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파랑 | 천선란 | 슬픔을 누그러트리는 진통제 같은 소설
뭔가를 쓰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하는 소설
‘감동을 억지로 자아내는 드라마 같은 줄거리’, ‘ ~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는 동화 같은 결말, 천선란의 『천 개의 파랑』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그런 이야기 중 하나일 수도 있다. 흔히 말하는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소설, 먹을 땐 맛있지만 먹고 나면 남는 것이 없는 인스턴트 식품 같은 소설. 그런데도 이 책을 추천한다면, 그것은 독자가 그런 뻔한 속셈을 의식할 틈을 주지 않을 정도로 게 눈 감추듯 단숨에 읽게 만드는, 작가의 개성이 살짝 드러나는 옹골진 필력에 있지 않을까 싶다.
내게는 이질적인 소녀적 취향이고 진부한 주제 의식이 다소 안타까웠지만 소박한 소재가 겸손하게 느껴질 정도로 작가 천선란의 글쓰기 역량은 예상 밖이었다. 옌롄커(閻連科)처럼 유려하고, 츠쯔젠(遲子建)처럼 서정적이라는 둥 문장력이 특별히 빼어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섬세하지만 지나치지 않고 연약하지만 나약하지 않은 문장들이 한데 엉켜 자아내는 ‘이야기’라는 아우라에는 작가가 사회의 부조리와 불행을 바라보는 시선 하나하나에 연민과 공감이 꿀처럼 뚝뚝 떨어질 정도로 담뿍 스며있음을 쉽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한마디로 죽은 사람 귓속에 소곤소곤 들려주면 뒷이야기가 궁금해서라도 파팍! 하고 두 눈을 번쩍 뜨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글솜씨가 좋다고 한다면 지나친 찬사일까?
한편으론, 『천 개의 파랑』은 우연한 기회에 읽게 된 문윤성의 『완전사회』의 졸필에 실망을 금치 못하며 혼자 바보처럼 한국 SF소설의 미래를 비관하고 있었던 나를 한시름 두시름 놓게 했다. 한국 SF소설 작가에도 사람을 이다지도 끌어들이는 생명력과 개성을 두루 갖춘 글쓰기를 구사하는 작가가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삶의 고단함을 잠시 잊게 해줄 진통제 같은 소설
소설을 읽는 다양한 이유 중 하나는 삶의 고단함을 잠시나마 잊게 해줄 진통제 같은 감동을 얻기 위해서다(물론 이런 ‘해피 엔딩’ 식의 감동은 내 취향은 아니다). 고로 작가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지어냄에 있어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티를 독자에게 들키지 않는 것이 사명이다. 추리소설의 허술한 트릭만큼이나 지어낸 티가 떡칠 화장처럼 팍팍 나는 뻔한 이야기는 감동은커녕 비웃음을 사기에 십상이다.
좋은 마술사는 관객이 속았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는 기적의 마술을 펼친다. 좋은 작가는 독자가 이 모든 이야기가 한낱 허구에 불과하다는, 더 나아가 독자의 주머니를 합법적으로 갈취하려는 수작의 하나라는 당연한 사실을 끝끝내 망각하게 만든다. 관객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마술이 속임수임을 눈치채지 못하면 그것은 마법이나 다름없다. 천선란의 글쓰기는 마법 같았다. 교고쿠도가 말하지 않았던가. 속는 사람이 속임수임을 모를 뿐만 아니라 속아서 행복하다만 그것은 그것대로 좋은 일이라고.
사실 근래 들어 나의 독서는 근근이 명맥은 유지해 왔지만, 블로그 관리라는 핑계로 일일 독서량은 형편없었다. 3.5인치 하드디스크 정도 되는 보통 두께의 한 권짜리 책 가지고 일주일이나 씨름하는 일이 다반사였으며, 베개로 써도 될 두께를 가진 책이면 완독까지 적어도 2주는 예상해야 했다. 그렇게 게을러진 나의 독서 편력에 『천 개의 파랑』은 단 이틀 만의 독파라는 일대 파란을 일으키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마지막 책장을 덮기가 무섭게 내일 제출할 숙제를 아직 못했다는 것을 떠올린 학생처럼 후다닥 책상 앞에 정좌하게 했다. 쓸개처럼 쓰디쓴 이야기건 꿀처럼 달콤한 이야기건 이토록 좋은 소설을 읽고 한 마디도 쓰지 않는다면 하늘이 우르르 쾅쾅 노할 것 같았다. 땅이 부르르 떨며 화낼 것 같았다. 노트북이 블루스크린을 뿜으며 반란을 일으킬 것 같았다. 그것보다 내가 뭔가를 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다만, ‘공상 과학’이라는 장르에서 ‘과학’만큼은 이공계 출신인 류츠신이나 이반 예프레모프의 작품과 비교하면 매우 부족하다. 『천 개의 파랑』은 ‘과학’보다는 ‘공상’에 치우친, 여기에 동화 같은 ‘해피 엔딩’이 결합하니 ‘판타지’ 소설을 읽은 기분이랄까? 사실 ‘공상 과학’이라는 장르 자체가 모호하므로 이 문제는 독자가 정의하는, 혹은 기대하는 ‘SF’ 수준에 따라 문제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으니 그저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다.
멈춰진 시간 속에 먼지처럼 쌓인 슬픔
세상은 참 빨리도 돌아간다. 눈 깜짝할 사이에 국가 멋대로 정한 기본 교육과정을 이수했고, 역시 국가 멋대로 정한 병역을 수행했다. 나를 혼자 남겨두고 훈련소 연병장을 저벅저벅 빠져나가는 가족과 친구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땐 군대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군가의 말 따라 국방부 시계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정해진 오차 범위 이내로 꼬박꼬박 흘러갔고, 국방부 시계뿐만 아니라 우주의 시계도, 그리고 내 육체의 시계도 얄궂게 속절없이 흘러갔다. 그렇게 어느덧 인생의 절반을 넘어섰다. 이런 말 하기엔 좀 이르지만, 지난 세월이 꿈 같았다.
『천 개의 파랑』의 보경은 남편이 사고로 죽었을 때 그 가늠할 수 없는 슬픔을 못 이겨, 그리고 앞으로 짊어질 삶의 중압감이 두려워 그 시간 속에 자신을 가두지만, 무심한 세상은 보경의 멈춰진 시간이 느리게라도 회복될 수 있도록 기다려 주지 않는다. 보경의 멈칫멈칫 느릿느릿 흘러가는 거북이 같은 시간과 동기화하기엔 빛의 속도로 흘러가는 듯한 세상의 시간은 너무 빠르다. 보경이 그것을 눈치챘을 땐 아이들은 이미 성장할 만큼 성장했으며, 시간이 멈춘 듯한 보경의 자리에서 바라본 아이들의 뒷모습은 가물가물할 정도로 멀리 있다.
서로 피를 나눈 세 명의 가족이 한 지붕 아래 살지만, 저마다 다른 시간을 걷는다. 그것은 가족 간의 텅 빈 우물처럼 깊고 우주처럼 어두운 소원함으로 나타난다. 여기엔 우리가 흔히 겪는 가족 간의 응당 있는 사소한 다툼조차 없다. 서로 다른 시간을 걷는 그들에겐 ‘다툼’은 사치다. 아무리 좋은 부싯돌이라도 결코 혼자서는 불꽃을 일으킬 수는 없는 법이니까.
이들 세 모녀의 서로 엇갈리는 시간을 비집고 들어와 마치 고장 난 시계의 눈금을 고치듯 세 모녀의 시간을 동기화하는 사람, 아니 물건은 바로 로봇 콜리다.
겪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가족 간의 갈등은 그때그때 풀지 못하면 누적되는 피로처럼 골이 깊어진다. 그것도 아주 깊이. 그래서 그런지 외부인이 오지랖 부린다고 섣불리 관여했다간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듯 고맙다는 말보다는 욕먹기가 더 쉽다. 부부싸움을 말리는 것만큼이나 고달프고 주제넘은 짓이 한 가족의 불화를 화해시켜 보겠다고 무턱대고 덤비는 것이다. 그것은 객기나 다름없으며 사람이라면 정말 못 할 노릇이지만, 콜리는 대견스럽게도 잘 해낸다.
콜리는 ’가족 상담(family counseling)‘이라는 전문적인 목적으로 설계된 로봇도 아니고, 보경의 딸 연재가 폐기물 처리장에 방치된 콜리를 처음 봤을 때 그런 갸륵한 뜻을 떠올린 것도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콜리의 등장은 갑작스러운 불행으로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여버린 세 모녀의 불화를 조금씩 조금씩 풀어내는 시발점이 된다. 아마 이것은 콜리가 사람이 아니라 기계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타인의 불행, 잔소리, 투정, 불평, 불만을 이미 숨넘어간 사람의 심장박동 모니터링 수치처럼 일고의 흔들림과 치우침 없이 끝까지 들어줄 수 사람은 이 세상에 단연코 없기 때문이다.
허구한 날 쏟아내는 인간의 불평 • 불만에 신도 두 발 두 손 들지 않았던가? 신기한 것은 사람의 불행, 슬픔은 그것을 초래한 원인과는 별개로 타인 앞에 고백함으로써 꽤 많이 해소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이런 소설을 외면하고 싶은 것처럼, 혹은 유니세프 광고 앞에서 냉정하게 채널을 돌리는 것처럼 우린 타인의 불행을 보고 듣는 것을 꽤 불편해한다. 그래서 사람은 불행에 빠지면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콜리의 예리한 관찰처럼 살아 있지 않은 걸 사랑할 수 있는 생명체는 ─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지구에선 ─ 사람밖에 없다. 때때론 도를 지나친 사랑이 집착으로 변질하면서 비극을 일으키는 실마리가 되기도 하지만, 우린 이 희귀한 능력 덕분에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그리고 눈물을 왜 흘리는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한낱 로봇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 그것도 펑펑.
연재가 폐기 처분될 콜리를 데리고 온 같잖은 연민을 코웃음 치며 우습게 보는 사람이 있지만, 아마도 그 같잖은 연민이야말로 딱딱하게 굳어진 서로의 마음을 ─ 뉴런 사이의 소통 역할을 하는 ─ 시냅스처럼 원활하게 이어주는 연결 지점이다. 굳은 마음이 풀어질 때 비로소 서로를 향한 대화 창구도 열린다. 대화는 불행을 누그러트리는 호르몬이다. 그리고 사랑의 시작은 대화다.
왜 우리는 속도를 늦추지 못할까?
경마장에서 한탕을 노리는 사람들만 ‘속도’에 열광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빠른 CPU, 빠른 자동차, 빠른 인터넷, 빠른 배달, 빠른 일 처리를 좋아하고, 또한 그것이 옳은 것으로 생각한다. 모든 것이 빛의 속도로 달리고, 빛의 속도로 지나치다 보니 오히려 느린 것이 눈에 띌 정도다.
왜 우리는 이다지도 속도에 열광할까? 진화심리학적으로 봤을 때 수렵 • 채집 시대에선 빨리 달리는 능력이 바로 생존과 직결되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달리기’하니까 이런 이야기가 생각난다.
산을 오르던 두 사람이 곰과 마주쳤다. 곧바로 달려들 듯한 곰의 심상치 않은 기세를 눈치챈 첫 번째 사람은 곧바로 달아날 채비를 한다. 그런데, 두 번째 사람은 딱딱한 등산화를 푹신한 운동화로 갈아신고 있었다. 막 달아날 채비를 하던 첫 번째 사람이 두 번째 사람에게 왜 도망가지 않고 운동화를 신느냐고 물었더니 두 번째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당신보다만 빨리 뛰면 되니까.”
남보다 빨리 뛰지 못하면 도태되는 삶은 비단 인류만 짊어진 숙명은 아니다. 생태계에서 먹히고 안 먹히느냐는 생존 법칙은 ‘빠름과 느림’이라는 일견 단순해 보이는 속도 법칙에 얽혀있다. 가젤의 최대 속도는 치타보다 느리다. 하지만, 한 마리의 가젤이 살아남기 위해선 굳이 치타보다 빨리 달려야 할 필요는 없다. 동료보다만 빠르면 치타에게 안 잡아 먹힌다. 달리기 선수가 1등을 하고 싶다면, 말처럼 빨리 달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참가한 선수들보다만 빠르면 된다. ‘빠름’이 승패와 생존을 좌우하는 인간 세상에서 남에게 뒤처지면 죽는다는 냉혹한 말에 어리둥절해하는 순간, 그것은 경쟁에서 뒤처진 것이 아니라 이미 경쟁에서 박탈된 것이리라.
콜리의 동료 ‘투데이’처럼 달리지 못하는 경주마를 안락사시키는 것은 패배자에게 관용을 잘 베풀지 않는 우리의 관습에 비추면 매우 자비로운 처사일지도 모른다. 특히 생존과 직결된 속도 경쟁에서 졌다는데 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말(馬)뿐만 아니라 나처럼 뒤처진 사람들도 안락사시켜 줬으면 좋겠다. 속이 울렁거리고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둥 더는 못 볼 꼴 안 보여도 되니까.
사람들의 열광 어린 탐욕에 무참히 관절이 짓밟힌 경주마 투데이, 그런 투데이의 본성에 순응하면서도 거스르는 듯한 ‘느리게 달리기 연습’은 ’빠름‘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세상에 색 바랜 홍일점 같은 소소한 여파를 남긴다. 이제 남들보다 느리게 달린다고 해도 맹수에게 잡아먹힐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사람들이 보기에 흉악했던 맹수들은 사람에 의해 철저하게 복수 당해 절멸한 지 오래니까. 그런데도 왜 우리는 속도를 늦추지 못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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