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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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 살인사건 | 에도가와 란포가 추천한 수작

문신 살인사건 | 다카기 아키미쓰 | 에도가와 란포가 추천한 수작

책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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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 살인 현장에 몸통만 남은 경우는?

폐쇄된 도축장을 보는 듯한, 혹은 약탈당한 정육점을 보는 듯한 토막 살인 현장은 흔치는 않지만, 간간이 ‘보는’ 범죄 현장이다. 물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릴 만큼 충격적이면서도 한편으론 손가락 틈새로 훔쳐보고 싶은 불온한 호기심을 억제하기 어려운 토막 살인 현장을 내가 직접 봤을 리는 만무하다. 소설 • 영화 등에서 당신이 육식을 즐기듯 살육을 즐기는 살인마의 엽기적 행각을 두드러지게 하고, 독자 • 관객의 불온한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확고한 소재로서 심심치 않게 애용되는 토막 살인을 가끔 께름칙한 기분으로 즐길 뿐이다.

그런데 간혹 토막 살인 현장에는 마치 정육점을 약탈한 부랑자가 맛없는 부위를 버리고 간 것처럼 사체의 일부분만 남겨져 있는 일도 있다. 칠칠찮은 살인마가 흘린 것일 수도 있고, 신원을 감춰 경찰 수사에 혼란을 주기 위한 살인마의 잔꾀일 수도 있고, 살인마가 ‘증거 인멸’과 ‘동물사랑’을 동시에 실천하고자 굶주린 들개를 위해 토만 난 사체를 좀 남긴 걸 들개들이 배불리 먹고 점잖게 남긴 것일 수도 있다. 이외에도 이유는 많다. 그렇다면 토막 살인 현장에 몸통만 남은 경우는 무엇일까? 영화 「차가운 열대어(Cold Fish)」처럼 물고기 밥으로 주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물고기가 좋아할 만한 살점은 몸통보단 팔다리에 더 많을 것 같은데?

아무튼, 보란 듯이 머리통은 남겨져 있으니, 신원을 숨기려는 의도는 아니다. 범인은 사람 몸통만 수집하는 별난 취미를 가진 사람이거나, 범인의 살인 계획이 엉성하게 짜인 나머지 토막을 미처 옮기기도 전에 목격자에 의해 살인 현장이 발각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살인 현장은 보통의 머리로는 풀지 못할 완벽한 밀실이었던 만큼 후자는 아닐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사실을 덧붙이면 그 사라진 몸통엔 문신 애호가들이 찬미하는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 아, 그렇다면 문신에 편집광처럼 집착하는 문신 수집가의 짓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가져볼 수 있다. 마침 주변엔 멋들어진 문신을 가진 사람들을 파파라치처럼 쫓아다니며 문신을 사전 구매하는 문신 애호가이자 문신 연구가이자 문신 수집가가 있다면, 참으로 아귀가 잘 들어맞는다. 그런데 이러면 너무 쉽지 않은가?

도쿄대학 의학부 표본실(東京大学医学部標本室)
<출처: 「Man Creates The Largest Collection of Tattooed Human Skin In the World」>

첫 장부터 트릭은 시작된다!

다카기 아키미쓰(高木彬光)의 『문신 살인사건(刺青殺人事件)』에서 일어나는 첫 번째 살해 현장이 그렇다. 보는 이로 하여금 아름다워서든 혐오스러워서든 어떻게든 전율하게 하는 문신이 그려진 몸통만 사라졌는데, 그 주변에 죽은 사람의 문신을 호시탐탐 노렸던 문신 수집가가 있다면, 용의자를 추려내는 수사의 방향이나 이제 막 추리에 시동을 켠 독자의 더듬이도 자연스럽게 문신 수집자 하야카와 헤이시로(早川平四郞) 박사로 향한다. 더군다나 그는 피해자의 사망 추정 시간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리바이를 말하지 못하니 더할 나위 없는 용의자다.

하지만, 명색이 추리소설인데 이처럼 간단한 추리를 어디라고 감히 들이민단 말인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될 일이다. 추리소설을 좀 읽은 독자라면 이것은 어떤 원대한 구상의 완성을 위한 시작이자 독자의 추리에 혼선을 부추기는 함정이라는 것쯤은 대뜸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함정은 이것만이 아니다. 일본 문신 문화에 대한 간략한 역사 서술과 문신을 예술로 평가하는 도입부 역시 일종의 서술 트릭으로 작용하면서 ‘문신 살인사건’의 심리적 혼돈을 주입한다. 즉, 독자가 앞으로 어떤 추리 대결이 펼쳐질지를 기대하면서 여유를 부리고 입맛을 다시는 서두부터 이미 트릭은 시작하는 것이니 한 단락의 낭비도 없는 꼼꼼한 플롯이라 할 수 있겠다.

독자에게 불가사의한 전율을 태풍처럼 안겨 줄 이지적인 요소와 기괴한 요소가 어우러진 이중 삼중의 심리 트릭은 이렇게 첫 페이지부터 시작된다. 추리소설 마니아라면 정말 기대할 만할 작품이다.

기대하라! ‘독자와의 대결‘

본격 추리소설 마니아라면 반드시 거쳐야 할 작가 중 하나는 반 다인(S.S. Van Dyne)이다. 추리소설에서 작가와 독자 간의 공정한 게임을 유지하기 위한 「Twenty rules for writing detective stories(탐정 소설 작법 20법칙)」으로도 유명한 그의 작품을 나 역시 도서관 출입 초창기 이제 막 추리소설에 입문했을 때 두루 섭렵했던 기억이 있다.

한국보다 추리소설 붐이 일찍 일어난 일본의 전후 추리소설을 읽다 보면, 자주 언급되는 추리소설 작가 중 하나로 반 다인을 꼽을 수 있는데 『문신 살인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언급되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고 탐정 파일로 밴스(Philo Vance, ‘파이로 번스’는 일어판을 중역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역)가 즐겨 쓰던 수사 방법을 빌려 쓰고 있다. 즉, 용의자를 모아 놓고 포커를 치는 심리적 흥정을 통해 진범을 찾아내는 방법을 『문신 살인사건』에 등장하는 천재형 탐정 가미즈키 요오스케가 그럴듯하게 흉내 낸다. 다만, 가미즈키 요오스케는 일본 문화에 맞게 포커가 아니라 바둑, 장기 등으로 심리 대결을 펼친다. 참고로 3대 기서 중 하나인 나카이 히데오(中井英夫)의 『허무에의 제물(虛無への供物)』에선 마작을 사용한다. 여기에 『문신 살인사건』은 본격 추리소설의 거장 엘러리 퀸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독자와의 대결’도 준비되어 있어 여러모로 기대를 자아내는 소설이다. 반 다인의 20칙에 들어맞는지 꼼꼼하게 따져 읽는 것은 또 다른 재미일 것이다.

사실 포커도 바둑도 마작도 잘 모르는 독자의 처지에선 탐정과 용의자들의 심리 대결을 제때 분석하지 못하면 ‘독자와의 대결’에서 패배할 수도 있겠다는 우려가 들 수 있지만, 한마디 조언을 하자면 (마작, 장기, 바둑 같은) 게임의 규칙은 중요하지 않다. 추리 대결은 공정하게 진행되니 아무쪼록 마음 놓고 ‘독자와의 대결’에 임하기를 바란다.

에도조용회(江戸彫勇会)
<출처: 「王子名主の滝 江戸彫勇会 納涼会 1934年8月20日」>

문신, 예술인가? 아니면 허영인가?

문신을 혐오하거나 경멸하는 사회적인 편견은 분명히 존재한다.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문신 살인사건』이 몽둥이처럼 그 편견을 후려치면서 미세하지만 뚜렷하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문신은 타인에게 공포감 • 두려움을 주려는 불측한 의도나 흉터를 드러내며 으스대는 전통에서 비롯된 하찮은 허영심 정도로만 치부했던, 그래서 ‘문신 = 깡패 = 불량배 = 양아치’라는 왜곡을 진실인 양 호도했지만, 날카로운 바늘이 하나하나 살에 찌를 때마다 피를 흘리고 살점이 타오르는 듯한, (경험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가짜 죽음의 체험이라 할 만한 고통을 긴 시간 인내해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 문신임을 뒤늦게 깨달은 지금, 그렇다고 정신분석학적으로 문신은 일종의 만성 자살이라는 말에 수긍하는 것은 아니고, 문신이 성욕의 구현이라는 말은 더더욱 믿지 않지만, 타인의 시선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의연함과 가짜 죽음의 체험이라 할 만한 고통을 인내한 그들의 의지가 부러울 정도로 무섭다는 것은 인정한다.

물론 내가 말하는, 그리고 『문신 살인사건』에 언급하는 문신은 팔뚝이나 어깨, 아니면 엉덩이나 허벅지에 보일 듯 말듯 앙증맞게 그린 그런 작은 문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조폭 영화에 한번은 등장하는 목욕탕(혹은 사우나) 장면에서 볼 수 있는, 망사처럼 얇은 옷 아래로 얼른얼른 비치는, 보는 이로 하여금 움찔 놀라게 하는 용이 기세 좋게 승천하거나 똬리를 튼 뱀이 노려보는 전신 문신을 말하는 것이다.

『문신 살인사건』에서 언급된 에도조용회(江戸彫勇会)는 실존하는 문신 동호회였고, 구글에서 검색하면 소설에 등장하는 문신을 감상할 수 있으며, 작품 속 주요 문신인 ‘지라이야(自雷也), 쓰나데히메(綱手姬), 오로치마루(大蛇丸)’ 역시 구글 검색으로 눈치 보지 않고 주눅들 필요 없이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 도쿄대학 의학부 표본실(東京大学医学部標本室)에 전시되어 있다는 ‘문신 인체 표본(刺青の人体標本)’ 역시 마찬가지다.

이 문신들을 예술이라고 평할 수 있을지, 예술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묘한 아름다움의 한 장르 정도는 되는지, 아니면 허영과 과시에 불과한지는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사람도 호랑이처럼 가죽을 남길 수 있다는 점에서 감탄과 공포와 흥분과 도취가 뒤섞인 복잡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에도가와 란포가 추천한 수작이면서도 한편으론 ‘괴작’으로도 불리는 『문신 살인사건』, 과연 당신은 ‘이지와 기괴로 쌓아 올린 걸작’에 도전해 볼 용기가 있는가? 혹은 사우나탕에 자욱한 증기를 마치 구름인 양 타고 올라가는 한 마리의 용을 마주 볼 용기는 있는가?

비록 보잘 것 없지만 광고 수익(Ad revenue)은 블로거의 콘텐츠 창작 의욕을 북돋우는 강장제이자 때론 하루하루를 이어주는 즐거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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