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층의 사각지대 | 모리무라 세이치 | 겹겹이 둘러싸인 알리바이의 미궁
마트료시카 인형 같은 다층 알리바이 트릭
얼웨허(二月河)의 제왕삼부곡(落霞三部曲) 시리즈 42권을 읽고 터미널 서점을 기웃거리는 여행객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가볍게 읽을 책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모리무라 세이치(森村誠一)의 『고층의 사각지대(高層の死角)』인데 드물게도,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가벼운 마음으로 기껍게 완독할 수 있는 그런 책이다.
제15회 에도가와 란포 상을 받은 『고층의 사각지대』는 고도 경제 성장에 편입해 무섭게 성장해 가던 1960년대 도쿄의 호텔을 무대로 한 추리 소설로서 휴대폰도 없고 감시 카메라도 없는, 말 그대로 발은 발대로 바쁘게 뛰어다녀야 하고 머리는 머리대로 빠르게 굴려야만 했던 형사들의 시대상에서 엿볼 수 있듯 오로지 ‘추리’에만 풍덩 빠질 수 있는 본격 추리 소설이다.
등장하는 트릭은 고전적이고 상투적이면서도 누구나 쉽게 도전해 볼 수 있는 소재인 ‘밀실 트릭’과 ‘알리바이 무너트리기’가 준비되어 있다. 『고층의 사각지대』는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는 기대와는 다르게 ‘밀실 트릭’보다는 ‘알리바이 무너트리기’가 압권인데, 알리바이를 무너트렸다고 생각하면 또 하나가 나오고, 이것을 무너트리면 또 하나가 나오는 식으로 양파껍질처럼 이중삼중 겹겹이 두른 범인의 치밀하고 정교한 알리바이 트릭은 ‘알리바이 무너트리기’의 새로운 지평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하나 범인의 철두철미한 알리바이 트릭은 일본의 교통편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으므로 일본의 대중교통과 지역 특징에 정통하지 못한 해외 독자가 풀기엔 쉽지 않다. 하지만,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착상마저 불허한다는 의미는 아니니 부디 실망하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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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층의 사각지대(1977)」, NHK 드라마 중 한 장면> |
적당한 난이도가 도전 의지를 불태운다!
반면에 첫 번째 살인에 사용되는 고층 호텔에서의 ‘밀실 트릭’은 보자마자 대번에 간파했을 정도로 싱거운데, 내가 쉽게 풀었다고 해서 쉬운 트릭이라고 말해야 하나? 어쩌면 삼 년 이상 서당을 출입한 뜻깊은 결실일 수도 있고, 어쩌면 천려일득(千慮一得)이라는 옛사람의 말에 따라 천 번째 그날이 마침 오늘 왔을 수도 있고, 어쩌면 그저 운이 좋아 맞힌 것일 수도 있겠다. 내 말 한마디에 쉬운 트릭이라고 속단하거나 얕잡아 보지 말고 어디 한 번 도전해 보시길!
전체적으로 봤을 때 왼손으로 무릎을 '탁' 치고 오른손으로 이마를 '탁' 치면서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감탄사가 연발로 새어 나올 정도로 아주 뛰어난 트릭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짱구를 애써 굴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아주 만만한 트릭도 아니다. 이 정도의 난이도라면 ‘이 정도면 나도 해볼 수 있겠는데?’ 하는 도전 의식과 추리 의지를 모내기하듯 독자의 머릿속에 단단하게 심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모를 심었다고 해서 수확이 보장되지 않는 것처럼 너무 만만하게 생각하다간 큰코다칠 수도.
아무튼, 글을 읽을 줄 아는 독자 누구라면, 이리 꼬고 저리 꼬는 해괴망측한 트릭에 주눅 들지 않고, 품행은 완전 바보인데 머리만 뛰어난 해괴망측한 명탐정의 기세에 눌리지 않고 본인의 도전 의지를 활활 불태울 수 있는, 그렇게 소소한 추리 마니아를 위한 적당한 난이도의 적당한 추리이니 실력 발휘 겸 실력 점검을 해보는 기회로 삼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더불어 추리 공정을 열혈 가동해 뇌에 버섯이 자라는 것도 방지할 수 있어 좋다. 또한, 조촐하고 직선적인 문장도 뇌세포를 추리에만 집중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인간 처리 공장'으로서의 호텔
호텔을 무대로 한 또 다른 추리 소설 하면 떠오르는 것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매스커레이드 호텔(マスカレ-ド ホテル)』 정도다. 대략 5년 전쯤에 본 소설이라 정확한 기억이라 할 수는 없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에선 손님의 처지에서 흥미롭게 느낄 수 있는 호텔 가십거리들이 언뜻언뜻 떠오른다. 호텔 직원이 주간지 기자와 인터뷰할 때 들려줄 법한 무례한 손님들의 은밀한 사연과 그로 인한 호텔 측의 고충 같은 것들 말이다.
한편, 『고층의 사각지대』는 호텔종사자가 아니고선 알기 어려운 내부 사정과 호텔 비즈니스와 관련된 묘사가 제법 등장한다. 살인 동기 역시 호텔 비즈니스와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모리무라 세이치가 작가로 전업하기 전에 9년 동안 호텔에서 일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인데, 여기엔 자본주의적 고도성장에 편입해 대량화, 대형화되어 가는 호텔 서비스의 물질화, 서비스의 비인간화, 서비스의 대량화 등에 대한 비판적 시선도 포함된다. 작가는 거대한 '인간 처리 공장'으로서의 호텔을 경험으로 체득했을 것이고, 그것이 고스란히 작품 속에 밑그림처럼 스며든 것이리라.
첫 번째 살인은 호텔 객실에서, 그것도 호텔 주인이 거주하는 최상위층 객실에서 일어난다. 그런데도 얼마 후 호텔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살인 사건이 발생한 객실을 정리한 다음 손님을 받기 시작한다. '인간 처리 공장'으로서의 호텔은 체크인과 체크아웃의 황금 룰렛만 멈추지 않는다면 커튼이 내려진 객실 창문 뒤에서 어떠한 추잡스러운 삶이 영위되는지 상관하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누군가가 누군가를 죽이고 죽는 악으로 가득한 상황일지라도. 받은 돈만큼만 되돌려주는 철저하게 이해타산적인 서비스 정신 아래로 지하수처럼 흐르는 무관심, 냉혹함, 몰이해야말로 고층의 사각지대, 아니 도시의 사각지대이다.
죽음과 배신 앞에서도 변절하지 않는 사랑...
서서히 죽어가면서 자신을 죽인 남자와의 사랑이 모두 거짓이었음을 깨달았음에도 그 남자가 남긴 증거를 인멸하고자 했던 한 여자가 있다. 바로 두 번째 희생자 아리사카 후유코가 그렇다. 그것은 범인의 진술대로 연애 상대를 잘못 고른 자신의 어리석음을 숨기려고 한 자존심 때문일까? 아니면 경찰 측의 추리대로 자기를 죽인 범인을 숨이 끊어질 때까지 감싸려고 한 순애보 때문일까?
사람 대부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확신이 드는 마지막 순간에는 자신도 모르게 진심이 드러난다고 한다. 죽음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순간 이익과 손해를 저울질하는 것은 의미도 없고 시간적 여유도 없다. 설령 거대한 이익이 눈앞에 있다고 해도 그것을 영위할 미래는 없다. 사정이 이러하니 진심이 나올 법도 하다. 만약 이때도 거짓을 행한다면 그것은 곧 죽을 자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남아 있는 누군가를 위한 것일 공산이 매우 크다. 부모가 자식의 허물을 죽음으로 감싸는 것처럼. 그래서 난 아리사카 후유코 마지막 행위는 범인의 진술이 아니라 경찰 측의 추리가 맞는다고 믿고 있지만, 그녀는 이미 죽었고, 그렇게 진실도 영원히 묻혔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굳이 꺼낸 것은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랑하는 남자의 행복을 위해 목숨마저 바칠 수 있는 여자의 애처롭고 어리석은, 그러나 그지없이 아름다운 사랑에 눈 주변이 AV를 보는 고등학생의 팬티처럼 뜨뜻미지근한 뭔가로 축축하게 젖었기 때문이다. 싱겁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남자로 태어난 이상 아리사카 후유코 같은 여자에게 헌신과도 같은 사랑을 받고 싶은 판타지는 심장이 멈추는 그날까지 포기하기 어렵다.
어쩌면 이런 소설에선 흔히 볼 수 있는 고만고만한 사연일 수도 있지만, 이 세상이 가면 갈수록 배타적이고 극단적이고 냉정하고 잔인하게 변해가는 것 같다는 기우 때문인지, 아니면 갑자기 뚝 떨어진 기온으로 몸과 더불어 마음도 꽁꽁 얼어붙어서인지, 아무튼 아리사카 후유코의 애절한 이야기는 예전보다 냉정해진 사람과 사람 사이, 더 나아가 국가와 국가 사이의 온도를 절절하게 느끼게 한다. 오래간만에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동에 전율하며, 한편으론 아직은 냉혈한이 되지 않은 나의 아집과 아둔함과 진부함에 안심한다.
멋모르고 산책에 나섰다가 성큼 다가온 겨울바람에 몸서리치고,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는 낙엽에서 더없는 쓸쓸함을 느끼면서 그녀가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무엇을 떠올렸을지를 생각해 본다. 가슴이 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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