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섬 악마 | 에도가와 란포 | ‘추리소설 + 모험소설 + 공포소설 + 괴기소설’
‘동서 미스터리 북스’ 시리즈 중 베스트 30
책과 친해지기로 마음을 다잡고 도서관을 제집처럼 드나들기 시작했던 15여 년 전, 솜사탕 실처럼 끊어지기 쉬웠던 독서와의 인연을 거미줄처럼 질기게 다져 준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책은 바로 DMB(동서 미스터리 북스) 시리즈다. 독서 초심자는 작심삼일의 덫에 빠지기 쉬운 ‘XX 추천 도서’ 같은 다소 난도가 있는 유명 추천 목록을 무턱대고 읽는 것보단 일단 ‘독서’라는 행위에 흥미를 붙이고 안착하는 것이 중요한데, 경험상 (남자에겐) 추리소설은 독서 초심자에게 추천하고 싶은 최고의 독서 마약이다. 도서관 출입 초창기에 한국 출판계에선 전무후무한 추리소설 전집인 ‘동서 미스터리 북스‘ 시리즈를 야금야금 먹어 치우면서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으로 시작되는 명언의 의미를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튼, ‘동서 미스터리 북스’와 남다른 인연이 있었던 내가 총 300권의 DMB 시리즈 중 독자들의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30권의 베스트 작품이 따로 있다고 해서 목록을 살펴봤는데, 이 중에서 아직 읽지 않은 몇 권의 작품 중 오늘은 에도가와 란포(江戸川 乱歩)의 『외딴섬 악마(孤島の鬼)』가 나의 좁은 시야 속으로 함박눈처럼 푸지게 들어왔다.
이 작품이 유난히 띌 수밖에 없는 것이 추리 작가의 등용문이라 할 수 있는 ‘에도가와 란포 상’의 명성 때문이기도 하고, 일본 추리소설(특히 고전)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 놓칠 수 없는 거장의 작품이기도 하고, 『음울한 짐승』은 대출했던 기록이 있었던 반면에 요 작품은 없었다는 것이 이상하기도 하고, 바로 앞서 『책도둑』, 『단테 클럽』 같은 시대물을 재밌게 읽은 영향 때문인지 이번에도 왠지 모르게 시대물이 당기기도 하고, 제목에서 물씬 풍기는 괴기스러움도 무심히 넘길 수가 없는 등등 오합지졸 같은 이유가 시답잖게 단합한 덕분에 이번엔 『외딴섬 악마』를 펼쳐 들게 되었다.
‘추리소설 + 모험소설 + 공포소설 + 괴기소설’
자, 그렇다면 『외딴섬 악마』는 어떤 느낌의, 혹은 어떻게 읽히는 장르소설인가? 라고, 다짜고짜 묻는다면 나 역시 다짜고짜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밖에 없겠다.
“실로 무서운 일이야. 전례가 없는 극악무도한 일이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메스꺼워. 인류의 적이야.”
이 대사는 소설에서 아마추어 탐정에 갈씬거렸던 미야마기 고키치가 사건에 대해 짧게 품평하면서 했던 말을 다짜고짜 인용한 것이다.
탐정 미야마기 고키치의 밑도 끝도 없는 가탄은 알싸한 자극에 굶주린 독자의 입맛을 신랄하게 돋우고도 남는데, 이후 펼쳐지는 이야기를 간략하게 품평해 본다면 ‘추리소설 + 모험소설 + 공포소설 + 괴기소설’ 정도를 예상하면 얼추 들어맞을 것 같다. ‘괴기소설’이라고 해서 있을법하지 않은 무시무시한 괴물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고 충분히 있을법한, 다시 말하면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시즌4(American Horror Story: Freak Show)」 정도를 상상하면 쉽게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 미노우라는 경찰이 미노우라의 약혼녀 기자키 하쓰요 살인사건을 제대로 수사하지 못한 채 미궁 속으로 빠트리자, 평소 알고 지내던 아마추어 탐정 미야마기 고키치에게 사건을 의뢰하게 되는데, 미야마기는 어찌 된 일인지 (앞서 인용한 말에서 알 수 있듯) 단박에 사건의 진상을 알아차린다(미야마기가 뜸도 들이지 않고 한눈에 사건의 진상을 파악한 이유는 그가 김전일 같은 천재라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의 기구한 삶에서 비롯된 것인데, 자세한 내막은 마지막에 가서야 알려준다). 하지만, 미야마기는 소설 속 탐정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의뢰인에게 바로바로 진상을 알려주지 않고, 사건이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변덕스럽게 변죽을 울리는데, 그러다 그조차 의뢰인 미노우라가 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살해당한다. 미야마기는 벌건 대낮에 인파가 우글우글한 백사장 한복판에서 보기 좋게 살해당하는데, 미스터리를 풀어야 할 탐정이 오히려 미스터리 한 뭉텅이를 남겨놓고 죽었으니, 명색이 탐정으로선 참으로 자존심 상하는 죽음이다.
어찌 되었든, 『외딴섬 악마』는 본격 추리소설에 어울릴만한 사건들을 이야기 초반 곳곳에 등장시켜 독자의 도통 쓸 일이 없는 추리 욕구를 잔뜩 흥분시켜 놓는데, 작품 초반은 이 사건들을 물고 늘어지는 재미로 쏠쏠히 시간을 보낼 수 있겠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무섭고, 극악무도하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메스꺼운’ 사건의 진상을 쫓아 외딴섬으로 훌쩍 모험을 떠나는 후반부야말로 알짜배기 클라이맥스인데, 여기서부터 『외딴섬 악마』로만 맛볼 수 있는 에로틱 공포와 엽기적 망상이 짝자꿍 된 환상적이고 기묘한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이야기했다간 스포일러 되기에 십상이라 간단하게 마무리하면, 드라마 「태국 동굴 구조작전(Thai Cave Rescue, 2022)」과 비슷한 환경에서 죽음을 앞둔 동성애자의 비장한 최후를 상상해 보면 될 것이다.
이렇게 한 가지 작품에서 다양한 장르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외딴섬 악마』만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그만큼 한 장르를 파고드는 깊이는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책장을 덮고 나면 아주 작은 미련조차 남기지 않고 바로 일상이라는 경쟁 속으로 떠밀어주는 뒤탈 없는 깔끔한 소설이라 할 수 있겠다.
꽉 찬 구성과 대담한 장면 전환
사실 『외딴섬 악마』의 엽기적 기질은 주인공 미노우라부터 시작된다. 왜냐하면 애인이 살해당했다고 해서 애인을 화장하고 남은 재를 훔쳐먹으며 복수를 다짐하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엽기적인 행위에 운명의 여신도 감탄했는지 미노우라가 사건을 해결한답시고 들쑤시는 곳마다 여봐란듯이 살인사건이 일어나게 되는데, 결론적으로 주인공은 다섯 건의 살인에 모두 간접적이나마 살인 동기를 제공하는 보기 드문 엽기적 아우라를 방증한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야말로 사건의 본질보다 더 무서운 일이지 않을 수가 없으며 전례가 없는 극악무도한 일이며 생각만 해도 가슴이 메스꺼워진다. 여기저기에 산타클로스의 선물처럼 살인사건을 흘리고 다니는 미노우라말로 공공의 적이다.
그렇다고 활명수를 준비해야 할 말끔, 즉 구토를 유발하는 심각하게 수위 높은 잔혹 활극이 대놓고 펼쳐지는 것은 아니니 안심하고 즐기길 바란다. 『외딴섬 악마』에서 묘사되는 엽기적 행각은 작품이 처음으로 발표될 당시엔 분명히 충격적인 이야기였겠지만, 다양한 매체를 통해 다양한 엽기 행각에 익숙해진 요즘 사람에겐 그다지 별스러운 일도 아니다. 현란한 시각적인 자극에 익숙해진 나머지 공상력이 빈곤해진 독자라면 퉁명스러운 마음으로 책장을 덮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 이야기, 물건 등등 작품에 등장하는 것 중 소홀히 흘러버리는 것이 없는 꽉 찬 구성에 그로테스크한 등장인물들과 한 장르에 머무르지 않는 대담한 장면 전환은 지금 읽어도 그 재미는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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