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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1. 17.

[책 리뷰] 성공 신화가 아닌 한 사람의 성장 이야기 ~ 비커밍 스티브 잡스(브렌트 슐렌더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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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 신화가 아닌 한 사람의 성장 이야기

Original Title: Becoming Steve Jobs by by Brent Schlender, Rick Tetzeli
게이츠는 잡스의 경영방식이 왜 표준이 되기에는 그 적용에 한계가 있는 독특한 사례인지 설명했다. “어쩌면 당신 책은 ‘모방하지 말아야 할 비법(Don’t Try This at Home)’이라고 제목을 붙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게이츠가 농담조로 한 말이다. “결국, 스티브처럼 되고자 하는 많은 사람이 ‘개자식’ 측면을 마스터하는 셈이에요. 다만 ‘천재’ 측면은 놓치고 있다는 게 문제지요.” 그리고 스티브 잡스의 방식으로 회사를 경영할 때의 한 가지 단점에 대해 이렇게 덧붙였다. “저지와 제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조직이 되기에 십상이죠.” (『비커밍 스티브 잡스』, p589)

죽음이 불러오는 관용

조금이라도 인정이 남아 있는 사람이라면 죽은 사람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것은 불편한 감정을 일으킨다. 헐뜯거나 비방한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앙갚음할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죽은 사람의 결점을 들춰내는 것은 왠지 모르게 꺼림칙하다. ‘좋은 사람’이 할 짓이 못 되는 것 같다. 죽은 사람의 단점과 결점을 감싸주기는커녕 그것을 굳이 들추어내는 자신이 옹졸하고 비겁해 보인다. 설령 죽은 사람이 생전에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할지라도 죽은 사람의 잘못을 산 사람이 물고 늘어지는 것은 너그럽지 못하고 관용이 부족한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 같아 추하다. 죽은 사람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일지라도 그 대상이 이미 죽었음에도 죽은 사람에 대한 증오심을 공공연하게 표출하는 것은 스스로 소인배임을 만천 한에 알리는 것과 다름없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도 있듯, 사람은 죽은 사람의 잘못이나 결점은 보통은 육신과 함께 땅속에 묻어두기를 원하고, 대신 죽은 사람과 가깝게 지낸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좋은 점만, 혹은 죽은 사람과 좋은 시간을 보냈던 것만을 기억하려 한다. 그것은 죽은 사람을 비난함으로써 앞으로 살아야 할 시간이 꽤 남은 산 사람의 명예나 입이 더럽혀지는 것을 예방하는 것은 물론이고, 죽은 사람과 함께 했던 사람들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히틀러 같은 인류의 적은 예외지만 말이다.

한마디로 기본적인 소양을 갖춘 사람이라면 죽은 사람에 대해 말할 때 어느 정도는 너그러워지는 법이다. 특히 죽은 사람과 함께 많은 일을 하면서 좋은 감정 나쁜 감정 다 맛본 사람들은 죽은 사람에 대한 추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기 마련이고, 죽은 사람이 유명인이라면 그런 심정은 더욱 깊어지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쁜 감정보다는 좋은 감정을 기억하기 마련이다. 추억은 아름다운 것이고 아름다워야 추억이라 말할 만하며, 그러하기에 죽은 사람과 핏발을 세워가며 논쟁했던 일이나, 서로 욕을 주고받으며 격렬하게 말싸움을 했던 일도 시간이 지나면 나름의 정당성을 가지고 공공연하게 미화된다. 죽음으로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고, 죽음은 공공연하게 동정과 관용을 불러온다.

오해에 대한 해명인가? 아니면 감상적인 미화인가?

내가 굳이 이런 졸렬한 소견을 밝힌 이유는 브렌트 슐렌더(Brent Schlender), 릭 테트젤리(Rick Tetzeli)가 『비커밍 스티브 잡스(Becoming Steve Jobs)』를 공저하면서 참고한 자료 중 상당 부분이 스티브 잡스 사후에 진행된 인터뷰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죽은 사람, 그것도 잡스와 함께 성공의 샴페인을 함께 터트리고 일부는 실패의 쓴잔을 함께 마신, 그래서 그들 스스로 위대한 사람이라고 평가내리는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은 잡스와 죽이 잘 맞았던 사람들이고, 몇몇은 잡스에게 재능을 인정받은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잡스와 함께 창의적인 일을 해낸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이 만약 잡스를 얼간이라고, 개자식이었다고 비판하는 것은 자식이 죽은 부모를 비난하는 것처럼 께름칙한 일이다. 설령 정당한 비판일지라도 그 대상이 일부에서는 영웅처럼 떠받들어지는 대단한 인물이라면 웬만한 용기와 각오 없이는 어렵다. 한편으로 그들은 잡스와 함께, 혹은 잡스 밑에서 세상이 놀랄 일을 해낸 사람들이고, 덕분에 명성과 부도 거머쥔 사람들이다. 그 자부심은 비할 데 없으며, 그 자부심은 잡스에 대한 추억과 기억에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영향력을 끼쳤을 것이다.

또한, 브렌트 슐렌더가 프롤로그에서도 밝혔듯, 『비커밍 스티브 잡스』는 스티브 잡스를 ‘반은 천재, 반은 얼간이로 살다간’ 인물로 각인시켰다고 여겨지는 월터 아이작슨(Walter Isaacson)이 쓴 『스티브 잡스(Steve Jobs)』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기를 든 책이다. 고로 독자는 이런 점들을 충분히 고려해 이 책을 읽어야 할 것을 당부시키고자 변변치 않은 변론을 펼쳐보았다. 사실 내가 보기에는 아이작슨의 책보다 슐렌더의 책이 잡스를 신격화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치 세상을 위기에서 구한 영웅처럼 띄워주는 눈꼴 시린 면이 더 많다고 여겨진다. 물론 이 모든 판단은 독자의 몫이지만, 만약 이 두 책을 모두 읽어볼 요량이라면 아이작슨과 슐렌더의 책을 모두 읽어본 나로서는 아이작슨의 공식 전기를 먼저 읽고 슐렌더의 책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아무래도 잡스가 살아생전에 집필을 부탁한 아이작슨의 공식 전기가 잡스에 대한 미화와 감상적인 추억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운 것 같다.

성공 신화가 아닌 한 인간의 성장 이야기

공식 전기(아이작슨)에 등장하는 스티브 잡스는 진짜 잡스가 아니라는 기치 아래 쓰인 『비커밍 스티브 잡스』는 스티브 잡스와 함께했던 동료들이 기억하는 잡스를 최대한 살리려는 노력의 하나이자, 한편으로는 공식 전기의 등장하는 강박적인 통제 욕구를 지닌 독재자 같은 잡스가 아니라 협력과 상호소통을 중시하는 지휘자로서 잡스를 기억하려는 시도다. 비록 잡스가 혈기왕성했던 청년 시절, 그리고 애플에서 쫓겨나기 전까지 ‘개자식’ 같은 면모를 보여준 것은 사실이고, 그런 개인적 성품의 결점을 그대로 이어갔던 넥스트(NeXT)에서의 실패도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 개인의 인간적 결점을 집요하게 들춰내는 것만으로는 훗날 침몰해가는 애플을 위기에서 건져 올릴 뿐만 아니라 이제 막 기사회생한 애플을 재조직하고 조련해 세계 최고의 혁신 기업으로 이끌게 될 잡스의 놀랍고도 성공적인, 누군가는 ‘신화’라고도 칭송하는 그런 이야기를 설명할 수 없다. ‘개자식’처럼 굴었던 청년 시절의 잡스라면 당연히 천지가 개벽할 그런 일을 일궈내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잡스는 기어이 해냈다. 그것은 잡스가 똑같은 실패를 거듭하는 얼간이가 아니라 실패의 교훈을 깊이 새길 줄 아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뜻이다.

애플에서 자신을 쫓아낸 사람들에게 복수하겠다는 집념이 다소 엿보이는 회사였던 넥스트의 실패를 통해서, 그리고 심드렁하게 인수한 픽사에서 자신의 ‘현실 왜곡장’을 간단히 물리치고 창의적 사고를 최상으로 운영하는 자신들만의 문화로 똘똘 뭉친 픽사 팀원들을 경험하면서 잡스는 많은 것을 깨달았다. 슐렌더는 그런 교훈이 없었다면 훗날 애플에서 펼쳐진 위대한 2막도 없었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슐렌더는 잡스가 넥스트를 직접 경영하면서 실패를 맛보고, 픽사가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로 창의성을 극대화하는 현장을 지켜보면서 조금씩 조금씩, 그렇지만 현실에 큰 영향력을 미칠 정도로 확실하게 변화해 나갔고, 그럼으로써 위대한 기업가의 자질을 갖출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잡스는 창의적인 사람들을 위한 창의적인 도구를 생산한다는 대의를 추구하는 이상적인 기업을 만들겠다는 열정은 그대로 간직한 채, 좀 더 신중해졌고, 기꺼이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했으며, 급진적인 방법이 아니라 점진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일이 더 많아졌으며, 예전처럼 팀원들의 갈등을 부추기기보다는 조화와 화합을 끌어내려고 노력했다. 쉽게 말해 잡스는 고단한 여정 속에서 엄청나게 성장하고 변했으며, 이러한 변화가 가능했기에 애플의 느리면서도 조심스러운 부활도 가능했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다. 그래서 한 사람의 성공 신화가 아니라 ─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법한 ─ 한 사람의 성장 이야기로써 『비커밍 스티브 잡스』를 어필하고 있다.

잡스의 인간적인 매력이 미치는 경계선

보기에 따라서는 잡스의 변화는 사람이 나이를 먹게 되었을 때 응당 갖추게 되는 성숙함과 노련미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슐렌더도 인정하듯 잡스가 애플 복귀 이후에도 감정적 충동이나 변덕, 무례한 언동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그리고 한 사람이 허물을 벗듯 자신의 천성을 온전히 벗어던질 수는 없다고 믿는 나는 잡스가 개과천선했다기보다는 노련해졌다고 본다. 하지만, 그것은 보통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서 응당 얻게 되는 평범한 노련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 정도로는 침몰하는 애플을 구해낼 수는 없다. 내가 볼 때 그 노련함은 어차피 약점을 완전히 벗어던질 수 없다면, 장점을 극대화하여 약점으로 말미암은 피해를 극복하거나 최소화하려는 의지를 압착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작가 짐 콜린스(Jim Collins)가 언급한 잡스의 가장 큰 장점인 ‘쉼 없는 몰두’가 마음껏 발휘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참고로 콜린스는 쉼 없는 몰두는 회복력의 원천이며, 자기 동기부여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제대로 알고자 하는 탐구심,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해내겠다는 열망, 그리고 최선을 다해 삶을 살겠다는 목적의식을 연료로 삼는다.

잡스의 ‘쉼 없는 몰두’가 가장 열정적으로, 그리고 가장 빈번하게 작용했던 곳은 당연히 그의 일터다. 잡스는 진정 자신이 하는 일을, 그리고 그 일과 관계된 모든 것을 사랑한 남자다. 안타까운 점은 그 경계가 지독히도 확실하게 그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즉, ─ 사람이건 물건이건 ─ 일에 도움이 되는 모든 것에는 자상하고 친절한 잡스가 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판단이 들면 소름 끼치도록 잔인한 잡스가 될 수도 있다. 애플로 복귀한 잡스를 도와 함께 성공 신화를 이끌었던 동료들이 시간이 흘러 쓸모가 없어지거나 재능이 고갈되는 것처럼 보이자 그들과 거리를 두면서 소원한 관계를 끌어낸 것도 잡스였고, 초창기 차고 모임에서부터 애플에 합류한 친구이자 애플 창업구성원인 대니얼 콧키가 정직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스톡옵션을 받지 못하게 한 것도 잡스였다. 그리고 잡스의 마케팅과 비즈니스 실력을 발동시킨 장본인이자, 어쩌면 두 사람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애플도 없었을 가능성이 농후했던 천재 엔지니어링 워즈니악과 서로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는 이유로 소원한 관계를 이어나간 것 역시 잡스다. 이런 점을 보면 잡스의 인간적인 매력이 미치는 범위가 극히 제한적임을 알 수 있다. 즉, 잡스에게 재능을 인정받거나, 혹은 잡스의 인간적 결점을 요령껏 피해가거나 인내할 수 있었던 사람들, 그래서 잡스와 함께 애플의 성공 이야기를 완성해나갈 수 있었던 사람들이 기억하는 잡스와 잡스의 배려와 관심이 미치는 경계선 밖으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이 기억하는 잡스가 같을 수는 없다. 전자의 사람들은 잡스를 자신에게 기회와 더불어 명성과 부를 가져다준 영웅이자 친구로서 추억될 것이고, 후자의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무시하거나 능력을 입증할 기회마저 박탈한 ‘개자식’으로 잡스를 기억할 것이다. 아마 이 중간 어디쯤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잡스의 진짜 모습이 어려있을 것이다.

성공한 사람의 발자취를 더듬어간다는 것

그 사람의 됨됨이를 몇 마디만으로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순하고 명확한 사람이 있고, 긴 설명으로도 부족한 복잡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있다. 이 중 어떤 사람이 좋고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잡스는 복잡한 성격과 더불어 그 복잡성을 배가시키는 변덕과 기벽까지 갖춘 사람이니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잡스를 읽고 있노라면 잡스만큼이나 변화무쌍한 성격을 가진 기인이자 간웅인 조조(曹魏)가 떠오른다. 자신이 필요로 하는 인재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웠지만, 그러한 인재라도 서로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이 드러나면 순욱 같은 공신이라도 내치는 조조의 몰인정은 앞서 얘기했던 잡스와 워즈니악 등의 소원한 관계를 보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몇몇 인물에 대한 분노나 복수심을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누그러트리지 못하는 질긴 적개심을 보면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江靑)이 떠오르기도 한다.

사실 잡스의 성격이 어떠한지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그런 것은 잡스의 비범한 재능을 부러워하고 시기하는 나 같은 소인배가 성공한 사람을 씹으면서 위안으로 삼을 때 써먹는 가십거리 정도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리고 『비커밍 스티브 잡스(Becoming Steve Jobs)』가 강조하는 것은 잡스가 실패와 좌절을 겪은 후에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이상을 끝까지 견지할 수 있었던 자신감과 자기 확신, 그리고 그것을 모종의 창의적인 과정을 거쳐 현실에 투영해 우리가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마음으로 느낄 수 있고, 두뇌로 작용할 수 있는, 지금까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놀라운 뭔가를 창출할 수 있게 만든 창조력과 부단한 열정을 돋보이게 하는 비범함이다. 또한, 여기저기 널린 소소한 아이디어들에서 미처 남들이 보지 못한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러한 아이디어들을 한데 모은 다음 그것들을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갈고 닦고 집대성해 엄청난 결과물을 창조해내는 창의적인 과정과 능력이야말로 잡스만이 할 수 있는 특출난 재능이다. 이런 재능에 비하면 그의 인간적 결점은 사소한 문제이고, 실재로도 사소한 문제였기에 잡스는 만인이 기억하는 혁신가이자 위대한 기업가로 남을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개자식’이겠지만 말이다.

자신보다 월등히 뛰어난 사람의 발자취를 더듬어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보통 사람의 배짱과 포부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언동과 결단력, 부럽고 시기심을 유발시키고도 남는 재능, 여기에 남부럽지 않은 가족 관계와 훌륭한 인간관계를 가진 누군가의 전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소갈머리 좁은 나의 마음은 부러움과 시기심으로 끓어오르고 황당하게 부아까지도 치민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그러고 싶지는 않지만, 전기적 삶을 살아간 사람의 발자취와 공적이 투영된 폭넓고 화려한 스펙트럼 위로 바퀴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보잘것없는 자신의 삶이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난 기업가도 아니고, 그런 것은 꿈도 꾸지 않지만, 짧고 굵직한 삶을 살아간 잡스의 삶은 쓸쓸한 뒤안길 같은 나의 초라한 삶을 반추시킨다. 잡스만큼 분명하지는 않을 것이고, 잡스만큼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나에게도 내 인생에 크고 작은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난 그것을 찾지 못했다. 아니면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일까? 어쩌면 영영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염치 불고하고 꿋꿋하게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리라고 여기며 나는 오늘도 자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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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1. 6.

[책 리뷰] 최고가 아니면 쓰레기! ~ 스티브 잡스(월터 아이작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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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가 아니면 쓰레기!

Original Title: Steve Jobs by Walter Isaacson
“그의 인생과 성격에는 극도로 지저분한 부분도 있어요. 그게 진실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그런 것들을 눈가림하려 해서는 안 돼요. 스티브는 조작이나 왜곡에 능하긴 하지만 놀라운 이야기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 것들을 다 있는 그대로 얘기했으면 좋겠어요.” (『스티브 잡스(Steve Jobs)』, p11)

대비되는 두 개의 전기

한국어로 번역된 스티브 잡스(Steve Jobs)의 전기는 두 책이 있다. 하나는 오늘 리뷰를 쓰는 책이자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난 그해에 출판된 월터 아이작슨(Walter Isaacson)이 쓴 『스티브 잡스(Steve Jobs)』, 다른 하나는 브렌트 슐렌더(Brent Schlender), 릭 테트젤리(Rick Tetzeli)가 공저하고 비교적 최근인 2016년에 나온 『비커밍 스티브 잡스(Becoming Steve Jobs)』다. 사후 5년 사이에 두 권의 전기가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 살아생전이나 사후에나 ─ 스티브 잡스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이 가고도 남지만, 무척이나 두툼한 두께의 책으로 전기가 출판되었음에도 5년 후 또 다른 전기가 나왔다는 점은 첫 번째 전기를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즉, ─ 스티브 잡스가 어딘가에서 벌떡 일어나 ‘쓰레기’라고 고함치며 태클을 걸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확신하면 그를 제외하고 ─ 유가족이나 애플의 처지에서 월터 아이작슨의 전기가 뭔가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었나 하는 의구심을 들게 한다. 아니나 다를까. 두 책의 대비되는 선전 문구가 이러한 추측에 힘을 더해주고 있었다.

아이작슨 책의 광고 문구는 ‘스티브 잡스의 육성이 담긴 유일한 공식 전기’라고 선전하고 있으며, 슐렌더와 테트젤리의 책은 ‘스티브 잡스의 가족과 애플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유일한 자서전!’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사실 아이작슨의 전기는 2004년부터 시작되어 2009년까지 이어진 잡스의 끈질긴 요청 끝에 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책을 잡스의 ‘공식 전기’라고 인정하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광고 문구 속에 버젓이 ‘공식 전기’란 말을 쓸 수 있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아이작슨의 책에 묘사된 잡스의 이미지가 잡스를 곁에서 지켜보아 왔던 가족이나 동료들에게는 영 탐탁지가 않았나 보다. 그래서 그 반대의 목소리, 혹은 아이작슨의 책에 묘사된 잡스와는 뭔가 다른 잡스의 이미지(유가족이나 동료들이 보기엔 잡스의 진짜 모습에 더 가까운)를 담은 것이 『비커밍 스티브 잡스』라고 볼 수 있다.

고로 아이작슨이 쓴 전기에는 잡스의 부탁으로, 그리고 작가와 잡스의 대화를 토대로 지어진 자서전에 가까운 전기라는 점에서 스티브 잡스가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고, 『비커밍 스티브 잡스』에는 스티브 잡스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간직된 잡스의 모습이 담겨 있을 것이라는 추측하에, 먼저 출판된, 그리고 잡스의 직접적인 요청으로 완성된 아이작슨의 책을 먼저 선택했다.

우연히 잡스의 전기를 찾게 된 이유

불행인지 행운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애플 제품을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을뿐더러 가까이서 구경하는 일조차 없었던 내가, 그리고 지금까지 애플 제품의 폐쇄성을 심술궂은 노인네의 똥고집으로 넘겨짚어 왔던 내가, 애플 제품의 혁신성이나 창조성을 거론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에 겨운 일이자 재미도 없는 일이다. 몇 자 적어보려고 손가락과 머리를 쥐어짜도 한 마디조차 끄집어내기 어려울 정도로 애플 제품에 대한 지식 역시 없다. 아, 그러고 보니 한 10여 년 전쯤에 AMD 샘프론 시스템에 해킨토시를 잠깐 사용해 본 기억이 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 솔직히 난 이 책을 접하기 전까진 스티브 잡스가 죽은 줄도 몰랐다!

그렇다면, 애플 제품을 사용해 본 적도 없고, 애플의 폐쇄성을 탐탁지 않게 여겨 왔던 내가 왜 이 책을 읽게 되었을까? 그 직접적인 원인은 시답지 않게도 스위즈(石毓智)의 『중국, 엄청나게 가깝지만 놀라울 만큼 낯선』이라는 책 때문이다. 이 책에서 스위즈는 중국인에게 특히 부족한 창의성, 창조력을 거론하면서 툭하면 그 비교 대상으로 스티브 잡스를 왕왕 거론하는데, 그런 식으로 스위즈의 책 속에서 스티브 잡스를 엄청 대단한 인물인 양 언급하는 것을 계속 읽다 보니 주책없는 호기심이 여지없이 발동해버렸다. 그렇게 해서 앞에서 거론한 스티브 잡스의 전기 두 책을 만나게 되었고, 이 책을 읽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된 것이다. 참 단순한 이유이지만, 이처럼 생각지도 못했던 호기심을 자극하고 그 호기심을 이어주고 지속시켜 주는 지적인 맛과 그 지적인 맛이 간혹 일깨워주는 지적인 유쾌함 때문에 난 책을 읽는다.

인간적으로 스티브 잡스는 어떤 사람일까?

50살이나 먹은 남자가 마트에서 스무디를 파는 할머니에게 스무디가 형편없다며 계속 잔소리를 퍼붓는다면, 당신은 그 남자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만약 당신이 정의감이 넘치면서도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라면 그 남자가 어떤 사람이라고 평가하기도 전에 바람처럼 달려가 할머니 편을 들면서 용감하게 그 남자와 맞설 수도 있다. 한국 사람이라면 ‘진상부리는’ 재수 없는 손님이라고 ‘퉤’하고 침을 뱉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진상부리는’ 사람 중 하나가 스티브 잡스다. 물론 이 한 편의 일화로 잡스의 인품을 무엇이라고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일화는 잡스의 괴팍한 성질이 한번 발동되면 상대를 매우 잔인하게 몰아붙인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무튼, 더욱 가관인 것은 그러고 나서 조금 있다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정색하며 ‘노인네가 일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겠냐’라고 말하며 할머니를 동정한다. 애초에 할머니를 동정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아무리 스무디가 맛이 없을지라도 그렇게 함부로 굴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항상 ‘최고의 것’ 아니면 ‘쓰레기’라는 엄격한 이분법적 사고로 일관됐던 잡스에겐 당연히 어느 마트에서나 팔 법한 고만고만한 스무디가 마음에 들 리가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평소대로 솔직하게 ─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생각을 배출하지 못하도록 막는 필터가 자신에게는 아예 없다고 잡스가 인정한 것처럼 ─ 형편없다고 말했을 뿐이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형편없는 제품, 혹은 형편없는 사람을 그 당사자 앞에서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형편없다고, 혹은 쓰레기라고 말하는 사람이 바로 잡스다. 가식과 체면치레에 신경 쓰느냐 솔직할 기회를 놓쳐 나중에 더 큰 화를 불러오는 일이 왕왕 있다는 것을 깨우친다면 잡스의 무정할 정도로 솔직한 성정은 눈여겨볼 만하다.

형편없는 스무디 이야기에 한때 동거했던 여자가 낳은 딸을 자신의 딸이 아니라고 잡아뗀 이야기, 그리고 그 딸이 어느덧 성장하여 대학을 졸업할 때, 단지 초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참석하지 않은 이야기까지 보태면 잡스의 잔인하고 매몰찬 성품이 어느 정도인지 대충이나마 짐작이 간다. 아이작슨의 책을 읽고 있노라면, 옹졸하고 무례하고 자기중심이고 잔인하고 심술궂고 버르장머리 없는 잡스의 괴팍한 성격에 치를 떠는 몇몇 순간이 있다. 정도가 심할 때는 역겹기도 하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지만, 이런 고약한 인간의 도움까지 받아야 할 정도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 형편없는 것일까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한다.

아무튼, 세계적인 명성과 거대한 부를 거머쥔, 그리고 끝내주게 잘 나가는 IT 기업인 애플의 CEO가 고작 마트에서 파는 스무디 품질 때문에 마치 한국의 지긋지긋한 진상 손님처럼 할머니에게 잔소리를 퍼붓는 모습은 인간적으로 참기 어려운 장면이다. 이 책에는 잡스의 괴팍한 성격에 곤혹스러워하는 아이작슨의 심정과 그래서 잡스의 모난 성격을 조금이라도 둥글게 빚어 보이려는 노력의 흔적이 간혹 엿보이기는 하지만,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살려야 하는 전기인 이상 더 이상의 덧칠이나 각색은 작가 자신도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워낙 잡스라는 인물이 더없이 괴팍하고 복잡하고 변덕스러운 심정을 소유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다 보니 그런 잡스의 성격을 미화하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은 것보다 반발이 더 거셀 것이다. 스티브 잡스의 극단적인 성격을 하릴없이 바라보면 자기애성 성격장애, 조울증, 사이코패스 등등 각종 정신병명을 떠올리게 한다. 그나마 이런 잡스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무례하고 거칠고 잔인하게 보이는 잡스의 언동에는 결코 악의가 담겨 있지는 않았다는 것, 그래서 남에게 일부러 상처를 주고 그것을 즐겁게 지켜보는 심술궂은 사람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잡스의 처지에서는 순진한 소년처럼 자신의 심정이나 느낌을 솔직하게 말했던 것뿐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점을 일찌감치 간파했던 동료들이 있었기에 그들과 함께 잡스는 놀라운 일을 해낼 수 있었으리라.

잡스의 재능은 분명 비범하지만, 다른 위인들도 그러했던 것처럼 그 역시 모든 영역에서 비범할 수는 없다. 잡스의 아내 로렌 파월이 한 말처럼 잡스는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본다거나 하는 사회적 배려는 없다. 그 점은 아이작슨 역시 숨기지 않는다. 대신 잡스는 인류에게 권능을 부여하는 일이나 인류의 진보, 인간의 손에 훌륭한 도구를 들려주는 일에 깊이 관심을 쏟았다. 그것이 잡스가 남기고 싶어 한 유산이었고, 우리가 잡스의 전기를 읽어야 하는 대단한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이기도 하다.

‘현실 왜곡장’, 매력? 아니면 비난?

어찌 되었든 그는 ‘미학과 기술’, 그리고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교차점에서 한발도 양보하지 않은 채 자신의 우아하고 놀라운 창의성에 과학기술, 예술적 감각, 그리고 완벽주의를 접목해 엄청난 일을 저지른 장본인이 되고 말았다. 그의 수많은 인간적 결점에도 그가 그토록 놀라운 업적으로 세상을 혁신시키며 인류를 놀라게 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완벽함에 대한 지고한 열정과 아이디어를 현실화시키는 맹렬한 추진력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천려일득(千慮一得)이라는 사자성어가 나온다.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천 번을 생각하면 한 번은 쓸모가 있다는 말이다. 고로 이 세상에는 무수한 아이디어가 무수한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하늘 저 멀리 반짝이는 별빛처럼 점멸하고 있으며, 그중에는 분명 애플 제품 같은 혁신적인 제품에 깊이 새겨진 창의성에 버금가는 아이디어들도 번득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살다 보면 누구나 괜찮은 아이디어 한두 개쯤은 생각해 낼 수는 있지만, 그것을 현실화시키는 것은 또 다른 일인과 동시에 정말로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잡스가 애플에서 비난과 욕을 먹어가면서, 즉 온갖 갑질과 진상을 부리면서도 그의 혁신적이면서도 도발적인 창의성으로 응축된 아이디어가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조금씩 윤곽이 잡혀가고, 그러다 어느덧 손으로 느끼고 눈으로 감상할 수 있는 하나의 온전한 제품이자 가전제품이라고 하기엔 너무 격이 떨어지고 예술품이라고 하기엔 너무 실용적인 미니멀리즘의 극치를 이룬 제품이 갓 태어난 아이처럼 순수하고 순결한 광채를 뽐내며 세상에 막 태어나는, 드라마처럼 가슴 뭉클한 장면은 애플 제품을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한 나로서도 정말 잊지 못할 감격을 안겨주었다. 그런 감개에 젖어 들 땐 나모 모르게 (자존심 상하게도) 평소 애플에 가졌던 못마땅한 점들은 몽땅 잊어버리고 그저 아직 애플 제품을 한 번도 써보지 못한 나의 한심한 인생에 한탄을 내뿜을 따름이다.

때론 독재자처럼 밀어붙이고, 때론 사디스트처럼 직원들을 못 살게 닦달하는 잡스였지만, 세상을 뒤집어 엎을만한, 그렇게 우주 전체에 거대한 파장을 일으킬만한, 그래서 신나는 일이 되는 제품을 만들고자 하는 개구쟁이 같은 열망과 모든 면에서 완벽을 추구하고자 하는 예술적 열정에 블랙홀처럼 빨려들 수밖에 없었던 잡스의 동료들은 그것이야말로 잡스의 매력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히틀러 같은 자신감 넘치는 카리스마로 상대가 정신을 못 차리게 온갖 거짓과 진실, 압박과 회유, 비난과 칭찬으로 상대나 팀원을 요리하면서 순간의 현실을 자기 뜻대로 왜곡하는 ‘현실 왜곡장(reality distortion field)’이라고 하는 잡스만의 독특한 매력이다. ‘현실 왜곡장’은 잡스를 괴팍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자 때론 사기꾼처럼 비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오로지 한 가지 일에 무섭도록 집중하도록 만드는 무시무시한 집중력을 낳기도 했다.

그 집중력에 소비자의 욕구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통제하려고까지 드는 잡스의 ‘빅브라더’ 같은 성향이 강력하게 결합하여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와 콘텐츠가 엔드투엔드 방식으로 통합된 간단하면서도 엄청난 제품을 완성했다.

최고가 아니면 쓰레기!

사실 아이디어라고 하는 것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혹은 책을 읽는 도중에, 혹은 꿈꾸는 것처럼 멍하게 딴생각을 하고 있을 때 등등 (잡스는 회의 중에 파워포인트를 펼치는 것은 얼간이 같은 짓이라며 대화를 강조했다는 점을 잊지 말자!) 어느 순간 반짝하고 떠오를 때가 많다.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머리를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쥐어 짜낸다고 해서 기발한 뭔가가 쉽게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런 면에서 잡스의 예술가적인 직관력은 그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앞서 잠깐 언급한 『중국, 엄청나게 가깝지만 놀라울 만큼 낯선』에서 스위즈(石毓智)는 중국인은 직관적 사고력이 좋아 문학, 역사, 철학 방면 분야는 나름 발전할 수 있었지만, 번뜩이는 생각이나 제품이 적지 않았음에도 추상적 • 논리적인 과학 체계가 만들어지기 어려웠던 까닭에 현대 과학기술 분야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없다고 지적했는데, 이와는 달리 잡스의 성공에는 직관력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잡스의 혁신 철학은 추상적인 면에서도 월등했다. 하지만, 애플 Ⅲ에 순전히 미적인 이유와 자신이 소음을 싫어한다는 이유로 냉각팬을 달지 않아 토스터로 만든 것이나 넥스트의 참담한 실패 사례를 보면 잡스의 직관력이 언제나 성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었다. 한마디로 잡스의 창의적인 고집대로 일을 밀어붙여 성공할 때도 있었지만, 넥스트의 사례처럼 실패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잡스는 그 자신이 누군가 발명해 놓은 제품들로 이로움을 만끽했던 것처럼 자신도 세상에 이로운 유산을 남기고 싶다는 고상한 동기와 그것을 현실화시키고자 하는 열망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기 때문에 거듭된 실패와 추락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자신의 아이디어로 이제까지 보지 못한 색깔로 세상을 밝히는 빛을 만들 수 있었다. 반면에 중국인이 과학기술 분야에서 뒤진 것은 번뜩이는 생각이나 아이디어를 현실화시킬 수 있는 동기와 열정과 열망이 개인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부족했던 것이리라.

흥미롭게도 잡스의 괴팍한 성벽 중에 잡스가 혁신을 이뤄낼 수 있게 공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놀랍게도 이분법적 사고관이라 할 수 있다. 일명 흑백논리다. 간단하게 말해 잡스에게 세상 모든 것은 ‘최고가 아니면 쓰레기’로 아주 간단하게 분류할 수 있다. 사람도, 물건도, 음식도, 아이디어도 그런 기준으로 평가했다. 그런 연유로 마트에서 할머니가 팔던 스무디는 당연히 ‘쓰레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을 ‘최고’와 ‘쓰레기’로 분류하는 극단적인 사고방식이 오직 애플만이 보여줄 수 있는, 다시 말해 예술과 과학기술의 교차점에 선 채로 완벽을 추구하는 우아한 제품을 잉태하는데 톡톡히 한몫해낼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만약 어떤 제품을 출시하려는데, 예정된 기능을 모두 넣고 예정된 가격으로 제날짜에 맞춰 출시하기가 어렵다고 할 때, 보통은 트레이드오프(Trade-off)라고 부르는 타협을 한다. 즉 몇 가지 기능을 제거해 가격을 낮추는 동시에 출시 날짜와 적정 가격에도 맞추는 것이다. 하지만, 잡스의 철칙은 ‘타협하지 마라’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아주 사소하고 자질구레한 것까지 관여했으며 작은 나사에까지 완벽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지나칠 땐 애플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은 바닥에 음식을 놓고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해야 한다고 요구하기도 했다. 누군가 가져오는 것마다 끊임없이 ‘쓰레기’라고 질타했고, 그럴 때마다 누군가는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공방 같았지만, 완벽한 제품을 세상에 내놓겠다는 잡스의 열망에 공감할 수 있었던 애플 직원들은 결국에는 견뎌냈고(당연히 견디지 못한 직원들은 짐을 싸고 떠났다), 잡스의 울타리 안에서 잡스의 지휘와 통제를 받으며, 그리고 잡스의 철칙과 철학, 열정까지 전수 받으며 온 힘을 다한 끝에 그들은 최고의 영예를 얻을 수 있었다.

평범함과 비범함을 가르는 것

잡스가 성공한 사례들을 보면 재밌게도 사람들이 그토록 집요하게 집착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방식이나 판단이 언제나 최고의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 재밌는 것은 과학과 기술로 먹고사는 업계에 몸담았던 잡스의 삶도 이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점이다.

적절한 식단과 박하 카스티야 비누만 있으면 땀도 나지 않고 냄새도 나지 않는다고 믿었던 잡스는 쓰레기 주위를 윙윙거리는 파리처럼 자신의 주변을 감싸도 도는 고약한 냄새에 주변 사람들이 곤욕을 치를 정도로, 어떤 기업인은 잡스가 씻고 오기 전엔 만나지 않겠다고 모욕할 정도로 목욕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세상이 자기 것인 것처럼 세계의 규칙은 개의치 않고 자기의 아이디어를 밀어붙였다. 처음으로 췌장암 진단을 받았을 때는 수술과 화학요법을 거부하고 민간 치료에만 의존했는데, 그러한 민간 치료 중에는 놀랍게도 심령술도 있었다. 잡스는 의사들이 자신의 몸을 열어보는 것이 싫었다고 밝혔는데, 이것은 보통 사람이 통상적으로 외과수술을 겁내는 그런 종류의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지나친 통제 욕구에서 기인한 복잡한 심리가 적용된 일종의 거부감은 아니었을까? 의사들은 확신하지 못했지만, 이때 바로 수술을 받았다면 암의 전이도 막고 잡스도 아직 살아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히피, 반문화, 반항아, 밥 딜런, LSD, 선불교와 명상, 금식과 극단적 채식주의, 맨발 등등 이러한 모든 것들이 그의 기벽과 괴팍하면서도 독특한 사고방식을 말해주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평범하지 않은 삶과 평범하지 않은 사고방식이 잡스를 평범하지 않은 길로 이끌었던 것일까?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잡스의 성공과 실패는 스파크처럼 번쩍 일어난 직감을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무모해 보일 정도로 저돌적인 추진력이 섣부른 도전으로 이어져 실패를 불러오기도 하지만, 때로는 평범함과 비범함을 가르는 주요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얻은 성공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데, 한 개인으로서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사회, 국가가 실패를 두려워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흔아홉 번의 실패 후라도 단 한 번의 혁신이 먹혀들어 간다면 그 모든 실패를 보상하고도 남는다는 점에서 우리, 그리고 우리 사회는 좀 더 과감해질 필요가 있다(이것이 네이버가 구글이 될 수 없었던 이유다!).

당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은?

혁신적인 분야에서 뭔가 엄청난 일을 해낸 사람들은 우리와 뭐가 다를까. 물론 그들은 머리도 좋고 (흥미롭게도 그들의 부모들은 박사, 변호사, 의사, 교수 등 지적인 분야에서 활동하는 경우가 많다), 특정 분야에 대한 열정, 그리고 미래를 내 손으로 창조하고 싶은 열망, 그리고 아이디어를 현실화시키는 추진력이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차이를 보이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이다. 한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은 그 사람조차도 명확하게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기준이야말로 세상을 뒤집어엎을 만한 뭔가를 창조하는 사람과 그것을 그저 사용하고 소비하는 평범한 사람으로 구분 짓는 것은 아닐까? 그 기준이 일반적인 상식과 일맥상통한다면 인간적으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평가받을 수는 있을망정 혁신가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세상을 남들과 다르게 보지 않는 이상 그 세상을 뒤집어엎을 수 있는 뭔가를 생각하거나 창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기가 사는 세상을 상식적인 수준에서밖에 보지 못하고 상식적인 수준에서밖에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그래서 현실이 만족스럽고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것을 뒤집어엎고 뛰어넘을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할 수 있더라도 무슨 용기로, 무슨 열정으로 실행으로 옮길 수 있겠는가?

진정한 혁신은 세상에 통용되는 상식과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과감한 창의성과 그것을 현실화하는 기지와 용기가 발휘할 때 가능하다는 점에서 혁신가는 반항아이자 혁명가이자 이단아자 도전자이다. 그래서 이 방면에는 성공한 사람이 극히 드물 수밖에 없다. 어느 사회든 반항아로, 혹은 혁명가로, 혹은 이단아로 사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이거니와 문화에 따라서는 사회적으로 매장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도전이 매번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잡스가 중국에서, 혹은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툭하면 능력이나 업무와는 상관없는 개인적이거나 도덕적인 결점까지 시시콜콜하게 들춰내어 인신공격을 가하는 한국과 중국의 문화로 볼 때, 마트에서 일하는 할머니에게 잔소리를 퍼붓고 결혼도 하지 않고 낳은 딸을 인정하지 않는 잡스를 몰인정하고 파렴치한 자로 낙인찍은 나머지 재능을 펼칠 기회조차 박탈하지는 않았을까?

아이작슨의 책을 읽으며 내내 부러웠던 점은 잡스가 엄청난 인간적 결점과 기벽을 안고 있었음에도 잡스의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허용했던 미국 사회의 관용이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사람의 도덕적 인간적 결점이 기업 경영에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이상, 또한 이익을 창출할 수 있다면 능력을 우선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조조도 사소한 결점 때문에 인재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지 않았던가? 그렇게 변명한다고 해도, 설령 능력주의가 대세라고 해도 인간적으로 망나니 같은 모습을 자주 보인 잡스가 크고 작은 불똥을 일으키면서 자신의 철학을 완성해 가는, 마치 고집 센 수도자가 고행을 쌓아가는 것 같은 모습은 인재를 배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인재가 가진 인간적 결점과는 별개로 그의 재능을 인정하고 받아줄 줄 아는 사회의 포용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스레 일깨워준다. 제갈량처럼 능력과 성품을 고루 갖춘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지만, 그런 사람이 혁신적인 일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보장도 없다는 점에서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잡스가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거기에도 이분법적 사고가 작용했을까? 그렇다면 잡스의 눈에는 우리가 살고 그가 살고 그의 가족과 동료가 사는 이 세상이 ‘최고’로 멋지게 보였을까? 아니면 ‘쓰레기’처럼 최악으로 보였을까? 애플이라는 회사가 건재하고, 또한 그 회사가 생산한 최고의 제품이 있었기 때문에 잡스가 세상을 떠날 무렵엔 이 세상이 ‘최고’로 멋지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한편, 『비커밍 스티브 잡스』에서 잡스는 어떤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날까? 스티브 잡스, 다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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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4. 27.

[책 리뷰] ‘디자인 원리’가 꿈꾸는 또 다른 미래 ~ 공유의 비극을 넘어(엘리너 오스트롬)

Governing the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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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원리’가 꿈꾸는 또 다른 미래

Original Title: Governing the Commons: The Evolution of Institutions for Collective Action by Elinor Ostrom
필자 주장의 핵심은 공유재의 딜레마라는 함정에 갇혀 자신들의 자원을 파괴해 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함정에서 성공적으로 빠져나오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공유의 비극을 넘어』, p53)

인간의 문제 해결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공유재의 비극’

간의 문제 해결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공유재의 비극’ 자세한 내용은 몰라도 ‘공유지(공유재)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이란 말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이 개념을 1968년 사이언스지 논문에 발표해 주목을 받았던 개럿 하딘(Garrett Hardin)은 ‘공유지의 비극’을 쉽게 설명하고자 ‘모두에게 열려 있는’ 목초지를 예로 들었다. 이 예에서는 목동들의 과잉 방목이 목초지의 황폐화를 불러와 결국 그들 모두가 파국적인 결말로 치닫게 된다고 예측한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과잉 방목할까? 목동 각자는 목초지에 풀어놓은 자신의 가축들로부터 직접적인 이익을 얻지만, 과잉 방목으로 말미암은 손실은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그 손실에 대한 부담도 그 일부만 짊어진다. 한 사람의 목동에게는 최선의 수익을 안겨준다는 점에서 그들의 개인적 선택은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는 비합리적인 결말에 이르게 된다는 역설을 개념화한 것이 바로 ‘공유지의 비극’이다 . 하딘의 모델은 흔히 죄수의 딜레마 게임으로 불리는 게임 이론으로 정형화되었고, 여러 사람에게 개별적 복지 추구 대신 집단적 복지를 추구하게 하는 일이 어렵다는 관점은 맨슈어 올슨(Mancur Olson)의 책 『집합 행동의 논리(The Logic of Collective Action)』(1965)에도 개진되어 있다.

이러한 개념을 기반으로 세워진 모델은 복잡한 것을 인위적으로 단순화시킴으로써 특정한 상황에 대해서만 분석과 예측할 수 있고, 불확실하고 복잡한 현실은 반영하지도 예측하지도 못해 실제적인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자들이 공유 자원 문제의 분석에 이용하고자 했던 개념들에는 인류의 문제 해결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선입관이 작용하고 있다. 하딘의 개념은 인간을 오로지 이기적이고, 경험으로부터 아무것도 학습하지 못하고, 오직 눈앞의 이익만 좇는 정형화된 틀에 묶어 두고 있다. 여기서 인간은 스스로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할 능력이 없고, 자발적으로 조직을 만들어 토착 환경에 적실한 제도를 디자인할 능력도 없다 . 오로지 정부라는 외부의 강력한 개입에 의해서면 공유 자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대부분의 공유재가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어촌, 농촌, 산촌 등에 산재해 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학자들이 교육이나 문화 수준이 도시보다 낮다는 이유로 지방 사람들의 문제 해결 능력을 평가절하하는 엘리트 의식도 다분히 느껴진다. 자신들의 게임 이론에서 전제한 인간처럼 고지식한 사회과학자들이 공유 자원 문제에서 선호하는 중앙집권적인 해결책은 명료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들이 제시한 해결책은 전지전능한 정부와 인격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완벽한 관리라는, 유토피아에서나 가능한 조건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공적인 공유 자원 관리를 위한 ‘디자인 원리’

2009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은 자신의 책 『공유의 비극을 넘어: 공유 자원 관리를 위한 제도의 진화(Governing the commons)』을 통해 현실은 그렇지 않음을 방증한다. 즉, 사회과학자들이 간과한 것처럼 인류의 문제 해결 능력은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 책은 공유 자원을 장기간에 걸쳐 성공적으로 관리한 집단을 제시하고 분석함으로써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제도의 디자인 원리(design principle)를 찾아 나선다 . 어떻게 디자인 원리가 자원 공유자의 행위 동기에 영향을 미쳐 공유 자원 체계 자체와 그 체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제도 모두가 오래 존속될 수 있었는지, 또한 그러한 제도 디자인 원리들이 사람들에게 어떠한 유인을 제공하여 공유 자원의 관리를 위해 지속적으로 시간과 노력을 들이도록 했는지를 밝힌다. 또한, 실패한 사례들에서 사용된 제도들과 성공한 사례들에서 사용된 제도들을 비교하고 분석함으로써 공유 자원을 활용 • 관리해 나갈 수 있는 개인들의 능력을 신장시키거나 가로막는 내외적 요인들도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다.

오스트롬이 실제 상황에서 작동하는 제도로부터 산출한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공유 자원 제도의 디자인 원리 8가지는 다음과 같다.

1. 명확하게 정의된 경계

2. 사용 및 제공 규칙의 현지 조건과의 부합성

3. 집합적 선택 장치

4. 감시 활동

5. 점증적 제재 조치

6. 갈등 해결 장치

7. 최소한의 자치 조직권 보장

8. 중층의 정합적 사업 단위(nested enterprises)

(『공유의 비극을 넘어』, p175)

공유 자원 사용자들이 자신들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례들에서는 앞에 제시된 8가지 디자인 원리 가운데 세 가지 이상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에서 오스트롬이 밝혀낸 디자인 원리는 현실적이고 경험적이며, 실제적인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하는데 매우 적실한 개념이다.

공유 자원 관리의 성공 여부와 외부 개입

통 사람들은 연안 어장, 지역 산림, 지하수, 목초지, 관개 시설 등의 공유재는 정부 같은 중앙집권적인 기구가 총괄해서 관리해야 자원의 낭비를 막고, 사익이 충돌하여 생기는 분쟁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나도 그런 선입관을 가진 사람 중 하나다. 하지만, 오스트롬이 제시한 사례에서 정부의 권위적인 개입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다. 캐나다의 뉴펀들랜드에서는 소규모의 현지 어부 집단이 그들 고유의 규칙을 디자인하고 유지해 올 수 있었지만, 중앙 정부 당국이 이들의 공유 자원 제도를 승인하지 않고 거부하는 바람에 ‘공유지의 비극’을 불러오는 결과를 만들었다. 대신 캐나다 정부는 지역 특성을 무시하고 전국적으로 통용되는 획일적 규제 방안을 강요함으로써 (이전에는 없었던) 문제들을 만들었다. 그렇다고 정부나 공공 기관의 개입이 언제나 문제 해결에 방해되는 것만은 아니다. 캘리포니아 남부 지하수 생산자들의 성공적인 사례는 지방 정부나 중앙 정부가 현지 사용자들의 효과적인 제도적 디자인 능력 제고를 돕는 여러 형태의 편의 장치를 마련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해나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한편, 실패 사례에서 성공 사례로 극적인 반전을 이루어낸 곳도 있었는데 바로 스리랑카의 갈오야(Gal Oya) 프로젝트다. 본래의 사업 계획안은 외부 규칙을 강제로 획일적으로 적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방침을 변경해 교육을 받은 ‘제도 조직자’를 투입해 농민들 스스로 기술과 문제 해결 능력을 계속 발전시켜 갈 수 있는 능력을 배양시키고, 농민들에게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자치 조직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농민들 스스로 이러한 제도가 지속하는 것에 대한 동기를 깨닫게 함으로써 성공적인 사례로 거듭날 수 있었다. 갈오야 프로젝트는 상호 불신과 적개심의 전통이 수세대에 걸쳐 재생산되어 온 경우라 할지라도, 외부 대행자의 도움으로 사용자들이 최적 이하의 결과를 가져오는 완고한 동기 유인을 극복해 나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 예시하는 소규모의 공공 자원 관리에 있어서 현지 역사나 문화, 기타 사정을 고려하지 않는 정부나 공공 기관 등 외부의 지배적이고 일률적인 개입은 상황을 악화시키지만, 공유 자원 사용자들의 자발적인 자치 제도를 지원하는 방식의 다층적인 개입은 거꾸로 상황을 개선해나가는 데 효과적임을 알 수 있다 .

마무리: 공유 자원을 바라보는 두 시선

리스토텔레스는 최대 다수가 공유하는 것에는 최소한의 배려만이 주어질 뿐이며, 모두 공익을 생각하기보다는 자기의 이익을 생각하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찌감치 인류의 이기적이고 근시안적인 성정에 일침을 가했던 것이다. 사회과학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을 때, 오스트롬은 자신만의 세밀하고 경험적인 연구 방법으로 지속가능한 공유 자원 관리의 가능성을 열었다 . 그녀는 성공적인 사례들에서 지속가능한 공유 자원 제도의 디자인 원리를 추려내었고, 그럼으로써 인류에게 불확실하고 복잡한 환경에서도 지속가능한 공유 자원 관리가 가능함을 일깨워주었다. 그것은 곧 그동안 공유 자원 관리에 회의적이었던 인류에게 새로운 희망을 선물한 것이나 다름없다. 앞으로 그녀가 개괄한 디자인 원리가 공유 자원 관리에 있어서 더욱더 많은 성공적인 사례들을 끌어낼 수 있다면 인류의 크나큰 짐 하나를 던 꼴이 될 것이다.

긴 책은 아니지만, 길게 느껴지는 책이 있는데, 바로 이런 학술적인 책들이 그러하다. ‘공유재의 비극’, ‘게임 이론’ 등 말로만 들어왔던 사회과학 용어들이 열심히도 나의 빈약한 뇌세포들을 교란하며 혼란을 부추겼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실제 사례를 이론에 접목시킨 그녀의 연구 방법론 때문일 것이다. 아무래도 나 같은 무지한 독자에겐 구체적인 실례만큼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없다. 그런 이유로 꽤 긴 리뷰였지만, 대부분 앵무새처럼 저자가 했던 말들의 반복이나 그것들의 짜 맞추기나 다름없다. 오스트롬에게 미안하고, 나의 무지와 몰이해도 부끄럽다.

공유 자원을 대할 때 왜 사람들은 그렇게도 몰상식하고 이기적이고 근시안적으로만 사익을 취하려고만 할까? 그것은 서로 간의, 그리고 세대 간의 깊은 단절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예를 들어 공유 자원을 사용하는, 그곳에서 대대손손 살아온 현지인들은 독자적인 제도를 고안해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유재의 비극’을 피하려고 나름의 노력을 다한다. 그들은 과거를 함께했고 미래도 함께할 것으로 기대하기에 사려 깊게 장기적 이익을 고려하는 것이 그들에겐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곧 현지인들에겐 공유 자원이 삶이고 인생 전부이다. 하지만, 외지인은 그 반대다. 그들은 현지인들과 과거를 공유하지도 않고 미래도 공유할 가능성은 희박하고 불확실하다. 그래서 그들에겐 ‘공유재의 비극’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목동처럼 단기적으로 이익을 최대한 뽑아내는 ‘지배 전략(dominant strategy)’이 합리적이다. 만약 공유 자원이 바닥을 드러내면 처음에 어딘가에서 그곳으로 왔던 것처럼 그렇게 그곳을 떠나 다른 곳에 정착하면 그만이다. 공유 자원을 둘러싼 반목과 갈등이 주로 현지인과 외지인 사이의 다툼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내 생각이 그렇게 부질없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외지인들의 정착을 방해하는 텃세를 해결하려는 현지인들의 노력과 오랫동안 한곳에 정착해온 현지인들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려는 외지인의 노력이 동반된다면, 그들이 공유 자원을 바라보는 시각도 조금씩 일치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끝으로 긴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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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7. 30.

[책 리뷰] 지금까지 구글은 좋은 편이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 구글드(켄 올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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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구글은 좋은 편이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원제: Googled: The End of the World As We Know It by Ken Auletta
구글은 그 힘을 이용하여 다른 시장을 부당하게 지배할 것인가? MS가 운영체제의 지배력을 이용하여 넷스케이프를 무력하게 했듯이? “구글이 ‘정직한 브로커’가 되겠다는 사명에 계속 충실하기만 하다면 난 만족해요. 구글이 다른 저의가 있다면, 그때는 두려운 일이겠지요.” 그는 구글이 저의가 있는지는 확실히 몰랐지만 걱정하는 것이 분명했다. “중국을 달래려고 특정 사이트를 차단할 수 있다면, 강력한 광고주들을 달래려고 특정 사이트를 차단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 되면 개인정보 문제가 권력 문제와 뒤엉킨다. 구글과 더블클릭 둘이 합하면 막대한 소비자 데이터를 산더미처럼 수집한다. (『구글드』, 301쪽)

정보와 지식의 민주화를 이루어낸 ‘구글’

터넷 사용자라면 굳이 ‘구글링(Googling)’ 하지 않아도 구글이 세계 검색엔진 점유율 1위라는 자명한 사실 정도는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구글의 혁신적인 검색 엔진 덕분에 사용자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빠르게 원하는 정보를 찾아 인터넷을 마음껏 항해할 수 있게 되었다. 광고가 덕지덕지 달렸고, 잡다한 링크로 떡칠해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고, 사용자를 자신들이 정한 틀에 가두려고 하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포털 사이트와는 달리 구글 홈페이지는 조그만 이미지 하나 없다. 정말이지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하다. 여기에는 배너광고가 사용자에게 최선의 경험을 제공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구글 창립자들(래리 페이지Larry Page와 세르게이 브린Sergey Brin)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지만, 한편으론 사용자가 가능한 한 빨리 원하는 정보나 목적지를 찾아 (사용자를 언제까지나 붙잡아 두고 싶은 포털 사이트와는 달리) 구글을 벗어나길 바라는 사용자 중심의 구글 철학도 담겨 있다. 덕분에 사용자는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쾌적하고 빠르게 정보의 바다 인터넷을 자유롭게 항해할 수 있다.

구글의 탁월한 검색 엔진은 우리가 정보와 지식을 찾아낼 때 부딪히는 장벽을 없애버렸고, 그럼으로써 정보와 지식의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구글의 검색 결과는 우리 시대상을 반영하는 인류의 문화유산이며, 그 세대가 어떤 주제에 사로잡혀 있는지 보여주는 정보와 지식의 자화상이다. 구글과 경쟁하는 기업들에는 불편한 진실이지만, 인터넷 민주화의 아이콘으로 등극한 구글은 사용자들의 신뢰를 확실하게 얻었다. 하지만, 구글이 추종하는 ‘군중의 지혜’가 곧 양질의 정보를 가려내는 절대적인 규칙은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조회 수가 많다고 해서 유용한 정보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 ‘군중의 지혜’와 알고리즘에 의존한 기계의 뉴스 수집이 기존의 저널리즘을 대체할 수 있다고 구글이 자만한다면, 그것은 문명의 진보와 민주주의 발전에 필요한 고뇌하고 사유하는 지식인의 존재 가치를 깎아내리는, 자칫 호모 사피엔스의 퇴화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는 위험한 생각이다 .

광고 수입에 의존하는 구글에 대한 염려

쨌든 인터넷은 구글이고 구글은 인터넷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지금은 구글을 통하지 않고서는 인터넷에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구글은 정보와 지식을 찾아낼 때 부딪히는 장벽을 없애버렸지만, 구글의 독점은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구글이라는 불투명한 터널에 사용자를 가둬놓는 꼴이 되고 말았다. 정보와 지식의 접근 통로를 구글이 독점한다면 구글이 사용자에게 어떤 정보를 보게 될지 결정할 수 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떤 정보들을 획득함에 따라 삶의 궤적이 변하고 인생이 바뀔 수도 있기에 이것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다. 실제로 구글은 중국 정부와 독일 정부의 요청에 따라 특정 사이트를 차단했다. 어떤 것에도 개의치 않고 자신들이 이루고 싶은 미래를 향해서만 질주하고자 했던 구글의 열정과 다른 기업들을 전율에 떨게 했던 원대한 포부가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거대한 장벽과 타협하는 순간이었다 .

초심을 버리고 현실과 타협하는 순간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소설을 탐독하거나 영화나 콘서트를 보는 일을 즐기지 않았고, 시간을 오래 잡아먹는 골프 같은 게임도 경멸했을 정도로 페이지와 브린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일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고, 시간 낭비를 지독히도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구글의 주요 수입원인 애드워즈와 애드센스도 사용자가 인터넷을 사용하는데 거치적거리지 않을 정도로 적당하게 배치했고, 구글 툴바로 인터넷 항해에 방해되는 팝업도 차단했다. 하지만, 구글이 인수하고 오랫동안 적자를 면치 못했던 유튜브 광고는 강제성을 띠며 사용자의 시간을 소비한다. 사용자는 동영상 시작할 때 최초 몇 초 동안 광고를 시청해야 하며, 때에 따라 1분 안팎의 중간 광고를 시청해야만 할 때도 있다. 사용자는 광고를 보던가 아니면 광고가 없는 유료 서비스인 ‘유튜브 레드’를 결제해야 한다.

광고가 주요 수입원인 구글로서 이 정도 변화는 어쩌면 당연할 일이다. 여기에는 광고가 무조건 사용자들을 짜증 나게 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사용자가 찾고자 하는 정보나 지식과 ‘연관성’만 있다면 유용한 정보가 될 수 있다는 구글의 인식 변화도 한몫한다 . 중요한 것은 구글은 공룡처럼 날로 커져만 가는 덩치를 먹여 살려야 하고 더불어 성장의 압박도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창조적인 혁신이 지속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인터넷 정보는 누구라도 자유롭게 무료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인터넷 혁명의 신념이자 구글의 신념이 성장과 수익의 압박으로부터 구글을 서서히 옥죄어온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만약 구글이 ‘이제 우리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돈을 지급해야 할 거야’라고 태도를 바꾸지 않고, 지금처럼 수익을 광고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다 보면 강력한 광고주들을 달래려고 특정 사이트를 차단하거나, 한국의 포털 사이트 네이버처럼 검색 결과에 광고주들의 입김이 크게 작용할 소지가 있다(현재 구글 검색 결과에는 키워드와 연관된 광고가 심심치 않게 페이지 상단과 하단에 노출되고 있다). 이러다 보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지금까지 받아왔던 사용자들의 신뢰를 하루아침에 잃거나, 아니면 서서히 잃어갈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을 일으킬만한 티핑 포인트는 어디서부터인지 아무도 모른다. 세상을 뒤집어엎으려는 혁명가 같은 구글의 야심에 비추어보면 구글의 초심이 세상의 변화에 따라, 혹은 자신들이 일으킨 풍파에 따라 변해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은 모든 변화를 받아들일 수도 없으며 사용자 역시 마찬가지다. 모든 변화에는 긍정과 함께 부정이 내포되어 있다. 어느 정도의 변화가 현재의 혁신을 이어가면서도 사용자의 신뢰를 잃지 않는 최후의 마지노선인지, 어느 시점에서 변화가 그동안 쌓아온 신뢰를 무너트리는 티핑 포인트로 작용할 것인지 , 역시 아무로 모른다.

‘빅 데이터’ 구글, 사생활 침해는?

제 ‘빅 데이터’ 이야기를 해보자. 미래에 ‘빅 브라더’가 탄생한다면, 그 가능성이 제일 좋은 대상이 현재로서는 구글이다. 그만큼 구글이 창립 이후 약 20여 년 동안 수집한 데이터의 양은 엄청나다. 사실 ‘인터넷 = 구글’이 된 요즘 우리는 검색을 할 때마다 구글에 가치를 부여해주는 셈이다. 여기에 막대한 광고주의 데이터가 접목된다. 광고주는 소규모 사업자부터 대기업까지 다양하다. 그들은 신용카드 사용 명세, 통화 기록, 이름과 주소, 학력과 경력 등 구글이 갖지 못한 데이터를 갖고 있을 확률이 높다. 앞에서도 말했듯 구글은 키워드 광고처럼 ‘연관성’만 있다면 광고도 유용한 하나의 정보로 본다. 이것은 데이터를 다른 곳에 공개하여 연관성을 높여 사용자에게 이익이 된다는 논리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 사용자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은 사용자가 광고를 클릭하거나 상품을 구매할 확률도 높아진다는 것이고, 이것은 곧 구글의 광고 수익 증가로 이어진다. 또한, 구글의 광고 수익 증가는 곧 광고주의 수익 증가를 의미한다. 뭔가 섬뜩하지 않은가?

그뿐만 아니라 구글이 수집한 데이터는 광고주가 보유한 데이터와 합쳐져 사용자의 욕구와 행동 패턴을 추측하는 데이터 마이닝 기술에도 활용될 수 있다. 이것은 광고주에게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다. 본격적인 데이터 마이닝 시대에 접어들면 구글이 가진 데이터는 모든 광고주의 미래이자 희망이 될 것이다. 구글을 갖은 방법으로 압박하며 데이터를 더 많이 달라는 광고주의 요구가 증폭되리라는 것은 안 봐도 뻔하다.

구글이 보유한 데이터는 예민한 사용자들에게는 개인정보와 사생활 침해 문제에 대해 충분히 걱정거리를 안길만 하지만, 이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이에 대한 구글 창업자 중 한 명인 브린의 생각이다. “유저들이 우리가 하는 일을 신뢰하는가? 그게 개인정보 문제보다 더 중요하죠.”. 『구글드: 우리가 알던 세상의 종말(Googled: The End of the World As we Know it)』 의 저자 켄 올레타(Ken Auletta)의 해석처럼 브린의 생각은 우리가 구글을 믿는다면, 그들이 우리 데이터를 악용할지 모른다고 두려워할 까닭이 없다는 뜻이다 . 하지만, 우리는 히틀러가 자신을 믿었던 독일 국민에게 어떠한 파괴적인 결말을 가져다주었으며, 국민의 지지와 신뢰를 얻고 선거를 통해 당선된 수많은 정치인이 어떻게 국민의 바람에 찬물을 끼얹었는지 알고 있다. 엔지니어다운 순진한 열정이 낳은 페이지와 브린의 곡해는 올레타의 평가처럼 어째서 누군가가 자신들의 의도를 의심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쉽게 측량되지 않는 두려움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전자사생활정보센터(The Electronic Privacy Information Center)의 대표 마크 로턴버그(Marc Rotenberg)의 예리한 질문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구글이 대체 왜 그 정보를 수집해야 하는가?’

지금까지 구글은 좋은 편이었다?

금까지 구글의 슬로건인 ‘사악하게 행동하지 마라(Don’t be evil)’는 (구글과 경쟁하는 기업은 구글이 악마처럼 보이겠지만) 대체로 사용자에게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사용자들이 구글에 보내는 신뢰는 구글이 아직은 좋은 편이라는 인상이 지배적이라는 현실을 반영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현재 구글이 좋은 편이라는 상황이 구글이 앞으로도 영원히 좋은 편일 거라는 것은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 그럼에도, 다른 대기업들에 비해 구글은 기술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혁신적인 기업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성공한 기업은 궁극적으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고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구글의 이상주의가 현실 앞에서 약해지는 모습을 종종 보여왔다. 여전히 왕성한 열정을 보여주는 창업자 페이지와 브린이 아직 젊고 또한 살아있기에 당분간은 구글이 좋은 편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나고 두 사람과 함께 초창기부터 구글을 이끌어 온 원로 직원들도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면, 구글은 어떻게 변할까? 그때도 구들에 대한 사용자들의 신뢰는 여전할까? 그들이 수집하고 소유한 어마어마한 데이터는 여전히 안전할까? 그땐 이미 나도 죽고 없어 별로 걱정할 일도 아니지만 말이다.

구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처지에서 구글을 신뢰하기보다는 신뢰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마치 부실하게 지어진 원자력발전소 옆에서 살아가야 하는 주민 같다. 매일 뭔가 터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면서 사느니 그냥 원자력발전소 존재 자체를 잊거나, 아니면 전적으로 발전소를 신뢰하여 매일 가슴 졸이며 사는 악몽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것이다. 현재로선 구글을 대체할 마땅한 대안도 업고 구글을 벗어날 길도 없다. 한편으론 구글의 독점이 안전하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만약 제2의 구글이 나타나 구글과 경쟁하며 구글의 광고 수익을 잠식해나간다면, 그래서 구글에 창업 이래 최대의 위기를 안긴다면 구글은 지금까지 수집한 데이터를 사용해서라도 광고 수익을 늘리고 광고주를 달래야 한다는 압력에서 견뎌내기 어려울 것이다.

마무리

청난 리뷰의 글을 남긴 것에서 보듯 켄 올레타의 『구글드』는 구글에 대해, 그리고 인터넷의 미래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많은 의문을 떠올리게 하는 책이다. 『구글드』는 구글 창립자 페이지와 브린의 신념이 어떻게 구글 문화로 자리 잡았는지, 그리고 그러한 문화가 어떻게 혁신을 거듭하는 구글 제국의 열정과 창조성을 제공했는지, 그럼으로써 수많은 프로젝트 실패에도 어떻게 검색 엔진 하나만으로 세계를 정복하고 사용자의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를 얻게 되었는지 등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잡아내고 있다. 구글의 창립 후 성장해가는 시기는 인터넷 혁명에 막 불이 붙은 시기이기도 했으며, 그 불에 핵탄두 같은 폭발력을 더한 것이 구글이라는 점에서 구글의 역사는 곧 인터넷의 역사의 굵직한 한 페이지가 되기도 한다 . 한편으론, 디지털 미디어 세계를 혁신하고 잠식해가는 구글의 성장 과정은 기존 미디어 세력과의 피할 수 없는 싸움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구글드』는 디지털 미디어 세계의 격변도 다루는 셈이다.

구글 사용자로서 이 책을 읽고 나면 구글에 대한 신뢰가 더 돈독해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일말의 의구심이 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우리가 구글을 떠날 수 없다는 처지에 변함이 없다면, 그리고 구글을 뛰어넘는 혁신을 폭발시킬 재능이 없다면, 변화의 물살 속으로 가라앉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은둔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런데 요즘은 은둔자들도 인터넷 정도는 하지 않을까?) 가능한 한 변화의 물살을 마음껏 누리는 사람으로 남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그것이 먼 미래에나 그 파급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디지털 혁명의 시기에 사는 우리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이고, 앞으로도 변할 것이고 또 변화해야만 살아남는 가혹한 인터넷 세계에서 한 개인으로서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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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3. 18.

[책 리뷰] 서구식 게임 속에서 성장한 중국의 어제와 오늘 ~ 왜 중국은 서구를 위협할 수 없나(에드워드 스타인펠드)

서구식 게임 속에서 성장한 중국의 어제와 오늘

원제: Playing Our Game - Why China's Rise Doesn't Threaten the West by Edward S. Steinfeld
중국은 글로벌 생산체제에서 말하자면 ‘최우수 조연’ 역할을 하고 있다 보편화된 상품을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면서 중국은 세계경제를 선도하는 선진국에게 상업적인 혁신과 전반적인 국제 상업 분야에서의 지배력을 더욱 강화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왜 중국은 서구를 위협할 수 없나』, 255쪽)

‘왜 중국은 서구를 위협할 수 없나’, 제목부터가 상당히 도발적인 에드워드 스타인펠드의 책은 중국 경제개혁의 본격적인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1990년대부터 이 책을 저술한 2009년까지 중국이 이룩한 경제성장에서 개혁의 원동력과 발전과정, 그리고 경제개혁이 중국에 끼친 근원적이며 광범위한 변화를 심도 있게 모색함으로써 새롭게 정립된 중국과 세계, 세계와 중국의 관계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하려는 책이다. 이 조명에서 가장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은 중국의 경제성장은 서구가 제정하고 이끌어가는 서구식 게임의 규칙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9년 동안 국제자문위원회로 활동했던 중국해양석유총공사의 공사화 과정과 미국의 정치적인 촌극을 불러온 유노컬 인수의 뒷이야기 등 국가의 가장 전략적인 산업에까지 미친 변화의 바람을 통해 중국이 어느 선까지 서구의 규칙에 따라 게임을 하는지와 그 한계를 파악하고 있으며, 한편으론 서구 산업국가의 가장 현실적인 걱정이라 할 수 있는 중국의 첨단 기술의 현실과 전망을 현장 인터뷰를 통해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있다.

자 에드워드 스타인펠드는 중국에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킨 첫 시발점이자 중국의 변화를 주도한 핵심 요인을 바로 제도의 아웃소싱으로 보고 있다. 자본주의 도입을 위한 지식과 경험, 규칙 등 기본적인 기반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중국은 생산 활동에 필요한 사회적 규칙을 정의하는 권한을 외국기업에 이양함으로써 세계화된 국제 분업체제에 자연스럽게 편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국제 규칙을 통째로 수입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은 곧 중국의 경제개혁이 서구가 만든 게임의 규칙에 따르고 있다는 뜻이다. ‘시장사회주의’이든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이든 중국이 자신들의 경제개혁을 뭐라고 표현하든 상관없이 이미 중국은 서구식 게임 규칙에 따라 세계화된 생산체제에 톱니바퀴처럼 깊숙하게 물려 있을 뿐만 아니라 제 몫 이상을 해냄으로써 G1 자리를 넘보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놀라운 경제성장에 한눈판 나머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중국의 경제성장에 맞물려 서구 산업국가들도 발전을 이룩했다는 사실과 특히 구글, 애플, 인텔은 기술집약적인 산업의 선두 두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이 서구의 게임 규칙을 착실하게 준수하는 이상 중국의 발전이 서구에도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왜 중국은 서구를 위협할 수 없나: 미국 MIT 최고 전문가 집단이 분석한 중국 경제의 실체』의 바람대로 중국은 현실에 안주할 뜻은 없어 보인다. 즉, 서구식 게임의 규칙에만 의존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시진핑 정부는 덩샤오핑의 성장제일주의 정책에서 한걸음 물러나 안정과 변화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10% 안팎의 고성장을 7%대로 조율하는 등 더는 성장에 매달리지 않겠다는 뜻과 함께 경제정책에 대한 자신감을 나타낸 중국공산당은 수출지향적인 경제를 내수지향적인 경제로 탈바꿈하고 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돈만 잘 벌면 되었던 시절에서 이제는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돈을 잘 써야 하는 시절로 전환된 것이다. 이미 중국은 2012년부터 3차산업 비중이 제조업을 넘어가면서 ‘세계의 공장’에서 ‘세계의 지갑’으로 거듭나고 있다. 세계 최대 명품 소비국은 이제 미국, 유럽이 아니라 중국이다. 그리고 ‘중국몽(中國夢)’, 즉 ‘팍스 차이나’를 위한 실질적인 정책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바다와 육지 양면으로 중국과 유럽을 잇는 일대일로(一帶一路)라고 불리는 21세기 실크로드 프로젝트, 미국과 유럽 주도의 금융 시스템에 맞서기 위한 브릭스 개발은행(NDB), 긴급외화보유기금(CRA), 그리고 아시아 인프라 투자은행(AIIB)의 설립, 그리고 위안화 국제화 등을 추진하면서 지속적으로 중동, 아프리카, 남미에 대한 투자도 증가하고 있다. 이로써 중국은 자신들만의 게임 장소와 규칙을 위한 원대한 포부를 밝힌 셈이다.

미국의 눈치를 보던 중에 영국이 총대를 메고 AIIB에 참가함으로써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럽 여러 국가가 줄줄이 사탕처럼 AIIB에 참가했다. 국제 사회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국의 이익이라는 것이 다시 한번 증명된 셈이다. 지금까지 미국의 핵주먹이 효과를 봤다면, 앞으론 중국의 돈맛이 미국의 핵주먹과 대등한 힘을 발휘하며 중국의 영향력을 넓혀갈 것이다. 이것은 때에 따라선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중국이 마련한 게임의 규칙에도 참가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재작년 리커창 총리와 영국 여왕과의 만남은 큰 의미가 있다. 불과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괄시받던 중국이 이젠 여왕까지 직접 나서 맞이해야 하는 존재로 성장한 것이다.

국이 세계화된 생산체제에 톱니바퀴처럼 깊숙하게 물려 있는 것만큼 세계 경제 역시 중국에 물려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중국은 자신들만의 게임장과 규칙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천명했고, 오래전부터 중국의 지속적인 투자를 받은 중동과 아프리카, 남미, 그리고 중국발 태풍의 직접적인 영향권 아래에 있는 아시아는 말할 필요도 없고 미국을 배신한 영국을 선두로 유럽 여러 국가가 중국식 게임에 - 적극적이든 수동적이든, 혹은 마지못해서든 - 참여하거나 참여의사를 밝혔다. 중국이 자신들만의 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이 적용될 장소를 마련하고 그 장소에서만 상호 간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게 한다면, 중국 경제와 긴밀하게 엮인 미국 중심의 경제 체제 역시 변화를 맞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식 규칙을 지키기로 각오한다면 각각 중국과 미국을 중심에 둔 두 거대한 경제 체제가 냉전시대처럼 대립할 수도 있다. 이러한 현대 자본주의 역사상 일례가 없었던 대격돌을 앞에 둔 지금, 그리고 변화를 싫어한다는 기득권자들의 본능을 염두에 두면 이 책의 도발적인 제목 『왜 중국은 서구를 위협할 수 없나』는 중국이 현재 몸담은 서구식 시스템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정착해주길 바라는 서구의 안일하면서도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다고밖에 해석할 수 없다.

서구는 어찌 되었든 지정학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긴밀하게 얽혀 있는 중국은 한국엔 너무나 위협적인 존재다. 이번 사드 보복을 통해 중국이 마련한 게임의 규칙에서 배제되면 어떠한 불이익을 받을지 그 일부를 맛본 한국으로선 비록 서구가 중국식 게임을 우습게 볼지라도 우리는 결코 그럴 수 없음을 뼈저리게 경험한 셈이다. 한편으론 한국에만 한정된 사드 보복을 통해 중국은 - 이유야 어찌 되었든 – 미국에 함부로 굴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중국은 미국의 기술력과 자신들의 상품을 팔 시장이 여전히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고 한국이 너무 미국과 일본 쪽으로만 치우치면 소인배 기질을 드러낸 중국이 또다시 – 그때에도 한국에만 한정된 것이겠지만 - 어떤 보복을 가할지 모르는 일이다. 또한, 북핵 문제 해결과 한반도 통일의 열쇠를 쥔 중국이라 우리로서는 참으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이다. 아무쪼록 중국의 심기를 건들리 않으면서 한편으론 경제 줄기를 다국적으로 뻗어나갈 필요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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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 30.

[책 리뷰] ‘세계의 지갑’, 중국의 ‘소비재 올림픽’ ~ 중국의 대전환, 한국의 대기회(전병서)

China's Great Transition, Korea's Great Opportunity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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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지갑’ 중국의 ‘소비재 올림픽’

Original Title: 중국의 대전환, 한국의 대기회 by 전병서
중국이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시기에 한국은 잘 먹고 잘살았지만 또한 중국이 그 시선을 주변국으로 돌리면 주변 국가들은 항상 어려움을 겪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중국의 대전환, 한국의 대기회』, p161)

진핑 정부는 덩샤오핑의 성장제일주의 정책에서 한걸음 물러나 안정과 변화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10% 안팎의 고성장을 7%대로 조율하는 등 경제정책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내고. 더는 양적인 성장이 아닌 질적인 성장의 포부를 밝힌 중국 공산당은 수출지향적인 경제를 내수지향적인 경제로 탈바꿈하는 중이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돈만 잘 벌면 되었던 시절에서 이제는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돈을 잘 써야 하는 시절로 바뀐 것이다. 이미 중국은 2012년부터 3차 산업이 제조업 비중을 넘어가면서 ‘세계의 공장’에서 ‘세계의 지갑’으로 거듭나고 있다. 세계 최대 명품 소비국은 이제 미국, 유럽이 아니라 중국이다.

그리고 ‘중국몽(中國夢)’, 즉 ‘팍스 차이나’를 위한 실질적인 정책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중국은 바다와 육지 양면으로 중국과 유럽을 잇는 일대일로(一帶一路) 21세기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미국과 유럽 주도의 금융 시스템에 맞서기 위한 브릭스 개발은행(NDB), 긴급외화보유기금(CRA), 그리고 아시아 인프라 투자은행(AIIB)을 설립했거나 추진 중이다.

에드워드 스타인펠드가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책 『왜 중국은 서구를 위협할 수 없나』에서 중국은 서구가 만든 게임의 규칙을 통해서 성장했고 여전히 그 규칙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서구를 위협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현재의 중국은 일대일로, 세계적인 금융 시스템 추진, 위안화 국제화 등 자신들만의 게임의 규칙을 만들고 있다. 이에 대해 미국은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지만, 미국의 오랜 동맹국인 영국이 미국의 으름장에도 유럽 국가 중 첫 번째로 AIIB에 가입한 것을 보면(영국의 뒤를 이어 프랑스, 독일 등 여러 유럽 국가 참여) 역시 국제 사회에선 명분보단 실리다. 지금까지는 미국의 주먹맛이 효과를 볼 수 있었다면 앞으론 외화보유액 3.8조 달러의 중국 돈 위력이 예측하기는 쉽지 않지만 어떤 식으로든 세계적인 경제 흐름에 변화를 줄 것이다.

국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시진핑 정부 이후 시작된 중국의 대전환을 대기회로 탈바꿈시켜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 『중국의 대전환, 한국의 대기회』(저자 전병서)의 주장이다. 중국에서의 승자가 진정한 세계 승자가 된 현시점에서 중국에서는 매일 치열한 소비재 올림픽이 개최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엔 중국 부자의 지갑을 털 명품이 없다. 또한, 구글, 애플, 인텔처럼 혁신을 이끄는 일류 회사도 없다. 이에 대해 저자 전병서는 승천하는 용에 금융투자를 함으로써 한몫 단단히 잡는 단기적 승부수와 중국 전문가를 양성하는 장기적 전망을 제안한다. 내 생각에, 만약 한국에서 부동산 투기로 처박히는 돈을 진작에 중국, 인도, 브라질과 동남아시아 등에 투자했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랬다면 집값도 안정되고 외화벌이도 짭짤했을 것 같다. 하지만, 창의력이 빈약하고 머리 굴리는 것을 싫어하는 한국인에게는 자나 깨나 부동산 투기밖에 모르니, 앞으로 잘 살기는 글러 먹었다.

아무튼, 『중국의 대전환, 한국의 대기회』이 출판되고 나서 2015년 8월 중국 증시는 8년여 만에 가장 큰 수준으로 폭락하면서 그 여파가 쓰나미처럼 전 세계 증시를 덮쳤다. 당시 중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방어에 나섰음에도 하락은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서야 서서히 회복세를 보이고 있지만, 중국 공산당이 경제정책에 대한 자신감을 너무 이른 시기에 드러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에 대해 일부 전문가들은 중복 • 과잉투자에 따른 중국 경제의 거품과 수출주도형 성장방식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라며 중국 경제의 장기적인 불황을 예고했다. 고로 투기꾼이 되어 단기간에 한밑천 잡으려는 얄팍한 수단은 좀 더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것 같다. 옥스퍼드 이코노믹스가 "중국 경제가 급락하면 무역 의존도가 높은 아시아 10개국 가운데 특히 한국의 충격이 클 것"이라고 전했듯 이제 남은 것은 중국 전문가를 양성하여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중국의 앞날에 대비하고 한편으로는 여전히 엄청난 구매력을 지난 중국의 중산층과 신흥 부유층을 겨냥한 명품 양성 등 중국 각 지방, 각 계층에 특화된 상품으로 중국 소비재 시장 올림픽에서 성적을 올리는 일이다.

가 지금까지 읽은 서구 학자들이 분석한 중국 관련 책들이 오랜 시간 준비하고 연구한 자료들을 기반으로 기술한 학술적인 경향이 짙은 냉철한 시각의 저술이었다면, 『중국의 대전환, 한국의 대기회』는 대(對)중국 정책의 위기를 심각하게 느끼는 한국 경제인이 대중국 문제의 안일한 대처를 경고하기 위해 쓴 긴급 보고서 같은 책이다. 열정적이고 감정적인 거친 저자의 문장에는 다급함과 절박함이 묻어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반복되는 주장과 산만한 구성, 그리고 장기적 대책의 미흡함은 책의 깊이를 다소 떨어트린다. 어쩌면 이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감지되는 절박함과 약간의 아쉬움이 책이 주장하고자 하는 중국통 부재의 절실함을 대변해주는지도 모르겠다.

이 리뷰는 2015년 10월 30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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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0. 27.

[책 리뷰] 자본주의는 지금껏 식량을 효율적으로 관리해본 적이 없다! ~ 푸드쇼크(로버트 앨브리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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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지금껏 식량을 효율적으로 관리해본 적이 없다!

원제: Let them eat junk by Robert Albritton

역사상 최대 규모의 과학 실험?

마 전 뉴스에서 한국인 혈액 속 수은 농도가 미국보다 3배 이상, 독일보다는 무려 5배나 높다는 조사결과가 보도되었다. 수은 같은 중금속들은 주로 수산물을 통해 흡수된다고는 하지만, 사람이 살면서 본의 아니게 먹게 되는 유해 물질은 비단 중금속 뿐만은 아니다. 바로 우리가 주로 먹고 마시는 라면이나 과자, 햄버거 또는 콜라 같은 가공 식품에서 흡수되는 화학물질 또한 인체에 쌓여 언제 터져 발병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될 수 있다. 운이 좋으면 천수를 누리겠지만, 재수 없으면 수십 년 후에 다른 화학물질들과 반응하여 암 같은 치명적이고 고통스러운 질병으로 고생할 수도 있다.

길거리에 흔한 패스트푸드 점포나 주위에 널린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가공식품들에는 맛과 모양을 위해서 다양한 화학물질이 사용되는데, 이런 화학물질들을 사람이 장기간 복용할 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확실하게 테스트 된 물질은 거의 없다고 한다. 환경보호기금의 정책 이사인 릭 스미스(Rick Smith)의 말을 따르면 ‘우리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통제받지 않는 과학 실험에 참여한 기니피그’다.

‘음식’을 둘러싼 부조리

리는 무엇을 위해 현대판 노예들, 스타크래프트의 일꾼 유닛과 다를 바 없는 치열한 경쟁 속으로 뛰어든 것일까. 그 이유 중 하나는 좋은 음식을 먹고 건강하게 오래 살려는 것이다. 이 대답에 사람이 그렇게 단순하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디 밥 안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사람에게 있어 음식은 최고의 행복이자 먹는 사람의 지위와 권위를 나타내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렇게 힘들게 번 돈을 가지고 몸에 좋지 않은 음식들을 계속 먹는 걸까. 왜 우리는 사람에게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음식까지도 소비자의 건강보다 기업의 이익을 우선하는 냉혹한 시장경제에 맡겨야 하는 걸까? 왜 기업들은 소비자가 먹는 음식에 첨가하는 화학물질에 대한 유독성 시험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걸까. 또한, 국가는 이런 상황을 왜 그대로 내버려두고, 인류의 번영에 이바지하기 위한 연구를 한다는 과학자들조차 소비자보다는 기업들에 편에 서서 담배를 옹호하는 걸까. 한편으로는, 한쪽에서는 어디를 가든 다양한 식품을 쉽게 구할 수 있어서 사람들은 많이 먹고 그만큼 많은 음식을 버리고, 그들은 음식의 풍요로움 속에서 비만과 과체중으로 고생한다. 반면에 WHO(세계보건기구)는 전 세계 30억 명의 인구가 굶주림이나 다른 영양 불균형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추정했고, 21세기에도 5초마다 5세 미만 어린이 다섯 명 중 한 명이 굶주림으로 죽어간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 걸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화학비료와 농업 생산의 자본화와 집중화로 식량은 이미 전 세계 인구를 먹여 살릴 만큼 충분하지만, 실제로 식량의 분배는 그렇게 공평치가 않다. 정작 식량을 생산하는 농부들이나 노동자들이 배고픔과 영양 불균형, 각종 인체에 해로운 농약(선진 대다수 국가에서는 사용금지되었지만, 빈곤 국가에서는 다국적 기업들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는) 때문에 질병에 시달리는 현실은 누구를 탓해야 하는 건가.

자본주의는 지금껏 식량을 효율적으로 관리해본 적이 없다!

버트 앨브리턴(Robert Albritton)의 『푸드쇼크(Let them eat junk)』는 넘쳐나는 식량 속에서 기아와 비만을 동시에 만들어 낸 자본주의 체제의 농업과 식량 공급에서의 불합리성과 모순에 대해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 이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자본주의의 한계와 문제점들은 비단 식량에 한해서만은 아니겠지만,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 식량이다 보니 『푸드쇼크』에서 제기되는 많은 문제점은 그냥 무심코 넘길 수가 없다. 또한, 크고 작은 동네 마트에서 할인해 파는 저렴한 식품이 눈에 많이 띄어서일까. 다른 나라에서는 5초마다 어린 아이가 굶어 죽는다고 하니, 정말 믿어지지 않는다. 이런 사실들을 추려보면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 그것도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기에 태어난 걸 정말 복 받은 것 같다. 이 풍요가 영원하지는 않을 테니까.

이런 문제에 대해 로버트 앨브리턴의 주장은 단호하다. 그는 자본주의는 지금껏 식량을 효율적으로 관리해본 적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인류의 번영에 필요한 식량체제의 기본 조건은 지구 생태에 미치는 훼손을 최소화하고, 미래 세대들을 위해 환경 건전성도 강화할 수 있는 방식으로 생산되어야 하고, 이렇게 생산된 우수한 품질과 충분한 양의 식량이 각 개인에게 제공되어야 마땅하며, 그것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가능성은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식량체제의 기본 조건에 대해 설명한다. 그러면서 자본주의가 소비자의 건강과 이익보다는 오로지 기업의 이익만을 고려하는 현실의 문제점들과 그 원인에 대해 가차없이 비판하고 있다.

『푸드쇼크』에는 자본주의의 무관심이 만들어 낸 정크푸드, 미래를 담보로 하는 지속 불가능한 현재의 식량 체제, 가난한 자가 더 가난해지는 지독한 자본주의, 식량이 무기가 되는 공포 정치,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기아와 비만, 설탕과 고기, 그리고 식품 첨가물에 중독되는 현대인, 농업 노동자는 가난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현실, 환경을 파괴하는 현재의 식량체제, 자유 민주주의보다 힘이 센 기업 등 우리가 사는 세상을 돌리고 지배하는 공장이라 할 수 있는 자본주의 진실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퍼붓고 있다. 그리고 현재의 식량체제의 위기를 극복할 단 • 장기적인 방안에 대해서도 앨브리턴 나름대로 모색한다. 그러나 그의 대책을 보고 내 생각을 감히 말하자면, 그 방안이 현실적으로 정말 가능할지, 너무 이상주의적이지는 않은지, 하는 의문과 걱정이 앞선다. 그만큼 자본주의는 우리 뼛속 깊이 잠식해 있고, 사람의 욕심과 욕망 또한 끝이 없을 뿐만 아니라 깊숙이 잠재된 욕망까지 끌어내고 없는 욕망도 만들어내어 유행을 호도하고 상품을 판매하는 자본주의가 과연 쉽사리 신의 권위에서 내려올지 회의가 든다.

식품회사의 관심은 소비자의 건강이 아니라 지갑이다

실 누구나 알다시피 기업이 이익을 좇는 본능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리고 그러한 기업의 장단에 맞추어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는 소비자의 우유부단한 태도 또한 문제인 것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충분한 정보를 얻지 못한 소비자는 단순히 돈만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을 담보로 무분별한 소비 행위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더 좋은 음식을 먹으려고 힘들게 공부하고 노력하며 돈을 벌지만, 결국에는 광고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편리함과 달콤하며 기름진 맛에 중독되어 장기적으로 건강을 해칠 수 있는 가공식품이나 패스트푸드로 하루 세 끼를 채운다. 특히 식습관은 유전이 아니라 어렸을 때의 환경적 요인, 즉 양육으로 결정된다는 걸 아는 식품회사들은 어린 아이들에 대해 더욱 공격적으로 마케팅한다. 이에 대해 과연 부모들은 가족이 먹는 음식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고, 가족의 건강을 위해 과연 적절하게 대처하고 있을까. 우리나라도 비만이 증가하고 있지만, 우리는 비만을 단순히 너무 많이 먹어서 살이 찐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정크푸드로 살 찌워진 사람들이 겉보기에는 배불러 보일지라도 영양상으로는 굶주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 없다. 즉 정크푸드가 칼로리만 높고 영양적 가치는 형편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육체는 부족한 영양성분을 보충하기 위해 더 많은 음식을 요구하고, 이런 악순환이 결국 비만을 불러온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알고 행동에 반영하고 있는가.

식품 회사나 담배 회사는 질 낮은 식품 섭취나 흡연으로 발생할 수 있는 막대한 사회 비용은 전적으로 개인이 부담하게 한 채, 뻔뻔스럽게 소비자의 건강을 담보로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고 있다. 요즘은 기업 이미지를 미화하기 위해 자선사업도 하고 여러 단체에 기부도 하지만, 결국 이런 것들은 기업의 궁극적인 기업의 이익을 위한 고도의 지능적인 전략일 뿐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미국의 광고회사들은 광고가 사람의 뇌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까지 하고 있다니, 예전 공산주의 사회에서 텔레비전을 국민의 세뇌 교육용으로 사용했듯이, 지금처럼 광고의 홍수 속에 사는 소비자가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는 기업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기 일쑤다. 많은 소비자가 사람의 살을 먹는 좀비가 아니라 자신의 지갑을 털어가면서, 부족하면 대출까지 받아 소비하는 자본주의적 좀비가 되어가고 있다.

자본주의의 대안은 가능할까?

사적으로 보면 자본주의는 냉전시대를 겪으면서 공산주의 때문에 만능해결책인양 과대 포장되어왔다. 당시 자본주의는 그 시대가 가진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거라 믿었고, 아직도 많은 사람이 그렇게 믿고 있거나 자본주의 외에 다른 체제는 생각해 본 적도,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로버트 앨브리턴의 『푸드쇼크』를 읽고 나서는 그런 안이하고 보수적인 생각에 많은 파문이 일어날 것이라 확신한다.

어떻게 보면 필요에 의해 자원이 분배되는 공산주의야말로 이론적으로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인 건 분명하다. 이런 세상에서는 모두가 필요한 걸 똑같이 가질 수 있거나, 아니면 모두 못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공평한 사회이다. 하지만, 사람은 결코 자신이 필요한 것만큼만 자원을 소유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이다. 사람은 배가 부르고 죽을 때까지 다 쓸 수 없을 만큼의 돈을 가지고 있어도, 계속해서 먹고 마시며 남의 것을 탐내며 계속해서 재산을 모으려고 애쓴다. 그래서 아무리 먼 미래라도 지금의 인류가 깨끗이 청소되고 신인류가 등장하지 않는 한, 이상적이고도 완벽한 공산주의 사회는 이미 사유의 쾌락에 물든 지금의 인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사람을 도덕적으로 개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역사에서 드러나지 않았는가. 인류의 역사에서 공산주의는 사람이 아직 사유의 개념을 알지 못했던 먼 옛날의 원시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추억으로만 남을 것이다.

사람은 사람이 가진 부족함과 어리석음, 모든 사람에게 잠재된 끊임없는 탐욕이 일으킬 재앙을 일찌감치 깨닫고 정의롭고 평등하고도 금욕적인, 여러모로 완벽한 존재인 신을 삶의 모습을 본떠 창조했지만, 그 신마저 정치와 권력, 그리고 욕망의 충족을 위해 이용됐다. 이러하니 자본주의 체제 또한 불완전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가 가진 문제점을 꼬집어 내어 비판만 하는 것보다는 우리의 후손과 인류의 미래를 위해 자본주의가 가진 불완전함과 불평등을 인정하고 개선해나가려는 의지이다. 자본주의 초창기부터 이미 부의 재분배에 대한 비판과 불만이 제기되어 왔고, 많은 자본주의 국가가 이에 대해 점점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도입하면서 개선하려고 노력해 왔다. 자본주의도 변화하고 진화하여 산업혁명 당시 초창기의 자본주의와는 많이 달라진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자본주의가 일으킨 부의 불균형과 불평등이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빈부의 격차는 국가 대 국가 간의 빈부의 격차 문제로 확장되었다. 착취 문제 또한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지역적이고 개인적인 문제를 넘어 국가 대 국가, 대기업과 빈민 국가 간의 전 세계적인 문제로 확대되었다. 아직도 마르크스가 19세기에 목격한 착취의 현장이 그대로 선진국과 대기업, 조금 먹고살 만한 사람들에 묵인하에 여전히 전 세계 곳곳에 생생하게 남아있으며, 빈민 국가 아동들의 노예화도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

값싼 음식, 값싼 소비자 의식이 지불하는 대가

든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 우리가 마트에서 싸게 사는 것만큼 누군가가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은 있는가. 중국이나 아프리카와 남미의 농장들, 그리고 다른 개발도상국의 임금과 작업 환경이 매우 열악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역시 우리에겐 다른 나라일 뿐이다. 전태일의 비극적인 죽음을 벌써 잊었는가. 여러분도 1860년대 마르크스가 처음 썼던 "내가 죽은 뒤 지구가 멸망하건 말건(Apres moi le Deluge)!"이라는, 모든 자본주의자와 자본주의 국가의 좌우명에 묵시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닌가. 과거 공산혁명이 그러했듯이, 이 모든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이 안 된다면 언제가 자본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사상과 함께 이 지구를 다시 한번 혁명의 화염 속으로 이끌 수도 있다. 그때는 아마도 과거처럼 도시적인 시민혁명이 아니라, 착취당해온 국가들이 일제히 들고일어서는 혁명이 올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한번 상상이라도 해봤는가. 자본주의나 민주주의 다음에 올 지금과 전혀 다른 시스템 위해 새워진 새로운 세상을. 조선시대나 중세 봉건 제도 아래에서 살았던 민중이 자본주의나 백성의 투표로 왕을 뽑는 민주주의, 신분제에서 해방된 사회를 상상하기가 어려웠듯이, 우리 역시 또한 자본주의에 파묻혀 다음 세상에 올 새로운 체제를 상상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런 선구자적인 새롭고 혁명적인 사상을 가지고 올, 제2의 마르크스가 세상에 태어날 것이다. 만약 당신이 ‘그’가 된다면 어떠한 시스템을 말하고 싶은가. 당신이 말하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는 무엇인가. 당신이 꿈꾸는 평화롭고 행복한 사회는 과연 어떤 사회인가.

나 같은 경제 쪽에 둔감한 사람에게는 『푸드쇼크』 초반부의 추상적인 자본주의를 설명하는 부분 등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가볍게 페이지가 넘어가는 책은 아니다. 한 장 한 장이 우리가 사는 현실의 모순을 보여주면서 우리가 모두 잊고 있던, 아니 잊고 싶었던 불편한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독자에게 불쾌함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진실을 알고자 하는 독자라면 그쯤의 불쾌함과 불편함을 어찌 예상하지 못할까. 지나가면서 가볍게 읽기에는 쉬운 내용은 아니지만, 깊이 생각하며 이해하고 넘어간다면, 소비 중심의 철저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우리에게 세상을 좀 더 냉철하고 정확하게 이해하고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되는 좋은 지식이 담겨 있다. 『푸드쇼크』를 읽고 나면 “변덕스러운 시장 가격에 식량 같은 기초 필수품을 맡겨놓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라는 앨브리턴의 당찬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에 대해 더 알고 싶으면 마이클 폴란의 『잡식동물의 딜레마』와 윌리엄 레이몽의 『독소』, 『식탁의 배신』과 파울 트롬머 『피자는 세계를 어떻게 정복했는가』와 함께 보면 좋을 듯싶다.

이 리뷰는 2012년 10월 27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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