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증명 | 모리무라 세이치의 최고작
모리무라 세이치의 인생 최고작
모리무라 세이치(森村誠一)의 ‘증명 시리즈’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인 『야성의 증명(野性の証明)』을 읽은 후 첫 번째 작품인 『인간의 증명(人間の証明)』을 읽게 되었는데, 의도한 순서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매우 잘된 일이었다. 『인간의 증명』은 줄거리, 감동, 여운, 사회성, 문장력 등 모든 면에서 『야성의 증명』보다 빼어난 작품이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의 증명』을 먼저 읽고 『야성의 증명』을 읽었더라면, 정말로 그랬더라면 두 작품의 질적 격차에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 『야성의 증명』(동서문화사)의 매끄럽지 못한 번역이 이런 격차를 느끼게 하는데 매우 나름의 공로가 있다는 말도 남겨두고 싶다.
‘증명 시리즈’ 3부작은 서로 연관이 없다. 그러므로 굳이 성실하게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 마음이 끌리는 대로 선택하면 된다. 하지만, 야심 차게 이 3부작을 모조리 읽을 계획이라면, 그래서 이 세 권의 책이 팔만 뻗으면 닿을 지척에 있다면 『인간의 증명』을 가장 마지막 순서에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행복을 느낀 채 식사를 마치고 싶은 사람이 맛있는 음식을 가장 마지막에 먹듯 ‘증명 시리즈’의 멋진 피날레를 장식하기 위해서 말이다.
아직 『청춘의 증명(青春の証明)』은 읽지 않았고, 구하기 어려워 읽을 계획도 없지만, 『인간의 증명』을 읽고 난 지금 왜 모리무라 세이치의 최고작이 『인간의 증명』으로 정해졌는지 충분히 알게 된 셈이다. 천 권 이상 읽은 독자로서 감히 말할 수 있는데, 추리 소설 작가 중에서 이만한 경지의 소설을 완성하고 죽는 작가는 얼마 없다. 작가가 20여 년간 가슴속 깊이 가라앉아 있던 것을 쏟아부었다는 말을 괜히 한 것이 아니다. 괜히 770만 부가 팔린 것이 아니다.
<영화 「인간의 증명(人間の証明, 1977)」의 한 장면> |
‘영원의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과 인간의 증명
어머니, 내 그 모자 어찌 되었을까요?
그래요, 여름날 우스이(確氷)에서 기리즈미(霧積)로 가는 길에,
골짜기에 떨어트린 그 밀짚모자 말이에요.
어머니, 그것은 아끼던 모자였어요.
그래서 나는 그때 꽤 분했어요.
하지만, 갑자기 불어온 바람이니
(사이조 야소(西조八十)의 시 「밀짚모자(麦藁帽子)」의 일부분)
놀랍게도 이 감성적인 시는 『인간의 증명』에서 범죄 사건을 추적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핵심 단서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더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시가 뭉클하면서도 아득하게 자아내는 어머니와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미지가 『인간의 증명』의 영혼 같은 모티브로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어떻게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애틋한 마음이 밥 먹듯이 사람을 죽이는 추리 소설의 모티브가 될 수 있을까? 참으로 의아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이 의아함은 탄복으로 둔갑하고, 이 탄복은 무량하게 밀려오는 감개로 이어진다. 눈언저리에 이슬처럼 맺힌 눈물이 차갑게 식는 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얼얼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영원의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으로 가득한 시를 단서로 살인 사건을 추적해 나가는 형사 무네스에 고이치로(棟居弘一良)는 ‘어머니의 정’ 따위는 전혀 모를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는 어린 시절 겪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행하고 비참한 경험 때문에 어머니의 정은커녕 뼛속 깊이 사람을 증오하고 불신한다. 그가 형사가 된 이유도 사회 정의를 위해서가 아니고 인간 전체에 복수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가 겪었던 것처럼) 사람을 더는 도망칠 수 없는 궁지에 몰아넣고 그 절망과 신음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느긋하게 구경하고 싶어서다.
그토록 인간을 증오하고 불신하던 그는 물증은 없고 심증만 있는 용의자와 막판 대결에서 용의자의 가슴 한구석에 한 가닥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인간적인 마음에 승부를 건다. 형사 무네스에는 그가 믿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 역시 인간을 믿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평소에 신 따위는 믿지 않는다고 자부해 온 사람이 절박한 상황에 몰리면 자신도 모르게 신에게 의지하는 것 같은 인간의 나약함을 말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용의자는 자기 안에 인간의 마음이 남아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당신이라면 당신의 마음속에 인간의 마음이 남아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가? 그 전에 인간의 마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참으로 범상치 않은 추리 소설이다.
죽음도 어쩌지 못한 한 인간의 절박한 의지
돌이켜보면 인간의 증명은 처음부터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뉴욕 슬럼가에서 빈곤과 인종차별에 신음하면서 일생을 보낼 것이 뻔한 흑인 조니 헤이워드는 일본 경제 발전의 상징이자 호화로움의 결정판인 도쿄의 초대형 호텔, 그것도 최고의 고객들이 최고의 만찬을 즐기는 최상위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서 칼을 맞고 죽은 채 발견된다. 보통은 살해당하는 마당에 죽을 장소를 물색할 여유는 없겠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경찰의 조사로 알려진 사실에 의하면, 그는 근처 공원에서 칼에 찔린 후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병원에 갈 생각은 하지 않고 무작정 택시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고 한다.
마치 호텔 꼭대기 층에 자신을 죽음에서 구원해 줄 엄청난 뭔가가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한 그의 인생 최후의 미스터리는 누가 봐도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에겐 그래야만 할 절박하고 간절한 사연이 있었고, 그 절절한 심정으로 그로서의 인간의 증명은 완성된다. 안경에 김이 서린 것처럼 흐릿해지는 그의 망막에 마지막으로 비친 것은 무엇일까? 내가 죽어갈 때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조니 인생의 마지막 에피소드에 얽힌 사연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비극 중의 비극이지만, 임종을 눈앞에 둔 그가 보인 엉뚱한 행동 이면에 숨겨진 인간의 숭고함은 차가운 비탄의 눈물을 뜨거운 감격의 눈물로 바꿔치기에 충분하다.
이 문단은 스포일러 때문에 말을 좀 아끼는 바람에 다른 문단보다 유난히 더 억지스러운 글이 되었지만, 눈치가 여우 같은 독자는 조니 살인 사건의 초동수사 정보만으로도 사건의 전체 윤곽을 얼추 그려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을 그립게 하는 마을, 사람을 그립게 하는 소설
『인간의 증명』엔 추리 소설이 갖추어야 할 모든 조건이 갖춰졌지만, 이 소설을 마냥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에 묶어두기엔 여러모로 아까운 작품이다. 사회성은 배우 송승헌의 송충이 눈썹처럼 짙고, 고발성은 처녀의 웃음처럼 은근하며, 문장력은 글 읽는 재미를 만끽하기에 부족하지 않다. 특히 아주 긴 페이지를 할애한 것은 아니지만, 살벌한 살인 사건과 삭막한 도시 환경에 절망한 독자의 기분을 전환해 줄 겸 등장하는, 한편으론 원숭이를 닮았다는 무뚝뚝한 요코와타리 형사조차 사람을 그립게 하는 마을이라고 감탄한 기리즈미(霧積) 풍경을 묘사한 장면은 마치 ‘영원의 어머니, 영원의 고향 같은 푸근함과 정겨움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라고 자랑하듯 뽐내는 것 같아 살짝 얄밉기는 하지만, 이렇게나마 도시적이고 물질적인 것에서 잠시 벗어나 정서적이고 정신적인 기분 전환을 꽤 할 수 있다는 것에 안도한다. 이와 비슷한 감개를 『점성술 살인사건(占星術殺人事件)』에서 한국의 민속촌 같은 메이지무라를 묘사한 장면에서도 받은 것 같다.
이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때 밧줄처럼 온몸을 죄어오는 지독한 몸살감기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래서 먹구름처럼 두툼한 이불 속에 처박혀 무위의 도원에 푹 잠기고 싶었지만, 이 책이 진통제라도 되는 양 떨쳐낼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은 나의 잡스러운 의지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뭔가를 반드시 이행해야겠다는 조니 헤이워드 굳세고 애절한 의지처럼 대단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오장육부를 휘감고 도는 심상치 않은 몸살의 고난 속에서도 이 책을 기필코 읽고 말겠다는 의지가 꺾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책이 그만큼 대단히 재밌게 읽힌다는 방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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