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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8.

[책 리뷰] 세계대전이 나은 불편한 진실, ‘대평준화’ ~ 불평등의 역사(발터 샤이델)

The-Great-Leve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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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전이 나은 불편한 진실, ‘대평준화’

Original Title: The Great Leveler: Violence and the History of Inequality from the Stone Age to the Twenty-First Century by Walter Scheidel
제국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 게 일반적이고, 전염병은 어느 시점이건 한때 발병하게 마련이었다. 끝없는 로마 제국이나 전염병 없는 세상은 현실적인 반사실이 아니다. 실제 충격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결국에는 다른 충격이 그 자리를 대신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아주 최근까지도 주기적인 폭력적 평준화에 대한 그럴듯한 대안은 없었다. (『불평등의 역사(The Great Leveler)』, p518)

나의 독서 습관과 그 흐름에 대하여

사실 난 뭔가 내세우기 위해, 혹은 남다른 특별한 목적으로 책을 읽지는 않는다. 도박이나 게임에 중독되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하고 생각하면서 독서에 중독되면 ‘할 일 되게 없나 보네’라고 비웃는 요즘, 그리고 일 중독이 만연한 요즘에는 독서는 그저 시간이 남아도는, 혹은 백수들의 알량한 취미 정도로 보는 사람도 많다. 그들은 책을 읽지 않으니 독서의 가치 또한 알지 못한다. 나 같은 경우는 그저 사는 게 지루하고, 지루하지 않더라도 죽을 날을 하릴없이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어 선택한 ‘시간 보내기’ 놀이가 독서다. 그렇게 발을 붙인 취미가 뜻밖에 죽은 듯이 잠자던 나의 지적 호기심을 깨우며 느슨한 중독을 일으켰고, 그 덕분에 안중근 선생의 유명한 경구인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의 체험적 의미까지 어렴풋이나마 깨우치면서 지금까지 유지해 온 것이다.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킨다는 그럴싸한 이유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목적 없이 책을 읽다 보니, 어떤 책을 읽을 것에 대한 목적의식도 희미할 때가 있다. 주식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지적 호기심이 다행스럽게 상승 분위기를 유지하고, 여기에 조금 전 읽은 책이 다음에는 어떤 책을 읽어야 하겠다는 ‘독서 릴레이’의 충실한 조언자 역할을 제대로 해낸다면, 다음에 읽어야 할 책을 굳이 고민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런 권장할만한 분위기가 늘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주식이 급락하는 것처럼 지적 호기심이 바닥을 쳐 독서에 흥미를 잃을 때도 있고, 침몰한 배처럼 지적 호기심이 지향해야 할 방향성을 잃기도 한다. 두 권을 고른다고 할 때 한 권 정도는 부담 없이 시원스럽게 읽을 수 있는 ─ 내가 좋아하는 작가나 작풍 위주의 ─ 장르소설이나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문학을 선택함으로써 독서 자체에 흥미를 잃는 것은 미리 방지할 수 있지만, 지적 호기심이나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는 선택하기 어려운 ─ 소설을 제외한 ─ 교양 도서는 그런 식으로 문제를 넘길 수가 없다. 꼭 교양 도서를 읽어야만 하는 이유나 의무는 없지만, 좋은 주제로 잘 쓰인 교양 도서는 웬만한 소설만큼이나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소설에서는 맛볼 수 없는 ─ 읽어본 사람만이 아는 ─ 짜릿한 지적 충만감을 경험하게 해준다. 나의 대출 습관이 어렴풋이 소설 1~2권, 교양 도서 1권의 비율로 자리 잡은 것도 그런 연유에서이다.

아무튼, 나의 본받을만한 식성처럼 책을 선택함에서도 종교 분야 정도를 제외하고는 특별히 구애받는 것은 없다. 이런 나이지만, 막상 목적의식이나 내 구미를 자극하는 지적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을 때는 무엇을 골라야 할지 난감하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막연하다. 이럴 땐 옛 골목처럼 더럽게 비좁은 도서관의 책장 사이를 유령처럼 돌아다니며 헤매기 일쑤다. 마치 마트에서 수많은 반찬거리를 앞에 두고 오늘 저녁에는 어떤 반찬을 식탁 위에 올려야 할지 망설이는 알뜰살뜰한 주부의 마음이랄까?

참고로 사람마다 제각각인 식성처럼 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난 ‘추천 도서’나 ‘권장 도서’를 그다지 신용하지 않는다. 남이 권해주는 반찬이나 음식이 언제나 맛있는 것은 아니고, 가족이 먹을 음식은 오로지 자신이 직접 선택해야 안심할 수 있는 성실한 주부처럼 책 역시 나의 입맛과 나의 지적 나침반이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선택해야 후회가 없다. 후회한다고 해도 오로지 내 잘못이니 선택의 실패로부터 교훈도 배울 수 있다.

세계대전이 나은 불편한 진실

역시나 서론이 쓸데없이 길었는데, 그렇게 뭘 골라야 할지 망설이며 시간을 낭비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선택한 책이 바로 발터 샤이델(Walter Scheidel)의 『불평등의 역사(The Great Leveler)』이다. 사람은 지구상의 그 어떤 동물보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자부한다. 하지만, 살아온 날이 살아갈 날보다 많아질수록, 시간이 오래 걸리는 신중에 신중을 기한 선택보다 직감에 따른 신속한 선택이 때론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고로 난 직감에 따라 두툼한 것이 뭔가 품위 있어 보이는 양장이라는 겉모양에 현혹되어 이 책을 선택했는데, 결과적으로 ─ 자화자찬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물론 아주 가끔은 고루하기 이룰 데 없는 책을 고를 때도 있지만, 책을 선택하는 것에서만큼은 나의 직감은 매우 훌륭하게 작동해 왔음을 『불평등의 역사(The Great Leveler)』가 다시 한번 증명해 준 셈이다. 내가 읽은 책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사전 지식 없이 오로지 나의 직감과 ─ 책을 고를 때만 발동하는 듯한 ─ 사려 깊은 판단력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여 선택한 책들이다.

읽기 전에는 몰랐지만, 『불평등의 역사』을 읽으니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의 『21세기 자본(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이 떠오른다. 둘 다 부와 소득분배의 불평등이라는, 인류가 농경, 가축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떠오른 고질적인 문제이자 ─ 내 생각엔 상위 10% 정도를 제외한 ─ 다수의 관심을 끌만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피케티가 20세기 유럽의 심상치 않은 부, 소득분배, 자본의 불평등을 도식적으로 표시한 여러 등락 곡선을 처음 봤을 때 눈에 띄었던 것은 세계대전이 가져온 곡선의 급락, 즉 부의 소득분배의 급작스러운 평준화이다. 샤이델은 이처럼 세계대전 시기에 이룩한 급격한 부의 평준화를 ‘대압착(Great Compression, 大壓搾)’이라고 지칭한다.

아무튼,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읽는 내내 내 머릿속을 불편하게 했던 것은 다름 아니라 대규모 전쟁이 이런 대압착을 불러온 결정적인 원인은 아니었을까 하는 불손한 생각이었다. 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이 인류 문헌에 기록된 역사에서 불평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유일무이한 시기였다고 해서, 더는 다다를 때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극심한 부의 불평등이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라고 딱 부러지게 지적할 수는 없지만, 세계대전의 결과만을 놓고 보면 전쟁이 부의 불평등을 완화하는 어떤 극적인 요소로 작용한다고는 볼 수 있다. 피케티의 책을 읽는 내내 그런 불안한 생각들이 길 잃은 파리처럼 왱왱거리며 머릿속을 맴돌았는데, 친절하게도 샤이델은 나의 그런 불손한 생각에 종지부를 찍어주었다. 나의 의심이 전혀 허튼 것이 아니었을뿐더러 오히려 정곡을 찔렀다는 점에서 약간의 자부심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인류사에서 대규모 전쟁만이 부를 거머쥔 소수를 거덜 내는 평준화를 이룰 수 있다면, 세계대전 이후로 30~40년 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된 평준화 시기가 1980년대 전후로 반등하여 다시 20세기 초 상황으로 치닫는 지금, 이 부의 불평등이 깨지려면 세계대전 같은 파멸적인 총력전을 바라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두려움과 망측함이 나를 당혹스럽게 한다.

대규모 폭력만이 괄목할만한 평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샤이델이 개괄하는 ‘불평등의 역사’는 수렵 • 채집 생활에 바탕을 둔 선사 시대부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이후 최초의 잉여 자원을 생산하고 권력을 등에 업은 소수가 잉여 자원을 축적할 수 있게 된 농사 • 가축 생활로 시작된 인류의 ‘불평등의 역사’는 찡하게도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유지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최근의 부와 소득분배 불평등의 심상치 않은 증가 추세는 최고 정점을 찍었던 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으로 회귀하는 듯하다. 그렇다고 ‘불평등의 역사’에서 부의 불평등이 언제나 상승 곡선을 달렸던 것은 아니다. 놀랍게도 끝없이 치솟을 것 같았던 불평등이 ─ 드물지만 ─ 대폭 감소하여 잠시 평준화가 이루어졌던 시기가 있었다. 무엇이 그런 급작스러운 평준화, 즉 대압착 시대를 불러왔을까? 그것은 성장지상주의자의 희망대로 경제 성장의 성과도 아니었고, 민주주의의 허울뿐인 경제정의도 아니었다. 신의 계시는 더더욱 아니었으며, 우연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자본과 자원의 가공할만한 물리적 파괴와 대량의 인명 살상을 불러온 엄청난 규모의 폭력이었다. 대평준화는 대규모 폭력에 대한 두려움을 동반한 대규모 폭력만이 유일무이한 원인이었다. 샤이델은 대압착 시대를 불러온 네 가지의 대규모 폭력으로 대중 동원 전쟁, 변혁적 혁명, 국가 실패 그리고 치명적 대유행병을 언급하며 이들을 당당히 ‘평준화의 네 기사(騎士)’라 부른다.

이 사총사(四銃士) 중 단연코 효과가 제일이었던 것은 대중 동원 전쟁, 즉 세계대전이다. 세계대전이 폭풍처럼 일으킨 총력전은 전쟁에 소요되는 모든 자원을 끄집어내는데 필요한 급진적 몰수와 ─ 현재처럼 평화롭고 안정적인 시기에는 불가능에 가까운 ─ 급진적인 재분배 정책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수월하게 끌어냈다. 그뿐만 아니라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는 세계대전에 대한 경각심과 전쟁만큼이나 무자비한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두려움이 전쟁 중에 도출된 재분배 정책에 대한 합의를 유지해나가는 의지와 동기가 되었다. 하지만, 냉전이 종식되고, 공산주의 진영의 두 거두 중국과 소련이 각기 다른 이유로 시장 경제를 받아들이면서 세상은 또다시 평화와 안정의 시기를 보내게 되었고, 그 결과 아직 번영을 구가하고 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기특했던 평준화 시대도 종식을 고했다.

이로써 다시 부의 소득분배의 불평등 곡선이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것도, 그리고 일말의 주저 없이 작금의 불평등 곡선의 상승 추세가 불평등의 역사상 부의 분배가 가장 불평등했던 20세기 초에 근접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20세기 전과 비교하면 세계대전 이후 많은 국가가 괄목할만한 경제 성장으로 GDP가 최저 생계 비용을 웃돌면서 극빈층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로써 1세기 전과 비교하면 잃을 것이 훨씬 많아지고 나름대로 살만해진 저소득층이 대중 동원 전쟁이나 공산주의 혁명 같은 피비린내 진동하고 파괴적인 폭력을 선호할 이유는 지극히 낮아졌다. 설령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 현재의 눈으로는 얻는 것보다 잃을 것이 더 많아 보이는 ─ 대중 동원 전쟁보다는 드론과 정교한 무기, 로봇 등이 활개 치는 최첨단 기술의 실험장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국지전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더 크다. 그리고 세계대전 시절보다 점잖아지고 가진 것도 더 많아진 국민은 재분배 정책에도 급진적인 혁명보다는 점진적인 개혁을 선호한다. 하지만, 현실과 역사는 이런 식의 점잖은 개혁이나 허울뿐인 정책만으로는 부와 소득분배의 불평등이 상승하는 것을 반등시키기는 하늘의 별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고 말한다.

경제적 평준화에 대한 필요성

경제학자들이 자신만만하게 내놓은 불평등을 억제하고 감소시킬 수 있는 정책들은 넘쳐나다 못해 썩어 문드러질 지경이다. 하지만, 그런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사람들은 부와 소득분배 곡선에서 최상위층에 존재하는, 소위 ‘엘리트들’, 혹은 ‘사회지도층’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재발로 자신들의 재산을 깎아 먹을 칭찬받을 짓을 할 리는 없다. 그것이 가능해지려면 그들을 대단히 압박하는 사회적 합의나 민주적인 추진력이 필요하다. 평준화를 지향하는 사회적 합의와 민주적인 추진력을 국민으로부터 끌어내려면 평준화를 기필코 실현하고자 하는 국민의 강력한 의지가 발동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의지는 평준화 필요성에 대한 동기가 인지되어야만 비로소 발효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이런 질문을 한번 곱씹어보자.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따지고 들어가야 할 정도로 경제적 불평등, 그리고 평준화가 그렇게 중요한가? 이에 대해 샤이델은 소득과 부의 불균형과 연관되어 있을지 모를 빈곤이나 막대한 부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것이 우리 삶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있다고 설명한다. 참으로 성의 없고 모호한 대답이다. 당연히 나라고 뾰족한 대답이 있는 것도 아니다. ─ 여전히 상당한 비율로 존재하지만 ─ 극빈층이 점점 사라져 가는 것처럼 보이고, 저소득층이라 할지라도 한 세기 전과 비교하면 눈부시도록 향상된 물질적 혜택으로 소시민적인 만족을 불러일으키는 요즘, 그래서 가식적이고 위선적일지라도 대다수가 살만해졌다고 말하는 요즘 부의 불평등이나 평준화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의식이 깨어 있는 시민이 과연 몇이나 될까? 어쩌면 경제 성장이 평준화를 불러일으키기는커녕 부의 불평등을 가속하는 암울한 현실 그 자체가 가장 적절한 대답이 될지도 모르겠다. 대다수 사람은 부와 소득분배의 불평등을 확고하게 인식하지도 못하고, 그것을 개선할 의지도 없을뿐더러 평준화 필요성에 대한 동기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먹고살 만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먹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말이다.

無대책이 암시하는 미래의 불평등을 그려본다

발터 샤이델(Walter Scheidel)의 『불평등의 역사(The Great Leveler)』는 정말 우연한 선택이, 그리고 나의 훌륭한 직감이 뜻밖의 기쁨을 안겨준 경우라 할 수 있다. 비록 통계학이나 경제학에 대한 지식이 좀 필요한 부분에서는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꽤 있었지만, 그 밖은 역사를 읽어나가듯 무난하게 책장을 넘길 수가 있었다. 불평등의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토마 피케티의 책과 더불어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아쉬운 것은 샤이델마저도 평준화의 미래에 대한 뾰족한 대안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정책상의 부재라기보다는 피케티도 시인했듯 의지의 문제다. 평준화 정책들은 국가, 정치, 권력, 경제, 시민의 의지가 일심동체가 되어야만 실행될 수 있다. 현재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국가들이 그나마 가장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의 경우는 이것마저 따라 할 의지는 없어 보인다. 이미 엘리트들이 권력과 정치, 경제, 사회 곳곳을 장악한 상태에서 몰수나 다름없는 상속세 같은 것들이 실행되기를 바라는 것은 생선을 앞에 둔 고양이가 스님처럼 묵묵히 명상에만 잠겨있기를 희망하는 것과 진배없다. 그런 일은 단 한 번의 경우를 제외하곤 전무후무했다. 그 단 한 번이란 바로 부의 불평등과 평준화 역사에서 홍일점과도 같았던 세계대전이다. 그렇다고 평준화를 위해 전쟁을 기도해야만 하는가? 물론 이것은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얼토당토않은 말이다. 하지만, 역사는 말한다. 세상을 초토화하는 대규모 폭력만이 평준화라는 위대한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고 말이다.

디스토피아적인 SF영화에 등장하는 것처럼 미래에는 유전 공학과 로봇 공학 등 최첨단 기술을 독차지한 덕분에 인류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육체적, 정신적 힘을 보유하고 영생을 얻은 엘리트층이 전 세계를 지배할 수도 있다. 로봇이 노동자를 대체한 덕분에 나 같은 자연인들은 할 일이 없어지고, 자연스럽게 극빈층으로 떨어진다. 로봇 군단에 대항할 수 없는 자연인 무리는 과거 순박했지만, 한편으론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면 분노를 표출할 줄 알았던 농민들처럼 반란도, 봉기조차 일으킬 수 없다. 이런 미래는 부의 불평등뿐만 아니라 기술의 불평등도, 그리고 영화 「인 타임(In Time, 2011)」처럼 수명의 불평등도 극대화된 암울한 미래다. 반대로 모두가 기술을 공유하고 로봇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유토피아적인 사회를 꿈꿀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전쟁은 들어갈 틈이 없다. ─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 또다시 세계대전 같은 적의로 가득한 대중 동원 전쟁이 일어났다간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공할만한 파괴력을 지닌 무기들의 향연으로 사람이 살만한 곳은 초토화될 것이다. 그랬다가는 대평준화가 아니라 대빈곤화로 인류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을 것이다.

뾰족한 대책이 없다는 것을 희망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만큼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인류의 미래에는 많은 가능성이 있다. 그 많은 가능성 덕분에 문명은 꽃을 피웠고,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그 꽃을 후대에 무사히 넘겨줄 수 있었다. 여전히 진행 중인 ‘불평등의 역사’에서 과연 어떤 미래가 우리를 기쁘게 반길지, 아니면 우리의 모든 낙관적 기대와 믿음을 가혹하게 내동댕이칠지는 지금으로서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아무도 알 수 없기에 진지하게 고민할 가치가 있으며 흥미롭기까지 하다. 과연 당신이 바라는, 혹은 예견하는 미래에 전개될 ‘불평등의 역사’는 무엇인가? 그리고 당신이 바라고 생각하는 평준화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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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0. 30.

[책 리뷰] 창의력 부족을 민족성에서 찾다 ~ 중국, 엄청나게 가깝지만 놀라울 만큼 낯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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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력 부족을 민족성에서 찾다

Original Title: 中國人的邏辑 by 石毓智
이 책을 쓰게 된 목적은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중화민족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사고습관을 알고, 그것의 득실을 이해하여 다른 각도로 세상을 바라보길 바라서다. 그것을 토대로 지혜를 넓히고 경쟁력을 높여 인류의 과학 문화 발전에 공헌하길 바라서다. (『중국, 엄청나게 가깝지만 놀라울 만큼 낯선』, 6p)

책을 읽고 보니 책 제목이 눈에 거슬리다

오늘 리뷰하는 책의 한국어판 제목은 부제까지 포함하면 책 제목치고는 무지하게 긴 『중국, 엄청나게 가깝지만 놀라울 만큼 낯선: 의외로 낯선 중국 문화와 사유의 인문학』이지만, 원제는 이보다는 훨씬 간략한 ‘中國人的邏辑’이다. 구글 번역이 아니라 바이두 번역을 이용하여 한국어로 번역하면 ‘중국인의 논리’다. 간혹 외국책이나 외국영화의 제목을 한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원제나 작품의 내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한, 그래서 원제와 동떨어진 감이 없지 않은 한국어 제목이 탄생하곤 하는데, 이 책의 제목도 그런 생뚱맞은 제목 중 하나라고 말하고 싶다. ‘중국인의 논리’라는 제목이 어떤 우여곡절을 거쳐 『중국, 엄청나게 가깝지만 놀라울 만큼 낯선』으로 재탄생했는지 그 오묘한 이치를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책을 읽고 나면, 그래서 내용을 알고 나면 한국어 제목이 상당히 놀라울 만큼 낯설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별로 의미심장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책 내용을 성의있게 암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기차처럼 길어 보이기만 하는 제목은 한국인의 입장을 고려해서 나온 듯한 추측이 들기는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 영화나 책이나 ─ 가능한 한 원제를 충실하게 반영하는 제목을 선호하는 나로서는 원제는 직역하고, 현재의 한국어 제목을 부제로 덧붙이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즉, 『중국인의 논리: 중국, 엄청나게 가깝지만 놀라울 만큼 낯선』처럼 말이다.

낯설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고

뜬금없이 되지도 않는 억지를 부려가며 제목에 시비를 건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중국, 엄청나게 가깝지만’이라는 말에는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말이지만, 그 뒤에 붙은 ‘놀라울 만큼 낯선’이라는 말은 독자의 소양에 따라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중국이 낯설게 느껴졌을지 몰라도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어찌 된 일인지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중국의 민족성에서 놀랍게도 한국의 민족성과 유사한 면을 많이 발견하면 할수록 더욱더 중국인이 가깝게 느껴진다. 물론 독자의 가치관이나 쌓아온 역사 지식이나 살아온 경험에 따라, 그래서 한국의 민족성을 어떻게 보고 이해하는지에 따라 이와는 반대로 작용할 수도 있다.

즉, 이 책을 읽으면서 중국의 낯선 모습에 더 많은 의미를 둘 수도 있고, 이 책의 한국어 제목도 그러한 연유로 지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최소한 나는 저자 스위즈(石毓智)가 조목조목 일목요연하게 지적한 중국의 민족성에서 중국인의 특성뿐만 아니라 한국의 민족성 또한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이, 그래서 어떻게 보면 두 민족이 쌍둥이처럼 보이기도 했다는 점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물론 같은 부모, 같은 환경 아래에서 서로 사이좋게 성장한 화목한 쌍둥이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부모와 환경 아래에서 자라면서 일찌감치 사이가 틀어져 어쩌다 만나기만 하면 원수처럼 으르렁거리는, 일란성보다는 이란성 쌍둥이에 더 가깝지만 말이다. 한국인의 유전자는 중국 남방에 사는 한족보다는 북방에 사는 조선족이나 만주족과 더 가깝다고는 하지만, 문화 유전자인 밈(Meme)으로만 따지면, 중국 문화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점에서 문화적으로도 이란성 쌍둥이 정도는 될 것 같다.

중국의 민족성에서 발견한 한국의 민족성

그렇다면 이쯤에서는 『중국, 엄청나게 가깝지만 놀라울 만큼 낯선』에서 스위즈가 통찰한 전 세계 중국인을 망라하는 민족성에서 한국인의 민족성과 유사한 점을 (이것은 순전히 내 주관적인 관점이다!) 꼽아보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그 첫 포문은 먹는 행위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중국인처럼 ─ 나를 포함한 ─ 한국인도 먹는 모습으로 그 사람의 인품을 가름하거나 첫인상을 결정하는 사람이 꽤 있다. 누군가와 첫 식사 자리를 같이하는데 먹는 둥 마는 둥 깨작깨작 밥을 먹는 사람, 심술 난 아이처럼 편식하는 사람, 음식을 터무니없이 남기는 사람, 밥 한 알도 남기지 않고 맛있게 먹는 사람 등 이들의 첫인상은 같을 수가 없다. 또한, ‘밥은 잘 먹고 다니니?’, ‘밥 먹었어?’, ‘식사하셨어요?’ 등은 가족, 친구, 지인, 혹은 처음 만난 사이에서도 안부를 묻고 인사를 나눌 때 가장 흔히 주고받는 말이다. 옛 시절을 회상하며 추억의 음식에 집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중국인은 날짐승이나 들짐승을 봤을 때 가장 먼저 '잡아먹어야겠다'라는 생각부터 한다고 하는데, 한국인이라고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다. 아무튼, 그런 연유로 중국인은 빈 땅을 보면 먹을거리를 심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서양인은 무엇을 심어야 아름다운 환경을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어떨까? 아마 요즘 사람들은 빈 땅을 보면 집을 짓거나 상가를 올려 세를 받아먹을 생각을 할 것 같다. 동양화의 매력은 여백인데, 빈 땅을 그냥 놔두질 못하니 도시 공간의 여백이 모두 죽어가는 덕분에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숨 막혀 죽을 지경인 것이 한국의 실정이다.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교육 부분이다. 스위즈는 중국의 교육 시스템이나 부모는 개성이 강하고 독립적이거나 권위와 전통에 도전하는 아이보다는 기존 질서에 순응하고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평범한 사람을 길러낸다고 (한국이랑 너무 비슷하지 않은가?) 말한다. 부모는 자식이 사회에 큰 공헌을 하기보다는 평생 안정되고 편안하게 살기를 바라거나, 아니면 자녀의 성공이나 출세를 등에 업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닐 수 있는 위세 등등한 부모가 되기를 꿈꾼다. 그래서 중국이나 한국의 젊은이들은 창업이라는 모험과 도전의 길로 들어서기보다는 대기업이나 공무원이나 교직 등 안정된 울타리 안에서 일하기를 바란다. 또한, 지나치게 기초와 준비를 강조하는 나머지 창업과 혁신에 가장 필요한 모험 정신과 기회를 놓치기 일쑤다.

이렇게 모험 정신이 부족한 상태에서 안정적인 것만을 찾는 데다가 모방 정신까지 투철하다 보니 가게를 열어도 뭔가 새로운 것을 모색하기보다는 장사가 잘되어 보이는 업종을 유행처럼 따라 하다가 결국 자멸한다. 그래서 한 중국인이 가게를 열어 돈을 엄청나게 벌면, 얼마 안 가서 다른 중국인이 같은 지역에 하나둘씩 같은 가게를 연다. 그런 식으로 제 살 깎는 경쟁이 시작되고, 다들 돈을 못 벌다가 결국은 하나둘 문을 닫는다. 스위즈는 이 이야기를 중국인의 특징을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소개하는데, 한국도 남 따라 하기는 뒤지지 않는다. 1990년대 말 우리 동네에서 최초로 PC방을 개업한 입장으로서는 소름 끼치도록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세 번째로 살펴봐야 할 것은 유교 문화에서 비롯된 폐해다. 직업에 대한 편견, 공정함에 대한 이해 부족, 어떤 일에 대해 옮고 그름을 따질 때 사람의 지위나 명성, 부를 보고 판단하는 관본위(官本位) 사상, 질서와 권위에 대한 복종을 미덕으로 여기는 전통, 지나치게 인내를 강요하는 사회 등 한때 유교를 광신했던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구구절절한 말들이다.

마지막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바는 직관적 사고방식이다. 스위즈는 중국의 과학기술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로 중국인의 수많은 발견이 직관적 관찰에만 그치고, 이것을 계승하고 발전시킬 논리적이고 수학적으로 사고하는 부분이 약했다고 분석한다. 그로 말미암아 문학, 역사, 철학 방면의 직관적 사유 분야는 나름 발전할 수 있었지만, 번뜩이는 생각이나 제품이 적지 않았음에도 추상적 • 논리적인 과학 체계가 만들어지기 어려웠던 까닭에 현대 과학기술 분야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없다고 지적한다. 중국인이 논리적이고 추상적인 사고가 발달하지 못하고 대신 직관적 사유가 발달한 근원에 대해 스위즈는 기호화되기 어려운 한자의 특성을 언급한다. 세계적인 발명이라 할 수 있는 측우기나 금속활자를 개발할 능력이 있었음에도 이런 발명품들을 통해 어떤 과학적인 이론이나 기술 체제를 확립하여 지속적인 개량과 발전으로 이어지지 못한 나머지 이제는 중국에까지 뒤처질 위기에 처한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큰 일리 있는 분석이다.

이밖에도 낯선 이를 차갑게 바라보는 폐쇄성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담장, 울타리 문화, 성격적 특성과 습성을 지역화하는 경향, 쉽게 감동하고 쉽게 감정에 휩쓸리는 냄비 근성, 자신의 잘못을 어떻게든 상대의 잘못으로 덮어보려는 행동, 개인의 능력과 도덕성을 집요하게 연결 짓는 것, ‘나 하나쯤이야.’ 하는 이기주의 등 중국인의 민족성에서 우리의 새가슴을 뜨끔하게 할 항목은 한둘이 아니다. 반면에 짝퉁에 지나칠 정도로 관대한 것과 목숨보다 더 체면을 중시하는 풍조, 오직 돈으로만 성공을 판단하고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는 돈에 대한 맹신과 지나친 탐욕, 불신이 난무하는 교육계, 연줄과 인맥이 없으면 아주 간단한 일조차 복잡하게 변해버리는 이상한 사회 등 어딘지 모르게 우리와 비슷하면서도 이질적인 성향을 보여주는 중국은 놀라울 만큼까지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낯설 수 있다.

창의력을 죽이는 중국인의 민족성

원제 ‘中國人的邏辑’를 직역한 그대로 중국인의 논리와 사고방식을 허심탄회하게 토로하는 한편, 그로 말미암은 부작용과 폐해를 진지하게 질책하는 책이다. 부끄럽게도 남의 험담을 듣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고, 그 대상이 우리를 위협하는 경쟁 상대라면 즐겁다 못해 고소하기까지 하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이러니까 중국은 더는 발전할 수 없는 거야’, ‘이래서 중국은 안 되는 거야’ 등의 안일한 생각을 품는 안일한 사람이 있을 수 있겠으니, 이 책은 그런 안일한 한국 독자들의 안일한 기대와 희망을 충족시키고자 쓰인 안일한 책은 절대 아니다. 그런 생각으로 가볍고 만만하게 이 책을 읽은 나머지 오히려 중국을 더 얕잡아 보는 우를 범하게 될까 봐 걱정이 태산이다. 중국을 상대해야 하는 우리에겐 부담스럽게도 『중국, 엄청나게 가깝지만 놀라울 만큼 낯선』은 중국인의 습관성 사고의 폐단과 이해득실을 따져보고 반성하기 위해 쓰인, 지혜롭고 근면한 민족인 중국인을 각성시켜 한 단계 더 나아가고자 하는 원대한 포부를 품고 쓰인 책이다. 그렇다고 중국인이 당장 이 책을 읽고 뜨거운 반성의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깊은 감명을 받은 나머지 ‘아, 이래선 안 되겠구나’라고 뉘우치면서 곧바로 자기성찰의 길로 이어질 거라는 기대는 성급한 판단이지만, 체면에 죽고 체면에 사는 중국인 스스로가 외부 세계에 드러내기 껄끄러워하는 민낯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그럼으로써 각성을 촉구한다는 것은 마치 루쉰이 살아 돌아온 것 같은 착각을 일게 할 정도로 섬뜩하면서도 충격적인 일이다.

스위즈는 총 10장에 걸쳐 중국인의 사고방식을 논하면서, 그리고 유구한 문화와 전통에서 현대 사회에 맞지 않거나 오히려 현대 사회 발전에 해가 되는 민족성의 단점들을 대중이 알기 쉽게 요목조목 따지면서 일관되게 강조하는 능력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창의력이다. 스위즈는 ‘왜 오늘날의 뛰어난 과학기술은 중국인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가?’라는 질문의 답으로 중국인의 부족한 창의력을 제일로 꼽고 있다. 중국 민족성의 단점들을 총 10장에 걸쳐 나열한 이유도, 뒷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천박한 호기심이나 만족시켜줄 가십거리를 제공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중국인의 민낯을 드러내어 전 세계인의 비웃음거리로 만들기 위해서도 아니다. 바로 중국인에게 있어 가장 치명적인 단점이라 할 수 있는 창의력이 부족한 근원을 중국인의 민족성에서 찾고자 함이다.

정말로 창의력의 부족이 민족성에 있고, ─ 쉽지는 않겠지만 ─ 창의력에 해가 되는 민족적 특성을 점차 개선해나갈 수 있다면, 그리고 중국이 정말 그럴 의도와 의지가 있다면 이 책은 중국인에게는 정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잠재력이다. 스위즈의 바람대로 중국인이 각성과 반성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고갈된 민주 의식도 싹이 터 그것을 토대로 인류의 과학 문화 발전에 공헌하는 방향으로 진보한다면야 천만다행일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겠지만, 지금처럼 공산당이 배출한 제3대 황제 시진핑을 필두로 고약한 공산당이 모든 걸 좌지우지한다면 우리에겐 득보다 실이 많을 것 같다. 중국의 어마어마한 경제력에 창의력까지 더해져 과학기술과 혁신 분야에서도 중국이 성큼 나아갈 수 있다면, 중국의 국가경쟁력은 세계 최고가 될 것이며, 그로 말미암은 전 세계적 여파는 상상하기조차 하기 싫을 정도로 충격적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무튼, 이 책이 지금의 중국에 당장 큰 영향을 끼칠 리는 없겠지만, 깨어 있는 중국인이 많을수록, 그리고 그들의 외침이 더욱더 커질수록 중국의 미래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지도 모른다. 물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인류에 유익한 방향으로만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지만 말이다.

우리도 부족한 것이 창의력인데

의도적이지 않게도 이 책은 중국처럼 창의력에 목말라 허덕이는 우리에게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사가 지나온 성장 지상주의의 씁쓸한 뒤안길을 다시금 뒤돌아보게 한다. 투기와 과대광고가 유행하는 것은 그 사회에 창조력이 부족함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중국인은 자연 앞에서 시나 노래를 지으면서 아름다운 문학을 얻었고, 유럽인은 자연 앞에서 거대한 돌의 이동 원리를 생각하여 새로운 과학 시대를 열었다고 한다면, 한국인은 자연 앞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고 그로 말미암아 무엇을 남겼나? 사고습관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낸다면, 한국인의 사고습관은 어떠한 논리와 이치에 맞물려 돌아가고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우리 사회에 투영되고 있을까? 물론, 스위즈의 이 책처럼 ‘한국인의 논리’나 민족성을 분석한 책이 어딘가에 있겠지만, 막상 펼쳐보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스위즈의 책은 다른 나라 이야기니 그러려니 하고 읽을 수 있었지만, 내가 만약 중국인이라면 나의 속내나 치부를 끄집어내는 『중국, 엄청나게 가깝지만 놀라울 만큼 낯선』을 읽고자 한다면 상당한 각오 없이는 어렵지 않을까? 아마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불편한 마음을 억누르는 인내심과 진정시킬 수 있는 냉정함이 꽤 많이 필요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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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0. 16.

[책 리뷰] 인민 잔혹사의 음울한 피날레 ~ 문화대혁명(프랑크 디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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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 잔혹사의 음울한 피날레

Original Title: The Cultural Revolution: A People's History, 1962-1976 by Frank Dikoter
이 거대한 변화에서 무대의 중앙을 차지한 것은 다름 아닌 농민들이었다. 중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은 통상적인 낙수 효과의 개념처럼 도시에서 농촌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시골에서 도심 지역으로 진행되었다. 경제를 변화시킨 개인 기업가들은 평범한 수백만 명의 농민들이었고 실질적으로 그들이 국가를 움직인 셈이었다. 중국의 경제개혁을 이끈 위대한 설계자가 존재한다면 보통의 인민들일 터였다. (문화대혁명(The Cultural Revolution)』, P492~493)

인민, 중국의 경제개혁을 이끌다!

공산당이 선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진실, 즉 해방이 어떻게 인민을 짓밟고 어떻게 그들의 삶을 파탄의 지경으로까지 몰고 갔는지 파격적으로 폭로한 『해방의 비극(The Tragedy of Liberation)』에서 출발한 프랑크 디쾨터(Frank Dikoter)의 ‘인민 3부작’은 전쟁도, 내전도 없었음에도 대한민국 정도의 인구를 단 4년 만에 증발시킨 참상을 고발한 『마오의 대기근(Mao's Great Famine)』을 거쳐 어느덧 그 긴, 그렇지만 절대 지루하지 않은 여정의 종착점인 『문화대혁명(The Cultural Revolution): 중국인민의 역사 1962~1976』에 이르렀다. 이제 막 『문화대혁명』의 마지막 장을 덮은 심정을 한마디로 토로하라고 다그친다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잘 만들어진 추리소설 속에서나 등장할법한 기가 막힌 대반전을(엄밀히 말하자면 기존 역사관을 뒤집는 충격적인 가설?), 그것도 무방비 상태에서 맞닥트렸으니 그 혼란과 충격은 과히 당신의 짐작을 뛰어넘고도 남는다.

야구 선수가 휘두른 방망이에 머리를 크게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띵하지만, 혼란과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 전적으로 이 책의 주장에 동의한다면 ─ 기존의 주류 역사에 과감히 반기를 들고 나선다는 짜릿한 쾌감과 시큰한 우쭐함이 곧바로 파도처럼 전신을 덮쳐온다. 이미 누구나 다 알 것 같은 엎질러진 물이나 다름없는 역사를 이야기하는 책에 무슨 반전이 있으며, 있어 봤자 별거 있겠느냐고 힐문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볼 땐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선택 범위가 비록 동네 도서관에 한정되지만, 나름 중국 현대사 관련 책을 조금은 읽어봤다고, 그래서 대충이나마 알 것은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나이지만, 프랑크 디쾨터가 『문화대혁명』을 통해 펼치고자 하는 견해는 세상을 뒤집어엎는 놀랍고도 충격적인 반전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렇게도 놀랍단 말인가? 독자는 이 책을 통해 중국의 경제개혁을 이끈 위대한 설계자는 중국 개혁 • 개방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덩샤오핑(鄧小平)이 아니라 그저 우리처럼 평범하고 평범한 보통의 인민들이었다는 기발한 역사 해석과 마주치게 된다.

경제개혁으로 공산당 입지를 다진 덩샤오핑

우리가 짐작하는 것처럼, 혹은 알고 있는 것처럼 덩샤오핑이 진심으로 개혁 • 개방 정책을 설계하고 추진했던 것이 아니라 그는 그저 대세를 따랐을 뿐이다. 전통적인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뿌리 뽑히는 것도 모자라 끝이 보이지 않는 가난과 죽 끓듯 변덕스러운 정치적 반동이 가하는 모진 핍박과 내전을 방불케 하는 대혼란에 내동댕이쳐진 인민들은 스스로 살길을 모색해야 했다. 처음에는 혼자이거나 가족끼리, 그리고 조금씩 더 나아가 이웃끼리 마을들끼리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았다. 보이지 않는 덫을 살피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극진한 조심스러움과 삶을 유지하고자 하는 모진 본능이 뒤섞인 눈빛에는 그 시대에는 충분히 반동적이라고 불릴만한 위험한 변화를 예견하는 선동적인 침묵을 내포하고 있었다.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아래로부터의 혁명은 ‘총체적 난국’이라는 곤경에서 어떻게든 벗어날 방법을 스스로 궁리할 수밖에 없었던 인민들 사이사이로 잠복 기간이 긴 전염병처럼 소리 없이 조용하게 퍼져 나갔다. 그것은 대담하게도 자본주의로의 회귀였다. 마오쩌둥 살아생전에는 꿈도 꿔서는 안 될 그런 도리였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마오쩌둥의 공상적 이상주의가 휘두른 잔악무도한 폭정의 가장 큰 피해자이면서도 가장 큰 인내심으로 근근이 버텨 온 인민들이 소리 없는 혁명을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직 마오쩌둥이 ─ 거의 반송장이나 다름없는 상태일지라도 ─ 살아 있을 때!

그렇게 소리소문없는 조용한 혁명은 농민에게서 노동자로, 시골에서 도시로, 시장 상인에서 기업으로, 그리고 종국에는 중국을 집어삼켰다. 중국 경제 성장의 원류는 화궈펑도 아니고, 덩샤오핑도 아니었으며, 그것은 인민들 스스로 궁색한 삶을 개척하고자 하는 삶에 대한 끈덕진 애착과 바퀴벌레 같은 끈질긴 생명력으로부터 파동치는 막강한 자본주의 물결에 있었다. 덩샤오핑은 그 물결에 떠밀려오는 여럿 배 중 적당하다고 여긴 배 위로 적당한 시기에 매우 적절하게 올라탔을 뿐이다. 영악한 통치술을 선보였던 덩샤오핑은 공산당을 공고히 하고 철권통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경제 성장을 이용했다. 그는 공산당 통치의 정당성을 오로지 경제 성장에만 묶어놓는 우를 범했다. 그리고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것으로 덩샤오핑이 집권 초기에 모호한 태도를 보인 이유가 약간은 이해될 수 있다. 훗날 톈안먼 민주화 운동을 인민의 피로 진압할 철권 통치자로 거듭날 그가 한때 사상해방과 민주를 지지했던 이유는 양심에 따른 것도 아니었고, 정치적 가치관에 따른 선택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대세를 역행하여 인민의 지지를 잃지 않으려는 노련한 정치적 술책일 뿐이었다. 그는 정치적으로 철저히 보수파였으며, 자신의 권력을 다지고 공산당이 인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경제 성장을 이용했다. 즉, 공산당 일당 독재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공산당에 위협만 되지 않는다면 나머지는 (대체로) 얼마든지 봐줄 수 있었던 것이 덩샤오핑 통치의 핵심이다. 그래서 그는 인민의 민주화 욕구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라는 군침 도는 미끼를 던지며 경제개혁을 제대로 이용했다. 아니 이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오쩌둥 사후에도 경제개혁이 이루어지지 않고 문화대혁명 같은 암울한 시기가 계속되었더라면, 과거 중국의 농민 봉기 역사를 보더라도 유방(劉邦) 같은 인물이 또다시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말이다.

아무튼, 경제개혁은 순전히 인민의 의지로 시작된 조용한 혁명이었다. 그렇기에 덩샤오핑은 개혁 • 개방에 대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계획이나 구상을 제시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는 일이었으며, 그 역시 중국의 경제 성장을 원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디까지나 그 방법은 원칙적으로 사회주의적이어야 했다. 하지만, 떠밀리듯 경제개혁이라는 거대한 조류에 올라탄 덩샤오핑의 처신만큼은 역시 통치술의 대가다웠다. 그야말로 ‘위대한 조타수’였다. 당근과 채찍으로 민주에 대한 인민의 욕구를 표면적으로나마 잠재울 수 있었으며, 더불어 중국은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었고, 그로 말미암아 중국 공산당은 건재할 수 있었다.

무색해진 ‘중국 특색 사회주의’

이로써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의미가 명확해진다. 그것은 공산당의 존재성과 정당성, 그리고 일당 독재에 방해되거나 위협이 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경제 성장을 이룩하고자 하는 것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에 대한 대가는 무엇일까? 조금은 아쉽게도 프랑크 디쾨터는 ‘그리고 그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라는 의미심장하면서도 모호함을 완전히 떨쳐낼 수는 없는 문장을 끝으로 위대한 ‘인민 3부작’의 여정을 마무리한다. 아마 나머지는 교수가 강의 후 과제를 내듯 고심하고 생각할 줄 아는 독자가 풀어야 할 숙제로 남겨놓은 것이리라.

중국은 국가 경제력에서 곧 미국을 추월하는 위치에 있는 명실상부한 경제 대국이지만, 그 안에 사는 인민의 행복지수는 한국뿐만 아니라 필리핀, 코소보보다 낮다. 중국인은 불행하다. 디쾨터가 ‘인민 3부작’을 완성하기 전에 이미 량샤오성(梁晓声)은 중국인은 우울하다고 진단했다. 이렇게 비교적 간단명료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지만, 그 원인을 놓고 따져보면 복잡하기 그지없다. 한 사람이 앓는 우울증의 원인을 진단하기도 쉬운 일이 아닐 터인데, 어마어마한 인구를 자랑하는 중국인의 우울증 원인을 밝히는 일은 오죽할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공산당이 자신의 존재성, 정당성을 경제 성장에만 묶어놓을수록, 그렇게 경제 성장주의에만 매달릴수록 중국은 ‘사회주의’ 변두리에서 표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경제 성장 지상주의에만 매달려온 국가들이 앓을 수밖에 없는 골칫거리에 자본주의의 길을 걸어온 전 인류가 겪는 공통적 문제가 더해진 온갖 잡다한 폐해가 중국을 물귀신처럼 붙잡고 늘어진 형국이다. ‘중국 특색 사회주의’라는 그럴듯한 표어 속에 숨은 진의가 까발려진 지금 중국의 사회주의적인 선전은 유명무실해졌다. 중국에서 사회주의는 이제 공산당 당헌 속에서나 존재하는 허울뿐인 과거의 유물이다.

어떤 방면에서는 미국보다 더 자본주의적이지만, 그것을 절대 인정할 수 없는 중국이니 그 폐해에 대한 원인파악과 대책 또한 미적지근할 수밖에 없다. 반자유 • 반민주 • 반평등 • 반인권을 기조로 외국 자본과 중국 정부가 손을 잡고 농민의 토지와 자연 자원을 약탈하고, 생태 환경을 훼손시키고, 수억 명의 노동자와 ‘농민공(農民工)’으로부터 대규모 이윤을 함께 착취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중국은 신속하게 전 세계의 제조공장으로 우뚝 섰다. 그렇게 얻은 부는 국가가 큰 몫을, 집단은 가운데 몫을, 그리고 남은 끄트머리를 개인이 차지함으로써 완성된 ‘중국 특색 사회주의’와 ‘중국 특색 노예제도’가 탄생했다. 그것이 롼밍(阮銘)이 『덩샤오핑 제국 30년(鄧小平帝國三十年)』에서 밝힌 ‘덩샤오핑 제국’의 정체이자 마오쩌둥 제국의 폐쇄적인 공산 노예제도에서 진화한 개방적인 공산 노예제도, 바로 ‘신노예제도’다. 아마도 이것이 앞서 말한 ‘그 대가’ 중 가장 큰 월척이지 않을까?

마오쩌둥 시대 인민의 잔혹사

이로써 ‘인민 3부작’이 완성되었다. 이 시리즈는 중국 현대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나 호기심을 품은 사람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이지만, 취미로 책을 읽는 사람에게도 권하고 싶은 알짜다. 중국에서 가장 최근에 공개된 공산당 문서를 기반으로 집필된 책이라 기존 저서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세밀하고 구체적인 상황까지 살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인민 3부작’이라는 시리즈 제목이 은유하듯 삼부작 모두 인민의 삶을 중심으로 다뤄지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마오쩌둥의 공상적 공산주의에 대한 병적인 집념이 어떻게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었던, 그리고 앞으로도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무지막지한 대중 실험으로 체현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 가혹한 실험의 연속에서 인민의 삶이 어떻게 무너져 내렸는지를, 그 어마어마한 숫자의 억울한 사상자와 피해자를 대신하여 이 책은 철저하게 밝힌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기본적인 식량조차도 해결하지 못한 마오쩌둥 시대에 기근은 하나의 표준이었고, 혼란과 숙청과 정치적 투쟁은 일상이었다. 마오쩌둥이 뭔가를 하려고 할 때마다 중국은 혼란에 빠졌고, 수만 수십만 수백만 수천만의 인민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허무하게 증발했다. 하지만, 상대가 그 위대한 마오쩌둥이었기에 인민은 답답하고 억울한 심정을 하소연할 수도 없었고,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살아남았다. 변덕스러운 마오쩌둥 때문에 그들은 시시각각 궁지에 몰렸지만, 그때마다 그들은 기사회생했다. 하지만, 절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복종하는 것처럼 보여야 하면서도 절대 선은 넘지 말아야 했다. 그 선은 항상 마오쩌둥이 일으키는 바람에 따라 요리조리 움직였다. 고의든 실수든 일단 선을 넘어서는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른다면 지옥이 아가리를 벌리며 마중 나왔다. 고개를 숙인 채 낯을 심하게 가리는 고양이처럼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야 했다.

그렇게 그들은 거듭되는 박해와 시련을 통해 생존하는 법을 깨우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잊을만하면 가해지는 숙청을 통해 정부가 노린 것은 실재하거나 상상 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적을 물리적으로 제거하기보다는 가능한 많은 사람에게 겁을 주어 다루기 쉬운 인민을 만들어내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그렇다. 살아남으려면 다루기 쉬운 인민처럼 보이면 된다. 그것은 가장 훌륭한 연기자로 거듭나는 길이다 (그래서 중국 배우들의 연기력이 유난히 뛰어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단 한 번의 실수라도 용납되지 않았다. 완벽한 연기자가 되어야 했다. 전설적인 명배우처럼 오로지 연기에만 매달리고 연기에만 목숨을 걸어야 했다. 당과 사회, 이웃뿐만 아니라 때론 가족과 자신마저 감쪽같이 속여야 하는, 달마대사도 혀를 내두르고 도망갈 자신과의 끝없는 싸움이자 인내와 고난의 행군이었다. 많은 인민이 중도에 지쳐 쓰려지거나 정체가 탄로 나는 바람에 모진 박해를 겪었다. 때론 목숨마저 빼앗겼다. 그러나 대다수 인민은 훌륭한 연기로 훌륭하게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살아남은 인민이 조용하지만, 지속적인 반전을 가했다. 그것이 바로 프랑크 디쾨터가 『문화대혁명』에서 말한 문화대혁명 중반 이후 농민이 일으킨 ‘아래부터의 혁명’, 즉 경제개혁의 시작을 알리는 자본주의 물결이다.

프랑크 디쾨터의 ‘인민 3부작’은 마오쩌둥 시대 인민의 잔혹사를 대변하는 데 가치를 둔 책이라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책이다. 또한, 중국 경제개혁의 원류를 농민에게서, 그것도 농민의 의식적이고 조직적인 혁명이 아니라 기근에 대한 생생한 두려움에서 비롯한 생존에 대한 본능적인 갈망에서 찾고 있다. 그런 갈망이 중국 전역에서 잡초처럼 우후죽순 자라나면서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사회와 또 하나의 경제를 지하조직처럼 이루었다. 그것이 ‘제2의 사회’, ‘제2의 경제’ 가설이다. 이 가설이 튼튼한 토대를 쌓는다면 역사를 이끄는 원동력은 몇 사람의 영웅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인민이라는 진실이 다시 한번 증명되는 셈이다. 프랑크 디쾨터의 『문화대혁명』은 매끄러운 언변으로 역사 저술의 지루함을 덜어내 텍스트 읽기의 부담을 경감시켜 많은 독자가 충분히 접할 수 있는, 인민의 대변자로 자처하고 나선 저자의 비굴하지 않을 정도로 낮고 따뜻하면서도 예리한 시점이 돋보이는 역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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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9. 29.

[책 리뷰] 그는 어떻게 평가해도 ‘최소한 영웅’이었다 ~ 조조(장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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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떻게 평가해도 ‘최소한 영웅’이었다

Original Title: 品曹操 by 张亚新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조는 대혼란과 대분열의 역사를 끝내는 데 혁혁한 공적을 세운 인물이다. 정세가 하루가 다르게 복잡하게 급변하고 이에 따라 끊임없이 인재들이 곳곳에서 배출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났던 영웅이 바로 조조인 것이다. (『조조』, p26~27)

이보다 더 ‘조조’를 자세히 말할 수 없다

이 책은 한때 간웅(奸雄)의 대명사이자 악당의 전형으로 여겨졌던 조조(曹操)를 의심할 바 없는 일세의 영웅으로서 재조명하고자 그의 모든 것을 총망라한, 그리고 조조를 주제로 다룬 저작으로는 장야신(張亞新)의 『조조(品曹操)』를 넘볼 수 있는 것은 당분간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 감히 장담하고 싶을 정도로 조조의 포부만큼이나 원대하게 구성된 역작이다. 책 대부분을 조조의 전기에 할양하고 있지만, 전기가 끝나는 뒷부분에는 조조의 세계관과 성격, 조조에 대한 시대별 평가 등을 분석한 해설을 따로 첨부함으로써 조조에 대한 이해를 한층 더 끌어올리고 있다. 루쉰(魯迅)의 말대로 조조는 어떻게 평가해도 ‘최소한 영웅’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조조 주변에는 영웅에 버금가는 뛰어난 자질을 갖춘 많은 인재가 왕성하게 활동했거나 조조와 대립하며 경쟁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영웅적 삶을 살아간 인물의 전기를 즐겨 읽는 독자에게 꿀단지 같은 달콤한 유혹일 수밖에 없다. 그뿐만 아니라 어떠한 시대적 상황이 어떻게 영웅을 배출하고, 어떠한 인물이 어떻게 시대적 상황에 부합하여서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를 첨예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조조의 일생 자체가 삼국 시대 중 가장 극심했던 혼란기를 관통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를 즐겨 읽는 독자에게도 진지하게 호소할 수 있는 명저다. 조조의 관점으로 본 또 한 권의 ‘삼국지’인 셈이다.

하지만, 개나 소나 한 번쯤은 읽어봤을 법한 ‘소설 삼국지’에서 표독스럽게 그려진, 즉 문학적 상상력으로 완성된 간사하고 음흉한 조조를 떠올리며 이 책을 건드리다가는 큰코다치기에 십상이다. 왜냐하면, 장야신이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조조의 참모습은 문학이 그려낸 조조와는 완전 딴판이기 때문이다. 조조에게 간사하고 음흉한 면모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진실을 알고 나면 그것은 단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는 결점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 속 조조는 진짜 조조의 단점을 집대성하고 극대화해 창조한 허구 속 인물일 뿐이며, 진짜 조조는 그보다 장점이 많은 인물이다. 조조에게 다재다능한 재능이 없었다면, 그리고 원대한 포부가 없었다면 그가 어떻게 북방 통일의 대업을 달성할 수 있었겠는가? 혼란과 전쟁이 이처럼 들끓었던 난세에 자신의 능력만으로 한 세력을 일으켜 세워 북방을 평정했다는 이 사실 한 가지만 보더라도 그는 ‘최소한 영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원수마저 부하로 받아들인 조조의 용인술

그렇다고 조조가 자행했던 수많은 만행이 사라지거나 용서되는 것은 아니며, 그의 공적으로 상쇄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상쇄되어서도 안 된다. 조조는 자신의 다재다능한 재능 탓인지 사람을 죽이고 부리고 살리는 일, 즉 한없는 관대함과 한없는 포악함 모두를 즐겼던 종잡기 어려운 성품의 소유자다. 일례로 조조는 아버지 복수를 위해 서주를 정벌하면서 아버지 죽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무고한 백성 수만(혹은 수십만) 명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진순신(陳舜臣)의 소설 『제갈공명』에서 제갈량은 숙부를 따라 고향을 떠나 양양으로 향했는데, 그때 하비를 지나가면서 조조의 만행이 나은 참담한 결과와 마주치게 된다. 조조의 만행은 닭과 개 한 마리마저 남기지 않았을 정도로 처참했다. 이 광경은 그대로 제갈량 마음속 깊이 각인되고, 그럼으로써 그는 조조 같은 사람은 천하를 통일할 자격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 누구보다도 백성의 안위를 걱정했던 제갈량이었기에 조조의 만행은 평생 잊히지 않았으며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짓이었다. 소설 『제갈공명』은 이것이 바로 제갈량이 조조에게 가지 않은 결정적 이유라고 설명한다. 조조가 대업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용인술의 대왕’이라는 이 책의 부제처럼 인재 한 명 한 명을 소중히 아끼고 적재적소에 활용한 그 자신의 능력 때문인 것은 분명하지만, 조조의 사디스트 같은 가학적 행동을 즐기는 듯한 난폭한 성정에 질린 나머지 스스로 조조를 외면한 이들도 적지 않다. 만약 조조가 그러한 성정을 다스려 좀 더 많은 인재를 포용할 수 있었다면, 그래서 제갈량마저도 포섭했더라면 분명히 삼국 역사의 판도는 달라졌을 것이다.

아무튼, 아버지에 대한 복수에 미친 나머지 무고한 백성을 학살했던 조조가 불과 7년 후(200년) 장남 조앙(趙鞅)뿐만 아니라 조카, 그리고 신임하던 호위 무사 전위(典韋)를 전사하게 하였던 원흉인 장수(張繡)의 투항을 전격적으로 받아들인다. 원소와의 대격전을 앞둔, 그래서 단 한 명의 무사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상황이었다는 점을 고려해도, 사사로운 원한을 마음에 두지 않는 넓은 도량을 온 천하에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포용력을 만천하에 알릴 절호의 기회였다고 해도,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미쳐 날뛰던 7년 전과는 달리 복수심을 자제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적군을 아군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조조의 영웅적 기개를 엿볼 수 있다. 인재를 아끼는 마음은 일시적인 변덕이 아니었다. 이후 조조가 정권을 잡고 나서 펼친 인재 등용 방침에서도 알 수 있듯 재능만 있다면 귀천의 구애 없이, 심지어 품행에 상관없이 얼마든지 천거할 수 있다는 조조의 철학이자 원칙이다. 제갈량 역시 나라나 군주에게 이롭게 충성하는 데 인재를 천거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이러한 이치는 조조에게도 마찬가지였었나 보다. 조조의 용인술은 그가 대업을 이루는 데 가장 큰 힘이 된다. 또한, 건안 5(200년)년 이전의 일은 일절 논하지 말라고 명할 정도로 조조는 과거에 얽매이는 것을 지양했는데, 인재 등용 방침과 과거의 과실을 문제 삼지 않는 태도에서 조조의 도량이 드러난다. 일례로 관도 대전 후 조조가 원소군이 남긴 전리품 중에서 자신의 부하가 원소와 내통한 내용을 담은 서신을 불태웠다는 일화는 유명한데, 이는 조조가 말만 앞세우는 소인배가 아니라 실천력을 갖춘 진정한 영웅임을 보여준다.

자신의 능력으로 일어선 조조

소설 삼국지에 등장하는 사악한 조조와는 달리 실제 조조는 죽은 장수나 병사의 의지할 데 없는 가족들을 적극적으로 보살피거나, 전란으로 고통받는 백성의 안타까운 처지를 시를 통해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자신의 측은지심을 은연중에 드러내기도 했다. 조조의 정치에서도 동한 말기 급부상한 호족 세력의 착취와 끊임없는 전쟁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백성의 삶을 조금이라도 개선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조조의 대민 정책이 사회를 안정시켜 백성의 지지를 끌어내고, 더 나아가 통일 전쟁에 동원될 병사나 군량 등의 자원을 확보하려는 먼 안목에서 비롯된 치밀한 계략일지라도, 남발하는 선거 공약처럼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일관성을 가지고 지속해서 시행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실제적으로도 백성의 부담을 덜어 주고 농업 경제 및 사회 질서를 회복하여 사회 발전을 끌어냈다는 점에서 조조의 순수한 의도를 외면하거나 깎아내리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비록 일시적인 충동이나 분노에 휩싸여 잔악무도한 짓을 저지른 일도 적지 않고, 한나라를 손에 넣는 데 방해되는 자는 순욱이나 최염처럼 공을 많이 세운 자라도 엄벌을 비껴갈 수 없었으며, 아무리 작은 모반에도 극단적으로 대처한 조조였지만, 과실로 공적을 덮기에는 조조의 공적이 너무나 크다. 그리고 이 책이 누누이 강조하듯 그의 공적 대부분은 그 스스로 일궈냈다는 점에서 그는 영웅이다.

품행 면에서는 높은 점수를 얻지 못했을지는 몰라도 관찰력과 임기응변 능력, 기민함과 지혜, 지략, 노련함, 과감한 행동과 여타 영웅들에서는 보기 어려운 문학적 및 예술적 재능까지 겸비한 조조의 다재다능함만큼은 역대 어느 영웅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단지 조조의 몇몇 행동이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불쾌함과 분노를 자아낸다고 해서 ‘조조는 한낱 악인에 불과할 뿐’이라는 그릇된 판단 속에 덮어두는 것만큼 어리석고 바보 같은 짓은 없다. 왜냐하면, 조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는 인간적 결점을 안고서도 강철 같은 의지와 영웅적 기개로 원대한 포부를 밀어붙여 대성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조조를 앞에 두고 몇 가지 인간적 결점을 물귀신처럼 붙잡고 늘어져 끝끝내 깎아내리는 것이 어찌 역사를 바로 보고, 역사를 온전히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의 올곧은 태도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은 굳이 긴 시간을 들여 이 책을 읽는 수고는 일찌감치 접어두고 그저 소설 삼국지나 보면서 시시덕거리면 그만이다.

결점을 안고 대업을 이룬 조조에게 반하다

내가 조조를 좋아하는 이유는 역대 어떤 영웅보다도 희로애락이 분명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매우 인간적인 영웅이라는 점이다. 조조의 감수성이 처녀처럼 예민할 땐 주인을 밥 먹듯 배반하는 여포를 죽일 때조차 동정심에 젖어 들었다. 만약 이때 옆에 있던 유비가 깨우침을 주지 않았더라면 여포의 생명은 몇 년 더 연장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며, 그랬다면 삼국 역사의 판도가 또 어떻게 달려졌을지 모를 일이다. 이런 조조에게 내가 심히 끌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나 역시 ─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 감수성이 풍부하고 감정의 기복이 심한 편이기 때문이다. ─ 이런 말 하면 웃기지도 않겠지만 ─ 내가 만약 조조처럼 한 국가를 다스리는 독재자가 된다면, 조조처럼 그때그때 기분이나 감정에 따라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일을 꽤 즐겼을 것이다. 그래서 조조를 보면, 조조를 읽으면, 조조를 생각하면 ─ 조조와 나의 실제 능력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지만 ─ 왠지 내가 군웅할거 시대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아 말하기 부끄러운 짜릿한 흥분감에 젖어 든다.

사실 조조는 평범한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처럼 명확하고 뚜렷한 성격을 가진 캐릭터가 아니라 매우 복잡한 성격을 가진 인물이기에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장야신의 역작 덕분에 비교적 쉽게 조조에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조조를 이해하고 파악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그것은 마치 장남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처럼 조조를 읽는 이의 가치관이나 사상, 성격, 나이, 시대, 성향에 따라 생성되는 조조의 이미지는 천차만별이다. 그런 식으로 각개격파된 조조의 이미지가 객관적인 조조의 이미지라고 볼 수는 없지만, 보는 이에 따라 무수한 조각으로 나뉜 조조의 이미지들의 교집합과 합집합 속에 진짜 조조가 살아 숨 쉬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것은 곧 다방면에 걸친 토론과 연구를 통해서만이 진짜 조조를 복원할 수 있다는 의미다.

조조를 읽을 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조조는 그 어느 때보다 어렵고 혼란스러웠던 난세를 살았다는 점이다. 난세를 살았기에 변덕스럽고 때론 잔인하기까지 한 그의 성품이 북방을 통일하는 대업을 달성하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때론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다. 다르게 해석하면 조조의 인간적 결점이 전국 통일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했을 수도 있는데, 만약 그랬더라면 조조의 인간적 결점이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그 결과는 어떠했을는지 고찰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예를 들어 원소를 격파하고 그 주변 오랑캐까지 토벌하면서 승승장구를 달리던 조조는 잠시 교만함에 빠지는데 하필 이때 관도대전만큼이나 중요한 적벽대전을 치른다. 제갈량은 아무리 훌륭한 재능을 가진 인재라도 교만함에 빠진 사람이라면 쓸모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아군에 피해를 줄 수 있다고 경고했을 정도로 교만함을 경계했는데,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이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이 교만함이다. 조조는 잠시 교만함에 빠진 나머지 정세를 자신에게 매우 유리한 상황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던 적벽대전에서 승리를 놓침으로써 천하를 삼분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로써 살아생전에 전국 통일을 이루겠다는 포부 역시 물거품이 되었다. 좀 더 일찍 통일되었더라면 전쟁도 그만큼 일찍 종결됨으로써 백성의 고생도 그만큼 더 줄었을 것이니 적벽대전의 패배는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고금에 보기 드문 알차고 재밌는 책이지만, 오탈자가 이렇게 많은 책도 고금에 보기 드물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인명이야 그렇다 쳐도 날짜처럼 역사적 사실과 직접 관계된 글자에서 오탈자가 발생하면, 독자는 잘못된 정보로 혼란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좀 더 신중하게 교정했어야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 때문에 사실 여부를 확인하느냐 몇 번이나 구글을 뒤졌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조조의 영웅적 기개와 원대한 포부, 조조가 꿈꾸던 이상, 조조가 추구하던 사상과 인간적 면모를 조조의 실제 삶과 실제 행적 속에서 발췌한 이 책을 놓친다는 것은 그 누구에게라도 있어서 고금에 보기 드문 손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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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9. 25.

[책 리뷰] 유난히 인재 등용을 강조한 제갈량, 그 이유는? ~ 와룡의 눈으로 세상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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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인재 등용을 강조한 제갈량, 그 이유는?

Original Title: 诸葛忠武侯文集
만약 쓸모가 있는 사람을 대우하지 않고, 대우를 받는 자가 쓸모가 없으며, 가난하고 한미하여 아랫사람이 되고, 재물이 있고 어여쁘다고 윗사람이 되며, 간사한 소인이 출세를 하고, 충직한 신하가 멀리 유배를 간다면 어떻게 인재를 얻을 수 있겠는가? 나라가 위태로워 다스릴 수가 없고 백성이 편안히 살 수 없는 것은 인재를 잃었기 때문에 생긴 잘못이다. 예로부터 인재를 잃고 나라가 위태로워지지 않거나 인재를 얻고 백성이 편안히 살 수 없었던 때는 없었다. (『와룡의 눈으로 세상을 읽다』, p373)

진순신의 소설과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제갈량(諸葛亮)은 한 국가의 중추적인 역할을 능히 감당한 인물이다. 제갈공명(諸葛孔明) 그는 경제, 형법, 인재 등용 등 국가와 백성을 다스리는 내정과 병사를 육성하고 장수를 부리고 병기를 제작하고 전략을 획책하고 전투를 지휘하는 군사 분야와 ‘천하삼분’의 형세를 유지하는 외교 등 한 국가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어 원동력이 되는 모든 분야에 걸쳐 혁혁한 성과를 이룩한, 어떤 역사적인 정치가도 보여주지 못한 걸출한 재능의 소유자다. 특히 제갈공명이 활동했던 시기가 난세였다는 점에서 그의 빛나는 재능은 더욱 돋보인다. 비록 제갈공명이 살았던 시대와는 전혀 다른 시대에 사는 우리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의 마음을 얻는 치도(治道)의 바탕을 이루는 도리는 크게 차이가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정치, 외교, 군사, 경제 등 여러 방면에서 걸출한 재능을 보여준 제갈공명은 현대를 살아가는 위정자, 위정자를 꿈꾸는 청년, 혹은 무리를 지휘하고 이끄는 역량을 요구하는 위치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한 최상의 본보기다. 그러므로 제갈공명이 남긴 문장, 문건, 문서 하나하나는 그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료이면서도, ‘리더십’을 요구하는 모든 분야, 모든 사람에게 유용한 실제적인 조언이자 사심 없는 충고가 아니지 않을 수 없다.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와룡의 눈으로 세상을 읽다』는 어느 모로 보나 ‘팔방미인’이었던 제갈량이 남긴 현존하는 모든 문서를 집록한 것이다. 청대 사람인 장주(張澍)가 남긴『제갈충무후문집(諸葛忠武侯文集)』을 원본으로 한 이 책에는 제갈량의 사상, 가치관뿐만 아니라 그의 성격과 인품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 위작으로 의심되는 자료들도 있지만 ─ 모두 제갈량이 작성한 글이라는 점에서 그의 작풍과 문풍까지 은연중에 드러나는 문집이다. 다른 이유는 제쳐놓고라도 제갈량을 한 시대를 풍미했고 한 시대를 뛰어넘는 위인이라는 점 때문에 그를 알고 싶고, 그를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진순신(陳舜臣)의 역작 『제갈공명(諸葛孔明)』과 함께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유난히 인재를 강조한 제갈량

제갈량은 국가를 다스리는 군주나, 아니면 군주를 보필하는 신하가 나라에 유익하고 충성하는 일 중에 단연코 인재 천거를 가장 중요하게 보았다. 이것은 진순신의 소설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제갈량은 종종 촉나라의 인재 부족을 한탄하면서 위나라와 오나라의 많은 인재를 부러워했던 것이다. 군주나 그와 비슷한 중요한 지휘에 있는 사람은 여러 사람의 지혜를 모으면서 나라나 조직에 유익한 의견을 널리 받아들여야 하는데, 인재가 없다면 이러한 일은 시도조차 할 수 없다. 제갈량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몸을 다스리는 것에 비교하기도 한다. 몸을 다스리려면 정신 함양에 힘써야 하고 나라를 다스리려면 인재 등용에 힘써야 하는데, 정신을 함양하면 생명의 장수를 얻고 인재를 등용하면 나라의 평안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인재를 등용해야 하는가? 제갈량은 인재는 꼭 성인 같을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총명하고 사리에 밝은 인재를 등용하면 되는데, 이때 아무리 재능과 지혜, 미덕을 가지고 있더라도 교만하고 인색한 사람만큼은 절대 취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사람이 교만하면 근처에 있는 사람들이 반감을 품거나 곁을 떠날 수 있다. 팀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적대적인 마음을 품고 있다면 그것은 팀워크에 엄청난 손실을 초래할 수도 있다. 이것은 한 명의 인재를 영입하고, 여러 명의 인재를 떠나보내는 결과이니 도리어 손해가 아닐 수 없다. 관도대전으로 원소를 격파한 조조가 잠시 교만에 빠져 유비 • 손권 연합군을 과소평가한 결과가 적벽대전의 패배로 이어졌음을, 그리고 이 때문에 천하삼분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던 조조는 자신의 야망인 천하통일을 끝내 살아생전에 보지 못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교만은 그 사람이 가진 재능조차 발휘할 틈을 막아버리는 무서운 적이다.

한편, 인색한 사람은 포상하지 않으니 부하가 사력을 다해 일하지 않는다. 사력을 다하지 않으면 공을 세울 수가 없으니 이만저만한 폐해가 아닐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인재를 등용하고자 하는 사람은 상벌이 공평무사해야 하고, 인의로 다스리고, 직언하는 자는 포용하고, 아첨하는 자를 멀리해야 좋은 인재를 곁에 머물게 할 수 있다.

능력만이 아니라 성격의 상성까지 고려한 인사 배치

인재가 지닌 재능도 중요하지만, 여러 사람과 어울려야 하는 조직적으로 분업화된 사회에서는 사람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제갈량의 말처럼 사람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어렵다. 선악은 전적으로 구별되지만, 마음과 외모는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직업, 학력, 명성, 직위 등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는 그 사람의 성품을 평가할 수 없다는 말임과 동시에 번지르르한 겉모습이나 현란한 재주에 현혹된 나머지 그 사람이 지닌 본성을 간과하는 경솔한 짓을 범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이기도 하다. 분업화된 사회나 조직에서는 협력해야 하는 동료 사이의 궁합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일례로 제갈량은 촉나라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 인사 배치 실패를 두 번이나 범했었다.

관우(關羽)가 형주에서 오나라 세력과 대치하고 있을 때 제갈량은 강릉 태수로 미방(糜芳)을 임명했다. 두 사람은 평소에 사이가 안 좋았을 뿐만 아니라 성격도 잘 맞지 않았다. 하지만, 제갈량은 일상에서는 마찰을 일으킬지는 몰라도 국운이 걸린 위기 앞에서는 두 사람 모두 사사로움에 얽매이지 않고 대의를 따를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러한 제갈량의 바람은 너무나 쉽게 무너진다. 관우는 우금과의 전투에서 생포한 포로들 때문에 군량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미방으로부터 군량 보급을 거절당하자 관우는 그만 손권의 영토인 상관(湘關)의 군량을 턴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관우는 죽음을 맞이한다. 이로부터 유비는 나날이 복수심에 불타올랐고, 결국 대의에서 벗어나도 한참이나 벗어난 이릉 전투를 일으켜 촉나라에 큰 타격을 입힌다. 또한, 제갈량은 1차 북벌에 “말이 실제보다 과하오. 크게 쓸 인물이 아니오”라는 유비의 유지에도 마속의 능력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가정 전투에 마속을 기용했다가 큰 낭패를 본다.

이 두 이야기는 인사 배치에서 개개인의 능력만을 고려할 것이 아니라 각각의 인물들이 가진 인품이나 성격,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발생할 수 있는 인물들 사이의 마찰이나 경쟁 구도도 사전에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사람의 본성을 이해하기가 제아무리 어렵다고 하더라도,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제갈량은 사람을 아는 일곱 가지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사회생활을 영위해야만 하는 모든 사람에게 평생 기억해 둘만 한 훌륭한 조언을 남겨 주었다. 그 전문을 모두 실어보면,

첫째, 시비를 물어 그의 지향을 관찰하는 것이다. 둘째, 능한 말로 그를 난처하게 만들어 임기응변 능력을 관찰하는 것이다. 셋째, 책략에 대한 의견을 들어 그의 재능과 식견을 관찰하는 것이다. 넷째, 재난을 알려 그의 용기를 관찰하는 것이다. 다섯째, 술에 취하게 하여 그의 품성을 관찰하는 것이다. 여섯째, 재물을 보여 그의 청렴함을 관찰하는 것이다. 일곱째, 기한을 두고 일을 맡겨 그의 신용을 관찰하는 것이다. (『와룡의 눈으로 세상을 읽다』, p427)

지금의 위정자들이 그의 발끝만큼이라도...

다른 리뷰도 상투적이고 지루했지만, 오늘은 더더욱 정치 기사처럼 재미없고 거북이 등껍질처럼 딱딱한 리뷰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문장삼이’와는 안드로메다만큼이나 떨어진 간관하고 졸렬한 리뷰라고 질타해도 면목이 없다. 이것은 나의 글솜씨가 지닌 명백한 한계이자 당최 천박하기 그지없는 문장력에서 기인한 것이다. 하지만, 굳이 변명하자면, 『와룡의 눈으로 세상을 읽다』는 많은 부분이 소실된 제갈량의 미완성 문서들을 집록한 문집이니만큼 풍부한 소설적 상상력이나 매끄러운 문학적 분위기를 기대하기 어려운 책이다. 그것은 나름 감상적인 평가를 내리기가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와룡의 눈으로 세상을 읽다』는 한 개인이 남긴 각종 문서를 집대성한 책이니만큼 딱딱하다면 딱딱하다고도 할 수 있는데, 그러한 문집 상의 특성이 리뷰를 쓰는 내게도 고대로 전수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이 책이, 아니 제갈량이 남긴 글들이 가치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비할 나위 없는 재능과 더불어 어느 역사적 인물보다 많은 덕목을 지닌 위인 중의 위인이다. 제갈량의 연박한 학식과 명민한 두뇌는 둘째치고 솔선수범, 청렴결백, 헌신, 충성, 책임감 등 한 사람으로서 지닐 수 있는 최고의 인품들을 고루 갖춘 것만으로도 그 어떠한 역사적 인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걸출한 인물이다. 또한, 미래를 통찰하는 뛰어난 안목과 원대한 포부는 어떠한가? 그런 제갈량의 뛰어난 재능과 인품을 엿볼 수 있는 유일무이한 문집이니만큼 배울 것도 많고 느낄 것도 많으며, 때론 자책하고 후회하는 성찰의 여지를 남겨 주기도 하는 책이다. 자칫 대학 교재처럼 졸음을 몰고 올 수도 있지만, 그 졸음을 유도하는 약발 속에 독자의 돌처럼 굳은 딱딱한 편견과 고루한 가치관을 깨부숴주는 깨우침도 들어 있으니 이 어찌 마다할 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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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8. 29.

[책 리뷰] 인간 정신의 위대한 해방자인가, 그냥 미친 자인가? ~ 불멸의 에로티스트 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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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정신의 위대한 해방자인가, 그냥 미친 자인가?

Original Title: Sade by Jean-Paul Brighelli

… 내 무덤의 흔적은 그렇게 해서 대지의 표면으로부터 완전히 사라질 것이요, 나로서는 사람들의 뇌리로부터 나에 대한 기억이 깨끗이 사라지는 게 더없이 기쁠 따름이다.

1806년 1월 30일, 온전한 정신과 몸 상태로 생 모리스 샤랑통에서 작성함.

D.A.F. 사드(『사드』, p271)

당신은 ‘사드’를 읽었는가?

직 ‘사드(Sade)’는 읽지 않았다. 영화, 문학, 정신의학 등 꽤 많은 분야에서 남발하는 경향이 있는 ‘사디즘(sadism)’, ‘사디스트(sadist)’라는 ─ 그의 이름에서 파생한 ─ 단어는 익히 들어온 바이지만, 사실 나는 그를 시대가 허용할 수 있는 경계를 훌쩍 넘어서는 쾌락을 추구한 방탕아 정도로만 알고 있었지, 소설을 쓴 작가였다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사디즘, 사디스트라는 어딘지 모르게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불경스럽고, 얼굴을 붉힐만한 괴상망측한 뭔가를 떠오르게 하는 단어들이 밀어붙이는 과도한 상상력에 압도된 나머지 어원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사드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해볼 여력이 없었다. 그렇지만, 도서관의 프랑스 소설들이 몰려 있는 서가를 들쑤시며 다닐 때마다 작게 일어나는 먼지 속에서 종종 내 눈에 띄곤 하던 책 한 권이 있었다. 바로 장 폴 브리겔리(Jean-Paul Brighelli)이 지은 『불멸의 에로티스트 사드(Sade)』이다. 책표지에 빨간 글씨로 새겨진 ‘SADE’라는 글자는 사드의 거북살스러운 명성만큼이나 음침하다. 그것은 마치 나약한 중생을 유혹하려는 악마의 활활 타오르는 음탕한 불꽃처럼 나를 노려본다. 지금까지 왜 이 책을 선택하지 못했을까? 아니 애써 외면해야 했을까? 그것은 내가 악마의 유혹을 뿌리치려는 의지가 유독 강했다기보다는, 이 책을 대출하려는 행위가 왠지 금단의 열매를 따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 섞인 망설임 때문이었다. 나를 파멸로 이끌 것 같은 망상적인 두려움이 악마의 음침한 유혹을 눌러버린 것이다. 적어도 지금까지만은….

‘사드’를 읽고 싶게 만드는 잔인한 책

러나 이 리뷰를 쓰고 있다는 것 자체가 무엇을 말하려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그렇다고 악마의 유혹에 넘어갔다기보다는, 조금씩 차오르다가 결국 흘러넘치고만 어둡고 음울한 내 호기심에 결국 굴복했다고 말하고 싶다. 단순히 호기심 때문에 ‘사드’에 관한 책을 선택했다는 말이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그렇다고 구차하게 믿어달라고 호소하고 싶지도 않다. ‘사드’에 관한 책을 선택했다는 것 자체가 모든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비록 그 ‘모든 것’이 무엇인지 나열할 수는 없더라도 말이다.

아무튼, 『불멸의 에로티스트 사드(Sade)』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지금, 이 책에 대한 평가를 한마디로 말하라고 강요한다면, 이해하기 어렵다는 사드만큼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라는 것이다. 형이상학적인 수사적 표현을 즐겨 쓰는 프랑스 작가 특유의 읽기 수월치 않은 문장들이 보란 듯이 눈앞에서 어지러이 광무를 추는 가운데, 세상에 유례없는 논리적인 광기로 세상에 유례없는 소설을 집필했다는 사드의 전설적인 글쓰기와 신화적인 삶, 그리고 지극히 파괴적이고 불경한 사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적어도 나의 능력으로서는 너무나도 벅차다. 더군다나 사드의 소설을 단 한 권도 읽지 못한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면 한 가지 확실해지는 것은 하나 있다. 그것은 더는 망설이지 말고, 누군가가 간곡하게 말리더라도, 혹은 애인이 절교하겠다고 협박하거나 아내가 이혼장을 들이밀더라도, 반드시 사드의 책을 읽어야겠다는 의지의 용솟음이다. 19세기에 활동한 비평가이자 작가인 쥘 자냉(Jules Janin)이 사드가 감옥에서 미친 듯이 쓴 『쥐스틴(Justine)』을 읽고 나서 심한 발작을 일으켰다는 실화나, 사드의 작품을 읽었다는 이유로 모든 걸 팽개치고 수녀원에 들어간 한 젊은 처녀의 이야기는 어떻게든 사드의 책을 읽어보겠다는 의지와 호기심을 ‘사드적으로’ 부채질한다. 하지만, 사드의 책을 동네 도서관에서 대출하려면 용기 그 이상의 뭔가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동네 도서관에 사드의 책이 총 네 권 있는데, 그중 두 권이 서고에 안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고에 안치된 책은 대출자가 도서관 직원에게 ‘직접’ 문의해야 빌릴 수가 있는 것이며, 그 직원 대부분은 여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용기 그 이상의 뭔가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바로 안면몰수와 철면피다!

아쉽게도 동네 도서관에는 국내에 번역된 사드의 소설 중 가장 엽기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소돔 120일』은 (아주 오래전에 영화를 봤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비루먹을 불쾌감을 끝까지 견뎌낸 나 자신이 정말 대단하다) 없다. 그러나 글 읽는 것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조차 발작을 일으킬 정도로 (악덕 쪽으로) 믿기 어려운 파괴력을 발산하는 책인 『쥐스틴』(미덕의 불운)은 있다! 오호라. 반드시 이 책을 읽고야 말 것이다. 전문연구가가 아니면서 사드를 읽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로부터 무사히 헤어나올 수가 없다는 아니 드 브륑(Annie Le Brun)의 경고도 무시한 채 말이다.

부디 사드의 독으로부터 약간의 상처만을 받기를. 그 약간의 독으로부터 역사와 문학이 배출한 가장 위대한 환상제조기 사드가 선사하는 시정(詩倩) 어린 상상력을 흡수할 수 있기를. 부디 신의 가호가 있기를. 할렐루야,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알라후 아크바르….

‘사드’에 대해 말하지만, 정작 ‘사드’는 없다?

책은 방탕과 감금이라는 이분법으로 쉽게 구분되는 사드의 일생뿐만 아니라 지난 2세기에 걸쳐 악덕의 화신에서 자유의 화신으로 부침에 부침을 거듭한 사드의 철학, 사상, 작품에 대한 비평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책이다. 종교적, 사회적, 윤리적 관습과 더불어 선과 악을 초월하여 신과 자연에 저항하는 고독한 외골수로 신격화된 자유인이자 순교자로서의 사드, 그리고 그저 방탕하고 변태적이면서 사악하고 신성모독적이지만 절대 미치지는 않은 광인으로서의 사드가 한 권의 책 안에서 서로 팽팽하게 대척한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 일말의 관용도 없었던 과거에 비교하면 ─ 긍정적으로 재평가되는 최근의 분위기를 반영하지만, 그렇다고 크게 균형을 잃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은 사드에 대해서는 말하면서도 정작 사드는 없다. 전기(傳記)에 할당된 분량이 빈약하다는 뜻이다. 그것은 사드가 죽은 지 벌써 200여 년이나 지났다는 것과 당대 끔찍스러운 악명으로 말미암아 그에 대한 자료가 별로 보존되지 못했던 소치이다. 그러하니 사드의 삶이 도대체 어떠했기에 불미스러운 모든 수식어를 석권할 수 있었는지 무척이나 궁금했던 나로서는 깊은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몇 가지 소득이 있다면, 사드가 저지른 방탕이 흉흉한 명성만큼은 대단치 않다는 것(그렇다고 평범하다는 것은 아니다!)과 사드가 걷잡을 수 없는 열정에 휩쓸린 나머지 극단적인 쾌락과 방탕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나름의 논리적이고 일관적인 철학을 바탕으로 (누군가는 그것을 단순히 ‘광기’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세상을 뒤엎는 악덕의 자유의지를 (물론 이 대부분은 거칠 것 없는 글쓰기를 통해) 실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드의 책을 한 권도 읽어보지 않은 나로서는 수사적인 문장을 무지막지하게 구사하는 프랑스 작가들의 글이 형언하고자 하는 사드의 그 사드적인 무언가를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마치 미증유의 혼란 속에서 길을 잃은 여행자가 느낄법한 방향을 잃었다는 두려움과 지금까지 가보지 못한 새로운 곳을 찾을 수도 있겠다는 호기심이 자석의 척력처럼 서로 밀어내는 가운데, 그 어쩔 수 없는 전장의 한복판에 있는 나는 당황하는 것이다.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광기 비슷한 그 무언가를 자유의지로 발산한 자이자 미덕을 강간한 자이자 악덕의 지존인 그 앞에서 나는 오줌 싼 어린애처럼 어찌할 줄 모르는 것이다. 신 앞에 선 한 인간이 그 전지전능한 권위에 압도되어 옴짝달싹 못 하는 것처럼 신과 자연을 거부한 사드의 사악한 힘에 짓눌려 나는 녹다운당한 것이다.

한 줌의 기적처럼...

렇게 방바닥에 널브러진 나는 어느새 사드가 조촐한 난교파티를 벌이던 라코스트 성의 음침한 구석에 내팽개쳐 있다. 방종과 방탕, 통음난무의 질퍽한 흔적이 역력한 그곳을 꽉 채운 사드의 얼굴은 블랙홀처럼 짙은 음영으로 가려져 있고,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사드의 한쪽 손에는 과거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을 전율에 떨게 했던 채찍이 들려 있다. 채찍이 차가운 돌바닥을 매몰차게 내리치는 소리는 엉덩이를 채찍질 당한 말처럼 나를 엉금엉금 기어가게 했고, 채찍이 서늘한 공기를 가르는 음흉한 소리는 내 항문을 뚫고 들어와 고막을 울린다. 정확히 그곳, 채찍이 내리친 폭력의 흔적이 역력히 보이는 그곳에는 제단 위로 올라탄 성상처럼 한 권의 책이 광휘를 발하고 있다. 그때까지도 사정없이 내 고막을 때리던 채찍 소리는 빛으로 휩싸인 책에 나의 손이 닿는 순간 기적처럼 사라진다. 사드도 기적처럼 사라졌다. 나도 기적처럼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 손에는 기적처럼 한 권의 책이 놓여 있다. 이 모두가 기적이었고, 그래서 나는 자연조차 철저하게 거부한 사드가 탄생한 것도 기적이라고 부르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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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7. 14.

[책 리뷰]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라는 짧은 질문에 대한 긴 대답 ~ 잡식동물의 딜레마

The Omnivore's Dilemma by Michael Pollan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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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무엇을 먹을까?’라는 짧은 질문에 대한 긴 대답

Original Title: The Omnivore's Dilemma by Michael Pollan
지금까지 반세기 동안 기업들은 가축이 이승에서 사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애써왔다. “할아버지 때에는 소들이 도축되기 전까지 4~5년을 살았죠.” 리치가 설명했다. “1950 년대에 아버지가 목장을 운영하고 있을 때에는 그 기간이 2~3년 정도였어요. 지금은 겨우 14~16개월이죠.” 참으로 패스트푸드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잡식동물의 딜레마』, p98)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에 대한 매우 긴 대답

널리스트 마이클 폴란(Michael Pollan)의 『잡식동물의 딜레마(The Omnivore's Dilemma)』는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라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적 질문에 대한 매우 긴 대답이다. 그것은 당신이 즐겨 먹고 생각만 해도 입에 군침이 돌게 하는 고기에 대한 불쾌감을 생성하려는 환경운동가의 지루한 설교가 될 수도 있고, ─ 지극히 낮은 확률이겠지만 ─ 날벼락 맞고 제정신을 찾은 광인처럼 당신을 채식가로 변신시키는 강력한 매개체가 될 수도 있다. 아니면, 당신을 오늘 저녁 식탁 위에 오를 고기가 무엇을 먹고 자랐는지, 어떠한 장소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세심하게 고려하는 깐깐한 섭취자로 거듭나게 할 수도 있다. 또한, 폴란의 긴 대답은 누군가를 유기농에 대한 병적인 집착에서 해방시키는 혁명이자 우악스럽게 싼 음식만 찾아다니던 누군가의 고집스러운 아둔함을 깨우쳐주는 예상치 못한 일침이다.

한편으로 이 책은 정부의 원조와 소비자의 무지라는 음침한 장막 뒤에 숨어 각종 모순과 폐해를 양산해 내는 산업적 음식 시스템과 허울뿐인 산업 유기농 음식을 고발하는 르포르타주이자, 문명을 도외시한 채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초유기농 농장을 체험하고, 구석기 시대에 살았던 인류를 모방하려는 매우 진기한 시도에서 폴란 자신이 직접 요리 재료를 찾아 사냥 • 채집하는 모든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진지한 모험이다. 이를 위해 마이클 폴란은 손수 트랙터를 몰아 검은 초콜릿색 바다의 물결로 일렁이는 옥수수밭을 위태롭게 행진하기도 하고, 농장에서 일주일간 날품팔이 일꾼 체험을 하면서 직접 닭을 도축한다. 버섯채집꾼과 함께 먹을 수 있는 버섯을 채집하러 새벽같이 산행을 강행하기도 하고, 총을 쏘며 직접 야생 돼지를 사냥한다. 그렇게 해서 손수 마련한 고기, 버섯, 채소, 과일, 효모 등의 다양한 음식 재료들로 지인들에게 만찬을 대접하는데, 폴란은 그날의 식사에 ‘잡식동물의 추수 감사제’라는 의미심장한 이름을 붙인다.

지속불가능한 산업적 음식 시스템

이클 폴란이 야심 차게 두 주 동안이나 고심하며 준비한 ‘잡식동물의 추수 감사제’는 보기도 좋고 맛도 좋은, 그래서 생각하기도 좋은 만찬이었던 점은 분명하지만, 이러한 음식 시스템은 (75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인구를 고려하면) 비현실적이며 지속불가능하다. 만약, 지금 당장 산업적 음식 시스템의 가동을 중단하고, 모든 사람이 폴란의 발자취를 따라 거창하게 ‘잡식동물의 추수 감사제’까지는 아니더라도 ‘잡식동물의 조촐한 저녁 식사’를 장만하려고 든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인류의 끔찍한 인구 팽창을 조장했던 산업적 음식 시스템은 지속가능한가? 옥수수로 1칼로리의 가공식품을 만들려고 화석 연료 에너지 10칼로리가 소비되고, 소고기 단백질 1칼로리를 생산하는 데 있어 석유 에너지가 54칼로리나 사용되고, 재배된 채소나 과일을 냉장하고 씻고 포장하여 소비자나 지역 마트에까지 수송하는 데 수백에서 수천 칼로리의 화석 연료 에너지가 소비되는, 이렇게 배보다 배꼽이 큰 음식사슬이 과연 언제까지나 지속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그뿐만 아니라 산업적 음식 시스템이 양산하는 환경오염과 공중 보건 문제는 누가 책임질 것인가? 결국, 이 모든 비용과 부담은 고스란히 사회적 비용으로 이관되어 납세자이자 산업적 음식사슬의 ─ 사실은 가장 큰 피해자인데 ─ 가장 큰 수혜자라는 누명을 안고 사는 소비자의 지갑과 건강에 대한 지속적인 위협으로 때우게 된다. 회복하는데 드는 비용보다 그 회복에 필요한 시간이 엄청나게 요구되는 환경오염 같은 경우는 이에 아무 책임도 없는 미래 세대도 부담하게 될 것이다.

여전히 ‘잡식동물의 딜레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현대인

이클 폴란의 재치있는 지적대로 산업적 효율의 관점에서 정말로 석유를 직접 마시지 못한다는 점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아쉽게도 지구가 나은 최고의 대식가이자 탐식가인 사람일지라도 그 정도까지는 진화하지 못했을뿐더러 앞으로도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설령 석유를 마시며 사는 신인류가 탄생할 수 있을지라도 그때가 되면 이미 석유는 고갈되고 없을 듯싶다.

우리는 지구상의 그 어떤 동물보다 가장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는 여전한 잡식동물이지만, 그렇다고 먹을 수 있어 보이는 모든 것을 몽땅 다 먹을 수는 없다.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자연에 있는 아주 많은 것들을 먹을 수 있다는 축복과 그 가운데서 먹어도 안전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많은 부담을 져야 한다는 저주가 공존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말하지만, 현대적인 산업적 음식사슬이 제공하는 다양한 가공식품들은 먹고 나서 바로 죽거나 탈이 날 정도로는 위험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리고 누군가가 그 음식들을 먹고 여전히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을 팔팔하게 돌아다닌다는 점에서 ‘잡식동물의 딜레마’ 문제를 해결하는 그럴듯한 대안으로 보인다. 정말 그럴까?

거대한 산업적 음식 시스템에 가려진 사회적 비용이나 노동자들의 인권 문제, 환경오염 등의 지속불가능성은 차치하더라도 ─ 의도적이든,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든 어차피 그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려는 용감한 소비자는 거의 없겠지만 ─ 요즘 사람들은 정말 안심하고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을까? 아니면 어딘지 모르게 께름칙함을 느끼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음식들을 장바구니에 담는 것일까? 유기농을 집어 들며 나름대로 최고의 선택이라 자화자찬하며 만족해하는가?

이제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하는지.’라는 태곳적 문제에서 좀 더 분화되고 문명화된 현대적인 문제들이 우리를 괴롭힌다. 주머니가 가벼운 미식가라면 어떤 음식을 먹어야 투자한 가격 대비 최상의 맛을 뽑아낼 수 있는지, 현명한 주부라면 어떤 음식을 먹어야 가족의 건강을 지킬 수 있는지, 이상주의자라면 어떤 음식을 구매해야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지 등등 많은 문제가 우리의 지갑과 장바구니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다. 마이클 폴란의 설명대로 우리는 여전히 ‘잡식동물의 딜레마’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식탁 앞에 엉거주춤 앉은 채 허우적거리고 있다.

먹는 방식이 바뀌려면 사는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

렇다고 이 책이 딱 부러지는 어떠한 해결책이나 대안을 내놓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그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과학자 몇 명이 옹기종기 모여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며 몇몇 정부가 나선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음식은 인류를 지탱하고 자연과 교감하는 근원이지만, 산업적 음식 시스템은 우리와 음식의 연결고리를, 그리고 그 연결고리를 통해 자연과 소통하는 우리의 태곳적 능력을 무참히도 파괴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먹든 그 재료가 무엇을 먹으며 어디에서 자랐는지, 그것이 어떻게 도축, 가공되어 내 식탁에까지 왔는지 등 한 생명체의 드라마틱한 일생을 되새겨보며 비위 상할 필요가 없으며 감사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이미 현대적인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산업적 음식 시스템을 등에 업고 인류의 문화와 문명, 그리고 개개인의 삶의 뿌리 깊숙이 들어앉았다. 지금에 와서 산업적 음식 시스템을 거부한다는 것은 전 인류를 기아와 아사의 벼랑으로 밀어 넣는 일과 다름없다. 지속가능한 농장이 분명히 존재하고 상업적으로도 성공할 수 있지만, 그러한 농장들이 지독하게도 많은 인류를 먹여 살릴 수는 없다. 현재로서는 산업적 음식 시스템이 인류의 찬란한 식탐을 그럭저럭 채워주는 듯 보이지만, 이 역시 얼마 못 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것이다. 만약 아무런 대안도 마련하지 못한 채 산업적 음식 시스템의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것은 아마 세계 3차대전보다 더 끔찍한 재앙이다.

마이클 폴란은 뾰족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대신 이 모든 것에 의문의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우리 모두를 그가 던져 놓은 사고의 덫에 걸려든 게 한다. 유머 가득하고 재치 만점인 폴란의 문장에 현혹된 나머지 그가 놓은 덫에 일단 한 번이라도 걸리게 되면, 우리가 먹고 마시는 모든 음식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밖에 없으며,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가 우리를 규정한다는 엄연한 현실에 직면할 수밖에 없으며, 진정으로 먹는 방식이 바뀌려면 진정으로 사는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그의 현실적인 믿음에 수긍할 수밖에 없다.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독자에게 자신이 먹는 음식을 보다 진지하게 바라보라고 요구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우리를 규정하는 음식과 그 음식이 먹는 음식에 얽힌 복잡하고도 난해한 음식 사슬을 단순히 먹고 먹히는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를 벗어나 철학적이고 윤리적이며 생태학적이고 생물학적인 관점으로 볼 것은 종용하고 있다. 만약에 이 책을 읽고도 오늘 저녁 식탁 위에 놓인 음식들을 전혀 불편한 감정 없이 예전처럼 즐길 수 있다면, 당신은 자신이 죽인 사냥감이나 채집한 음식에 대해 감사와 예의를 표할 줄 알았던 구석기 시대 조상보다 못한 미개인이다!

육식에 대한 끝나지 않은 도덕적 • 윤리적 논쟁

으로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이성과 감성을 갖춘 지능적인 잡식동물이 진보된 문명화를 이루고 나서 필연적으로 마주칠 수밖에 없는 육식에 대한 도덕적 • 윤리적 고찰을 다루고 있다. 자신처럼 고기를 먹는 사람은 적어도 한 번쯤은 인생에서 육식 때문에 일어나는 살해를 직접 해보라고 요구하는 마이클 폴란은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는 측의 주장과 사람의 동물적 특성을 강조하면서 사냥과 육식을 옹호하는 측의 주장을 모두 다룬다. 그러나 이러한 균형은 육식하는 저자의 마지막 논리로 무너진다. 마이클 폴란은 돼지를 한 마리라는 개체로 볼 것이 아니라 종(種)의 개념으로 볼 것을 주장한다. 그의 주장대로 라면 돼지(기타 인류에 의해 가축화된 모든 동물)는 인류가 돼지고기를 좋아하는 한 멸종할 일은 없다. 가축화는 그들의 진화적 선택이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인류와 가축화된 동물들과의 윈-윈(win-win) 관계가 성공적으로 수립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비록 한 마리 한 마리 돼지의 집단가축사육시설(CAFO: Concentrated Animal Feeding Operations)에서의 짧은 삶이 끔찍하고 고통스럽고 불행하더라도 인류의 썩 괜찮은 과학기술과 변치 않는 식탐이 소멸하지 않는 이상 그들의 종은 보존될 수 있다는 것이 폴란의 주장이다. 육식을 옹호하는 처지에선 썩 괜찮은 논리처럼 들리는데, 내가 보기에는 아무리 영리한 돼지라도 이런 설명을 알아들을 리가 없다는 점에서 폴란의 주장은 어떻게든 육식에 대한 도덕적 • 윤리적 부담을 덜고자 하는 인류의 수많은 변명거리 중 하나로 들린다. 즉, ‘이성적인 존재’가 될 때 가장 큰 장점은 원하는 무엇에 대해서든 이유를 찾을 수 있다는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의 말과 다름없다.

만약 외계의 어느 지적생명체 문명에서 인류의 뇌가 고단백 영양 식품으로 유행한다고 치다. 그 바람에 그들에 의해 인류가 강제로 가축화된다면, 그래서 외계인에 의해 20~30세까지 인도적으로 사육되다가(적어도 그들은 사람을 끔찍한 CAFO 같은 곳에서 기르는 것보다 좋은 음식과 적당한 운동, 괜찮은 교육, 그리고 깨끗한 환경을 기반으로 해서 성장한 뇌가 더 영양가 있고 맛도 더 좋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도축된다면(이런 이야기를 하니 영화에서 한니발 렉터(Hannibal Lecter)가 사람의 뇌를 삼겹살 구워 먹듯 요리해 먹는 장면이 떠오른다), 과연 우리는 폴란가 주장한 논리로 한껏 위안을 받으면서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즉, 우리보다 뛰어난 과학기술과 문명을 갖춘 외계인이 우리의 뇌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이상 우리는 지구에서뿐만 아니라 이 우주에서의 생존을 보장받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위안 아닌 위안에 만족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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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7. 7.

[책 리뷰] 장엄한 역사와 무심한 통계 속에 묻힌 소년병들 ~ 한국전쟁(왕수쩡)

Korean War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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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한 역사와 무심한 통계 속에 묻힌 소년병들

Original Title: 朝鮮戰爭 by 王樹增
전쟁은 어느 한 쪽의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으며, 심지어 쌍방의 계획대로 진행되지도 않는다. 전쟁은 자체의 규율이 있고, 우연과 필연이 한데 섞여 흐름이 결정되기도 하며, 삶의 희열과 죽음의 함정을 안배하기도 한다……. (『한국전쟁(朝鮮戰爭)』, p894)

이름 모를 ‘소년병’

픽션 왕수쩡(王樹增)의 『한국전쟁(朝鮮戰爭): 한국전쟁에 대해 중국이 말하지 않았던 것들』 막바지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전방에서 중국군의 소년병이 최전방 진지로 명령을 전달하러 가고 있었다. 명령이 적힌 쪽지는 잘 접혀서 그의 상의에 넣어져 있었고, 소년병은 영리하게 포탄 구덩이 속을 재빠르게 옮겨가며 그날따라 더 맹렬해진 포화 속을 힘겹게 전진하고 있었다. 소년병은 죽고 싶지 않았고, 최대한 빨리 임무를 완수한 다음 부모님, 가족, 연인이 오매불망 기다리는 따뜻하고 포근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적군, 아군을 떠나서 소년병이 명령서를 전달하던 그 날 전쟁에 끌려든 모든 군인은 십중팔구 소년병과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백전노장도 엄두 내기 어려운 맹렬한 포화로 뒤덮인 전장의 한복판을 위태하게 뛰어가면서도 수시로 명령서가 있는 가슴께를 더듬던 소년병이 진지에 거의 접근했을 때 소년병은 포격에 쓰러지면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정신이 든 소년병은 한쪽 다리의 발목이 절단된 것을 알았고, 개의치 않으려고 애썼지만, 안색이 창백해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잠시 누워 있던 소년병은 고무신이 신겨진 채 절단된 발목을 한쪽 손에 들고, 다른 한쪽 손으로는 안간힘을 쓰면서 진지까지 기어갔다. 소년병은 하늘가를 붉디붉게 물들인 석양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명령서를 가슴에서 꺼내 지휘관에게 건넬 수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그날 소년병이 최전방 진지로 전달한 명령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명령 오늘 밤 10시에 정식으로 휴전한다. 그때 총이나 대포를 한 발도 발사해서는 안 된다.”

쪽지를 받아 든 지휘관이 시계를 보니 오후 8시 정각이었다. 소년병이 명령서를 전달한 날은 밀고 당기는 지난한 협정 끝에 마침내 한국전쟁의 정전협정을 조인하는 날이었다.

장엄하다는 역사 속에 한낱 무명으로 묻힌 ‘소년병’

이후 소년병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리고 그 소년병이 누구였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한국전쟁의 중국 측 자료를 수년 동안이나 파헤치며 숨겨진 영웅들을 적지 않게 발굴해 낸 왕수쩡조차 소년병의 이름을 모르는 것을 보면, 우리 역시 영영 알 길이 없다.

역사가는 소년병 같은 일화는 대규모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종종 벌어지는 사소한 사건이라고 냉정하게 판단하고는 기록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소년병의 희생이 있었든 없었든 어찌 되었든 정전협정은 성립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또한, 한국전쟁에서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인 데다가 그중 영웅이라고 불릴만한 용기를 보여준 병사들도 한 두 명이 아닐 텐데 그깟 소년병의 이름이 대수로울 리도 없다. 하지만, 전쟁은 사람이 한다. 폭우처럼 쏟아붓는 포화를 끝내 견뎌내야 하는 일도, 그리고 포화 속에서 끝끝내 희생되어야 하는 것도 소년병처럼 이름 없는 병사들이다. 전쟁은 이름 없는 병사들의 복종, 투지, 희생, 의지, 용기의 복합적인 작용으로 잔혹한 현실로 구체화된다. 농민군을 이끌어 신중국을 수립한 마오쩌둥(毛澤朿)은 '세상만사를 결정짓는 요소들 가운데 첫째는 바로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한국전쟁에서 보여준 중국인민지원군의 전쟁 철학에서도 중요하게 드러나는 중심 사상이지만(일부는 이를 ‘인해전술(人海戰術)’이라고 깎아내리기도 하지만), 왕수쩡이 쓴 『한국전쟁』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국인의 처지에선 중국인민지원군이라는 적군의 실상과 활약을 다뤘다는 점에서 조금은 불편할 수도 있는 (솔직히 이런 책도 불편할 정도로 머리가 차갑지 못한 사람이라면 아예 책을 읽지 말지어다!) 왕수쩡의 『한국전쟁』이 끝내 한국 독자에게 복받치는 감동을 밀려오게 하는 이유도 바로 그러한 점에 있다. 즉, 전장의 한복판에는 ‘무명의 병사’가 있듯, 그가 쓴 논픽션의 한복판에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장엄하다는 역사 속에서 한낱 무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소년병’의 이야기는 내 이야기가 되었을 수도 있고, 당신의 이야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전 이후 수많은 책이 한국전쟁을 다뤘지만, 그 누구도 ‘소년병’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왜일까? 전쟁에서 한 사람의 목숨 따위는 파리 목숨만큼이나 가치가 없어서? 그저 몇 개의 숫자로 표현되는 통계 수치의 일부라서? 총알이 빗발치고 포화가 모든 것을 불태우고 파괴하는 전장도 참혹하지만, 그 뜨거운 전장 속에 벚꽃처럼 만개한 청춘을 기꺼이 받쳤음에도 역사와 후손들에게 외면당한 그들의 운명도 참혹하다.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은 끊임없이 진동하고, 지옥에 떨어진 것처럼 하늘에서는 불을 내뿜는 전장에서 우리처럼 가족이 있고, 각자 나름의 이력과 삶을 가진 무수히 많은 청춘이 자욱한 포연 속으로 연기처럼 사라져갔지만, 역사는, 그리고 우리는 편리하게도 ‘수만 명’으로 통칭해버린다. 아, 이 얼마나 무정하고 매정한 숫자 놀음인가!

‘소년병’을 기억하려는 노력이 맺은 결실

가 왕수쩡이 날고 기는 재주가 있더라도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모든 이들을 알 길은 없다. 하지만, 그가 이름 모를 그 ‘소년병’을 기억하려고 노력하듯, 그의 책에는 역사가의 무참한 붓과 인류의 무심함 속에 묻혀버린 또 다른 소년병들을, 그리고 그 소년병들이 무리를 이룬 크고 작은 부대들을 기억하려는 흔적이 역력하다. 이 책은 그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본 역작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보통 역사가들이 사건들과 그 사건들이 서로 복잡하게 엮여가는 그 인과관계를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하는 것에 비해 왕수쩡은 사건을 실제로 일으키는 사람들의 행위와 그 사람들의 운명에 천착하고 있다. 그래서 그가 기술하는 한국전쟁은 다른 역사서보다 더 생생하고 드라마틱하지만, 그만큼 더 잔혹하게 느껴질뿐더러 심금을 울리는 자극도 강렬하다. 특히 전쟁사를 좋아하는 독자들이 눈여겨볼 만한 요인도 있는데 중국군 최고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가 병법을 구사하는 내밀한 과정과 마오쩌둥이 전체적인 중국군 전술에 끼친 영향, 중국군 장교들이 전투에 임하는 자세와 그들이 상부의 명령을 받아들이는 체계 등 다른 한국전쟁 관련 책에서는 보기 어려운 중국군의 활약상이 상세하기 기술되어 있다. 중국인민지원군 부대들의 구체적인 전술도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중국인민지원군 병사들의 정신력 예찬

편으로는 죽음도 불사하는 소름 끼치는 투지와 믿기지 않는 인내력을 몸소 보여준 중국인민지원군 병사들의 뛰어난 정신력을 이 책은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해 왕수쩡은 공산주의에 대한 신앙(지금의 중국 젊은이들은 어떨지 몰라도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끝내고 이제 막 국가를 수립한 1950년대 초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과 제국주의에 대한 증오, 그리고 현재 치러지는 전쟁이 ‘정의의 전쟁’이라는 굳은 믿음이 군 장병 마음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사실 한국전쟁에서 물질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유엔군보다 현격히 뒤처진 중국군이 그토록 놀라운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핵심은 바로 왕수쩡이 강조하는 그 ‘정신력’에 있었다는데 누구도 반박하기 어렵다. 중국군의 분신쇄골도 마다하지 않는 희생정신은 '세상만사를 결정짓는 요소들 가운데 첫째는 바로 사람’이라는 마오쩌둥의 말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한국전쟁에서 보여준 중국인민지원군의 소름 돋는 희생은 광신도들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예가 아닌가 싶다. 그렇게라도 해서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한국전쟁에서 중국군이 이룬 그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결정적 이유는 중국군이 희생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것은 중국이 거둔 모든 승리는 젊은 병사들의 피와 생명을 바꾼 결과였다는 말이다. 비록 적군이지만, 그들이 한국 땅에서 흘린 피와 생명, 그리고 그들이 보여준 뛰어난 용기와 비장한 희생을 생각하면 절로 숙연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마치면서...

책에는 군인과 그 군인들이 한데 모여 움직이는 부대의 운명과 비장한 심리가 한 편의 소설처럼 완벽하게 묘사되어 있다. 몰입하여 읽다 보면 중국군이 아군처럼 친근하게 느껴지는 난감한 상황에 자신도 모르게 당황하기도 하고, 눈물 없이는 책장을 넘기기 어려운 부분도 더러 있고, 장황하다 보니 석연치 않은 부분도 더러 있다. 숭고한 희생에서 오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든, 안타까운 희생에서 오는 슬픔의 눈물을 흘리든, 석연치 않은 점을 의심하든 중요한 점은 서로 죽고 죽이는 생명을 담보로 한 필사의 싸움에서도 인류는 거침과 섬세함, 포악함과 따스함, 천함과 고상함, 유약함과 굳셈이라는 인격과 인성을 발휘하면서 어떻게든 인간성을 유지하려고 애쓴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전쟁을 다룬 다른 논픽션들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놀랍지 않은가? 사람의 잔인하고 난폭한 성정을 극대화하고 부추기는 전쟁조차도 사람을 감동시키는 인간성을 말살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이로써 지금보다 더더욱 문명이 발전하고 사람들의 의식도 진보할 미래에는 전쟁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희망할 수 있을까?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최소한 우리가 지난 전쟁들의 실상들을 잊지 않고 있을 때야 그러한 희망의 작은 뿌리를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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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4. 14.

[책 리뷰] 유토피아가 인도한 생지옥 ~ 마오의 대기근(프랑크 디쾨터)

Mao's-Great-Famine-book-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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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가 인도한 생지옥

Original Title: Mao's Great Famine: The History of China's Most Devastating Catastrophe, 1958-1962 by Frank Dikötter
국가가 전부이고, 개인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개인의 가치는 노동 점수에 의해 끊임없이 평가되고, 흙을 나르거나 벼를 심을 수 있는 능력으로 결정되었다. 농촌에서 농민들은 가축처럼 취급되었다. 그들은 먹이고, 입히고, 재워야 할 존재였고 그 모든 것은 공사에 대가가 따랐다. 이 음울한 계산의 논리적 귀결은 살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 이들을 도태시키는 것이었다. 굼뜬 사람, 비실비실한 사람, 여타 비생산적 분자들의 무차별적 살해는 노동을 통해 정권에 기여하는 사람들에 대한 전체적 식량 공급을 증가시켰다. 폭력은 식량 부족을 다루는 한 가지 방식이었다. (『마오의 대기근(Mao's Great Famine)』, p438)

인류 정치사상 최악의 인재, 대기근

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남긴 가장 파괴적인 전쟁이었던 2차 세계대전에서 민간인을 포함한 총 사상자는 대략 5,000만 명에서 7,000만 명으로 잡고 있다. 전쟁 기간은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1939년 9월 1일부터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항복한 1945년 9월 2일까지로 대략 5년이었다. 그런데 전쟁도 없었고 내전도 없었음에도 4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민간인만 4,500만 정도가 사망한, 아마도 인류 정치사에서 최악의 인재(man-made calamity)라고 불릴만한 사건이 있었다. 바로 마오쩌둥(毛澤東)의 야심 찬 프로젝트 대약진(大跃进: Great Leap Forward)이 불러들인 대기근(大饥荒: Great famine)이다.

15년 안에 영국을 추월하겠다는 마오쩌둥의 공산주의적 공상에서 발아한 대약진은 한마디로 중국에서 가장 남아도는 자원인 6억의 노동력으로 자본을 대체하여 소련처럼 급진적인 산업화를 이루어내겠다는 마오쩌둥의 의지였다. 그러나 동방원정과 유대 볼셰비즘 말살로 아리아 민족을 위한 지상 천국을 건설하겠다는 히틀러의 지독한 ‘의지’가 독일에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을 불러온 온 것처럼, 자신의 생애에 공산주의적 유토피아를 기필코 건설하겠다는 마오쩌둥의 의지에서 싹튼 대약진 역시 중국에 전무후무한 파괴를 가져왔다. 대약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대량 살상을 낳았을 뿐 아니라 그 목적에 반하게도 농업과 무역, 공업, 운송 등 중국의 산업과 경제에도 유례없는 피해를 줬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4,500만 명이 아사해가고 있을 때 권력의 중심부 사이를 비밀스럽게 오간 말과 그 당사자들의 냉혹한 행위들에 대한 완전한 그림이 담겨 있을 것으로 예상하는 베이징의 중앙당 기록 보관소는 여전히 굳게 닫혀 있다. 지금까지 국가나 중국 공산당의 위신을 실추시키고 체면을 깎아내리는 크고 작은 불쾌한 사건들이 철저하게 은폐되어 온 것처럼 중국 공산당은 여전히 진실을 호도하거나 감추기에 바쁜 것 같다. 역사와 인민 앞에 공산당의 책임을 온전히, 그리고 떳떳하게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4,500만 명을 조기 사망시킨 대기근과 수억 인민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준 문화대혁명의 절대적 책임을 공산당이 인정한다는 것 자체가 계급 사회를 타파하고 억압으로부터 인민을 해방시키겠다는 혁명 이념으로 정권을 장악한 공산당의 정당성을 스스로 부인하는 꼴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그들은 참혹한 결과 앞에 울며 겨자 먹기로 오류는 인정하면서도 히틀러나 마오쩌둥이 그랬던 것처럼 교묘하게 책임은 회피한다.

감춰진 잔혹사를 폭로하다

랑크 디쾨터(Frank Dikoter)의 인민 3부작 중 두 번째인 『마오의 대기근(Mao's Great Famine): 중국 참극의 역사 1958~1962』은 역사학자가 접근할 수 있는 최상, 최신의 자료로 완성된 수작이다. 이 책은 대기근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참상뿐만 아니라 중국 전체를 파괴했던 대약진의 구조적인 토대가 어떻게 세워지고 어떻게 지속하였는지를, 그리고 그렇게 자리 잡은 토대 위에서 파괴 위에 파괴를 거듭하고 시체 위에 시체를 쌓아가면서도 무오류를 확신하는 마오쩌둥의 의지와 그를 숭배하는 당원과 인민으로부터 광적으로 뿜어져 나온 동력이 어떻게 대약진을 유지시켰는지를 면밀하게 파헤친다. 또한,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제시된 증거들은 사회주의 중국을 건설하겠다는 다수의 ‘자발적인’ 의지가 아니라 소수의 권력과 권위, 그리고 이들의 야심과 맹목, 탐욕에서 출발한 강압과 공포, 체계적인 폭력이 대약진 운동의 토대였음을 밝힌다. 그럼으로써 대기근은 인재(人災)였을 뿐만 아니라 조기 사망자 대다수가 기존에 알려진 사실대로 아사, 혹은 굶주림과 관련된 질병으로 죽은 것은 확실하지만, 그밖에 알려지지 않은 사망원인 즉, 대약진 동안 100만 명에서 300만 명이 자살로, 그리고 적어도 250만 명은 맞아 죽거나 고문을 당해 죽었다는 감춰진 잔혹사(残酷史)를 드러낸다.

20세기 ‘위대한 독재자들’의 지독한 공통점

실 히틀러, 마오쩌둥, 스탈린 등 20세기 ‘위대한 독재자’들은 그 누구보다 인민들의 목숨을 파리목숨보다 더 하찮게 여겼다. 아마 그러한 절대온도 같은 냉혹한 성정이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는 불가결한 자질일지도 모르겠다. 특히 이 책 『마오의 대기근(Mao's Great Famine)』을 읽는 내내 나의 머릿속에서는 마오쩌둥과 히틀러는 참으로 닳은 점이 많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각자 상정한 유토피아를 향한 두 사람의 꺾일 수 없는 ‘의지’와 ‘집념’은 현실을 생지옥으로 탈바꿈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과정에서 치러지는 희생 역시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히틀러가 수많은 병사의 죽음을 민족의 생존을 위한 ‘영웅적 투쟁’에서 불가피하게 치러야 하는 희생이자 대가라고 주장했듯, 마오쩌둥 역시 대약진의 희생자들을 혁명의 대의를 위해, 미래에 약속된 유토피아를 위해, 전체를 유지하기 위해 당연히 희생되어야 할 소모품으로 여겼다. 두 사람 다 끝까지 책임을 회피하고자 했으며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편집증적으로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기에 바빴다. 히틀러가 모든 잘못을 유대인 탓으로 돌린 것처럼 마오쩌둥은 봉건 세력, 수정주의자, 반동분자, 반혁명 분자 등 (거듭된 숙청으로 이제는 존재하지도 않는) 적성 계급 탓으로 돌렸다. 또한, 아랫사람들이 등 뒤에서 벌이는 짓들을 히틀러는 모른다고 믿는 ‘지도자 신화’라는 후광 속에서 (적어도 스탈린그라드 전투 전까지는) 히틀러가 비난의 화살을 비껴갈 수 있었던 것처럼 마오 역시 ‘위대한 조타수’로서 오직 인민의 복지만을 염려하는 인자한 지도자로 그려지는 데 성공했다. 결정적으로 두 사람은 자신들의 천재성과 무오류성을 확신했다. 그래서 제아무리 논리적이고 현실을 반영한다고 할지라도 두 사람의 언행과 정책에 대한 비판은 전혀 먹혀들지가 않았고, 감히 지도자의 심기를 건드린 비판자들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래도 마오쩌둥이 히틀러보다 나았던 점이 있다면 철저하게 자국민들에 (비록 그들은 세상 그 누구도 겪지 못한 공포에 떨고 고통에 짓눌리며 하루하루를 살아야 했지만) 한해서 만행을 저질렀다는 점이다. 마오쩌둥이 중국 공산당과 6억 인민을 가지고 사회주의 실험 놀이에 한창 빠져있었던 덕분에, 이 기회를 틈타 대만과 한국은 경제 발전을 가속할 수 있었다.

한편, 제3제국의 모든 층위에서 이루어진 의사소통에 구조적으로 진실이 왜곡되었던 것처럼 중국은 대약진 시기에 망령에 가까운 마오쩌둥 실험에 장단을 맞춰주느냐 온 나라가 오로지 규정량, 할당치, 목표량 등의 수치를 날조하고 조작하는 데만 혈안이 되었다. 나치당원들이 히틀러의 직접적인 명령이 없었어도 히틀러가 원하고 좋아할 만한 일들을 알아서 계획하고 추진한 것이 나치의 동력원이었다면, 규정량, 할당치, 목표량 경쟁에서 뒤지지 않고 정치적 생명력을 이어가겠다는 공산당원들의 잔인한 보신(補身) 의지가 대약진의 동력원이었다. 나치가 국가에 짐이 되고 밥만 축낸다는 잔혹한 논리로 불치병, 정신병, 선천적 질병을 앓는 환자를 안락사시킨 것처럼 대약진 시기에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라는 엄혹한 논리로 아이, 병자, 노인은 잔학무도한 생존경쟁에서 학대를 피할 수 없었다. (다른 점도 많겠지만) 어딘가 닮은 점이 있는 두 독재자 밑에서 인류사에 지워지지 않을, 그리고 지워져서도 안 될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파괴적인 재앙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은 오싹하기 짝이 없다.

한국 전쟁의 영웅 펑더화이의 몰락을 불러온 대약진

약진이 모든 지도층 당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1957년 하반기에 시작된 치수 사업 맥락에서 처음 사용된 용어 ‘대약진’이 막상 시작되었을 때 당의 제2인자인 류사오치는 마오쩌둥의 비전을 받아들였지만, 중국에서 마오쩌둥 다음가는 권위를 가진 저우언라이와 경제 전문가 천윈(陳雲)은 마오쩌둥의 경제 정책을 반대했다. 하지만, (권위와 보신 앞에 장사가 없듯) 두 사람은 자리를 보전하고자 마오쩌둥의 끈질긴 압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 1959년 루산 회의에서 한국 전쟁의 영웅이자 국방부장이었던 펑더화이(彭德怀)는 마오쩌둥에게 조심스럽게 대약진의 참상을 알리고 비판하는 편지를 전했다가 불명예스럽게 자리에서 쫓겨나고, 루산 회의에서 펑더화이를 지지했던 다른 이들도 비참한 결과를 맞이했다.

한편, 1961년 4월 류사오치는 거의 40여 년 만에 고향을 방문했다가 실제로 목격한 참상에 충격을 받고는 (아마 그는 참상을 눈앞에서 보고도 외면할 정도로 모진 사람은 못 되었나 보다!) 이때부터 대약진에 대한 태도를 180도 바꾼다. 이후 류사오치는 농민들은 ‘30퍼센트는 천재요, 70퍼센트는 인재’라고 말한다며 대기근의 원인을 명확하게 중앙 지도부로 지목하면서 마오쩌둥의 심기를 건드린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대기근의 참상이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뒤였기에 마오쩌둥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의 침묵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거나 상대를 용서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대약진의 참담한 실패로 그는 어쩔 수 없이 잠시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곧 실추된 자신의 위신과 권위를 회복하고 실패로 끝난 공산주의적 유토피아 건설을 위한 또 하나의 거대한 실험을 일으킨다. 그로 말미암아 중국은 대약진의 충격에서 미처 회복되기도 전에 또 한 번 혼란과 고난의 수렁 속으로 빠져든다. 이번에는 대약진의 실패를 거울삼아 급진적인 산업화가 아니라 대중 선동을 선택한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을 일으킨 것이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아이가 겨우 일어서려는 찰나에 다시 크게 한방 얻어맞고 진흙탕 속으로 굴러떨어진 격이니, 어찌 인민들에게 잠시의 평안함이 허락될 수 있었겠는가? 이때는 감히 ‘위대한 조타수’에게 반기를 든 펑더화이와 류사오치도 죽음을 면치 못할 터였다.

파국의 시대에 드러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적나라함

지막으로 파국의 시대에 인간 행동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것 역시 이 책 『마오의 대기근(Mao's Great Famine)』의 목표 가운데 하나라고 프랑크 디쾨터는 설명한다. 그 어떤 공포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사람이 사람에게 행하는 잔혹한 짓들이 이 책에는 끊임없이 등장한다. 굶주린 아이가 먹을 것 좀 훔쳤다고 우물에 빠트려 죽이고, 먹을 것을 훔친 소년의 아버지에게 자식을 산 채로 땅에 파묻게 하고, 어느 엄마는 여덟 살 딸아이 몫의 배급 식량을 빼앗아 자기 자식을 굶겨 죽이기도 했다.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것은 죽은 사람조차 그냥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죽어서 땅에 묻히면 천운이었고 길거리에 그냥 방치되는 것은 보통이었으며, 앞에서 말한 소년처럼 사소한 경범죄를 저질러 맞아 죽은 사람들은 다른 재료와 함께 솥에 넣고 끓여진 다음 거름으로 재활용되었다.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적군도 아닌, 같은 동네에 사는 이웃에게 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이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런 만행이 한 두 마을에서만 있었던 특이 사례가 아니라 중국 전역에 걸쳐 비일비재하게 일어난 일상사의 하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면, 우리는 숙연한 역사 앞에서 인간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위기 앞에 또다시 서게 된다. 한편으론 훗날 문화대혁명 중에 일어나게 될 만행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는 이 책을 통해 명확하게 드러난 셈이다.

전쟁이나 내전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대한민국 정도의 인구가 단 4년 만에, 그것도 단 한 사람의 의지와 그를 뒤따르는 어떻게든 정치적 생명을 이어가고 자리를 보전해 보겠다는 사람들의 흉물스럽고 천박한 탐욕으로 말미암아 조기 사망했다는 무참한 진실 앞에선 끊임없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와 역정조차 곧바로 허탈한 감정으로 식어버린다. 마주해야 할 진실이 너무나 참혹했을 때, 그래서 당황할 수밖에 없을 때 우리는 무정하게도 그 저주받은 시기에 태어난 그 사람들의 저주받은 운명을 탓하고야 마는, 생각하기를 멈추고 논리와 이성이 마비된 무상함에 빠져든다. 이런 복잡한 감정을 조금이나마 다스리고 분노를 풀어보고자 제법 긴 글의 리뷰를 쓰고 난 지금이지만, 그럼에도 심란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 한마디로 그것은 엄청난 일이었고, 지금까지 그 누구도 밝히기를 꺼렸던 진실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고자 노력한 흔적이 역력한 『마오의 대기근(Mao's Great Famine)』도 엄청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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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 13.

[책 리뷰] 그는 정말 ‘사악’하기만 한 사람이었을까? ~ 젊은 스탈린(몬티피오리)

Young Stalin (2007년)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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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정말 ‘사악’하기만 한 사람이었을까?

Original Title: Stalin: The Court of the Red Tsar by Simon Sebeg Montefiore

“이 사람이 돌 같은 내 심장을 녹여주었는데. 그녀가 죽었으니 인간에 대한 내 마지막 따뜻한 감정도 죽었어.” 그는 자기 가슴에 손을 얹었다 . “이곳이 너무나 황량해.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이 황량해.” (『젊은 스탈린』, p369)

가체칠라제 신부는 스탈린이 독재하는 동안 그때 그 동행자를 죽여버릴 걸 하고 후회했지만, 당시에는 “그는 모두에게 감명을 주었다. 난 그를 좋아하기까지 했다. 그는 절제력이 있었고 진지했고 멋있었다. 심지어 내게 시를 읊어주기까지 했다.” (『젊은 스탈린』, p271)

그는 정말 ‘사악’하기만 한 사람이었을까?

린 스탈린이 (레닌 사후 펼쳐진) 권력 다툼에서 승리하고 나서 무자비하게 정적들을 숙청하며 권력을 다지고, 그럼으로써 냉혹한 독재자로 올라선 다음 최종적으로 완성된 ‘사악한 독재자’라는 이미지에 익숙하다. 비록 그의 공포 정치가 확실히 기억에 남을 만큼 경악할만한 일이기는 하지만, 여기엔 어떤 일의 발단을 집요하게 추적하거나, 그런 결과를 낳은 근본적인 원인을 깊이 천착하는 일에 무한한 지루함을 느끼는, 그래서 간단하고 빠르게 결과만을 보고 결과만을 중시하는 것에 익숙해진 좀비처럼 생각하기를 귀찮아하는 우리의 非사고적 일상도 한 몫 자리 잡고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바는 구태여 우리의 빈약한 정신적 삶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마다 통계는 조금씩 다르지만, 이 책 『젊은 스탈린』에서는) 대략 2,000만에서 2,500만 명의 죽음에 당당히 책임이 있는 ‘사악한 독재자’ 스탈린이 어떻게, 그리고 어떤 식으로 완성됐는가 하는 의문이다. 또한, 그의 등장은 역사적 필연이었을까? 아니면 시대의 흐름이자 시대의 요구였을까? 하는 의구심 역시 뒤따르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질문에 유용할만한 대답을 짜내고자 하는 호기심 충만한 독자라면 그가 권력을 장악하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스탈린과 어떻게든 관련이 있었던 실존 인물들의 (그들의 생애에서도,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마지막이 될 듯한 진술과 스탈린의 성장 과정에 대한 진짜 기록이 담긴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Simon Sebeg Montefiore)의 『젊은 스탈린(Young Stalin)』이야말로 최선이자 (한국어만 할 줄 아는 사람으로서는) 유일한 선택이다.

잃어버린 연결고리들을 메운 문학적 소양

력에 오른 사람이 자신의 명성에 흠집이 될, 혹은 반대자들에게 약점으로 잡힐 만한 오점으로 얼룩진 과거를 조작하거나 말살시켜버리는 파렴치한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굳이 예를 들면 문화대혁명 초기 자신의 과거 중 연애와 관련된 사항뿐 아니라 정치적 기록도 걱정한 장칭(江青)은 배우로 활동했던 상하이 시절과 관련된 자료를 집요하게 추적해 몽땅 태워버렸다), 그리고 스탈린 자신의 과거에 대한 콤플렉스와 그의 편집광적인 기질이 스탈린의 성장 과정을 진실하게 밝혀줄 만한 꽤 많은 자료에 끼친 악영향을 고려하면, 스탈린의 성장 과정을 기록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몬티피오리는 스탈린만큼이나 강한 의지와 집요함으로 10년에 걸쳐 자료를 수집한 끝에 『젊은 스탈린』을 완성했다. 이 자리를 빌려 그의 존경할만한 학구적 능력과 그 성실함에 손바닥 발바닥에 불꽃이 튀기도록 박수를 보내고 싶다.

비록 10년에 걸친 자료 수집이라 해도 이 책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저자가 태어나기도 전에 발생한 일이었다. 자신의 인생 경험이 연구에 별 보탬이 될 수 없다는 무력감은 둘째치고, 무심한 세월이 게눈 감추듯 먹어치운 몇 안 되는 생존자들의 기억이 띄엄띄엄 회상하는 과거를 경청하는 일은 말더듬증 같은 학습 장애나 언어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말을 받아적는 것만큼이나 큰 인내심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여기에 스탈린 자신의 노력으로 훼손되고 손실된 자료까지 더해지면, 베일에 싸인 스탈린의 성장 과정을 밝혀낸다는 것은 완성된 그림을 알지 못한 채 엎질러진 직소 퍼즐 조각만을 만지작거리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무지하게 난감한 상황이나 다름없다. 그나마 조각만이라도 모두 모여있으면 다행이지만, 행방은 둘째치고 존재조차 알 수 없는 조각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래도 연구는 결실을 보았고 『젊은 스탈린』은 완성되었다. 그것은 유실된 조각들이 조롱하듯 남겨놓은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을 것 같았던 조각판 위의 빈 곳을 문학적 소양으로 매끄럽게 메웠기에 가능했다.

한 사람의 전기는 충분히 객관적이고 공정하다고 할지라도 단순하게 자료만 나열한다고 (그렇다면 그것은 그저 연보일 뿐이다) 해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 무미건조하게 시체처럼 죽어 나자빠져 있는 자료들을 한데 엮은 다음 생명력을 불어넣어 누군가가 흥미진진하게 읽어볼 만한 한 권의 책으로, 즉 사실들을 그저 나열한 연대기에서 흡입력 있는 문학적인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전기 작가의 소임이라고 한다면, 몬티피오리는 스탈린의 성장 과정을 사실과 기록에 충실하게, 그리고 앞서 언급한 이런저런 이유들로 발생한 단편적 사실들 사이의 잃어버린 연결고리들을 문학적 소양으로 매끄럽게 이어붙였다는 점에서 훌륭하게 소임을 다했다.

다만, 이 책은 몬티피오리도 밝혔듯이 스탈린의 생애에서 정치, 이데올로기, 경제, 군사, 국제관계, 사적 영역의 모든 측면을 담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스탈린의 성장 과정에 대한 진짜 기록을 밝히면서 그의 영향권 속에 있었던 겉으로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은 정치적 • 사적 영역에 집중한 책이다. 그렇게 장단점이 명확한 책이기에 깊이는 있을망정 숲 전체를 보는 통찰력이나 통합적 조명은 조금 아쉬울 수도 있다. 이 부족한 부분은 스탈린 생애의 공적 삶에 대한 모든 것을 담아내려는 흔적이 역력한 로버트 서비스(Robert Service)의 스탈린 전기로 메울 수 있다(사실 한국에서 스탈린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 두 작가의 책 외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올랜도 파이지스(Orlando Figes)의 『속삭이는 사회(The Whisperers)』는 스탈린 시대 보통 사람들의 사적인 삶에 대한 호기심을 만족스럽게 충족시켜 줄 수 있을 것이다.

에덴동산의 사과처럼 강렬한 유혹을 발산하는 독기

제 『젊은 스탈린』 책에 대한 칭찬은 그만하고, 이 책이 만남을 주선해 준 젊은 스탈린에 대해 몇 마디 해볼까 한다. 사실 젊은 스탈린은 그의 사후 완성된 ‘사악한 독재자’라는 단순 명확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상당히 복잡한 사람이다. 복잡하다는 말은 그냥 ‘사악하다’라는 다소 세련되지 못한 평가가 부당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 나름의 독특한 매력이 있다는 뜻이다. 주근깨와 천연두 후유증으로 남은 얽은 자국, 그리고 몇 번의 사고 탓으로 돌릴 수 있는 약간 절룩이는 다리와 뻣뻣한 짝짝이 왼팔이라는 그의 특이한 외모는 제쳐놓고 (사실 스탈린은 자신에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평생 짊어지고 살았지만, 스탈린의 화려한(?) 여성 편력을 보면 그의 그런 외모가 본인의 생각과는 달리 실제 생활에서는 콤플렉스로 작용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의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성격만 놓고 봐도 그는 분명히 특출난 사람이었다. 산과 하늘에 대해서는 시적인 열정을 보여주었던 것과는 달리 사람에 대한 연민은 거의 없었던 스탈린은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하고 잔악무도한 짓거리를 서슴없이 행했다. 이처럼 지독하고 잔인한 면이 있었음에도, 그가 권력을 잡기 전부터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은 상당했다. 젊은 스탈린은 이렇다 할 명성도, 권력도, 돈도 없었음에도 혁명 활동을 처음 시작한 그루지야에서 이미 마피아 같은 무장 강도단을 이끌 정도로 충성스러운 추종자와 지지들을 모을 수 있었다. 스탈린은 전 세계 언론 머리기사로 보도될 정도의 은행 강도에 성공함으로써 지지자들을 끌어모으는 데만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조직하고 선동하여 과감하게 행동으로 나서게 하는 일에도 특출난 수완이 있음을 매우 거친 방법으로 증명했다. 위험천만한 상황도 무릅쓰고 때론 목숨까지 걸고 젊은 스탈린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그가 비록 복잡한 인물이었을지라도 한편으로는 현재의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력적인 인물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스탈린의 무엇이 주변 사람들을 회오리바람처럼 빨아들이게 하였을까. 스탈린의 무엇이 주변 사람들에게 그렇게도 매혹적이었을까.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그와 가까웠던 사람들 다수가 훗날 공포 시대에 닥칠 재앙을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을 보면 그것은 치명적인 독기였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금지된 과일임에도 따먹었을 수밖에 없었던 사과처럼 강렬한 유혹을 발산하는 독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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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2. 23.

[책 리뷰] 두려워서 말하지 못했고, 두려워서 듣지 못했다 ~ 속삭이는 사회(올랜도 파이지스)

The Whisperers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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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서 말하지 못했고, 두려워서 듣지 못했다

Original Title: The Whisperers: Private Life in Stalin's Russia by Orlando Figes by Orlando Figes

말하기는 가장 좋은 시절에도 위험할 수 있었으나, 대숙청 시기에는 누군가가 영원히 사라지는 데 분별없는 말 몇 마디면 충분했다. (『속삭이는 사회 1권』, p418)

어머니는 딸에게 노동수용소에서 겪은 일을 결코 말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너무 두려워서 말하지 못했고, 나는 너무 두려워서 묻지 못했다.”고 마리나는 회고한다. (『속삭이는 사회 2권』, p229)

숨 막히는 사회

선 이 책 『속삭이는 사회(The Whisperers: Private Life in Stalin's Russia by Orlando Figes)』 에 등장하는 놀랍고 충격적이며 한편으론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그들의 ‘삶’이 단지 나에겐 그저 극적인 ‘이야기’일뿐이라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쓸어내린다. 이런 나 자신이 가증스럽게 느껴지지만, 그들이 토해내듯 힘겹게 뱉어내는 ‘속삭이는 사회’를 듣고 있노라면 약간의 상상력만 발휘해도 지옥이나 다를 바 없는 끔찍한 삶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비록 내가 그들이 겪은 불행과 고통에 통탄해하고 비탄에 잠겨 그들이 겪은 모든 것에 대해 동정할지라도 한편으론 나 자신이 그런 불행의 시기에 태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 다행스럽게 여기는 것은 인지상정이라고 나의 파렴치한 양심은 변명한다.

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만약 내가 그 시대, 혹은 그와 비슷한 시대에 살고 있다면 지금의 내 양심과 도덕적 가치를 끝까지 견지할 수 있을까? 동시대인의 눈에는 무모한 행동으로 보일 수 있는, 하지만 훗날 누군가가 봤을 때는 공포정치의 압제와 부당함에 저항하고 굴복하지 않는 용감하고 꿋꿋한 나의 반항은 일찌감치 나를 총살장으로 인도하거나, 운이 좋으면 시베리아로 끌려가는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혹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든 아니면 단지 살아남으려는 방편으로 그런 것이든 내 양심과 도덕적 가치를 소비에트 이데올로기에 맞추어 적절한 타협점을 찾는다면 생존 가능성은 커질 것이다. 아무튼, 용감하게 시베리아로 끌려갔든 자신을 기만하며 공포정치에 순응했든 한 가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두려움, 의심, 거짓말, 배신이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 모두를 지배하는 숨 막히는 사회는 누구에게든 견디기 어려운 가혹한 삶이라는 것이다.

인민의 최우선순위는 무엇보다 ‘생존’이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일제강점기를 살아갔던 조선인을 독립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비난할 수 없는 것처럼, 반항하지 않은 ‘조용한 삶’을 살아간 소련인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들을 짓누른 공포와 정부, 그리고 이웃에 대한 두려움은 그들의 사소한 언행 하나하나에 미칠 정도로 삶을 압박했을 것이다, 어찌 보면 그것은 그들의 영혼과 육신에 하느님의 가르침보다 더 깊이 새겨진 행동 교훈이었을지도 모른다.

‘인민의 적’, ‘망가진 이력’, 무엇이 이것들을 유지시켰을까?

의 규칙과 이데올로기를 준수하는 한 사적 생활이 허용된 나치즘이나 파시즘 운동과는 달리 사적 생활과 공적 생활의 경계가 무너진 스탈린 치하의 공포정치에서는 분별없는 말 몇 마디면 그 누구라도 지금까지 영위하던 삶의 궤적에서, 그리고 그를 알던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서 조용히 사라지기에 충분했다. 집단통제체제의 상징이던 비좁은 공동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을 사소한 분쟁에 노출시키는 평범한 시기심에, 코딱지만 한 방 한 칸에 한 가족 이상이 사는 열악한 주거 환경에서 조금이라도 더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자 하는 간절함에, 혹은 선수를 치지 않으면 자신들이 고발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리고 얼마 간은 소비에트 이상에 봉사하고자 하는 시민적 의무감에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이웃과 친구, 심지어 가족과 친척까지도 ‘인민의 적’으로 고발했다. 소비에트가 선전하는 ‘인민의 적’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소비에트 선전을 믿는 사람들은 가족이 ‘인민의 적’으로 끌려가도 국가가 가족을 잡아간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으로 믿었으며, 설령 가족의 결백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인민의 적’을 체포하다 보면 간혹 실수로 체포되는 일도 있을 것이라고 정부를 두둔하며 가족의 체포마저 합리적으로 받아들였다. 한편, 소비에트 선전을 의심하는 사람이라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민의 적’의 존재를 믿는 척해야 했으며,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누군가를 고발해야만 했다. 반면에 소심한 사람들은 밤늦은 시간에 낯선 자동차가 집 앞에 주차하지 않기만을 바라면서도 잡혀갈 것에 대비하며 침대 옆에 미리 짐을 싸둔 채 뜬눈으로 밤을 보내야만 했다.

고발당한 자들은 총살당하지 않으면 거대한 ‘굴라크(gulag) 제국’의 일원으로서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의 가혹한 환경에서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다. 고발당한 자의 가족들은 가까운 곳에 있는 ‘인민의 적’을 고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당해 ‘굴라크 제국’의 일원이 되거나, ‘인민의 적’을 가족으로 둔 ‘망가진 이력’ 때문에 스탈린 사후 해빙의 시기에 복권이 진행될 때까지 사회적 차별을 감수해야 했다. ‘망가진 이력’을 가졌음에도 자신의 야심을 미처 저버릴 수 없는 사람은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힌 부모를 부정하거나 ‘망가진 이력’을 숨긴 채 소비에트 이데올로기에 헌신하는 충직한 시민으로 보이게끔 노력함으로써 생존과 함께 출세를 도모했다. 이들 중엔 볼셰비키 교육으로 세뇌당한 결과로, 혹은 국가가 선전하는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진심으로 믿었기에 스탈린 체제를 옹호한 사람들도 있었고, 생존을 넘어 개인적 야심을 이루고자 하는 노력의 하나로 그런 척한 사람들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수많은 사람이 스탈린 체제의 공포정치에 짓밟히고 억압당하고 기만당했음에도 스탈린 체제는 그가 죽기 전까지 그럴듯하게 잘 유지되었다. 무엇이 그러한 소비에트 사회를 유지하게 했을까. 봉건제도를 만들어놓고 농노들에게는 천국의 보상을 약속한 중세 교회처럼 현실의 궁핍과 고통이 사회주의 유토피아 건설에 대한 필수적인 희생이라고 설득당한 소련 사람들의 낭만적인 믿음과 이상적인 희망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체제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서 비롯한 수동적이고 순응주의적 태도 때문이었을까. 올랜도 파이지스는 후자에 비중을 두고 있지만, 스탈린 체제를 경험했던 사람 중 일부는 고르바초프 개혁 이후에도 (우리 중의 누군가 박정희 시대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여전히 스탈린을 숭배하고 그 시절을 향수에 젖어 회상했다는 기록을 보면 전자도 전자 역시 무시할 수만은 없다.

인지부조화적인 체제가 양산한 ‘도덕의 진공’

랜도 파이지스의 『속삭이는 사회』는 스탈린 체제의 공포정치가 개인과 가족생활에 끼친 영향을 깊이 탐구하는 최초의 책으로써 불신, 배신, 고발, 악의, 중상이 판을 치고 소비에트가 선전하는 사회주의 유토피아 이상과는 터무니없이 동떨어진 현실이 보여준 모순 속에서 어떻게 그들이 최소한의 인간성을 유지한 채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그 답을 진지하게 파헤치는 본격적인 연구다. 그래서 한 개인의 도덕적 영역은 이 책의 주요 무대다. 체제가 제시한 소비에트 유토피아를 믿었든 안 믿었든 한 개인으로서 생존하려면 보편적 양심과 도덕적 가치는 기회주의적 타협에 맞추어 적절하게 변형될 수밖에 없었으며, 생존에만 만족하지 않고 개인적 야심을 이루고자 소비에트 시민으로 거듭나고 출세하고 싶다면 그 도덕적 변형을 기형적으로 과도하게 일그러트려야 했던 사회, 즉 올랜도 파이지스(Orlando Figes)가 언급한 ‘도덕의 진공 상태’가 바로 스탈린 체제가 보통 사람들에게 선물한 무겁고 냉혹한 짐이었다. 생존자들의 구술 위주로 진행된 이 연구에는 일기와 편지 등이 포함된 가족문서고 자료도 활용되었으며, 이를 통해 독자는 그들이 ‘도덕의 진공 상태’에서 어떻게 자신의 도덕적 가치를 변형시키고 억압함으로써 공포정치에 적응하고 생존에 성공했는지를 독자가 지닌 나름의 가치 판단과 경험에 비추어 고려해볼 수 있다. 이 연구가 진행되던 2000년대 초반에도 ‘인민의 적’ 생존자 가족들은 여전히 두려움 가득한 시선으로 과거를 회상했으며, 일부는 이 연구를 계기로 다시 떠올리게 된 과거가 끌어온 두려움과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가족문서고를 폐쇄해야 했을 정도로 그 시대가 남긴 두려움, ‘인민의 적’과 그 가족들로 대물림된 ‘정신적 외상’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오죽했으면 내가 이 글 서두에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까.

마치면서...

무튼, 이 책은 체제를 생산하고 그것을 유지하려는 권력중심적인 입장에서 다룬 역사가 아니라 그 체제가 발산하는 절대적 영향력 아래에서 어떻게든 구조에 적응하려고 발버둥 치는 보통 사람들의 역사를 세밀하게 다뤘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 있고 흥미로운 책이다. 스탈린 체제가 제시하는 방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갈지자로 걷다 조용히 사라진 사람도 있고, 대놓고 체제를 비판하다 비명횡사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봉건시대의 농민들처럼 참고 견디는 수동적이고 운명에 순응하는 미덕을 견지한 덕분에 살아남았다. 스탈린 치하에서도 그랬고, 같은 시기에 벌어진 파시즘과 나치즘 운동 밑에서도, 그리고 그 이후 마오쩌둥의 또 다른 공포정치 속에서도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든 결국 살아남았다.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인고의 인고를 거듭하며 적응방산(adaptive radiation)한 끝에 살아남은 보통 사람들의 바퀴벌레 같은 생존력은 찬탄할 만하지만, 단지 두려움 때문에 자신들에게 가혹한 시련의 삶을 제공한 체제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무언가 찜찜하고 개운치 않은 떨떠름한 뒤끝을 남긴다. 물론 나라고 그러한 상황에서 용감하게 저항의 목소리를 높일 수는 없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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