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그리고 일상적인 생각을 쓰고. 이 모든 것을 음악을 들으며.

Recent Comments

레이블이 공포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공포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17/2020

[영화 리뷰] 정적을 깰 생각일랑 꿈에서조차 하지 마라 ~ 데드 사일런스(Dead Silence, 2007)

Dead-Silence-2007-movie-scene
review rating

정적을 깰 생각일랑 꿈에서조차 하지 마라

'꿈에서 그녀를 보더라도...

결코 비명을 지르지 마라'

「데드 사일런스(Dead Silence, 2007)」은 복화술을 소재로 한 공포영화다. 복화술 공연을 직접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생소한 소재이기는 하지만, 복화술사의 어원이 기원전 6세기에 죽은 자의 영혼이 사람의 배를 통해 말할 수 있었다는 믿음에서 기인한 것을 보면 지금까지 감상한 공포영화 중에서 복화술을 소재로 한 영화가 「데드 사일런스(Dead Silence)」가 처음인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소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괴이하다. 기원전의 복화술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지만(혹시 죽은 자의 이야기를 듣는 빙의의 일종일까?), 이해할 수 현상이나 기술을 쉽게 초자연적이거나 미신적인 것과 결부 지었던 옛사람들의 순진한 상상력도 엿보인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본 일본 드라마 「맛있는 급식(おいしい給食, 2019)」에서 여경이 학생들에게 인형을 이용한 복화술로 교통 교육을 한 장면과 일본 애니메이션 김전일 시리즈 중에서도 복화술이 등장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내가 이 방면으로 무관심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일본에서는 복화술이 꽤 대중적인 유흥거리인가보다.

Dead-Silence-2007-movie-scene

「데드 사일런스(Dead Silence)」가 여타 공포영화와는 다른 점이 있다면, 이야기의 인과 관계가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것처럼 잘 맞아떨어진다는 점이 으스스한 멋에 지적인 품격을 더해주는 듯하다. 얼마 전에 소개한 공포영화 「두 개의 영혼(雙魂, Walk with Me, 2019)」처럼 ─ 범인이든, 악령의 정체든 ─ 객관식 시험이라도 풀 듯 뭔가를 맞추려는 의지에서 기인한 상상력이 다분한 추리소설 애독자라면 추천하고픈 영화다.

Dead-Silence-2007-movie-scene

이 영화를 보면서 더듬이처럼 곤두세울 필요가 있는 감각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청각이다. 보통의 공포영화가 예상치 못한 큰 소리로 관객의 심장을 철컥 내려앉게 하는 놀람을 주는 것에 비해 「데드 사일런스(Dead Silence)」는 점프 스케어 같은 뭔가 심상치 않은 일어날 것 같은 암시를 갑작스러운 정적(靜寂)으로 연출한다(‘Dead Silence’를 구글 번역하면 ‘쥐죽은 듯한 고요함’이다). 악령은 먹잇감을 덮치기 전에 빗소리, 음악 소리, 주전자 물 끓는 소리, 시계추가 똑딱거리는 소리 등 먹잇감 주변을 흐르는 배경 소리의 볼륨을 0으로 죽임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동시에 시청자를 심리적으로 압박한다.

영화에서 정적은 악령을 위한 전주곡이나 다름없으며, 또 다른 의미에서 정적은 그것에 둘러싸인 누군가의 죽음을 예고하는 악령이 놓는 최초의 덫이다. 하지만, 진짜 죽음은 정적을 보란 듯이 깨는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져야 완성된다. 하물며 경솔하게 비명을 내지르는 사람이 당신이 아니기를...

Dead-Silence-2007-movie-scene

데드 사일런스(Dead Silence)는 현실적인 사연과 초현실적인 사연이 적절하게 조화된 공포영화로써 막무가내로 덤비는 맛보다는 사건에 얽힌 사연을 진지하게 풀어나가는 개연성과 복화술만이 구현할 수 있는 반전이 볼만하다.

나로서는 Rotten Tomatoes의 낮은 평점이 이해할 수 없으며, 흥행 실패로 속편이 잠정적으로 취소된 것은 무척 아쉬운 결정이다. 그만큼 시청자의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꽤 갈릴 수 있다는 뜻이며, 그것은 공포심 자체가 지극히 개인적인 정서와 경험, 그리고 그날그날 변덕스러운 기분에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점에서 공포영화라는 장르의 아쉬운 특성이기도 할 것이다.

지금 당장 볼만한 공포영화를 찾지 못해 지루함을 곱씹고 있는 당신에게 감히 추천하고 싶다.

본문에 사용된 이미지 저작권은 영화 「데드 사일런스(Dead Silence, 2007)」 제작사에 있습니다
Share:

2/13/2020

[영화 리뷰] 머릿속이 사나울 때 공허하게 감상하자 ~ 데이 오브 더 데드(Day Of The Dead, 2008)

Day-Of-The-Dead-2008
review rating

머릿속이 사나울 때 공허하게 감상하자

"당신을 좋아하고 있잖아. 좀비가 대쉬하는거야?" - 살라자

「데이 오브 더 데드(Day Of The Dead, 2008)」는 나처럼 좀비 영화에 굶주린 사람이라면, 마음 오지게 단단히 먹고 딱 한 번 정도는 볼 수 있는 영화이니,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자. 그래도 아주 오래간만에 보는 좀비 영화이고, 왠지 모르게 영화 선택 시부터 큰 기대감을 주지 않는 겸손한(?) 영화라서 그런지 그럭저럭 봐줄 만했다고 말할 수는 있겠다. 좀비처럼 아무 생각 없이 본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정신없이 사납게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 미쳐버리지 않으려면 가끔은 머리를 텅 비워줄 필요가 있다. 그런 각오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느껴진다면 마음과 머리를 비우고 감상해보자. 이런 영화에서도 나름의 재미를 찾아내는 인류의 영묘한 정신력에 영탄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다행인 것은 상영 시간이 비교적 짧다는 것이지만, B급 영화(혹은 그 이하)에서 기대해 볼 수 있는 탱탱한 유방 한 번 보여주지 않는 쓸데없는 청교도적 분위기가 우리를 다소 실망스럽게 한다. 뭇 남자들의 시기심만 잔뜩 불러일으키는 유방을 힘껏 움켜쥔 남자의 손만 카메오처럼 잠깐 등장하는 것이 전부이니, 그래도 명색이 공포영화인데 너무 밋밋한 것 아니냐고 뿌루퉁해 있으면 변태가 되는 건가?

Day-Of-The-Dead-2008

영화는 감히 좀비 영화계의 전설 조지 로메오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3 - 시체들의 날(Day Of The Dead, 1985)」을 모방했다고 선언한다. 그 발끝에도 살짝 미칠까 말까 한 것이 말이다. 그래도 꿈과 목표는 크게 가지라고 했으니, 그 점은 가상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결과물이 너무 신통치가 않으니 곤란한 것이다.

Day-Of-The-Dead-2008

그렇다고 이쯤에서 희망의 줄을 놓는 우는 범하지 말자. 공포영화에서만큼은 빠질 수 없는 매력적인 여주인공이 앞서 언급한 모든 실망과 좌절을 절반 정도는 보상해주기 때문이다. 당신이 만약 남자라면, 사라 역을 맡은 미나 수바리(Mena Suvari)의 눈부신 금발과 숨을 잠깐 멈추게 하는 매혹적인 파란 눈동자에 퐁당 빠지는 순간 영화의 모든 것을 용서해 줄 관대함이 어딘지 모르는 심연으로부터 불쑥 솟아오르는 기적을 느끼게 될 것이다. 「플래닛 테러(Planet Terror, 2007)」에 나왔던 마리 쉘톤(Marley Shelton)도 그렇고, 난 파란 눈동자를 품은 금발에게 약한가 보다. 현장에서 직접 본 적은 한 번도 없는데도 말이다.

Day-Of-The-Dead-2008

나름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히 보이는 점은 차별화된 좀비를 만들려고 한 노력이다. 좀 더 과학적으로 말하면 진화한 좀비? 이보다 조금 더 앞서 나온 영화 「랜드 오브 데드(Land Of The Dead, 2005)」에서 좀비가 각성한 결과라서 그런가?

아무튼,「데이 오브 더 데드(Day Of The Dead, 2008)」의 좀비는 도구도 사용하고, 라디오도 청취하고, 사람의 공격도 피하고, 나름 방어 자세도 취한다. 군인이었던 좀비는 방아쇠를 당기고, 채식주의자였던 사람이 좀비로 되니 스님처럼 육식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사람 냄새에 이끌린 좀비들이 ─ 아무리 육체를 함부로 굴려 먹어도 문제 없다지만 ─ 창문 밖으로 몸을 내동댕이치는 장면은 그 정도로 사람 고기가 좋다면 기꺼이 이 한 몸 바치리라는 말도 안 되는 연민이 들게 할 정도로 처절하다. 또한, 좀비가 되어서도 뽀뽀 한 번 못해본 고참(사라)을 위해 연정을 불사르는 사연은 정말이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다.

초창기 좀비들로부터 차별해 나가면서 변덕스러운 대중의 요구에 맞게 날렵하고, 그리고 필요한 만큼만 영리해져 가는 좀비들이 기특하다. 「웜 바디스(Warm Bodies, 2013)」에 와서는 좀비와 사람이 사랑까지 나누지 않겠는가? 오~ 할렐루야! 마지막에 등장하는 좀비는 프로토타입답게 매트릭스의 한 장면처럼 숭숭 날라오는 총알을 휙휙 피하면서 시종일관 한일자로 야멸차게 다물어져 있던 시청자의 입을 떡 벌어지게 하는 압권 중의 압권을 연출한다. 이래도 안 보고 배길 수 있나?

끝으로 「데이 오브 더 데드(Day Of The Dead, 2008)」가 화끈할 수밖에 없는 것이 좀비들을 화끈하게 불로 조지는 것이다. 그것도 화염방사기처럼 늘 보던 것이 아닌 미사일 추진 연료를 사용해서 말이다. 좀비물은 그냥 한바탕 야단법석만 제대로 치면 일단 반은 먹고 들어가는 것 아니었던가?

본문에 사용된 이미지 저작권은 영화 「데이 오브 더 데드(Day Of The Dead, 2008)」 제작사에 있습니다
Share:

2/05/2020

[영화 리뷰] 준비된 네 개의 반전, 그리고 단서들 ~ 두 개의 영혼(雙魂, Walk with Me, 2019)

walk-with-me-2019
review rating

준비된 네 개의 반전, 그리고 단서들

"내 말 뜻은, 만약 니가 악귀를 만났다면 니가 악귀보다 더 악해 질 필요가 있다는거야" - 침욱

처음엔 ─ 네이버 영화에 적힌 대로 ─ 공포영화인 줄 알고 감상하다가 전혀 공포영화답지 않은 진지하면서도 싱거운 모습에 조소와 실망을 금치 못하다가, 중후반쯤 가서 이 영화는 공포영화가 아니라 정신병리학적인 요소에 추리 요소를 결합한 미스터리 스릴러에 더 가까운 영화라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으면서 영화의 진정한 의미와 재미를 다시금 되새겨본 영화다. 그로 말미암아 나름 괜찮은 영화라는 생각과 함께 평점으로 별 한두 개는 더 얹어줘도 무방하겠다는 흡족한 마음을 먹게 했다.

walk-with-me-2019

반전의 충격이나 강도는 보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이겠지만, 내가 보기엔 「두 개의 영혼(雙魂, Walk with Me, 2019」에는 최소한 네 번의 반전이 준비되어 있다. 첫째는 주인공 유심의 주변 사람들을 죽인 진짜 범인에 대한 반전, 둘째는 주인공은 어떤 사람이냐에 대한 반전, 셋째는 주인공의 친구 침욱에 대한 반전, 넷째는 공장에서 일하던 주인공이 잠시 기절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느냐에 대한 반전이다.

walk-with-me-2019

흥미로운 사실은 앞에서 제시한 네 가지 반전에 대해 영화는 마치 ‘독자와의 대결’로 유명한 엘러리 퀸의 본격 추리소설을 충실하게 따르는 것처럼 시청자가 추리할 수 있는 단서를 장면 곳곳에, 그것도 꽤 많이 숨겨놓았다는 것이다. 그런 고로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꽤 안성맞춤인 영화다. 그런 사람이 탐정인 척 작정하고 「두 개의 영혼(雙魂, Walk with Me, 2019」을 감상한다면, 정말로 명탐정이라도 된 듯한 짜릿하고 유쾌한 착각에 빠져들기에 충분할 정도로 영화의 추리적 요소는 매우 논리적이고, 또한 계획성 있게 적재적소에 잘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예를 든다고 시시콜콜 더 말하게 되면, 영화의 재미가 반감될 것이 뻔하니 이에 대한 것은 그만 닥치는 게 좋을 것 같고, 만약 자신이 추리에 자신이 있다면 좋은 승부가 될 수 있는 영화라는 사실 정도만 밝혀두자.

walk-with-me-2019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퇴마 장면은 「두 개의 영혼(雙魂, Walk with Me, 2019」이란 영화를 나처럼 귀신이 등장하는 보통의 공포영화라고 착각하게 한 다음 장면과 장면 사이사이에 숨어 있는 진실을 가리키는 단서를 간과하게 만듦으로써 반전의 충격을 극대화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싶다. 물론 흔쾌히 속아 넘어간 나로서는 이에 대해 더는 할 말은 없지만, 앞뒤를 따지고 보니 그렇다는 얘기다.

사실 진실을 가리키는 단서는 벌써 영화 제목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하지만, 난 보통 때처럼 제목 같은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그냥 영화 장르가 ‘공포영화’라는 것에만 현혹되어 무작정 감상했다가 크게 한 방 얻어맞은 꼴이다. 마치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빵이란 사실만 확인하고 허겁지겁 먹었다가 다 먹고 나서야 날짜가 지나도 한참 지난 빵이란 사실을 알게 된 격이랄까? 그렇다고 영화 한 편 잘 못 봤다고 식중독 같은 병에 걸릴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이중인격’이라 불리는 해리성 정체성 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는 이미 영화에서 흔한 소재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고 어떻게 마무리하느냐에 따라 신선함과 진부함으로 나눠질 수 있다고 한다면, 「두 개의 영혼(雙魂, Walk with Me, 2019」은 나름 신선한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참고로 이 영화엔 1980 • 90년대 홍콩 코미디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오요한(吴耀汉)이 못난 남편이자 아버지 역으로 등장하여 옛 향수를 떠올리게 한다(이 배우가 누구냐고 물어본다면, 당신은 「오복성」도 안 봤냐고 되묻고 싶다). 그런데 강아지를 산 채로 전자레인지에 놓고 돌리는 사이코패스 여자아이는 왜 나온걸까? 내가 또 놓친 것이 있는 것일까?

본문에 사용된 이미지 저작권은 영화 「두 개의 영혼(雙魂, Walk with Me, 2019」 제작사에 있습니다
Share:

1/25/2020

[드라마 리뷰] 유령은 두려운 대상이 아니라 보고 싶은 사람 ~ 힐 하우스의 유령(The Haunting of Hill House, 2018)

The-Haunting-of-Hill-House-2018
review rating

유령은 두려운 대상이 아니라 보고 싶은 사람

힐 하우스의 목석 위에는 한결같이 정적이 깔려 있으며

그곳에서 걷는 게 누구든 그들은 함께 걷는다

유령 하면 뭐가 떠오를까? 원한, 복수, 죽음, 공포, 깊은 상처, 오싹함, 악마, 저주 등 어째 기분 나쁜 잡탕들만 떠오른다. 정말로 유령이 존재한다면, 그래서 유령과 마주친다면 바지에 오줌을 싸는 추태까지는 부리지 않더라도 오금을 펴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기는 할 것이다. 왜? 아마도 그것은 유령이라는 불확실하고 불명확하고 불안정한 존재에게 한순간 엮이게 든 자신의 예측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유령이 불행을 안겨줄지, 죽음을 선고할지, 아니면 평생에 걸쳐 지속할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줄 저주를 내릴지 두렵다. 그냥 지나쳐갔으면 좋으련만, 우리가 아는 유령이란 존재는 마주친 사람을 그냥 지나치는 법은 없다. 우리가 만들어 낸 유령은 그저 사악하고 사악하기만 한 존재다.

혹시라도 유령에게 해코지를 당할까 하는 두려움은 유령의 존재를 부정하지 못하는 약점으로 작용한다. 혹시라도 유령과 마주칠까 하는 두려움은 흐릿하고 모호했던 유령을 사람처럼 육체가 있고 삶이 있는 현실성 있는 캐릭터로 재생산한다. 그래서 유령은 사람의 두려움을 먹고 산다고 하는가 보다. 그래서 유령은 그 사람에게 있어 가장 두려운 것이 문득문득 현실 속에 투영된 착시현상일 뿐이라고도 하는가 보다.

하지만, 「힐 하우스의 유령(The Haunting of Hill House, 2018)」은 이런 통론을 거부한다. 드라마는 유령은 두려운 대상이 아니라 애타게 보고 싶은 사람이 유령이라고 말한다. 두려움의 대상과 보고 싶은 사람, 이것은 완전히 정반대다.

The-Haunting-of-Hill-House-2018

죽도록 보고 싶은 사람을, 혹은 뼈에 사무치도록 그리운 사람을 유령으로라도 만난다는 것이 반갑고 다행스러운 일인지, 아니면 당장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 위중한 일인지 대답하기 곤란한 것은 기존의 대중매체가 우리에게 착실히 심어 놓은 유령에 관한 좋지 않은 선입관도 있겠지만, 보고 싶은 사람을 유령으로라도 만나는 것이 당사자에게 가져다줄 심리적 영향력을 제삼자로서는 가늠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약 보고 싶은 사람을 유령으로라도 봐서 행복해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당신의 뇌가 만들어낸 망상이라고 깨닫게 해주는 것이 옳은 일일까? 현실과 꿈과 환상의 경계가 그 사람이 믿고 있는 것과 믿고 싶은 것을 분주히 오가는 착각 속에서 쉽게 허물어진다고 했을 때, 본인이 행복하다면 망상이든 꿈이든 상관없지 않을까?

The-Haunting-of-Hill-House-2018

아무튼, 힐 하우스의 유령(The Haunting of Hill House, 2018)은 지금까지 보아온 유령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각도로, 다른 시선으로, 다른 방법으로 유령의 존재론적인 방법론과 그 방법론이 한 가족의 운명에 미치는 무시무시한 영향력을 얽히고설킨 실타래 풀듯 복잡하게 풀어나간다. 유령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를 떠나서, 유령의 존재를 믿는 것만으로도 유령은 사람에게, 그리고 한 가족에게 때때로 파괴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음을 드라마는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유전적 정신질환을 단체로 앓는 한 가족의 비극과 그 비극으로 말미암은 가족 관계의 끝없는 추락과 갈등 속에서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역시 가족뿐이라는 매우 진부한 메시지를 되새겨주고 싶었던 것일까?

누군가는 그냥 흘려들을 법한 유령 이야기가 한 가족의 애증 • 애착 관계를 심리적으로 옭아매는 깊이 있고 심오한 진행이 신선하기는 하지만, 뭔가 대단히 자극적이고 무시무시한 것을 기대한 시청자에겐 소화제나 두통약을 찾게 할 정도로 꽤 철학적이다.

The-Haunting-of-Hill-House-2018

드라마에 나오는 힐 하우스(Hill House)는 동양으로 따지면 흉가, 혹은 귀신 들린 집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설령 유령에게 괴롭힘을 당한다고 해도 힐 하우스 같은 대저택이라면 한 번쯤 살아보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도 든다. 아니면 내가 이담에 죽어 유령이 된다면, 힐 하우스 정도라면 기꺼이 들러붙을 의향이 있다고 해야 하나? 한국의 도시는 유난히 괴담이 싹을 트지 못하는데, 그것은 귀취(鬼趣)가 깃들만한 고아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을씨년스러운 격조 있는 집이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그 누가 아파트 같은 곳에 들러붙어 귀신 노릇 하고 싶겠는가? 그럴 바엔 차라리 지옥으로 떨어지겠다.

이 세상 어딘가에 힐 하우스(Hill House) 같은 집 하나 정도는 있을법하고, 힐 하우스 같은 집에서 유령과의 불가항력적인 인연으로 전전긍긍하는 가족들도 있을법하지만, 한국에서 이런 드라마를 제작한다는 것을 있을법하지 않다(설령 제작한다고 해도 과연 몇 사람이나 보려나?) 연기, 스토리텔링, 연출, 구성 등 모든 면에서 높은 수준을 만족시키는 드라마다.

본문에 사용된 이미지 저작권은 드라마 「힐 하우스의 유령(The Haunting of Hill House, 2018)」 제작사에 있습니다
Share:

1/12/2020

[영화 리뷰] 단지 생일을 축하해 주려던 것뿐인데 ~ 시스터스(Sisters, 1973)

Sisters-1973-movie-poster
review rating

단지 생일을 축하해 주려던 것뿐인데…

몰래 카메라 TV 프로그램 때문에 우연히 만난 필립과 다니엘. 두 사람은 다니엘의 전 남편의 갑작스러운 훼방이 있었지만, 필립이 쇼 출연 상품으로 받은 호텔 식사권으로 무사히 저녁을 마치고 다니엘의 아파트로 향한다.

Sisters-1973-movie-scene

아파트까지 따라온 다니엘의 전 남편을 가볍게 따돌린 필립은 그녀와 달콤한 밤을 보낸다. 다음 날 아침 필립은 오늘이 다니엘과 다니엘의 쌍둥이 동생 도미니크의 생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아파트 근처 빵집에서 생일 케이크를 산다.

Sisters-1973-movie-scene

다니엘을 깜짝 놀라게 하여주고자 침대에 누워 있던 다니엘에게 촛불이 켜진 생일 케이크를 내밀던 필립은 갑자기 포악한 사람으로 돌변한 다니엘이 휘두른 칼에 찔린다. 겨우 창가로 기어간 필립은 건너편에 사는 이웃이 볼 수 있도록 창문에 자신의 피로 쓴 도움을 요청하는 붉은 메시지를 남기고, 건너편 아파트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기자 그레이스는 즉시 경찰에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나 그레이스가 늑장 부리는 형사들을 대동하고 다니엘의 아파트를 수색할 땐 이미 필립은 사라지고 없었다.

Sisters-1973-movie-scene

샴쌍둥이를 소재로 한, 화면 분할 기법으로 또 다른 긴장감을 연출하는, 고전이지만 지금 봐도 상당한 몰입감을 느낄 수 있는 스릴러 영화.

본문에 사용된 이미지 저작권은 영화 「시스터스(Sisters, 1973)」 제작사에 있습니다
Share:

11/12/2019

[영화 리뷰] 과학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지적으로 우아한 영화 ~ 평행이론: 도플갱어 살인(Coherence, 2013)

Coherence movie poster
review rating

과학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지적으로 우아한 영화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뭔지 알아?"

어느 날 저녁, 에밀리와 그녀의 친구들은 모처럼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시간을 공유한다. 8명의 친구는 담소를 나누지 못해 죽은 귀신이라도 들린 듯 저녁을 기다리는 동안이나 식사 후에도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떠드는데 정신이 팔린 나머지 밤하늘을 유유히 헤엄쳐가는 혜성을 잠시 잊고 있었다.

Coherence movie scene
<유쾌한 저녁을 보내는 8명의 친구>

한창 이야기가 물이 오를 무렵, 이들의 우정을 질투한 누군가가 훼방이라도 놓듯 갑작스러운 정전이 발생한다. 잠시 당황한 이들은 누군가는 촛불을 밝히고 누군가는 야광봉을 준비하며 상황을 추스른다. 사실 이날 저녁은 아무런 충격도 가하지 않았는데 휴대전화 액정에 금이 가는가 하면 모두의 휴대전화가 불통이 되는 이상한 밤이기도 했다. 정전의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 살펴보려고 창밖을 기웃 들여다보던 이들은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유일하게 불이 켜진 집이 한 채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들은 일부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화를 빌리고자 몇 명의 선발대를 조직한 다음 파란 야광봉을 들고 불이 켜진 집을 향해 나선다.

Coherence movie scene
<다른 집에서 가져온 상자 안에는 놀랍게도 자신들의 사진이!>

집에 남은 친구들이 한창 애간장을 태우며 선발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불이 켜진 집을 향해 나섰던 친구들은 구급상자 크기의 하얀 상자를 들고 돌아온다. 놀랍게도 상자 안에는 뒷면에 숫자가 적힌 8명의 사진이 탁구채와 함께 들어있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사실이 집 밖을 나간 사람들이 불이 켜진 집에서 본 것들이었다. 그 집에는 자신들과 똑같은 8명의 사람이 자신들처럼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Coherence movie scene
<에밀리 vs 에밀리>

서로의 존재를 몰랐을 땐 상관이 없지만, 자신의 도플갱어를 본다면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하나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도플갱어 괴담을 다중 우주 이론과 평행 우주 이론에 접목한 미스터리, 공포, 그리고 SF라고도 할 수 있는 영화가 「평행이론: 도플갱어 살인(Coherence, 2013)」이다.

내 앞에 숫자 1에서 100까지 적힌 100장의 카드가 있고 그중 한 개만을 고른다고 치자. 만약 내가 숫자 1을 선택하면 숫자 1을 선택한 것이 나의 현실이다. 하지만, 평행 이론은 나머지 카드 99장을 각각 선택했을 때의 세계도 어딘가에서는 ‘현실’로서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즉, 이 경우에는 100개의 세계가 평행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평행으로 존재하기에 평소에는 서로 마주칠 일은 없다. 물론 이것은 매우 단순화한 경우의 수다. 한 사람의 인생만 놓고 봐도 선택과 우연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고, 그것이 인생에 미치는 영향을 간과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여기에 타인의 선택과 기회도 생각하면 평행한 세계는 무한의 수로 존재할 것이다.

영화는 평소에는 상호 작용하지 않는 평행한 세계의 경계가 혜성의 영향으로 일시적으로 붕괴한다고 가정한다. 매우 기발한 착상이지만, 다중 우주 이론과 평행 우주 이론을 모르면 이해하기 어려운 설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론을 안다면 정말 놀랍도록 흥미진진할 뿐만 아니라 영화로서는 드물게도 과학적 호기심까지 자극하는 지적으로도 우아한 영화다.

어딘가의 세계에서는 작금의 내 현실보다 더 잘 먹고 잘사는 ‘나’가 존재할 수 있으며, 또 다른 세계에서는 불행한 사고로 이미 죽은 ‘나’도 존재할 것이고, 밑바닥 계층에서 허우적대며 겨우 끼니를 때우는 궁핍한 ‘나’도 존재할 것이다. 만약 혜성의 영향이든, 아니면 다른 무언가의 힘으로 영화처럼 평행한 세계의 경계가 일시적으로 무너져 궁핍한 ‘나’가 잘사는 ‘나’의 존재를 눈치챈다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영화 「평행이론: 도플갱어 살인(Coherence, 2013)」에서 초자연적인 현상을 가장 빨리 인지하고, 더불어 상황 정리까지 일찌감치 마친 에밀리가 겪는 딜레마로 대신할 수 있다. 초자연적 현상에 말리면서 공황 상태에 빠진 친구들과 불행한 저녁을 보내야 하는 에밀리와 초자연적 현상이 일어난 것조차 눈치채지 못한 채 (때론 모르는 게 약이다) 평범한 시간을 보내는 친구들과 함께 있는 에밀리, 그녀의 선택은?

본문에 사용된 이미지 저작권은 영화 「평행이론: 도플갱어 살인(Coherence, 2013)」 제작사에 있습니다
Share:

8/12/2019

[영화 리뷰] 작품성 운운을 떠나 뭔가를 쓰고 싶게 만드는 영화 ~ 데드 어게인(Dead Again, 2017)

review rating

작품성 운운을 떠나 뭔가를 쓰고 싶게 만드는 영화

"다른 누군가의 과거가 너의 현재를 찾아올 거라고" - 점쟁이

이렇게 좋은 영화를 감상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는 것은 예의가 아닐뿐더러 거사(?)를 막 치르고 난 후 찢어진 콘돔을 보는 것만큼이나 께름칙한 일이라서 힘겹고 괴로운 갈등 끝에 이 글을 쓰게 되었다(혹은 포스터의 경고대로 난 견디지 못하고 결국 글을 쓰고야 말았다!). 이왕 시작한 이상 그래도 천자는 채워야 할 터인데, 무슨 얘기로 그 많은 천자를 채워야 할지 벌써부터 난감하다. 이 영화의 리뷰를 형편없이 썼다는 이유만으로 욕 바가지를 얻어먹을까 봐 영화를 볼 때보다 지금이 더 긴장되고 무섭다. 그래도 두 명의 여주인공은 매우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일단 공포 영화라고 하면 끗발이 설 수 있는 미인이 등장해야 제맛인데, 일단 이 점에서만큼은 「데드 어게인(Dead Again, 2017)」은 합격점을 주고 싶다. 다만, 공포 영화의 막간으로 등장하는 베드씬이 없어 두 미인의 뽀얀 살결을 감상할 수 없다는 것이 흠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IMDB 평점이 무려 7점을 넘어선다. 마구 쏟아지는 공포 영화 중에서 평점 7점을 넘기는 작품을 발견하는 일은 흔치 않다. 그래서 보고 만 것이다(개인적으로 Naver 평점보다 IMDB 평점을 더 신뢰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IMDB 사용자 후기에 10점 만점을 준 사용자가 한 분 계시다는 것, 그런데 미스터리한 것은 그 사용자가 리뷰를 남긴 영화는 「데드 어게인(Dead Again, 2017)」이 유일하다는 것. 아마도 그분은 감독과의 관계가 매우 돈독한 지인일 것으로 추정된다. 뼈가 되고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좋은 친구를 둔 것 같아 정말 부럽다.

영화를 본 사람을 발칵 뒤집어놓을 만한 놀라운 반전이 있는데, 그것은 이 영화가 콜카타 국제 컬트 영화제(Calcutta International Cult Film Festival) 2018년 Best Horror/Science Fiction Feature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내가 이 영화를 감상하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당혹스럽게 만드는 갖가지 어설픈 요소들이 잔인하리만치 즐비하다고 느낀 것은 영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나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렇게 쓸데없는 소리와 어림도 없는 소리 모두 죄다 끌어모아 주절주절 늘어놓아도, 여기에 공백까지 포함해도 천자가 안 된다. 천원은 쉽게 볼 수 있지만, 천자는 쉽게 볼 수 없는 녀석이다. 그래서 천자문 외우는 것도 그토록 어려웠었나 보다.

아무튼, 「데드 어게인(Dead Again, 2017)」는 내가 처음 들어보는 영화제에서 상까지 받은 수작이니, 코를 후벼 파다 못해 콧속을 대머리처럼 반질반질하게 윤기 낼 정도로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는 사람은 꼭 감상하기 바란다. 감히 후회는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못 하지만 말이다. 또한, 다른 사람이 재미없다고 해서 나 역시 재미없으리란 법도 없으니까.

본문에 사용된 이미지 저작권은 영화 「데드 어게인(Dead Again, 2017)」 제작사에 있습니다
Share:

8/03/2019

[영화 리뷰] 두 악당이 마주친다면 과연 누가 재수 없는 것일까? ~ 노 원 리브스(No One Lives, 2012)

No-One-Lives-2012-movie-poster
review rating

두 악당이 마주친다면 과연 누가 재수 없는 것일까?

"이 꼴을 보고 있자니 무슨 생각이 드는 줄 알아?"

'이제 죽었구나!'

진정 무엇이 인정사정없는 것인지를 명확하게 일관된 폭력으로 극명하게 보여주는 영화다. 그에겐 피도 눈물도 없다. 정의도 없고, 인정도 없고, 분노도 없다. 단지 눈에 띄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이는 그 앞엔 고통에 절은 절규와 처절한 살육의 현장이 마치 별천지처럼 펼쳐진다.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뱀이라도 훑고 지나간 듯 어느새 몸은 싸늘하게 식어 있고, 혹시라도 주인공이 눈치라도 챌세라 심장은 최저 RPM으로 작동하며 알아서 숨죽인다. 소름을 돋게 하는 그런 무서움이 아니라 온몸의 신경과 감각을 쥐 죽은 듯 착 가라앉게 하는 그런 냉혹함이 진실로 무시무시한 영화다.

No-One-Lives-2012-movie-secene

숲에서 누군가에게 쫓기는 한 젊은 여성의 절망적인 몸부림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그리고 곧 등장하는 다정한 부부처럼 보이는 연인. 그리고 이삿짐센터로 가장해 대범하게 빈집을 터는 호그 일당.

그날 호그 일당은 공교롭게도 휴가를 떠난 집주인이 갑자기 집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빈집을 터는 현장이 발각된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호그가 뭔가 대책을 시도하기도 전에 성질 더러운 플린이 다짜고짜 집주인과 그의 가족들에게 총을 난사하여 그들을 영원한 휴식처로 보내 버린다.

No-One-Lives-2012-movie-secene

연인처럼 보이는 그들은 단지 거주지를 옮겨가고 있었을 뿐인데, 하필 재수 없게도 모텔 주인이 친절하게 소개해준 다 쓰러져가는 스테이크집에서 그날 하루를 잡치고 돌아온 호그 일당과 마주친다. 그런데 과연 이 전초전 같은 만남은 누가 누구에게 재수 없는 일이 될 것인가?

No-One-Lives-2012-movie-secene

속세를 초월한 악마 같은 악당이 세속적인 고만고만한 악당을 학살하는 그런 영화다. 죽어가는 사람도 악당이고 죽이는 사람도 악당이라 누가 누구를 동정해야 하는가 하는 그런 감정적인 부담은 전혀 없다. 다만, 일말의 연민도, 동정도 보이지 않고 먹잇감을 고문하고 살육하는 이름 모를 주인공에게서 피비린내가 자욱한 악마적인 끌림이 물씬 일어나는 바람에 당혹스럽다.

그런데 앞에서 연인으로 묘사한 이사 중인 베티와 남자 주인공, 그리고 남자 주인공과 그에게 쫓기는 엠마의 사연이 빠져 있는 둥 이야기가 매끄럽지 않은 것은 둘째치고 남자 주인공 너무 무적이지 않냐?

본문에 사용된 이미지 저작권은 영화 「노 원 리브스(No One Lives, 2012)」 제작사에 있습니다
Share:

7/22/2019

[영화 리뷰] 좀비가 되고 싶어? 그럼 자지마! ~ 불면의 저주(失眠, 2017)

review rating

좀비가 되고 싶어? 그럼 자지마!

그녀의 심장 박동수와 혈압은 다 정상이다

역시 정신력이 넘치는 것 같다

그녀는 일주일 내내 한숨도 자지 못했다

역시 온몸 구석구석 찐득찐득하는 한여름에는 공포 영화가 최고다 해서 한 편 골라봤는데, 괜찮으려나 모르겠다. ‘불면증으로 어떻게 공포 영화를 만든다는 거지?’ 하는 의구심 반 기대 반으로 재생을 시작하는 분이 많겠지만, 후반부로 가니 보통 수준 이상의 강렬한 비주얼이 전반부의 조금은 지루했던 시간을 보상해주고도 남는다. 특히 일본 장교의 성기를 통째로 도려내 일본 녀석들 엿 먹어라 하듯 장교 입안으로 그대로 쑤셔 넣는 장면은 지금까지 본 그 어떤 영화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통쾌함을 관객의 오감 속으로 욱여넣어 준다. 하지만, 「불면의 저주(失眠, 2017)」가 단지 공포 영화라고 해서 추천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는 내가 지금까지 본 중국/홍콩 영화에서는 별로 이슈화되지 못했던 ‘위안부’ 문제를 꽤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위안부’ 문제만큼은 한국과 중국이 힘을 합쳐 일본을 압박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리뷰가 쓰고 싶어졌다.

The_Sleep_Curse movie secene

초반만 놓고 보면 ‘불면증’을 의학적으로만 다루는 듯한 오해의 소지는 충분하지만, 중반부를 넘어서면 두 가족사에 대대로 유전됐음에도, 현대 의학으로는 해결하지 못한 ‘불면증’을 ‘저주’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비극적인 내력이 이야기보따리의 터진 옆구리에서 새어 나오듯 서서히 드러난다. 때는 일본이 중국을 한창 점령하던 시기로서 친일파가 기세등등하게 거리를 활보하고, 눈에 보이는 어린 여자는 죄다 잡아들여 위안부를 조직하던 시기다. 이때 부모로부터 흑마술을 전수 받은 자매와 얼떨결에 매국노가 된 람싱과 한국의 이완용처럼 적극적으로 친일파가 된 차우복의 운명이 엇갈리면서 ‘불면의 저주’를 시작된다.

그런데 친일파를 '착한 친일파'와 '나쁜 친일파'로 구분할 수 있을까? 내가 볼 땐 람싱처럼 소극적인 친일파와 차우복처럼 적극적인 친일파로 구분하는 것이 더 그럴듯하다. 한마디 더 덧붙이면 람심 같은 소극적 친일파는 그럭저럭 봐줄 수 있지만, 차우복 같은 적극 분자는 얼마가 지났든 반드시 숙청해야 하며 후손들만 남아있다면 친일 행위로 얻은 모든 이익과 그 이익이 낳은 이익까지 모두 몰수(이것은 소극적인 친일파도 해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The_Sleep_Curse movie secene

불면증이 이다지도 큰 병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영화 속에서 오랫동안 잠을 못 잔 사람들은 주체할 수 없는 광기를 휘두르다 끝내 자멸한다. 잠을 못 자면 뇌세포가 손상된다고 하는데, 오랫동안 잠을 못 잔 사람이 좀비처럼 난폭하게 돌변하는 것은 파괴된 뇌세포를 회복하기 위한 단백질을 보충하고픈 강렬한 욕구의 발산일지도 모르겠다. 생살을 뜯어 먹는 좀비가 되고 싶다면, 잠을 안 자면 된다! 그런데 하루라도 버틸 수 있으려나. 아니면 잠을 안 재워 좀비로 만드는 건가?

The_Sleep_Curse movie secene

잠은 하루 동안 온갖 정보를 처리하고자 혹사당한 뇌에 주어지는 유일한 휴식이다. 우리는 보통 하루에 습득한 정보 대부분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하지만, 꿈에서 막 깨어났을 때 방금 꿈에서 본 것들을 힘겹게 떠올려보면 별의별 정보가 다 있다. 심지어 책에서 본 (당연히 의식적으로는 절대 기억할 수 없는) 글자 하나하나까지 선명하게 떠올라 스스로 놀랄 때도 있다. 물론 놀람과 동시에 곧바로 잊어먹지만, 이런 점만 봐도 뇌는 엄청난 과부하를 견뎌내고자 선택적 기억을 고안해낸 것이리라. 만약 우리가 하루에 접하는 모든 정보를 다 기억한다면, 하루하루 쌓이는 그 엄청난 정보량을 감당해내지 못하고 끝끝내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고로 뇌 활동이 왕성하거나, 뇌세포가 많이 남아있는 사람은 잠이 많을 것이다(참고로 난 아직 잠이 많다). 반면에 뇌세포가 이미 많이 손상된 사람은 잠도 적을 것이다. 그래서 나이를 먹으면 잠도 없어지나 보다. 이것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깨어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려는 것이 아니라 휴식을 취할 뇌세포가 젊었을 때보다 현격히 줄어들었을 테니 그만큼 필요한 잠도 줄어들었다는 말이다. 아무튼, 한창 성장하는 시기에 충분한 수면이 뇌 건강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불면의 저주(失眠, 2017)」는 참으로 통탄할 만한 이야기로 섬뜩하게 깨우쳐주고 있다.

본문에 사용된 이미지 저작권은 영화 「불면의 저주(失眠, 2017)」 제작사에 있습니다
Share:

7/01/2018

[영화 리뷰] 기억이 낳은 또 다른 고름, 악몽 ~ 썸니아(Before I Wake, 2016)

Before I Wake 2016 poster
review rating

기억이 낳은 또 다른 고름, 악몽

"그때 내가 (방아쇠를) 당겼다면 당신의 남편도 다른 사람들도 살 수 있었을 텐데. 어쩌면 당신이…. 내가 못한 걸 할 수 있을지 몰라요" - 웰란

아이가 꾸는 꿈이 그대로 현실로 재현된다는, 그리 기발하지는 않은 소재를 다뤘음에도 공포영화로서는 보기 드물게 인과 관계를 마치 추리소설처럼 비교적 명확하게 풀어냄으로써 나름 독창적인 감흥을 자아내고 있는 영화 「썸니아(Before I Wake, 2016)」. 새로 입양한 아이 코디의 새엄마 제시는 코디의 악몽 속에 갇혀 있는 트라우마를 쫓는 탐정이 되는데, 그럼으로써 그녀는 코디 친모의 죽음이 아이에게 남긴 씻어낼 수 없는 기억이 단편화와 인상화라는 망각적 변용을 거쳐 끝내 악몽으로 이어졌음을 밝혀낸다. 그렇게 아이의 악몽은 끝난 것처럼 보이고, 두 사람의 운명은 화창한 봄날을 맞이한다.

약간은 무서우면서도, 그것보다 조금 더 약간은 슬프면서도 결말은 해피한 공포영화다. 다르게 말하면, 확실히 무섭지도 않고, 확실히 감동적이지도 않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도 코디의 악몽을 두루뭉술하게 에두른 것이 아니라 명징하게 추적한 것이 인상적이다. 그렇다. ‘악몽은 다름 아닌 우리 현실에서, 그것도 나의 삶, 나의 고통, 나의 슬픔, 나의 상처, 나의 기억에서 오는 것이다!’라고 영화는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마치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보는 듯하지 않은가? 우리는 꿈속에 등장하는 뜻밖의 물건, 상황, 인물과 맞닥트리면서 괜히 놀라곤 하는데, 사실 이들을 역추적해보면 대부분이 (영화 속 코디처럼) 삶에서 받은 여러 인상의 과도한 변용과 예측할 수 없는 단편화가 가져온 결과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은 변용이 심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단순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지만, 결국 꿈에 등장하는 모든 것은 꿈을 꾸는 자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상상할 수 있는 한계점 내로 한정되어 진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사람이 보지도 듣지도 못한 ‘컴퓨터’와 연계된 꿈은 꿀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뭐 믿거나 말거나…. 아무튼, 영화 「썸니아」 는 아버지로 보이는 듯한 남자가 잠자는 코디를 권총으로 죽이려는 아찔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Before I Wake 2016 scene

하지만, 뭔 바람이 불었는지 닫혀 있던 문이 갑자기 ‘꽝’ 열리면서 남자가 놀라는 바람에 코디는 무사히 그날 밤을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법적으로나 도리상으로나 아이를 총으로 쏴죽이려 했던 남자에게 코디를 계속 맡길 수는 없는 법. 코디는 입양을 희망하는 젊은 홉슨 부부의 집으로 보금자리를 옮기고, 홉슨 부부는 불행한 사고로 아들 션을 잃어버린 가슴 아픈 기억을 여전히 간직한 채 코디를 새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세 살에 엄마를 여의고 어떤 연유로 여러 가정을 전전한 코디는 아이답지 않게 홉슨 부부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한다.

Before I Wake 2016 scene

코디가 가져온 짐이라곤 달랑 네모난 상자 하나. 코디가 방에 없을 때 침대 밑에 숨겨놓은 상자를 우연히 발견한 제시는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나 뚜껑을 열어본다. 아이가 좋아하는 나비에 대한 책과 함께 발견한 것은 놀랍게도 (아직 고삼도 아닌데!) 각성제. 그날 코디에게 약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던 제시는 뜻밖의 대답을 듣는다. 잠을 자는 게 싫어서 각성제를 먹는다는 코디는 자신이 잠들면 ‘캔커맨’이 나타나 사람들을 잡아먹는다고 고백한다. 코디는 사뭇 진지하지만, 그냥 캄캄하고 어두운 밤을 무서워하는 아이가 지어낸 이야기로 치부한 제시는 조금만 이해하면 무서운 게 사라진다는 과학적인 사고방식으로 코디의 걱정을 잠재우려고 한다.

Before I Wake 2016 scene

코디를 잠재우고 거실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던 부부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된다. 두 사람이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어디선가 갑지가 날아든 가지각색의 나비가 어느새 거실을 가득 채운 것이다. 하지만, 나비는 갑자기 날아든 것처럼 부부 앞에서 갑자기 사라진다. 남편과 함께 신비한 현상을 겪자 제시는 용기를 내어 어젯밤에 션을 본 일도 남편에게 털어놓는다. 제시에게 그 일은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생생했던 경험이었다. 다음 날 부부는 더욱 놀라운 경험을 공유하게 된다. 나비와 함께 이번에는 죽은 아들 션이 나타난 것이다. 이 일로 두 사람은 코디의 꿈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은 아닌지 어렴풋이 추측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션의 사고 장면, 즉 아이의 발이 약간 위로 들려 있는 상태에서 발버둥치는 것으로 보아 제시가 아이의 발을 잡고 들어 올려 익사시킨 것은 아닐지, 그래서 그녀만 그 충격으로 집단 정신치료를 받는 것이 아닌지 상상해 본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코디의 꿈은 처음에는 자신이 좋아하던 나비로 시작한다. 그러던 것이 부부가 애타게 보고 싶어하던 션으로 옮겨가는데, 이것은 코디가 (또다시 버림받지 않고자) 부부에게 잘 보이려는 무의식이 꿈으로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션으로 연기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나날이 갈수록 그것이 부담되니까 ‘캔커맨’을 등장시켜 자신도 모르게 사람들을 집어삼키는 것은 아닐까? 이러면 잘 보여야 할 사람도 사라지니까 말이다. 결국, 코디는 새 부모에게 잘 보이고 싶은데, 새 부모는 그런 코디의 애처로움은 외면한 채 코디가 가진 희귀한 재능만을 탐낸 비극적 결과가 사람들의 실종으로 나타난 것은 아닐지 조심스럽게 유추해 보면서 「썸니아」 리뷰를 마친다.

본문에 사용된 이미지 저작권은 영화 「썸니아(Before I Wake, 2016)」 제작사에 있습니다
Share:

Category

팔로어

Recent Comments

Blog 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