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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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의 증명 | 아쉬운 번역에도 빛나는 흡입력

야성의 증명 | 모리무라 세이치 | 아쉬운 번역에도 빛나는 흡입력

野性の証明 책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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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명 시리즈’ 3부작의 피날레

모리무라 세이치(森村誠一)의 『고층의 사각지대(高層の死角)』를 읽고 난 직후 느낀 감개가 ‘아, 이 작가의 다른 작품도 모조리 읽어버리고 싶다!’라는 독서 욕구를 폭발한 후지산에서 솟구치는 용암만큼 뜨겁고 장대하게 불러일으키지는 않았지만, 혹은 작품이 남긴 잔상과 여운으로 발효된 기묘한 상상들이 그날 밤 꿈자리를 독차지할 정도로 매우 무량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모리무라 세이치의 다른 작품은 어떨까?’ 하는 기대감을 ‘모리무라 세이치의 다른 작품은 별 볼 일 없겠지’하는 체념이 압살할 정도로 실망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기대와 ‘어떨지’ 하면 불안감이라는 미적지근한 태도로 ‘증명 시리즈’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인 『야성의 증명(野性の証明)』을 읽었다. 맛도 제대로 보지 않고, 모양만으로 품평하는 듯한 나의 시건방진 태도가 작가의 처지에선 불쾌하고 불성실한 독자로 보이겠지만, 내 마음이 그렇게 움직이는 것을 난들 어찌하나.

참고로 ‘증명 시리즈’ 3부작의 출판 순서는 『인간의 증명(人間の証明, 1976)』, 『청춘의 증명(青春の証明, 1977)』, 『야성의 증명(1977)』이다. 가능하면 시리즈는 순서대로 읽는 것을 선호하는 나로서는 『인간의 증명』을 먼저 읽는 것이 순리겠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자주 이용하는 전자도서관에 『야성의 증명』이 후지산처럼 광휘를 발휘하고 있었기에 다른 것 생각할 겨를 없이 바로 탐독에 돌입했는데, 여기서 ‘일독’이 아닌 ‘탐독’이란 표현을 쓴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 『야성의 증명』은 기대보다 꽤 재미나게 읽혔다. 한편으론 세 작품 중 모리무라 세이치의 역량이 찬란하게 발휘된 작품이라고 하는 『인간의 증명』은 맛있는 음식을 아껴 먹듯 나중에 읽어도 될 것이다.

영화 「야성의 증명(Never Give Up, 1978」의 한 장면
<영화 「야성의 증명(Never Give Up, 1978」의 한 장면 >

아쉬운 번역, 그럼에도 흡입력을 잃지 않은 작품

그렇다고 작품의 모든 면이 만족스럽다는 의미는 아니다. 일단 가장 큰 흠은 번역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것. 그래서 문장과 문장을 흩고 지나가는 시선이 껄끄럽고, 그로 인해 활발하게 활동해야 할 좌뇌는 조잡하다고 인지하는 문장력을 조잡하지 않게 짜맞추려는 힘겨운 노력으로 인해 과부하에 걸리기 일쑤다. (이렇게 얼추 짜맞춘 결과) 문장력이 작품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나 작품이 다루는 주제만큼이나 삭막하고 황폐한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볼 땐 번역이 제대로 되었다면 하드보일드 스타일 성향의 개성 있는 문체로 비평될 수준은 될 성싶을 정도로 박력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내가 읽은 ‘동서문화사’ 출판사 번역본보다 최근에 번역된 ‘깊은숲’ 출판사 번역본을 권장하고 싶다.

그다음은 마지막 책장을 덮었을 때쯤에야 깨우칠 법한 작가의 의도, 그리고 그 의도를 전달하려는 전체적 구상은 꽤 박진감 있었고,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논점 역시 지금 시대에도 퇴색되지 않을 정도로 보편성이 살아 있다. 하지만, 그것을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데 있어 세밀함이 부족하다. 쉽게 말해 요즘 잘나가는 추리 소설 작가의 작품들처럼 꼼꼼하지 못하다고나 할까나?

제아무리 잘나가는 작가의 소설이라도 미흡한, 혹은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은 있기 마련이고, 이러한 것들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된다거나, 작가가 의도한 주제 의식을 해치거나 곡해시키지만 않는다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는데 『야성의 증명』이 그러하다. 고로 나의 불만 아닌 불만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제넘은 사견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첫 페이지를 열어보면 알겠지만,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읽을 수 있는 그런 속도감 있는 통쾌한 소설이다.

광기는 무엇으로 증명되는가?

『야성의 증명』의 시작은 무시무시하다. 마치다 고(町田康)의 『살인의 고백(告白)』(‘가와치 10인 살해사건(河内十人斬り)’이라는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쓴 소설)을 떠올리게 하는 대량 학살 사건으로 시작하기 때문인데, 그것도 한술 더 떠 10인이 아닌 13명의 마을 주민이 도끼로 장작 패듯 참혹하게 살해된다. 이 악마의 유혹 같은 잔혹하고도 흥미로운 첫술을 뜨게 되면, 다음 이야기를 안 보고는 배길 수가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알고도 당하는 사기 같은 미끼다.

그런데 이런 가십거리 같은 시작은 학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가 드라마 「벌죄(罚罪)」에서 자오 가문이 창우시를 장악한 것처럼 오바 가문이 장악한 하시로(羽代)시의 범죄와 맞서면서 전개될 다사다망한 이야기에 비하면 주간지 표지 같은 원색적인 광고 수준일 뿐이다. 그 ‘다사다망한 이야기’엔 자신들이 집요하게 쫓아다니던 학살 사건 용의자를 다른 지역 경찰에 빼앗길 우려가 있자 경찰이 용의자를 지켜주기 위해 고생을 사서 하는 착잡한 코미디도 있고, 학살 사건의 용의자가 한 도시를 장악한 거대한 범죄 조직에 맞서 사건을 파헤쳐 나가는 서스펜스도 (요즘의 잘 쓰인 추리 소설에 비하면 다소 엉성하지만) 나쁘지 않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재미를 선사하는 정도지 ‘충격’을 운운할 정도는 아니다. 진짜 충격적인 전개는 따로 있다. 그것은 학살 사건에서 공공연하게 드러난 용의자의 광기를 증명하기 위해 시도한, 학살자의 광기만큼이나 광기가 번득이는 방법이다. 이것은 나치가 홀로코스트를 저지른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그 증거가 없으니, 나치보고 다시 한번 홀로코스트를 재현해 보라는 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참말로 무시무시한 ‘증명’이다.

우린 이러한 욕망을 삐뚤어진 악성이라고 봐야 할까?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 모든 이야기를 굶주린 개가 밥그릇을 덮치듯 허겁지겁 먹어온 우리의 호기심을 가장한 욕망은 악성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광기를 증명하기 위해 광기를 부추기는 이 소름 끼치는 상황이야말로 『야성의 증명』이 남긴 불후의 증명이다.

GPT 4o 제공 이미지
<GPT 4o 제공>

야성의 증명? 광기의 증명?

작가 모리무라 세이치는 인간이란 본래 야성적인 동물이라고 주장하면서, 인간의 야성은 소멸하지 않고 문명의 사육으로 둔화하거나 억제되었을 뿐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평화스럽게 여겨지는 세상일지라도 야성이 조직적으로 훈련받고 조장되어 살인마로 사육되고 있는데, 바로 인간 병기인 군인들이 그러하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사람들을 그 야성을 드러내지 않고는 못 견디는 환경에 몰아넣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스라엘 • 하마스, 우크라이나 • 러시아 등 세계 곳곳에서 진행 중인 전쟁에선 문명에 굴복한 것 같았던 인간의 야성이 ‘애국’과 ‘용기’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버젓이 활개 치고 있다. 이것을 작가는 야성을 봉쇄당한 사람들의 비극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지금도 인간의 야성은 시시각각 증명되고 있는 셈이다.

아쉬운 점은 작품이 인지하는 야성의 의미가 ‘광기, 폭력’이라는 협소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폭력은 인간 본성이라는 전근대적인 사고관이 밑그림처럼 작동하고 있다. 사실 1970년대만 해도 폭력성을 인간의 본성 중 하나로 인정하던 시절이다. 진화심리학 연구가 더 활발해진 후에야 호모 사피엔스의 진화론적 발전사에서 ‘폭력’은 인간 본성이라기보다는 본성이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을 실현하는 수단에 가까우며 실제로 ‘폭력’보다 ‘협력’, ‘이타심’ 같은 긍정적 요소가 호모 사피엔스의 삶에 더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새로운 이해를 얻게 되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이 암묵적으로 폭력을 사람의 본성으로 인정한다. 왜냐하면,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할 때 폭력만큼 빠르고 떠오르는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처럼 법치가 확립되기 이전 사회에선 폭력이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수단일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우리는 타인과 갈등을 겪거나 마찰을 빚을 때 대화를 시도하기보단 주먹이 먼저 나가려고 하는 욱하는 상황을 자주 경험하게 된다.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려고 하는 것은 인류 진화사에서 언어가 매우 뒤늦게 발견된 것임을 고려하면 당연한 상황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야성과 광기를 동일시한다면, 그래서 우리 조상들이 하루하루를 광기에 휩싸여 살았더라면, 호모 사피엔스는 진즉에 멸종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모리무라 세이치는 ‘야성 ≒ 광기’라는 단순한 등식을 기준으로 『야성의 증명』을 풀어나갔다. 완전히 헛다리를 짚은 것은 아니지만, 야성을 현대인인 지니고 있으면 안 될 부정적인 뭔가로 정의 내리려는 행위에서 오늘의 인류가 (경멸의 의미가 담겨 있는) 야만인의 연장선에 있음을 부정하는 오만함과 우월함이 후지산처럼 명확히 보이는 듯해 조금은 찝찝하다. 그래서 내가 볼 땐 책 제목은 ‘야성의 증명’이 아니라 ‘광기의 증명’이 더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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