 『기억나지 않은, 형사(遺忘.刑警)』에 매료된 나머지 그 이후 발표한 소설 『13.67』을 거쳐 여기까지 이르게 된 것이리라. 아마도 말이다. 『망내인』에 대한 세간의 평은 뜻밖에 좋아 보이지만, 내게 미치도록 감상적이면서도 문학적 격이 느껴지는 텍스트를 선물한 『별들의 고향(최인호)』을 읽은 직후라서 그런지 여러모로 실망스러운 소설 읽기가 되어버렸다.

예전 작품과 비교해 어딘지 모르게 퇴화하여버린 듯 단조로워진 텍스트는 장르소설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재능, 사회적 지위, 명성, 재력 등 어디 한군데 빠질 데 없이 너무나도 완벽한 탐정 아녜의 완벽한 계획과 완벽한 리드가 톱니바퀴 맞물리듯 잘 짜여 있어 싱겁다 못해 허탈하게까지 느껴진다. 마치 롤플레잉 게임에서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퀘스트처럼 한 치의 오차도 한 치의 어긋남도 없다. 그는 전지전능한 해커 실력과 ‘사회 공학’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상대의 모든 허점과 개인 정보를 꿰뚫어 볼뿐만 아니라 그 정보를 이용해 상대의 감정을 좌지우지하며 판단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상대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조종당한다. 아마도 이러한 설정을 통해 맹목적으로 과학기술을 추종하고, 인터넷과 SNS에 중독된 일부 독자에게 이제라도 개인 정보 유출과 신상털기 위험성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라는 일침을 가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은둔한 고수처럼 괴짜 같은 성격만 빼놓으면 남모르게 좋은 일을 하면서 당연하다는 듯 내색하지 않는 그는 정말 완전무결한 인간이지 아닌가?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탐정 아녜라는 인물에게서는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역겹다 못해 기가 찬다. 추리소설을 읽는 재미 중 하나는 작품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다양하고 독특한 개성으로 넘쳐나는 탐정들이 발산하는 인간적인 매력이라 할 수 있는데, 아녜에게서는 그런 것을 느끼기가 어렵다. 그는 인공지능처럼 퍼펙트한 계획을 짜고, 악마처럼 감정의 동요 역시 계획을 착착 진행한다. 하물며 그는 인과응보도 믿는다. 그렇다면 돈을 받고, 혹은 심심풀이로 재미 삼아 염라대왕처럼 단호히 복수를 집행하는 그가 뿌린 것은 어떻게 거둬들여야 할 것인가?

아녜는 보기에 따라 이제껏 보지 못한 독특한 탐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엄청난 재력에 질린 나머지 일찍이 은거하여 취미 삼아 마치 신이 세상의 악을 단죄하듯 탐정 일과 복수 사업을 병행하는 그를 하등 보잘것없는 내가 어찌 시샘하지 않고 버틸 수 있겠는가? 그런 재수 없는 밥맛 같은 탐정을 나는 내내 질투하고 있었으니, 염라대왕의 멱살이라도 붙잡고 담판을 짓고 싶다. 그런데 무슨 담판을 짓는다는 거지?

아무튼, 질투와 시샘이 극에 달해도 그 격한 감정을 풀 때가 없으니 제풀에 꺾일 수밖에 없고, 대신 그 반작용으로 우울증이 도진다. 세상만사가 다 귀찮아진다. 리뷰를 쓰는 지금도 그 우울한 감정을 여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그것은 그만큼 아녜가 알게 모르게 눈부시도록 생생하게 그려졌다는 방증이 아닌가? 아, 이 모든 것이 찬호께이의 트릭이었나?

인간의 가학성을 부추기는 인터넷

어쨌거나 『망내인(网内人)』은 이전 두 작품에 비하면 실망스럽다. 물론 읽는 재미는 있다. 지루하지도 않다. 그러나 추리 깊이나 트릭의 신선함은 예전만 못하다. 특히 『기억나지 않은, 형사(遺忘.刑警)』에 비하면 ‘무한대의 재능’이 벌써 소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앞으로 찬호께이가 추리소설 역사에 길이 남을 좋은 작품을 많이 남긴다면, 이 소설은 위대한 작가의 평작으로 남을 그런 소설이다. 사회파 미스터리의 시조 마쓰모토 세이초(松本 清張)의 『푸른 묘점(蒼い描点)』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누군가 『망내인』을 고른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다. 아무리 이 소설이 이전 작품과 비교하면 무너진 우물처럼 깊이가 떨어지고 막판 할인에 들어간 생선처럼 신선치 못하다 하더라도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만큼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은 단순히 공감을 넘어서 마땅히 우리가 인지하고 직시하고 그래서 반드시 개선해야 할 인터넷 세상의 고질적인 병폐이기도 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잊을만하면 반복되는 인터넷 마녀사냥이다.

『망내인』은 여타 추리소설과는 달리 단 한 사람의 죽음만이 부각된다. 바로 15살 소녀 샤오원이다. 한창 예민할 대로 예민한 사춘기 시기의 소녀가 말 못 할 고민 몇 가지쯤 가지고 있는 것은 대수가 아니다. 그로 말미암아 죽음을 떠올리더라도 그것은 누구나 응당 겪을 수 있는, 삶을 배우고 이해해 나가는 수업의 한 과정이다. 어른들이 멋대로 설정한 교과서 같은 경로에서 약간 벗어난 정도의 성장통이다. 그러나 소녀가 정말로 자살했고, 그 발단이 누군가 인터넷에 올린 악의적인 글 때문이라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소녀의 나약함을 질책해야 할까? 아니면 그 소녀를 모욕하는 더러운 글을 올려 선동질한 누리꾼과 무수한 댓글로 이에 동조한 키보드 워리어들을 탓해야 할까? 아마 이것은 각자가 가진 가치관이나 신념, 인격에 따라 차이가 날 것 같다. 그중에는 어차피 그런 것도 견디지 못할 정도로 나약하다면 일찍 세상을 떠나는 것이 나을 거라고 가차 없이 말하는 사람도 분명 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은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한다고, 그래서 도태되는 쪽이 되지 않으려면 도태시키는 계층이 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차가운 피를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에게서는 일말의 인간성도 찾아볼 수 없지만, 우리는 그들의 생각이 현실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에 분노하기보다는 탄식하기 일쑤다.

아무튼, 선동적인 글을 올린 누리꾼을 탓하는 것은 무방하지만, 그 글의 표적이 된 소녀가 스트레스에 시달린 나머지 정신적 붕괴를 일으켜 자살했다고 해도 그 누리꾼은 기껏해야 명예훼손죄에 해당할 뿐이다. 그 사람은 그저 인터넷에 글을 올린 것뿐이니까. 이것이 『망내인』에서 사달을 일으키는 시발점이다. 소설은 범죄와 추리를 다루는 만큼 잔인하게도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즉, 그저 재미 삼아, 혹은 화풀이로 누군가를 비방하는 글을 인터넷에 올린 것이 아니라 표적이 된 사람이 자살하게끔 의도적으로 그런 글을 올려 마치 여론몰이라도 하는 것처럼 누리꾼들을 선동하고 댓글을 조작한다. 참으로 비열하고 비겁하고 더없이 야비한 짓이지만, 인터넷 사용이 활발한 오늘날, 그 누구도 마녀사냥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소름 끼치는 일이지 아닐 수가 없다.

『망내인』처럼 특정인을 자살하려는 목적으로 마녀사냥을 일으킨다면, 그래서 그 목적이 이루어졌다면, 그 누리꾼을 살인자라고 딱 부러지게 지목할 수 있을까?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참으로 딱 부러지게 말하기 어려운 문제다. 문명과 기술이 안락함과 물질적 풍요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전 사고방식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운 심각한 부조리를 가져온 것도 사실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사이버 범죄다. 우리가 남이 안 보는 곳에서 맘 놓고 험담을 지껄이듯, 인터넷이라는 익명성은 인간의 보편적인 가학적 취미인 험담을 방종의 상태로 풀어놨다. 사회에서는 점잖은 옷을 입고 점잖게 말하는 그가 모니터 화면 앞에 숨어 인신공격으로 가득한 댓글을 따발총처럼 쏘아댈 때, 과연 그의 진짜 모습은 무엇인가? 하물며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인터넷에 어떤 글과 댓글을 남기는가? 인터넷이 스트레스에 찌들 때로 찌든 현대인의 해우소 역할을 돈독히 한다고 해도, 변소에 남긴 똥과 오줌이 오롯이 당신 것인 것처럼 인터넷에 남긴 글은 당신의 또 다른 모습이다. 『망내인』은 인간성의 적나라한 모습이 가장 심각하고 저급한 방식으로 드러나는 곳인 인터넷과 그 뒤에 숨은 인간의 어두운 모습을 샤오원의 자살과 샤오원을 자살로 몰아간 사람들의 동기와 교차시키며 독자의 양심을 자극한다. 다만, 그 천착의 깊이가 다소 얕고 두루뭉술하며 교조적이라는 점이 흠이라면 흠이지만 말이다.

복수의 굴레에 빠진 자만이 복수를 끝낼 수 있다

독자는 『망내인(网内人)』을 읽는 내내 반드시 한 가지 의구심이 들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샤오원의 언니 아이의 처지에서는 범인들이) 샤오원을 마녀사냥으로 자살로 몰아간 동기다. 이 동기를 알게 된 순간, 그토록 복수심에 불타오르던 아이는 동생을 위한 복수를 망설이게 된다. 이대로 복수를 강행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이쯤에서 그들을 용서하고 복수를 멈추어야 하는 걸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쳐 아녜에게 복수를 의뢰할 때까지만 해도 추호도 의심할 수 없었던, 영원히 변치 않을 것 같았던 복수심이었지만, ─ 분명 동생이 받았을 법한 ─ 고통에 시달리는 한 소녀를 보자 아이의 마음은 동요한다. 복수한다고 자신이 겪는 불행과 고통, 슬픔이 기쁨과 행복으로 마법처럼 탈바꿈할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복수했다는 기억만큼은 평생 안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건 그 복수극의 도화선이 된 소중한 누군가, 즉 아이에게는 샤오원을 잃은 것만큼이나 쓸쓸하고 우울한 기억이자 아물만하면 마음 한구석을 찔러 상처를 남기는 영원의 가시이지 않을까? 난 아이의 선택이 옳다고 단정하지는 않는다. 대신 그녀의 선택이 현명했다고 말하고 싶다. 비참한 운명을 끝낼 수 있는 사람은, 그 비참한 운명에 빠진 그 사람뿐이다. 그런 면에서 아이의 선택은 현명했다.

반은 추리, 나머지 반은 복수에 할당한 긴 소설이자,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해커소설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해킹 실력에 의존하는 경향이 많기에 탐정이 발로 뛰며 사건을 집요하게 파헤치는 고전적인 맛은 부족하다. 하지만, 사이버 시대의 추리소설은 구시대 탐정들이 필수적으로 갖춘 명석한 두뇌에 아녜 같은 컴퓨터 실력까지 갖춘 탐정이 제격일지도 모르겠다. 그 누구도 검색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시대에, SNS에는 온갖 잡다한 개인 정보가 벼룩시장에 나온 잡동사니처럼 진열된 요즘에, 우리의 신상털기는 총체로 먼지를 털어내는 것만큼이나 쉽다. 현실이 그러하니 구태여 발품을 들여 시간을 낭비할 필요도, 수고할 필요도 없다. 그래도 난 아무리 구린 발 냄새가 사방천지에 진동하더라도 발로 뛰는 탐정들이 등장하는 전통적인 추리소설이 좋다. 현실과 소설은 엄연히 다른 것이니까. 아무튼, 전작에 비교해 다소 진부한 소재와 번득이는 맛이 부족한 평작이지만, 찬호께이의 전작 두 소설을 읽은 독자라면 그래도 읽어보지 않고는 배길 수는 없는, 그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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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0. 20.

[책 리뷰] 외로움이라는 괴물에 삼켜진다는 것 ~ 별들의 고향(최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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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이라는 괴물에 삼켜진다는 것

Original Title: 별들의 고향 by 최인호
우리들이 서로 만나 약속도 없이 서로의 살을 맞댄 것은 사랑 때문이긴 해도 우리는 결과적으로 서로 떨어져 있는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결국 혼자, 혼자, 혼자뿐이었다. 술을 마시고, 사랑을 하고, 정사를 나누고, 식사를 하고, 영화구경을 하고, 산보를 하고, 육교를 오르내리고, 커피를 나눠 마시고, 껄껄 웃어도 우리는 결국 혼자였다. (『별들의 고향』, 2권, p265)

한때 그녀가 살아 있었다는 것이 나를 슬프게 한다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인 1972년에 신문 연재를 시작했으니, 반올림하면 어느덧 5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50년은 반세기이고, 생물학적으로 계산해 본다면 호모 사피엔스의 2세대에 해당하는 짧지 않은 시기다. 이 말은 만약 경아가 살아 있다면, 그녀는 나의 어머니 또래이며 지금 자라라는 아이들의 할머니뻘에 속하는 세대라는 말이다. 그녀가 살아 있다면, 경아가 살아 있었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경아는 그러지 못했다. 경아는 암울했던 유신 시대의 종말을 고함과 동시에 새로운 군부독재의 시작을 고하던 1979년의 그 날도, 도시 빈민에 대한 가혹한 폭력의 역사를 은폐하고 국제무대에 한국을 알리는 계기가 된 1988년의 그 날도, 빚더미에 올라앉은 나라가 통째로 무너진 1997년의 그 날도, 둥그런 축구공이 어디로 튀는지에 따라서 온 국민이 울고 울었던 영광스러운 2002년의 그 날도, 그리고 70여 년 동안 적대관계에 있던 북한과 미국의 정상이 드디어 한 자리에 마주하던 2018년 희망의 그 날도 그녀는 보지 못했다. 그녀보다 네 살 어린 나의 어머니도 아직 살아 있고, 심지어 그녀보다 두 살 많으면서 믿기지 않게 한창 청춘의 고뇌에 빠져 허우적거려야 할 26살에 『별들의 고향』을 썼다고 하는 소설가 최인호도 당당하게 살아 있는데,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그렇다. 쉽게 예상할 수 있듯 그녀는 죽었다. 그래서 나는 슬프다. 이 슬픔은 잠시 사랑했던 연인과 헤어질 때 느낄법한 얄팍한 비애감보다는 내가 죽도로 짝사랑했던 여자가, 평소에는 나를 쳐다볼 생각도 않았던 도도한 그녀가, 그런 그녀가 나를 남모르게 좋아했다는, 그래서 내가 자기에게 다가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라는 말을 남기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나의 영혼을 짓누르는 죽음과도 같은 참담함에 가깝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경아가 살아생전에 했던 말처럼 그녀가 죽어서 슬픈 것보다는 그녀가 한때 살아 있었다는 생각이 더더욱 나를 우울하고도 깊은 슬픔에 잠기게 한다. 차라리 경아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태어났더라도 그녀의 존재를 몰랐더라면 그녀의 때 이른 죽음이 나를 때늦은 비애 속에 잠기게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이미 지독한 작가를 통해 지독한 삶을 살아간 경아를 알게 되었으니 빌어먹게도 작고 귀엽고 통통하고 착한 그녀를 어찌 사랑하지 않고 버틸 수 있을쏘냐! 젠장 맞게도 난 어젯밤 경아를 연상시키는 통통한 중년 여자와 질퍽하게 섹스하면서 뭔가 비장한 쾌감까지 느끼는 이상야릇한 꿈까지 꾸지 않았던가! 상황이 이처럼 빌어먹을 지경으로까지 몰렸으니 이제 작가라도 원망하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다. 무심하고 잔인한 작가 최인호, 경아를 죽인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당신이야!

죽기 전에 읽어서 정말 다행이야!

나의 되먹지도 않은 푸념과 내가 지독히도 존경하는 작가에 대한 무례는 이쯤에서 그만두고 『별들의 고향』을 읽고 나서, 그리고 읽으면서 가장 절실했던 것을 꼭 집어서 말하라면, 이제라도 이 작품을 읽었다는 안도감과 만족감이다. 죽기 전에 놓치지 않고 읽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 정도의 좋은 작품, 좋은 소설은 이 세상에 부지기수겠지만, 한 독자가 평생 읽을 수 있는 독서량의 한계와 그 사람이 책을 접할 수 있는 운신의 폭 내에서 그런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우연과 기회는 좀처럼 드물다. 내가 비록 지금까지 천여 권의 책을 읽었다지만, 그 책 전부가 동네 도서관에 소장된 책으로 한정되어있는 점만 보더라도 세상에 읽을 책은 정말 많지만 실제로 읽을 수 있는 책은 그렇게 많지 않다. 물론 경제적인 여유와 더불어 원서를 읽을 수 있는 언어적인 능력까지 겸비한 독자라면 선택의 폭은 더 넓어지겠지만, 그렇다고 무한정 책을 읽을 수는 없다. 천 권을 읽던, 만 권을 읽던 한 사람이 평생 읽을 수 있는 독서량은 한계가 있고, 그러한 현실 인식은 진지하고 현명한 독자에게 단 한 권이라도 양질의 책을 선택하여 읽어야겠다는 의지와 욕심, 조바심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그런 면에서 고전은 가장 무난한 선택이다. 한편, 가끔은 소일거리로, 혹은 머리도 식히고 기분도 전환할 겸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인 책들도 읽을 수 있겠지만, 그런 책들이 주가 된다면, 독서력을 퇴보시키는 지름길이다. 이런 책들은 독자의 시야를 흐트러트리고 편견과 선입관을 주입시키면서 지적 능력을 퇴화시킨다. 고로 시간 낭비일 뿐만 아니라 인생의 낭비이며 그릇된 독서의 길로 빠지기도 쉽다. 하지만 무엇이 양질의 책이고, 무엇이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인 책이며, 무엇이 인생의 낭비가 되는 책인지는 독자가 선택해야 할 몫이다. 여기서 어떤 책이 좋은 책이다, 혹은 나쁜 책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것은 책을 수백 권 정도 진득하게 읽다 보면 누구라도 충분히 감을 잡을 수 있는 경험의 문제다. 고로 책을 읽어라! 그러다 보면 내가 『별들의 고향』을 읽고 났을 때 내 마음속으로 쓰나미처럼 밀려왔던 안도감과 만족감을 이해하는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다.

외로움이라는 괴물에 대하여

내겐 분명히 ‘좋은 책’으로 다가온 『별들의 고향』이지만, 요즘의 젊은 세대에겐 따분하고 이질적인 정조 관념, 통행 금지 등의 시대적 괴리, 그리고 소위 ‘참여문학’이라고 하는 문학의 한 귀퉁이에서 바라볼 때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시대적 반영의 결여라는 결점이 다소 존재하는 만큼 누군가에게는 고만고만한 통속적인 소설로 비추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문학이 가지는 자유의 기치를 가장 높이 평가한다면 문학이 반드시 시대의 정치적 • 사회적 상황을 반영해야 할 의무는 없으며, 지금보다 낡고 고루한 풍조나 세대 차이를 드러낸다고 해서 외면해야 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에겐 문학에서조차 시대의 암울했던 정치적 우울함과 마주치는 일이 고문이거나 가혹 행위이다. 우린 어차피 그 낡고 고루한 풍조의 연장 선상에서 세대 차이에 부대끼며 살고 있지 않은가! 굳이 이런 말장난 같은 변명과 두둔이 아니더라도 『별들의 고향』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거대화된 도시가 필연적으로 잉태할 수밖에 없는 괴물인 외로움이 여전히 우리를 좀 먹고 있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사람에 치일 정도로 사방팔방에 사람들로 바글거리고, 경아는 상상도 하지 못할 신통하고 별난 기계로 별의별 짓을 다 하는 스마트한 인구 과잉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고독과 외로움이라는 만성 질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문제이면서도 그 누구도 뾰족한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명확하게 원인을 파헤치지 못한 이 변덕스러운 질병에 대해 한낱 소설 나부랭이에 불과한 이 책이 명확한 답을 제시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전장의 어둠 속에 숨은 죽음과도 같이 도시인을 하염없이 짓누르는 외로움이라는 괴물의 한 단면을 정부 시설에 내버려진 연고자 없는 약물 중독자처럼 지독히도 쓸쓸하게 죽어가는 경아를 통해 생생하게 내비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도시라는 거대한 가면 뒤에 숨은 위선과 가식의 자궁 속에서 잉태된 외로움이라는 괴물의 정체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적당한 구실을 얻은 셈이다.

히드라처럼 많은 얼굴을 가진 그 괴물은 때론 행복으로 가장된 불행이며, 때론 꿈을 먹고 사는 절망이며, 때론 인구 과잉과 인구 밀집을 사악하게 비웃는 소외감이며, 때론 옆구리 터진 유조선에서 흘러나오는 기름처럼 대책 없이 주변을 오염시키는 고독이다. 경아가 아득한 별들의 고향으로 떠나고 나서 5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한강의 기적으로 감당하기 벅찰 정도로 물질적 번영을 이루었음에도, 문명의 영광이라는 찬란한 후광을 등에 업고 하하 호호 기세등등한 도시를 발작적으로 조롱하듯, 전염병 같기도 하고 기생충 같기도 한 외로움이라는 괴물은 여전하다 못해 시시때때로 도시인의 불안한 정서를 밤마다 드리우는 어둠처럼 파고 들어와 가뜩이나 보잘것없는 우리의 삶을, 조루 환자처럼 빠르게 만개했다 빠르게 져버리는 우리의 행복과 청춘을, 언제나 별 볼 일 없었던 우리의 희망을, 쥐새끼처럼 살금살금 갉아먹는다. 고로 『별들의 고향』이 한겨울에 뼛속까지 스며드는 냉기처럼 우리를 전율케 하는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것이 제아무리 흔하디흔한 소재일지라도 말이다.

지독한 외로움, 우리는 결국 혼자다

문오의 말처럼 삶이 실상은 만나고 헤어짐의 문제뿐이라는 사실에 대해 깊이 공감한다면, 우리는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혼자이고, 고독하고 외로운 동물이며,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의 특성조차 인간이 혼자임을 견디기 어려워한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 아닌가? 경아를 죽인 것은 빌어먹을 작가도 아니며, 악마처럼 날뛰는 정욕에 점령당해 경아의 처녀를 빼앗고 낙태라는 뼈아픈 상흔을 남긴 영석도 아니며, 과거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경아를 내팽개친 만준도 아니며, 단물 빠진 껌 뱉듯 몇 개월 재미나게 살다가 경아를 버린 문오도 아니다. 천성이 밝고 낙관적이었던 경아, 일회용품처럼 남자의 놀잇거리가 되어 놀아나는데 이골이 난 경아는 그 정도로 죽을 여자는 아니다. 그럼에도 경아는 스물일곱 꽃다운 나이에 죽었다. 아니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단지 외로움 때문일까? 아무리 지독하다 할지라도 외로움만으로 사람이 죽을 수 있을까?

콜록콜록 시도 때도 없이 우리를 앓아눕게 하지만, 그로 말미암아 죽는 사람은 도통 찾아보기 어려운 감기처럼 외로움은 우리의 삶을 조금씩 조금씩 갈아먹으며 괴롭힐망정 정작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지는 못하는 그런 병이었지 않았나? 경아가 외로움을 끝내 견디지 못해 죽었는지, 자신의 소박한 꿈이 계속 짓밟히는 것에 짜증이 머리끝까지 난 나머지 죽음을 선택했는지, 남자에게 버림받는 삶에 지치고 지쳐 피곤해서 쓰러졌는지, 이기적인 남자들이 배출하는 온갖 잡다한 쓰레기를 정화하는 필터 작용을 했던 경아의 육체가 제 기능을 다 한 나머지 역류한 쓰레기에 오염되어 죽었는지, 아니면 이 모든 것이 서로 짬뽕되어 일으킨 합병증으로 죽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것은 염병할 작가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허우대 멀쩡하게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선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천기 같은 그 무엇이지 않을까? 혹은 누추한 병상에 누워 홀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해야만 하는 사람만이 느낄법한 자조 섞인 비애이자 허무와 고독의 극치를 벗어난 비극의 결정판이다.

뭔가에 취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

그 사람이 죽어서 슬픈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한때 살아 있었다는 것이 슬프다고 말하는 경아. 우리 시대에 가지고 있던 따스한 인정과 순정을 아직 간직하고 있었던 경아. 언젠가 버림받을 것을 알면서도 내색 없이 오롯이 현재 그 순간만을 지극히 사랑할 수 있었던 경아. 그런 경아가 보고 생각하는 세상은 우리가 보고 생각하는 세상과는 달랐을 것이다. 뭔가가 달랐기에 경아는 비굴한 우리처럼 세상에 적응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했다. 차라리 그 시궁창 물을 마셔 없애버릴지언정 썩을 대로 썩은 시궁창에 몸을 적시기는 죽음보다 싫었다. 성공과 출세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미덕으로 자리 잡은 지금으로서는 경아의 순수함은 천진하다 못해 바보 멍텅구리나 다름없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가장 순수했던 경아는 우리처럼 그렇게 억척같이, 안면박대하고, 몰염치하게, 되는대로 살아갈 수가 없었다. 경아처럼 순수했던 사람들은 억척스러운 사람들만이 살아남아 자식을 낳고 작게나마 번영을 구가할 수 있는 현대 사회에서는 진화 법칙에 따라 서서히 도태되어 가고, 이제는 억척스러운 사람들만이 살아남는다. 하지만, 웬만큼의 억척스러움 가지고는 입에 겨우 풀칠이나 하는 이 거지 같은 세상에서 사람들은 더욱더 악착같은 사람들로 진화하고 있다. 나도 어찌어찌하여 이 척박한 세상 속에서 여전히 생존해 가고는 있지만, 경아처럼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도통 모르겠다.

“난 정말 모르겠어요, 정말 모르겠어요, 남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다들, 다들 말이에요, 용이하게 살아가고 있잖아요? 어떻게 그렇게 용이하게들 살아가고 있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별들의 고향』 2권, p275)

그래서 뭔가에 취하지 않고는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나 보다. 경아는 술에 취해 꿈속으로 달아났고, 나는 책에 빠져 세상을 외면한다. SNS에 취한 누군가는 가상현실에 중독되어 현실에서 도피한다. 명성에 취한 누군가는 교만에 빠진 채 현실을 왜곡한다. 돈에 취한 누군가는 빈부격차를 조장하며 현실을 교란한다. 게임에 취한 누군가는 지존을 꿈꾸며 현실을 부정한다. 일에 취한 누군가는 자신을 혹사시키며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친다. 이처럼 현대인이 외로움을 부정하고 외면하는 방법은 각양각색이지만, 뭔가에 취하면 취할수록,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 파도처럼 밀려드는 외로움과 허무함은 더 거세고 더 지독한 법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도시를 단숨에 집어삼킬 것처럼 아가리를 쩍 벌린 그 괴물 같은 외로움과 허무함이 굶주림에 지쳐 사냥을 나서기 전에, 누군가 논개처럼 비장하게 그 아가리 속으로 뛰어들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양양한 바다에서 물 한 바가지를 퍼내는 미미한 일일지라도, 그래서 세상일에 별 보탬이 되지 않는 무모한 일일지라도, 나는 애써 변명하고 싶다. 그것은 사막에서 갈증에 허덕이는 자에게 뜻밖에 내린 한 방울의 물과 같다고, 그래서 괴물의 갈증을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그 한 방울의 물이 증발할 때까지 괴물은 다른 곳에 한눈을 팔 수는 없을 것이라고, 다른 곳에 한눈을 팔 수 없는 그 찰나만큼은 우리도 외로움을 잠시 잊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괴물이 나를, 당신을 당장 집어삼키지 않는 것은, 괴물이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누군가가 괴물의 시선을 빼앗고 있기 때문이라고, 누군가 괴물에게 삼켜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이야기에 취하고 텍스트에 홀린다

마지막으로 『별들의 고향』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를 또 하나 들고 싶다. 그것은 텍스트를 읽는 재미다. 내가 한국 소설을 많이 읽어본 편은 아니지만, 그중에서 텍스트를 읽는 재미를 선물해 준 작가는 그렇게 많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중에서 그 작가만의 색깔, 그 작가만의 멋을 가진 텍스트를 구사하는 작가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소설을 이야기만으로 읽는다면 그 이야기가 아무리 재미있더라도 그 소설은 기껏해야 이류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소설은 이야기도 재미있고 그만의 의미가 있어야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 이야기에 작가만의 멋과 색깔이 담긴 텍스트가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실상 자신만의 문체, 자신만의 텍스트를 보여주는 작가는 그리 많지 않다. 작가가 자신만의 텍스트를, 자신만의 문체를 구사한다는 말은 이야기가 아닌 종이 위에 선명하게 인쇄된 텍스트만 보고도 그것을 쓴 작가가 누구인지를 구분해낼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익명의 글을 문체의 특성만으로 누가 썼는지를 분별해내었던 역사적 사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내 텍스트 분별력은 그 경지까지 오른 것은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문체를 구사한다. 나쓰메 소세키(夏目金之助)가 그러하고, 옌롄커(閻連科)가 그러하고, 셀마 라게를뢰프(Selma Lagerlof)가 그러하다. 그리고 약간 추켜세워 한국 작가 최인호가 (『별들의 고향』 한 작품만으로는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지만) 대충 그러하다.

장난스럽지만 짓궂지는 않고, 천박한 듯 보이면서도 도를 넘어서지 않고, 냉기가 스며 나오는 경멸감 어린 시선 속에 따스한 관심이 공존하고, 무심한 듯하면서도 우리 시대의 마지막 남은 인정을 담을 듯한, 그래서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통속적인 흐름에 은근살짝 문학적 품격을 무단 방류해 놓은 듯한 그의 텍스트는 우울하고 구슬프고 쓸쓸한 우리 시대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재현해내는데 단단히 한몫하고 있다. 그래서 감히 친구의 주량을 빤히 알면서도 말리기는커녕 한 잔 더 따라주는 심정으로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거기엔 책에 취해 세상만사 온갖 시름을 잠시라도 잊었으면 하는 선량한 마음과 한 번쯤은 짜릿하게 심장까지 스며드는 외로움과 허무함으로 밤잠을 설치며 번뇌에 빠져보라는 짓궂은 마음이 나란히 공존한다.

(질질 끌어 정말 미안한 마음 금할 수가 없지만, 정말 마지막으로) 갑자기 경아가 하얀 눈 속에 파묻혀 죽은 모습이 노트북 액정 화면 위로 오버랩된다. 우리 시대 순수의 상징인 경아가 깨끗함의 상징인 눈 속에서 죽다니, 이 얼마나 절묘한 궁합인가? 그것은 마치 경아는 무심한 도시인들에 밀려 쓰러지고 짓밟힌 눈사람이라고 은근히 항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또한, 그것은 이상하게도 겨울만 되면 쓰라린 인생의 비애를 겪어야 했던 경아가 겨울이 돌아오면 그 고통과 상처를 딛고 우리 앞에 눈사람으로 환생한다는 판타지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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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0. 16.

[책 리뷰] 인민 잔혹사의 음울한 피날레 ~ 문화대혁명(프랑크 디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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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 잔혹사의 음울한 피날레

Original Title: The Cultural Revolution: A People's History, 1962-1976 by Frank Dikoter
이 거대한 변화에서 무대의 중앙을 차지한 것은 다름 아닌 농민들이었다. 중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은 통상적인 낙수 효과의 개념처럼 도시에서 농촌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시골에서 도심 지역으로 진행되었다. 경제를 변화시킨 개인 기업가들은 평범한 수백만 명의 농민들이었고 실질적으로 그들이 국가를 움직인 셈이었다. 중국의 경제개혁을 이끈 위대한 설계자가 존재한다면 보통의 인민들일 터였다. (문화대혁명(The Cultural Revolution)』, P492~493)

인민, 중국의 경제개혁을 이끌다!

공산당이 선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진실, 즉 해방이 어떻게 인민을 짓밟고 어떻게 그들의 삶을 파탄의 지경으로까지 몰고 갔는지 파격적으로 폭로한 『해방의 비극(The Tragedy of Liberation)』에서 출발한 프랑크 디쾨터(Frank Dikoter)의 ‘인민 3부작’은 전쟁도, 내전도 없었음에도 대한민국 정도의 인구를 단 4년 만에 증발시킨 참상을 고발한 『마오의 대기근(Mao's Great Famine)』을 거쳐 어느덧 그 긴, 그렇지만 절대 지루하지 않은 여정의 종착점인 『문화대혁명(The Cultural Revolution): 중국인민의 역사 1962~1976』에 이르렀다. 이제 막 『문화대혁명』의 마지막 장을 덮은 심정을 한마디로 토로하라고 다그친다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잘 만들어진 추리소설 속에서나 등장할법한 기가 막힌 대반전을(엄밀히 말하자면 기존 역사관을 뒤집는 충격적인 가설?), 그것도 무방비 상태에서 맞닥트렸으니 그 혼란과 충격은 과히 당신의 짐작을 뛰어넘고도 남는다.

야구 선수가 휘두른 방망이에 머리를 크게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띵하지만, 혼란과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 전적으로 이 책의 주장에 동의한다면 ─ 기존의 주류 역사에 과감히 반기를 들고 나선다는 짜릿한 쾌감과 시큰한 우쭐함이 곧바로 파도처럼 전신을 덮쳐온다. 이미 누구나 다 알 것 같은 엎질러진 물이나 다름없는 역사를 이야기하는 책에 무슨 반전이 있으며, 있어 봤자 별거 있겠느냐고 힐문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볼 땐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선택 범위가 비록 동네 도서관에 한정되지만, 나름 중국 현대사 관련 책을 조금은 읽어봤다고, 그래서 대충이나마 알 것은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나이지만, 프랑크 디쾨터가 『문화대혁명』을 통해 펼치고자 하는 견해는 세상을 뒤집어엎는 놀랍고도 충격적인 반전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렇게도 놀랍단 말인가? 독자는 이 책을 통해 중국의 경제개혁을 이끈 위대한 설계자는 중국 개혁 • 개방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덩샤오핑(鄧小平)이 아니라 그저 우리처럼 평범하고 평범한 보통의 인민들이었다는 기발한 역사 해석과 마주치게 된다.

경제개혁으로 공산당 입지를 다진 덩샤오핑

우리가 짐작하는 것처럼, 혹은 알고 있는 것처럼 덩샤오핑이 진심으로 개혁 • 개방 정책을 설계하고 추진했던 것이 아니라 그는 그저 대세를 따랐을 뿐이다. 전통적인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뿌리 뽑히는 것도 모자라 끝이 보이지 않는 가난과 죽 끓듯 변덕스러운 정치적 반동이 가하는 모진 핍박과 내전을 방불케 하는 대혼란에 내동댕이쳐진 인민들은 스스로 살길을 모색해야 했다. 처음에는 혼자이거나 가족끼리, 그리고 조금씩 더 나아가 이웃끼리 마을들끼리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았다. 보이지 않는 덫을 살피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극진한 조심스러움과 삶을 유지하고자 하는 모진 본능이 뒤섞인 눈빛에는 그 시대에는 충분히 반동적이라고 불릴만한 위험한 변화를 예견하는 선동적인 침묵을 내포하고 있었다.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아래로부터의 혁명은 ‘총체적 난국’이라는 곤경에서 어떻게든 벗어날 방법을 스스로 궁리할 수밖에 없었던 인민들 사이사이로 잠복 기간이 긴 전염병처럼 소리 없이 조용하게 퍼져 나갔다. 그것은 대담하게도 자본주의로의 회귀였다. 마오쩌둥 살아생전에는 꿈도 꿔서는 안 될 그런 도리였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마오쩌둥의 공상적 이상주의가 휘두른 잔악무도한 폭정의 가장 큰 피해자이면서도 가장 큰 인내심으로 근근이 버텨 온 인민들이 소리 없는 혁명을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직 마오쩌둥이 ─ 거의 반송장이나 다름없는 상태일지라도 ─ 살아 있을 때!

그렇게 소리소문없는 조용한 혁명은 농민에게서 노동자로, 시골에서 도시로, 시장 상인에서 기업으로, 그리고 종국에는 중국을 집어삼켰다. 중국 경제 성장의 원류는 화궈펑도 아니고, 덩샤오핑도 아니었으며, 그것은 인민들 스스로 궁색한 삶을 개척하고자 하는 삶에 대한 끈덕진 애착과 바퀴벌레 같은 끈질긴 생명력으로부터 파동치는 막강한 자본주의 물결에 있었다. 덩샤오핑은 그 물결에 떠밀려오는 여럿 배 중 적당하다고 여긴 배 위로 적당한 시기에 매우 적절하게 올라탔을 뿐이다. 영악한 통치술을 선보였던 덩샤오핑은 공산당을 공고히 하고 철권통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경제 성장을 이용했다. 그는 공산당 통치의 정당성을 오로지 경제 성장에만 묶어놓는 우를 범했다. 그리고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것으로 덩샤오핑이 집권 초기에 모호한 태도를 보인 이유가 약간은 이해될 수 있다. 훗날 톈안먼 민주화 운동을 인민의 피로 진압할 철권 통치자로 거듭날 그가 한때 사상해방과 민주를 지지했던 이유는 양심에 따른 것도 아니었고, 정치적 가치관에 따른 선택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대세를 역행하여 인민의 지지를 잃지 않으려는 노련한 정치적 술책일 뿐이었다. 그는 정치적으로 철저히 보수파였으며, 자신의 권력을 다지고 공산당이 인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경제 성장을 이용했다. 즉, 공산당 일당 독재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공산당에 위협만 되지 않는다면 나머지는 (대체로) 얼마든지 봐줄 수 있었던 것이 덩샤오핑 통치의 핵심이다. 그래서 그는 인민의 민주화 욕구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라는 군침 도는 미끼를 던지며 경제개혁을 제대로 이용했다. 아니 이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오쩌둥 사후에도 경제개혁이 이루어지지 않고 문화대혁명 같은 암울한 시기가 계속되었더라면, 과거 중국의 농민 봉기 역사를 보더라도 유방(劉邦) 같은 인물이 또다시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말이다.

아무튼, 경제개혁은 순전히 인민의 의지로 시작된 조용한 혁명이었다. 그렇기에 덩샤오핑은 개혁 • 개방에 대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계획이나 구상을 제시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는 일이었으며, 그 역시 중국의 경제 성장을 원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디까지나 그 방법은 원칙적으로 사회주의적이어야 했다. 하지만, 떠밀리듯 경제개혁이라는 거대한 조류에 올라탄 덩샤오핑의 처신만큼은 역시 통치술의 대가다웠다. 그야말로 ‘위대한 조타수’였다. 당근과 채찍으로 민주에 대한 인민의 욕구를 표면적으로나마 잠재울 수 있었으며, 더불어 중국은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었고, 그로 말미암아 중국 공산당은 건재할 수 있었다.

무색해진 ‘중국 특색 사회주의’

이로써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의미가 명확해진다. 그것은 공산당의 존재성과 정당성, 그리고 일당 독재에 방해되거나 위협이 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경제 성장을 이룩하고자 하는 것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에 대한 대가는 무엇일까? 조금은 아쉽게도 프랑크 디쾨터는 ‘그리고 그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라는 의미심장하면서도 모호함을 완전히 떨쳐낼 수는 없는 문장을 끝으로 위대한 ‘인민 3부작’의 여정을 마무리한다. 아마 나머지는 교수가 강의 후 과제를 내듯 고심하고 생각할 줄 아는 독자가 풀어야 할 숙제로 남겨놓은 것이리라.

중국은 국가 경제력에서 곧 미국을 추월하는 위치에 있는 명실상부한 경제 대국이지만, 그 안에 사는 인민의 행복지수는 한국뿐만 아니라 필리핀, 코소보보다 낮다. 중국인은 불행하다. 디쾨터가 ‘인민 3부작’을 완성하기 전에 이미 량샤오성(梁晓声)은 중국인은 우울하다고 진단했다. 이렇게 비교적 간단명료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지만, 그 원인을 놓고 따져보면 복잡하기 그지없다. 한 사람이 앓는 우울증의 원인을 진단하기도 쉬운 일이 아닐 터인데, 어마어마한 인구를 자랑하는 중국인의 우울증 원인을 밝히는 일은 오죽할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공산당이 자신의 존재성, 정당성을 경제 성장에만 묶어놓을수록, 그렇게 경제 성장주의에만 매달릴수록 중국은 ‘사회주의’ 변두리에서 표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경제 성장 지상주의에만 매달려온 국가들이 앓을 수밖에 없는 골칫거리에 자본주의의 길을 걸어온 전 인류가 겪는 공통적 문제가 더해진 온갖 잡다한 폐해가 중국을 물귀신처럼 붙잡고 늘어진 형국이다. ‘중국 특색 사회주의’라는 그럴듯한 표어 속에 숨은 진의가 까발려진 지금 중국의 사회주의적인 선전은 유명무실해졌다. 중국에서 사회주의는 이제 공산당 당헌 속에서나 존재하는 허울뿐인 과거의 유물이다.

어떤 방면에서는 미국보다 더 자본주의적이지만, 그것을 절대 인정할 수 없는 중국이니 그 폐해에 대한 원인파악과 대책 또한 미적지근할 수밖에 없다. 반자유 • 반민주 • 반평등 • 반인권을 기조로 외국 자본과 중국 정부가 손을 잡고 농민의 토지와 자연 자원을 약탈하고, 생태 환경을 훼손시키고, 수억 명의 노동자와 ‘농민공(農民工)’으로부터 대규모 이윤을 함께 착취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중국은 신속하게 전 세계의 제조공장으로 우뚝 섰다. 그렇게 얻은 부는 국가가 큰 몫을, 집단은 가운데 몫을, 그리고 남은 끄트머리를 개인이 차지함으로써 완성된 ‘중국 특색 사회주의’와 ‘중국 특색 노예제도’가 탄생했다. 그것이 롼밍(阮銘)이 『덩샤오핑 제국 30년(鄧小平帝國三十年)』에서 밝힌 ‘덩샤오핑 제국’의 정체이자 마오쩌둥 제국의 폐쇄적인 공산 노예제도에서 진화한 개방적인 공산 노예제도, 바로 ‘신노예제도’다. 아마도 이것이 앞서 말한 ‘그 대가’ 중 가장 큰 월척이지 않을까?

마오쩌둥 시대 인민의 잔혹사

이로써 ‘인민 3부작’이 완성되었다. 이 시리즈는 중국 현대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나 호기심을 품은 사람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이지만, 취미로 책을 읽는 사람에게도 권하고 싶은 알짜다. 중국에서 가장 최근에 공개된 공산당 문서를 기반으로 집필된 책이라 기존 저서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세밀하고 구체적인 상황까지 살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인민 3부작’이라는 시리즈 제목이 은유하듯 삼부작 모두 인민의 삶을 중심으로 다뤄지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마오쩌둥의 공상적 공산주의에 대한 병적인 집념이 어떻게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었던, 그리고 앞으로도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무지막지한 대중 실험으로 체현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 가혹한 실험의 연속에서 인민의 삶이 어떻게 무너져 내렸는지를, 그 어마어마한 숫자의 억울한 사상자와 피해자를 대신하여 이 책은 철저하게 밝힌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기본적인 식량조차도 해결하지 못한 마오쩌둥 시대에 기근은 하나의 표준이었고, 혼란과 숙청과 정치적 투쟁은 일상이었다. 마오쩌둥이 뭔가를 하려고 할 때마다 중국은 혼란에 빠졌고, 수만 수십만 수백만 수천만의 인민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허무하게 증발했다. 하지만, 상대가 그 위대한 마오쩌둥이었기에 인민은 답답하고 억울한 심정을 하소연할 수도 없었고,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살아남았다. 변덕스러운 마오쩌둥 때문에 그들은 시시각각 궁지에 몰렸지만, 그때마다 그들은 기사회생했다. 하지만, 절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복종하는 것처럼 보여야 하면서도 절대 선은 넘지 말아야 했다. 그 선은 항상 마오쩌둥이 일으키는 바람에 따라 요리조리 움직였다. 고의든 실수든 일단 선을 넘어서는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른다면 지옥이 아가리를 벌리며 마중 나왔다. 고개를 숙인 채 낯을 심하게 가리는 고양이처럼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야 했다.

그렇게 그들은 거듭되는 박해와 시련을 통해 생존하는 법을 깨우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잊을만하면 가해지는 숙청을 통해 정부가 노린 것은 실재하거나 상상 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적을 물리적으로 제거하기보다는 가능한 많은 사람에게 겁을 주어 다루기 쉬운 인민을 만들어내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그렇다. 살아남으려면 다루기 쉬운 인민처럼 보이면 된다. 그것은 가장 훌륭한 연기자로 거듭나는 길이다 (그래서 중국 배우들의 연기력이 유난히 뛰어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단 한 번의 실수라도 용납되지 않았다. 완벽한 연기자가 되어야 했다. 전설적인 명배우처럼 오로지 연기에만 매달리고 연기에만 목숨을 걸어야 했다. 당과 사회, 이웃뿐만 아니라 때론 가족과 자신마저 감쪽같이 속여야 하는, 달마대사도 혀를 내두르고 도망갈 자신과의 끝없는 싸움이자 인내와 고난의 행군이었다. 많은 인민이 중도에 지쳐 쓰려지거나 정체가 탄로 나는 바람에 모진 박해를 겪었다. 때론 목숨마저 빼앗겼다. 그러나 대다수 인민은 훌륭한 연기로 훌륭하게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살아남은 인민이 조용하지만, 지속적인 반전을 가했다. 그것이 바로 프랑크 디쾨터가 『문화대혁명』에서 말한 문화대혁명 중반 이후 농민이 일으킨 ‘아래부터의 혁명’, 즉 경제개혁의 시작을 알리는 자본주의 물결이다.

프랑크 디쾨터의 ‘인민 3부작’은 마오쩌둥 시대 인민의 잔혹사를 대변하는 데 가치를 둔 책이라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책이다. 또한, 중국 경제개혁의 원류를 농민에게서, 그것도 농민의 의식적이고 조직적인 혁명이 아니라 기근에 대한 생생한 두려움에서 비롯한 생존에 대한 본능적인 갈망에서 찾고 있다. 그런 갈망이 중국 전역에서 잡초처럼 우후죽순 자라나면서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사회와 또 하나의 경제를 지하조직처럼 이루었다. 그것이 ‘제2의 사회’, ‘제2의 경제’ 가설이다. 이 가설이 튼튼한 토대를 쌓는다면 역사를 이끄는 원동력은 몇 사람의 영웅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인민이라는 진실이 다시 한번 증명되는 셈이다. 프랑크 디쾨터의 『문화대혁명』은 매끄러운 언변으로 역사 저술의 지루함을 덜어내 텍스트 읽기의 부담을 경감시켜 많은 독자가 충분히 접할 수 있는, 인민의 대변자로 자처하고 나선 저자의 비굴하지 않을 정도로 낮고 따뜻하면서도 예리한 시점이 돋보이는 역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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