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치바 | 이사카 코타로 | ‘GOD’한 업무, ‘GOD’한 무책임
이번엔 가벼운 읽을거리를
얼마 전에 읽은, 달나라에서 나 홀로 우주의 심연을 관조하듯 차분하고 고독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몽환적인 분위기가 운치 있었던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태엽 감는 새 연대기(ねじまき鳥クロニクル)」는 과도한 감정 소비 없이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지만, ‘깊이 있는 수려한 문장’을 잘강잘강 소화하고자 평소엔 잘 사용하지 않던 지력을 소비했기 때문인지 약간의 정신적 피로를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이번엔 ‘읽는 재미’는 과감히 포기하고 대충대충 읽어도 얼렁뚱땅 이해할 수 있는 재미도 있고 읽기도 쉬운 책을 골라봤다. 이왕이면 새 얼굴로 새 작가로. 그렇게 해서 선택한 책이 이사카 코타로(伊坂幸太郎)의 『사신 치바(死神の精度)』다.
그렇다고 누군가로부터 이사카 코타로라는 작가를 추천받은 것은 아니었고, ‘이담에 기회가 되면 한번 읽어봐야겠다’라고 기존부터 벼르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이런저런 파일을 정리하던 도중 ‘2005 나오키상 최종후보’, ‘2006 전국서점대상 3위’라는 표지의 선전 문구가 눈에 띄었기 때문에 한 번 읽어보기로 작정한 것이다.
명예로우면서도 뭔가 아쉬운 타이틀이 대변하듯 이 책은 재미도 있고, 마무리 반전과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물거품처럼 떠오르는 감동과 여운도 유치하지 않고 꽤 세련되지만, 문장력은 내가 기대한 대로 평범하다. 아마 장르소설에서 익히 볼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문장력 때문에 ‘최종후보’와 ‘3위’라는 타이틀을 뛰어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 같은 게으른 독서가가 단 이틀 만에 독파했을 정도로 이야기의 흡입력만큼은 확실히 뛰어나다. 사실 하루 만에 다 읽을 수도 있었고, 그러고 싶기도 했는데 ‘이 재밌는 걸 하루 만에 다 읽으면 내일은 무슨 재미로 살지?’ 하는 웃기지도 않는 걱정 때문에 다음 날 읽을 분량을 일부러 남겨두었다. 믿거나 말거나.
일은 제쳐두고 음악만 찾는 불성실한 사신들
‘사신(死神)’이라는 단어를 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일본 만화 「데스 노트(デスノ-ト)」에 등장하는 사신인데, 여기에 등장하는 사신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시뻘겋게 잘 익은 사과를 통째로 베어먹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사신 치바는 사과를 좋아하지 않는다. 단지 그뿐만이 아니라 치바는 맛도 느끼지 못하고, 영양분을 섭취할 필요도 없다. 사정이 그러하니 당연히 식사라는 행위에 흥미도 없다. 그저 주변 분위기나 상대하는 사람에 맞춰주기 위해 먹는 척할 뿐이다.
인간 세상의 것 중 사신들이 유일하게 좋아하고 즐기는 것은 음악이다. 한국의 전통 장례식엔 상여를 메고 장지로 가며 불렀던 상엿소리라는 노래가 있고, 외국에도 장례 때 연주하는 장송곡이 있으니 죽음과 음악이 딱히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대상자에게 사망 선고를 내릴지 말지를 결정하는 사신의 주 업무는 동사무소 직원이 등본을 발급하는 것처럼 사무적으로 처리하면서도 업무 중 사무실이 아닌 사우나실을 점령하고 있는 공무원들처럼 음반 가게에 죽치고 있는 사신들의 직무 유기는 괘씸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다.
만약 나의 생사를 움켜쥔 사신이 나를 조사하기를 지나가는 똥개 쳐다보듯 경시한 채 음악만 주야장천 듣다가 조사 마지막 날, 그러니까 조사 대상자의 사망 여부를 결정하는 날 ‘네가 뭘 해도 넌 진즉에 죽은 목숨이었어’라는 식으로 탑처럼 쌓인 서류에 도장찍듯 사무적으로 사망 선고를 내린다면 (할 수만 있다면) 그 사신을 직무 유기로 고발하고 싶을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사신의 호의를 조금이라도 얻어 죽음을 연기할 가능성을 단 1%라도 올리고 싶다면, 공기에 에워싸인 것처럼 음악에 에워싸여 살라고 강력히 충고하고 싶다.
그런데 사신을 알아볼 수 있냐고? 주변에 아래와 같은 사람이 최근에 접근했다면 그 사람은 100% 사신이다!
1. 음반 매장에 비정상적으로 자주 드나든다.
2. 이름으로 동네나 시의 이름을 쓰고 있다.
3. 대화의 포커스가 미묘하게 빗나간다.
4. 맨손으로 사람과 접촉하려 하지 않는다.
5. 항상 비를 몰고 다닌다.
6개의 에피소드, 6개의 죽음
지금까지의 글로 예상할 수 있듯 사신 치바의 업무는 대상자를 직접 만나보고 조사해서 ‘죽음’을 실행하기에 적합한가 어떤가를 판단하여 보고하는 것이다. 그 기한은 7일이며 그 일주일 동안 상대와 접촉해 두세 번 이야기를 나누고 ‘가(可)’ 혹은 ‘보류’라고 쓰기만 하면 된다. 그가 ‘가(可)’라고 결정하면 대상자는 다음 날 죽는 것이고, 그가 ‘보류’라고 보고하면 대상자는 천수를 누릴 수 있다. 한 사람의 생사를 결정하는 과정치곤 상당히 간단할 뿐만 아니라 무례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성의도 없다. 그래도 딱히 하소연도, 불평도 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의 좌우명대로 사람은 어차피 죽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사신이 대상자를 조상한답시고 치근거릴 때, 대상자에게 꼭 하는 질문이 하나 있다.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사신 치바』는 분명 가벼운 문장으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지만, 치바 같은 사신들에게는 코딱지만큼도 흥미롭지 않을지 몰라도 나와 당신 같은 아직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 있어선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주제인 ‘죽음’을 다루고 있어 사뭇 진중한 느낌도 없지 않아 있는데, 만약 위 질문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가(可)’ 혹은 ‘보류’라고 결정된다고 한다면 당신은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연작 소설인 『사신 치바』엔 총 6개의 에피소드가 준비되어 있고, 그 말인즉슨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라는 질문에 6명의 대답을 들어볼 수 있다는 말이다.
불량 고객에게 시달리는 전자 제품 고객서비스 직원, ‘의협심’을 몸소 실천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야쿠자, (마치 김전일 에피소드를 보는 듯한) 눈보라 치는 산장에서 일어나는 연쇄 살인, 이제 막 심쿵한 사랑이 싹틀 기미를 보이는 초보 연인, 친엄마와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을 칼로 찌르고 도주 중인 범죄자, 전망 좋은 미용실을 운영하는 노파 등 실로 다양한 이력을 가진 다양한 사람의 죽기 전 7일이 주마등처럼 펼쳐진다. 과연 그들은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그들의 생각에 자기 경험과 지식을 융합할 수 있다면 우리는 사신을 만족시켜줄 만한 정답을 찾을 수 있을까? 그래서 ‘보류’ 판정받을 수 있을까? 아니면 ‘음악’ 외에는 인간 삶에 큰 관심이 없는 사신 앞에서 강아지처럼 애교를 부리고 도사처럼 도를 외우고 음양사처럼 주문을 암송해도 우리는 여지없는 ‘가(可)’ 등급일까?
혹은 모르겠다. 우리가 돈과 음식을 밝히는 것만큼 음악을 밝히는 사신과 함께하는 인생의 마지막 7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콘서트만 편력한다면 먹구름 사이로 잠깐 내비치는 한 줄기 햇살 정도만큼의 가련한 희망이라도 건질 수 있을지도.
비와 음악, 그리고 무책임은 나의 천직이로다
일하는 날이면 많든 적든 어떻게든 비가 오기 때문에 구름에 가려진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다며 푸념하는 치바는 결국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눈 부신 햇살의 평범한 장관을 처음으로 실감하게 된다. 치바가 사람은 눈부신 표정을 지을 때와 웃을 때 표정이 닮았다는 것을 배울 때 독자는 각각의 에피소드가 게 눈 감추듯 몰래 먹어 치운 세월의 깊이를 그제야 가늠하게 된다.
얼핏 연대기처럼도 보이는 각 에피소드 사이엔 꼬부랑 할머니 이마에 고랑처럼 파인 주름이 의미하는 것만큼이나 넉넉한 시간 격차가 있고, 이 시간 격차는 치바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직업에 성실하게 임해왔다기보다는 공무원들처럼 철밥통을 잘 지켜왔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지금까지 사신에 대해 이야기하며 종종 ‘공무원’에 빗댄 것처럼 치바를 포함한 사신의 업무 태도를 칭찬하기 어려운 것이 이미 그들은 조사에 임하기 전부터 ‘가’를 주기로 했고, 이 선입관은 조사 후에도 부동자세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한 사람의 생사가 달린 조사에 임하는 자세가 이토록 무심하고 불성실한 것은 그들이 보기에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인간은 죽음을 면치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하루하루 구차스럽게 연명해 나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안고 태어난 한 생명체로서 죽음에 구애받지 않는 사신들이 죽음에 구애받는 사람들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듯한 태도는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배고픔을 농담거리로 삼는 것만큼이나 분통 터지는 일이다.
만약 조사 대상자가 조사 결과에 상관없이 ‘너도 사람이니 언젠가 죽지 않고는 못 배길 것 아니냐?’ 하는 막무가내식으로 운명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어디에도 하소연할 데 없는 원통함과 기껏해야 대화 몇 마디로 내 죽음이 결정된다는 허망함은 예수와 부처와 공자도 견디기 어려울 것 같다.
살인청부업자가 호황을 맞으면 애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죽어 나가듯 사신들이 근면하면 맬서스주의자들이 호황을 누릴 것이지만, 그 어느 누가 사신 앞에서 이런 부당함을 맹랑하게 항의할 수 있으며, 한편으론 그 어느 누가 자신이 죽지 말아야 할 이유를 명확하게 제시할 수 있겠는가? 한마디로 사신은 인간 세상에서만큼은 꺼릴 것이 전혀 없는 무적 같은 존재다. 묻지 않으면 알려주지 않는 정보부와의 갈등이 조금 있다지만, 한 사람의 목숨을 결정짓고도 책임을 전혀 지지 않는 ‘GOD’한 업무에 비하면 그런 스트레스쯤은 한 양동이 들이켜도 탈 날 것이 없다. 이만한 땡보직도 없을 것 같다.
사정이 이러하니, 그리고 사신들은 음악을 좋아하고 비를 몰고 다닌다고 하니 참으로 나의 천직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당장 경험과 연륜과 지식이 부족하여 사람의 목숨을 관장하는 정식 사신은 못 되더라도 한국에서 개의 목숨을 관장하는 수습 사신이라도 되어 나의 숨은 사신 자질을 증명해 보이고 싶다. 말쑥한 개로 변신해서 조사 대상견인 개와 ‘멍멍, 왈왈’ 대화하고 그 개가 탕국의 재료가 될지를 결정하는 일도 지금의 삶보다 훌륭하면 훌륭했지,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는 개 같은 소리로 『사신 치바』의 훌륭하지 않은 리뷰를 마치련다.
그런데 이렇게 글을 싸질러놓고 보니 ‘사신 치바’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사신의 7일(死神の浮力)』도 왠지 읽고 싶어진다. 참고로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 제목은 「스위트 레인 - 사신의 정도(Sweet Rain 死神の精度 Sweet Rain Accuracy Of Death,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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