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도둑(The Book Thief) | 당신에게 책과 글쓰기는?
무엇이 나를 이 책을 선택하게 했을까?
책등에 수더분하게 박힌 물이 살짝 빠진 파란색 바탕에 빛을 잃은 금색 제목이 눈에 띄었나? 아니면 책 위에 올라타 자기 키보다 긴 낫을 들고 소녀를 야릇한 표정으로 내다보고 있는 사신이 알록달록 그려져 있는 표지가 인상적이었나? 아니면 지나치게 두껍지도 않고 지나치게 얕지도 않은 적당한 두께가 먹음직스러웠나? 아니다. 모두 아니다. 이 모든 그럴듯한 이유는 일단 일을 저지르고 난 후에 어떻게든 합리화시키는 데 필요 이상으로 집요한 사람의 구차한 본성과 구질구질한 말주변을 설명하는 것밖에는 안 된다.
솔직히 말하면, 아마 나도 어느 정도는 ‘책도둑’이기 때문에 동병상련 비슷한 감정에 이끌려 호기심 반, 자책 반으로 이 책을 선택했다는 것이 정답에 가장 가까운 대답일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이 책을 도서관 책장에서 조심스럽게 끄집어낼 때 처음 도둑질하는 소년처럼 내 심장은 시끄럽게 뛰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책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도서관에서 객사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런 지극히 개인적인 사연은 제쳐두고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제목,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작가의 책 앞에서 머뭇머뭇 망설이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도서관에서 새로운 뭔가를 선택하는 것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 새로운 문장 등의 새로운 경험을 누릴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설레면서도, 한편으론 내 선택에 대한 실망과 금 같은 시간을 낭비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약간은 두렵기도 하다. 마음 한쪽에선 삼 일 굶주린 사람이 눈앞의 빵을 노려보는 것처럼 일단 먹고 보라고 심히 보채기도 하고, 또 다른 한쪽에선 이 추운 겨울날 수고스러운 발걸음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다면 좀 더 신중해지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용호상박의 접전이 따로 없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문고본보다 책값이 비싼 양장본은 확실히 후회 없는 선택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 볼품없는 작품을 사려고 (문고본보다) 비싼 값을 기꺼이 헌납할 독자는 그리 많지 않으니까 말이다.
이번에도 내 경험과 충동과 직감의 삼위일체는 완벽하게 적중했다.
그들의 이야기, 이야기 뒤의 이야기, 이야기 안의 이야기
마커스 주삭(Markus Zusak)의 『책도둑(The Book Thief)』은 2차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 뮌헨 외곽의 작은 도시 몰힝의 이야기다. 몰힝의 힘멜 거리 33번지에 사는 후버만 가족의 이야기다. 후버만 가족에 입양된 빼빼 마른 10대 소녀이자 옹골찬 책도둑인 리젤 메밍거의 이야기다. 리젤 메밍거가 큰 주인공이라면, 작은 주인공들로는 은(銀) 같은 눈을 따뜻하게 반짝이며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칠장이이자 리젤의 양아버지이기도 한 한스 후버만, 구겨놓은 판지 같은 얼굴에서 쉴 새 없이 욕을 퍼붓는 리젤의 양어머니 로자 후버만, 1936년 베를린 올림픽 400미터 계주 금메달리스트인 제시 오언스를 선망한 나머지 온몸에 검은 칠을 하고 (참고로 제시 오언스는 흑인) 운동장을 뜀박질한 몰힝의 전설이자 레몬 빛깔의 금발에 안전한 파란 눈을 가진 온전한 아리아인이면서도 리젤의 도둑질 동료이기도 한, 그럼으로써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약간은 정신이 나간 루디 스타이너가 있다. 그리고 후버만 가족의 위험한 유대인 손님이자 리젤에게 책 두 권을 선물하는 깃털 같은 머리카락을 가진 막스 판덴부르크가 있다. 아, 리젤의 책 도둑질이 본궤도로 올라서는데 은밀하게 협력한 서재를 방황하는 유령 같은 존재이자 리젤의 신랄한 표현에 의하면 청승맞은 여자인 일자 헤르만을 빼먹었네.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 초반에 일어나는 그들의 이야기, 이야기 뒤의 이야기, 이야기 안의 이야기에는 재의 맛이 나는 전쟁 이야기도 있고, 달콤 쌉싸름한 맛이 나는 가족 이야기도 있고, 곰팡이 맛이 나는 책 이야기도 있고, 비참한 맛이 나는 유대인 이야기도 있고, 애틋한 맛이 나는 철부지들의 사랑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전쟁의 기근 속에서 비쩍 말라가는 육체만큼이나 메말라가는 영혼이 말(言)을 배우고 책을 읽음으로써 살찌워지는 책도둑 리젤이 있다.
이 모든 추하면서도 아름다운 사람 이야기는 나의 심장을 힘껏 디딘 채 좌심방과 우심방 사이를 다리밟기하듯 오고 가기를 쉼 없이 반복한다. 소의 발길질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묵직한 이야기에 밭갈이 된 것처럼 한껏 짓밟혀진 나의 노쇠한 심장은 몸 구석구석에 피를 공급해 주는 본연의 역할을 잠시 망각한 채 애수와 격정으로 끓어 넘치는 눈물을 독기를 빼내듯 몸 밖으로 펌프질한다. 까딱하다간 저세상으로 직행할 수 있었던 아찔한 순간이었지만, 무엇보다 묘지를 편안하게 여기는 존재이자 모든 사람의 최후의 진정한 친구일 수도 있는 존재이자 피폭의 혼돈 속에서 쓰레기통에 처박힌 리젤 메밍거의 책을 주운 존재인 사신이 정신을 차리라는 듯 온몸을 훑고 지나간 덕분에 겨우 정신이 든다.
아무튼, 내 심장을 두들겨 팬 이야기가 다 소화되었을 때 나의 눈은 이슬을 머금은 어둠처럼 음습하게 젖어있었고, 나의 마음은 습기 가득 한 우리 집 화장실처럼 꺼무죽죽한 곰팡이가 만개하고 있었으며, 나의 입은 어찌할 줄 모르는 바보처럼 헤벌쭉 벌어진 채 한 방구리 고인 침을 무단 방류하기 직전이었고, 나의 뇌는 이 모든 통제 불능과도 같은 상황을 윤석열 정부처럼 대책 없이 방치하고 있었다. 내가 싸구려 감상에 젖어 과장된 칭찬을 하고 있다고 여기는가? 오, 예수여, 마리아여, 요셉이여! 당신이 만약에,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이 책을 읽고 나면 그런 생각이 완전히 헛짚은 것이라는 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오늘의 섣부른 판단을 인생 최고의 실수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
후벼파듯 상상력을 부추기는 필력
이것이 다는 아니다. 소설은 소재와 그 소재로 빚어지는 독창적이고 상상력 풍만한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개인적으로 문장을 읽고 음미하는 맛을 비중 있게 따지는 내게 있어 『책도둑(The Book Thief)』의 일곱 빛깔 무지개처럼 다채로운 묘사, 시처럼 운치 있고, 스포츠처럼 역동적이고, 철학적인 뉘앙스도 살짝 풍기면서도 시치미 떼듯 간결함의 미덕을 유지하는 문체는 마치 검은색 잉크를 뒤집어쓴 지렁이가 눈앞에서 꿈틀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할 정도로 생기가 넘친다. 단순하고 소박한 문체가 주를 이루는 장르소설을 주로 읽던 독자가 『책도둑』을 읽게 되면 (절뚝거릴지라도 그럭저럭 페이지를 따라갈 수 있는 독해력과 상상력을 갖췄다면) 흑백영화만 보다가 처음으로 천연색 영화를 보는 관객처럼 신비로움과 오묘함에 질식해 죽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전 지식 없이 선택한 책이니만큼 큰 기대 없이 첫 페이지를 열어젖혔는데 기대 이상의, 그리고 훔쳐서라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유려한 문장력은 복권에라도 당첨된 듯한 감격과 환호를 충격적으로 전해준 탓에 마치 따귀라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 정도였다. 귀여운 나쁜 소녀 리젤 메밍거를 가운데 두고 사방팔방으로 흘러넘치는 멋진 소우주를 요리해 낸 말과 단어들의 집합이 한 땀 한 땀 가슴에 꿰매지는 느낌 좋은 이야기라고 할까나?
『책도둑』 같은 소설이야말로 영원을 두고 수십 번 읽고 싶은 그런 좋은 소설이자 한편으론 큰마음 먹고 구매한 비싼 약을 매일매일 조금씩 챙겨 먹듯 야금야금 아껴 읽고 싶은 그런 소설이기도 하다. 가히 전 세계 1,600만 명이 선택할 만한 작품이다.
지금은 한 번 더 읽고 싶은 욕정을 억누르고 간신히 리뷰를 쓰고 있을 정도다.
우리에게 책과 글쓰기는 무엇일까?
『책도둑』처럼 흡족한 문체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휘갈겨 쓰는 검은 줄기 사이사이에서 형형색색의 조화를 이루는 보석 같은 문장들이 뚝뚝 떨어지는 작가들의 필력이 참으로 부럽다. ‘빈약한 어휘력’이라는 명확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머릿속에서 무수한 말과 글들이 번개처럼 번득번득 떠오르는 나이지만, 이것들이 태어날 때와는 달리 시냅스와 신경을 거쳐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 관절에 도착할 때쯤 되면 도중에 무슨 우여곡절이라도 있었는지 과달카날 전투에 패한 일본 군대처럼 살아남은 녀석들이 별로 없다. 전선이 길어지면 전압강하가 생기는 것처럼 머리에서 번득인 말과 단어들이 손가락까지 전해지는 그 짧은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단말마로 횡사하는 경우가 일상다반사다.
그 시대 사람 대부분이 음식에 굶주렸듯 책에 굶주린 리젤은 절규하듯 책을 멀리하는 한국인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절규하듯 책에 매달린다. 단어를 들이마시고 숨으로 단어를 내뱉는 경지에서 목소리로 말과 단어를 연주하는 경지까지 이른 리젤은 단어를 삼키고 훔치고 숨기는 것으로도 모자랐던지 어느 날 문득 매일 밤 자기 삶 열 페이지를 완성하려고 결심한다. 생각할 것이 아주 많았고, 아주 많은 것들이 빠져나갈 위험에 처해 있다고 판단한 리젤은 자신만의 이야기로 자신만의 글쓰기를 시작한 것이다. 어쩌다 떠오른 생각이 과거처럼, 망각처럼 산산이 흩어지고 부서지는 것이 못마땅하고 괘씸해 글을 쓰려고 하는 작금의 나처럼 말이다.
리젤 메밍거에게 책과 글쓰기는 전쟁이라는 인간의 추악함 속에서 병들어가는 불행한 영혼에게 살아야 하는 의지를 질풍과 같은 바람처럼 불러일으키는 인간만의 품위 있는 미덕 같은 것이었으리라. 불쌍한 영혼이 번민과 외로움과 불안과 생계의 고단함 속에서 속절없이 방전되다가 삶에 향한 의지를 영영 놓아버릴 것이 두려워 이렇게 잡글을 쓰는 나처럼 말이다.
어찌 되었든, 난 시간이 절뚝절뚝 흘러가고 책장이 훌렁훌렁 넘겨지고 단어가 꾸물꾸물 기어가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 마커스 주삭의 『책도둑』처럼. 오, 예수여, 마리아여, 요셉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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