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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8. 18.

[책 리뷰] 멀고도 가까운 당신, 그대 이름은 ‘광기’ ~ 광기와 문명(앤드류 스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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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당신, 그대 이름은 ‘광기’

Original Title: Madness in Civilization: The Cultural History of Insanity by Andrew Scull
내 해석은 정신의 의학에게 받아 마땅한 것을 주고자 하면서도 받아 마땅한 것보다 더는 주지 않고자 하는 해석이 될 것이며, 우리가 광기에 따르는 불행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는커녕 광기의 뿌리라도 제대로 이해하려면 아직도 얼마나 멀었나를 강조하는 해석이 될 것이다. 그리고 광기에는 어떤 한 묶음의 의미와 관습에도 견줄 수 없이 커다란 사회 • 문화적 특징과 중요성이 있음을 인정하는 해석이 될 것이다. (『광기와 문명』, p21)

세상이 미쳤을 때

국의 모던록 밴드이자 내가 즐겨 듣는 노래 <1/10>, <유자차> 를 부른 브로콜리 너마저(broccoli, you too>)가 2010년 발표한 2집 앨범의 타이틀곡 <졸업> 은 ‘이 미친 세상에’라는, 단순 명료하지만 다소 불손한 가사에 막막한 미래를 앞둔 대학생들의 불안과 분노를 집약시켰다. 한편, 파괴적인 장소라는 이유로 정신병원을 맹렬히 반대한 스코틀랜드의 정신과의 로널드(R. D. Laing) 랭은 정신분열증이란 그가 미친 세계라고 공표한 세계에 맞닥뜨린 최고 제정신의 한 형태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제대로 미치지 않은 대학생들은 노래를 부르며 무지막지한 사회에 대한 분노와 암울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삭히고, 우리가 ‘미친 사람’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오히려 세상이 미쳤다며 자신들은 그저 그런 미친 세상에 적응한 것일 뿐이라고 항변한다. 세상이 미친 것일까? 정말로 세상이 미칠 수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 세상이 미쳤다고 말하는 사람이 미친 것일까?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세상이 미쳤을 때가 종종 있었다는 것이다. 굳이 멀리 되돌아갈 필요도 없다. 난징대학살, 베트남 전쟁, 한국 전쟁, 세계 1 • 2차 대전, 나치가 자행한 ‘홀로코스트’, 그리고 앞에 언급한 사건들만큼은 유명하지는 않지만, 전쟁에 열정을 쏟아붓느냐 궁핍해진 정부가 정신병원 예산을 삭감함으로써 환자의 1/3을 간접적으로 살해한, 충분히 ‘약한 말살’이라고 불릴만한 조치도 있다. 그리 놀랄 것도 없지만, 분명히 사회, 민족, 국가, 혹은 세상 전체가 미칠 때가 있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세상이 미쳤을 때, 광기는 인류가 자부하는 문명의 범주에서 크게 비켜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영악한 일부는 광기를 발산하는데 문명의 이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나치의 산업적이고 기계적이고 효율적인 학살 시스템은 문명의 진보가 없었다면 절대 실현될 수 없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한순간에 폭망시켰던 원자 폭탄은 ─ 보는 사람의 눈을 한순간에 멀게 하는 핵폭발 순간의 그 강렬한 섬광만큼이나 ─ 첨단 과학의 눈부신 상징 중의 상징이지 않았던가? 마지막으로 일사불란한 학살 시스템을 가동시키고 인류 문명이 집약된 원자 폭탄 발사 스위치를 누른 장본인들이야말로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자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 자부하는 문명인이지 않았던가?

‘광기’, 그것은 ‘문명’의 지울 수 없는 일부!

‘광기’와 ‘문명’, ‘어딘지 모르게’가 아니라 확연하게 서로 어긋날 뿐만 아니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처럼 들린다. 인류는 지구상에서뿐만 아니라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로는 우주에서 유일하게 문자를 기반으로 한 언어로 소통하는 지능적 동물이다. 인류는 자연을 마냥 착취하는 야만적인 수준을 넘어서 자연을 능수능란하게 조작하는 훌륭한 기술과 뛰어난 능력, 그리고 집요한 의지까지 고루 갖췄다. 이로써 지속가능한 착취를 달성하고자 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동물인 인류의 야무진 염원은 달성된 셈이다. 오래전에 지구를 야심 차게 정복한 인류는 이제 태양계 넘어 광활한 우주를 넘보며 군침을 흘릴 정도로까지 진보했다. 강아지가 주인 손에 들린 뼈다귀를 탐내며 침을 질질 흘릴 수는 있다지만, 지구상의 그 어느 생명체가 감히 우주를 바라보며 그 경이로움에 감명받은 나머지 입을 떡 벌리고 침을 질질 흘릴 수 있단 말인가. 실정이 이러한데, 감히 그 누가 인류와 인류가 이룩한 문명을 보고 ─ 실성한 자가 아니고서야 ─ ‘광기’라는 불경한 단어를 떠올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여기 바로 그 실성한 자가 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광기와 문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하니, 차마 문명인으로서는 입에 언급하는 것조차 민망하고 지성인으로서는 충분히 대경실색할만한 그의 주장은 제대로 실성한 자가 아니고서야 할 말이 아니다. 하지만, 각양각색의 광기로 뒤덮인 세상을 광기 없이 온전하게 통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그의 실성은 이유 있는, 지적으로 우아하고 용기가 가상한 실성이라 말할 수 있으리라.

(말본새가 막 나가다 보니 본의 아니게 실성한 자라고 소개했지만, 진짜 그런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길) 앤드류 스컬(Andrew Scull)이 야심 차게 집필한 『광기와 문명(Madness in Civilization): 성경에서 DSM-5까지, 문명 속의 광기 3000년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놀랍게도 문명과 광기의 관계는 우리의 상상과는 정반대다. 우리의 바람대로 광기는 그저 문명의 끄트머리, 혹은 그 반대편, 혹은 그 변방에 존재하는, 문명의 우수리처럼 별 볼 일 없는 존재가 아니다. 예로부터 광기는 화가, 극작가, 소설가, 작곡가, 성직자, 의사, 과학자의 중심적인 관심 주제의 하나였을 뿐만 아니라, 예나 지금이나 광기로 가득 찬 연극이나 영화를 우리는 즐겨 본다. 특히 광기가 지독하게 들린 살인자를 소재로 한 섬뜩한 공포 영화를 보는 관객은 환호하고 전율에 떨며, ‘이 미친 세상에’ 얼마 안 되는 기분전환 거리로 삼는다. 문학이나 예술에서 광인은 사회에 만연한 허영, 가식, 부조리를 비꼬고 까발리고 풍자하여 대중의 꽉 막힌 심중을 활명수처럼 뚫어주는 없어서는 안 될 소재다. 스컬의 말처럼 광기는 중요한 여러 면에서, 문명의 밖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문명의 지울 수 없는 일부이며, 우리 의식과 일상생활을 끈덕지게 침범하는 문제이고, 따라서 의식의 수면 아래에 잠겨 있는 동시에 절대 그렇지 않은 문제다.

광기를 사회 • 문화적으로 재미나게 통찰한 책

속하지만, 사회적 편견이 물씬 풍기는 단어 ‘광기’와 품위 있지만, 인류의 고독한 오만이 물씬 풍기는 단어 ‘문명’. 왠지 원수처럼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것 같은 두 단어는 사이좋게 각각 인류사의 한 단면씩을, 한쪽은 지극히도 비참하고 한쪽은 지극히도 찬란하게 대변한다. 그렇게 광기와 문명은 자신의 건재함과 위용을 칼춤을 추듯 뽐내고 견제하며 위태롭게 공존해왔다. 세상이 미친 듯이 너도나도 전쟁으로 뛰어들며 광기의 위세를 한껏 드러내면, 이에 질세라 문명은 전쟁을 빨리 끝내겠다는 그럴싸한 논리를 들이대며 첨단 과학의 온갖 잡다한 결과물로 세상을 초토화한다. 문명의 선봉에 섰다고 자부하는 국가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판단 아래 식민지 건설에 매진하고 있을 때, 광기는 문명사회에서는 드러내놓고 발산하기 어려웠던 강간, 살인, 폭력, 약탈 등의 야만적인 쾌락을 식민지 사회에서만큼은 위법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문명이 한 수 위인지, 아니면 광기가 한 수 위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인류 문명의 찬란한 역사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광기는 빠트릴 수 없는 핵심 조미료이다.

이것은 작금의 문명을 힘겹게 이끌어가는 인류를 이해하는 데도 역시 광기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만약 문명과 광기 사이에 ─ 그것의 용도가 무엇이든 간에 ─ 보이지 않는 다리가 놓여 있다면, 그 다리의 길이가 길든 짧든 그것은 멀고도 가까운, 그런 마법의 다리다. 혹은,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유명한 경구처럼 문명이 ─ 재미 삼아서든 연구 삼아서든 ─ 광기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봤기에 가끔 문명이 광기에 휩싸이듯, 광기 역시 ─ 광인 특유의 무분별한 호기심 때문이든 아니면 아무 생각 없어서든 ─ 문명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봤기에 가끔 광기가 문명인 척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아무튼, 『광기와 문명』은 광기와 문명의 문화 • 사회적 변천 과정을 변증법적으로 접근한 매우 흥미로운 책이다. 예부터 지금까지 피와 눈물, 살육과 복수, 갈가리 찢긴 도덕과 인간성 말살 등의 광기로 얼룩진 연극, 소설, 영화 등의 작품들이 ─ 아직 광기 근처까지 가보지는 못했지만, 잠재적으로 광기 보균자라 할 수 있는 ─ 대중의 흐느끼는 환호와 전율 속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처럼 ‘광기’를 다뤘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 책은 독자의 겸연쩍은 호기심을 부채질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광기는 인류의 야릇한 관심과 환호 속에서도 한편으로 비참한 대접을 받아왔다. 감호소와 전기경련치료(Electroconvulsive treatment, ECT), 전두엽 절제술(frontal lobotomy)로 대변되는 매우 문명적이고 사회적인 폭력의 압제를 묵묵히 견뎌야 했다. 신들린 자, 의지박약한 자, 퇴폐한 자, 사회의 찌꺼기라는 무지막지한 편견 속에서 광기는 자신의 존재를 꿋꿋하게 지켜왔다. 그리고 그 존재감은 광인 몇 사람이 의기투합하고 문명의 이기에서 도움을 얻어 자행된 테러에서 여지없이 드러낸다. 그뿐인가? 미친 듯이 빠르고 거칠게 돌아가는 세상은 또 어떠한가? 이곳에서는 폭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지옥에 빠진 구제불능의 영혼처럼 울부짖고, 저곳에서는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를 한탄하는 노예처럼 신음하고 있다. 세상에 만연한 부조리와 불편한 진실을 따라가다 보면 문명이 광기에 오염된 것인지, 광기가 문명을 흉내 내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 책을 읽고 나서도 감히 문명과 광기의 경계를 긋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악마의 구슬림에 넘어간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이거나, 아니면 실성한 자이거나, 그도 아니면 세상 남부러울 것 없는 바보천치다. 여전히 그 원인을 뾰족하게 밝히지 못한 광기는 여전히 문명의 주변을 어슬렁어슬렁 기웃거리며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우리를 들여다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감히 충고하건대, 당신이 아직도 정신질환을 앓는 불행한 사람을 ‘의지가 박약한 자’, ‘인간쓰레기’로 낙인찍는 무식쟁이에다가 시대착오적인 사람이라면 그냥 이 책 『광기와 문명』을 가만히 내버려 두길 원한다. 당신처럼 변변치 못한 사람에게 이 책은 고작해야 광기가 문명 언저리에서 노닥거리다 남긴 반사회적인 흔적을 가십거리로 엮은 그렇고 그런 책정도로나 비칠 테니까. 하지만, 문명과 인류에 대한 보다 심연 하면서도 세밀한 이해에 목마른 독자라면, 인류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심연의 우주처럼 문명이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 아니면 이해하기를 포기한 ─ 광기를 사회 • 문화적으로 이보다 재미나게 통찰한 책은 다시는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꼭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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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8. 11.

[책 리뷰] 언어가 드러내는 우리의 ‘민낯’ ~ 단어의 사생활(페니베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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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드러내는 우리의 ‘민낯’

Original Title: The Secret Life of Pronouns: What Our Words Say About Us by James W. Pennebaker
우리에게는 각자의 <단어 사용 스타일> 이 있다. 자신만의 스타일로 거의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낸다. 그 단어 속에 자신에 대한 단서, 자신에 대한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어딜 가든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만의 <언어 지문> 을 남긴다. 그 지문을 따라 단서를 추적하여 분석하면 그 단어를 사용한 사람의 개인적 세계를 엿볼 수 있다. (『단어의 사생활』, p8~9)

‘글’과 ‘댓글’은 글을 쓴 사람의 ‘인격’

는 인터넷상에서 수없이 마주치는 사람들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조금이라도 짐작할 방법은 그 사람이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등의 SNS나 뉴스 사이트, 포럼, 기타 다양한 게시판에 쓴 글이나 댓글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상대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즉 상대에 대해 완전히 무지할 수밖에 없는 인터넷상에서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건더기가 그 사람이 썼다고 생각하는 ‘글’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심결에, 그리고 습관처럼 남기는 글들이 익명이라는 무시무시한 탈을 쓴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웅덩이에 고이고 고여 글을 쓴 사람조차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숨은 캐릭터이자 사이버 인격이 된다. 비록 내가 쓴 글을 많은 사람이 그냥 지나치거나 대충 흘겨보면서 넘어갈지라도 결국 그것이 쌓이고 쌓여 인터넷에서 ‘나’를 대표하는 하나의 이미지를 형성해간다는 뜻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것들에 대해 누리꾼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무관심과 방관으로 일관한다. 전염병처럼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 한글파괴 현상과 외계어의 범람, 저속한 글들이 난무하는 현실이 그러한 사실을 방증하고도 남는다. 인터넷이 현대 사회가 앓는 만성 질환인 소통의 부재를 완화하는 긍정적 효과보다는 비방, 악담, 욕설 등 마음속에 욱여넣어 두었던 악에 찬 외침을 폭발시키는 스트레스 해소의 공간으로 전락한 것만 같아 씁쓸하다. 물론,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을 지나치게 참는 것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병의 원인이 되는 것처럼 인터넷이라는 익명성이 부추기는 ‘막말’이 개인과 사회에 이바지하는 스트레스 해소 효과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소위 문명인이라고 자부하는 우리가 문명인의 가식과 위선을 인터넷이라는 또 하나의 현실에서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이 만천하에 드러내는 작태는 추하면 추했지 아름다울 리는 없다. 물론 나라고 뭐 크게 다를 것은 없지만, 서로 얼굴을 볼 수 없다고 해서 글을 함부로 내뱉는 사람들과 맞닥뜨리다 보면 한 줄기 차가운 분노와 그 분노를 집어삼키는 슬픔이 내 심장을 꿰뚫고 지나가는 뜨악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내겐 짧게 쓰는 댓글 한 마디도 대수롭다. 타인이 쓴 글의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초등학생 수준보다 못할 정도로 성의가 없거나, 한글파괴와 외계어가 난무하는 형편없는 글이라고 판단이 들면, 그 글을 읽어야 할 필요성이 있더라도 그냥 무시해 버린다(사실 읽어줄 만한 글에는 무성의하다는 불쾌한 기분이 들 정도로 기초적인 국어 표현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하는 글은 없다). 예의상 이렇게 말했지만, 사실 그런 글 중에서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오만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글을 잘 써도 내용이 천박하여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글이 있고, 글을 못 써도 내용이 순수하여 미소를 자아내는 글이 있듯, 이것은 글을 잘 쓰고 못 쓰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내 생각에는 글을 쓴 사람의 ‘성의’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즉, 인터넷에서 누군가에게 사람대접받고 싶다면, 최소한의 성의와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 글을 써야 하지 않을까? 그런 것들이 무시된 글을 읽었을 때, 글을 읽은 사람이 글을 쓴 사람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할까에 대해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그런 막글을 함부로 쓰지는 못할 것이다. 사실 정중하고 우아하게 상대를 비난하는 글도 얼마든지 쓸 수 있는데 그런 막글로 자신의 얼굴을 스스로 더럽히는 짓을 굳이 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능히 그러고도 남는 것이 사람이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는 누구라도 틀릴 수 있고, 나 역시 시시콜콜하게 그런 것들을 지적하는 좀팽이는 아니다. 내 글도 형편없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렇다고 ‘성의’ 없이 막 쓰지는 않는다. 그럴 바엔 아예 글을 쓰지 않는다. 아무튼, ‘성의’ 없는 글은 도무지 읽을 생각이 코딱지만큼도 생기지 않는 것은 나로서도 어찌할 수가 없다.

‘단어’가 우리에 대해 말해주는 것들

터넷에 올리는 ‘글’과 ‘댓글’이 그 사람의 ‘인격’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데, 쓸데없이 장황하게 늘어놓기만 해놨으니, 나도 별수 없는 녀석이다. 그런데 평소의 이런 나의 가치관을 어느 정도 뒷받침해 주는, 너무나도 반갑고 고마운 책을 발견했으니 바로 사회심리학자 제임스 W. 페니베이커(James W. Pennebaker)가 쓴 『단어의 사생활: 우리는 모두, 단어 속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The Secret Life of Pronouns: What Our Words Say about Us)』이란 책이다. 사람은 자신만의 스타일로, 즉 ‘언어 지문’을 남김으로써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를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고, 그 지문을 따라 단서를 추적하여 분석하면 그 단어를 사용한 사람의 개인적 세계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다. 이 책은 ‘글’뿐만 아니라 ‘말’까지 포함했다는 점에서 내 주장(벌써 잊어버렸을 것 같아 다시 말하자면, 인터넷에 올리는 ‘글’과 ‘댓글’이 그 사람의 ‘인격’이다!)보다 더 포괄적이지만, 단어 연구를 위한 컴퓨터 분석을 위해 대화, 연설 등 일상생활에서 서로 주고받는 ‘말’을 ‘글’로 변환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에 실린 수많은 실험이 종이에 쓴 글, 채팅 기록, 인터넷에 올린 글 등 텍스트 자료로 행해졌다는 점에서 내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다시 말해, 일상에서 소통의 목적으로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나 연설, 기자 회견 등의 ‘말’뿐만 아니라 편지, 일기 등의 고전적인 글쓰기부터 SNS, 포럼, 블로그 등의 현대적인 글쓰기까지 모두 포함해서 그 사람이 사용하는 단어는 그 사람의 성격뿐만 아니라 생각이나 감정, 동기 등의 복잡한 심리 상태와 사회적 관계를 알아내는 강력한 ‘도구’인 것이다. 고로 그 사람이 사용한 단어를 분석하면 성별, 나이, 사회적 계층, 감정 상태, 정직성, 성격 유형, 지위, 격식을 차리는 정도, 서열 관계, 지도력, 인간관계의 질 등 한 사람에 대해 정말 많은 것을 추리할 수 있다고 『단어의 사생활』은 말한다. 여기서 ‘글쓰기 치료’를 떠올리는 분들이 쉽게 오해할 수 있는 점이 있는데, 그렇다면 사용하는 단어를 바꾸면 그 사람의 성격이나 심리 상태, 사회적 관계도 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니고, 현재까지의 연구 성과들은 단어는 단지 그 사람의 심리 상태나 사회적 관계를 반영하는 거울로 작동한다고 말한다.

이것만 해도 놀라운 사실이지 않은가? ─ 노파심에 또 한 번 더 말하자면 ─ 인터넷에 올리는 ‘글’과 ‘댓글’이 그 사람의 ‘인격’이라는 내 생각이 그리 허무맹랑한 주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물이 주룩주룩 흐르도록 감개무량하게도 이 책은 모든 수고와 나를 대신하여 훌륭하게 증명해주고 있다. 또한, 이 책이 제시한 흥미로운 사실들은 거꾸로 말해 자신이 쓴 글을 통해 자신조차 눈치채지 못했던 자신의 심리 상태와 성격, 사회적 관계 등도 알아낼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사돈 남 말하는 격이지만, 이 책을 읽는 당신, 남을 험담하기 전에 자신이 한 말과 자신이 쓴 글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뜻깊은 성찰의 시간을 꼭 가져보기 바란다.

‘나’라는 일인칭 단순 대명사에 숨겨진 무서운 비밀

미롭게도 『단어의 사생활』의 모든 장에 걸쳐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이 ‘나’라는 일인칭 단순 대명사이다. 거짓을 탐지하려고 할 때 ‘나’라는 단어는 정직함을 가장 잘 나타내는 표시이며, 부정적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보다 ‘나’라는 단어 사용의 빈도가 우울증을 더욱 정확히 예측한다. 단어 사용 스타일은 우리 정체성을 보여주는 일부임을 실험적으로 증명하는 이 책의 논지는 영어뿐만 아니라 모든 언어에서 발견된다고 한다. 이런 언어 특성이 기원전 5세기에 쓰인 에우리피데스의 희곡에서도 발견된다고 하는데, 나 같은 경우 굳이 그렇게까지 오래된 책을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얼마 전에 읽은 앤드류 솔로몬(Andrew Solomon)의 『한낮의 우울(The Noonday Demon: An Atlas of Depression)』을 살펴본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멋대로 한 페이지를 골라 다시 읽어봤는데, 소름 끼치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앤드류 솔로몬의 글쓰기에는 1인칭 단수 대명사 ‘나’의 사용 빈도가 유난히 높은데, 그것은 조금 전에 언급한 ‘나’라는 단어의 사용이 우울증을 예측한다는 사실과 일맥상통했다. 왜냐하면, 앤드류 솔로몬이 바로 우울증 환자이기 때문이다. 비록 번역된 책이라 원문을 분석했을 때보다 정확도는 떨어질 수 있지만, ‘나’의 사용 빈도가 높은 것이 ─ 저자가 우울증 환자임을 고려하면 ─ 오히려 번역의 정확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편으로 솔로몬의 책은 자아 성찰적인 면이 강한 만큼 어쩌면 ‘나’의 사용 빈도가 당연히 높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인생은 대체로 순조로웠다. 나만한 정도의 조건으로 인생을 시작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우 만족스러워할 것이다. 살아오면서 기준으로는 좋았던 시절도 있었고 불행했던 때도 있었지만 그 불행들은 내게 일어난 일을 설명하기엔 충분하지 못하다. 인생이 좀 더 험난했더라면 나는 내 우울증에 대해 아주 다르게 이해했을 것이다. 사실 나는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나를 절대적으로, 끊임없이, 아낌없이 사랑해 주시는 부모님이 계셨고 역시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 남동생과도 우애가 좋은 편이었다. 완전하다고도 할 수 있는 가정이어서 부모님의 이혼이나 심각한 싸움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부모님은 진정으로 서로를 무척 사랑하셨고 이런저런 일로 가끔 다투긴 했지만 서로에 대한, 그리고 나와 동생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이 흔들렸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이나 중학교 시절에 인기 있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고교 시절 말쯤에 마음이 맞는 친구들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학업 성적은 늘 우수했다. (앤드류 솔로몬, 『한낮의 우울』, 61쪽, 민승남 옮김, 민음사)

‘단어’가 말해주지 않는 것들, 그리고 ‘민낯’을 드러내는 ‘글쓰기’

심결에,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말이나 휘갈겨 쓴 글이 한 사람의 성격이나 심리 상태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사회적 상황을 반영한다는 것이 인터넷에 올리는 ‘글’과 ‘댓글’이 그 사람의 ‘인격’이라는 나의 주장을 전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이 사용하는 단어가 그 사람의 심리 상태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글쓰기나 말하기 스타일은 상황에 따라, 그리고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변한다는 점에서 고정적 특성이 강한 ‘인격’을 반영한다는 나의 주장은 어불성설에 가깝다. 하지만, 글이나 댓글을 보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는 전제는 얼추 들어맞는다. 고로 ‘막글’이나 ‘막말’을 하는 사람을 보고 그냥 그 사람의 인격이 더럽다고 지레짐작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심리 상태나 사회적 상황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무의식중에 ‘막글’이나 ‘막말’을 내뱉게 했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다.

남들이 피하고 혐오하는 거칠고 험한 일을 하고, 혹은 거의 착취에 가까운 노예 계약으로 일을 하면서도 사람들이나 사회로부터 동정은커녕 빈번히 무시당하거나 괄시당한다. 그렇게 사회에 대한 불만이 자기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에 쌓이고 쌓여 무의식적으로 거친 언어를 통해 분출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그 사람의 타고 난 천성을 반영한다고는 할 수 없다. 도둑놈에게도 경찰 제복을 입혀놓으면 보란 듯이 도둑을 잡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번지르르한 말과 그럴싸한 글로 사람들을 홀라당 속이는 위선자는? 이렇게 생각하면 인터넷에 올리는 ‘글’과 ‘댓글’로 그 사람의 ‘인격’을 멋대로 재단해버리는 일이 얼마나 오만하고 위험한 일인지, 새삼스레 깨달을 수밖에 없다. 내 주장은 허무맹랑하다 못해 편견과 선입관을 부추기는 위험하기까지 한 일이었으니, 쑥스럽다 못해 쥐구멍에라도 숨어 들어가고 싶다. 장광설을 내뱉고, 스스로 그것을 무너뜨리니 바보가 따로 없다.

다만, 아쉬운 것은 『단어의 사생활』은 여기까지만 알려준다는 점이다. 단어는 그것이 정확히 어떤 심리 상태이고 어떤 사회적 상황인지, 그리고 왜 그러한 심리 상태와 사회적 상황에 부닥쳤는지, 무엇이 그러한 상황을 유발했는지 등 좀 더 세밀한 부분까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단어는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고, 관심 사항, 사회적으로 관계를 맺는 무언가에 대해 대략적으로나마 넌지시 말해줄 뿐, 좀 더 자세한 정황까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말해주지 않는 것인지, 말해주고 있지만,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편지나 일기 등 종이에 글을 쓰는 일은 줄어들었지만, 이메일, SNS, 블로그 등 인터넷의 보급으로 오히려 예전보다 글을 쓰는 일이 많아진 요즘, 페니베이커 같은 학자들은 더 쉽고 빠르게 자료를 모으고, 그 많은 자료를 컴퓨터 단어 분석 프로그램을 통해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후속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된다면, 우리는 단어가 우리에 대해 시사하는 것들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날도 멀지 않다. 이런 분야의 연구가 더 널리 알려진다면, 앞으로 신입생이나 직원을 뽑을 때, 수필이 필수 항목이자 중요한 잣대가 될지도 모르겠다. 결혼 중매사이트에서 짝을 찾을 때도 마치 궁합을 보듯 구혼자들의 언어 스타일 일치도를 분석하여 짝을 지어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편으로는 SNS나 블로그, 게시판 등에 글을 남긴다는 것이 사뭇 ‘자신의 민낯’을 드러내는 일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에 살짝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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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7. 28.

[책 리뷰] 누가 우리를 걸어 다니는 독성물질 창고로 만들었나? ~ 음식의 역습(마이크 애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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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우리를 걸어 다니는 독성물질 창고로 만들었나?

Original Title: Food Forensics(The Health Ranger's Guide to Foods that Harm and Foods that Heal) by Mike Adams
여러 상황을 종합해보면 우리 후손들이 독성물질의 부작용을 겪지않도록 완전히 막는 것은 이미 불가능하다. 또 독성물질에 대한 노출은 시간이 지날수록 나아지기보다 점점 악화되기 때문에 세대가 계속될수록 부정적 효과는 더욱 심화된다. 이 때문에 인류의 지속 가능성은 점점 위태로워질 것이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불임을 겪는 사람이 증가하고 있으며 암 환자 수는 절망적일 정도로 늘었으며 사람들의 인지기능 역시 약화되는 상황이다. (『음식의 역습』, p35)

산업화가 나은 또 하나의 재앙

‘아는 것이 힘이다(knowledge is power)’라는 잉글랜드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격언이 있다. IT 기술의 진보로 누구나 인터넷이라는 방대한 지식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할 수 있는 요즘에는 분명히 아는 것이 많은 만큼 실생활에서의 유익한 점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때론 지나치게 많이 아는 것이 뜻하지 않은 불편함이나 불쾌감을 가져올 때도 있다. 흔히 말하는 ‘불편한 진실’이 그러하다. 슈퍼마켓 선반들 위에 진열된 위선적인 풍요로움과 지금 어딘가에서는 분명히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을 아이들, 공원이나 휴양지에서 평화롭게 나들이를 즐기는 사람들과 자신들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전쟁과 테러로 삶이 송두리째 뿌리뽑힌 난민들, 달콤하고 쌉싸래한 초콜릿을 혓바닥 위에서 녹이고 있을 때 문득문득 떠오르는 카카오 농장에서 일하면서도 평생 초콜릿 한번 먹어보기 어렵다는 아이들, 우리의 끝없는 식탐을 충족시키고자 끔찍한 환경에서 짧고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동물. 이 모두는 아직 일말의 양심을 간직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불편한 진실들이다. 이러한 ‘불편한 진실’들은 한 개인의 의지로서는 어찌해볼 수 없다는 무력감과 이런 부조리에 간접적으로나마 일조했다는 도덕적 자책감을 일으키면서 지성과 양심이 미약하게나마 살아 있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그래서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속담이 있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을 함축하는 ‘불편한 진실’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거나 부정하는 사람은 비겁하고 위선적이며 이기적이라는 비난 정도는 평생 감수하고 살아야 할 각오 정도는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먹는 ‘음식’은 어떨까? 가공식품에 첨가되는 발음하기도 어려운 각종 화학물질, ─ 외식을 포함해서 ─ 원산지가 불분명하고 원재료 표기조차 제대로 안 된 음식들, 무엇을 먹고 어떠한 환경에서 자랐는지 알 수 없는 가축에게서 나온 고기와 달걀, 어떤 종류의 화학비료와 살충제와 제초제를 얼마나 사용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채소와 과일 등등 이것들은 정부를 포함해서 그 누구도 명확하게 알려주지 않는 베일에 싸인 진실들이다. 한편으론, 안다고 해도 한 개인으로서는 크게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점에서 ‘불편한 진실’이다. 왜냐하면, 이미 거대한 산업 시스템으로 굳어진 현재의 식품 체제는 소비자의 경제적 사정에 따른 식품 선택의 폭이 좀 유동적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지구에서 생산하는 음식 재료나 그 음식 재료를 가공해서 만든 식품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에서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지구 곳곳이 중금속과 화학물질로 오염될 대로 오염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가 산업화를 무분별하게 강행하며 지속불가능한 성장을 고집해서 얻은 당연한 결과다.

유기농 인증 마크도 무색하게 하는 중금속

리 집 강아지 다롱이가 먹는 사료뿐만 아니라 우리가 슈퍼마켓에 진열된 온갖 종류의 식품 중에는 USDA(미국 농무부: United States Department of Agriculture)에서 인증받았다는 유기농 식품이 있다. 보통 소비자는 USDA 등의 공인인증기관에서 유기농 인증을 받은 식품이니만큼 중금속도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위험한 착각이다. 마이크 애덤스(Mike Adams)의 『음식의 역습(Food Forensics): 우리가 먹는 독성물질의 모든 것』은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은, 그것이 유기농 식품이건 지역 농장에서 생산된 식품이건 상관없이 중금속, 살충제, 제초제, 항생제, 호르몬제, 화학물질 등의 독성물질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고발한다.

과거에 비하면 많은 정부와 기업들이 환경오염에 관심을 쏟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저개발 국가에서는 선진국에서는 금지된 살충제, 제초제가 사용되고 있으며, 그들은 생산량을 늘리고자 토양을 오염시키는 화학비료를 쏟아부으며 선진국에서 저질렀던 폐단을 답습하고 있다. 또한, 저개발 국가나 한창 산업화가 진행 중인 국가에서는 환경오염과 관련된 규제가 느슨하여 화학폐기물이 그대로 자연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 그래서 중국, 동남아시아, 인도 등에서 생산된 식품의 중금속 함유량이 유난히 높다. 그렇다면 그러한 나라에서 생산되는 식품만 피하면 안전할까? 그렇다면 굳이 마이크 애덤스가 이 책을 출판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살충제나 제초제를 일반 식품보다 덜 사용한다는 미국의 유기농 식품에서도 중금속이 검출되듯 (유기농 제품일지라도 유기농 농법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된 몇몇 살충제는 쓰고 있다) 화학물질을 과도하게 사용했던 과거의 파괴적인 농업 활동으로 토양과 지하수에 이미 상당량의 화학물질이 축적되어 있다. 한창 산업화가 진행되었던 시대에 자연에 무분별하게 버린 산업폐기물에 포함된 중금속 등의 독성물질도 토양과 지하수에 여전히 남아있다. 결국, 이것들이 먹이사슬을 따라 올라가며 생물농축을 일으키다가 우리가 먹는 식품 속으로 무임승차하게 된다.

독소 자체를 피하라. 그러나 현실은?

USDA의 인증을 받은 유기농 식품에서도 중금속이 검출되었으며, 일부 유기농 식품은 일반 식품보다 더 많은 중금속이 검출되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건강한 식품을 섭취하고픈 소비자의 욕구를 반영한 USDA의 유기농 제품 기준에는 수은을 비롯한 중금속에 관한 제한 규정이 없다는 사실이다. 사실 몸에 축적되고 해독도 매우 어렵다는 점에서 중금속이 화학물질보다 더 위험한데도 말이다. 하지만, 중금속이나 살충제, 제초제, 식품첨가물 등 이 모두는 인체에 장기적으로 추적할 수 없는 손상을 가하는 독성물질이라는 점에서 이들은 한 가족이나 다름없다.

마이크 애덤스도 독성물질에서 벗어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독소 자체를 피하는 것 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처럼 사람과 자동차로 미어터지는 도시에 살며 매시간 오염된 공기를 마시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독소 자체를 피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주머니가 가벼운 소비자는 울며 겨자 먹기로 저렴하지만, 그 저렴함의 대가로 건강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저질 식품을 섭취해야 한다. 주머니가 넉넉한 소비자라면 유기농 식품(유기농 식품에도 독성물질이 포함될 수 있지만, 대체로 일반 식품과 비교하면 더 깨끗하고 안전하다)을 선택하거나 지역 농장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소비자는 마이클 애덤스의 충고처럼 행동을 개선하고 올바른 식품을 선택해 독소에 반복해서 노출되는 악순환을 무너뜨리고, 신선한 채소와 과일 섭취, 땀을 울리는 운동으로 몸의 해독력과 독소 제거력이 제대로 기능하도록 도울 수 있다.

사실 도시를 벗어나 좋은 식품만을 먹으며 사는 전원적이며 여유로운 삶은 누구나 원하는 삶이지만,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현대인은 도시를 벗어나 산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삶의 터전이 철저하게 도시에 저당 잡혀 있다. 여기에 바쁜 일상에 쫓기고 피 터지는 경쟁에 시달리다 보니 하루 세끼라도 챙겨 먹을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끼니때마다 요목조목 따져보며 식사할 수 있는 것은 소수만 누릴 수 있는 사치이자 특권이다. 대부분 사람은 생으로 굶는 것보다는 라면이나 햄버거 같은 저질 식품이라도 먹는 것이 더 나을 때가 잦다. 상황이 이러하니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어차피 먹어야 하는 음식이라면 차라리 모르고 먹는 것이 소화라도 더 잘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식품 내 중금속을 직접 분석하는 저자

놀라운 사실은 마이크 애덤스는 손수 설립한 식품과학수사연구소에서 시중에 유통되는 식품들을 검사한다고 한다. 물리학 서적에서나 들어볼 법한 유도결합플라스마질량분석기(ICP-MS)라는 수백만 달러짜리 기기를 설치해 분석한 자료들은 『음식의 역습(Food Forensics)』의 「3부 데이터」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비록 이 책에 실린 자료가 미국에서 유통되는 식품들에 한해서이지만,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성인 남녀 6,311명을 대상으로 인체 내 유해화학물질 16종의 농도를 조사한 결과 한국인의 혈중 수은 농도가 미국보다 3배나 높다는 국립환경과학원의 조사 결과(원문 「[알아봅시다] 차곡차곡 내 몸속에~ 중금속 3인방 수은, 카드뮴, 납 술술~ 배출법」)를 놓고 보면(내 생각에는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수입하는 식품에 대한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마이크 애덤스의 질량분석기가 분석한 자료는 더욱더 깨끗하고 안전한 식품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우리에게도 매우 유용한 자료가 될 것이다. 최신 자료는 저자가 운영하는 홈페이지 Natural Science Journal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연히 저자가 제공하는 모든 정보는 무료다! 단, 기부금은 받는다.

사실 마이크 애덤스는 많은 위험을 무릅써가며 이 책을 출간했다. 자신들이 생산한 식품이 중금속으로 오염되었다고 폭로한 사람을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해 주어서 고맙게 생각하는 양심적인 기업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기업들은 중금속에 오염되었다는 자사 제품에 대해 부인, 공격, 왜곡, 거짓말(정치인이나 범죄자들이 자신의 죄를 부정할 때 많이 쓰는 시나리오 아닌가!)이라는 네 단계로 대응했다고 한다. 내 생각에는 그가 아직 멀쩡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소비자를 기만하는 식품회사와 정부

FDA(미국 식품의약청: Food and Drug Administration)는 어떤 화학물질이 암을 유발해 사람들의 건강을 해치는지 밝혀내는 게 아니라 실험을 통해 발암물질을 어느 정도까지 섭취해도 괜찮은지 연구한다. 업계로부터 지원을 받은 74건의 연구는 아스파르탐이 100% 안전하다고 주장했고, 식품첨가물 업계로부터 지원을 받지 않은 연구 가운데 92%는 아스파르탐이 건강 문제를 일으킨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두 이야기는 우리가 먹는 음식이 생각만큼 안전하지 않으며, 정부와 기업이 공모하여 마땅히 소비자가 알아야 할 모든 정보에 대해 침묵한다는 음모론이 우리의 음식사슬을 지배하고 있다는 암울한 현실을 말해준다. 식품회사들은 소비자의 건강 따위는 안중에도 없으며, 어떻게든 많이 먹여 많이 팔 생각만 한다. 비만 환자는 보통 사람보다 더 많이 먹기 때문에 비만 환자의 증가는 식품회사에 부를 가져다주는 보증 수표나 다름없다. 비만이 된다고 해서, 그리고 독성물질에 조금씩 오염된다고 해서 금방 죽는 것은 아니며, 그로 말미암아 병에 걸린다고 해도 현재의 의학기술로는 그 진원을 정확하게 추적할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한 개인이 기업을 상대로 싸움을 벌여 이긴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만약 당신이 암에 걸렸다면, 그것은 10년 전부터 즐겨 먹어왔던 한 저질 식품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식품회사는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완강히 부정한다. 그것은 담배회사들이 담배와 폐암의 연관성을 기필코 부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식품회사들은 이런 점을 악용하고 정부와 은밀하게 공모한 결과 현재의 음식사슬은 그들의 탐욕스러운 의지대로 완벽하게 산업화가 이루어졌다. 이제 한 개인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먹는 음식사슬에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하기보다는 좌절해야 마땅하다. 그것은 우리의 이성과 양심이 식품회사들이 파렴치하게 저질러온 농간에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하고, 한편으론 속수무책으로 식탐 앞에 굴복했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건전한 섭취자로서 약간의 자존심 남아있다면, 이제라도 이 책이 고발하는 소리에 귀 기울어야 할 때이다. 『음식의 역습』이 증거로 제시하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분노하게 하는 믿고 싶지 않은 사실들을 냉정하게 되새김질해보면 ‘당신이 먹는 것이 곧 당신이다.’라는 낯설지 않은 격언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마치면서...

리가 어렵게 일하면서 돈을 버는 가장 큰 이유는 좋은 음식을 먹으며 건강하게 오래 살고자 함인데, 현실은 그러한 우리를 조롱하다 못해 철저하게 산업화한 음식사슬로 우리를 굴복시킨다. 우리는 우리의 오래전 조상이 먹었었던, 독성물질에 오염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풍취와 신선함을 간직한 식품들을 먹고 싶을 뿐이지만, 어느덧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음식의 역습』은 우리에게 독성물질을 최대한 피하라고 충고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안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신체가 가진 해독 능력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지경으로까지 와버렸다. 인생은 도박이라더니 이제는 우리가 먹는 것까지도 하나의 도박이 되어버렸다. 오늘 저녁 식탁에 오른 음식에 얼마만큼의 독성물질이 들어 있는지는 신도 모를 것이다. 신은 인류가 그렇게 많은 화학물질을 만들어낸 것도 모자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먹어야 하는 그 음식들에까지 그렇게 뿌려댈 줄은 몰랐을 것이다. 어쩌면 나이를 먹으면서 하나둘씩 생기는 자잘한 만성 질환들이 우리 몸에 축적된 독성물질 때문인지도 모른다. 설령 그렇더라도 그것은 내가 선택한 음식들에 대한 마땅한 결과다. 하지만, 내가 달리 어떠한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마지막으로 『음식의 역습』에 담긴 쉽게 접하기 어려운 자료들은 식품회사들이 사람들이 알아내지 못하도록 절박하게 애쓰는 정보들이다. 모르는 것이 약인지, 아는 게 힘인지는 이 책을 읽고 당신이 어떠한 판단을 내리고 어떻게 행동할지에 따라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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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5. 26.

[책 리뷰] '나는 우울하다. 고로 존재한다', 우울증의 모든 것! ~ 한낮의 우울(앤드류 솔로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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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울하다. 고로 존재한다’, 우울증의 모든 것!

Original Title: The Noonday Demon: An Atlas of Depression by Andrew Solomon
내가 “한낮의 악마” 〔이 책의 원제 ‘"Noonday Demon ”〕 를 제목으로 택한 것도 우울증의 의미를 정확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한낮의 악마” 가 지닌 이미지는 우울증 환자를 괴롭히는 끔찍한 침입의 느낌을 상상할 수 있게 해 준다. 우울증은 뻔뻔스러운 면이 있다. 대부분의 악마들은(대부분의 고뇌들은) 밤의 어둠을 틈타서 찾아들며 그것들을 분명하게 보는 것은 곧 그것들을 쳐부수는 것이다. 그러나 우울증은 눈 부신 햇살 아래 당당하게 서 있으며 우리가 똑바로 보아도 끄떡도 하지 않는다. 그것의 모든 이유들을 알아도 무지한 것처럼 고통받는다. 그런 정신 상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한낮의 우울』, p434)

만약 우울증을 느낄 수 있다면 이런 느낌?

는 한낮에 내리쬐는 따스한 햇볕 속을 한 줌의 먼지처럼 하릴없이 부유하지만, 태초부터 존재해온 그 따뜻함을 느끼지 못한다. 모든 감각기관이 대동단결하여 태업을 벌이는 듯 따스함도 차가움도 느낄 수가 없다. 감각이 마비되니 감각을 정교하게 가다듬어 내 마음의 상황을 대변해야 할 감정도 사라진다. 감정이 사라지니 감정을 더더욱 정교하게 가다듬고 그 지속성으로 나의 존재감을 드러내야 할 기분도 사라졌다. 나의 모든 활동과 모든 감정이 밝혀질 수 없는 어둠과 깨지 않는 잠 속으로 무겁게 가라앉는 것 같다. 블랙홀처럼 짙은 어둠은 나의 눈을 멀게 하고, 우주의 심연처럼 깊은 잠은 나의 귀를 먹게 한다. 끔찍하고 저주스러운 침묵만이 나의 무감각을 보란 듯이 희롱하고, 오장육부를 쥐어짜며 겨우 내지르는 나의 외마디 외침마저 주변을 짓누르는 정적에 압도당한다. 오늘의 동면이 영원히 지속할 것 같은 불안감은 내일은 좀 나아질 거라는 한 가닥 희망조차 물거품으로 만들며 미래를 삼켜버린다. 지금의 동면이 내일도, 모레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될 것이라면 삶의 의미는 완전히 소멸하고 그럼으로써 살아갈 이유도 소멸한다. 내 영혼에서 모든 색깔이 사라지고 내가 사랑했던 나도 사라지고 그저 인형처럼 껍데기만 남은, 몇 주 전에 죽었는데 아직 시체가 발견되지 않은 듯한 느낌. 우울증이란 이런 아무런 느낌도 감각도 없는 무력감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우울하다. 고로 존재한다’

‘합리(Rational)’와 ‘이성(Reason)’의 대가(大家) 데카르트(René Descartes)는 말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하지만, 대량 학살, 세계 대전, 혁명, 제국주의 등 피비린내 나는 20세기 역사가 휘몰아친 광풍에 어쩔 수 없이 휩쓸렸던 불행한 인민들은 ‘나는 고통스럽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하며 몸소 체험한 실존주의적 성찰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듯싶다. 반면에 신통한 진통제들이 범람하는 덕분에 육체적 고통에서 다소 해방되고, 이기심과 탐욕이 나은 얼마간의 죄책감과 양심을 짓누르는 중압감을 개인과 사회에 만연한 도덕적 타락으로 덜어낼 수 있었던 현대인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우울하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우울증 자가 진단 테스트’를 해보니 정상이지만 가끔 우울할 수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또한, 같은 사이트의 조울증 테스트는 통과했지만, 공황장애 테스트는 12점으로 공황장애가 의심된다는 결과를 얻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겉으로는 그럭저럭 괜찮게 보이는 나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현대인이 겪는 비밀스러운 유행병인 우울증이 주는 서글프고 무력한 존재감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 같다. 이제는 나도 가끔은 우울하기 때문에 가끔은 존재한다고 의기소침하게 말할 수가 있으리라.

그대여, 더는 ‘나’와 함께 있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지 마라!

전적으로 큰 문제가 없다면, 우울증을 일으키는 원인 중 가장 으뜸은 스트레스다. 현대인이 받는 (가사노동, 장거리 이동 등) 직접적인 육체적 스트레스는 물질적 풍요와 기술의 발달로 과거보다 상당량 줄었다. 하지만, 산업화한 국가에서 우울증 환자와 자살률이 꾸준히 증가 추세를 보인다는 것은 현대인이 그 어느 때보다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그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정신적 스트레스가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같은 정신질환뿐만 아니라 암 같은 육체적 질병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현대인은 과거보다 더 피곤하고 힘들고 고달픈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산업 시대 이후 우울증 환자가 꾸준히 증가한 가장 큰 원인은 앞에서 말한 대로 스트레스라고 볼 수 있지만, 우울증을 바라보는 개인과 사회의 시선이 변화했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도덕적 타락과 나약함의 표시로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었던 우울증이 뇌과학의 진보, - 환자의 나약한 의지를 탓해야 할 것이 아니라 암이나 당뇨병처럼 의학적 치료를 받아야 할 질병이라는 - 인식의 변화, 그리고 이러한 모든 변화에 맞물려 부단한 발전을 거듭해온 약물치료제의 기적 같은 효능으로 그동안 불가사의한 사회적 압력에 눌려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혼자 집안에 처박혀 끙끙 앓으며 인고의 세월을 보내던 은둔형 환자들을 병원으로 불러낼 수 있었다. 예전에는 환자로 취급받지 못했던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이 개인과 사회가 우울증을 바라보는 이해와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바람에 이제는 병원에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는 어엿한 환자가 되었다.

이런 변화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우울증에 대해 밝히기를 꺼린다. 그것은 자신이 어딘가 모자르고 비정상적이며 의자가 박약하다고 시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불합리한 망상 때문이다. 한편으론 여전히 많은 사람이 자신이 겪는 극심한 심리적, 정신적 고통과 무기력을 치료해야 할 병으로 인식하지 못한 채 뼈를 깎는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울증이 사회에 만연해 있음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사람들은 더더욱 우울증에 대해 밝히기를 꺼린다. 이러한 악순환은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더욱 고립되게 만들며 우울증 통계의 정확성을 떨어트리고 진실을 호도하게 한다. 이런 점 때문에 우리는 결코 우리가 사는 사회에 우울증 환자가 얼마나 되는데 정확하게 알 수는 없겠지만, 병원에서 우울증 치료를 받는 환자 수의 증가만으로도 우울증이 꾸준한 증가 추세를 보인다는 것을 깨닫기에는 충분하다. 우울증은 수치스러운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암이나 심장병처럼 꾸준히 치료받아야 할 질병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조현병의 증세 중 하나가 우울증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우울증 환자는 가족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와 국가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우울증 증가는 현대성의 결과?

자 앤드류 솔로몬(Andrew Solomon)은 『한낮의 우울(The Noonday Demon: An Atlas of Depression)』에서 우울증 환자의 증가는 두말할 필요 없이 현대성의 결과라고 말한다. 산업 시대 이전에도 우울증 환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작금의 우울증 환자가 집값이 오르고 전세금이 오르는 것처럼 꾸준히 증가 추세의 그래프를 그리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무엇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것일까? 무엇이 우리를 외롭게 만드는 것일까? 무엇이 우리를 슬프게 만드는 것일까? 유전, 환경, 스트레스, 성격 등 우울증의 발병 원인이 너무나 다양하고, 또한 여러 원인이 복잡하게 서로 얽히고설킨 경우가 많아 현대 과학도 꼭 집어 밝혀내기가 어렵다. 하지만, 솔로몬의 지적처럼 현대성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솔로몬은 현대의 지나치게 빠른 삶의 속도, 기술 혁신이 가져온 혼돈, 사람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소외감, 전통적인 가족구조의 붕괴, 풍토병이 되다시피 한 외로움, - 종교적, 도덕적, 정치적, 사회적 분야를 총망라하여 과거에 인간들에게 삶의 의미와 방향성을 제시했던 - 믿음 체계의 와해는 파국적이라고 진단한다. 20여 년간 연쇄 폭탄 테러로 미국을 공포에 떨게 한 극단적인 문명 혐오론자 유니바머(Unabomber, 본명은 시어도어 존 카진스키 Theodore John Kaczynski)는 사회가 사람들에게 지독하게 불행한 상황을 강요하면서 – 마치 병 주고 약 주듯 - 그런 느낌을 제거하는 약을 준다고 비난했다. 정보의 홍수는 필연적으로 막상 자신을 위해 무엇을 선택할 때가 되면 (한 사람이 세상 모든 정보를 다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정보의 부재를 불러왔고, 이런 모순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대인은 선택하려면 그것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함으로써 지독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또한, 솔로몬은 선택 범위가 넓어진 것과 지나친 자유가 결국에는 모두를 압박하고 불안감에 떨게 하는 웃지 못할 결과를 가져왔다고 설명한다.

말 그대로 우울증의 모든 것을 담은 책

드류 솔로몬(Andrew Solomon)의 『한낮의 우울(The Noonday Demon: An Atlas of Depression)』은 자기 고백적 성격이 짙은 우울증 체험담이자 - 우울증과 관련된 - 역사, 문화, 정치, 의학, 진화, 사회 등 우울증의 모든 것을 담은 역작이다. 책 끝의 ‘참고 문헌’의 방대한 분량만 봐도 짐작할 수 있듯 그는 우울증에 대해 자신이 찾을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조사했다. 그는 많은 우울증 환자들과 인터뷰했으며, 그 과정은 건조한 일회성 만남이 아니라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친구로서 우정과 사랑을 나누는 뜻깊은 시간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가능한 모든 우울증 치료법들을 시도해 보았다. 심지어 그는 민간에서 행해지는 주술적인 정신병 치료 의식인 은두프(ndeup)를 받고자 세네갈까지 날아가 막 도살한 숫양의 따뜻한 피로 범벅이 되기도 했다. 이 책을 집필하기까지 세 번의 우울증 삽화(에피소드)를 겪은 그는 여전히 우울증약을 복용 중이다. 그는 악몽과 지옥을 합친 고통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은 최악의 상황에 다시는 빠지지 않고자 평생 약을 먹을 생각임을 당당하게 밝히는 진짜 우울증 환자이다.

앤드류 솔로몬은 언제 어느 순간에 닥칠지 모르는 우울증 삽화를 걱정해야 하는, 이 책에 소개된 수많은 우울증 환자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처지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그동안 우울증 때문에 겪은 고통스러운 시간과 언제 닥칠지 모르는 우울증을 대비해야 하는 걱정과 두려움으로 잠식당한 시간이 마냥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그가 역작 『한낮의 우울』을 집필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피눈물 나는 투병 생활 끝에 우울증으로부터 독특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우울증 환자는 진실을 더 날카롭게 직시한다고 말했듯, 이 책에는 우울증으로 기나긴 투병 생활을 겪은 사람만이 묘사할 수 있는, 정신병자 특유의 예리한 관찰력과 번개처럼 번득이는 지혜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우울증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이자 우울증의 암흑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이해를 밝혀주고 인식을 넓혀주는 등대다. 만약 비인간적이고 몰인정한 현대성이 우울증을 확산시키는 주범이라면,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그 누구도 우울증의 음울한 마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면, 우울증 만물 박사인 이 책의 가치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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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0. 21.

[책 리뷰] 인문학과 철학을 통한 근본적이고 고차원적인 해결 방안을 ~ 생태학적 세계관과 문명의 미래(박이문)

Ecological worldview and future of civilization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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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과 철학을 통한 근본적이고 고차원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하다

Original Title: 생태학적 세계관과 문명의 미래 by 박이문
환경철학은 지적 호기심을 만족하기 위한 한가롭고 사치스런 활동이 아니다. 환경철학은 인간의 실존적 삶은 물론 생물학적 생존과 뗄 수 없이 연결된 가장 절실한 문제이다. (『생태학적 세계관과 문명의 미래』, p622)

병도 주고 약도 주는 과학기술

류는 산업혁명 이후 눈부신 발전과 성장으로 이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편리하고 풍요로운 사회를 건설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질병, 빈곤, 기아에 시달리고 있지만, 한 세기 전과 비교했을 때 그런 사람들의 수가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꽤 줄어든 것도 사실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여러 이유 중에서 과학기술을 1순위로 지명한다 해도 반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정도로 과학기술이 인류 문명의 꽃을 활짝 개화시키면서 많은 사람을 기아와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시키고 물질적 풍요를 안겨주었으며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구축하는 데 이바지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반면에 기후변화, 환경오염, 생태계 문제를 일으킨 무분별한 개발과 산업화 역시 과학기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것도 재론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막연하게만 느껴지고 일부 지식인에 의해서만 거론되던 기후변화, 환경오염, 생태계 문제들이 지금은 인류의 존재 자체를 위협할 정도의 지구적인 문제로 부상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인류는 이 모든 문제를 일으킨 과학기술을 버리고 중세, 혹은 그 이전의 원시적인 사회로 돌아가야 할까?

우주의 중심이 지구가 아니듯 자연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다!

행스럽게도 『생태학적 세계관과 문명의 미래 과학기술: 문명에 대한 대안적 통찰』은 그럴 필요도 없을뿐더러 그럴 수도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왜냐하면, 과학기술이 생태계를 파괴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과학기술을 사용한 것은 인류의 선택과 의지였지 과학기술 그 자체는 가치 중립적이며 이미 과학 문명이 제공하는 물질적인 안락함과 편리함, 풍요로움에 길든 현대인이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원시적인 과거의 삶으로 회귀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한 자루의 날카로운 칼이 의사의 손에 쥐어지면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도구로 쓰이지만, 살인자에 손에 쥐어지면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 흉기가 되듯 과학기술 역시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인류의 번영과 생존, 그리고 풍요를 약속하는 훌륭하고 믿음직스러운 동지가 될 수도, 혹은 인류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파멸로 몰아넣는 여섯 번째 대멸종을 일으킬 수 있는 지옥의 화신도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인류는 결코 지속할 수 없고 무모해 보이는 자연에 대한 약탈을 그토록 무자비하게 자행했고, 그 무시무시한 대가를 예상함에도 여전히 그만두지 못하는 것일까. 그 배경에는 인간 이외의 모든 존재와 현상을 인간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만 보고, 그것들의 가치를 오로지 인간의 가치 실현을 위한 도구로만 파악하는 인간중심주의적인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적 세계관이 식민주의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했듯,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은 인간을 위해서라면 자연에 대한 착취와 약탈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해롭거나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종의 멸종 등 자연에 대한 파괴적인 모든 행동을 허용하거나 최소한 눈감아 준다. 즉 인류는 인간중심주의적인 세계관을 버리고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 아니라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자연중심주의적이고 생태중심적인 세계관으로의 코페르니쿠스적 인식의 전환만이 지구와 인류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고 『생태학적 세계관과 문명의 미래』를 통해 박이문은 역설한다.

‘실천적 문제’라는 거대한 장벽에 맞닥트린 인류

21세기의 문명사적 문제이자 인류의 화두는 환경보호와 생태계 보전이라는 『생태학적 세계관과 문명의 미래』의 저자 박이문의 주장에 아직도 반감을 보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이 문제는 다른 생명은 제외하더라도 인류라는 지구상의 유일한 지적생명체의 행복과 생존, 그리고 번영에 직결되어 있으며, 서서히 기후변화의 무서움을 실감해가는 우리로서는 매우 절실하기까지 하다. 그런 인식을 반영하듯 환경보호와 생태계 보전에 공감의 뜻과 적극적인 지지를 표하는 사람들도, 크고 작은 환경보호 단체들도 눈에 띄게 많아졌다. 그럼에도, 우리는 기후변화, 환경오염, 생태계 파괴라는 인류 최대의 위기 앞에서 무력적인 존재임을 깊이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무력감은 우리의 삶이 여전히 친환경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고, 우리 사회와 지역은 여전히 환경보호보다는 지역개발을 우선시하며, 우리 국가 정책에서도 여전히 환경보호는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는 실천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자연과 우주 속에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기 전에 선행된 가치에 대한 인간의 포괄적 비전과 신념을 세계관이라고 규정한다면, 앞서 거론한 실천적 문제는 우리의 세계관이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대착오적이고 낡은 세계관이라는 말이 된다. 그런 면에서 생태중심적인 세계관은 하나의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알던 세계의 종말』(클라우스 레게비, 하랄트 벨처 지음, 윤종석, 정인회 옮김, 한울아카데미)에서도 기후변화를 극복하는 근본적인 방안으로 ‘문화 혁명’이라는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거론할 정도로 기후변화와 생태계 문제는 단순히 기술적인 차원을 넘어서 인문학적이고 철학적인 분야로까지의 확장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기후변화와 생태계 파괴를 일으키는 물리적인 원인과 그 영향력은 과학기술로 설명할 수 있지만, 어떠한 의도로든 과학기술을 사용한 주체는 인간과 그 인간으로 이루어진 사회, 조직일 뿐만 아니라 그 피해를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 것 역시 인간과 인간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환경적인 문제에 대한 인식은 어느 정도 대중적인 문제로 확산했지만, 그 인식이 실천적 방안으로까지는 이어지지 못하고 문명의 이기 앞에서 나약하게 주저앉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인간중심주의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말한다. 그것은 이기적이고 무절제한 탐욕과 편안함에 길든 나태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과학 문명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과 비판적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의 교육과 인문학적 소양, 윤리적 가치관이 과학과 과학기술의 의미를 자연과 인간 사이의 맥락에서 이해하고 비판하기에 부족함을 의미한다. 이 한 권의 책으로 그 부족함을 전부 메워줄 수는 없을지라도, 기후변화와 생태계라는 언뜻 보면 기술적이고 실재적인 문제로 보이는 것들을 철학적이고 인문학적인 화두로 끌어올림으로써 보다 근본적이고 고차원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글들이지 않은가 싶다.

마치면서...

복되는 논지도 많고, 집요하게 언어적 개념부터 정리하려는 분석 철학적인 면이 강해 지금껏 철학 분야를 접해본 적이 없는 나에게는 좀 어렵고 지루한 면이 조금은 있었지만, 끝까지 읽고 나면 파도처럼 밀려오는 지적 만족감으로부터 솟구치는 뿌듯함이 강하게 뇌세포를 흥분시키는 책이다. 『생태학적 세계관과 문명의 미래』의 요지대로 이제 기후변화나 생태계 문제는 과학기술에만 전적으로 매달려서 해결할 수 있는 단계는 이미 오래전에 지나갔다. 어떤 목적으로든 과학기술을 도구로 사용하고 문명이 제공하는 물질적인 안락함과 편안함에 중독된 우리의 탐욕스러운 마음과 안일한 정신이 얼음물을 뒤집어쓰듯 확 깨는 근본적인 세계관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 그리고 근검절약이 일상화되고 물질적이고 동물적인 쾌락보다 정신적이고 인간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신인류로 거듭나지 않는 이상 기후변화와 생태계 문제뿐만 아니라 자원, 기아, 빈곤, 에너지, 인구, 테러, 난민 등 인류의 고질적인 문제들의 해결도 불가능하다. 우리가 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현재의 인류는 지구를 좀먹은 ‘암세포’로 기록될 것이고, 한때 찬란했던 인류의 문명은 지구를 침몰시킨 ‘타이타닉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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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9. 24.

[책 리뷰] 스스로 인생의 답을 구하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바치는 방랑지식인의 성찰 ~ 하나만의 선택(박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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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인생의 답을 구하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바치는 방랑지식인의 성찰

Original Title: 하나만의 선택 by 박이문
모든 것에 대해서,특히 나 자신에 대해서 분명하고 명석해지고 싶었다. 나는 분명히 알고 싶었다. 그리고 투명하기를 원했다. (『하나만의 선택』, P17)

고백하기에 민망한 나의 무지와 이 책을 선택하게 된 동기

집을 편찬할 정도로 명망과 학식이 있는 저자였음에도 막상 겉표지에 적힌 저자의 이름 석 자 ‘박이문’을 읽었을 땐 ‘뭐 하는 사람이지?, 어떤 글을 쓰는 사람이지?’ 등의 무식이 철철 흐르는 의문이 들었다. 나름 책 좀 읽는다고 자부해왔지만, 부끄럽게도 이 책을 집어 들기 전까지 저자 ‘박이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털끝만큼도 없었다. 어느덧 도서관 출입은 10년을 넘어서고 그동안 꽤 많은 책을 읽었지만, 아쉽게도 저자의 이름 석 자는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사실 죽을 때까지 책만 읽는다고 해도 아는 작가보다 모르는 작가가 더 많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세상에는 글 쓰는 사람은 어마어마하게 많지만, 문학을 좀 읽는 사람치곤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인문학에 관심을 둔 독자에겐 전혀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던 저자의 이름 석 자가 평소에 인문학, 그중에서도 철학에 가까운 분야는 거의 읽지 않았기에 그러한 무지를 드러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찌 되었든 오늘날의 우연한 계기가 없었더라면 남은 세월을 도서관 오타쿠로 살아간다 할지라도 내가 저자를 만나는 지적 행운은 한줌의 재로 화하는 최후의 날까지 얻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좀 어이없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 우연한 계기란 데이비드 쾀멘(David Quammen)의 『도도의 노래The Song of the Dodo)』다. 인류가 인식한 최초의 멸종 동물로 알려진 도도의 슬픈 이야기를 다룸으로써 생태학 분야의 고전이 된 책에 크나큰 감동과 깊은 인상을 받은 나는 혹시 이와 비슷한 책이 또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도서관 자료 검색 사이트에 ‘생태학’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했다. 총 300여 권의 결과물 중 17번째에 위치한 『생태학적 세계관과 문명의 미래: 과학기술문명에 대한 대안적 통찰』(박이문의 인문학 전집 중 여덟 번째)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제목만 보고는 평소 과학기술의 남용과 오용에 회의적이었던 나의 입장을 명쾌하게 대변해 줄 동지를 만난 것 같아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824쪽이라는 꽤 많은 분량도 부담스러운데 ‘인문학 전집’이라는 엄숙한 표제와 저자 소개 글의 ‘철학박사’라는 따분한 단어에 지레 겁먹은 나는 824쪽 대부분을 철학적이고 학술적인 딱딱하고 난해한 글로만 채워줬을 것으로 지레짐작하여 선뜻 선택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 시대 인문학 최고의 마에스트로라는 추천사에 조금 현혹되고, 여기에 예전에 읽었던 신랄하면서도 명쾌한 故리영희의 글을 읽으며 느꼈던 지적 흥분과 상쾌함을 다시 경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근거림이 선택의 갈림길에서 갈팡질팡하던 나약한 의지에 결정타를 날림으로써 겨우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나는, 그렇다면 이왕 이렇게 된 거 전집은 다 못 읽더라도 『생태학적 세계관과 문명의 미래』를 읽기 전 사전 준비 격으로 저자가 어떠한 삶을 살아왔고 삶에 대한 어떠한 태도와 가치관을 가졌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는 자서전 격인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하나만의 선택’에 담긴 세심한 인생 철학

데없이 서두가 길었지만,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기품이 두루 느껴지는 『하나만의 선택』에는 백발이 되어도 끝나지 않는 저자의 지적 호기심과 방황, 회의와 반성, 그리고 지적 추구와 방랑의 생애가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하나만의 선택’이라는 일련의 연속 과정으로서 잘 나타나 있다. 우리는 삶의 무한하고 연속된 갈림길에서 선택은 오직 하나뿐이라는 잔인한 현실에 부딪혀 머뭇거리기도 하고 실망도 하지만, 강요나 압력에 의해서건, 자의에 의해서건, 혹은 대범하게 주사위를 굴리건 결국 우린 인생의 중요한 기로 앞에선 한 가지만 선택할 수 있다. 그렇게 한 사람의 인생이 그 연속된 ‘하나만의 선택’이 그려온 기하학적 도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면, 그 다사다난했던 도식을 짧고 긴 텍스트가 어우러지는 문학적 소양으로 풀어쓴 것이 바로 이 책이라 할 수 있겠다. 저자는 편안하고 안정된 삶을 선택할 수도 있었고,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 국가와 여전히 가난한 국민을 위한 공익적 활동에 직접적으로 참여할 수도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을 거부하고 오로지 앎의 지적 성장을 추구하는 외롭고도 고된 방랑 지식인의 길을 걸어왔다. 때론 자신의 태도나 생각이 일종의 자학이요 자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회의가 들기도 하고, 자신의 자족적인 삶이 너무 초라해 보이기도 했으며, 다른 사람들처럼 단란한 가정을 꾸림으로써 얻을 수 있는 안락하고 평온한 삶이 그립고 부러울 때도 있었다. 한편으론 국가와 국민뿐만 아니라 자신을 낳고 길러준 부모님조차 외면해야 했던 지성과 앎에 대한 집념이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 부끄럽고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그러나 출세하고 편안히 산다는 것은 잘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과는 다르고, 어떠한 인생이 참다운 인생이며 뜻있는 삶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인생에는 여러 가지 살아가는 길이 있으며 또한 인생에는 많은 종류의 할 일과 즐거움을 가질 수 있다는, 인생의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를 투명하게 밝히고 설명하려는 저자 박이문의 인생 철학은 ‘하나만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인생의 갈림길 앞에서 누군가의 강요나 사회적 압력, 안락을 추구하려는 육체적 안일함과 정신적 나태함을 극복하는 기폭제가 되었고, 그렇게 모든 결정은 궁극적으로 ‘나의 결정’이었다는 자부심과 책임감이 이 책을 압도하고 있다.

정신의 빈곤을 채워줄 마음의 양식

엇이 올바른 삶이고, 어떠한 삶이 잘 살았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건전한 삶이며, 어떻게 살아야 정신과 영혼이 건강하고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더불어 행복은 어디서 오고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인류에게 말과 글자가 발명된 이후 수많은 석학이 이 질문에 대해 명쾌하고 정연한 논리로 파고들면서 놀라운 인류의 지혜를 보여주었지만, 그 누구도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박이문 역시 그러하며, 아마도 이 문제는 인류가 멸종하는 그날까지 답 없는 수수께끼로 남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여전히 수많은 인문학자가 이 문제에 자신의 지력과 열정, 그리고 보석보다 소중한 시간을 다 받쳐 씨름하고 있다. 왜 그들은 정답도 없고 실존적 삶에 하등 보탬이 안 되는 철학적 고뇌에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일까? 단순히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고자? 명성을 얻으려고? 그래서 한 몫 단단히 잡으려고? 아니면, 그냥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고자? 이 모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우리의 마음을 강렬한 지적 환희로 전율시켜줄 명확한 답도 아니다. 김빠지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아마도 그 답은 ‘사색과 사고’라는 길고도 먼 자기성찰의 고행길에서 스스로 발견해야 하는 무엇인지도 모른다. 철학이라고 하기엔 너무 소탈하고 문학이라고 하기엔 너무 진지한 『하나만의 선택』은 자신만의 길을 가는, 혹은 가고자 하는 사람에게 지적 성찰과 편력이라는 고독하고 쓸쓸한 길에서 말동무가 되어주고 의지도 북돋아 주고 조언과 충고를 아끼지 않는 든든한 동반자이자 믿음직스러운 친구다. 더불어 질식할 것 같은 현대 사회에서 정신의 빈곤에 시달리는 영혼의 길을 잃은 어린 양에게도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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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4. 15.

[책 리뷰] 우울함의 병원을 인문학적 역량에서 찾다 ~ 우울한 중국인(량샤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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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함의 병원을 인문학적 역량에서 찾다

원제: 郁闷的中国人 by 梁晓声
한 민족이든 한 나라든 인도주의 교육은 필수적이다. 동정심이 없는 인도주의는 인도주의가 아니다. 인도주의가 없는 인문적인 문화는 인문적인 문화가 아니다. (『우울한 중국인』, 430쪽)

초고속 성장의 뒤탈을 단단히 겪는 중국

국에서 ‘개미족(蟻族)’은 개미처럼 작고 허름한 집에 모여 살면서 쉴 새 없이 이사를 하는 청년들을 지칭한다. 베이징에서의 청년 실업과 주거 문제를 다룬 2016년에 방영한 국내의 한 시사 프로에서 개미족의 실상이 공개되었는데, 아이 하나가 써도 비좁은 방에 2층 침대 두 개를 넣어 어른 네 명이 쓰고 있었다. 이들은 카메라 촬영에는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스마트폰을 열심히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모르는 사람이 보면 게임 삼매경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사실은 필사적으로 구직 정보를 확인하고 있었다. 하등 보잘것없는 생활이지만, 이마저도 그들 뜻대로 지속하기는 어렵다. 아파트에 하숙생을 꾸역꾸역 채워넣는 것은 정부의 단속대상이라 이런 생활마저도 하루하루가 위태롭기 때문이다. 폭등하는 집값에 누추한 달팽이 집이나마 장만하려 빚을 냈다가 수렁에 빠진 두 자매를 담은 드라마 <워쥐(蝸居, 달팽이집, 베이징 TV, 2009)>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음에도 당국의 철퇴로 조기에 종영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중국 정부는 실상을 덮으며 체면 차리기에 급급하다.

제아무리 천하를 호령하는 만한전석(滿漢全席)이라도 급하게 먹으면 탈이 나는 법이고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중국은 개혁 • 개방 이후 연이은 고도성장으로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룬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 따른 상당한 역효과와 수많은 부작용을 불러온 것도 사실이다. 앞에서 언급한 청년 실업과 주거 문제는 중국이 해결해야 할 수많은 문제 중 단지 하나일 뿐이다. 극심한 빈부 격차, 환경오염, 지역 간 발전 및 소득 격차, 인플레이션 등 이제 막 자본주의에 발을 들여놓은 사회라면 응당 치르게 되는 통과의례 격인 진통부터 부정부패, 범죄, 도덕적 가치 상실, 세대 간 단절 등 현대화된 사회가 겪는 보편적인 문제까지, 그리고 이 모든 문제를 아우르는 사회주의 덕목의 상실이라는 중국 특색 문제들까지 보태져 중국은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우울함의 원인을 인문학적 역량의 상실에서 찾다!

가이자 대학교수인 량샤오성(梁晓声)은 『우울한 중국인』에서 몸살을 앓는 중국인을 한마디로 딱 잘라 우울하다고 진단한다. 하지만, 그 우울함의 기원은 꼭 개혁 • 개방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을 만든 것은 시간상으로 현실과 가장 가까운 역사이듯 이 우울함의 기원은 그리 멀지 않은 과거로까지 올라간다. 청 왕조의 멸망과 서구 열강의 억압에 의한 우울함, 일본의 침략과 내전으로 말미암은 우울함, 대약진 • 문화대혁명 등 공산당의 시행착오가 양산한 우울함, 개혁 • 개방이 낳은 우울함, 그리고 불확실한 현재와 불투명한 미래가 떠안긴 우울함까지 그 오죽함은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양심을 잃은 문화, 타락한 문학, 경외심과 수치심의 상실, 인성 미달, 공민 의식의 미성숙, 역사적 고통 등 이 우울함의 병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지만, 따지고 보면 앞에 나열한 것들은 인문학적 역량의 상실로 귀결된다. ‘사랑’이란 단어가 세상에 넘쳐난다고 해서 우리 마음속에 사랑이 넘친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듯, ‘인문’이 유행한다고 해서 그 사회에 인문적인 요소가 충분한 것은 아니다. 유행이 결핍의 결과라면,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인문학 붐이 일어난 것은 그만큼 사회 곳곳에 인문적인 요소가 부족하다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량샤오성의 『우울한 중국인(郁闷的中国人)』은 중국의 과거와 현실, 그리고 미래를 뼈아프게 진단한 책이지만, 중국만큼이나 국가와 사회, 그리고 각 개인에 인문적인 역량이 부족한 한국에도 많은 시사점을 귀띔해 주는 책이다.

저성장의 현실을 외면한 채 고성장에 목을 맨 한국인은 현재의 성장률이 마뜩잖아 우울하다. 파이를 키우자고 말하면서도 모든 국민이 어렵게 노력해서 얻은 파이를 인간적으로 공평하게 나누자는 이야기는 아무도 하지 않으니 우울하다. 용기를 내어 이런 이야기를 꺼낸다 해도 귀담아듣기는커녕 ‘빨갱이’, ‘좌빨’이라고 몰아세우니 우울하다. 똥구멍이 빠지도록 노력했는데도 여전히 사는 게 힘들다고 하소연하면 위로해주지는 못할망정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면서 더 노력하라고 질타하니 우울하다. 살고 싶어도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 우울하다. 죽고 싶어도 죽은 뒤에 욕먹으며 손가락질당할 것을 생각하니 우울하다. 물 한 방울만 한 희망이라도 티클 모아 태산이듯 모이고 모이면 시냇물이 되고 강이 되는데 이 한 방울조차 모이지 않으니 우울하다. 우울함이 심해지면 답답함과 분노를 느끼고 더 진행되면 화병에 이른다고 한다. 한국인이 화병으로 다 뒈지기 전에 한국인의 우울함을 명확히 진단하고 일부만이라도 해결할 수 있는 명쾌한 처방이 하루빨리 나와주기를 바랄 뿐이다.

마치면서...

문과 사랑, 그리고 인연을 노래하는 책이라 그런지 창자가 끊어질 것 같은 애절한 이야기들이 문장과 단락 사이를 도도히 흐르면서 이슬방울처럼 촉촉한 정情을 영글어낸다. 『우울한 중국인』은 모두가 저자 량샤오성의 경험을 토대로 한 소소한 일상이라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마치 할머니 할아버지가 화톳불에 고구마를 구워주시면서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그 이야기 속에는 웃음과 유쾌함도 있지만, 만만치 않은 인생의 쓴맛도 알게 모르게 숨어 있다. 우리가 경제적, 역사적, 그리고 문화적으로 중국과 긴밀하게 엮어 있다고 해서만은 아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반자라는 우정 어린 인류애적인 입장으로만 본다 해도 이 책에 담긴 진심 어린 조언과 충고, 그리고 허심탄회한 비판과 인간적인 분노는 중국인이 처한 위기에 동정과 연민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더 나아가 비슷한 문제를 겪는 우리에게도 매우 큰 의미가 있기에 ‘우울한 중국인’의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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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2. 18.

[책 리뷰]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거침없이 써 나가라 ~ 힘 있는 글쓰기(피터 엘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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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거침없이 써 나가라

Original Title: Writing With Power by Peter Elbow
나는 학생들이 계획하고 조심스럽게 기준에 맞추려고 애쓰며 쓴 글을 읽을 때보다 조심스러움을 내던지고 ‘쓰레기면 어때’하는 마음으로 쓴 글을 읽을 때 나를 사로잡거나 끌어당기는 문구를 더 자주 마주친다. (『힘 있는 글쓰기』, p25)

개인이건 문명인이건 사람은 세상에 뭔가를 남기고 싶어 한다. 그중에는 태초부터 내려오는 원시적 방법이자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궁극적 목적인 번식을 통해 유전자를 후대에 남기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보통은 이것을 동물적 본능이라고 말한다. 이 외에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으로는 많은 사람을 감탄하게 할 만한 업적을 남겨 역사적 • 사회적으로 유명한 인물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문화적 본능이라고 볼 수 있겠다. 앞선 방법은 대부분 사람이 가능한 보편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유명인이 되라는 후자의 방법은 비범한 재능을 타고난 운이 좋은 소수에게나 해당하는 일이다. 그러나 요즘 같은 문명 시대에는 꼭 이 두 경우가 아니더라도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통해 자신을 알리는 쉽고 간편한 방법이 있으며 실제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자신만의 블로그나 트위터, 페이스북에 글을 남기는 것이 바로 이 경우인데 이 방법은 누구나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만 있으면 가능하다. 이 방법은 평범한 사람들의 소박한 공명심을 만족시켜주는 사회적 • 문화적 욕망의 배출구로서 매우 유용하다.

내가 블로그에 글을 쓰는 여러 이유 중 하나로 이런 소박한 공명심이 전혀 없다고 한다면 새빨간 거짓말일 것이다. 블로그에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그때나 지금이나 누가 읽건 안 읽건 전혀 상관하지 않았고, 특정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쓴 글이 더더욱 아니지만, 우주만큼이나 광활한 인터넷 공간에 나의 유치한 생각이나 알량한 의견을 남긴다는 사실 그 자체와 혹시 누군가에게 보탬이 될지도 모르는 얕은 지식을 공유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런 이유로 내가 쓴 글이 좋은 글인지, 나쁜 글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은 없다. 굳이 자평해본다면 처음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보다는 작문 실력이 조금은 나아진 것 같다는 느낌은 들지만, 그렇다고 딱히 좋은 글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문장은 평범하고 구성은 불분명하며 주제는 모호하다. 그러나 이왕이면 다른 사람도 읽고 싶어 하는, 그리고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독자의 마음에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어 하는 바람이 아예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새빨간 거짓말이다. 단지 그것에 너무 집착하거나 욕심을 내지 않는 것일 뿐이다. 욕심을 낸다고 될 일도 아니며, 어차피 좋은 글을 쓰는 실력은 나의 능력 밖이라는 체념은 이미 마음속에 구렁이처럼 똬리를 틀고 있다. 때론 위대한 작품들에서 발산하는 거대한 아우라에 압도되어 감히 그런 마음을 먹을 엄두가 나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힘 있는 글쓰기(Writing With Power)』의 저자 피터 엘보(Peter Elbow)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누구나 꾸준한 노력으로 ‘힘 있는 글’을 쓸 수 있다고 믿는다. 그의 마법 같고 낭만적이며 자유방임적인 글쓰기 방법은 그 가능성을 가늠한다. 그렇다면 피터 엘보가 말하는 ‘힘 있는’ 글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논리적이고 구성이 완벽하며 화려한 수식어와 현란한 기교를 부린 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힘 있는 글이란 글자와 문장이 살아 숨 쉬면서 독자에게 변화를 끌어낼 수 있는 글이다. 독자를 압도하고 독자가 듣고 싶어 하지 않는 말을 듣게 하거나 독자가 의도하지 않았던 경험을 하게 하는 글이다.

피터 엘보는 이러한 ‘힘 있는 글’을 쓰려면 무엇보다 자유롭게 글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자유롭게 글쓰기’는 나쁜 글이든 상관하지 말고 10분 동안만이라도 마음에 떠오르는 언어를 존중하고 그것을 기록하고, 계속해서 떠오르는 언어를 존중하고 기록하는 것이다. 이것은 글에 힘을 불어넣는 최고의 손쉬운 만능 연습법이다. 여기에는 어떤 비판도, 어떤 독자도 고려하지 않는다. 나쁜 글이라는 두려움은 잊고 그저 쓰고 또 쓰는 것이며 설령 실제로 나쁜 글이라도 상관하지 말고 쓰는 것이다. 글의 주제나 내용과 상관없어도 일단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써나가는 것이 자유로운 글쓰기의 핵심이다.

는 어렸을 때부터 일기든 독후감이든 꾸준히 뭔가를 써보지 못한 채 성장했다. 당시의 학교 교육 시스템이 요구하는 글쓰기 능력은 선생님이 칠판에 적는 것을 공책에 베껴 쓰는 것과 숙제로 내준(기억으로는 작문 숙제는 전혀 없었다) 문제를 푸는 것 정도면 충분했다. 졸업 후 자발적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글을 쓴 최초의 기억은 아마도 군대 가서 여자친구와 편지를 주고받았던 것이었고, 그것도 제대 후에는 인터넷 메일과 MSN메신저, 그리고 문자 메시지 등으로 뚝 끊기고 말았다. 그 이후 블로그를 통해 글을 쓰기 전까지는 정말 글쓰기와는 담쌓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블로그 덕분에 보잘것없는 글이지만 그래도 뭔가를 쓰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 맞춤법도 틈틈이 다시 보게 되었다. 이제는 좀 더 욕심이 난 것일까? 주제넘게 ‘힘 있는 글’에 도전하려고 하다니 말이다.

아무튼, 이 책은 필자처럼 블로그 등에 글을 꾸준히 쓰는 사람에게 상당히 유용한 책이지만, 피터 엘보가 글쓰기에 관해 설명하는 그 대상의 글이 주로 논리적인 글에 가깝다는 점을 보면 사회생활에서 무미건조한 보고서나 평가서, 기획서 등을 남발하는 것에 질린 사람이나 남들과 다른 특별한 논문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더 유용할 듯싶다.

이 리뷰는 2016년 2월 18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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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 30.

[책 리뷰] ‘무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 왜 책을 읽는가(샤를 단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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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Original Title: Pourquoi lire? by Charles Dantzig
책은 결코 삶과 대립하지 않는다. 책은 인생이다. 진지하고 난폭하지 않은 삶, 경박하지 않고 견고한 삶, 자긍심은 있되 자만하지 않는 삶, 최소한의 긍지와 소심함과 침묵과 후퇴로 어우러진 그런 삶이다. 그리고 책은 실용주의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초연히 사유의 편에 선다. 독서는 그 어느 것에도 봉사하지 않는다. 그래서 독서가 위대한 것이다. (『왜 책을 읽는가(Pourquoi lire?)』, p257)

“왜 나는 책을 읽는가?”

“왜 우리는 책을 읽는가?” “왜 우리는 책을 읽어야만 하는가?”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은 독자에 따라 천차만별일 것이다. 자신을, 그리고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는 상투적이면서도 가장 무난한 대답에서부터, 인생의 길고도 긴 지루한 시간을 유용하게 보내려고, 사심 없는 순수한 지적 욕구로 지식과 교양을 쌓으려고, 누군가에게 독서량을 자랑하려고, 조금은 노골적이라 할 수 있지만 이 중에서 가장 솔직한 대답일 것 같은 출세와 성공을 위해서라는 등까지 별의별 대답이 가능하지만, 이 대답들을 대충 흩어만 봐도 독서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면에서는 여타 이기적인 행동과는 구별이 되지만, 여하튼) 충분히 이기적인 행동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이 자리에서 떠오르는 대로 급조한 궁색한 대답들이 현실과는 얼마나 가까울까? 정말 독서가 돈과 명예를 가져다주는 것일까. 독서가 사람도 변하게 할까? 교양도 가져다줄까? 어렸을 적에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교훈대로 책을 많이 읽으면 정말 ‘훌륭한’ 사람이 될까?

이러한 호기심과 궁금증이 머리와 마음속에서 파리처럼 윙윙거리며 떨쳐버릴 수 없다면 샤를 단치(Charles Dantzig)의 『왜 책을 읽는가(Pourquoi lire?)』를 읽어 보자. 독서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담긴 이 책을 통해 독서에 대한 뿌리 깊은 환상도 깨지지만 공평하게 독서에 대한 근거 없는 불안과 불신도 날려버리게 될 것이다.

독서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

를 단치의 부모는 저자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굳이 글자를 깨우쳐주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그에 대한 반발이었을까. 샤를 단치는 어렸을 때부터 자타가 공인하는 수준 높은 독서광이 되었다. 너무 책에만 매달려 지내는 저자를 걱정하는 부모의 기분을 맞춰 드리려고 일부러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을 정도라니 정말 영재가 따로 없다. 그렇게 오랜 시간 쌓인 독서의 힘은 이 책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지나칠 정도로 지적인 저자의 수준 높은 독서 담론에는 수도원의 오래된 고서에서나 맡음 직한 퀴퀴한 곰팡내가 난다. 그렇다고 격식을 지나치게 차린다거나 특별히 경건하지도 않다. 오히려 날카롭고 직설적인 그의 필치는 경쾌하며 자유분방하다. 때론 뜻대로 그림이 안 그려지는 성난 화가가 마구 붓을 휘두르듯, 연약하지만 부드러운 종이에 두 눈에 광채를 뿜어대며 마구 글씨를 휘갈기는 광기 어린 저자의 모습이 눈에 그려지기도 한다.

독서광이니만큼 독서에 대한 예찬으로 가득 찰 거라고 미리 짐작했다간 나처럼 뒤로 벌렁 자빠질 수 있으므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샤를 단치는 독서는 사람을 거의 변화시킬 수 없으며 교양 있는 사람으로도 만들 수도 없다고 말한다. 참말로 놀랍게 들릴지도 모르는 말이지만, 난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 리뷰를 쓰고 있는 나를 보더라도 대한민국 성인의 평균 독서량보다는 상당히 많은 책을 읽었음에도 처음 도서관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음을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원래 그렇게 좋지도 나쁘지도,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범인이었는데, 책과 역사 속에 파묻혀 살다 보니 오히려 사람을 괜히 미워하고 불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미워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매우 인간적인 감정이다. 꿈보다 해몽이 좋듯, 그것은 아직 인간성은 남아 있다는 방증이다.

독서를 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리가 독서를 하는 진짜 이유에 대해 샤를 단치는 독서는 자기 자신을 위한 자기 만족적인 이기적인 행위라고 말한다. 그것은 리뷰 앞부분에 책을 읽는 이유에 대해 내가 주절주절 늘어놓은 대답들만 봐도 무난하게 수긍할 수 있는 말이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타인의 관심을 좀 더 끌고 더 나아가 사랑받기 위한 일이 아니겠는가. 독서의 좋은 영향에 대한 환상과 나쁜 영향에 대한 쓸데없는 기우를 밝히면서 샤를 단치는 좀 더 자세하게 왜 책을 읽는지를 밝힌다. 그것은 지식의 경계를 확장하고, 편견을 없애며,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다. 왜 책을 읽는가? 자기 울타리 안에 갇혀 편견 속에 살면서 무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말이다. ‘무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니, 이 얼마나 오만하면서도 명쾌한 비유인가. 그러나 독서는 결국 이타심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저자는 책과 독서, 문학에 대한 기존 관념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한편으로는 독서의 가치를 지키는, 종이책의 가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 자처한다. 종이책의 가치가 벼랑 끝에 선, ‘책’의 전환이 이루어지려는 변혁의 시대에 숨을 쉬듯 책을 읽으면서 죽음과 경주하는 저자는 오래전 책으로 사용했던 양피지 두루마리와 대나무 등이 사라졌듯이 전자책으로 말미암아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종이책이 없는 세상에 닥칠 위험을 경고한다. 정보화된 미래는 권력자들에게 더 충실히 봉사할 것이고, 그럴수록 인류의 정신은 더욱 조그만 상자 안에 갇힐 것이라고.

인류의 무궁한 상상력과 예민한 감수성과 변덕스러운 감정을 가장 잘 간직한 물리적인 매개체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 책이라면, 종이는 무궁하고 예민하고 변덕스러운 사람의 마음과 친숙하게 이어주는 가장 친근한 매개체였다고 볼 수 있다. 전자책으로도 글을 읽을 수는 있지만, 뭔지 모를 그 낯섦은 여전히 종이책을 찾게 만든다.

마치면서...

랑스에 가본 적도 없고 프랑스어는 ‘봉쥬르’와 ‘마담’ 정도밖에 모르며 그렇다고 특별히 프랑스 문학이나 역사를 깊이 있게 읽어 본 적도 없는 나지만, 『왜 책을 읽는가(Pourquoi lire?)』는 왠지 프랑스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을 프랑스적인 것, 프랑스 문학으로 사색의 정원을 꾸민 이 책에는 보편적인 애국심과는 질과 격이 다른 자부심이 넘쳐 흐른다. 파벌을 형성하고 제자들의 연구를 가로채는 프랑스 대학의 교수들과 다분히 의도적으로 글을 쓰는 졸렬한 작가들을 통렬하게 비판한 부분은 충분히 공감이 가고 시원스럽지만, 작가로서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오만함과 자신의 신념에 대한 강한 확신은 갑자기 찌릿한 오줌 냄새를 맡았을 때처럼 인상을 찌푸리게 한다. 그래서 때론 메스껍고 구역질이 나며 반감이 일어서기도 한다.

그러나 시체 썩는 냄새 같은 견디기 어려운 악취가 아닌 이상 다행스럽게도 사람의 코는 웬만한 냄새에는 금세 둔감해지기 마련이다. 오만과 확신의 악취가 사라지면 그제야 자연스럽게 저자 샤를 단치의 놀라운 통찰력과 깊고 넓은 지식으로 곰탕처럼 걸쭉하게 우려낸 독서에 대한 고찰이 머릿속으로 스멀스멀 조금씩 기어들어 오기 시작한다.

이 리뷰는 2016년 1월 30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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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2. 6.

[책 리뷰] 작가의 소설에서 반추해 보는 작가의 삶 ~ 나쓰메 소세키: 생애와 작품(권혁건)

Soseki Natsume Life and Works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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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소설에서 반추해 보는 작가의 삶

Original Title: 나쓰메 소세키: 생애와 작품 by 권혁건
나쓰메 소세키 문학에 많은 사람들이 매혹당하는 이유는 약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통할 수 있는 근대화의 모순과 그늘, 죄의식, 고독감, 소외된 지식인들이 처한 제반의 문제, 지식인의 불안, 죽음과 자살, 삼각관계, 불륜에 대한 공포, 금전의 구애, 부친과 자식의 갈등, 급격한 근대화에 대한 지식인이 느끼는 두려움, 근대문명과 인간의 불안, 에고이즘 추구로 몸부림치는 고독한 인간 모습 등을 작품을 통해 철저하게 파헤쳐 설득력 있는 문장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나쓰메 소세키 – 생애와 작품』, p21-22)

느 작가의 작품들을 읽다 매료되다 보면 작가의 일생에도 관심이 갈 때가 있다. 내가 이런 말을 꺼낸 이유는, 소설이 아무리 상상력의 소산이라고 해도 의도적이건 아니건 작가의 경험이나 사상이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기 마련이기 때문인데, (나 자신이) 탄복할만한 작품을 쓴 작가들을 마주할 때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길래, 어떻게 사는 작자이길래, 어떤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길래 이다지도 재미나고 섬세한 소설을 쓸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부러움과 시기, 칭찬이 고루 섞인 감탄의 말을 자아낼 때가 많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이자 일본에서 ‘국민 작가’로 추앙받는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역시 자신의 체험을 밑바탕으로 소재로 만든 작품들이 꽤 있고, 그렇지 않은 작품들에서도 크고 작게 그의 생애와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는 장면이 간간이 등장한다. 그래서 이번에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들을 두 번째로 접하는 와중에 함께 찾은 책이 『나쓰메 소세키 – 생애와 작품』(권혁건 지음)이다. 참고로 이 책은 처음으로 경기도 시민에 한해서 경기도에 있는 모든 공공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수 있는 ‘이웃대출’ 서비스(이 리뷰를 게시하는 2018년 현재 ‘책 바다’ 서비스로 통합되었다)를 이용해서 대출한 책이기도 하다.

책을 참고로 나쓰메 소세키가 쓴 작품에서 작가의 체험이나 삶과 연관 지을 수 있는 몇 작품을 흩어보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吾輩は猫である)』 다음으로 1906년에 발표한 『도련님(坊っちゃん)』은 나쓰메 소세키가 1895년(28살)에 1년 정도 근무했던 경험이 있는 시코쿠의 마쓰야마 중학교를 무대로 해서 만든 작품이다. 같은 해 발표한 『풀베개(草枕)』는 나쓰메 소세키가 1897년(30살) 12월 31 일 친구와 함께 규슈 구마모토 현 다마나군 덴스이 초에 있는 오아마 온천에 놀러 갔다가 하이쿠를 지었던 체험이 소재가 되어 탄생한 작품이다. 1908년(41살) 아사히신문에 연재된 열 개의 꿈 이야기로 이어진 짧은 단편 『몽십야(夢十夜)』는 꿈 이야기인 만큼 작가의 무의식 세계까지 은밀하게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산시로(三四郞)』의 무대인 도쿄제국대학은 작가가 졸업한 대학이기도 하다. 1910년(43살)에 연재된 『문(門)』에서 주인공 소스케가 직장동료의 소개로 가마쿠라의 암자 잇소암에서 좌선하는 장면은 1894년(27살) 12월 친구 스가 토라오의 소개로 도쿄 근교 관광지에 있는 가마쿠라 엔가쿠지의 관장인 샤쿠 소엔이라는 사람을 찾아가 좌선 체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쓰메 소세키가 죽기 한 해 전 19015년에 연재된 『미치쿠사(한눈팔기, 道草)』는 작가의 자전적 장편 소설이다.

1867년 도쿄에서 태어난 나쓰메 소세키는 나누시(현재의 동장이나 이장, 파출소장 역할까지 역임)였던 아버지가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짐에 따라 나누시 제도가 폐지되고 수입이 없어지면서 가족의 형편은 어려워지게 되었다. 또한, 나쓰메 소세키가 태어났을 때의 아버지 나쓰메 고헤나오카쓰의 나이는 이미 50세였고, 모친 나쓰메 치에의 나이 또한 42세였다. 고령의 나이에 아이를 낳은 것이 수치스러웠던 시대에 가정의 경제적 사정도 어려워지자 나쓰메 소세키는 두 명의 누나와 세 명의 형들과 헤어져 고물상에 양자로 들어가고, 노점에서 소쿠리에 담겨 잡동사니와 함께 전시되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한다. 에도가 도쿄로 바뀐 1868년에 11월에는 다시 시오바라 마사노스케의 양자로 들어가지만, 양아버지가 바람을 피워 양어머니 야스와 다투고 이혼을 하자 나쓰메 소세키는 1875년(8세) 4월에 다시 생가로 돌아온다. 그리고 얼마 후 1881년(14세) 1월에 자신을 가장 사랑해주던 모친 치에가 54세로 사망한다.

태어날 때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두 가정의 양자로 떠도는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의 삶 자체를 조명해보면 연민과 동정심을 자아내는 슬픈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여기에 친어머니의 죽음, 폐렴으로 말미암은 두 형의 잇따른 죽음, 가장 친한 친구였던 마사오카 시키의 죽음과 영국 유학에서 발견한 인간을 고립시키고 불안하게 만드는 문명의 고독하고 쓸쓸한 그림자와 부족한 유학비, 신체적인 열등감, 소화기관의 쇠약에 의한 소화불량 등이 원인이 되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해 앞으로 만성적인 질환으로 정착하게 될 신경쇠약 등은 그의 문학을 세밀하게 이해하는 데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그가 일찍부터 만성질환을 앓게 된 것은 고령 출산과 관련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가 『나쓰메 소세키 – 생애와 작품』을 읽으며 나쓰메 소세키 삶 중에서 가장 실망스러웠던 점은 바로 그가 징병 기피자였다는 사실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입대 연기 제도를 이용하여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할 예정인 해인 1893년 26세까지 입대를 연기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대학과 대학원에 재학하는 학생들에게 입대 연기 혜택을 주는 것과 같은 제도가 이미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 시행되고 있었다는 점을 보면 이런 것도 일본 것을 그대로 베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입대 1년 전인 1892년 4월에 뜬금없이 나쓰메 소세키의 부친은 아들의 호적을 홋카이도로 옮긴다. 당시 홋카이도에는 인구가 매우 적었기 때문에 호적이 홋카이도인 평민은 징병이 면제된다는 점을 이용한 계획적인 병역 기피였다(예전 어느 국가대표 축구선수가 ‘국적 문제’를 악용하여 병역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때가 떠오른다). 그의 호적이 다시 도쿄로 돌아온 것은 『마음(心)』이 《아사히신문》에 연재되고 있던 그의 나이 47세 때인 1914년(大正 3) 6월 1일이었다. 이러한 꼼수를 징병 대상자인 나쓰메 소세키가 몰랐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안타까웠던 점이 있다면 1909년 9월 2일 오사카에서 데쓰레이마루라는 배를 타고 대련으로 향하면서 시작한 46일간의 만주와 한국 여행에서 남긴 나쓰메 소세키의 기록에서 일본의 가혹한 식민지 정책에 따라 착취당하고 고통받는 중국인과 조선인에 대해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가져야 할 연민이나 책임감 등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신문에 연재되는 기행문에 중국인을 시종일관‘더럽다’라고 경멸하고, ‘짱’(‘짱콜라’의 약침으로 중국인을 이르는 경멸의 말)이라고 부르는 등 민족 차별적인 언사를 아무 거리낌 없이 사용하였다. 또한, ‘더러운’ 중국인과 ‘깨끗한’ 일본인을 비교하며 일본 국민을 일등 국민이라고 자화자찬하는 등 영국 유학을 하였음에도 당대 많은 일본 지식인이 가진 한계를 나쓰메 소세키 역시 극복하지는 못한 듯하다.

한국 여행에서는 온통 흰옷을 입은 한국인과 한국의 자연풍경 가운데, ‘잔잔하고 푸른 시냇물’과 ‘푸른 소나무’에만 관심을 나타내었다. 특히 남산에 서 있는 소나무를 인상 깊게 봤는데, 소나무에 대한 특별한 그의 관심은 작품 『갱부』의 첫머리에서도 볼 수 있다.

아까부터 소나무 숲을 지나고 있는데 소나무 숲이란 것은 그림에서 본 것보다도 훨씬 더 길었다. 아무리 가도 소나무만 자라나 있으니 참으로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내가 아무리 걷는다 해도 소나무 쪽에서 발전해 주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차라리 애초부터 버티고 선 채로 소나무와 눈싸움을 하는 편이 나을 뻔했다. (『갱부』, 옮긴이 박현석, p11)

이렇게 서울에서 16일간 여행하며 남긴 것은 ‘소나무’뿐이었다.

나쓰메 소세키는 ‘산이 있고 소나무가 있어’ 서울이 좋다고 표현했으며, 서울의 ‘남산과 그곳에 서 있는 ‘소나무’에 대하여 강한 애착을 갖고 바라보았다. 그는 당시 한국인들이 일본인들로부터 억압, 탄압을 받고 있는 문제에 대하여는 무슨 이유에선지 침묵하면서 서울의 자연경관에만 관심을 나타냈던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 – 생애와 작품』, p133)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려고 소나무에 유난히 집착했던 것인지, 정말로 서울의 소나무가 그토록 뛰어났던 것인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

가도 사람이기에 완벽할 수는 없다. 작가는 작가이고 작품은 작품이다. 작품을 좀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 작가의 삶을 들춰볼 수는 있으나, 작가의 도덕성이나 인격이 작품성을 판단하는 데 영향을 끼치는 것은 도가 지나치고 어리석은 짓이다. 요리사의 인상이 험악하다고 해서 요리가 맛없는 것도 아니고, 사생활이 문란한 연예인이라고 해도 시청자를 웃길 수만 있다면 그만이지 않은가? 아무튼, 나쓰메 소세키를 애독하는 독자라면 『나쓰메 소세키 – 생애와 작품』은 한 번쯤은 꼭 읽고 건너야 할 고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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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1. 30.

[책 리뷰] 달콤 쌉싸래한 맛 속에 숨은 ‘불편한 진실’ ~ 나쁜 초콜릿(캐럴 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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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쌉싸래한 맛 속에 숨은 ‘불편한 진실’

Original Title: Bitter Chocolate by Carol Off

음모의 소용돌이가 푹푹 찌고 숨 막히는 열대 공기처럼 우리를 둘러쌌다. 취재원들은 끊임없이 내게 말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키에페르는 이들의 당부를 무시하고 조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선을 넘었는지 어떻게 알죠?”

내가 물었다.

“코트디부아르에 왔을 때 이미 넘어버린 겁니다.”

(『나쁜 초콜릿(Bitter Chocolate)』, p359)

‘신의 음식’에서 ‘아동 노동 착취’의 아이콘으로

틴어로 ‘테오브로마 카카오(Theobroma cacao)’. 즉 ‘신의 음식’이라 불리는 카카오나무의 역사는 3,000여 년 전의 중앙아메리카부터 시작된다. 그 당시 옥수수를 주식으로 삼았던 올메크족 여인들은 카카오 원두의 끈끈하고 찐득거리는 지방질 건더기에 물과 녹말을 섞은, 오늘날 카카오를 함유한 음식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순도 높은 초콜릿을 만들어 고위 계급에 바쳤다. 그리고 올메크족의 뒤를 이은 마야, 아스테카 문명에서도 카카후아틀의 요리와 섭취는 전적으로 지배계급의 취향이었다. 이는 일반 민중뿐 아니라 카카오 원두를 수확하는 이들조차 결코 누릴 수 없는 사치였으며, 원두에 불과했지만 워낙 귀중한 상품이었던 카카오는 아스테카 제국의 공식 통화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후 카카오는 16세기 신대륙 발견 이후 유럽으로 흘러 들어가 식민지 경제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으로써 커피나 사탕수수, 목화 산업처럼 노예무역을 활성화하는데 크나큰 이바지를 한다. 조직적이고 교회의 인가까지 받은 노예 제도는 법적으로는 19세기 중반에 끝났어야 했으나, ‘계약 노동자’라는, 그럴듯하게 이름만 바뀐 채 현대에까지 이어져 ‘아동 노동 착취’, ‘빈곤’ 등의 국제적 문제를 남긴다.

카카오 열매를 따는 아이들과의 약속

나다 언론인 캐럴 오프(Carol Off)의 『나쁜 초콜릿(Bitter Chocolate)』은 3,000여 년 전의 중앙아메리카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계급 시대와 착취, 탐닉과 폭력으로 얼룩진 카카오 역사와 그 현장을 추적하여 고발하는, 초콜릿을 좋아하는 소비자로서는 외면하고 싶은 ‘불편한 진실’이 담긴 책이다.

인류 문명에 카카오가 처음 등장한 시대부터 카카오가 유럽에 전파된 대항해시대를 거쳐 퀘이커교도 사업가들에 의해 달콤하면서 쌉싸래한 근대적인 판형 초콜캐럴 오프릿 제품들이 개발되기까지의 기나긴 과정과 달곰한 먹거리로 상품화된 덕분에 더욱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게 된 각양각색의 초콜릿 제품 생산을 둘러싼 극심한 경쟁 속에서 탄생한 대형 독과점 및 카르텔 형성 과정에 숨겨진 다국적기업들의 횡포와 야심, 그리고 단지 배고픔을 면하고자 하는 빈약한 소망을 품은 가난한 사람들의 약점을 이용하여 감금 생활과 무임금 노동 등의 노예와 다를 바 없는 학대를 자행한 농장주와 이를 무심히 넘겨버린 다국적기업과 각국 정부들, 또한 카카오와 관련된 코트디부아르 정부의 부정과 부패를 파헤치다 사라진 저널리스트 앙드레 키에페르, 코트디부아르의 카카오 농장으로 끌려가 총으로 위협당하며 강제노동을 해야 하는 아이들을 구출하다 실직한 외교관, 돈을 벌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카카오 농장에서 노동 착취와 학대를 경험했던 소년들의 실화 등 과거와 현재를 아우라는 입체적인 구성과 날카로운 필치로 카카오 세계에 만연한 불의를 폭로한 캐럴 오프는 제2의 키에페르가 될 수도 있다는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코트디부아르의 현지 조사를 강행하면서까지 『나쁜 초콜릿(Bitter Chocolate)』을 완성했다.

캐럴 오프는 코트디부아르의 시니코송(Sinikosson)이라 불리는 외지고 가난한 곳에 도착했을 때, 마을 사람들에게 그들이 카카오 열매로 뭘 하는지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마을 사람들 모두 족장을 쳐다보았다. 난처해진 족장은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카카오 원두를 생산하는 그들은 기업들이 카카오 원두를 사들여 뭘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캐럴 오프는 마을 사람들에게 초콜릿에 관해서 설명했고 그중 한 사람이 마을 바깥에 갔을 때 한번 먹어보았는데 맛이 좋았다고 대답했을 뿐, 그 밖에는 초콜릿이 무엇인지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또한, 그녀는 초콜릿이 뭔지 모르는 코트디부아르의 시니코송 아이들에게 초콜릿을 먹는 대부분의 바깥세상 사람들은 그 초콜릿이 어디서 오는지, 누가 카카오 열매를 따는지,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전혀 모른다고 말해주었을 때, 시니코송 아이들은 그녀가 대신 그 사실들을 초콜릿을 먹는 사람들에게 알려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캐럴 오프는 『나쁜 초콜릿(Bitter Chocolate)』을 완성함으로써 시니코송 아이들과의 약속을 지킨 셈이 되었다.

‘공정무역’ 상품에 내포된 또 다른 ‘불편한 진실’

카오 역사가 처음 시작되는 3,00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초콜릿은 지위가 낮은 이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특권층이 소비하는 사치품이다. 수천 년 동안 지배계급의 초콜릿에 대한 가없는 갈망을, 결코 바닥을 드러낼 줄 모르는 기업의 탐욕을 채워주려면 역시 가없는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했다. 부자가 있으면 가난한 자가 있고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듯, 제품의 싼값에는 그에 걸맞은 이유가 있고 그 이유는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1차 생산자들의 노동 착취가 자리하고 있다. 물론 그 노동 착취에는 어떻게든 돈을 벌어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혹한 처지에 태어난 아이들도 예외는 아니다.

이런 씁쓸하고 우울한 현실을 직시하고 나면 항상 떠오르는 회의는 왜 기업은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이윤 추구와는 공존할 수 없을까 하는, 다소 공상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상심에서 오는 낙담이다. 그렇다면 1988년 네덜란드에서 막스 하벨라르(Max Havelaar)가 시작한 공정무역 운동이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유기농 분야의 선구자인 크레이그 샘스와 그의 아내 페얼리는 유기농 초콜릿 상품에 적합한 공급자를 벨리즈 남부 톨레도의 농민에게서 발견했다. 그들은 마야인의 후손으로 재래종 크리오요 카카오나무를 3,000년 전 올메크족으로부터 전수받은 방식, 즉 비료나 살충제를 사용하지 않는 재래식 방법으로 재배하고 있었다. 톨레도의 농민들은 샘스가 파트너 손을 내밀기 얼마 전에 허밍버드허시와 벨리즈 정부의 조언에 따라 농약에 절은 교배종을 심었다가 크게 실패를 본 직후여서 그의 사업 제한이 못 미더웠지만, 그렇다고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결국 계약에 동의했다. 샘스가 설립한 그린&블랙스는 이를 계기로 ‘마야골드’라고 이름 붙인 명품 초콜릿을 생산했고 그것은 단지 유기농 초콜릿만이 아니라 ‘공정무역’ 상품이기도 했다.

덕분에 수입이 증가한 톨레도 농민들은 아이들을 다시 학교에 보낼 수 있게 되었고, 그들의 동네에 정기 운행 버스가 개설될 정도였지만, 그럼에도 자신들의 이름을 딴 초콜릿을 살 만큼 부유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전히 원두 재배 이상의 것은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미 전 지구적 피라미드 경쟁에서 상위를 차지한 여러 나라와 다국적기업들이 자신들이 점령한 유리한 자리를 빼앗기지 않고자 장벽을 쌓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공정무역이 추구하는 진정한 목적이 1차 생산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불편한 진실’도 한몫한다. 윤리적 소비가 생산자보다는 소비자의 관점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한 사람 중 하나인 크레이그 샘스는 “소비자들은 문제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하지 않아요. 그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편에 자신들이 설 수 있도록 제조업자들이 도와주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열대우림과 전통문화의 소멸, 지구 온난화에 대해 느끼는 절망, 비관, 무기력함 등의 감정을 덜게 해주기를 원하죠.”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공정무역 제도가 기존 체제와 비교하면 1차 생산자인 농민들에게 더 큰 이득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그럴듯한 제도로 가장 큰 이득을 보는 것은 공정무역 딱지를 붙이고 경쟁상품보다 더 비싸게 파는 기업이다. 그리고 공정무역 라벨이 붙은 제품을 삼으로써 세상에,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뭔가 크게 이바지를 했다는 우월감, 또는 자부심에 빠져 자화자찬하며 만족하는 소비자도 빠질 수 없다.

공정무역이 그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개선할 기회는 제공해 줄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기업이 적극적으로 공정무역 제품을 생산하고 소비자 역시 적극적으로 동참할 때 가능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런 희망적인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캐럴 오프는 이렇게 오랫동안 지속한 불의가 바로 잡히는 날은 오기 어려울 거라고 비관적인 전망으로 글을 마친다.

마치면서...

리 주변의 크고 작은 슈퍼마켓, 심지어 시골의 구멍가게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먹을거리가 바로 초콜릿 제품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것을 사 먹을 수 있을 만큼 가격 또한 저렴하다. 그러나 군침을 삼키며 그 초콜릿 제품 봉지를 벗기는 부드럽고 나약한 어느 한 소년의 흰 손과 땡볕 아래 시커멓게 그을리며 끼니도 제대로 못 때우고 카카오를 재배하는 소년의 거칠고 억센 손 사이의 격차는 어마어마하다 못해 요원하기까지 하다. 인종이나 종교, 국경과 상관없이 보편적인 상품이 된 초콜릿이지만, 초콜릿의 원료를 재배하는 소년과 농민들에겐 여전히 사치품이다. 살 만한 나라, 경제적으로 괜찮은 부모 밑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심심풀이 간식으로 초콜릿을 소비하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단지 생존을 위해 어렸을 때부터 노동하며 초콜릿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날을 꿈꾼다.

누구나 겉으로는 공정하며 평등한,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거나 이에 동조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실제 행동은 그 반대다. 『나쁜 초콜릿』이라는 책이 출판되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12초마다 기아와 그와 관련된 질병으로 아이들이 죽어가는 것처럼 하루도 빠짐없이 행해지는 의도적이지는 않지만 의식적인 지속적인 테러가 부정할 수 없는 그 증거이며, 우리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지속적인 테러에 동참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루소는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문명사회 이전 자연인 상태에서의 불평등은 신체적 불평등뿐이지만 그것은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미미하다고 말하면서 현재의 불평등과 그에 따른 죄악은 사유의 개념이 생기면서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 이 얼마나 놀라운 발견이고 선견지명인가. 그러나 아쉽게도 이 불평등을 혁파할 수 있는 조금의 여지도 안 보이니, 정말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이 리뷰는 2015년 11월 30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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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1. 12.

[책 리뷰] 한국의 높은 자살률의 원인을 19세기 프랑스에서 찾다 ~ 자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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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높은 자살률의 원인을 19세기 프랑스에서 찾다

Original Title: David Émile Durkheim by Le Suicidé
사실 오늘날의 타락의 원인은 바로 종교가 이제는 무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살론(Le Suicidé)』, p499)

경제적 풍요가 가져온 정신적 빈곤

OECD 국가 중 자살률과 자살 증가율 1위, 세계에서는 12년간 109.4% 증가로 자살 증가율 2위를 기록한 한국. 세계 경제 순위에서는 꾸준히 20권 안에 머무른 중산층 국가라고 자부할만한 한국에서 왜 그렇게 높은 자살률이 나오는 것일까.

이미 19세기 말에 자살에 대한 명쾌한 사회과학적 분석으로 객관적 평가를 내린바 있던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은 자살률 증가의 원인으로 경제적 빈곤이 아니라 문명이 가져온 정신적 빈곤을 지적했다. 보통 사람들은 가난, 또는 이와 비슷한 경제적 어려움이 자살의 원인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기 일쑤지만, 실제 통계를 보면 경제적으로 한참 뒤에 있는 국가들의 자살률이 한국보다 훨씬 낮은 경우가 허다하다.

뒤르켐은 『자살론(Le Suicidé)』에서 19세기 유럽의 주요 국가들의 자살률을 분석하면서 19세기 초부터 19세기 말까지 증가한 유럽 여러 국가의 자살률을 개인적 기질, 성격, 내력, 개인사나 심리학, 정신병리학적으로 파악하기보다는 사회의 한 현상으로 보았다. 그는 하루, 한 달, 한 해에 따라 나타나는 자살률의 변화는 사회생활의 리듬을 반영하는 것이며 이러한 자살률이 사회의 통합 정도에 반비례함을 밝힘으로써 자살의 사회과학적 연구의 기초를 다졌다.

보이지 않는 죽음을 가져오는 가족과 사회의 해체

살이 범죄나 단순한 정신병이 아닌 중대한 사회 현상으로 본 뒤르켐은 자살을 크게 세 종류로 분류했다. 사회의 해체가 이미 개인들이 겪는 정신적 고뇌를 더욱 가중시키고, 개인과 사회를 연결하는 유대가 느슨해짐으로써 삶과의 연결고리 역시 약해지면서 발생하는 이기적 자살과 지나치게 부족한 개인화 때문에 발생하는 이타적 자살, 그리고 가장 규제가 필요한 상황에서 욕망이 규제를 받지 못해 일종의 무규율상태 증가로 발생하는 아노미성 자살이다.

이기적 자살은 지나친 개인주의로 말미암은 우울과 의기소침을 예로 들 수 있으며, 이타적 자살은 원시 부족 사회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늙거나 병든 남자의 자살, 남편의 죽음을 따른 아내의 자살이나 족장의 죽음에 따른 부하나 시종의 자살 등이 있다. 마지막으로 유명인들의 급작스러운 자살 같은 권태감이나 환멸감으로 말미암은 자살은 아노미성 자살의 한 예가 될 수 있다.

뒤르켐은 이기적 자살은 인간이 존재의 근거를 삶에서 찾지 못해서 일어나고 이타적 자살은 존재의 근거가 삶의 외부에 존재하기 때문에 일어나며 아노미성 자살은 인간의 활동이 충분히 규제되지 못해서 생기는 고통에서 나온다고 분석하며 이기적 자살과 아노미성 자살을 현대사회의 정규적이고 일정한 수의 연간 자살률이 나오는 주요 원인으로 보았다. 둘 다 개인에게 사회가 불충분한 존재인 까닭에 생겨나지만, 이기적 자살은 진정한 집단활동의 결핍으로 인해서 개인이 목적과 의미를 상실하는 경우이고 아노미성 자살은 개인의 열망에 미치는 사회의 영향이 결핍됨으로써 개인을 제동 없이 방치함으로써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사회의 통합력에서 자살의 사회적 원인을 찾았던 뒤르켐은 19세기 초에서부터 말까지 증가한 프랑스의 자살률 증가 원인을 출생률 감소, 이혼 증가, 전통의 해체로 말미암은 가족의 해체와 분산, 그리고 사회적 통합력의 상실, 공동 목표의 상실, 국가 이상의 상실 등으로 보았다.

자살로 이르는 궁극적 원인

르켐이 밝힌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자살률 증가의 원인을 보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작금의 한국 상황과 너무나 흡사하다. 선진국들은 경제발전과 시민 의식의 상호 변증법적인 과정에 비교적 많은 시간을 소비하며 성장한 끝에 명성에 걸맞은 성숙한 시민 의식을 이룩했다면, 한국은 급격한 경제발전을 이루는 대부분 시기에 시민적 자유가 정체되면서 사회적 성숙도 지체되었다. 빠른 속도로 붕괴해 가는 전통적 가치관을 시기적절하게 대체할 가치관이 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함으로써 발생한 빈곤한 정신은 빈곤한 사회를 낳았다. 빈곤한 사회는 사회적 이상과 국가적 이상의 상실이라는 혼란과 권태의 씨앗을 잉태했고, 이로써 한국 사회는 나침반을 잃은 배처럼 목표를 잃고 떠도는 유령선이 되었다. 그저 나 하나만의 출세와 성공을 향해 앞만 보고 내달릴 뿐이다. 치열한 생존 투쟁에 육체는 지치고 정신은 피폐해진다. 지옥 같은 세상이라고 한탄하지만, 그런 지옥 같은 세상을 만든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갑작스러운 경제적 풍요가 가져온 예기치 못한 정신적 빈곤의 쓴맛을 톡톡히 치르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뒤르켐은 자기의 삶이 불행하다고만 해서 자살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자실 직전은 슬프지만, 그것이 원인은 아니며 그를 슬픔으로 이끈 사회적 원인, 즉 슬픔을 극복할 힘과 기회를 주지 못하고 벼랑으로 이끈 것은 다름 아닌 사회, 즉 우리라는 말이다. 만약 대한민국 사회가 각성하지 못하고 일말의 책임도 느끼지 못한다면 ‘자살 국가’라는 불명예는 늘 우리의 뒤를 따라다닐 것이며, 해 질 무렵 드리우는 어둠처럼 소리 없이 밀려오는 검은 유혹에서 당신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이 리뷰는 2015년 11월 12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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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9. 13.

[책 리뷰] ‘자연인’으로서의 시작은 ‘공존’ ~ 인간 불평등 기원론(장 자크 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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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인’으로서의 시작은 ‘공존’

Original Title: Discours sur l'origine et les fondements de l'inégalité parmi les hommes by Jean-Jacques Rousseau
이 설명으로부터 당연히 불평등은 자연 상태에서는 거의 없으나 우리의 능력의 발달과 정신의 발전으로부터 그 에너지를 얻어 성장하며, 마침내는 소유권과 법의 제정에 의해 항구적이 되고 합법화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 중에서)

사회적 불평등의 부당함을 고발한 반항아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Diacours sur l`origine de l`negalite parmi leshommes)』에는 불평등의 기원뿐만 아니라 루소가 생각한 이상적인 사회, 인류의 정신적 발달과 감정의 변화, 자연상태에서 사회화 상태로의 전환, 사회와 법률의 기원, 정치적인 사회의 성립과 폐해, 진정한 자유의 가치, 이성과 본성의 관계, 인간의 잠재력을 끌어올린 언어의 발달 등 다소 장황하게 느껴질 수 있는 루소의 관념과 사색이 담겨 있다. 루소는 본문에서 밝혔듯이 이 모든 설명을 가설과 추리로만 해결했으며 생물학적이나 고고학적 등의 과학적 증거는 사용하지 않았는데, 당시의 과학적 발전 수준으로는 하고 싶어도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루소는 모든 문명의 혜택을 버리고 불평등을 거의 느낄 수 없으며 영향도 거의 없는 자연상태에서 살았던 자연인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면서도 자연인에서 지금의 문명인으로의 자연스러운 진화는 인정하지 않았다. 루소는 자기완성 능력이나 사회적인 미덕 등 인류 문명의 여러 가지 기술과 발전이 자연인의 타고난 능력만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으며, 문명의 진보를 위해서는 외부적인 원인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자연인에서 현재의 문명인으로 진보할 수 있었던 것은 ‘신’의 개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암시나 다름없다. 루소의 생각으로는 이러한 ‘신’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현재의 인류는 원시 상태로 남았으리라는 것이다.

루소가 진화를 인정하지 않고 신의 개입을 선택함으로써 어느 한 편으로는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사회적 불평등의 부당함과 폐단을 과학적 자료의 지원 없이 혼자만의 사색과 추리로 정확하게 지적했으며, 그 최초의 기원을 인류의 원시 상태로까지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문명의 발전과 불평등의 심화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밝힌 셈이다. 한편, 「원주」에서 다양한 인간을 연구하려면 현지 조사를 우선해야 한다는 루소의 주장은 인간은 어디서나 마찬가지여서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인간이던 인간은 모두 같은 정념과 같은 악덕을 가지고 있으므로 여러 민족의 특징을 구별하려고 하는 것을 쓸데없는 일이라고 주장하던 당시 철학자들의 불합리함을 반박함으로써 문화의 상대성을 일찌감치 간파한 루소의 사상은 훗날 인류학의 토대가 되었다.

프랑스 대혁명을 예고?

런 논지를 제쳐두고라도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정말로 위대한 점은 곧 일어날 ‘피’의 대혁명을 예견한 점이다. 당시 절대군주의 억압과 부패한 귀족 밑에서 시름시름 앓고 있던 민중의 고통을 몸소 느끼며 불의에 분노하고 있었던 루소는 이 불평등의 마지막 종착점이 전제정치라고 말하면서 이 괴물(전제정치)이 모든 것을 삼켜 버려 인민은 이미 통치자도 법률도 갖지 못하게 되고 오직 전제군주만을 갖게 되었으며 풍습이나 미덕도 사라졌고, 성실이나 의무도 없으며 남은 것은 극도로 맹목적인 복종만이라고 전제정치의 부조리를 고발한다.

그리고 이 귀착점에서 한 바퀴 돌아서 모든 개인이 다시 평등해지는 사회로 돌아갈 것인데, 그 길은 새로운 변혁들이 일어나 정부를 완전히 해체하거나 이것을 합법적인 제도로 접근시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이 변혁에는 폭력을 동반한 혁명도 정당하다며 루소는 사후에 있을 프랑스 대혁명을 예견한다. 독재자를 죽이거나 퇴위시키는 폭동도, 독재자가 신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제멋대로 처리한 행위와 마찬가지로 합법적인 행위이다. 힘으로 지탱한 정부는 그것을 타도할 수 있는 것도 힘뿐이다. 한마디로 힘으로 일어선 정부는 힘으로 쓰러트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가난한 시민의 아들로 태어나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전제정치의 억압과 방탕하며 나태한 귀족들 아래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체험할 수밖에 없는 약자로 평생을 방랑 속에서 고독하게 보낸 루소는 글의 힘으로 그 불평등을 타파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살아생전에 이루지 못했을뿐더러 당시로써는 혁명적이자 반항적이고 도발적인 자신의 사상으로 말미암아 그는 방랑자에 도피자라는 꼬리가 하나 더 붙으며 쫓기는 신세로 전락한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자연인을 예찬한 루소는 끝없는 박해를 피해 그 자신도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고독한 자연인’, 자연이 명령한 간소하고 일정한 고독한 생활양식을 지켜나가는 최선이자 최소의 삶으로 회귀하여, 인류의 악덕을 버리고 그 지식도 버림으로써 태고의 원시적인 순진성을 회복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마치면서...

전히 일부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가 결국엔 모두에게 풍요로운 삶과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낙관한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로 향하고 있다. GDP 상으로 부자가 된 나라들은 지구행복 지수상으로는 매우 낮은 수치를 기록한다. 루소의 말대로 자연에 폭군처럼 군림해온 인류는 인류의 생존이 걸린 기후변화라는 심판의 날을 기다리고 있으며 빈부 격차와 기아는 전염병처럼 확산하고 있다.

설령 루소가 갈망했던 자연인이 된다 하더라도 루소가 생각했던 것처럼 완벽한 고독과 문명으로부터의 이탈은 어려울 것 같다. 루소의 말처럼 자연에 폭군처럼 군림해온 인류 덕분에 자연인이 살아갈 터전이 될 자연 대부분은 이미 문명에 잠식당하고 심각하게 오염되었으며, 곧 있으면 기후변화가 익숙한 자연의 생태계를 송두리째 바꿔놓을지도 모른다.

토지 사유, 경작 등 자연에 대한 미미한 착취로 시작한 불평등은 강탈에 가까운 착취가 이루어진 산업화 이후로는 해소되기는커녕 지구적으로 확대되고 고착화 되었다. 고로 무모하게 생태계의 한계를 시험해 보지 않으며 지구상의 다른 생명처럼 자연과 공존하고, (쉽지는 않겠지만) 필요한 만큼만 가지고 필요한 만큼만 분배되는 사회야말로 불평등 일부나마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지 않을까. 이 어려운 문제를 인류가 해결할 수 있다면 이것과 무관하지 않은 또 다른 인류의 고질적인 문제들인 기후변화, 에너지, 물 부족, 기아 등의 문제들도 엉킨 실타래가 풀리듯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인류는 준엄한 자연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그때가 되면 자연을 위한 최상의 선택이 인류 스스로가 멸종되어버리는 일이라는, 인류사의 모든 근원을 뒤집어버리는 뼈 아픈 성찰을 씹어 삼켜야 할지도 모른다.

이 리뷰는 2015년 9월 13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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