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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9일 일요일

[책 리뷰] ‘다양성의 혼재’ 속의 모호한 정체성 ~ 콩고의 판도라(알베르트 산체스 피뇰)

Pandora-in-the-Congo-book-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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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의 혼재’ 속의 모호한 정체성

Original Title: Pandora in the Congo by Albert Sánchez Piñol
내가 쓴 원고가 남의 이야기든 말든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마리 앙투아네트의 등껍데기가 자연물이 아니라 인공적인 물건이면 어떻다는 말인가.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남의 이야기를 썼다고 해서 내가 하찮은 글쟁이가 아닌 것처럼, 나무 껍데기를 썼다고 해서 하찮은 거북이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콩고의 판도라』, p459)

현대의 판도라 ‘인류’

피메테우스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던 판도라(Pandora)에게 무엇이 부족했던 것일까? 호기심을 못 참은 그녀는 제우스의 엄중한 경고도 무시한 채 제우스가 결혼선물로 준 상자를 열고 만다. 그 상자 안에는 욕심, 질투, 시기, 각종 질병 등 온갖 나쁜 것들이 가득 담겨 있었으며, 이것들은 판도라가 상자를 여는 순간 빠져나와 세상 곳곳으로 퍼졌다. 그로 말미암아 평화로웠던 세상은 금세 험악해졌다는, ‘판도라의 상자’라고 불리는 그리스 신화의 한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의 출처인 위키백과에는 판도라의 그 뒷이야기는 나와 있지 않지만, ─ 만약 그녀가 양심적인 사람이었다면 ─ 상자를 연 판도라도 자신 때문에 불행에 빠진 세상을 바라보며 예전 같은 행복한 삶을 마냥 누릴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는 있다. 이 이야기는 뜻밖의 재앙의 근원을 말하고자 할 때 종종 언급된다.

그렇다면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Albert Sanchez Pinol)의 소설 『콩고의 판도라(Pandora al Congo)』에서 ‘판도라’는 무엇을 의미할까?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판도라는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 정도로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린다. 그러나 그녀는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편으로는 제우스의 경고를 무시할 정도로 도를 넘어선 호기심을 참지 못한 채, 미지의 무언가를 추구하다가 재앙을 불러들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소설 속 ‘판도라’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판도라처럼 현실에 만족하거나 안주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탐욕과 이익을 추구하려는 인류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새로운 자원, 새로운 땅, 그리고 돈과 명성을 좇아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세력을 확장하려는 야심을 일각에서는 ‘모험 정신’, ‘개척 정신’으로 그럴싸하게 포장하거나, 혹은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려는 ‘도전 정신’으로 추켜세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식으로 제국주의가 시작되었으며, 또한 그런 식으로 서구 문명이 비서구 문명을 ─ 서구 문명의 논리와 이성으로 볼 때는 지극히도 합리적인 행동으로써 ─ 침탈했음을 익히 알고 있다. 소설 속 배경이 되기도 하는 20세기 전후에 만연했던 제국주의도 탐욕과 이익을 좇아 주변으로 무한히 확장하려는 인류 속성의 역사적 증거다.

서구 문명이 잉태한 악이 정당하게 활개 치는 그곳

설은 ‘인류’라는 현대의 판도라가 ‘콩고’라는 또 다른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을 때 찬란한 인류 문명과 냉혹한 이성 뒤에 감춰진 ‘악’이 소위 말하는 문명인을 흔히 말하는 야만인으로 어떻게, 어떤 식으로 서서히 탈바꿈시키는지를, 그리고 문명의 탈을 쓴 야만인이 자신들이 저지른 온갖 짓들에 문명의 이중 잣대를 들이대며 어떻게 합리화하는지를 액자 형식의 이야기를 통해 교묘하게 그려내고 있다.

서구 문명이 볼 때 ‘콩고’는 법, 도덕, 그리고 자신들 문명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다. 그러므로 제국주의의 판사는 그런 곳에서 어떤 짓을 저질러도 문책할 수 없다고 판결한다. 그것은 인류가 빚어낸 업적 중에서 가장 고결하고, 인류를 지혜와 사랑을 품은 지적생명체로서 빛나게 해주던, 그래서 많은 사람이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생명을 품은 ─ 인류의 존재를 위협하지 않는 ─ 모든 존재에게 두루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정의’와 ‘보편적 도덕성’을 깡그리 무시하는, 참으로 합리의 극치를 달리는 위대한 판결이다.

그럼으로써 서구 문명은 식민지에서의 야만적인 행위를 정당화하고, 동시에 현대적 문명이 자리 잡은 영역에서 적절한 탈출구를 찾지 못해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사회악’이 배출될 수 있는 합리적 공간을 제공한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문제처럼 식민지에서의 야만적 행위를 허용하였기에 ‘사회악’의 배출구로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로 ‘사회악’의 배출구가 필요해서 식민지에서의 야만적 행위를 허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콩고의 판도라’는 현대 문명의 모순과 부조리가 잉태한 더럽고 추한 인간쓰레기들의 집합소이자 현대 문명이 용납할 수 없는 그들의 변태적인 욕망과 탐욕을 해결하는 구역질 나는 변소인 것은 틀림없다.

‘다양성의 혼재’의 아쉬움을 달래고도 남는 기발한 이야기

『콩고의 판도라』는 소설 속에 또 다른 소설을 삽입하거나 스릴러, 판타지, 추리, 모험 등 다양한 장르가 공존하는 특이한 창작 기법을 구사하여 서구 문명에 대한 깊은 통찰을 시도한다. 하지만, 여러 장르의 혼합을 시도하려는 어딘지 모르게 혼란스러운 와중에 말로만 듣던 대필작가의 고단한 노예 생활, 1차 세계대전 전후의 영국과 유럽의 세태를 반영하려는 사실주의적인 풍자 요소, 문학의 예기치 못한 파괴적인 힘, 언론의 노골적인 상업성, 감동 앞에 힘없이 무너지는 진실과 그것이 대변하는 우매한 대중 등 서구 문명이 잉태한 다양한 문젯거리를 다루다 보니 어딘지 모르게 풍요로운 맛은 있지만, 똑 부러지게 하나를 파고드는 집요한 맛은 없다. 어딘지 모르게 우겨 넣어진 느낌이다. 여기에 대필작가로서 소설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주인공이 문학적 정체성을 찾아 나가는 성장 소설적인 요소에 주인공이 남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남의 여인을 짝사랑하는 애처로운 사연까지 가미되었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겠다. 특정한 장르에 머무르지 않으면서 여러 장르의 경계를 드나드는, 그래서 딱히 어떤 장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소설의 특징이라면 특징이겠지만,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 작품에 담아내려다 보니 이것도 저것도 아닌 소설이 되어 버린 느낌도 없지 않아 있다. 내가 보기엔 충실하게 상업성을 따르면서도 소소한 문학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 결과 어중간하게 붕 떠버린 소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간간이 발휘되는 유희적이고 기지가 번득이는 문장, 그리고 ‘상업성’, ‘문학성’ 등의 작품성을 따지기에 앞서 누구라도 책 앞에 진지하게 붙들어 매 놓을 수 있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에는 찬탄을 금할 수가 없다. 여기에 잘 만들어진 추리 소설에서나 볼법한 기가 막힌 반전과 독자를 감쪽같이 속여넘기는 서술 트릭은 또 어떠한가? 아무튼, 뭔가 깊고 옹골진 맛은 없지만, ‘다양성의 혼재’라는 새로운 창작 기법으로 할아버지가 들려줄 옛날이야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꼬마들처럼 모험심과 호기심으로 한껏 달아오른 독자의 흥심을 달래주기에는 부족함은 없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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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5일 일요일

[책 리뷰] ‘동화’라는 포장지에 싸인 ‘불량 식품’ 같은 ~ 암흑 동화(오츠이치)

Ankoku Dowa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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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라는 포장지에 싸인 ‘불량 식품’ 같은 이야기

Original Title: 暗黑童話 by Otsuichi
“그래, 여기 온 인간은 모두 수술을 받아. 행복한 수술이야. 그리고 갇히는 거야. 신기하게도 그것은 고통이 아니야.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모든 것에서 해방된 기분이 돼.” (『암흑 동화』, P348)

눈을 잃은 소녀, 그리고 눈이 기억하는 것

‘당신은 세포 기억설(Cellular Memory)을 믿습니까?’, 대뜸 이런 식으로 질문을 들이대니까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나 붙잡은 다음 다짜고짜 ‘도를 믿습니까?’라고 물고 늘어지던 사람들이 생각난다. 내 질문 역시 그런 뜬금없는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세포 기억설은 아직 과학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가설에 불과함에도 놀라운 실제 사례들이 존재하는 미지의 세계다. 태국 공포 영화 「디 아이(見鬼: The Eye, 2002」에서는 각막이식수술로 19년 만에 처음으로 눈을 뜬 주인공이 거리를 떠도는 귀신과 죽음의 그림자를 보게 된다.

그렇다면 이런 이야기도 가능할까? 사람이 살아생전에 보게 되는 모든 광경은 오직 눈을 통해서만 뇌로 흘러 들어간다. 무엇을 보든 ‘본다는’ 것의 시작은 언제나 눈이다. 쉽게 말해 눈이 없거나 손상되면 사람은 주변을 볼 수 없다. 빛과 사람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가 눈이다. 그런데 만약 눈이 단순히 영상을 뇌로 전달해주는 도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기억처럼 영상을 저장할 수 있다고 한다면 다른 이의 안구를 기증받은 사람에겐 어떤 일이 일어날까?

두 눈을 잃은 소녀는 까마귀가 선물해주는 다른 사람의 눈들을 통해 암흑으로 채워졌던 무서운 꿈 대신 눈 주인이 살아생전에 보았던 생생한 현실을 꿈속에서 본다. 한쪽 눈을 잃은 충격으로 과거의 모든 기억을 잃은 어느 한 소녀는 기증받은 눈의 주인이 보았던 과거를 자신의 텅 빈 기억 속으로 채워 넣는다. 두 이야기 모두 누군가에는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오츠이치(Otsuichi)의 『암흑동화(暗黑童話, Ankoku Dowa)』에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 까마귀가 가져다준 부드럽고 촉촉한 둥근 눈을 해골처럼 텅 빈 동공에 끼워 넣으면 눈 주인이 보았던 세상을 꿈속에서 경험한다는 두 눈을 잃은 소녀와 안구 기증자가 살아생전에 본 것을 현실 속 환영을 통해 보게 된다는 소녀 나미의 이야기는 ‘동화’라는 제목에 걸맞은 환상적이며 어딘지 모르게 가슴 뭉클한 아름다운 이야기처럼 들린다.

암흑 속에 갇힌 잔혹한 동화

눈을 잃은 소녀는 자신에게 둥근 것을 성실하게 가져다주는 말하는 까마귀가 진짜 누구인 줄 몰랐다. 소녀는 자신에게 사라진 꿈과 색깔을 찾아준 부드럽고 촉촉한 둥근 것이 다른 사람의 눈인 줄 몰랐다. 소녀는 사람의 얼굴에서 방금 뽑아낸 것 같은 촉촉한 눈알이 까마귀가 다른 사람을 무자비하게 공격해서 얻게 된 것인 줄은 더더욱 몰랐다. 마지막으로 소녀는 꿈이 끝나는 마지막에 항상 나타나는 검은 괴물이 까마귀인 것을, 그리고 그 검은 짐승이 자신을 덮치는 모습이 사실은 까마귀가 눈의 주인을 공격해서 눈을 빼앗는 그 순간인 것을 몰랐다. 소녀는 자신이 다시 꿈을 꾸게 된 잔혹한 내력을 몰랐기 때문에 까마귀의 선물 덕분에 행복했고, 까마귀는 소녀가 자신이 준 선물 때문에 우울함과 암흑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기뻤다. 소녀가 전지전능한 신이나 줄 수 있을 법한 선물 덕분에 달콤한 꿈을 꾸며 행복에 젖어 있을 때 이처럼 잔혹한 내막이 소녀의 주위를 암흑처럼 드리우고 있었다. 소녀는 그 사실을 죽을 때까지도 몰랐기에 자신에게 일어난 앨리스가 방문한 이상한 나라에서나 있을법한 신비한 일을 동화 속 이야기처럼 마냥 행복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한편으론 까마귀는 이 모든 사실을 알았고 그것이 나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오직 소녀를 기쁘게 해주고자 하는 일념으로 다른 사람을 공격해서 눈을 빼앗았기 때문에 소녀가 겪은 동화 같은 이야기에 지워지지 않는 짙은 암흑을 남겨놓는다.

한편, 나미는 기증받은 왼쪽 눈이 현실이라는 스크린에 기증자의 과거를 영사기처럼 낱낱이 투영해주는 환영을 마치 불행한 사고로 잃어버린 자신의 기억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처럼 낱낱이 기록하다가 어느 날 기증자가 죽는 과정을 보게 된다. 하지만, 기증자의 죽음은 평범한 죽음이 아니었다. 기증자는 우연히 발견한 납치당한 소녀를 구하려다 납치범에게 들킨다. 그는 다급하게 납치범에게 벗어나려다 그만 달려오던 차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교통사고로 죽는다. 기증자가 본 실종된 소녀는 나미도 언젠가 뉴스에서 본 적이 있는 소녀였다. 사고로 기억을 잃어 텅 빈 과거를 가지게 된 나미는 메마른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기증자의 과거를 빠르게 흡수하면서 마치 자신이 기증자가 된 것 같은 착각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기증자의 예사롭지 않은 죽음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결국, 나미는 집을 나와 기증자가 살던 산골 마을로 무작정 길을 떠난다. 납치범을 잡아 기증자의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말이다.

사실 나미가 추적하는 납치범은 평범한 납치범이 아니다. 그는 어떤 생명체라도 손길만 닿으면 죽음과 고통, 생존의 족쇄에서 벗어난 현실과는 차원이 다른 평온을 느끼게 해주는 마법 같은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난도질 된 육체에 생명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간달프 같은 백색 마법사지만, 그는 악의도 살의도 없이 마주치는 사람들을 해부실의 실험용 시체처럼 팔다리를 절단하고 장기들을 뽑아내거나 마구 휘저어 놓는다는 점에서 순수한 악마다. 그의 잔인한 유흥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좀비가 마구 파헤친 것처럼 내장이 드러나고 팔다리가 잘려나가지만, 그의 신비한 힘 때문에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죽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현실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금지된 평온과 행복 같은 이상야릇한 도취감에 사로잡힌다. 그의 손이 미치는 곳이 곧 고통과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지만, 그의 손길이 닿은 인간의 육체는 이미 괴물 아닌 괴물로 변해버린다.

사고로 한쪽 눈도 잃고, 기억도 잃고, 과거도 잊고, 그뿐만 아니라 정체성까지 잃고 방황하던 소녀가 기증받은 눈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삶에 애착을 갖게 되면서 비로소 이전의 ‘나’와는 다른 길을 걷는 새로운 나를 발견해간다는 우울한 동화 같은 이야기에 기증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기괴한 힘을 가진 납치범이 끼어들면서 동화는 빛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암흑 속에 갇히게 된다.

‘동화’라는 포장지에 싸인 ‘불량 식품’ 같은 이야기

‘정말 지금까지 내가 본 모든 것들을 내 눈도 기억하고 있을까?’, 언젠가는 이 질문에 대한 과학적 진실이 명확하게 밝혀지겠지만, 지금은 불가사의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낭만적이고, 한편으로는 소름 끼치는 이야기로 들린다. 그래서 ‘눈의 기억’이란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오츠이치(Otsuichi)의 『암흑동화(Ankoku Dowa)』도 불가사의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낭만적이고, 한편으로는 소름 끼친다. 외르겐 브레케(Jorgen Brekke)의 『우아한 제국(Nadens Omkrets)』에 등장하는 연쇄살인범이 섬뜩한 예술적 광기를 번득이며 피해자의 피부를 벗겨 내듯 광기가 번득이는 창의성으로 동화가 품은 낭만과 아름다움을 벗겨 내 검붉은 징그러움을 드러내는 잔혹한 이야기는 악마적인 흥미로움과 구역질 나는 애잔함이 담겨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의 어둡고 자극적인 이야기를 싸고도는 섬뜩한 매력은 누군가에게는 불량 식품 같은 금단의 열매가 될 수도, 또 다는 누군가에는 게워내야 할 상한 음식이 될 수도 있다. 감히 추천하기에는 불편한 작품이지만, 감히 불량 식품의 맛이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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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20일 토요일

[책 리뷰] ‘지식인’을 게워내고 ‘시경’을 몰라도 매력적인 작품 ~ 풍아송(옌롄커)

The Odes of Songs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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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을 게워내고 ‘시경’을 몰라도 매력적인 작품

Original Title: 风雅颂 by 阎连科
나는 소리치고 싶었다. 소리내어 노래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방을 나서서 밖으로 나온 나는 수많은 연구실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모습을 보고 또 보다가 공중화장실에 가서 기지개를 켜며 소변 한 번 본 것이 전부였다. (『풍아송(風雅頌)』, p58)

솔직히 밝히지 못한 집필 목적

책이 중국에서 출판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2013년에 쓴 한국어판 서문에는 『풍아송(風雅頌, The Odes of Songs)』은 대학에 대해, 교수들에 대해, 오늘날 중국 지식인들의 나약함과 무력함, 비열함과 불쌍함, 물질, 금전, 권력에 대한 그들의 타협과 숭배, 이상과 욕망의 이율배반, 저항과 탈피의 불화, 기개와 교태의 갈등 같은 것에 관해 쓴 작품이라고, 그제야 작가 옌롄커(阎连科, Yan Lianke)는 자신의 작품이 지향하는 메시지를 솔직하게 밝혔다. 그러나 중국에서 이 책이 처음 출판되고 나서 벌떼 같은 비평과 비판, 쟁론에 부딪혔을 때 옌롄커는 한국어판 서문처럼 솔직하게 집필 목적을 감히 밝힐 수는 없었다. 그도 우리처럼 명확한 한계를 지닌 사람이자 마치 고수가 초수를 펼치듯 복잡다단하고 변화무쌍하게 펼쳐지는 사회적 그물망이 옭아매는 족쇄에서 벗어날 수도, 아니면 도도한 학처럼 마냥 외면할 수도 없는 나약한 동물인지라 차마 스스로 고립되는 길을 고집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는 그저 『풍아송』은 내 정신적 자서전이자 나에 대한 따돌림이고 비판이라고, 누가 봐도 궁색한 변명을 둘러댐으로써 또다시 자신의 작품이 ‘금서’ 목록에 추가되는 명예스러운 불행을 미리 방지할 수 있었다.

옌롄커, 스스로 지식인임을 부정하다

손해서 그런 것인지 진짜로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옌롄커는 책 뒷부분의 「저자 후기」에서 스스로 지식인임을 부정한다. 그러나 그의 필력이 가진 영향력과 오랫동안 노벨상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아온 중국의 대표 작가임을 고려해보면 (내 생각이지만 머지않아 그는 노벨상을 받을 것이다!) 그 역시 작가라는 지식인의 한 부류임을 부정할 수 없다. 고로 자신이 지식인이 아니라는 옌롄커의 부정은 지나친 겸손이다.

그렇다면, 왜 그는 자신을 지식인이 아니라고 부정했을까? 아마도 그 이유는 지식인으로서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시류에 영합하고 현실에 타협한 자신의 무능과 무능력, 그리고 비겁함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저자 후기」에서 밝히듯 『풍아송』은 자신의 무능과 무력감에 대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혐오감을 표현한 것이라는, 얼핏 보면 지식인으로서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자신의 잘못에 대한 책망이자 질타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거 유행처럼 중국을 휩쓸었던 정풍 운동의 덫에 걸린 지식인이 마지못해 토해내는 자아비판처럼 들리기도 하는 옌롄커의 변명은 누군가 시키지 않아도 지식인 스스로가 알아서 자신을 탄압하고 억압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시스템을 겨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편, 중국 문단의 문제아이자 금서(禁書) 전문 작가라는 수식어를 꼬리처럼 달고 살았던 옌롄커의 소설 『풍아송』이 금서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그가 시류에 영합하는 고만고만한 지식인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출판 후 폭우처럼 퍼부을 비난을 예감한 옌롄커가 그것에 대한 변명을 미리 「저자 후기」에 실었다는 것 자체가 그의 무력감을 방증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 지식인의 성찰로 모든 지식인의 성찰을 요구하다

지만,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오랫동안 노벨상 후보로 거론된 세계적인 작가 옌롄커가 자신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소심하다 못해 무력하고 체면치레하느라고 허세를 부리고, 한편으론 질투에 집어삼켜 지는 옹졸한 지식인의 모습을 아무리 자신에 대한 성찰이라고 피력해도 그것을 (중국을 제외한 전 세계가)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질 리는 만무하다. 그의 영향력은 그의 의지와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미 중국을 벗어나 버릴 대로 벗어나 버렸고, 그의 문장이 미치는 파급력은 황하를 범람하게 할 정도로 막대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현실에서 그가 소설에 등장시킨 한 지식인의 비굴하고 무력하고 염치없는 모습을 자신의 이야기라고 빗대어 거침없이 형상화했다는 것은 중국 지식인에 대한 결연한 도전이자 겸허한 비판이면서, 한편으론 그들의 근원적 성찰을 촉구하는 강력한 메시지나 다름없다. 쉽게 말해 추기경이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고 속죄하고 있는데, 그 광경을 지켜보는 사제들이 어찌 뻔뻔하게 자신들은 눈처럼 깨끗하다고 시치미 뚝 떼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뿐만 아니라 참회하는 추기경을 보는 사제들의 심기는 어찌 불편하지 않겠는가? 아마 당시 『풍아송』을 읽은 중국 지식인들의 마음이 그러한 사제들의 좌불안석 불편한 마음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어쩌면 이것은 거대한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중국의 지식인이 지식인이라면 응당 지켜야 할 의무와 스스로 짊어진 책무에 충실할 수 없게 하는 강력한 무언의 압력이 중국 사회에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얼마 전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중국 인터넷에서 하루아침에 말살된 가수 리지(李志)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니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텍스트를 읽는 재미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러나 꼭 이렇게 물귀신처럼 지식인을 물고 늘어지지 않더라도, 소설 제목이 의미하고 소설 속 주인공 양 교수가 연구하는 소재이기도 한 「시경(詩經, the book of Songs)」을 전혀 몰라도 『풍아송』은 시종일관 부드럽고 청순한 우윳빛 흡입력을 발산하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옥수수 껍질 벗겨내듯 작품에서 ‘지식인’이라는 거칠고 모난 껍질을 한 꺼풀 벗겨내면 차지고 노랗게 영근 옥수수알 같은 구수하면서도 달곰한 문장들이 읽는 이로 하여금 무한한 희열을 느끼게 한다. 과장되면서도 지나치지 않고, 원색적이면서도 운치 있고, 생동감이 넘치면서도 경박하지 않은 옌롄커만의 색깔을 지닌 독특한 문장은 예전 작품들에서 보여준 필력보다 더 원숙해지고 숙달된 경지를 보여준다. 그가 자유자재로 붓을 휘두르고 문장으로 천지를 호령하는 모습은 신이 들린 지휘자가 종이, 붓, 먹, 벼루를 진두지휘하여 하늘과 땅을 글로써 종이에 담아내고, 그럼으로써 세상의 이치와 역사와 삶을 설명하려는 것처럼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철학과 의지의 발로이다. 또한, 그의 문장에는 눈이 있고 귀가 있고 코가 있어 변화무쌍하면서도 오묘한 세상 만물의 미묘한 움직임이나 변화도 능히 잡아내기 때문에 보지 않으려야 보지 않을 수가 없고, 듣지 않으려야 듣지 않을 수가 없고, 맡지 않으려야 맡지 않을 수가 없다. 이렇게 그의 작품은 굳이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무게를 두지 않더라도 텍스트를 읽는 재미만으로도 충분히 독자를 무아지경에 빠트릴 수 있는 수준 높은 소설이자 진짜 문학이다.

정말로 진정한 지식인은 모두 죽었는가?

실 『풍아송』이 사유하고 고찰하고자 하는 지식인에 대한 비판적인 메시지는 별로 그렇게 와닿지 않았다. 이미 내 마음속에는 오래전부터 지식인에 대한 믿음과 존경과 공감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을 정도로 그들이 권력에 영합하고 권위를 추종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작위적이고 속물적인 작태에 신물이 났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좀 더 안다고, 배웠다고, 그래서 좀 유명하다고 우쭐대는 지식인 같지 않은 지식인들이 다양한 대중매체에서 설쳐대는 모습은 꼴사납기 그지없다. 그들이 대중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교수가 이제 막 입학한 신입생을 바라보는 것 같은 적당히 꾸며진 자애와 숨기지 않는 우월함이 번득인다. 더 가관인 것은 그들의 말이라면 무조건 진실이라고 믿는, 마치 약장수의 번지르르한 혓바닥에 놀아난 관객이나 사이비 교주의 간사한 능변에 이성을 잃은 신도를 연상시키는 대중들의 우매함이다.

어쩌면 누구의 말대로 진정한 지식인은 모두 죽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약삭빠른 사람들만이 생존할 수 있는 무한 경쟁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신이 할 도리를 운명이 부여한 의무처럼 기필코 완수하려는 정의롭고 책임 있고 용기 있는 지식인의 설 자리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부처님이나 예수님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품위 있는 교양과 자애로운 성정과 강직한 품격을 지식인에게 무리하게 강요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그들이 무슨 초능력이라도 타고 난 영웅이 아니라 우리처럼 그저 묵묵히 자기 삶에 충실해지려는 수많은 사람 중 한 사람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비록 지식인에게 실망을 금치 못했을지 망정 그렇다고 지식인의 필요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인간의 역사에는 위대한 지식인들이 존재했었고 그들이 문화, 사회, 정치, 경제 등 인류 문명에 끼친 긍정적인 영향력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자질 미달의 지식인이 설쳐대는 것이 문제일까? 그래서 크고 작은 뜻을 품은 진짜 지식인이 설 자리가 없는 것이 문제인가? 아니면, 지식인이 설 자리를 스스로 찾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가? 우리 사회가 지식인의 존재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것일까? 이것도 아니면 대중이 진짜 지식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일까? 한 번쯤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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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31일 일요일

[책 리뷰] 특별함은 없지만, 모호함이 암시하는 가능성의 미학 ~ 위미(비페이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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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함은 없지만, 모호함이 암시하는 가능성의 미학

Original Title: 玉米 by 畢飛宇
마음이 차가워진 것이다. 마음이 한번 얼면 그만큼 더 자라는 법이다. 사람이란 이런 식으로 한 차례 한 차례 나이를 먹어가고, 마음도 한 차례 한차례 죽어간다. 세월과는 아무 상관 없이. (『위미(玉米)』, p105)

당당히, 그리고 교묘히 나를 압박하는 세 자매

먹기 전에는 배고픔을 느끼고, 배불리 먹고 나서는 만족스러운 포만감을 느끼면서도 다음 식사는 또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걱정 아닌 걱정이 옹졸하고 탐욕스러운 새가슴을 살짝 긴장시키는 것처럼 새로운 책을 읽기 전에는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기대감과 호기심으로 들끓는 문학적 배고픔에 시달리고, 읽고 나서는 문학적 성취감으로 한껏 고양된 지적 포만감으로 알량한 거드름을 피우면서도 ‘어떤 이야기로 리뷰를 시작해야 할까?’라는 하는 의무 아닌 의무에 부담을 느끼곤 한다. 그런데 오늘은 이런 부담에 앞서 당혹감이 먼저 나를 찾아왔다.

마지막 페이지는 이미 넘겨졌고, 그렇게 이야기가 끝났음에도 내가 만났던 세 자매는 못내 나를 닦달하는 것이다. 똑똑하고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아는 셋째 위슈(玉秀)는 쌍꺼풀진 큰 눈을 치켜뜨고 ‘당신이 고작 책 한 권 읽은 거로 우리에 대해 뭘 안다고 떠든다는 거예요?’라고 내가 이제 막 뭔가를 쓰기도 전에 시퍼런 날을 세운다. 평소엔 침묵으로 차분함과 위엄을 두루 자아냈던 첫째 위미(玉米)는 어찌 된 일인지 침묵을 깨고 ‘우리에 대해 쓰고 싶으면 실컷 써보세요’라고 오만과 자신감을 분간하기 어려운 당당한 어투로 격려인지 협박인지 모를 한마디를 내뱉는다. 위미의 말은 위슈가 세운 날 위에 묵직한 돌을 얹어놓은 것처럼 나의 폐부를 깊이 파고든다. 언니들과는 달리 땅딸막하지만 튼튼한 체구를 지닌 막내 위양(玉秧)은 고양이처럼 얌전히 웅크린 채 나를 말끄러미 쳐다본다. 나를 올려다보는 위양의 순진한 눈동자 속에는 자신들에 대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를 사뭇 기대하는 어린이 같은 순진한 호기심이 언뜻 비치면서도, 실수인 척하면서 바퀴벌레를 짓밟아 죽인 요조숙녀의 가식적인 놀람 속에 가려진 냉소도 숨겨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자괴감이 집 지키던 강아지가 도둑놈 바짓가랑이를 물듯이 나를 물고 늘어지고, 지금까지 힘겹게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던 손가락에는 풍선에 바람 빠지듯 힘이 빠지고, 세 자매의 협박 아닌 협박에 머릿속은 쓰레기통 비워지듯 깨끗하게 텅 비워진다. 천지를 진동시키고 태산을 쓸어버릴 듯한 그녀들의 기세에 눌려 쥐포처럼 납작해지지 않는다면, 기껏해야 산산이 부서져 그녀들의 콧방귀 장단에 맞춰 아지랑이 춤을 춰야 하는 한 줌의 먼지가 되리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나는 써야 한다. 그녀들도 알고 있다. 그러하기에 내가 아직 살아있다.

삶을 밀어붙이는 강력한 동력원, 복수와 증오

루아침에 몰락한 집안의 권위와 가세를 세우고, 한편으론 파혼의 수치를 씻고자 간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버지뻘 되는 사람에게 시집간 위미는 철저하게 권력을 추구한다. 반면에 윤간의 치욕과 아픔을 뒤로하고, 그리고 위미와 대립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구미호 같은 기질을 살려 한몫 잡으려는 위슈는 악의 없는 꽃뱀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10년 후, 모든 사람에게 평범하고 평범한 아이로만 보였던 위양은 신통방통하게도 사범학교에 진학하고, 그곳에서 평범한 속에 빛을 내는 방법을 발견한다. 그것은 어둠 속에 숨어 동료를 감시하고 밀고하는 첩자가 되는 일이었다.

위미의 권력 추구가 자신의 가족을 업신여긴 고향 사람들에 대한 복수심에서 기인한 것일까? 위슈가 전심전력으로 여우 짓을 했을 뿐 아니라 꽃뱀 짓을 한 것은 윤간의 통한을 씻고자 하는 복수심에서 기인한 것일까? 위양이 룸메이트를 밀고한 것이 누군가 자신을 무고(誣告)한 것에 대한 복수였을까? 물론 그녀들은 ‘아니야’라고 앙칼지게 소리 지르고 고개를 좌우로 연방 흔들며 강력하게 부인한다. 위미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약간의 권력을 누리며 예전 권위를 조금이나마 되찾아 가족들이 안락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라고, 위슈는 나중에야 그것이 진정 사랑이었음을 깨달았다고, 위양은 당의 가르침대로 충실하게 공작했을 뿐이라고 발뺌한다.

그녀들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우리는 복수심과 증오가 삶을 밀어붙이는 강력한 동력원이자 동기라는 것을 안다. 복수심과 증오심은 한 사람이 가진 천부적인 기질에 의해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되어 가공할만한 힘으로 성장하기도 하고, 평생 그대로 묻히고 말 수도 있었던 잠재력이 복수심이나 증오심에 자극받아 봇물 터지듯 터지면서 무시무시한 의지력으로 그 사람의 삶을 장악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자신은 충실하게 사회가 지향하는 원칙을 지켰을 따름인데 본의 아니게 타인의 삶을 짓밟는 일도 있다. 그리고 이 모든 복잡한 감정 문제와 삶의 원칙과 인생의 목적은 결국 ‘행복’이라는 보편타당한 단어 하나로 귀결된다. 복수를 하든, 권력을 추구하든, 남자를 홀리든, 동료를 밀고하든 그 자신이 행복하다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지금까지 행해진 그 모든 행위가 정당하든 정당하지 않든, 합법이든 위법이건, 도덕적이든 비도덕적이든 등등에 개의치 않고 자기합리화 속에 정당화된다. 그러나 이러란 자기합리화도 그 사람이 행복을 느낄 때야 가능성이 있고 타당성이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그래서 그녀들은 행복할까?’라고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녀들은 행복할까?

렇게나 기세등등했던 위미도 어딘가 불편한 모양인지, 아니면 하등 대답할 가치가 없는지 이 질문에는 학처럼 가녀린 목선을 드러내며 도도하게 고개를 외로 틀뿐이다. 위슈의 매혹적으로 빛나던 쌍꺼풀진 큰 눈의 초점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어딘가 위태롭다. 간망한 눈빛으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위양의 의기소침한 표정은 마치 내가 내리는 대답에 따라 자신들의 행복이 결정되는 양 민망하기 그지없다. 그녀들의 가련하면서도 안절부절못한 태도는 나를 부담의 늪으로 미끄러트리는 것도 모자라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떨게 한다.

나는 그녀들의 행복을 운운하는 것을 떠나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되묻고 싶다. 가족의 급격한 몰락을 겪고 그로 말미암아 주변 사람들부터 천시당하고 괄시받는 한창 예민할 나이의 소녀가 앞으로 어떻게 삶을 헤쳐나가야 할까? 위슈처럼 한창 꽃 피울 나이에 집단 강간이라는 끔찍한 경험을 겪은 여자가 남은 삶을 과연 행복하게 보낼 수 있을까? 하지만, 세월이 약이라고 그 어떤 트라우마라도 세월의 녹이 스며들면 완전치는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녹에 가려지면서 조금씩 치유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그 어느 정도라도 치유가 되는 데 필요한 세월은 얼마이며, 그 시기 동안 받는 고통은 누가 어떻게 보상해줄까?

민주적 법치가 정비된 국가라 할지라도 범죄를 당한 피해자에게 국가가 해줄 수 있는 일이란 이른 시일 안에 범인을 잡아 감옥에 가두는 것 외엔 이렇다 할 보상을 해줄 수 없듯, 결국 이 모든 것들은 한 사람이 평생 짊어져야 할 지극히 개인적인 짐으로 남는다. 그것은 마음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고 죽을 때까지 안고 살아가야 할 응어리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위슈처럼 집단 강간을 당하거나 위미나 위양처럼 마을 사람들에게 괄시당하고 업신여겨지는 그런 비극적인 일을 겪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치열한 경쟁 속에 휘말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크고 작은 충돌과 마찰을 겪게 되고, 그럼으로써 증오와 분노, 수치와 원한, 실패와 좌절이라는 격한 감정의 가시는 정신과 육체 속으로 깊숙이 침투해 들어온다. 가시는 생각하고 움직일 때마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듯 상처를 들쑤시면서 우리를 고통의 열반 속으로 인도한다. 여기에 슬픔과 고통의 경중은 상대적이라는 점을 고려하고, 사람은 어떤 동물보다 감정 이입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세 자매의 일이 결코 그녀들만의 일이 아니라는 참담한 현실에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그녀들이 행복하냐고 묻고 있다면, 할 말 못 할 말 다 쏟아낸 지금의 나로선 그녀들에게 직접 물어보라는 말 이외엔 더 토해낼 말이 없다.

인류사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집단 광기로부터의 치유

지막으로 중국 인민을 정신적으로 강간했던 문화대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배경이 어떻게 반영되어 있으며, 또한 세 자매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어떤 식으로 투영된 작품인지 묻는다면, 1970년 봄에 시작된 일타삼반(一打三反)과 ‘5 • 16’ 분자 색출 운동이라는 두 가지 운동이 진행됨에 따라 조반파의 핵심 분자들이 잇달아 숙청되고 탄압받으면서 1971년이면 사실상 문화대혁명의 혼돈, 혼란, 파괴가 어느 정도 정리되어 가는 시점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소설에서는 문화대혁명 초기의 과격했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비페이위(畢飛宇)의 『위미(玉米)』는 (특히 과격했던) 문화대혁명 초기의 혼란과 파괴를 몸소 체험한 작가들이 문화대혁명이 쓸고 지나간 잔해와 상처를 다룬 ‘상흔 문학’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고, 그렇다고 문화대혁명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1980년대 이후 출생한 작가들이 내놓은 새로운 중국을 대표하는 문학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석연치가 않다. 천지를 진동시켰던 문화대혁명 초기는 아슬아슬하게 비껴가고, 그 진동이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가라앉고 평온을 되찾으려 하는 197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옛 상처를 파헤쳐 고름을 짜내려는 ‘상흔 문학’에서 조금씩 벗어나려는 과도기적인 소설이라고 굳이 분류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사실상 문화대혁명은 그녀들의 성장이나 인격 형성 과정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는 것이 내 견해다. 그것보다는 초기 산업사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도시에 대한 농촌 사람들의 막연한 선망, 경외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러한 경향은 옌롄커(閣連科)의 『여름 해가 지다(夏日落)』와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爲人民服務)』에서 어떻게든 가족의 호구를 도시로 입적시키고자 하는 군인들의 발악과도 같은 집착에서도 잘 나타난다. 『위미』에서도 농촌을 벗어나 도시에 거주하는 것 자체가 농촌 사람들이 볼 땐 반은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며 부러움의 대상이다. 때론 위미처럼 뛰어난 외모와 젊다는 것 외엔 특별하게 내세울 것이 없는 농촌 여성들도 도시에 사는 간부 남편을 만나 단박에 신분 상승을 노릴 수 있다는 점에서 ‘신데렐라 콤플렉스’ 같은 심리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복수심에서든 그보다는 조금 단순하고 보편적이라 할 수 있는 출세욕에서든, 어찌 되었든 성공을 꿈꾸고 야심을 불태우는 대담한 여성은 어느 시대를 가나 존재한다는 점에서 세 자매의 이야기는 경제 대국으로 부상한 현재의 중국에서도 성립될 수 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태어나 성장했지만, 혁명적 대의와 과업을 거창하게 운운하기보다는 그보다는 세속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출세와 복수, 애증 등 혁명 과업에서는 금기시되는 개인적 감정과 야욕에 더 긴밀하게 엮여 있는 이 소설은 문화대혁명이 이제는 창작의 중심에서 벗어나 변두리나 풍경 정도로 이완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중국이 인류사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집단 광기가 일으킨 대혼란에서 어느덧 자가 치유되는 단계에 진입했음을 방증한다.

마치면서...

제 슬슬 마무리를 지어야 할 시간이다. 지금까지 혼자 잘도 주절대고 떠들어댔지만, 결국 두서없는 지루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나의 형편없는 리뷰로 말미암아 비페이위의 『위미』도 지루하다고 지레짐작해서는 안 된다. 굴욕과 치욕을 겪은 세 자매의 혁명적 이상 같은 모호한 지향성을 지닌 복수심을 다뤘다는 점에서 특별히 우아하고, 특별히 아름다운 감동도, 그리고 특별한 통쾌함도 없지만, 재치가 깨알처럼 쏟아져 나오는 유쾌한 문장과 100m 달리기에는 못 미치지만 10,000m 달리기보다는 빠른, 즉 3,000m 달리기 정도에서 느낄 수 있는 속도감이 독자를 사로잡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어딘지 모르게 마무리가 미적지근하고 막연하지만, 그 모호함 속에 세 자매 인생의 격류가 거침없이 흐르고 있다는 점에서, 그 모호함은 독자가 추리하고 분석해야 할 그 무엇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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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30일 일요일

[책 리뷰] 죽은 자, 죽어가는 자, 죽을 자’에서 제외된 사람들 ~ 콜리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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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 죽어가는 자, 죽을 자’에서 제외된 사람들

Original Title: Kolyma Tales by Varlam Tikhonovich Shalamov

“사람이 사는 것은 무엇을 믿고 무엇을 기대하기 때문이 아니랍니다. 삶의 본능이 어느 동물이나 보호하듯 사람을 보호해 줘요.” (『콜리마 이야기』, p197)

안드레예프는 미래를 생각하지 않았다. 하루 앞의 삶도 내다보지 못한다는 걸 광산에서 배운 그는 죽음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듯 눈앞의 것을 위해 싸우려고 애썼다. (『콜리마 이야기』, 295)

곳은 ‘뼛속까지 얼어붙는 추위’가 실재하는 곳이다. 기력이 다한 수인이 따스함을 느끼면 영하 30도, 찬 안개가 끼면 영하 40도, 숨 쉴 때 공기가 소음과 함께 나오지만 아직 숨쉬기가 어렵지 않다면 영하 45도, 숨소리가 요란하고 호흡 곤란이 눈에 띄면 영하 50도, 뱉은 침이 공중에서 얼면 영하 55도 이하다. 뼛속도 얼어붙을 수 있다면 뇌도 얼어붙고 마음도 얼어붙을 수 있으니, 이곳의 혹한 속에서는 모두가 멍청해지고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거추장스러운 영혼은 말끔히 소멸한 채 좀비처럼 생존을 향한 육체적 본능만을 불태울 수 있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그곳. 그곳은 바로 시베리아 북동부로 영구 동토층과 툰드라가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고 연중 9개월이 겨울인 ‘콜리마’이다. 또한, 『콜리마 이야기(Kolyma Tales)』의 저자 바를람 샬라모프(Varlam Tikhonovich Shalamov)가 무려 17년간이나 수용소 생활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전히 스탈린 시대에 노동 수용소로 보내진 사람들의 규모와 그곳에서 죽은 사람의 정확한 수는 미스터리다. 하지만, 적어도 수백만의 사람들이 부당하게 수용소로 보내졌으며, 그중 동료 수인들이나 수용소 관리들이 행사한 폭력에 희생되었든, 혹독한 추위 속에 얼어 죽었든, 가혹한 노동 착취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든, 아니면 (수인들을 죽음에 이르게 갖가지 원인에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 열악한 주거와 보건 환경 속에서 빈약한 식사로 병들고 굶어 죽었든, 어찌 되었든 많은 수의 수인들이 끝내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서 종종 펼쳐지는 이루말 할 수 없는 참혹한 상황에서도 결국엔 살아남는 사람들이 씁쓸한 감동으로 역사의 결말을 장식했듯, 대다수 사람은 이런 혹독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아 공포 시대의 산증인이 되었다.

하루 치 식량 이래 봐야 낮은 품질의 500g 빵(무게로만 본다면 보통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식빵 한 봉지보다 약간 많은 양, 그러나 품질은?)과 수프라기보다는 미지근한 물에 가까운 묽은 수프 두세 접시. 여기에 휴일도 없고 보호 장비라고는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의 16시간의 중노동만 해도 끔찍한데, 방한복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채 말 그대로 뼛속까지 얼어붙는 혹독한 추위를 어떻게든 버터야 한다는 끔찍한 상황에서 생존한다는 것이 정말로 가능했던 것이다.

죽은 자, 죽어가는 자, 죽을 자 등 죽음이 일상화된 수용소에서는 죽기는 밥 먹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죽기는 매한가지기에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모든 요소요소에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라는 악에 받친 침울한 투쟁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누구를 향한 투쟁인가? 그것은 수용소 관리도, 깡패도, 소비에트 정부도 아닌 바로 ‘죽음’을 향한 투쟁이다. 누군가 바로 코앞에서 내게로 총을 발사하려고 할 때 손바닥이 총알을 막을 수 있든 없든 상관없이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으로 총구를 향하여 방어의 손바닥을 펼치듯, 그들의 투쟁은 곳곳에 만연한 ‘죽음’에 대한 육체의 본능적인 저항이자 무의식적인 몸부림이다.

온갖 더럽고 추악하고 잔인하며 비열한 일들이 일상처럼 벌어지는 수용소는 필연적으로 도덕과 양심의 진공 상태를 불러올 수밖에 없으며, 오랜 굶주림, 희망 없는 미래, 머리와 마음조차 얼어붙게 하는 혹한에서 사람의 정신적 지지대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문명사회에서는 그 고결함과 순수함으로 추앙되는 사람의 영혼은 수용소 생활을 견디기에는 너무나 나약하고 순진한, 그럼으로써 그 고결함을 조금이나마 유지하고자 자살을 부추기는 장애물일 뿐이다. 사람으로서 마땅한 생각을 하고 보편적인 양심과 도덕에 비추어 수용소 생활을 바라본다면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죽은 자를 뒤로하고, 죽어가는 자에서 회복하여 죽을 자에서 벗어나려면 오로지 생존과 삶을 향한 좀비 같은 끈질기고 맹목적인 육체의 본능과 어떻게든 고통을 참고 한계 상황을 견뎌내려는 마조히스트도 울고 갈 정도의 인내심만이 눈앞의 것을 위해 싸우게 할 수 있고, 이러한 하루하루의 필사적이면서도 조용한 노력이 끊기지 않고 영사기에 걸린 필름처럼 이어질 때 그것은 마침내 위대한 ‘생존’으로 귀결될 수 있다.

다른 러시아 수용소 작가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One Day in the Life of Ivan Denisovich by Alexander Solzhenitsyn)』가 보통 세상에서는 보통 사람의 역할을 나름대로 해낼 수 있었던 평범한 사람들이 어디까지 비굴해지고 파렴치해질 수 있나 하는 그 한계를 시험하는 무대로써 수용소의 잔혹한 현실을 다소 해학적으로 그려냈다면, 바를람 샬라모프의 『콜리마 이야기』는 자기가 죽어가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사람의 정신적 감각과 그 감각을 유지하는 의식 자체를 소멸시키는 혹한의 수용소에서조차 말소될 수 없는 육체에 대한 동물적인 집착과 본능이 어떻게 생존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담담하고 말쑥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또한, 수용소를 둘러싼 툰드라와 타이가의 쓸쓸하면서도 나름의 운치를 자아내는 정경과 그 혹한의 환경에서조차 차분하게 호흡하는 자연의 생명력을 예찬하는 묘사가 수용소 생활의 삭막함을 조금은 씻겨주고 있다.

수용소라는 특별한 경험을 위해 특별한 서술 기법을 도입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처음에는 짧은 단편들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참혹할 대로 참혹한 수용소 생활이지만, 『콜리마 이야기』에서는 평범한 사람의 일상처럼 차분하고 단조롭게 이야기된다. 마치 그것이 스탈린 치하의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삶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직소 퍼즐 맞추듯 단편들이 이어져 전체의 윤곽을 대충이나마 볼 수 있게 되면 샬라모프를 비롯한 수용소의 수많은 생존자가 도무지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그 콜리마의 수용소에서, 미래도 아니고 내일도 아닌 단 오늘만을 위한 인고와 삶의 본능이 어떻게 생존의 결말로 귀결될 수 있었는지를 얄팍하게나마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시무시한 공포 시대에 무시무시한 생존 본능으로 맞선 그들의 잔혹사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시무시하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이 어떠한 환경에도 굴복하지 않고 생존을 위한 본능을 어디까지나 뻗쳐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그들의 명확한 증언이기도 해 경외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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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16일 일요일

[책 리뷰] 현실 감각을 마비시키는 언어의 독 ~ 기억을 파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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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감각을 마비시키는 언어의 독

Original Title: O vendedor de passados by José Eduardo Agualusa
잘 생각해보면, 꿈이 있는 것과 꿈을 꾼 것은 분명 차이가 있다. 나는 꿈을 꾸었다. (『기억을 파는 남자』, p221

력을 속이는 연예인, 과거를 부정하는 정치인, 과거를 날조하는 역사학자, 과거를 왜곡하는 국가,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든 과거를 지우고 잊으려는 사람들과 그와 다른 이유에서 과거를 추억하고 기리는 사람들 등 이 모든 작태는 아름답든 추하든 과거는 존재하며 또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 삶과 함께 머물 것임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그런데 여기 장터에서 물건 팔듯 과거를 파는 남자가 있으니, 황당하면서도 귀가 솔깃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당신의 과거가 추하다면 아름다운 것으로, 당신의 과거가 현재 지위나 명예에 걸맞지 않게 초라하다면 고귀하고 전통 있는 내력을 갖춘 명망 있는 일가의 일원으로, 화려하고 주목받는 삶에 싫증 난다면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과거로, 주제 에두아르두 아구아루사(José Eduardo Agualusa)의 소설 『기억을 파는 남자(O vendedor de passados)』에 등장하는 백색증을 앓는 흑인 펠릭스 벤투라는 마치 논문을 대필해 주듯 과거를 팔고 기억을 매매한다. 마이클 베이 감독의 영화 「아일랜드(The Island, 2005)」에서 장기 대체용으로 생산되는 복제인간에게 그럴듯하게 만들어진 과거를 심어주듯, 펠릭스는 한 사람의 완전한 과거를 재창조해내고 그것을 사들인 사람은 지우고 싶은 과거 위에 기꺼이 새 과거를 덮어씌운다.

지만, 단지 매매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뀐 과거가 현재의 삶과 그 삶을 살아가는 태도도 변화시킨다는 『기억을 파는 남자』의 테마는 사람이 얼마나 과거에 집착하고 사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어떤 토양에 뿌리를 내리느냐에 따라 식물의 발육 정도가 제각각이듯 한 사람의 인성과 현재의 삶은 과거에서 기인하고 그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는데, 소설에서 새 과거를 산 사람은 재창조된 과거에서 마치 자신이 실제로 살았던 것처럼 재창조된 과거에 걸맞은 성격으로 서서히 변화해 간다. 이것은 사람은 자신이 맡은 사회적 역할이나 자신이 입은 제복의 영향력으로 언행이나 심리가 변화될 수 있음을 연구해 온 사회심리학자들의 오랜 노력을 떠올리게 한다.

아무튼, 그럼으로써 그 사람의 진짜 과거는 묻히고 대신 그 자리에 재창조된 새 과거가 들어선다. 만약 그의 진짜 과거를 아는 사람이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헌재 살아가는 그의 삶이 진실한 과거에 기반을 둔 삶인지, 아니면 거짓된 과거에 기반을 둔 삶인지 판단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한 사람에 대한 기억 대부분이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어떻게 기억하는 것으로 유지되듯 설령 한두 사람이 그 사람의 진짜 과거를 안다고 해도 많은 사람이 그 사람의 재창조된 과거를 진짜로 여긴다면 누가 한두 사람의 말을 믿어줄까. 아마도 이때는 그 사람의 진짜 과거를 밝히는 한두 사람의 말이 거짓이 되고 다수가 믿는 재창조된 과거가 진짜가 되는, 진실과 거짓이 자연스럽게 뒤바뀌는 상황을 목격하리라.

학은 진실을 추구하고 과학은 사실을 추구하지만, 두 학문의 상호간섭적인 영향력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거짓과 진실, 허구와 실재, 꿈과 현실의 경계가 생각만큼 명확하게 딱 그어져 있지 않다. 그뿐만 아니라 때론 우리 자신이 그 경계를 뭉개면서 서로 대치되는 것으로 뒤엉킨 모순적 삶이 가져다주는 환상적이고 아찔한 매혹에 좀비처럼 끌려가게 된다. 『기억을 파는 남자』는 그러한 현실을 사람이 아닌 도마뱀붙이 에울랄리우라의 눈에 비친 모습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吾輩は猫である)』에 등장하는 이름 없는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펠릭스 집에 거주하는 한때 사람이었던 에울랄리우라의 눈과 의식, 전생에 대한 기억, 그리고 꿈으로 그려진 이 소설을 읽노라면 자신의 꿈은 언제나 현실보다 더 생생하고 사실적이라는 도마뱀붙이의 당돌한 의견에 공감하거나, 아니면 묵묵히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억을 파는 남자』를 읽는 동안만큼은 거짓과 진실, 허구와 실재, 꿈과 현실을 구분하려는 독자의 인지 감각은 도마뱀붙이가 내뱉는 관조와 사색의 퀴퀴한 향기가 은은히 묻어나오면서도 강아지가 누워 있다가 막 떠난 자리의 따스함이 나른하게 전해져 오는, 도마뱀붙이의 갈라진 혀끝이 부리는 마술적 조합에서 쏟아져 나오는 언어의 독에 자신도 모르게 마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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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18일 일요일

[책 리뷰] 예수님조차 두 손 두 발 들게 한 ~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조반니노 과레스키)

Mondo Piccolo Don Camillo by Giovannino Guareschi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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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조차 두 손 두 발 들게 한 우리들의 괴짜 신부님!

Original Title: Mondo Piccolo: Don Camillo by Giovannino Guareschi
주교가 웃으며 말했다. “불쌍한 노인을 즐겁게 해주느라 애썼네. 고맙네.” 돈 까밀로가 집으로 돌아와 예수님에게 모든 사실을 말씀드렸다. 예수님은 고개를 흔들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다들 정신이나 갔구나!”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 p312)

학이 시대와 국경, 문화, 언어를 초월하여 읽힐 수 있는 것은 비록 문명 발전과 산업화 정도 여하에 따라 살아가는 겉모양은 다를지라도 사람들이 서로 좌충우돌 부대끼며 갈등과 대립이라는 빈번한 마찰을 빚어낸다는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어디를 가나 비슷비슷하다는 보편적인 인간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히 지칠 줄 모르는 시기와 질투, 한도 끝도 없이 쌓이는 원한, 끝없이 폭발하는 분노와 이 모든 파괴적인 감정을 지배하는 이기심은 인류사의 수많은 전쟁과 혼란, 무질서를 지속적으로 생산한 죄의 씨앗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인류는 자멸하지 않았다. 크고 작은 돌부리에 걸려 이리 튀고 저리 튀는가 하면 때론 천 길 낭떠러지로 몰리는 세기말적 위기를 몇 번 겪기도 하면서 험난한 여정을 걸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는 근근이 굴러왔다. 무엇 때문일까?

마 너무 진부한 대답일지 모르겠지만, 허구한 날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와중에도 단단히 굳은 시멘트도 뚫고 나오는 풀 같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솟아 나오는 ‘정(情)’ 때문이지 않을까. 그중에서도 뭔가 그럴싸한 이유나 동기가 필요한 고운 정보다는 조건 없이 생기면서도 고운 정보다 더 질기고 너그럽다는 미운 정을 특별히 강조한다면, 그렇다면 뽀 강과 아페닌 산맥 사이에 펼쳐진 평야, 그 한 자락에 자리 잡고 흐르는 뽀 강을 배경으로 옹기종기 들어선 작은 마을의 유명한 원수지간인 공산주의자 읍장 뻬뽀네(Peppone)와 신부 돈 까밀로(Don Camillo) 사이의 위험천만하면서도 포복절도케 하는, 그러면서도 때론 눈물샘을 자극하는 감동 어린 이야기가 시대를 훌쩍 뛰어넘고 대담하게 국경을 넘으면서까지도 전해져 내려올 수 있었던 것도 어찌 보면 두 사람 사이의 ‘미운 정’이 두 사람 몸에 난 털만큼이나 잔뜩 박혔기 때문이지 않을까. 만약 그랬지 않았더라면 이미 그 작은 마을은 두 사람에 의해 초토화되었을 테니까. 또한, 미운 정이 두 사람을 고무줄처럼 밀고 당기는 와중에 어느새 몽클몽클 고운 정도 피어나니 두 사람의 이야기가 전 세계 수많은 독자를 웃고 울게 한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뻬뽀네와 돈 까밀로처럼 서로의 얼굴 앞에서는 몇 년 굶은 짐승처럼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하며 으르렁대다가도 돌아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로의 안위를 걱정하고 챙겨주듯, 시기와 질투, 분노와 원한의 파멸적인 감정의 기복 사이에서도 악착같은 미운 정을 피워낼 수 있는, 얼핏 보면 별로 대단한 것 같지도 않은 인류의 적응력이 분노와 탐욕을 이기지 못해 하루하루 구원과 죄악 사이를 넘나드는 우리의 무지막지한 삶이 무지막지하게 분쇄되지 않도록 응집력을 발휘해주는 조그마한 죔쇠로 작용하는지도 모르겠다.

뽀네와 돈 까밀로의 밀접한 사이를 주제넘게 언급하며 ‘미운 정’에 대한 찬사 아닌 찬사를 늘어놓으면서 막상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Mondo Piccolo: Don Camillo)』(조반니노 과레스키 Giovannino Guareschi)의 주인공 돈 까밀로에 대해 한마디로 없이 넘어갔다가 신부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욕바가지만 얻어먹고 끝나면 천운이고, 아슬아슬하게 머리 옆으로 의자가 스쳐 날아가는 아찔한 상황으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고, 그날 꿈자리가 뒤숭숭했다면 기관총이나 박격포 세례까지는 각오해야 할 것이다. 덤으로 영적 사명을 수행하는 신부님의 특권으로 지옥행 표도 떼 놓은 당상이다. 나는 그만한 각오를 다질 배짱도 없거니와 지옥은 더더욱 싫기에 지금부터는 좋든 싫든 돈 까밀로 신부에 대해 몇 자 적어야겠다.

꽤 실력 있는 읍장에 골수 공산주의자인 뻬뽀네가 인민을 위해 일한다면 돈 까밀로는 하느님을 위해 일하는 진짜 신부다. 둘 다 솥뚜껑만큼 큰 손과 딱 벌어진 어깨를 가진 장사에다 입도 걸걸하다 보니 툭 하면 터지는 말싸움이 주먹질로까지 번지는 일이 비일비재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약과다. 성질이 불같은 신부 돈 까밀로는 긴 의자를 마구 휘둘러 대다가 교구 성당에서 잠시 쫓겨나는가 하면, 여세가 불리하면 떡 하니 기관총까지 대동하고 나선다. 어찌 되었든 상대가 75밀리 박격포를 쏘아대면 바로 81밀리 박격포로 대응하는,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지거나 당하고는 못사는 신부가 바로 돈 까밀로이다 보니, 예수님조차도 이런 구제 불능 같은 신부를 타이르고 훈계하는 일은 만만치 않다. 벅차다.

그렇다고 돈 까밀로가 예수님 앞에서라도 고분고분한가? 결국엔 들킬 것이 뻔하면서도 예수님 앞에서조차 뻔뻔하게 이리 속이려 들고 저리 거짓말하며 능청 떨고 구구절절 변명하는 돈 까밀로는 정말 못 말리는 괴짜 신부다. 타고난 사람의 심성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면 바로 돈 까밀로 신부를 두고 한 말이리라. 그럼에도, 그를 미워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사고를 치는 이유가 사적인 탐욕이 아니라 신실한 신앙심과 인민을 위한 마음, 그리고 봐줄 만한 약간의 인간적 나약함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그가 청소년 회관이나 보육원을 새로 짓거나 낡은 종을 보수할 기금을 마련하고자 공갈 • 협박으로도 모자라 약삭빠른 재주(?)를 조금 부려도 제단 위의 근엄한 예수님은 두 손 두 발 들 수밖에 없다. 하물며 우리라고 별수 있나. 그저 포복절도하며 뒹굴다가 때늦지 않게 정신 차리 배꼽을 온전히 지킬 수 있으면 그만이다. 또한, 그는 진정 인민을 위하는 일이라면 철천지원수인 뻬뽀네와도 손을 잡는 분별력 있는 인간적 결점을 보여주며, 어떠한 잘못이든 일단 무조건 오리발 내밀고 보는 현대인의 질 나쁜 처세술과는 달리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속죄함에도 전혀 인색하지 않다. 겉으로는 우람한 풍채에 기관총, 박격포로 무장한 과격한 신부처럼 보이지만, 그 속은 선량한 신앙심과 따스한 정으로 옹골진 인자한 신부가 바로 돈 까밀로인 것이다.

정이 이러하니 신도 종교도 믿지 않는 나이지만, 돈 까밀로 같은 신부가 있는 성당이라면 종지기가 돼서라도 가까이서 살고 싶다.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 돈 까밀로처럼 차지고 즐겁게 호탕하게, 그러면서도 경건하게 참회하며 살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좋지 아니한가. 아무튼,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은 하루하루 살면서 쌓일 수밖에 없는 마음속의 이런 저러한 개운치 않은 앙금을 개운하게 씻겨주는 시원하고 상큼한 청량음료 같은 소설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간결하게 표현하자면 ‘사이다’ 같은 소설이다. 일은 잘 안 풀리고 몸은 지치고 마음은 울적한데, 그런데도 어딘가로 훌쩍 떠날 형편이 못 된다면, 여기 말없이 성호를 그으며 떡대처럼 쫙 벌어진 어깨로 양팔을 벌리고 서 있는 돈 까밀로 신부의 품으로 뛰어들어라. 그럴듯한 진리는 못 찾더라도 마음의 작은 평화 정도는 충분히 구하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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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28일 일요일

[책 리뷰] 가슴속에 품고 있으면서도 감히 실현하지 못하는 꿈을 좇는 ~ 동굴(주제 사라마구)

The Cave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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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속에 품고 있으면서도 감히 실현하지 못하는 꿈을 좇는 인류의 유구한 숙명

Original Title: La caverna / The Cave by Jose Saramago
난 돌 의자에 묶여서 벽만 바라보며 여생을 보내고 싶지는 않아. (『동굴(The Cave, A caverna)』, p461)

거짓의 안락한 삶, 진실의 불편한 삶

르투갈의 노벨상 수상 작가,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의 『동굴(The Cave, A caverna)』은 도시인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고, 문화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모든 기능이 들어선 ‘센터(The Center)’라는 거대한 건물을 중심으로 구획화된 가상의 세계를 통해 자본주의 지배 아래 물질만능주의적인 삶을 추구하게 되면서 삶의 참모습을 보는 눈을 잃은 현대인을 비판한 작품이다.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상품화하는 ‘센터’는 자본주의를 대변하는 괴물답게 끊임없이 확장에 확장을 거듭해간다. 그러던 어느 날, ‘센터’ 지하에서 여느 때와 다름없이 확장 공사를 하다가 뜻밖에도 동굴이 발견된다. 그 동굴은 다름 아닌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Allegory of Cave)’에 나오는 바로 그 동굴이다. 옴짝달싹 못 하게 사슬에 묶인 채 해골로 변한 사람들, 불을 피웠던 흔적 등 주인공 시프리아노(Cipriano)가 ‘센터’의 경비원이자 사위인 마르살(Marçal) 덕분에 다른 사람들 몰래 살펴볼 수 있었던 동굴의 모습은 플라톤이 묘사한 모습 그대로였다. 평소에도 모든 것이 갖춰진 ‘센터’에서 사는 것이 왠지 감옥에 갇혀 사는 것처럼 답답했던 시프리아노와 그의 딸 마르타(Marta), 그리고 평소 ‘센터’ 신봉자였던 마르살조차 동굴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센터’를, 그리고 플라스틱 상품으로 직업을 잃기 전까지 도공으로서 시프리아노가 3대째 도자기를 굽던 정든 가마와 집을 버리고 떠난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현실의 안주를 버리고 미래를 향한 기약 없는 여정에 오르게 하였을까? 그것은 결국에는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그 꿈을 꿀 때만큼은 이루어질 것 같은 꿈을 향한 무모한 도전일까? 아니면 세상의 진실과 참모습을 쫓으려는 어리석은 열정과 지나친 호기심이었을까? 정확히 무엇이라고 꼭 집어 말할 순 없지만, 아마도 그것은 환상을 갖는 건 잘못이 아니지만, 자신을 속이는 게 잘못이라는 시프리아노의 철학처럼 자신이 세상의 그림자 속에 갇혀 지내고 있다는 진실을 외면한 채 눈앞의 현실만이 실재라고 자신을 속이는 짓은 차마 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찌 되었든 동굴의 존재를 확인한 사람으로서 그림자가 세상 전부라고 믿고 살다 죽은 해골을 외면하고 기존의 삶과 가치관을 그대로 유지한 채 자신과 세상을 속이며 살아간다는 것은 기아, 난민, 기후변화, 빈곤, 생태계 파괴 등의 ‘불편한 진실’을 가끔씩 마주쳐야 하는 우리보다 더더욱 께름칙한 일임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하루하루 매시간 일분일초가 불편한 진실의 연속일 테니까.

가슴속에 품고 있으면서도 감히 실현하지 못하는 꿈을 좇는 인류의 유구한 숙명

프리아노가 발견한 동굴 속의 사람들이 물리적인 힘인 사슬에 묶여 어둠 속에 갇혀 있다면, 시프리아노를 비롯한 현대인은 현실을 지배하는 주축 시스템이자 가치관인 자본주의에 갇혀 대안적 삶을 포기한 외곬의 길을 가고 있다. 맹목적인 자본주의적 삶은 현대인을 물질적 탐욕의 늪 속으로 물귀신처럼 끌어당기고, 늪에 빠져 삶의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허우적거리는 현대인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오로지 동물적 생존 본능과 어떻게든 탐욕을 채워줄 물질적 결과물을 얻기 위한 무한 경쟁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어제의 만족이 오늘의 만족을 보장하지 못하듯 그들 앞엔 오늘의 만족이 결코 내일의 만족을 기약하지 않는다는 불안정하고 불투명하면서도 비정한 내일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설령 경쟁에서 승리해 뭔가를 얻어내더라도 신상품의 홍수와 대중 미디어의 부추김 속에서 그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일시적인 만족감을 일으킬 뿐, 새로운 자극에 곧바로 발기한 욕망의 더듬이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끊임없이 돌아가는 욕망의 굴레를 무심하게 굴릴 뿐이다. 반면에 경쟁에서 낙오되거나 좌절당하면 빈곤의 나락과 사회적 소외 계층으로 한없이 추락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병적인 두려움과 공포가 현대인을 정신적으로 압박하고 있다.

물리적 사슬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쉽게 끊어버릴 수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사슬은 자신의 힘, 즉 시프리아노처럼 각성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이상 그 속박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폐해가 담론으로 오가지만, 그것을 개선할 의지가 조금이라도 엿보이면 발아 단계에서 말살시켜 버리거나, 혹 실천적 행동으로 옮겨지더라도 곧 거대한 힘에 묻혀버리고 마는 우리의 현실은 시스템의 속박이 얼마나 견고하지를 말해준다. 우리는 문화, 문명, 관습, 규칙, 제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보이지 않는 속박 속에서 지식이 어릿광대의 현란한 무대 소품 같은 돈벌이 수단으로 퇴락한 씁쓸한 광경을 너무나도 많이 목격했다. 많이 안다고 해서 그만큼 자유로운 것은 아니지만, 동굴 속의 그림자만이 세상의 참모습이며 지금 가는 길만이 바른길이라는 아집과 오만은 우리를 더더욱 부자유스럽게 죄어온다.

그렇다고 각성한 시프리아노 가족이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떠났다는 사실만으로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희망이 뒤섞인 어두침침한 미명을 밝혀주는 것은 아니고, 자본주의 시스템을 버리고 어떠한 대안적 삶을 선택한다고 해서 더 나은 삶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속박에서 벗어나 세상의 참모습을 보는 것이 꼭 행복한 삶과 미래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동굴 밖의 모습이 세상의 참모습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며 마트로시카라는 러시아 인형처럼 동굴 밖이 또 다른 동굴 속이고 그것이 또 다른 동굴 속의 연속일 수도 있다. 이처럼 세상의 참모습을 찾으려는 인간의 열정과 희망은 결국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허망한 시도로 끝날지도 모르는 허무의 나락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뭔가를 찾아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은 (옮긴이의 말처럼) 가슴속에 품고 있으면서도 감히 실현하지 못하는 꿈을 좇는 지적생명체가 짊어질 수밖에 없는 인류의 유구한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마치면서...

품 『동굴(The Cave, A caverna)』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평생 책을 읽으면서도 그냥 종이 위에 있는 단어들밖에 읽지 못해 그 단어들이 빠르게 흐르는 강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에 불과하다는 걸 결코 깨닫지 못한다. 그 징검다리는 우리가 반대편 강가로 건너갈 수 있게 해주려고 그 자리에 있는 것이라고, 중요한 건 바로 그 반대편 강가라고 시프리아노는 말한다. 그런데 만약 독자가 가진 반대편 강변이 단 하나뿐이라면, 그래서 건너고 건너 도착한 곳이 어제의 그 강변이고 내일도 역시 그 강변이라 해도 그것이 문학 읽기를 그만두어야 할 이유는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반대편 강변이 하나뿐이라 해도 그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그 강변이 변화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즉, 동굴 속에 갇혀 탈출하기가 어렵다 해도 그 동굴 속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그래서 동굴 밖 세상을 꿈꾸고 탐구하려는 유구한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면, 그 힘은 참된 문학 읽기를 통해 얻을 수도 있겠다는 나의 아둔한 의견을 끝으로 따분했던 『동굴(The Cave, A caverna)』 후기를 이쯤에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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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30일 목요일

[책 리뷰] 조국의 근대화에 난파된 이름 모를 작은 목선 ~ 미스 양의 모험(조선작)

Miss Yang's Adventures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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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근대화에 난파된 이름 모를 작은 목선

Original Title: 미스 양의 모험 by 조선작
난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어. 다만 나는 내 꿈을 좇아왔을 뿐이야. 꿈을 좇아서 여기까지 달려온 거야. (『미스 양의 모험』, p386)

미스 양, 드디어 서울로 상경하다!

안의 경제적 사정으로 고등학교 1학년 중퇴한 열여덟 살의 양은자는 펜팔을 시작했다. 혹시나 해서 잘 팔리는 주간잡지에 약간의 양념을 가미한 인적사항을 실었는데, 얼마 후 한두 통씩 도착하던 편지가 어느덧 사백칠십팔 통의 편지가 쌓이게 되었다. 그 많은 편지 중 태반은 시시껄렁한 것들이었고, 그중 마음에 드는 몇 통에 편지에 대해서만 은자는 답장하곤 했다. 은자는 나름대로 비밀을 지키려고 애썼다. 하지만, 괜히 참견하길 좋아하는 우체부의 넓은 오지랖과 하필 우체통이 은자를 몰래 사모해오던 소꿉친구 기수네의 라디오방 앞에 있었기 때문에 기수에게 덜미가 잡혀 편지를 압수당하는 수치를 당한다. 이로 말미암아 은자의 별거 아닌 펜팔 이야기는 가족들뿐만 아니라 온 동네방네로 퍼지는 별 거지 같은 일이 다 일어나 은자의 펜팔은 시들해질 수밖에 없었다.

위문편지로 알게 된 육군 병장에 대한 짝사랑의 실패에 따른 쓴맛에 이어 펜팔 사건으로 동네북이 되는 흉한 몰골까지 당한 은자는 정말 자기의 인생이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 돼버리리라는 망상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인생의 막다른 길에 몰린 것 같은 은자는 고민 끝에 오래전에 막연하게 결심해 왔던 대모험을 감행하기로 한다. 바로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는 것이다. 은자의 대결심은 훗날‘대모험’이라 감히 칭할 수 있겠지만, 그때는 그냥 철없는 시골 처자의 ‘가출’이나 다름없었다.

아무튼, 그 시대 무작정 상경한 대부분의 소년 소녀들이 그러하듯, 은자의 서울 진출이 확실한 자각과 뚜렷한 신념을 바탕으로 결정된 것이기보다는 막연한 호기심과 막연한 기대, 그리고 막연한 희망과 막연한 가능성 등이 그들을 움직인 것이다.

때마침 어디론가 사라졌던 양아버지이자 자칭 군납업자가 놀랍게도 삼만 원을 어디선가 마련해 왔고, 가슴 설레면서 그 돈을 훔친 그 날 은자는 바로 서울로 떠났다. 한마디로 야반도주를 한 계집애가 된 것이다. 그리고 한 달포쯤 시들시들 풀죽어 있던 기수는 어느 날 마침 기수 아버지가 돼지 팔아 온 돈 오만 원을 훔쳐 가자고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은자는 서울로 향하는 입석 기차 안에서 고통스러운 여행을 견디며 내심 이렇게 다짐했다.

‘돌아갈 때는 좌석 번호가 있는 특급열차를 타야지. 아니야, 택시는 대절하지 못 할라구. 또 모르지, 자가용 타고 고향 갈는지도…….’

드디어 혼잡하고 분주한 서울역에 도착한 은자. 은자는 물론 사전에 공중전화 사용법과 서울의 지도를 보고 지리도 연구해 두었다. 또한, 동대문구 전농동에 사는 시집간 언니와 형부의 전화번호와 주소도 수첩에 적어 왔고, 만약을 대비해 이 년 전에 은자보다 먼저 서울로 돌격해 미아리 양말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친구 경혜와 펜팔로 사귀었던 몇몇 남자들의 연락처도 준비했다. 그러나 형부와 경혜와는 도통 통화할 수가 없었고 마침내 전화 통화에 성공한 것은 펜팔로 알게 된 한 남자가 있는 신학대학생의 가정교사 집이었다. 그리고 그 대학생은 기꺼이 은자가 있는 서울역으로 나오기로 약속한다.

우리의 미스 양이 지키고 싶어 했던 ‘선’

리의 미스 양, 은자는 그 당시 시골에 사는 소녀라면 한 번쯤 상상했을 법한 일을, 그리고 많은 소년 소녀들이 과감히 저질렀던 ‘무작정 상경’의 대모험을 감행한다. 은자의 서울 상경에 대한 배경은 출세와 돈에 대한 억척스러운 집념보다는 어떻게 하든지 성공을 거두어서 이제까지 자기를 길러 오느라고 고생한 이리댁의 여생을 편안하게 해주고 동생들을 대학까지 공부시켜보자는,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부모와 그런 가정에서 자라는 동생을 둔 누나, 오빠, 형이라면 누구나 바랄법한 기특하고 소박한 소망이다. ‘어떻게 하든지’라고 은자는 말하지만, 사실 서울 진출 초기만 해도 은자는 막연하게나마 지켜야 할 선을 나름대로 마음속에 그었다.

은자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여자 중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괜찮은 한국남자나 외국인을 꾀어 한순간의 신분 상승을 노리는 야심에 찬 기회주의적인 여자들도 있었다. 『영자의 전성시대』로 유명한 조선작의 『미스 양의 모험』에도 은자의 고향 친구 경혜는 양말 공장, 비어 홀을 전전하다 결국에는 소망대로 한국으로 관광 온 50대 일본 남자를 만나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런 경혜를 두고 은자는 돈도 좋지만 그렇게 혼까지 팔아먹을 수는 없다며, 적어도 좋은 남자 하나를 사랑할 수 있는 맑고 투명한 혼만은 고이 간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쩌다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된 권씨 일가의 마나님에게 식모살이를 권유받자 식모살이를 하려고 서울까지 올라왔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모멸감까지 느낀다. 또한, 은자가 아직 시골에 있을 때 서울에서 놀러 와 은자의 가출을 부채질하는 경혜를 보고는 기껏 양말 공장의 공순이나 할거하면 서울 안 간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시대를 불문하는 남자들의 채워지지 않는 정욕

자는 무작정 상경한 소녀들이 주로 몸담는 식모살이나 공장 노동자는 경멸했으며, 경리 학원이나 타자 학원 같은데 다녀 떳떳한 직장에 취직하고 떳떳한 길을 밟아 성공하고 싶었다. 어떻게 보면 그리 큰 꿈도 아니다. 하지만, 시대가 좋지 못했다. 무허가의 직업소개소는 은자 같은 이들에게 뒷돈을 요구하기 일쑤였고, 요정이라고 속인 다음 반강제로 데리고 간 곳은 다름 아니라 허름한 니나놋집이었고, 그것도 모자라 햇빛도 들지 않는 음침한 방에서 감금 생활과 ‘여관 출장’을 강요당했다. ‘자립하기를 원하는 여자들’을 데리고 있는 지배인은 회비라는 명목으로 부당하게 착취했으며, 이러한 구조적 악습은 요정, 비어 홀, 카바레, 목욕탕 등 하층 노동자들이 주로 일하는 곳에서 그들을 더욱 고단하고 좌절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이러한 사회적인 부당한 대우 속에서 은자를 더욱 괴롭힌 것은 양의 탈을 쓴 늑대 같은 남자들의 시도 때도 없이 들이미는 정욕이었다.

은자가 상경 첫날 만난 신학대학생이라고 속인 문대성, 장차 일류 가수로 출세할 것이 틀림없는 자기에게 일찌감치 프러포즈를 해두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것이라고 자신만만했던 세차원 길병수, 치과대생이라고 속인 소매치기 구상철, 열여덟 살밖에 안 된 다방 주방에서 일하던 머슴애 차군 등 은자를 만나는 남자들의 목적은 단 한 가지, 고이고 고인 정충을 쏟아붓고 싶은 동물적 욕망뿐이었다.

누가 그들을 ‘종점’으로 몰아붙였는가?

자는 상경 때만 해도 나름대로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키고 싶었다. 몸을 파는 유혹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림과 불면을, 연금과 약탈을, 배회와 허망을, 실망과 분노를 그리고 이루어지지 않는 조그마한 소망들과 채워지지 않은 사랑의 갈증을 겪으면서” “돈은 가장 어두운 곳에 또는 가장 더러운 곳에 흔하게 널려 있다는 깨우침이라든가 남자는 동물과 사람의 중간쯤 되는 동물이라는 각성, 또는 세상이란 얼마나 어리숙한 인간들의 집합인가 하는 데 대한 인식 따위의 총체가 은자를 가만히 비극적으로 눈뜨게” 한다. 또한, “마침내 자신의 순결 같은 것이 남자들의 애타는 요구에 비해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에 대해서 슬프게 유념하기” 시작한 은자는 온갖 치졸한 방법을 다 동원하여 끈질기게 매달렸던 남자들의 힘겨운 요구에도 지켜왔던 마지막 보루, 상경 초기 막연하게나마 지켜야 할 선을 넘어서게 된다. 그렇게까지 해서 도착한 그곳은 동료이자 고참인 미스 유의 말대로 ‘종점’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우리나라의 산업화 • 도시화에 따른 사람 사는 모습의 변화에 대해 남다른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 것이 문학의 주제나 조형의 뼈대가 되어 줄 것이라는 확실한 신념을 가져서는 아니었고, 날로 비대해져 가는 도시의 한 서민으로서 느끼는 소외감과 열등감이 도리어 도전적인 흥미를 부채질하지 않았는가 싶다. (「작가의 말」 중에서)

숨 쉴 틈도 없이 치고 달리는 도시화와 산업화에 편승해 소박한 꿈을 이루고자 무작정 상경한 시골 청소년들은 ‘조국의 근대화’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조국의 근대화나 산업화, 자본주의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결코 사람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음주운전처럼 안전한 속도와 정해진 규칙을 준수하지 않고 미친 듯이 내달렸고, ‘빨리빨리’라는 단 한마디로 민족성을 대변할 수 있는 시대답게 과속으로 맹렬하게 달리던 산업화를 조기에 이룩하려는 국가적 탐욕은 마땅한 희생이 필요했다. ‘한강의 기적’은 참말로 맞는 말이었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소박한 꿈조차 체념하게 만드는 잔인한 도시

소한 나에게 있어서 최인호와 함께 1970년대 하면 떠오르는 작가 조선작의 『영자의 전성시대』, 『성벽』 등의 중단편과 첫 장편 『미스 양의 모험』은 산업화에서 소외된 도시 하층민의 삶을 적나라하게, 그렇지만 값싼 동정이나 연민에는 휩싸이지 않는 절제된 문장으로 작품을 완성했다. 여기에 그만의 독특한 글쓰기 스타일, 뭍으로 막 올라온 붕어처럼 파닥거리는 생동감과 『영자의 전성시대』에서 유감없이 보여준 거칠면서도 재치있는 매우 맛깔스러운 글쓰기는 순수하게 텍스트를 읽어내는 재미만으로도 독자를 유쾌하게 만든다. 참고로 난 소설을 읽을 때 자신만의 개성 있는 글쓰기를 구사하는 작가를 높이 평가하는데, 그런 점에서 나쓰메 소세키의 담백한 문장은 평생 잊을 수 없으며, 그 독특한 문장의 멋 때문이라도 가끔 다시 읽고 싶어진다.

아무튼 『미스 양의 모험』에서 조선작은 소박하지만 나름대로 원대한 포부를 안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한 수많은 청소년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서울에서 겪어야 했던 다사다난한 삶을 은자의 7년간 서울살이를 통해 대변하고 있다. 상경 초기에만 해도 순결을 지키고자 했던, 진실한 사랑을 믿었던 당차고 억새며 약간의 순박함도 간직했던 우리의 은자가 세상 풍파에 닳고 닳은 여자들이 도달하기 마련인 ‘종점’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조선작은 딱 잘라 ‘체념’이라고 말한다.

세상 누구도 은자를 진실하게 맞이해 주지 않았다. 비집고 들어가려야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냉담한 콘크리트의 벽들 사이에 갇혀 외롭고 쓸쓸했다. 외로움과 쓸쓸함을 달래줄 믿음직스럽고 따뜻한 어깨를 간직한 든든한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 은자의 주변엔 어떻게든 은자를 한 번 안아보려고 침을 질질 흘리는 발정 난 양의 탈을 쓴 늑대뿐이었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낯선 서울에서 은자는 늘 이방인이었다. 그리고 사방은 어수룩한 사람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적(敵)들이었다.

은자는 피곤했고 이 모든 넌더리에 그만 지쳐버렸다. 그래서 모든 걸 체념했다. 상경할 때 마음먹었던 소박한 꿈이나, 돈을 벌더라도 최소한 지켜야 할 선 같은 애초에 지키지도 이루지도 못할 것들을 체념했다. 이제는 고액의 수입보다는 터무니없을지라도 안정된 삶과 휴식이 필요했다. 조선작은 은자는 조난당한 난민이 아닐까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엇에 조난당했다는 말인가. 그것은 홍수나 지진 따위가 아니다. 차라리 그런 자연재해에 조난당한 난민이라면 구제할 길은 얼마든지 있으니 다행일지도 모른다. 은자가 당한 재난은 바로 조국의 근대화라는 돌풍이었다고 조선작은 말한다. “돌풍의 와중에서 마침내는 형체도 없이 난파해 버린 하나의 작은 목선”, 그것이 바로 양은자다.

‘여름 해가 지다’나 ‘유리문 안에서’도 그랬지만, 거의 3년 전에 쓴 글을 이제야 올리는 이 게으름과 불성실함이란! 된장 고추장처럼 마냥 묵혀둔다고 조악한 글이 절로 살아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3년 전에 쓴 글이라 그런지 ‘리뷰’를 쓰는 방식이 지금과는 사뭇 다르다. ‘줄거리’를 앞에 붙이는 것이 꼭 독후감을 쓰는 것 같다. 지금은 책의 내용에는 구애받지 않고 책을 읽고 떠오르는 느낌이나 감상을 적으려고 노력 중이다. 아무튼, 지금도 밀린 ‘책 리뷰’ 글일 수두룩한데 앞으로는 좀 부지런히 글을 올려야겠다. 이러다 내가 불의의 사고나 병으로 죽으면, 다른 것은 미련이 없지만, 비록 쓰레기 같은 글이지만 이것만은 좀 미련이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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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26일 일요일

[책 리뷰] 한 잔의 원두커피처럼 씁쓸함 뒤의 개운함, 그리고 ~ 유리문 안에서(나쓰메 소세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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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잔의 원두커피처럼 씁쓸함 뒤의 개운함, 그리고 따뜻함이 담긴

원제: 硝子戶の中 by 夏目 漱石

아무리 좁은 세계라 하더라도 그 나름대로 사건은 일어난다. 그리고 자그마한 나와 넓은 세상 사이를 격리시키고 있는 이 유리문 안으로 이따금 사람이 들어온다. 그게 또 나로서는 전혀 뜻밖의 사람들로 이 또한 전혀 뜻밖의 말이나 행동을 하기도 한다. 나는 흥미에 가득 찬 눈으로 그런 그네들을 맞이하거나 보낸 일조차 있다. 나는 그런 일들을 여기에 조금 써보려고 한다. (『유리문 안에서』, p10)

매일처럼 유리문 안에 앉아서, 아직 겨울이다 겨울이다 하고 있는 사이, 봄은 어느결에 저만큼 다가와 내 마음을 휘젓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리문 안에서』, p159)

병인 위궤양과 감기 등의 병치레로 쇠약하진 나쓰메 소세키(夏目 漱石)가 병상에서 일어나 겨우 집안 정도를 거동할 수 있을 무렵에 쓴 『유리문 안에서(硝子戶の中)』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해인 1915년 1월부터 2월에 걸쳐 아사히 신문에 연재되었다. 자신이 다음 해에 죽으리라는 것을 꼭 집어 예견할 수는 없었겠지만, 오랜 지병인 위궤양과 신경쇠약 때문에 자신의 삶이 곧 죽음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어느 정도 예감한 듯, 죽음에 대한 상념과 고찰뿐만 아니라 과거에 대한 회상을 주로 담은 『유리문 안에서』는 집필 시기였던 겨울만큼이나 쓸쓸하고 적막한 죽음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앞둔 사람이 신변 정리를 하듯, 과거, 현재를 반추하고,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지는 인과 관계 등을 되돌아보는 삶에 대한 담담한 자기 성찰과 회고가 담긴 이 수필은 유리문 하나로 세상과 격리된 채 양지바른 툇마루에 앉아 명상에 잠겨 ‘자신의 영혼이 자유롭게 노니는 대로’ 붓을 휘둘러 완성된 작품이다. 곧 맞이할 것 같은 죽음을 떠올려야만 하는 사람들의 막막한 불안함 속에서도 죽음을 숙명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삶을 해탈하고자 하는 의지가 자아내는 영혼의 여유로움을 은근히 느낄 수 있는 수작이다. 한편으로는 이 모든 것을 속세와는 ‘유리문’ 한 장으로 격리된 툇마루에서 홀로 숙고해야만 하는 자의 쓸쓸함이 독자의 심금에 잔잔한 울림을 전해주기도 한다.

떻게 보면 (너무나도 유명한) 나쓰메 소세키의 이름 없는 고양이, 누런 점박이 강아지 헥토르, 저자의 사진을 담고 싶다는 사진사, 자신의 기구한 인생을 고백하며 인생의 조언을 구하는 여자 손님,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 원고를 들고 평가를 받고자 찾아오는 사람, 한시나 하이쿠를 써달라고 멋대로 단자쿠와 선물을 보내는 사람, 일찍 죽은 형제와 지인, 그리고 여전히 마음속에 어른거리는 올 성근 감색 홑옷이나 조붓한 검은 공단 오비를 두른 그리운 어머니 이야기 등 한 개인의 과거와 주변을 훑는 신변잡기 따위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쓰메 소세키 특유의 재치와 관조적인 담백한 문장은 한 귀로 흘려도 무방할 듯한 사소하고 소소한 개인의 일상을 허탈하게 웃고 넘기기엔 무척이나 아쉬운 그럴듯한 이야기로 끌어올린다. 한편으로는 그의 다른 작품에서는 엿보기 어려웠던 나쓰메 소세키의 일상적인 모습과 사유가 담겨 있어 매우 친근감이 느껴진다.

은 각 이야기의 마무리는 친근한 무언가를 갑자기 잃어버리는 듯한 상실감이나 처량함, 때론 믿었던 누군가에게 버려진 듯한 씁쓸하고 허탈한 여운을 남기기도 하지만, 그런 씁쓸한 뒷맛을 소처럼 되새겨 보면 막 내린 따끈한 원두커피처럼 씁쓸함 뒤의 구수한 개운함이 온몸을 따뜻하게 퍼져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반복되는 일상에 지치고 삶의 과중함에 억눌려 노곤해질 대로 노곤해진 영혼의 각성을 위한 천연의 강장제가 될 수도 있으며, 바쁜 일상의 굴레를 잠시 중단하고 자신의 삶을 반추해 보는 소중한 시간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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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19일 일요일

[책 리뷰] 미학적 가치가 자아내는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존엄성 ~ 여름 해가 지다(옌롄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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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적 가치가 자아내는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존엄성

원제: 夏日落 by 閻連科
자오린이 말했다. “빌어먹을, 지는 해를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풀어지는 것 같군그래.” (『여름 해가 지다(夏日落)』, p261)

서 전문 작가라는 불명예인지 명예인지 알 수 없는 알쏭달쏭한 호칭을 달고 다니는 중국 작가 옌롄커(閻連科)의 『여름 해가 지다(夏日落)』는 군대 사회의 일상화된 부정 • 부패, 그리고 병영에서 일어난 총기 도난 사건과 한 병사의 자살 사건으로 빚어지는 출세 지향적인 중대장과 지도원 간의 암묵적 갈등과 긴장을 통해 중국 사회에 만연한 가식과 위선을 폭로한 비교적 짧은 분량의 소설이다. 한편으로는 소설 속에서 자살한 병사의 이름 샤를뤄(夏日落: 여름 해가 지다)의 뜻처럼 황하고도(黃河故道)에서 지는 석양의 아름다움을 수준 높은 미학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감성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를뤄가 무엇 때문에 자살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지만, 그가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 쓰여있듯 샤를뤄는 석양이 하늘을 가르는 미세한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고요해서 누구라도 그곳에 도착하기만 하면 마음이 백지장처럼 깨끗해질 것 같은, 그곳의 지는 해(日落)의 장엄한 아름다움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은 듯하다. 그런데도 그는 자살을 선택했다. 여름 해에 의해 뜨겁게 달구어진 대지는 해가 지면 서늘한 기운에 가늘게 몸서리를 치고, 사람의 뜨뜻한 피도 결국엔 우물물처럼 식는다. 여름 해가 질 때 태어나 여름 해가 질 때 세상을 떠난 샤를뤄를 통해 저자 옌롄커는 쳇바퀴처럼 돌고 도는 인생의 무상함을 말하고 싶었을까. 생존의 의미를 잃어버린 한 인간에 대해 역설하고 싶었던 것일까.

자살 사건으로 출세에 대한 희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짐으로써 삶의 목적을 유실한 중대장과 지도원은 샤를뤄가 극찬한 여름 해자 지는 장관을 감상하며 자살 사건으로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던 지난날의 응어리가 자신들도 모르게 풀어짐을 느낀다. ‘우리가 살면서 뭘 더 바라겠나? 자기 인생의 몫을 살아내는 것뿐이지’라는 지도원의 체념 아닌 체념의 말처럼 그들은 다시 삶을 환기시키고 자신들을 추스른다. 한 사람에겐 죽음의 이정표가 된 여름 해가 지는 경이로운 광경이 또 다른 사람에겐 나침반이 되어 목적 없이 표류할뻔한 삶의 방향을 잡아준 것이다. 생존의 의미를 잃어버린 인간에게 여름 해가 지는 장관은 죽음이라는 영원한 안식을 주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으론 위안과 동정심을 자아내는 등 모순적인 의미로 표현되고 있다. 생존의 의미를 잃어버린 인간을 묵과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회유하며 제 갈 길로 보내려고 하는 『여름 해가 지다(夏日落)』의 이중성은 비록 삶의 목적과 의미를 상실한 인간일지라도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존엄성만큼은 놓치지 않으려는 옌롄커의 남다른 의지는 아닐까.

일 나누는 인사처럼 군대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를 신랄하게 비난하기보다는 똥을 싸면 으레 밑구멍을 닦듯 천연덕스럽게 꾸며대는 것도 묘미이지만, 여름 해가 지는 황하고도의 아름다운 운치에 푹 빠져 일상과 경쟁에 지친 노곤한 마음을 깨끗이 비울 수 있는 잠시 쉬어 가는 짬을 주는 것도 이 작품의 또 다른 묘미이다. 한마디로 매일 입지는 않지만, 잊을만하면 요긴하게 쓰이는 유행을 타지 않는 옷처럼 두고두고 곁에 두고 위안을 얻고 싶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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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9일 목요일

[책 리뷰] ‘찰칵’, 앨범 속에 간직하고픈 추억 ~ 시로밤바(이노우에 야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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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칵’, 앨범 속에 간직하고픈 추억 같은 이야기

원제: しろばんば by 井上靖

고사쿠는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할머니가 참 많이 늙어버렸음을. 마을의 어느 노인보다도. (『시로밤바(しろばんば)』, p434, p296)

큰집 식구들 말대로 할머니는 오래 못 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문득 ‘세상사 서글픈 일이 가득하다’라는 시험문제 속 문장이 떠올랐다. 인생이란 참으로 서글픈 일투성이였다. 정신이 이상해져 버린 이누카이 선생, 갈수록 흉하게 늙어가는 할머니,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버린 사키코. 별나게 고즈넉한 그 날 밤, 인생이라는 것이 너무도 서글픈 얼굴을 하고 고사쿠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시로밤바(しろばんば)』, p434)

상은 한 번 지나가면 절대 돌아오지 않는 아쉬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어제’와 ‘오늘’이 그러하고 ‘내일’도 그러할 것이며, 우리의 ‘유년 시절’, ‘젊은 시절’, 그리고 애틋한 ‘첫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말 못 할 비밀이 숨겨져 있고, 행복했던 때보다 슬펐을 때가 더 많았을지라도, 단지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과거는 소중한 ‘추억’으로 포장되어 언제든 다시 꺼내볼 수 있도록 마음 한 켠 빛바랜 서랍 속에 고이 간직된다. 마음속 서랍이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을지는 몰라도 빅뱅 후 우주로 뻗어 나간 시간의 지배에서는 벗어날 수 없는 법, 망각이라는 세월의 성배 속에서 어느새 비밀은 녹이 슬어 감흥 없는 고물 덩어리로 퇴색되고, 슬픔에서 감로주처럼 발효된 시큼 달콤한 향기는 행복했던 기억에 풍미를 더해주면서 추억은 한 사람의 정신적 평온과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된다. 이처럼 초장부터 주절주절 ‘추억’을 주워 담은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거칠지만 순박하고 목가적인 시골의 삶을 담은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의 『시로밤바(しろばんば)』는 누구나 한 번쯤은 겪고 싶은, 혹은 간직하고 싶은 아름다우면서도 슬프고 달콤하면서도 씁쓰름한 우리 모두의 ‘추억’ 같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의 유년 시절 추억이 떠올리는 것조차 진저리가 날 정도로 비참하다면, 이 작품으로 그 비참함을 어루만지며 소소한 위안을 받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본의 국민 작가로 노벨상 후보였던 이노우에 야스시의 자전적 장편 소설이기도 한 『시로밤바(しろばんば)』는 복잡한 집안 사정으로 도시에 사는 가족과 떨어져 한적한 시골 온천 마을 유가시마에서 소학교 시절을 보내게 된 고사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고사쿠가 흙집에서 증조부의 첩과 단둘이 살게 된 복잡한 집안 내력만큼 고사쿠를 둘러싼 인간관계 역시 평범하지 않다. 첩에게 자신의 남편을 빼앗긴 원한에 사무친 큰할머니가 사는 큰집 친척들에게 고사쿠는 원수에게 붙들려간 인질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고사쿠에게 있어 할머니는 유일하게 자신을 애지중지 보살피고 어떤 일에서도 편들어 주는 든든한 보호자다. 고사쿠는 강아지 새끼처럼 할머니를 쪼르르 따르지만, 당연히 큰집에선 이런 고사쿠가 못마땅할 따름이다. 고사쿠에겐 큰집 식구들이야말로 피를 나눈 혈육이지만, 큰집에 가도 툭하면 미운 오리 새끼 취급받기 일쑤니 역시 할머니와 흙집에 사는 게 더 좋다.

견원지간처럼 날카롭게 대립하는 할머니와 큰집 식구들과의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시도 때도 없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해묵은 감정싸움이 가져오는 갈등을 경험하는 고사쿠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듯 마음의 상처를 입기도 한다. 남몰래 사모하던 이모의 때 이른 죽음에서는 쓰라린 상실의 슬픔을 맛본다. 자신보다 어리지만 조숙했던 한 소녀에게서 사춘기의 풋사랑을 느낀 고사쿠는 예전처럼 멋대로 여자아이들을 대할 수 없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는 걸 문득 깨닫기도 한다. 이 모든 경험은 고사쿠를 소년에서 어엿한 청년으로 성장시키는 쓰기도 하고 달기도 한 인생의 자양분이다.

교생활, 수험 준비, 여행, 친구, 소녀, 복잡한 친척 관계, 낯선 도시 생활과 정겨운 시골 등 차곡차곡 나이를 먹고 학년을 올라가면서 겪는 다양한 경험 속에서 고사쿠에게 가장 가깝고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는 작품의 제목 ‘시로밤바’(백발의 할머니)에서도 알 수 있듯 바로 할머니다. 그래서 할머니를 바라보는 고사쿠의 인식 변화는 고사쿠의 내적 성장의 변화를 감지하는 척도다. 아침마다 할머니가 준비한 오메자(단 과자)를 받아먹고 나서야 일어나는 늦잠꾸러기 ‘아가(고사쿠)’는 어느 날 문득 할머니의 가늘고 앙상한 팔과 눈에 띄게 허리가 굽은 할머니의 등을 통해 비로소 할머니가 참 많이 늙어버렸음을 깨닫는다. 자신을 애지중지 키워준 할머니, 혹은 엄마가 늙어가고 있음을 문득 깨달았을 때만큼 온몸을 통째로 불사르고 싶을 정도로 슬프고 억울한 일이 어디 또 있을까. 그 착잡하고 무겁고 쓰라린 심정을 통해 한층 더 성장한 고사쿠는 죽기 전에 고향을 방문하고 싶은 할머니 여행에 기꺼이 동참하게 된다.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는 ‘아가’ 고사쿠에서 이제는 할머니를 돌봐줄 수 있는 어엿한 고사쿠로 성장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러일전쟁을 막 끝내고 1차대전을 지나치는 20세기 초 격동기임에도 ‘전쟁’, ‘천황’, ‘식민지’, ‘군인’ 등의 당시 역사적 상황을 대변해주는 정치적 단어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흥미롭다. 의도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역사적 배경이 제거된 유가시마 마을은 마치 동화 속나 등장할법한 평온하고 목가적인 마을과 다름없다. 투박하면서도 어딘가 정겹고 소박한 일본 특유의 시골 풍경은 『시로밤바(しろばんば)』가 발표될 당시 패전의 참혹한 고통이 아직 가시지도 않은 채 인내와 고난의 재건 시절을 보내던 일본인에게 달콤한 솜사탕과도 같은 추억과 위안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때 그 시절을 서정적인 필치로 한껏 담아낸 이 작품은 일본 국민이 간직한 ‘일본의 추억’이고 그래서 그들은 이 작품에 매료되었던 것이리라. 비단 일본인에게뿐만 아니라 목가적인 생활을 동경하는 나 같은 도시인에게도 서정적인 분위기로 한층 더 아름답게 포장된 고사쿠의 추억은 은근한 시샘을 일으키기에 충분하고도 남는다.

『시로밤바(しろばんば)』를 읽는 내내 오래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방학만 되면 연례행사처럼 시골에 있는 외할머니댁으로 놀러 가곤 했는데, 양반처럼 상투를 틀고 곰방대로 담배를 피우시곤 했던 엄격한 외할아버지와는 달리 외할머니는 고사쿠의 할머니처럼 손자들에게 이것저것 챙겨주시기에 바쁘셨다. 특히 도시 생활을 하는 내가 시골 밥상이 입맛에 맞지 않을까 봐 걱정하셨던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 몰래 다락방에 – 시골집의 다락방은 곶감, 약과, 사탕, 말린 생선, 누군가 사다 놓은 통조림, 먹다 남은 술 등 아이들에게 있어 보물 창고나 다름없었다 - 라면을 숨겨 놓았다가 외할아버지가 외출하실 때 종종 끓여주시곤 했다. 사실 난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거나 잘 먹는 식성이지만, 아무튼 그때 외할머니가 끓여주신 이름 모를 라면의 맛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절로 뜨거워진다. 하지만, 고등학교, 대학교, 군대를 갔다 오고 난 후부터는 특별한 이유 없이 명절 때조차도 잘 내려가지 않게 되었고, 그러다 말년에 치매에 걸리신 외할머니는 아들 셋이 건장하게 살아있음에도 딸 집들만을 버려진 개처럼 배회하시다 우리 집에서 쓸쓸하게 돌아가시고 말았다. 당시 일을 핑계로 외할머니 일을 모조리 어머니에게만 맡겨둔 채 틈틈이 손 한 번 따스하게 잡아드리지 못했던 것이 너무나 후회막심하다. 그래서 그럴까. ‘시로밤바’가 ‘아가’ 곁을 떠나던 날, 고사쿠가 아닌 또 한 명의 아가도 통렬한 회한의 눈물을 흘렸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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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30일 월요일

[책 리뷰] 우리 인생처럼 ‘희로애락’이 교차하는 ~ 수달 타카의 일생(헨리 월리엄슨)

Tarka the Otter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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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생처럼 ‘희로애락’이 교차하는 수달 타카의 일생

원제: Tarka the Otter by Henry Williamson

타카는 텅 빈 나무 속에서 배고픔과 추위에 떨며 어미가 돌아와 주지 않을까 기다리던 그 시절 이후로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다시 느꼈다. (『수달 타카의 일생』, p129)

살아오면서 수많은 슬픔과 공포를 겪으며 참을성을 키운 회색주둥이는 타카의 상처 난 얼굴과 목을 보듬어 안아주고 핥아주었다. (『수달 타카의 일생』, p134-135)

고 작은 지류들이 합쳐져 바다로 연결되는 생태 환경을 가진 영국의 ‘투 리버(Two Rivers)’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수달 타카(Tarka)의 일생을 묘사한 『수달 타카의 일생(Tarka the Otter)』의 시대적 배경은 여전히 수달 사냥이 널리 행해지던 1920년대다. 그래서 타카를 비롯해 얼마 남지 않은 다른 수달들은 번식과 먹이, 잠자리 문제는 둘째치고 연례행사처럼 벌어지는 사람들의 수달 사냥에서 무사히 살아남아야만 한 살을 더 먹을 수 있는, 마치 목숨을 건 줄타기에 해마다 내던져지는 듯한 위태로운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타카의 일생에도 이러한 위험은 수시로 닥친다. 덫에 걸려 발가락 세 개를 잃기도 하는 타카는 거대한 사냥개 무리를 대동한 사람들의 무지막지한 사냥으로 가끔 모습을 내비치던 아빠와 외로운 자신을 엄마처럼 보살펴 준 연상의 여인 회색주둥이, 그리고 눈이 멀고 턱이 산산이 부서질 때까지 사냥개 무리와 싸운 용감한 큰아들 타콜을 잃는다. 타콜을 잃고 난 직후 타카는 마치 자신의 소중한 가족을 잃은 것에 대한 복수라도 하는 듯 노련한 수달사냥개 데드락의 숨통을 기어이 끊어놓고 사람들 앞에서 유유히 바닷속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사냥개 무리와 사람과의 처절한 사투를 벌이면서 9시간이나 쫓기던 타카의 온몸은 이미 만신창이다. 타카가 살아있다는 마지막 증거는 바닷속에서 힘없이 솟아오른, 첫 번째,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공기 방울이 전부다. 발로 어미의 코를 톡톡 치고 수염을 물고 잡아당기면서 장난을 치던 개구쟁이 새끼에서 회색주둥이를 만나 사랑을 나누고, 아빠가 되어 자식도 낳고, 부모와 자식을 잃는 상실감까지 맛본 의젓한 어른으로 성장한 타카는 그렇게 우리의 시야에서 영영 사라진다. 그 이후 그가 운 좋게 살아남아 늙은 수컷 수달 말랜드 지미만큼이나 오래 살았는지, 아니면 그날 그렇게 양양한 바다의 품속에 고이 잠들었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생 생태계에서 최상위에 존재하는 육식 포식자 수달의 일생을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정교하고 세심하게 묘사한 헨리 월리엄슨(Henry Williamson)의 『수달 타카의 일생(Tarka the Otter)』은 비단 수달의 삶뿐만 아니라 수달이 살아가는 환경, 즉 수달이 주로 서식하는 바다, 하천, 습지에서 수달과 함께 공존하면서 각자 나름의 생태적 지위를 차지하는 도감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법한 다양한 야생 동식물의 삶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한 폭의 풍경화처럼 조화롭고 다채로운 모습으로 묘사된 ‘투 리버’의 생태 환경은 추억 속의 활동사진처럼 서정성과 역동성이 고루 느껴질 정도로 아름답다. 그뿐만 아니라 타카가 밟은 풀 한 포기와 물속에서 뿜어내는 공기 방울 하나뿐만 아니라 소리를 통한 서로 다른 종끼리의 크고 작은 소통까지 놓치지 않는 묘사는 세밀함의 극치를 보는 듯하다. 자연과 관계된 것이라면 작은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한 필사적인 묘사에는 먼 훗날 자연이 심각하게 파괴된 지구에서 살게 될 후세들을 위한 안타까움과 쓸쓸함이 묻어나는 배려가 엿보인다. 일본의 하천 개발로 수달과 그 생태 환경이 사라진 것처럼 미래에는 수달뿐만 아니라 『수달 타카의 일생』에서 묘사한 수생 생태계 역시 일부러 ‘정글의 법칙’에나 나올법한 오지로 떠나지 않는 이상 문명화된 사람이 모여 사는 주변에서는 두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비록 수달뿐만이 아니라도 단지 즐기기 위한, 재미를 위한, 스포츠의 일종으로 행해지는 사람의 사냥 때문에 수많은 야생 동물들이 겪어야 할 고통과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앞서 ‘슬픔’이라 표현한 것에 많은 사람은 반감을 품을지 모르지만,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듯, 동물들도 사람처럼 예민한 감수성을 가졌다. 단지 서로 의사소통 방법이 달라 그들의 감정을 사람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뿐이다. 아마 강아지와 함께 오랫동안 산 사람은 강아지가 나름의 감수성과 교감 능력을 지닌 예민한 동물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내가 이런 얘기를 굳이 하는 이유는 『수달 타카의 일생』에 공개된 타카의 일생은 마치 사람의 삶처럼 ‘희로애락’이 교차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달들은 사람처럼 상실과 사별의 슬픔의 겪기도 하지만, 이러한 슬픔을 역시 사람처럼 망각을 통해 극복하기도 한다. 때론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 마음에 둔 짝을 빼앗기는 비련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타카의 어미는 타카가 힘차게 장난치는 모습에 여느 엄마들처럼 대견스러워 기뻐하고, 오랫동안 혼자 지내온 늙은 수달 지미는 오랜만에 다른 수달을 만나 함께 놀 수 있게 되자 행복에 겨워한다. 새 아빠와 함께 떠난 엄마 때문에 쓸쓸해진 타카는 연상의 여인 회색주둥이를 통해 외로움을 극복하고 새롭고 달콤한 새 삶을 시작하지만, 왁자지껄한 사람 소리와 시끌벅적한 사냥개의 소리가 들리면 타카의 일시적인 행복도 무너지기 마련이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처럼 사냥을 즐기고 사냥감을 가지고 장난치는 잔인하고 비열한 육식 포식자다운 습성도 보여준다. 아무튼, 사람의 도를 넘어선 사냥만 아니었더라면, 아마도 타카는 회생주둥이와 꽤 오랫동안 신혼의 달콤함을 만끽했을 뿐만 아니라 손자 • 손녀들이 태어나 어른으로 성장하는 모습도 뿌듯하게 지켜봤을 것이다.

리버 지역의 장어들은 연어나 무지개송어의 알과 치어들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수달들은 이런 장어들을 또한 신나게 잡아먹는다. 겉으로는 아름답고 평온해 보이는 자연 속에 가려진 먹이 사슬의 엄격함은 다소 잔혹해 보인다. 그러나 먹고 먹히는 과정에서 조화와 공존, 그리고 지속가능성의 위대함을 완성한 자연이야말로 경이로움 그 자체다. 모자람과 지나침이 없는 조화와 공존 속에서 지속가능성은 완성되었고, 이런 순환 속에는 저마다 맡은 역할에 충실해 온 미생물부터 최상위 포식 동물에 이르는 다양한 생명체의 드러나지 않는 현명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만류의 영장이자 지적이고 이성적인 존재임을 자부하는 인류가, 자연을 정복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장담한 인류가 이 순환을 무참히도 깨버렸다. 인류의 지나친 탐욕과 이기심에 의해 이미 많은 종이 멸종했으며 또 다른 종들이 멸종 위기에 처해있다. 사람의 배은망덕하고 후안무치한 파괴와 착취 행위가 언제 끝날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지만, 마찬가지로 온갖 상처를 입은 자연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역시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수달 타카의 일생』은 인류가 자연을 정복하고자 하는 필요 이상의 도락이 어떻게, 그리고 그토록 무심하고 잔인하게 생태계의 한 종을 짓밟는지를 만천하에 고발한다. 먹이 사슬의 최상위에서 군림하지만, 스스로 목을 조이듯, 혹은 뿌린 대로 거두듯 그 먹이 사슬에 균열을 일으키는 생태계 파괴와 기후 변화의 압박을 받는 인류의 위태로운 삶은 마치 사람의 지나친 탐욕에 희생당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동물, 그리고 그 수많은 동물 중 오늘날 알게 된 수달 타카의 삶을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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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29일 일요일

[책 리뷰] 한 인력거꾼의 이유 있는 타락 ~ 낙타샹즈(라오서)

Camel Xiangzi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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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력거꾼의 이유 있는 타락

원제: 骆驼祥子 by 老舍

“나라고 노력 안 해본 줄 알아? 그래 봤자 털끝만치도 남은 게 없잖아.” (『낙타상즈』, p327)

강철 인간이라고 해도 이 그늘에선 못 벗어나. 맘씨 좋은 건 또 무슨 소용이 있고! 인과응보라고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어! (『낙타상즈』, p349)

말에 ‘고진감래(苦盡甘來)이니 화복무문(禍福無門)’이라고 했다. 고생 끝에 즐거움이 오니 착하게 살면 언제가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공평하지도 정의롭지도 희망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우리는 도무지 피할 도리가 없는 한여름의 불볕더위만큼이나 뜨겁게 체감하면서 살고 있다. 중세 교회가 민중의 고질적인 가난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교회와 영주의 권위에 대한 복종을 합리화시키고 영속시키고자 현실에서의 모든 고생에 대한 보상으로 천국을 약속하고 성서와 교리를 자기들 입맛에 맞게 난도질하면서 민중을 기만했듯, 어쩌면 ‘고진감래(苦盡甘來)이니 화복무문(禍福無門)’이란 말도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봉건시대의 중국 백성에게 부질없는 희망을 심어주고 달래주는 한편으로는 을러대고자 위정자들에 의해 유포된 감언이설 같은, 그래서 혹시 있을지 모를 폭동이라도 방지해 볼 심산의 기만적인 표어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지나친 비약이자 비관적이고 회의적인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만큼 가진 것 없는 민중에겐 (예나 지금이나) 현실은 너무나도 가혹하다. 그래서 라오서(老舍)가 질질 끌고 온 인력거꾼 샹쯔(혹은 샹즈? 祥子)의 일은 남의 일처럼 허탈하게 웃어넘기기에는 예사롭지가 않다.

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부모 • 형제 • 친척 • 친구도 없는 천애의 고아지만, 여자, 술, 담배, 도박도 하지 않고 어디 한 군데 한눈파는 일 없이 인력거 끄는 것을 천직으로 알고 성실하고 착실하게 살아온 샹쯔. 말주변도 없고 그래서 더더욱 과묵하지만, 그 침묵 속에는 세상을 향한 원망도 두려움도 말끔하게 봉인되어 있었을 만큼 그의 타고난 천성은 낙관적이고 유순했다. 『낙타상즈(骆驼祥子)』의 샹쯔는 열심히 성실하게 자기 일만 잘하면 언젠가 자신의 인력거도 마련하면서 덩달아 생활도 안정되고 그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나아지리라고 믿었다. 오랜 고생 끝에 처음으로 자신의 인력거를 장만했을 때까지만 해도 세상은 샹쯔의 소소한 바람대로 그럭저럭 호응해 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전쟁 때문에 인력거를 군인들에게 강탈당하고, 피땀 흘려 모아놓은 돈도 형사 나부랭이에게 빼앗긴다. 반쯤 속아서 한 결혼이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된다는 뿌듯한 마음에 내심 기대하던 샹쯔는 아내와 첫 아이마저 그놈의 돈 때문에 전부 잃고 만다. 이쯤에서도 얄궂은 운명의 장난은 끝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또다시 샹쯔에게 ‘새 출발’이라는 희망의 미끼를 던진 운명은 샹쯔가 처음으로 진정 좋아하게 된 여인의 비극적인 결말을 눈물겹도록 멋들어지게 연출함으로써 샹쯔의 마지막 희망과 기회마저 물거품 속으로 사그라트리고 만다. 이후 샹쯔는 어떻게 되었을까? 자신의 ‘개’ 같은 운명을 절실히, 그리고 절망적으로 깨달은 샹쯔가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하염없이 시궁창이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감히 누가 막을 수 있을까? 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을까?

도 끝도 없이 치러내야 하는 치열한 삶의 경쟁에 지치고 턱없이 높은 경쟁의 문턱 앞에서 좌절하고, 이를 개선하고 바로잡아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보란 듯이 자신들의 사리사욕만 챙기는 것에 절망하고 낙담한 사람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세상이라 해서 ‘헬조선’이라 부른다. 물론 이런 이유로 애초에 (나처럼?) 노력조차 해보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비열하고 무책임한 짓거리는 없지만, 개미처럼 일하고 머리가 터지고 온몸의 피부가 부르터지도록 삶의 전선에 부딪혀도 겨우 입에 풀칠이나 면할 수밖에 없는 타인들의 비장한 삶을 보면 감히 뛰어들 엄두도 못 낸다. 도대체 얼마나 노력해야 샹쯔 같은 소박한 사람들의 소박한 꿈과 행복을 이룰 수 있을지 속 시원히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물며 평생 개미처럼 일만 하면서, 그리고 평생 피똥 싸도록 노력만 하면서 살고 싶은 사람도 없다. 정말 이런 생각들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여 보면 가끔 얻어지곤 하는 소소한 쾌락과 행복을 맛보고자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과연 운이 좋은 일인지 되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안국진 감독, 이정현 주연의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2014)」는 샹쯔에게 일어난 일이 비단 과거, 그것도 역사적 격동기이자 혹한기를 살았던 특정 인민들에 국한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영화 속 수남과 북경에서 인력거를 끌던 샹쯔가 그랬던 것처럼 노력의 노력의 끝장을 본 사람은 자포자기적인 심정 속에서 자기연민에 빠진 끝에 사악하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생사의 결전을 앞둔 독사처럼 독이 오른다. 그것은 아무리 착실하게 노력해도 무엇 하나 이루어지지 않는 기만적인 세상은 극단적인 생존 경쟁의 치열한 장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자기연민과 이기심 속에선 하나하나가 자신의 피와 땀의 대가이니 배려란 있을 수 없다. 그러하기에 세상인심은 더욱 각박해지고 경쟁은 더더욱 치열해진다. 이런 악순환의 늪에 한 번 빠지면, 다급한 마음에 자기만 살고자 물귀신처럼 서로 물고 늘어질 뿐이니 그 누구도 헤어나올 길 없다. 한마디로 세상은 ‘생지옥’이 된다.

인력거꾼의 이유 있는 타락은 사회적 배려와 운명적 관용이 무너진 상태에선 선과 악의 경계, 그리고 양심과 도덕이 가지는 구속력 또한 맥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또한, 그 누구도 샹쯔와 같은 일을 겪는다면 샹쯔처럼 파렴치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많은 범죄가 더는 떨어질 나락도 없는 궁지에 몰린 사람들에 의해 자포자기적인 심정으로 저질러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낙타상즈』 샹쯔의 일은 옮긴이의 해석처럼 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선 사회의 비극이자 재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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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22일 일요일

[책 리뷰] 칭다오의 조가비 ~ 속에서 들려오는 ‘한숨’의 불협화음(라오서)

Seashells on Qingdao Beach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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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가비 속에서 들려오는 ‘한숨’의 불협화음

“나는 그들의 악행들을 알죠. 그들은 선물 ᅳ 뇌물을 받으며 장사하는 사람을 억압하죠. 그들은 밀가루를 ‘헤로인’으로 둔갑시키고, 그들은 구휼미 도급을 맡아서 …… 나는 다 알아요. 내가 만약 그들의 비리를 누설하면, 총살감이에요, 총살!”(『칭다오의 조가비』, 「신시대의 구비극」, p113)

이상이란 아마 영원히 실제 생활과 일치될 수 없으며, 원앙새의 다채로운 깃털처럼 자연스럽게 조화미를 배합하듯이, 철학자일지라도 그의 인생철학과 일상생활을 완전히 하나로 연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칭다오의 조가비』, 「새로운 햄릿」, p184)

화인민공화국 설립 전 이미 「인력거꾼(혹은 낙타 샹쯔)」이라는 작품으로 서방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중국작가였던 라오서(老舍)와의 첫 만남이다. 라오서를 선택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해리슨 E. 솔즈베리(Harrison E. Salisbury)의 『새로운 황제들(The New Emperors: China in the Era of Mao and Deng)』(박월라 • 박병덕 옮김, 다섯수레)를 읽다가 문화대혁명의 광풍에 휩쓸린 끝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라오서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베이징에 살던 라오서는 홍위병에게 끌려가 구타를 당하고 1966년 8월 25일 타이핑 호수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홍위병에게 살해당하고 호수에 버려진 거라는 소문도 있었으나 솔즈베리는 호숫가에서 시체가 발견되었을 때 그의 손에 무언가 쓰다 남긴 종잇조각이 쥐어져 있었다는 점과 8월 24일 ‘한 늙은이’가 종일 벤치에 앉아 있었다는 타이핑 공원 수위의 증언을 근거를 라오스가 자살했다는 설에 무게감을 둔다. 그가 죽은 후 수개월 동안 타이핑 호수에서는 상당히 많은 시체가 건져졌으며, 호수는 라오서가 죽은 후 도시 개발 과정에서 메워졌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나서 라오서의 소지품들은 모두 가족에게 돌려주었으나 그 종이는 없었다고 한다. 자신의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예감한 라오서가 마지막으로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 놓았다면, 이제는 그 종이에 적힌 내용은 그가 생전에 남긴 작품들로부터 유추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오서의 중단편집 『칭다오의 조가비(Seashells on Qingdao Beach)』는 1930년 영국에서 귀국한 저자가 1937년까지 머물렀던 칭다오에서 남긴 작품으로 약삭빠른 자본주의적 세계관에 잠식당하는 전통적 가치관(「오래된 상점」), 과거의 위세를 가슴 속에 묻은 채 은거하는 고수(「단혼창」), 흑심을 품지 않았기에 오히려 출세할 수 있었던 기가 막힌 처세술(「들은 이야기」), 한 가족의 위기와 기사회생에서 드러나는 이해타산적이고 기만적인 사회(「신시대의 구비극」), 자신의 딸에게 타도 당하는 매국노(「방안에서」),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짓눌려 허우적대는 나약한 지식인(「새로운 햄릿」), 약자에겐 강하고 강자에겐 약한 자기 기만적이고 계산적인 처세술이 부른 가난한 인력거꾼 아들의 죽음(「부고」) 등 1편의 중편과 6편의 단편이 들어 있다. 최하위층인 인력거꾼부터 점원, 은둔 고수, 지배 계급, 관료, 지식인, 상인, 지주 등 다양한 사회 계층 인물들의 일상과 소문, 신념, 계층과 세대 간의 갈등과 대립을 통해서 산업화와 자본주의화가 가져온 몰인정한 변화 속에서 부침하는 중국 사회의 단면을 소박하게 담아냈다.

『칭다오의 조가비』란 제목은 칭다오 해변에서 어린 딸의 손을 잡고 해변을 걷으며 모래밭에 별처럼 점점이 박힌 조가비를 줍는 평온하고도 아름다운 일상을 속에서 비롯되었다는 하지만, 그 크고 작은 조가비의 매끄러운 속껍질에 투영되는 작품들은 어린 딸의 손을 잡고 한가로이 해변을 걷는 부녀의 모습처럼 마냥 평온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다. 가만히 조가비에 귀 기울여 보면 제철소의 용광로도 식혀버릴 것 같은 차갑고도 묵직한 한숨이 조가비의 차가운 표면을 타고 귀를 통해 냉랭하게 전해져 온다. 아스라이 사라져가는 옛것과 지나간 옛 영광에 대한 안타까움의 한숨,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민들의 서러움과 고통에 찌든 한숨, 인민의 등골을 뽑아먹고 사는 자의 포식에 겨운 한숨, 현실 도피적인 지식인의 자조 섞인 한숨 등 각양 각층이 만들어내는 한숨의 불협화음은 『칭다오의 조가비』 속에 진주처럼 숨겨진 중국 인민의 피와 땀, 인고의 세월이 응축된 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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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8일 일요일

[책 리뷰] 옷깃을 스치는 살근한 바람 같은 이야기 ~ 다리 위 미친 여자(쑤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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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깃을 스치는 살근한 바람 같은 이야기

원제: 紙上的美女 by 蘇童

언뜻 보기에는 눈에 띄는 미모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시들시들했다. 다리 위 미친 여자는 유난히 외롭게 보였다. (『다리 위 미친 여자』, 「다리 위 미친 여자」, p10)

융산의 눈에 고인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금 그녀는 진심으로 이 거리를 벗어나 아주 멀리 떠나고 싶었다. 이제 진정으로 고향을 떠난 것이다. 그녀만 아는 약간의 추억을 제외하고, 이 거리는 그녀를 위해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정말로 이 거리를 떠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다리 위 미친 여자』, 「집으로 가는 5월」, p348)

신은 과거를 기억하는데 과거는 일찌감치 당신을 잊어버린 것 같아 씁쓸함과 허탈함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집으로 가는 5월」에 나오는 엄마 융산은 아들과 함께 몇 년 만에 고향을 찾아왔지만, 개발과 도시화로 폐허가 된 자신의 옛집에서 추억을 북돋아 주고 향수를 달래줄 아스라한 그 무엇도 발견하지 못한다. 얼마 전까지 고행에 살던 남동생은 연락도 없이 옛집을 팔고 이사를 가버렸고, 황폐하고 쓸쓸한 거리에는 죄다 낯선 사람들뿐이다. 사업차 고향을 방문한 샤오멍(「대기 압력」)은 중학교 시절 물상 선생님으로 보이는 듯한 노인네가 안내하는 숙소에 숙박한다. 난방도 제대로 안 되는 썰렁하고 볼품없는 시설이 가져온 험악하게 일그러진 분위기 때문에 샤오멍은 사제관계를 밝히기 어려워한다. 짜증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찝찝한 기분을 뒤로하고 샤오멍은 베란다 밖으로 펼쳐진 황량한 주변 모습을 무심코 바라보다 자신이 다니던 옛 학교가 앙상한 뼈대를 드러낸 채 철거 중인 것을 보게 된다. 「다리 위 미친 여자」는 화려하게 차려입은 치파오를 뽐내고 다녔던 찬란했던 과거 속에서 자란 환영의 나무에 위태롭게 매달린 앙상한 잎사귀들로 현실을 덮어보려 하지만, 오히려 냉혹한 현실에 반격당한 그녀는 ‘미친 여자’로 낙인찍힌다 …… 그래서 과거는 과거 속에 묻어둘 때만 가치가 있는 것인지로 모른다. 기억에서 나오는 순간 과거는 모진 세월과 냉정한 현실에 의해 오염될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퉁(蘇童)의 『다리 위 미친 여자(紙上的美女)』는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쓸쓸함과 애틋함, 혹은 잊고 싶은 과거에 대한 애도와 비애가 아롱아롱 스며 나오는 소담한 단편집이다. 필자가 지금까지 읽은 쑤퉁의 다른 작품들(『쌀』, 『화씨 비가』)과는 달리 인간성과 삶, 그리고 운명에 대한 소름 끼치는 묘사와 집요한 파헤침은 이 단편집에서만큼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신 그 자리에 과거와 현실에 대한 차분한 관조가 들어섰다. 그래서 생뚱맞게 물귀신이라든가, 태어나자마자 털이 난 거대한 고추를 가진 아기가 등장할지라도 단편집 『다리 위 미친 여자』는 지나치게 격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차분하지도 않은 채, 설교에 지친 중생들의 지루함을 해탈시키고자 14편의 짧은 이야기로 설법하는 스님처럼 유유자적 제 할 이야기를 다 한다. 그것은 뭔가 낯설고 이질적이면서도 삶의 한 단면을 발효시키는 효소가 되는 시금털털한 이야기다. 그래서 옷깃을 스치는 살근한 바람처럼 결코 우리와 동떨어지지 않은, 절대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사실 『다리 위 미친 여자』는 저자 쑤퉁의 다른 작품들처럼 뭔가 극적이고 자극적인 것을 바라고 책장을 펼쳐 든 독자라면 실망감을 안겨줄 수 있는 단편집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자극적인 음식에 물린 사람들이 기필코 가정식을 찾듯, 이 작품은 엄마의 푸근한 사랑이 담겨 있는 가정식처럼 소박하고 소탈하면서도 푸짐하고 푸근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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