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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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월일 | 그는 왜 농촌에 집착할까?

연월일 | 옌롄커 | 그는 왜 농촌에 집착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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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형 인간의 책 장보기

작정하고 도서관 나들이를 시작한 지도 어느덧 13년째에 접어든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하듯 내가 사는 도시도 변했다. 다만, 강산처럼 푸르고 울창하게 변한 것이 아니라 콘크리트 잿빛은 더욱 짙어지고 그에 놀란 하늘은 도망가버렸다. 지나가는 사람을 말없이 위압하는 아파트 단지가 세 개나 들어섰다. 창백한 공사 소음과 문드러진 하천 냄새, 그리고 황사용 마스크의 눈에만 알랑거리는 얄밉상스러운 먼지를 밤낮으로 토해냈던 지하철 공사도 끝났다. 그런데도 난 이다지도 변한 것이 없으니 ‘새옹지마’가 비웃는다. 아, 건강이 더 나빠졌구나! 제기랄.

도서관을 한 주에 여러 번 방문하는 부지런함을 보인 것도 아니고, 도서관 열람실 의자에 엉덩이를 접착제로 붙여놓아도 불평하지 않을 열렬 독서광도 아니었지만 10년 넘게 비교적 규칙적으로 도서관을 들락거리면서 책에 대한 나름의 안목을 다질 수 있었던 내가 예쁜 애인의 면회를 기다리는 군인의 그 축축한 애절함까지는 아니더라도 직장인이 연말 보너스를 기다리는 기분 좋은 간절함 정도로 새 작품을 기다리는 작가가 몇 사람 있는데, 그중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작가가 바로 옌롄커(閻連科)다.

다만, 그놈의 염병할 코로나 사태로 도서관을 찾아가던 나의 유쾌한 당일치기 여행은 태풍으로 발길이 묶인 여행객들처럼 속수무책이었고, 이 때문에 성실한 주부가 요모조모 궁리하며 시장에서 장을 보는 것에 비교할 수 있는 책 장보기의 즐거움도 잃어버렸다. 책 장보기란 무엇인가? 인터넷을 놔두고 시간과 차비를 들어가며 굳이 도서관이나 서점을 찾는 이유가 하늘에 물을 뿌린 듯한 연한 파란색을 알싸하게 감도는 퀴퀴한 책 냄새도 좋지만, 보물찾기라는 설렘과 지적인 풍류를 선물하는 책 장보기 때문이지 않았단 말인가!

아무튼, 웬만한 칼질에도 끄떡없을 것 같은 짙은 화장 아래 새침하게 숨어 있는 얼굴에서 여자의 진짜 미모를 분별할 수 없는 것처럼, 포토샵 같은 디지털 기술로 위장한 온라인 마트의 사진만으론 진짜 맛을 느낄 수 없는 것처럼, 온라인 서점의 그럴듯한 카피 문구만으론 내 입맛에 맞는 책을 선별하기는 어렵다. 세상에 하이라이트가 재미없는 영화는 없는 것처럼 카피 문구만 놓고 보면 다 재밌고 유익한 책 같다. 오프라인 매장으로 향하는 발바닥 위로 두근거리는 가슴의 진동이 전해 내려오고, 종이책을 넘기면서 그 특유의 가치르르한 감촉에 살짝 소름 돋는 난 아날로그형 인간이다.

옌롄커, 그리고 기타 등등의 중국 작가 때문에 도서관 갈 때마다 빠지지 않고 살펴보는 책장이 바로 ‘중국소설’이다. 그런데 도서관을 못 가게 되었으니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것처럼 아주 천연덕스럽게 ‘중국소설’을 잊고 있었다. 옌롄커도 잊고 있었다. 그러다 누군가 선물해 준 『작렬지(炸裂誌)』를 기점으로 다시 그를 찾았다. 마치 오래전에 헤어진 첫사랑이라고 말하기는 쑥스럽고 옛친구를 만나는 것 같다.

<셴 할아버지와 눈 먼 개?(사진출처: MP頭條)>

농민의 영원한 꿈, 농촌 탈출!

내가 만난 많은 작가가 문학적으로 순수하고 예술적으로 풍성하고 영혼처럼 깊이 있는 문장의 글을 쓰기보다는 자극적이고 이야기 중심적인 글을 쓴다. 금전적인 이유보다는 재능과 신념의 문제가 더 클 것이겠지만, 문학성을 추구하든 상업성을 추구하든 상관없이 현대 소설이 도시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편파적인 현실은 교과서처럼 굳어진 것 같다. 마치 ‘현대 = 도시’라는 등식이 모든 작가의 허구적 상상력에 마법처럼 제한을 걸어놓은 것 같다. 산업화 이후 사람들은 가뭄으로 황폐해진 땅을 탈출하는 쥐 떼처럼 농촌에서 도시로 대거 이주해왔고, 작가들은 이런 시세에 어긋나지 않게 도시를, 그리고 도시인의 삶을 때론 참새처럼 떠들썩하게, 때론 까마귀처럼 음침하게 이야기한다. 개미가 인간의 삶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처럼 도시인도 농촌의 삶에 관심이 없어졌다. 이러다 도시와 농촌은 지구와 화성처럼 별개의 세상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제 농촌은 소박한 꿈을 간직한 몇몇 도시인이 시골에 대한 질박한 향수로 갑갑한 도시 생활을 견뎌내려고 할 때 잠시 등장하는 엑스트라 정도다. 사실 중국 현대사에서 도시와 농촌은 말 그대로 별개의 세상이었다. 사실상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는 시골 사람의 인생 최대 목표는 도시 호적을 따는 것이었을 정도니 말이다. 왜 그랬을까? 얼마나 농촌 생활이 힘들기에 그랬을까?

「천궁도(天宫圖)」의 절름발이 루류밍(路六命)의 경험을 빌리자면, 농촌 마을은 노동교화소만도 못했다. ‘노동교화소’라는 명함은 꽤 순화된 표현이다. 온종일 뜨거운 가마에서 벽돌을 굽고 50kg의 벽돌을 공사판 인부처럼 등에 지고 나르는 강제 노역이 고되지 않을 리야 없겠지만 그래도 마을에서 농사짓는 것보다 낫다고 하니, 평생 호미 한 번 쥐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루류밍이 겪은, 그리고 옌롄커가 박진력 있게 묘사한 농촌 생활의 신산함을 어떤 식으로 설명해야 할지 지금이라도 글 쓰는 것을 멈추고 염치라고 살리고 싶은 심정이다.

<자신의 시신을 거름으로 던진 셴 할아버지의 마음을 도시인이 이해할 수 있을까?>

옌롄커, 그는 왜 농촌에 집착하는가?

마트 선반엔 허기진 배를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 보따리처럼 가득 채울 수 있는 다양한 식품들로 1년 내내 가득 차 있으니 도시인으로선 풍년과 흉년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고, 비 소식도 아침에 출근할 때 우산을 챙겨야 하나 마나 하는 아주 사소한 행동에 영향을 줄 뿐이다. 오히려 비는 외출과 여행을 즐기는 도시인에겐 간헐적인 짜증을 불러오는 귀찮은 심술이다.

하지만, 농촌에서 비는 갓난아기의 젖줄 같은 생명줄이다. 「연월일(年月日)」의 셴 할아버지와 눈먼 개가 들려준 영혼을 태워 재를 만들 정도로 슬프고 처참한 이야기는 오직 비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류와 자연과의 전쟁과도 같은 투쟁’이라는 인류사의 핵심을 실감할 수 있는 곳은 바로 농촌이다. 이곳엔 옌롄커의 종교 같은 신념이 진흙이 머금은 물기처럼 눅눅하게 스며있다.

‘자연의 변덕스러움에 굴복하는 것은 곧 죽음이다’라는 숙명에서 비롯된 처절한 투쟁, 만리장성처럼 끝없는 노동, 쓸데없고 자질구레하고 소모적인 일상, 삶과 죽음을 백지 한 장 차이로 만드는 고단함 삶, 여기에 모든 종에게 부여된 번식이라는 태산처럼 무겁고 교리처럼 덧없는 짐. 자연과 담쌓고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속담이 느릿하면서도 확실하게 현실화되어 가는 도시인으로선 한결같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다. 웰빙이랍시고 일부러 흙길을 찾아 에도는 도시인의 기름에 절어 번지르르한 입에서 일 년 동안 뱉어내는 시커멓고 불투명한 말속에 ‘농촌’이란 단어가 한 번이나 등장할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옌롄커는 왜 농촌에 집착하는 것일까? 몇 세대 후면 도시인에게 농촌소설은 지금의 공상과학소설만큼 정도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낯설고 신비로운 매력을 지니게 될 때를 대비한 선견지명 때문에? 나처럼 모두가 ‘예’라고 말할 때 그저 께끄름한 반항심으로 ‘아니오’라고 말하는 욱하는 성깔 때문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보다는 바러우(耙耬) 산맥 주변 같은 척박한 땅에서라도 생명과 죽음을 무덤덤하게 일궈내는 그들의 전혀 박약하지 않은 의지, 그리고 밥 먹듯 찾아오는 재난조차 순리로 받아들이는 무지하지 않은 체념이야말로 호모 사피엔스가 도시화라는 별처럼 빛나고 개암처럼 거무튀튀한 문명의 열매를 꽃피울 수 있게 한 토대이자 근원이라는 진리를, 우리가 로봇의 시중을 받고 휴가를 화성에서 보내는 더할 나위 없이 편한 세상이 오더라도 결국 사람은 땅에서 태어나 땅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한 조각임을 ‘농촌’ 하면 무턱대고 운치 있는 전원생활을 떠올리고 보는 멋모르는 도시인에게 알리고 싶어서?

그렇다면 옌롄커 문학이 신봉하는 농촌 삶의 극단적인 고단함은 이 땅을 일군, 일구고 있는, 그리고 일굴 예정인 모든 농촌 사람을 위한 반어적인 문학적 칭송이다. 이주의 자유가 제한된 중국에선 도시인에게 가하는 압박이다. 요우쓰댁이 자신의 골수를 푹 고아낸 육수로 자식들의 바보병을 다스렸듯 농민의 고단함으로 도시인의 탐욕을 채우려는 파렴치한 현실에 대한 반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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