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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12일 일요일

[책 리뷰] 먼뎃불빛 같은 추억 속에 잠긴 비운의 사랑 ~ 백발마녀전(양우생)

White Haired Witch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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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뎃불빛 같은 추억 속에 잠긴 비운의 사랑

Original Title: 白髮魔女傳 by 梁羽生
옥나찰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절세의 용모를 지니고 태어난 몸이었다. 그리고 자기의 미모를 가장 사랑하고 아꼈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소녀가 백발의 여인으로 변하고 만 것이었다. 얼굴이 쭈글쭈글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백발 노파가 된 것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이 당한 괴로움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그저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다. (백발마녀전(白髮魔女傳) 중에서)

오래간만에 무협 소설을 찾은 변변치 않은 이유

릿속이 실타래가 엉킨 것처럼 잡다한 상념과 고민으로 복잡하게 꼬여 있을 때,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을 때, 지속해서 책을 읽는다는 것에 회의를 느끼거나 독서 자체에 염증을 느낄 때, 이럴 때 나는 무협 소설을 찾는다. 재충전 안 되는 일회용 건전지가 하릴없이 방전되는 것처럼 남은 삶의 하루하루가 무기력하게 소모되는 나의 삶에서 번뇌와 자책감에 빠지는 것마저 때론 사치로 느껴질 때, 무협 소설은 이 모든 상념과 번뇌에서 잠시라도 벗어나는 해방감을 만끽하게 해준다. 삶의 중압감으로 빈대떡처럼 납작하게 짓눌려 있었던 꿈을 풍선처럼 다시 부풀어 오르게 하고, 냉혹한 현실주의로 기가 팍 죽어 있던 공상의 금빛 날개를 다시금 펼치게 하는 무림의 세계는 엄연히 비현실적이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매혹적이다. 마음과 머릿속에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던 번뇌의 실타래를 한올 한올 풀어주는 시원스럽고 통쾌한 무공 대결, 부족한 용기와 타고난 소심함으로 포효해내지 못했던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울분을 삭여주는 의협심이 활활 타오르는 크고 작은 영웅들의 이야기는 감개무량하다. 여기에 난독증으로 고생하는 사람, 책만 보면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사람, 아니면 나처럼 즐겨 책을 읽던 사람 등 책과 친하고 친하지 않고에 상관없이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든 이에게 폭풍 같은 흡입력을 발휘하는 조악하면서도 단순하고 명확하고 간결한 문체도 무겁고 심란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주는 데 한몫한다. 그렇다고 무협/판타지 소설이 독서 세계의 주요 장르가 되어서는 아니 되지만, 앞서 거론한 몇 가지 이유와 기타 이런저런 이유로 가끔은 기분 전환 삼아 빠져들 만하다. 그래서 찾은 작품이 영화로도 유명한 양우생(梁羽生)의 무협 소설 「백발마녀전(白髮魔女傳)」이다. 한국에서는 『여도 옥나찰(女盜 玉羅刹_』이란 제목으로 소개되었지만, 중국어 위키백과를 찾아보니 ‘백발마녀전’이 원제다.

내가 만난 최고의 女고수이자 최고의 女영웅

금까지 내가 읽어본 무협 소설이라 해봤자 김용(金庸)과 고룡(古龍)의 몇몇 작품들로 한정되지만, 사실 무협 소설 중에서 굳이 찾아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내 생각으론 무협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김용을 제외하면, 고룡, 양우생, 와룡생(臥龍生) 정도 언급하고 싶을 뿐이다. 보통 무협 소설 한 작품의 분량이 일반 소설보다 훨씬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앞에 거론한 작가들의 작품을 고루고루 돌려 읽는다면 평생 우려먹을 수 있으므로 기타 무협 소설을 읽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 낭비다.

그런데 지금까지 읽어본 무협 소설의 주인공들은 전부 다 남자 영웅이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女영웅을, 그것도 정파와 대립하는 녹림에 몸을 담은 女고수를 만났다. 무림인들은 그녀가 없는 곳에서는 그녀를 옥나찰(玉羅刹)이라 부르지만, 그녀의 본명은 연예상(練霓霜)이다. ‘나찰’은 사람을 잡아먹는 귀신을 뜻하는데 이 앞에 아름다움을 뜻하는 구슬 ‘옥’자가 붙었으니,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박거리지 않는 절세미녀를 이처럼 잘 표현한 별호는 없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보통의 무협 소설에서 남자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미녀를 빼놓을 수 없듯, 옥나찰 역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난다. 다만, 다른 무협지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강호를 유람하다 인연을 맺게 된 여러 명의 미녀 사이에서 애증의 굴레에 빠지고, 사랑의 달콤한 갈등을 거듭하는 것에 반해 옥나찰은 단 한 명의 남자와 처음이자 마지막인 운명적 사랑에 빠진다. 매초 악랄한 초식을 구사하면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독한 마음의 소유자이자, 무공이 고강한 만큼이나 호승심도 강한 그녀의 아찔한 애정의 과녁이 된 행운(?)의 남자는 장차 무당파의 장문인이 될 장문제자 탁일항(卓一航)이다./p>

먼뎃불빛 같은 추억으로 남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자는 녹림을 주름잡는 대도 중의 대도, 남자는 강호에서 소림사와 함께 정파를 대표하는 무당파의 장문제자. 두 사람의 배경부터 흑과 백의 구별이 선명하지만, 두 사람의 성격 차이도 그에 못지않다. 옥나찰은 자신의 무공과 미모에 대하여 자부심으로 가득 찬만큼 어떤 상황에서도 안하무인 격으로 거칠 것 없이 행동한다. 또한, 그녀는 심보가 악독하기로 정평이 나 있고, 그녀의 하얀 섬섬옥수가 내지르는 수단 하나하나가 매섭기 그지없지만, 흑백을 가릴 줄 알고 시비를 분간할 줄 아는 호탕한 협녀다. 반면에 탁일항은 무협 소설에서는 보기 드물게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옥나찰과의 애정 문제에서는 매사 우유부단한 태도를 선보이며 영 시원스럽지가 못하다. 한마디로 시종일관 답답한 모습을 보이면서 독자의 짜증을 부채질한다. 그뿐만 아니라 옥나찰의 걸출한 무공과 눈부신 외모에 비하면 탁일항의 무공은 그저 그렇고 외모는 고만고만하다. 한마디로 무협 소설의 남자 주인공치곤 매우 변변치 못한 인물이 바로 탁일항이다. 이런 두 사람의 대비되는 배경과 성격에서 짐작해 볼 수 있듯 두 사람의 줄타기 같았던 아슬아슬한 사랑은 결국 가슴에 사뭇 치는 처연하고 쓸쓸한 감정만 남긴 채 미완성으로 마무리된다.

옥나찰이 처음으로 탁일항을 만나게 되는 철이 없을 무렵, 그녀는 탁일항과 결합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어려움도 무릅쓸 각오가 되어 있었고, 두 사람 사이를 방해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지위나 무공의 고하 따위는 상관없었다. 그녀에겐 두 사람의 앞길을 훼방 놓는 사람은 모두가 적이었다. 그것은 세상 규칙 따윈 거들떠보지도 않는 호방하고 방종한 그녀의 성격과도 일치했다. 그렇게 그녀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일편단심으로 두 사람의 인연을 완성하려고 했지만, 관습과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는 소심하고 답답한 탁일항의 모습에서 사랑을 확신하지 못한 옥나찰은 좌절에 좌절을 거듭한 나머지 꼭 탁일항과 함께 사는 것만이 최선은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때는 이미 사랑의 번뇌가 가져다준 상심과 피로, 사랑과 미움의 반복이라는 시련이 극에 달한 나머지 그녀의 머리가 허옇게 세어버렸을 때이기도 하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자 그녀는 두 사람의 사랑을 하늘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여겼던 것일까? 탁일항의 모든 것을 희생시키고 자기 혼자만 그를 독차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차라리 한 가닥 애련한 추억을 남기고 그것을 기억하며 살기로 마음먹는다. 아쉽게도 두 사람의 사랑은 밤하늘을 수놓은 별처럼 서로 마주 보면서도 결코 가까이 다가설 수 없는 아득하고 아련한 먼뎃불빛 같은 추억으로 남게 되고,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애틋함과 쓸쓸함은 예리한 면도날이 오장육부를 스쳐 가듯 가슴 한구석을 아려 온다.

마치면서 무협 소설에 대해 한 마디

협 소설에서 무지개처럼 화려하고 번개처럼 날렵하며 태풍처럼 웅장한 무공 대결만큼이나 볼만한 것이 남녀 주인공의 기구한 사랑의 운명이다. 하지만, 보통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는 우여곡절을 거듭하고 다사다난한 역정을 거치면서도 끝내는 해피엔딩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또한, 그런 해피엔딩이 가져다주는 냉장고에서 막 꺼낸 사이다 같은 청량감이 텁텁한 마음을 시원하게 적셔주는 통쾌하고 개운한 맛에 보는 것이 또 무협 소설 아닌가? 하지만,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두 사람의 사랑이 태우다 남긴 시커먼 숯등걸 조각들을 보면, 『백발마녀전』 의 서글픈 결말은 울적하고 소침한 기분을 풀고자 이 소설을 탐독한 나에게 불난 데 오히려 부채질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옥나찰과 함께 한 절대 짧지 않았던 그 시간만큼은 온갖 잡다한 세상만사와 시름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홀가분한 시간이었다고 감히 말하 수 있으리라.

마지막으로 몇 마디 더 한다면 무척이나 긴 내용에 비해 읽고 나면 남는 것이 별로 없는 것이 무협 소설이다. 이것은 무협 소설만이 가지는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다. 아무 생각, 아무 걱정 없이 텅 빈 마음과 텅 빈 정신으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지만, 긴 시간을 할애하고도 영양가 없는 독서를 했다는 자괴감이 들 수도 있다는 점에서 단점이다. 하지만, 독서라는 것이 지식이나 지혜, 하다못해 감수성을 자극한다거나 감개무량한 뭔가를 얻고자 하는 목적으로 행해지는 것만은 아니다. 중과부적으로 우리를 압박해오는 지루한 시간의 중압감과 고리타분한 일상의 막막함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시간과 삶의 굴레에서 잠시 비껴갈 수 있는 짬을 얻어낼 수 있는 취미 중의 하나가 바로 독서다. 그래서 독서는 고상하면서도 천박한 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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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7일 일요일

[책 리뷰] ‘빵 맛’을 잃고 ‘숲 전체’를 놓친 나, 그래도 ~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우타노 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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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맛’을 잃고 ‘숲 전체’를 놓친 나, 그래도 만족스러운 감동

Original Title: 春から夏、やがて冬 by 歌野 晶午
내선전화가 울렸다. 히라타가 수화기를 들어 두세 마디 응대했다. “현실이란 것은 이런 식으로 인정사정없어. 한참 심각한 얘기 중에 ‘십 분 남았는데 연장하시겠습니까?’라는군.” 스에나가 마스미는 움쩍도 하지 않았다.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春から夏,やがて冬)』, p189)

나무가 아니라 숲을 봐야 ‘세계가 반전’한다!

표지 바로 뒷면에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春から夏,やがて冬)』의 저자 우타노 쇼고(歌野 晶午)를 간략하게 소개하는 페이지에는 ‘마지막 5페이지에서 세계가 반전한다!’라는 강렬한 문구가 쓰여 있다. 실로 엄청난 자신감이 내포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는 이 문구는 독자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엄청난 기대감을 품게 하면서도 과연 얼마나 대단하기에 그런 자극적인 문구로 선전하는지 비판의 날을 세우게 한다. 마치 어느 제과점에서 세계 어느 빵집에서도 맛볼 수 없는 새로운 빵이라고 신제품을 선전하는 것이 거뜬히 세 끼 식사는 꼬박꼬박 챙겨 먹으면서도 늘 굶주려 있는 사람들의 탐욕스러운 입을 걸쭉한 침의 바다로 만듦과 동시에 이들의 세련될 대로 세련된 미각의 경계심을 곧추세우는 것과 같다. 결국엔 기대 반 호기심 반으로 지갑을 털어 신제품 빵을 한입 베어먹는다. 약간의 놀람 속에서 ‘그럼 그렇지.’ 귀신처럼 익숙한 맛을 찾아낸다. 그러면서 뭔가 대단한 것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우쭐대는 것이 이들의 취미다. 만약 아무것도 모르는 배고픈 사람이 그 빵을 먹었더라면 아마 세계 최고의 빵이라는데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겠지만, 그들은 지금까지 수많은 빵을 먹어치운 미식가답게 조금은 젠체하며 맛을 꼼꼼하게 음미하려다 보니 전체적인 ‘빵 맛’을 놓쳐버린 것이다. 그것은 빵을 먹는 것이 아니라 실험실의 연구원처럼 분석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너무 세심한데 신경 쓰다 보니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세계가 반전’하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숲을 봐야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즉, 너무 기대한 나머지 잔뜩 긴장한 채 꼼꼼하게 분석하면서 이 책을 읽다 보면 ‘세계가 반전’해야 할 것이 그냥 어느 동네 한구석이 반전해 버리는 시시콜콜한 일로 끝날 수도 있다.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바로 그런 경우였기 때문이리라.

내가 좋아하는 추리 소설 작가 중 한 사람

타노 쇼고는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반전을 안겨준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葉桜の季節に君を想うということ)』라는 소설로 단박에 내가 좋아하는 추리 소설 작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잠시 다른 책들은 젖혀두고 도서관에 있는 우타노 쇼고의 작품들로만 독서 욕구를 연달아 충족시켰던 기억이 아직도 머릿속에 선하다. 『시체를 사는 남자』,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 『여왕님과 나』, 『밀실살인게임』, 『해피엔드에 안녕을』, 『밀실살인게임 2.0』, 『긴 집의 살인』, 『흰 집의 살인』, 『움직이는 집의 살인』까지 단숨에 탐독했었다. 여기서 그친 것은 도서관에 있던 우타노 쇼고의 소설이 그땐 그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벌써 수년 전 이야기지만, 그렇게 시간이 흘러 잠시 잊고 있다가 오래간만에 괜찮은 추리 소설이 읽고 싶어 그를 찾았고, 역시 그는 나를 실망시키지는 않았다.

때론 생각이 지나치게 많으면 재미가 반감된다!

러나 ‘마지막 5페이지에서 세계가 반전한다!’에 너무 현혹된 나머지 전체를 놓치고 말았다. 이번엔 나도 작가가 준비한 트릭이나 구성에 쉽게 속지 않고자 나름의 각오를 다졌다. 그리하여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고 꼼꼼하게 추려내어 뭔가 성과를 올려보겠다는, 되지도 않는 오기와 공염불한 의지가 발동된 것이다. 그런 시기적절하지 않은 의지와 오기 덕분에 작가가 준비한 떡밥을 (물론 이 모든 것이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덥석 물지 못했던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런 각오에도, 끝내 마지막 반전의 묘수는 완벽하게 간과하지는 못했다. 결말을 봤지만 (이해가 부족해서 일지도 모르겠지만) 잠을 푹 자고 난 것 같은 개운함보다는 자는 도중에 갑자기 깬 것 같은 찌뿌둥함과 ‘이것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고로 이것이 끝이 아니다, 뭔가 더 있다!’라는 석연치 않은 의심이 여전히 남아 있었기에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같은 뒤통수를 냅다 후려갈기는 기막힌 반전은 만끽하지 못했다. 독자의 지나친 의심과 경계가 추리 소설의 묘미를 맛보는데 제약이 된 경우였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런 독자의 의심과 경계를 예상하지 못했거나 예상했더라도 의심과 경계를 흐트러트릴 수 있는 적절한 방책을 마련하지 못한 작가의 실수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런 연유로 ‘세계의 반전’은 만끽하지 못했지만, 그 대신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빵이 아닌 세계에서 가장 슬픈 빵을 먹은 것 같은 가슴 언저리에 뭔가 묵직한 비극의 체증을 맛보았다. 그것은 보은의 도리가 낳은 거짓말이 예기치 않게 불러온 오해와 그 오해로 말미암은 흘리게 된 눈물과 피에 젖은 빵이었다.

내가 본 ‘두 개의 떡밥’, 그리고 놓친 ‘세계의 반전’

가 보기엔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에는 커다란 두 개의 떡밥이 나온다. 첫 번째는 보통 사람이 그렇게 다급한 상황에서 어떻게 그렇게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는지였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초등학생이 다리를 건너다 무심결에 지나가는 사람을 건드렸는데 어쩌다 보니 그 사람이 다리 밑으로 떨어져 죽은 것이다. 그런데 초등학생은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지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침착하게 행동한다. 초등학생은 숙련된 범죄자처럼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주변을 살핀다. 목격자가 없는 것을 확인한 초등학생은 죽은 사람을 사고가 아닌 자살로 죽은 것으로 교묘하게 꾸민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설정이다. 두 번째는 추리 소설에서 잘못 사용하거나 지나치면 재미와 트릭의 질을 떨어트리면서 개연성까지 잃게 하는 지나친 우연성이다.

이 두 경우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떡밥일 수도 있다. 그것은 상대가 우타노 쇼고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설마 그가 이런 허술한 설정으로 독자를 속여 넘길 생각은 아니겠지?’ 하는 이유 있는 경계심이 내 의심의 촉각을 더욱 곤두세웠고, 그로 말미암아 끝까지 경계와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던 나는 ‘세계의 반전’을 놓치고 만 것이다. 만약 내가 우타노 쇼고를 전혀 모르는 독자였다면 지금까지 남아 있을 강렬한 반전이 일으킨 흥분에 휩싸여 횡설수설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현실은 안타깝게도 그렇게 흘러가지는 않았다. 반면에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떡밥이 작가의 준비성 부족이거나 반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불성실의 결과였다면 그것은 한마디로 치명적인 실수다.

마치면서...

래도 추리 소설에서는 전혀 기대하지 못한 서늘한 바람이 가슴 한구석을 휑하니 휘젓고 지나간 것 같은 가슴을 아련히 시리게 하는 씁쓸하고 서글픈 감동은 ‘빵 맛’을 잃고 ‘숲 전체’를 놓친 나에게 그나마 다행이고 위안으로 다가온다. 또한,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은 내 독서 인생 중 단 몇 시간 만에 일독한 아주 소수의 책 중 하나다. 초반엔 그 흔한 살인도 없고, 그래서 범인을 추리하는 전개도 없는 전혀 추리 소설 같지 않은 전개가 당황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언제까지나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고 난 다음의 회상이지 정말이지 그땐 그런 것조차 생각할 정황이 없었을 정도로 나도 모르게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었었다. 막상 다 읽고 나면 별것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반전은 둘째치고 단순 명쾌한 문장으로 직선적으로 밀어붙이는 이야기 자체의 흡입력이 상당하다 보니 그것만으로도 이 소설을 추천하고 싶을 정도다. 요즘 후덥지근한 장마철 날씨에 시달리던 빈약한 육체였지만, 이 책 덕분에 잠시나마 더위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말한다면 과언일까(이 리뷰는 2018년 여름에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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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25일 월요일

[책 리뷰] 정직하지만 교묘한 ‘심리 트릭’에 매혹되다 ~ 불연속 살인사건(사카구치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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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하지만 교묘한 ‘심리 트릭’에 매혹되다

Original Title: 不連続殺人事件 by 坂口 安吾
“ … 문에 끈을 달아 저절로 닫히게 한다거나 밀실살인을 가장하는 그런 잔재주는 그 자체로 결국 흔적을 남기고 마니까요 잔재주를 일체 배제한 점이 바로 범인의 어떤 한 심리를 드러내고 있는 셈이지요. 그는 자기의 속마음이 드러나는 걸 무엇보다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조심조심하고 있지요 그런 침착성과 침묵은 범인이 천재적인 살인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범인의 진짜 동기는 무엇일까요? 어떤 살인이 범인의 진짜 목적일까요? … ” - 교세이 (『불연속 살인사건(不連続殺人事件)』, p186)

오기(?) 때문에 탄생할 수 있었던

1947년 9월호부터 다음 해 8월호까지 잡지에 연재된 『불연속 살인사건(不連続殺人事件)』은 사카구치 안고(坂口 安吾)의 첫 추리 소설이다. 소년 시절부터 반 다인(S.S. Van Dine)과 엘러리 퀸(Ellery Queen), 그리고 애거사 크리스티(Dame Agatha Christie) 등의 추리 소설을 즐겨 읽었던 사카구치는 성인이 되어 문인 생활을 하면서도 종종 동료 문인들과 함께 추리 소설의 범인 맞추기 게임을 했는데, 그는 누구보다 게임에 열심히 임했음에도 범인을 맞춘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범인 맞추기 게임에서 매번 지기만 해서 오기가 발동했는지, 아무튼 그는 ‘자네들이 절대 알아맞히지 못할 추리 소설을 내가 꼭 쓸 테니까, 어디 두고 보게’라는 전설 같은 말을 남기고 훌쩍 사라졌다가 어느 날 약 350장의 원고용지 묶음을 가지고 잡지 편집부에 나타났고, 그렇게 탄생한 소설이 바로 『불연속 살인사건』이다. 또한, 이 소설이 잡지에 연재되기 시작했을 때 엘러리 퀸(Ellery Queen) 추리 소설만의 별미인 ‘독자에게 도전’을 본떠 범인 맞추기 현상금 대회를 열었다고 한다. 이 범인 맞추기 대회에는 우리도 익히 그 명성을 아는 에도가와 란포(江戸川 乱歩) 등 쟁쟁한 문인들이 도전했는데, 뜻밖에도 1등은 도쿄 물리 학교의 한 학생이 차지했다고 전설처럼 전해진다.

탐정 교세이와 긴다이치

렸을 때부터 추리 소설을 즐겨 읽었음에도 동료와의 범인 맞추기 게임에서는 번번이 실력 발휘를 못 한 한이 맺혔던지 『불연속 살인사건』에서 활약하는 탐정 교세이(巨勢)는 사카구치처럼 문인일 뿐만 아니라 소설이 엉성하니까 범죄를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즉 소설을 쓰지 못하기 때문에 탐정의 자질이 있다는 어딘가 역설적인 능력을 갖춘 인물이다. 이것은 마치 사카구치 자신은 범인 맞추기 게임을 잘하지 못하기 때문에 추리 소설은 잘 쓸 수 있다고 동료에게 해명하면서도, 한편으론 늘 범인 맞추기 게임에서 패배의 쓴잔을 마신 자신을 위로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식의 구차한 해명을 굳이 늘어놓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 소설은 ‘심리 트릭’을 기가 막히게 활용했다.

탐정 교세이 이야기가 나왔으니 짚고 넘어갈 것이 있는데, 이 소설이 연재되기 바로 1년 전에 요코미조 세이시(横溝 正史)의 긴다이치 코스케(金田一 耕助) 시리즈 첫 소설인 혼징 살인사건(本陣殺人事件)이 나왔다는 점이다.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두 소설 모두 살인 잔치라도 벌이듯 대량 살인이 처참하게 벌어진다는 점과 얄궂게도 범인이 계획한 모든 살인이 다 끝나고 난 후에야 진상이 밝혀진다는 점(대부분의 추리 소설 이야기 구성이 이와 비슷하겠지만)이 비슷할 뿐만 아니라 긴다이치와 교세이 역시 어딘지 모르게 비슷한 면모를 풍긴다는 점이다. 앞으로 나서서 적극적으로 활약하기보다는 좋게 말하면 겸손하게,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소심하게 경찰 수사 뒤에서 사태를 관망하는 한편, 어딘지 미덥지 못한 어수룩하고 능청 떠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다가 죽을 사람이 다 죽고 난 후에야 마침 기다렸다는 듯 진상을 밝힌다. 아마도 추리 소설 마니아였던 사카구치로서는 『불연속 살인사건』을 준비하면서 요코미조 세이시의 소설을 읽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것이 첫 추리 소설을 쓰는 부담감을 조금 덜어주는 의미에서 약간의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산장을 애욕의 산란장으로 전락시키는 문인들

시에서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있는 산장에서 무려 8번이나 일어나는 연쇄 살인사건을 다룬 이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퇴폐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문인들이다. 이 소설 속에서 문인들은 서로 노골적으로 야유하고 조롱하고 경멸하고 비꼬고 업신여기고 놀리고 모독하고 험담하는 등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주 무대가 되는 산장을 애욕의 산란장으로 전락시키는 등 문명과 문화를 대변한다는 문인들이 홍등가에서조차 보고 듣기 어려운 파렴치한 짓거리를 서슴없이 행한다. 패전의 영향으로 치부하기엔 정도가 지나친 경향이 있는데 아마도 문인들 사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경쟁의식과 각자의 작품특성이나 성격을 두고 일어나는 논쟁에서 비롯한 날카로운 대립의식 때문에 문인들이 받는 스트레스와 그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픈 자포자기적인 심정을 반영한 것은 아닌가 싶다. 그렇지만, 별생각 없이 보면 마구 내뱉는 말처럼 보이는 거칠게 오가는 설전 속에 의미심장한 가시를 심어두는 문인들의 그럴듯한 말재주를 음미하는 재미도 가히 쏠쏠하고, 그런 설전 속에서 뒤틀리고 왜곡된 인간의 심성을 은연중에 부각시키는 것이 이 소설의 특징이 아닌가 싶다.

‘심리 트릭’에 푹 빠지다

지막으로 『불연속 살인사건』은 연재를 시작하자마자 범인 맞추기 현상금 대회를 시작했을 정도로 독자 앞에 정직하고 공정한 소설이다. 고로 눈치 빠른 독자는 네 번째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때쯤 심증만으로 진범을 추려낼 수 있지만, 그렇다고 만만하게 볼 트릭은 아니다. 왜냐하면, 불연속적인 일곱 번의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동안 알리바이 조사를 통한 공통된 용의자도, 살해된 사람들의 신상 관계를 통한 공통된 동기를 가진 용의자도 추려내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독자는 이 일곱 사건이 서로 다른 범인에 의해 계획된 개별적인 사건인지, 아니면 같은 범인에 의해 계획된 연쇄 살인인지 혼란에 빠진다. 아니면 일곱 사건 중 그중 몇 가지는 범인의 진짜 목적과 들어맞는 살인이고 나머지 살인은 잔악하게도 그 목적을 숨기기 위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설정도 떠올려볼 수 있다. 힌트를 주자면 이 소설이 준비한 트릭은 밀실이나 알리바이 같은 물리적이고 시간적인 트릭이 아니라 매우 교묘한 심리적인 트릭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에는 자연스러워 보여도 막상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언행이 바로 정답이다. 그 매혹적인 ‘심리 트릭’에 푹 빠져버리지 못한 당신은 더는 추리 소설을 읽을 자격이 없다는 말을 끝으로 지루한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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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20일 수요일

[책 리뷰] 환상적인 미스터리와 과학적 엄밀함으로 빚어낸 ~ 기억나지 않음, 형사(찬호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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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적인 미스터리와 과학적 엄밀함으로 빚어낸

Original Title: 遺忘.刑警 by 陳浩基
갑자기 등줄기가 차가워지는 기분이다. 아친이 꺼낸 말은 내가 지금까지 생각해보지 않았던 부분을 건드렸다. 나는 수첩을 꺼내 펼쳤다. 보고 싶지 않았던 진실이 적나라하게 거기 있다. “이상해…… 정말 이상해…… 정말로 6년 동안의 기억을 잃은 거라면 내 수첩에 적힌 내용이 왜 6년 전 사건인 걸까요?” (『기억나지 않은, 형사(遺忘.刑警)』, p128)

독자를 현혹하는 두 개의 미스터리

자는 자그마치 무려 두 개의 미스터리를 추적해야 한다. 첫 번째는 전형적인 홍콩의 소시민층이었던 임산부와 그녀의 남편을 잔혹하게 살해한 범인을, 두 번째는 시간 터널을 통해 6년을 점프한 것인지 아니면 영화 「사랑의 블랙홀(Groundhog Day, 1992)」처럼 매일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즉 지난 6년간의 기억을 송두리째 잃은 한 남자의 정체를 밝혀내는 것이다. 두 개의 미스터리를 풀어내는 실마리는 엉킨 실타래처럼 서로 긴밀하고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다. 마치 눈앞에서 미치광이가 춤을 추는 것처럼 독자를 현혹하는 텍스트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안개 낀 것처럼 모호하게 흩뿌려놓는다. 한편으론 엄밀한 과학적 추론을 끌어들이는 텍스트의 간곡한 의지는 미스터리와 미스터리를 연결하는 논리성과 개연성을 증대시킨다. 이처럼 환상 속으로 밀어붙이려는 원심력과 과학적 논리를 추구하려는 구심력은 독자가 섣불리 판단할 수 없도록 혼란과 의문을 가중시킨다. 함정인 걸 알면서도 함정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운명의 가혹한 힘에 떠밀린 독자는 작가가 친절하게 준비한 교묘한 서술에 중독되고, 관능적인 텍스트에 놀아나며 갈팡질팡하는 독자가 가련하고 보기에 딱했던지 멀찌감치 떨어져 팔짱을 끼고 여유롭게 관조하던 미스터리는 그제야 서서히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이 흩어졌던 미스터리가 점점 한 점으로 응축되면서 드디어 미스터리가 더는 미스터리가 아니게 되는 순간, 독자의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오싹한 한기와 미세하게 떨리는 전율은 그동안의 혼란과 좌절을 십분 보상해주고도 남을 터이다.

환상과 과학의 명확한 경계를 논리로 무너트리다

리 소설에서는 기름과 물처럼 섞이기 어려운 존재인 환상과 과학의 확고부동한 경계를 명쾌한 논리로 무너트림으로써 완성된 찬호께이(陳浩基)의 『기억나지 않은, 형사(遺忘.刑警)』는 미스터리의 엄밀함과 (그동안 장르 소설에서는 도외시되었던) 문학성을 추구하는 텍스트로 잠수하기 전에 크게 숨을 들이마시는 것처럼 독자를 한껏 빨아들인다. 그러다가 그렇게 미스터리의 중심까지 빨려온 독자를 기가 막힌 반전으로 재채기하듯 힘껏 내쳐 버린다. 이로써 미스터리의 윤곽을 서서히 잡아간다고 의기양양했던 독자를 또다시 미스터리의 한복판으로 날려 보내 어리벙벙하게 만드는 실로 놀라운 작품이다.

덕분에 오랜만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은 제대로 된 추리 소설이었다. 한편으로는 읽는 내내 찬호께이(陳浩基)라는 대단한 작가를 발견했다는 기쁨과 흥분에 겨워 책을 잡은 두 손이 휴대전화의 진동이 울리는 것처럼 떨기도 했다. 사실 영화나 소설 등 많은 대중적인 작품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나 기억 상실을 소재로 삼아왔기 때문에 식상하지 않을까, 혹은 너무 쉽게 미스터리의 윤곽이 잡히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선입견이 작용할 수도 있으나 그런 걱정은 붙들어 매둬도 될 것 같다. 나 역시 그런 걱정이 전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끝까지 읽고 나니 역시 그런 걱정은 쓸데없는 기우에 불과했다. 『기억나지 않은, 형사』를 읽는 내내 같은 소재를 가지고도 이렇게나 다른 작품을 완성할 수 있는 무한한 상상력과 무궁무진한 창조력을 가진 인류의 놀라운 능력에 다시 한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고로 찬호께이는 일본 추리소설계의 거장 시마다 소지(島田荘司)로부터는 “무한대의 재능”이라는 찬사를 받았고, 단지 ‘중국인이 이런 내용을 써낼 수 있을까?’라는 막연한 의심 때문에 타이완 추리작가협회 심사위원단으로부터 영어권 작품을 번역해서 고쳐 쓴 게 아닐까 하는 표절 의혹을 샀을 정도로 중국어권 추리소설계에서 용처럼 솟아오르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너무 찬사를 남발하는 것 아니냐고 못마땅해할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기억나지 않음, 형사』를 읽고 나면 비록 백 퍼센트는 아닐지라도 많은 사람이 특별한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이유에 어느 정도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찬호께이는 시마다 소지 추리소설상에 투고할 때 덧붙인 글에서 미스터리의 환상성과 전통적 관념을 전복시키는 새로운 방법론, 그리고 21세기적 새로운 과학지식으로 작품을 지탱해야 한다는 21세기 본격추리 창작의 조건에 대해 언급했다고 한다. 『기억나지 않음, 형사』는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킬 뿐만 아니라 이로써 독특하면서도 엄중한 자신만의 창작 가치관을 지닌 작가를 만나게 된 독자는 반갑기 그지없다. 시마다 소지의 심사평대로 ‘21세기 본격추리’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특출난 작품이다.

마치면서...

반적인 문학 작품은 탐독 전에 약간의 스포일러를 안고 가도 보통은 작품 감상에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말 한마디가 단서가 되고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추리 소설, 그것도 본격파 추리 소설 같은 경우는 다르다. 특히 이 소설처럼 굉장히 세밀하고 엄격한 논리로 구성된 경우 리뷰를 쓰는 사람이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라도 머리 회전이 빠르고 눈치가 뛰어난 독자에겐 김 새게 하는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으므로 일부러 줄거리나 본문 중 극히 작은 부분이라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일은 삼갔다. 좀 더 많은 이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관심을 불러들이고자 소설의 세부내용을 언급할 수도 있었지만, 앞서 말한 이유로 에둘러 말할 수밖에 없었음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한다면 지금까지의 지리멸렬한 내 글은 깡그리 무시해도 좋지만, 당신이 만약 추리 소설 마니아라면, 특히 나 같은 본격파 류의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정말 놓쳐서는 안 되는 작품이라는 것만 알아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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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27일 일요일

[책 리뷰] 유감스러웠던 독일 국민작가와의 첫 만남 ~ 신데렐라 카니발(안드레아스 프란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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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스러웠던 독일 국민작가와의 첫 만남

Original Title: Todesmelodie by Andreas Franz, Daniel Holbe
그러나 그보다 훨씬 견디기 힘든 사실은 변태적인 욕구에 눈이 멀어 엄청난 돈을 주고라도 이런 비디오를 살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대서양 이쪽에만 있는 게 아니다. 수요에 따라 가격이 책정된다는 점에서는 섹스도 마약이나 무기 와 마찬가지였다. (『신데렐라 카니발』, p406)

원작자의 갑작스러운 죽음만큼이나 당황스러운 소설

스터리 스릴러 소설 『신데렐라 카니발(Todesmelodie: Ein neuer Fall fuer Julia Durant)』은 절반 정도 완성된 안드레아스 프란츠(Andreas Franz)의 유작을 작가이자 안드레아스 프란츠의 팬이기도 한 다니엘 홀베(Daniel Holbe)가 이어 완성한 작품이다. 의도치 않은 공동 집필이니만큼 약간의 매끄럽지 않은 진행이나 탄탄치 못한 구성을 어느 정도 예상했음에도, 고인의 갑작스러운 죽음만큼이나 당황스럽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범인 설정은 약간의 미흡함을 넘어서 작품의 완성도나 격을 떨어트리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 때문에 독일의 유명한 미스터리 스릴러 작가 안드레아스 프란츠와의 첫 만남치곤 매우 유감스러운 자리가 되어버렸다.

안드레아스 프란츠의 다른 소설은 아직 읽지 않았기 때문에 『신데렐라 카니발』의 밋밋하기도 하고 억지스럽기도 한 범인 설정이 프란츠의 죽음이 초래한 원작자의 집필 의도나 구성의 상실이 가져온 부작용인지, 혹은 미완성 유작을 이어받은 다니엘 홀베의 미숙함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프란츠 작품은 그런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미스터리 스릴러 범죄 소설 읽기의 참맛을 개연성 있는 추리 과정이나 개연성 있는 범인의 의외성에서 찾는 나로서는 소설 앞부분에 지나가는 말투로 딱 한 번 언급된 인물이 막판에 범인으로 등장하는 무성의한 설정은 허무하기 그지없다. 내가 원하는 개연성 있는 추리 과정이란 모래성을 쌓듯 크고 작은 단서들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범인의 윤곽을 조금씩 조금씩 그려나가는 것인데, 이 소설은 단박에 ‘짠’하고 튀어나와 버린다. 다시 말해 소설 초반에 아주 잠깐 언급되고 나서 마지막 범인으로 지목되기까지의 공백은 LA와 뉴욕만큼이나 너무나도 크게 떨어져 있다. 범인을 뒤쫓거나 특정 인물로 용의자를 좁혀가는 과정은 밋밋하고, 그래서 조각들을 모아 퍼즐을 완성하듯 뭔가를 풀어나가는 재미도 없다. 한마디로 범인 찾기 놀이의 미스터리한 재미는 실망스러울 정도로 형편없다. 한편으론 (정체는 아직 드러내지 않은) 범인의 일인칭 시점으로 범행 동기가 부여되는 시점과 범행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과정에 관한 서술을 좀 더 추가하거나, 아니면 이것을 좀 더 일찍 등장시켜 형사들의 수사 활동과 교차시켰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나마 봐줄 만한 사회파 미스터리적인 요소

런 고로 이 소설은 미스터리 스릴러라고 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추리가 번득이거나 재치가 넘치는 것도 아니다. 추리적 요소보다는 (전편을 못 봐 정확한 앞뒤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던 율리아 뒤랑(Julia Durant) 형사의 힘겨운 복귀 드라마에 좀 더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다. 물귀신처럼 붙잡고 늘어지는 과거와 트라우마를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현장으로 복귀하는 것에 따르는 파트너와의 갈등, 그리고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새로운 살인 사건이 주는 압박감 등 삼중고에 시달리면서도 수사11반의 동료와 더불어 다른 지역 경찰과의 협조 수사도 유연하게 이끈 율리아 형사의 복귀는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녀의 뼈를 깎는 인고의 노력과 자기희생 정신이 빛을 발휘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 외에는 변태적이고 이상야릇한 호기심을 일으키는 ‘스너프 필름’에 얽힌 잔악무도한 범죄를 묘사한 범죄 소설일 뿐이다. 아무리 미완성 유작이라지만, 독일의 국민작가라고 불리는 작가의 작품이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그렇고 그런 평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가혹한 평가에 공감하지 않는 독자가 더 많겠지만, 아마도 내가 『신데렐라 카니발』에 실망이 큰 이유에는 엄청난 작가라는 선전에 현혹되어 기대치가 너무 높았던 탓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안드레아스 프란츠의 다른 소설은 어떤지 읽어봐야겠다는 호기심과 다른 소설들도 이처럼 실망스러우면 어쩌지 하는 망설임이 교차하는 복잡한 심정이다.

그럼에도, 성인 비디오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 놓고 발산하는 『신데렐라 카니발』은 일본의 사회파 미스터리처럼 사회를 향한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 ‘스너프 필름’은 마치 도시 전설처럼 어둠의 세계 속에서 기생하고 있다. 그것은 사람의 변태적인 욕망을 먹고 산다. 전 세계를 연결하는 그물망처럼 얽힌 인터넷으로 범죄에 국경이 없어진 덕분에 ‘스너프 필름’의 더러운 생명을 끈질기게 유지해주는 줄기와 뿌리는 쉽게 전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었고, ‘스너프 필름’의 밥그릇은 사람들의 구역질 나는 추한 욕망으로 철철 흘러넘친다. 여기에도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이다. 즉, ‘스너프 필름’ 전설이 근절되지 않는 것은 좀비처럼 그것을 찾아 헤매는 수요가 좀처럼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남자라면 이러한 사실을 단호하게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개탄할 만한 현실에 대해 가공할 충격과 끔찍한 고통을 안겨주는 성범죄를 직접 겪은 피해자이고도 한 율리아 뒤랑 형사는 말한다. “자기가 강간 살해를 하는 장면을 녹화하고 그것도 모자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정도면 대체 얼마나 미쳐야 하는 거야?” 그녀의 일침이 진행 중이거나 앞으로 일어날 인류의 보편적인 도덕성 상실을 경고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상실된 보편적 도덕성을 저주하고 한탄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자신도 뒤랑 형사의 일침이 가늠하는 범주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마치면서...

담으로 율리아 형사가 속한 프랑크푸르트 수사11반의 강력계 형사들의 성비는 좀처럼 보기 드문 비율로 구성되어 있다. 내근하는 베르거 과장을 제외하고 현장에서 활동하는 5명의 형사 중 무려 3명이 여성이다. 선진국이라 그런 것일까? 한국인이 보기에 형사 업무 중 가장 고되고 거친 일을 하는 강력계의 절반 이상이 여성이라는 것은 진보적이다 못해 가히 혁명적이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나이도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활달하고 매력적이지만, 좀처럼 사적인 면모는 드러내지 않는 베일에 싸인 20대 후반의 자비네 카우프만(Sabine Kaufmann) 형사, 늦은 임신으로 조심스럽게 행복에 겨워하는 30대 후반의 도리스 자이델(Doris Seidel) 형사, 그리고 40대 중반임에도 여전히 매력을 발산하고 오랫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을 정도로 과거의 일로 정신적 • 육체적 고통을 겪는 율리아 뒤랑 형사가 있다. 나머지 두 남자 형사는 도리스와 드림팀을 구성하는 팀 동료이자 동거인인 페터 쿨머(Peter Culmer) 형사, 뒤랑 형사의 오랜 파트너이자 팀에서 가장 연장자인 프랑크 헬머(Frank Helmer) 형사가 있다.

소설 마지막에 싸움에 익숙한 범인을 추적하던 도리스와 율리아 형사가 되레 범인에게 육체적으로 제압당하는 장면을 보듯, 여성 셋, 남성 둘이라는 남녀평등에 충실한 강력계 팀은 이색적인 구성인 것은 맞지만, 어떤 면에서는 취약한 구성이다. 결국, 범인은 현장에 출동한 다른 경찰관에 의해 제압당하고 이보다 앞서 범인의 정확한 신원은 다른 지역 경찰서에서 밝힌다. 율리아 팀은 나름 훌륭한 팀워크와 직무에 충실한 형사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범죄를 다룬 여타 소설처럼 영웅은 없다. 사건 해결은 약간의 운과 근면 성실함, 그리고 다른 지역 경찰들의 협조 덕분에 어줍게나마 마무리된다. 그들 하나하나는 나름 유능하지만 그렇다고 특별나지는 않은 보통 형사들이다. 철저하게 1인 영웅 놀이를 배제한 구성은 평범함 속에서 현실성을 극대화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이 또한 영웅 놀이의 속물성과 그것에 동반하는 상업성에 일침을 가하는 작품의 또 다른 긍정적인 부분이다. 한편으론, 과거에 ‘위대한 지도자’의 영웅 놀이에 독일 전체가 참가했다가 쓴맛을 톡톡히 본 독일 역사가 남긴 교훈이 아직도 작용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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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9일 일요일

[책 리뷰] 한국 추리소설 계보의 시작을 알리는 ~ 마인(김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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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추리소설 계보의 시작을 알리는

Original Title: 魔人 by 김내성

그러나 아아, 그 사흘 동안이야 말로 유탐정에게 있어서는 실로 여러가지 의미로 초조와 번민의 연쇄였다.

첫째로는 사건을 하루 바삐 해결해야 되겠다는, 말하자면 탐정으로서의 초조였고 둘째로는 한개의 연애자(戀愛者)로서의 번민이었다.

더구나 오상억이라는 새로운 경쟁자가 주은몽의 눈 앞에 나타난 이 즈음,

그리고 전과는 달라서 주은몽의 태도가 지극히 애매하여진 이 지음이 아닌가. (『마인(魔人), 下권 中에서』

시대를 떠나 재미나게 읽을 수 있는 잘 쓰인 소설

제나 난 (작품성이니 문학성이니 등의 전문적 비평은 제쳐두고 단지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독자의 시점에서) 잘 쓰인 글은 시대를 초월하여 재미나게 읽힐 수 있다는 지론을 묵묵히 머릿속에 담아왔는데, 김내성의 추리소설 『마인(魔人)』이 바로 그러한 경우라 할 수 있다. 『마인』은 거의 100여 년이나 지난 소설임에도 21세기에 사는 우리가 읽기에도 손색이 없는 멋들어지게 잘 쓰인 추리소설이다. 그렇다고 『마인』에서 요즘의 읽을만한 추리소설이라면 당연시하는 과학적 엄밀성이나 치밀한 트릭, 아니면 어떠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사회파 미스터리’ 같은 것을 기대하라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추리소설’이라는 장르가 반드시 갖춰야 할 첫 번째 재능이 ‘트릭’이 아니라 ‘추리’에 있다고 보는 독자라면, 충분히 읽어줄 만한 소설이다. 무엇보다 요즘 쓰레기처럼 쏟아져 나오는 판타지, 무협, 로맨스 등 소위 ‘라이트 노벨’이라고 불리는, 하지만 내가 보기엔 ‘소설’이라는 딱지조차 가당치도 않은 졸렬한 텍스트로 가득한 책들과는 당연히 비교할 수 없는 품격을 갖춘 책이 『마인』이며, 요즘의 잘 나가는 추리소설보다 트릭의 구성이나 범죄의 치밀한 면은 뒤질 수 있지만, 문장삼이(文章三易)를 고루 갖춘 유창한 문장과 민첩한 재기가 돋보이는 필치는 이들보다 한 수 위다. 아마 내용만으로 평가한다면 다소 평범하기 그지없는 소실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앞서 언급한 이유로 장르 소설에서는 맛보기 어려운 텍스트 읽기의 재미가 스펀지에 스며든 감로수처럼 촉촉이 스며 나오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기본에 충실한 고전 추리소설

전이니만큼 변칙과 응용에 능한 요즘의 추리소설과는 달리 기본에 충실한 면이 있는데, 그것은 독자가 ‘모든 불가능한 일을 제하고 남는 것이 그 수수께끼의 해결’이라고 하는, 추리소설을 제법 읽어본 독자라면 반드시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법칙으로 범인을 쉽게 추리할 수 있다는 점이 그러하다. 다시 말해 『마인』에서 펼쳐지는 ‘세계범죄 사상에 잊을 수 없는 일’ 들 중에서 가능성이 없는 경우, 혹은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을 하나둘씩 제거해 가면서 범인을 유추해 나갈 수 있다는 말이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사건 A에서 알리바이가 성립되는 사람이 ‘가’, ‘나’, ‘다’이고, 알리바이가 없는 사람은 ‘라’, ‘마’이며, 사건 B에서는 알리바이가 성립되는 사람이 ‘가’, ‘나’, ‘마’이고 알리바이가 없는 사람이 ‘다’, ‘라’일 때, 그리고 두 사건의 범인이 한 사람이라면 두 사건 모두에서 알리바이가 없는 ‘라’가 범인이라는 추리다. 물론 현대 추리소설에서는 알리바이 트릭으로 사건 정황을 교란시켜 추리를 어렵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 알리바이 트릭이 간파된다면, 역시 앞서 거론한 방법으로 범인을 유추해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최후의 1인, 즉 범인을 추리하는 것은 비단 『마인』에서뿐만 아니라 ‘범인은 우리 중에 있다!’라는 (이 역시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명제가 성립되는 추리소설에서 두루 써먹는 익숙한 추리이기도 하다.

『마인』에서 독자가 범인을 솎아낼 수 있는 실마리이자 ‘세계범죄 사상에 잊을 수 없는 일’ 이란 (사건이 일어난 순서대로 나열하면) 이렇다. 조선 최초의 가장무도회에서 주은몽을 해치려 하던 어릿광대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일, 주은몽에게 버림받은 연인 김수일 화가를 대신하여 무도회에 나타난 이선배란 화가가 주은몽 살해 미수 사건 직후 막다른 골목에서 사라진 일, 세계적인 무희 주은몽과 백만장자 백영호와의 결혼식장에 나타난 (주은몽과 어렸을 때 잠깐 알고 지내던) 해월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자취를 감춘 일, 그리고 백영호와 그의 두 자녀의 잇따른 죽음이다. 나 같은 경우 이중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커텐에 비친 두 그림자’라는 인상적인 장면을 남겨놓고 살해당한 백영호의 사건 정황을 듣고 범인을 정확히 유추해냈다.

반면에 범죄 동기는 셜록 홈스라도 절대 알아낼 수 없을 정도로 극히 제한적인 정보만이 제공될 뿐이며, 이후 탐정들의 활약을 통해 하나둘씩 밝혀지는 과거로부터 서서히 사건의 내막이 드러나게 된다. 동기는 탐욕과 증오, 원한과 복수라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인간의 지독한 감정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친숙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진부하기도 하다. 다만, 다른 추리소설과는 달리 『마인』에는 여러 탐정이 등장하고, 다른 추리소설에서는 금기시되는 탐정의 연애도 두드러질 뿐만 아니라 이 연애 감정으로 (그것도 삼각관계에 빠진 탐정의 질투!) 말미암아 추리와 판단에 혼선을 빚기까지 하는 초풍할 일이 벌어진다는 점에서 특이하다면 특이하다고 볼 수 있다. 오죽하면 탐정 유불란은 사랑과 질투에 빠진 나머지 사건 해결에 지리멸렬했던 자신이 못 미더웠던지 우여곡절 끝에 사건을 해결하고 나서는 다시는 범죄사건에 손을 대지 않겠다고 천명하지 않았던가.

한국 추리소설 역사에서는 독보적인 존재

느덧 오늘의 리뷰에 마침표를 찍어야 할 시간이 왔다. 『마인』은 무려 100여 년 전에 제법 괜찮은 추리소설을 내놓은 일제강점기 시절의 조선 문단을 새롭게 보게 한 작품이다. 그렇다고 그때 소설들을 일일이 다시 읽어봐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세월과 오해 속에 묻혔던 일제강점기 시절 작품 중에서 지금 꺼내 읽어도 제법 재미가 쏠쏠한 작품들이 꽤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하고, 한국 추리소설의 잠재성을 어느 정도 읽어낼 수 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하다. 이후 한국전쟁의 비극을 다룬 ‘한국식 사회파 미스터리’의 첫 작품이라 여겨지는 김성종의 대표작 『최후의 증인』을 거쳐, 지금은 어떤 이가 이들 대가의 계보를 잇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치밀한 트릭이 돋보이는 일본 추리소설과 이야기가 풍부한 서양 추리소설의 장점을 어떤 식으로든 소화해 낸 한국 추리소설만의 특징이 새겨진 작품이 나올 때도 된 것 같다. 벌써 나왔는지도 모르고, 벌써 나왔다면 반드시 나에게 알려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 소설이 있다면, 죽기 전에 꼭 읽어보고 싶다.

마지막으로 『마인』이 요즘의 추리소설처럼 정교하고 치밀한 맛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바늘에 실 가듯 추리소설에 반드시 따라붙어야 할 논리성마저 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하물며 트릭이나 반전의 치밀함은 떨어질지라도 전체적인 이야기 구성에 있어서만큼은 그물망처럼 잘 짜여 있다. 여기에 톡톡 튀는 필치가 옹골지다. 마지막에 범인이 애드벌룬을 타고 도망치는 액션 장면은 영화로 봤다면 (실제로 1957년에 개봉한 한형모 감독의 영화 ’마인‘이 존재하지만, 분노스럽게도 필름은 소실된 모양이다!) 그야말로 장관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소설로라도 좀처럼 만나보기 어려운 일제강점기 시기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도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동기가 완전히 숨겨져 있고 짐작하기조차 어렵다는 점에서 공정하지는 않지만, 베일에 싸인 과거와 의혹으로 똘똘 뭉친 동기의 실타래를 성실하게 풀어나가는 맛은 제법이다. 다만, 그 동기에 얽힌 사연이나 내막이 (그 당시로는 신선했을지는 몰라도 지금은 그러한 사정을 소재로 한 것들이 여기저기에 질리도록 넘쳐난다는 점에서) 신파극처럼 유치하고 진부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자, 그렇다면 읽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만약 당신에게 그것이 문제라면, 정말로 그것이 문제라서 갈팡질팡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면, 여기서 약소하게나마 나의 경험을 이야기하겠다. 나는 『마인』이라는 소설이 있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 읽을 생각을 못 했다. 왜냐하면, 그 존재 자체를 몰랐으니까. 하지만, 이 소설의 존재를 알고 나서는 단박에 찾아 읽었다. 왜냐하면, 최소한 한국 추리소설 계보의 시작을 온 세상에 알렸던 독보적인 존재니까. 꼭, 그것만은 아니더라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일제강점기의 탐정이 되어보는 것은, 반복되는 일상의 지루함과 피로를 조금이나마 풀어줄 수 있는 시원하게 톡 쏘는 뜻밖의 청량제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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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2일 일요일

[책 리뷰] ‘리뷰’는 정직해야 한다 ~ 사신의 술래잡기(마옌난)

In the name of sin book cover

‘리뷰’는 정직해야 한다

Original Title: 以罪为名 by 罪恶倾城
“한 사람을 죽이는 데는 품이 많이 들지. 하지만 이렇게 수십번 찌르면서도 죽이지 않고 살려두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모삼, 느껴봐라. 내가 찌른 칼자루의 깊이와 그 각도를.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지. 하지만, 너는 모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살육의 미학이다. 『사신의 술래잡기(以罪爲名)』, p9”

내가 생각하는 좋은 ‘책 리뷰’

가 되지도 않는 글 실력으로 재미는 없고 뻣뻣하기만 한 ‘책 리뷰’를 굳이 쓰려는 이유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읽어볼 만한 책을 한 권이라도 더 추천하기 위해서다. 자식이 고기 한 점이라도 더 먹어 무럭무럭 자랐으면 하는 엄마의 마음처럼 누군가 내 리뷰를 읽고 한 권의 책이라도 더 읽어 의식이 무럭무럭 자랐으면 하는 바람에서이다. 그런 연고로 최대한 스포일러는 자제하면서 내가 소개하는 책을 읽어볼 요량은 생기도록, 혹은 내가 소개하는 책의 책장을 넘기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호기심이 활활 타오르도록 하고픈, 그런 갸륵함으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며 횡설수설 같으면서도 나름 진지한 마음으로 주절주절 늘어놓게 된 것이다. 이런 ‘책 리뷰’ 쓰기에는 좋은 ‘책 리뷰’는 그 책을 읽지 않아도 될 정도로 내용이 풍족하고 책의 핵심이 잘 요약된 것이 아니라 그 책을 읽도록 호기심을 부추기는, 그래서 그 책을 읽어볼 마음이 無에서 불쑥 솟아오르도록 만드는 글이라는, 아무리 잘 쓴 리뷰라도 책을 읽는 것에 비교해서는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는 나의 철학이 담겨 있다.

겉으로 드러난 목적만 보면 책 파는 장사꾼 같은 상술과 다를 바 없지만, 그 속마음은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다'라는, 배움과 앎에 굶주린 사람이 책을 훔친 것은 배고픔에 굶주린 사람이 생존을 위해 음식을 훔친 것처럼 용서해줘야 한다는 옛사람의 관용에 담긴 깊은 속뜻과도 일맥상통한다. 즉, 한 사람이라도 책을 더 가까이했으면 하는 간절함과 그로 말미암아 우리 사회가 좀 더 성숙한 시민 사회로 거듭났으면 하는 포부다. "누군가 큰돈을 훔치면 그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뜻이지만, 누군가 굶주림에 음식을 훔쳤다면 그것은 그 사회가 잘못됐다는 뜻입니다."라는 어느 중국 시민의 지당한 말씀처럼 물질적 풍요 속에서 정신적 빈곤에 시달리는 것 역시 사회의 책임이다. 고로 난 누군가의 육체적 굶주림에 하등 보탬은 되지 못할지라도, 정신적 빈곤을 해갈하는 데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하는 작은 바람에서 ‘책 리뷰’를 쓴다.

굳이 리뷰를 남기지 않아도 될 책인데도, 굳이 리뷰를 남기는 이유

런데 이런 요건을 충족시키는 책은 최소한 추천할만한 장점이라든가, 아니면 내세울 만한 뭔가가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말발도 서고, 할 말도 더러 있게 되는데, (매우 드문 경우지만) 간혹 내 선택의 잘못으로 영양가가 전혀 없는 책을 읽을 때도 있다. 작가나 번역한 사람에게는 미안하게도 마옌난(馬燕楠)의 『사신의 술래잡기(以罪爲名)』가 그러한 경우다. 삼류 소설로 분류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오합지졸에 불과한 텍스트, ‘영혼’, ‘개성’ 등등을 운운하는 것이 매우 사치스럽게 여겨질 정도로 진지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두 주인공, 산책하는 사람의 발밑에서 바스러지는 바짝 마른 낙엽처럼 독자가 책장을 넘기는 가냘픈 손짓에도 부서질 것 같은 버석버석한 구성, 마지막으로 오 팀장이 두 주인공 모삼과 무즈선을 대하는 말투가 존댓말과 반말을 오가는 등 번역상의 오류 등 이런저런 짧고 굵직한 흠들이 대뜸 마음속을 휘젓다 보니 책에 대한 흥미도도 떨어지고, 책에 대한 흥미도가 떨어지니 장르 소설이 반드시 갖춰야 할 매력이라 할 수 있는 긴장감은 더더욱 기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읽는 도중에 중도하차하고 싶은 뻐근한 간절함이 독자를 능히 괴롭히고도 남는, 그런 소설이다.

그런 연유로 양심상 이 책을 차마 추천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책이 인터넷 서점에서 별 4개 수준의 평점을 받았다는 것이다. 유명한 N 영화 사이트에는 ‘평점 알바’가 평점과 댓글을 조작한다는 비난과 조롱의 글을 쉽게 볼 수 있긴 한데, 도서 쪽도 이런 비열한 상업주의에서는 벗어날 수 없나 보다. 정말 별점 알바는 존재했던 것이다. 참고로 구글과 바이두에서 저자 이름인 ‘馬燕楠’의 검색 페이지가 달랑 두 페이지인 것을 보면 마옌난은 그렇게 많이 알려진 작가도 아니고, 바이두에서 ‘以罪爲名’로 검색하면 ‘罪恶倾城’라는 작가가 쓴 소설이 텍스트로 공개되어 있는데, 구글 번역으로만 봐도 『사신의 술래잡기』와 같은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이로 보아 아마 (중국에서는 종이책으로 출판된 것 같지는 않은) 인터넷 소설을 중국인이 한국어로 번역해 종이책으로 출판한 것으로 보인다.

누구나 첫 시작이 있고, 또한 유명세가 작품의 질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책 읽는 소중한 시간을 고려하면 최소한 보통 수준 이상의 작품을 접하고 싶은 독자의 욕심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다. 또한, 세상의 모든 책을 번역할 수 없다는 점에서 출판사 역시 이러한 점을 응당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쩌자고 이 책을 한국어로 옮겼을까? 그것도 출판사의 첫 작품으로? 거의 무모한 시도에 가까운 도전이었으리라 짐작되지만, 여기서 남의 비즈니스까지 간섭할 이유는 없고, 간섭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한 마디 충고한다면, 앞으로는 번역할 책을 선택함에 좀 더 신중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무튼, 그런고로 평점은 정직해야만 한다. 그런데 내가 볼 때 『사신의 술래잡기(以罪爲名)』에 대한 평점은 정직하지 못하다. 보통 인터넷 평점은 나보다 후할 때가 많기는 하지만, 이것은 빗나가도 너무 빗나갔다. 그래서 굳이 리뷰를 남기지 않아도 될 책인데도, 굳이 리뷰를 남기고 있다.

마치면서...

실 이 책을 선택하게 된 계기는, 예전에 읽었던 중국 장르 소설 계통을 개척한다는 좋은 평가를 받은 참신한 작품들 때문이었다. 굳이 언급하자면, 찬호께이(陳浩基)의 『기억나지 않은, 형사(遺忘.刑警)』, 류츠신(劉慈欣)의 『삼체(三體: The Three-Body Problem)』, 등등.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내 ‘책 리뷰’ 사상 최고의 가혹한 리뷰가 되었지만, ‘정직’을 사람이 살면서 지켜야 할 최고의 미덕 중 하나로 믿는 나로서는 도저히 입에 침을 바르면서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또한, 이 책이 평점 4점을 받았다는 황당한 작태가 나의 앙상한 손가락을 자극해 키보드 워리어로 만들고 말았다. 그럼에도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를 반드시 한마디라도 남겨야 한다면 무엇이라고 써야 할까? 중국에서 실제 일어난 사건 파일과 부검 자료를 바탕으로 했다는, 범죄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에겐 호기심을 넉넉하게 자극할 수 있는 책 뒤표지의 문구가 그나마 무난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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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14일 일요일

[책 리뷰] 비장함에 반하고 비감함에 취하다 ~ 제물의 야회(가노 료이치)

Sacrificial evening party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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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함에 반하고 비감함에 취하다

Original Title: 贄の夜会 by 香納諒一

미나미가 죽고 자신이 살아서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다니, 그에게는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는 일로 생각되어 견딜 수 없었다. 전혀 상정하고 있지 않던 예상외의 사태다. 어째서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일까. (『제물의 야회』, p75)

“그 녀석이, 미나미가 없는 인생은 시시해…….” (『제물의 야회』, p649)

타 추리소설에서는 좀처럼 맛보지 못한 비장함으로 홀딱 반하게 만든 『환상의 여자(幻の女)』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자마자 바로 찾은 가노 료이치(香納諒一)의 또 다른 작품 『제물의 야회(贄の夜会)』. 무려 6년이라는 집필 기간이 말해주듯 저자 가노 료이치의 모든 것이 담겼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닌 『제물의 야회』는 질풍처럼 내달리는 텍스트 사이사이로 다양한 사회 문제를 언뜻언뜻 내비침으로써 단순한 추리소설로 남기를 과감히 거부한다. 문명의 시대를 비웃는 듯 잊을만하면 벌어지는 엽기적인 범죄, 도려내고 도려내도 암세포처럼 자라나는 부정부패,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존재 목적과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경찰 업무, 범죄 피해자나 그 가족들보다 가해자의 인권을 더 챙기려는 몰상식한 언론, 살인을 즐기는 살인마와 직업적으로 살인하는 살인청부업자가 바라보는 죽음과 살인에 대한 심리적 제반 사항, 그리고 청소년 범죄에 대한 사회적 이해와 대처 문제 등 범죄와 관련된 다양한 사회적 갈등과 심리적 문제를 제시함으로써 스스로 격을 높이고 있다.

그렇다고 『제물의 야회』가 추리소설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오지랖 넓게 나서기만 함으로써 진짜 재미를 놓친 것은 아니냐고 의심한다면 그야말로 헛다리 짚은 것이다. 명실상부한 하드보일드 스타일답게 고통과 범죄에 대한 거칠고 세밀한 묘사는 비정한 분위기를 냉정하게 발산하면서도 때론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는 거부감이 들게 할 정도로 과감하다. 또한, 추리소설로서 당연히 갖추어야 할 범죄자와 범죄 동기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풍부한 미스터리는 두말하면 잔소리고, 여기에 수프에 후춧가루를 뿌리듯 살짝 가미된 범죄 성향에 대한 심리 분석도 볼만하다. 마지막으로 작품에서 일어난 갈등들을 깔끔하게 없애는 대신 일말의 미해결을 남겨둠으로써 미해결된 문제에 대해서는 사회적 각성을 요구하고, 끝까지 미스터리로 남은 인물에 대해선 비감한 여운을 불러일으키는 등 과감한 마지막 한 수를 두고 있다.

에 읽은 『환상의 여자』에서와 마찬가지로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마음속을 텅 비우는 듯한 허전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비감함이다. 『환상의 여자』에서는 5년 만에 우연히 재회했지만, 재회의 기쁨을 누릴 짬도 없이 바로 그날 살해된 옛 애인의 가닥을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과거사를 좇는 삐딱이 변호사가 등장했다면, 『제물의 야회』에는 한 냉혹한 살인청부업자가 순전히 위장 차원에서 결혼한 아내의 죽음에 대한 집요한 복수가 등장한다. 연인, 혹은 아내와 헤어지고 또다시 새로운 연인을 맞아들이는 일이 일상다반사인 요즘, 과거는 과거에 묻고 죽은 사람은 마음속에 묻은 채 세월에 모든 것을 맡겨두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이라고 생각하는 냉정하고 현실적인 사람에겐 두 주인공의 작태가 궁상맞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여자에 대한 두 남자의 감정은 사랑, 혹은 집착이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면서도 개운치 않은, 그렇다고 확실하게 뭐라고 꼬집어 말하기도 어려운 묵직한 뭔가가 끈적끈적하게 녹아들어 있다. 사랑이지만 마냥 달콤하지 않고 슬픔이지만 마냥 쓰지 않은 그 뭔가가 두 남자의 정서를 지배하고 있고, 이 두 남자를 동정하고 한편으로는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나로선 그들에게서 지독하게 풍기는 비감함에 취한다.

로답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돈을 받고 사람을 죽여왔던 그가, 그저 편리하게 신분을 위장하고자 결혼한 한 여자의 죽음에서 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면서까지 그토록 복수심에 불타오를까? 그리고 경찰이 그보다 먼저 용의자를 체포할 것인가? 아니면 아내를 잃은 살인청부업자의 분노로 달아오른 뜨거운 총알이 먼저 용의자의 심장을 향해 발사될 것인가? 광기와 총명함의 구분을 넘어서는 지능적인 범죄자를 추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칠맛 나지만, 한 범죄자를 사이에 두고 경찰과 살인청부업자가 다투는 양산도 놓칠 수 없는 승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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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16일 일요일

[책 리뷰] 미스터리가 품은 과거에 대한 집착과 과거로부터의 속박 ~ 환상의 여자(가노 료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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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가 품은 과거에 대한 집착과 과거로부터의 속박

Original Title: 幻の女 by 香納 諒一

“그녀는 내가 자신의 과거를 알기를 바라는 걸까?” (『환상의 여자(幻の女)』, p404)

“있잖아, 스모토 씨. 그 아이는 고바야시 료코로 그냥 이대로 묻어 줘. 고바야시 가의 묘에 넣는 게 꺼려지면 새로 묘지를 수배해 주겠어? 그 아이는 과거의 인생을 버린 거야 당신은 도망쳤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도망치면 안 돼? 살아 있는 동안은 어느 쪽이든 과거를 떠안고 있잖아 …… ” (『환상의 여자(幻の女)』, p620)

을부터 겨울에 걸친 반년도 못 되는 기간을 함께 보냈다. 어떤 날에는 돌아올 따뜻한 봄과 뜨거운 여름에 함께 나눌 소소하지만 달콤한 계획들을 속삭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봄과 여름은 오지 않았다.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한마디 말도 없이 남자 곁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한창 열중하던 일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갑작스레 그만두어야 할 때의 아쉬움과 찝찝함, 허탈함과 상실감, 그리고 이 모든 감정으로부터 회오리바람처럼 몰아붙이는 뼈에 사무치는 미련은 사랑에서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 그런 강렬한 감정이 특별한 추억을 만든다. 매듭을 확실히 짓지 못한 이별은 ‘일시 정지’ 상태로 의식 속에 착잡하게 침잠한다. 어떤 계기가 미꾸라지처럼 의식 속을 헤집게 되면 머릿속은 잊은 줄 알았던 진흙탕 같은 과거로 다시 혼탁해진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5년은 무언가를 깜빡 잊기에는 충분할지는 몰라도, 무감각해질 정도로 완전히 잊기에는 충분치 않은, 언제든지 미꾸라지 한 마리가 설쳐댄다면 과거가 현재를 혼탁하게 흐려놓을 수 있는 애매한 시간이다.

어느 날 지하철역에서 5년 만에 만난 고바야시 료코. 잠깐 차라도 한잔하면서 대화를 나누려는 옛 남자의 처량한 제의를 거절하고, 연락처만 주고받은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거리 속 무뚝뚝한 사람들 속으로 차분하게 사라진 그녀. 남자의 자동응답기에 한 가지 상담해 줬으면 하는 게 있다고, 그래서 내일 다시 전화하겠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영원한 과거 속으로 영영 사라진 그녀. 어제만큼은 냉정하게 자신의 발걸음을 내디뎠던, 아직 몸속에서는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었던 그녀가 오늘은 시체안치소의 싸늘한 시신으로 누워 있다. 이렇게 추억 속의 그녀가, 과거 속의 그녀가 마치 환상 속의 실루엣처럼 그에게로 다가왔다가 뜬구름처럼 사라진다. 이제 남은 일은 사라지지는 않지만, 무슨 일이 없으면 지금의 삶에 관여할 리가 없는 과거가 우연과 찰나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5년 만의 재회를 계기로 미꾸라지 같은 헤살꾼이 되어 그 남자, 변호사 스모토의 삶을 송두리째 뒤엎는 일이다.

찰은 로쿄의 죽음을 클럽을 경영하던 마담과 조폭이 얽힌 치정에 의한 그렇고 그런 살인 사건이라고 단정 짓지만, 스모토는 료코의 어린 시절을 추적하던 중 호적상의 ‘고바야시 료코’가 자신이 아는 그녀와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품고, 그 순간부터 그는 자신이 맡은 사건과 의뢰를 모두 팽개치고 료코 사건에 매달린다는, 몇십 년 동안 눈물 한 번 흘린 적이 없다는 삐딱한 변호사 스모토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비정하고 우울한 분위기가 흠뻑 묻어나는 하드보일드 풍의 추리 소설이 바로 가노 료이치(香納 諒一)의 『환상의 여자(幻の女)』다. 끝까지 마음을 놓지 못하게 하는 깊고도 깊은 미스터리가 진국이지만, 짧은 만남 속에서 평생을 간직할 수 있는 길고도 긴 여운을 맺은 스모토와 로쿄의 애틋하고 서글픈 사랑이 한껏 부러움을 자아내기도 하는, 팽이처럼 빠르게 돌아가는 피곤한 삶 속에서 무뎌질 대로 무뎌진 현대인의 감성을 살포시 자극하는 작품이다.

군가를 처음으로 만나 서로 알고 지내게 되면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려고 할 때 그 사람의 과거를 모르면 할 수 없지만, 만약 알고 있다면, 그리고 그 과거가 내심 그 사람에 대해 내린 앞선 판단과 완전히 어긋난다 해도 당신은 그 사람의 과거를 머릿속에서, 그리고 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완전히 떨쳐버릴 수 있는가. 과거는 언제든지 지나가 버리지만, 때론 『환상의 여자』처럼 유령처럼 스리슬쩍 다가와 진흙탕 속 미꾸라지처럼 현실을 흐려놓으면서 물귀신처럼 발목을 잡고 늘어진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도피하기는 쉬워도 과거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환상의 여자』는 설령 그로 말미암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더라도 사람이 얼마나 과거에 집착하고 사는지, 또한, 과거로부터 얼마나 큰 속박을 받고 사는지를 미스터리 속에서 가늠해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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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3일 일요일

[책 리뷰] 미워할 수 없는 아름다운 살인자 ~ 알렉스(피에르 르메트르)

Alex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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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할 수 없는 아름다운 살인자

원제: Alex by Pierre Lemaitre
불행한 여자, 곧잘 계획적이면서도 나약하고, 고혹적이면서도 자멸의 충동에 시달리는, 경찰이 아무리 수사망을 넓혀도 결국 미지의 인물로 남아 있는 살인범, 거대한 이 밤의 여인 알렉스 흘릴 눈물조차 메말라버린 알렉스. (『알렉스(Alex)』, p372)

은 새장 속에 갇혀 고통받는 아름다운 여인, 고어물에나 등장할법한 잔인한 수법으로 여섯 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범, 평생 아물 수 없는 가혹한 상처를 입은 여린 소녀. 경악을 금치 못할 잔혹한 살인범이지만 끝내 독자의 마음속에 연민과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이토록 사람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 비참하면서도 애처로운 사연을 단말마처럼 남기고 떠난, 미워할 수 없는 가련하고 아름다운 살인자 알렉스. 어떤 이유로든 살인은 정당화될 수 없다면, 소녀의 마음속에 살의를 품게 하는 파렴치하고 간악한 자들의 행태는 정당한가. 한 소녀의 정신적 성장마저 가로막은, 마음속 깊이 무겁게 가라앉은 십 년 묵은 원한이 시위를 당긴 화살이 원수에게 명중하지 못한다면 결국 되돌아와 자신에게 치명상을 입히리라는 것을, 원수가 아니면 자신이 죽어야 하는 이토록 절박한 상황에서도 살인은 미워해야만 하는 죄인가?

워할 수 없는 아름다운 살인자가 등장하는 『알렉스(Alex)』는 저자 피에르 르메트르(Pierre Lemaitre)의 다른 작품 『실업자(Cadres Noirs)』처럼 범죄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양산해낸다는 나름의 철학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사회파 미스터리다. 이런 점만이 아니라 『알렉스(Alex)』에 등장하는 두 주인공 ‘아름다운 살인자’ 알렉스와 알렉스를 추적하는 ‘땅딸보’ 형사 카미유의 (솔직히 말해 두 사람의 육체적 대조가 더 흥미롭지만) 심리적 설정과 구성은 여타 범죄 소설과는 달리 단순하지도 만만하지도 않다. 알렉스처럼 카미유도 지워지지 않는 내면의 상처를 안고 산다. 명색이 강력계 형사임에도 납치범으로부터 아내를 구해내지 못한 자괴감과 예술과 양육에서 예술을 선택하며 자신을 버린 냉정한 어머니에 대한 애증은 강박관념처럼 카미유의 신경 세포들을 괴롭힌다. 그래도 세월 속에 상처가 조금씩 아무는가 싶었더니 알렉스의 납치 사건을 통해서, 그리고 알렉스의 과거를 통해서 카미유의 상처는 다시 터질 수밖에 없으니 이 얼마나 얄궂은 운명의 장난인가. 알렉스를 추적하며 자신의 상처도 다시 돌아봐야 하는 울지도 웃지도 못할 상황에서 카미유는 알렉스를 구렁텅이에서 구해내야만 자신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운명적인 계시를 받았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알렉스에 대한 집요한 추적에는 단순히 형사의 의무가 아니라 마치 자신과 싸우고 집 나간 딸을 찾는 아빠의 간곡함과 애틋함마저 느껴지기 때문이다.

로 쫓고 쫓기며 생존 대결을 펼치는 살인마와 형사지만, 정서적 안정을 기반으로 인격의 기초가 다져져야 하는 가정이 뿌리째 뽑혀버렸다는 점과 납치 사건의 피해자라는 점에서 알렉스와 카미유 두 사람은 같은 상처를 안고 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카미유는 알렉스의 가슴 아픈 과거가 밝혀지기 전에 이미 그녀의 살인에서 단순한 광적 기질이 아니라 애틋하고 수수로운 뭔가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다. 이러한 카미유와 알렉스의 묘한 공감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카미유의 스케치 실력에서 어렴풋이나마 드러난다. 틈만 나면 알렉스의 초상화를 그리는 카미유의 집념에는 단순히 몽타주를 완성하겠다는 직업적 의무 그 이상의 무언가가 담겨 있다. 카미유의 그림 속 그녀는 생글거리며 웃거나 하염없이 울기도 한다. 때론 뭔가 하고픈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파르르 떨고 있다. 형사임에도 감히 살의를 품어서는 안 될 대상에까지 강한 살의를 품곤 하는 카미유는 몽타주를 빙자한 초상화를 그림으로써 알렉스의 고적한 살의와 아물지 않는 상처를 어루만져주면서 동병상련의 교감을 나누고 싶었을까? 하지만, 끝내 살아있는 실물은 보지 못했으니 ‘인생은 미완성’이라는 노래 가사처럼 그리다 만 초상화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작은 괴짜 형사 카미유와 세상에서 가장 가련하고 아름다운 살인자 알렉스의 이루어지지 못한 만남은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며칠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까칠한 보풀을 일으키며 마음을 심란하게 한다. 한마디로 추리 소설적인 스릴감과 범죄 소설적인 통쾌함에 이례적으로 도스토옙스키적인 내면의 고독과 투시까지 겸비한 범죄 소설 같지 않은 범죄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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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3일 월요일

[책 리뷰] 만약 2차 세계대전이 추축군의 승리로 끝났다면? ~ 높은 성의 사내(필립 K. 딕)

The Man in the High Castle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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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2차 세계대전이 추축군의 승리로 끝났다면?

원제: The Man in the High Castle by Philip K. Dick

조가 말했다.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 먹기 시작했다.

“우리도 그들과 같은 처지였다면 그들이 저지른 짓을 그대로 했을 거야. 그들은 공산주의로부터 세계를 구했어. 독일이 없었다면 우리는 빨갱이 세상에서 살았겠지. 지금보다 더 끔찍했을 거야.”

“아무렇게나 말하네. 라디오처럼, 횡설수설.”

줄리아나가 말했다. (『높은 성의 사내』, 150쪽)

실만을 연구하는 역사에서 가정은 의미가 없다. 그래서 사실만을 나열하면 사서(史書)가 되고 여기에 문학적 상상력을 보태면 역사소설이 된다. 하지만, 역사를 다양하게 읽고 싶은 일반인의 처지에서 과거에 일어났던 중요 사건에 ‘만약’과 ‘문학적 상상력’ 도입하여 파생된 새로운 역사를 상상하는 것만큼 흥미진진한 일도 없다. 그중에서도 단연코 만인의 관심을 이끌 수 있는 질문은 ‘만약 2차 세계대전이 추축군의 승리로 끝났다면 세상은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이다. 전쟁사를 좋아하는 일반 독자뿐만 아니라 전쟁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이라 할지라도 사석에서 농담삼아 한 번쯤은 던져봤을법한 질문이지 않은가?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 『유빅(Ubik)』의 작가 필립 K. 딕(Philip K. Dick)의 또 다른 작품 『높은 성의 사내(The Man in the High Castle)』는 일반적인 SF 소설과는 달리 미래가 아니라 가상의 역사를 그렸다. 그 가상의 역사는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 것이 아니라 히틀러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추축군의 승리로 끝난 역사다. 진지한 역사학자들은 이 작품에 일말의 가치를 두기는커녕 냉소로 일관하겠지만, 구름 따라 바람 따라 정처 없이 떠도는 방랑객처럼 호기심 따라 여러 장르, 여러 작가의 작품을 오가는 필자 같은 방랑독서가들에겐 『높은 성의 사내』 같은 작품들은 별종을 맛본다는 점에서 반갑기 그지없다. 고로 『높은 성의 사내』를 펼쳐들기 전에 나름의 역사적 지식과 추론 능력을 총동원하여 추축군의 승리로 끝난 세계는 과연 어떤 세상일지 미리 상상해보고 나서 작품을 탐독하는 것도 과히 나쁘지는 않다.

전국이 대체로 승전국의 문화를 흡수하듯 (승전국) 일본의 (패전국) 미국 점령지역에서는 미래의 운명을 점지해 주는 주역이 유행이다. 상류층인 일본인부터 하층계급인 백인까지 주인공들은 무슨 중요한 일, 혹은 어려운 일에 부딪힐 때마다 주역으로 점을 친다. 점괘는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현실처럼 애매모호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꿈보다 해몽이 좋듯, 점을 친 사람들은 점괘에서 나름의 설명과 해법을 구한다. 점괘가 맞는지 틀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수수께끼 같은 점괘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점을 친 사람의 바람과 이해득실이 무의식중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소설 『높은 성의 사내』 속에서 연합군이 승리한 세상을 그린 아벤젠의 소설 「메뚜기는 무겁게 짓누른다」를 두고 점을 친 결과에 대한 릴리아나의 해석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그녀는 아벤젠의 책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그녀에겐 연합군이 승리한 세상이 진실이고 자신들이 사는 세상은 거짓이다. 사람은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릴리아나처럼 일본에 점령당한 현실이 우울하면 우울할수록 믿음은 더욱더 현실도피적인 경향을 띠기 마련이다. 하지만, 릴리아나의 집념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점령국인 일본 고위관료 다고미가 사후세계라고 착각한 환상 속에서 잠시 겪는 또 다른 세상이 바로 릴리아나가 믿는 연합군이 승리한 세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품은 상반된 두 세계 중 어느 세계가 실제이고 허구인지 더는 파헤치지 않는다. 다양한 현실과 그에 따른 다양한 미래가 존재한다는 평행현실, 평행우주 이론은 이 작품에서는 밋밋하게 마무리되지만, 이후 작품인 『유빅』에서는 주요 소재로 등장하여 독자를 매료시킨다.

행현실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도(道), 선과 악, 음과 양, 해탈과 죽음, 실재와 환상 등 소설가를 꿈꾼 철학자(혹은, 철학자를 꿈꾼 소설가)답게 철학적인 요소들이 표면적으로나마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기에 터미널이나 기차역 간이 매점에서 종종 사서 읽는 가벼운 라이트소설로 생각하고 무심히 펼쳤다간 당황하고 실망할 수 있는 소설이 필립 K. 딕의 『높은 성의 사내』이다. 하지만, ‘만약’으로 시작된 단문의 가정에 추리에 추리를 거듭하고 상상력을 덧붙여 ‘대체 역사소설’이라는 한 장르로 완결지은 점은 높이 평가하고 싶다. 솔직히 소설 속 세상은 별로 반갑지는 않지만, 안전하게 소설로만 즐기는 것은 충분히 봐줄 만한 일이며 혹자에겐 재미있는 읽을거리인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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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9일 월요일

[책 리뷰] 삶이 가진 예측 불가능함의 필연성 ~ 작년을 기다리며(필립 K. 딕)

Now Wait for Last Year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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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가진 예측 불가능함의 필연성

원제: Now Wait for Last Year by Philip K. Dick
“그놈의 시간여행 약을 먹고 머리가 이상해지기라도 한 건가? 그래서, 자네 앞에서 작고 하찮은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어? 옆이나 뒤가 아니라? 혹시 작년이 다시 되돌아와 주기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거야?” 에릭은 손을 뻗어 메모지를 집어 들었다. “정확한 지적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작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다시 와줄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군요.” (『작년을 기다리며』, 358쪽)

소위 말하는 순수문학이든, 아니면 추리소설, SF소설 등을 한데 묶는 장르소설이든, 소설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 그 자체와 그 인간들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유기적으로 기능하는 사회와 그 사회가 생산하는 문화에 대한 다각적 관찰과 그에 따른 다양한 해석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SF소설은 현실에서 전혀 일어나지 않을 법한,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그래서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소재로 인간을 설명하고 인간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려는 하나의 방법론으로 접근할 수 있다. SF소설이라고 해서 인간과 인간 사회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나 고찰이 빠진 채 그저 과학적 • 기술적 상상력을 발흥하여 단순한 흥밋거리를 제공하는 것에만 그친다면 그저 그런 삼류소설과 다름없다.

필립 K. 딕(Philip K. Dick)의 작품들이 그의 사후에도 꾸준히 재평가를 받으며 재판되는 이유는 그의 작품들은 시간 보내기 용이나 흥미 위주의 SF 소설이 아니라 제한적이며 규격화된 현실의 상황만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인간의 내면과 실존 문제를 파헤치는데 SF 소재를 사용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SF소설의 품격과 위상을 높인 그만의 독특한 혜안이 있었기에 우리는 여전히 그의 작품을 읽을 수밖에 없다.

금까지 읽은 필립 K. 딕의 작품 중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유빅』에 이어 세 번째인 『작년을 기다리며(Now Wait for Last Year)』에는 인류의 문명이 발생한 이후 인간 사회에 끊이지 않는 논란과 문젯거리를 제공해 온 ‘결혼’에 실패한 인공장기 이식 전문의 에릭 스위트센트가 등장한다. 그는 아내의 사악한 계략에 걸려 JJ-180이라는, 외계 문명과 전쟁 중인 지구에서 적국을 섬멸하고자 만든 최악의 마약을 복용한다. 덕분에 그는 평행우주의 실체를 몸소 체험하고 다양한 미래를 경험하게 되면서 현실과 평행한 또 다른 세계에 사는 미래의 ‘나’를 만난다. 미래의 또 다른 에릭들은 거두절미하고 마약 때문에 폐인이 된 아내 캐시와의 관계를 일찌감치 끊으라고 조언한다. 그래야만 평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릭은 미래를 여행함으로써 마약에 찌든 아내가 어떤 결말을 맞을지, 그것이 자신에게도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미래의 또 다른 ‘나’의 강고한 조언이 있었음에도 아내를 저버리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떤 결말이 올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음에도, 그것이 설령 파국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일으킬지라도 인간은 종종 그러한 선택을 자행한다. 여기에는 어떠한 논리적 • 과학적 설명도 필요 없으며 들어맞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자율제어식 택시의 말대로 인생은 그런 식으로 구성된 현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아내가 악독하고 파렴치한 여자라 할지라도 병든 아내를 차마 저버릴 수 없는 인지상정은 비합리적이며 비이성적일 수도 보일 수도 있지만 바로 그러한 인간성 때문에 인간은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작년을 기다리며』는 아무리 많은 미래를 볼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필연이 아니라 일어날 법한 수많은 경우의 수 중 하나일 뿐임을 환기시켜 준다. 예상한 대로, 예측한 대로 인간이 행동하고 사회가 기능한다면, 그것은 프로그래밍한 대로 움직이는 로봇의 삶과 다름없으며 허무와 권태의 극치이다. 삶이 가진 예측 불가능함의 불가결함을 다중현실이라는 SF적 요소에 자신만의 독특한 필치와 깊이 있는 안목을 결합시켜 완성시켰다는 점이 바로 필립 K. 딕의 『작년을 기다리며』의 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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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25일 일요일

[책 리뷰] 생명의 소실과 엔트로피 증가, 그리고 실존 ~ 유빅(필립 K. 딕)

Ubik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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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소실과 엔트로피 증가, 그리고 실존

원제: Ubik by Philip K. Dick

“UN은 반생명을 금지해야 해.” 조는 말했다. “생과 사의 자연스러운 순환 과정에 간섭하는 그런 기술 따위는.” (138쪽)

“손님 같은 분은 안 오시면 좋겠군요. "스피커가 말했다. 조는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언젠가 때가 오면 나 같은 사람들이 들고일어나서 너 같은 놈들을 쫓아낼 거야. 자동조절식기계의 횡포가 종언을 맞고, 인간적 가치, 인정, 따스함의 시대가 되돌아오는 거지. 그러면 힘든 일을 겪은 뒤에 기운을 차리고 억지로 일하기 위해서라도 한 잔의 뜨거운 커피가 절실하게 필요한 나 같은 사람은 1포스크레드가 있든 없든 간에 뜨거운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될걸.” 그는 크림이 든 조그만 용기를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런데 너, 이 크림인지 우유인지 모를 게 썩었다는 거 알아?” 스피커는 침묵을 지켰다. (『유빅(Ubik)』, 141~142쪽)

주의 대법칙인 엔트로피 증대의 법칙에 따라 엔트로피(entropy), 즉 무질서도는 시간에 따라 보존되지 않고 증가한다. 이 법칙은 우주뿐만 아니라 사람의 육체를 포함한 생명체에도 적용된다. 오스트리아의 양자물리학자인 슈뢰딩거(Schrödinger)는 생명을 아주 넓은 의미에서 즉각적으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 즉 연기가 대기로 흩어지는 것처럼 무질서하게 빠르게 흩어져버리는 상태로 소멸되지 않는 무엇이라고 정의했다. 이 말은 생명은 엔트로피가 무한정 증가하는 것을 억제하는 균형이나 질서, 혹은 그런 질서를 유발하는 흐름이나 효과이며 이것을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생리학자 루돌프 쇤하이머(Rudolph Schoenheimer)는 동적 평형(動的平衡, dynamic equilibrium)이라고 불렀다. 한마디로 생명체에게 있어 무질서도의 증가는 노화와 죽음을 의미한다.

리는 통상적으로 심장이 작동을 멈추면 죽음을 선고한다. 그렇다면 심장이 멈춘 직전과 직후의 엔트로피 값 차이는 얼마나 날까. 정말로 영혼의 무게가 던컨 맥두걸(Duncan MacDougall) 박사가 1907년 과학저널에 발표한 연구 논문대로 21g이라고 한다면 그 차이는 미미하다. 이 말은 지금 막 심장이 멈춘 사람은 비록 듣지도, 보지도, 말도 못한다 할지라도 엔트로피 수치상으로는 완전히 분해된 우주 속 먼지보다는 아직은 생명에 가깝다는 뜻이다. 죽음이 선고되었을 때, 그리고 엔트로피가 급격히 증가하기 전, 좀 더 실재적인 말로 설명하자면 부패를 겪기 전에 그 사람을 급속 냉동시킨다면, 비록 그 사람이 죽음으로 말미암은 육체적 기능의 정지로 일반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는 없을지라도 아직 완전히 소멸하지 않은 생명의 질서, 혹은 흐름의 잔흔은 남아있지 않을까. 이른바 필립 K. 딕(Philip K. Dick)의 공상과학 소설 『유빅(Ubik)』에서 말하는 반(半)생명 상태에서 감지할 수 있는 영자(靈子) 같은 것 말이다.

『유빅』에서는 냉동으로 보존된 반생자(半生者)의 희미한 대뇌 작용, 즉 영자를 감지하는 특수한 장비를 이용해 산 자와 죽은 자가 마치 전화기로 통화하듯 대화를 나눈다. 소설 『유빅』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산 자들만이 경험하는 현실이 존재하듯, 반생자에게도 그들만의 현실을 배정한다. 반생자들은 냉동된 상태에서 산 자의 세계와 격리된 채 잠자며 꿈만 꾸는 것이 아니라 산 자의 세계를 그대로 복제한 듯한, 그리고 산 자들의 세계의 살벌한 약육강식의 법칙도 그대로 물려받은, 이승도 아니고 저승도 아닌 현실처럼 만만치 않은 또 다른 세상에서 투쟁적이고 위태로운 제2의 삶을 살아간다. 그렇다면 산 자와 반생자의 삶에서 어느 쪽이 진짜 현실이고 어느 쪽에서의 죽음이 진짜 죽음인가. 그리고 그 사람의 실존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는가.

상하는 사람의 관점이나 가치관에 따라 SF 영화는 특수 효과가 생명일 수도 있다. 그런 사람에겐 오래된 SF 영화는 빛바랜 흑백 사진처럼 향수를 불러오는 추억의 영화가 될 수는 있지만, 요즘 영화 같은 스펙타클한 감흥을 맛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시대를 개의치 않는 탁월한 상상력과 기발함을 생명으로 탄생한 SF 문학은 다르다. 오히려 너무 시대를 앞지른 상상력 때문에 첫 발간 당시에는 빛을 보지 못했다가 훗날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문화적 기반과 과학적 가치관이 뒷받침되는 시대를 맞이하고서야 인정받는 작품들이 있다. 바로 필립 K. 딕의 작품이 그러하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유빅』은 사람의 삶과 죽음을 가르는 엄숙한 경계를 독창적인 상상력이 안무하는 리듬에 맞춰 냉정하게 춤추는 순발력 있는 필치로 뒤흔드는 SF 요소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서도 개운하게 가시지 않는 미스터리 요소를 훌륭하게 접목시킨, 안 보면 두고두고 후회할 작품 중 하나인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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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4일 일요일

[책 리뷰] ‘영화가 건드리지 못한 수많은 이야깃거리’ ~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필립 K. 딕)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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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건드리지 못한 수많은 이야깃거리’

원제: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 by Philip K. Dick
“당신의 양은 진짜인가요?”라고 묻는 것은, 누군가에게 당신의 치아나 머리카락이나 내부 장기가 검사를 통해 진짜인지 확인받았느냐고 묻는 것보다도 더 무례한 행위였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21쪽)

영화의 빛나는 영광의 그늘 속에 숨은 원작

SF 영화광치고 해리슨 포드(Harrison Ford)가 주연한 불후의 명작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1982)」를 두 번 이상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어렴풋한 기억으로 더듬어봐도 최소 세 번은 본 것 같은데, 그만큼 이 영화는 SF 장르에서 조지 루커스(George Walton Lucas Jr.) 감독의 「스타워즈(Star Wars)」 시리즈와 쌍벽을 이루는 전설적인 영화다. 하지만, 영화에 감명받은 나머지 영화의 원작 소실인 필립 K. 딕(Philip K. Dick)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까지 읽어 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는 작품성을 따지고자 할 때 영화와 그 영화의 원작은 별개로 쳐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그렇다고 원작을 각색한 영화에 대한 깊이 있는 감상을 고려할 때, 서로 완전히 떨어져 놓고 생각할 수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영화만 봤을 때 확실하게 이해할 수 없거나 진행과 구성에서 뭔가 띄엄띄엄 넘어간다고 생각했던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원작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오롯이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것은 원작을 영화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실수, 혹은 의도적인 생략과 변형에서 비롯된 결과이기에 원작을 보지 않고서는 영화에서의 뭔가 매끄럽지 못한 점이나 모호함이 있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상업 영화가 추구하는) 화려한 영상미와 빠르고 긴박한 진행, 그리고 교묘한 편집에 감춰지기에 원작을 읽지 않은 관객은 그러한 모순이 있는지조차 파악할 수 없다.

영화가 무엇을 건지고 무엇을 놓쳤는지를...

럼에도, 난 「블레이드 러너」는 매우 훌륭한 SF 영화라고 본다. 특히 원작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과는 달리 식민지에서 사람을 죽이고 지구로 탈출한 복제 인간(원작의 ‘안드로이드’) 로이를 자신(복제 인간)을 사냥하는 현상금 사냥꾼 데커드를 위해 희생함으로써 복제 인간의 숙명과 그 숙명이 빚어낼 수밖에 없는 비극적 한계를 극적으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찬사를 보내주고 싶다. 하지만, 영화는 원작에만 있는 또 다른 이야깃거리인 데커드가 (원래 그의 직업이긴 하지만) 그날따라 왜 안드로이드를 사냥했는지에 대한 구구절절한 사연과 가짜 동물과 진짜 동물에 대한 이야기를 생략했음에도 이 이야기들을 알아야만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대화가 - 실수인지 의도적인지는 모르겠지만 - 고스란히 삽입되어 있다 . 바로 데커드가 복제 이간을 제조하는 타이럴(원작의 ‘로즌’) 회사에서 레이첼과 나눈 대화 중 올빼미(혹은 부엉이)에 대한 이야기다. 두 사람은 사무실에 있는 올빼미가 인조인지 진짜인지, 그리고 가격은 얼마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나눈다. 원작에서 올빼미는 레이첼이 현재 지구에서 하나뿐인 진짜라고 데커드를 속이면서까지 협상 카드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물건’이다. 영화에서는 레이첼이 바로 가짜라고 인정하면서 가격은 아주 비싸다고 덧붙이는 것으로 가짜 동물에 대한 이야기는 싱겁게 끝난다.

(원작에서) 데커드는 그날 출근하면서 옆집 사는 이웃 바버가 키우는 진짜 살아있는 페르슈롱 말을 보며 자신도 진짜 동물을 갖고 싶다는 욕구와 희망을 품는다. 사실 데커드는 이전부터 양을 한 마리 키우고 있었지만, 그것은 1년 전에 죽은 진짜 양을 대신한 가짜 동물인 전기양이다. 세계최종대전으로 사람을 제외한 생명체 대부분이 멸종된 지구에는 진짜 동물을 키우는 것이 언제부터인가 유행으로 자리 잡았으며 동물이 희귀할수록, 그리고 더 클수록 부의 상징이 되었다. 지구를 황폐화시킨 인류가 황폐한 지구에 살면서 황폐한 마음을 달래주고, 한편으로는 인류가 처한 황폐한 상황에도 여전히 왕성한 허영심도 채워줄 위안거리로 선택된 것이 살아있는 진짜 동물인 것이다. 그래서 그날 데커드는 진짜 동물을 장만할 자금을 마련하고자 굳이 안드로이드 사냥을 나선 것이다. 사정이 그러했기에 레이첼은 올빼미를 미끼로 데커드를 유혹할 수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옮긴이의 지적대로 원작에는 영화가 건드리지 못한 수많은 이야깃거리가 더 있고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을 읽어야만 진정으로 영화가 무엇을 건지고 무엇을 놓쳤는지를 알 수 있다 . 여기에 한마디 더 덧붙인다면 영화를 인상깊게 본 관객이라면 원작도 인상적일 정도로 괜찮은 소설이라는 것이다.

여전히 유효한 소설의 메시지

설이 발표되고 나서 시간이 지날수록, 과학 기술이 발전하고 그래서 사람들의 과학적 눈높이가 올라갈수록 퇴색될 수 있는 것이 SF라는 장르가 가진 단점이지만, 꼭 모든 SF 소설이 그런 것은 아니다. 50여 전에 발표한 필립 K. 딕(Philip K. Dick)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이 제시한 안드로이드라는 소재는 아직도 실현되지 않은 인류의 꿈이자 소망이기에 여전히 매력적이고 강한 흡입력을 발휘한다. 또한, 소설이 안드로이드와 인류 사이의 대립과 갈등, 가짜 동물로는 결코 충족시켜줄 수 없는 사람과 살아있는 다른 생명체들 사이의 유기적 관계로 기대할 수 있는 감정 교류 등이 시사하고자 했던 쟁점들은 오히려 발표 당시보다 더 두드러졌다. 왜냐하면, 소설이 발표될 당시에는 단지 막연한 꿈이었던, 그래서 단순한 재미와 흥밋거리로만 읽혔던 안드로이드라는 소재가 이제는 언젠가는 실현될 미래 기술 중 하나로 가시화되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안드로이드도 사람처럼 꿈을 꾼다면 그 꿈에 나타나는 동물이 전기양일지 혹은 진짜 양일지에 대한 다소 황당한 호기심에서부터, 안드로이드가 비록 사람 같은 내밀한 감정은 없더라도 정교하게 프로그램화된 감정을 통해 상황에 맞추어 적절하게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면 데커드가 고민했던 것처럼 과연 사람은 그 안드로이드를 기계로 대할 수 있을지 등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 시대에 앞서 한 번쯤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의문을 자아내는 필립 K. 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의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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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14일 일요일

[책 리뷰] 엄밀한 과학적 상상력과 풍부한 문학적 창작력 ~ 삼체. 2 - 암흑의 숲(류츠신)

The Dark Forest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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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한 과학적 상상력과 풍부한 문학적 창작력이 일궈낸 놀라운 작품

원제: 黑暗森林(The Dark Forest) by 刘慈欣(Cixin Liu)
“아이가 품에서 굶어 죽는 것과 인류의 문명을 존속시키는 것, 둘 중에 뭐가 더 중요할까요?” (『삼체 2부: 암흑의 숲』, 510쪽)

생존의 딜레마에 빠진 우주 문명

체(三體, three-body) 세계에는 ‘우주를 있는 그대로 비춤으로써 자신을 감추는 것이 영원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라는 명언이 있다. 우주에서 문명을 오래 유지하고 싶으면 어딘가에 존재하는 우주의 다른 문명에 위치나 정체가 발각되지 않게 마치 투명인간처럼 꼭꼭 숨으라는 말이다 . 이것은 생존의 딜레마 때문에 극도의 긴장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우주라는 ‘암흑의 숲’의 본질을 꿰뚫는 명언이다. 생존의 딜레마 개념은, 첫째, 생존은 문명의 첫 번째 필요조건이다. 둘째, 문명은 끊임없이 성장하고 확장되지만, 우주의 물질 총량은 불변한다는 우주사회학(Astrosociology)의 공리에서 출발한다. 우주의 물질 총량은 변하지 않지만, 생명은 지수적으로 증가한다. 고로 서로 다른 문명이 생존을 두고서 벌이는 충돌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삼체 문명(Trisolarans)처럼 우주 공간을 장기간 항해할 수 있는, 아니면 최소한 인류처럼 우주를 탐색할 정도의 기술과 지능을 보유한 문명이라면 언어와 문화를 이용한 다양한 소통으로 파국적인 결말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같은 언어,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지역 사회나 이웃끼리도 소통의 어려움을 일상적으로 체험하는 것이 인류의 현주소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국가 간에 발생하는 사소한 마찰도 소통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전쟁도 불사하지 않는 것이 인류다. 그런 인류가 인류 문명과는 근본부터가 다른 진화사와 문화를 가진 외계 문명과 원활한 소통이 가능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우주사회학에서는 어불성설이다.

‘의심의 사슬’, 모든 문명이 사슬의 양 끝점에 놓인다

구 문명이 안드로메다 문명과 서로 신호를 주고받았다고 가정해보자. 안드로메다 문명이 지구 문명을 착한 문명으로 생각하더라도, 우주사회학 첫 번째 공리에 따라 지구 문명은 아무런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안드로메다 문명을 착한 문명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러니까 안드로메다 문명은 지구 문명이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없다. 만약 안드로메다 문명이 지구 문명을 착한 문명으로 생각하고 지구 문명도 안드로메다 문명이 지구 문명을 착한 문명으로 여긴다는 것을 안다고 가정하자. 그래도 ‘지구 문명이 안드로메다 문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안드로메다 문명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지구 문명은 알 수 없다. 이러한 의심의 고리는 계속 늘어나면서 ‘의심의 사슬’이라는 우주사회학의 또 다른 개념을 이룬다. 착한 문명이든 악한 문명이든, 문명의 특징과 사회 형태, 도덕 성향과는 다르게 모든 문명이 사슬의 양 끝점에 놓이는 것이 ‘의심의 사슬’이다 .

기술 폭발’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지자(Sophon)

편, 우연히 만난 두 문명의 발전 정도가 서로 다를 수도 있다. 인류와 삼체 문명처럼 한쪽은 아주 강하고 한쪽은 아주 약해서 서로 위협이 안 되는 경우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는 우주사회학의 마지막 개념 ‘기술 폭발’로 무시될 수 있다 . 5,000년이라는 인류 문명사에서 현대 기술은 고작 300년 사이에 급속하게 발전했다. 우주의 시간을 기준으로 보면 그건 발전이 아니라 폭발이다. 이것은 모든 문명의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해준다. 인류의 기술이 폭발적으로 발전하는 데 걸린 300년이라는 시간이 우주의 다른 문명보다 느리다고, 그렇다고 빠르다고도 말할 수 없다면, 다른 문명의 기술 폭발은 더 맹렬할 수도 있다. 만약 삼체 문명이 인류와의 소통을 선택하고, 인류에게 자신들이 이룩한 기술과 정보를 전수한다면 인류의 기술 폭발은 지금보다 더 맹렬해질 수 있다. 그러다 어느 날 청출어람이 되어 인류의 과학 기술이 삼체 문명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삼체 문명은 지구에 수많은 지자(Sophon: 삼체 문명이 지구에 심어놓은 소립자 스파이)를 파견하여 인류의 기초 물리학 발전을 동결시킨다. 지자는 삼체 문명이 지구에 도착하는 데 걸리는 400년이란 시간 동안 인류의 ‘기술 폭발’을 차단하기 위한 일종의 안전장치다.

‘침묵’도 답이 될 수는 없다

렇다면, 침묵은 어떨까? 인류가 발견한 외계 문명의 기술 수준이 원시적인 수준이라면 침묵도 답이 되지 않을까? 침묵이 침묵하는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그들도 언젠가는 지구가 자신들을 발견한 것처럼 지구를 발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기술 수준이 지금은 원시적이라도 언제까지 그 상태로 머무를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렇다면 그들의 문명이 현재는 지구보다 약하더라도 언제든 기술 폭발이 일어나 인류를 앞지를 수 있다는 의심의 사슬이 생긴다. 결론적으로 그들의 존재, 즉 다른 문명의 존재가 인류 문명에 위협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문명이 다른 문명의 존재를 알게 되면 교류할 수도, 침묵할 수도 없다. 오직 한가지 선택밖에 없다 .

‘암흑의 숲(The Dark Forest)’을 유랑하는 순진한 아이, 인류

울하고 어두운 우주의 냉혹한 적자생존 논리를 『삼체 2부: 암흑의 숲』의 주인공 뤄지는 간단하게 ‘암흑의 숲(The Dark Forest)’이라고 명명한다. 삼체 문명으로부터 인류의 구원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진 면벽자(面壁者, Wallfacer) 뤄지(Luo Ji)의 설명을 들어보자.

“우주는 암흑의 숲이에요. 모든 문명이 총을 든 사냥꾼이죠. 그들이 유령처럼 숲 속을 누비고 있어요. 길을 가로막는 나뭇가지를 살며시 치우고 발소리를 최대한 줄이고 숨소리조차 낮추고……. 조심해야 해요. 숲 속에 곳곳에 사냥꾼들이 숨어 있으니까요. 다른 생명을 발견하면 그게 사냥꾼이든 아니든, 천사든 악마든, 갓난아기든 꼬부랑 노인이든, 소녀든 소년이든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뿐이에요. 총을 쏴서 없애버리는 거죠. 이 숲에서 타인은 그 자체만으로 지옥이고 영원한 위협이에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그 어떤 생명도 곧바로 없애버려야 해요. 이것이 바로 우주 문명이고 페르미 역설에 대한 해석이에요.” (『삼체 2부: 암흑의 숲』, 669~670)

이러한 ‘암흑의 숲’에서 우주로 신호를 보내는 일은 ‘나 여기 있어요. 나 잡아보세요.’라고 순진하게 외치는 꼴이다. 우주에 있을 수많은 문명은 이런 신호를 무시하겠지만, 반대로 수많은 문명은 만약을 위한 조처를 할 가능성도 있다. 『삼체 2부: 암흑의 숲』의 논리를 그대로 현재에 적용하면 외계 지적생명탐사(SETI)는 자칫 잘못하면 자살 행위가 될 수도 있다.

우주는 공허하리만큼 조용하다. 어딘가에 있을 외계 문명은 일찌감치 ‘생존의 딜레마’ 문제를 깨닫고 자신들 문명의 존속을 위해 맨 앞에서 언급은 삼체 문명의 격언을 본받아 투명한 존재가 되기를 선택한 것이다. 어쩌면 차갑고 어둡고 생명에 적대적인 광활한 우주 공간 자체가 문명과 문명을 보호해주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장벽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류는 그 장벽을 허물고 그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한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인류의 염원이기도 하다. 인류는 그 장벽 밖의 세상을 꿈꾸어왔다. 인류는 그 장벽 밖의 아득한 어둠과 그 어둠에 외로이 저항하는 무수한 별빛이 자아내는 경이로운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하지만, 류츠신은 인류에게 자신의 소설 『삼체』 시리즈를 통해 조심스럽지만, 엄중하게 경고한다. 인류의 오랜 꿈이 인류를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이끌 수도 있다는 것을 .

엄밀한 과학적 상상력과 풍부한 문학적 창작력

주사회학은 류츠신(刘慈欣, Cixin Liu)이 『삼체 2부: 암흑의 숲』을 통해 세상에 처음 소개하는 학문이다. 하지만, 생각만큼 낯설지 않은 명칭을 가진 이 학문은 우주 곳곳에 거대 문명이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별만큼이나 많이 존재하고 그 문명들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다고 전제한다. 아직도 많은 과학자가 우주 어딘가에 인류 같은 지적생명체 존재하리라는 것에 회의적이라는 현실에 비추어보면 우주사회학이 당장 대학의 한 강단을 차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사실 우리는 우리들의 사회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 존재 가능성이 희박한 외계 문명을 연구한다는 것은 인류의 능력을 한참이나 넘어서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삼체 2부』가 은유하는 진중한 심연의 메시지는 그냥 재미있는 소설로만 읽고 흘려보내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현실성이 은근히 다분하다. 마치 오늘날 일어나는 눈앞의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것은 엄밀하고 논리적인 과학적 상상력과 풍부한 문학적 창작력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어 엄격하게 완성된 이 작품이 현실과 작품 속 세계를 혼동시킬 만큼 뛰어나기 때문이다 . 그뿐만 아니라 과거의 몇몇 뛰어난 작품들이 예지력과 선견지명을 보여준 사실을 떠올려 보면, 혹시 모르는 일이다. 인류와 외계 문명과의 첫 접촉이 실현될지 모르는 미래에는 우주사회학이 대세가 될지도. 그런 세상이 오면 아마도 이 작품은 미래의 성경이 될 것이다.

마치면서...

에서도 말했지만, 과학적 상상력과 문학적 창작력이 이처럼 조화를 이루며 독자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작품은 정말 흔치 않다. 정말 놀라운 흡입력이고, 엄청난 상상력과 창의성의 결합이 나은 엄청난 이야기다. 이삼일이면 읽기를 끝낼 수 있었지만, 『삼체 2부』랑 일찍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워 하루 독서량을 엄격하게 정해놓고 천천히 읽었다. 줄어드는 페이지를 볼 때마다 내 남은 생의 하루하루가 소진되는 것 같은 안타까움과 쓸쓸함이 책장을 넘기는 손끝을 통해 살포시 저며왔다. 마지막 장을 향해 한장 한장 다가서는 나는 종말을 향해 떠밀려 가는 작품 속의 인류처럼 아득한 절망감에 사무쳐 나도 모르게 책장을 덮곤 했다. 그리고는 작품 속 주인공이 되어 미래를 구할 계책을 진지하게 고민해 본다. 또는 만약 피할 수 없는 인류의 종말이 예정되어 있다면, 인류의 평범한 한 사람으로서 나는 어떻게 마음을 준비하고,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갈지를 골몰히 구상해 본다. 물론 소기의 성과는 없었다. 이처럼 독자가 책을 읽지 않는 시간에도 작품이 창조해낸 상상의 공간 속으로 끌어들이는 중력이 작용하는 작품은 절대 흔하지 않다 .

마지막으로 결말이 급격하게 진행되는 과정은 서두르는 것 같아 약간은 아쉬웠고, 두 문명의 극적인 화해의 축을 이루게 하는 소재가 진부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다만, 극적인 화해는 이야기의 뒤를 잇는 작품이자 ‘지구의 과거’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한 『사신의 영생(死神永生 Death's End)』 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굉장한 이야깃거리를 탄생시킬 초석으로 볼 수도 있다. 아무튼, 그런 몇 가지 아쉬운 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보석처럼 단단한 작품의 재미와 흡입력에 일말의 흠집을 낼 정도는 아니다. 평소 공상과학 소설을 탐독하는 독자라면 평생에 걸쳐 꼭 한번 이상은 읽어야 할 작품이지만, 문학적으로도 충분히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기 때문에 독서 불감증에 빠진 일반 독자에게도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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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31일 일요일

[책 리뷰] 외계 지적생명체, 인류의 구원인가? 아니면 재앙인가? ~ 삼체(류츠신)

The Three-Body Problem book_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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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 지적생명체, 인류의 구원인가? 아니면 재앙인가?

원제: 三體 by 劉慈欣
“그렇습니다. 인류의 전체 역사 역시 우연입니다. 석기 시대부터 현재까지 중대한 이변이 없었으니 운이 아주 좋았지요. 하지만 행운도 결국엔 끝나는 날이 있습니다. 아니, 끝났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세요. 지금 제가 교수님께 드릴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입니다.” (『삼체』, 28쪽)

‘골든 레코드’가 가져올 수도 있는 위험

미 인류는 SETI(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 외계 지적생명체 탐사) 프로그램을 통해 우주 어딘가에는 존재할 것으로 예상하는 외계 지적생명체의 존재를 찾고 있다. 1977년 발사된 보이저 탐사선에는 저명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의 아이디어로 인류 문명의 수백 가지 언어로 기록된 인사말과 다양한 자연의 소리 등이 녹음된 골든 레코드(Voyager Golden Record)를 실었다. 보이저 탐사선 1호는 이미 태양권덮개를 벗어나 성간 공간에 들어갔으며, 2호는 태양권덮개를 통과하는 중이다. 아직 두 탐사선은 정상 작동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2020~2030년쯤에는 전력 부족으로 모든 작동이 멈출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탐사선에 실린 골든 레코드의 수명은 무려 10억 년이라고 하니,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지 않는다면 우주라는 망망대해에 띄워진 ‘병’ 속에 담긴 인류의 메시지와 염원은 ‘영원’ 속에 버려진 어느 한 문명의 희미한 발자취로 남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영화 스타워즈처럼 우주를 자유자재로 항해할 능력을 갖춘 외계인이 이 디스크를 발견한다면? 그리고 그들이 인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매우 호전적인 종족이라면? 혹은 호전성은 인류 정도지만, 기후변화, 환경오염, 행성 수명 등 어떠한 이유로 절체절명의 멸종 위기를 맞아 자신들이 살던 행성을 떠나야 할 처지에 있다면, 레코드에 실린 지구와 인류의 정보는 호전적인 종족에게는 짜릿한 약탈의 기회를, 마지못해 고향 행성을 버려야 할 종족에게는 일종의 구원이나 다름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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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문명의 선과 악, 정의와 도덕의 가치는 보편적일까?

인류가 진정 외계 지적생명체와의 조우를 진지하고 고려하고 있다면, 그들과의 접촉이 인류 사회와 문명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사회과학적 고찰도 수반되어야 한다. 우리는 심심치 않게 터지는 교수나 정치인들의 추문에서도 쉽게 알 수 있듯 지적으로 우월하다고 해서 도덕적 수준도 보통 사람들보다 나을 것이라는 지레짐작을 피해야 한다. 즉, 우주 곳곳을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을 정도로 과학이 매우 진보하고, 그래서 인류보다 더 높은 수준의 문명을 누린다고 해서 도덕 수준도 꼭 그에 따를 필요는 없다 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 인류와 비슷한 도덕적 가치를 공유하는지, 아니면 아예 도덕적 가치관이 없는지 우리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인류의 과학 발전의 원동력이 전쟁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는다면, 매우 높은 수준의 과학을 보유한 문명이라면 그들의 전쟁사 역시 매우 화려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사이먼 페그(Simon Pegg)가 주연했던 영화「앱솔루틀리 애니씽(Absolutely Anything, 2015)」에서는 선과 악의 기준이 인류와는 정반대인 외계인 무리가 등장하기도 한다. 이처럼 우주에서 선과 악의 기준이 절대적이지 않다면, 각각의 문명에서 ‘정의’와 ‘도덕’이 차지하는 위치와 가치도 우리와 같을 것으로 생각할 이유가 없다.

류츠신(劉慈欣)의 『삼체(三體: The Three-Body Problem)』는 그동안 막연한 존재로만 생각되던, 혹은 인류 문명이 잉태한 갖은 고질병을 치료해 줄 수 있는 뛰어난 과학 기술을 갖춘 평화적이고 선량한 구원의 존재로까지 격상되곤 했던 외계 지적생명체에 대한 환상에 경종을 울린다. 환상이 깨진 다음 정신을 차리고 나면 인류의 문제는 언제 어떤 식으로 어떤 종족과 마주칠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부질없는 기대에 희망을 걸기보다는, 무슨 한이 있더라도 인류가 해결해야 한다는 자존심과 사명감이 남는다. 인류가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동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동정심과 연민, 사랑 등의 감정이 풍부한 동물인 것도 사실이기에 인류는 위태위태한 위기의 순간들을 극복해 오면서 지금껏 문명을 지속시킬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실낱같은 가능성을 극대화한 상상력

어찌 되었든 보이저호에 실린 디스크를 외계 지적생명체가 발견한다는 둥, SETI 프로그램이 괄목할만한 성과를 올려 외계 지적생명체와의 접물이 실현된다는 둥, 이 모든 일이 일어날 확률은 매우 희박하지만, 『삼체』는 소설답게 실낱같은 가능성을 놓치지 않고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 저자 류츠신의 말을 빌리면 역사학자가 과거를 진실하게 기록하는 것처럼, 혹은 잊힌 인류사의 한 부분을 이제 막 발굴된 고서를 통해 복원시켜놓는 것처럼 감쪽같이 눈앞의 현실로 끌어당긴다 . 그래서 행동과 생각을 제약하는 인류적인 편견과 사상을 훌쩍 내던지고 몸과 마음을 텅 비운 후 소설 『삼체』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다면 상상을 초월하면서도 현실과의 한 가닥 끈을 절대 놓치지 않는 곁다리 인류사에 첫발을 들여놓는 짜릿함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첫발’이냐고? 무척이나 기대되는 다음 편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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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3일 일요일

[책 리뷰]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1천만 명을 죽이는 ~ 사악한 최면술사(저우하오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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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적인 방법으로 1천만 명을 죽이는 방법

원제: 邪惡催眠師 by 周浩暉
샤멍야오가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링밍딩을 쳐다보았다. “사람들이 과거를 좋아한다는 건 그들이 현재 행복하지 않다는 거잖아요. 안 그래요?” (429쪽)

최면술사, 대량 살인을 예고하다

씨년스러운 추위가 느껴지는 깊은 가을 저녁. 룽저우의 한 조간신문에 무시무시한 머리기사가 눈에 띄었다. ‘얼굴 뜯어먹는 좀비, 시내에 출몰하다!’. 한 좀비광이 병원에서 항T바이러스혈청(좀비 게임레지던트 이블에 등장하는 약)을 찾다가 (당연히) 구하지 못하자 거리로 나가 길거리의 행인들에게 난폭한 짓을 저질렀다. 거리 CCTV에 찍힌 피의자는 좀비처럼 두 다리를 질질 끌며 느릿느릿 비틀거렸다. 머리와 상체는 살짝 앞으로 기울었으며 두 팔은 앞으로 축 늘어뜨렸다. 그는 지나치는 차들은 무시한 채 흐느적거리며 도로를 가로지르다 자신을 피하려고 급정거한 자동차의 운전자를 덮쳤다. 그는 운전자의 얼굴 반쪽을 물어뜯다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다. 부검할 때 그의 목덜미에는 사람의 이빨 자국으로 보이는 상처가 발견되었다.

그런가 하면 다음 날에는 어느 비둘기광이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해 죽은 사건이 발생했다. 죽은 사람은 평소처럼 비둘기 모이를 주고 있었는데, 그때 비둘기들이 거리에서 울린 호루라기 소리에 놀라 하늘로 날아오르자 비둘기광은 마치 자신이 비둘기라도 된 것처럼 두 팔을 날개처럼 활짝 벌려 옥상에서 투신했다고 한다.

그런데 비둘기광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인터넷에는 ‘너희들의 생사가 내 손에 달려 있다!’라는 도발적인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나는 세계 최고의 최면술사다. 너희들의 생사가 내 손에 달려 있다.
어제는 좀비를 훈련시키고 오늘은 비둘기를 조련했다.
나는 지금 최면술사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룽저우에 와 있다. (『사악한 최면술사』, 53쪽)

중국의 ‘히가시노 게이고’가 빚어낸 형사 뤄페이

군가 괜찮은 추리소설 몇 편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한다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바로 일본 추리소설계의 거장 히가시노 게이고(東野 圭吾)의 작품들이다. 그런데 중국에도 ‘히가시노 게이고’가 있다고 한다. 바로 중국의 히가시노 게이고라고 불리는 저우하오후이(周浩暉)이다. 그리고 『사악한 최면술사(邪惡催眠師)』는 저우하오후이의 많은 작품 중에서 한국어로 번역된 첫 작품이다. 흥미로운 것은 작품 속 첫 사건이 2012년 6월 29일 중국 저장성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모티프로 했다는 점. 해당 사건은 소설처럼 실제로 한 남성이 마치 영화 속 좀비처럼 거리에서 여성을 공격한 다음 얼굴을 물어뜯었다고 한다 .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가가 형사가 있다면, 저우하오후이는 형사대장 뤄페이가 있다. 나이는 대충 마흔 살쯤 되어 보이고 짧은 머리에 널찍한 이마, 각진 얼굴에 짙은 눈썹 등 왠지 중국 공안, 혹은 인민해방군 하면 떠오를법한 딱딱한 이미지를 쏙 빼다박았다. 키는 가가 형사처럼 크지 않고 체격도 건장한 편은 아니다. 캐주얼한 차림에 더부룩한 머리카락, 윤곽이 뚜렷한 얼굴, 인상이 남는 울림 좋은 목소리, 하얀 이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환한 미소 등 피의자나 피해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편안한 느낌을 전해주는 가가 형사와는 상당히 다른 어딘지 느낌의 형사다. 팍팍한 외모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듯 이 작품에서만큼은 형사 뤄페이에게서 인간적인 따듯한 정은 느끼기 어렵다. 마오쩌둥이 자신의 이상주의에 희생된 인민들을 바라보던 냉혹한 시선처럼 뤄페이에게 사람은 끊임없는 관찰과 분석의 대상일 뿐이다 . 형사 뤄페이의 인간적인 면의 부족함이 저자 저우하오후이의 의도이든, 아니면 작품 구성의 2% 부족함 때문이든, (마치 마르크스주의 신봉자 같은) 기계적이며 과학적인 그의 사고방식은 사건과 관련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감정에 휩쓸리는 것을 방어해 준다. 덕분에 그는 미모의 최면술사 앞에서도 냉철하게 수사를 진행해나간다 .

그리고 마흔 살이라는 연륜이 나타내듯 뤄페이에게는 현재의 그를 만들고 현재 그의 사고방식의 끄트머리를 이어주는 과거가 있으며 고로 그가 등장하는 다른 작품들이 존재한다. 현재 한국에서 형사 뤄페이를 만날 수 있는 작품은 『사악한 최면술사』 하나지만, 만약 그의 활약을 다룬 다른 작품들도 번역된다면, 소설 『사악한 최면술사』에서 잠깐 내비친 뤄페이의 쓸쓸하고 어두운 과거에 얽힌 속사정에 대한 궁금증은 시원하게 해결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물론 앞으로 일어난 사건의 실마리를 숨겨둔 에필로그 덕분에 다음 편도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되었지만 말이다.

최면술은 잠을 재우는 것이다?

비처럼 흐느적흐느적 거리며 이야기를 질질 끄는 것 같으면서도 독고구검처럼 변화무쌍한 전개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반전들 때문에 좀처럼 정신을 차리기 어려운 추리소설이다. 특히 좀처럼 물증을 잡기 어려운 최면술을 소재로 범죄를 구성한 면이 독특하고 흥미로우며, 상당한 지면을 최면술 소개에 할애한 저우하오후이의 각별한 배려는 최면술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이로써 ‘최면술은 잠을 재우는 것이다’라는 최면술에 대한 케케묵은 오해와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마지막으로 『사악한 최면술사』에는 중요하지는 않지만 사소한 몇몇 장면들이 눈에 띈다. 형사 뤄페이가 병원 복도에서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나 심문 과정을 비디오 카메라, 녹음기, 워드프로세서가 아닌 수기로 직접 기록하는 등 중국의 놀라운 경제 성장과 비교하면 여전히 뭔가 동떨어지는 듯한 문명의 흔적들이 발견되는데 중국 추리소설에만 발견할 수 있는 이런 독특한 장면들을 찾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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