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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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 깊은 곳 | 고독에 대한 우아한 천착

Deep-in-loneliness-Hao-Jingf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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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 깊은 곳 | 하오징팡 | 고독에 대한 집요하면서도 고집스럽지 않은 우아한 천착

뜬금없는 SF 소설에 대해 갖는 감상

SF 소설에 대한 작가 하오징팡(郝景芳)의 감상이 『고독 깊은 곳(孤独深处)』이라는 책 제목과 관련이 있다면, 내가 SF 소설에 대해 갖는 감상은 무엇일까? 막상 질문을 던져놓고 보니 바로 후회가 될 정도로 대답하기 참 껄끄러운 질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마치 철학자라도 되는 것처럼 우물처럼 깊고 수평선처럼 아득하게 생각을 쥐어 짜낼 수 있다고 해서 기대하지 않은 뭔가가 튀어나올 법하지도 않다. 그저 애꿎은 뇌세포만 혹사당할 테니, 그냥 떠오르는 대로 대강 추려보자.

내가 SF 소설에 대해 갖는 막 떠오르는 감상은 상상을 뛰어넘는 현란한 기술들이 총망라되어 눈부시게 펼쳐지는 환상과 그 환상적인 기술에 압도되어 인간성을 버린 기계적인 삶을 강요당하는 공허감이다.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내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도무지 구할 길이 없을 것 같은 허탈감이다. 그것은 지금의 현대 문명이 그러한 것처럼 미래 문명도 겉만 번지르르한 번영 속에 인간적인 삶을 포기당한 실체가 끄무레한 존재들의 뭉뚱그려지고 흐리멍덩한 삶의 연속이다. 다수를 위한 과학이 소수의 특권으로 전락할 때, 그래서 과학의 첨병을 독점한 소수가 질서 유지라는 명목으로 다수를 억압하고 통제하고자 과학의 명분을 날조하고 기술의 힘을 남용하는 그날, 만약 그날이 온다면 과학 기술의 절대적인 우위를 가진 소수를 과학 기술의 절대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다수의 인해전술로는 물리칠 수 없다는 점에서 인간의 삶은 공허와 고독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 또한, 거대한 자본과 ─ 그 자본을 융통하고 응용할 권력 없이는 ─ 한 번 뒤떨어진 기술력을 따라잡기는 멍멍이가 ‘야옹’하고 울기만큼이나 어렵다는 점에서 미래의 공허에는 마침표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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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강탈당한 자의 그 비참함이란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의 연속은 사람을 프로그래밍이 된 로봇처럼 기계화시키고, 결국 우리는 수많은 사물에 둘러싸인 외톨이가 되고 만다. 고로 기계처럼 움직이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돌아가는 덧없고 공허한 삶이 인류에게 줄 수 있는 축복은 바로 고독이다. 고독은 고도화된 감정을 지닌 인간만이 품을 수 있는, 그럼으로써 내가 아직은 살아 있는 인간이란 것을 깨닫게 해주는 세련된 아픔이자 우아한 슬픔이다. 고통을 느낌으로써 육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듯, 고독을 느낌으로써 영혼의 존재를 생각한다.

설령 우주의 심연처럼 바닥을 알 수 없는 공허와 고독이 인류가 받아들여야 할 운명이라 해도 오지게도 질긴 생명력과 오지게도 뛰어난 적응력을 갖춘 인류는 결국엔 살아남겠지만, 그 가늠할 수 없는 공허함과 허탈감, 그리고 박탈감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비참함은 ─ 아이러니하게도 물질문명의 절정기를 구가한다고 자처하는 작금에서야 ─ 인간의 사물화를 이제 막 인지하지 시작한 우리가 느낄법한 비참함과는 매우 다를 것이다.

48시간씩 돌아가는 주기에서 하위계층은 40시간은 강제로 잠들고 오직 밤의 8시간만 깨어 있을 수 있는, 그것도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오직 ‘두 시간’ 짜리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접는 도시(北京折叠, Folding Beijing)」. 그곳에서 햇빛조차 보기 어려운 라오다오 같은 사람에겐 고독과 공허감을 느낄 시간적 여유조차 없다. 이들에겐 로댕처럼 팔을 괴고 어쭙잖은 표정으로 똥폼을 잔뜩 잡으며 고독을 음미하고 공허를 느끼는 것은 호사이자 사치다. 시간까지 상류층에 헌납해야 하는 라오다오의 인생을 보고 있노라면 비참함의 가지가지도 인류의 뛰어난 상상력만큼이나 무궁무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소름이 끼친다. 마치 사형집행인이 섬뜩한 아이디어와 ─ 결코, 그 사용 목적을 알고 싶지 않은 ─ 기괴한 도구들의 조합으로 사람을 고문하는 것처럼 문명 역시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인류는 고문하는 것 같다. 신이 자신이 창조한 인류로부터 모독받고, 부모가 자신이 낳은 자식으로부터 푸대접을 받는 것처럼 인류 역시 자신이 창조된, 그리고 창조한 문명으로부터 고통받고 있으니 세상 이치는 그렇게 통하나 보다.

문명의 부조리를 먹고 사는 고독

그런데 왜 작가는 SF 소설에 대한 감상을 말하며 ‘고독’을 언급했을까?

과학과 기술은 개인의 능력을 강화한다. 여기에 유전자 조작까지 허용된다면 사람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지금의 인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대폭 향상된 능력을 얻게 된다. 이렇게 능력이 강화된 개인은 예전에는 여럿이 협력해서 해야 할 일들을 혼자서도 거뜬히 할 수 있다. 부족한 부분은 인공지능이나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이 해결한다. 협력이 필요한 일은 원격으로 처리하거나 자동화된 업무 분담 시스템이 처리하면 되니 지금처럼 서로 만나 머리를 맞대고 회의하거나 마주 앉아 식사할 일도 없다. 각 개인은 지금보다 더욱 파편화될 수밖에 없다. 권력과 자본을 축적한 소수의 엘리트가 전횡하다시피 기술을 독차지하는 문제를 떠나,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함으로써 수많은 일자리를 빼앗는 문제를 떠나, 과학 기술의 진보는 필연적으로 인간을 소외시키고 물귀신처럼 고독이라는 심연 속으로 물고 늘어지는 부작용을 낳는 것인지도 모른다.

「화려한 한가운데(繁华中央)」에서 작곡가 아주가 자신의 곡이 영원히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세상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이 사회의 잉여물이 될 수도 있다는 현실을 견딜 수가 없다. 사람을 사물 다루듯 생산과 수요의 법칙에 따라 통계 내고, 사람의 생명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현금으로 환산할 수 있는 냉혹한 현실에서 내가 이 사회에 필요하지 않은 존재일 수도 있다는 일말의 당혹감이 잠깐이라도 고개를 쳐드는 순간, 그 사람은 헤어나오기 어려운 고독과 공허의 늪으로 떨어지게 된다. 나의 존재 가치가 외면당하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은 나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는 것보다 더 비참한 일이다. 무능은 ─ 비록 그것이 비난의 한 일면일망정 ─ ‘무능’이라는 가치, 즉 그의 능력이 사회에 하등 보탬이 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지만, 사회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 자체가 여전히 그는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 포함된 사람임을 의미하지만,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거나 추방당한 존재는 ‘무능’이라는 딱지조차 받을 수가 없다. 그래서 모욕받고 멸시받을지언정 이 사회에서 버려졌다는 것만큼은 죽어도 인정하기 싫다. 인정하지 않으니 개선할 여지도 없다. 삶의 고독은 그렇게 자생한다.

한편으론, 내가 원했던 삶과 내가 실제로 사는 삶 사이의 결코 좁혀질 수 없을 것 같은 격차, 내가 가진 능력과 그 능력이 도달하기를 바랐던 경지 사이의 넓고 깊은 심연, 그로 말미암아 나를 집요하게 옭아매는 소외감, 현실에서 동떨어진 기분, 그리고 내가 사는 사회에서 가장 끄트머리로 밀려난 참담함과 울적함이 이 책을 찾은 독자의 감개를 무량하게 한다.

고독에 대한 우아한 천착

하오징팡 소설이 독자의 감수성을 시험하는 무대가 될 수 있는 것은 과학의 세계가 펼치는 휘황찬란한 볼거리에만 의존하는 소설이 아니라 지금의 인류뿐만 아니라 미래의 인류도 짊어지게 될 고독에 대한 집요하면서도 고집스럽지 않은 우아한 천착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소설은 물질적이고 기술적인 사유에만 머무르지 않으며, 물질과 기술이 인간의 정신적인 양식에 미치는 심리적 영향에까지 파고들고 있다는 점에서 SF 소설의 격을 한 단계 높였다고 볼 수 있다.

그녀는 라흐마니로프의 비가(elegiaque)만큼이나 비애감에 젖은 텍스트로 미래 사회를 섬세하고 아름답게, 한편으로는 냉혹하고 비정하게 그려내는데 천부적인 소질을 발휘했으며, 물리학자 출신다운 논리적이고 냉철한 통찰력으로 현대 인류가 업보처럼 짊어지고 사는 외로움, 쓸쓸함, 고독감을 한 치의 가감 없이 온전하게 미래 사회에 투영하는 데 성공했다. 그녀의 문장은 과학과 기술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강철처럼 냉혹하지만, 이음새 없이 만들어진 강철 제품처럼 세련되고 매끄럽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다운 의젓함과 자기만의 격이 숨어 있다. 정말이지 류츠신(劉慈欣)에 이은 SF 계의 떠오르는 별이라 불릴만하다. 이런 싹수가 훤히 보이는 SF 작가들을 연이어 배출한 중국이 부러울 정도다.

텍스트를 읽는 것 자체가 즐겁고, 그 참신한 이야기에 매료되고, 그 참신한 이야기가 자아내는 달곰씁쓸한 감동에 넋을 놓는다. 물론 책에 실린 모든 단편이 나를 매료시키는 것은 아니다. 문장력으로서나 창작력으로서나 「접는 도시」나 「현의 노래(弦歌)」에 많이 못 미치는, 그래서 작가의 습작이 아닐까 여겨질 정도로 다른 작품들과 수준 차이가 느껴지는 「아방궁(阿房宫)」이나 플롯이 모호한 「고독한 병실(孤单病房)」 같은 소설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휴고상을 받은 「접는 도시」와 두 이야기가 서로 이어지는 「현의 노래」와 「화려한 한가운데」 이 세 가지 작품만으로도 작가의 매력과 재능을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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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나의 클론과의 행복에 겨운 동거

끝으로 「마지막 남은 용감한 사람(最后一个勇敢的人)」에서는 외로운 나머지 자신의 클론을 만들어 서로 위로하는 기가 막힌 상황이 연출된다. 그들은 크리스마스날 서로에게 (결국, 자기 자신에게?) 선물과 카드를 주고받으며 자신과 똑같은 클론이 건네준 선물 하나하나에 놀라워하고 기뻐한다. 사람의 외로움이 얼마나 극에 도달해야 이런 일이 벌어질까? 또한, 자신의 클론을 만들어 서로 위안하는 삶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나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이 세상의 단 한 사람을 꼽을 때, 그 사람이 바로 나와 똑같은 유전자를 가진 나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인생의 짝으로 클론을 선택한 것은 참으로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탁월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이왕이면 유전자 성별도 조작해 나와 나의 클론이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의 클론과 외로움을 나누는 것뿐만 아니라 사랑도 나눌 수 있겠는가? 나르시시스트라면 두 손 두 발을 들고 환영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웃사이더로 자처하고 싶은 나로서도 아직은 글쎄올시다.

황당무계한 이야기지만, 이 황당무계한 이야기는 사람은 이다지도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동물임을 에둘러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이 바글바글 넘치는 세상에서, 왜 우리는 외로움에 시달리고 쓸쓸함에 몸서리쳐야 할까? 사회를 질식시키고 소외를 극대화하는 불신과 증오, 적의와 시기를 끝내 떨쳐낼 수 없는 세상, 그래서 나를 복제한 클론과 외로움을 나누는 것이 이웃들과 소통하는 일보다 더 쉽고 편한 세상, 그런 세상이 우리가 기대는 미래일까?

비록 보잘 것 없지만 광고 수익(Ad revenue)은 블로거의 콘텐츠 창작 의욕을 북돋우는 강장제이자 때론 하루하루를 이어주는 즐거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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