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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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통행증(魂手形) | 미야베 미유키

영혼 통행증 | 미야베 미유키 | 박꽃처럼 희고 달처럼 밝은 우아한 귀신, 미나모

책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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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지식이 튼튼하면 소설은 더 흥미로워진다!

하나의 소설을 천만 명이 읽으면 천만의 각기 다른 감흥이 파릇파릇 솟아난다. 왜냐하면, 소설을 이해하는데 밑바탕이 되는 인생 경험과 축적된 지식과 감수성은 저마다 독특하고도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소설을 한 사람이 읽는다고 해도 10대 때 읽었을 때의 감흥과 30대, 50대 때 읽었을 때의 감흥은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고, 매번 읽을 때마다 서로 다른 감흥을 끌어낼 수 있어야 좋은 소설이기도 하다.

그래서 좋아하는 작가의 같은 소설을 두 번 세 번 읽을 때, 혹은 ‘미야베 월드 제2막’처럼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시리즈를 내리읽을 때 기존에 느껴보지 못했던, 혹은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감흥이나 이해를 얻고 싶다면 약간의 배경지식을 공부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내가 에도 시대를 좀 더 알고 싶어서 애즈비 브라운(Azby Brown)의 『만족을 알다(Just Enough)』을 읽은 것처럼 말이다.

애즈비 브라운의 책을 통해 에도 시대 서민과 무사들이 어떠한 가치관과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어떠한 환경에서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를 대략적으로나마 헤아려 보고 나서 『영혼 통행증(魂手形)』을 읽으니, (약간 과장해서 표현한다면) 마치 3D 안경을 끼고 보는 듯한 입체감이 새록새록 느껴진다고 할까나? 아니면, 오래 쓴 안경을 새 안경으로 바꾼 것처럼 모호했던 배경이 좀 더 선명해진다고 할까나?

배경지식이 없으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인물들의 일상 행동, (괴담 이야기가 펼쳐지는) 흑백의 방의 장식과 경관, 집의 구조, 심지어 옷의 닳고 낡음까지 등등. 그냥 문장과 문장 사이에 묻혀 스쳐 지나가기 마련인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서 나름의 의미와 설명을 뽑아내는 자잘한 재미가 지금까지와는 뭔가 다른 파삭파삭한 맛을 제공한다.

에도의 우동 노점상 앞에 서 있는 기모노 소녀

‘맛집 찾기’ 유행의 원조, 에도

같은 약을 계속 먹으면 내성이 생겨 효과가 떨어지는 것처럼 아무리 재밌는 시리즈라도 연달아 읽게 되면 처음만큼의 감흥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라고 변명하고 싶을 정도로 『영혼 통행증(魂手形)』은 지금까지 읽은 ‘미시마야 시리즈’보다는 약간 밋밋하다고 말하고 싶다. 기대보다 짧은 분량은 허기진 사람이 고작 삶은 메추리알 하나를 받아먹게 되었을 때 느낄법한 실망감을 포효시킬 만하지만, 아무래도 이런 미련한 이유보단 좀 더 (남성의) 본성적인 이유, 즉 괴담을 듣는 인물이 오치카에서 도미지로로 전격 교체되었다는 사실이 왠지 모를 서운함과 함께 ‘헛헛함’을 쓰나미처럼 몰고 온다.

독자가 옆구리에 드라이아이스를 달고 사는 쓸쓸하고 외로운 남자라면 주인공이 고운 처녀에서 총각으로 바뀐 심상한 사실은 심상치 않은 상실감을 유발한다. 하루아침에 오치카를 잃은 상심에 절규하는 나의 허망한 심정을 동정하는 분은 많겠지만, 아마도 ‘헛헛함’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도미지로는 먹는 것을 좋아한다. 많이 먹는 대식가는 아니지만, 이런저런 간식류(특히 노점에서 파는 달콤한 간식)를 즐겨 먹는 먹보다. 평소 단것을 자주 찾지는 않지만 ‘도미지로의 노점상 편력’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집중력이 흐트러지면서 지금 당장 단 것을 입고하라는 아우성 같은 군침이 입 안에 한 방구리 고이게 된다.

도미지로의 집요한 노점상 탐방 기질 덕분에 (『영혼 통행증』의 두 번째 에피소드인) 「한결같은 마음」 같은 가슴 뭉클한 사연이 피어오를 수 있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만약 야심한 밤에 두드리면 북처럼 둥둥 울릴 것 같은 공복을 움켜쥐고 이 에피소드를 읽게 된다면, XX파이 한 상자라도 해치워야 누그러질 것 같은 원초적 욕구는 나조차 당해낼 수가 없다. 물을 한 대접 들이켜던가, 아니면 뭐라도 먹든가, 뒷감당은 알아서 해결하자.

미시마야에 도미지로가 끼어들고부터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것이 노점상인데, 에도에 유난히 노점상이 많은 것은 작가가 꾸며낸 것이 아니라 실재로도 그러했다고 한다. 애즈비 브라운에 따르면 에도는 놀랄 만한 음식 도시이며, 에도에만 2천 호가 넘는 노점이나 음식점이 있었다고 한다. 『금빛 눈의 고양이』에 소개되는 ‘도카이도 안내서’처럼 맛집을 소개하는 식당 안내서가 에도에서는 해마다 십여 권씩 발행되었다고 하니, ‘맛집 찾기’ 유행의 원조는 다름 아닌 에도였다.

참고로 한마디 더 덧붙이면, 에도에서 우동, 과자, 생선구이 등 조리된 음식을 파는 노점상이나 반찬가게가 유행했던 것은 식탐 때문이 아니라 연료, 쓰레기, 환경 등을 생각하면 조리된 음식을 사는 편이 저렴했기 때문이다.

천장에 매달린 처녀 귀신

박꽃처럼 희고 달처럼 밝은 우아한 귀신, 미나모

세 번째 에피소드인 「영혼 통행증」이야말로 손에 땀을 쥐고 기다린 독자들의 기대에 한껏 부응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흑단 같은 머리카락을 바닥까지 늘어트린 채 천장에 거미처럼 거꾸로 매달려 당신을 보고 있는 이 세상 것이 아닌 존재, 다시 말해 일본 공포영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이 오싹한 자세로 기선을 제압하는 「영혼 통행증」은 오랜만에 나에게 ‘귀신 나오는 꿈’을 선사했는데, 대충 이러한 꿈이었다.

무심결에 어느 방안을 바라봤는데, 생머리를 앞으로 길게 늘어트려 얼굴을 가린 두 명의 여자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런데 그 두 명의 여자는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런 존재였다. 내가 자신들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여자들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당신은 보고 있는 거야’라는 묘한 말을 던지면서 (공포영화에서 귀신이 순간이동 비슷하게 카메라 쪽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것처럼) 한달음에 내 앞으로 다가왔으니, 이부자리에 오줌이라도 지릴 것 같았던 무서움 때문에 꿈에서 안 깨려야 안 깰 수가 없었다.

왠지 귀신 본인도 머쓱했을 것 같은 ‘천장 거꾸로 매달리기’라는 미나모의 첫 등장은 내 꿈처럼 정말로 무서웠지만, ‘따뜻한 인간의 정이 있는 사회를 향한 동경’으로 가득한 작가의 포근한 포부는 겉모습은 아주 괴기스러울지라도 독자에게 전해지는 인상만큼은 박꽃처럼 희고 달처럼 밝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귀신을 만들어 냈다. 미나모의 첫인상은 당연히 살이 떨리다 못해 살점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무섭지만, 그런데도 피하고 싶기보다는 가까이하고 싶은 귀신으로 남는다. 그 달콤하지만, 잔물결 같은 떨림을 머금은 목소리에 취하고 싶어진다. 내가 남자라서? 옆구리가 허전해서? 텅 빈 내 마음을 누가 알쏘냐.

나야 어찌 되었든, 행동거지는 괴기스럽지만, 마음 씀씀이는 그 누구보다 사람다운 미나모, 그리고 생전 마주친 적 없는 미나모가 원한을 풀고 성불할 수 있도록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린 한 남자의 헌신적인 이야기는 과연 우리가 사는 세상이 괴물이 바글거리는 마계가 아닌 인간 세상인지를 순간적으로나마 의심스럽게 만든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사람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일이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그런데도 심금이 요동치는 것은 죽은 사람을 위해 이렇게 큰 희생과 노력을 감내하는 사회라면 산 사람을 위해 무엇을 못 할쏘냐, 같은 에도에 대한 미야베 미유키(宮部みゆき)의 남다른 마음은 역시나 유난스럽다.

미나모의 몸에선 백단향이 난다고 한다. 왜냐하면, 누군가 혼을 위해 향을 피워 주면 그 향이 그 혼에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즘 혼에선 어떤 냄새가 날까? 장례 예식장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여있을 공장에서 찍어낸 고만고만한 향들을 생각하면 굳이 안 맡아도 뻔하겠지만, 나만큼은 미나모처럼 우아한 백단향을 풍기고 싶다는 당치도 않은 희망을 품어본다. 사람의 욕심이란 게 이처럼 무섭고 뻔뻔스러운 것이 생전뿐만 아니라 사후도 겨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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