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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17일 일요일

[책 리뷰] 무엇이 파괴와 절멸의 유산을 받들었나? ~ 히틀러 2(이언 커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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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파괴와 절멸의 유산을 받들었나?

Original Title: Hitler: 1936-1945 Nemesis by Ian Kershaw
제대로 못 배운 술집 선동가에 고집불통의 인종주의자였고 자기도취와 과대망상에 젖었으며 민족의 구세주를 자처했던 사람이 철학자와 시인의 나라로 알려졌고 발달된 경제를 가진 현대 문명국에서 휘두를 수 있었던 극단적 형태의 개인 통치는 그 운명의 12년 동안 끔찍한 사건들이 펼쳐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히틀러 2(Hitler: 1936-1945 Nemesis)』, p1,023)

나치 체제는 히틀러의 교묘한 전략? 아니면 우연?

틀러는 교활한 악마다. 그는 그토록 많은 학살에 책임이 있으면서도 결코 소름 끼치도록 하얀 자기 손에는 피 한 방울 안 묻혔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을 ‘위대한 지도자’로 받드는 수하들에게 학살 명령을 직접 내릴 필요도 없었다. 그는 신처럼 하늘 높은 곳에 앉아 수하들이 자신이 추구하는 신념을 종교처럼 따르도록 단단히 혼을 빼놨으며, 히틀러를 따르는 수하들은 주인 앞에서 칭찬받고 싶어 하는 강아지처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히틀러가 좋아할 만한 행동을 스스로 찾아낸 다음 충실하게 실행으로 옮겼다. 한때 화가 지망생이었던 히틀러가 스케치하듯 대충 큰 그림을 그려놓으면, 그를 추종하는 수하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어떻게든 나머지 공간을 채워 넣는, 그런 형태였다. 그는 직접 명령을 내릴 필요도 없었고, 자신의 손에 더러운 것을 묻힐 필요는 더더욱 없었을뿐더러, 그래서 어딘가 일이 잘못되어도 독일 국민의 경외하는 ‘위대한 지도자’라는 강철처럼 견고하고 새 자동차의 후드처럼 매끄러운 명성에 흠집이 날 일도 없었다. 권력의 최고 정점에 선 히틀러의 후광이 비치는 범위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려고 수하들은 치열하게 경쟁했다. 그들은 히틀러의 총애가 보장하는 달콤한 권력의 한 조각을 받아내려고 히틀러가 좋아할 만한 일들을 알아서 계획하고 추진했다.

느슨하면서도 꽤 견고하게 지속했던 나치 체제와 히틀러 주위를 배회하는 권력 게임 시스템이 확답보다는 두루뭉술하게 넌지시 언급하기를 즐기고, 그런 식으로 결정을 회피하려 드는 히틀러 개인의 우유부단하고 폐쇄적인 성격적 특성에서 기인한 우연일까? 아니면 히틀러가 의도한 교묘한 전략이었을까? 만약 우연이었다면 1차 세계 대전 직후 정치계에 우연히 발을 들여놓으며 자신의 숨은 재능을 발견했던 것처럼, 두 번 시도된 폭탄 암살에서 크게 다치지 않고 멀쩡하게 살아남았던 것처럼 히틀러는 타고난 행운아다. 다만, 그것은 독일을 몰락으로 이끌고 전 세계를 참혹한 전쟁의 늪으로 물귀신처럼 잡아 끌어들인 악마의 행운이다. 반면에 그것이 히틀러의 의도적인 계획으로 나타난 전략적 결과였다면 그는 메피스토펠레스도 울고 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천재이며 악마 중의 악마다.

히틀러를 지지하는 그들은 ‘좀비’가 아니었다

마 진실은 그 중간쯤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히틀러는 악마라는,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구분 짓는 것만큼 위험천만한 일은 없다. 그것은 전부 아니면 전무, 아리아인과 유대인이라는 선악 세력의 결전, 승리가 아니면 완전한 파멸이라는, 즉 모든 문제를 ‘흑백’의 단순 명쾌한 논리로 환원해 사람들의 정신을 단숨에 빨아들이는 재주가 탁월했던 히틀러의 전철을 따라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주창한 흑백 논리에 스며든 못 말리는 자기 파괴 경향이 어떠한 결말을 가져왔는지 명백하게 드러난 시점에서 또다시 흑백 논리의 유혹에 빠져든다는 것만큼 어리석고 바보 같은 일은 없다. 제아무리 그것이 단순하고 명쾌해서 많은 사람을 아주 쉽게 현혹하고 설득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극과 극을 가르는 흑백 논리가 가져올 자기 파괴적이고 공허한 결말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지만, 그런 식으로 히틀러를 꾸짖고 비난한다고 해서,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그저 그런 보통 사람들이었던 그 수많았던 독일 국민이, 문명의 혜택과 교육을 받으며 교양을 쌓을 수 있었던 선진 시민이, 특별히 악하게 태어난 것도 아니고 세상 모든 사람이 그러듯 자기 한 몸과 가족이 무탈하게 살아가는 것을 낙으로 알고 삼았던 평범한 사람들이, 히틀러의 뛰어난 언변술에 현혹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좀비처럼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완전히 얼이 빠진 상태도 아니었던 사람들이, 그런 평범하고 교육도 받을 만큼 받은 사람들이 좌파나 반체제 세력, 유대인 등 일부 사람들에 한해 막강한 파괴력을 발휘한 나치의 무자비한 탄압에 굴복한 것도 아니면서, 히틀러를 마치 하느님처럼 받들면서 전 세계의 힘센 나라들을 모두 적으로 삼고 싸우는 가망 없는 전쟁에서 왜 필사적으로 싸우려 했는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추천할 수밖에 없는 20세기 인류사의 역작

틀러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라 불리는 이언 커쇼(Ian Kershaw)의 히틀러 전기 『히틀러 2(Hitler: 1936-1945 Nemesis)』는 이해관계가 나치와 직접적으로 얽히고설킨 대기업, 자본가, 정치인 등 기존의 권력 계층뿐만 아니라 고위 장성, 고급 관리, 변호사, 기업가 등의 상층 부르주아와 상인, 숙련공, 소농, 하위 공무원, 노동자 같은 중하류층에 이르는 다양한 계층과 남녀노소를 불문하는 다양한 연령층의 완전무결한 지지가 어떻게 단 한 사람의 의지와 결합하고, 더 나아가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가지고 주사위를 굴리려고 하는 한 사람의 손아귀에 어떻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고, 그럼으로써 지도자 신화가 탄생하고 그 신화가 독일과 전 세계를 지옥의 구렁텅이로 끌고 들어가는 모든 과정을 아우르며 통찰하는 전무후무한 책이다.

히틀러를 알고 싶고, 2차 세계 대전을 알고 싶고, 한 걸음 더 나아가 20세기 인류를 알고 싶으면 절대 빠트릴 수 없는, 히틀러가 인류에 미친 어마어마한 영향력만큼이나 두 권 합쳐 2천 페이지가 넘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책이다. 한 권의 무게가 무려 2kg이 넘으니 급할 땐 아령으로 써도 부족함이 없는 무게 때문에 괴력의 보유자가 아닌 이상 두 손으로 받쳐 읽기는 불가능하고, 웬만한 독서대로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두께도 무지막지하다. 2천 페이지 넘는 책을 일일이 스캔해서 전자책으로 만드는 위대한 과업을 고단하게 달성한 나 자신이 뿌듯하게 느껴질 정도다. 괴물 같은 책의 부피 때문에 섣불리 선택하기는 어려운 책이지만, 그럼에도 감히 추천할 수밖에 없는 20세기 인류사의 역작이다.

그도 우리처럼 꿈을 꾸는 인간이었다는 섬뜩한 사실

무튼, 나도 괴짜인 것이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패색이 짙어져 가는 상황에서 하루하루가 다르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망가져 가는, 그리고 린츠 재건축 모형을 보며 좋아하는 히틀러를 보면서 일말의 난감한 연민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만큼 히틀러의 일생을 다룬 커쇼의 문학적 필치가 뛰어났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히틀러는 생전에 고향 도시 린츠를 재건축하고 싶어 했다. 린츠를 재건축하는 공상은 종일 우울한 소식만 날아들며 히틀러의 골치를 지끈지끈 썩일 때, 그의 유일한 현실 도피처였다. 전쟁이 끝나면 고향 린츠로 돌아가 살려고 했던 히틀러는 암묵적으로 전쟁의 패배가 확실시되던 1945년 2월이 되어서야 린츠 재건축 모형을 보게 된다. 그리고는 어린아이처럼 마냥 기뻐서 어쩔 줄 모른다.

결코, 지어지지 못하리라는 것을 스스로 뻔히 아는 모형을 내려다보면서 히틀러는 몽상에 잠겼고 친구 쿠비체크와 린츠를 다시 짓는 꿈을 꾸던 젊은 시절의 환상으로 돌아갔다. 벌써 아득한 옛날이었다. 그러고는 가혹한 현실로 돌아왔다. (『히틀러 2(Hitler: 1936-1945 Nemesis)』, p948)

이때 히틀터의 외모는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전보다 더 수척했고 전보다 더 늙었다. 허리는 구부정했으며 걸음도 제대로 못 걸었다. 왼손과 왼팔은 수전증 환자처럼 수습 못 할 정도로 떨었다. 얼굴에서 핏기는 사라졌고 눈은 충혈되었으며 눈가는 축 처졌다. 입가에서는 치매 걸린 노인네처럼 때때로 침이 흘러내렸다. 홀로코스트를 일으킨 장본이었던 그도 때론 (자기도취적이지만) 꿈을 꾸는 사람이었고, (대부분 자업자득이지만)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 쇠약해지고 늙어가는 한 인간일 뿐이었다. 이런 히틀러의 마지막 모습이 혹시라도 관객의 동정을 살까봐, 히틀러에게 연민을 불러일으켜 그에 대한 역사적 판결을 완화시키려는 수작 아니냐는 비난의 화근이 될까 봐, 영화에서는 히틀러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기 어렵다.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으로 고민한 흔적이 역력히 없는 뻔뻔하고 거만한 얼굴로 등을 꼿꼿이 세운 채 벙커를 활보하고 다닌 의지의 사나이만은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짙은 패색이 안개처럼 전장에 무겁게 드리우고 패배가 눈앞으로 바짝 다가와도 승리에 대한 확신을 버리지 않았던 자기기만적이고 자기도취적인 낙관의 화신 히틀러가 간혹 최측근들 앞에서 우울하고 절망에 빠진 침울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면 믿어지는가? 하지만, 그런 모습은 찰나였을 뿐이고, 그는 곧 전쟁의 승리를 확신하는 의지와 투쟁을 불사르는 무대 위의 히틀러로 다시 돌아왔다. 어떤 모습이 진짜 히틀러의 모습이고 진짜 히틀러의 심정인지 우리는 영영 알 수 없지만, 말년에 그가 보여준 순진하고 어리석을 정도로 승리를 낙관하고 그러한 심지를 끝까지 지키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스트레스와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그것을 내색하지 않으려는, 그리고 기필코 한 줌의 권력조차 놓지 않으려는 의지는 정말이지 애처로울 정도로 눈물겹다. 그런 면에서 그는 정말 ‘의지의 화신’이었다. 한편으론, 부랑아, 낙오자 등 별 볼 일 없는 존재에서 세계를 처참하게 짓밟는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는 점은 가히 인상적이다.

마치면서...

런 값싼 동정은 그저 한낱 스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저질 감상일 뿐, 히틀러가 잔악무도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없다. 그는 독일이 전쟁에서 지고, 그로 말미암아 독일 민족이 절멸하는 것조차 사회다윈주의 관점에서 해석했다. 철저하게 의도된 연기였든, 아니면 타고난 천성이었든 정치적 무대에서 그는 따뜻한 인간적 감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가 살인과 학살을 즐기는 사이코패스였든 아니든, 그는 유대인의 학살을 당연시했다. 그런데 이런 히틀러를 보면서 우리의 무관심과 침묵이 일으킨 ‘지속적인 테러(ENDURING TERRORS)’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을 떠올린다면 황당무계한 비약(飛躍)이 될까? 지금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기아로, 설사병으로, 홍역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보면서 ‘내가 과연 히틀러를 악마라고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무고한 인명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의 인생을 황폐화시킨 히틀러가 악마라면, 5초마다 아이들이 굶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관심과 침묵으로 일관하는 우리는 도대체 무엇인가? 히틀러로 시작해서 이런 말로 끝을 맺다니, 역시 하고 싶은 대로 막 나가는 리뷰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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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10일 일요일

[책 리뷰] 기회주의자? 의지의 사나이? 아니면 행운아? ~ 히틀러 1(이언 커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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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주의자? 의지의 사나이? 아니면 행운아?

Original Title: Hitler: 1889-1936 Hubris: 1889-1936: Hubris by Ian Kershaw
하지만 히틀러가 독일 역사에서 그저 ‘우연’히 나타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히틀러를 부각시킨 특별한 상황이 없었더라면 히틀러는 무명인으로 남았을 것이다. 히틀러가 다른 시대로 훌쩍 뛰어넘어 가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히틀러의 개성, 히틀러의 말투는 그런 특별한 상황이 없었더라면 눈길을 끌지 못했을 것이다. 전쟁, 혁명, 민족적 수모, 볼셰비즘에 대한 공포는 워낙 광범위한 독일 국민을 뒤흔들었고 히틀러는 그런 상황을 발판으로 삼았다. 그는 상황을 기가 막히게 활용했다. (『히틀러Ⅰ(Hitler: 1889-1936 Hubris)』, p603)

‘의지의 승리’가 아니라 ‘기회의 승리’?

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 감독이 1934년 9월 나치당의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를 촬영한 다큐멘터리에 히틀러(Hitler)는 「의지의 승리(Triumph des Willens)」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제목은 히틀러가 자신을 맨주먹으로 시작해서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력으로 앞길을 헤쳐나간 영웅적 정치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과 히틀러의 그러한 불굴의 오만과 위대한 착각에 비위를 맞추듯 히틀러를 미화하려고 애썼던 나치 신화의 한 요소를 대변해 준다. 하지만, 이언 커쇼(Ian Kershaw)는 히틀러 전기 『히틀러Ⅰ(Hitler: 1889-1936 Hubris)』을 통해 히틀러가 끝내 정권을 차지하게 된 원인은 의지보다는 기회주의와 약간의 행운이 더 크게 작용했음을 설득력 있게 설파한다. 사실 히틀러 하면 떠오르는 것은 타고난 연설가로서의 천재적인 대중 선동 능력과 단호한 의지다. 커쇼 역시 연설가로서 히틀러 능력은 부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히틀러의 대중 선동 능력이 나치당의 성장과 히틀러의 정치적 삶에 크게 이바지한 점까지도 인정하지만, 히틀러가 끝내 정권을 차지하게 된 이런 저러한 복합적인 이유 중에 히틀러의 의지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기존의 해석에는 단호한 비판의 날을 세운다.

권력의 심장부에 있었던 사람들의 계산 착오

사학자에게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 원인에 관해 물어본다면 그 누구도 객관식 문제를 풀어내는 것처럼 명확한 대답을 내놓지는 못한다. 그것은 히틀러가 부상하는데 히틀러의 개인적 요소와 주변적 요소, 그리고 시대적 배경이 서로 복잡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히틀러가 권력을 차지하게 된 출발점을 총리가 된 시점으로 본다면, 그 대답은 몇 가지로 간추려볼 수는 있을 것 같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것은 결코 필연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커쇼는 히틀러가 총리 자리에 오른 것은 히틀러의 활약보다는 권력의 심장부에 있었던 사람들의 계산 착오에 있었다고 본다. 권력의 심장부에 있었던 사람이란 다름 아닌 민주주의를 파계하려는 우익 보수 세력이었고, 그들은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데 혈안이 된 나머지 히틀러를 충분히 자신들의 의지대로 다룰 수 있는 만만한 인물로 보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 히틀러에 대한 과소평가는 1923년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히틀러를 정치계에서 완전히 쫓아낼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히틀러가 총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정권을 잡으려는 나치당의 노력이 주효했다기보다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세력이 그만큼 밀어주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권위주의 체제에 자기들 이해관계가 걸려 있었던 대지주와 군부는 히틀러의 권력 쟁취를 도운 일등 공신이었고, 대기업은 비록 정치적으로는 근시안적이었고 자기 이익만을 추구했지만,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마지막으로 패전, 실패한 혁명, 대공황 등으로 말미암아 총체적 난국과 빈곤에 시달리면서 민주주의에 대해 뼛속까지 염증을 느끼고 있었던 독일 국민도 히틀러를 선택함으로써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데 한몫 거들었다.

여기에 히틀러가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커쇼는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이어지는 독일 정치 문화의 중요한 줄기들을 거론한다. 그것은 폐쇄적 민족주의, 제국주의, 인종주의, 반마르크스주의, 전쟁 미화, 자유보다는 질서를 강조하는 전통, 강한 권위에 끌리는 마음이었고, 아울러 단기적으로는 바이마르 민주주의가 출범할 때부터 부딪쳤던 첩첩이 쌓인 위기들이었다. 여기에 주어진 상황을 잘 활용하면서 시류에 영합하는 기회주의적이면서도 영악한 히틀러의 상황 대처 능력이 ‘지도자 히틀러’의 탄생을 ‘우연’이 아닌 무언가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히틀러가 군대에서 연설할 수 있는 재능을 발견하여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이 순전히 우연이었음을 고려해보면 ‘지도자 히틀러’ 탄생에 우연성이나 우발성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우물쭈물하고 자꾸 뒤로 미루는 히틀러의 우유부단한 통치 방식이 오히려 나치당과 관료 체제의 느슨한 통합을 이끌었다는 점과 시의적절하게 터진 의사당 방화 사건이나 힌덴부르크의 사망, 1차 세계대전 참전 등 히틀러는 운도 꽤 따랐다.

히틀러는 기회주의자인가? 행운아인가? 아니면 비범한 능력의 소유자인가?

렇다면 ‘지도자 히틀러’ 탄생에서 얼마만큼을 우발성 내지는 심지어 역사의 우연 탓으로 돌려야 하는가? 얼마만큼을 당시 독일을 다스렸던 비범한 남자의 행동과 동기 탓으로 돌려야 하는가? 얼마만큼을 민주주의에 적대적인 세력 탓으로 돌려야 하는가? 또 얼마만큼을 히틀러를 스치고 지나갔던 행운 탓으로 돌려야 하는가? 또 얼마만큼을 광신적으로 히틀러를 숭배했던 나치 일당과 독일 국민 탓으로 돌려야 하는가? 이 책은 바로 이런 물음에 답을 구하려는 진중한 노력의 결과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간단히 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분명한 것은 이 모든 요소가 의도적이든 우연히든 서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기도 하고 부족한 부문을 서로 메워주기도 하면서, 그렇게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는데 각자 나름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것들은 둘째치고 정권을 장악하는데 히틀러의 의지는 얼마나 도움이 되었던 것일까? 연설이나 선동 분야를 제외하고는 히틀러의 개인적 능력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으로 보는 커쇼의 답은 당연히 부정적이다. 커쇼는 히틀러의 의지보다는 다분히 기회주의적인 면을 부각시킨다.

부랑자보다 약간 나았던 청년 시절

실 1차 세계대전 전에 그림을 팔아 생활비를 벌 수 있었다는 점에서 부랑자보다 약간 나은 생활을 했던 히틀러의 청년 시절을 돌이켜보면 과연 히틀러가 뭐라도 이루어보겠다는 약간의 의지가, 아니 그러한 의지가 존재했는지조차 의심이 들 정도로 게으르고 방만하고 나태한 삶을 살았다. 그나마 재능이라 할 수 있는 그림 실력을 부지런히 발휘해 돈을 열심히 벌려고 하지도 않았고, 사교성이 좋아 인맥을 두루 넓힌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어렸을 때부터 꿈꾸던 예술가가 되겠다고 열심히 공부한 것도 아니었다. 낮에는 반쯤은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하루하루 먹고살 궁리를 해야 했고, 밤이면 바그너의 음악에 빠져 공상과 망상의 바다에 자신을 질식시켰다(마치 세상을 등진 채 책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나 자신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 그 당시 히틀러의 삶은 그가 지독히도 경멸하던 막노동꾼의 삶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히틀러는 삽 대신 붓을 들었고, 술과 담배 대신 독서와 음악에 취했을 뿐이다. 말 그대로 그냥 되는대로 살았던 히틀러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전쟁터에서 제 세상을 찾은 듯 보였지만, 그것도 금방 끝나고 말았다.

뜻밖에 군대에서 깨달은 연설 능력

틀러는 어떻게든 제대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군대에서 공짜로 재워주고 먹여주고 월급까지 주었기 때문이다. 학력이 출중한 것도 아니고, 연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매우 뛰어나지는 않지만 보통 이상은 하는 그림 실력을 제외하곤 아무 기술도 없는 상태에서 패전으로 엉망진창이 된 독일 경제의 폐허 한복판으로 내몰린다는 것은 예전의 부랑자와 다를 바 없는 삶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 히틀러가 군대에서 정치에 발을 내디디면서 처음 맡은 임무는 훗날 등에다 칼을 박았다는 배신자로 부르게 될 사회주의 세력이 이끌던 혁명 정부의 일을 도운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히틀러는 좌파 정권이 집권하는 동안 소속 대대의 대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사회주의 정부의 홍보 부처를 도와 부대원들에게 ‘교육’ 자료를 배포하는 일을 맡았다.

이때부터 이미 기회주의적인 히틀러의 특성이 드러난다. 히틀러가 사회주의에 반감을 품지 않았을 리는 만무하지만, 히틀러는 단지 생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군대에 남고 싶었다. 군대에 남는 것이라는 (훗날에는 권력 쟁취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다면 비록 신념에 어긋나더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히틀러의 특성이다. 훗날 히틀러는 나치당을 이끌면서 권력 쟁취라는 목적 아래 나치당과는 다른 이념을 가진 여러 사회 집단을 받아들이는데, 좋게 말하면 유연성 있는 상황 대처 능력이라 할 수 있고 달리 말하면 기회주의적인 처사라고 볼 수 있다.

1919년 5월 혁명 정부가 무너지고 키를 마이어(Karl Mayr) 대위를 통해 군대를 反볼셰비즘과 민족주의 방향으로 올바르게 교육하는 선전요원으로 선택되고 나서야 히틀러는 자신이 연설할 수 있다는 재능을 깨닫게 된다. 히틀러가 자발적으로 선전요원으로 나섰다기보다는 선택되었다는 점에서 다분히 기회주의적인 냄새가 풍긴다.

‘북 치는 사람’ 히틀러

렇다고 히틀러가 자신의 연설 능력과 대중 선동 능력을 깨닫게 되면서 바로 권력으로 향한 의지를 드러낸 것도 아니다. 1923년 11월 쿠데타 실패로 란츠베르크 감옥에 갇히기까지 히틀러는 위대한 지도자의 앞길을 닦아놓는 북 치는 사람이라는 역할로 만족했다. 그것은 예전에 품었던 위대한 화가나 건축가가 되겠다는 꿈 대신에 히틀러가 새로 발견한 천직이었다. 하지만, 란츠베르크 감옥에서 『나의 투쟁(Mein Kampf )』을 집필하고 세계관의 틀이 다져지면서 그는 이제 ‘북 치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지도자가 되어야 할 운명을 짊어진 사람으로 인식한다. 이때부터 구렁텅이에 빠진 독일을 이끌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자기도취적인 사명감에 불타올랐고, 이때서야 비로소 권력을 쟁취해 지도자가 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맨 앞에서 설명했듯 히틀러가 총리에 오르는 과정은 절대로 히틀러의 의지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이후 독일에서 전개되는 정치 전개 과정을 봐도 히틀러의 의지력 하나보다는 고집, 우유부단함, 도박사 기질 등 그의 다른 성격적인 요소가 독일의 운명에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 것이 아닌가 싶다.

마치면서...

『히틀러Ⅰ(Hitler: 1889-1936 Hubris)』은 히틀러의 일대기 중 히틀러의 할아버지부터 시작하여 독일의 라인란트 재점령으로 히틀러의 지도자적 위치가 완벽하게 확립되는 1936년 봄까지를 담고 있다. 어마어마한 책 두께만큼 히틀러에 대해 밝혀진 모든 자료를 담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책이지만, 다른 독재자들의 과거처럼 젊은 시절의 기록은 이 빠진 것처럼 군데군데 빈자리가 많이 보이고, 사용된 자료의 신빙성도 미덥지 못하다. 젊은 시절의 히틀러에게 좀 더 가깝고 투명하게 다가갈 수 없다는 점이 아쉽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은 히틀러의 성장 과정과 히틀러의 개인적 기질과 우연과 행운이 어떻게 독일의 정치 • 사회 • 경제와 상호 작용하고, 그 비상한 맞물림 속에서 어떻게 위대한 선동가가 탄생했고 어떻게 위대한 지도자가 만들어질 수 있는지를 세밀하게 통찰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자료다. 어마어마한 분량의 책이니만큼 책 무게는 가벼운 운동기구로 사용해도 될 만큼 상당히 부담스럽지만,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시종일관 흡입력을 잃지 않는 명쾌한 문장력 때문에 읽기는 전혀 부담스럽지는 않다. 이 덕분에 지루할 새도 없이 독파할 수 있었다. 두께 때문에 감히 추천하기는 어려운 책이지만, 두께를 훨씬 뛰어넘는 지적 충만감과 역사적 혜안을 안겨줄 수 있는 역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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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24일 일요일

[책 리뷰] 부패할 수 없는 혁명의 파수꾼 ~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장 마생)

Robespierre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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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할 수 없는 혁명의 파수꾼

Original Title: Robespierre by Jean Massin
나는 충분히 살았습니다. 나는 프랑스 민중이 비천함과 예속의 한 가운데에서 영광과 자유의 정점으로 도약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민중들의 족쇄가 깨지고 세상을 짓누르는 비난받아 마땅한 왕좌들이 승리한 민중들의 손 아래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Robespierre)』, p599)

부패할 수 없는 혁명의 파수꾼

패할 수 없는,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는 파수꾼이자 자유의 사도로 불린 사람. 헌법의 서문인 인권선언의 이름으로 3년 동안 헌법의 해악들에 대항해 투쟁했던 사람.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사상의 아들로 자유를 얻은 위대한 민중의 한가운데에서 자연의 선의를 찬양하는 꿈을 꾸고 있던 사람. 그 사람은 바로 프랑스 혁명이 나은 부르주아 혁명가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다. 그가 민중으로부터 ‘혁명의 파수꾼’이라는 찬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부르주아로서 혁명의 소용돌이에 발을 막 들여놓았을 때 다른 부르주아들이 보려고도, 결코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을 로베스피에르만은 보았기 때문이다. 바스티유 함락은 만 명에 이르는 생탕투안 포부르(faubourg Saint-Antoine)의 가난한 노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장 폴 마라(Jean-Paul Marat)의 일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은 오직 민중을 신뢰할 때에만, 그리고 혁명 수호에 그들을 참여시킬 수 있을 때만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혁명의 불씨가 본의 아니게 부르주아에서 민중으로 튄 꼴이 되었을지라도 로베스피에르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이미 민중 속으로 파고든 혁명의 불씨가 활활 타오르는 혁명의 용광로로 진화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연료를 공급하는데 자신의 젊음과 나머지 생애를 기꺼이 바치기로 다짐했기 때문이다.

커피를 마시는 것 같은 진한 혁명의 체취와 온기

스티유 습격으로 프랑스 혁명이 이제 막 동이 틀 무렵, 이로부터 권총 자살이 불운으로 실패하고 단두대에서 생애를 마감하기까지 그에게 남은 시간은 달랑 5년뿐이었다. 이 시기에 로베스피에르는 전력 질주와 휴식을 반복하며 훈련하는 육상 선수처럼 때론 왕성한 활동력과 열정을 보여주기도 하고 때론 신중하고 병약한 침체기를 보여주기도 하는 등 심하지는 않지만 비교적 뚜렷한 기복을 보여준다. 하지만, 결코 그는 다른 부르주아들처럼 혁명과 반혁명 사이를 줏대 없이 천방지축 날뛰며 오락가락하지 않았다. 지레 겁먹고 주춤주춤 후퇴하는 법은 더더욱 없었다. 험난하고 외롭고 쓸쓸한 혁명의 길을 나홀로 묵묵히 걸어간 그가 남긴 발자취를 두고 훗날의 사람들은 공상가, 유토피아주의자, 냉철한 현실주의자, 순진한 혁명가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것을 인정하고, 또한 그가 혁명 활동 중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오류를 적지 않게 범하며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드러냈다는 사실 역시 인정하더라도, 로베스피에르가 남긴 부정할 수 없는 업적이 있다. 그는 당시 혁명가 중 모호함과 장황함이 가장 적은 인물이었고, 혁명이 발발했을 때의 그 격렬함과 열정을 생생하게 피부와 호흡으로 흡수했던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고, 또한 그는 혁명의 원칙과 신념을 끝까지 고수했다. 이로써 그는 상퀼로트 민중을 정치적 활동의 경험 속으로 인도한, 그리고 정치 권력의 행사와 결합한 첫 부르주아 혁명가였다.

장 마생(Jean Massin)은 자칫 역사의 무심함과 역사가들의 편협함 속에 묻힐뻔했던 로베스피에르의 참모습을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Robespierre)』으로 복원했다. 기존 해석과 어긋나기도 하고 대치되기도 하는 복원된 그의 모습이 마음에 드는 사람도 있을 테고, 내키지 않거나 껄끄러운 사람도 있겠지만, 이 책에는 민중을 향한 로베스피에르의 식지 않는 뜨거운 열정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온기가 마치 보온병에 담긴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시는 것처럼 진한 혁명의 체취와 함께 전해진다. 두툼한 이 책을 가슴에 안고 있노라면 마치 강아지를 품에 안은 것처럼 따뜻한 혁명적 온기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전해져 오는 것 같다.

로베스피에르는 민중이 혁명의 심장이자 팔이라며 믿었을지는 몰라도, 산악파 부르주아지가 여전히 혁명의 두뇌여야 한다는, 훗날의 엘리트 의식이라 불리게 될 한계를 명백히 드러내기도 한다. 민중(프롤레타리아)을 계몽하고 자극하고 선동하여 혁명 전차를 이끌게 하되, 전차 부대 지휘는 직업 혁명가가 맡아야 한다는 엘리트 의식은 훗날 러시아와 중국 혁명에서 그대로 실현된다. 그럼에도, 당시 부르주아 대부분이 민중을 멸시하거나 적당히 꼬드겨 이용할 먹을 생각만 하고 있었을 때, 그리고 민중은 이러한 부르주아를 불신하고 있었을 때, 이 거대한 두 힘이 충돌하여 혁명이 자폭하지 않도록 그 사이에서 고독한 완충재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이 바로 로베스피에르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공포 정치가 시작되기도 전에 혁명의 불씨가 일찌감치 꺼졌거나 반동적인 부르주아의 민중 학살이 공포 정치를 대신했을지도 모른다.

마치면서...

책에 대해 가장 아쉬운 점은 불충분한 자료가 가져온 한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상적이거나 의회 연설을 제외한 다른 혁명 활동, 민중과의 교류 등 로베스피에르의 구체적인 동선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연설이나 글, 그리고 그것에 대한 장 마생의 분석과 해석이 주를 이루다 보니, 다시 말해 액션 영화를 보는데 액션 장면은 없고 대신 현학적인 해설자가 생략된 액션 장면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을 듣는 꼴이라 좀 지루하고 곤혹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인권선언, 기본권, 자유, 평등, 우애, 혁명, 국민, 국민국가, 국민주권, 시민권, 헌법, 대의제, 정교분리, 의무교육, 국민군, 입헌주의, 자유민주주의 등 현재도 여전히 유효한 민주주의적인 키워드 전부가 프랑스 혁명에서 탄생한 것도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프랑스 혁명을 통해 유토피아적 이상에서 현실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실재적인 무언가로 윤곽을 드러냈고, 그럼으로써 근대 사회의 민주주의적 가치관이 꽃 피울 수 있도록 씨앗과 영양분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로베스피에르가 프랑스 혁명에서 이룬 과업과 부닥친 한계를 명확히 밝힌 이 책의 가치는 유효하다. 또한, 혁명의 도덕군자 로베스피에르가 완고하게 강조했던 혁명의 덕성이 비록 그의 순진성을 드러낼지라도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조차 보편적인 도덕성이 날로 희미해져 가는 요즘 우리는 ‘부패할 수 없는’ 그의 강직함에서 더 높은 민주주의와 자유로의 도약을 기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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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10일 일요일

[책 리뷰]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혜성처럼 사라진 혁명가 ~ 트로츠키(로버트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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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성처럼 나타났다가 혜성처럼 사라진 혁명가

Original Title: Trotsky: A Biography by Robert Service
레닌의 후계자 경쟁에서 트로츠키가 결코 넘을 수 없었던 장애물은 바로 그에게 최고 지도자가 되려는 강력한 욕망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트로츠키(Trotsky: A Biography)』, p860)

권력 쟁취에 대한 빈약한 의지

닌(Vladimir Lenin)의 뒤를 이은 권력 투쟁에서 왜 트로츠키(Leon Trotsky)는 스탈린(Joseph Stalin)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을까? 『트로츠키(Trotsky: A Biography)』의 저자 로버트 서비스(Robert Service)가 이 책보다 앞서 출판한 『스탈린(Stalin: A Biography)』을 읽으면서 내린 내 나름의 판단은 레닌 사후 권력 쟁취와 투쟁을 향한 트로츠키의 미적지근한 태도를 언급하고 싶다.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를 건설하겠다는 혁명 의지와 세상을 도취시킬듯한 매혹적인 글을 쓰겠다는 의지는 당대의 그 누구도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충만했을지 몰라도, 권력을 쟁취하겠다는 의지만큼은 악다구니 같았던 스탈린과는 대조적이다. 트로츠키는 권력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거나, 인식했더라도 혁명이 완성되는 과정에서 권력이 차지하는 절대적인 중요성을 너무 소홀히 여겼던 것 같다. 혁명을 위해서든, 개혁을 위해서든, 한 국가를 자신의 신념대로 뜯어고치고 운영하려면 권력은 필수 불가결한 도구라는 현실적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다. 아니면 모두가 혁명의 대의를 풀고 한마음 한뜻으로 달려간다면 권력은 누가 쟁취하든 상관없을 정도로 순진했던 것일까? 이러했던 내 생각이 이 책을 읽으면서 앞선 판단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되었고, 아니나 다를까 로버트 서비스 역시 트로츠키는 권력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가는 데 필요한 결단력과 의지가 없었다고 결론 내린다.

히틀러(Adolf Hitler)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폭발적인 연설 솜씨, 여러 해 동안 베스트셀러 작가였을 만큼 탁월한 작문 실력, 지옥이라도 엎어버릴 만큼 성난 군중을 달래 집으로 돌려보내는가 하면 패퇴하여 도망치는 오합지졸 같은 군인들을 설득하여 다시 전장으로 보내 싸우게 하는 대범한 용기와 뛰어난 대중 선동 능력 등 10월 혁명과 러시아 내전의 영웅으로 활약하여 자신의 재능을 증명했던 트로츠키였지만, 결국에는 스탈린과의 권력 투쟁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마오쩌둥(毛泽东, Mao Zedong), 장제스(蔣介石, Chiang Kai-shek), 히틀러, 스탈린 등 20세기에 이름을 날린 독재자들의 필수 미덕이었던 권력 쟁취에 대한 집념과 의지가 부족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트로츠키의 실패 원인을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했음을 전면적으로 부인하기는 어렵지만,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게 느껴질 수도 있다.

고상한 혁명가 트로츠키와 악랄한 혁명가 스탈린

석연치 않은 부분을 조금 메워보자면, 트로츠키도 스탈린처럼 충성을 바치는 측근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자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은 아니었던 트로츠키는 권력 투쟁의 장에서 자신을 지지해주고 자신의 편에서 싸워줄 정치적 피후견인 집단은 일부러 만들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무장해제를 한 셈이다. 혁명 전 그루지야에서 무장 강도단을 성공적으로 이끌던 스탈린은 이미 이 시절부터 나름의 자기 집단을 만들고 있었다.

능력보다 자신에 대한 충성도로 인선했던 스탈린과는 달리 트로츠키는 과거 행적이나 사상에 개의치 않고 능력 위주로 필요한 사람을 뽑았다. 트로츠키는 더러운 방식으로 싸우는 것을 싫어했다. 이에 비해 스탈린은 주로 더러운 방법으로만 싸우려고 들었다. 사람의 보편적인 감정이 결여된 트로츠키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타협할 줄도 몰랐고, 주위 사람과 어울려 떠드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으며, 동료 당 지도자들에게서 신뢰가 넘치는 따뜻한 정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아주 기초적인 사실도 몰랐다. 그럼으로써 통합을 외치면서도 한편으론 동료에게 신랄한 조롱을 퍼부으며 자신도 모르게 불필요한 적들을 양산해내는 모순을 범하고 말았다. 공포 정치의 대가로 악명높은 스탈린조차 종종 동료와 방탕한 밤을 보내거나 옛 친구를 자신의 별장으로 초대하기도 하고, 사정이 어려운 친구들에게는 자신의 월급봉투를 탈탈 털어 보내기도 했다. 또한, 스탈린은 지인들 앞에서 노래 부르고 농담하며 유쾌한 시간을 갖기도 했다. 스탈린과 비교하면 트로츠키의 사교 능력은 ‘제로’라기보다는 적을 양산해 낸다는 점에서 차라리 ‘마이너스’라고 볼 수 있다.

스탈린 역시 극히 자기중심적이었지만, 충돌이나 대립, 갈등이 생기거나 모욕을 당하면 참지 못하고 바로 폭발시키는 일이 많았던 트로츠키와는 달리 되도록 그 자리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는 냉철한 자제력을 발휘할 줄 아는 현실적인 면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비상한 스탈린의 기억력은 이런 일은 절대 잊지 않고 훗날 충분히 되갚아 준 반면에 애초에 타인의 인간적인 면에 관심이 없었던 트로츠키에겐 사사로운 복수나 원한에 집착하는 것은 권력에 집착하는 것만큼이나 낭비적인 일이었던 같다. 아마도 트로츠키에게 그런 것은 고상한 혁명가가 품기에는 너무나 가소롭고 형편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소련에서 추방되고 외국 망명 생활에서 보여준 이방인에 대한 트로츠키의 태도는 그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순진했으며 의심이라고는 할 줄 몰랐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그는 온갖 더럽고 추잡하고 음흉한 중상모략과 음모가 난무하는 권력의 중심지에서 남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내려는 한 마리의 도도한 고니처럼 꼿꼿하게 버티려 했던 외롭고 오만하며 독선적인,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눈부신 재능을 겸비한 혁명가였다.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트로츠키의 도도한 자태는 혁명적 이념과 혁명적 이상으로 모든 것을 깡그리 불살라 버리고 남은 잿더미에서 유일하게 찾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애처로운 흔적이다. 그나마 정치적 암살이 그를 이데올로기에 헌신한 순교자라는 동정적인 인상을 심어주는 바람에 광풍의 역사 속에서 곧 날아가 버릴 것 같았던 그의 애처로운 흔적은 여태껏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혁명에 대한 갈망과 공포의 묘한 공존

수파에 굴복하기보다는 투쟁하다가 몰락하는 길을 택했던, 권력의 쟁취를 최고 목표로 삼지 않았던 트로츠키는 진정한 혁명가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의 인간적 결점과 오점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오직 프롤레타리아만이 세상을 재앙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모든 노동하는 사람들이 세계의 예술적 • 과학적 성취를 누리는 해방의 날을 진심으로 꿈꿨다는 점에서 트로츠키의 유언 “나의 혁명적 정직성에는 단 하나의 오점도 없다”라는 말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혁명이 역사의 무덤 속에 묻힌 오늘날 혁명가를 회상하는 일은 달지도 않고 쓰지도 않은, 아무 맛도 없는 무미건조한 일이다. 그러나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한 사람으로서 ‘혁명’이라는 단어는 가까이하기엔 너무나 아찔하고 멀리하기엔 너무나 유혹적인 금단의 열매다.

한편으론 비록 맛볼 수도 없고, 설령 맛을 본다고 해도 삼킬 수 없는 악마의 사탕일지라도 우리는 세상에 만연한 부당함에 대한 분노가 극치에 이르면 ‘이 더러운 세상 혁명으로라도 확 뒤집혔으면’ 하는 말을 무심결에 내뱉는다. 미약한 개인으로서 어떻게도 해볼 수 없는 부조리하고 불공정한 세상과의 일방적인 대결에서, 불만이 팽배해질수록 자신의 무기력은 더욱 또렷해지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혁명’은 일종의 푸념 아닌 푸념이다. 하지만, 곧 그런 과격한 말을 내뱉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란다. 혁명은 아름답지도 않고 낭만적이기도 않으며 평화롭지도 않다는 것을 아주 잘 보여준 20세기 역사를 떠올린 이성이 자신을 질책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때론 찰나지만 무의식중에 혁명을 갈망하면서도 불끈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를 수밖에 없는 것은 잠시 자리를 떠난 이성이 재빨리 되새겨준 20세기 혁명사의 찬란한 궤적이 남긴 악몽과도 같은 혼란과 파괴를 결코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혼란스러운 혁명 이미지를 전해준 대표급 선수 중에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혜성처럼 사라진 트로츠키가 있다. 그래서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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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5일 화요일

[책 리뷰] 폭력, 억압, 감시의 핏빛 삼위일체 ~ 코뮤니스트(로버트 서비스)

Comrades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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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억압, 감시의 핏빛 삼위일체

Original Title: Comrades!: A History of World Communism by Robert Service

그러나 냉전은 끝났고 서방이 승리했다. 승리가 결정된 특정한 날짜는 없다. 군사적 항복 같은 어떤 사건도 없었다. 사람들이 거의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 과정은 완결되었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전 지구적으로 패배했음은 부인할 수가 없다. (『코뮤니스트』, p713)

체코슬로바키아 극작가 바츨라프(Václav Havel) 하벨은 다음과 같이 상황을 묘사한다. “우리 모두는 전체주의 체제에 익숙해졌고, 체제를 바꿀 수 없는 사실로 수용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계속 굴러가게 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저 전체주의 체제의 희생자인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전체주의 체제 창출을 함께 도왔기 때문이다.” (『코뮤니스트』, p563)

날에, 그러나 그리 멀지 않은 옛날에 천년왕국 운동이 있었다. 한편, 충분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증적인 과학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산업혁명 이후에도 천년왕국을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볼셰비키라 불리었고, 곧 다가올 자본주의의 파멸을 역사적 필연이라 주장하며 완벽한 사회에 대한 오랜 꿈을 이루게 될 사회주의 시대를 실현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들은 지구 역사상 최초로 공산주의 혁명에 성공했고, 천년왕국을 건설할 실질적 기반이자 힘이 될 권력을 장악하는 데도 성공했다. 세상에 지금껏 없었던 국가 체제를 막 완성한 입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천년왕국에 바짝 다가서는 듯했다.

하지만, 인민에게 새롭고 독창적인 국가 체제는 한마디로 괴물이었다. 혁명으로 권력의 정점에 올라선 사람들은 훗날 이름하여 ‘전체주의’라 불리게 될 가혹한 체제의 맷돌을 마음껏 돌리면서 그 속에 자유, 민주, 사적 소유, 사생활, 전통, 종교 등 진정 인민들이 원했던 모든 가치를 꾸역꾸역 밀어 넣은 다음 인정사정없이 으깨버렸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곧 완성될 사회주의 유토피아에 대한 선전만은 멈추지 않았다. 입으로는 천국을 이야기하면서도 눈과 귀로는 인민들을 감시하고, 두 손과 두 발로는 인민들을 사정없이 짓밟는 이 놀라운 예비 천년왕국에서 인민들은 미래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에 의지하며 모든 것을 인내하고 인내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들이 희망하던 미래는 사악하고 음흉한 공산주의자들이 선전하는 천년왕국이 아니라, 어떻게든 몰락해 버린 공산주의자들이 그들의 눈앞에서 말끔히 사라지는 날이었다.

들의 바람대로 공산주의는 역사의 종말을 고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가 오래 버티는 바람에 그 역사적 날을 보지 못하고 맷돌 속에서 갈리고 갈리다 끝내 먼지가 되어 사라진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매일매일 되풀이되는 가차 없는 삶 속에서 공산주의 체제가 몰락해야만 되찾을 수 있는 자유를 은밀하게 상상하고, 공산주의와 절대 공존할 수 없었던 종교적 삶에 몰래 의지하며 고된 삶을 위로했을 것이다. 하지만, 니체의 말대로 신은 죽었고 신의 빈자리는 끔찍하게도 레닌으로 대체되었으며 신전을 관리하는 대사제 자리에는 악마도 무릎 꿇고 한 수 배우려고 하는 스탈린이 들어섰다. 폭력, 억압, 감시라는 저주받을 삼위일체는 완성되었고, 이에 탄력을 받은 체제의 맷돌은 진정 인민들이 원하는 것들을 꼼꼼히 갈아엎어 버림으로써 한 세기를 풍미할 전체주의적인 공산주의 체제를 완성했다.

사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초기에 보여준 약간의 성장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비전을 보여주지 못한 가혹한 소련 체제가 그토록 오래도록 유지되고, 또한 대물림의 대물림된 이유가 무엇인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또한, 소련 체제의 완성과 유지, 그리고 전염성을 통해 설명되는 공산주의는 본질적으로 전제적인지 아니면 잠재적으로 해방적인지에 대한 역사적 논쟁에 대한 결말도 역시나 궁금하다.

마르크스 이전의 공산주의부터 카불에서 할크(Khalq)가 권력을 장악한 20세기 마지막 공산주의 혁명까지 통찰하면서 앞의 공산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에 진지하게 답하려는 책이 바로 로버트 서비스(Robert Service)의 『코뮤니스트: 마르크스에서 카스트로까지 공산주의 승리와 실패의 세계사(Comrades!: A History of World Communism)』라 할 수 있다. 한때 지구의 3분의 1을 붉게 물들였던 공산주의가 어렴풋이 싹튼 다음 근근이 줄기를 뻗고, 그럼으로써 끈질기게 뿌리를 내리고 야심 차게 성장하여 괄목할만한 번식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탐구하려는 이 하나의 목적만으로도 이 책 『코뮤니스트』를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 당연히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는지라 다소 딱딱하고 지루한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한때 냉전체제의 한 축으로서 제3차 세계대전의 원흉이 될 수 있었던 공산주의를 모르고서는 인류의 현대사를 얘기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비록 공산주의 사상에는 흥미가 없을지라도 20세기 현대사를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로 공산주의를 바라본다면 『코뮤니스트』만큼 유혹적인 책도 없다.

동자들은 재능에 따라 과제를 배당받고 일에 따라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생시몽(Saint-Simon)의 주장보다 더 급진적인, 사람들이 수행한 일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지불받아야 한다는 블랑(Louis Blanc)의 주장은 꽤 매력적이다.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 물질적 제화를 얻을 수 있다면, 그리고 물질적이고 소비적인 탐욕이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준으로 적절하게 조절될 수 있다면, 이런 사회에서는 누구나가 물질적으로 최소한의 인간적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삶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점이 나름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던 나의 시선을 끌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 공산주의 역사는 이런 장밋빛 이상과는 전혀 다르게 폭력과 억압, 감시의 핏빛 삼위일체를 신봉한 가혹한 전제적인 체제로 발전하고 굳어졌다. 그러다 과거 역사 속으로 사라진 수많은 전제주의 정부의 실례를 따라 몇몇 변종을 제외하고는 1989년 동유럽이 무너지던 날 전후로 무더기로 사라졌다. 이로써 공산주의는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실패가 소멸을 뜻하지는 않는다. 공산주의를 배양했던 억압, 착취, 가난, 그리고 절망감이 인류에게 남아있는 한 공산주의, 혹은 그 변종이 활동할 틈은 여전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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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6일 일요일

[책 리뷰] ‘사악함’에 가려진 그의 진짜 모습 ~ 스탈린 강철 권력(로버트 서비스)

Stalin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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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함’에 가려진 스탈린의 진짜 모습

Original Title: Stalin: A Biography by Robert Service
이 책에서는 스탈린이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다면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스탈린은 관료이며 살인자였지 만 지도자, 작가, 편집자이기도 했고, 이론에도 일가견을 보였을 뿐 아니라 젊었을 때 시를 쓰고 예술도 추구했으며, 가정이 있는 사람이었고 한편으로는 매력도 있었다. (『스탈린 강철 권력(Stalin: A Biography)』, p11)

포 정치의 대가 스탈린(Stalin)이 사악한 사람이었다는 말에는 감히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가 역사의 오명을 남길 만큼 사악하지 않았더라면 레닌 사후 펼쳐진 권력 쟁탈전에서 트로츠키(Trotsky), 지노비예프,카메네프,부하린 등의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자신만의 독재 체제를 정립하고 죽을 때까지 한 점 흐트러짐 없이 ‘공포 정치’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폭도나 반란을 잔인하게 진압한 트로츠키도 스탈린 못지않게 사악했다. 하지만, 트로츠키의 사악함이 귀족적인 오만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면, 스탈린은 어렸을 때부터 단련된 폭력에서 비롯된 사악함이었다. 그래서 레닌 사후 펼쳐진 권력 쟁탈전에서 (자만심에서 비롯된 우유부단함도 있었지만) 트로츠키는 체면상 사악하게 밀어붙일 수가 없었지만, 스탈린은 안면몰수에서 비롯된 사악함이었기에 거칠 것이 없었다.

스탈린을 사악했다고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분명히 스탈린은 사악했지만, 그에게는 사악함 그 이상의 뭔가가 있었다. 더군다나 스탈린 통치 시절 (믿어지지 않지만) 생각보다 많은 소련 인민들이 보여준 스탈린을 향한 열렬한 환호와 지지, 그리고 그가 죽었을 때 거의 이성을 잃을 정도로 슬퍼한 수많은 소련 인민들을 설명하려면 스탈린에게 거북이 등딱지처럼 달라붙은 ‘사악함’이라는 이미지는 어떻게든 극복해야 한다. 그것은 스탈린이 비록 의심만으로 정적들을 살해하고 몰염치로 기아를 버려둬 인민을 아사시키고, 강제노동수용소인 ‘굴라크’를 운영하면서 인민의 삶을 짓밟은 진짜로 사악한 사람이었을지라도 야망을 향해 꾸준히 전진할 수 있는 굳건한 의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실하게 목적을 달성하는 영악함, 그리고 권력을 휘어잡고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추종자들을 거느릴 수 있는 사교성과 매력이 있었음을 말한다. 이 모든 것들은 스탈린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사악하기만 했던 인물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나름 매력적인 인물이었음을 시사한다.

시아 혁명사 연구에서 탁월한 업적을 인정받은 영국의 역사학자 로버트 서비스(Robert Service)의 『스탈린 강철 권력(Stalin: A Biography)』은 역사가 스탈린에게 씌운 ‘사악함’이라는 굴레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에겐 ‘사악함’ 이상의 복잡하고 역동적이며 다면적인 뭔가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스탈린이 권력을 잡기 전에 보여준 여성 편력은 그가 천연두와 마차 사고로 얻은 외모적인 콤플렉스와는 상관없이 남성적인 매력이 충분했음을 말해준다. 젊은 스탈린은 낭만적인 시를 짓는 예술가이자 자신의 혁명에 대한 신념과 이상을 글로써 표현하려는 작가이기도 했다. 스탈린에 대한 알릴루예바 가족의 변함없는 애정은 그가 가족과 친지에게 친절을 베푸는 가정적인 면도 없지 않았음을 대변한다. 스탈린은 권력 근처를 배회하는 사람에겐 냉정한 도살자였을지라도, 스탈린에게 암소 한 마리를 선물하려는 일흔 살 된 농부의 간곡한 편지, 거리에서 스탈린과 우연히 마주친 것만으로도 감격에 겨워 울음을 터트린 어느 한 할머니, 그리고 스탈린이 죽었을 때 보여준 인민들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듯한 오열은 스탈린에 대한 인민들의 찬양이 순전히 공산당 선전 속에서나 있을법한 허구가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마지막으로 스탈린은 평생 자신이 마주친 세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자 끊임없이 공부하고 책을 읽은 지식인이었다. 성격적으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인간 폭탄이었고, 거짓말쟁이의 음흉한 음모꾼인 데다가 기회주의적이고 변덕스럽고 자존심 강하고 의심 많고 명예심과 복수심에 불타고 지극히 자기중심점인, 한마디로 인격에 심히 상처를 입은 사람이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수많은 반대자를 억압하면서 소련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달성하고 제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장본인이라는 것 역시 부정하기 어렵다.

2000년에 시행된 20세기 역사에서 가장 찬사를 보낼 만한 시기를 묻는 여론 조사에서 스탈린의 독재 시대가 무려 26%의 지지를 얻었다고 한다. 물론 스탈린 독재에 반대하는 의견은 이보다 더 훨씬 높은 48%였지만, 외부에서 보기엔 공포 그 자체로 보였던 스탈린 시대가 실제로 그 시기를 살았던 사람에겐 나름의 향수와 추억을 남겼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소치는 공산주의가 무너지면서 얻는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았던 사람들의 분노, 자유주의가 확산하고 서구 문명이 들어서면서 만연해진 물질주의와 방종에 대한 불만, 2차 세계대전의 승리에서 얻은 자부심, 그리고 스탈린 시기에 젊은 시절을 보냈다는 청춘 시절에 대한 동경과 추억 등도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억의 쇠퇴가 일으킨 억압과 질서에 대한 혼동이다. 사람은 기억하고 싶은 것, 좋은 것만 기억하려는 경향이 있다. 때로는 이를 위해 기억을 만들기도 하고 심각하게는 날조해내기까지 한다. 이것은 스탈린 시대에 인민들이 극장표를 사려고 가지런히 줄을 선 모습만 기억하고, 한쪽 손엔 총과 또 다른 한쪽 손엔 굴라크행 기차표를 들고 매의 눈으로 감시하는 억압적인 체계를 기억 속에서는 영원히 지워버렸다는 뜻이다(아마도 이런 이유로 여전히 박정희 시대를 그리워하는 한국 사람이 존재하는 것 아닐까?).

『스탈린 강철 권력(Stalin: A Biography)』은 위대하게 사악한 독재자 스탈린의 ‘사악함’ 뒤에 숨은 능력과 매력의 재발견이라는 다소 심란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사악함’이야말로 최고 권력의 자리로 신속하게 올라서고, 그 권력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악덕 중 가장 큰 효과를 보여주는 재능 중 하나임을 말하는 것 같아 불편하다. 사실 장기 집권한 독재자 중에 사악한 이면을 드러내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악함은 인류가 경계해야 할 악덕이지만, 그 사악함으로 누구보다 빠르게 목적을 달성하고 성공할 수 있다는 가슴 아픈 현실은 사악함의 대가로 흘린 인류의 피와 눈물의 강이 헛되이 망각이 바닷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 같아 통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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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25일 일요일

[책 리뷰] 마오처럼 크나큰 실수들을 저지른 중요한 인물 ~ 장제스 평전

Chiang Kai Shek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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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처럼 크나큰 실수들을 저지른 중요한 인물

Original Title: Chiang Kai Shek: China's Generalissimo and the Nation He Lost by Jonathan Fenby
이 모든 점을 고려할지라도, 그의 가장 위대한 공적은 나날이 통일되어 가는 중국의 최전면에서 그토록 오래 생존했다는 것이다. 중국 통일이 최종적으로는 그의 가장 큰 적수의 무대가 되었더라도 말이다. (『장제스 평전』 , p617)

‘부재’로써 그의 역사적 의의를 추론하다

사가 승자의 전리품이라면, 이미 오래전에 ‘실패한 지도자’라는 이미지로 굳게 자리 잡은 장제스(蔣介石, Chiang Kai-shek)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역사라는 학문에 객관성과 엄밀성을 중시하는 과학적 탐구 방법이 접목될 수 있다면, 아무리 잘못이 크고 결점이 많더라도 어찌 되었든 그는 격동과 혼돈의 시대에 (잠시나마) 우뚝 선 지도자이자, 타이완으로 도망하기 전까지 중국을 대표하면서 실재적으로도 명목상으로도 중국을 통치한 지배자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장제스의 역사적 중요성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면, 장제스의 역사적 사명과 중요성, 그리고 그가 끼친 영향이 무엇인가를 더욱더 정확하게 판단하려면 좋든 나쁘든 만약 그가 부재했더라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를 고려해 보는 것만큼 확실한 일은 없다.

조너선 펜비(Jonathan Fenby)의 『장제스 평전(Chiang Kai Shek: China's Generalissimo and the Nation He Lost)』은 그의 부재를 가상했을 때, 역사의 진로가 어떻게 방향을 바뀌어 지금과 다른 세상을 그려냈을지를 독자의 머릿속에서 추론하고 유추하는 데 필요한 모든 소스가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방대하고 광범위한 자료를 기반으로 (저자가 밝힌 바대로) 30년 만에 처음으로 탄생한 ‘전격적인’ 장제스 평전이다. 저자 조너선 펜비가 참고한 수많은 자료 중 최초로 장제스의 일기를 참고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매우 큰 의미와 가치가 있는데, 왜냐하면 장제스는 매일 여명 전에 기상해 체조했던 것처럼 날마다 일기에 자기 생각을 기록하고 앞으로의 목표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고로 일기는 그의 외면적 언행 뒤에 숨은 진의를 판단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자료다.

만약 중국에 장제스가 없었다면?

너선 펜비는 만약 중국에 장제스가 없었다면, 군벌 시대와 중국의 분열은 지배 범위를 놓고 끝없이 싸우는 봉건 할거 국면으로 빠져들었을 가능성이 컸을 것으로, 또한, 1936년 장제스가 동북군 총사령관 장쉐량에게 납치되었던 시안에서 그대로 피살되었다면, 국민당 정부 내의 친일파가 도쿄와 동맹을 맺고 중국 군대가 일본에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짙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히틀러가 서쪽으로부터 소련을 침공할 때 일본군은 동쪽으로부터 소련을 침공해 제2차 세계 대전의 역사는 완전히 뒤바뀌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나는 조너선 펜비의 의견에도 공감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도 예상해 본다. 만약 반일감정보다 반공감정이 더 압도적이었던 장제스가 없었다면, 상하이 대숙청도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공산당 봉기도 국민당이 진압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국민당 이데올로기를 이용해 대중 세력의 지지를 얻게 해줄 장제스라는 구심력이 없었다면, 국민당 세력은 쑨원(孙文, Sun Yat-sen) 사후 크게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하면 중국공산당이 국민당 대신 주도권을 잡는 시간이 더 빨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아니면 누군가 우격다짐으로 국민당을 이끌어갔더라도 극단적으로 공산당을 혐오했던 장제스가 없었고, 세력 확장보다는 수성에 더 큰 가치를 두었던 군벌들의 특성이나 동족끼리의 전쟁을 혐오했던 청년 원수 장쉐량(張學良,Zhang Xueliang) 등을 고려하면 국공합작이 큰 파탄 없이 꽤 순조롭게 진행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순조로운 국공합작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엄청난 비극을 내포하고 있다. 한반도와 유사한 상황으로써 일본의 패전 후 제기될 수 있는 중국의 분단 가능성이다. 양쯔강을 경계로 북쪽의 공산당과 남쪽의 국민당으로 예상할 수 있는 중국의 분단은 이후 냉전의 역사를 통째로 바꿨을 것이며, 어쩌면 이로 말미암아 한국전쟁이 중국전쟁으로 불똥이 튀어 세계 3차대전을 일으켰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상황을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은 조너선 펜비가 내린 결론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최전선에서 장제스가 그토록 오래 생존했기 때문이고, 그러므로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위대한 공적이다.

철학처럼 논리적이고 명징하게, 문학처럼 우아하고 생동감 있게

심이 깃들기도 하고 특별한 목적도 없고, 개인적 혹은 역사적으로 억압된 감정이나 분노를 분풀이하여 카타르시스를 얻고자 하는 치졸한 상상력에서 기인한 역사에서의 ‘만약’이라는 가정(假定)은 시간과 사고력의 낭비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만약 역사의 이해와 통찰력 증대라는 합목적성과 객관적이고 공정한 역사적 자료에 기반을 둔 가설은 역사를 한층 더 깊게 이해하고 그에 비추어 현실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역사를 논함에서 ‘만약’이라는 가정(假定)이 꼭 금단의 열매가 될 필요는 없다. 또한, 곁에 있으면 그것의 소중함을 인지하기 어렵고 막상 그것이 사라져야 그것의 중요성이나 영향력이 드러나듯, 그동안 간과해 온 장제스의 중요성과 영향력을 현실감 있게 부각시키고자 그의 부재를 가상한 것은 참신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장제스의 부재를 상상함으로써 그의 중요성이 드러나더라도 그와 그가 이끌었던 국민당의 부정, 부패, 혼란, 무능, 무지 등의 부정적 평가가 희석되는 것도 아니다.

『장제스 평전』은 장제스의 부재를 가정함으로써 그의 역사적 의의를 밝히고자 하는 책이지 그러한 재조명 속에서 부각될 수 있는 장제스의 중요성으로 그의 정책적 오류나 개인적 결점을 변명하거나 슬쩍 덮어보려는 그런 불순한 의도로 쓴 책은 아니다. 자신이 보편적인 도덕을 강조했음에도 친인척뿐만 아니라 당원들의 부정부패를 눈감아 주었던 장제스의 치명적 결점과 모순을 통렬하게 고발하는 등 철저하게 비판적으로 장제스와 그의 국민당을 분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이 장제스를 변호하거나 미화하고자 나온 책이 아님은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서방 기자로는 최초로 옌안 시절의 공산당을 방문한 에드거 스노(Edgar Snow)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공산당이 아편을 취급했다는 증거를 제시하는 등 그의 날카로운 시선에는 공산당도 비껴갈 수는 없다. 이런 균형 잡힌 날카로운 시각은 장제스에 대한 면죄부나 영웅화에 대한 약간의 가능성조차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다.

굳이 장제스의 부재를 들먹임으로써 그의 영향력을 반추해 보는 것은 그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장제스에 대한 가혹한 평가를 동정한다거나 그것의 부당함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역사를 서술하고 한 인물을 평가하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 할 수 있는 공정성과 객관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조너선 펜비의 현명한 고집이다. 그럼으로써 15세에 장제스와 결혼해서 장제스가 쑹메이링(宋美齡, Soong May-ling)를 만나고 나서 그로부터 버림받을 때까지 장제스의 아내였던 천제루(陳潔如, Chen Jieru)가 자신의 회고록에 기록한 것처럼 평범한 한 남자가 어떻게 하늘이 준 기회를 끈질기게 부여잡고 마침내 한 나라의 명실상부한 지도자로 올라섰는지를 철학처럼 논리적이고 명징하게, 그리고 문학처럼 우아하고 생동감 있게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치면서...

지막으로, 조너선 펜비에게 총사령관의 고향 마을을 안내해 준 어느 대학원생은 장제스를 크나큰 실수들을 저지른 중요한 인물이었다고 말하고 나서 잠깐 머뭇거리더니 마오 주석(毛泽东, Mao Zedong)처럼이라는 말을 덧붙였다고 한다. 과거와 사뭇 다른 이러한 평가가 이제 어느 정도 살 만한 해진 경제적 여유에서, 또는 승자의 관용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역사의 오류와 부족한 부분을 바로잡으려는 역사 이해의 발전적 과정과 그로 말미암은 역사 인식 변화의 일부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패배자’, ‘실패자’라는 어둡고 깊은 무덤 속에 묻힌 채 퇴보도 전진도 없이 고정되어 버린 장제스에 대한 기존의 평가를 뒤로하고 새로운 자료와 새로운 방법으로 재평가를 시도하는 이 책이야말로 역사의 부단한 정진이 일구어낸 소중한 성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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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5일 일요일

[책 리뷰] 공산당의 정당성을 경제 성장에 예속시킨 장본인 ~ 덩샤오핑 평전(에즈라 보걸)

Deng Xiaoping and the Transformation of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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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의 정당성을 경제 성장에 예속시킨 장본인

원제: Deng Xiaoping and the Transformation of China by Ezra F. Vogel

처음 정권을 장악했을 때만 해도 덩샤오핑은 이론적으로 민주주의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당내에 더 많은 민주적 토론이 있어야 한다고 격려했다. 그러나 시위자들이 더욱 많은 군중을 끌어모아 중국공산당 영도의 근본 체제를 반대하기 시작하자 그는 과감하게 이러한 도전을 탄압하는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한 성위원회 제1서기가 나중에 말한 것처럼, 민주주의에 대한 덩샤오핑의 시각은 엽공호룡(葉公好龍)과 마찬가지로 진짜로 용이 나타나자 그 역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덩샤오핑 평전』, p352)

계속해서 긍정적인 의미로 ‘민주’라는 말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민주 집중제(民主集中制)’를 견지했다. 일단 당이 결정하면 모든 당원은 이를 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덩샤오핑 평전』, p726)

중국의 경제 성장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

느덧 미국의 뒤를 바짝 쫓는 경제 대국으로 올라선 중국의 놀라운 고도성장 배경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중국 ‘개방 • 개혁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덩샤오핑(鄧小平)이다. 엄밀히 말해 개혁 • 개방은 4인방을 타도하는 데 앞장서고도 중국공산당 역사에서 사라진 비운의 인물 화궈펑(华国锋)이 시작했다고도 말할 수 있지만, 그 눈부신 성과는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 가난한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다, 일부 사람을 먼저 부자가 되게 하라 등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통속적인 구어로 실용주의 노선을 명쾌하게 설파하면서 (뭔가 그럴싸하게 들리는) ‘중국 특색 사회주의’ 이론을 들고나온 덩샤오핑의 영도하에 실현될 수 있었다고, 에즈라 보걸(Ezra F. Vogel)의 『덩샤오핑 평전: 현대 중국의 건설자(Deng Xiaoping and the Transformation of China)』은 말하는 듯하다. 정말 그런 것일까? 흥미롭게도 이와는 정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한 역사학자가 있다. 바로 프랑크 디쾨터(Frank Dikoter)인데, 그는 중국 현대사를 인민 중심으로 다룬 역작인 ‘인민 3부작’ 중 마지막 저서인 『문화 대혁명(The Cultural Revolution)』을 통해 충격적인 가설을 제시하고 있다. 디쾨터는 자신의 책을 통해 중국의 경제 개혁을 이끈 위대한 원동력은 덩샤오핑이 아니라 평범한 보통의 인민들, 그중에서도 농민들이 스스로 궁색한 삶을 개척하고자 하는 의지의 발로로써 일으킨 소리 없는 자본주의 물결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디쾨터의 책은 뭉뚱그려 희생자라는 암울한 통계 수치 정도로만 조명을 받아왔던, 중국 역사의 어렴풋한 배경 같은 존재로만 인식됐던 인민을 새로운 시각과 새롭게 공개된 자료를 동지 삼아 역사의 중심으로 한 단계 끌어올린 역작이니만큼 중국 현대사에 관심 있는 독자에겐 반드시 권하고 싶은 그런 책이다.

아무튼, 한 사람의 전기임에도 1978년 이전까지 덩샤오핑이 살아온 70년이 넘는 이야기는 비교적 적은 분량이 할당되었고, 나머지는 덩샤오핑이 마오쩌둥(毛澤東)의 뒤를 이은 2대 핵심으로 급부상하여 무소불위의 권위를 휘두른 말년을 다루고 있다. 덩샤오핑의 말년은 (우연이건 아니건) 중국의 개혁 • 개방의 찬란한 도약 시기와 일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덩샤오핑 평전』은 중국의 개혁 • 개방의 구상과 진행, 그리고 그 성과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를 얻을 수 있는 책이지만, 그 업적을 오로지 한 사람의 영웅적인 의지로 돌리고 있다는 점이 조금은 개운치 못하다.

공산당의 정당성을 경제 발전에 예속시키다

실 덩샤오핑은 개혁 • 개방에 대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계획이나 구상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최고의 영도자로서 개혁 • 개방에 활력을 불어넣는 데 필요한 많은 일을 주관했다. 이제 막 기지개를 켜는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었던 베트남과 소련과의 국경 분쟁, 그리고 (결국, 피를 보고 말았지만) 톈안먼 민주화 운동을 단호한 판단과 강력한 지도력으로 해결하면서 국가 발전에 필수적인 안정과 평화를 가져왔으며, 장기적인 안목과 유연한 외교력으로 미국과의 수교 및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통해 4개 현대화 노선에 필요한 기술과 자본을 끌어들이는 데 공헌했다. 또한,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처럼 잔인하고 파멸적이지 않은, 교활함마저 감쪽같이 숨겨버리는 우아한 방법으로 개혁 • 개방에 방해되는 인물들을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고 더불어 보수파와의 마찰도 유연하게 피해 가는 특유의 적응력 높은 변칙적인 통치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성과만 뚜렷하다면 일부 당원들의 정도가 미약한 부정과 부패는 눈감아 줄 정도로 오로지 경제 발전을 가속하는 데만 집중했는데, 이는 공산당은 경제 발전을 통해서만 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한 그의 신념을 반영한다. 그가 1992년 남순강화 때 많은 인민의 지지와 환호를 받은 것처럼 개혁 • 개방의 효과를 톡톡히 본 인민들도 분명히 존재했지만, 반면에 또 다른 수많은 인민은 개혁 • 개방 초기부터 심화되는 빈부 격차, 도를 더해가는 당원들의 부정 • 부패, 질적으로는 낮았을지라도 그나마 사회주의 국가라는 이름을 들먹일 수 있게 만들었던 기존 복지 시스템의 해체, 프롤레타리아 국가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열악한 노동 환경, 도시 집중화로 말미암은 열악한 주거 환경, 환경오염 등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이를 덩샤오핑이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먼저 부자가 된 자가 다른 이들을 도와 같이 부자가 될 수 있도록 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희망으로 앞선 문제들을 후세에게 넘겼다. 그는 공산당의 정당성을 오로지 경제 발전에만 예속시킴으로써 그의 뒤를 이은 영도자들도 성장주의에 목매달 수밖에 없게 만든 셈이다.

하지만, 일찍이 산업혁명을 겪은 서구 세계가 저성장 체제로 진입했듯 고도성장은 무한정 지속할 수는 없다. 그리고 내 정보획득력이 부족해서일지도 모르지만, 아직 부자가 (강제적인 고율의 세금 징수가 아닌) 순전히 선의적인 의도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다수의 부자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다. 개혁 • 개방 정책을 중국에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덩샤오핑은 중국이 부자로 향하는 길을 개척한 것은 틀림없지만, 그 많은 부의 대부분은 중국 정부, 기업, 사업가, 관리 등 극히 일부가 독점하며 (그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비판하는) 서구 자본주의보다도 더 극심한 빈부 격차를 낳았다. 덩샤오핑은 중국이 부자가 되면 그 부를 어디에다 어떻게 써야 할지 개략적으로도 제시하지 못했다. 또한, 어느 정도 부를 쌓은 다음에야 의료 보험, 연금 제도 등 경제적 정의를 실현할 사회주의 정책을 1순위로 올려놓아야 하는지 등의 사회주의 국가의 초석이 되는 묵직한 과제들은 손도 대지 않은 채 고스란히 후세로 미뤘다. 그래서 영민하게도 덩샤오핑은 일찌감치 사회주의 고급 단계를 100년 이후의 목표로 연기해 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백만의 백만장자와 1억 명의 중산층에 가려진 12억은 둘째치고 극빈층 1억의 인민들은 여전히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티며 살아가는 중국의 현실을 고려하면, 그 100년 동안 앞에서 제기된 문제 등으로 고통받고 신음하게 될 수많은 인민의 삶을 국가의 안정과 당의 권위를 위해 마땅히 희생된 톈안먼 광장의 열사들처럼 진보와 발전이라는 대의를 위한 값비싼 희생으로 치르겠다는 뜻과 다름이 없다.

우울한 중국인

국은 '2016 세계 행복 보고서'에서 부유한 국가답지 않게 초라하게도 83위를 기록했다. 작가 량샤오성의 냉정한 진단처럼 중국인은 우울한 것이다. 부와 행복이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경제력이 보장되어야만 최소한의 인간적 품위를 지킬 수 있는 삶을 지탱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런 자긍심이 삶의 만족도와 행복에 크나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생각하면, 중국 정부는 부자지만 그 울타리 안에서 사는 인민들은 경제적으로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인민들의 불평 • 불만이 단지 경제에만 한정된 것일까? 앞서 제기한 문제점들에 미흡한 법치와 인권, 그리고 여전한 언론 감시와 통제, 급증하는 노동자들의 시위 건수(하지만, 절대 공개되지는 않는)가 더해지면 앞으로 '세계 행복 보고서' 순위에서 중국이 추락할 여지는 충분한 셈이다.

이것은 경제 성장에만 공산당의 정당성을 부여한 덩샤오핑의 특권계급 독재 하의 불도저식 개방 • 개혁 정책도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는 의미다. 덩샤오핑이 마오쩌둥이 남긴 지속적인 계급투쟁과 대중 선동이라는 과거의 혁명적 유산을 극복함으로써 개혁 • 개방의 길로 중국을 인도하며 수렁에 빠진 국가를 구출해낼 수 있었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급격한 고도성장의 부작용이 점점 더 심각하게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는 현재의 중국은 덩샤오핑의 개혁 • 개방이 남긴 성장지상주의를 극복하고 또한, 덩샤오핑이 후세로 미뤘던 ‘민주’, ‘자유’, ‘인권’ 등 인민의 기대와 삶의 질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보편적 문제를 정의롭고 공정하게 다룰 수 있을 때 현재의 수렁을 빠져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초급 단계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 상당히 부담스러운 분량의 책이며 무미건조하게 업적이나 행적만 기술한 부분은 눈꺼풀을 무겁게 짓누르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에즈라 보걸의 『덩샤오핑 평전』은 현재의 중국을 만든 덩샤오핑의 지도력을 흠모하거나, 혹은 정치가나 리더를 꿈꾸는 사람들이 눈여겨 볼만한 덩샤오핑 특유의 기만적이고 변칙적인 통치술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저서 중 하나다. 그리고 중국 경제가 본격적으로 성장 추진력을 받기까지의 개혁 • 개방 정책의 부단한 정치적 과정을 비교적 세밀하게 다룬 수작이다. 또한, 대체로 덩샤오핑의 치적과 경제를 중심으로 다뤄져 있지만, 중국의 개혁 • 개방 정책과 사회주의 시장 경제를 이해하고 그 문제점과 앞으로의 발전 과정을 논하는 데 있어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역사를 한 사람의 영웅적인 전기로 대체하려는 것 같아 여전히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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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15일 일요일

[책 리뷰] 중국의 마지막 두 황제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 새로운 황제들(솔즈베리)

The New Emperors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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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마지막 두 황제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원제: The New Emperors: China in the Era of Mao and Deng by Harrison E. Salisbury
천원은 마오가 1956년에 죽었더라면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칭송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많은 다른 동지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마오가 그로부터 10년 후에만 죽었더라도 역사는 여전히 그를 높이 평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1976년에 죽었다.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새로운 황제들』, p331)

사(正史)는 중국의 마지막 황제를 신해혁명으로 축출된 선통제 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피로 얼룩진 혁명의 시련을 몸소 체험한 중국인의 기억 속에는 또 다른 황제 두 명이 더 새겨져 있다. 바로 공산당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끈 마오쩌둥(毛澤東)과 개혁 • 개방의 아버지라 불리는 덩샤오핑(鄧小平)이다. 농민을 등에 업고 인민을 옭아매던 봉건주의와 구습에 맞선 공산당은 혁명에 승리하고 권력을 장악하자 예전에는 타도의 대상이었던 구통치계급의 부와 특권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리고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그 권력의 정상에는 새로운 황제 마오쩌둥의 표정없는 둥글넓적한 얼굴이 음산한 광채를 드러내고 있었다. 결국, 비공식적인 황제를 받들게 된 인민의 입장에선 권력 체계와 구조만 바뀌었을 뿐 근본적으로 구체제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천 년 넘게 이어져 온 지긋지긋한 황제의 권력에서 벗어나 이제야 진정한 인민 해방을 맞이할 줄 알았던 그들은 결코 황제라고 불리지 않는 새로운 황제 마오쩌둥의 변덕스럽고 종잡을 수 없을뿐더러 공허하고 현실과 괴리된 망상적인 정책에,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작은 황제 덩샤오핑의 무자비한 탄압에 또다시 피와 땀, 눈물, 그리고 목숨을 떨어내게 될 터였다.

소련 및 중국문제 전문가인 해리슨 E. 솔즈베리(Harrison E. Salisbury) 『새로운 황제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의 중국(The New Emperors: China in the Era of Mao and Deng)』은 중국 해방을 이끈 두 거인인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을 중국의 ‘새로운 황제’라는 시각으로 현대중국을 형성한 주요 사건들을 – 국공내전에서부터 톈안먼 사태까지 – 재구성한 책이다. 또한, 『새로운 황제들』은 봉건주의와 구습, 빈곤 퇴치를 목표로 세운 중국혁명이 뜻하지 않은 새로운 황제 마오쩌둥을 필두로 또다시 인민을 권력의 압제와 관료주의적 병폐, 그리고 기아와 가난이라는 익숙하면서도 반갑지 않은 역사의 늪으로 끌어내리는 악몽과도 같은 시련의 연속적 단면을 슬라이드 필름처럼 어둡고 강렬하게 비춰내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에 남는 분석은 마오쩌둥의 걷잡을 수 없는 변덕과 비현실이며 공허하고 망상적이기까지 한 이상주의에서 마약 중독의 흔적을 발견한 점이다. 당시 아편이 여전히 흔하게 남용되었던 중국에서(『장제스 평전(조너선 펜비, 노만수 옮김, 민음사』은 공산당이 옌안 시절 아편을 취급했던 흔적을 발견했다) 마오쩌둥이 마약에 중독되었다는 물증은 찾아내지 못했으나, 마오쩌둥이 지독한 수면 장애로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했었을 뿐만 아니라 한동안 축 늘어져 있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광적으로 일에 매달리는가 하면, 부하가 항문에 손을 집어넣어 대변을 끄집어낼 정도로 지독한 변비로 고생했다는 사실, 그리고 마오쩌둥 특유의 추상적 사변이나 환상의 세계에서 솔즈베리는 아편 중독의 냄새를 맡은 것이다. 참고로 마약성 진통제의 가장 흔한 부작용은 바로 변비이다.

지막으로 『새로운 황제들』이 솔즈베리의 수년간의 걸친 여행과 주요 사건 관계자들과의 인터뷰와 회고록 등의 현장 체험적인 자료들로 구성된 점은 마치 특별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생생한 현장감과 추리 소설 같은 굉장한 흡입력을 발산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세심함과 세밀함 속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거시적인 맥락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는 차분하면서도 심오한 호흡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필자 같은 일반인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거나 지적 만족감을 채워주는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전공하는 학생이나 학자에게도 신선하면서도 짜릿한 지적 자극을 전해줄 수 있는, 그리고 상처투성이였지만, 찬란하기도 했던 중국 현대사를 깊이 알고 싶어하는 독자에겐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한마디 덧붙이면 주석의 임기 제한 규정을 삭제함으로써 시진핑의 장기집권 기틀을 마련한 중국의 우려스러운 현 상황을 볼 때, 자칫하다간 마오쩌둥, 덩샤오핑에 이은 중국 공산당의 세 번째 황제가 탄생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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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24일 일요일

[책 리뷰] 명령이 남긴 ‘가시’가 주는 위협 ~ 군중과 권력(엘리아스 카네티)

Masse Und Mac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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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이 남긴 ‘가시’가 주는 위협

원제: Masse Und Macht by Elias Canetti

모든 명령은 강박(强迫)과 가시로 이루어져 있다. 강박은 명령을 받은 사람에게 명령의 내용에 맞게 행동하도록 강요한다. 그리고 가시는 명령을 받은 사람 속에 남는 것이다. 명령이 기대한 대로 정상적으로 기능을 발휘할 때 가시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감쪽같이 숨어 있다가 명령에 순종하기 전의 희미한 반항을 통해 그 존재를 드러낼 뿐이다. (『군중과 권력(Masse Und Macht)』, p408)

사람들이 군중 속에서 의기양양해 하는 진짜 이유는 그 속에서 그들을 속박하고 에워싸며 괴롭히는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 그 이상으로 자유를 느낄 수 있는 곳은 없다. 개인이 군중 속에 남아 있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이유는 자신이 거기에서 벗어났을 때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집으로, 혹은 그 자신에게로 되돌아올 때, 그는 다시 그곳에서 한계와 부담과 가시들을 발견하게 된다. (『군중과 권력(Masse Und Macht)』, p432)

‘성공’의 가장 기본적이고 명백한 형태는 무엇일까. 그것은 개인의 가치관, 사회의 가치관, 문화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이 만약 살아남는 것, 다시 말해 생존을 성공의 극치라고 정의한다면 한 개인의 생존을 보장해주는 도구이자 힘 중 최고는 단연코 권력이지 않을까. 살아남는 최후의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은 진정으로 권력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의 가장 깊은 욕구다. 이런 사람들은 권력의 강력한 도구인 ‘명령’으로 다른 사람들을 죽음이나 사지로 몰아넣음으로써 자기 죽음을 모면하고 안전을 도모하며 그럼으로써 생명을 연장한다. 그러나 모든 개개인이 권력을 쟁취할 정도로 권력은 흔하지도 않으며 원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마트 진열대에 널린 상품처럼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개인들은 무리를 지어 생존 확률을 높이거나 군중을 생성해 권력과 부당한 명령에 대항한다. 즉, 엘리아스 카네티(by Elias Canetti )의『군중과 권력(Masse Und Macht)』은 살아있는 생명이라면 반드시 마주칠 수밖에 없는, 하지만 가장 피하고 싶은 ‘죽음’과 모든 생명이 추구하는 ‘생존’이라는 두 불가분의 현상 을 독특한 사고 과정과 원시와 근대 사회, 신화와 전설, 역사와 전기 등 광범위한 자료를 기초로 고찰함으로써 군중과 권력의 기원, 본질, 그리고 다양한 형태를 밝히고자 한 책이다.

리아스 카네티(by Elias Canetti)의 불후의 고전 『군중과 권력(Masse Und Macht)』의 독특한 사고의 결과물 중 눈여겨볼 것은 바로 명령이 남긴 ‘가시’이다. 모든 명령은 강박과 가시로 이루어져 있다. 강박이 명령을 받은 사람에게 명령의 내용에 맞게 행동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라면, 가시는 명령을 받은 사람 속에 남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다. 그것은 감쪽같이 숨어 있다가 명령에 순종하기 전에 희미한 반항을 통해 그 존재를 드러낼 뿐이다. 가시를 피하려면 받은 명령을 즉시 다른 사람에게 떠넘겨야 한다. 그래서 진정한 자유인은 명령을 받고 나서 명령을 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미리 명령을 피할 줄 아는 사람이다. 명령에 제일 많이 시달리는 자는 어린이들이고, 명령의 가시를 모면할 기회가 전혀 없는 사람은 군대의 졸병이다. 항상 고립된 어떤 것으로 남는 가시는 모든 사람이 한 무더기 지니고 다니는 것은 불가피하며, 만약 가시에 짓눌려 마비 상태가 되었을 때 찾아오는 병이 정신분열증(조현병)이다. 반면에 홀로코스트 학살자들이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명령이 남긴 가시를 유대인 학살이라는 죽음의 무더기로 없앴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제거할 가망이 없는 명령의 가시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혹은 가시에 짓눌리고 억눌린 분노의 감정을 방전하고자 사람들은 군중을 형성한다. 수많은 사람이 단결해서 명령을 내렸던 사람들의 집단에 대해 반기를 드는 것이다. 그렇게 역전 군중은 형성되고 봉기와 혁명이 일어난다.

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는 오랜 역사의 과정을 거쳐 오늘날과 같이 단단하고 확고한 형태를 가지게 된 명령은 어느 모로 보더라도, 사람의 공동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요소라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현대인의 고질적인 불안과 스트레스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명령이 남긴 가시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당신의 몸속에 톡 쏘는 소화제와 쌉쌀한 위장약, 그리고 따끔한 주사로도 내려가지 않는 십 년 묵은 체증이 있다면, 그것은 십중팔구 누군가의 명령이 남긴 가시이다. 그 누군가는 당신의 부모나 선생님일 수도 있고, 아내나 친구일 수도 있으며, 직장 상사나 군대 상관일 수도 있다. 아니면 자신에게 부여한 막중한 책임감이나 과중한 목표 의식이 나은 부담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군중과 권력(Masse Und Macht)』을 통해 고슴도치처럼 당신의 몸속에 박힌 가시를 흐릿하게나마 인지할 수 있게 된다면, 지금 당장 축배를 들어라. 왜냐하면, 앞으로 더 많은 가시가 쌓여 정신분열을 일으키는 최악의 사태는 막게 된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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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27일 일요일

[책 리뷰] ‘군중심리’를 탁월하게 악용한 자, 그는 히틀러!

Psychologie des foules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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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심리’를 탁월하게 악용한 자, 그는 히틀러!

원제: Psychologie des foules by Gustave Le Bon
지극히 편협한 정신과 결합한 강력한 확신이 권위를 갖춘 사람에게 부여하는 힘을 생각하면 때로는 소름이 끼친다. 그렇지만, 이 같은 조건을 실현해야만 장애를 무시하고 강한 의지를 발휘할 수 있다. 군중은 활기와 확신에 가득 찬 인물이야말로 언제나 자신들에게 필요한 지도자라고 본능적으로 믿는다. (『군중심리』, p227)

랑스의 사회학자 귀스타브 르 봉(Gustave Le Bon)이 쓴 『군중심리(Psychologie des foules)』를 읽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며 떠나지 않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역대 최고의 선동가 히틀러다. 의식하는 개성의 소멸, 의식하지 못하는 개성의 우위, 암시와 감염을 통해 감정과 생각을 한 방향으로 인도하고, 암시된 생각을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경향이라던가, 또는 충동성, 과민성, 추론 능력결핍, 판단력과 비판정신의 부재, 감정 과잉 등 개인의 지적 수준에 상관없이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는 군중심리의 특징을 극단적으로 악용한 자이자 최대 수혜자는 히틀러가 아닐까? 히틀러의 연설은 비논리적이고 증거도 없음에도 확고한 확언과 인상적인 이미지들을 반복적으로 대중들에게 주입함으로써 ‘카리스마’라는 강력한 개인적 위엄을 구축하고 한편으로는 군중을 압도했다. 자신의 카리스마가 발휘하는 힘과 영향력, 그리고 카리스마에 압도된 군중을 어떻게 이용할지 알았던 히틀러는 영악하게도 직접적인 명령이 아닌 단지 암시만으로 유대인 학살을 일으켰다. 아니다 다를까. 히틀러뿐만 아니라 무솔리니, 드골, 레닌, 스탈린도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를 읽었다고 하니 귀스타브가 경험 • 실증주의적 사고관에 따라 예리하고 냉소적으로 관찰한 군중의 심리적 특성이 역사적으로 방증된 것이나 다름없다.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내 생각엔 문화대혁명으로 대중을 선동하고 대중을 좌지우지하며 중국을 혼란의 도가니 속으로 밀어붙인 마오쩌둥도 『군중심리』를 읽었을 것 같다.

런데 더더욱 소름끼치는 일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가서 히틀러의 부흥과 몰락을 보고 온 것처럼 군중의 지도자 특성들을 나열한 문장마다 히틀러를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참고로 『군중심리』가 출판된 1895년에 히틀러는 막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가장 편협한 지도자들이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 역사상 큰 사건은 오직 자기 자신만 믿는 보잘것없는 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 지속적인 의지력은 매우 드물고 강력한 능력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그 앞에서 굴복한다는 것, 마지막으로 - 이 부분은 오싹 소름이 돋을 정도로 충격적 - 충분한 위엄을 갖추고 그것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은 인간을 학대하고 수백만 명씩 학살하고 침략에 침략을 거듭할 수 있다는 것! 정말 대예언가의 말씀처럼 히틀러와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가? 그뿐만 아니라 대기근으로 수천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고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는 마오쩌둥도 앞에 나열한 군중의 지도자 특성 대부분이 들어맞는다. 군중이 해바라기처럼 따르는 인물이 그런 군중의 죽음에 가장 무심하다는 사실은 권력을 지향하는 이에게 군중은 일회용 젓가락 같은 소비품이자 권력 놀이의 졸개 정도로 취급됨을 시사하고도 남는다.

장에서 많은 관객과 함께 봤을 땐 재미있거나 무서웠던 영화들이 집에서 혼자 보면 유치하거나 수면제로 둔갑하는 경우, 그리고 스포츠 경기장에서 느껴지는 무아지경과 사전에 특별히 준비된 것도 없지만 지휘자의 신호에 맞추어 일사불란하게 응원하는 관중 등은 과잉된 감정의 전염과 과민성, 암시된 생각을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군중심리의 일상적인 사례다. 군중심리는 이렇게 한 장소에 무리지어 모였을 때뿐만 아니라 ‘세월호’(전국을 노란 꽃으로 물들인 리본을 벌써 잊었는가)나 자연재해 등 큰 사건이나 위기, 재난을 통해서 장소와 계층에 상관없이 작동하기도 한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면서 교육 수준도 높아졌지만, 개인의 의식적 활동이 군중의 무의식적 행위로 대체되는 군중심리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오히려 인터넷을 통한 SNS의 비약적인 발달로 익명성을 띤 이질적 군중세력이 급속히 성장한 요즘이야말로 군중심리를 이해하는 것이 곧 시대와 사회의 흐름을 읽는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다. 그렇다면 군중심리를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는 자는 성공의 지름길을 발견한 것이나 다름없다. 거꾸로 공공의 이익이든 개인적 이익이든 군중심리를 이용하려는 선동가나 야심가에게 지배당하지 않으려면, 교육과 학습이 군중의 정신 상태를 개선하여 지적 무의식을 보완할 수 있다는 『군중심리』의 저자 귀스타브 르 봉의 논리가 맞는다면 군중심리에 대한 이해와 고찰은 군중심리의 악용과 속박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다. 한마디로 큰 히틀러든 작은 히틀러든 야심과 권력욕, 지배욕으로 가득 찬 인정사정없는 놈들에게 개처럼 이용당하지 않으려면 책을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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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18일 일요일

[책 리뷰] 지속불가능한 체계를 극복하는 ‘무지개색 진화’ ~ 값싼 음식의 실제 가격(마이클 캐롤런)

The Real Cost of Cheap Food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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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불가능한 체계를 극복하는 ‘무지개색 진화’

원제: The Real Cost of Cheap Food by Michael Carolan
세계 인구의 4분의 1이 과도하게 먹어 위험에 빠져 있고, 또 다른 4분의 1은 너무 적게 먹어 목숨을 잃을 위기에 빠져 있으며, 일부는 비만과 영양 결핍을 동시에 겪으며 죽어 갈 위험에 노출된 이 상황을? (『값싼 음식의 실제 가격』, 18쪽)

약 어떤 상품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적정가보다 싸다면 그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사용한 중고이거나 성능에 문제가 없는 한도 내에서 외관에 흠집이 생긴 상품, 전시용으로 오랫동안 진열된 상품이나 초기 불량인 상품을 수리해서 재판매하는 상품 등 이유는 매우 다양하다. 이런 이유로 말미암아 정가보다 가격이 저렴하다면 대부분의 판매자는 상품을 설명하는 전단 등에 이를 명시한다. 그러하기에 소비자는 특별한 설명 없이 지나치게 싼 상품을 경계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경계심이 유독 미치지 않는 곳이 있다. 바로 우리가 먹는 식품이다. 현재 식품 체계의 가격이 지나치게 저가라고 의심하거나 경계하는 소비자는 존재할까?

소비자는 가격이 그 상품의 품질을 가늠할 수 있는 여러 지표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상품의 품질은 그 가격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어쩌면 사람이 사는 지대한 목적이거나 일상의 단비 같은 소박한 행복일 수도 있는 음식을 선택하면서 저가 식품을 경계하기보다는 헤어졌던 주인을 만난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반기듯 만면의 희색을 띄운 채 경쟁적으로 지폐를 꺼내 든다. 그런가 하면 쌀밥을 먹으면서 응당 반찬을 집어들듯 저가 식품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긴다. 앞에서도 말했듯 싼 가격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고 이것은 음식이라도 절대 비켜갈 수는 없는 것이 엄연한 시장논리이고 현실이다. 맥도널드의 쿼터파운드 치즈버거의 진짜 가치는 200달러 이상이듯 저가 식품을 위해 소비자의 주머니가 내야 하는 현실 가치와 실제 가치는 하늘 땅만큼 차이가 크다. 무엇이 이러한 비용의 차이를 만들고 그 대가는 무엇이며 이러한 차이가 정치적 • 사회적 • 문화적 • 경제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 것일까.

배적 식품 체계가 자체 비용을 사회화하고 이와 동시에 수익 대부분을 사유화하는데다가 보조금도 축내기에 저가 식품 체제는 작동될 수 있다. 그로 말미암은 대가는 다름 아닌 우리의 건강과 건강만큼이나 소중한 혈세와 생태계, 그리고 동물 복지, 선택의 자유, 미래 세대가 누려야 할 행복이다. 또한, 저기 식품 체계는 국제 식량 안보, 국가 간 및 국내 분쟁, 무역 질서, 지역 사회와 공동체, 기후 변화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음식의 다양성을 떨어트리면서 동시에 문화적 다양성도 떨어트린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저가 식품 체계는 지속불가능한 체계라는 점이라고 마이클 캐롤런(Michael Carolan)은 『값싼 음식의 실제 가격(The Real Cost of Cheap Food)』을 통해 강조한다.

2050년이면 세계 인구가 최대 90억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하지만, 현재의 지속불가능한 저가 식품 체제에서 점차 둔화할 것으로 예상하는 생산량 증가율로는 세계 예상 수요의 절반가량 정도만 먹여 살릴 수 있다. 그렇다면 나머지 절반은? 식량 농업 기구(FAO)가 발간한 「2015 세계식량농업보고서」에 따르면 거의 10억 명의 인구가 여전히 극심한 빈곤(하루 1.25달러 미만으로 생활)에 빠져 있으며, 7억 9,500만 명이 만성적 기아로 고통받고 있다. 미래 90억 명의 나머지 절반이 어떻게 될지는 독자의 풍부한 상상력에 맡기련다.

가 식품 시스템을 파헤친 『값싼 음식의 실제 가격』이 파헤치는 암담한 현실에 우울해지고 또한, 『값싼 음식의 실제 가격』이 제시하는 암울한 미래에 한 줄기 희망마저도 싹둑 꺾인다. 한 술 더 떠 적정 가격 식품 문제는 정치적 • 사회적 • 경제적으로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문제이기에 만병통치약 같은 해결책은 존재할 수 없다. 다만, 공정하고 지속가능하며 영양적이고 윤리적인 식품 생산 및 소비에 따라 근시안적인 흑백 논리를 배제하고 무지개처럼 다채로운 진화에 기반을 둔 발전적 해법이 가능할 때만 적정 가격 식품 체제라는, 무지개처럼 아름답고 다양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최소한의 토대인 공정하고 균등한 발전과 분배의 동력이 갖춰질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마이클 캐롤런의 『값싼 음식의 실제 가격』을 읽으면서 우리를 살찌우려고만 하고 먹을거리의 다양성과 선택권을 박탈한 시장과 식품 회사에 맞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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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21일 일요일

[책 리뷰] 나는 검색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검색되지 않을 자유(임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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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검색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원제: 『검색되지 않을 자유: 빅데이터에 포박된 인간과 사회를 넘어서』 by 임태훈
절망의 반대편에는 희망이 아니라 우리가 처한 현실에 대한 정밀한 이해가 있을 뿐입니다. 이 책 역시 질문하는 책입니다. 한국의 정보자본주의, 디지털 신자유주의의 실체와 폐해, 허상을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검색되지 않을 자유』, 10쪽)

당신은 예측 가능한 사람입니까?

군가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은 예측 가능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예측 불가능한 사람입니까?’

수십 년 전, 아니 불과 몇 년 전만이라도 누군가 이런 질문을 했다면 충분히 웃음거리가 되고도 남았을 법한 황당한 질문이다. 열길 우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것이고, 또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빅데이터(big data)’ 시대로 접어드는 지금도 앞선 질문에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비웃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경각심이 전혀 없거나 핵폭발의 한복판에 있어도 살아날 구멍이 있다고 믿는 매우 낙천적인 사람이거나, 혹은 디지털 혁명 시대를 경험하는 산증인으로서의 역사적 사명을 포기하고 스스로 무지를 드러내는 사람이다.

정보자본주의에 길든 새로운 노예, 호모 익스펙트롤(Expectrol)

람과 그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불투명성, 불확실성, 예측 불가능성은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근원적인 토대이자 원동력이다. 반론의 여지가 없는 사람의 존엄과 실존, 자유 그 자체다. 사람은 지금 이 시간 이후 모든 것들이 불확실하기에 두려움을 품으며 적절한 긴장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그 두려움을 삶에서 최대한 분리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위해 노력하면서 삶에 집착한다. 그러한 집착은 알게 모르게 한데 모여 우리 사회를 이루는 뼈대를 형성하고, 경제가 원활하게 기능하도록 윤활제 같은 구실을 톡톡히 해내고 있기에 사람이 물질이나 정념에 쏟아붓는 집착과는 달리 (분수만 지킨다면) 아름답고 활기차 보인다. 그러하기에 집착이라기보다는 애착에 가깝다.

그런데 만약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한 삶에서 살아간다면, 불확실성이 제거된 세계에서 살아간다면, 사람이 무엇을 하든 모든 것이 예측된 그대로라면 과연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지금과 같은 삶에 대한 집착과 애착이 사회 • 경제적으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바지할 수 있는 적절한 한도 이내로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유지될 수 있을까? 의미가 있다면 예측 가능한 삶을 실현하게 해 준 빅데이터를 지배하는 기업과 정부에겐 이 모든 것이 무한한 권력과 안정적인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더불어 삶에 대한 집착과 애착은 투명한 미래에 잠식당하고, 로봇처럼 프로그래밍이 된 일상이 사람의 삶을 교과서처럼 지배하려 들 것이다. 즉, 그들은 빅데이터를 독점하며 권력을 행사하는 빅브라더(big brother)이고, 그 외 나머지 사람들은 임태훈이 『검색되지 않을 자유: 빅데이터에 포박된 인간과 사회를 넘어서』에서 제시한 정보자본주의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최적화된 새로운 종 호모 익스펙트롤(Expectrol)이다. 이들은 충분히 예상 가능하며 로봇처럼 탁월이 통제될 수 있는 존재로서 정보자본주의에 길든 새로운 노예다 .

이미 현실 속으로 파고든 ‘빅데이터’ 활용

모든 것은 SF에서나 등장할법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러나 매우 스피드한 시대답게 초 단위까지 세밀하게 기록된 신용카드 명세서만으로도 그 사람의 다음 소비에 대한 예측과 잠재적 욕망까지 속속들이 드러난다. 여기에 이메일 계정을 뚫고 SNS를 흩어보면 한 사람의 사생활은 적나라하게 노출된다. 『검색되지 않을 자유』에 실린 한 사례는 이 모든 것이 현실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는 것을 증명한다. 미국의 할인매장 ‘타깃(Target)’에서는 데이터마이닝(data mining) 기술로 한 고등학생 소녀의 소비 패턴에서 소녀의 가족들조차 모르는 임신 사실을 알아낸 다음 소녀에게 아기 옷이랑 아기 침대 할인쿠폰을 보냈다고 한다. 이에 비하면 아직은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한국 할인매장에서도 고객의 소비 패턴을 분석해 자주 구매하는 물품들 위주로 할인쿠폰을 보낸다. 당신의 사유가 자본이 친절히 매개해 주고 그럴싸하게 포장한 꿈속에서 여전히 헤매고 있다면, 이런 이야기들이 더는 SF에서나 등장할법한 이야기라고 비웃을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땐 이미 당신은 충실한 호모 익스펙트롤이 되었으리라 .

사유화기를 멈춘 당신은 이미 호모 익스펙트롤로 진화 중

브라더의 현신을 경고하는 것이 『검색되지 않을 자유: 빅데이터에 포박된 인간과 사회를 넘어서』의 전부는 아니다. 『검색되지 않을 자유』는 부의 불평등한 재분배, 인간적 존엄을 말살하는 노동 환경, 수탈적 금융자본이라는 현실이 디지털 신자유주의의 실체라고 질타한다. 또한, 토건족이 지배하는 아파트 공화국의 획일적 풍경과 일상은 삶과 사유의 다양성을 말살하는 최악의 환경을 조성해 빅데이터 기술의 발전 이전에 빅데이터 분석에 알맞은 인간형의 일반화라는 필수조건을 이 나라에서 이미 완성한 상태라고 역설한다.

왜 우리는 노동 소외와 인간성 왜곡을 심화시키는 이 시대의 야만적인 폭력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일까. 건축이 휘두른 폭력에 황폐해진 도시의 폐해를 몸소 겪으면서도 왜 우리는 살아보지 못한 삶을 이리도 쉽게 포기하는 것일까. 불처럼 타오르는 정념에 채굴기가 온몸을 훑고 지나가듯 분노에 치를 떨고 시대의 비참함에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지만, 사유하기를 멈춘 당신은 이런 글은 찌질이들의 푸념 정도로 생각할 뿐이다. 하지만, 가계 부채 1,200조 시대에, 상위 10%가 전체 부의 70% 정도를 차지한 세습자본주의 시대에, 돈과 노동력뿐만 아니라 정보와 시간, 미래까지 착취당할 시대에 찌질해지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요즘은 눈감으면 코를 베어 가는 세상이 아니라 두 눈을 멀쩡히 뜨고 있어도 코를 베어 가는, 알고도 당하는 시대다. 디지털 정보화 시대에 당신의 욕망, 꿈, 희망, 야망, 정신과 육체 등 당신의 모든 것이 비트화되어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다. 시대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면, 시대에 질문하지 않는다면, 시대를 사유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훌륭하게도 이미 호모 익스펙트롤로 진화해가는 중이다 . 디지털화될 수 없는 것들의 가치를 진중히 사유하고, 그것들을 우리 삶 안에서 소중히 지켜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검색되지 않을 자유』의 가르침이 당신의 시대를 향한 숭고한 사유를 다시 일으키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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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7일 일요일

[책 리뷰] 부와 소득분배 동학에 대한 통찰과 공정하고 도덕적인 불평등 ~ 21세기 자본(토마 피케티)

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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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와 소득분배 동학에 대한 통찰과 공정하고 도덕적인 불평등

원제: 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 by Thomas Piketty
내가 보기에는 모든 사회과학자, 모든 저널리스트와 논평가, 노동조합의 모든 활동가와 온갖 부류의 정치가, 특히 모든 시민은 돈과 그에 대한 측정, 그를 둘러싼 사실들 그리고 그 역사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 데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숫자를 다루기를 거부하는 것이 가난한 이들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21세기 자본』, 697쪽)

상위 10%가 전 세계 부의 87%를 소유

마 피케티(Thomas Piketty) 『21세기 자본(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을 보면 프랑스에서는(2010~2011) 가장 부유한 10%가 전체 부의 62%를 장악했지만, 가장 가난한 50%는 고작 4%를 소유한다. 같은 시기를 다룬 연방준비은행 자료에는, 미국 상위 10%가 국부의 72%를, 하위 50%는 고작 2%를 소유한다. 좀 더 최근 자료인 크레디트스위스(CS)가 2014년에 발표한 「세계 부(富) 보고서(Global Wealth Report)」를 보면 상위 1% 재산이 전 세계 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8%로 2009년의 44%에서 소폭 증가했으며 상위 10%는 전 세계 부의 87%를 소유하고 있다. 반면에 하위 50%는 전 세계 부의 1%도 소유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김낙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의 「한국의 부의 불평등 2000~2013: 상속세 자료에 의한 접근」 논문에는 2010~2013년 기준으로 자산 상위 1%가 차지하는 자산은 전체의 25.9%, 자산 상위 10%가 가진 자산은 전체의 66.0%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부의 집중도는 2000~2007년 기간과 비교하면 각각 1.7%포인트, 2.8%포인트 높아졌다. 한국 역시 세계화 추세에 걸맞게 부의 불평등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한국 국민의 하위 50%가 가진 자산은 1.7%에 불과하며, 고로 중산층 40%는 35.7%의 부를 가진 셈이다.

상위 10% 국가 부의 90%를 차지했던 벨 에포크(Belle Époque) 시대만큼은 아니지만, 현재의 추세는 과거로 회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기대했던 만큼 민주주의가 자본주의를 충분히 통제하지 못했으며 권리와 기회의 평등이 부의 평등한 분배를 보장하기에 충분하지 못했다는 것과 공정한 불평등을 찬양하는 능력주의의 실패를 방증한다 . 또한, 18세기 이후 부와 소득분배의 동학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통찰한 책 『21세기 자본(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에 담긴 우려이기도 하다.

다시 도마 위에 오른 세습자본주의

렇다고 이 책이 한물간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되새김질하거나 빛바랜 마르크스주의의 부활을 시도하는 것은 아니다. 토마 피케티가 강조하듯 이 책의 집필 목적은 자본소유자들에 대한 노동자들의 처지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가능한 한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현실, 천문학적인 CEO의 연봉으로 대표되는 노동소득 불평등에 자본소득률이 성장률을 꾸준히 앞서는 시너지 효과가 더해지면서 세계대전 이후 잠시 잊혔던 세습자본주의가 다시 도마 위에 오른 지금, 이러한 역사 • 경제적 추동력이 그려낼 미래는 너무나 암울하다 . 앞으로 『21세기 자본(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이 제시한 이상적이고 혁신적인 초국가적 세제 개혁이 수반되지 않는 한 현재의 불평등 수준은 1차 대전 전처럼 극단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벨 에포크 시대의 극단적인 부의 불평등이 두 번의 세계대전과 대공황으로 청산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부의 불평등이 심화하면 필연적으로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뿐더러 다행스럽게도 현재에는 그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중산층이 양극단 사이에서 어느 정도 완충 구실을 하며 균형을 잡으려고 나름 애쓰고 있지만, 그 과격하고도 과격했던 프랑스혁명으로도 부의 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했듯 완만한 수준의 정책이나 안일한 개혁으로는 현재의 불평등 수준을 타파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리고 세계 대전의 발발 원인 중 하나는 국가적 부의 획득과 관련되었다는 명백한 사실이 기후변화와 자원 고갈이라는 피할 수 없는 위기에 직면한 인류의 미래를 더욱 불투명하게 만든다.

부와 소득분배의 역사적 동학을 시원하게 밝힌 책

마 피케티는 돈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 데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나마 소득 상위층과 소득 하위층 사이에서 나름의 균형을 잡으며 완충 역할을 하던 중산층도 서서히 빈곤화되어 가고 있다. 과연 인류는 상위 1%에 점령당한 정치적 난관을 뚫고 사적 이익을 대중의 이익으로 둔갑시키는 데 뛰어난 역량을 지닌 경제학자들을 구워삶아 사회적 차별은 오직 공익에 바탕을 둘 때만 가능하다는 프랑스혁명 이념처럼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공정하고 도덕적인 불평등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을 통해 제시한 이상적인 해법들이 비록 정치적이고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인 여러 이유로 바로 현실에 적용할 수는 없지만, 부와 소득분배의 역사적 동학을 시원하게 밝힌 이 책의 장점은 부의 불평등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을 다양한 계층으로 확산시켜 공정하고 투명한 민주적 토론으로 부와 소득분배 문제 인식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형성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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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10일 일요일

[책 리뷰] 파시즘이 취하는 겉모습에는 한계가 없다 ~ 파시즘(로버트 O. 팩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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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이 취하는 겉모습에는 한계가 없다

원제: The Anatomy of Fascism by Robert O. Paxton
파시즘은 아직도 존재할 수 있는가? 제1단계의 파시즘은 대부분의 민주 국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좀 더 중대한 문제는 이것이다. 1단계 수준의 파시즘이 또다시 2단계에 이르러 뿌리를 내리고 권력을 장악할 수 있을까? (『파시즘』, 458쪽)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파시즘 해석이나 정의는 없다!

버트 O. 팩스턴(Robert O. Paxton)의 『파시즘(The Anatomy of Fascism)』은 모든 사람을 남김없이 만족시킬 수 있는 파시즘 해석이나 정의는 없다고 본다. 그만큼 파시즘은 복잡하다. 그 복잡성은 죽음을 불사르면서까지 지켜야 할 확고한 철학 체계가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뿌리가 없기에 특정한 이념이나 사상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전술적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말과 행동을 바꿀 수 있다. 여기에 파시즘 특유의 운동성이 더해지면 ‘운동하면서 변화하는’, 그야말로 카멜레온처럼 변화무쌍한 이념 같지 않은 이념이 된다 .

그렇다면 『파시즘(The Anatomy of Fascism)』에서 정의하는 파시즘은 무엇인가. 파시즘은 ‘공동체의 쇠퇴와 굴욕, 희생에 대한 강박적인 두려움과 이를 상쇄하는 일체감, 에너지, 순수성의 숭배를 두드러진 특징으로 하는 정치적 행동의 한 형태이자, 그 안에서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은 결연한 민족주의 과격파 정당이 전통적 엘리트층과 불편하지만 효과적인 협력 관계를 맺고 민주주의적 자유를 포기하며 윤리적 • 법적인 제약 없이 폭력을 행사하여 내부 정화와 외부적 팽창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정치적 행동의 한 형태’이다.

파시즘의 일대기를 (1) 파시즘의 탄생, (2) 정치 제도 안에 뿌리내리기, (3) 권력 장악, (4) 권력 행사, (5) 파시즘 정권이 급진화나 정상화 중 한 가지를 선택하게 되는 장기 지속 기간 등 총 다섯 단계로 나누어 운동하는 파시즘의 역동성과 변화의 순간마다 사진 찍듯 선명하게 포착한 이 책은 ‘운동하면서 변화하는’, 역동성이 강한 살아있는 파시즘을 이해하려면 파시스트들의 그럴싸한 주장보다는 그들의 행동 자체로부터 추론해 내야 한다는 저자의 신념을 토대로 파시즘을 재조명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그럼으로써 파시즘이 지닌 고유한 매력과 그것의 복잡한 역사적 경로, 그리고 파시즘이 지닌 극단의 공포를 더욱 명료하게 설명하고, 이를 통해 파시즘이란 개념을 의미의 남용으로부터 구출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 책은 머리글의 제목 ‘파시즘 논쟁에 종지부를 찍는 결정판’이라는 거창한 수사에 전혀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파시즘에 대한 명쾌한 분석과 통찰을 담은 책이다. 고로 현명한 독자라면,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쯤이면 스스로 파시즘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내릴 수 있을 정도의 개념은 잡을 것이다. 비록 나는 그 정도까지의 진척은 이루지 못했지만, 단계적으로 철저히 해부 된 파시즘 조각들에서 ‘운동성’, ‘무체계적 이념성’, 그리고 ‘선택성’이라는 키워드를 집어낼 수 있었다

‘운동성’, ‘무체계적 이념성’, 그리고 ‘선택성’

19~20세기를 대표하는 자유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사상은 로크, 마르크스, 엥겔스 등의 저명한 철학자들에 의해 집대성된 학문으로써 일관되고 논리 정연한 철학 체계를 구축했다. 그러나 20세기 인류를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트린 파시즘은 정교한 철학 체계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았음에도 1 • 2차 세계대전 사이 즉, 당시 세계 질서의 3대 이념인 자유주의, 보수주의, 공산주의가 서로 세력을 다투고 실패를 거듭하면서 질서가 무너지던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서는 데 성공했다.

세계 대전이나 대공황 같은 정치 • 경제 • 사회적 긴장과 위기가 파시즘이 태동할 수 있는 태생적 조건이라면, 대중 운동은 그 조건 속에서 파시즘이 싹을 틔울 수 있게 하는 거름이다. 그 어떤 정권도 대중 운동 없이는 진정한 파시즘 정권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대중 운동은 파시즘에서 필수 불가결하다. 이처럼 파시즘의 힘은 대중 운동에 있다. 여기에 파시즘 특유의 ‘무체계적 이념성’은 서로 다른 계급을 하나의 가치관 아래 묶어놓음으로써 대중 운동을 강력한 추진제로 거듭나게 하는 기폭제가 된다 .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파시즘이 운동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게, 즉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의 ‘선택’이 있었다는 것이다 . 독일과 이탈리아를 제외하고 스페인, 포르투갈 등에서의 유사 파시즘이 실패했던 가장 큰 원인은 강력한 보수 혹은 기득권 세력이 파시즘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들은 현재의 위기가 극단적인 파시즘을 ‘선택’할 만큼 절체절명의 위기로는 느끼지 않았을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파시즘 성공에 필수적인 최후의 본질적 전제조건은 파시스트 도전자들과 권력을 나눌 준비가 된 의사 결정자들이다. 그 의사 결정자들은 독일의 나치즘 체제에서 볼 수 있듯, 민주적인 선거로 선출된 의원도 예외는 아니다.

21세기, 파시즘의 대두 가능한 일인가?

‘선택’의 문제는 20세기 파시즘의 위기와 파국을 경험한 인류가 다시 파시즘에 빠져들 수 있느냐는 현실적 우려에서도 매우 중요한 키워드다. 팩스턴은 (약간 섬뜩하게도 들릴지도 모르지만) 제1단계의 파시즘은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민주 국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더 중대한 문제는 1단계 수준의 파시즘이 제도적으로 정착하고 권력을 장악할 가능성이다 . 테러와 난민 문제에 시달리는 자유주의 국가의 시민이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너무나도 쉽게 자신들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에 찬성하는 것을 우리는 익히 보아왔다. 초기 파시즘이 권력 장악을 향해 더 나아갈 것인지는 국가적 • 사회적 위기의 심각성 정도와도 부분적으로 상관이 있지만, 무엇보다 사람들, 특히 경제 • 사회 • 정치적 권력을 쥔 사람들의 ‘선택’에 달렸다는 팩스턴의 충고를 되새겨보면, ‘자유주의 제도’의 포기는 심각한 위험 신호이며 스스로 화를 불러오는 일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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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16일 일요일

[책 리뷰] 등에 칼을 맞을 맞았다는 전설에 스스로 ~ 나치스 민족공동체와 노동계급(티모시 메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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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에 칼을 맞을 맞았다는 전설에 스스로 발목이 잡힌

Sozialpolitik im Dritten Reich: Arbeiterklasse und Volksgemeinschaft by Timothy W. Mason
나치스 시대의 노동계급은 강화된 착취와 억압에 의하여 정의되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 시대의 노동계급이 그들에게 닥쳐온 것에 의하여 규정된다고도 할 수 있다. 나치스의 사회정책과 선전 선동은 노동계급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이를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바로 그 사회정책과 선전 속에 노동계급의 특수한 지위가 발견된다. 즉 노동계급은 1933년 이후에도 너무도 위협적인 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치스 민족공동체와 노동계급』, 7쪽)

일은 1933년 나치가 집권했을 때부터 히틀러의 팽창 정책을 수행하고자 사회 • 경제력을 국방력 증강과 군수 산업 확장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런데도 독일 경제는 침략적 전쟁을 결정하고 그것을 준비하던 기간과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몇 년 동안에도 ‘전시경제’와 ‘평시경제’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전시경제이면서도 동시에 평시경제였던 어중간한 정책의 후유증은 그리 어렵지 않았던 폴란드 진격이 단기간에 끝나고 난 뒤, 폭탄과 차량 물량의 부족분이 너무 커서 몇 달간의 전쟁 수행조차 불가능한 상황으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1939년 10월로 예정된 히틀러의 프랑스 침공 계획도 군의 무장 상태가 턱없이 모자란다는 장군들의 반대로 말미암아 포기해야 했다.

『나치스 민족공동체와 노동계급(Sozialpolitik im Dritten Reich): 히틀러 이데올로기 전시경제 노동계급』의 저자 티모시 메이슨(Timothy W. Mason)은 이 문제, 즉 오래전부터 전쟁을 계획하고 준비해왔던 나라의 군수물자가 막상 전쟁을 일으켰을 때에 그렇게 열악했던 이유와 그렇게 군수물자가 부족했던 상황에서 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나치스 사회 • 경제 체제의 내적 모순에서 찾고 있다. 그것은 바로 나치스와 노동계급의 갈등이다 .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잡자마자 노조와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세력 등의 노동자 정당과 조직은 괴멸되었다. 노동계급 자체가 완전히 소멸된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노동자들은 나치의 전쟁 계획에 맞추어 철저하게 탈권화되었던 것이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사회적 권리를 대변해주던 노조가 눈앞에서 별다른 저항 없이 무너지는 것을 뜬눈으로 멍하게 지켜다 볼 수밖에 없었다. 대공황의 여파로 빈곤과 실업의 공포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은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조차 없었고, 치열한 생존 경쟁 때문에 조직화된 저항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나치가 군수 경제를 밀어붙이자 상황은 역전되었다. 전쟁 준비로 독일 경제가 완전가동되는 상황에서 완전고용이 이루어졌고, 기업들이 노동자들을 붙잡아두기 위해 뇌물까지 받치는 상황이 되자, 노동자들은 위장된 파업, 결근, 작업장 이탈, 병가, 작업 중의 부주의, 명령 불복종 등 수동적으로 나치에 저항했다.

그럼에도, 나치는 곧바로 게슈타포 등을 동원해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탄압하는 것은 주저했다. 1938년에서 1941년의 ‘무늬만 전쟁인 전쟁’ 시기, 즉 독일이 전쟁에서 승승장구하고 여전히 영국은 미적지근하게 나오고 그래서 전쟁이 주는 압력과 위기감이 미약한 가운데 군수 목표치를 달성하고자 가뜩이나 부족한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탄압해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또한, 1차 대전 패전에 대한 히틀러의 자의적 해석이 낳은 트라우마가 생생하게 떠올랐기도 했다. 즉, 1차 대전 패전의 원인은 연합군의 압도적인 물량 때문이 아니라 11월 혁명으로 노동운동과 유대인이 배신함으로써 전쟁의 와중에 내부의 적에게 등에 칼을 맞았다는 논리다.

나치는 전쟁준비를 위해서는 노동계급을 탈권화시키고 억압하며 가차없이 착취해야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의 정치적 충성도 확보해야 하는 근본적인 모순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의 부담을 사회적으로 감당할 수 있게 만들어 줄 구상은 애초에 존재할 수도 없었다 고 메이슨은 설명한다. 즉, 노동자들의 사회적 요구를 일일이 받아들이면 군수 생산에 차질이 생기고, 그렇다고 게슈타포 등을 동원해 폭력적으로 대응하였다가는 또다시 ‘등에 칼을 맞을’ 위험성이 높아질 것이다. 등에 칼을 맞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나치로 하여금 섣불리 전시경제를 도입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 전시경제는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전세가 어느 정도 기울었던 1943년에야 비로소 취해졌다. 나치는 등에 칼을 맞을 맞았다는 스스로 지어낸 전설에 발목이 잡혀 노동자들을 착취해야 하면서도 충성도 확보해야 하는 모순적 부담을 스스로 껴안은 꼴이 되고 만 것이다.

틀러의 불굴의 의지만으로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주의주의(主意主義)는 나치와 노동계급의 갈등에서는 그 효용을 찾아볼 수 없었다. 무릇 백성을 다스림에 식(食)이 최우선이지만, 밥이 충족되면 의(衣), 주(宙) 등 백성의 요구는 하나둘씩 늘어난다. 어느 정도는 이 요구들을 선전과 사상 교육으로 억누르거나 완화할 수 있다지만, 이들의 요구가 터무니없이 무시되면 종종 폭동이나 혁명이 일어나 정부가 전복되거나 왕이 바뀌기도 한다. 나치의 염려가 전혀 쓸데없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히틀러가 그토록 공산주의를 싫어했던 것도 이해가 간다. 만약 독일에 공산주의가 뿌리를 내리지 않았다면, 나치는 좀 더 많은 노동자의 충성을 확보할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겉으로는 절대권력을 확보한 것처럼 보였던 히틀러와 나치도 막상 전쟁을 준비하는 데 있어 수많은 장애와 난관에 부딪혔고, 더군다나 이들은 이러한 복잡한 문제점들을 해결해나갈 능력도 의지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하기에 나치와 정부는 소홀히 할 수 없는 문제들까지도 덮어놓고 도박적이며 도피적인 선동으로 전쟁을 일으켰던 히틀러에게 자포자기적인 심정으로 몸을 내맡겨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급진성은 현실의 문제들을 해결하기보다는 미래에 펼쳐질 유토피아가 마치 눈앞에 도래된 것처럼 사람들을 현혹해 현실의 문제들을 직시하지 못하게 가리고 덮어두는데 더 탁월하게 작용했다 . 어쩌면 그들이 권력을 차지했을 땐 현실의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급진성에 제동을 걸기에는 늦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급진성은 나치가 일으킨 소용돌이를 움직이고 유지하는 가장 강력한 동력원이었고, 이런 상태에서 나치가 스스로 급진성에 제동을 건다는 것은 소용돌이의 소멸, 즉 나치의 자살을 의미했다. 그래서 그들은 사신(死神)에게 쫓기듯 무작정 앞으로 내달릴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인 이상 언젠가는 지칠 수밖에 없었고, 사람인 이상 신에 맞서 이길 수는 없었다. 그들의 파멸은 등 뒤에 칼을 맞은 내부의 배신이 아니라 급진성에 모든 것을 의존한 자들의 예정된 운명이었다 .

긴이(김학이)는 티모시 메이슨의 『나치스 민족공동체와 노동계급』을 한국에 출간된 수많은 나치즘 관련 서적 가운데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책 여섯 권 중에서 마르틴 브로샤트의 『히틀러 국가』(김학이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11) 다음으로 읽어볼 책으로 추천했다. 처음엔 두 책의 옮긴이가 같은 것을 보고 왠지 광고를 하는 것 같아 약간은 미심쩍었으나, 막상 읽어보니 나치와 당시 독일의 사회 • 경제적 관계, 특히 나치와 노동계급의 역학 관계에 대한 좀 더 깊은 안목과 풍부한 이해를 제공해주는 탁월한 학술서였다. 학술서이니만큼 딱딱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겉만 번지르르한 나치 신화의 허울을 요모조모 파헤치는 통쾌함이 느껴질 정도로 절대 지루하지는 않은 시간이었다. 또한, 『나치스 민족공동체와 노동계급』처럼 읽고 나면 상당한 지적 만족감을 채워주면서 또 다른 호기심을 발동시켜주기도 하는 좋은 책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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