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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4.

[책 리뷰] 탈선? 아니면 넘치는 박식함의 산물? ~ 광골의 꿈(교고쿠 나쓰히코)

a dream of madness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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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선? 아니면 넘치는 박식함의 산물?

Original Title: 狂骨の夢 by 京極 夏彦
“그렇습니다. 이 뼈의 주인이 이번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의 진짜 범인이에요.” (『광골의 꿈(狂骨の夢) 下』, p256)

탈선인가? 아니면 넘치는 박식함인가?

민간에 전승되는 요괴나 설화 등의 기괴한 이야기를 소재로 삼는 것으로 유명한 교고쿠 나쓰히코(京極 夏彦)지만 소재가 바닥난 것일까? 민속학과 종교학에 박학한 요괴 연구가인 그가 결국 일본서기(日本書紀)와 고사기(古事記)에 등장하는 신화적 인물까지 끄집어내고 말았다. 엑스트라도 아니고 조연도 아닌 당당히 주연 격으로 말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등장인물들이 500년 묶은 숙원이니 1500년 묶은 숙원이라고 씨부렁대는 것도 과히 지나치지 않다. 분명히 독자는 (나처럼) 미스터리한 소설이나 추리소설을 읽는 가볍고 신선한 기대감으로 이 책을 선택했을 터인데, 그런 기대감은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 고대사 이야기는 따발총처럼 날아든다. 사건을 이해하려면 선택의 여지 없이 그런 이야기를 울며 겨자 먹기로라도 새겨들어야 하니 독자는 기겁할 수밖에 없다. 눈에 잘 들어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뱀처럼 길고 징그럽기만 한 인명은 읽는 것조차 부담스럽다. 유령이나 요괴의 차이도 구분할 줄 모르는 나의 얕은 지식으로는 ─ 일본 사람들도 별로 관심 없거나 잘 알지 못할 것 같은 ─ 일본의 고대 신화를 앞세우는 교고쿠도의 세 치의 혀에 금세 넌더리가 날 수밖에 없다. 알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알고자 했던 것도 아닌 지식을 부지불식간에 받아들여만 하는 독자로서는 지리멸렬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단군 신화’에나 나올법한 인물을 대뜸 범인이라고 지목하니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번에는 사신 같은 사악한 풍모의 교고쿠도에게 제대로 걸린 것 같다. 좀 더 과장하면, 과연 이러한 이야기들이 일반인에게 얼마나 친숙한 이야기일지 의문까지 드는 지경이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지만, ‘꿈의 해석’이나 ‘정신분석’, ‘종교적 회심’, ‘프로이트’, ‘정신분열’, ‘신경증’, ‘광신’, ‘양광’ 등을 운운하는 설교성 텍스트는 조금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사실 이 정도 선에서만 유지해 줬으면 이전 작품처럼 현란한 교고쿠도의 말발에 호방하게 넘어갈 주었을 뿐만 아니라 ‘설교’인지 ‘현학’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그의 말발이 여전히 매력적으로 남았을 텐데, 이번에는 도가 지나친 것 같다. 지루한 일상을 잠시나마 잊고자 선택한 책이 다짜고짜 일본 고사를 들이대니, 마치 따분한 옛 교과서를 보는 것 같아 낭패다. 지루함을 넘어서 짜증스럽기까지 하다. 당황스러운 것은 둘째치고 괜히 시간만 낭비한 것 같아 불쾌하다. 홍수 난 강처럼 철철 넘치는 작가의 박식함을 감당해내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간혹 일어날 수 있는 탈선일까? 나로서는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광골의 꿈(狂骨の夢)』은 이전에 읽었던 교고쿠 나쓰히코의 세 작품(우무베의 여름, 망령의 상자, 엿보는 고헤이지)보다 지루하고도 한편으로는 실망스러운, 인스턴트 라면이나 패스트푸드처럼 배가 고파 먹을 때는 그럭저럭 삼킬 만했지만, 막상 먹고 나면 왜 먹었을까 하고 후회할 수도 있는 그런 소설이 되어버렸다.

‘뼈’로 시작해서 ‘뼈’ 끝나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 진지하게 결딴나는 이번 작품의 주요 모티브는 ‘꿈’과 ‘뼈’다. 하나가 정신적 모티브를 제공한다면 다른 하나는 물질적 모티브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여기저기 널브러진 사건들을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하나의 큰 사건으로 뭉뚱그리고, 그 사건들 속에 철두철미하게 숨은 (오로지 교고쿠도만이 해독할 수 있는) 오래 묵은 숙원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혜안이자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1500년이나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다. 이 신화를 알지 못하고는 엉망진창으로 뒤섞인 사건들을 이해하지도, 해결할 수도 없다는 사실 그 자체가 『광골의 꿈(狂骨の夢)』이 다소 지루하고 고루하게 다가올 수 있음을 예견하고 있다.

‘꿈’이니 ‘뼈’니, 그리고 여기에 ‘신화’까지 들먹이니 ‘이번엔 정말로 범인이 요괴나 유령이라도 되는 건가?’ 하고 세키구치 같은 흐리멍덩한 의심이 들 수도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런 것은 아니다. 그것은 결정적인 순간이면, “세상에는 말이지요, 이상한 일이라고는 무엇 하나 없어요. 그렇지, 세키구치 군?”이라고 능글맞게 말하는 교고쿠도의 여유만만한고 오만한 말로 대신 대답할 수 있다. 만약 그랬다면 정말 멍청한 요괴 소설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신화나 전설, 요괴 이야기의 신비롭고도 기괴한 점을 현재 펼쳐지는 사건을 해결하는 논리적인 열쇠로 변형하여 그럴듯하게 끼어맞추는 것이 교고쿠 나쓰히코의 소설을 읽는 현학적인 맛이 아니었던가? 또한, 추리소설에서는 드물게 종교와 철학, 그리고 이번에는 정신분석까지 끌어들이는 지적인 탐구 역시 교고쿠 나쓰히코의 소설에서나 맛볼 수 있는 강점이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신화에 깊게 천착했다는 점이 다소 지루하게 다가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의 강점이 묻힌 것도 소멸한 것도 아니다. 다만 이번에는 너무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아 있고, 그 주제가 나 같은 일반인이 다가가기에는 너무 먼 주제가 아니었던가 싶다.

아무튼, 유괴하는 스님, 뼈를 파내는 신주, 되살아나는 사자나 전생의 기억, 살이 붙어 가는 해골, 바다에 떠오른 금색 해골, 젊은 남녀의 집단 자살, 머리가 잘린 병역기피자 등 현실에서 일어난 서로 연관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해괴망측한 사건들과 불꽃 속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해골 앞에서 교접하는 남녀를 보는 꿈, 바닷속에 빠졌다가 머리뼈만 기세 좋게 수면으로 떠 오르는 꿈, 어릴 적 기괴한 체험으로 뼈를 무서워하게 된 목사가 서로 뭐가 어떻게 관련된 건지 복잡해서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쓸데없이 말발이 서는 교고쿠도처럼 쓸데없이 복잡한 인물과 사건 관계 때문에 나중에는 아예 이해하기를 포기하게 될 수도 있다. 마치 독자를 은근슬쩍 세키구치로 둔갑시키려는 것 같다. 그래도 결국 사건은 해결된다. 당연히 교고쿠도의 그 휘황찬란한 세 치의 혀와 특정 분야에서만큼은 브리태니커 뺨치는 그 박식함으로 말이다.

하지만, 신화까지 들먹어야 해결이 되는 것은 너무 멀리 나간 것 같고, 작가 혼자만 알고 있는 사실들만으로 추리를 완성하는 것은 치사하고 시시하다. 또한, 반전을 짜내고자 비겁한 속임수를 사용하는 것은 여태껏 작가의 추리와 논리대로 잘 따라온 독자를 배신하는 짓이자 독자의 기대를 한순간에 내동댕이치는 짓이다. 지난 작품을 재밌게 읽었고, 교고쿠도의 장광설 같은 궤변에 나름 맛을 들였던지라, 기대감이 너무 지나쳤나 보다. 너무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겠지만, 『광골의 꿈(狂骨の夢)』은 마쓰모토 세이초(松本 清張)의 소설 『푸른 묘점(蒼い描点)』처럼 유명 작가의 평작으로 남을만한 소설일지도 모르겠다.

여전한 교고쿠도의 못 말리는 친구들

그래도 다행스러운 점은 서로를 마구잡이로 바보 취급하는 교고쿠도의 들러리 같은 존재이자 못 말리는 친구들인 에노키즈, 세키구치, 기노가 여전히 간헐적인 유쾌함을 선사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사건을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혼란과 혼선을 부추기는 경우가 더 많은 교고쿠도의 친구들은 실로 추리소설뿐만 아니라 보통의 소설에서도 보기 드문 범상치 않은 인물들이다. 이들은 상식적인 인물이라고 말하기는 당연히 어렵고, 일반적인 지인이라고도 하기에는 너무 유별나고, 기인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그렇다고 재능이 특출난 것도 아니고, 모자란 재능을 덮어줄 의욕이 왕성한 것도 아니다.

에노키즈는 사람들이 모여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는 자리에서도 태평하게 잠이 들 수 있을 정도로 방약무인이다. 세키쿠치는 원숭이라고 놀림당하는 것이 하나도 불쌍하지 않을 정도로 칭찬하는 보람보다는 헐뜯는 보람이 더 큰 얼뜨기다. 범죄를 좋아하는 대불(伏佛) 같은 얼굴의 남자 기바는 머리보다 몸이 앞서야만 하는 형사이니 어려운 고사를 들먹어야만 실마리가 겨우 풀리는 교고쿠 나쓰히코가 창조한 사건에서는 더더욱 도움이 안 된다. 이들은 서로를 악연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우정을 유지하는 특이한 친구들이지만, 그런 해괴망측한 우정 속에서도 그럭저럭 의리를 견지하는 것이야말로 실로 미스터리다. 이들이 훌륭하게 조연 역할을 해주고 있기에 지루하고 방만하게 느껴지는 이번 작품도 나름 볼만하다고 우길 수가 있는 것이다.

아무튼, 교고쿠 나쓰히코의 지난 세 작품이 무미건조한 세상을 재밌게 해주는 많은 소설 중 하나인 것은 분명했지만, 『광골의 꿈(狂骨の夢)』에게 그러한 명예를 짊어주는 것은 당분간은 유보하고 싶다. 막상 이러한 글을 쓰고 보니 교고쿠 나쓰히코의 다음 작품을 선택하기가 망설여진다. 고민이다. 도서관에 비치된 교고쿠 나쓰히코의 소설 중 읽지 않은 작품은 다 읽으려고 마음먹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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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1. 24.

[책 리뷰] 유령만큼이나 무섭고 기이한 인연에 대하여 ~ 엿보는 고헤이지(교고쿠 나쓰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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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만큼이나 무섭고 기이한 인연에 대하여

Original Title: 覘き小平次 by 京極 夏彦
“그래. 무엇이든 이야기해야만 비로소 존재가 되네. 이야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어. 거짓말이든 허풍이든 입 밖에 내면 낸 만큼 존재가 되는 거야. 자네가 얄팍한 것도, 내 속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도, 둘 다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겠지. 얄팍하다고 생각하는지 몰라도 자네에게는 두께가 있을 것일세. 텅 비었다고 여기지만 피도 있고 살도 있잖은가. 밥도 먹고 똥도 눈단 말이지. 사람이란 누구나 약간은 한심한 법이야.” (『엿보는 고헤이지』, p233)

살아 있는 유령, 얼뜨기 고헤이지

유명한 요괴 연구가, 하지만 고서점 주인 교고쿠도의 능란한 화술을 빌려 유령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못을 박았던 작가 교고쿠 나쓰히코(講談社文庫)가 ‘유령’ 추리소설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엿보는 고헤이지(のぞき小平次)』에는 한국의 전설적인 공포 드라마 ‘전설의 고향’처럼 진짜 유령이 등장할까? 민속학과 종교학에 박학한 요괴 연구가인 교고쿠 나쓰히코가 갑작스럽게 생각을 바꿔 유령의 존재를 인정할 리는 만무하다. 대신 독자를 한껏 홀릴 어처구니없는 인물을, 그것도 지금까지 읽지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그런 유일무이한 인물을 창조해냈다.

그는 유령 같은 외모와 행동 때문에 막무가내로 유령 취급당하지만 그렇다고 유령은 아니다. 무엇보다 칠흑처럼 캄캄한 것을 두려워한다는 점에서 그는 유령 자격 미달이다. 하지만, 그는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귀가 있어도 듣지 않고, 코가 있어도 냄새를 맡지 않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않는 영락없는 유령이다. 그는 땅거미 질 무렵의 어둑어둑함에 자신의 엷고 얇은, 그래서 아지랑이처럼 흐릿하고 수육처럼 흐물흐물한 육체를 묻어버리기를 좋아한다. 그렇다고 투명 인간처럼 존재감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이 소설 또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존재감은 눈앞에 확연히 드러나는 육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근처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눈에 띄지 않는 괴상한 존재가 몰래 자신을 훔쳐보고 있음을 자각할 때나 느낄법한 그 소름 끼치는 섬뜩함에서 나온다. 그래서 그가 가까이에 있다면, 불편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불편할 뿐만 아니라 어딘가에서 반드시 엿보고 있다는 음산한 상상에 기분도 나빠진다. 그는 유령처럼 흐릿하면서도 섬뜩한 존재감 때문에 아내처럼 보이는 여자에게나 그의 단 하나뿐인 친구처럼 행세하는 무뢰한에게나 반푼이 취급당한다. 툭하면 죽어버리라는 악담을 견뎌야 한다. 그가 바로 얼뜨기 배우 ‘고헤이지’다.

형편없는 인물이 내뿜는 유령 같은 음산한 매력

그는 아내로 보이는 여자와 친구처럼 행세하는 무뢰한으로부터 기관총처럼 사정없이 퍼부어대는 악담과 싸늘한 시선을 묵묵히 견딘다. 집중포화를 피해 참호로 기어들어 가는 다친 병사처럼 고헤이지는 악담과 냉대를 피해 어둑한 헛방 속으로 스멀스멀 소리 없이 기어들어 간다. 그리고는 자궁 속 태아처럼 몸을 잔뜩 웅크리고 하릴없이 발꿈치를 문지르면서, 한 치 반 틈 사이로 열린 문틈으로 세상을 엿본다. 아내 같은 여자를 엿본다. 아내 같은 여자가 자신의 친구인 척하는 무뢰한과 한껏 놀아나는 것을 엿본다. 고헤이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고헤이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니 아무 감정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도 이래저래 사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이 괴롭기는 하다. 하지만, 무리해서 괴로움을 벗어나기보다는 괴로움을 견딘다. 괴로움을 벗어난다고 편안함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괴로움을 견디는 것이 꼭 나쁜 일도 아니다. 그것이 그가 존재하는 방식, 아니 유일하게 존재할 수 있는 방식이다.

‘엿보는 고헤이지’는 그 어떤 소설에서도 보기 어려운 정말 형편없는 주인공이다. 쓸모도 없고, 근성도 없다. 그 누구에게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 얼뜨기 중의 얼뜨기다. 우울하고 음산한 존재로서 살아 있는 유령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에게서 살아 있는 반푼이 유령 취급당한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외면할 수가 없다.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는 심통을 부리며 애써 텍스트를 외면해 보지만, 한껏 돌 다 멈춘 눈알의 초점은 무심하게도 텍스트에 맞춰져 있다.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파렴치하게도 침까지 질질 흘리는 무아지경에 빠진 채 텍스트를 읽고 있다. 고헤이지를 읽고 있다. 고헤이지를 상상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야심한 밤에 혼자 숲을 산책하다 유령과 딱 마주쳤을 때, 유령이 내뿜는 음산한 공포에 사로잡혀 얼음처럼 얼어붙은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유령이 내뱉는 말을 따라 하고 유령이 시키는 대로 하는 둥, 유령이 발산하는 음산하고 어두운 기운에 유혹되어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조종당하고 있는 것이니라. 이런 연유가 아니라면, 나만큼이나 형편없는 고헤이지를 왜 읽고 있단 말인가! 그것도 아주 재미있게.

유령만큼이나 무섭고 기이한 인연에 대하여

굳이 『엿보는 고헤이지(のぞき小平次)』의 장르를 구분 짓는다면,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미스터리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일반적인 미스터리소설과는 달리 교고쿠 나쓰히코 특유의 현학적인 텍스트에서 송진처럼 끈적하게 묻어나오는 퇴폐적이고 염세적인, 그리고 고헤이지만큼이나 음산한 기운이 듬뿍 보태진 철학적 분위기가 묘한 중독성을 발휘한다. 이번 작품은 고헤이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유령만큼이나 무섭고 기이한 인연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왜 고헤이지는 유령 같은 음산한 은둔 생활을 하게 되었을까? 오쓰카라고 불리는 여자는 왜 죽도록 싫어하는 무능한 남자 고헤이지와 함께 사는 것일까? 무뢰한 다구로는 어떤 도움도 안 되는 고헤이지의 유일한 친구 행세를 왜 5년 동안이나 해왔던 것일까? 한때 미소년이라 칭송받았던 가센을 비롯해 14살 때 자신의 부모를 죽인 살인마 운페이와 다구로는 왜 아무런 존재감 없는 고헤이지를 죽일 마음을 먹었을까? 단지 무대 위에서 평소처럼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 유령 역할을 멋들어지게 소화해내는 것이 유일무이한 쓸모인 고헤이지의 무엇이 그들의 살의를 부추겼을까? 한편, 아홉 번 둔갑한다는 도적 지헤이는 위험에 빠진 고헤이지를 왜 굳이 도우려고 마음먹었을까?

이 모든 질문의 해답을 구하고자 한다면 등장인물들 사이를 그물처럼 얽히고설킨 인연과 관계의 실타래를 하나하나씩 풀어나가는 길뿐이다. 하지만, 살해, 살인, 죽음, 인신매매, 남창, 윤간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온갖 슬픔과 고통으로 얼룩진 과거를 가진 사람이 비슷한 과거를 가진 사람과 좋든 싫든, 그리고 크고 작든 인연을 맺게 되었을 때, 그 파장은 실로 엄청나다. 마이너스 더하기 마이너스가 더 큰 마이너스를 내놓는 것처럼 끔찍한 상처를 앓는 누군가가 비슷한 상처를 앓는 누군가와 인연을 맺을 때, 그들의 상처는 서로 상쇄되어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의 상처에 또 다른 상처를 보태주는 최악의 상황을 연출한다. 이것은 마치 누군가를 진정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가진 모든 상처까지도 안아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경구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보통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서로의 과거를 숨기지 않는다. 숨기지 않기에 그들 모르게 상처끼리 맞부딪혀 덧나거나 악화되는 것 역시 어느 정도 대비할 수 있다. 반대로 새로운 인연은 새로운 출발을 이야기한다. 보통 새로운 출발은 그때까지의 과거를 묻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전제로 시작한다. 인연이 깊지 않을 땐 더더욱 그러하다. 때에 따라선 과거가 새로운 출발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인연은 과거를 묻지 않는다. 과거를 묻지 않기에 그 사람이 어떤 상처와 고통을 안고 사는지 알 턱이 없다. 언제 어느 날, 서로의 과거가 남몰래 안고 온 상처와 고통이 두 사람 모르게 얽히고, 맞물리고, 결합하고, 반응하여 현재의 관계를 뒤틀고 뒤흔들 때, 그들은 모르고 당할 수밖에 없기에 그 파장과 충격은 알고 당하는 것보다 더 클 수밖에 없다.

깊던 얕든, 두껍든 얇든 인연이 한 번 맺어지면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영광스럽지 못한 과거의 상처와 고통이 전염병처럼 스멀스멀 퍼져나가 인연이라는 희미한 줄을 타고 상대에게 옮겨붙어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그리고 그 누구도 원하지 않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음을 『엿보는 고헤이지』는 긴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누군가와 새로운 인연을 맺는다는 것은, 언제 어느 날 상대가 짊어진 짐 중 하나가 어떤 계기를 통해 부지불식 간에 나에게로 굴러떨어져 발등을 찍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이야기한다. 고로 존재한다!

저마다 소름 끼치는 과거 한두 개씩 짊어지고 사는 등장인물들도 기이하지만, 더욱 기이한 것은 그들은 이름을 고침으로써 과거와의 단절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과론적이지만, 무수한 인연의 매듭으로부터 불거져 낳은 파괴적인 결말을 고려하면, 마치 벌레가 허물을 벗으려는 듯한 그들의 개명은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운 출발을 시도하려는 그들의 처절한 몸부림 정도로만 치부될 뿐이다. 그 누구도 완전히 허물을 벗지 못했을뿐더러, 무리하게 허물을 벗으려는 시도가 오히려 각자 짊어진 상처를 덧나게 한 격이 되고 말았다. 인간은 허물을 던져버림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벌레가 아니며, 벌레가 아니기에 과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가 없다. 만약 그들 서로가 인연으로만 그치지 않고, 서로의 과거를 허심탄회하게 밝힐 수 있는 진지한 관계로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면, 그런 비극적이고 치명적인 결말이 연출될 수 있었을까?

한때 도둑이었던 지헤이가 유령 고헤이지에게 한 충고처럼 이야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다. 이야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은 거짓말이든 허풍이든 이야기한 것만큼 두께가 생기고 부피가 생긴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진득하게 듣는 사람의 머리와 마음속으로 흘러 들어가 누군가의 기억 속에 새로 심은 치아처럼 단단히 자리 잡을 때 비로소 이야기한 사람의 존재감은 완성된다. 하지만, 『엿보는 고헤이지(のぞき小平次)』의 등장인물들은 인연은 맺지만,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이야기하더라도 자기 이야기만 실컷 떠들 뿐 진지하게 듣는 이가 없다. 그들 모두 고헤이지가 유령 같다고 하지만, 사실 그들 모두 유령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고무줄 같은 팽팽한 인연의 연결고리를 통해 서로 끌어당기고, 물렁물렁하고 흐릿한 존재감으로 말미암아 본의 아니게 서로 겹쳐지고 포개지다 보니 벼룩이 옮는 것처럼 서로의 상처와 고통까지 사이좋게 옮겨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런 연유로 현대인은 그렇게 미치도록 SNS에 매달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나를 세상에 이야기함으로써 미약한 존재감을 어떻게든 극복하고 싶은 허영으로 부푼 열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 치 반 틈 사이로...

기괴한 인물이다. 그리고 기구한 인연이다. 무슨 심보로 이런 소설을 내놓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 아무리 실화를 참고했다지만 ─ 정말 무지막지한 인물과 으스스한 이야기를 창조하고 말았다. 이미 세상에 내놓은 이상 어찌 손 쓸 도리도 없다. 그런 곤란한 말을 지껄이면서도 다음 이야기가 또 있을까 하는 기대감이 유령처럼 스르르 싹 트는 이유는 무엇일까? 살아 있는 유령처럼 살아가는 고헤이지에게서 얼뜨기 같은 나를 봐서일까? 아니면 이런 얼뜨기 같은 인물도 나름대로 존재의 법칙을 유지하며 흐릿하게나마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서 보잘것없는 삶의 위안을 받았기 때문일까? 아무튼, 나도 한 치 반 틈 사이로 세상을 내다보고 싶다. 과연 무엇을 볼 수 있을까? 그것이 문제로다.

살다 보면 별것도 아닌 것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가 있다. 살다 보면 별로 대단치 아니한 것들이 사람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뒤집어 놓을 때가 있다. 『엿보는 고헤이지(のぞき小平次)』가 대단한 소설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지만, 교고쿠 나쓰히코의 다른 작품들이 그렇듯이, 정치가가 유세하는 것 같은 능변과 종교인이 설교하는 것 같은 초월적인 무언가가 고명처럼 얹어지고, 여기에 교수가 강의하는 것 같은 현학적이고 선문답 같은 양념이 뿌려지면서, 신들린 약장수가 선전하는 것처럼 어딘가 미심쩍으면서도 왠지 믿고 싶어지는 텍스트가 완성된다. 하지만, 그것은 뻔히 알고도 속아 주는, 그것도 그냥 우울하게 속아 주는 것이 아니라 기껍게 속아 주는 거역하기 어려운 기괴한 매력을 발산한다. 교고쿠 나쓰히코의 텍스트를 읽노라면 마치 불량식품을 앞에 놓고 인생 최고의 고민에 빠진 나머지 침과 땀으로 범벅된 손가락을 쪽쪽 빠는 아이가 된 듯한 기분이다. 그런데 그거 아는가? 지금 한 치 반 틈 사이로 열린 문틈으로 누군가 당신을 엿보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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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1. 3.

[책 리뷰] 뒤틀린 공명심을 자극하는 잔인한 사회 ~ 10만 분의 1의 우연(마쓰모토 세이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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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틀린 공명심을 자극하는 잔인한 사회

Original Title: 十万分の一の偶然 by 松本 清張
“카메라 애호가들의 심리도 별나거든. 누구나 「격돌」을 의식하고 있어. 하지만 의식을 해도 도저히 안 되니까 그런 위험한 연출 사진을 찍는 거야. 그런 사진을 당선작으로 뽑아서 신문에 발표해 보라고. 독자는 연출 사진인 줄 모르니까 또 시끄러운 비난이 신문사로 쏟아지겠지. 시운마루 호 사례를 들면서 사진 찍을 시간이 있었으면 왜 사람을 구하러 달려가지 않았느냐 하고 말이야.” (『10만 분의 1의 우연』, p185)

대가의 또 다른 평작?

『10만 분의 1의 우연(十万分の一の偶然)』을 얼마 전에 리뷰한 소설 『푸른 묘점(蒼い描点)』처럼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마쓰모토 세이초(松本 清張)의 또 다른 소설이라고 간단하게 소개한다면, 아마도 ‘대가의 또 다른 평작’이라고 넘겨짚는 독자가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라고 해서 모두 평작일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하물며 사회파 미스터리의 시조로 인정받는 대가의 작품이라면 아무리 평작이라도 (『푸른 묘점(蒼い描点)』이 그랬던 것처럼) 독자를 낚아 올릴 수 있는 무언가가 한두 개쯤은 준비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10만 분의 1의 우연』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이 『10만 분의 1의 우연』의 책장을 넘기게 하는가? 『10만 분의 1의 우연』의 무엇이 (작품이 발간되고 나서) 거의 4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현대인의 이목을 끌 수 있는가?

우리를 경악시키는 잔혹한 동영상들

그것은 『10만 분의 1의 우연(十万分の一の偶然)』이 다루고 있는 문제의식은 문명의 이기가 양산한 병폐 중 하나라는 점에서 놀랍도록 현대적이다. 그것은 스마트폰의 보급이 일으킨 카메라의 보편화와 인터넷, 그리고 자기현시, 자기표현을 ‘개성’이라고 떠들어대는 대중매체가 결합한다, 그럼으로써 과도하게 공명심을 자극하는 요즘의 풍조를 떠올리게 한다.

한국 사람이라면 2018년 4월 30일 광주에서 일어난 집단폭행 사건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유독 이 사건이 기억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 이유는 사건의 참혹성도 있지만, 그 참혹한 폭행 장면을 담은 동영상이 방송과 인터넷으로 유포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동영상을 찍은 사람이 겁이 나 싸움을 말리지 못했던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무슨 마음으로 동영상을 찍었을까? 그 동영상이 생생하게 전해준 사건의 잔혹성은 2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청와대 국민청원에 서명하게 하는 힘으로 작용했지만, 동영상을 공유한 사람이 쭉쭉 올라가는 ‘조회수’와 거기에 달릴 ‘댓글’을 의식하지 않았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해당 사건 피해자의 회복되지 못한 흐릿한 시야에 그 동영상이 언제든지 눈에 띌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피해자를 여러 번 죽이는 셈이다. 동영상이 인터넷에서 완전히 삭제되지 않는 이상 그것은 지우고 싶은 과거를 반강제로 떠올리게 하는 영원한 고통이다.

한편, 2017년 8월에는 부산 구포시장 대로변에서 도망친 개를 보신탕집 종업원이 수백 미터를 쫓아가 쇠막대기 올가미로 다리를 묶은 채로 대로변에서 질질 끌고 가 도축하는 장면이 동영상으로 유포되어 물의를 일으켰다. 앞서 말한 광주 사건 동영상을 공중파 뉴스를 통해 처음 접했을 땐 ‘너무 참혹하다’라는 생각과 거의 동시에 가해자에 대한 무한한 분노가 나를 휘감았지만, 구포시장 동영상은 ‘왜 아무도 말리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가장 먼저 일어났다. 광주 사건처럼 여러 명의 가해자가 가담한 경우가 아니기에, 동영상을 찍는 사람이 한 번쯤 말릴 수도 있지 않았나 하는 질책성 의구심이 들었다. 어쩌면, 동영상을 찍으면서 말리는 말 한두 마디라도 건넬 수 있었지 않았을까? 그 동영상을 찍은 사람이 동물 복지를 진정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 동영상은 개가 최후의 숨을 헐떡이며 죽어가는 장면까지 흔들림 없이 냉혹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마치 산 제물을 바치는 종교의식을 찍는 광신도처럼 말이다.

생명과 보도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물론 이런 동영상들이 사회에 경각심을 일깨워주고 그냥 묻힐 수도 있었던 사건을 사회에 널리 보도함으로써 관심과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생명과 보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처지에 몰렸을 경우 둘 중 무엇이 더 중요하며,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라는 골치 아픈, 그러나 딱히 해답은 없는 질문을 다시금 일깨운다. 이 질문은 『10만 분의 1의 우연(十万分の一の偶然)』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이기도 하지만, 고성능의 카메라가 장착된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누구나 감독이 될 수 있고, 누구나 기자가 될 수 있는 요즘에도 응당 적용되는 질문이다.

쉽게 말하면 이런 것이다. 당신이 인적 없는 바닷가를 산책하고 있다. 그때 당신은 바다에 빠진 누군가가 다급하게 구조를 요청하는 외침을 듣는다. 당신은 수영을 어느 정도 할 줄 알지만, 자신의 수영 실력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할 정도의 실력인지는 확신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고 바다에 뛰어들어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야 할까? 아니면 이 10만 분의 1의 우연 같은 긴박한 순간을 동영상에 담아 엄청난 ‘조회수’와 ‘댓글’ 잔치를 만끽해야 할까? 상식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인 기준에 비춰보면 사람을 구해야 하는 일이 우선이다. 하지만 그것은 강제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또한 세상은 그렇게 반듯하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오가다가 무슨 일만 터지면, 타인의 처지는 생각지도 않고 무작정 스마트폰을 들이대고 보는 현대인의 잔인한 공명심이 우리 사회 일부를 병들게 하지만, 스마트폰 기능 중에는 오직 카메라만 있는 것처럼 과대광고하는 상업주의는 이를 더 부추길 뿐이다. 나날이 발전하는 스마트폰 카메라 성능에 열광하는 우리는 나를 전 세계에 알릴 ‘10만 분의 1의 우연’을 학수고대하며 굶주린 하이에나가 먹잇감을 찾아 사바나를 헤매는 것처럼 오늘도 거리를 방황한다.

6명의 목숨을 대가로 얻은 박력 넘치는 사진

마쓰모토 세이초의 『10만 분의 1의 우연(十万分の一の偶然)』에 등장하는 아마추어 사진가 야마가 교스케는 생명이 아니라 보도를 선택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한껏 명성을 얻는 데 성공한다. 그가 찍은 처참한 교통사고 현장 사진에는 6명의 생명을 앗아간 그 참혹함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격돌」이라고 이름 붙여진 그 사진에는 사고 현장에 아직 경찰차도, 구급차도 도착하기 전, 그러니까 곧 죽을 6명의 사람이 아직 살아있는 채로 불타는 차 속에 갇혀 있는, 그런 사고 직후 절체절명의 긴박한 상황을 완벽한 구도로 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시체라는 죽음의 결과물을 직접 보는 것보다 그 죽음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상상하게 하는 무언가를 볼 때, 그 형용하기 어려운 상상 속에서 더 크나큰 공포를 느낀다는 점을 고려하면 6명이 죽음으로 치달리는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격돌」은 최상의 공포이자 최상의 충격이다. 이 사진을 <독자 뉴스사진 연간상> 최고상으로 선정한 심사위원장 후루야 구라노스케는 10만 분의 1의 우연으로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했다고 격찬한다. 한마디로 ‘박력’이 넘치는 사진이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6명의 생명을 담보로 탄생한 사진이니 충격과 박력이 굉장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격돌」을 보면서 자동차 안에 갇혀 오도카니 죽어가는 피해자를 상상해야만 했을 가족들의 심정은 필설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하다. 많은 사람이 「격돌」을 보며 사진 찍을 시간이 있으면 한 명이라도 더 구출하는데 애써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분노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하물며 「격돌」을 보며 사랑하는 약혼녀가 뜨거운 불 속에 갇혀 죽어가고 있다는,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오는 악몽을 쓰디쓴 눈물을 머금으며 밀어내야만 하는 누마이 쇼헤이의 기분은 어떠할까? 더군다나 그 사고가 단지 굉장한 ‘사진’을 찍기 위한 누군가의 연출로 일어난 것이라면?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면? 아마 죽고 싶을 정도로 답답하고 억울할 것이다. 자신을 집어삼키려는 분노와 억울함을 이겨내지 못한 누마이 쇼헤이는 복수를 결심한다.

‘추리’와 ‘트릭’으로 승부하지 않는 추리소설?

어느 독자가 『10만 분의 1의 우연』을 읽어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야마가 교스케가 단 한 장의 박력 넘치는 사진을 위해 일부러 사고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방법이나 사용된 도구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굳이 범인을 꼭꼭 숨기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이 마치 대단한 업적이라도 쌓은 양 기고만장하는 야마가 교스케와 정확한 사고 원인을 차근차근 추리해가면서, 한편으로는 침착하게 야마가 교스케에게 접근해 가는 누마이 쇼헤이와의 대비되는 구도가 상당한 흡입력을 발산한다. 전반적으로 격하지 않고 묵직하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것이 추리소설이 아니라 마치 논픽션을 읽는 것 같다. 한마디로 ─ 이 작품이 추리소설이 맞는다면 ─ ‘추리’와 ‘트릭’으로 승부하지 않는 이상한 추리소설이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점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적인 기교와 치밀함으로 무장한 요즘의 추리소설을 상상하면서 이 소설을 선택했다면,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실망감에 털썩 주저앉다 못해 그만 책장마저 덮는 크나큰 우를 범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시간이 갈수록 야마가 교스케도 누마이 쇼헤이가 자신에게 접근하는 숨은 의도를 짐작하게 되고, 두 사람은 원수가 외나무다리 위에서 만나듯 한밤의 크레인 위에서 단둘이 있을 기회를 얻게 된다. 야마가 교스케에게는 누마의 쇼헤이의 의중을 꿰뚫을 기회이고, 누마이 쇼헤이에게는 야마가 교스케가 사고를 일으키게 한 트릭을 증명할 기회이다. 하지만, 증거가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과연 야마가 교스케는 유족 앞에서 순순히 자신의 죄를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발뺌할 것인가?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상대가 자신의 죄를 인정했건 하지 않았건 이미 시작한 복수는 완성해야 했다. 그러나 누마이 쇼헤이의 표정에서는 복수를 성공시켰다는 희열감이나 기쁨, 만족감 같은 것은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패자처럼 맥없이 고개를 숙이며 서글픈 표정을 짓는다. 줄곧 미워해 오던 야마가 교스케처럼 자신도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이 복수에 성공했다는 쾌감을 억누르는 데 성공한 것을까? 아니면 그동안 복수에 정신이 팔려서 미처 깨닫지 못한 한 가지 자명한 사실, 즉 살인자를 죽인다고 해도 이미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복수를 완성하고 나서야 문득 깨달았던 것일까? 아니면 야마가 교스케를 굴복시키지 못한 자신의 무능력에 실망한 것일까? 이도 아니면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야마가 교스케의 교활함이 회의와 허무감을 불러일으켰을까?

무심코 올린 동영상과 사진은 폭력이 될 수 있다!

추리소설이지만, 범죄를 뒷받침하는 완벽한 증거는 없다. 완전범죄다. 그리고 범인은 초장부터 명백하게 드러난다. 대형 자동차 사고를 일으킨 트릭도 크게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참으로 미스터리한 추리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쓰모토 세이초 작품에서 미스터리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기보다는, 온갖 군상이 판을 치는 사회와 접목될 때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된다. 『10만 분의 1의 우연』은 한 사람이 섣부른 공명심에 휘둘릴 때 일으킬 수 있는 범죄적 요소와 사회가 어떻게 그 공명심을 교묘하게 부추기는지를 통해 현대 문명의 잔인한 일면을 ‘박력’이 넘치는 정도는 아니지만, 긴장감 있게 포착해내고 있다. 하물며 그 섣부른 공명심이 ‘자기표현’의 한 방식이자 한 사람의 ‘개성’이라고까지 당당하게 인정받는 요즘의 세태를 떠올리면 마쓰모토 세이초의 메시지는 섬뜩하기까지 하다. 정말 놀라운 예견이다.

마지막으로 아직도 우리 사회는 보도 사진, 보도 동영상이 가지는 긍정적인 의미, 혹은 자극적인 감상에 너무 쏠린 나머지 피해자와 그 가족을 종종 외면하게 된다. 세상에 경종을 울리고자 하는 좋은 취지에서 공유한 사진과 동영상일지라도 피해자와 그 가족에겐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고통의 순간을 되새기게 하는, 영원히 반복되는 끔찍한 악몽이나 다름없다. 피해자나 그 가족이 굳이 인터넷을 뒤져가며 그러한 것들을 찾아보지는 않겠지만, 그러한 자료를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이 피해 본 사고를 담은 사진이나 동영상을 누군가 재미 삼아 보고 있다는 상상이 이들을 더 고통스럽고 슬프게 한다. 다수의 저속한 오락적 감상을 위해 소수가 지속적으로 고통받아야 하는 것이 옳은가? 한 사람의 자기표현, 공명심을 위해 피해자와 그 가족의 삶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나는 이에 대해 답할 수가 없다. 정확히 말해서 잘 모르겠다. 나도 그런 사진, 동영상을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재미 삼아 본 적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10만 분의 1의 우연』을 읽은 한 사람으로서 진지하게, 그리고 건방지게 감히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어 몇 자 적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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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0. 23.

[책 리뷰] ‘험담’이라는 가학성 취미를 부추기는 인터넷 ~ 망내인(찬호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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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담’이라는 가학성 취미를 부추기는 인터넷

Original Title: 网内人 by 陳浩基
자신의 비참한 운명을, 불행을 타인에게 전가한다면 다시는 행복할 수 없을 것 같다. 복수는 오히려 불행을 지속시키고 또 다른 형태로 세상에 원한을 남겨놓을 뿐이다. (『망내인(网内人)』, p625)

재능과 재력 모두 역대급 탐정

아마 찬호께이(陳浩基)의 『망내인(网内人)』을 선택한 독자가 거쳐온 별로 특별할 것 없는 과정은 나와 비슷하리라 본다. 2011년 제2회 시마다 소지 추리소설상을 받으면서 일본 추리소설계의 거장 시마다 소지(島田荘司)로부터는 “무한대의 재능”이라는 찬사를 끌어낸 『기억나지 않은, 형사(遺忘.刑警)』에 매료된 나머지 그 이후 발표한 소설 『13.67』을 거쳐 여기까지 이르게 된 것이리라. 아마도 말이다. 『망내인』에 대한 세간의 평은 뜻밖에 좋아 보이지만, 내게 미치도록 감상적이면서도 문학적 격이 느껴지는 텍스트를 선물한 『별들의 고향(최인호)』을 읽은 직후라서 그런지 여러모로 실망스러운 소설 읽기가 되어버렸다.

예전 작품과 비교해 어딘지 모르게 퇴화하여버린 듯 단조로워진 텍스트는 장르소설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재능, 사회적 지위, 명성, 재력 등 어디 한군데 빠질 데 없이 너무나도 완벽한 탐정 아녜의 완벽한 계획과 완벽한 리드가 톱니바퀴 맞물리듯 잘 짜여 있어 싱겁다 못해 허탈하게까지 느껴진다. 마치 롤플레잉 게임에서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퀘스트처럼 한 치의 오차도 한 치의 어긋남도 없다. 그는 전지전능한 해커 실력과 ‘사회 공학’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상대의 모든 허점과 개인 정보를 꿰뚫어 볼뿐만 아니라 그 정보를 이용해 상대의 감정을 좌지우지하며 판단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상대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조종당한다. 아마도 이러한 설정을 통해 맹목적으로 과학기술을 추종하고, 인터넷과 SNS에 중독된 일부 독자에게 이제라도 개인 정보 유출과 신상털기 위험성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라는 일침을 가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은둔한 고수처럼 괴짜 같은 성격만 빼놓으면 남모르게 좋은 일을 하면서 당연하다는 듯 내색하지 않는 그는 정말 완전무결한 인간이지 아닌가?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탐정 아녜라는 인물에게서는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역겹다 못해 기가 찬다. 추리소설을 읽는 재미 중 하나는 작품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다양하고 독특한 개성으로 넘쳐나는 탐정들이 발산하는 인간적인 매력이라 할 수 있는데, 아녜에게서는 그런 것을 느끼기가 어렵다. 그는 인공지능처럼 퍼펙트한 계획을 짜고, 악마처럼 감정의 동요 역시 계획을 착착 진행한다. 하물며 그는 인과응보도 믿는다. 그렇다면 돈을 받고, 혹은 심심풀이로 재미 삼아 염라대왕처럼 단호히 복수를 집행하는 그가 뿌린 것은 어떻게 거둬들여야 할 것인가?

아녜는 보기에 따라 이제껏 보지 못한 독특한 탐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엄청난 재력에 질린 나머지 일찍이 은거하여 취미 삼아 마치 신이 세상의 악을 단죄하듯 탐정 일과 복수 사업을 병행하는 그를 하등 보잘것없는 내가 어찌 시샘하지 않고 버틸 수 있겠는가? 그런 재수 없는 밥맛 같은 탐정을 나는 내내 질투하고 있었으니, 염라대왕의 멱살이라도 붙잡고 담판을 짓고 싶다. 그런데 무슨 담판을 짓는다는 거지?

아무튼, 질투와 시샘이 극에 달해도 그 격한 감정을 풀 때가 없으니 제풀에 꺾일 수밖에 없고, 대신 그 반작용으로 우울증이 도진다. 세상만사가 다 귀찮아진다. 리뷰를 쓰는 지금도 그 우울한 감정을 여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그것은 그만큼 아녜가 알게 모르게 눈부시도록 생생하게 그려졌다는 방증이 아닌가? 아, 이 모든 것이 찬호께이의 트릭이었나?

인간의 가학성을 부추기는 인터넷

어쨌거나 『망내인(网内人)』은 이전 두 작품에 비하면 실망스럽다. 물론 읽는 재미는 있다. 지루하지도 않다. 그러나 추리 깊이나 트릭의 신선함은 예전만 못하다. 특히 『기억나지 않은, 형사(遺忘.刑警)』에 비하면 ‘무한대의 재능’이 벌써 소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앞으로 찬호께이가 추리소설 역사에 길이 남을 좋은 작품을 많이 남긴다면, 이 소설은 위대한 작가의 평작으로 남을 그런 소설이다. 사회파 미스터리의 시조 마쓰모토 세이초(松本 清張)의 『푸른 묘점(蒼い描点)』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누군가 『망내인』을 고른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다. 아무리 이 소설이 이전 작품과 비교하면 무너진 우물처럼 깊이가 떨어지고 막판 할인에 들어간 생선처럼 신선치 못하다 하더라도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만큼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은 단순히 공감을 넘어서 마땅히 우리가 인지하고 직시하고 그래서 반드시 개선해야 할 인터넷 세상의 고질적인 병폐이기도 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잊을만하면 반복되는 인터넷 마녀사냥이다.

『망내인』은 여타 추리소설과는 달리 단 한 사람의 죽음만이 부각된다. 바로 15살 소녀 샤오원이다. 한창 예민할 대로 예민한 사춘기 시기의 소녀가 말 못 할 고민 몇 가지쯤 가지고 있는 것은 대수가 아니다. 그로 말미암아 죽음을 떠올리더라도 그것은 누구나 응당 겪을 수 있는, 삶을 배우고 이해해 나가는 수업의 한 과정이다. 어른들이 멋대로 설정한 교과서 같은 경로에서 약간 벗어난 정도의 성장통이다. 그러나 소녀가 정말로 자살했고, 그 발단이 누군가 인터넷에 올린 악의적인 글 때문이라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소녀의 나약함을 질책해야 할까? 아니면 그 소녀를 모욕하는 더러운 글을 올려 선동질한 누리꾼과 무수한 댓글로 이에 동조한 키보드 워리어들을 탓해야 할까? 아마 이것은 각자가 가진 가치관이나 신념, 인격에 따라 차이가 날 것 같다. 그중에는 어차피 그런 것도 견디지 못할 정도로 나약하다면 일찍 세상을 떠나는 것이 나을 거라고 가차 없이 말하는 사람도 분명 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은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한다고, 그래서 도태되는 쪽이 되지 않으려면 도태시키는 계층이 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차가운 피를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에게서는 일말의 인간성도 찾아볼 수 없지만, 우리는 그들의 생각이 현실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에 분노하기보다는 탄식하기 일쑤다.

아무튼, 선동적인 글을 올린 누리꾼을 탓하는 것은 무방하지만, 그 글의 표적이 된 소녀가 스트레스에 시달린 나머지 정신적 붕괴를 일으켜 자살했다고 해도 그 누리꾼은 기껏해야 명예훼손죄에 해당할 뿐이다. 그 사람은 그저 인터넷에 글을 올린 것뿐이니까. 이것이 『망내인』에서 사달을 일으키는 시발점이다. 소설은 범죄와 추리를 다루는 만큼 잔인하게도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즉, 그저 재미 삼아, 혹은 화풀이로 누군가를 비방하는 글을 인터넷에 올린 것이 아니라 표적이 된 사람이 자살하게끔 의도적으로 그런 글을 올려 마치 여론몰이라도 하는 것처럼 누리꾼들을 선동하고 댓글을 조작한다. 참으로 비열하고 비겁하고 더없이 야비한 짓이지만, 인터넷 사용이 활발한 오늘날, 그 누구도 마녀사냥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소름 끼치는 일이지 아닐 수가 없다.

『망내인』처럼 특정인을 자살하려는 목적으로 마녀사냥을 일으킨다면, 그래서 그 목적이 이루어졌다면, 그 누리꾼을 살인자라고 딱 부러지게 지목할 수 있을까?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참으로 딱 부러지게 말하기 어려운 문제다. 문명과 기술이 안락함과 물질적 풍요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전 사고방식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운 심각한 부조리를 가져온 것도 사실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사이버 범죄다. 우리가 남이 안 보는 곳에서 맘 놓고 험담을 지껄이듯, 인터넷이라는 익명성은 인간의 보편적인 가학적 취미인 험담을 방종의 상태로 풀어놨다. 사회에서는 점잖은 옷을 입고 점잖게 말하는 그가 모니터 화면 앞에 숨어 인신공격으로 가득한 댓글을 따발총처럼 쏘아댈 때, 과연 그의 진짜 모습은 무엇인가? 하물며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인터넷에 어떤 글과 댓글을 남기는가? 인터넷이 스트레스에 찌들 때로 찌든 현대인의 해우소 역할을 돈독히 한다고 해도, 변소에 남긴 똥과 오줌이 오롯이 당신 것인 것처럼 인터넷에 남긴 글은 당신의 또 다른 모습이다. 『망내인』은 인간성의 적나라한 모습이 가장 심각하고 저급한 방식으로 드러나는 곳인 인터넷과 그 뒤에 숨은 인간의 어두운 모습을 샤오원의 자살과 샤오원을 자살로 몰아간 사람들의 동기와 교차시키며 독자의 양심을 자극한다. 다만, 그 천착의 깊이가 다소 얕고 두루뭉술하며 교조적이라는 점이 흠이라면 흠이지만 말이다.

복수의 굴레에 빠진 자만이 복수를 끝낼 수 있다

독자는 『망내인(网内人)』을 읽는 내내 반드시 한 가지 의구심이 들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샤오원의 언니 아이의 처지에서는 범인들이) 샤오원을 마녀사냥으로 자살로 몰아간 동기다. 이 동기를 알게 된 순간, 그토록 복수심에 불타오르던 아이는 동생을 위한 복수를 망설이게 된다. 이대로 복수를 강행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이쯤에서 그들을 용서하고 복수를 멈추어야 하는 걸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쳐 아녜에게 복수를 의뢰할 때까지만 해도 추호도 의심할 수 없었던, 영원히 변치 않을 것 같았던 복수심이었지만, ─ 분명 동생이 받았을 법한 ─ 고통에 시달리는 한 소녀를 보자 아이의 마음은 동요한다. 복수한다고 자신이 겪는 불행과 고통, 슬픔이 기쁨과 행복으로 마법처럼 탈바꿈할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복수했다는 기억만큼은 평생 안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건 그 복수극의 도화선이 된 소중한 누군가, 즉 아이에게는 샤오원을 잃은 것만큼이나 쓸쓸하고 우울한 기억이자 아물만하면 마음 한구석을 찔러 상처를 남기는 영원의 가시이지 않을까? 난 아이의 선택이 옳다고 단정하지는 않는다. 대신 그녀의 선택이 현명했다고 말하고 싶다. 비참한 운명을 끝낼 수 있는 사람은, 그 비참한 운명에 빠진 그 사람뿐이다. 그런 면에서 아이의 선택은 현명했다.

반은 추리, 나머지 반은 복수에 할당한 긴 소설이자,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해커소설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해킹 실력에 의존하는 경향이 많기에 탐정이 발로 뛰며 사건을 집요하게 파헤치는 고전적인 맛은 부족하다. 하지만, 사이버 시대의 추리소설은 구시대 탐정들이 필수적으로 갖춘 명석한 두뇌에 아녜 같은 컴퓨터 실력까지 갖춘 탐정이 제격일지도 모르겠다. 그 누구도 검색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시대에, SNS에는 온갖 잡다한 개인 정보가 벼룩시장에 나온 잡동사니처럼 진열된 요즘에, 우리의 신상털기는 총체로 먼지를 털어내는 것만큼이나 쉽다. 현실이 그러하니 구태여 발품을 들여 시간을 낭비할 필요도, 수고할 필요도 없다. 그래도 난 아무리 구린 발 냄새가 사방천지에 진동하더라도 발로 뛰는 탐정들이 등장하는 전통적인 추리소설이 좋다. 현실과 소설은 엄연히 다른 것이니까. 아무튼, 전작에 비교해 다소 진부한 소재와 번득이는 맛이 부족한 평작이지만, 찬호께이의 전작 두 소설을 읽은 독자라면 그래도 읽어보지 않고는 배길 수는 없는, 그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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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0. 13.

[책 리뷰] 대가의 평작, 그래도 나름 읽는 묘미는 있다 ~ 푸른 묘점(마쓰모토 세이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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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의 평작, 그래도 나름 읽는 묘미는 있다

Original Title: 蒼い描点 by 松本清張

노리코가 다시 물어봐도 그는 “지금은 소요 시간만 알고 있으면 돼”라며 설명하지 않았다.

버릇이 또 나왔네.

이번엔 화도 나지 않았다. 웃음이 나왔다.

“사키노 씨는 가끔 의미 있는 척 행동하는 버릇을 고치면 훨씬 좋은 사람이 될 거야.”

노리코는 그 말만 해 두었다. 역시 그냥 가만히 있어서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턱을 쓰다듬으며 다쓰오는 대꾸하지 않았다. (『푸른 묘점』, 464)

대가의 평작,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 리뷰를 쓰는 올해가 2019년이니까 60년 하고도 더하기 1년이다. 마쓰모토 세이초(松本 清張)의 소설 『푸른 묘점(蒼い描点)』 이 세상에 선보인 지 말이다. 시대와 언어, 문화의 장벽을 초월하여 다양한 독자에게 다양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명품 소설 ‘고전 문학’에는 60년의 세월쯤은 대수롭지 않은 시간이겠지만, 나날이 기교와 트릭이 발전하고 논리적으로도 정연해지고 과학적으로 엄밀성까지 갖추어 가는 미스터리 장르는 그렇지가 않다. 그래서 현대적이고 세련된 추리소설에 익숙해진 독자가 60여 년 전에 완성된 추리소설에서 요즘의 잘 만들어진 추리소설과 같은 전율이나 감흥을 기대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런 고로 제아무리 마쓰모토 세이초라 해도 그의 모든 작품이 현대에 와서도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때때로 『푸른 묘점』처럼 그의 명성에 조금은 걸맞지 않은 작품들도 다수 존재한다.

누군가는 이런 작품들은 작가에게 홀딱 반한 마니아들이나, 혹은 작가의 대표작 몇 권에 푹 빠진 나머지 잠시 분별력을 잃은 독자가 아니라면 찾아주지 않는 낙엽처럼 빛이 바랜 쓸쓸한 작품들이라고 냉철하게 분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막상 읽어보면 또 그게 그렇지가 않다. 마쓰모토 세이초처럼 시대의 한 획을 그은 작가의 작품이라면, 비록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한 작품일지라도 읽어보면 나름의 묘미를 발견하게 된다. 물론 이런 주장이 작가의 명성에 혹한 한 독자의 동정적인 비평이 다분히 섞인 과장으로, 혹은 추종자들의 맹목적인 떠받듦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마쓰모토 세이초의 대표작들이 극찬을 받은 유명한 작품들이니만큼, 그런 대표작들이 발하는 후광이 짙게 드리운 그림자에 평작들이 애꿎게 묻혀버렸다는 느낌도 없지 않아 있다. 『푸른 묘점』은 마쓰모토 세이초의 감히 평작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벌써 무덤 속으로 묻어버리기에는 어딘지 아까운 소설이다. 고로 너무 많은 기대는 걸지 않고, 그렇다고 삼류소설 쳐다보듯 너무 경솔하지는 않은 마음으로, 한편으로는 마치 신인 작가를 대하듯 『푸른 묘점』을 읽는다면, 나름 쏠쏠한 재미가 있을 것이다.

단점에도 흡입력을 발하는 묘한 책

솔직히 말해 이 소설을 선택한 것은 순전히 마쓰모토 세이초의 명성 때문이다. 뭐 읽을만한 추리소설 없나 하는 생각으로 무심결에 동네 도서관의 ‘일본소설’ 쪽 책장으로 눈을 돌린다는 것이 그만 딱 『푸른 묘점』하고 마주치고 말았다. 커피숍이나 지하철, 버스 등의 공공장소에서 아무 생각 없이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을 때의 흠칫 놀라는 기색과 그 상대가 매력적인 여성이었을 때 느낄법한 당황함이 적절히 혼합된 그런 기분이었다. (도서관 출입 초창기에 읽었던 책이라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오래전에 『점과 선』을 인상 깊게 읽은 나로서는 우연히, 아니 운명적으로 마주친 『푸른 묘점』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나는 시간에 쫓기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내용도 살펴보지 않고 소매치기가 두둑해 보이는 지갑을 가로채듯 서가에서 책을 낚아챘다. 사정이 그러했기에 당연히 실망도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추리소설을 포함한 모든 소설이 지향하는 허구적 이야기를 완성하면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우연’이라고는 하지만, 『푸른 묘점』은 우연을 지나치게 남발한 나머지 일부 상황은 억지스럽게까지 보이기도 한다. 뛰어난 기교를 자랑하는 요즘의 추리소설에 비하면 빈약해 보이는 트릭과 어딘지 모르게 늘어지는 구성, 거북이처럼 느린 전개는 일부 독자에게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작가의 명성에 실망하는 탄식을 자아내게 할 수도 있다. 나 역시 탄식까지는 아니더라도, 약간의 실망감을 내비치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단점들만 늘어놓으니 상당히 재미없는 소설로 보인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막상 읽어보면 또 그게 그렇지가 않다. 대가의 명성에 압도된 나머지 객관적인 비평을 내리지 못한 것일까? 아니다. 정말 그것은 아니다. 앞서 말한 단점은 『푸른 묘점』을 읽는 누구나 명확하게 지적할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하다. 그것은 저 찬찬한 상공에 떠 있는 태양처럼 자명하다. 이 책을 번역한 사람도 나를 지지한다. 그럼에도, 정말 신묘한 것이 앞서 언급한 단점들은 이 책을 읽게 되면 누구라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지만, 그런 단점들을 염두에 두고 책을 읽는데도 따분하기는커녕 쉽게 책 앞에서 자리를 떠나지 않게 하는 마력이 『푸른 묘점』에는 있다.

약간은 억지스럽기까지 한 추천의 글

앞서 언급한 단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엇이 나를 이 책 앞에 껌딱지처럼 붙들어 매 놓았을까? 명시한 단점들이 척력으로 작용함에도 무엇이 이것을 능가하는 인력으로 작용한 것일까? 재미있게 읽은 것은 분명히 사실인데, 막상 그 점을 밝히려고 하니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이 없으니 참으로 난감하다. 잡지사 편집자로 일하는 두 젊은 남녀 사키노 다쓰오(崎野竜夫)와 시이하라 노리코(椎原典子)의 아마추어 탐정 놀이가 신선했을까? 아니면, 수사와 탐문 차원에서 이곳저곳 여행하는 두 사람의 발자취가 추리소설에서는 보기 어려운 정취를 자아냈던 것일까? 아니면, 그물처럼 얽히고설킨 사건의 복잡한 인과관계가 흥미로웠던 것일까? 혹은, 두 주인공의 탐정 놀이에서 은연중에 싹 트는 사랑이 뭔가를 기대하게 하였던 것일까? 일본 드라마 「열쇠가 잠긴 방(鍵のかかった部屋, 2012)」에 등장하는 변호사 세리자와가 탐정에 대해 입버릇 토로하는 불만 불평처럼 추리의 진척 상황을 감추며 거들먹거리는 다쓰오 앞에서 아이처럼 투정 부리는 노리코가 귀여웠나? 그것도 아니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극 중 인물들에 매료되었던 것일까? 정답은 이 모두일 수도 있고, 전부 다 아닐 수도 있고, 그 중간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다.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성의 없고 무례한 답변이자 나의 무지함으로 북을 치고 장구를 치는 격이다. 내 말이 정 미덥지 못하다면 직접 『푸른 묘점』을 펼쳐보시라.

한편, 마쓰모토 세이초의 추리소설들이 범죄의 사회적 동기에 중심을 둠으로써 ‘사회파 미스터리’의 시발점을 제공한 업적과는 별개로 대중소설과 순문학의 경계를 허물어트린 대범한 작가였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마쓰모토 세이초의 문장력이 절대 평범하지 않다는 말이다. 보통 추리소설을 읽을 때는 별로 기대하지 않는 것이 문장력이지만, 텍스트를 읽는 재미를 유난히 중시하는 나에겐 『푸른 묘점』의 기대 이상의 문장력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다. 특히 그런 감흥은 두 주인공이 사건 수사를 위해 도쿄를 떠나 지방으로 내려갈 때 두드러진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본 작가인 나쓰메 소세키처럼 독특하고 뛰어난 품격 높은 문장력이라고까지는 치켜세울 수 없지만, 그래도 텍스트를 읽는 재미를 풍기기에는 나름 괜찮은 문장이라고 내심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노리코는 다쓰오와 수사를 같이하게 되면서 다쓰오를 대하는 사무적인 태도가 조금씩 조금씩 애정 어린 관심으로 번져가면서 사랑스러운 처녀로 영글어가는데, 이런 노리코의 풋풋한 심정 변화를 담은 언행을 문장에서 직접 느껴보는 것도 나름 괜찮다. 그리고 1950년대 말임에도 대중교통이 제법 잘 갖추어진 일본 사회를 배경으로 삼은 점도 과거에 대한 어쭙잖은 향수에 젖어 든 내겐 또 하나의 흥밋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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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0. 2.

[책 리뷰] 음식의 온기는 단순히 체온만 높여주는 것이 아니다 ~ 전쟁터의 요리사들(후카미도리 노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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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의 온기는 단순히 체온만 높여주는 것이 아니다

Original Title: 戰場のコックたち by 深綠野分
나중에 얼마만큼 참혹한 사태를 야기하든 전화는 몸서리가 날 만큼 아름답다. 설령 이대로 죽는 한이 있어도 기분 좋게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든다. 자신이 느끼는 흥분이 가짜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우리 중 다수가 이미 그 비할 데 없는 공포와 쾌감과 피로에 중독되어 있었다. 망설임도 상실의 고통도 잊을 수 있는 극도의 긴장이 그리웠다. (『전쟁터의 요리사들』, p422)

추리소설 + 전쟁소설 = ?

묘한 전쟁소설이다. 후카미도리 노와키(深綠野分)의 『전쟁터의 요리사들(戰場のコックたち)』은 사람의 이성이 처참하게 파괴되는 전장의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수수께끼 같은 사건들을 파헤치는 말단 병사들의 활약에서 무너진 이성의 일부분이나마 복원하려는 듯 논리와 추리를 찾고 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인간성 말살의 증거인 전쟁에서 산발적으로 목격되는 적군과 아군 사이에서 피어나는 드라마 같은 우정이나 인종과 문화, 민족과 국가를 초월한 박애 정신이 희망의 불씨를 되살리듯, 인류가 쥐어짜 낼 수 있는 모든 기술이 총동원된 살육 잔치가 한쪽에서 효율적인 잔인함과 극대화된 파괴성을 자랑스레 떠벌리는 동안 주인공들은 ‘군인 탐정단’이 되어 아직 건전한 이성이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살인 기계로 둔갑한 무지막지한 이성에게 일말의 배신감을 느낀 독자를 안심시키려는 약간은 우울한 위안거리다.

『전쟁터의 요리사들』의 초반부는 전쟁소설이 가질 수밖에 없는 진중한 품격을 훼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도에 넘치는 유쾌함으로 시작되어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전쟁소설을, 그것도 실제 벌어졌고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이었던 2차 세계대전을 유쾌하고 가볍게 읽는다는 것이 ─ 내 비록 전쟁 세대가 아닐지라도 ─ 과연 도덕적으로 옳은 일인지 꺼림칙하게 여긴 나는 왠지 이 책을 읽는 것 자체가 그들을 모욕하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켕기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 금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세월이 많이 흘렀다지만, 인류의 존재와 번영을 위해 그들이 ─ 본의 아니게 ─ 희생되었다고 고집스럽게 생각하는 난 여전히 세계대전 역사를 눈물 없이 읽지 못하는 감수성이 유별나게 예민한 바보인지라, 여타 추리소설 같은 초반의 그 익숙한 느낌이 확실히 호의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래도 전쟁소설은 전쟁소설이었다. 아무래도 초반의 산뜻한 출발은 중반 이후 펼쳐질, 그것도 전쟁소설만이 전해줄 수 있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전장의 참혹함과 전장에서는 도무지 피할 길이 없어 보이는 인간성 상실이라는 충격이 전해주는 슬픔이 독자의 여린 마음을 짓누를 것에 대비한 작가의 배려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나의 마음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실제 일어난 전쟁을 소재로 한 픽션이나 논픽션을 읽었을 때처럼 이 책 역시 나의 예민하고 풍부한 감수성에 지독히도 쓰라린 흔적을 남겨놓았다.

시체처럼 식은 동료의 몸과 마음을 위로해주는 ‘요리사들’

내 값싼 감수성을 탓할 사람도 있겠지만, 사람이 사람에게 물건 다루듯 일말의 감정 없이 가하는 폭력만큼 잔혹하고 슬픈 것은 없다. 먹보이자 조리병인 주인공 콜처럼 전우를 잃은 상실감이 복수심으로 변주되어 항복해 오는 적을 사살하는 것이 ─ 실제 전쟁에서는 아주 짝에 쓸모없는 ─ 국제법에 위촉되고 누군가에게는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짓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차라리 인간답다. 하지만, 살인마저 고루한 습관이 되고, 그래서 노동자가 공장의 생산설비에서 생산품을 반복 조립하는 지루한 과정처럼 줄지어 선 포로들을 아무런 감정 없이 기계적으로 적을 사살하는 것은, 인간성의 완전한 말살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그래서 기계적으로 산업화한 홀로코스트의 대량 학살이 인류를 그토록 소름 끼치도록 했다.

그렇다고 우리의 주인공들이 그들과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그 유명한 노르망디 작전으로 처음 실전에 투입된 주인공 콜과 그의 동료는 전장의 혼란스러움과 여기저기서 동료가 죽어 나가는 참상에 차츰 익숙질 뿐만 아니라 어느덧 고참병이 되고 나서부터는 전쟁터를 그리워할 정도로 전쟁에 중독된다. 전쟁에 중독된 그들에겐 떼죽음을 몰고 오는 전장의 빗발치는 포화가 마치 불꽃놀이처럼 몸서리치도록 아름답다. 그들에게 전쟁터는 도시락으로는 전투식량을 지참하고 놀이기구로는 소총과 수류탄을 소지한 소풍이나 다름없다. 순식간에 육체가 잿더미로 화하고 영혼이 증발하는 전장이라는 이미지가 강압적으로 주입하는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도 사람은 뭔가 즐길만한 거리를 찾아내고 그것을 위안으로 삼는다. 그것은 전쟁에 익숙해지면 전쟁도 하나의 놀이가 되고, 살인에 익숙해지면 살인도 하나의 놀이가 된다는 끔찍한 논리로 귀결된다. 소녀가 품에 안은 곰 인형처럼 할머니의 레시피 공책을 소중히 여겼던 콜이 점점 피에 굶주린 살인마처럼 변해가는 과정은 전쟁에서 인간성을 간직한 채 생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콜을 보고 있노라면, 인류 문화유산 중 하나이자 적대감이 팽배한 분위기를 버터 녹이듯 부드럽고 따뜻하게 녹여주는 매우 훌륭한 수단이기도 한 요리를 책임지는 조리병일지라도 어느 정도의 인간성 붕괴를 겪지 않고서는 대량 살상 무기가 최고의 가치를 발하는 전쟁에서 살아남기 어려움을 실감하게 된다.

특기병임에도 툭하면 무시와 조롱을 받는 조리병들은 동료의 위장만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시체처럼 차갑게 식은 음식을 자주 먹을 수밖에 없는 그들의 마음도 시체처럼 차갑게 식어간다. 콜은 동료에게 조금이라도 따뜻한 음식을 먹여 추위와 죽음에 그을린 그들의 몸과 마음을 녹여보려고 나름 애써보지만, 한 명의 조리병으로서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 그런데도 이처럼 콜이 무던히도 애쓰는 것은 할머니의 가르침을 통해 따뜻한 음식이 의미하는 바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간간이 섭취하는 따뜻한 요리는 죽음이 일상이고, 일상이 죽음인 싸늘한 전쟁터에서 ─ 적군이고 아군이고 간에 ─ 모두에게 가족이 있다는 기억을 무의식적으로나마 되새기게 해준다. 그것은 콜 같은 진득한 ‘전쟁터의 요리사들’이 존재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군인 탐정단’으로 비화를 한층 누그러트리는

전쟁소설에 추리소설 양념을 가미한 독특한 소설이다. 조리병 콜과 그의 동료는 굳이 파헤쳐도 되지 않을 일을, 혹은 누군가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도맡아서 짬짬이 탐정 놀이를 즐긴다. 그렇게라도 잠시 머릿속에서 전쟁을 잊고 싶었으리라. 징병 모집 포스터에 등장해도 놀라지 않을법한 훤칠한 외모와 놀라운 장사 수완을 지닌 라이너스가 쓸모없어진 보조 낙하산을 모으는 이유, 하룻밤 사이에 보급품 600상자가 증발한 연유, 어린 두 자녀를 미군에게 남기고 자살한 네덜란드인 부부의 가슴 아픈 사연, 그 누구보다 혈기왕성했던 디에고를 하루아침에 겁쟁이로 만들어버린 유령 소동 등 홈스처럼 냉철하고 명철한 두뇌를 가진 에드와 왓슨처럼 어수룩한 콜이 동료의 도움을 받아 ‘군인 탐정단’을 간간이 이끌어가는 모습은 여지없이 추리소설답다. 그럼에도, 난 이 소설을 굳이 분류하자면, (전쟁추리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지 않는다면) 전쟁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도 썩 괜찮은 전쟁소설로 말이다. 분노와 실망이 뒤범벅된 복잡한 감정으로 눈에 띄지 않는 괴물로 변해가는 콜을 바라보며, 동료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 에드를 애도하며, 동고동락했던 전우의 진짜 정체가 밝혀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하루아침에 등을 돌린 비정한 병사들을 힐난하며, 접착제처럼 질기고 강한 우정으로 뭉친 사이일지라도 죽음까지는 붙들어 맬 수는 없는 무정한 전장에서만 벌어지는 비일비재한 죽음을 바라보며, 나는 오늘 한 편의 좋은 전쟁소설을 읽었다고 말하고 싶다. 중간마다 눈치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땀에 전 끈적끈적한 손등으로 훔치는 바보 같은 나이지만, 오늘 정말로 오래간만에 좋은 전쟁소설을 읽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약간은 거리감을 둔 듯한 시선으로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르게 말해 조금은 가벼운 시선으로 전쟁을 관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누군가에겐 그러한 점이 이 소설을 전쟁소설로 분류할 수 없다고 비판할 수 있는 초석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전장의 참혹함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독자의 정신마저 피폐하게 만드는 전쟁소설이나 논픽션은 꽤 넘쳐난다는 점에서 『전쟁터의 요리사들』은 나름 묘한 매력이 있다. 아마 전쟁을 겪지 않은 비교적 젊은 작가가 쓴 작품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약간 피상적인 느낌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시선으로 전쟁을 이해하고 있다는 현실을 망각하지 않는다면, 나름의 묘미가 있는 소설이다. 또한, 세계를 뒤집을만한 반전은 아니지만, 약간의 반전도 준비되어 있으니 추리소설의 맛도 함께 즐길 수 있으니 좋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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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9. 18.

[책 리뷰] 역사에 정통한 문학적 상상력이 맺은 결실 ~ 제갈공명(진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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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정통한 문학적 상상력이 맺은 결실

Original Title: 諸葛孔明 by 陳舜臣
공명은 자신의 지향과 유비의 지향이 거의 같은 방향에 있지만 다소 다른 점이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한나라의 부흥에 공명은 그다지 열렬하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천하 통일’이었다. 천하 인민의 평화를 위해서 통일이 요구된다면 천하를 통일하는 자가 유씨劉氏의 황통이 아니라도 도리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코 조조가 되어서는 안되었다. (『제갈공명』, p406)

역사소설 같지 않은 역사소설?

광활한 중국을 무대로 한 무협소설의 대가(大家)로 김용(金庸)이 있다면, 역시 같은 무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의 대가에는 진순신(陳舜臣)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역사소설 같지 않은 역사소설 『제갈공명(諸葛孔明)』은 당대 최고의 중국역사문학가로 평가받는 진순신의 명성에 과히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소설 『제갈공명』을 ‘역사소설 같지 않은 역사소설’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첫째,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와는 달리 철저한 고증과 참조할 수 있는 모든 사료를 기반으로 해서 빚어진 작품이니만큼 역사를 읽는 진중한 맛이 있으면서도, 둘째, 사료로는 채울 수 없는 이 빠진 듯한 공백들을 매끄럽게 메운 진순신의 풍부한 문학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즉, 역사소설에 평균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고증의 깊이, 혹은 얼마나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게 서술했느냐는 보편적 잣대를 훌쩍 뛰어넘으면서도 소설과 책 읽기의 재미를 잃지 않는 고품격 역사소설이라는 말이다.

보통 역사소설은 역사에 충실하다 보면 이야기의 흐름이 딱딱해지기 쉽고, 반대로 허구에 충실하다 보면 진중한 맛이 떨어지기 십상인데, 앞서 말한 대로 진순신의 역사소설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읽기 쉬운 소설을 통해 역사를 이해하고 싶은 호기심 많은 독자에게도, 역사와는 상관없이 단순히 재밌는 책을 읽으면서 지루한 시간을 이겨내고 싶은 독자에게도 고루 호소할 수 있는 작품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모든 것 즉, 진순신의 소설이 역사에 충실하면서도 소설적 창작성과 개연성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이유로는 (물론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진순신의 문학적 상상력 자체가 역사에 정통한 학문적 토양 위에서 피어올랐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하기에 역사소설을 쓰는 작가라면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빈약한 사료와 시대적 간극이라는 고충을 유연하게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한국에 소개된 진순신의 작품은 비단 『제갈공명』뿐만 아니다. 무수히 많은 그중 전자도서관을 통해 무료로 볼 수 있는 책이 하나 있다. 『열국지』, 『초한지』, 『삼국지』, 『사기』를 한 번에 엮은 동양 최대의 역사서인 『십팔사략(十八史略)』을 방대한 역사소설로 재구성한 『소설 십팔사략』이라는 작품이다. 무협지처럼 긴 작품(8권)이라 선뜻 손이 가지는 않지만, 날을 잡아 한 번쯤은 꼭 읽어봐야 할 작품이 아닌가 싶다.

제갈량이 ‘천하통일’로 얻고자 했던 것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제갈량(諸葛亮)을 뛰어난 군사 전략가로 소개하고 있다. 물론 이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제갈량은 군사 전략가로서의 재능만큼이나 내정, 즉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에도 밝았는데, 진순신의 소설은 이러한 점을 분명히 밝히려고 했던 것 같다. 만약 제갈량의 평범함을 뛰어넘는 치정 능력이 없었다면, 천하삼분(天下三分)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천하삼분이 가능해지려면 촉나라는 군사력으로나 경제력으로나 최소한 오나라에 맞먹는 능력을 갖추어야 했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이가 바로 제갈공명이다. ─ 유비(劉備) 사후 벌어지는 ─ 제갈량의 1차 북벌 실패, 그리고 이후 4차까지 무리하게 강행된 북벌, 그뿐만 아니라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운명을 다했음에도 이후 무려 30년 동안이나 촉나라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 역시 제갈량이 내정을 튼실하게 쌓아 올렸기에 가능했다. 비록 제갈량의 꿈이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자신의 이상을 향해 충절 한 톨 잃지 않고 머리카락 한 올까지 기꺼이 불태웠다는 점에서,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는 칭송받아 마땅한 위인 중의 위인이다.

그렇다면, 진순신이 소설을 통해 그려내는 제갈량의 이상은 무엇일까? 소설에서 제갈량은 유비 진영에 합류하기 전, 그러니까 양양 근처 융중에서 친구 서서(徐庶), 최주평(崔州平) 등과 천하의 일을 담론할 때 종종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밝히는데, 그것은 스스로 군주가 되어 천하를 평정하는 것보다는 제나라 환공(桓公)을 보좌하면서 나라를 초월한 단결과 일체감을 일궈낸 관중(管仲)을 본받고 싶어 했다. 난세에 태어난 제갈량은 고통받는 천하의 인민을 위해 자신의 재능을 받치고 싶었고, 관중이 환공을 보좌하듯 유비를 섬겼다. 그는 유비가 찾아오기 전부터 이미 이러한 포부를 품고 있었으니, 그 포부를 위해 제갈량이 유비를 선택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 즉, 제갈량은 천하 통일의 대업을 달성해서 전란으로 끊임없이 고통받는 인민을 위무하고 인민에게 평화를 선물하고 싶었다. 그래서 제갈량이 섬길 군주는 꼭 유비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천하를 통일할 자격을 갖춘 영웅이라면 제갈량은 누구라도 섬길 생각이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조조를 선택하지 않고, 유비를 선택했다. 만약 제갈량이 조조를 선택했다면, 그의 능력은 지기인 서서뿐만 아니라 조조 밑에 있던 순유, 순욱, 곽가, 가후 등 내로라하는 책사들의 능력과 시너지 효과를 발휘해 조조에게 엄청난 경쟁력을 가져다줬을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위나라의 천하 통일은 더욱더 빨리 이루어졌으리라.

조조가 아닌 유비를 선택한 제갈량

제갈량 역시 조조(曹操)가 걸출한 위인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어렸을 때 겪은 단 하나의 사건이 제갈량의 신념을 굳힌다. 그것은 조조 같은 사람은 천하를 통일할 자격이 없다는, 제갈량이 죽을 때까지 고수하게 될 신념이었다. 14세 때 고향을 떠난 제갈량은 숙부를 따라 양양으로 향했는데, 그때 일행은 하비를 지나가면서 조조의 만행이 나은 참담한 결과와 마주치게 된다. 조조는 아버지 복수를 위해 서주를 토벌했는데, 복수심에 눈이 먼 나머지 복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백성까지 잔혹하게 학살하고 마을을 깡그리 불태웠다. 제갈량은 아버지를 위해 복수하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아버지의 죽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백성까지 도륙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이 일은 이후 제갈량의 마음속에 선명하게 각인되면서 조조를 생각할 때마다 떠올리게 된다. 제갈량의 생각으로는 만약 조조가 천하를 통일하게 된다면, 제2의 시황제가 되어 천하 인민을 핍박할 것이 틀림없었다. 실상은 제갈량의 걱정과는 꽤 달랐지만 말이다.

제갈량이라고 유비의 모든 점이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유비가 유표가 지배하는 형중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을 때, 제갈량은 유비에게 이미 인심을 잃은 유표를 치고 형주를 차지하라고 권한다. 유비도 제갈량이 말하고자 하는 대의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오갈 데 없는 어려운 처지였을 때 은혜를 입은 유비로서는 차마 유표를 배신할 수 없었다. 제갈량은 사사로운 의리와 정에 연연하는 유비가 못마땅했지만, 한편으론 그런 점에 매료되어 유비를 선택했다. 유비에게는 조조에게 없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덕’과 ‘정’이다. 이 두 미덕은 난세에는 군주가 과감한 결단력을 내려야 할 때 장애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천하가 통일되고 안정되었을 때는 군주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미덕이기도 하다. 나머지 유비의 부족한 점은 제갈량 자신이 보충하면 될 터였다. 제갈량은 그렇게 미래까지 생각하고 끝까지 유비를 따랐던 것이리라. 유비의 따뜻한 미덕과 제갈량의 냉철한 지성이 조화를 이룬다면 천하 통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천하삼분으로 잠시나마 안정을 구할 수는 있을 터였다. 제갈량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제갈량은 그것을 이루어냈다.

여전히 ‘제갈량’을 읽어야 하는 이유

천하의 제갈량이라도 빈틈이나 실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수많은 장점과 뛰어난 능력, 여기에 성인과 비교할 수 있는 청렴한 인품까지 갖춘 그였지만, 일면 그도 미완성의 사람이었다. 그는 생각보다 많은 전투에서 패했다. 하지만, 패배의 책임만큼은 절대 회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 책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만천하에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질책할 정도로 원대한 포부만큼이나 보기 드문 큰 그릇을 지닌 인물이다. 동료나 부하로부터의 직간도 달게 받았다. 한마디로 나라에 충성하는 데 필요한 미덕과 능력을 고루 갖춘 비범한 인재 중의 인재였다. 그는 나라나 군주에게 이롭게 충성하는 데 인재를 천거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런 그가 인재를 활용하는 가장 적극적 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 인사 배치를 소홀하게 여겼을 리는 없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제갈량의 큰 실패 두 가지가 바로 인사 배치의 실패에서 비롯되었다.

제갈량은 관우(關羽)가 형주에서 오나라 세력과 대치하고 있을 때, 아랫사람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관우가 사대부나 윗사람에게는 까다롭다는 성격을 고려하지 않고 강릉 태수로 미방(糜芳)을 임명했다. 가뜩이나 평소에 사이가 안 좋았던 두 사람이었기에 이러한 인사 배치는 사전부터 불안한 요소가 가득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관우가 미방으로부터 군량 보급을 거절당하자 손권의 영토인 상관(湘關)의 군량을 털게 되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관우는 죽음을 맞이한다. 이로부터 유비 세력에 엄청난 피해를 안겨준 이릉 전투가 발생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또한, 제갈량은 마속에 대해 “말이 실제보다 과하오. 크게 쓸 인물이 아니오”라는 유비의 유지가 있었음에도 1차 북벌 때 마속의 능력을 과대평가했다가 가정 전투에서 낭패를 본다. 동료의 만류에도 제갈량은 법에 따라 마속을 처형하고, 이로부터 신하를 법대로 처단하여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뜻의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는 사자성어가 유래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야기는 인사 배치에서 개개인의 능력만을 고려할 것이 아니라 각각의 인물들이 가진 인품이나 성격,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발생할 수 있는 인물들 사이의 마찰이나 경쟁, 대립 구도도 사전에 반드시 고려해야 할 요소임을 시사한다. 그런 점 때문에 제갈량을 다룬 이야기가 인사 배치의 중요성이 주목받는 현대의 기업 • 국가 경영에서 반드시 읽히는 전략서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은 제갈량의 티끌 하나 없는 깨끗한 인품과 사심 하나 없는 청명한 이상이지 않을까 싶다. 더럽고 야비한 수단으로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쌓는 일이 비일비재한 요즘 같은 세상에서 앞서 말한 제갈량의 공명정대한 미덕을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아직 제갈량을 읽는다는 것은 시궁창 속에 살면서도 깨끗함의 미덕을 잃지 않으려는 무의식적인 발악이 우리의 의식과 양심 속에 희미하게나마 존재한다는 방증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제갈량’을 읽고 무엇을 느낄 것인가?

어떻게 보면 제갈량은 다정다감한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사람을 마냥 무시한다거나,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 데면데면하게 굴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예의범절과 사리에 밝았지만, 언제나 대의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중요한 자리에 있었기에 사사로운 정에 연연할 수가 없었다. 아니 연연해서는 안 되었다. 그런 사람은 유비 한 명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그것을 위해 기꺼이 소수를 희생시킬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한다는 것은 말하기는 쉽지만, 막상 그 소수를 앞에 두고 행동으로 옮기기는 절대 쉽지 않다. 머리는 행동으로 옮기라고 명령하지만, 가슴이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다. 이런 감정에 연연하여 차일피일 미루다 보면 응당 기회는 놓칠 수밖에 없다. 유비가 유표의 손에서 차마 형주를 빼앗지 못해 천하삼분의 시기가 늦어진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인간으로서 응당 품을 수밖에 없는 감정조차 절제할 정도로 제갈량은 냉철하고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이자 확고한 신념에서 비롯하는 과감한 결단력의 소유자였다고밖에 볼 수 없다.

하지만, 공명은 자신의 부족한 점을 유비의 따뜻한 미덕을 통해 보완하고 싶었다. 냉철한 공명과 따뜻한 유비로 탄생한 중탕의 섭리는 전란으로 친지와 가족의 잇따른 죽음을 겪어야만 했던 인민의 분노한 마음을 식히면서도, 전란으로 삶의 희망을 잃은 인민들의 마음을 데워줄 것이었다. 천하 인민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고통을 위로하고 싶었던 제갈량의 그 절실함과 애통함이 진순신의 작품을 읽는 내내 내 마음을 휘감았다. 심금을 울렸다. 어느새 내 두 눈은 살며시 배어 나온 눈물로 침침해져 있었다. 흐릿해져 있었다. 감개가 무량했다. 아득한 옛일이 나의 마음을 사정없이 요동시키고 있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나는 읽으면서 이렇게 느꼈지만, 분명히 다른 누군가는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당연히 다르게 느껴져야 하고 그래야 좋은 작품, 좋은 책, 좋은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생각, 느낌, 감명을 주는 책은 삼류 소설이나, 아니면 특정 지식을 주입하는 확실한 목적의식 하나로 집필된 교과서나 가전제품 설명서, 자격증 참고서적 같은 책에서나 경험할 수 있다. 진순신의 소설 『제갈공명』은 역사이기에 앞서 한 편의 문학이다. 그러하기에 누구에게나 다르게 읽힐 여지가 충분하고 또한 그러해야 한다. 자, 당신은 제갈량에게서 무엇을 듣고 싶은가? 아니면 제갈량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이 책은 가상 인공지능 음성 비서 '샤오아이(XiaoAi)'처럼 부족한 것은 부족한 대로, 적절한 것은 적절한 대로, 충분한 것은 충분한 대로 당신에게 제갈량을 이야기해 줄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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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9. 15.

[책 리뷰] ‘범죄’, ‘괴기’, ‘추리’소설의 짬뽕을 맛보다! ~ 우부메의 여름(교고쿠 나쓰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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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괴기’, ‘추리’소설의 짬뽕을 맛보다!

Original Title: 姑獲鳥の夏 by 京極夏彦
“원래 이 세상에는 있어야 할 것만 존재하고, 일어나야 할 일만 일어나는 거야. 우리들이 알고 있는 아주 작은 상식이니 경험이니 하는 것의 범주에서 우주의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만 상식에 벗어난 일이나 경험한 적이 없는 사건을 만나면 모두 입을 모아 저것 참 이상하다는 둥, 그것 참 기이하다는 둥 하면서 법석을 떨게 되는 것이지. 자신들의 내력도 성립 과정도 생각한 적 없는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나?” (『우부메의 여름』, p23)

추리소설 + 괴기소설 + 범죄소설

‘범죄소설’, ‘괴기소설’, ‘추리소설’ 등 세 장르의 특징을 비빔밥 버무리듯 뒤섞어놓으면서도 결말만큼은 마치 루빅 큐브 완성하듯 아귀가 잘 맞아떨어질 정도로 빈틈없고 논리적인, 뜻을 알 수 없는 제목만큼이나 요상한 소설이다. 사실 지난번 『망량의 상자(もうりょうの匣)』 리뷰에서 현학적인 교고쿠도의 화술에 농락당하다 보면 거북한 그의 논리가 궤변인지 정론인지도 알지 못한 채 그냥 압도당하고 마는, 그래서 독자의 취향에 따라 희비가 엇갈릴 수 있다는 말을 남겼었다. 그런데 인제 보니 그것이 뜻밖에 중독성이 있다. 악의 없는 진실한 꾸짖음이 때론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처럼, 경지에 이른 듯한 교고쿠도의 연설은 누군가에게 설교를 듣는 일이 이렇게도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한마디로 마약 같은 장광설이다. (나처럼?) 교고쿠도에게 늘 바보 취급당하는 세키구치의 깨달음처럼 뭔가 고차원적 사기술에 걸려든 듯한 기분이다. 애초부터 그의 주장과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의 장광설, 혹은 공들인 궤변을 넋을 놓고 듣노라면 고개를 힘없이 주억거리며 얼떨결에 수긍하고 말 것이다. 세 치의 혀만으로 대중을 압도한다는 점에서 교고쿠도는 히틀러를 연상시키지만, 과학적 합리성과 논리적 연속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히틀러를 뛰어넘는다. 교고쿠도가 대중 앞에 첫선을 보이는 계기이자 교고쿠 나쓰히코(京極夏言)의 첫 작품이기도 한 『우부메의 여름(姑獲島の夏)』은 첫 활약이니만큼 교고쿠도가 조금은 미숙한 점을 드러낼 만도 한데 전혀 그렇지도 않다. 첫 작품이지만, ‘논리 덩어리’ 다운 엄밀함과 ‘지식 덩어리’ 다운 현학성이 사이좋은 자매처럼 다정하게 공존하는 매우 보기 드문 추리소설이자 괴기소설이며 범죄소설이다. 한마디로 추리소설처럼 논리적이면서 괴기소설처럼 섬뜩하면서, 그리고 범죄소설처럼 술술 읽히는 그런 요상한 소설이다.

이 세상에는 이상한 일 같은 건 아무것도 없다!

『망량의 상자』처럼 『우부메의 여름』 역시 범인(凡人)들에겐 초자연적인 현상처럼 보이는 괴상한 사건을 교고쿠도의 박학다식함이 시종일관 매끈한 강철판처럼 번득이는 추리로 하나하나 격파해 나간다. 그것은 과학적인 합리주의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논리와 추리만으로 ‘미신’과 ‘저주’로 둘러싸인 기괴한 사건의 마뜩잖은 겉껍질을 벗겨 낸다. 그리고 그 겉껍질을 형성하는 주원료인 편견과 선입관을 하나둘씩 혁파해 가면서 사건의 본질을 조금씩 밝혀내 가는 유쾌한 여정이다. 이것은 흥미롭게도 교고쿠도의 여동생이 편집자로 일하는 희담사가 발간하는 ‘희담월보’의 취지와 일맥상통한다. ‘희담월보’는 동서고금의 기담, 괴이한 사건에 이성의 빛을 쏘여 그 수수께끼를 밝히려는 취지의 잡지인데, 교고쿠 나쓰히코가 쓰는 소설이 바로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 작품에서도 과학적으로는 명쾌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교고쿠도의 말을 빌리자면 ‘민속학’적인 요소들이 대거 등장한다. ‘유령’, ‘저주’, ‘요괴’, ‘종교’ 등이 그러하다. 그뿐만 아니라 현대 과학이 다루는 한 분야이면서도 여전히 완벽하게 해명되지 않은 요소들도 교고쿠도의 달변 속에 포함된다. 바로 ‘뇌의 기원’과 뇌와 ‘마음’, ‘의식’, ‘기억’을 서로 연결하고 뒷받침하는 복잡한 구조다. 그럼 이런 것들이 단지 교고쿠도 자신의 박학다식함을 자랑하고자 백화점 진열대에 화려하게 늘어져 있는 상품 같은 요깃거리일 뿐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이 세상에는 있어야 할 것만 존재하고, 일어나야 할 일만 일어난다는, 그래서 이 세상에는 이상한 일 같은 건 아무것도 없다는 교고쿠도의 유명한 (아니면 유명해질) 좌우명처럼 미신이나 초자연적인 현상을 논리정연하게 파고들어 현실의 무언가로 끌어내리는 명석함도 교고쿠 나쓰히코의 작품을 읽는 더없는 맛이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단지 지식을 자랑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괴기스럽고 요상한 사건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식견이자 그 사건을 해결하는 열쇠로 작용한다. 이것은 교고쿠도의 장광설에서 얼핏 보면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을 것 같은 요소들이 결국에 가서는 클라이맥스를 해결하는 논리적 연결고리이자, 이야기 전개의 개연성을 보장하는 보증인이자, 결말의 합법칙성 뒷받침하는 규칙으로 작용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서술 트릭’, ‘선입관’, ‘시선 트릭’으로 마술을 부리다!

이 밖에도 몇 가지 염두에 둘 것이 있는데, 『우부메의 여름』에는 독자(혹은 나만의 경우에는)를 감쪽같이 속이는 트릭으로 일종의 ‘서술 트릭’과 ‘선입관’, 그리고 ‘시선 트릭(?)’이 등장한다. 소설을 이끌어 가는 화자이자 트라우마의 후유증으로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혼란을 겪기도 하는 ‘나’ 세키구치는 프로이트가 심리적 방어기제의 하나로 제시한 데서 비롯된 '선택적 망각' 증상을 보일 뿐만 아니라 선택적으로 사물을 보지 못하는 인지적 착시 현상(정확한 용어는 모르겠다)도 겪는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우리처럼 ‘선입관’으로 똘똘 뭉쳐 있다. 아시다시피 한 사람이 일생을 살아오면서 차곡히 쌓이다 못해 암 덩어리처럼 딱딱하게 굳어지기까지 한 선입관은 쉽게 타파하거나 극복하기는 어렵다. 그런 점에서 그가 보는 것과 보지 못한 것, 이해한 것과 이해하지 못한 것,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 등이 오롯이 그의 잘못이라거나 능력 부족으로 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작가는 세키구치가 겪는 혼란과 혼동을 역이용해 독자의 시선과 머릿속에서 사건의 진상을 교묘히 감춘다.

마지막으로 ‘시선 트릭’이 있다. 이것은 작품 중 아주 잠깐이지만 매우 중요한 한 장면에서 펼쳐진다(나처럼 이것을 뒤늦게야 깨우친 아둔한 독자는 아마도 페이지를 거슬러 올라가서 이 장면을 다시 한번 읽게 될 것이다). 마치 마술사의 숨겨진 필살기처럼 딱 한 번 발휘되는데, 만약 독자가 이것을 눈치채면 사건의 진상을 단박에 꿰뚫어 보는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기에 실로 대범한 수법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필살기이니만큼 정교하고 교묘하게 장치되어 있다. 고로 ‘혹시 내가 트릭을 깨면 어떠하나, 그래서 사건의 진상을 일찌감치 파악하는 바람에 책을 읽는 것이 재미없어지면 어쩌지?’ 하는 뜬구름 같은 기대와 쓸데없는 걱정은 일찌감치 접고 안심하고 읽어도 된다. 사실 술술 읽히는 텍스트와 달콤 쌉싸래하게 사람을 빨아들이는 교고쿠도의 장광설, 그리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괴기스러운 이야기에 점점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트릭’ 같은 것은 잊어버리게 된다. 책을 읽는 ‘나’조차도 잊을 정도다. 하물며 책 읽는 재미를 잃지 않고 독서를 위해 소비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트릭’은 간파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 프로이트의 방어기제처럼 선택적 망각의 대상이 되어 ─ 간과해야 제맛이다.

마치면서...

장르소설로써 설명할 수 있는 작품성 같은 것은 둘째치고 교고쿠 나쓰히코의 텍스트가 발휘하는 흡입력이 어느 정도냐 하면, 지난번에 『망량의 상자』를 읽었을 땐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대조차 미처 몰랐을 정도다. 그만큼 며칠 굶은 사람이 개처럼 허겁지겁 밥을 먹는 것처럼 정신없이 읽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우부메의 여름』도 마찬가지다. 사정이 이러하니 당연히 작가의 다른 작품도 입맛이 당길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작가의 첫 소설이자 ‘교고쿠도 시리즈’의 첫 발판이어서 그런지 시대적 배경이 명확하게 명시된다. 2차 세계대전 직후의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하면 1952년이 소설의 ‘현재’다. 사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현대의 첨단 과학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하면서도 어느 정도의 과학적 합리성과 논리성을 갖춘, 그래서 약간은 고전틱한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내겐 안성맞춤이다. 이것은 아마도 살아보지 못한 시대에 대한 염치 없는 그리움과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괴기스러운 첨단 문명에 대한 위선적인 혐오 때문에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딱히 현대 추리소설을 꺼리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런 연유로 「CSI: 마이애미 (CSI: Miami)」보다는 「탐정 몽크(Monk)」를 더 좋아할 뿐만 아니라 앞 드라마는 아직 한 편도 보지 않았지만, ‘몽크’는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모든 시즌을 감상했다. 이렇게 뜬금없이 다시 떠올리고 보니 다시 한번 ‘몽크’가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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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8. 4.

[책 리뷰] 세 치 혀에 농락당할지라도 재밌으면 그만 ~ 망량의 상자(교고쿠 나쓰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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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치 혀에 농락당할지라도 재밌으면 그만

Original Title: 魍魎の匣 by 講談社文庫

“보통은 그런 짓은 하지 않지. 충동은 대부분 참을 수 있네. 하지만 ― 참을 수 없을 때가 있어. 시간으로 따지자면 겨우 몇십 분의 1초일세. 그 잠깐 사이에, 도리모노가 그녀의 안을 지나간 걸세. 따라서 그녀는 가나코의 등을 밀었을 때 밉다든가, 원망스럽다든가, 그런 축축한 인간의 감정을 갖고 있었던 건 아니야 ― .”

교고쿠도는 그렇게 말하며 두 손을 내밀었다.

“그녀에게는, 그저 가나코의 등에 난 여드름이 보였을 뿐이지.”

(『망량의 상자(下)』 , p168)

‘동기’는 조연도 안 된다!

권짜리 추리 소설은 오랜만이다. 읽는 도중에는 간간이 길다고 느껴지긴 했지만, 다 읽고 나니 소설이 꽤 길다고 느꼈던 불과 조금 전 감상이 새빨간 거짓말처럼 믿어지지 않는다. 이 말은 겉으로는 상관없어 보이는 서로 다른 사건들(소설 속에서)의 전개가 독자에게 혼란과 지루함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 세 치 혀만으로 세상을 헤쳐나간다는 위대한 현학자 교고쿠도의 표현을 빌리자면 ─ ‘이 불쾌한 우연의 집적과 확산’으로 복잡하게 뒤얽힌 사건들의 진상이 하나하나 풀어지는 계몽의 시기는 그야말로 말이 트이고 눈이 뜨이는 천지개벽의 시간이다. 그래서 재밌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 동료로부터 시종일관 바보 취급당하는 가엾은 소설가 세치구치처럼 ─ 왠지 모르게 선생님으로부터 핀잔을 듣는 학생과도 같은 불편하면서도 거북한 마음도 없지 않아 있다. 끝내 진상은 밝혀지지만, 범죄 동기를 세상 사람들이 범죄에 대해 자신을 스스로 이해시키고 만족시키기 위한 환상으로 치부하는 교고쿠도의 여우 같은 설교에 한 번 빠져들고 보니, 그동안 추리 소설 속의 사건을 구성하는 요소 중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던 동기를 탐색하고 밝히는데 적지 않은 뇌세포를 동원해 왔던 나로서는 도무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산 채로 사람의 사지를 절단하고, 하나뿐인 친구를 달려오는 기차 앞으로 밀어 넣고, 엄마가 딸을 유괴할 계획을 모색하는 등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범죄가 분명한 사건들이 발생해도 ‘동기’는 중요한 것이 아니란다. 여기에 한술 더 떠 교고쿠도는 동기만이라면 세상 사람 누구에게나 있을 뿐만 아니라 살인 계획도 다들 세우고 있다면서 단지 실행하지 않을 뿐이라는 섬뜩한 주장을 불쾌한 얼굴로 불쾌하게 설명한다. 솔직히 말해 층간소음을 유발하는 이웃들을 어떻게 죽여야 완전 범죄로 만들까 하는 변변치 못한 궁리를 하는 파렴치한 나를 보면 그의 주장에는 일말의 진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범죄에서 동기는 중요하지 않을뿐더러, 동기는 범죄가 발생하기 전에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범죄가 저질러지고 나서 누군가에게 질문을 받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하니, 그동안 ‘동기’에 천착해 온 나로서는 역시 어리둥절할 뿐이다.

범죄는 막상 ‘그’가 찾아올 때, 일어난다!

고쿠도에게 범죄는 언제나 찾아왔다가 떠나가는 ‘도리모노(通り物)’ 같은 것이다. 도리모노란 지나가던 집이나 만난 사람에게 재앙을 끼치고 나서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는 요괴다. 교고쿠도는 괴상망측한 도리모노를 설명하고자 인기척 없는 심야의 전철역을 상기시킨다. 인기척 없는 심야의 플랫폼 가장자리에 소녀가 서 있고, 거기에 전철이 들어온다. 당신은 그 소녀의 등 뒤에 서 있고, 지금 소녀의 등을 밀어도 목격자는 아무도 없다. 기회는 한 번밖에 없다. 전철이 멈추기 직전, 빨라도 늦어도 안 된다. 아주 약간만 타이밍을 놓쳐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전철은 점점 다가오고,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연히 이런 미묘한 상황에 놓이면 소녀의 등을 밀고 싶은 충동을 정말 느낄까? 아니면 느껴야 할까? 살의라고 부르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미덥지 못한 이러한 충동을 대부분 사람은 잘 참아낸다. 참아내니까 세상은 그나마 살 만한 것이다. 나 같은 경우 위층이나 아래층에 사는 사람을 종종 계단에서 마주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사람이 계단 위쪽에서 구르기 시작하여 아래쪽까지 도착하는데 몇 번을 굴러야 하나 시험해 보고 싶은 충동을 간절하게 느낀다. 그렇지만, 이 글을 ─ 감옥이 아닌 ─ 집에서 쓰고 있다는 것은 대견스럽게도 내가 그 충동을 잘 참아내 왔기 때문이다(이런 점 때문에 층간소음을 일으키는 이웃을 계단이나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일은 내겐 일종의 고문이다). 하지만, 참을 수 없을 때가 있다. 1초도 안 되는 그 잠깐 사이에, 도리모노가 그 사람 안을 흩고 지나간다. 심야의 플랫폼 가장자리에 서 있던 소녀의 등을 민다. 그 소녀가 미워서도 아니고, 원망스러워서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도리모노’일뿐이다. 그렇다면 연쇄살인범은 도리모노에게 영혼이 강탈된 자인가? 아니면 도리모노 그 자체인가?

아무튼, 사정이 이러하니 교고쿠 나쓰히코(講談社文庫)의 『망량의 상자(もうりょうの匣)』를 읽고 난 뒷맛이 개운할 리가 없다. 이제 막 긴장이 풀어진 뇌세포를 휴식 상태로 전환해놓고, 허탈해하는 오장육부를 휘돌아 나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책장을 덮는다. 이쯤 되면 오롯이 남아있는 것은, 약간은 허망하면서도 그다지 불쾌하지는 않은, 억울하지만 분하지는 않은 알쏭달쏭한 미련이다. 시체를 먹는 귀신을 망량이라고 하지만, 한편으론 상당히 오래된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자 흐릿한 경계도 망량(魍魎)이라고 한다. 추리 소설과 환상 소설의 흐릿한 경계를 배회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책 『망량의 상자(もうりょうの匣)』야말로 내겐 ‘망량’이다.

취향에 따라 희비가 크게 엇갈릴 수 있는 작품

다인(S. S. Van Dine)이 창조한 탐정 파일로 반스(Philo Vance)보다 더 현학적인 교고쿠도의 화술에 농락당하다 보면 거북한 그의 논리가 궤변인지 정론인지도 알지 못한 채 그냥 압도당하고 마는 , 『망량의 상자(もうりょうの匣)』는 그런 추리 소설이다. 독자는 음울한 사소설을 쓰는 소설가이자 처음부터 끝까지 동료에게 이해력이 떨어진다고 핀잔받는 가련한 세치구치처럼 ‘이 불쾌한 우연의 집적과 확산’으로 복잡하게 뒤얽힌 사건들이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래서 끝을 보고도 석연치 않다. 그렇게 미련은 남는다. 누군가에게 이 미련은 시기를 놓쳐 버리지 못하고 남은 쓰레기처럼 불쾌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꼭 쓸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 색다른 것을 발견한 것 같은 소박한 흥분감을 느끼게 해줄 수도 있다. 무엇이 정답인지는 읽은 사람만이 알 수 있지만, 한가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읽었던 추리 소설들과는 달라도 많이 다른, 현학적으로 집요한 맛이 느껴지는, 태생부터가 어딘지 다른 돌연변이 같은 추리 소설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충고하자면, 교고쿠도의 현학적 언변이 색다른 탐구의 길을 모색했다는 반가움과 지적 흥분감을 느끼게 할 수도 있지만, 수다스러운 허풍쟁이의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는 불쾌감을 줄 수도 있다. 물론 선택은 당신의 자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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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7. 21.

[책 리뷰] 전설적 형사로 은유하는 홍콩 경찰의 슬픈 역사 ~ 13.67(찬호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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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 형사로 은유하는 홍콩 경찰의 슬픈 역사

Original Title: 13.67 by 陳浩基
“그 여덟 장은 금고 안에 남겨뒀습니다. 범인이 정보를 얻고 싶어 하는데 못 줄 것도 없죠. 난 손안의 패를 상대방이 못 보게 감추는 것보다 대범하게 다 보여주는 편을 좋아합니다. 상대방은 내 손만 보고 그게 내 패의 전부라고 생각하겠죠. 하지만 난 의자 밑에 그것보다 열 배가 넘는 패를 숨겨놓고 있거든요. 그래야 더 재미있어지는 겁니다.” (『13.67』, p562)

격동의 홍콩을 은유하는 형사 ‘관전둬’

리 소설로는 드물게 미스터리의 엄밀함과 문학성을 두루 갖춘 텍스트로 독자를 현혹시키는 『기억나지 않은, 형사(遺忘.刑警)』로 일본 추리소설계의 거장 시마다 소지(島田荘司)로부터는 “무한대의 재능”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찬호께이(陳浩基)의 또 다른 작품 『13.67』은 홍콩의 전설적인 천재 형사 관전둬의 이야기다. 물론 관전둬는 실존 인물은 아니다. 그는 찬호께이가 홍콩 경찰의 어둡고 씁쓸한 역사를 재조명하고, 줄곧 아시아 속의 ‘작은 서양’으로 존재하다가 급성장한 신중국의 사회주의 체제로 편입되는 바람에 중심을 잃고 부침하는 격동의 시기를 보낸 홍콩을 은유하고자 창조한 인물이다. (솔직히 난 홍콩/중국 영화에 경찰로 멋지게 등장하는 배우들을 통해 봤던 모습들을 제외하고는 홍콩 경찰이나 홍콩 역사에 대해서는 쥐뿔만큼도 모르지만) 찬호께이는 ─ 소설 『13.67』 집필 시기인 ─ 2013년에 와서도 홍콩 경찰의 이미지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고 토로한다. 강하고 공정하고 정의롭고 용감하며 시민을 위해 온 마음으로 일하는, 그래서 홍콩 어린이들의 자랑거리이자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홍콩 경찰은 이제 온데간데없으며, 1967년 무렵의 괴상하고 추한 모습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찬호께이에게는 홍콩 경찰이 전성기를 누렸던 때 같은 신뢰를 시민으로부터 다시 받을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하지만, 관전둬의 파란만장한 형사의 삶 속에는 홍콩 사회와 홍콩 경찰이 겪었던 혼돈과 격동의 시기가 고스란히 녹아 있고, 또한 그가 백 퍼센트 해결률을 자랑하는 전설적인 형사라는 점을 고려하면, 저자는 홍콩 경찰을 은유하는 관전둬를 통해 홍콩 경찰의 암울한 현재를 어떻게든 빨리 떨쳐버리고 싶다는 무언의 희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 아닌가 싶다. 그 희망 속에는 다시 홍콩 경찰이 어린이들의 우상이 되고, 시민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지원군이 되어 줄 가까운 미래도 포함되어 있을 듯싶다.

‘관전둬’의 사명감 속에 새겨진 홍콩 경찰의 밝은 미래

설의 제목이 ‘13.67’인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오늘날, 즉 20 13 년의 홍콩이 19 67 년의 홍콩처럼 똑같이 괴상하며, 홍콩 경찰 역시 그때처럼 바르지 못한 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경찰의 온갖 부정, 부패, 특권이 거리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되었으며 본토의 문화대혁명 영향으로 사회적으로도 혼란하고 과격한 시기를 보냈던 때가 1967년임을 고려하면 저자가 탄식하며 걱정하는 홍콩 사회의 현재(2013년)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대략적으로나마 감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관전둬가 경찰로서 갖는 사명감이다. 관전둬는 아무 의심 없이 무조건 상급자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홍콩경찰선서에 어긋나더라도 시민을 보호해야 하는 것이 경찰의 가장 우선적이자 진정한 임무라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형사로서 남긴 발자취에 깊이 새겨 넣은 부동의 신념이기도 하다. 제도가 무고한 시민에게 피해를 주거나 정의를 표방하지 못한다면, 경찰은 분명한 근거를 내세우면서 경직된 제도에 대항해야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또한, 관전둬는 교활하고 음험한 범죄자에 맞서고자 자신의 목숨마저 기꺼이 내놓는 인물이 아니었던가!

찬호께이가 괜히 관전둬를 심어 놓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지나치게 경직되고 자신들의 밥그릇만 지키기에 바쁜 현재의 홍콩 경찰(이 고질적인 병폐는 비단 홍콩 경찰뿐이겠는가!)이 스스로 정화할 수 없을 정도로 문제가 비대해지기 전에 옳은 길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관전둬 형사를 통해 은근히 내비치는 것이다. 참고로 ‘홍콩 누아르’라는 장르를 탄생시켰을 정도로 경찰 조직에 부패가 만연했던 1970년대에 홍콩 정부는 염정공서(廉政公署, ICAC-HongKong : Independent Commission)라는 외부 조직을 만들어 ─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5장 빌려온 공간」의 배경이기도 하다 ─ 부패한 경찰을 조사하는 역할을 맡기기도 했다. 이런 극약 처방을 내려야 하는 최악의 상황으로까지 내몰리기 전에 홍콩 경찰이 어린이들의 우상이 되고, 시민의 든든한 지팡이가 되는 날이 다시 오기를, 선의를 가진 시민이라면 누구라도 환영할만한 이런 경사스러운 일이 비단 홍콩뿐만 아니라 우리 한국의 경찰도 그렇게 되기를, 찬호께이와 함께 소망해본다.

뭐라고 씨부렁거리던 추리 소설의 묘미를 온전히 갖춘 수작이다!

전 작품 『기억나지 않은, 형사(遺忘.刑警)』에선 볼 수 없었던 ‘사회파 미스터리’ 같은 요소가 소설 『13.67』에 포함된 것은 사실이지만, 뭐니 뭐니 해도 추리 소설의 묘미는 ‘미스터리’, ‘트릭’, ‘추리’, ‘반전’이라는 점에서 볼 때 『13.67』은 앞서 말한 모든 요소에 형사와 범인과의 뛰어난 두뇌 대결까지 갖춘 추리 소설의 완벽한 ‘풀세트’다. 마치 고수들이 바둑을 두는 것처럼 상대의 여러 수를 넘겨보고, 크고 작은 승패에 얽매이지 않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같은 동료와 심지어는 소속된 조직까지 속일 정도로 대담한 계략으로 도박사 같은 승부수를 던지는 관전둬와 지능범과의 치밀한 두뇌 대결은 관전둬 형사의 뛰어난 후배라고 할 수 있는 뤄샤오밍 형사마저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정도로 종잡을 수 없다. 그만큼 관전둬 형사의 두뇌 플레이는 ‘역대급’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나며, 추리력 역시 Sherlock Holmes(셜록 홈스)가 홍콩에서 환생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날카롭기 그지없다.

한편, 그는 ‘사고 기계(The Thinking Machine)’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밴 두젠(Augustus S.F.X. Van Dusen) 교수(작가 잭 푸트렐이 창조한 인물), 할머니라는 혼화한 마스크 속에 번득이는 사고력을 감춘 미스 마플(Jane Marple), 제프리 디버(Jeffery Deaver)가 창조한 반신불수의 은퇴한 경찰 링컨 라임(Lincoln Rhyme) 같은 유형의 안락의자 탐정(Armchair detective)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그가 행동하기를 싫어하는 게으른 유형의 형사라는 것은 아니다. (스포일러 때문에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젊었을 때 그는 액션 영화에서나 볼법한 불꽃 튀는 추격전을 몸소 보여주기도 한다. 가끔 관전둬는 동료가 수집한 자료나 정보를 종합하고 추리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직접 현장에 가지 못함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지만,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현장 업무를 고집하지는 않는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은 현재에서 과거로 진행되는 역순의 연대기 형식이라는 평범하지 않은 구성을 취하고 있다. 여섯 편의 단편은 ‘관전둬 사건 일지’라고 제목을 붙여도 될 정도로 독립적이며 하나하나가 훌륭한 단편 추리 소설이다. 그러나 마지막 페이지의 마지막 문장을 접했을 때 받게 될, 마치 죽음의 신의 휘두른 거대한 낫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 같은 몸서리쳐지는 서늘함을 접하게 되었을 때, 독자는 찬호께이의 천재적인 플롯 구성, 그리고 서로 배타적이면서도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플롯의 엄밀함에 혀를 내두르게 될 것이다. 특히, 마지막 반전은 또 한 명의 ‘관전둬’가 될 수도 있었을 법한 비범한 인물이 한 개인을 은은하게 짓누르는 역사와 기회와 운에 교묘하게 지배받는 인생이라는 격랑 속에서 교활한 범죄자로 타락하는 운명의 아이러니를 절실하게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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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6. 23.

[책 리뷰] 진실 뒤에 숨은 지독한 이기심 ~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우타노 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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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뒤에 숨은 지독한 이기심

Original Title: 家守 連作推理小說 by 歌野晶午
“ … 닥치는 대로 정보를 공개해서 질서를 혼란시키는 게 정의일까? 세상에는 ‘필요악’이라든지 '거짓도 방편’이라는 말이 있어. 사람이라는 생물은 거짓말이나 악을 잘 이용해서 지금까지 계속 번성해 왔지.”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 p306~p307)

늘 소개하는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家守 連作推理小說)』는 내가 지금까지 읽은 수백 편의 추리 소설 중 최고의 반전 펀치를 날린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의 작가 우타노 쇼고(歌野晶午)의 단편 소설집이다. 총 다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제목에서 예상할 수 있듯 모두 가정집에서 일어난 밀실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밀실 살인 사건을 주된 테마로 하는 듯 보이지만, 내가 보기에 이 소설의 숨겨진 묘미는 ‘의도치 않은 살인’이 반 박자 늦게 불러오는 ‘섬뜩함’이다. 보통 추리 소설을 읽는 재미는 치밀하게 계획된 살인 범죄를 엉킨 실타래 풀듯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데 있지만(물론 이 소설에도 의도적인 살인이 한 건 등장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살인 사건들처럼 우연하고 우발적으로 일어난 의도치 않은 살인이 불러오는 예기치 못한 섬뜩함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이렇게만 설명하고 나니 속 빈 강정처럼 뭔가 싱겁게 들린다. 과실치사라고 불려도 무방한, 살인 사건 같지 않은 살인 사건들 속에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들처럼 미스터리한 맛이 무엇 있겠으며, 또한 명탐정 김전일처럼 명쾌하게 추리할 만한, 명석한 두뇌를 가진 독자들의 탐정 기질을 충분히 자극할 수 있는 건더기가 있어봤자 얼마나 있겠는가 하고 넘겨짚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섣부른 판단이 될 수도 있다. 우타노 쇼고도 그 점을 생각했는지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들을 신문기사처럼 그저 보이는 대로 싱겁고 맹숭맹숭하게 독자 앞에 갖다 바치는 대신 ‘우연’, 혹은 ‘우발성’이라는 범죄 아닌 범죄 속에 묻힌 사람들의 본능처럼 발동하는 이기심을 간과하지 않으며 그 뒤에 살포시 은폐된 진실을 들여다본다. 마치 악마가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선 집에 함부로 들락날락한 것을 부모님에게 들켜 혼나는 것이 무서워 친구가 낯선 집에서 숨바꼭질하다 실종된 것을 숨긴 소년들(인형사의 집), 수십 년 전에 유괴된 동생을 기다려야 한다는 이유로 마을에서 유일하게 도로 개발에 반대하며 집을 팔지 않고 버티다가 보상금에 눈이 먼 남편에게 살해된 아내와 그 아내가 유괴된 것으로 믿었던 동생의 비밀(집 지키는 사람), 고액에 혹해서 치매 노인의 가짜 아들 역할을 맡았다가 뜻하지 않은 죽음을 맞이한 청년(즐거운 나의 집), 시골 마을 사람들의 집단 이기심에 의해 계획적으로 은폐되고 날조된 살인 사건(산골 마을), 복권처럼 돼도 그만 안 돼도 그만인 ‘프로버빌리티(probability) 범죄’로 아내를 가혹하게 다룬 남편의 예기치 못한 비극적 결말(거주지 불명) 등 총 다섯 편의 이야기는 우타노 쇼고의 다른 작품에 비하면 반전의 파괴성이나 기발한 맛은 덜하지만, 사람의 죽음조차 태연하게 덮어버리려는 지독한 이기심을 예기치 못한 살인을 은폐하려는 인물들의 비겁한 행위 속으로 잘 녹아내리게 했다는 점에서 나름의 호소력이 있다.

지막으로, ─ 오늘 했던 이야기와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 다섯 편의 단편 중 마지막 편인 「거주지 불명」에서 아내를 친정으로 쫓아내어 자유를 되찾고자 하는 목적으로 집에 얽힌 무서운 이야기로 아내를 겁주던 남편 도시미쓰는 아내가 집을 되팔자는 성화에 일일이 답변하다가 이런 말을 내뱉는다.

“ … 아파트는 싫어. 정원도 없는 집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어.”

그런데 도미시쓰가 사는 일본의 바로 옆 나라는 애초 집 살 때 정원 같은 거 고려할 생각조차 못 한다. 소음에 시달려 신경병 환자가 되고 먼지를 잔뜩 먹어 목이 막혀도 상관없다. 다만, 장래에 집값이 얼마나 오를 것인가만을 따져본다. 도시미쓰를 보면 한국의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오명이 단지 정부와 대기업이 짜고 치는 고스톱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그 판에 놀아나는 무지한 국민도 문제이다. 우리보단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는 일본의 주택 환경이 부럽기도 하고, 내 집 앞 골목이나 인도에서조차 마음 놓고 걸어 다닐 수가 없는 한국의 불량하고 비인간적인 주택 환경에 분노가 치밀기도 하여 별 시답지도 않은 몇 마디 적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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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6. 2.

[책 리뷰] ‘유령 탐정’, 자신을 죽인 자를 추적하다! ~ 생사의 강(차이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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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탐정’, 자신을 죽인 자를 추적하다!

Original Title: 生死河 by 蔡駿
“모든 아이들은 태어날 때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대요. 행복하게 살다가 편안히 죽었든, 기구하게 살다가 비명횡사했든, 아니면 일찍이 요절했든 그 기억이 남아 있다죠. 기쁘고 슬프고 고통스럽고 힘든 기억들이 머릿속에 남아 있는 거예요. 갓난아기들이 밤에 잠도 안 자고 우는 게 바로 그 때문이래요. 시간이 지날수록 그 기억들이 점점 희미해져 나중엔 다 잊어버리고 순수한 아이가 되는 거죠.” (『생사의 강』, p200~p201)

맹파탕(孟婆湯)을 토하고 기억을 간직하다

떠한 종류의 어느 정도 고통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고통과 그런 고통에 몸부림치며 신음하고 있을 때 누군가로부터 위로받지 못하고 쓸쓸하게 혼자 감내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점은 좀 두렵지만, 나는 죽음 그 자체는 두렵지 않다. 그것은 죽음 뒤에 무엇이 있을지 두렵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땐 이미 존재 여부와 존재의 소멸을 느껴야 할 ‘나’라는 존재 자체가 없으니까. 그렇더라고는 해도 만약 사후 세계가 있다면, 그 사후 세계가 어떤 식으로 존재할지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마저 매몰차게 떨쳐버리기는 어렵다. 이러한 호기심은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존재이기에 앞서 영적이고 문화적인 존재인 한 인간이 품을 수 있는 근원적이고 문학적인 상상력을 사유로 한다.

사실과 실험으로써 진리를 이해하려는 엄격한 과학은 사후 세계와 환생을 설명하려고도 않지만, 우주의 막연함과 경이로움 앞에 여전히 작은 존재인 인류의 지식이 아직 밝히지 못한, 아니면 결코 밝힐 수 없는 환생 시스템이 어떤 방식으로든 작동하고 있다면, 전생의 기억을 간직한 채 태어나는 사람들은 그 환생 시스템에서 아주 가끔 일어나는 오류일지도 모른다. 혹은 누구처럼 삼켜야 할 맹파탕(孟婆湯)을 토해낸 결과일지도 모른다.

『생사의 강(生死河)』에는 이런 전설이 나온다. 사람이 죽으면 귀문관(鬼門關)을 건너 황천길로 들어서는데 저승과 이승의 사이에 망천수(忘川水)라는 강이 있고, 그 강에 있는 나하교(奈何橋)를 건너면 다시 태어난다. 하지만, 나하교를 건너려면 나하교 옆에 앉아 있는 맹파(孟婆)라는 노파가 주는 맹파탕을 마셔야 한다. 맹파탕을 마시면 이승에서의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나하교를 건너자마자 좀 전에 먹은 맹파탕을 토해낸 불량한 영혼이 있다. 그럼으로써 그는 전생의 기억을 그대로 간직한 채, 그리고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자신을 죽인 사람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죽어야만 했던 그 원한도 그대로 이어받은 채 환생한다. 그래서 그는 다음 생애에서 자신을 죽인 범인을 잡는 ‘유령 탐정’이 된다. 그는 바로 차이쥔(蔡駿) 추리 소설 『생사의 강』에 등장하는 요절한 주인공 선밍이다.

사람의 복잡한 삶을 축소해 놓은 듯한 사건의 복잡성

난 추리 소설이다. 선밍이 학생들에게 ‘마녀 구역’이라 불리는 음침하고 캄캄한 지하실에 혼자 있을 때 자신을 뒤에서 급습하여 칼로 찔러 죽인 범인을 추리해 나간다는 점에서는 추리 소설이지만, 살해된 사람이 전생의 기억과 원한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환생하여 자칭 ‘유령 탐정’ 노릇을 한다는 점은 추리 소설이기보다는 괴기 소설에 더 가깝다. 살해된 영혼이 다른 인물로 환생하여 전생의 ‘나’를 죽인 살인자를 찾아 나선다는 이야기만 놓고 보면 ‘전설의 고향’이나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막상 소설을 읽어보면 선밍이 살해된 사건 전후로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어내기는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생사의 강(生死河)』에 등장하는 살인자는 한두 명이 아니고, 그에 따라 피해자도 여러 명이다. 선밍 같은 경우는 특이하게도 살해된 피해자이기에 앞서 분노와 증오로 눈이 먼 나머지 애꿎은 사람을 죽인 적이 있는 명백한 살인자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인과응보로 보이기도 한다. 다른 소설이나 현실에서 일어나는 살인처럼 『생사의 강』 속 살인자들도 시기, 질투, 탐욕, 증오, 비밀 등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살인을 저지른다. 언뜻 보면 각각의 살인은 개별적으로 보일 정도로 사건들을 서로 이어주는 동기나 연결성은 쉽게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언뜻 개별적으로 보이는 각각의 사건과 선밍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어떤 것은 거미줄처럼 매우 가늘고, 어떤 것은 동아줄처럼 매우 굵은 등의 서로 차이를 보일 수는 있어도 사건들의 중심에는 선밍이 있다는 것이다.

거의 이십 년에 가까운 길고도 긴 수사 과정을 거친 끝에 마침내 선밍을 죽인 살인자는 밝혀진다. 선밍의 죽음에 직 • 간접적으로 무수히 얽힌 복잡하기 그지없는 우여곡절은 사람의 다사다난하고 복잡한 삶을 축소해 놓은 듯 매우 압축적이며 조밀하다. 독자의 가슴을 찢어발길 수도 있는 선민의 죽음에 얽힌 우연적 요소는 잔인한 운명의 장난 때문에 불행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의 비극적인 삶을 대변해주는 듯하다. 등장인물 간에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처럼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와 은원관계는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머릿속과 마음속에서 쉽게 갈무리가 안 될 정도다. 마침내 선밍을 죽인 사람이 누구였는지 밝혀지는 순간, 그 운명의 잔인함과 불가해함에 할 말을 잃고, 그런 복잡한 난제를 소설로 풀어쓸 수 있었던 차이쥔(蔡駿)의 문학적 상상력과 감수성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만다.

주인을 서서히 갉아먹는 비밀

지고 보면 이렇게 삶을 복잡하고 어렵게 만드는 것은 사람은 누구나 한두 개씩 품고 사는 ‘비밀’이다. 선밍의 영혼이 씌운, 한마디로 귀신 들린 소년 쓰왕의 말처럼 누군가는 그 비밀을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를 손에 넣고자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 비밀을 숨기려고 살인까지 저지르며 비밀을 알고 있는 자의 입을 막기도 한다. 물론 아름다운 비밀을 간직한 사람도 있겠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공개되는 순간 자신의 삶을 하루아침에 파멸시킬 수 있는 치명적이고 범죄적인 비밀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다. 이런 비밀은 그것이 누군가에게 약점으로 잡히는 순간 그 주인에게도 매우 치명적이기에 그것을 지키려는 사람의 수단과 방법도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람에게 가장 치명적인 수단은 바로 살인이다. 그래서 치명적인 비밀을 품는 등장인물들이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생사의 강』에서는 살인도 많이 일어난다.

치명적인 비밀을 품고 산다는 것은 자신의 몸속에 흰개미를 품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의 삶은 흰개미에 의해 서서히 갉아 먹힐 테고, 그래서 언젠가는 약간의 타격만으로 쉽게 허물어지게 된다. 그것은 운이 나쁘면 비극적인 죽음이 될 것이고, 운이 좋다면 절망과 좌절에 늪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서서히 세상으로부터 잊히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두 결과 다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겪고 싶지 않은 끔찍한 일이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것은 살면서 그런 치명적인 비밀을 절대로 만들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다. 그럴 땐 어찌해야 할까? 나라고 별수 있나? 나도 모르겠다.

마치면서...

이쥔(蔡駿)의 『생사의 강』은 지금까지 읽어본 추리 소설 중에서 가장 복잡한 사건 배경을 가진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일 것이다. 그 복잡성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 머릿속으로 작품을 정리하면서 음미하는 과정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지만, 한편으론 무상하고 기만적인 운명의 얄궂은 장난을 보는 것 같아 알싸한 슬픔에 젖게 한다. 아무튼, 데구루루 굴러가면서 저절로 풀어지기도 하는 실뭉치를 신기한 듯 따라가는 고양이처럼 문장이 풀어내는 이야기를 본능적으로 따라가지 않고는 못 배기는 소설이다. 굴러가던 실뭉치가 고르지 못한 바닥 때문에 요리 튀고 저리 튈 때마다 고양이가 춤을 추는 것처럼 독자도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변화무쌍한 이야기 전개에 따라 감정이 요동치는 짜릿함을 맛볼 수 있으리라.

마지막으로 현대 중국 소설을 읽다 보면 생소하면서도 어딘지 낯익은 과거를 보는 듯한 이채로운 도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인데, 2000년대 초에 우체국에서 아직도 주판을 사용하는 것과 자가용 불법 택시, 중학교 근처에 생뚱맞게 자리한 고급 술집은 꼭 우리의 멀지 않은 과거를 보는 것 같다. 반면에,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는데) 중국에는 크리스마스 휴일이 없다는 사실과 고등학교 1학년 첫 어문 수업(우리나라로 따지면 국어?)에 마오쩌둥의 글을 배운다는 점은 역시 혁명으로 탄생한 공산주의 국가라는 특색을 드러내는 것 같아 이색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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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5. 12.

[책 리뷰] 먼뎃불빛 같은 추억 속에 잠긴 비운의 사랑 ~ 백발마녀전(양우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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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뎃불빛 같은 추억 속에 잠긴 비운의 사랑

Original Title: 白髮魔女傳 by 梁羽生
옥나찰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절세의 용모를 지니고 태어난 몸이었다. 그리고 자기의 미모를 가장 사랑하고 아꼈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소녀가 백발의 여인으로 변하고 만 것이었다. 얼굴이 쭈글쭈글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백발 노파가 된 것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이 당한 괴로움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그저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다. (백발마녀전(白髮魔女傳) 중에서)

오래간만에 무협 소설을 찾은 변변치 않은 이유

릿속이 실타래가 엉킨 것처럼 잡다한 상념과 고민으로 복잡하게 꼬여 있을 때,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을 때, 지속해서 책을 읽는다는 것에 회의를 느끼거나 독서 자체에 염증을 느낄 때, 이럴 때 나는 무협 소설을 찾는다. 재충전 안 되는 일회용 건전지가 하릴없이 방전되는 것처럼 남은 삶의 하루하루가 무기력하게 소모되는 나의 삶에서 번뇌와 자책감에 빠지는 것마저 때론 사치로 느껴질 때, 무협 소설은 이 모든 상념과 번뇌에서 잠시라도 벗어나는 해방감을 만끽하게 해준다. 삶의 중압감으로 빈대떡처럼 납작하게 짓눌려 있었던 꿈을 풍선처럼 다시 부풀어 오르게 하고, 냉혹한 현실주의로 기가 팍 죽어 있던 공상의 금빛 날개를 다시금 펼치게 하는 무림의 세계는 엄연히 비현실적이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매혹적이다. 마음과 머릿속에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던 번뇌의 실타래를 한올 한올 풀어주는 시원스럽고 통쾌한 무공 대결, 부족한 용기와 타고난 소심함으로 포효해내지 못했던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울분을 삭여주는 의협심이 활활 타오르는 크고 작은 영웅들의 이야기는 감개무량하다. 여기에 난독증으로 고생하는 사람, 책만 보면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사람, 아니면 나처럼 즐겨 책을 읽던 사람 등 책과 친하고 친하지 않고에 상관없이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든 이에게 폭풍 같은 흡입력을 발휘하는 조악하면서도 단순하고 명확하고 간결한 문체도 무겁고 심란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주는 데 한몫한다. 그렇다고 무협/판타지 소설이 독서 세계의 주요 장르가 되어서는 아니 되지만, 앞서 거론한 몇 가지 이유와 기타 이런저런 이유로 가끔은 기분 전환 삼아 빠져들 만하다. 그래서 찾은 작품이 영화로도 유명한 양우생(梁羽生)의 무협 소설 「백발마녀전(白髮魔女傳)」이다. 한국에서는 『여도 옥나찰(女盜 玉羅刹_』이란 제목으로 소개되었지만, 중국어 위키백과를 찾아보니 ‘백발마녀전’이 원제다.

내가 만난 최고의 女고수이자 최고의 女영웅

금까지 내가 읽어본 무협 소설이라 해봤자 김용(金庸)과 고룡(古龍)의 몇몇 작품들로 한정되지만, 사실 무협 소설 중에서 굳이 찾아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내 생각으론 무협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김용을 제외하면, 고룡, 양우생, 와룡생(臥龍生) 정도 언급하고 싶을 뿐이다. 보통 무협 소설 한 작품의 분량이 일반 소설보다 훨씬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앞에 거론한 작가들의 작품을 고루고루 돌려 읽는다면 평생 우려먹을 수 있으므로 기타 무협 소설을 읽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 낭비다.

그런데 지금까지 읽어본 무협 소설의 주인공들은 전부 다 남자 영웅이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女영웅을, 그것도 정파와 대립하는 녹림에 몸을 담은 女고수를 만났다. 무림인들은 그녀가 없는 곳에서는 그녀를 옥나찰(玉羅刹)이라 부르지만, 그녀의 본명은 연예상(練霓霜)이다. ‘나찰’은 사람을 잡아먹는 귀신을 뜻하는데 이 앞에 아름다움을 뜻하는 구슬 ‘옥’자가 붙었으니,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박거리지 않는 절세미녀를 이처럼 잘 표현한 별호는 없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보통의 무협 소설에서 남자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미녀를 빼놓을 수 없듯, 옥나찰 역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난다. 다만, 다른 무협지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강호를 유람하다 인연을 맺게 된 여러 명의 미녀 사이에서 애증의 굴레에 빠지고, 사랑의 달콤한 갈등을 거듭하는 것에 반해 옥나찰은 단 한 명의 남자와 처음이자 마지막인 운명적 사랑에 빠진다. 매초 악랄한 초식을 구사하면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독한 마음의 소유자이자, 무공이 고강한 만큼이나 호승심도 강한 그녀의 아찔한 애정의 과녁이 된 행운(?)의 남자는 장차 무당파의 장문인이 될 장문제자 탁일항(卓一航)이다./p>

먼뎃불빛 같은 추억으로 남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자는 녹림을 주름잡는 대도 중의 대도, 남자는 강호에서 소림사와 함께 정파를 대표하는 무당파의 장문제자. 두 사람의 배경부터 흑과 백의 구별이 선명하지만, 두 사람의 성격 차이도 그에 못지않다. 옥나찰은 자신의 무공과 미모에 대하여 자부심으로 가득 찬만큼 어떤 상황에서도 안하무인 격으로 거칠 것 없이 행동한다. 또한, 그녀는 심보가 악독하기로 정평이 나 있고, 그녀의 하얀 섬섬옥수가 내지르는 수단 하나하나가 매섭기 그지없지만, 흑백을 가릴 줄 알고 시비를 분간할 줄 아는 호탕한 협녀다. 반면에 탁일항은 무협 소설에서는 보기 드물게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옥나찰과의 애정 문제에서는 매사 우유부단한 태도를 선보이며 영 시원스럽지가 못하다. 한마디로 시종일관 답답한 모습을 보이면서 독자의 짜증을 부채질한다. 그뿐만 아니라 옥나찰의 걸출한 무공과 눈부신 외모에 비하면 탁일항의 무공은 그저 그렇고 외모는 고만고만하다. 한마디로 무협 소설의 남자 주인공치곤 매우 변변치 못한 인물이 바로 탁일항이다. 이런 두 사람의 대비되는 배경과 성격에서 짐작해 볼 수 있듯 두 사람의 줄타기 같았던 아슬아슬한 사랑은 결국 가슴에 사뭇 치는 처연하고 쓸쓸한 감정만 남긴 채 미완성으로 마무리된다.

옥나찰이 처음으로 탁일항을 만나게 되는 철이 없을 무렵, 그녀는 탁일항과 결합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어려움도 무릅쓸 각오가 되어 있었고, 두 사람 사이를 방해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지위나 무공의 고하 따위는 상관없었다. 그녀에겐 두 사람의 앞길을 훼방 놓는 사람은 모두가 적이었다. 그것은 세상 규칙 따윈 거들떠보지도 않는 호방하고 방종한 그녀의 성격과도 일치했다. 그렇게 그녀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일편단심으로 두 사람의 인연을 완성하려고 했지만, 관습과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는 소심하고 답답한 탁일항의 모습에서 사랑을 확신하지 못한 옥나찰은 좌절에 좌절을 거듭한 나머지 꼭 탁일항과 함께 사는 것만이 최선은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때는 이미 사랑의 번뇌가 가져다준 상심과 피로, 사랑과 미움의 반복이라는 시련이 극에 달한 나머지 그녀의 머리가 허옇게 세어버렸을 때이기도 하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자 그녀는 두 사람의 사랑을 하늘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여겼던 것일까? 탁일항의 모든 것을 희생시키고 자기 혼자만 그를 독차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차라리 한 가닥 애련한 추억을 남기고 그것을 기억하며 살기로 마음먹는다. 아쉽게도 두 사람의 사랑은 밤하늘을 수놓은 별처럼 서로 마주 보면서도 결코 가까이 다가설 수 없는 아득하고 아련한 먼뎃불빛 같은 추억으로 남게 되고,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애틋함과 쓸쓸함은 예리한 면도날이 오장육부를 스쳐 가듯 가슴 한구석을 아려 온다.

마치면서 무협 소설에 대해 한 마디

협 소설에서 무지개처럼 화려하고 번개처럼 날렵하며 태풍처럼 웅장한 무공 대결만큼이나 볼만한 것이 남녀 주인공의 기구한 사랑의 운명이다. 하지만, 보통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는 우여곡절을 거듭하고 다사다난한 역정을 거치면서도 끝내는 해피엔딩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또한, 그런 해피엔딩이 가져다주는 냉장고에서 막 꺼낸 사이다 같은 청량감이 텁텁한 마음을 시원하게 적셔주는 통쾌하고 개운한 맛에 보는 것이 또 무협 소설 아닌가? 하지만,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두 사람의 사랑이 태우다 남긴 시커먼 숯등걸 조각들을 보면, 『백발마녀전』 의 서글픈 결말은 울적하고 소침한 기분을 풀고자 이 소설을 탐독한 나에게 불난 데 오히려 부채질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옥나찰과 함께 한 절대 짧지 않았던 그 시간만큼은 온갖 잡다한 세상만사와 시름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홀가분한 시간이었다고 감히 말하 수 있으리라.

마지막으로 몇 마디 더 한다면 무척이나 긴 내용에 비해 읽고 나면 남는 것이 별로 없는 것이 무협 소설이다. 이것은 무협 소설만이 가지는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다. 아무 생각, 아무 걱정 없이 텅 빈 마음과 텅 빈 정신으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지만, 긴 시간을 할애하고도 영양가 없는 독서를 했다는 자괴감이 들 수도 있다는 점에서 단점이다. 하지만, 독서라는 것이 지식이나 지혜, 하다못해 감수성을 자극한다거나 감개무량한 뭔가를 얻고자 하는 목적으로 행해지는 것만은 아니다. 중과부적으로 우리를 압박해오는 지루한 시간의 중압감과 고리타분한 일상의 막막함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시간과 삶의 굴레에서 잠시 비껴갈 수 있는 짬을 얻어낼 수 있는 취미 중의 하나가 바로 독서다. 그래서 독서는 고상하면서도 천박한 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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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4. 7.

[책 리뷰] ‘빵 맛’을 잃고 ‘숲 전체’를 놓친 나, 그래도 ~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우타노 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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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맛’을 잃고 ‘숲 전체’를 놓친 나, 그래도 만족스러운 감동

Original Title: 春から夏、やがて冬 by 歌野 晶午
내선전화가 울렸다. 히라타가 수화기를 들어 두세 마디 응대했다. “현실이란 것은 이런 식으로 인정사정없어. 한참 심각한 얘기 중에 ‘십 분 남았는데 연장하시겠습니까?’라는군.” 스에나가 마스미는 움쩍도 하지 않았다.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春から夏,やがて冬)』, p189)

나무가 아니라 숲을 봐야 ‘세계가 반전’한다!

표지 바로 뒷면에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春から夏,やがて冬)』의 저자 우타노 쇼고(歌野 晶午)를 간략하게 소개하는 페이지에는 ‘마지막 5페이지에서 세계가 반전한다!’라는 강렬한 문구가 쓰여 있다. 실로 엄청난 자신감이 내포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는 이 문구는 독자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엄청난 기대감을 품게 하면서도 과연 얼마나 대단하기에 그런 자극적인 문구로 선전하는지 비판의 날을 세우게 한다. 마치 어느 제과점에서 세계 어느 빵집에서도 맛볼 수 없는 새로운 빵이라고 신제품을 선전하는 것이 거뜬히 세 끼 식사는 꼬박꼬박 챙겨 먹으면서도 늘 굶주려 있는 사람들의 탐욕스러운 입을 걸쭉한 침의 바다로 만듦과 동시에 이들의 세련될 대로 세련된 미각의 경계심을 곧추세우는 것과 같다. 결국엔 기대 반 호기심 반으로 지갑을 털어 신제품 빵을 한입 베어먹는다. 약간의 놀람 속에서 ‘그럼 그렇지.’ 귀신처럼 익숙한 맛을 찾아낸다. 그러면서 뭔가 대단한 것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우쭐대는 것이 이들의 취미다. 만약 아무것도 모르는 배고픈 사람이 그 빵을 먹었더라면 아마 세계 최고의 빵이라는데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겠지만, 그들은 지금까지 수많은 빵을 먹어치운 미식가답게 조금은 젠체하며 맛을 꼼꼼하게 음미하려다 보니 전체적인 ‘빵 맛’을 놓쳐버린 것이다. 그것은 빵을 먹는 것이 아니라 실험실의 연구원처럼 분석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너무 세심한데 신경 쓰다 보니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세계가 반전’하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숲을 봐야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즉, 너무 기대한 나머지 잔뜩 긴장한 채 꼼꼼하게 분석하면서 이 책을 읽다 보면 ‘세계가 반전’해야 할 것이 그냥 어느 동네 한구석이 반전해 버리는 시시콜콜한 일로 끝날 수도 있다.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바로 그런 경우였기 때문이리라.

내가 좋아하는 추리 소설 작가 중 한 사람

타노 쇼고는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반전을 안겨준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葉桜の季節に君を想うということ)』라는 소설로 단박에 내가 좋아하는 추리 소설 작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잠시 다른 책들은 젖혀두고 도서관에 있는 우타노 쇼고의 작품들로만 독서 욕구를 연달아 충족시켰던 기억이 아직도 머릿속에 선하다. 『시체를 사는 남자』,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 『여왕님과 나』, 『밀실살인게임』, 『해피엔드에 안녕을』, 『밀실살인게임 2.0』, 『긴 집의 살인』, 『흰 집의 살인』, 『움직이는 집의 살인』까지 단숨에 탐독했었다. 여기서 그친 것은 도서관에 있던 우타노 쇼고의 소설이 그땐 그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벌써 수년 전 이야기지만, 그렇게 시간이 흘러 잠시 잊고 있다가 오래간만에 괜찮은 추리 소설이 읽고 싶어 그를 찾았고, 역시 그는 나를 실망시키지는 않았다.

때론 생각이 지나치게 많으면 재미가 반감된다!

러나 ‘마지막 5페이지에서 세계가 반전한다!’에 너무 현혹된 나머지 전체를 놓치고 말았다. 이번엔 나도 작가가 준비한 트릭이나 구성에 쉽게 속지 않고자 나름의 각오를 다졌다. 그리하여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고 꼼꼼하게 추려내어 뭔가 성과를 올려보겠다는, 되지도 않는 오기와 공염불한 의지가 발동된 것이다. 그런 시기적절하지 않은 의지와 오기 덕분에 작가가 준비한 떡밥을 (물론 이 모든 것이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덥석 물지 못했던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런 각오에도, 끝내 마지막 반전의 묘수는 완벽하게 간과하지는 못했다. 결말을 봤지만 (이해가 부족해서 일지도 모르겠지만) 잠을 푹 자고 난 것 같은 개운함보다는 자는 도중에 갑자기 깬 것 같은 찌뿌둥함과 ‘이것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고로 이것이 끝이 아니다, 뭔가 더 있다!’라는 석연치 않은 의심이 여전히 남아 있었기에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같은 뒤통수를 냅다 후려갈기는 기막힌 반전은 만끽하지 못했다. 독자의 지나친 의심과 경계가 추리 소설의 묘미를 맛보는데 제약이 된 경우였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런 독자의 의심과 경계를 예상하지 못했거나 예상했더라도 의심과 경계를 흐트러트릴 수 있는 적절한 방책을 마련하지 못한 작가의 실수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런 연유로 ‘세계의 반전’은 만끽하지 못했지만, 그 대신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빵이 아닌 세계에서 가장 슬픈 빵을 먹은 것 같은 가슴 언저리에 뭔가 묵직한 비극의 체증을 맛보았다. 그것은 보은의 도리가 낳은 거짓말이 예기치 않게 불러온 오해와 그 오해로 말미암은 흘리게 된 눈물과 피에 젖은 빵이었다.

내가 본 ‘두 개의 떡밥’, 그리고 놓친 ‘세계의 반전’

가 보기엔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에는 커다란 두 개의 떡밥이 나온다. 첫 번째는 보통 사람이 그렇게 다급한 상황에서 어떻게 그렇게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는지였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초등학생이 다리를 건너다 무심결에 지나가는 사람을 건드렸는데 어쩌다 보니 그 사람이 다리 밑으로 떨어져 죽은 것이다. 그런데 초등학생은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지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침착하게 행동한다. 초등학생은 숙련된 범죄자처럼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주변을 살핀다. 목격자가 없는 것을 확인한 초등학생은 죽은 사람을 사고가 아닌 자살로 죽은 것으로 교묘하게 꾸민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설정이다. 두 번째는 추리 소설에서 잘못 사용하거나 지나치면 재미와 트릭의 질을 떨어트리면서 개연성까지 잃게 하는 지나친 우연성이다.

이 두 경우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떡밥일 수도 있다. 그것은 상대가 우타노 쇼고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설마 그가 이런 허술한 설정으로 독자를 속여 넘길 생각은 아니겠지?’ 하는 이유 있는 경계심이 내 의심의 촉각을 더욱 곤두세웠고, 그로 말미암아 끝까지 경계와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던 나는 ‘세계의 반전’을 놓치고 만 것이다. 만약 내가 우타노 쇼고를 전혀 모르는 독자였다면 지금까지 남아 있을 강렬한 반전이 일으킨 흥분에 휩싸여 횡설수설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현실은 안타깝게도 그렇게 흘러가지는 않았다. 반면에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떡밥이 작가의 준비성 부족이거나 반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불성실의 결과였다면 그것은 한마디로 치명적인 실수다.

마치면서...

래도 추리 소설에서는 전혀 기대하지 못한 서늘한 바람이 가슴 한구석을 휑하니 휘젓고 지나간 것 같은 가슴을 아련히 시리게 하는 씁쓸하고 서글픈 감동은 ‘빵 맛’을 잃고 ‘숲 전체’를 놓친 나에게 그나마 다행이고 위안으로 다가온다. 또한,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은 내 독서 인생 중 단 몇 시간 만에 일독한 아주 소수의 책 중 하나다. 초반엔 그 흔한 살인도 없고, 그래서 범인을 추리하는 전개도 없는 전혀 추리 소설 같지 않은 전개가 당황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언제까지나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고 난 다음의 회상이지 정말이지 그땐 그런 것조차 생각할 정황이 없었을 정도로 나도 모르게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었었다. 막상 다 읽고 나면 별것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반전은 둘째치고 단순 명쾌한 문장으로 직선적으로 밀어붙이는 이야기 자체의 흡입력이 상당하다 보니 그것만으로도 이 소설을 추천하고 싶을 정도다. 요즘 후덥지근한 장마철 날씨에 시달리던 빈약한 육체였지만, 이 책 덕분에 잠시나마 더위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말한다면 과언일까(이 리뷰는 2018년 여름에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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