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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21일 일요일

[책 리뷰] 전설적 형사로 은유하는 홍콩 경찰의 슬픈 역사 ~ 13.67(찬호께이)

13.67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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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 형사로 은유하는 홍콩 경찰의 슬픈 역사

Original Title: 13.67 by 陳浩基
“그 여덟 장은 금고 안에 남겨뒀습니다. 범인이 정보를 얻고 싶어 하는데 못 줄 것도 없죠. 난 손안의 패를 상대방이 못 보게 감추는 것보다 대범하게 다 보여주는 편을 좋아합니다. 상대방은 내 손만 보고 그게 내 패의 전부라고 생각하겠죠. 하지만 난 의자 밑에 그것보다 열 배가 넘는 패를 숨겨놓고 있거든요. 그래야 더 재미있어지는 겁니다.” (『13.67』, p562)

격동의 홍콩을 은유하는 형사 ‘관전둬’

리 소설로는 드물게 미스터리의 엄밀함과 문학성을 두루 갖춘 텍스트로 독자를 현혹시키는 『기억나지 않은, 형사(遺忘.刑警)』로 일본 추리소설계의 거장 시마다 소지(島田荘司)로부터는 “무한대의 재능”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찬호께이(陳浩基)의 또 다른 작품 『13.67』은 홍콩의 전설적인 천재 형사 관전둬의 이야기다. 물론 관전둬는 실존 인물은 아니다. 그는 찬호께이가 홍콩 경찰의 어둡고 씁쓸한 역사를 재조명하고, 줄곧 아시아 속의 ‘작은 서양’으로 존재하다가 급성장한 신중국의 사회주의 체제로 편입되는 바람에 중심을 잃고 부침하는 격동의 시기를 보낸 홍콩을 은유하고자 창조한 인물이다. (솔직히 난 홍콩/중국 영화에 경찰로 멋지게 등장하는 배우들을 통해 봤던 모습들을 제외하고는 홍콩 경찰이나 홍콩 역사에 대해서는 쥐뿔만큼도 모르지만) 찬호께이는 ─ 소설 『13.67』 집필 시기인 ─ 2013년에 와서도 홍콩 경찰의 이미지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고 토로한다. 강하고 공정하고 정의롭고 용감하며 시민을 위해 온 마음으로 일하는, 그래서 홍콩 어린이들의 자랑거리이자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홍콩 경찰은 이제 온데간데없으며, 1967년 무렵의 괴상하고 추한 모습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찬호께이에게는 홍콩 경찰이 전성기를 누렸던 때 같은 신뢰를 시민으로부터 다시 받을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하지만, 관전둬의 파란만장한 형사의 삶 속에는 홍콩 사회와 홍콩 경찰이 겪었던 혼돈과 격동의 시기가 고스란히 녹아 있고, 또한 그가 백 퍼센트 해결률을 자랑하는 전설적인 형사라는 점을 고려하면, 저자는 홍콩 경찰을 은유하는 관전둬를 통해 홍콩 경찰의 암울한 현재를 어떻게든 빨리 떨쳐버리고 싶다는 무언의 희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 아닌가 싶다. 그 희망 속에는 다시 홍콩 경찰이 어린이들의 우상이 되고, 시민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지원군이 되어 줄 가까운 미래도 포함되어 있을 듯싶다.

‘관전둬’의 사명감 속에 새겨진 홍콩 경찰의 밝은 미래

설의 제목이 ‘13.67’인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오늘날, 즉 20 13 년의 홍콩이 19 67 년의 홍콩처럼 똑같이 괴상하며, 홍콩 경찰 역시 그때처럼 바르지 못한 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경찰의 온갖 부정, 부패, 특권이 거리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되었으며 본토의 문화대혁명 영향으로 사회적으로도 혼란하고 과격한 시기를 보냈던 때가 1967년임을 고려하면 저자가 탄식하며 걱정하는 홍콩 사회의 현재(2013년)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대략적으로나마 감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관전둬가 경찰로서 갖는 사명감이다. 관전둬는 아무 의심 없이 무조건 상급자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홍콩경찰선서에 어긋나더라도 시민을 보호해야 하는 것이 경찰의 가장 우선적이자 진정한 임무라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형사로서 남긴 발자취에 깊이 새겨 넣은 부동의 신념이기도 하다. 제도가 무고한 시민에게 피해를 주거나 정의를 표방하지 못한다면, 경찰은 분명한 근거를 내세우면서 경직된 제도에 대항해야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또한, 관전둬는 교활하고 음험한 범죄자에 맞서고자 자신의 목숨마저 기꺼이 내놓는 인물이 아니었던가!

찬호께이가 괜히 관전둬를 심어 놓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지나치게 경직되고 자신들의 밥그릇만 지키기에 바쁜 현재의 홍콩 경찰(이 고질적인 병폐는 비단 홍콩 경찰뿐이겠는가!)이 스스로 정화할 수 없을 정도로 문제가 비대해지기 전에 옳은 길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관전둬 형사를 통해 은근히 내비치는 것이다. 참고로 ‘홍콩 누아르’라는 장르를 탄생시켰을 정도로 경찰 조직에 부패가 만연했던 1970년대에 홍콩 정부는 염정공서(廉政公署, ICAC-HongKong : Independent Commission)라는 외부 조직을 만들어 ─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5장 빌려온 공간」의 배경이기도 하다 ─ 부패한 경찰을 조사하는 역할을 맡기기도 했다. 이런 극약 처방을 내려야 하는 최악의 상황으로까지 내몰리기 전에 홍콩 경찰이 어린이들의 우상이 되고, 시민의 든든한 지팡이가 되는 날이 다시 오기를, 선의를 가진 시민이라면 누구라도 환영할만한 이런 경사스러운 일이 비단 홍콩뿐만 아니라 우리 한국의 경찰도 그렇게 되기를, 찬호께이와 함께 소망해본다.

뭐라고 씨부렁거리던 추리 소설의 묘미를 온전히 갖춘 수작이다!

전 작품 『기억나지 않은, 형사(遺忘.刑警)』에선 볼 수 없었던 ‘사회파 미스터리’ 같은 요소가 소설 『13.67』에 포함된 것은 사실이지만, 뭐니 뭐니 해도 추리 소설의 묘미는 ‘미스터리’, ‘트릭’, ‘추리’, ‘반전’이라는 점에서 볼 때 『13.67』은 앞서 말한 모든 요소에 형사와 범인과의 뛰어난 두뇌 대결까지 갖춘 추리 소설의 완벽한 ‘풀세트’다. 마치 고수들이 바둑을 두는 것처럼 상대의 여러 수를 넘겨보고, 크고 작은 승패에 얽매이지 않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같은 동료와 심지어는 소속된 조직까지 속일 정도로 대담한 계략으로 도박사 같은 승부수를 던지는 관전둬와 지능범과의 치밀한 두뇌 대결은 관전둬 형사의 뛰어난 후배라고 할 수 있는 뤄샤오밍 형사마저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정도로 종잡을 수 없다. 그만큼 관전둬 형사의 두뇌 플레이는 ‘역대급’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나며, 추리력 역시 Sherlock Holmes(셜록 홈스)가 홍콩에서 환생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날카롭기 그지없다.

한편, 그는 ‘사고 기계(The Thinking Machine)’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밴 두젠(Augustus S.F.X. Van Dusen) 교수(작가 잭 푸트렐이 창조한 인물), 할머니라는 혼화한 마스크 속에 번득이는 사고력을 감춘 미스 마플(Jane Marple), 제프리 디버(Jeffery Deaver)가 창조한 반신불수의 은퇴한 경찰 링컨 라임(Lincoln Rhyme) 같은 유형의 안락의자 탐정(Armchair detective)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그가 행동하기를 싫어하는 게으른 유형의 형사라는 것은 아니다. (스포일러 때문에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젊었을 때 그는 액션 영화에서나 볼법한 불꽃 튀는 추격전을 몸소 보여주기도 한다. 가끔 관전둬는 동료가 수집한 자료나 정보를 종합하고 추리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직접 현장에 가지 못함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지만,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현장 업무를 고집하지는 않는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은 현재에서 과거로 진행되는 역순의 연대기 형식이라는 평범하지 않은 구성을 취하고 있다. 여섯 편의 단편은 ‘관전둬 사건 일지’라고 제목을 붙여도 될 정도로 독립적이며 하나하나가 훌륭한 단편 추리 소설이다. 그러나 마지막 페이지의 마지막 문장을 접했을 때 받게 될, 마치 죽음의 신의 휘두른 거대한 낫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 같은 몸서리쳐지는 서늘함을 접하게 되었을 때, 독자는 찬호께이의 천재적인 플롯 구성, 그리고 서로 배타적이면서도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플롯의 엄밀함에 혀를 내두르게 될 것이다. 특히, 마지막 반전은 또 한 명의 ‘관전둬’가 될 수도 있었을 법한 비범한 인물이 한 개인을 은은하게 짓누르는 역사와 기회와 운에 교묘하게 지배받는 인생이라는 격랑 속에서 교활한 범죄자로 타락하는 운명의 아이러니를 절실하게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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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14일 일요일

[책 리뷰]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라는 짧은 질문에 대한 긴 대답 ~ 잡식동물의 딜레마

The Omnivore's Dilemma by Michael Pollan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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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무엇을 먹을까?’라는 짧은 질문에 대한 긴 대답

Original Title: The Omnivore's Dilemma by Michael Pollan
지금까지 반세기 동안 기업들은 가축이 이승에서 사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애써왔다. “할아버지 때에는 소들이 도축되기 전까지 4~5년을 살았죠.” 리치가 설명했다. “1950 년대에 아버지가 목장을 운영하고 있을 때에는 그 기간이 2~3년 정도였어요. 지금은 겨우 14~16개월이죠.” 참으로 패스트푸드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잡식동물의 딜레마』, p98)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에 대한 매우 긴 대답

널리스트 마이클 폴란(Michael Pollan)의 『잡식동물의 딜레마(The Omnivore's Dilemma)』는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라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적 질문에 대한 매우 긴 대답이다. 그것은 당신이 즐겨 먹고 생각만 해도 입에 군침이 돌게 하는 고기에 대한 불쾌감을 생성하려는 환경운동가의 지루한 설교가 될 수도 있고, ─ 지극히 낮은 확률이겠지만 ─ 날벼락 맞고 제정신을 찾은 광인처럼 당신을 채식가로 변신시키는 강력한 매개체가 될 수도 있다. 아니면, 당신을 오늘 저녁 식탁 위에 오를 고기가 무엇을 먹고 자랐는지, 어떠한 장소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세심하게 고려하는 깐깐한 섭취자로 거듭나게 할 수도 있다. 또한, 폴란의 긴 대답은 누군가를 유기농에 대한 병적인 집착에서 해방시키는 혁명이자 우악스럽게 싼 음식만 찾아다니던 누군가의 고집스러운 아둔함을 깨우쳐주는 예상치 못한 일침이다.

한편으로 이 책은 정부의 원조와 소비자의 무지라는 음침한 장막 뒤에 숨어 각종 모순과 폐해를 양산해 내는 산업적 음식 시스템과 허울뿐인 산업 유기농 음식을 고발하는 르포르타주이자, 문명을 도외시한 채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초유기농 농장을 체험하고, 구석기 시대에 살았던 인류를 모방하려는 매우 진기한 시도에서 폴란 자신이 직접 요리 재료를 찾아 사냥 • 채집하는 모든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진지한 모험이다. 이를 위해 마이클 폴란은 손수 트랙터를 몰아 검은 초콜릿색 바다의 물결로 일렁이는 옥수수밭을 위태롭게 행진하기도 하고, 농장에서 일주일간 날품팔이 일꾼 체험을 하면서 직접 닭을 도축한다. 버섯채집꾼과 함께 먹을 수 있는 버섯을 채집하러 새벽같이 산행을 강행하기도 하고, 총을 쏘며 직접 야생 돼지를 사냥한다. 그렇게 해서 손수 마련한 고기, 버섯, 채소, 과일, 효모 등의 다양한 음식 재료들로 지인들에게 만찬을 대접하는데, 폴란은 그날의 식사에 ‘잡식동물의 추수 감사제’라는 의미심장한 이름을 붙인다.

지속불가능한 산업적 음식 시스템

이클 폴란이 야심 차게 두 주 동안이나 고심하며 준비한 ‘잡식동물의 추수 감사제’는 보기도 좋고 맛도 좋은, 그래서 생각하기도 좋은 만찬이었던 점은 분명하지만, 이러한 음식 시스템은 (75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인구를 고려하면) 비현실적이며 지속불가능하다. 만약, 지금 당장 산업적 음식 시스템의 가동을 중단하고, 모든 사람이 폴란의 발자취를 따라 거창하게 ‘잡식동물의 추수 감사제’까지는 아니더라도 ‘잡식동물의 조촐한 저녁 식사’를 장만하려고 든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인류의 끔찍한 인구 팽창을 조장했던 산업적 음식 시스템은 지속가능한가? 옥수수로 1칼로리의 가공식품을 만들려고 화석 연료 에너지 10칼로리가 소비되고, 소고기 단백질 1칼로리를 생산하는 데 있어 석유 에너지가 54칼로리나 사용되고, 재배된 채소나 과일을 냉장하고 씻고 포장하여 소비자나 지역 마트에까지 수송하는 데 수백에서 수천 칼로리의 화석 연료 에너지가 소비되는, 이렇게 배보다 배꼽이 큰 음식사슬이 과연 언제까지나 지속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그뿐만 아니라 산업적 음식 시스템이 양산하는 환경오염과 공중 보건 문제는 누가 책임질 것인가? 결국, 이 모든 비용과 부담은 고스란히 사회적 비용으로 이관되어 납세자이자 산업적 음식사슬의 ─ 사실은 가장 큰 피해자인데 ─ 가장 큰 수혜자라는 누명을 안고 사는 소비자의 지갑과 건강에 대한 지속적인 위협으로 때우게 된다. 회복하는데 드는 비용보다 그 회복에 필요한 시간이 엄청나게 요구되는 환경오염 같은 경우는 이에 아무 책임도 없는 미래 세대도 부담하게 될 것이다.

여전히 ‘잡식동물의 딜레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현대인

이클 폴란의 재치있는 지적대로 산업적 효율의 관점에서 정말로 석유를 직접 마시지 못한다는 점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아쉽게도 지구가 나은 최고의 대식가이자 탐식가인 사람일지라도 그 정도까지는 진화하지 못했을뿐더러 앞으로도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설령 석유를 마시며 사는 신인류가 탄생할 수 있을지라도 그때가 되면 이미 석유는 고갈되고 없을 듯싶다.

우리는 지구상의 그 어떤 동물보다 가장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는 여전한 잡식동물이지만, 그렇다고 먹을 수 있어 보이는 모든 것을 몽땅 다 먹을 수는 없다.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자연에 있는 아주 많은 것들을 먹을 수 있다는 축복과 그 가운데서 먹어도 안전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많은 부담을 져야 한다는 저주가 공존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말하지만, 현대적인 산업적 음식사슬이 제공하는 다양한 가공식품들은 먹고 나서 바로 죽거나 탈이 날 정도로는 위험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리고 누군가가 그 음식들을 먹고 여전히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을 팔팔하게 돌아다닌다는 점에서 ‘잡식동물의 딜레마’ 문제를 해결하는 그럴듯한 대안으로 보인다. 정말 그럴까?

거대한 산업적 음식 시스템에 가려진 사회적 비용이나 노동자들의 인권 문제, 환경오염 등의 지속불가능성은 차치하더라도 ─ 의도적이든,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든 어차피 그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려는 용감한 소비자는 거의 없겠지만 ─ 요즘 사람들은 정말 안심하고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을까? 아니면 어딘지 모르게 께름칙함을 느끼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음식들을 장바구니에 담는 것일까? 유기농을 집어 들며 나름대로 최고의 선택이라 자화자찬하며 만족해하는가?

이제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하는지.’라는 태곳적 문제에서 좀 더 분화되고 문명화된 현대적인 문제들이 우리를 괴롭힌다. 주머니가 가벼운 미식가라면 어떤 음식을 먹어야 투자한 가격 대비 최상의 맛을 뽑아낼 수 있는지, 현명한 주부라면 어떤 음식을 먹어야 가족의 건강을 지킬 수 있는지, 이상주의자라면 어떤 음식을 구매해야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지 등등 많은 문제가 우리의 지갑과 장바구니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다. 마이클 폴란의 설명대로 우리는 여전히 ‘잡식동물의 딜레마’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식탁 앞에 엉거주춤 앉은 채 허우적거리고 있다.

먹는 방식이 바뀌려면 사는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

렇다고 이 책이 딱 부러지는 어떠한 해결책이나 대안을 내놓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그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과학자 몇 명이 옹기종기 모여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며 몇몇 정부가 나선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음식은 인류를 지탱하고 자연과 교감하는 근원이지만, 산업적 음식 시스템은 우리와 음식의 연결고리를, 그리고 그 연결고리를 통해 자연과 소통하는 우리의 태곳적 능력을 무참히도 파괴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먹든 그 재료가 무엇을 먹으며 어디에서 자랐는지, 그것이 어떻게 도축, 가공되어 내 식탁에까지 왔는지 등 한 생명체의 드라마틱한 일생을 되새겨보며 비위 상할 필요가 없으며 감사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이미 현대적인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산업적 음식 시스템을 등에 업고 인류의 문화와 문명, 그리고 개개인의 삶의 뿌리 깊숙이 들어앉았다. 지금에 와서 산업적 음식 시스템을 거부한다는 것은 전 인류를 기아와 아사의 벼랑으로 밀어 넣는 일과 다름없다. 지속가능한 농장이 분명히 존재하고 상업적으로도 성공할 수 있지만, 그러한 농장들이 지독하게도 많은 인류를 먹여 살릴 수는 없다. 현재로서는 산업적 음식 시스템이 인류의 찬란한 식탐을 그럭저럭 채워주는 듯 보이지만, 이 역시 얼마 못 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것이다. 만약 아무런 대안도 마련하지 못한 채 산업적 음식 시스템의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것은 아마 세계 3차대전보다 더 끔찍한 재앙이다.

마이클 폴란은 뾰족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대신 이 모든 것에 의문의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우리 모두를 그가 던져 놓은 사고의 덫에 걸려든 게 한다. 유머 가득하고 재치 만점인 폴란의 문장에 현혹된 나머지 그가 놓은 덫에 일단 한 번이라도 걸리게 되면, 우리가 먹고 마시는 모든 음식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밖에 없으며,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가 우리를 규정한다는 엄연한 현실에 직면할 수밖에 없으며, 진정으로 먹는 방식이 바뀌려면 진정으로 사는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그의 현실적인 믿음에 수긍할 수밖에 없다.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독자에게 자신이 먹는 음식을 보다 진지하게 바라보라고 요구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우리를 규정하는 음식과 그 음식이 먹는 음식에 얽힌 복잡하고도 난해한 음식 사슬을 단순히 먹고 먹히는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를 벗어나 철학적이고 윤리적이며 생태학적이고 생물학적인 관점으로 볼 것은 종용하고 있다. 만약에 이 책을 읽고도 오늘 저녁 식탁 위에 놓인 음식들을 전혀 불편한 감정 없이 예전처럼 즐길 수 있다면, 당신은 자신이 죽인 사냥감이나 채집한 음식에 대해 감사와 예의를 표할 줄 알았던 구석기 시대 조상보다 못한 미개인이다!

육식에 대한 끝나지 않은 도덕적 • 윤리적 논쟁

으로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이성과 감성을 갖춘 지능적인 잡식동물이 진보된 문명화를 이루고 나서 필연적으로 마주칠 수밖에 없는 육식에 대한 도덕적 • 윤리적 고찰을 다루고 있다. 자신처럼 고기를 먹는 사람은 적어도 한 번쯤은 인생에서 육식 때문에 일어나는 살해를 직접 해보라고 요구하는 마이클 폴란은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는 측의 주장과 사람의 동물적 특성을 강조하면서 사냥과 육식을 옹호하는 측의 주장을 모두 다룬다. 그러나 이러한 균형은 육식하는 저자의 마지막 논리로 무너진다. 마이클 폴란은 돼지를 한 마리라는 개체로 볼 것이 아니라 종(種)의 개념으로 볼 것을 주장한다. 그의 주장대로 라면 돼지(기타 인류에 의해 가축화된 모든 동물)는 인류가 돼지고기를 좋아하는 한 멸종할 일은 없다. 가축화는 그들의 진화적 선택이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인류와 가축화된 동물들과의 윈-윈(win-win) 관계가 성공적으로 수립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비록 한 마리 한 마리 돼지의 집단가축사육시설(CAFO: Concentrated Animal Feeding Operations)에서의 짧은 삶이 끔찍하고 고통스럽고 불행하더라도 인류의 썩 괜찮은 과학기술과 변치 않는 식탐이 소멸하지 않는 이상 그들의 종은 보존될 수 있다는 것이 폴란의 주장이다. 육식을 옹호하는 처지에선 썩 괜찮은 논리처럼 들리는데, 내가 보기에는 아무리 영리한 돼지라도 이런 설명을 알아들을 리가 없다는 점에서 폴란의 주장은 어떻게든 육식에 대한 도덕적 • 윤리적 부담을 덜고자 하는 인류의 수많은 변명거리 중 하나로 들린다. 즉, ‘이성적인 존재’가 될 때 가장 큰 장점은 원하는 무엇에 대해서든 이유를 찾을 수 있다는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의 말과 다름없다.

만약 외계의 어느 지적생명체 문명에서 인류의 뇌가 고단백 영양 식품으로 유행한다고 치다. 그 바람에 그들에 의해 인류가 강제로 가축화된다면, 그래서 외계인에 의해 20~30세까지 인도적으로 사육되다가(적어도 그들은 사람을 끔찍한 CAFO 같은 곳에서 기르는 것보다 좋은 음식과 적당한 운동, 괜찮은 교육, 그리고 깨끗한 환경을 기반으로 해서 성장한 뇌가 더 영양가 있고 맛도 더 좋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도축된다면(이런 이야기를 하니 영화에서 한니발 렉터(Hannibal Lecter)가 사람의 뇌를 삼겹살 구워 먹듯 요리해 먹는 장면이 떠오른다), 과연 우리는 폴란가 주장한 논리로 한껏 위안을 받으면서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즉, 우리보다 뛰어난 과학기술과 문명을 갖춘 외계인이 우리의 뇌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이상 우리는 지구에서뿐만 아니라 이 우주에서의 생존을 보장받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위안 아닌 위안에 만족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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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7일 일요일

[책 리뷰] 장엄한 역사와 무심한 통계 속에 묻힌 소년병들 ~ 한국전쟁(왕수쩡)

Korean War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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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한 역사와 무심한 통계 속에 묻힌 소년병들

Original Title: 朝鮮戰爭 by 王樹增
전쟁은 어느 한 쪽의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으며, 심지어 쌍방의 계획대로 진행되지도 않는다. 전쟁은 자체의 규율이 있고, 우연과 필연이 한데 섞여 흐름이 결정되기도 하며, 삶의 희열과 죽음의 함정을 안배하기도 한다……. (『한국전쟁(朝鮮戰爭)』, p894)

이름 모를 ‘소년병’

픽션 왕수쩡(王樹增)의 『한국전쟁(朝鮮戰爭): 한국전쟁에 대해 중국이 말하지 않았던 것들』 막바지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전방에서 중국군의 소년병이 최전방 진지로 명령을 전달하러 가고 있었다. 명령이 적힌 쪽지는 잘 접혀서 그의 상의에 넣어져 있었고, 소년병은 영리하게 포탄 구덩이 속을 재빠르게 옮겨가며 그날따라 더 맹렬해진 포화 속을 힘겹게 전진하고 있었다. 소년병은 죽고 싶지 않았고, 최대한 빨리 임무를 완수한 다음 부모님, 가족, 연인이 오매불망 기다리는 따뜻하고 포근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적군, 아군을 떠나서 소년병이 명령서를 전달하던 그 날 전쟁에 끌려든 모든 군인은 십중팔구 소년병과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백전노장도 엄두 내기 어려운 맹렬한 포화로 뒤덮인 전장의 한복판을 위태하게 뛰어가면서도 수시로 명령서가 있는 가슴께를 더듬던 소년병이 진지에 거의 접근했을 때 소년병은 포격에 쓰러지면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정신이 든 소년병은 한쪽 다리의 발목이 절단된 것을 알았고, 개의치 않으려고 애썼지만, 안색이 창백해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잠시 누워 있던 소년병은 고무신이 신겨진 채 절단된 발목을 한쪽 손에 들고, 다른 한쪽 손으로는 안간힘을 쓰면서 진지까지 기어갔다. 소년병은 하늘가를 붉디붉게 물들인 석양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명령서를 가슴에서 꺼내 지휘관에게 건넬 수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그날 소년병이 최전방 진지로 전달한 명령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명령 오늘 밤 10시에 정식으로 휴전한다. 그때 총이나 대포를 한 발도 발사해서는 안 된다.”

쪽지를 받아 든 지휘관이 시계를 보니 오후 8시 정각이었다. 소년병이 명령서를 전달한 날은 밀고 당기는 지난한 협정 끝에 마침내 한국전쟁의 정전협정을 조인하는 날이었다.

장엄하다는 역사 속에 한낱 무명으로 묻힌 ‘소년병’

이후 소년병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리고 그 소년병이 누구였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한국전쟁의 중국 측 자료를 수년 동안이나 파헤치며 숨겨진 영웅들을 적지 않게 발굴해 낸 왕수쩡조차 소년병의 이름을 모르는 것을 보면, 우리 역시 영영 알 길이 없다.

역사가는 소년병 같은 일화는 대규모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종종 벌어지는 사소한 사건이라고 냉정하게 판단하고는 기록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소년병의 희생이 있었든 없었든 어찌 되었든 정전협정은 성립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또한, 한국전쟁에서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인 데다가 그중 영웅이라고 불릴만한 용기를 보여준 병사들도 한 두 명이 아닐 텐데 그깟 소년병의 이름이 대수로울 리도 없다. 하지만, 전쟁은 사람이 한다. 폭우처럼 쏟아붓는 포화를 끝내 견뎌내야 하는 일도, 그리고 포화 속에서 끝끝내 희생되어야 하는 것도 소년병처럼 이름 없는 병사들이다. 전쟁은 이름 없는 병사들의 복종, 투지, 희생, 의지, 용기의 복합적인 작용으로 잔혹한 현실로 구체화된다. 농민군을 이끌어 신중국을 수립한 마오쩌둥(毛澤朿)은 '세상만사를 결정짓는 요소들 가운데 첫째는 바로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한국전쟁에서 보여준 중국인민지원군의 전쟁 철학에서도 중요하게 드러나는 중심 사상이지만(일부는 이를 ‘인해전술(人海戰術)’이라고 깎아내리기도 하지만), 왕수쩡이 쓴 『한국전쟁』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국인의 처지에선 중국인민지원군이라는 적군의 실상과 활약을 다뤘다는 점에서 조금은 불편할 수도 있는 (솔직히 이런 책도 불편할 정도로 머리가 차갑지 못한 사람이라면 아예 책을 읽지 말지어다!) 왕수쩡의 『한국전쟁』이 끝내 한국 독자에게 복받치는 감동을 밀려오게 하는 이유도 바로 그러한 점에 있다. 즉, 전장의 한복판에는 ‘무명의 병사’가 있듯, 그가 쓴 논픽션의 한복판에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장엄하다는 역사 속에서 한낱 무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소년병’의 이야기는 내 이야기가 되었을 수도 있고, 당신의 이야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전 이후 수많은 책이 한국전쟁을 다뤘지만, 그 누구도 ‘소년병’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왜일까? 전쟁에서 한 사람의 목숨 따위는 파리 목숨만큼이나 가치가 없어서? 그저 몇 개의 숫자로 표현되는 통계 수치의 일부라서? 총알이 빗발치고 포화가 모든 것을 불태우고 파괴하는 전장도 참혹하지만, 그 뜨거운 전장 속에 벚꽃처럼 만개한 청춘을 기꺼이 받쳤음에도 역사와 후손들에게 외면당한 그들의 운명도 참혹하다.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은 끊임없이 진동하고, 지옥에 떨어진 것처럼 하늘에서는 불을 내뿜는 전장에서 우리처럼 가족이 있고, 각자 나름의 이력과 삶을 가진 무수히 많은 청춘이 자욱한 포연 속으로 연기처럼 사라져갔지만, 역사는, 그리고 우리는 편리하게도 ‘수만 명’으로 통칭해버린다. 아, 이 얼마나 무정하고 매정한 숫자 놀음인가!

‘소년병’을 기억하려는 노력이 맺은 결실

가 왕수쩡이 날고 기는 재주가 있더라도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모든 이들을 알 길은 없다. 하지만, 그가 이름 모를 그 ‘소년병’을 기억하려고 노력하듯, 그의 책에는 역사가의 무참한 붓과 인류의 무심함 속에 묻혀버린 또 다른 소년병들을, 그리고 그 소년병들이 무리를 이룬 크고 작은 부대들을 기억하려는 흔적이 역력하다. 이 책은 그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본 역작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보통 역사가들이 사건들과 그 사건들이 서로 복잡하게 엮여가는 그 인과관계를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하는 것에 비해 왕수쩡은 사건을 실제로 일으키는 사람들의 행위와 그 사람들의 운명에 천착하고 있다. 그래서 그가 기술하는 한국전쟁은 다른 역사서보다 더 생생하고 드라마틱하지만, 그만큼 더 잔혹하게 느껴질뿐더러 심금을 울리는 자극도 강렬하다. 특히 전쟁사를 좋아하는 독자들이 눈여겨볼 만한 요인도 있는데 중국군 최고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가 병법을 구사하는 내밀한 과정과 마오쩌둥이 전체적인 중국군 전술에 끼친 영향, 중국군 장교들이 전투에 임하는 자세와 그들이 상부의 명령을 받아들이는 체계 등 다른 한국전쟁 관련 책에서는 보기 어려운 중국군의 활약상이 상세하기 기술되어 있다. 중국인민지원군 부대들의 구체적인 전술도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중국인민지원군 병사들의 정신력 예찬

편으로는 죽음도 불사하는 소름 끼치는 투지와 믿기지 않는 인내력을 몸소 보여준 중국인민지원군 병사들의 뛰어난 정신력을 이 책은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해 왕수쩡은 공산주의에 대한 신앙(지금의 중국 젊은이들은 어떨지 몰라도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끝내고 이제 막 국가를 수립한 1950년대 초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과 제국주의에 대한 증오, 그리고 현재 치러지는 전쟁이 ‘정의의 전쟁’이라는 굳은 믿음이 군 장병 마음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사실 한국전쟁에서 물질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유엔군보다 현격히 뒤처진 중국군이 그토록 놀라운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핵심은 바로 왕수쩡이 강조하는 그 ‘정신력’에 있었다는데 누구도 반박하기 어렵다. 중국군의 분신쇄골도 마다하지 않는 희생정신은 '세상만사를 결정짓는 요소들 가운데 첫째는 바로 사람’이라는 마오쩌둥의 말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한국전쟁에서 보여준 중국인민지원군의 소름 돋는 희생은 광신도들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예가 아닌가 싶다. 그렇게라도 해서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한국전쟁에서 중국군이 이룬 그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결정적 이유는 중국군이 희생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것은 중국이 거둔 모든 승리는 젊은 병사들의 피와 생명을 바꾼 결과였다는 말이다. 비록 적군이지만, 그들이 한국 땅에서 흘린 피와 생명, 그리고 그들이 보여준 뛰어난 용기와 비장한 희생을 생각하면 절로 숙연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마치면서...

책에는 군인과 그 군인들이 한데 모여 움직이는 부대의 운명과 비장한 심리가 한 편의 소설처럼 완벽하게 묘사되어 있다. 몰입하여 읽다 보면 중국군이 아군처럼 친근하게 느껴지는 난감한 상황에 자신도 모르게 당황하기도 하고, 눈물 없이는 책장을 넘기기 어려운 부분도 더러 있고, 장황하다 보니 석연치 않은 부분도 더러 있다. 숭고한 희생에서 오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든, 안타까운 희생에서 오는 슬픔의 눈물을 흘리든, 석연치 않은 점을 의심하든 중요한 점은 서로 죽고 죽이는 생명을 담보로 한 필사의 싸움에서도 인류는 거침과 섬세함, 포악함과 따스함, 천함과 고상함, 유약함과 굳셈이라는 인격과 인성을 발휘하면서 어떻게든 인간성을 유지하려고 애쓴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전쟁을 다룬 다른 논픽션들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놀랍지 않은가? 사람의 잔인하고 난폭한 성정을 극대화하고 부추기는 전쟁조차도 사람을 감동시키는 인간성을 말살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이로써 지금보다 더더욱 문명이 발전하고 사람들의 의식도 진보할 미래에는 전쟁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희망할 수 있을까?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최소한 우리가 지난 전쟁들의 실상들을 잊지 않고 있을 때야 그러한 희망의 작은 뿌리를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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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3일 수요일

[책 리뷰] 공산당원의 눈으로 본 ‘덩샤오핑 제국 30년’ 성장에 가져진 불편한 진실 ~ 롼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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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원의 눈으로 본 ‘덩샤오핑 제국 30년’ 성장에 가져진 불편한 진실

Original Title: 鄧小平帝國30年 by 阮銘
노예제도가 자유를 집어삼키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중국을 변화시키고 중국의 노예제도를 자유제도로 변화시키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데 중국을 변화시키기 위한 전제 조건은 중국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자 덩샤오핑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다. (『덩샤오핑 제국 30년』, p22)

돈에 눈이 멀듯 성장에 현혹되다!

된 말로 학생은 공부만 잘하면, 의사는 치료만 잘하면, 그리고 변호사는 변호만 잘하면 ─ 몇 개 더 추가한다면 여자는 얼굴만 예쁘고 남자는 돈만 잘 벌면 ─ 모든 것이 용서된다고 한다. 좋게 보면 한 사람이 가진 재주나 장점을 극대화하거나, 직업인으로서 마땅히 갈고닦아야 할 능력을 고취하려는 뜻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달리 보면 사람으로서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도덕성이나 사회적 윤리나 직업윤리를 소홀히 하는 능력 제일주의의 한 폐단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같지도 않은 논리를 자본주의 사회로까지 비약적으로 확대 적용해 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만 잘 벌면 최고이며 돈이 많으면 모든 것이 용서될 수 ─ 다르게 말하면 허용될 수 ─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인류와 문명이 품은 이상과 그 이상이 추구하는 정의를 깡그리 무시하는 말도 안 되는 말이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현실은 잔혹하기 그지없다.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부정한 방법으로 많은 돈을 번 사람을 겉으로는 비난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그런 사람을 부러워하는 모순을 안고 산다. 올해 신혼부부 특별공급에서 10%가 부정청약이었다는 말은 ‘뭐든 안 걸리면 장땡이다!’라는 파렴치한 심보의 기회주의와 도덕적 불감증이 기성세대들에게서 젊은 세대들로 그대로 유전되었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좀 더 많이 배우고 좀 더 나은 환경에 성장했다고 생각한 ─ 결국엔 착각이었지만 ─ 젊은 세대들조차 돈만 많이 가질 수 있다면 법을 어기고 욕쯤 먹는 것이 대수인가? 하는 뻔뻔한 작태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니 이 나라의 미래는 우울하다. 또한, 적발된 이들이 진정으로 잘못을 뉘우치기라도 하는가? 높은 분이든 낮은 분이든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미는 식으로 절대로 자기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 한국인의 고질적인 문제는 성찰이 없는 민족, 그래서 의식 발전은커녕 오히려 퇴보하는 감도 없지 않다. 어쨌든 욕먹는 사람이 오래 산다고도 하고 실질적으로도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늘어나지 않았는가?

아무튼, 내가 초장부터 굳이 억지스러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우리는 중국의 눈부신 경제 성장에 현혹된 나머지 그 속에 감춰지거나 가려진 것 중 너무나 많은 것을 놓치거나, 혹은 ‘불편한 진실’ 대하듯 애써 외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이다. 그렇게 놓친 진실 중 제일 큼지막한 대어를 꼽으라면 개혁 • 개방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덩샤오핑(鄧小平)이 설계하고 건설했다는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실상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덩샤오핑 제국’의 진실이기도 하다.

마오쩌둥 제국에서 진화한 신노예제도

때(2004~2006) 타이완 총통부(總統府) 국책고문(國策顧問)으로 일했던 저자 롼밍(阮銘)은 『덩샤오핑 제국 30년(鄧小平帝國三十年)』에서 덩샤오핑 제국의 경제 성장과 그 경제 성장이 가져오는 이익에만 급급한 나머지 중국의 실체를 제대로 직시하지 못했던 점, 중국의 심기를 건드릴까 두려워 어두운 면을 왜곡하여 진실을 감추거나 고의로 외면하는 편협한 기존 역사관, 그리고 그런 중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만들어 한몫 잡으려는 욕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불편한 진실’을 의도적으로 간과해버린 서구의 안이하고 비겁한 시선을 비판한다.

그렇다면 롼밍이 바라보는 덩샤오핑 제국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신노예제도로서 마오쩌둥 제국의 폐쇄적인 공산 노예제도에서 진화한 개방적인 공산 노예제도다. 그리고 덩샤오핑이 주창하는 ‘개혁 • 개방’은 민주와 자유를 기조로 하는 보편적인 개혁 • 개방이 아니라 특권계급 독재 하의 개혁 • 개방이다.

6 • 4 학살의 유혈 속에서 부상한 덩샤오핑 제국은 대내적으로는 ‘자산계급 자유화에 반대’하는, 즉 반자유 • 반민주 • 반평등 • 반인권을 기조로 하면서 외국 자본과 중국 정부가 손을 잡고 농민의 토지와 자연 자원을 약탈하고, 생태 환경을 훼손시키고, 수억 명의 노동자 ‘농민공(農民工)’으로부터 대규모 이윤을 함께 착취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중국을 신속하게 전 세계의 제조공장으로 우뚝 세웠다. 하지만, 그렇게 얻은 막대한 부를 대표적인 보수 경제관료인 천윈(陳雲)의 ‘새장 경제’ 원칙에 따라 국가가 큰 몫을 갖고, 집단은 가운데 몫을 갖고, 개인은 작은 몫을 갖음으로써 중국 특색의 새로운 노예제도를 안착시켰다. 중국 인민은 ‘안정적인 노예가 되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현대 중국의 이른바 집단 시위는 바로 중국의 ‘노예가 되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시대’의 산물인 것이다. 이것이 중국의 신노예제도에 관한 롼밍의 대략적인 해석이다. 여기서 ‘안정적인 노예’는 모두가 평등하게 가난했음에도 변변치 않은 사회주의 제도로 의료, 직업, 주택, 노후 문제를 그럭저럭 해결할 수 있었던 과거 마오쩌둥 시대를 말하는 것 같다. 아무튼, 경제발전을 이룩하면서도 고도의 노예제도를 유지하고, 독재정치체제가 세계화에 어울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이자 본보기를 몸소 보여주면서 훗날 자유 민주주의와 대립할 가능성이 큰 그런 시스템을 창안한 사람이 바로 덩샤오핑이다.

경제에서는 ‘개혁 • 개방’, 정치와 사상에서는 ‘보수’

실 ‘개혁 • 개방의 아버지’라는 진보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덩샤오핑의 정치는 권위주의적인 철권통치였다. 덩샤오핑은 경제적인 면에서는 확실하게 개혁 • 개방을 지지했지만, 정치적인 면에서는 철저하게 보수파였다. 그것은 경제와 정치가 충돌했을 때 확고부동하게 정치를 지지한 데서도 덩샤오핑의 보수적인 면모를 알 수 있다. 그가 스스로 말한 바와 같이 경제 분야에서 문제가 출현하면 양보할 수 있었지만, 자유화와 관련해 문제가 발생하면 절대로 양보하지 않았다. 따라서 반자유화를 위해서는 독재적인 수단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고, 톈안먼 학살은 덩샤오핑의 확고한 반자유 • 반인권 • 반민주 사상과 공산 독재만이 중국에 안정과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는 자기기만에 가까운 확신에서 비롯된 예고된 비극이라 할 수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런 덩샤오핑의 입에서 한때나마 ‘민주’ 운운하는 말이 나왔다는 것이다. 중국 역사의 중대한 전환으로 일컬어지는 11기 3중전회(1978년)에서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두 가지 범시(마오쩌둥의 정책과 지시는 무조건 옳다)와 문화대혁명이 철저하게 부정되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봤으며, 11기 3중전회의 양대 주제였던 사상해방과 민주를 지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3개월 후 덩샤오핑은 「4항 기본원칙의 견지(사회주의 노선의 견지, 인민 민주독재의 견지, 공산당 영도의 견지, 마르크스 • 레닌주의와 마오쩌둥주의의 견지)」를 발표함으로써 ‘자산계급 자유화 반대’와 함께 덩샤오핑 제국의 두 가지 범시를 성립했다. 그 이후 6~7년 동안 덩샤오핑의 견해와 주의력은 민주파와 보수파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다가 1987년 1월 후야오방(胡耀邦)이 권좌에서 물러나면서 덩샤오핑 제국의 반자유화 대전략이 최종적으로 확립되었다.

덩샤오핑 통치술의 핵심

렇다면, 어떤 모습이 덩샤오핑의 참모습인가? 롼밍은 모두가 진짜 덩샤오핑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11기 3중전회에서 사상해방과 민주를 지지하던 덩샤오핑의 모습도 진짜고, 개혁 • 개방을 지지하는 덩샤오핑의 모습도 진짜고, 톈안먼 학살을 폭력으로 진압하는 덩샤오핑의 모습도 진짜라는 것이다. 즉, 이것이 바로 덩샤오핑 자신이 말한 “지도자의 견해와 주의력이 변함에 따라 바뀌는 것”이다. 다르게 말해 시세와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처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통치술의 극치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변칙적인 통치술이 바로 덩샤오핑 통치술의 핵심이기도 하다. 마오쩌둥도 변덕이 심하긴 했지만, 그것은 ‘변덕’이라고 표현될 수 있을 만큼 마오쩌둥 본인의 핵심 사상과는 크게 관계없는 일에 한해서였던 반면에 덩샤오핑은 ‘민주, 자유, 인권’과 ‘반민주, 반자유, 반인권’이라는 사상적인 면에서 완전히 서로 다른 양극단을 오고 갔었던 만큼 마오쩌둥보다 한 수 위라고 봐야겠다. 이뿐만 아니라 마오쩌둥이 지정한 후계자 화궈펑(华国锋)이 얼마 가지 못하고 거의 쫓겨나다시피 하여 권력에서 물러났던 것에 반해 덩샤오핑이 지정한 두 후계자(장쩌민과 후진타오)는 모두 완만하게 정권을 잇고 무난하게 국정을 꾸려나갔던 것을 보면 역시 후계자 선정 문제에서도 덩샤오핑의 능력은 그보다 탁월했다.

공산 노예제도와 자유 민주의의 대립?

‘덩샤오핑 제국’에 대한 롼밍의 총평이라 할 수 있는 ‘개방적인 공산 노예제도’라는 말에는 공감하는 독자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롼밍은 더 나아가 중국의 공산 노예제도가 자유 민주의의 물결에 대해 또 한 번의 도전이라고 웅변한다. 과거 파시즘 세력과 자유 민주주의 세력이 대립하고, 공산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이 대립했던 것처럼 덩샤오핑 제국의 산물인 공산 노예제도의 확장이 인류의 자유에 대한 거대한 위협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데, 이 말에는 어리둥절할 수도 있다. 처음에는 저자의 편집증적인 망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야오방 밑에서 일하다가 1985년에 당적을 박탈당한 분노와 원한을 그런 식으로 풀어보려는 심보는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짐바브웨 군부 쿠데타 관련 뉴스에서 중국이 정권교체에 개입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 순간 중국의 투자가 아프리카에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과 아프리카에는 여전히 절대 독재국가와 전체주의 국가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잇달아 떠올랐다. 소름이 돋았다. 덩샤오핑이 1974년 UN 연설에서 중국은 절대 패권을 차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마오쩌둥의 장기인 상대를 일단 안심시키고 나서 기습하는 기만술이자 덩샤오핑 특유의 변칙적인 처세술이었단 말인가?

중국이 장차 패권 국가로 성장한다면 가까운 이웃 나라이자 중국에 경제적으로 많은 것을 의존하는 우리로서는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다. 과거 미국이 민주와 자유를 전도한다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골목대장 노릇을 하며 수많은 나라의 내정에 간섭해 불미스러운 일을 저질렀던 사실에 비추어보면, 훗날 중국의 군사력이 미국을 압도하게 되면 어떤 괴물로 다시 태어날지 참으로 두렵다. 그런 중국의 속마음과 진의를 꿰뚫어 보기 위해서라도 중국 현대사의 굵직한 한 획을 긋는 덩샤오핑 제국 30년이 드리운 어둡고 깊은 그림자를 비판적 관점으로 낱낱이 해부한 이 책을 읽어볼 가치가 있다.

마치면서...

책은 후야오방 밑에서 일했단 진짜 공산당 당원으로서 덩샤오핑 제국의 형성 과정을 현장에서 몸소 체험하고 두 눈으로 똑똑히 봤던 롼밍의 독특한 역사적 체험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책이다. 특히 이 책에는 공산당원만이 설명하고 제시할 수 있는 증거와 정치 공작의 세밀한 내막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무슨 무슨 회의마다 발표되는 강령, 강화 등의 글이 발표되는 정치적 배경과 경위가 그러하다. 예를 들어 1979년 3월 30일에 덩샤오핑이 발표한 「4항 기본원칙의 견지」라는 글은 후차오무(胡喬木)가 기초한 것이지만, 이보다 3개월 전인 11기 3중전회 때에는 덩샤오핑이 후차오무의 원고를 퇴짜놓으며 후야오방에게 원고를 청탁했다는 일화 등이다. 덩샤오핑이 어떤 글을 채택하고 그 글을 누가 작성했느냐는 것을 따져보기만 해도 독자는 자연스럽게 덩샤오핑의 정치적 행로나 사상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한편, 『덩샤오핑 제국 30년』은 내심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강국으로 올라섰을 때 당연히 패권을 추구할 것이라는 전제가 가정되고, 그래서 중국의 민주화를 바라는 절실하고 긴박한 마음에서 집필한 만큼 때론 격하게 끓어오르는 저자의 감정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 감정의 힘과 압박이 문장에 고스란히 실리다 보니 마치 선동하는 글처럼 느껴진다. 그러한 불편만 조금 감수한다면, 저자의 값지고 독보적인 정치 체험 속에서 현장의 복잡하고 미묘하면서도 살벌한 정치 흐름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는, 그리고 중국 현대사를 비판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날카로운 안목을 길러낼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가 보위했지만, 끝내 비운의 결말을 맞이하며 화궈펑처럼 역사에서 지워진 후야오방의 철학과 이상주의를 조명한 것은 새롭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에즈라 보걸(Ezra Vogel)이 중국 개혁 • 개방의 모든 공을 덩샤오핑 한 사람에게 몰아준 것에 대해, 그리고 개혁 • 개방의 역사를 한 사람의 전기로 대체해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던 롼밍이 사돈 남 말 하듯 후야오방을 중국 민주화의 구세주라고 되었던 것처럼 너무 치켜세우는 것도 같아 눈살이 찌푸려진다. 아무튼,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국가, 즉 인민은 빈곤하지만 국가는 부유한 초강대국 중국의 화려한 경제 성장이 은폐할 수밖에 없었던 덩샤오핑 제국의 본모습을 적나라하게 다뤘다는 것만으로도 두고두고 화자가 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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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3일 일요일

[책 리뷰] 진실 뒤에 숨은 지독한 이기심 ~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우타노 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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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뒤에 숨은 지독한 이기심

Original Title: 家守 連作推理小說 by 歌野晶午
“ … 닥치는 대로 정보를 공개해서 질서를 혼란시키는 게 정의일까? 세상에는 ‘필요악’이라든지 '거짓도 방편’이라는 말이 있어. 사람이라는 생물은 거짓말이나 악을 잘 이용해서 지금까지 계속 번성해 왔지.”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 p306~p307)

늘 소개하는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家守 連作推理小說)』는 내가 지금까지 읽은 수백 편의 추리 소설 중 최고의 반전 펀치를 날린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의 작가 우타노 쇼고(歌野晶午)의 단편 소설집이다. 총 다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제목에서 예상할 수 있듯 모두 가정집에서 일어난 밀실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밀실 살인 사건을 주된 테마로 하는 듯 보이지만, 내가 보기에 이 소설의 숨겨진 묘미는 ‘의도치 않은 살인’이 반 박자 늦게 불러오는 ‘섬뜩함’이다. 보통 추리 소설을 읽는 재미는 치밀하게 계획된 살인 범죄를 엉킨 실타래 풀듯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데 있지만(물론 이 소설에도 의도적인 살인이 한 건 등장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살인 사건들처럼 우연하고 우발적으로 일어난 의도치 않은 살인이 불러오는 예기치 못한 섬뜩함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이렇게만 설명하고 나니 속 빈 강정처럼 뭔가 싱겁게 들린다. 과실치사라고 불려도 무방한, 살인 사건 같지 않은 살인 사건들 속에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들처럼 미스터리한 맛이 무엇 있겠으며, 또한 명탐정 김전일처럼 명쾌하게 추리할 만한, 명석한 두뇌를 가진 독자들의 탐정 기질을 충분히 자극할 수 있는 건더기가 있어봤자 얼마나 있겠는가 하고 넘겨짚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섣부른 판단이 될 수도 있다. 우타노 쇼고도 그 점을 생각했는지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들을 신문기사처럼 그저 보이는 대로 싱겁고 맹숭맹숭하게 독자 앞에 갖다 바치는 대신 ‘우연’, 혹은 ‘우발성’이라는 범죄 아닌 범죄 속에 묻힌 사람들의 본능처럼 발동하는 이기심을 간과하지 않으며 그 뒤에 살포시 은폐된 진실을 들여다본다. 마치 악마가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선 집에 함부로 들락날락한 것을 부모님에게 들켜 혼나는 것이 무서워 친구가 낯선 집에서 숨바꼭질하다 실종된 것을 숨긴 소년들(인형사의 집), 수십 년 전에 유괴된 동생을 기다려야 한다는 이유로 마을에서 유일하게 도로 개발에 반대하며 집을 팔지 않고 버티다가 보상금에 눈이 먼 남편에게 살해된 아내와 그 아내가 유괴된 것으로 믿었던 동생의 비밀(집 지키는 사람), 고액에 혹해서 치매 노인의 가짜 아들 역할을 맡았다가 뜻하지 않은 죽음을 맞이한 청년(즐거운 나의 집), 시골 마을 사람들의 집단 이기심에 의해 계획적으로 은폐되고 날조된 살인 사건(산골 마을), 복권처럼 돼도 그만 안 돼도 그만인 ‘프로버빌리티(probability) 범죄’로 아내를 가혹하게 다룬 남편의 예기치 못한 비극적 결말(거주지 불명) 등 총 다섯 편의 이야기는 우타노 쇼고의 다른 작품에 비하면 반전의 파괴성이나 기발한 맛은 덜하지만, 사람의 죽음조차 태연하게 덮어버리려는 지독한 이기심을 예기치 못한 살인을 은폐하려는 인물들의 비겁한 행위 속으로 잘 녹아내리게 했다는 점에서 나름의 호소력이 있다.

지막으로, ─ 오늘 했던 이야기와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 다섯 편의 단편 중 마지막 편인 「거주지 불명」에서 아내를 친정으로 쫓아내어 자유를 되찾고자 하는 목적으로 집에 얽힌 무서운 이야기로 아내를 겁주던 남편 도시미쓰는 아내가 집을 되팔자는 성화에 일일이 답변하다가 이런 말을 내뱉는다.

“ … 아파트는 싫어. 정원도 없는 집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어.”

그런데 도미시쓰가 사는 일본의 바로 옆 나라는 애초 집 살 때 정원 같은 거 고려할 생각조차 못 한다. 소음에 시달려 신경병 환자가 되고 먼지를 잔뜩 먹어 목이 막혀도 상관없다. 다만, 장래에 집값이 얼마나 오를 것인가만을 따져본다. 도시미쓰를 보면 한국의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오명이 단지 정부와 대기업이 짜고 치는 고스톱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그 판에 놀아나는 무지한 국민도 문제이다. 우리보단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는 일본의 주택 환경이 부럽기도 하고, 내 집 앞 골목이나 인도에서조차 마음 놓고 걸어 다닐 수가 없는 한국의 불량하고 비인간적인 주택 환경에 분노가 치밀기도 하여 별 시답지도 않은 몇 마디 적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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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6일 일요일

[책 리뷰] 화석을 읽고 고래를 스케치하는 탐사 수필 ~ 걷는 고래(J. G. M. 한스 테비슨)

The Walking Whales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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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석을 읽고 고래를 스케치하는 탐사 수필

Original Title: The Walking Whales: From Land to Water in Eight Million Years by J. G. M. Hans Thewissen
나는 결국은 내가 답하게 된 질문들에 답을 하러 파키스탄에 간 것이 아니었고, 전쟁이 터져서 내 첫 번째 탐사 일정은 초주검이 되었다.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끈기와 행운에 의해서였고, 그 탐사 일정이 훗날 내가 일부가 된 흥분되는 발견들로 가는 길을 닦았다. (『걷는 고래(The Walking Whales)』, p271)

표지 속 수수께끼의 다섯 동물

지에 인쇄된 것 중 글자는 쏙 빼고 그림만 본다면, 이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판단하기가 꽤 곤란하다. 꽤 역동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표지의 동물들은 뱀장어처럼 매끈하고 길쭉하게 잘 빠진 녀석도 보이고, 설치류나 양서류 비스름한 녀석도 보이지만, 내 식견으로는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다. 자기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나를, 아니 나의 무지를 원망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들의 인상이 아무리 험상궂다 하더라도 그들은 한때 지구 위에 존재했던 다섯 종(種)의 동물인 것만은 분명하다. 다섯 동물이 사이좋게 나란히 한 표지를 장식했다고 해서 모두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 살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 서로는 어떻게든 연관이 있는 동물들이다. 그중 네 마리는 같은 목(目, Order)에 속한 동물들인데 놀랍게도 그들이 속한 목은 바로 고래목(Cetacea)이다. 사실 창조론자들은 고래를 어째서 화석기록이 진화를 뒷받침하지 않는가를 보여주는 으뜸가는 일례로 써먹었다고 하는데,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왔던 동물이 다시 바다로 돌아갔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진화의 방향성은 사람이 쉽사리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다. 현생 고래와 현생 고래의 진화적 경로를 대표하는 표지 속에서 멋쩍게 포즈를 취하는 네 종을 나란히 비교해 보면 ─ 적어도 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사람이라면 ─ 희미하게나마 연결고리를 찾을 수가 있다. 하지만, 고래의 조상을 대표하는 표지의 네 종 중 한 종만 빠져도 가뜩이나 빈약해 보이는 이들의 연결고리는 완전히 끊어진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었고, 그래서 고래는 ─ 앞서 거론한 것처럼 ─ 창조론자들의 만만한 먹잇감이었다.

고래의 조상 중 육지에서 살았던 고래와 바다에서 살았던 고래의 잃어버린 연결고리는, 육지에서는 걷고 물속에서는 헤엄을 칠 수 있었던 암불로케투스(Ambulocetus)이다. 이 화석이 발견된 덕분에 창조론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줄 수 있었고, 더불어 고래의 기원과 진화의 과정을 이해하고 연구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 그리고 이 중요한 고리를 발견한 사람은 다름 아닌 이 책 『걷는 고래(The Walking Whales)』의 저자 J. G. M. 한스 테비슨(J. G. M. Hans Thewissen)이다.

고래의 에오세 친척, 인도히우스

지의 다섯 동물 중 다른 목에 속한 나머지 한 마리는 에오세(Eocene)에 살았던 우제목(偶蹄目)인 인도히우스(Indohyus)다. 하마가 고래와 가장 가까운 현생 친척이라면, 이 너구리만 한 초식동물이 에오세에서 고래목과 가장 가까운 친척인 셈이다. 인도히우스를 처음으로 발굴한 사람도 테비슨인데, 그럼으로써 고래목의 유연관계에 대한 케케묵은 쟁점도 해결되었다. 그동안 고생물학자들은 고래목이 메소닉스목(Mesonychia)이라 불리는 발굽이 달린 식육 포유류의 멸종한 집단과 가까운 관계라고 가정했는데, 인도히우스라는 화석증거는 고래목은 에오세 어느 원시 우제목에서 유래했으며, 고래목의 가장 가까운 현생 친척은 하마임을 보여준다. 이로써 DNA 분석으로 고래목과 가장 가까운 현생 친척은 하마과임을 예측했던 분자생물학자들의 데이터도 맞아떨어졌다.

화석을 읽고 고래를 읽는다

인류학자 도널드 조핸슨(Donald Johanson)이 최초의 인류 화석 ‘루시’를 발굴하고 해석해가는 과정을 담은 책 『루시 최초의 인류(Lucy)』에서 자신이 이룩한 업적과 성공에 대한 ─ 어떻게 보면 교만에 가까운 ─ 자부심과 이것을 시기하고 견제하는 동료 학자들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마음껏 드러내었던 것에 반해 『걷는 고래』의 저자 J. G. M. 한스 테비슨는 다소 차분하게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그 차분함 속에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학구적 열정이 끓어 넘칠 듯 말듯 고이 감춰져 있다. 그 열정은 전쟁과 테러, 적대적인 자연환경, 이질적인 문화 등의 외부적인 어려움과 시간, 돈과 같은 개인적인 어려움에서 기인하는 각종 위험과 역경을 배낭처럼 둘러메고 거의 중노동에 가까운 화석 탐사 일정을 끈질기게 소화해냈다는 것으로 충분히 증명되고도 남는다. 그 열정의 대륙 속에는 현생 고래와 조상 고래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채 나란히 존재하며 그들은 탐정처럼 자신들의 삶과 죽음의 행적을 끈덕지게 뒤쫓는 테비슨을 귀찮은 듯하면서도 대견스러운 눈빛으로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에 대한 보답인 양 고래들은 물속과 육지를 바삐 오가며 신들린 듯 춤을 추고 있다. 우리는 저자와 함께 화석을 읽고 고래를 읽는다. 그들은 어느덧 더부룩한 털을 없애고 늘씬하고 매끈한 몸매로 탈바꿈했고, 공기의 진동을 듣는 귀 대신에 ─ 훗날 인류가 보고 배울 ─ 초음파 탐지기를 장착했다. 사지는 잠시 물속을 노처럼 휘젓는 구실을 하다가 곧 퇴화하고, 그 대신 유연한 몸놀림과 넓고 튼실한 꼬리로 바닷속을 자유자재로 헤엄쳐 다니게 되었다. 이때쯤이면 누구라도 진화의 무궁한 업적을 깨닫고는 넋을 잃지 않을 수가 없다. 억울하도록 아쉬운 것은 수백만 년 후에 고래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빈약한 내 머리로는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여행 스케치 같은 수필

편으론 테비슨이 인도와 파키스탄을 오가는 다사다난했던 탐사 과정을 기록한 『걷는 고래』는 여행 스케치 같은 수필이다. 이야기는 그가 겪었던 고된 현장 작업과는 달리 거칠지도 격렬하지 않다. 읽는 이로 하여금 몽상에 빠지게 하는 나긋나긋하게 단조로운 문장은 미지의 아늑함마저 물씬 풍겨 온다.

형형색색으로 물든 암석과 땅을 온종일 파고, 조련사 앞에서 강아지처럼 노는 범고래를 바라보고, 화석을 찾아 섭씨 40도를 넘나드는 프라이팬 그 자체인 펀자브의 평원으로 들어선다. 납치, 전쟁 등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발이 묶이기도 하고, 괴짜 같은 주인의 변덕 때문에 연구가 시급한 화석을 눈앞에 남겨둔 채 쫓겨나기도 한다. 어느 공항에선 서른다섯 명의 서로 다른 낯선 사람들이 외국인인 저자의 돈을 뜯으러 모기떼처럼 집요하게 달라붙는다. 심지어 경찰까지도. 찬디가르에 곧게 뻗은 큰길을 지나며 살아 있는 존재들만 무시한다면 괜찮은 도시라고 감탄하기도 한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아이들에게 나눠주려고 일부러 가져간 사탕이지만, 종교적 텃세 때문에 여자아이에겐 주지 못한다. 가난하지만 손님만큼은 푸짐하게 대접하려는 현지인의 문화는 저자를, 그리고 그 상황을 읽는 나까지도 곤혹스럽게 만든다.

낯선 땅, 낯선 사람들, 낯선 문화, 그리고 거리에서 원숭이의 손을 뜯어먹는 개도 마주칠 수 있는 낯선 환경. 이 모든 것을 과학자의 진지함과 호기심이 번득이는 시선으로 관찰하고 잠시 머릿속에서 버무린 다음 깨끔하게 글로 묘사한다. 고래의 기원과 진화의 역사를 진지하게 파헤쳐가는 여정도 짜릿하지만, 그 여정 곳곳에 알맞게, 그리고 보기 좋게 널려 있는 담백한 수필을 감상하는 것도 묘미다. 그래서 저자의 과학적 열정과 엄밀함에 세련된 수필이 더해져 완성된 『걷는 고래』는 과학서적으로는 보기 드물게 문학적 교양과 과학적 지식을 두루 만족시킬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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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9일 일요일

[책 리뷰] ‘다양성의 혼재’ 속의 모호한 정체성 ~ 콩고의 판도라(알베르트 산체스 피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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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의 혼재’ 속의 모호한 정체성

Original Title: Pandora in the Congo by Albert Sánchez Piñol
내가 쓴 원고가 남의 이야기든 말든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마리 앙투아네트의 등껍데기가 자연물이 아니라 인공적인 물건이면 어떻다는 말인가.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남의 이야기를 썼다고 해서 내가 하찮은 글쟁이가 아닌 것처럼, 나무 껍데기를 썼다고 해서 하찮은 거북이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콩고의 판도라』, p459)

현대의 판도라 ‘인류’

피메테우스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던 판도라(Pandora)에게 무엇이 부족했던 것일까? 호기심을 못 참은 그녀는 제우스의 엄중한 경고도 무시한 채 제우스가 결혼선물로 준 상자를 열고 만다. 그 상자 안에는 욕심, 질투, 시기, 각종 질병 등 온갖 나쁜 것들이 가득 담겨 있었으며, 이것들은 판도라가 상자를 여는 순간 빠져나와 세상 곳곳으로 퍼졌다. 그로 말미암아 평화로웠던 세상은 금세 험악해졌다는, ‘판도라의 상자’라고 불리는 그리스 신화의 한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의 출처인 위키백과에는 판도라의 그 뒷이야기는 나와 있지 않지만, ─ 만약 그녀가 양심적인 사람이었다면 ─ 상자를 연 판도라도 자신 때문에 불행에 빠진 세상을 바라보며 예전 같은 행복한 삶을 마냥 누릴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는 있다. 이 이야기는 뜻밖의 재앙의 근원을 말하고자 할 때 종종 언급된다.

그렇다면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Albert Sanchez Pinol)의 소설 『콩고의 판도라(Pandora al Congo)』에서 ‘판도라’는 무엇을 의미할까?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판도라는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 정도로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린다. 그러나 그녀는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편으로는 제우스의 경고를 무시할 정도로 도를 넘어선 호기심을 참지 못한 채, 미지의 무언가를 추구하다가 재앙을 불러들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소설 속 ‘판도라’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판도라처럼 현실에 만족하거나 안주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탐욕과 이익을 추구하려는 인류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새로운 자원, 새로운 땅, 그리고 돈과 명성을 좇아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세력을 확장하려는 야심을 일각에서는 ‘모험 정신’, ‘개척 정신’으로 그럴싸하게 포장하거나, 혹은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려는 ‘도전 정신’으로 추켜세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식으로 제국주의가 시작되었으며, 또한 그런 식으로 서구 문명이 비서구 문명을 ─ 서구 문명의 논리와 이성으로 볼 때는 지극히도 합리적인 행동으로써 ─ 침탈했음을 익히 알고 있다. 소설 속 배경이 되기도 하는 20세기 전후에 만연했던 제국주의도 탐욕과 이익을 좇아 주변으로 무한히 확장하려는 인류 속성의 역사적 증거다.

서구 문명이 잉태한 악이 정당하게 활개 치는 그곳

설은 ‘인류’라는 현대의 판도라가 ‘콩고’라는 또 다른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을 때 찬란한 인류 문명과 냉혹한 이성 뒤에 감춰진 ‘악’이 소위 말하는 문명인을 흔히 말하는 야만인으로 어떻게, 어떤 식으로 서서히 탈바꿈시키는지를, 그리고 문명의 탈을 쓴 야만인이 자신들이 저지른 온갖 짓들에 문명의 이중 잣대를 들이대며 어떻게 합리화하는지를 액자 형식의 이야기를 통해 교묘하게 그려내고 있다.

서구 문명이 볼 때 ‘콩고’는 법, 도덕, 그리고 자신들 문명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다. 그러므로 제국주의의 판사는 그런 곳에서 어떤 짓을 저질러도 문책할 수 없다고 판결한다. 그것은 인류가 빚어낸 업적 중에서 가장 고결하고, 인류를 지혜와 사랑을 품은 지적생명체로서 빛나게 해주던, 그래서 많은 사람이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생명을 품은 ─ 인류의 존재를 위협하지 않는 ─ 모든 존재에게 두루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정의’와 ‘보편적 도덕성’을 깡그리 무시하는, 참으로 합리의 극치를 달리는 위대한 판결이다.

그럼으로써 서구 문명은 식민지에서의 야만적인 행위를 정당화하고, 동시에 현대적 문명이 자리 잡은 영역에서 적절한 탈출구를 찾지 못해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사회악’이 배출될 수 있는 합리적 공간을 제공한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문제처럼 식민지에서의 야만적 행위를 허용하였기에 ‘사회악’의 배출구로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로 ‘사회악’의 배출구가 필요해서 식민지에서의 야만적 행위를 허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콩고의 판도라’는 현대 문명의 모순과 부조리가 잉태한 더럽고 추한 인간쓰레기들의 집합소이자 현대 문명이 용납할 수 없는 그들의 변태적인 욕망과 탐욕을 해결하는 구역질 나는 변소인 것은 틀림없다.

‘다양성의 혼재’의 아쉬움을 달래고도 남는 기발한 이야기

『콩고의 판도라』는 소설 속에 또 다른 소설을 삽입하거나 스릴러, 판타지, 추리, 모험 등 다양한 장르가 공존하는 특이한 창작 기법을 구사하여 서구 문명에 대한 깊은 통찰을 시도한다. 하지만, 여러 장르의 혼합을 시도하려는 어딘지 모르게 혼란스러운 와중에 말로만 듣던 대필작가의 고단한 노예 생활, 1차 세계대전 전후의 영국과 유럽의 세태를 반영하려는 사실주의적인 풍자 요소, 문학의 예기치 못한 파괴적인 힘, 언론의 노골적인 상업성, 감동 앞에 힘없이 무너지는 진실과 그것이 대변하는 우매한 대중 등 서구 문명이 잉태한 다양한 문젯거리를 다루다 보니 어딘지 모르게 풍요로운 맛은 있지만, 똑 부러지게 하나를 파고드는 집요한 맛은 없다. 어딘지 모르게 우겨 넣어진 느낌이다. 여기에 대필작가로서 소설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주인공이 문학적 정체성을 찾아 나가는 성장 소설적인 요소에 주인공이 남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남의 여인을 짝사랑하는 애처로운 사연까지 가미되었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겠다. 특정한 장르에 머무르지 않으면서 여러 장르의 경계를 드나드는, 그래서 딱히 어떤 장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소설의 특징이라면 특징이겠지만,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 작품에 담아내려다 보니 이것도 저것도 아닌 소설이 되어 버린 느낌도 없지 않아 있다. 내가 보기엔 충실하게 상업성을 따르면서도 소소한 문학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 결과 어중간하게 붕 떠버린 소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간간이 발휘되는 유희적이고 기지가 번득이는 문장, 그리고 ‘상업성’, ‘문학성’ 등의 작품성을 따지기에 앞서 누구라도 책 앞에 진지하게 붙들어 매 놓을 수 있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에는 찬탄을 금할 수가 없다. 여기에 잘 만들어진 추리 소설에서나 볼법한 기가 막힌 반전과 독자를 감쪽같이 속여넘기는 서술 트릭은 또 어떠한가? 아무튼, 뭔가 깊고 옹골진 맛은 없지만, ‘다양성의 혼재’라는 새로운 창작 기법으로 할아버지가 들려줄 옛날이야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꼬마들처럼 모험심과 호기심으로 한껏 달아오른 독자의 흥심을 달래주기에는 부족함은 없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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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일 일요일

[책 리뷰] ‘유령 탐정’, 자신을 죽인 자를 추적하다! ~ 생사의 강(차이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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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탐정’, 자신을 죽인 자를 추적하다!

Original Title: 生死河 by 蔡駿
“모든 아이들은 태어날 때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대요. 행복하게 살다가 편안히 죽었든, 기구하게 살다가 비명횡사했든, 아니면 일찍이 요절했든 그 기억이 남아 있다죠. 기쁘고 슬프고 고통스럽고 힘든 기억들이 머릿속에 남아 있는 거예요. 갓난아기들이 밤에 잠도 안 자고 우는 게 바로 그 때문이래요. 시간이 지날수록 그 기억들이 점점 희미해져 나중엔 다 잊어버리고 순수한 아이가 되는 거죠.” (『생사의 강』, p200~p201)

맹파탕(孟婆湯)을 토하고 기억을 간직하다

떠한 종류의 어느 정도 고통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고통과 그런 고통에 몸부림치며 신음하고 있을 때 누군가로부터 위로받지 못하고 쓸쓸하게 혼자 감내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점은 좀 두렵지만, 나는 죽음 그 자체는 두렵지 않다. 그것은 죽음 뒤에 무엇이 있을지 두렵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땐 이미 존재 여부와 존재의 소멸을 느껴야 할 ‘나’라는 존재 자체가 없으니까. 그렇더라고는 해도 만약 사후 세계가 있다면, 그 사후 세계가 어떤 식으로 존재할지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마저 매몰차게 떨쳐버리기는 어렵다. 이러한 호기심은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존재이기에 앞서 영적이고 문화적인 존재인 한 인간이 품을 수 있는 근원적이고 문학적인 상상력을 사유로 한다.

사실과 실험으로써 진리를 이해하려는 엄격한 과학은 사후 세계와 환생을 설명하려고도 않지만, 우주의 막연함과 경이로움 앞에 여전히 작은 존재인 인류의 지식이 아직 밝히지 못한, 아니면 결코 밝힐 수 없는 환생 시스템이 어떤 방식으로든 작동하고 있다면, 전생의 기억을 간직한 채 태어나는 사람들은 그 환생 시스템에서 아주 가끔 일어나는 오류일지도 모른다. 혹은 누구처럼 삼켜야 할 맹파탕(孟婆湯)을 토해낸 결과일지도 모른다.

『생사의 강(生死河)』에는 이런 전설이 나온다. 사람이 죽으면 귀문관(鬼門關)을 건너 황천길로 들어서는데 저승과 이승의 사이에 망천수(忘川水)라는 강이 있고, 그 강에 있는 나하교(奈何橋)를 건너면 다시 태어난다. 하지만, 나하교를 건너려면 나하교 옆에 앉아 있는 맹파(孟婆)라는 노파가 주는 맹파탕을 마셔야 한다. 맹파탕을 마시면 이승에서의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나하교를 건너자마자 좀 전에 먹은 맹파탕을 토해낸 불량한 영혼이 있다. 그럼으로써 그는 전생의 기억을 그대로 간직한 채, 그리고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자신을 죽인 사람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죽어야만 했던 그 원한도 그대로 이어받은 채 환생한다. 그래서 그는 다음 생애에서 자신을 죽인 범인을 잡는 ‘유령 탐정’이 된다. 그는 바로 차이쥔(蔡駿) 추리 소설 『생사의 강』에 등장하는 요절한 주인공 선밍이다.

사람의 복잡한 삶을 축소해 놓은 듯한 사건의 복잡성

난 추리 소설이다. 선밍이 학생들에게 ‘마녀 구역’이라 불리는 음침하고 캄캄한 지하실에 혼자 있을 때 자신을 뒤에서 급습하여 칼로 찔러 죽인 범인을 추리해 나간다는 점에서는 추리 소설이지만, 살해된 사람이 전생의 기억과 원한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환생하여 자칭 ‘유령 탐정’ 노릇을 한다는 점은 추리 소설이기보다는 괴기 소설에 더 가깝다. 살해된 영혼이 다른 인물로 환생하여 전생의 ‘나’를 죽인 살인자를 찾아 나선다는 이야기만 놓고 보면 ‘전설의 고향’이나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막상 소설을 읽어보면 선밍이 살해된 사건 전후로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어내기는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생사의 강(生死河)』에 등장하는 살인자는 한두 명이 아니고, 그에 따라 피해자도 여러 명이다. 선밍 같은 경우는 특이하게도 살해된 피해자이기에 앞서 분노와 증오로 눈이 먼 나머지 애꿎은 사람을 죽인 적이 있는 명백한 살인자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인과응보로 보이기도 한다. 다른 소설이나 현실에서 일어나는 살인처럼 『생사의 강』 속 살인자들도 시기, 질투, 탐욕, 증오, 비밀 등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살인을 저지른다. 언뜻 보면 각각의 살인은 개별적으로 보일 정도로 사건들을 서로 이어주는 동기나 연결성은 쉽게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언뜻 개별적으로 보이는 각각의 사건과 선밍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어떤 것은 거미줄처럼 매우 가늘고, 어떤 것은 동아줄처럼 매우 굵은 등의 서로 차이를 보일 수는 있어도 사건들의 중심에는 선밍이 있다는 것이다.

거의 이십 년에 가까운 길고도 긴 수사 과정을 거친 끝에 마침내 선밍을 죽인 살인자는 밝혀진다. 선밍의 죽음에 직 • 간접적으로 무수히 얽힌 복잡하기 그지없는 우여곡절은 사람의 다사다난하고 복잡한 삶을 축소해 놓은 듯 매우 압축적이며 조밀하다. 독자의 가슴을 찢어발길 수도 있는 선민의 죽음에 얽힌 우연적 요소는 잔인한 운명의 장난 때문에 불행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의 비극적인 삶을 대변해주는 듯하다. 등장인물 간에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처럼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와 은원관계는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머릿속과 마음속에서 쉽게 갈무리가 안 될 정도다. 마침내 선밍을 죽인 사람이 누구였는지 밝혀지는 순간, 그 운명의 잔인함과 불가해함에 할 말을 잃고, 그런 복잡한 난제를 소설로 풀어쓸 수 있었던 차이쥔(蔡駿)의 문학적 상상력과 감수성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만다.

주인을 서서히 갉아먹는 비밀

지고 보면 이렇게 삶을 복잡하고 어렵게 만드는 것은 사람은 누구나 한두 개씩 품고 사는 ‘비밀’이다. 선밍의 영혼이 씌운, 한마디로 귀신 들린 소년 쓰왕의 말처럼 누군가는 그 비밀을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를 손에 넣고자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 비밀을 숨기려고 살인까지 저지르며 비밀을 알고 있는 자의 입을 막기도 한다. 물론 아름다운 비밀을 간직한 사람도 있겠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공개되는 순간 자신의 삶을 하루아침에 파멸시킬 수 있는 치명적이고 범죄적인 비밀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다. 이런 비밀은 그것이 누군가에게 약점으로 잡히는 순간 그 주인에게도 매우 치명적이기에 그것을 지키려는 사람의 수단과 방법도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람에게 가장 치명적인 수단은 바로 살인이다. 그래서 치명적인 비밀을 품는 등장인물들이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생사의 강』에서는 살인도 많이 일어난다.

치명적인 비밀을 품고 산다는 것은 자신의 몸속에 흰개미를 품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의 삶은 흰개미에 의해 서서히 갉아 먹힐 테고, 그래서 언젠가는 약간의 타격만으로 쉽게 허물어지게 된다. 그것은 운이 나쁘면 비극적인 죽음이 될 것이고, 운이 좋다면 절망과 좌절에 늪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서서히 세상으로부터 잊히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두 결과 다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겪고 싶지 않은 끔찍한 일이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것은 살면서 그런 치명적인 비밀을 절대로 만들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다. 그럴 땐 어찌해야 할까? 나라고 별수 있나? 나도 모르겠다.

마치면서...

이쥔(蔡駿)의 『생사의 강』은 지금까지 읽어본 추리 소설 중에서 가장 복잡한 사건 배경을 가진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일 것이다. 그 복잡성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 머릿속으로 작품을 정리하면서 음미하는 과정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지만, 한편으론 무상하고 기만적인 운명의 얄궂은 장난을 보는 것 같아 알싸한 슬픔에 젖게 한다. 아무튼, 데구루루 굴러가면서 저절로 풀어지기도 하는 실뭉치를 신기한 듯 따라가는 고양이처럼 문장이 풀어내는 이야기를 본능적으로 따라가지 않고는 못 배기는 소설이다. 굴러가던 실뭉치가 고르지 못한 바닥 때문에 요리 튀고 저리 튈 때마다 고양이가 춤을 추는 것처럼 독자도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변화무쌍한 이야기 전개에 따라 감정이 요동치는 짜릿함을 맛볼 수 있으리라.

마지막으로 현대 중국 소설을 읽다 보면 생소하면서도 어딘지 낯익은 과거를 보는 듯한 이채로운 도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인데, 2000년대 초에 우체국에서 아직도 주판을 사용하는 것과 자가용 불법 택시, 중학교 근처에 생뚱맞게 자리한 고급 술집은 꼭 우리의 멀지 않은 과거를 보는 것 같다. 반면에,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는데) 중국에는 크리스마스 휴일이 없다는 사실과 고등학교 1학년 첫 어문 수업(우리나라로 따지면 국어?)에 마오쩌둥의 글을 배운다는 점은 역시 혁명으로 탄생한 공산주의 국가라는 특색을 드러내는 것 같아 이색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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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26일 일요일

[책 리뷰] '나는 우울하다. 고로 존재한다', 우울증의 모든 것! ~ 한낮의 우울(앤드류 솔로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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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울하다. 고로 존재한다’, 우울증의 모든 것!

Original Title: The Noonday Demon: An Atlas of Depression by Andrew Solomon
내가 “한낮의 악마” 〔이 책의 원제 ‘"Noonday Demon ”〕 를 제목으로 택한 것도 우울증의 의미를 정확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한낮의 악마” 가 지닌 이미지는 우울증 환자를 괴롭히는 끔찍한 침입의 느낌을 상상할 수 있게 해 준다. 우울증은 뻔뻔스러운 면이 있다. 대부분의 악마들은(대부분의 고뇌들은) 밤의 어둠을 틈타서 찾아들며 그것들을 분명하게 보는 것은 곧 그것들을 쳐부수는 것이다. 그러나 우울증은 눈 부신 햇살 아래 당당하게 서 있으며 우리가 똑바로 보아도 끄떡도 하지 않는다. 그것의 모든 이유들을 알아도 무지한 것처럼 고통받는다. 그런 정신 상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한낮의 우울』, p434)

만약 우울증을 느낄 수 있다면 이런 느낌?

는 한낮에 내리쬐는 따스한 햇볕 속을 한 줌의 먼지처럼 하릴없이 부유하지만, 태초부터 존재해온 그 따뜻함을 느끼지 못한다. 모든 감각기관이 대동단결하여 태업을 벌이는 듯 따스함도 차가움도 느낄 수가 없다. 감각이 마비되니 감각을 정교하게 가다듬어 내 마음의 상황을 대변해야 할 감정도 사라진다. 감정이 사라지니 감정을 더더욱 정교하게 가다듬고 그 지속성으로 나의 존재감을 드러내야 할 기분도 사라졌다. 나의 모든 활동과 모든 감정이 밝혀질 수 없는 어둠과 깨지 않는 잠 속으로 무겁게 가라앉는 것 같다. 블랙홀처럼 짙은 어둠은 나의 눈을 멀게 하고, 우주의 심연처럼 깊은 잠은 나의 귀를 먹게 한다. 끔찍하고 저주스러운 침묵만이 나의 무감각을 보란 듯이 희롱하고, 오장육부를 쥐어짜며 겨우 내지르는 나의 외마디 외침마저 주변을 짓누르는 정적에 압도당한다. 오늘의 동면이 영원히 지속할 것 같은 불안감은 내일은 좀 나아질 거라는 한 가닥 희망조차 물거품으로 만들며 미래를 삼켜버린다. 지금의 동면이 내일도, 모레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될 것이라면 삶의 의미는 완전히 소멸하고 그럼으로써 살아갈 이유도 소멸한다. 내 영혼에서 모든 색깔이 사라지고 내가 사랑했던 나도 사라지고 그저 인형처럼 껍데기만 남은, 몇 주 전에 죽었는데 아직 시체가 발견되지 않은 듯한 느낌. 우울증이란 이런 아무런 느낌도 감각도 없는 무력감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우울하다. 고로 존재한다’

‘합리(Rational)’와 ‘이성(Reason)’의 대가(大家) 데카르트(René Descartes)는 말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하지만, 대량 학살, 세계 대전, 혁명, 제국주의 등 피비린내 나는 20세기 역사가 휘몰아친 광풍에 어쩔 수 없이 휩쓸렸던 불행한 인민들은 ‘나는 고통스럽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하며 몸소 체험한 실존주의적 성찰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듯싶다. 반면에 신통한 진통제들이 범람하는 덕분에 육체적 고통에서 다소 해방되고, 이기심과 탐욕이 나은 얼마간의 죄책감과 양심을 짓누르는 중압감을 개인과 사회에 만연한 도덕적 타락으로 덜어낼 수 있었던 현대인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우울하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우울증 자가 진단 테스트’를 해보니 정상이지만 가끔 우울할 수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또한, 같은 사이트의 조울증 테스트는 통과했지만, 공황장애 테스트는 12점으로 공황장애가 의심된다는 결과를 얻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겉으로는 그럭저럭 괜찮게 보이는 나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현대인이 겪는 비밀스러운 유행병인 우울증이 주는 서글프고 무력한 존재감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 같다. 이제는 나도 가끔은 우울하기 때문에 가끔은 존재한다고 의기소침하게 말할 수가 있으리라.

그대여, 더는 ‘나’와 함께 있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지 마라!

전적으로 큰 문제가 없다면, 우울증을 일으키는 원인 중 가장 으뜸은 스트레스다. 현대인이 받는 (가사노동, 장거리 이동 등) 직접적인 육체적 스트레스는 물질적 풍요와 기술의 발달로 과거보다 상당량 줄었다. 하지만, 산업화한 국가에서 우울증 환자와 자살률이 꾸준히 증가 추세를 보인다는 것은 현대인이 그 어느 때보다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그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정신적 스트레스가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같은 정신질환뿐만 아니라 암 같은 육체적 질병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현대인은 과거보다 더 피곤하고 힘들고 고달픈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산업 시대 이후 우울증 환자가 꾸준히 증가한 가장 큰 원인은 앞에서 말한 대로 스트레스라고 볼 수 있지만, 우울증을 바라보는 개인과 사회의 시선이 변화했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도덕적 타락과 나약함의 표시로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었던 우울증이 뇌과학의 진보, - 환자의 나약한 의지를 탓해야 할 것이 아니라 암이나 당뇨병처럼 의학적 치료를 받아야 할 질병이라는 - 인식의 변화, 그리고 이러한 모든 변화에 맞물려 부단한 발전을 거듭해온 약물치료제의 기적 같은 효능으로 그동안 불가사의한 사회적 압력에 눌려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혼자 집안에 처박혀 끙끙 앓으며 인고의 세월을 보내던 은둔형 환자들을 병원으로 불러낼 수 있었다. 예전에는 환자로 취급받지 못했던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이 개인과 사회가 우울증을 바라보는 이해와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바람에 이제는 병원에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는 어엿한 환자가 되었다.

이런 변화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우울증에 대해 밝히기를 꺼린다. 그것은 자신이 어딘가 모자르고 비정상적이며 의자가 박약하다고 시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불합리한 망상 때문이다. 한편으론 여전히 많은 사람이 자신이 겪는 극심한 심리적, 정신적 고통과 무기력을 치료해야 할 병으로 인식하지 못한 채 뼈를 깎는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울증이 사회에 만연해 있음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사람들은 더더욱 우울증에 대해 밝히기를 꺼린다. 이러한 악순환은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더욱 고립되게 만들며 우울증 통계의 정확성을 떨어트리고 진실을 호도하게 한다. 이런 점 때문에 우리는 결코 우리가 사는 사회에 우울증 환자가 얼마나 되는데 정확하게 알 수는 없겠지만, 병원에서 우울증 치료를 받는 환자 수의 증가만으로도 우울증이 꾸준한 증가 추세를 보인다는 것을 깨닫기에는 충분하다. 우울증은 수치스러운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암이나 심장병처럼 꾸준히 치료받아야 할 질병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조현병의 증세 중 하나가 우울증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우울증 환자는 가족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와 국가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우울증 증가는 현대성의 결과?

자 앤드류 솔로몬(Andrew Solomon)은 『한낮의 우울(The Noonday Demon: An Atlas of Depression)』에서 우울증 환자의 증가는 두말할 필요 없이 현대성의 결과라고 말한다. 산업 시대 이전에도 우울증 환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작금의 우울증 환자가 집값이 오르고 전세금이 오르는 것처럼 꾸준히 증가 추세의 그래프를 그리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무엇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것일까? 무엇이 우리를 외롭게 만드는 것일까? 무엇이 우리를 슬프게 만드는 것일까? 유전, 환경, 스트레스, 성격 등 우울증의 발병 원인이 너무나 다양하고, 또한 여러 원인이 복잡하게 서로 얽히고설킨 경우가 많아 현대 과학도 꼭 집어 밝혀내기가 어렵다. 하지만, 솔로몬의 지적처럼 현대성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솔로몬은 현대의 지나치게 빠른 삶의 속도, 기술 혁신이 가져온 혼돈, 사람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소외감, 전통적인 가족구조의 붕괴, 풍토병이 되다시피 한 외로움, - 종교적, 도덕적, 정치적, 사회적 분야를 총망라하여 과거에 인간들에게 삶의 의미와 방향성을 제시했던 - 믿음 체계의 와해는 파국적이라고 진단한다. 20여 년간 연쇄 폭탄 테러로 미국을 공포에 떨게 한 극단적인 문명 혐오론자 유니바머(Unabomber, 본명은 시어도어 존 카진스키 Theodore John Kaczynski)는 사회가 사람들에게 지독하게 불행한 상황을 강요하면서 – 마치 병 주고 약 주듯 - 그런 느낌을 제거하는 약을 준다고 비난했다. 정보의 홍수는 필연적으로 막상 자신을 위해 무엇을 선택할 때가 되면 (한 사람이 세상 모든 정보를 다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정보의 부재를 불러왔고, 이런 모순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대인은 선택하려면 그것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함으로써 지독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또한, 솔로몬은 선택 범위가 넓어진 것과 지나친 자유가 결국에는 모두를 압박하고 불안감에 떨게 하는 웃지 못할 결과를 가져왔다고 설명한다.

말 그대로 우울증의 모든 것을 담은 책

드류 솔로몬(Andrew Solomon)의 『한낮의 우울(The Noonday Demon: An Atlas of Depression)』은 자기 고백적 성격이 짙은 우울증 체험담이자 - 우울증과 관련된 - 역사, 문화, 정치, 의학, 진화, 사회 등 우울증의 모든 것을 담은 역작이다. 책 끝의 ‘참고 문헌’의 방대한 분량만 봐도 짐작할 수 있듯 그는 우울증에 대해 자신이 찾을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조사했다. 그는 많은 우울증 환자들과 인터뷰했으며, 그 과정은 건조한 일회성 만남이 아니라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친구로서 우정과 사랑을 나누는 뜻깊은 시간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가능한 모든 우울증 치료법들을 시도해 보았다. 심지어 그는 민간에서 행해지는 주술적인 정신병 치료 의식인 은두프(ndeup)를 받고자 세네갈까지 날아가 막 도살한 숫양의 따뜻한 피로 범벅이 되기도 했다. 이 책을 집필하기까지 세 번의 우울증 삽화(에피소드)를 겪은 그는 여전히 우울증약을 복용 중이다. 그는 악몽과 지옥을 합친 고통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은 최악의 상황에 다시는 빠지지 않고자 평생 약을 먹을 생각임을 당당하게 밝히는 진짜 우울증 환자이다.

앤드류 솔로몬은 언제 어느 순간에 닥칠지 모르는 우울증 삽화를 걱정해야 하는, 이 책에 소개된 수많은 우울증 환자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처지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그동안 우울증 때문에 겪은 고통스러운 시간과 언제 닥칠지 모르는 우울증을 대비해야 하는 걱정과 두려움으로 잠식당한 시간이 마냥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그가 역작 『한낮의 우울』을 집필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피눈물 나는 투병 생활 끝에 우울증으로부터 독특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우울증 환자는 진실을 더 날카롭게 직시한다고 말했듯, 이 책에는 우울증으로 기나긴 투병 생활을 겪은 사람만이 묘사할 수 있는, 정신병자 특유의 예리한 관찰력과 번개처럼 번득이는 지혜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우울증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이자 우울증의 암흑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이해를 밝혀주고 인식을 넓혀주는 등대다. 만약 비인간적이고 몰인정한 현대성이 우울증을 확산시키는 주범이라면,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그 누구도 우울증의 음울한 마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면, 우울증 만물 박사인 이 책의 가치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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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19일 일요일

[책 리뷰] 생명과 죽음을 관장하는 원소계의 야누스 ~ 산소(닉 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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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죽음을 관장하는 원소계의 야누스

Original Title: Oxygen: The Molecule That Made the World by Nick Lane
장수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는 것이라는 점이다. 앞서도 보았듯이, 미토콘드리아는 난자로만 전해지며 따라서 미토콘드리아 유전자 열세 개도 모두 어머니한테서 물려받는다. 만일 이 유전자들이 정말로 수명에 영향을 미친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머니한테서 물려받을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우리는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의 수명을 따라가게 된다. (『산소(OXYGEN)』, p455)

노화와 죽음을 불러들이는 주범, 산소

람을 포함하여 지구상에 존재하는 많은 동물이 산소(酸素, oxygen) 없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확고부동한 사실이다. 그런데 생명의 원동력으로 알려진 산소가 노화와 죽음을 불러들이는 주범이라면 당신은 믿을 수 있겠는가? 사람의 세포는 산소 덕분에 숨을 쉬고 에너지를 얻고 있지만, 호흡 과정에서 생기는 자유라디칼(free radical) 때문에 - 산소가 철을 부식시키는 것처럼 - 세포는 녹슬고 있다. 세포는 호흡과 동시에 산소의 강력한 산화 작용으로 서서히 노화되어 가는 것이다. 우리는 산소에서 생명력을 얻으며 산소와 함께 진화했다는 사실 때문에 산소가 우리에게 어떠한 해를 끼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것도 사람에 따라선 몸서리치도록 두렵고 마냥 미루고만 싶은 노화의 주범이라니, 어디 될법한 말인가.

사람이 산소에 적응하도록 진화됐다는 것과 다른 포유류에 비해 비교적 긴 수명을 가졌다는 것, 그럼으로써 지금까지 (리처드 도킨스 Richard Dawkins의 말을 빌리면)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의 운반체 노릇을 성공적으로 해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종족의 번식’을 최우선으로 삼는 유구한 진화사에서 다른 동물과는 달리 그 이상의 뭔가를 더 갈망하고 욕구하는 사람에겐 100세도 짧게 느껴진다. 그뿐만 아니라 죽음과 소외, 질병을 예고하는 노화는 피할 수 없는 현실임에도 인류는 지금까지 (비도덕적이고 악랄한 방법을 포함하여) 온갖 수단으로 노화와 죽음에 대항해 왔다. 현대 의학은 인간의 한계 수명을 115세로 가정하고 있지만, 알다시피 대부분 사람은 100세는커녕 90세도 넘기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살아갈 에너지를 공급하는 산소가 한편으로는 우리를 곱게 늙도록 가만 놔두지 않기 때문이다. 산소는 생명과 죽음을 관장하는 원소계의 야누스 같은 존재다.

사람의 몸도 산소가 독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소가 독성이라는 사실은 사람의 신체 구성에서도 나타난다. 사람의 체액 구성이 조상인 단세포 생물들이 예전에 살았던 바닷물과 똑같은 것처럼 사람 몸의 산소 농도는 호흡효소가 처음 생겼을 당시의 산소 농도(대기 중 산소 압력의 0.3% 미만)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은 몸 안팎의 산소 농도 차이로 말미암은 부담이나 부작용을 처리하고자 다양한 방법으로 항산화제 평형을 유지하는 쪽으로 진화해 왔다. 그러나 그 평형이 언제까지나 지속하는 것은 아니다(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영원한 젊음을 얻게 될 것이다). 평형은 개체가 번식이 끝나는 시기를 지나면서 서서히 깨지는데,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노화 현상으로 나타난다. 번식을 마친 개체는 자신의 소임(유전자를 후세에 전달하는 것)을 다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선택 압력이 낮아진다. 그것은 자유라디칼로 말미암은 세포와 유전자 손상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면, 적당한 시기에 번식을 통해 건강한 유전자를 남기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진화상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화는 한 개체의 일생 중에서 비교적 뒤늦게 찾아온다. 만약 번식을 마치기도 전에 노화가 먼저 오는 종이 있다면, 그 종은 자연 선택으로 일찌감치 도태되었을 것이다. 노화나 노인병이 인생 말기에 찾아오는 것에는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비록 산소가 야누스처럼 두 얼굴을 가졌지만, 진화를 산소라는 프리즘을 통해 들여다보면 우리는 산소를 미워하기보다는 마땅히 감사하는 마음을 더 가져야 할 것 같다. 바다와 토양이 생명이 자랄 수 있는 든든한 기반을 제공했다면, 산소는 생명력이라는 오묘한 에너지를 생산하는 엔진이다. 지구상의 생물 다양성은 산소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생물 다양성이 활짝 만개한 덕분에 그 틈새를 통해서 인류가 진화할 수 있었는데, 만약 생물 다양성을 이루어낼 수 없었다면 지구는 일찌감치 화성처럼 불모의 땅이 되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산소(OXYGEN)』의 저자 닉 레인(Nick Lane)은 산소가 있었기에 생물 다양성뿐만 아니라 유성생식, 성별, 인간의 의식 자체가 존재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한마디로 지구 생명의 역사는 산소의 역사와 길을 같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흔히 말하는 장수 비법, 다 과학적 근거가 있다?

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35억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산소의 기원을 밝히는 일보다는 앞서 언급한 대로 산소와 노화의 관계를 밝히는 일에 더 관심이 많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대부분이 아직 가설 수준에 머물러 있고, 실험적으로 증명된 사실은 많지 않지만, 닉 레인의 『산소(OXYGEN)』는 노화가 진행되는 전반적인 흐름이나 원인에 대해 대략적인 개념을 잡을 수 있는 (TV 속 쇼닥터의 약장수 같은 광고성 궤변과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과학적 지식과 조언으로 충만한 책이다. 지질학, 고생물학, 화학, 의학, 생물학, 유전학 등 서로 다른 분야를 넘나들면서 이해의 연결고리를 제공하는 다양한 학문적 성과, 실험적 증거, 논리적 가설을 바탕으로 충분히 설득력 있게, 그리고 약장수처럼 장황하게 밀어붙이지 않는 닉 레인의 친절한 설명은 다소 깊이가 있는 이 책을 읽는 부담감을 어느 정도 덜어줄 뿐만 아니라 독자가 자연스럽게 흐름을 따라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주인공이 ‘산소’이듯 때때로 설명이나 가설은 세포, 세균, 유전자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화학적 분석과 함께 진행되기 때문에 오래전에 학교를 졸업한 (나 같은) 독자에겐 다소 난감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으나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을 조망하는 데 큰 무리는 없다. 그리고 이 책 막바지에 등장하는 ‘미토콘드리아 노화’ 이론은 닉 레인의 또 다른 책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책 리뷰] 세상을 지배할 단 한 번의 진화 ~ 미토콘드리아(닉 레인)」)에서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진다.

아직 현대 의학 기술로는 노화와 관련된 유전자들을 직접 조작하여 수명을 연장시킬 수는 없지만, 노화를 서서히 진행시킬 수 있는 방법은 분명히 존재하며 그것은 장수하는 사람들의 생활 습관에서도 잘 나타난다. 사람이 장수하려면 음식을 적게 먹고 - 그중에서도 채소와 과일을 풍부히 섭취하고 - 적당히 운동하고, 스트레스를 적게 받는 낙관적인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흔히 말한다. 예전에는 그것이 그저 교과서적인 공허한 말로만 들렸다면, 『산소(OXYGEN)』를 제대로 읽었다면 왜 그러한 생활 태도가 젊음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노화를 늦추는데 어떻게,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되는지 세포적인 수준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으면 음식을 적게 먹으면 대사 스트레스를 낮춰 미토콘드리아에서 자유라디칼이 새어 나와 건강한 세포를 공격하는 일을 줄일 수 있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덤으로 이 책을 읽고 나면 적게나마 돈도 절약할 수 있다. 왜냐하면, 널리 선전하는 항산화제 건강보조식품들이 실제로는 노화 예방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과학적 근거도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놀이터에 흙이 사라진 오늘날,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은 지나치게 깨끗한 환경에서 성장하는 것이 면역력을 약화시켜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설명은 반드시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마치면서...

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계에 의존하면서까지 의식 없는 삶을 연장하는 것을 생명에 대한 모욕으로 생각하는 나 같은 사람에겐) 말년을 얼마만큼 건강하게 보낼 수 있느냐는 더더욱 중요하다. 그러려면 흔히 비꼬면서 말하기도 하는, 이른바 ‘바른 생활 태도’가 필요하다. 음식을 적게 먹고, 채소와 과일을 포함하여 골고루 먹고, 적당히 운동하고, 스트레스를 피하고, 삶의 속도를 느리게 유지한다. 이것이 신체의 노화를 예방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면, 사람의 정신 건강과 깊은 관련이 있는 뇌의 노화를 – 치매나 알츠하이머 등 - 예방하려면 독서를 통해 꾸준히 뇌를 운동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운동으로 근육을 단련하듯 독서로 뇌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내 믿음에서 착안한 의견이다.

이 모든 일은 사람의 육체를 구성하는 세포가 산소로부터 산화되는 것을 조금이라도 늦추려는 최선이자 최소한의 시도다. 『산소(OXYGEN)』를 읽고 나면 예전에는 의사들이나 장수하는 사람들이 으레 내뱉는 말로만 들렸던, 그래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 진부한 조언들이 진지하다 못해 심각하게 들린다. 먹는 것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고, 자칫 잘못하면 운동에 대한 강박관념에도 시달릴 수 있다. 그럼에도 건강한 삶과 노화를 조금이라도 늦추는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원초적인 희망이라는 점에서 닉 레인은 많은 것을 알려준다. 노화를 인문학적으로 다룬 다른 책들과는 달리 노화의 주범인 ‘산소’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노화를 직설적이자 직접적으로 다룬 이 책은 단지 과학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생활 방식을 어떻게 가져야 할지에 대한 조언도 은근슬쩍 내비친다. 산소와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겐 ‘산소’라는 분자를 통해 생명의 비밀을 캐내려는 이 책은 사람의 삶과 죽음의 언저리를 둘러싼 베일을 걷어내려는 야심 찬 시도다. 생명의 기원과 진화, 우리의 삶과 죽음에는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 같은 동반자 ‘산소’가 늘 함께하고 있다.

참고로 이 책을 읽었다면 다음 책으로는 닉 레인의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와 피터 워드(Peter Ward)의 『진화의 키 산소 농도(Out of thin air)』를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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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12일 일요일

[책 리뷰] 먼뎃불빛 같은 추억 속에 잠긴 비운의 사랑 ~ 백발마녀전(양우생)

White Haired Witch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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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뎃불빛 같은 추억 속에 잠긴 비운의 사랑

Original Title: 白髮魔女傳 by 梁羽生
옥나찰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절세의 용모를 지니고 태어난 몸이었다. 그리고 자기의 미모를 가장 사랑하고 아꼈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소녀가 백발의 여인으로 변하고 만 것이었다. 얼굴이 쭈글쭈글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백발 노파가 된 것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이 당한 괴로움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그저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다. (백발마녀전(白髮魔女傳) 중에서)

오래간만에 무협 소설을 찾은 변변치 않은 이유

릿속이 실타래가 엉킨 것처럼 잡다한 상념과 고민으로 복잡하게 꼬여 있을 때,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을 때, 지속해서 책을 읽는다는 것에 회의를 느끼거나 독서 자체에 염증을 느낄 때, 이럴 때 나는 무협 소설을 찾는다. 재충전 안 되는 일회용 건전지가 하릴없이 방전되는 것처럼 남은 삶의 하루하루가 무기력하게 소모되는 나의 삶에서 번뇌와 자책감에 빠지는 것마저 때론 사치로 느껴질 때, 무협 소설은 이 모든 상념과 번뇌에서 잠시라도 벗어나는 해방감을 만끽하게 해준다. 삶의 중압감으로 빈대떡처럼 납작하게 짓눌려 있었던 꿈을 풍선처럼 다시 부풀어 오르게 하고, 냉혹한 현실주의로 기가 팍 죽어 있던 공상의 금빛 날개를 다시금 펼치게 하는 무림의 세계는 엄연히 비현실적이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매혹적이다. 마음과 머릿속에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던 번뇌의 실타래를 한올 한올 풀어주는 시원스럽고 통쾌한 무공 대결, 부족한 용기와 타고난 소심함으로 포효해내지 못했던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울분을 삭여주는 의협심이 활활 타오르는 크고 작은 영웅들의 이야기는 감개무량하다. 여기에 난독증으로 고생하는 사람, 책만 보면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사람, 아니면 나처럼 즐겨 책을 읽던 사람 등 책과 친하고 친하지 않고에 상관없이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든 이에게 폭풍 같은 흡입력을 발휘하는 조악하면서도 단순하고 명확하고 간결한 문체도 무겁고 심란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주는 데 한몫한다. 그렇다고 무협/판타지 소설이 독서 세계의 주요 장르가 되어서는 아니 되지만, 앞서 거론한 몇 가지 이유와 기타 이런저런 이유로 가끔은 기분 전환 삼아 빠져들 만하다. 그래서 찾은 작품이 영화로도 유명한 양우생(梁羽生)의 무협 소설 「백발마녀전(白髮魔女傳)」이다. 한국에서는 『여도 옥나찰(女盜 玉羅刹_』이란 제목으로 소개되었지만, 중국어 위키백과를 찾아보니 ‘백발마녀전’이 원제다.

내가 만난 최고의 女고수이자 최고의 女영웅

금까지 내가 읽어본 무협 소설이라 해봤자 김용(金庸)과 고룡(古龍)의 몇몇 작품들로 한정되지만, 사실 무협 소설 중에서 굳이 찾아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내 생각으론 무협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김용을 제외하면, 고룡, 양우생, 와룡생(臥龍生) 정도 언급하고 싶을 뿐이다. 보통 무협 소설 한 작품의 분량이 일반 소설보다 훨씬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앞에 거론한 작가들의 작품을 고루고루 돌려 읽는다면 평생 우려먹을 수 있으므로 기타 무협 소설을 읽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 낭비다.

그런데 지금까지 읽어본 무협 소설의 주인공들은 전부 다 남자 영웅이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女영웅을, 그것도 정파와 대립하는 녹림에 몸을 담은 女고수를 만났다. 무림인들은 그녀가 없는 곳에서는 그녀를 옥나찰(玉羅刹)이라 부르지만, 그녀의 본명은 연예상(練霓霜)이다. ‘나찰’은 사람을 잡아먹는 귀신을 뜻하는데 이 앞에 아름다움을 뜻하는 구슬 ‘옥’자가 붙었으니,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박거리지 않는 절세미녀를 이처럼 잘 표현한 별호는 없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보통의 무협 소설에서 남자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미녀를 빼놓을 수 없듯, 옥나찰 역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난다. 다만, 다른 무협지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강호를 유람하다 인연을 맺게 된 여러 명의 미녀 사이에서 애증의 굴레에 빠지고, 사랑의 달콤한 갈등을 거듭하는 것에 반해 옥나찰은 단 한 명의 남자와 처음이자 마지막인 운명적 사랑에 빠진다. 매초 악랄한 초식을 구사하면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독한 마음의 소유자이자, 무공이 고강한 만큼이나 호승심도 강한 그녀의 아찔한 애정의 과녁이 된 행운(?)의 남자는 장차 무당파의 장문인이 될 장문제자 탁일항(卓一航)이다./p>

먼뎃불빛 같은 추억으로 남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자는 녹림을 주름잡는 대도 중의 대도, 남자는 강호에서 소림사와 함께 정파를 대표하는 무당파의 장문제자. 두 사람의 배경부터 흑과 백의 구별이 선명하지만, 두 사람의 성격 차이도 그에 못지않다. 옥나찰은 자신의 무공과 미모에 대하여 자부심으로 가득 찬만큼 어떤 상황에서도 안하무인 격으로 거칠 것 없이 행동한다. 또한, 그녀는 심보가 악독하기로 정평이 나 있고, 그녀의 하얀 섬섬옥수가 내지르는 수단 하나하나가 매섭기 그지없지만, 흑백을 가릴 줄 알고 시비를 분간할 줄 아는 호탕한 협녀다. 반면에 탁일항은 무협 소설에서는 보기 드물게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옥나찰과의 애정 문제에서는 매사 우유부단한 태도를 선보이며 영 시원스럽지가 못하다. 한마디로 시종일관 답답한 모습을 보이면서 독자의 짜증을 부채질한다. 그뿐만 아니라 옥나찰의 걸출한 무공과 눈부신 외모에 비하면 탁일항의 무공은 그저 그렇고 외모는 고만고만하다. 한마디로 무협 소설의 남자 주인공치곤 매우 변변치 못한 인물이 바로 탁일항이다. 이런 두 사람의 대비되는 배경과 성격에서 짐작해 볼 수 있듯 두 사람의 줄타기 같았던 아슬아슬한 사랑은 결국 가슴에 사뭇 치는 처연하고 쓸쓸한 감정만 남긴 채 미완성으로 마무리된다.

옥나찰이 처음으로 탁일항을 만나게 되는 철이 없을 무렵, 그녀는 탁일항과 결합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어려움도 무릅쓸 각오가 되어 있었고, 두 사람 사이를 방해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지위나 무공의 고하 따위는 상관없었다. 그녀에겐 두 사람의 앞길을 훼방 놓는 사람은 모두가 적이었다. 그것은 세상 규칙 따윈 거들떠보지도 않는 호방하고 방종한 그녀의 성격과도 일치했다. 그렇게 그녀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일편단심으로 두 사람의 인연을 완성하려고 했지만, 관습과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는 소심하고 답답한 탁일항의 모습에서 사랑을 확신하지 못한 옥나찰은 좌절에 좌절을 거듭한 나머지 꼭 탁일항과 함께 사는 것만이 최선은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때는 이미 사랑의 번뇌가 가져다준 상심과 피로, 사랑과 미움의 반복이라는 시련이 극에 달한 나머지 그녀의 머리가 허옇게 세어버렸을 때이기도 하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자 그녀는 두 사람의 사랑을 하늘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여겼던 것일까? 탁일항의 모든 것을 희생시키고 자기 혼자만 그를 독차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차라리 한 가닥 애련한 추억을 남기고 그것을 기억하며 살기로 마음먹는다. 아쉽게도 두 사람의 사랑은 밤하늘을 수놓은 별처럼 서로 마주 보면서도 결코 가까이 다가설 수 없는 아득하고 아련한 먼뎃불빛 같은 추억으로 남게 되고,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애틋함과 쓸쓸함은 예리한 면도날이 오장육부를 스쳐 가듯 가슴 한구석을 아려 온다.

마치면서 무협 소설에 대해 한 마디

협 소설에서 무지개처럼 화려하고 번개처럼 날렵하며 태풍처럼 웅장한 무공 대결만큼이나 볼만한 것이 남녀 주인공의 기구한 사랑의 운명이다. 하지만, 보통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는 우여곡절을 거듭하고 다사다난한 역정을 거치면서도 끝내는 해피엔딩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또한, 그런 해피엔딩이 가져다주는 냉장고에서 막 꺼낸 사이다 같은 청량감이 텁텁한 마음을 시원하게 적셔주는 통쾌하고 개운한 맛에 보는 것이 또 무협 소설 아닌가? 하지만,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두 사람의 사랑이 태우다 남긴 시커먼 숯등걸 조각들을 보면, 『백발마녀전』 의 서글픈 결말은 울적하고 소침한 기분을 풀고자 이 소설을 탐독한 나에게 불난 데 오히려 부채질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옥나찰과 함께 한 절대 짧지 않았던 그 시간만큼은 온갖 잡다한 세상만사와 시름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홀가분한 시간이었다고 감히 말하 수 있으리라.

마지막으로 몇 마디 더 한다면 무척이나 긴 내용에 비해 읽고 나면 남는 것이 별로 없는 것이 무협 소설이다. 이것은 무협 소설만이 가지는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다. 아무 생각, 아무 걱정 없이 텅 빈 마음과 텅 빈 정신으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지만, 긴 시간을 할애하고도 영양가 없는 독서를 했다는 자괴감이 들 수도 있다는 점에서 단점이다. 하지만, 독서라는 것이 지식이나 지혜, 하다못해 감수성을 자극한다거나 감개무량한 뭔가를 얻고자 하는 목적으로 행해지는 것만은 아니다. 중과부적으로 우리를 압박해오는 지루한 시간의 중압감과 고리타분한 일상의 막막함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시간과 삶의 굴레에서 잠시 비껴갈 수 있는 짬을 얻어낼 수 있는 취미 중의 하나가 바로 독서다. 그래서 독서는 고상하면서도 천박한 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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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5일 일요일

[책 리뷰] ‘동화’라는 포장지에 싸인 ‘불량 식품’ 같은 ~ 암흑 동화(오츠이치)

Ankoku Dowa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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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라는 포장지에 싸인 ‘불량 식품’ 같은 이야기

Original Title: 暗黑童話 by Otsuichi
“그래, 여기 온 인간은 모두 수술을 받아. 행복한 수술이야. 그리고 갇히는 거야. 신기하게도 그것은 고통이 아니야.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모든 것에서 해방된 기분이 돼.” (『암흑 동화』, P348)

눈을 잃은 소녀, 그리고 눈이 기억하는 것

‘당신은 세포 기억설(Cellular Memory)을 믿습니까?’, 대뜸 이런 식으로 질문을 들이대니까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나 붙잡은 다음 다짜고짜 ‘도를 믿습니까?’라고 물고 늘어지던 사람들이 생각난다. 내 질문 역시 그런 뜬금없는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세포 기억설은 아직 과학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가설에 불과함에도 놀라운 실제 사례들이 존재하는 미지의 세계다. 태국 공포 영화 「디 아이(見鬼: The Eye, 2002」에서는 각막이식수술로 19년 만에 처음으로 눈을 뜬 주인공이 거리를 떠도는 귀신과 죽음의 그림자를 보게 된다.

그렇다면 이런 이야기도 가능할까? 사람이 살아생전에 보게 되는 모든 광경은 오직 눈을 통해서만 뇌로 흘러 들어간다. 무엇을 보든 ‘본다는’ 것의 시작은 언제나 눈이다. 쉽게 말해 눈이 없거나 손상되면 사람은 주변을 볼 수 없다. 빛과 사람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가 눈이다. 그런데 만약 눈이 단순히 영상을 뇌로 전달해주는 도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기억처럼 영상을 저장할 수 있다고 한다면 다른 이의 안구를 기증받은 사람에겐 어떤 일이 일어날까?

두 눈을 잃은 소녀는 까마귀가 선물해주는 다른 사람의 눈들을 통해 암흑으로 채워졌던 무서운 꿈 대신 눈 주인이 살아생전에 보았던 생생한 현실을 꿈속에서 본다. 한쪽 눈을 잃은 충격으로 과거의 모든 기억을 잃은 어느 한 소녀는 기증받은 눈의 주인이 보았던 과거를 자신의 텅 빈 기억 속으로 채워 넣는다. 두 이야기 모두 누군가에는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오츠이치(Otsuichi)의 『암흑동화(暗黑童話, Ankoku Dowa)』에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 까마귀가 가져다준 부드럽고 촉촉한 둥근 눈을 해골처럼 텅 빈 동공에 끼워 넣으면 눈 주인이 보았던 세상을 꿈속에서 경험한다는 두 눈을 잃은 소녀와 안구 기증자가 살아생전에 본 것을 현실 속 환영을 통해 보게 된다는 소녀 나미의 이야기는 ‘동화’라는 제목에 걸맞은 환상적이며 어딘지 모르게 가슴 뭉클한 아름다운 이야기처럼 들린다.

암흑 속에 갇힌 잔혹한 동화

눈을 잃은 소녀는 자신에게 둥근 것을 성실하게 가져다주는 말하는 까마귀가 진짜 누구인 줄 몰랐다. 소녀는 자신에게 사라진 꿈과 색깔을 찾아준 부드럽고 촉촉한 둥근 것이 다른 사람의 눈인 줄 몰랐다. 소녀는 사람의 얼굴에서 방금 뽑아낸 것 같은 촉촉한 눈알이 까마귀가 다른 사람을 무자비하게 공격해서 얻게 된 것인 줄은 더더욱 몰랐다. 마지막으로 소녀는 꿈이 끝나는 마지막에 항상 나타나는 검은 괴물이 까마귀인 것을, 그리고 그 검은 짐승이 자신을 덮치는 모습이 사실은 까마귀가 눈의 주인을 공격해서 눈을 빼앗는 그 순간인 것을 몰랐다. 소녀는 자신이 다시 꿈을 꾸게 된 잔혹한 내력을 몰랐기 때문에 까마귀의 선물 덕분에 행복했고, 까마귀는 소녀가 자신이 준 선물 때문에 우울함과 암흑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기뻤다. 소녀가 전지전능한 신이나 줄 수 있을 법한 선물 덕분에 달콤한 꿈을 꾸며 행복에 젖어 있을 때 이처럼 잔혹한 내막이 소녀의 주위를 암흑처럼 드리우고 있었다. 소녀는 그 사실을 죽을 때까지도 몰랐기에 자신에게 일어난 앨리스가 방문한 이상한 나라에서나 있을법한 신비한 일을 동화 속 이야기처럼 마냥 행복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한편으론 까마귀는 이 모든 사실을 알았고 그것이 나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오직 소녀를 기쁘게 해주고자 하는 일념으로 다른 사람을 공격해서 눈을 빼앗았기 때문에 소녀가 겪은 동화 같은 이야기에 지워지지 않는 짙은 암흑을 남겨놓는다.

한편, 나미는 기증받은 왼쪽 눈이 현실이라는 스크린에 기증자의 과거를 영사기처럼 낱낱이 투영해주는 환영을 마치 불행한 사고로 잃어버린 자신의 기억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처럼 낱낱이 기록하다가 어느 날 기증자가 죽는 과정을 보게 된다. 하지만, 기증자의 죽음은 평범한 죽음이 아니었다. 기증자는 우연히 발견한 납치당한 소녀를 구하려다 납치범에게 들킨다. 그는 다급하게 납치범에게 벗어나려다 그만 달려오던 차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교통사고로 죽는다. 기증자가 본 실종된 소녀는 나미도 언젠가 뉴스에서 본 적이 있는 소녀였다. 사고로 기억을 잃어 텅 빈 과거를 가지게 된 나미는 메마른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기증자의 과거를 빠르게 흡수하면서 마치 자신이 기증자가 된 것 같은 착각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기증자의 예사롭지 않은 죽음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결국, 나미는 집을 나와 기증자가 살던 산골 마을로 무작정 길을 떠난다. 납치범을 잡아 기증자의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말이다.

사실 나미가 추적하는 납치범은 평범한 납치범이 아니다. 그는 어떤 생명체라도 손길만 닿으면 죽음과 고통, 생존의 족쇄에서 벗어난 현실과는 차원이 다른 평온을 느끼게 해주는 마법 같은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난도질 된 육체에 생명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간달프 같은 백색 마법사지만, 그는 악의도 살의도 없이 마주치는 사람들을 해부실의 실험용 시체처럼 팔다리를 절단하고 장기들을 뽑아내거나 마구 휘저어 놓는다는 점에서 순수한 악마다. 그의 잔인한 유흥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좀비가 마구 파헤친 것처럼 내장이 드러나고 팔다리가 잘려나가지만, 그의 신비한 힘 때문에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죽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현실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금지된 평온과 행복 같은 이상야릇한 도취감에 사로잡힌다. 그의 손이 미치는 곳이 곧 고통과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지만, 그의 손길이 닿은 인간의 육체는 이미 괴물 아닌 괴물로 변해버린다.

사고로 한쪽 눈도 잃고, 기억도 잃고, 과거도 잊고, 그뿐만 아니라 정체성까지 잃고 방황하던 소녀가 기증받은 눈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삶에 애착을 갖게 되면서 비로소 이전의 ‘나’와는 다른 길을 걷는 새로운 나를 발견해간다는 우울한 동화 같은 이야기에 기증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기괴한 힘을 가진 납치범이 끼어들면서 동화는 빛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암흑 속에 갇히게 된다.

‘동화’라는 포장지에 싸인 ‘불량 식품’ 같은 이야기

‘정말 지금까지 내가 본 모든 것들을 내 눈도 기억하고 있을까?’, 언젠가는 이 질문에 대한 과학적 진실이 명확하게 밝혀지겠지만, 지금은 불가사의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낭만적이고, 한편으로는 소름 끼치는 이야기로 들린다. 그래서 ‘눈의 기억’이란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오츠이치(Otsuichi)의 『암흑동화(Ankoku Dowa)』도 불가사의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낭만적이고, 한편으로는 소름 끼친다. 외르겐 브레케(Jorgen Brekke)의 『우아한 제국(Nadens Omkrets)』에 등장하는 연쇄살인범이 섬뜩한 예술적 광기를 번득이며 피해자의 피부를 벗겨 내듯 광기가 번득이는 창의성으로 동화가 품은 낭만과 아름다움을 벗겨 내 검붉은 징그러움을 드러내는 잔혹한 이야기는 악마적인 흥미로움과 구역질 나는 애잔함이 담겨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의 어둡고 자극적인 이야기를 싸고도는 섬뜩한 매력은 누군가에게는 불량 식품 같은 금단의 열매가 될 수도, 또 다는 누군가에는 게워내야 할 상한 음식이 될 수도 있다. 감히 추천하기에는 불편한 작품이지만, 감히 불량 식품의 맛이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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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27일 토요일

[책 리뷰] ‘디자인 원리’가 꿈꾸는 또 다른 미래 ~ 공유의 비극을 넘어(엘리너 오스트롬)

Governing the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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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원리’가 꿈꾸는 또 다른 미래

Original Title: Governing the Commons: The Evolution of Institutions for Collective Action by Elinor Ostrom
필자 주장의 핵심은 공유재의 딜레마라는 함정에 갇혀 자신들의 자원을 파괴해 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함정에서 성공적으로 빠져나오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공유의 비극을 넘어』, p53)

인간의 문제 해결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공유재의 비극’

간의 문제 해결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공유재의 비극’ 자세한 내용은 몰라도 ‘공유지(공유재)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이란 말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이 개념을 1968년 사이언스지 논문에 발표해 주목을 받았던 개럿 하딘(Garrett Hardin)은 ‘공유지의 비극’을 쉽게 설명하고자 ‘모두에게 열려 있는’ 목초지를 예로 들었다. 이 예에서는 목동들의 과잉 방목이 목초지의 황폐화를 불러와 결국 그들 모두가 파국적인 결말로 치닫게 된다고 예측한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과잉 방목할까? 목동 각자는 목초지에 풀어놓은 자신의 가축들로부터 직접적인 이익을 얻지만, 과잉 방목으로 말미암은 손실은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그 손실에 대한 부담도 그 일부만 짊어진다. 한 사람의 목동에게는 최선의 수익을 안겨준다는 점에서 그들의 개인적 선택은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는 비합리적인 결말에 이르게 된다는 역설을 개념화한 것이 바로 ‘공유지의 비극’이다 . 하딘의 모델은 흔히 죄수의 딜레마 게임으로 불리는 게임 이론으로 정형화되었고, 여러 사람에게 개별적 복지 추구 대신 집단적 복지를 추구하게 하는 일이 어렵다는 관점은 맨슈어 올슨(Mancur Olson)의 책 『집합 행동의 논리(The Logic of Collective Action)』(1965)에도 개진되어 있다.

이러한 개념을 기반으로 세워진 모델은 복잡한 것을 인위적으로 단순화시킴으로써 특정한 상황에 대해서만 분석과 예측할 수 있고, 불확실하고 복잡한 현실은 반영하지도 예측하지도 못해 실제적인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자들이 공유 자원 문제의 분석에 이용하고자 했던 개념들에는 인류의 문제 해결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선입관이 작용하고 있다. 하딘의 개념은 인간을 오로지 이기적이고, 경험으로부터 아무것도 학습하지 못하고, 오직 눈앞의 이익만 좇는 정형화된 틀에 묶어 두고 있다. 여기서 인간은 스스로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할 능력이 없고, 자발적으로 조직을 만들어 토착 환경에 적실한 제도를 디자인할 능력도 없다 . 오로지 정부라는 외부의 강력한 개입에 의해서면 공유 자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대부분의 공유재가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어촌, 농촌, 산촌 등에 산재해 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학자들이 교육이나 문화 수준이 도시보다 낮다는 이유로 지방 사람들의 문제 해결 능력을 평가절하하는 엘리트 의식도 다분히 느껴진다. 자신들의 게임 이론에서 전제한 인간처럼 고지식한 사회과학자들이 공유 자원 문제에서 선호하는 중앙집권적인 해결책은 명료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들이 제시한 해결책은 전지전능한 정부와 인격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완벽한 관리라는, 유토피아에서나 가능한 조건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공적인 공유 자원 관리를 위한 ‘디자인 원리’

2009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은 자신의 책 『공유의 비극을 넘어: 공유 자원 관리를 위한 제도의 진화(Governing the commons)』을 통해 현실은 그렇지 않음을 방증한다. 즉, 사회과학자들이 간과한 것처럼 인류의 문제 해결 능력은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 책은 공유 자원을 장기간에 걸쳐 성공적으로 관리한 집단을 제시하고 분석함으로써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제도의 디자인 원리(design principle)를 찾아 나선다 . 어떻게 디자인 원리가 자원 공유자의 행위 동기에 영향을 미쳐 공유 자원 체계 자체와 그 체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제도 모두가 오래 존속될 수 있었는지, 또한 그러한 제도 디자인 원리들이 사람들에게 어떠한 유인을 제공하여 공유 자원의 관리를 위해 지속적으로 시간과 노력을 들이도록 했는지를 밝힌다. 또한, 실패한 사례들에서 사용된 제도들과 성공한 사례들에서 사용된 제도들을 비교하고 분석함으로써 공유 자원을 활용 • 관리해 나갈 수 있는 개인들의 능력을 신장시키거나 가로막는 내외적 요인들도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다.

오스트롬이 실제 상황에서 작동하는 제도로부터 산출한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공유 자원 제도의 디자인 원리 8가지는 다음과 같다.

1. 명확하게 정의된 경계

2. 사용 및 제공 규칙의 현지 조건과의 부합성

3. 집합적 선택 장치

4. 감시 활동

5. 점증적 제재 조치

6. 갈등 해결 장치

7. 최소한의 자치 조직권 보장

8. 중층의 정합적 사업 단위(nested enterprises)

(『공유의 비극을 넘어』, p175)

공유 자원 사용자들이 자신들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례들에서는 앞에 제시된 8가지 디자인 원리 가운데 세 가지 이상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에서 오스트롬이 밝혀낸 디자인 원리는 현실적이고 경험적이며, 실제적인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하는데 매우 적실한 개념이다.

공유 자원 관리의 성공 여부와 외부 개입

통 사람들은 연안 어장, 지역 산림, 지하수, 목초지, 관개 시설 등의 공유재는 정부 같은 중앙집권적인 기구가 총괄해서 관리해야 자원의 낭비를 막고, 사익이 충돌하여 생기는 분쟁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나도 그런 선입관을 가진 사람 중 하나다. 하지만, 오스트롬이 제시한 사례에서 정부의 권위적인 개입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다. 캐나다의 뉴펀들랜드에서는 소규모의 현지 어부 집단이 그들 고유의 규칙을 디자인하고 유지해 올 수 있었지만, 중앙 정부 당국이 이들의 공유 자원 제도를 승인하지 않고 거부하는 바람에 ‘공유지의 비극’을 불러오는 결과를 만들었다. 대신 캐나다 정부는 지역 특성을 무시하고 전국적으로 통용되는 획일적 규제 방안을 강요함으로써 (이전에는 없었던) 문제들을 만들었다. 그렇다고 정부나 공공 기관의 개입이 언제나 문제 해결에 방해되는 것만은 아니다. 캘리포니아 남부 지하수 생산자들의 성공적인 사례는 지방 정부나 중앙 정부가 현지 사용자들의 효과적인 제도적 디자인 능력 제고를 돕는 여러 형태의 편의 장치를 마련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해나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한편, 실패 사례에서 성공 사례로 극적인 반전을 이루어낸 곳도 있었는데 바로 스리랑카의 갈오야(Gal Oya) 프로젝트다. 본래의 사업 계획안은 외부 규칙을 강제로 획일적으로 적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방침을 변경해 교육을 받은 ‘제도 조직자’를 투입해 농민들 스스로 기술과 문제 해결 능력을 계속 발전시켜 갈 수 있는 능력을 배양시키고, 농민들에게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자치 조직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농민들 스스로 이러한 제도가 지속하는 것에 대한 동기를 깨닫게 함으로써 성공적인 사례로 거듭날 수 있었다. 갈오야 프로젝트는 상호 불신과 적개심의 전통이 수세대에 걸쳐 재생산되어 온 경우라 할지라도, 외부 대행자의 도움으로 사용자들이 최적 이하의 결과를 가져오는 완고한 동기 유인을 극복해 나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 예시하는 소규모의 공공 자원 관리에 있어서 현지 역사나 문화, 기타 사정을 고려하지 않는 정부나 공공 기관 등 외부의 지배적이고 일률적인 개입은 상황을 악화시키지만, 공유 자원 사용자들의 자발적인 자치 제도를 지원하는 방식의 다층적인 개입은 거꾸로 상황을 개선해나가는 데 효과적임을 알 수 있다 .

마무리: 공유 자원을 바라보는 두 시선

리스토텔레스는 최대 다수가 공유하는 것에는 최소한의 배려만이 주어질 뿐이며, 모두 공익을 생각하기보다는 자기의 이익을 생각하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찌감치 인류의 이기적이고 근시안적인 성정에 일침을 가했던 것이다. 사회과학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을 때, 오스트롬은 자신만의 세밀하고 경험적인 연구 방법으로 지속가능한 공유 자원 관리의 가능성을 열었다 . 그녀는 성공적인 사례들에서 지속가능한 공유 자원 제도의 디자인 원리를 추려내었고, 그럼으로써 인류에게 불확실하고 복잡한 환경에서도 지속가능한 공유 자원 관리가 가능함을 일깨워주었다. 그것은 곧 그동안 공유 자원 관리에 회의적이었던 인류에게 새로운 희망을 선물한 것이나 다름없다. 앞으로 그녀가 개괄한 디자인 원리가 공유 자원 관리에 있어서 더욱더 많은 성공적인 사례들을 끌어낼 수 있다면 인류의 크나큰 짐 하나를 던 꼴이 될 것이다.

긴 책은 아니지만, 길게 느껴지는 책이 있는데, 바로 이런 학술적인 책들이 그러하다. ‘공유재의 비극’, ‘게임 이론’ 등 말로만 들어왔던 사회과학 용어들이 열심히도 나의 빈약한 뇌세포들을 교란하며 혼란을 부추겼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실제 사례를 이론에 접목시킨 그녀의 연구 방법론 때문일 것이다. 아무래도 나 같은 무지한 독자에겐 구체적인 실례만큼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없다. 그런 이유로 꽤 긴 리뷰였지만, 대부분 앵무새처럼 저자가 했던 말들의 반복이나 그것들의 짜 맞추기나 다름없다. 오스트롬에게 미안하고, 나의 무지와 몰이해도 부끄럽다.

공유 자원을 대할 때 왜 사람들은 그렇게도 몰상식하고 이기적이고 근시안적으로만 사익을 취하려고만 할까? 그것은 서로 간의, 그리고 세대 간의 깊은 단절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예를 들어 공유 자원을 사용하는, 그곳에서 대대손손 살아온 현지인들은 독자적인 제도를 고안해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유재의 비극’을 피하려고 나름의 노력을 다한다. 그들은 과거를 함께했고 미래도 함께할 것으로 기대하기에 사려 깊게 장기적 이익을 고려하는 것이 그들에겐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곧 현지인들에겐 공유 자원이 삶이고 인생 전부이다. 하지만, 외지인은 그 반대다. 그들은 현지인들과 과거를 공유하지도 않고 미래도 공유할 가능성은 희박하고 불확실하다. 그래서 그들에겐 ‘공유재의 비극’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목동처럼 단기적으로 이익을 최대한 뽑아내는 ‘지배 전략(dominant strategy)’이 합리적이다. 만약 공유 자원이 바닥을 드러내면 처음에 어딘가에서 그곳으로 왔던 것처럼 그렇게 그곳을 떠나 다른 곳에 정착하면 그만이다. 공유 자원을 둘러싼 반목과 갈등이 주로 현지인과 외지인 사이의 다툼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내 생각이 그렇게 부질없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외지인들의 정착을 방해하는 텃세를 해결하려는 현지인들의 노력과 오랫동안 한곳에 정착해온 현지인들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려는 외지인의 노력이 동반된다면, 그들이 공유 자원을 바라보는 시각도 조금씩 일치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끝으로 긴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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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20일 토요일

[책 리뷰] ‘지식인’을 게워내고 ‘시경’을 몰라도 매력적인 작품 ~ 풍아송(옌롄커)

The Odes of Songs book cover
review rating

‘지식인’을 게워내고 ‘시경’을 몰라도 매력적인 작품

Original Title: 风雅颂 by 阎连科
나는 소리치고 싶었다. 소리내어 노래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방을 나서서 밖으로 나온 나는 수많은 연구실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모습을 보고 또 보다가 공중화장실에 가서 기지개를 켜며 소변 한 번 본 것이 전부였다. (『풍아송(風雅頌)』, p58)

솔직히 밝히지 못한 집필 목적

책이 중국에서 출판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2013년에 쓴 한국어판 서문에는 『풍아송(風雅頌, The Odes of Songs)』은 대학에 대해, 교수들에 대해, 오늘날 중국 지식인들의 나약함과 무력함, 비열함과 불쌍함, 물질, 금전, 권력에 대한 그들의 타협과 숭배, 이상과 욕망의 이율배반, 저항과 탈피의 불화, 기개와 교태의 갈등 같은 것에 관해 쓴 작품이라고, 그제야 작가 옌롄커(阎连科, Yan Lianke)는 자신의 작품이 지향하는 메시지를 솔직하게 밝혔다. 그러나 중국에서 이 책이 처음 출판되고 나서 벌떼 같은 비평과 비판, 쟁론에 부딪혔을 때 옌롄커는 한국어판 서문처럼 솔직하게 집필 목적을 감히 밝힐 수는 없었다. 그도 우리처럼 명확한 한계를 지닌 사람이자 마치 고수가 초수를 펼치듯 복잡다단하고 변화무쌍하게 펼쳐지는 사회적 그물망이 옭아매는 족쇄에서 벗어날 수도, 아니면 도도한 학처럼 마냥 외면할 수도 없는 나약한 동물인지라 차마 스스로 고립되는 길을 고집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는 그저 『풍아송』은 내 정신적 자서전이자 나에 대한 따돌림이고 비판이라고, 누가 봐도 궁색한 변명을 둘러댐으로써 또다시 자신의 작품이 ‘금서’ 목록에 추가되는 명예스러운 불행을 미리 방지할 수 있었다.

옌롄커, 스스로 지식인임을 부정하다

손해서 그런 것인지 진짜로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옌롄커는 책 뒷부분의 「저자 후기」에서 스스로 지식인임을 부정한다. 그러나 그의 필력이 가진 영향력과 오랫동안 노벨상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아온 중국의 대표 작가임을 고려해보면 (내 생각이지만 머지않아 그는 노벨상을 받을 것이다!) 그 역시 작가라는 지식인의 한 부류임을 부정할 수 없다. 고로 자신이 지식인이 아니라는 옌롄커의 부정은 지나친 겸손이다.

그렇다면, 왜 그는 자신을 지식인이 아니라고 부정했을까? 아마도 그 이유는 지식인으로서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시류에 영합하고 현실에 타협한 자신의 무능과 무능력, 그리고 비겁함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저자 후기」에서 밝히듯 『풍아송』은 자신의 무능과 무력감에 대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혐오감을 표현한 것이라는, 얼핏 보면 지식인으로서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자신의 잘못에 대한 책망이자 질타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거 유행처럼 중국을 휩쓸었던 정풍 운동의 덫에 걸린 지식인이 마지못해 토해내는 자아비판처럼 들리기도 하는 옌롄커의 변명은 누군가 시키지 않아도 지식인 스스로가 알아서 자신을 탄압하고 억압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시스템을 겨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편, 중국 문단의 문제아이자 금서(禁書) 전문 작가라는 수식어를 꼬리처럼 달고 살았던 옌롄커의 소설 『풍아송』이 금서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그가 시류에 영합하는 고만고만한 지식인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출판 후 폭우처럼 퍼부을 비난을 예감한 옌롄커가 그것에 대한 변명을 미리 「저자 후기」에 실었다는 것 자체가 그의 무력감을 방증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 지식인의 성찰로 모든 지식인의 성찰을 요구하다

지만,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오랫동안 노벨상 후보로 거론된 세계적인 작가 옌롄커가 자신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소심하다 못해 무력하고 체면치레하느라고 허세를 부리고, 한편으론 질투에 집어삼켜 지는 옹졸한 지식인의 모습을 아무리 자신에 대한 성찰이라고 피력해도 그것을 (중국을 제외한 전 세계가)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질 리는 만무하다. 그의 영향력은 그의 의지와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미 중국을 벗어나 버릴 대로 벗어나 버렸고, 그의 문장이 미치는 파급력은 황하를 범람하게 할 정도로 막대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현실에서 그가 소설에 등장시킨 한 지식인의 비굴하고 무력하고 염치없는 모습을 자신의 이야기라고 빗대어 거침없이 형상화했다는 것은 중국 지식인에 대한 결연한 도전이자 겸허한 비판이면서, 한편으론 그들의 근원적 성찰을 촉구하는 강력한 메시지나 다름없다. 쉽게 말해 추기경이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고 속죄하고 있는데, 그 광경을 지켜보는 사제들이 어찌 뻔뻔하게 자신들은 눈처럼 깨끗하다고 시치미 뚝 떼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뿐만 아니라 참회하는 추기경을 보는 사제들의 심기는 어찌 불편하지 않겠는가? 아마 당시 『풍아송』을 읽은 중국 지식인들의 마음이 그러한 사제들의 좌불안석 불편한 마음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어쩌면 이것은 거대한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중국의 지식인이 지식인이라면 응당 지켜야 할 의무와 스스로 짊어진 책무에 충실할 수 없게 하는 강력한 무언의 압력이 중국 사회에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얼마 전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중국 인터넷에서 하루아침에 말살된 가수 리지(李志)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니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텍스트를 읽는 재미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러나 꼭 이렇게 물귀신처럼 지식인을 물고 늘어지지 않더라도, 소설 제목이 의미하고 소설 속 주인공 양 교수가 연구하는 소재이기도 한 「시경(詩經, the book of Songs)」을 전혀 몰라도 『풍아송』은 시종일관 부드럽고 청순한 우윳빛 흡입력을 발산하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옥수수 껍질 벗겨내듯 작품에서 ‘지식인’이라는 거칠고 모난 껍질을 한 꺼풀 벗겨내면 차지고 노랗게 영근 옥수수알 같은 구수하면서도 달곰한 문장들이 읽는 이로 하여금 무한한 희열을 느끼게 한다. 과장되면서도 지나치지 않고, 원색적이면서도 운치 있고, 생동감이 넘치면서도 경박하지 않은 옌롄커만의 색깔을 지닌 독특한 문장은 예전 작품들에서 보여준 필력보다 더 원숙해지고 숙달된 경지를 보여준다. 그가 자유자재로 붓을 휘두르고 문장으로 천지를 호령하는 모습은 신이 들린 지휘자가 종이, 붓, 먹, 벼루를 진두지휘하여 하늘과 땅을 글로써 종이에 담아내고, 그럼으로써 세상의 이치와 역사와 삶을 설명하려는 것처럼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철학과 의지의 발로이다. 또한, 그의 문장에는 눈이 있고 귀가 있고 코가 있어 변화무쌍하면서도 오묘한 세상 만물의 미묘한 움직임이나 변화도 능히 잡아내기 때문에 보지 않으려야 보지 않을 수가 없고, 듣지 않으려야 듣지 않을 수가 없고, 맡지 않으려야 맡지 않을 수가 없다. 이렇게 그의 작품은 굳이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무게를 두지 않더라도 텍스트를 읽는 재미만으로도 충분히 독자를 무아지경에 빠트릴 수 있는 수준 높은 소설이자 진짜 문학이다.

정말로 진정한 지식인은 모두 죽었는가?

실 『풍아송』이 사유하고 고찰하고자 하는 지식인에 대한 비판적인 메시지는 별로 그렇게 와닿지 않았다. 이미 내 마음속에는 오래전부터 지식인에 대한 믿음과 존경과 공감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을 정도로 그들이 권력에 영합하고 권위를 추종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작위적이고 속물적인 작태에 신물이 났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좀 더 안다고, 배웠다고, 그래서 좀 유명하다고 우쭐대는 지식인 같지 않은 지식인들이 다양한 대중매체에서 설쳐대는 모습은 꼴사납기 그지없다. 그들이 대중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교수가 이제 막 입학한 신입생을 바라보는 것 같은 적당히 꾸며진 자애와 숨기지 않는 우월함이 번득인다. 더 가관인 것은 그들의 말이라면 무조건 진실이라고 믿는, 마치 약장수의 번지르르한 혓바닥에 놀아난 관객이나 사이비 교주의 간사한 능변에 이성을 잃은 신도를 연상시키는 대중들의 우매함이다.

어쩌면 누구의 말대로 진정한 지식인은 모두 죽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약삭빠른 사람들만이 생존할 수 있는 무한 경쟁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신이 할 도리를 운명이 부여한 의무처럼 기필코 완수하려는 정의롭고 책임 있고 용기 있는 지식인의 설 자리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부처님이나 예수님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품위 있는 교양과 자애로운 성정과 강직한 품격을 지식인에게 무리하게 강요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그들이 무슨 초능력이라도 타고 난 영웅이 아니라 우리처럼 그저 묵묵히 자기 삶에 충실해지려는 수많은 사람 중 한 사람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비록 지식인에게 실망을 금치 못했을지 망정 그렇다고 지식인의 필요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인간의 역사에는 위대한 지식인들이 존재했었고 그들이 문화, 사회, 정치, 경제 등 인류 문명에 끼친 긍정적인 영향력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자질 미달의 지식인이 설쳐대는 것이 문제일까? 그래서 크고 작은 뜻을 품은 진짜 지식인이 설 자리가 없는 것이 문제인가? 아니면, 지식인이 설 자리를 스스로 찾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가? 우리 사회가 지식인의 존재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것일까? 이것도 아니면 대중이 진짜 지식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일까? 한 번쯤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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