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마녀전 | 양우생 | 먼뎃불빛 같은 추억 속에 잠긴 비운의 사랑
옥나찰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절세의 용모를 지니고 태어난 몸이었다. 그리고 자기의 미모를 가장 사랑하고 아꼈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소녀가 백발의 여인으로 변하고 만 것이었다. 얼굴이 쭈글쭈글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백발 노파가 된 것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이 당한 괴로움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그저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다. (백발마녀전(白髮魔女傳) 중에서)
오래간만에 무협 소설을 찾은 변변치 않은 이유
머릿속이 실타래가 엉킨 것처럼 잡다한 상념과 고민으로 복잡하게 꼬여 있을 때,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을 때, 지속해서 책을 읽는다는 것에 회의를 느끼거나 독서 자체에 염증을 느낄 때, 이럴 때 나는 무협 소설을 찾는다. 재충전 안 되는 일회용 건전지가 하릴없이 방전되는 것처럼 남은 삶의 하루하루가 무기력하게 소모되는 나의 삶에서 번뇌와 자책감에 빠지는 것마저 때론 사치로 느껴질 때, 무협 소설은 이 모든 상념과 번뇌에서 잠시라도 벗어나는 해방감을 만끽하게 해준다. 삶의 중압감으로 빈대떡처럼 납작하게 짓눌려 있었던 꿈을 풍선처럼 다시 부풀어 오르게 하고, 냉혹한 현실주의로 기가 팍 죽어 있던 공상의 금빛 날개를 다시금 펼치게 하는 무림의 세계는 엄연히 비현실적이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매혹적이다. 마음과 머릿속에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던 번뇌의 실타래를 한올 한올 풀어주는 시원스럽고 통쾌한 무공 대결, 부족한 용기와 타고난 소심함으로 포효해내지 못했던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울분을 삭여주는 의협심이 활활 타오르는 크고 작은 영웅들의 이야기는 감개무량하다. 여기에 난독증으로 고생하는 사람, 책만 보면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사람, 아니면 나처럼 즐겨 책을 읽던 사람 등 책과 친하고 친하지 않고에 상관없이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든 이에게 폭풍 같은 흡입력을 발휘하는 조악하면서도 단순하고 명확하고 간결한 문체도 무겁고 심란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주는 데 한몫한다. 그렇다고 무협/판타지 소설이 독서 세계의 주요 장르가 되어서는 아니 되지만, 앞서 거론한 몇 가지 이유와 기타 이런저런 이유로 가끔은 기분 전환 삼아 빠져들 만하다. 그래서 찾은 작품이 영화로도 유명한 양우생(梁羽生)의 무협 소설 「백발마녀전(白髮魔女傳)」이다. 한국에서는 『여도 옥나찰(女盜 玉羅刹_』이란 제목으로 소개되었지만, 중국어 위키백과를 찾아보니 ‘백발마녀전’이 원제다.
내가 만난 최고의 女고수이자 최고의 女영웅
지금까지 내가 읽어본 무협 소설이라 해봤자 김용(金庸)과 고룡(古龍)의 몇몇 작품들로 한정되지만, 사실 무협 소설 중에서 굳이 찾아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내 생각으론 무협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김용을 제외하면, 고룡, 양우생, 와룡생(臥龍生) 정도 언급하고 싶을 뿐이다. 보통 무협 소설 한 작품의 분량이 일반 소설보다 훨씬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앞에 거론한 작가들의 작품을 고루고루 돌려 읽는다면 평생 우려먹을 수 있으므로 기타 무협 소설을 읽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 낭비다.
그런데 지금까지 읽어본 무협 소설의 주인공들은 전부 다 남자 영웅이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女영웅을, 그것도 정파와 대립하는 녹림에 몸을 담은 女고수를 만났다. 무림인들은 그녀가 없는 곳에서는 그녀를 옥나찰(玉羅刹)이라 부르지만, 그녀의 본명은 연예상(練霓霜)이다. ‘나찰’은 사람을 잡아먹는 귀신을 뜻하는데 이 앞에 아름다움을 뜻하는 구슬 ‘옥’자가 붙었으니,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박거리지 않는 절세미녀를 이처럼 잘 표현한 별호는 없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보통의 무협 소설에서 남자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미녀를 빼놓을 수 없듯, 옥나찰 역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난다. 다만, 다른 무협지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강호를 유람하다 인연을 맺게 된 여러 명의 미녀 사이에서 애증의 굴레에 빠지고, 사랑의 달콤한 갈등을 거듭하는 것에 반해 옥나찰은 단 한 명의 남자와 처음이자 마지막인 운명적 사랑에 빠진다. 매초 악랄한 초식을 구사하면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독한 마음의 소유자이자, 무공이 고강한 만큼이나 호승심도 강한 그녀의 아찔한 애정의 과녁이 된 행운(?)의 남자는 장차 무당파의 장문인이 될 장문제자 탁일항(卓一航)이다./p>
<사진 출처: 美桌> |
먼뎃불빛 같은 추억으로 남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여자는 녹림을 주름잡는 대도 중의 대도, 남자는 강호에서 소림사와 함께 정파를 대표하는 무당파의 장문제자. 두 사람의 배경부터 흑과 백의 구별이 선명하지만, 두 사람의 성격 차이도 그에 못지않다. 옥나찰은 자신의 무공과 미모에 대하여 자부심으로 가득 찬만큼 어떤 상황에서도 안하무인 격으로 거칠 것 없이 행동한다. 또한, 그녀는 심보가 악독하기로 정평이 나 있고, 그녀의 하얀 섬섬옥수가 내지르는 수단 하나하나가 매섭기 그지없지만, 흑백을 가릴 줄 알고 시비를 분간할 줄 아는 호탕한 협녀다. 반면에 탁일항은 무협 소설에서는 보기 드물게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옥나찰과의 애정 문제에서는 매사 우유부단한 태도를 선보이며 영 시원스럽지가 못하다. 한마디로 시종일관 답답한 모습을 보이면서 독자의 짜증을 부채질한다. 그뿐만 아니라 옥나찰의 걸출한 무공과 눈부신 외모에 비하면 탁일항의 무공은 그저 그렇고 외모는 고만고만하다. 한마디로 무협 소설의 남자 주인공치곤 매우 변변치 못한 인물이 바로 탁일항이다. 이런 두 사람의 대비되는 배경과 성격에서 짐작해 볼 수 있듯 두 사람의 줄타기 같았던 아슬아슬한 사랑은 결국 가슴에 사뭇 치는 처연하고 쓸쓸한 감정만 남긴 채 미완성으로 마무리된다.
옥나찰이 처음으로 탁일항을 만나게 되는 철이 없을 무렵, 그녀는 탁일항과 결합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어려움도 무릅쓸 각오가 되어 있었고, 두 사람 사이를 방해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지위나 무공의 고하 따위는 상관없었다. 그녀에겐 두 사람의 앞길을 훼방 놓는 사람은 모두가 적이었다. 그것은 세상 규칙 따윈 거들떠보지도 않는 호방하고 방종한 그녀의 성격과도 일치했다. 그렇게 그녀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일편단심으로 두 사람의 인연을 완성하려고 했지만, 관습과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는 소심하고 답답한 탁일항의 모습에서 사랑을 확신하지 못한 옥나찰은 좌절에 좌절을 거듭한 나머지 꼭 탁일항과 함께 사는 것만이 최선은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때는 이미 사랑의 번뇌가 가져다준 상심과 피로, 사랑과 미움의 반복이라는 시련이 극에 달한 나머지 그녀의 머리가 허옇게 세어버렸을 때이기도 하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자 그녀는 두 사람의 사랑을 하늘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여겼던 것일까? 탁일항의 모든 것을 희생시키고 자기 혼자만 그를 독차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차라리 한 가닥 애련한 추억을 남기고 그것을 기억하며 살기로 마음먹는다. 아쉽게도 두 사람의 사랑은 밤하늘을 수놓은 별처럼 서로 마주 보면서도 결코 가까이 다가설 수 없는 아득하고 아련한 먼뎃불빛 같은 추억으로 남게 되고,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애틋함과 쓸쓸함은 예리한 면도날이 오장육부를 스쳐 가듯 가슴 한구석을 아려 온다.
마치면서 무협 소설에 대해 한 마디
무협 소설에서 무지개처럼 화려하고 번개처럼 날렵하며 태풍처럼 웅장한 무공 대결만큼이나 볼만한 것이 남녀 주인공의 기구한 사랑의 운명이다. 하지만, 보통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는 우여곡절을 거듭하고 다사다난한 역정을 거치면서도 끝내는 해피엔딩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또한, 그런 해피엔딩이 가져다주는 냉장고에서 막 꺼낸 사이다 같은 청량감이 텁텁한 마음을 시원하게 적셔주는 통쾌하고 개운한 맛에 보는 것이 또 무협 소설 아닌가? 하지만,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두 사람의 사랑이 태우다 남긴 시커먼 숯등걸 조각들을 보면, 『백발마녀전』 의 서글픈 결말은 울적하고 소침한 기분을 풀고자 이 소설을 탐독한 나에게 불난 데 오히려 부채질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옥나찰과 함께 한 절대 짧지 않았던 그 시간만큼은 온갖 잡다한 세상만사와 시름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홀가분한 시간이었다고 감히 말하 수 있으리라.
마지막으로 몇 마디 더 한다면 무척이나 긴 내용에 비해 읽고 나면 남는 것이 별로 없는 것이 무협 소설이다. 이것은 무협 소설만이 가지는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다. 아무 생각, 아무 걱정 없이 텅 빈 마음과 텅 빈 정신으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지만, 긴 시간을 할애하고도 영양가 없는 독서를 했다는 자괴감이 들 수도 있다는 점에서 단점이다. 하지만, 독서라는 것이 지식이나 지혜, 하다못해 감수성을 자극한다거나 감개무량한 뭔가를 얻고자 하는 목적으로 행해지는 것만은 아니다. 중과부적으로 우리를 압박해오는 지루한 시간의 중압감과 고리타분한 일상의 막막함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시간과 삶의 굴레에서 잠시 비껴갈 수 있는 짬을 얻어낼 수 있는 취미 중의 하나가 바로 독서다. 그래서 독서는 고상하면서도 천박한 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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