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법 | 야마다 무네키 | 불로장생과 죽음의 딜레마
생존제한법(LIFE LIMIT LAW)
인간의 불로화 기술이 보급된 세계. 하지만 모든 인간이 영원히 살아서는 사회를 유지할 수 없다. 따라서 불로화 시술을 받은 이는 법으로 정해진 기한이 지나면 죽어야 한다.
야마다 무네키(山田宗樹)의 『백년법(百年法)』은 불로(不老)화 시술, 즉 시술받은 시점으로부터 늙지 않게 된 사람들은 백년법(혹은 생존제한법)이라는 불리는 법에 따라 100년 후 자발적으로 안락사당해야 한다는 설정을 골자로 펼쳐지는 소설이다.
‘늙지 않는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 누룽지처럼 바닥에 눌어붙은 몸을 빈대떡 뒤집듯 이리저리 뒤척이며 잡스러운 공상에 빠져드는 사람 중 무한한 삶이나 영원한 젊음을 꿈꾸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수많은 잠 못 이루는 밤을 『백년법』 비스름한 사회를 공상하며 지새우곤 했다. 이 기회에 그 전모를 밝히면 대충 이렇다.
유전자는 이런저런 이유로 시간에 따라 손상을 입게 되고, 손상된 채 그대로 복제되면서 전체 유전자 손상률은 조금씩 증가하게 된다. 그런데 만약 유전자 복구 과정의 기준이 되는 단 한 개의 DNA가 있다면? 그래서 그 DNA를 100% 상태의 DNA로 교체하여 손상된 유전자들을 회복시킬 수 있다면? 이런 과학적 공상에 기반하여 손상된 DNA를 원래의 상태로 회복시킨다. 그에 따라 노화된 몸을 젊은 몸으로 역행시키고, 그럼으로써 사람은 나이를 거꾸로 먹게 된다. 한마디로 늙고 젊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영원한 삶에 근접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시술은 40~60년마다 받으면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엔 몇 가지 제약이 있다.
첫째, 시술 대상자는 자식이 없어야 한다. 즉, 장생과 번식 중 하나를 택일해야 한다.
둘째, 시술받을 때 국민 평균 자산을 제외한 나머지 자산은 국가에 기부해야 한다. 만약, 내가 시술받을 때 가진 자산이 총 100억이고 그때의 국민 평균 자산이 10억이라면, 10억을 제외한 90억은 국가에 기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능력 있는 소수가 부를 독점하는 것을 방지하고, 부를 쌓기 위한 지나친 경쟁을 방지한다.
셋째, 국가 경영에 적합한 최적의 인구를 정해놓고 그에 맞추어 사고, 질병, 노화(시술받지 않은 사람) 등으로 죽은 사람 수만큼 출산을 허용한다.
넷째, 징역 X년 이상을 선고받은 범죄자는 시술 대상자에서 제외한다.
당연히 실현 가능성 없는 허무맹랑하고 터무니없는 공상이지만, 지금처럼 국가 간의 심각한 마찰 • 경쟁 • 대립이 소멸한, 다시 말해 국가 간 장벽이 없어지고 인류가 UN 같은 국제기구에 의해 통치받는 단일 사회라면 그럭저럭 버텨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죽음 없는 사회는 고인 물처럼 썩는다
내 공상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문명 발전의 추동력이자 근간인 경쟁이 약화하거나 사라짐으로써 사회의 활력 역시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불로장생은 유한한 삶을 가진 모든 사람의 꿈이지만, 늙지 않는 영원히 삶이 보장된다면 누가 지금처럼 열심히 일하겠는가? 인생은 유한하므로 우리는 (위험은 크지만 성공하면 보상이 큰) 찰나에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용기와 의미가 생긴다. 그래서 사람의 도전 정신은 유한한 삶에 대한 반란이자 한편으론 어떻게든 그 유한한 삶을 견뎌 보려는 발악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사람의 시간 척도로는 가늠할 수 없는 긴 앞날이 남았다면, 도전적인 뭔가에 열정을 쏟기보다는 자리 지키기에 더 열심히 하기 마련이고, 이렇게 되면 신세대가 자리 잡을 기회는 점점 고갈되다가 나중에는 아예 사라질 것이다. 거리의 모습은 노인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젊지만, 활력은 죽음처럼 사라진 그런 사회가 될 것이다. 죽음은 생명의 순환 중 하나의 과정일 뿐만 아니라 인류 사회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 과정의 시작인데, 죽음이 정체되면 그 사회는 고인 물처럼 썩어 갈 것이다. ‘백년법’의 취지는 강제로라도 삶과 죽음의 순환을 펌프질해 사회의 활기를 되찾겠다는 것이다.
소설 『백년법』의 긴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하지만, 『백년법』에서 불로화 시술을 받은 사람은 아이를 낳을 수는 있지만, 정해진 법에 따라 100년 후에는 자발적으로 안락사당해야 한다. 물론 백년법에 대해 동의해야만 불로화 시술을 받을 수 있지만,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것이 사람인데 어떻게 100년 후를 기약할 수 있단 말인가? 특히 앞으로 100년 동안 늙지 않고 젊음을 유지한다는, 진시황도 이루지 못한 불로(不老)의 실현이 당장 눈앞에 있다면 더더욱 냉정한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다.
그렇게 100년이 지났을 때 육체는 아직 20대처럼 팔팔한데 안락사당해야 한다면 당신은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건강한 육체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법으로 정해졌다는 이유만으로 삶에 대한 미련을 순순히 내려놓을 수 있을까? 사람의 생명을 그런 식으로 다뤄도 되는 것일까? 누구라도 망설일 것이다. 거부자(백년법을 거부한 사람들)가 되는 힘겨운 삶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이래저래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이라는 절망과 자포자기적인 생각으로 폭력 단체 같은 곳에 가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무슨 짓인들 못 할까. 더군다나 육체도 팔팔한데 말이다.
소설 『백년법』의 긴장은 이렇게 증폭된다.
‘정치’를 조금 싫어하는 나도 재밌게 읽은 소설
내 블로그에서 ‘정치’와 관련된 글은 대체로 ‘역사를 다룬 책’에 국한된다. ‘역사’라는 장르는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들만 다루는지라 딱히 거부감이나 진부함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는데, 정치를 소재로 한 소설, 드라마, 영화는 (역사를 조금 알고 있어서 그런지) 지나치게 음모적이어서 음산하거나, 지나치게 인간적이어서 유치할 때가 많다. 이외에도 내가 정치적인 장르를 꺼리는 이유는 대의도 없고 비전도 없는 현실 정치에 이제는 분노마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실망해서일 수도 있고, 경쟁, 음모, 협잡 같은 것을 싫어하는 천성 때문일 수도 있고, 서로 속고 속이는 비슷비슷한 이야기가 지긋지긋해서일 수도 있다.
아무튼, 『백년법』은 ‘법’이라는 책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결국 정치적인 이야기로, 다시 말하면 권력 투쟁과 음모 놀이로 마무리된다. 막판의 어처구니없는 반전은 참으로 유치하기까지 하지만, 그래도 이 책이 싫지 않은 이유는 감정 기복 같은 부담 없이 독자가 바라는 대로 이야기가 술술 잘 풀려나가기 때문이다. 독자의 짜증을 부채질하지도 않고, 인내심을 시험하지도 않고, 근성을 건드리지도 않고 이야기는 칼칼한 목에 막걸리 넘어가듯 매끈하게 진행된다.
야외를 산책하면서, 혹은 실내 자전거를 타면서 TTS로 들어도 무난히 이해할 수 있는 단순 간결하고 효율적인 문장 역시 이 책을 싫지 않게 만든다. 침대에 누워 『백년법』을 TTS로 듣고 있노라면 마치 자장자장 자장가를 듣는 듯한 편안함마저 느껴질 정도다. 또한, 잘 조각된 석고상을 연상시키는 플롯 역시 책에서 손을 뗄 수 없게 만든다. 한마디로 한 번 책장에 손을 데면 돌풍에 휩쓸리듯 나도 모르게 이야기 속으로 떠밀려 들어가는 소설이다. 두 권이 짧게 느껴진다.
찰나적으로나마 죽음에 대한 명상에 잠기게 하는 책
『백년법』을 읽으면서 한 번쯤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주제가 있다면, 바로 ‘죽음’이 우리와 사회에 어떤 존재여야, 혹은 어떤 역할이어야 하는 것인가이다. 이것은 인류에게 불로장생을 허용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도 이어지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떠올리게도 한다.
인간이 노화와 죽음을 극복한 이후에도 인간의 존엄성은 유지될 수 있을까? 만약 특권층 • 엘리트 • 부자들에게만 불로장생 혜택을 준다고 할 때 우리 같은 범인은 죽음마저 불공평한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혹은 모든 사람에게 불로장생 혜택을 공평하게 부여한다면, 그런 사회는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와 가까운 사회가 될까?
내 생각엔 사람의 뇌는 100년 정도는 모르겠지만, 200 • 300년 이상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수백 년 산 사람은 간혹 천재가 자기 능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미쳐가는 것처럼 세월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무너지지 않을까 싶다. 설령 불로장생, 혹은 그런 비스름한 기술이 발견된다고 해도 그 혜택을 받는 것은 부자 • 엘리트 • 위정자 같은 특권층일 확률이 매우 높으므로 디스토피아가 될 수도 있다. 야속하게도 야마다 무네키는 『백년법』에서 한국을 그런 사회로 묘사했다.
금메달 딴 사람, 돈을 많이 기부한 사람, 능력이 출중한 사람, 사회에 크게 공헌한 사람 등에게는 백년법을 한시적으로 동결시킨다. 사람들은 목숨을 유지하고 연장하기 위해 피 터지는 경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국가의 발전 속도도 빨라진다는 것이 야마다 무네키가 『백년법』에서 묘사한 한국의 형편이다. 돈이 아닌 목숨을 놓고 경쟁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과연 행복할까(지금처럼 ‘돈’을 놓고 경쟁하는 데도 ‘출산율 저하’라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드러내는데?). 야마다 무네키는 한국을 어지간히도 싫어하거나 (일본 사람들이 대체로 그렇게 보이는 것처럼) 정치적으로 미성숙하거나, 아니면 그런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은 하루하루가 즐겁고 행복할 것이라고 믿거나.
아무튼, 이야기가 이야기다 보니 소설 속으로 첨벙 뛰어들어 익사해 가다 보면 자기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머리까지 치밀어오르는 우울하고 슬픈 감정에 정말로 익사할 것 같다. 언제 어디서 단두대처럼 나를 덮칠지 모를 죽음을 기다리느니 차라리 지금 그렇게 익사해버리면 좋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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