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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1. 13.

[책 리뷰] 전통적 삶과 혁명적 삶의 수선스러운 공존 ~ 바보 웃음(라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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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 삶과 혁명적 삶의 수선스러운 공존

Original Title: 傻笑 by 勞馬
후루진 주민들의 모든 주의력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하나의 목적에만 쏠려 있었다. 후루진 주민들의 생각과 행위는 전부 돈을 에워싸고 움직였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사고나 이야기는 모두 돈과 관련되어 있었다. (『바보 웃음(傻笑)』, p134)

중국의 경제 개혁, 과연 누가 이끌었나?

역사학자 프랑크 디쾨터(Frank Dikoter)는 심혈을 기울인 자신의 역작 ‘인민 3부작’ 중 마지막 저서인 『문화 대혁명(The Cultural Revolution)』을 통해 주류 역사관을 뒤집어 엎을만한 충격적인 가설을 제시한다. 그것은 중국의 경제 개혁을 이끈 원동력은 ─ 보통 알려진 대로 ─ 개혁 • 개방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덩샤오핑(鄧小平)이 아니라 그저 우리처럼 평범하고 범용한 보통의 인민들, 그중에서도 농민들이었다는 것이다.

오로지 선전과 선동만으로도 내전과 전쟁을 뛰어넘는 대혼돈과 대파괴를 가져올 수 있다는 무서운 사실을 인류사에 남긴 마오쩌둥의 위대한 공산주의 실험의 연속조차 농민들의 순박함과 우둔함 속에 숨겨진 삶에 대한 끈질긴 애착을 소멸시키지는 못했다. 마오쩌둥의 공상적 이상주의의 실현이라는 그럴싸한 이데올로기의 실체는 망령이 난 노인의 과대망상과 변덕이 곤죽처럼 섞인 혼돈 그 자체였음이 뒤늦게 밝혀지긴 했지만, 그것들이 대세를 장악하며 중국을 평정하고 있었을 땐 어느 누가 감히 진실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을까? 설령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그것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 있었을까?

해방 이후 혼돈과 파괴가 갈마돌며 정신없이 몰아치는 시련의 연속에서 생존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확보하고자 그 어느 때보다 전투적으로 매달려야 했던 농민들은 그러한 사실을 꿰뚫어 볼 틈도, 능력도 없었거니와 설령 그럴 수 있다 해도 당연히 누설할 수 없었다. 위대한 조타수의 위대한 실험 속에서 수천만 명이 기아로, 혹은 그와 관련된 질병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에 한 점의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음으로 내몰렸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이 대다수 인민은 살아남았다.

이것은 위대한 조타수가 안내한 길은 혹독하고 가혹했지만, 그에 맞서는 인민들의 인내심과 처세술도 만만치 않았다는 방증이다. 그들의 생명력은 바퀴벌레처럼 질겼으며, 그들의 처세술은 최고의 여배우로서 아카데미상을 받은 오드리 헵번 뺨쳤다. 겉으로는 순박하고 우둔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생존을 향한 야수 같은 본능과 전통적으로 물려받은 돈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열망이 있었다(역시 상인의 나라답다!). 이 둘에 스스로 궁색한 삶을 개척하고자 하는 삶에 대한 끈덕진 애착이 더해져 모종의 시너지 효과를 발휘해 소리 없는 혁명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완고한 보수주의자였던 덩샤오핑조차 거스를 수 없었던 대세, 즉 시장 경제를 향한 조용하면서도 굳센 의지가 서린 물결이었다.

바보가 특산물인 마을

쓸데없이 거창한 서문도 봐주기 어려운데, 그것조차 삼천포로 빠지고 말았으니 정말이지 면목이 없다. 그렇다고 이쯤에서 내 블로그를 떠나면 글을 쓴 내 성의가 완전히 무시되고 마는 꼴이니 내 처지에서는 당연히 곤란하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끝까지 읽어보면 내 감히 장담하건대 안 읽은 것보단 나으리라. 아무튼, 『바보 웃음(傻笑)』은 장편이 아니고 단편과 중편 사이를 오가는 작품들의 모음집이다 보니 와닿는 느낌이 약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 나로서는 이런 모음집이 리뷰를 쓰기에는 가장 난감하다. 그래서 오늘의 리뷰는 횡설수설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미 시작부터 멋지게 삼천포로 빠지지 않았는가?

중국 작가 라오마(勞馬)의 중편 모음집 『바보 웃음』은 정치적으로 역사적으로 복잡하게 얽힌 중국 현대사를 집요하게 거들먹거리는 정치적 색채가 짙은 소설은 절대 아니다. 다만, 중국의 개혁 • 개방 시기를 전후로 펼쳐지는 젊은 세대와 구세대 간의 세대 차이와 그로 말미암은 갈등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와중에서도 돈에 대한 열망만큼은 세대 차이를 뛰어넘어 농촌의 활기차고 역동적인 모습에 활력소로 작용하는 모습에서, 개혁 • 개방의 원동력을 농민에게서 찾은 프랑크 디쾨터의 책들이 생각나 몇 자 끄적거려 본다는 것이 이도 저도 아닌 서두가 되어버렸다고나 할까나.

아무튼, 남자는 마누라에게 손찌검하고, 마누라는 애를 때리고, 애는 개를 때리고, 개는 남자를 문다. 제구실을 못 하는 남편을 둔 아내는 마을 사람들 몰래 바보를 유혹해 씨를 받아 아이를 낳는다. 초등학교는 바보의 집요한 요청에 못 이겨 ‘바보증명서’를 발급한다. 돌잡이를 바라보는 가족들은 아이가 1위안짜리 지폐를 잡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린다. 농민들은 도시에서 하방한 청년이 거품을 일으키며 이를 닦는 모습도 이해하지 못한다. 바보가 집마다 한 명씩은 꼭 있는 바보가 특산물인 마을이 있다. 누군가는 도시처럼 번지르르해지는 고향의 변화를 반가워하고, 누군가는 무분별한 개발에 황폐해져 가는 고향을 바라보며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해방 이후 반강제적으로 주입된 혁명적인 삶 속에 여전히 가부장적이고 전통적인 가치관이 아슬아슬하게 기생하는 독특한 생활 풍속을 보여주는 『바보 웃음』 속에 등장하는 농촌 마을의 진풍경이다.

소박하고 우직한 농민들의 수선스러운 일상

궁핍하고 외진 농촌이다 보니 도시로부터 불어오는 광풍의 직격탄은 피해갈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100% 안전한 것은 아니다. 이(李) 괴물의 첫째 아들 이스가 생과부의 유혹에 넘어가 씨를 제공하는 망나니가 되고, 나중에는 말 한마디 잘못 내뱉은 대가로 정치범으로 끌려간다. 백치가 정치범으로 둔갑한다는 웃지 못할 여정은 아무리 외진 시골일지라도, 아무리 정치적 격변 지역의 변두리라 할지라도 위대한 조타수의 실험이 내뻗는 마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해준다. 그래도 이 정도면 약과라고 볼 수 있다. 최소한 『바보 웃음(傻笑)』에서는 ‘문화대혁명’을 소재로 한 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간성에 대한 환멸적인 탄식을 자아내는 잔혹한 광경이나 가족끼리, 혹은 이웃끼리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하는 아귀다툼은 일어나지 않는다. 소설 제목처럼 바보스러운 웃음을 절로 짓게 하는 바보들의 언동과 소박하고 우직한 농민들의 수선스러운 일상의 왁자지껄한 조합이 정치적, 사회적 격변을 애써 우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중국의 온 도시를 휩쓴 정치적 광풍이 모든 농촌을 집어삼키지는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중국이 오죽 넓으랴. 그리고 중국 농민 역시 오죽할까? 춘추전국시대부터 진시황제를 거쳐, 그리고 군웅할거의 삼국 시대와 청나라 말기의 열강 침략과 항일전과 국공내전을 거쳐 공산 혁명으로 종결된 파란만장한 역사의 산증인이자 그럼으로써 각종 재난과 풍파에 단련될 때로 단련된 그들이 아니었던가?

『바보 웃음』을 읽고 있노라면, 그런 잔혹의 시대를 견뎌온 농민들의 억척스러운 모습이 은연중에 내비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삶을 향한 순박한 의지와 애착이 의도치 않게 자아내는 해학과 풍자이다. 바보가 한 말은 모두 엉터리라 여기기에 여기저기에 얽힌 복잡한 책임 관계에서 벗어나듯 그들의 순박함과 고지지식함이 의도치 않게 자아내는 해학과 풍자 역시 변화무쌍한 정치적 격변에서 살짝 어긋나 있다. 약간은 아쉬우면서도, 약간은 더 시원하게 꼬집어주기를 원하면서도, 약간은 더 과감하게 밀어 붙어주기를 원하면서도, 그 약간의 기대감을 ‘바보 웃음’으로 하나씩 떨쳐내는 필설이야말로 이 책의 묘미라면 묘미다.

돈, 돈, 돈, 모두가 ‘돈’을 바란다

농민들의 삶을 향한 순박한 의지와 애착을 간단하게 종합해보면 ‘돈’으로 마무리할 수 있다. 아무리 무지하고 소박한 농민일지라도 그들 역시 소망하고 꿈꾸는 삶이 있다. 그것은 돈을 벌어 부자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처럼 부자를 선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부자를 비난하고 시기하는 모순된 감정을 안은 채 자신들도 언젠가는 그런 부자가 되기를 갈망한다.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돌잡이 풍습에서 갓 돌을 맞은 아기가 지폐를 잡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는 가족들의 모습에서 돈을 향한 그들의 열정이 얼마나 애타고 간절한지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열망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정부와 공산당이 제대로 일을 못 하니 스스로 돈을 벌어보겠다는 농민들의 의지가 모이고 모여 시냇물을 이루고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룬 덕분에 중국 경제가 물꼬를 틀 수 있었다고 디쾨터는 해석하지 않던가.

『바보 웃음(傻笑)』에서는 바보조차 돈을 벌고자 작심하고, 부패한 관리들은 서민들 앞에서 어깃장을 놓으며 삥을 뜯는다. 계층이 다르고 사는 곳은 다를지라도 모두가 돈을 향한 열정만은 일맥상통한다. 욕을 먹든 배가 고프던 바보는 바보니까 웃고, 돈을 번 사람은 돈을 벌었으니까 웃고, 인민에게서 삥을 뜯은 관리는 체면을 차렸으니까 웃는다. 이래저래 돈을 잃은 사람도 부자가 될 내일을 기약하며 웃는다. 돈이 윤활유가 되어 군상들 사이를 뱀처럼 요리조리 헤쳐나가 겨드랑이를 간지럽히듯 사람들을 자극하고, 그래서 그들을 웃음 짓게 한다. 삶이 아무리 구차하고 고단하더라도 그들은 누군가의 돈을 바라보고, 또는 언제가 내 손으로 만지게 될 ─ 한편으로는 기약 없는 ─ 돈을 상상하며 바보처럼 웃음 짓는다. 누구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갈지 모르는 돈을 사이에 두고 그들은 서로 다른 욕심과 이해로 모두 바보처럼 웃는다.

어쩌면 중국 농민들이 그렇게 숱한 역경을 겪고도 때마다 오뚜기처럼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삶에 대한 끈질긴 애착과 더불어 돈을 벌고자 하는 타고난 장사꾼 기질이 끈질기게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확실하고 뚜렷한 목적이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역경과 고난을 더 잘 이겨내는 것처럼 말이다.

태풍의 눈 같은, 하지만 가볼 수 없는 고향

『바보 웃음(傻笑)』의 이야기 대부분은 우여곡절 끝에 해피 엔딩으로 귀결된다. 아마 개혁 개방 당시 중국 농민의 현실은 그것보다는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집요하게 주요 인물들의 삶이 안정적인 궤도에 안착하는 것으로 마무리한 것을 보면 중국 농민들의 행복을 염원하는 작가 라오마의 바람이 기대 이상으로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비극적인 현실을 노예가 짐수레를 끌고 가듯 해피 엔딩으로 강제적으로 끌고 가버림으로써 교묘하게 풍자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도 아니면 당시 중국 농민들의 실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꽤 괜찮은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도시가 정치적 풍파로 혼란과 파괴가 불규칙하게 어우러진 몸살을 대단히 앓고 있을 때, 『바보 웃음』의 농민들만큼은 그들 특유의 소박하면서도 평온한 일상을 꽤 유지하고 있었다. 간혹 누군가 일으킨 웃지 못할 비화로 일상에 잠깐 금이 가곤 했지만, 결코 도시처럼 삶 자체가 풍비박산 나는 지경으로까지는 치닫지는 않았다. 이는 그들에게 있어선 참말로 다행이자 복이 아니지 않을 수 없다. 그곳은 마치 태풍의 눈 같은 곳이라고 할까나.

도시를 무너뜨린 광풍이 언제 휘몰아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도 전통과 혁명적인 삶이 요상하게 공존하는, 그리고 고향의 옛 모습이 뜨거운 개발 열기로 녹아내리는 밀랍 인형처럼 서서히 윤곽을 잃어가는 그곳 농민들의 삶과 풍습을 작가 라오마는 마치 독자가 살아본 적 없고, 살아볼 수 없었던, 그럼에도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어느 먼 고향 마을처럼 단아하게 그려내고 있다. 격정은 없지만, 대신 활기가 있고, 비극은 없지만, 대신 ‘바보 웃음’이 존재하고, 망각과 희망이 엇비슷하게 대치하는 그런 고향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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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0. 20.

[책 리뷰] 외로움이라는 괴물에 삼켜진다는 것 ~ 별들의 고향(최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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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이라는 괴물에 삼켜진다는 것

Original Title: 별들의 고향 by 최인호
우리들이 서로 만나 약속도 없이 서로의 살을 맞댄 것은 사랑 때문이긴 해도 우리는 결과적으로 서로 떨어져 있는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결국 혼자, 혼자, 혼자뿐이었다. 술을 마시고, 사랑을 하고, 정사를 나누고, 식사를 하고, 영화구경을 하고, 산보를 하고, 육교를 오르내리고, 커피를 나눠 마시고, 껄껄 웃어도 우리는 결국 혼자였다. (『별들의 고향』, 2권, p265)

한때 그녀가 살아 있었다는 것이 나를 슬프게 한다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인 1972년에 신문 연재를 시작했으니, 반올림하면 어느덧 5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50년은 반세기이고, 생물학적으로 계산해 본다면 호모 사피엔스의 2세대에 해당하는 짧지 않은 시기다. 이 말은 만약 경아가 살아 있다면, 그녀는 나의 어머니 또래이며 지금 자라라는 아이들의 할머니뻘에 속하는 세대라는 말이다. 그녀가 살아 있다면, 경아가 살아 있었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경아는 그러지 못했다. 경아는 암울했던 유신 시대의 종말을 고함과 동시에 새로운 군부독재의 시작을 고하던 1979년의 그 날도, 도시 빈민에 대한 가혹한 폭력의 역사를 은폐하고 국제무대에 한국을 알리는 계기가 된 1988년의 그 날도, 빚더미에 올라앉은 나라가 통째로 무너진 1997년의 그 날도, 둥그런 축구공이 어디로 튀는지에 따라서 온 국민이 울고 울었던 영광스러운 2002년의 그 날도, 그리고 70여 년 동안 적대관계에 있던 북한과 미국의 정상이 드디어 한 자리에 마주하던 2018년 희망의 그 날도 그녀는 보지 못했다. 그녀보다 네 살 어린 나의 어머니도 아직 살아 있고, 심지어 그녀보다 두 살 많으면서 믿기지 않게 한창 청춘의 고뇌에 빠져 허우적거려야 할 26살에 『별들의 고향』을 썼다고 하는 소설가 최인호도 당당하게 살아 있는데,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그렇다. 쉽게 예상할 수 있듯 그녀는 죽었다. 그래서 나는 슬프다. 이 슬픔은 잠시 사랑했던 연인과 헤어질 때 느낄법한 얄팍한 비애감보다는 내가 죽도로 짝사랑했던 여자가, 평소에는 나를 쳐다볼 생각도 않았던 도도한 그녀가, 그런 그녀가 나를 남모르게 좋아했다는, 그래서 내가 자기에게 다가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라는 말을 남기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나의 영혼을 짓누르는 죽음과도 같은 참담함에 가깝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경아가 살아생전에 했던 말처럼 그녀가 죽어서 슬픈 것보다는 그녀가 한때 살아 있었다는 생각이 더더욱 나를 우울하고도 깊은 슬픔에 잠기게 한다. 차라리 경아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태어났더라도 그녀의 존재를 몰랐더라면 그녀의 때 이른 죽음이 나를 때늦은 비애 속에 잠기게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이미 지독한 작가를 통해 지독한 삶을 살아간 경아를 알게 되었으니 빌어먹게도 작고 귀엽고 통통하고 착한 그녀를 어찌 사랑하지 않고 버틸 수 있을쏘냐! 젠장 맞게도 난 어젯밤 경아를 연상시키는 통통한 중년 여자와 질퍽하게 섹스하면서 뭔가 비장한 쾌감까지 느끼는 이상야릇한 꿈까지 꾸지 않았던가! 상황이 이처럼 빌어먹을 지경으로까지 몰렸으니 이제 작가라도 원망하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다. 무심하고 잔인한 작가 최인호, 경아를 죽인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당신이야!

죽기 전에 읽어서 정말 다행이야!

나의 되먹지도 않은 푸념과 내가 지독히도 존경하는 작가에 대한 무례는 이쯤에서 그만두고 『별들의 고향』을 읽고 나서, 그리고 읽으면서 가장 절실했던 것을 꼭 집어서 말하라면, 이제라도 이 작품을 읽었다는 안도감과 만족감이다. 죽기 전에 놓치지 않고 읽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 정도의 좋은 작품, 좋은 소설은 이 세상에 부지기수겠지만, 한 독자가 평생 읽을 수 있는 독서량의 한계와 그 사람이 책을 접할 수 있는 운신의 폭 내에서 그런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우연과 기회는 좀처럼 드물다. 내가 비록 지금까지 천여 권의 책을 읽었다지만, 그 책 전부가 동네 도서관에 소장된 책으로 한정되어있는 점만 보더라도 세상에 읽을 책은 정말 많지만 실제로 읽을 수 있는 책은 그렇게 많지 않다. 물론 경제적인 여유와 더불어 원서를 읽을 수 있는 언어적인 능력까지 겸비한 독자라면 선택의 폭은 더 넓어지겠지만, 그렇다고 무한정 책을 읽을 수는 없다. 천 권을 읽던, 만 권을 읽던 한 사람이 평생 읽을 수 있는 독서량은 한계가 있고, 그러한 현실 인식은 진지하고 현명한 독자에게 단 한 권이라도 양질의 책을 선택하여 읽어야겠다는 의지와 욕심, 조바심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그런 면에서 고전은 가장 무난한 선택이다. 한편, 가끔은 소일거리로, 혹은 머리도 식히고 기분도 전환할 겸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인 책들도 읽을 수 있겠지만, 그런 책들이 주가 된다면, 독서력을 퇴보시키는 지름길이다. 이런 책들은 독자의 시야를 흐트러트리고 편견과 선입관을 주입시키면서 지적 능력을 퇴화시킨다. 고로 시간 낭비일 뿐만 아니라 인생의 낭비이며 그릇된 독서의 길로 빠지기도 쉽다. 하지만 무엇이 양질의 책이고, 무엇이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인 책이며, 무엇이 인생의 낭비가 되는 책인지는 독자가 선택해야 할 몫이다. 여기서 어떤 책이 좋은 책이다, 혹은 나쁜 책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것은 책을 수백 권 정도 진득하게 읽다 보면 누구라도 충분히 감을 잡을 수 있는 경험의 문제다. 고로 책을 읽어라! 그러다 보면 내가 『별들의 고향』을 읽고 났을 때 내 마음속으로 쓰나미처럼 밀려왔던 안도감과 만족감을 이해하는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다.

외로움이라는 괴물에 대하여

내겐 분명히 ‘좋은 책’으로 다가온 『별들의 고향』이지만, 요즘의 젊은 세대에겐 따분하고 이질적인 정조 관념, 통행 금지 등의 시대적 괴리, 그리고 소위 ‘참여문학’이라고 하는 문학의 한 귀퉁이에서 바라볼 때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시대적 반영의 결여라는 결점이 다소 존재하는 만큼 누군가에게는 고만고만한 통속적인 소설로 비추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문학이 가지는 자유의 기치를 가장 높이 평가한다면 문학이 반드시 시대의 정치적 • 사회적 상황을 반영해야 할 의무는 없으며, 지금보다 낡고 고루한 풍조나 세대 차이를 드러낸다고 해서 외면해야 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에겐 문학에서조차 시대의 암울했던 정치적 우울함과 마주치는 일이 고문이거나 가혹 행위이다. 우린 어차피 그 낡고 고루한 풍조의 연장 선상에서 세대 차이에 부대끼며 살고 있지 않은가! 굳이 이런 말장난 같은 변명과 두둔이 아니더라도 『별들의 고향』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거대화된 도시가 필연적으로 잉태할 수밖에 없는 괴물인 외로움이 여전히 우리를 좀 먹고 있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사람에 치일 정도로 사방팔방에 사람들로 바글거리고, 경아는 상상도 하지 못할 신통하고 별난 기계로 별의별 짓을 다 하는 스마트한 인구 과잉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고독과 외로움이라는 만성 질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문제이면서도 그 누구도 뾰족한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명확하게 원인을 파헤치지 못한 이 변덕스러운 질병에 대해 한낱 소설 나부랭이에 불과한 이 책이 명확한 답을 제시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전장의 어둠 속에 숨은 죽음과도 같이 도시인을 하염없이 짓누르는 외로움이라는 괴물의 한 단면을 정부 시설에 내버려진 연고자 없는 약물 중독자처럼 지독히도 쓸쓸하게 죽어가는 경아를 통해 생생하게 내비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도시라는 거대한 가면 뒤에 숨은 위선과 가식의 자궁 속에서 잉태된 외로움이라는 괴물의 정체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적당한 구실을 얻은 셈이다.

히드라처럼 많은 얼굴을 가진 그 괴물은 때론 행복으로 가장된 불행이며, 때론 꿈을 먹고 사는 절망이며, 때론 인구 과잉과 인구 밀집을 사악하게 비웃는 소외감이며, 때론 옆구리 터진 유조선에서 흘러나오는 기름처럼 대책 없이 주변을 오염시키는 고독이다. 경아가 아득한 별들의 고향으로 떠나고 나서 5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한강의 기적으로 감당하기 벅찰 정도로 물질적 번영을 이루었음에도, 문명의 영광이라는 찬란한 후광을 등에 업고 하하 호호 기세등등한 도시를 발작적으로 조롱하듯, 전염병 같기도 하고 기생충 같기도 한 외로움이라는 괴물은 여전하다 못해 시시때때로 도시인의 불안한 정서를 밤마다 드리우는 어둠처럼 파고 들어와 가뜩이나 보잘것없는 우리의 삶을, 조루 환자처럼 빠르게 만개했다 빠르게 져버리는 우리의 행복과 청춘을, 언제나 별 볼 일 없었던 우리의 희망을, 쥐새끼처럼 살금살금 갉아먹는다. 고로 『별들의 고향』이 한겨울에 뼛속까지 스며드는 냉기처럼 우리를 전율케 하는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것이 제아무리 흔하디흔한 소재일지라도 말이다.

지독한 외로움, 우리는 결국 혼자다

문오의 말처럼 삶이 실상은 만나고 헤어짐의 문제뿐이라는 사실에 대해 깊이 공감한다면, 우리는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혼자이고, 고독하고 외로운 동물이며,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의 특성조차 인간이 혼자임을 견디기 어려워한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 아닌가? 경아를 죽인 것은 빌어먹을 작가도 아니며, 악마처럼 날뛰는 정욕에 점령당해 경아의 처녀를 빼앗고 낙태라는 뼈아픈 상흔을 남긴 영석도 아니며, 과거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경아를 내팽개친 만준도 아니며, 단물 빠진 껌 뱉듯 몇 개월 재미나게 살다가 경아를 버린 문오도 아니다. 천성이 밝고 낙관적이었던 경아, 일회용품처럼 남자의 놀잇거리가 되어 놀아나는데 이골이 난 경아는 그 정도로 죽을 여자는 아니다. 그럼에도 경아는 스물일곱 꽃다운 나이에 죽었다. 아니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단지 외로움 때문일까? 아무리 지독하다 할지라도 외로움만으로 사람이 죽을 수 있을까?

콜록콜록 시도 때도 없이 우리를 앓아눕게 하지만, 그로 말미암아 죽는 사람은 도통 찾아보기 어려운 감기처럼 외로움은 우리의 삶을 조금씩 조금씩 갈아먹으며 괴롭힐망정 정작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지는 못하는 그런 병이었지 않았나? 경아가 외로움을 끝내 견디지 못해 죽었는지, 자신의 소박한 꿈이 계속 짓밟히는 것에 짜증이 머리끝까지 난 나머지 죽음을 선택했는지, 남자에게 버림받는 삶에 지치고 지쳐 피곤해서 쓰러졌는지, 이기적인 남자들이 배출하는 온갖 잡다한 쓰레기를 정화하는 필터 작용을 했던 경아의 육체가 제 기능을 다 한 나머지 역류한 쓰레기에 오염되어 죽었는지, 아니면 이 모든 것이 서로 짬뽕되어 일으킨 합병증으로 죽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것은 염병할 작가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허우대 멀쩡하게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선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천기 같은 그 무엇이지 않을까? 혹은 누추한 병상에 누워 홀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해야만 하는 사람만이 느낄법한 자조 섞인 비애이자 허무와 고독의 극치를 벗어난 비극의 결정판이다.

뭔가에 취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

그 사람이 죽어서 슬픈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한때 살아 있었다는 것이 슬프다고 말하는 경아. 우리 시대에 가지고 있던 따스한 인정과 순정을 아직 간직하고 있었던 경아. 언젠가 버림받을 것을 알면서도 내색 없이 오롯이 현재 그 순간만을 지극히 사랑할 수 있었던 경아. 그런 경아가 보고 생각하는 세상은 우리가 보고 생각하는 세상과는 달랐을 것이다. 뭔가가 달랐기에 경아는 비굴한 우리처럼 세상에 적응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했다. 차라리 그 시궁창 물을 마셔 없애버릴지언정 썩을 대로 썩은 시궁창에 몸을 적시기는 죽음보다 싫었다. 성공과 출세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미덕으로 자리 잡은 지금으로서는 경아의 순수함은 천진하다 못해 바보 멍텅구리나 다름없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가장 순수했던 경아는 우리처럼 그렇게 억척같이, 안면박대하고, 몰염치하게, 되는대로 살아갈 수가 없었다. 경아처럼 순수했던 사람들은 억척스러운 사람들만이 살아남아 자식을 낳고 작게나마 번영을 구가할 수 있는 현대 사회에서는 진화 법칙에 따라 서서히 도태되어 가고, 이제는 억척스러운 사람들만이 살아남는다. 하지만, 웬만큼의 억척스러움 가지고는 입에 겨우 풀칠이나 하는 이 거지 같은 세상에서 사람들은 더욱더 악착같은 사람들로 진화하고 있다. 나도 어찌어찌하여 이 척박한 세상 속에서 여전히 생존해 가고는 있지만, 경아처럼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도통 모르겠다.

“난 정말 모르겠어요, 정말 모르겠어요, 남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다들, 다들 말이에요, 용이하게 살아가고 있잖아요? 어떻게 그렇게 용이하게들 살아가고 있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별들의 고향』 2권, p275)

그래서 뭔가에 취하지 않고는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나 보다. 경아는 술에 취해 꿈속으로 달아났고, 나는 책에 빠져 세상을 외면한다. SNS에 취한 누군가는 가상현실에 중독되어 현실에서 도피한다. 명성에 취한 누군가는 교만에 빠진 채 현실을 왜곡한다. 돈에 취한 누군가는 빈부격차를 조장하며 현실을 교란한다. 게임에 취한 누군가는 지존을 꿈꾸며 현실을 부정한다. 일에 취한 누군가는 자신을 혹사시키며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친다. 이처럼 현대인이 외로움을 부정하고 외면하는 방법은 각양각색이지만, 뭔가에 취하면 취할수록,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 파도처럼 밀려드는 외로움과 허무함은 더 거세고 더 지독한 법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도시를 단숨에 집어삼킬 것처럼 아가리를 쩍 벌린 그 괴물 같은 외로움과 허무함이 굶주림에 지쳐 사냥을 나서기 전에, 누군가 논개처럼 비장하게 그 아가리 속으로 뛰어들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양양한 바다에서 물 한 바가지를 퍼내는 미미한 일일지라도, 그래서 세상일에 별 보탬이 되지 않는 무모한 일일지라도, 나는 애써 변명하고 싶다. 그것은 사막에서 갈증에 허덕이는 자에게 뜻밖에 내린 한 방울의 물과 같다고, 그래서 괴물의 갈증을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그 한 방울의 물이 증발할 때까지 괴물은 다른 곳에 한눈을 팔 수는 없을 것이라고, 다른 곳에 한눈을 팔 수 없는 그 찰나만큼은 우리도 외로움을 잠시 잊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괴물이 나를, 당신을 당장 집어삼키지 않는 것은, 괴물이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누군가가 괴물의 시선을 빼앗고 있기 때문이라고, 누군가 괴물에게 삼켜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이야기에 취하고 텍스트에 홀린다

마지막으로 『별들의 고향』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를 또 하나 들고 싶다. 그것은 텍스트를 읽는 재미다. 내가 한국 소설을 많이 읽어본 편은 아니지만, 그중에서 텍스트를 읽는 재미를 선물해 준 작가는 그렇게 많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중에서 그 작가만의 색깔, 그 작가만의 멋을 가진 텍스트를 구사하는 작가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소설을 이야기만으로 읽는다면 그 이야기가 아무리 재미있더라도 그 소설은 기껏해야 이류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소설은 이야기도 재미있고 그만의 의미가 있어야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 이야기에 작가만의 멋과 색깔이 담긴 텍스트가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실상 자신만의 문체, 자신만의 텍스트를 보여주는 작가는 그리 많지 않다. 작가가 자신만의 텍스트를, 자신만의 문체를 구사한다는 말은 이야기가 아닌 종이 위에 선명하게 인쇄된 텍스트만 보고도 그것을 쓴 작가가 누구인지를 구분해낼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익명의 글을 문체의 특성만으로 누가 썼는지를 분별해내었던 역사적 사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내 텍스트 분별력은 그 경지까지 오른 것은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문체를 구사한다. 나쓰메 소세키(夏目金之助)가 그러하고, 옌롄커(閻連科)가 그러하고, 셀마 라게를뢰프(Selma Lagerlof)가 그러하다. 그리고 약간 추켜세워 한국 작가 최인호가 (『별들의 고향』 한 작품만으로는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지만) 대충 그러하다.

장난스럽지만 짓궂지는 않고, 천박한 듯 보이면서도 도를 넘어서지 않고, 냉기가 스며 나오는 경멸감 어린 시선 속에 따스한 관심이 공존하고, 무심한 듯하면서도 우리 시대의 마지막 남은 인정을 담을 듯한, 그래서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통속적인 흐름에 은근살짝 문학적 품격을 무단 방류해 놓은 듯한 그의 텍스트는 우울하고 구슬프고 쓸쓸한 우리 시대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재현해내는데 단단히 한몫하고 있다. 그래서 감히 친구의 주량을 빤히 알면서도 말리기는커녕 한 잔 더 따라주는 심정으로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거기엔 책에 취해 세상만사 온갖 시름을 잠시라도 잊었으면 하는 선량한 마음과 한 번쯤은 짜릿하게 심장까지 스며드는 외로움과 허무함으로 밤잠을 설치며 번뇌에 빠져보라는 짓궂은 마음이 나란히 공존한다.

(질질 끌어 정말 미안한 마음 금할 수가 없지만, 정말 마지막으로) 갑자기 경아가 하얀 눈 속에 파묻혀 죽은 모습이 노트북 액정 화면 위로 오버랩된다. 우리 시대 순수의 상징인 경아가 깨끗함의 상징인 눈 속에서 죽다니, 이 얼마나 절묘한 궁합인가? 그것은 마치 경아는 무심한 도시인들에 밀려 쓰러지고 짓밟힌 눈사람이라고 은근히 항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또한, 그것은 이상하게도 겨울만 되면 쓰라린 인생의 비애를 겪어야 했던 경아가 겨울이 돌아오면 그 고통과 상처를 딛고 우리 앞에 눈사람으로 환생한다는 판타지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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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9. 18.

[책 리뷰] 역사에 정통한 문학적 상상력이 맺은 결실 ~ 제갈공명(진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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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정통한 문학적 상상력이 맺은 결실

Original Title: 諸葛孔明 by 陳舜臣
공명은 자신의 지향과 유비의 지향이 거의 같은 방향에 있지만 다소 다른 점이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한나라의 부흥에 공명은 그다지 열렬하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천하 통일’이었다. 천하 인민의 평화를 위해서 통일이 요구된다면 천하를 통일하는 자가 유씨劉氏의 황통이 아니라도 도리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코 조조가 되어서는 안되었다. (『제갈공명』, p406)

역사소설 같지 않은 역사소설?

광활한 중국을 무대로 한 무협소설의 대가(大家)로 김용(金庸)이 있다면, 역시 같은 무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의 대가에는 진순신(陳舜臣)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역사소설 같지 않은 역사소설 『제갈공명(諸葛孔明)』은 당대 최고의 중국역사문학가로 평가받는 진순신의 명성에 과히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소설 『제갈공명』을 ‘역사소설 같지 않은 역사소설’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첫째,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와는 달리 철저한 고증과 참조할 수 있는 모든 사료를 기반으로 해서 빚어진 작품이니만큼 역사를 읽는 진중한 맛이 있으면서도, 둘째, 사료로는 채울 수 없는 이 빠진 듯한 공백들을 매끄럽게 메운 진순신의 풍부한 문학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즉, 역사소설에 평균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고증의 깊이, 혹은 얼마나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게 서술했느냐는 보편적 잣대를 훌쩍 뛰어넘으면서도 소설과 책 읽기의 재미를 잃지 않는 고품격 역사소설이라는 말이다.

보통 역사소설은 역사에 충실하다 보면 이야기의 흐름이 딱딱해지기 쉽고, 반대로 허구에 충실하다 보면 진중한 맛이 떨어지기 십상인데, 앞서 말한 대로 진순신의 역사소설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읽기 쉬운 소설을 통해 역사를 이해하고 싶은 호기심 많은 독자에게도, 역사와는 상관없이 단순히 재밌는 책을 읽으면서 지루한 시간을 이겨내고 싶은 독자에게도 고루 호소할 수 있는 작품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모든 것 즉, 진순신의 소설이 역사에 충실하면서도 소설적 창작성과 개연성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이유로는 (물론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진순신의 문학적 상상력 자체가 역사에 정통한 학문적 토양 위에서 피어올랐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하기에 역사소설을 쓰는 작가라면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빈약한 사료와 시대적 간극이라는 고충을 유연하게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한국에 소개된 진순신의 작품은 비단 『제갈공명』뿐만 아니다. 무수히 많은 그중 전자도서관을 통해 무료로 볼 수 있는 책이 하나 있다. 『열국지』, 『초한지』, 『삼국지』, 『사기』를 한 번에 엮은 동양 최대의 역사서인 『십팔사략(十八史略)』을 방대한 역사소설로 재구성한 『소설 십팔사략』이라는 작품이다. 무협지처럼 긴 작품(8권)이라 선뜻 손이 가지는 않지만, 날을 잡아 한 번쯤은 꼭 읽어봐야 할 작품이 아닌가 싶다.

제갈량이 ‘천하통일’로 얻고자 했던 것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제갈량(諸葛亮)을 뛰어난 군사 전략가로 소개하고 있다. 물론 이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제갈량은 군사 전략가로서의 재능만큼이나 내정, 즉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에도 밝았는데, 진순신의 소설은 이러한 점을 분명히 밝히려고 했던 것 같다. 만약 제갈량의 평범함을 뛰어넘는 치정 능력이 없었다면, 천하삼분(天下三分)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천하삼분이 가능해지려면 촉나라는 군사력으로나 경제력으로나 최소한 오나라에 맞먹는 능력을 갖추어야 했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이가 바로 제갈공명이다. ─ 유비(劉備) 사후 벌어지는 ─ 제갈량의 1차 북벌 실패, 그리고 이후 4차까지 무리하게 강행된 북벌, 그뿐만 아니라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운명을 다했음에도 이후 무려 30년 동안이나 촉나라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 역시 제갈량이 내정을 튼실하게 쌓아 올렸기에 가능했다. 비록 제갈량의 꿈이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자신의 이상을 향해 충절 한 톨 잃지 않고 머리카락 한 올까지 기꺼이 불태웠다는 점에서,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는 칭송받아 마땅한 위인 중의 위인이다.

그렇다면, 진순신이 소설을 통해 그려내는 제갈량의 이상은 무엇일까? 소설에서 제갈량은 유비 진영에 합류하기 전, 그러니까 양양 근처 융중에서 친구 서서(徐庶), 최주평(崔州平) 등과 천하의 일을 담론할 때 종종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밝히는데, 그것은 스스로 군주가 되어 천하를 평정하는 것보다는 제나라 환공(桓公)을 보좌하면서 나라를 초월한 단결과 일체감을 일궈낸 관중(管仲)을 본받고 싶어 했다. 난세에 태어난 제갈량은 고통받는 천하의 인민을 위해 자신의 재능을 받치고 싶었고, 관중이 환공을 보좌하듯 유비를 섬겼다. 그는 유비가 찾아오기 전부터 이미 이러한 포부를 품고 있었으니, 그 포부를 위해 제갈량이 유비를 선택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 즉, 제갈량은 천하 통일의 대업을 달성해서 전란으로 끊임없이 고통받는 인민을 위무하고 인민에게 평화를 선물하고 싶었다. 그래서 제갈량이 섬길 군주는 꼭 유비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천하를 통일할 자격을 갖춘 영웅이라면 제갈량은 누구라도 섬길 생각이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조조를 선택하지 않고, 유비를 선택했다. 만약 제갈량이 조조를 선택했다면, 그의 능력은 지기인 서서뿐만 아니라 조조 밑에 있던 순유, 순욱, 곽가, 가후 등 내로라하는 책사들의 능력과 시너지 효과를 발휘해 조조에게 엄청난 경쟁력을 가져다줬을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위나라의 천하 통일은 더욱더 빨리 이루어졌으리라.

조조가 아닌 유비를 선택한 제갈량

제갈량 역시 조조(曹操)가 걸출한 위인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어렸을 때 겪은 단 하나의 사건이 제갈량의 신념을 굳힌다. 그것은 조조 같은 사람은 천하를 통일할 자격이 없다는, 제갈량이 죽을 때까지 고수하게 될 신념이었다. 14세 때 고향을 떠난 제갈량은 숙부를 따라 양양으로 향했는데, 그때 일행은 하비를 지나가면서 조조의 만행이 나은 참담한 결과와 마주치게 된다. 조조는 아버지 복수를 위해 서주를 토벌했는데, 복수심에 눈이 먼 나머지 복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백성까지 잔혹하게 학살하고 마을을 깡그리 불태웠다. 제갈량은 아버지를 위해 복수하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아버지의 죽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백성까지 도륙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이 일은 이후 제갈량의 마음속에 선명하게 각인되면서 조조를 생각할 때마다 떠올리게 된다. 제갈량의 생각으로는 만약 조조가 천하를 통일하게 된다면, 제2의 시황제가 되어 천하 인민을 핍박할 것이 틀림없었다. 실상은 제갈량의 걱정과는 꽤 달랐지만 말이다.

제갈량이라고 유비의 모든 점이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유비가 유표가 지배하는 형중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을 때, 제갈량은 유비에게 이미 인심을 잃은 유표를 치고 형주를 차지하라고 권한다. 유비도 제갈량이 말하고자 하는 대의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오갈 데 없는 어려운 처지였을 때 은혜를 입은 유비로서는 차마 유표를 배신할 수 없었다. 제갈량은 사사로운 의리와 정에 연연하는 유비가 못마땅했지만, 한편으론 그런 점에 매료되어 유비를 선택했다. 유비에게는 조조에게 없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덕’과 ‘정’이다. 이 두 미덕은 난세에는 군주가 과감한 결단력을 내려야 할 때 장애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천하가 통일되고 안정되었을 때는 군주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미덕이기도 하다. 나머지 유비의 부족한 점은 제갈량 자신이 보충하면 될 터였다. 제갈량은 그렇게 미래까지 생각하고 끝까지 유비를 따랐던 것이리라. 유비의 따뜻한 미덕과 제갈량의 냉철한 지성이 조화를 이룬다면 천하 통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천하삼분으로 잠시나마 안정을 구할 수는 있을 터였다. 제갈량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제갈량은 그것을 이루어냈다.

여전히 ‘제갈량’을 읽어야 하는 이유

천하의 제갈량이라도 빈틈이나 실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수많은 장점과 뛰어난 능력, 여기에 성인과 비교할 수 있는 청렴한 인품까지 갖춘 그였지만, 일면 그도 미완성의 사람이었다. 그는 생각보다 많은 전투에서 패했다. 하지만, 패배의 책임만큼은 절대 회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 책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만천하에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질책할 정도로 원대한 포부만큼이나 보기 드문 큰 그릇을 지닌 인물이다. 동료나 부하로부터의 직간도 달게 받았다. 한마디로 나라에 충성하는 데 필요한 미덕과 능력을 고루 갖춘 비범한 인재 중의 인재였다. 그는 나라나 군주에게 이롭게 충성하는 데 인재를 천거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런 그가 인재를 활용하는 가장 적극적 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 인사 배치를 소홀하게 여겼을 리는 없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제갈량의 큰 실패 두 가지가 바로 인사 배치의 실패에서 비롯되었다.

제갈량은 관우(關羽)가 형주에서 오나라 세력과 대치하고 있을 때, 아랫사람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관우가 사대부나 윗사람에게는 까다롭다는 성격을 고려하지 않고 강릉 태수로 미방(糜芳)을 임명했다. 가뜩이나 평소에 사이가 안 좋았던 두 사람이었기에 이러한 인사 배치는 사전부터 불안한 요소가 가득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관우가 미방으로부터 군량 보급을 거절당하자 손권의 영토인 상관(湘關)의 군량을 털게 되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관우는 죽음을 맞이한다. 이로부터 유비 세력에 엄청난 피해를 안겨준 이릉 전투가 발생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또한, 제갈량은 마속에 대해 “말이 실제보다 과하오. 크게 쓸 인물이 아니오”라는 유비의 유지가 있었음에도 1차 북벌 때 마속의 능력을 과대평가했다가 가정 전투에서 낭패를 본다. 동료의 만류에도 제갈량은 법에 따라 마속을 처형하고, 이로부터 신하를 법대로 처단하여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뜻의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는 사자성어가 유래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야기는 인사 배치에서 개개인의 능력만을 고려할 것이 아니라 각각의 인물들이 가진 인품이나 성격,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발생할 수 있는 인물들 사이의 마찰이나 경쟁, 대립 구도도 사전에 반드시 고려해야 할 요소임을 시사한다. 그런 점 때문에 제갈량을 다룬 이야기가 인사 배치의 중요성이 주목받는 현대의 기업 • 국가 경영에서 반드시 읽히는 전략서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은 제갈량의 티끌 하나 없는 깨끗한 인품과 사심 하나 없는 청명한 이상이지 않을까 싶다. 더럽고 야비한 수단으로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쌓는 일이 비일비재한 요즘 같은 세상에서 앞서 말한 제갈량의 공명정대한 미덕을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아직 제갈량을 읽는다는 것은 시궁창 속에 살면서도 깨끗함의 미덕을 잃지 않으려는 무의식적인 발악이 우리의 의식과 양심 속에 희미하게나마 존재한다는 방증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제갈량’을 읽고 무엇을 느낄 것인가?

어떻게 보면 제갈량은 다정다감한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사람을 마냥 무시한다거나,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 데면데면하게 굴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예의범절과 사리에 밝았지만, 언제나 대의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중요한 자리에 있었기에 사사로운 정에 연연할 수가 없었다. 아니 연연해서는 안 되었다. 그런 사람은 유비 한 명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그것을 위해 기꺼이 소수를 희생시킬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한다는 것은 말하기는 쉽지만, 막상 그 소수를 앞에 두고 행동으로 옮기기는 절대 쉽지 않다. 머리는 행동으로 옮기라고 명령하지만, 가슴이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다. 이런 감정에 연연하여 차일피일 미루다 보면 응당 기회는 놓칠 수밖에 없다. 유비가 유표의 손에서 차마 형주를 빼앗지 못해 천하삼분의 시기가 늦어진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인간으로서 응당 품을 수밖에 없는 감정조차 절제할 정도로 제갈량은 냉철하고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이자 확고한 신념에서 비롯하는 과감한 결단력의 소유자였다고밖에 볼 수 없다.

하지만, 공명은 자신의 부족한 점을 유비의 따뜻한 미덕을 통해 보완하고 싶었다. 냉철한 공명과 따뜻한 유비로 탄생한 중탕의 섭리는 전란으로 친지와 가족의 잇따른 죽음을 겪어야만 했던 인민의 분노한 마음을 식히면서도, 전란으로 삶의 희망을 잃은 인민들의 마음을 데워줄 것이었다. 천하 인민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고통을 위로하고 싶었던 제갈량의 그 절실함과 애통함이 진순신의 작품을 읽는 내내 내 마음을 휘감았다. 심금을 울렸다. 어느새 내 두 눈은 살며시 배어 나온 눈물로 침침해져 있었다. 흐릿해져 있었다. 감개가 무량했다. 아득한 옛일이 나의 마음을 사정없이 요동시키고 있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나는 읽으면서 이렇게 느꼈지만, 분명히 다른 누군가는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당연히 다르게 느껴져야 하고 그래야 좋은 작품, 좋은 책, 좋은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생각, 느낌, 감명을 주는 책은 삼류 소설이나, 아니면 특정 지식을 주입하는 확실한 목적의식 하나로 집필된 교과서나 가전제품 설명서, 자격증 참고서적 같은 책에서나 경험할 수 있다. 진순신의 소설 『제갈공명』은 역사이기에 앞서 한 편의 문학이다. 그러하기에 누구에게나 다르게 읽힐 여지가 충분하고 또한 그러해야 한다. 자, 당신은 제갈량에게서 무엇을 듣고 싶은가? 아니면 제갈량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이 책은 가상 인공지능 음성 비서 '샤오아이(XiaoAi)'처럼 부족한 것은 부족한 대로, 적절한 것은 적절한 대로, 충분한 것은 충분한 대로 당신에게 제갈량을 이야기해 줄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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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9. 11.

[책 리뷰] 에로틱한 수면제 ~ 규방철학(사드)

La Philosophie dans le boudoir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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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틱한 수면제

Original Title: La philosophie dans le boudoir by Marquis de Sade
으제니: 오세요, 엄마, 이리 와, 내가 당신 남편이 되어줄게. 당신 남편 것보다 좀 더 굵지 않아?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자 들어간다……. 아! 소리를 지르네, 엄마, 소리를 질러, 당신 딸과 하면서!……. 돌망세, 당신이 나에게 들어오는구나!……. 그러니 나는 지금 동시에 근친상간에, 불륜에, 남색까지 겸한 것이 되는군. 이 모든 것이 바로 오늘 처녀를 잃은 여자에게 마련된 것이라!……. 친구들, 대단한 진보가 아닌가요. (『규방철학』, p285)

사드 명성에 걸맞은 발칙한 ‘교육’

담하게도 사드(Marquis de Sade)는 어머니는 딸에게 이 책을 읽도록 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사드의 말대로라면 『규방철학: 쥐스틴을 지은 작가의 유고작(La Philosophie dans le boudoir)』은 일종의 교육지침서인 셈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고상한 ‘교육’하고는 차원이 완전히 다른 지침서이니만큼 만약 이 책을 읽는 독자 (앞으로 이 책을 읽을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있을지도 심히 의심스럽지만) 중 한창 꽃봉오리를 피우려는 어여쁜 딸을 둔 어머니가 있다면 절대적으로 오해 없기를 바란다. 무슨 이야기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이 책을 온전히 섭렵한 처녀에게 기대할 수 있는 교육의 성과 중 더도 말고 딱 하나만 언급하겠다. 주인공 으제니는 매독 환자가 엄마를 강간하게 하여 매독균을 은밀한 그곳으로 주입한 다음 혹시라도 매독균이 유실될까 봐 앞과 뒷구멍을 실로 꿰맨다. 이 얼마나 괴상한 교육의 발칙한 결과인가? 또한, 이러한 책을 읽는 나는 이 얼마나 후안무치한 사람인가?

사정이 이러하니 당신 모녀가 광적인 사드 후작 추종자가 아니라면 순진하고 연약하고 부드러운 딸을 위해 『규방철학』을 애써 준비하는 후회막급인 일은 생각지도 마시라. 그렇게 말하는 나는 왜 이 책을 당돌하게 찾았는가? 감옥에 갇힌 사드가 정염(情炎)이 이끄는 대로 이 책을 썼다면, 호기심에 갇힌 나는 정념(情念)이 이끄는 대로 이 책을 손에 쥐었을 뿐이다. ‘손에 쥐었다’라고 말한 이유는 도서관에서 이 책의 표지를 만지작거릴 때까지만 해도 이 책을 대출할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때는 이미 사드와 관련된 책을 두 권이나 읽었던 상태였고, 그 덕분에 ‘사드의 책이라고 하더라도 그 악명만큼 별로 대단한 것도 없구나!’ 하는 판단이 지배적으로 자리 잡은 상태였다. 그래도 사드의 나머지 다른 책은 어떤가 하는 궁금증은 끝내 견뎌낼 수 없었던 것 같다. 어느새 이 책이 내 손에 슬그머니 쥐어져 있었던 것을 보면 말이다.

사실 큰 기대를 걸고 책장을 넘긴 『미덕의 불운(Justine, Les Infortunes de la Vertu)』이 불순한 어른을 위한 불경(不經) 동화 정도로만 여겨졌기에 사드 문학에 대한 실망감이 상당했다. 사드 문학은 그냥 이 정도에서 손을 떼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도서관에 진열된 책장에 기대어선 채 몇 페이지 훌훌 넘기면서 대충 살펴보니 이것이 웬걸! 『규방철학』은 『미덕의 불운』처럼 밋밋하지가 않았다. 누가 봐도 방탕아로서 사드가 떨친 악명을 확연하게 떠올리게 하는 난잡한 장면들이, 아직 녹이 슬지 않은 한 남자로서 거절할 수 없는, 색정을 다룬 원색적인 삼류소설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화려한 난교파티의 기괴한 연출이 수두룩했다. 이러하니 아직 남자인 나로서는 감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방탕아들이 감히 철학을 논하다!

미롭게도 『규방철학』은 연극적 특색을 띠는데, 그 이유에는 사드가 일생에 걸쳐 연극을 좋아했었다는 기질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미덕의 불운(쥐스틴)』 역시 언제라도 연극으로 연출할 수 있도록 특별히 배려된 작품으로 보인다. 감옥에 가기 전 사드는 ‘사회극단’을 조직하고 직접 연출을 하거나 배우로서 무대에 오르기도 했으며, 그가 말년을 보낸 ‘샤랑통(Charenton)’ 요양소에서도 연극을 향한 식지 않는 열정을 보여 주었다. 사드는 훗날 집단정신 치료요법으로 발전하는 ‘사이코드라마’를 창조하여 광인들의 광연(狂演)을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이 소일거리를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유일한 낙으로 삼았다. 하지만, ─ 읽으면 알겠지만 ─ 이 작품을 실제로 연극으로 공연하기는 (만약 실현된다면 대박이다!) 무척이나 어려울 것 같다. 쾌락을 향한 끝없는 추구라는 나름의 철학을 기반으로 하는 등장인물들의 행위는 보통의 남녀가 행하는 일반적인 성교하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근친상간, 남색, 동성애, 비역질, 용두질, 강간, 윤간 등 체면이나 겉치레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기겁할만한 변태적 욕망이 마치 서커스를 관람하는 것처럼 독자의 두 눈앞에서 적나라하게, 그리고 보란 듯이 펼쳐진다. 이것도 부족해 영아살해와 근친살해까지 부추기니 가히 사드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단지 이 정도라면 좀 과한 음란소설로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의 대화는 삼류소설처럼 결코 저속하거나 천박하거나 상스럽지 않다. 그것보다 진지하다 못해 엄숙하게까지 느껴지는 철학적 풍모를 띄우고 있으니 쉽사리 비웃을 수도 없다. 우리가 보기에는 음란한 행위로써 쾌락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즉 단순명료해 보이는 그 모든 것들이, 실제 그것에 임하는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철학을 토대로 이론을 논하고 가설을 세운 다음 그것을 현실로 체현함으로써 증명하는 하나의 시험장이다.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난교 체험에서는 어떻게 자세를 취해야 할지 등에 대해 가전제품 설명서처럼 자세하게 설명하기도 한다. 방탕처럼 보이지만, 엄격한 질서와 규칙을 기반에 입각한 쾌락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사드 문학은 성인을 대상으로 한 보통의 삼류소설과는 절대적으로 구분된다.

‘불멸의 에로리스트’라는 평판이 무색하지는 않은 쾌락 추구

이 존재하지 않으면 더는 신성모독을 즐길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신의 부재를 슬퍼했던 사드에게 종교, 덕, 도덕 등 인위적인 모든 것은 거부하고 위반하며 왜곡하고 부정해야 할 대상이다. 그 이유는 진정한 자연의 질서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드가 보는 자연의 질서란 무엇인가. 간단하게 말해 그것은 약육강식과 다름없다. 달리 말해 파괴와 죽음에 기초한 평형 상태다. 살인 역시 죄가 될 수 없다. 살인은 그 형태만을 바꾸어 자연으로 다시 되돌려줌으로써 자연이 새로운 창조를 일구게끔 이바지하는, 즉 자연의 평형 상태를 유지하는 든든한 밑거름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섭리인 파괴를 인위적으로 구속하는 모든 형태의 선과 덕, 도덕, 종교, 법은 자연의 흐름에 거스르는 것이다. 반면에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끌리기 마련인, “파괴, 악행, 압제 같은 것이야말로 자연이 인간의 가슴에 새겨 넣은 가장 중요한 성향들이다. 결국, 자연은 평형을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우리 가슴 속에 악행에 대한 취향을 새겨 넣은 셈이다.” (장 폴 브리겔리(Jean-Paul Brighelli)의 『불멸의 에로티스트 사드(Sade)』 p482).

소위 기벽이라 불리는 것, 쾌락을 추구하려는 욕망 역시 자연이 불어넣어 준 것이므로 거스르면 안 될뿐더러 만약 이에 저항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사람이 범할 수 있는 유일한 죄다. 고로 정념의 목소리는 자연의 목소리나 다름없으며, 불타오르는 정념을 충족시키고자 행하는 모든 행위는 정당하다. 등장인물이 실천으로 옮기는 모든 기벽, 성벽, 변덕은 자연이 준 것이므로 이것을 거스르지 않는 이상 자연을 위반할 일도 없다.

대충 이러한 것이 『규방철학』에서 지루하게 반복되는 사드의 자연 철학이다. 온갖 기행을 자연의 이름으로 합리화시키며 쾌락 철학을 구축하려는 사드에겐 욕망이 곧 법이고 쾌락이 도덕이다. 안하무인 격이지만, 모든 구속을 허락하지 않는 경이로운 쾌락의 자유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불멸의 에로리스트’라는 평판이 무색하지는 않다. 보는 이에 따라서 ‘미친’, ‘쓰레기’ 같은, 혹은 점잖게 말해 ‘반사회적인’ 소설이라고 불려도 전혀 손색이 없는 작품이지만, 논리적이고 일관적인 철학을 바탕으로 광기를 발산했다는 점에서 매우 독보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끝으로 불경에 대한 욕망과 잔혹한 취향으로 간간이 독자를 흥분시키기도 하지만, 그렇게 약발이 긴 편은 아니다. 무심하게도 반복되는 설교는 나의 눈꺼풀을 짓누르기 일쑤다. 덕분에 내겐 에로틱하고 관능적이면서도 동시에 강력한 수면제로도 작용하는, 그래서 사드의 기벽만큼이나 인상적인 ‘수면용’ 책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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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9. 8.

[책 리뷰] 그들도 우리처럼 단지 ‘발악’했을 뿐이다 ~ 문명소사(이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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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도 우리처럼 단지 ‘발악’했을 뿐이다

Original Title: 文明小史 by 李寶嘉
“우리 중국인에겐 남의 잘못을 꼬집는 특출한 재능이 있지. 그건 마치 거울과 같아서 눈꺼풀 위의 흉터가 어떤 모양인지, 얼굴에는 어떤 자국이 있는지 거의 한 치의 차이도 없으니, 과거를 숨길 생각일랑 아예 단념해야겠지요. 그런데 자기 자신을 말할 때는 거울로 되비춰 보려 하질 않소이다. 그러니 자신의 얼굴에 얼마나 많은 자국과 흉터가 있는지 전혀 모르지요! 황 선배는 제가 말하지 않더라도, 부자들이나 중당(中堂) 또는 권세 있는 상서倘書)를 만나면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으며 비위를 맞춥니다. ….”(『문명소사(文明小史)』, p430)

갈팡질팡하는 그들을 보고 웃어야 하나?

책에는 대략 청일전쟁 이후부터 러일전쟁 초기까지 중국의 시대상이 총 60회에 이르는 일화들로 잘게 쪼개져 담겨 있다. 겉보기에는 잘지만 속은 야무지고, 야무지지만 지나치게 딱딱하지 않기에 독자는 술술 내리 읽히는 일화들 속에서 어렵지 않게 중국 근대화의 초상을 발견하게 된다. 『문명소사(文明小史)(이보가(李寶嘉))』라는 책 제목이 시사하듯, 그 초상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유명한 역사적 인물들이 아니라 작은 역사, 여태껏 역사의 주필에서 소외되고 외면받아온 우리 같은 작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휩쓸리게 된 ‘근대화’라는 격랑 속에서 거듭되는 부침을 겪는가 하면, 때론 삶의 전통적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생존 위기에도 직면한다. 그들은 본의 아니게 인생에서 커다란 도전이라 할 수 있는 ‘시대적 변화’와 맞닥트린다. 약삭빠른 누군가는 재빨리 유신(維新)파임을 자처하며 실속을 챙기고, 둔감한 누군가는 새로운 것을 대충 흉내 내기에도 진땀을 흘린다. 또 다른 고지식한 누군가는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기에 급급한 나머지 역성을 들며 변화에 반대한다.

이러한 사정은 비단 그때뿐만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다. 과거 한때 변화에 앞장선 덕분에 지금은 성공한 사람일지라도 새로운 변화에 직면하면, 자신이 이룬 것을 지키고자 변화에 반대하기 일쑤다. 하지만, 혈기 넘치고 아직 이룬 것이 없어 입신양명의 꿈을 향해 내달리는 젊은이들은 누구보다도 변화에 앞장서며 새로운 기회를 갈구한다. 누군가에게 변화는 패배와 좌절을 예고하는 불행의 신호탄이지만, 누군가에게 변화는 성공을 속삭이는 듯한 달콤한 기회다. 변화가 몰고 오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이런 상황은 이보가가 살았던 시대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왜냐하면, 산업혁명 이후 변화는 언제나 진행형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문명소사』에서 변화의 물살에 휩쓸려 아등바등하는 민초들은 결코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웃어넘기자니 꼭 나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아 기분이 찜찜하고, 진지하게 묵상하자니 별것도 아닌 일에 괜히 똥폼 잡는 것 같아 별꼴이다.

지금 우리는 이보가가 살았던 시대의 흐름이나 결과를 손바닥 보듯 훤히 알고 있다. 덕분에 우리는 『문명소사』에 담긴 일화들을 여유롭게 읽어 내려갈 수 있고, 때로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라고 경멸하며 웃어넘길 수도 있다. 무심한 누군가는 박장대소한다. 하지만, 태풍의 눈에 있는 사람이 태풍의 실제 위력을 감지하기 어렵듯, 매일매일 ─ 크든 작든 ─ 변화의 한복판을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그 변화의 성질을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다. 생각해 봐라.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같은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인조차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한 날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일기장에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一 오후에 수영강습”이라고 적었다. 이 유명한 일화는 인류 최초의 세계대전이라는 대격변을 바로 코앞에 두고도 한 사람이 그 의미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기 어렵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려준다. 이것은 미래 세대가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사건일지라도, 그것이 실제로 발생해 나타나는 시기에 사는 우리는 그 중요성을 인식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가 이러하니 현재 우리가 옳다고 판단하고 이것이 최선이라고 여기면서 행동한 모든 것들, 이 모든 것들이 미래 세대에게는 한낱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문명소사』에 등장하는 어쭙잖은 지식인과 고리타분한 관료들이 펼치는 난센스를 보며 실소를 터트리는 경솔한 상황과 진배없다.

단지 살아가고자 발악했던 것일 뿐이다!

리에게 ─ 이미 여러 역사책 등으로 정연하고 깔끔하게 정리된 ─ ‘근대화’라는 격변을 살아가게 된 중국인들이 유신의 언저리를 맴돌면서 펼치는 얼치기 근대화 담론은 포복절도할 지경까지는 아니더라도 피식 멋쩍은 미소를 짓게 한다. 하지만, 그러한 행태가 나름의 살길을 모색하기 위한 방도를 마련하고자 하는 삶에 대한 애착과 그 절실함에서 나왔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잠시 그들을 비웃었던 나를 꾸짖지 않을 수가 없다. 오만하게도 작금의 잣대로 그들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삶의 굴레와 우여곡절을 제멋대로 재단한 자신의 얄팍한 지성이 부끄럽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현재의 어주리없는 지식으로 그들의 행태와 양식이 얼토당토않다며 비웃을 수 있지만, 그들에겐 우리에게 한낱 비웃음거리로만 보였던 그 모든 것들이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변화의 물살 앞에서 각자 나름의 방법으로서의 대처이자, 하루살이처럼 위태로운 삶을 근근이 연명하고자 구두에 밟힌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몸부림치던 발악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매일매일 치열한 생존 경쟁에 시달리며 발악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변화의 물살 앞에 사람은 나약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고, 그 나약함은 훗날 촌극으로 기록됨을 이보가는 수고스럽게도 『문명소사』의 존재를 통해 가르치는 것이다. 당신이 이 책을 읽고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얼치기 지식인들을 비웃고, 손가락질하든 내 알 바 아니지만, 우리의 삶을 속속들이 파헤쳐보면 『문명소사』의 주류를 이루는 얼치기 지식인이나 무능한 관리처럼 아는 체하고, 잘난 체하고, 자신보다 못 배우고 없는 사람을 업신여기는, 이런 주책바가지 같았던 일화들이 당신의 인생에서 한 번도 없었다고는, 양심을 엿 바꿔먹은 철면피가 아니고서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처럼 우리도 달리 어찌할 수 없지 않은가?

쩌면, 외국어에 능숙할 정도로 유신에 열성이었다가 그 열성의 무분별함 때문에 도피자 신세로 전락한 왕제천의 깨달음처럼 유신이니 수구니 하는 것은 모두 거짓부렁인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유신이 이득이 되면 유신을 따르고, 수구가 이득이 되면 수구를 따르는 것이 변화무쌍한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가 쥐어짜 낼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인지도 모른다. 아주 좋게 풀어보면, 시세와 상황에 따라 선택과 처세를 달리하고,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중용(中庸)과 비슷하다. 그런 점에서 이보가는 전면적인 개혁이나 혁명을 주창하기보다는 차근차근 내실을 다져가며 현실에 맞는 유신을 점진적으로 받아들이는 편을 선호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고지식한 관리와 얼치기 지식인들이 시도 때도 없이 질질 싸대는 무능, 부패, 부조리를 너그럽게 표현하자면 풍자와 해학으로, 솔직하게 말하자면 신랄하게 꼬집은 것은 다름 아니라 현재의 폐단을 수습함으로써 개혁을 받아들일 발판을 마련하자는 뜻이다. 그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협잡꾼들이 융성하는 와중에서도 단체를 결성하여 힘을 집중시키는 것, 국가 통화를 통폐합하여 개혁의 경제적 기반을 다질 수 있게 도와주는 정부 은행 설립, 근대적인 입법 제정, 근대적인 여성 학교 설립 등 중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한마디로 그는 중도적인 개혁가였다.

『문명소사』에 등장하는 온갖 군상들처럼 아무것도 모르면서 유신을 자처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듯, 작금에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XX임을 자처하는 부류들이 넘쳐난다. 아마 이런 사람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어디에나 존재하는 기생충이나 박쥐 같은 존재들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 나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그뿐만 아니라 이보가가 살았던 그 당시의 세태와 다를 바 없이 지금도 손에 큰돈이나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을 우리는 속으로는, 그리고 그들이 안 보는 곳에서는 양심을 속이고 얻은 것이라고 욕하고 손가락질하면서도, 그들 앞에서는 굽신거리고 갖은 알랑방귀를 뀌어가며 그들을 따른다. 떡고물 하나라도 더 받아먹으려고 말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이보가가 현재의 우리를 보고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에 든 것이 없는 속 빈 강정 같다고 실소를 터트린다고 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분명히 재밌고 가볍게 책장을 넘길 수 있는 책이지만, 앞서 말한 이런저런 이유로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을 한낱 촌극으로만 여긴다는 것은 근대화의 부침 속에서 유명을 달리했던 모든 조상을 모독하는 것이 될 테니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물어보자면, 그들이 달리 어찌할 수 있었겠는가? 또한, 당신이 지금 달리 어찌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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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9. 4.

[책 리뷰] 불순한 어른을 위한 불경(不經) 동화 ~ 미덕의 불운(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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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순한 어른을 위한 불경(不經) 동화

Original Title: Les infortunes de la vertu by Marquis de Sade

모두 미덕을 지키는 세상이라면 나 역시 당신에게 미덕을 권장하겠어요. 그러나 온통 썩어 빠진 세상이라면 오직 악덕 이외의 다른 것은 권하지 않겠어요. (『미덕의 불운』, p187)

당신은 항상 나에게 섭리를 역설하지만, 그 섭리가 질서를 좋아하며 나아가 미덕을 사랑한다고 누가 증명해 줘요? (『미덕의 불운』, p189)

무엇이 나를 ‘사드’에게로 인도했나?

국, 읽고야 말았다. 나는 전문연구가가 아니면서 사드를 읽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로부터 무사히 헤어나올 수가 없다는 아니 드 브륑(Annie Le Brun)의 경고도 무시한 채, 건방지고 오만불손하게도 사드의 책을 읽고야 말았다. 솔직히 말해 미친 듯이 솟구치는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이미 녹슬 대로 녹이 슨 관능의 발로도 아니었고, 이미 식을 대로 식은 정염(情炎)의 불똥도 아니었다. 뼈가 사무치도록 쓸쓸한 나의 삶에서 오랫동안 잊혔던 쾌락을 어떻게든 되찾고자 하는 욕구불만도, 그 욕구불만이 드리운 그늘진 마음에서 비롯된 심연의 뭔가는 더더욱 아니었다. 사드를 읽고 싶다는 무엇으로도 형용하기 어려운 욕구를 굳이 하나의 단어로 꾸역꾸역 압축한다면, 그 단어는 다름 아닌 ‘파괴’다. 이 빌어먹을 세상을, 이 미친 세상을, 이 역겹도록 부조리한 세상을 맷돌에 간 콩처럼 가루가 되도록 으깨고 부수는 파괴적인 글쓰기를 몸서리치도록 느껴보고 싶었다. 느껴보고 싶다.

정당한 근거도, 증명된 실체도 없이 오랫동안 세상을 기만한 미덕 속에 숨은 위선, 가식, 허영을 모조리 파괴하는 짜릿함과 파괴 후 남은 영광의 잿더미 위에 다시 돋아날 찬연한 희망에 예속된다. 그렇게 해서라도 어리석었던 내 삶이 필연적으로 잉태한 절망과 회한의 늪에서 벗어난다고 믿고 싶다. 벗어나고 싶다. 이 지긋지긋한 세상, 이 빌어먹을 세상, 이 막돼먹은 세상은 사회의 섭리를 거부했다는 이유만으로 사드를 감옥에 가둔 것처럼 세상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나를 절망과 무능, 권태 속에 가둬놓았다. 그래서 이 순간만큼은 나는 사드가 되고 싶다. 나도 세상을 사정없이 뒤엎고 섭리를 무참히 짓밟는 파괴적인 글쓰기로 통한의 외침을 터트리고 싶다.

그러나 주지하듯 나의 글쓰기는 무디다. 무디다 못해 엉성하다. 엉성하다 못해 유치하기까지 하다. 시퍼렇게 날이 선 글쓰기를 통해 모든 구속을 속속들이 파괴하는, 악마도 울고 갈 정도로 사악하고도 사악한 사드의 광기가 오늘만큼은 너무나도 부러울 따름이다. 신내림을 받듯 사드의 광기를 발톱 때만큼이라도 물려받고 싶어 발작이라도 일으킬 지경이다. 그래도 난 포기하지 않고 글을 쓴다. 그것이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삶의 생산적인 요소이자 단 하나의 위안이다. 그 방증으로 오늘도 노트북 자판을 무심히 두드리며 리뷰를 쓰는 나를 발견한다(비록 짧은 글이지만, 이렇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응어리진 뭔가를 토로하고 나면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이것이 바로 ‘치료적 글쓰기’의 진정한 효과다).

사드, 그는 진정 미덕의 불행만을 말하고자 했을까?

행하게도 오늘 나의 글쓰기의 대상으로 간택된 『미덕의 불운(Justine, Les Infortunes de la Vertu)』은 광기도 글쓰기를 통해 논리정연하게 발산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드(Marquis de Sade)가 그 논리적 광기의 시발점이자, 이후 작품들에서 펼쳐질 폭발적 글쓰기의 원류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19세기에 활동한 비평가이자 작가인 쥘 자냉(Jules Janin)이 사드가 감옥에서 미친 듯이 쓴 ─ 당시의 풍속으로는 너무나도 악마적인 ─ 이 책을 읽고 나서 심한 발작을 일으켰다는 실화가 심히 나의 호기심을 도발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현대인의 보편적 도덕성이 타락해서인지, 아니면 나의 도덕적 무감각이 유별난 것인지, 아니면 사전 지식(폴 브리겔리(Jean-Paul Brighelli)의 『불멸의 에로티스트 사드(Sade)』) 덕분인지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발작을 일으켜야 할 정도로 충격적이지는 않다. 누구의 지적대로 ‘지루한 반복’도 그렇게 심하지는 않다. ─ 이 책을 단지 성적 흥분제로 여기고 찾은 경박한 독자에게는 대단히 실망스러운 일이지만) 이후 작품인 『소돔의 120일(The 120 Days of Sodom)』이나 『쥘리에트(L'Histoire de Juliette, ou les Prospérités du vice)』에서 보여준 노골적이고 변태적이고 엽기적인 관능의 표현도 없다. 다만, 보편적인 감수성을 보유한 독자의 마음을 심란하고 불편하게 할 몹시도 불행하고 몹시도 불운한 가련한 처녀 쥐스띤느(쥐스틴)의 고통과 고난으로 가득한 여정만이 고해실의 신부처럼 덩그러니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미덕은 불행을 가져오고 악덕은 번영을 가져온다는 반사회적이고 대담무쌍한 통찰의 중심이자, 세상에 만연한 온갖 부조리와 부당함을 까발리고자 사드가 날린 직격탄이다. 미덕의 불합리를 폭로한 대가로 사드는 죽을 때까지 광인 취급을 받았으며, 샤랑통이라는 감호소(수용소)에서 그 광기 어린 영혼을 잠재움으로써 사드에 대한 유별난 사회적 관심에 합당한 죽음을 맞이했다.

사드에 대한 긍정적인 재평가는 1990년대로 들어와서야 실현된다. 그것은 그때까지 인류는 고지식하게도 현실과는 괴리된 미덕을 ─ 진심이든 마지 못해서든 ─ 꾸역꾸역 찬양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위태롭게나마 그럭저럭 유지되어 온 질서를 파괴할 것 같은 ‘미덕의 불합리’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인류는 사드에게 온갖 악담을 퍼부으며 역사적으로, 문학적으로 매장했다. 이런 사드의 작품이 현대에 들어와서 인정받는다는 것은 인류에게 있어 미덕이라는 것이 세상을 이해하고 경험하는 데 있어 절대적 진리가 될 수 없음을 뒤늦게나마 깨달았다는 뜻이다. 한편으로는 고전적인 미덕의 가치에 기반을 둔 이상주의의 포기이자,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기준이 적용된 미덕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다. 강요된 미덕이 실재적인 삶에 가하는 부당함을 통렬하게 고발한 사드는 ─ 본의 아닐지라도 ─ 마치 파괴야말로 진정한 창조의 힘이라는 것을 깨우쳐주듯 미덕의 완전한 파괴를 통해 새로운 미덕이 창조될 빌미를 제공한 셈이다. 한마디로 병을 주고 약을 준 셈인데, 물론 사드는 자신의 작품이 이렇게까지 해석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며, 나도 사드의 책을 이런 식으로 읽게 될 줄 역시 꿈에도 몰랐다(역시 꿈보다 해몽인가?). 미덕의 부정을 통해 새로운 미덕의 탄생을 은유하니 참으로 역설적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미덕의 화신인 쥐스띤느가 겪는 불행과 불운이 너무 충격적으로 다가온 나머지, 작품이 시작하는 곳에 사드가 애써 적어 넣은 다음과 같은 글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별로 없었나 보다.

최선을 다하여 미덕을 고수하는 착하고 마음씨 고운 여인을 짓누르는 숱한 불행과 또 한편 평생 동안 미덕을 경멸해 온 여인이 누리는 찬란한 행운을 동시에 묘사해야 된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 없이 잔혹한 일이다. 그러나 그 두 화폭에서 단 하나의 선이라도 태어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그림을 대중에게 제공한 행위를 구태여 나무랄 수 있겠는가? (『미덕의 불운』, p9)

미덕의 불행과 악덕의 번영이 역설적이게도 새로운 선(善)을 낳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 글은 사드가 출판 이후에 빗발치듯 쏟아질 비난에 대비해서 변명거리로 심어둔 것일까? 아니면 이 작품 저의에 담긴 사드의 진심일까? 이것이 순탄한 앞날을 위한 변명거리라면, 사드가 아직 세상의 눈치를 봐야 할 정도로 자신의 광기적 글쓰기에 온전히 휩싸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드의 진심이 담긴 글이라면, 당대, 그리고 사후 악덕의 화신으로 손가락질받아온 사드임을 고려해 볼 때 조금은 뜻밖의 일이다.

어른을 위한 불경스러운 동화

실 이 소설의 불경스러운 면은 이후 ─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 사드가 집필한 작품들에서 보여줄 방탕하고 변태적이고 사악하고 엽기적인 글쓰기에 비하면 약과다. 『불멸의 에로티스트 사드(Sade)』에 인용된 사드의 글 몇 문장만 살펴봐도, 자유분방한 글쓰기의 극치가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고도 남는다. 그것을 읽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끔찍스러운 고통을, 누군가에게는 이제껏 맛보지 못한 희열을 안겨줄 수도 있겠지만, 어찌 되었든 모두에게나 ─ 모욕적이든 신선하든 ─ 충격적인 경험일 것이라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다만, 무척이나 아쉬운 것은 사드 불경소설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미덕의 번영』과 『소돔의 120일』은 동네 도서관에 없다는 것! 그래도 훗날 기회가 되면 꼭 읽어야 할 것이다.

사드의 『미덕의 불운』은 마치 불순한 어른을 위한 암흑 동화 같은 기분으로 읽혔다. 분별없는 미덕의 유해함을 신랄하게 조롱하는 악인들의 방종스러운 궤변은 마치 작금에까지 소멸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악덕의 번영을 역설하는 것 같아 사뭇 통쾌하게까지 느껴진다. 바보스럽게 보일 절도록 미덕을 찬양하고 고집할수록 더더욱 가혹해지는 쥐스띤느의 불행과 고난, 그리고 그 비극적인 결말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발악해도 마치 땅바닥에 단단하게 고정된 나사못처럼 제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대인과 그들을 삼켜버린 불행의 굴레를 보는 것 같아 소름이 끼친다. 누렇게 시들어 죽어가는 덕 있는 사람들보다는 번영을 구가하는 새파란 악인들 측에 합세해야 할지, 아니면 쥐스띤느가 믿었던 것처럼 ─ 설령 그것이 거짓이더라도 ─ 사후 세계에서 받을 보상을 위안 삼아 현세의 불행과 고통을 인내해가며 끝끝내 미덕을 고집해야 할지는 오로지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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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6. 9.

[책 리뷰] ‘다양성의 혼재’ 속의 모호한 정체성 ~ 콩고의 판도라(알베르트 산체스 피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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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의 혼재’ 속의 모호한 정체성

Original Title: Pandora in the Congo by Albert Sánchez Piñol
내가 쓴 원고가 남의 이야기든 말든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마리 앙투아네트의 등껍데기가 자연물이 아니라 인공적인 물건이면 어떻다는 말인가.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남의 이야기를 썼다고 해서 내가 하찮은 글쟁이가 아닌 것처럼, 나무 껍데기를 썼다고 해서 하찮은 거북이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콩고의 판도라』, p459)

현대의 판도라 ‘인류’

피메테우스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던 판도라(Pandora)에게 무엇이 부족했던 것일까? 호기심을 못 참은 그녀는 제우스의 엄중한 경고도 무시한 채 제우스가 결혼선물로 준 상자를 열고 만다. 그 상자 안에는 욕심, 질투, 시기, 각종 질병 등 온갖 나쁜 것들이 가득 담겨 있었으며, 이것들은 판도라가 상자를 여는 순간 빠져나와 세상 곳곳으로 퍼졌다. 그로 말미암아 평화로웠던 세상은 금세 험악해졌다는, ‘판도라의 상자’라고 불리는 그리스 신화의 한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의 출처인 위키백과에는 판도라의 그 뒷이야기는 나와 있지 않지만, ─ 만약 그녀가 양심적인 사람이었다면 ─ 상자를 연 판도라도 자신 때문에 불행에 빠진 세상을 바라보며 예전 같은 행복한 삶을 마냥 누릴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는 있다. 이 이야기는 뜻밖의 재앙의 근원을 말하고자 할 때 종종 언급된다.

그렇다면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Albert Sanchez Pinol)의 소설 『콩고의 판도라(Pandora al Congo)』에서 ‘판도라’는 무엇을 의미할까?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판도라는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 정도로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린다. 그러나 그녀는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편으로는 제우스의 경고를 무시할 정도로 도를 넘어선 호기심을 참지 못한 채, 미지의 무언가를 추구하다가 재앙을 불러들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소설 속 ‘판도라’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판도라처럼 현실에 만족하거나 안주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탐욕과 이익을 추구하려는 인류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새로운 자원, 새로운 땅, 그리고 돈과 명성을 좇아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세력을 확장하려는 야심을 일각에서는 ‘모험 정신’, ‘개척 정신’으로 그럴싸하게 포장하거나, 혹은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려는 ‘도전 정신’으로 추켜세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식으로 제국주의가 시작되었으며, 또한 그런 식으로 서구 문명이 비서구 문명을 ─ 서구 문명의 논리와 이성으로 볼 때는 지극히도 합리적인 행동으로써 ─ 침탈했음을 익히 알고 있다. 소설 속 배경이 되기도 하는 20세기 전후에 만연했던 제국주의도 탐욕과 이익을 좇아 주변으로 무한히 확장하려는 인류 속성의 역사적 증거다.

서구 문명이 잉태한 악이 정당하게 활개 치는 그곳

설은 ‘인류’라는 현대의 판도라가 ‘콩고’라는 또 다른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을 때 찬란한 인류 문명과 냉혹한 이성 뒤에 감춰진 ‘악’이 소위 말하는 문명인을 흔히 말하는 야만인으로 어떻게, 어떤 식으로 서서히 탈바꿈시키는지를, 그리고 문명의 탈을 쓴 야만인이 자신들이 저지른 온갖 짓들에 문명의 이중 잣대를 들이대며 어떻게 합리화하는지를 액자 형식의 이야기를 통해 교묘하게 그려내고 있다.

서구 문명이 볼 때 ‘콩고’는 법, 도덕, 그리고 자신들 문명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다. 그러므로 제국주의의 판사는 그런 곳에서 어떤 짓을 저질러도 문책할 수 없다고 판결한다. 그것은 인류가 빚어낸 업적 중에서 가장 고결하고, 인류를 지혜와 사랑을 품은 지적생명체로서 빛나게 해주던, 그래서 많은 사람이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생명을 품은 ─ 인류의 존재를 위협하지 않는 ─ 모든 존재에게 두루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정의’와 ‘보편적 도덕성’을 깡그리 무시하는, 참으로 합리의 극치를 달리는 위대한 판결이다.

그럼으로써 서구 문명은 식민지에서의 야만적인 행위를 정당화하고, 동시에 현대적 문명이 자리 잡은 영역에서 적절한 탈출구를 찾지 못해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사회악’이 배출될 수 있는 합리적 공간을 제공한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문제처럼 식민지에서의 야만적 행위를 허용하였기에 ‘사회악’의 배출구로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로 ‘사회악’의 배출구가 필요해서 식민지에서의 야만적 행위를 허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콩고의 판도라’는 현대 문명의 모순과 부조리가 잉태한 더럽고 추한 인간쓰레기들의 집합소이자 현대 문명이 용납할 수 없는 그들의 변태적인 욕망과 탐욕을 해결하는 구역질 나는 변소인 것은 틀림없다.

‘다양성의 혼재’의 아쉬움을 달래고도 남는 기발한 이야기

『콩고의 판도라』는 소설 속에 또 다른 소설을 삽입하거나 스릴러, 판타지, 추리, 모험 등 다양한 장르가 공존하는 특이한 창작 기법을 구사하여 서구 문명에 대한 깊은 통찰을 시도한다. 하지만, 여러 장르의 혼합을 시도하려는 어딘지 모르게 혼란스러운 와중에 말로만 듣던 대필작가의 고단한 노예 생활, 1차 세계대전 전후의 영국과 유럽의 세태를 반영하려는 사실주의적인 풍자 요소, 문학의 예기치 못한 파괴적인 힘, 언론의 노골적인 상업성, 감동 앞에 힘없이 무너지는 진실과 그것이 대변하는 우매한 대중 등 서구 문명이 잉태한 다양한 문젯거리를 다루다 보니 어딘지 모르게 풍요로운 맛은 있지만, 똑 부러지게 하나를 파고드는 집요한 맛은 없다. 어딘지 모르게 우겨 넣어진 느낌이다. 여기에 대필작가로서 소설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주인공이 문학적 정체성을 찾아 나가는 성장 소설적인 요소에 주인공이 남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남의 여인을 짝사랑하는 애처로운 사연까지 가미되었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겠다. 특정한 장르에 머무르지 않으면서 여러 장르의 경계를 드나드는, 그래서 딱히 어떤 장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소설의 특징이라면 특징이겠지만,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 작품에 담아내려다 보니 이것도 저것도 아닌 소설이 되어 버린 느낌도 없지 않아 있다. 내가 보기엔 충실하게 상업성을 따르면서도 소소한 문학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 결과 어중간하게 붕 떠버린 소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간간이 발휘되는 유희적이고 기지가 번득이는 문장, 그리고 ‘상업성’, ‘문학성’ 등의 작품성을 따지기에 앞서 누구라도 책 앞에 진지하게 붙들어 매 놓을 수 있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에는 찬탄을 금할 수가 없다. 여기에 잘 만들어진 추리 소설에서나 볼법한 기가 막힌 반전과 독자를 감쪽같이 속여넘기는 서술 트릭은 또 어떠한가? 아무튼, 뭔가 깊고 옹골진 맛은 없지만, ‘다양성의 혼재’라는 새로운 창작 기법으로 할아버지가 들려줄 옛날이야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꼬마들처럼 모험심과 호기심으로 한껏 달아오른 독자의 흥심을 달래주기에는 부족함은 없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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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5. 5.

[책 리뷰] ‘동화’라는 포장지에 싸인 ‘불량 식품’ 같은 ~ 암흑 동화(오츠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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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라는 포장지에 싸인 ‘불량 식품’ 같은 이야기

Original Title: 暗黑童話 by Otsuichi
“그래, 여기 온 인간은 모두 수술을 받아. 행복한 수술이야. 그리고 갇히는 거야. 신기하게도 그것은 고통이 아니야.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모든 것에서 해방된 기분이 돼.” (『암흑 동화』, P348)

눈을 잃은 소녀, 그리고 눈이 기억하는 것

‘당신은 세포 기억설(Cellular Memory)을 믿습니까?’, 대뜸 이런 식으로 질문을 들이대니까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나 붙잡은 다음 다짜고짜 ‘도를 믿습니까?’라고 물고 늘어지던 사람들이 생각난다. 내 질문 역시 그런 뜬금없는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세포 기억설은 아직 과학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가설에 불과함에도 놀라운 실제 사례들이 존재하는 미지의 세계다. 태국 공포 영화 「디 아이(見鬼: The Eye, 2002」에서는 각막이식수술로 19년 만에 처음으로 눈을 뜬 주인공이 거리를 떠도는 귀신과 죽음의 그림자를 보게 된다.

그렇다면 이런 이야기도 가능할까? 사람이 살아생전에 보게 되는 모든 광경은 오직 눈을 통해서만 뇌로 흘러 들어간다. 무엇을 보든 ‘본다는’ 것의 시작은 언제나 눈이다. 쉽게 말해 눈이 없거나 손상되면 사람은 주변을 볼 수 없다. 빛과 사람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가 눈이다. 그런데 만약 눈이 단순히 영상을 뇌로 전달해주는 도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기억처럼 영상을 저장할 수 있다고 한다면 다른 이의 안구를 기증받은 사람에겐 어떤 일이 일어날까?

두 눈을 잃은 소녀는 까마귀가 선물해주는 다른 사람의 눈들을 통해 암흑으로 채워졌던 무서운 꿈 대신 눈 주인이 살아생전에 보았던 생생한 현실을 꿈속에서 본다. 한쪽 눈을 잃은 충격으로 과거의 모든 기억을 잃은 어느 한 소녀는 기증받은 눈의 주인이 보았던 과거를 자신의 텅 빈 기억 속으로 채워 넣는다. 두 이야기 모두 누군가에는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오츠이치(Otsuichi)의 『암흑동화(暗黑童話, Ankoku Dowa)』에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 까마귀가 가져다준 부드럽고 촉촉한 둥근 눈을 해골처럼 텅 빈 동공에 끼워 넣으면 눈 주인이 보았던 세상을 꿈속에서 경험한다는 두 눈을 잃은 소녀와 안구 기증자가 살아생전에 본 것을 현실 속 환영을 통해 보게 된다는 소녀 나미의 이야기는 ‘동화’라는 제목에 걸맞은 환상적이며 어딘지 모르게 가슴 뭉클한 아름다운 이야기처럼 들린다.

암흑 속에 갇힌 잔혹한 동화

눈을 잃은 소녀는 자신에게 둥근 것을 성실하게 가져다주는 말하는 까마귀가 진짜 누구인 줄 몰랐다. 소녀는 자신에게 사라진 꿈과 색깔을 찾아준 부드럽고 촉촉한 둥근 것이 다른 사람의 눈인 줄 몰랐다. 소녀는 사람의 얼굴에서 방금 뽑아낸 것 같은 촉촉한 눈알이 까마귀가 다른 사람을 무자비하게 공격해서 얻게 된 것인 줄은 더더욱 몰랐다. 마지막으로 소녀는 꿈이 끝나는 마지막에 항상 나타나는 검은 괴물이 까마귀인 것을, 그리고 그 검은 짐승이 자신을 덮치는 모습이 사실은 까마귀가 눈의 주인을 공격해서 눈을 빼앗는 그 순간인 것을 몰랐다. 소녀는 자신이 다시 꿈을 꾸게 된 잔혹한 내력을 몰랐기 때문에 까마귀의 선물 덕분에 행복했고, 까마귀는 소녀가 자신이 준 선물 때문에 우울함과 암흑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기뻤다. 소녀가 전지전능한 신이나 줄 수 있을 법한 선물 덕분에 달콤한 꿈을 꾸며 행복에 젖어 있을 때 이처럼 잔혹한 내막이 소녀의 주위를 암흑처럼 드리우고 있었다. 소녀는 그 사실을 죽을 때까지도 몰랐기에 자신에게 일어난 앨리스가 방문한 이상한 나라에서나 있을법한 신비한 일을 동화 속 이야기처럼 마냥 행복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한편으론 까마귀는 이 모든 사실을 알았고 그것이 나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오직 소녀를 기쁘게 해주고자 하는 일념으로 다른 사람을 공격해서 눈을 빼앗았기 때문에 소녀가 겪은 동화 같은 이야기에 지워지지 않는 짙은 암흑을 남겨놓는다.

한편, 나미는 기증받은 왼쪽 눈이 현실이라는 스크린에 기증자의 과거를 영사기처럼 낱낱이 투영해주는 환영을 마치 불행한 사고로 잃어버린 자신의 기억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처럼 낱낱이 기록하다가 어느 날 기증자가 죽는 과정을 보게 된다. 하지만, 기증자의 죽음은 평범한 죽음이 아니었다. 기증자는 우연히 발견한 납치당한 소녀를 구하려다 납치범에게 들킨다. 그는 다급하게 납치범에게 벗어나려다 그만 달려오던 차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교통사고로 죽는다. 기증자가 본 실종된 소녀는 나미도 언젠가 뉴스에서 본 적이 있는 소녀였다. 사고로 기억을 잃어 텅 빈 과거를 가지게 된 나미는 메마른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기증자의 과거를 빠르게 흡수하면서 마치 자신이 기증자가 된 것 같은 착각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기증자의 예사롭지 않은 죽음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결국, 나미는 집을 나와 기증자가 살던 산골 마을로 무작정 길을 떠난다. 납치범을 잡아 기증자의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말이다.

사실 나미가 추적하는 납치범은 평범한 납치범이 아니다. 그는 어떤 생명체라도 손길만 닿으면 죽음과 고통, 생존의 족쇄에서 벗어난 현실과는 차원이 다른 평온을 느끼게 해주는 마법 같은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난도질 된 육체에 생명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간달프 같은 백색 마법사지만, 그는 악의도 살의도 없이 마주치는 사람들을 해부실의 실험용 시체처럼 팔다리를 절단하고 장기들을 뽑아내거나 마구 휘저어 놓는다는 점에서 순수한 악마다. 그의 잔인한 유흥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좀비가 마구 파헤친 것처럼 내장이 드러나고 팔다리가 잘려나가지만, 그의 신비한 힘 때문에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죽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현실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금지된 평온과 행복 같은 이상야릇한 도취감에 사로잡힌다. 그의 손이 미치는 곳이 곧 고통과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지만, 그의 손길이 닿은 인간의 육체는 이미 괴물 아닌 괴물로 변해버린다.

사고로 한쪽 눈도 잃고, 기억도 잃고, 과거도 잊고, 그뿐만 아니라 정체성까지 잃고 방황하던 소녀가 기증받은 눈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삶에 애착을 갖게 되면서 비로소 이전의 ‘나’와는 다른 길을 걷는 새로운 나를 발견해간다는 우울한 동화 같은 이야기에 기증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기괴한 힘을 가진 납치범이 끼어들면서 동화는 빛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암흑 속에 갇히게 된다.

‘동화’라는 포장지에 싸인 ‘불량 식품’ 같은 이야기

‘정말 지금까지 내가 본 모든 것들을 내 눈도 기억하고 있을까?’, 언젠가는 이 질문에 대한 과학적 진실이 명확하게 밝혀지겠지만, 지금은 불가사의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낭만적이고, 한편으로는 소름 끼치는 이야기로 들린다. 그래서 ‘눈의 기억’이란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오츠이치(Otsuichi)의 『암흑동화(Ankoku Dowa)』도 불가사의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낭만적이고, 한편으로는 소름 끼친다. 외르겐 브레케(Jorgen Brekke)의 『우아한 제국(Nadens Omkrets)』에 등장하는 연쇄살인범이 섬뜩한 예술적 광기를 번득이며 피해자의 피부를 벗겨 내듯 광기가 번득이는 창의성으로 동화가 품은 낭만과 아름다움을 벗겨 내 검붉은 징그러움을 드러내는 잔혹한 이야기는 악마적인 흥미로움과 구역질 나는 애잔함이 담겨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의 어둡고 자극적인 이야기를 싸고도는 섬뜩한 매력은 누군가에게는 불량 식품 같은 금단의 열매가 될 수도, 또 다는 누군가에는 게워내야 할 상한 음식이 될 수도 있다. 감히 추천하기에는 불편한 작품이지만, 감히 불량 식품의 맛이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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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4. 20.

[책 리뷰] ‘지식인’을 게워내고 ‘시경’을 몰라도 매력적인 작품 ~ 풍아송(옌롄커)

The Odes of Songs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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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을 게워내고 ‘시경’을 몰라도 매력적인 작품

Original Title: 风雅颂 by 阎连科
나는 소리치고 싶었다. 소리내어 노래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방을 나서서 밖으로 나온 나는 수많은 연구실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모습을 보고 또 보다가 공중화장실에 가서 기지개를 켜며 소변 한 번 본 것이 전부였다. (『풍아송(風雅頌)』, p58)

솔직히 밝히지 못한 집필 목적

책이 중국에서 출판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2013년에 쓴 한국어판 서문에는 『풍아송(風雅頌, The Odes of Songs)』은 대학에 대해, 교수들에 대해, 오늘날 중국 지식인들의 나약함과 무력함, 비열함과 불쌍함, 물질, 금전, 권력에 대한 그들의 타협과 숭배, 이상과 욕망의 이율배반, 저항과 탈피의 불화, 기개와 교태의 갈등 같은 것에 관해 쓴 작품이라고, 그제야 작가 옌롄커(阎连科, Yan Lianke)는 자신의 작품이 지향하는 메시지를 솔직하게 밝혔다. 그러나 중국에서 이 책이 처음 출판되고 나서 벌떼 같은 비평과 비판, 쟁론에 부딪혔을 때 옌롄커는 한국어판 서문처럼 솔직하게 집필 목적을 감히 밝힐 수는 없었다. 그도 우리처럼 명확한 한계를 지닌 사람이자 마치 고수가 초수를 펼치듯 복잡다단하고 변화무쌍하게 펼쳐지는 사회적 그물망이 옭아매는 족쇄에서 벗어날 수도, 아니면 도도한 학처럼 마냥 외면할 수도 없는 나약한 동물인지라 차마 스스로 고립되는 길을 고집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는 그저 『풍아송』은 내 정신적 자서전이자 나에 대한 따돌림이고 비판이라고, 누가 봐도 궁색한 변명을 둘러댐으로써 또다시 자신의 작품이 ‘금서’ 목록에 추가되는 명예스러운 불행을 미리 방지할 수 있었다.

옌롄커, 스스로 지식인임을 부정하다

손해서 그런 것인지 진짜로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옌롄커는 책 뒷부분의 「저자 후기」에서 스스로 지식인임을 부정한다. 그러나 그의 필력이 가진 영향력과 오랫동안 노벨상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아온 중국의 대표 작가임을 고려해보면 (내 생각이지만 머지않아 그는 노벨상을 받을 것이다!) 그 역시 작가라는 지식인의 한 부류임을 부정할 수 없다. 고로 자신이 지식인이 아니라는 옌롄커의 부정은 지나친 겸손이다.

그렇다면, 왜 그는 자신을 지식인이 아니라고 부정했을까? 아마도 그 이유는 지식인으로서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시류에 영합하고 현실에 타협한 자신의 무능과 무능력, 그리고 비겁함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저자 후기」에서 밝히듯 『풍아송』은 자신의 무능과 무력감에 대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혐오감을 표현한 것이라는, 얼핏 보면 지식인으로서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자신의 잘못에 대한 책망이자 질타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거 유행처럼 중국을 휩쓸었던 정풍 운동의 덫에 걸린 지식인이 마지못해 토해내는 자아비판처럼 들리기도 하는 옌롄커의 변명은 누군가 시키지 않아도 지식인 스스로가 알아서 자신을 탄압하고 억압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시스템을 겨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편, 중국 문단의 문제아이자 금서(禁書) 전문 작가라는 수식어를 꼬리처럼 달고 살았던 옌롄커의 소설 『풍아송』이 금서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그가 시류에 영합하는 고만고만한 지식인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출판 후 폭우처럼 퍼부을 비난을 예감한 옌롄커가 그것에 대한 변명을 미리 「저자 후기」에 실었다는 것 자체가 그의 무력감을 방증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 지식인의 성찰로 모든 지식인의 성찰을 요구하다

지만,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오랫동안 노벨상 후보로 거론된 세계적인 작가 옌롄커가 자신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소심하다 못해 무력하고 체면치레하느라고 허세를 부리고, 한편으론 질투에 집어삼켜 지는 옹졸한 지식인의 모습을 아무리 자신에 대한 성찰이라고 피력해도 그것을 (중국을 제외한 전 세계가)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질 리는 만무하다. 그의 영향력은 그의 의지와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미 중국을 벗어나 버릴 대로 벗어나 버렸고, 그의 문장이 미치는 파급력은 황하를 범람하게 할 정도로 막대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현실에서 그가 소설에 등장시킨 한 지식인의 비굴하고 무력하고 염치없는 모습을 자신의 이야기라고 빗대어 거침없이 형상화했다는 것은 중국 지식인에 대한 결연한 도전이자 겸허한 비판이면서, 한편으론 그들의 근원적 성찰을 촉구하는 강력한 메시지나 다름없다. 쉽게 말해 추기경이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고 속죄하고 있는데, 그 광경을 지켜보는 사제들이 어찌 뻔뻔하게 자신들은 눈처럼 깨끗하다고 시치미 뚝 떼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뿐만 아니라 참회하는 추기경을 보는 사제들의 심기는 어찌 불편하지 않겠는가? 아마 당시 『풍아송』을 읽은 중국 지식인들의 마음이 그러한 사제들의 좌불안석 불편한 마음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어쩌면 이것은 거대한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중국의 지식인이 지식인이라면 응당 지켜야 할 의무와 스스로 짊어진 책무에 충실할 수 없게 하는 강력한 무언의 압력이 중국 사회에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얼마 전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중국 인터넷에서 하루아침에 말살된 가수 리지(李志)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니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텍스트를 읽는 재미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러나 꼭 이렇게 물귀신처럼 지식인을 물고 늘어지지 않더라도, 소설 제목이 의미하고 소설 속 주인공 양 교수가 연구하는 소재이기도 한 「시경(詩經, the book of Songs)」을 전혀 몰라도 『풍아송』은 시종일관 부드럽고 청순한 우윳빛 흡입력을 발산하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옥수수 껍질 벗겨내듯 작품에서 ‘지식인’이라는 거칠고 모난 껍질을 한 꺼풀 벗겨내면 차지고 노랗게 영근 옥수수알 같은 구수하면서도 달곰한 문장들이 읽는 이로 하여금 무한한 희열을 느끼게 한다. 과장되면서도 지나치지 않고, 원색적이면서도 운치 있고, 생동감이 넘치면서도 경박하지 않은 옌롄커만의 색깔을 지닌 독특한 문장은 예전 작품들에서 보여준 필력보다 더 원숙해지고 숙달된 경지를 보여준다. 그가 자유자재로 붓을 휘두르고 문장으로 천지를 호령하는 모습은 신이 들린 지휘자가 종이, 붓, 먹, 벼루를 진두지휘하여 하늘과 땅을 글로써 종이에 담아내고, 그럼으로써 세상의 이치와 역사와 삶을 설명하려는 것처럼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철학과 의지의 발로이다. 또한, 그의 문장에는 눈이 있고 귀가 있고 코가 있어 변화무쌍하면서도 오묘한 세상 만물의 미묘한 움직임이나 변화도 능히 잡아내기 때문에 보지 않으려야 보지 않을 수가 없고, 듣지 않으려야 듣지 않을 수가 없고, 맡지 않으려야 맡지 않을 수가 없다. 이렇게 그의 작품은 굳이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무게를 두지 않더라도 텍스트를 읽는 재미만으로도 충분히 독자를 무아지경에 빠트릴 수 있는 수준 높은 소설이자 진짜 문학이다.

정말로 진정한 지식인은 모두 죽었는가?

실 『풍아송』이 사유하고 고찰하고자 하는 지식인에 대한 비판적인 메시지는 별로 그렇게 와닿지 않았다. 이미 내 마음속에는 오래전부터 지식인에 대한 믿음과 존경과 공감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을 정도로 그들이 권력에 영합하고 권위를 추종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작위적이고 속물적인 작태에 신물이 났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좀 더 안다고, 배웠다고, 그래서 좀 유명하다고 우쭐대는 지식인 같지 않은 지식인들이 다양한 대중매체에서 설쳐대는 모습은 꼴사납기 그지없다. 그들이 대중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교수가 이제 막 입학한 신입생을 바라보는 것 같은 적당히 꾸며진 자애와 숨기지 않는 우월함이 번득인다. 더 가관인 것은 그들의 말이라면 무조건 진실이라고 믿는, 마치 약장수의 번지르르한 혓바닥에 놀아난 관객이나 사이비 교주의 간사한 능변에 이성을 잃은 신도를 연상시키는 대중들의 우매함이다.

어쩌면 누구의 말대로 진정한 지식인은 모두 죽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약삭빠른 사람들만이 생존할 수 있는 무한 경쟁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신이 할 도리를 운명이 부여한 의무처럼 기필코 완수하려는 정의롭고 책임 있고 용기 있는 지식인의 설 자리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부처님이나 예수님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품위 있는 교양과 자애로운 성정과 강직한 품격을 지식인에게 무리하게 강요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그들이 무슨 초능력이라도 타고 난 영웅이 아니라 우리처럼 그저 묵묵히 자기 삶에 충실해지려는 수많은 사람 중 한 사람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비록 지식인에게 실망을 금치 못했을지 망정 그렇다고 지식인의 필요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인간의 역사에는 위대한 지식인들이 존재했었고 그들이 문화, 사회, 정치, 경제 등 인류 문명에 끼친 긍정적인 영향력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자질 미달의 지식인이 설쳐대는 것이 문제일까? 그래서 크고 작은 뜻을 품은 진짜 지식인이 설 자리가 없는 것이 문제인가? 아니면, 지식인이 설 자리를 스스로 찾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가? 우리 사회가 지식인의 존재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것일까? 이것도 아니면 대중이 진짜 지식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일까? 한 번쯤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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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 31.

[책 리뷰] 특별함은 없지만, 모호함이 암시하는 가능성의 미학 ~ 위미(비페이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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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함은 없지만, 모호함이 암시하는 가능성의 미학

Original Title: 玉米 by 畢飛宇
마음이 차가워진 것이다. 마음이 한번 얼면 그만큼 더 자라는 법이다. 사람이란 이런 식으로 한 차례 한 차례 나이를 먹어가고, 마음도 한 차례 한차례 죽어간다. 세월과는 아무 상관 없이. (『위미(玉米)』, p105)

당당히, 그리고 교묘히 나를 압박하는 세 자매

먹기 전에는 배고픔을 느끼고, 배불리 먹고 나서는 만족스러운 포만감을 느끼면서도 다음 식사는 또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걱정 아닌 걱정이 옹졸하고 탐욕스러운 새가슴을 살짝 긴장시키는 것처럼 새로운 책을 읽기 전에는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기대감과 호기심으로 들끓는 문학적 배고픔에 시달리고, 읽고 나서는 문학적 성취감으로 한껏 고양된 지적 포만감으로 알량한 거드름을 피우면서도 ‘어떤 이야기로 리뷰를 시작해야 할까?’라는 하는 의무 아닌 의무에 부담을 느끼곤 한다. 그런데 오늘은 이런 부담에 앞서 당혹감이 먼저 나를 찾아왔다.

마지막 페이지는 이미 넘겨졌고, 그렇게 이야기가 끝났음에도 내가 만났던 세 자매는 못내 나를 닦달하는 것이다. 똑똑하고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아는 셋째 위슈(玉秀)는 쌍꺼풀진 큰 눈을 치켜뜨고 ‘당신이 고작 책 한 권 읽은 거로 우리에 대해 뭘 안다고 떠든다는 거예요?’라고 내가 이제 막 뭔가를 쓰기도 전에 시퍼런 날을 세운다. 평소엔 침묵으로 차분함과 위엄을 두루 자아냈던 첫째 위미(玉米)는 어찌 된 일인지 침묵을 깨고 ‘우리에 대해 쓰고 싶으면 실컷 써보세요’라고 오만과 자신감을 분간하기 어려운 당당한 어투로 격려인지 협박인지 모를 한마디를 내뱉는다. 위미의 말은 위슈가 세운 날 위에 묵직한 돌을 얹어놓은 것처럼 나의 폐부를 깊이 파고든다. 언니들과는 달리 땅딸막하지만 튼튼한 체구를 지닌 막내 위양(玉秧)은 고양이처럼 얌전히 웅크린 채 나를 말끄러미 쳐다본다. 나를 올려다보는 위양의 순진한 눈동자 속에는 자신들에 대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를 사뭇 기대하는 어린이 같은 순진한 호기심이 언뜻 비치면서도, 실수인 척하면서 바퀴벌레를 짓밟아 죽인 요조숙녀의 가식적인 놀람 속에 가려진 냉소도 숨겨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자괴감이 집 지키던 강아지가 도둑놈 바짓가랑이를 물듯이 나를 물고 늘어지고, 지금까지 힘겹게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던 손가락에는 풍선에 바람 빠지듯 힘이 빠지고, 세 자매의 협박 아닌 협박에 머릿속은 쓰레기통 비워지듯 깨끗하게 텅 비워진다. 천지를 진동시키고 태산을 쓸어버릴 듯한 그녀들의 기세에 눌려 쥐포처럼 납작해지지 않는다면, 기껏해야 산산이 부서져 그녀들의 콧방귀 장단에 맞춰 아지랑이 춤을 춰야 하는 한 줌의 먼지가 되리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나는 써야 한다. 그녀들도 알고 있다. 그러하기에 내가 아직 살아있다.

삶을 밀어붙이는 강력한 동력원, 복수와 증오

루아침에 몰락한 집안의 권위와 가세를 세우고, 한편으론 파혼의 수치를 씻고자 간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버지뻘 되는 사람에게 시집간 위미는 철저하게 권력을 추구한다. 반면에 윤간의 치욕과 아픔을 뒤로하고, 그리고 위미와 대립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구미호 같은 기질을 살려 한몫 잡으려는 위슈는 악의 없는 꽃뱀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10년 후, 모든 사람에게 평범하고 평범한 아이로만 보였던 위양은 신통방통하게도 사범학교에 진학하고, 그곳에서 평범한 속에 빛을 내는 방법을 발견한다. 그것은 어둠 속에 숨어 동료를 감시하고 밀고하는 첩자가 되는 일이었다.

위미의 권력 추구가 자신의 가족을 업신여긴 고향 사람들에 대한 복수심에서 기인한 것일까? 위슈가 전심전력으로 여우 짓을 했을 뿐 아니라 꽃뱀 짓을 한 것은 윤간의 통한을 씻고자 하는 복수심에서 기인한 것일까? 위양이 룸메이트를 밀고한 것이 누군가 자신을 무고(誣告)한 것에 대한 복수였을까? 물론 그녀들은 ‘아니야’라고 앙칼지게 소리 지르고 고개를 좌우로 연방 흔들며 강력하게 부인한다. 위미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약간의 권력을 누리며 예전 권위를 조금이나마 되찾아 가족들이 안락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라고, 위슈는 나중에야 그것이 진정 사랑이었음을 깨달았다고, 위양은 당의 가르침대로 충실하게 공작했을 뿐이라고 발뺌한다.

그녀들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우리는 복수심과 증오가 삶을 밀어붙이는 강력한 동력원이자 동기라는 것을 안다. 복수심과 증오심은 한 사람이 가진 천부적인 기질에 의해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되어 가공할만한 힘으로 성장하기도 하고, 평생 그대로 묻히고 말 수도 있었던 잠재력이 복수심이나 증오심에 자극받아 봇물 터지듯 터지면서 무시무시한 의지력으로 그 사람의 삶을 장악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자신은 충실하게 사회가 지향하는 원칙을 지켰을 따름인데 본의 아니게 타인의 삶을 짓밟는 일도 있다. 그리고 이 모든 복잡한 감정 문제와 삶의 원칙과 인생의 목적은 결국 ‘행복’이라는 보편타당한 단어 하나로 귀결된다. 복수를 하든, 권력을 추구하든, 남자를 홀리든, 동료를 밀고하든 그 자신이 행복하다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지금까지 행해진 그 모든 행위가 정당하든 정당하지 않든, 합법이든 위법이건, 도덕적이든 비도덕적이든 등등에 개의치 않고 자기합리화 속에 정당화된다. 그러나 이러란 자기합리화도 그 사람이 행복을 느낄 때야 가능성이 있고 타당성이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그래서 그녀들은 행복할까?’라고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녀들은 행복할까?

렇게나 기세등등했던 위미도 어딘가 불편한 모양인지, 아니면 하등 대답할 가치가 없는지 이 질문에는 학처럼 가녀린 목선을 드러내며 도도하게 고개를 외로 틀뿐이다. 위슈의 매혹적으로 빛나던 쌍꺼풀진 큰 눈의 초점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어딘가 위태롭다. 간망한 눈빛으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위양의 의기소침한 표정은 마치 내가 내리는 대답에 따라 자신들의 행복이 결정되는 양 민망하기 그지없다. 그녀들의 가련하면서도 안절부절못한 태도는 나를 부담의 늪으로 미끄러트리는 것도 모자라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떨게 한다.

나는 그녀들의 행복을 운운하는 것을 떠나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되묻고 싶다. 가족의 급격한 몰락을 겪고 그로 말미암아 주변 사람들부터 천시당하고 괄시받는 한창 예민할 나이의 소녀가 앞으로 어떻게 삶을 헤쳐나가야 할까? 위슈처럼 한창 꽃 피울 나이에 집단 강간이라는 끔찍한 경험을 겪은 여자가 남은 삶을 과연 행복하게 보낼 수 있을까? 하지만, 세월이 약이라고 그 어떤 트라우마라도 세월의 녹이 스며들면 완전치는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녹에 가려지면서 조금씩 치유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그 어느 정도라도 치유가 되는 데 필요한 세월은 얼마이며, 그 시기 동안 받는 고통은 누가 어떻게 보상해줄까?

민주적 법치가 정비된 국가라 할지라도 범죄를 당한 피해자에게 국가가 해줄 수 있는 일이란 이른 시일 안에 범인을 잡아 감옥에 가두는 것 외엔 이렇다 할 보상을 해줄 수 없듯, 결국 이 모든 것들은 한 사람이 평생 짊어져야 할 지극히 개인적인 짐으로 남는다. 그것은 마음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고 죽을 때까지 안고 살아가야 할 응어리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위슈처럼 집단 강간을 당하거나 위미나 위양처럼 마을 사람들에게 괄시당하고 업신여겨지는 그런 비극적인 일을 겪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치열한 경쟁 속에 휘말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크고 작은 충돌과 마찰을 겪게 되고, 그럼으로써 증오와 분노, 수치와 원한, 실패와 좌절이라는 격한 감정의 가시는 정신과 육체 속으로 깊숙이 침투해 들어온다. 가시는 생각하고 움직일 때마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듯 상처를 들쑤시면서 우리를 고통의 열반 속으로 인도한다. 여기에 슬픔과 고통의 경중은 상대적이라는 점을 고려하고, 사람은 어떤 동물보다 감정 이입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세 자매의 일이 결코 그녀들만의 일이 아니라는 참담한 현실에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그녀들이 행복하냐고 묻고 있다면, 할 말 못 할 말 다 쏟아낸 지금의 나로선 그녀들에게 직접 물어보라는 말 이외엔 더 토해낼 말이 없다.

인류사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집단 광기로부터의 치유

지막으로 중국 인민을 정신적으로 강간했던 문화대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배경이 어떻게 반영되어 있으며, 또한 세 자매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어떤 식으로 투영된 작품인지 묻는다면, 1970년 봄에 시작된 일타삼반(一打三反)과 ‘5 • 16’ 분자 색출 운동이라는 두 가지 운동이 진행됨에 따라 조반파의 핵심 분자들이 잇달아 숙청되고 탄압받으면서 1971년이면 사실상 문화대혁명의 혼돈, 혼란, 파괴가 어느 정도 정리되어 가는 시점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소설에서는 문화대혁명 초기의 과격했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비페이위(畢飛宇)의 『위미(玉米)』는 (특히 과격했던) 문화대혁명 초기의 혼란과 파괴를 몸소 체험한 작가들이 문화대혁명이 쓸고 지나간 잔해와 상처를 다룬 ‘상흔 문학’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고, 그렇다고 문화대혁명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1980년대 이후 출생한 작가들이 내놓은 새로운 중국을 대표하는 문학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석연치가 않다. 천지를 진동시켰던 문화대혁명 초기는 아슬아슬하게 비껴가고, 그 진동이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가라앉고 평온을 되찾으려 하는 197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옛 상처를 파헤쳐 고름을 짜내려는 ‘상흔 문학’에서 조금씩 벗어나려는 과도기적인 소설이라고 굳이 분류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사실상 문화대혁명은 그녀들의 성장이나 인격 형성 과정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는 것이 내 견해다. 그것보다는 초기 산업사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도시에 대한 농촌 사람들의 막연한 선망, 경외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러한 경향은 옌롄커(閣連科)의 『여름 해가 지다(夏日落)』와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爲人民服務)』에서 어떻게든 가족의 호구를 도시로 입적시키고자 하는 군인들의 발악과도 같은 집착에서도 잘 나타난다. 『위미』에서도 농촌을 벗어나 도시에 거주하는 것 자체가 농촌 사람들이 볼 땐 반은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며 부러움의 대상이다. 때론 위미처럼 뛰어난 외모와 젊다는 것 외엔 특별하게 내세울 것이 없는 농촌 여성들도 도시에 사는 간부 남편을 만나 단박에 신분 상승을 노릴 수 있다는 점에서 ‘신데렐라 콤플렉스’ 같은 심리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복수심에서든 그보다는 조금 단순하고 보편적이라 할 수 있는 출세욕에서든, 어찌 되었든 성공을 꿈꾸고 야심을 불태우는 대담한 여성은 어느 시대를 가나 존재한다는 점에서 세 자매의 이야기는 경제 대국으로 부상한 현재의 중국에서도 성립될 수 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태어나 성장했지만, 혁명적 대의와 과업을 거창하게 운운하기보다는 그보다는 세속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출세와 복수, 애증 등 혁명 과업에서는 금기시되는 개인적 감정과 야욕에 더 긴밀하게 엮여 있는 이 소설은 문화대혁명이 이제는 창작의 중심에서 벗어나 변두리나 풍경 정도로 이완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중국이 인류사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집단 광기가 일으킨 대혼란에서 어느덧 자가 치유되는 단계에 진입했음을 방증한다.

마치면서...

제 슬슬 마무리를 지어야 할 시간이다. 지금까지 혼자 잘도 주절대고 떠들어댔지만, 결국 두서없는 지루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나의 형편없는 리뷰로 말미암아 비페이위의 『위미』도 지루하다고 지레짐작해서는 안 된다. 굴욕과 치욕을 겪은 세 자매의 혁명적 이상 같은 모호한 지향성을 지닌 복수심을 다뤘다는 점에서 특별히 우아하고, 특별히 아름다운 감동도, 그리고 특별한 통쾌함도 없지만, 재치가 깨알처럼 쏟아져 나오는 유쾌한 문장과 100m 달리기에는 못 미치지만 10,000m 달리기보다는 빠른, 즉 3,000m 달리기 정도에서 느낄 수 있는 속도감이 독자를 사로잡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어딘지 모르게 마무리가 미적지근하고 막연하지만, 그 모호함 속에 세 자매 인생의 격류가 거침없이 흐르고 있다는 점에서, 그 모호함은 독자가 추리하고 분석해야 할 그 무엇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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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2. 30.

[책 리뷰] 죽은 자, 죽어가는 자, 죽을 자’에서 제외된 사람들 ~ 콜리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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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 죽어가는 자, 죽을 자’에서 제외된 사람들

Original Title: Kolyma Tales by Varlam Tikhonovich Shalamov

“사람이 사는 것은 무엇을 믿고 무엇을 기대하기 때문이 아니랍니다. 삶의 본능이 어느 동물이나 보호하듯 사람을 보호해 줘요.” (『콜리마 이야기』, p197)

안드레예프는 미래를 생각하지 않았다. 하루 앞의 삶도 내다보지 못한다는 걸 광산에서 배운 그는 죽음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듯 눈앞의 것을 위해 싸우려고 애썼다. (『콜리마 이야기』, 295)

곳은 ‘뼛속까지 얼어붙는 추위’가 실재하는 곳이다. 기력이 다한 수인이 따스함을 느끼면 영하 30도, 찬 안개가 끼면 영하 40도, 숨 쉴 때 공기가 소음과 함께 나오지만 아직 숨쉬기가 어렵지 않다면 영하 45도, 숨소리가 요란하고 호흡 곤란이 눈에 띄면 영하 50도, 뱉은 침이 공중에서 얼면 영하 55도 이하다. 뼛속도 얼어붙을 수 있다면 뇌도 얼어붙고 마음도 얼어붙을 수 있으니, 이곳의 혹한 속에서는 모두가 멍청해지고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거추장스러운 영혼은 말끔히 소멸한 채 좀비처럼 생존을 향한 육체적 본능만을 불태울 수 있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그곳. 그곳은 바로 시베리아 북동부로 영구 동토층과 툰드라가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고 연중 9개월이 겨울인 ‘콜리마’이다. 또한, 『콜리마 이야기(Kolyma Tales)』의 저자 바를람 샬라모프(Varlam Tikhonovich Shalamov)가 무려 17년간이나 수용소 생활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전히 스탈린 시대에 노동 수용소로 보내진 사람들의 규모와 그곳에서 죽은 사람의 정확한 수는 미스터리다. 하지만, 적어도 수백만의 사람들이 부당하게 수용소로 보내졌으며, 그중 동료 수인들이나 수용소 관리들이 행사한 폭력에 희생되었든, 혹독한 추위 속에 얼어 죽었든, 가혹한 노동 착취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든, 아니면 (수인들을 죽음에 이르게 갖가지 원인에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 열악한 주거와 보건 환경 속에서 빈약한 식사로 병들고 굶어 죽었든, 어찌 되었든 많은 수의 수인들이 끝내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서 종종 펼쳐지는 이루말 할 수 없는 참혹한 상황에서도 결국엔 살아남는 사람들이 씁쓸한 감동으로 역사의 결말을 장식했듯, 대다수 사람은 이런 혹독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아 공포 시대의 산증인이 되었다.

하루 치 식량 이래 봐야 낮은 품질의 500g 빵(무게로만 본다면 보통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식빵 한 봉지보다 약간 많은 양, 그러나 품질은?)과 수프라기보다는 미지근한 물에 가까운 묽은 수프 두세 접시. 여기에 휴일도 없고 보호 장비라고는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의 16시간의 중노동만 해도 끔찍한데, 방한복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채 말 그대로 뼛속까지 얼어붙는 혹독한 추위를 어떻게든 버터야 한다는 끔찍한 상황에서 생존한다는 것이 정말로 가능했던 것이다.

죽은 자, 죽어가는 자, 죽을 자 등 죽음이 일상화된 수용소에서는 죽기는 밥 먹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죽기는 매한가지기에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모든 요소요소에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라는 악에 받친 침울한 투쟁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누구를 향한 투쟁인가? 그것은 수용소 관리도, 깡패도, 소비에트 정부도 아닌 바로 ‘죽음’을 향한 투쟁이다. 누군가 바로 코앞에서 내게로 총을 발사하려고 할 때 손바닥이 총알을 막을 수 있든 없든 상관없이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으로 총구를 향하여 방어의 손바닥을 펼치듯, 그들의 투쟁은 곳곳에 만연한 ‘죽음’에 대한 육체의 본능적인 저항이자 무의식적인 몸부림이다.

온갖 더럽고 추악하고 잔인하며 비열한 일들이 일상처럼 벌어지는 수용소는 필연적으로 도덕과 양심의 진공 상태를 불러올 수밖에 없으며, 오랜 굶주림, 희망 없는 미래, 머리와 마음조차 얼어붙게 하는 혹한에서 사람의 정신적 지지대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문명사회에서는 그 고결함과 순수함으로 추앙되는 사람의 영혼은 수용소 생활을 견디기에는 너무나 나약하고 순진한, 그럼으로써 그 고결함을 조금이나마 유지하고자 자살을 부추기는 장애물일 뿐이다. 사람으로서 마땅한 생각을 하고 보편적인 양심과 도덕에 비추어 수용소 생활을 바라본다면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죽은 자를 뒤로하고, 죽어가는 자에서 회복하여 죽을 자에서 벗어나려면 오로지 생존과 삶을 향한 좀비 같은 끈질기고 맹목적인 육체의 본능과 어떻게든 고통을 참고 한계 상황을 견뎌내려는 마조히스트도 울고 갈 정도의 인내심만이 눈앞의 것을 위해 싸우게 할 수 있고, 이러한 하루하루의 필사적이면서도 조용한 노력이 끊기지 않고 영사기에 걸린 필름처럼 이어질 때 그것은 마침내 위대한 ‘생존’으로 귀결될 수 있다.

다른 러시아 수용소 작가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One Day in the Life of Ivan Denisovich by Alexander Solzhenitsyn)』가 보통 세상에서는 보통 사람의 역할을 나름대로 해낼 수 있었던 평범한 사람들이 어디까지 비굴해지고 파렴치해질 수 있나 하는 그 한계를 시험하는 무대로써 수용소의 잔혹한 현실을 다소 해학적으로 그려냈다면, 바를람 샬라모프의 『콜리마 이야기』는 자기가 죽어가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사람의 정신적 감각과 그 감각을 유지하는 의식 자체를 소멸시키는 혹한의 수용소에서조차 말소될 수 없는 육체에 대한 동물적인 집착과 본능이 어떻게 생존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담담하고 말쑥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또한, 수용소를 둘러싼 툰드라와 타이가의 쓸쓸하면서도 나름의 운치를 자아내는 정경과 그 혹한의 환경에서조차 차분하게 호흡하는 자연의 생명력을 예찬하는 묘사가 수용소 생활의 삭막함을 조금은 씻겨주고 있다.

수용소라는 특별한 경험을 위해 특별한 서술 기법을 도입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처음에는 짧은 단편들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참혹할 대로 참혹한 수용소 생활이지만, 『콜리마 이야기』에서는 평범한 사람의 일상처럼 차분하고 단조롭게 이야기된다. 마치 그것이 스탈린 치하의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삶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직소 퍼즐 맞추듯 단편들이 이어져 전체의 윤곽을 대충이나마 볼 수 있게 되면 샬라모프를 비롯한 수용소의 수많은 생존자가 도무지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그 콜리마의 수용소에서, 미래도 아니고 내일도 아닌 단 오늘만을 위한 인고와 삶의 본능이 어떻게 생존의 결말로 귀결될 수 있었는지를 얄팍하게나마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시무시한 공포 시대에 무시무시한 생존 본능으로 맞선 그들의 잔혹사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시무시하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이 어떠한 환경에도 굴복하지 않고 생존을 위한 본능을 어디까지나 뻗쳐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그들의 명확한 증언이기도 해 경외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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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2. 16.

[책 리뷰] 현실 감각을 마비시키는 언어의 독 ~ 기억을 파는 남자

O vendedor de passados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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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감각을 마비시키는 언어의 독

Original Title: O vendedor de passados by José Eduardo Agualusa
잘 생각해보면, 꿈이 있는 것과 꿈을 꾼 것은 분명 차이가 있다. 나는 꿈을 꾸었다. (『기억을 파는 남자』, p221

력을 속이는 연예인, 과거를 부정하는 정치인, 과거를 날조하는 역사학자, 과거를 왜곡하는 국가,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든 과거를 지우고 잊으려는 사람들과 그와 다른 이유에서 과거를 추억하고 기리는 사람들 등 이 모든 작태는 아름답든 추하든 과거는 존재하며 또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 삶과 함께 머물 것임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그런데 여기 장터에서 물건 팔듯 과거를 파는 남자가 있으니, 황당하면서도 귀가 솔깃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당신의 과거가 추하다면 아름다운 것으로, 당신의 과거가 현재 지위나 명예에 걸맞지 않게 초라하다면 고귀하고 전통 있는 내력을 갖춘 명망 있는 일가의 일원으로, 화려하고 주목받는 삶에 싫증 난다면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과거로, 주제 에두아르두 아구아루사(José Eduardo Agualusa)의 소설 『기억을 파는 남자(O vendedor de passados)』에 등장하는 백색증을 앓는 흑인 펠릭스 벤투라는 마치 논문을 대필해 주듯 과거를 팔고 기억을 매매한다. 마이클 베이 감독의 영화 「아일랜드(The Island, 2005)」에서 장기 대체용으로 생산되는 복제인간에게 그럴듯하게 만들어진 과거를 심어주듯, 펠릭스는 한 사람의 완전한 과거를 재창조해내고 그것을 사들인 사람은 지우고 싶은 과거 위에 기꺼이 새 과거를 덮어씌운다.

지만, 단지 매매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뀐 과거가 현재의 삶과 그 삶을 살아가는 태도도 변화시킨다는 『기억을 파는 남자』의 테마는 사람이 얼마나 과거에 집착하고 사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어떤 토양에 뿌리를 내리느냐에 따라 식물의 발육 정도가 제각각이듯 한 사람의 인성과 현재의 삶은 과거에서 기인하고 그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는데, 소설에서 새 과거를 산 사람은 재창조된 과거에서 마치 자신이 실제로 살았던 것처럼 재창조된 과거에 걸맞은 성격으로 서서히 변화해 간다. 이것은 사람은 자신이 맡은 사회적 역할이나 자신이 입은 제복의 영향력으로 언행이나 심리가 변화될 수 있음을 연구해 온 사회심리학자들의 오랜 노력을 떠올리게 한다.

아무튼, 그럼으로써 그 사람의 진짜 과거는 묻히고 대신 그 자리에 재창조된 새 과거가 들어선다. 만약 그의 진짜 과거를 아는 사람이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헌재 살아가는 그의 삶이 진실한 과거에 기반을 둔 삶인지, 아니면 거짓된 과거에 기반을 둔 삶인지 판단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한 사람에 대한 기억 대부분이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어떻게 기억하는 것으로 유지되듯 설령 한두 사람이 그 사람의 진짜 과거를 안다고 해도 많은 사람이 그 사람의 재창조된 과거를 진짜로 여긴다면 누가 한두 사람의 말을 믿어줄까. 아마도 이때는 그 사람의 진짜 과거를 밝히는 한두 사람의 말이 거짓이 되고 다수가 믿는 재창조된 과거가 진짜가 되는, 진실과 거짓이 자연스럽게 뒤바뀌는 상황을 목격하리라.

학은 진실을 추구하고 과학은 사실을 추구하지만, 두 학문의 상호간섭적인 영향력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거짓과 진실, 허구와 실재, 꿈과 현실의 경계가 생각만큼 명확하게 딱 그어져 있지 않다. 그뿐만 아니라 때론 우리 자신이 그 경계를 뭉개면서 서로 대치되는 것으로 뒤엉킨 모순적 삶이 가져다주는 환상적이고 아찔한 매혹에 좀비처럼 끌려가게 된다. 『기억을 파는 남자』는 그러한 현실을 사람이 아닌 도마뱀붙이 에울랄리우라의 눈에 비친 모습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吾輩は猫である)』에 등장하는 이름 없는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펠릭스 집에 거주하는 한때 사람이었던 에울랄리우라의 눈과 의식, 전생에 대한 기억, 그리고 꿈으로 그려진 이 소설을 읽노라면 자신의 꿈은 언제나 현실보다 더 생생하고 사실적이라는 도마뱀붙이의 당돌한 의견에 공감하거나, 아니면 묵묵히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억을 파는 남자』를 읽는 동안만큼은 거짓과 진실, 허구와 실재, 꿈과 현실을 구분하려는 독자의 인지 감각은 도마뱀붙이가 내뱉는 관조와 사색의 퀴퀴한 향기가 은은히 묻어나오면서도 강아지가 누워 있다가 막 떠난 자리의 따스함이 나른하게 전해져 오는, 도마뱀붙이의 갈라진 혀끝이 부리는 마술적 조합에서 쏟아져 나오는 언어의 독에 자신도 모르게 마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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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1. 18.

[책 리뷰] 예수님조차 두 손 두 발 들게 한 ~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조반니노 과레스키)

Mondo Piccolo Don Camillo by Giovannino Guareschi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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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조차 두 손 두 발 들게 한 우리들의 괴짜 신부님!

Original Title: Mondo Piccolo: Don Camillo by Giovannino Guareschi
주교가 웃으며 말했다. “불쌍한 노인을 즐겁게 해주느라 애썼네. 고맙네.” 돈 까밀로가 집으로 돌아와 예수님에게 모든 사실을 말씀드렸다. 예수님은 고개를 흔들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다들 정신이나 갔구나!”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 p312)

학이 시대와 국경, 문화, 언어를 초월하여 읽힐 수 있는 것은 비록 문명 발전과 산업화 정도 여하에 따라 살아가는 겉모양은 다를지라도 사람들이 서로 좌충우돌 부대끼며 갈등과 대립이라는 빈번한 마찰을 빚어낸다는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어디를 가나 비슷비슷하다는 보편적인 인간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히 지칠 줄 모르는 시기와 질투, 한도 끝도 없이 쌓이는 원한, 끝없이 폭발하는 분노와 이 모든 파괴적인 감정을 지배하는 이기심은 인류사의 수많은 전쟁과 혼란, 무질서를 지속적으로 생산한 죄의 씨앗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인류는 자멸하지 않았다. 크고 작은 돌부리에 걸려 이리 튀고 저리 튀는가 하면 때론 천 길 낭떠러지로 몰리는 세기말적 위기를 몇 번 겪기도 하면서 험난한 여정을 걸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는 근근이 굴러왔다. 무엇 때문일까?

마 너무 진부한 대답일지 모르겠지만, 허구한 날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와중에도 단단히 굳은 시멘트도 뚫고 나오는 풀 같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솟아 나오는 ‘정(情)’ 때문이지 않을까. 그중에서도 뭔가 그럴싸한 이유나 동기가 필요한 고운 정보다는 조건 없이 생기면서도 고운 정보다 더 질기고 너그럽다는 미운 정을 특별히 강조한다면, 그렇다면 뽀 강과 아페닌 산맥 사이에 펼쳐진 평야, 그 한 자락에 자리 잡고 흐르는 뽀 강을 배경으로 옹기종기 들어선 작은 마을의 유명한 원수지간인 공산주의자 읍장 뻬뽀네(Peppone)와 신부 돈 까밀로(Don Camillo) 사이의 위험천만하면서도 포복절도케 하는, 그러면서도 때론 눈물샘을 자극하는 감동 어린 이야기가 시대를 훌쩍 뛰어넘고 대담하게 국경을 넘으면서까지도 전해져 내려올 수 있었던 것도 어찌 보면 두 사람 사이의 ‘미운 정’이 두 사람 몸에 난 털만큼이나 잔뜩 박혔기 때문이지 않을까. 만약 그랬지 않았더라면 이미 그 작은 마을은 두 사람에 의해 초토화되었을 테니까. 또한, 미운 정이 두 사람을 고무줄처럼 밀고 당기는 와중에 어느새 몽클몽클 고운 정도 피어나니 두 사람의 이야기가 전 세계 수많은 독자를 웃고 울게 한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뻬뽀네와 돈 까밀로처럼 서로의 얼굴 앞에서는 몇 년 굶은 짐승처럼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하며 으르렁대다가도 돌아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로의 안위를 걱정하고 챙겨주듯, 시기와 질투, 분노와 원한의 파멸적인 감정의 기복 사이에서도 악착같은 미운 정을 피워낼 수 있는, 얼핏 보면 별로 대단한 것 같지도 않은 인류의 적응력이 분노와 탐욕을 이기지 못해 하루하루 구원과 죄악 사이를 넘나드는 우리의 무지막지한 삶이 무지막지하게 분쇄되지 않도록 응집력을 발휘해주는 조그마한 죔쇠로 작용하는지도 모르겠다.

뽀네와 돈 까밀로의 밀접한 사이를 주제넘게 언급하며 ‘미운 정’에 대한 찬사 아닌 찬사를 늘어놓으면서 막상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Mondo Piccolo: Don Camillo)』(조반니노 과레스키 Giovannino Guareschi)의 주인공 돈 까밀로에 대해 한마디로 없이 넘어갔다가 신부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욕바가지만 얻어먹고 끝나면 천운이고, 아슬아슬하게 머리 옆으로 의자가 스쳐 날아가는 아찔한 상황으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고, 그날 꿈자리가 뒤숭숭했다면 기관총이나 박격포 세례까지는 각오해야 할 것이다. 덤으로 영적 사명을 수행하는 신부님의 특권으로 지옥행 표도 떼 놓은 당상이다. 나는 그만한 각오를 다질 배짱도 없거니와 지옥은 더더욱 싫기에 지금부터는 좋든 싫든 돈 까밀로 신부에 대해 몇 자 적어야겠다.

꽤 실력 있는 읍장에 골수 공산주의자인 뻬뽀네가 인민을 위해 일한다면 돈 까밀로는 하느님을 위해 일하는 진짜 신부다. 둘 다 솥뚜껑만큼 큰 손과 딱 벌어진 어깨를 가진 장사에다 입도 걸걸하다 보니 툭 하면 터지는 말싸움이 주먹질로까지 번지는 일이 비일비재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약과다. 성질이 불같은 신부 돈 까밀로는 긴 의자를 마구 휘둘러 대다가 교구 성당에서 잠시 쫓겨나는가 하면, 여세가 불리하면 떡 하니 기관총까지 대동하고 나선다. 어찌 되었든 상대가 75밀리 박격포를 쏘아대면 바로 81밀리 박격포로 대응하는,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지거나 당하고는 못사는 신부가 바로 돈 까밀로이다 보니, 예수님조차도 이런 구제 불능 같은 신부를 타이르고 훈계하는 일은 만만치 않다. 벅차다.

그렇다고 돈 까밀로가 예수님 앞에서라도 고분고분한가? 결국엔 들킬 것이 뻔하면서도 예수님 앞에서조차 뻔뻔하게 이리 속이려 들고 저리 거짓말하며 능청 떨고 구구절절 변명하는 돈 까밀로는 정말 못 말리는 괴짜 신부다. 타고난 사람의 심성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면 바로 돈 까밀로 신부를 두고 한 말이리라. 그럼에도, 그를 미워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사고를 치는 이유가 사적인 탐욕이 아니라 신실한 신앙심과 인민을 위한 마음, 그리고 봐줄 만한 약간의 인간적 나약함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그가 청소년 회관이나 보육원을 새로 짓거나 낡은 종을 보수할 기금을 마련하고자 공갈 • 협박으로도 모자라 약삭빠른 재주(?)를 조금 부려도 제단 위의 근엄한 예수님은 두 손 두 발 들 수밖에 없다. 하물며 우리라고 별수 있나. 그저 포복절도하며 뒹굴다가 때늦지 않게 정신 차리 배꼽을 온전히 지킬 수 있으면 그만이다. 또한, 그는 진정 인민을 위하는 일이라면 철천지원수인 뻬뽀네와도 손을 잡는 분별력 있는 인간적 결점을 보여주며, 어떠한 잘못이든 일단 무조건 오리발 내밀고 보는 현대인의 질 나쁜 처세술과는 달리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속죄함에도 전혀 인색하지 않다. 겉으로는 우람한 풍채에 기관총, 박격포로 무장한 과격한 신부처럼 보이지만, 그 속은 선량한 신앙심과 따스한 정으로 옹골진 인자한 신부가 바로 돈 까밀로인 것이다.

정이 이러하니 신도 종교도 믿지 않는 나이지만, 돈 까밀로 같은 신부가 있는 성당이라면 종지기가 돼서라도 가까이서 살고 싶다.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 돈 까밀로처럼 차지고 즐겁게 호탕하게, 그러면서도 경건하게 참회하며 살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좋지 아니한가. 아무튼,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은 하루하루 살면서 쌓일 수밖에 없는 마음속의 이런 저러한 개운치 않은 앙금을 개운하게 씻겨주는 시원하고 상큼한 청량음료 같은 소설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간결하게 표현하자면 ‘사이다’ 같은 소설이다. 일은 잘 안 풀리고 몸은 지치고 마음은 울적한데, 그런데도 어딘가로 훌쩍 떠날 형편이 못 된다면, 여기 말없이 성호를 그으며 떡대처럼 쫙 벌어진 어깨로 양팔을 벌리고 서 있는 돈 까밀로 신부의 품으로 뛰어들어라. 그럴듯한 진리는 못 찾더라도 마음의 작은 평화 정도는 충분히 구하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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