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가장 밑바닥 by 겐콘 이치호이 | 메이지 시대 빈민층의 삶
외면하고 싶은 ‘가난’을 굳이 찾은 이유
가난은 전염병 같다. 전염병처럼 병균을 옮겨서가 아니라 보는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는 점에서 전염병 같다. 뭔가라도 도와주고 싶지만 그러질 못해서 불편하고, 또 그럴 형편이 안 되는 나의 탐탁지 못한 능력을 자각하게 만들어 불편하다. 못 볼 걸 본 것 같아 불편하고, ‘자칫하면 나 역시 그렇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불길한 예감에 마음 한편이 불편해진다. 조금의 측은지심이라도 남아 있는 사람이라면, 가난을 목격했을 때 번개 같은 찰나일지라도 묵념과도 같은 착잡한 상념에 잠기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런지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것처럼 내 눈앞에 안 보이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가난’을 외면한다. 빠듯하게 사는 사람일수록 불길한 징조를 보는 것 같아 더욱더 ‘가난’을 외면하려고 한다. TV에 유니세프나 굿네이버스 광고가 나올라치면 한가로이 콧구멍 파던 손가락은 믿기지 않는 반응 속도로 잽싸게 리모컨을 움켜쥔다.
이런 비겁하고 심약한 사람 중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죽음을 잉태한 듯 배가 남산처럼 부풀어 오른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왠지 모르게 미안하고 너무 미안해서 화면을 똑바로 응시할 수가 없다. ‘나도 한때는 길거리에서 동냥하는 사람을 마주칠 때마다 만 원짜리 지폐를 쾌척하던 시절이 있었는데‘라는 기억까지 떠오르게 되면 그날 기분은 완전히 잡치게 된다.
그런데도 밑바닥 중의 밑바닥 생활을 묘사한 겐콘 이치호이(乾坤一布衣, 본명은 마쓰바라 이와고로(松原岩五郎))의 『도쿄의 가장 밑바닥(最暗黑の東京)』이라는 책을 굳이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가난‘이라는 고질적인 사회적 병폐에 관심을 가질 정도로 대가리가 무르익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쓰네노 누님(『에도로 가는 길(Stranger in the Shogun's City, 에이미 스탠리 저)』의 주인공)이 에도에서 겪었던 하층민 생활과 미야베 미유키의 시대소설을 좀 더 풍부하고 사실적으로 이해하고 싶은 자기 만족적인 지적 욕구 때문이다.
경제성장 뒤에 숨은 모순을 폭로한 기록문학
『도쿄의 가장 밑바닥』은 청일전쟁을 앞둔 메이지 25~26(1892~1893)년의 도쿄 하층민 사회를 밀착 취재한 기록문학이다. 메이지 유신 후 ‘아시아 일등국’을 꿈꾸고 있던 일본의 떠오르는 도시 도쿄에는 이미 도시 개발과 경제성장의 부작용과도 같은 ‘빈민굴’이 여러 개 형성되어 있었다. 과거엔 빈민에게 무상으로 나눠줬을 법한 잔반도 돈 주고 사 먹어야 할 정도로 자본주의 경제 원리가 빈민의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있었고, 노동력 갈취 등의 자본주의적인 착취도 이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와 지금 빈민의 물질적 생활 수준은 큰 차이가 있겠지만, 상대적인 박탈감, 그리고 가난한 자에게 으레 따르는 신산한 삶과 도저히 헤어나갈 길 없는 빈곤의 굴레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겐콘 이치호이의 글은 여전히 읽을만한 가치가 충만하다.
전문 작가가 도쿄의 밑바닥 인생, 막장 인생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폭로한 일본 최초의 대담무쌍한 탐방이자 일본 사회의 모순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그 소재를 최초로 밝힌 이 책은 번영하는 대도시의 번쩍번쩍한 겉모습을 조롱하는 듯한 밑바닥 사람들의 삶에 대한 집념과도 같은 애착을 유려한 필체로 악착스럽게 포착하고 있다. ‘감빨다, 휘갑치다, 골골샅샅이, 적바림하다, 자깝스럽다, 잡살뱅이, 애옥살이’ 등 저자(혹은 옮긴이?)의 단어 구사 능력도 남다를 뿐만 아니라 ‘논픽션, 탐방기’가 아니라 ‘기록문학’이라고 불리는 데서 알 수 있듯 문학적으로 읽는 재미도 넉넉하다.
이 책이 출판되기 20년 전까지만 해도 도쿄의 가난한 서민들은 짬밥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한다(잔반은 그냥 바다에 버렸다고 함). 하지만,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후의 극빈층은 잔반조차 돈 주고도 사 먹기 힘들 정도로 귀해졌다고 하니 경제성장 뒤에 숨은 모순을 뼈 때리는 진실이 아닐 수가 없다.
먹고살 만한 집 하인은 그래도 상팔자
서문에서 잠깐 언급했던 쓰네노 누님은 1853년 에도의 여름이 막 시작되는 때, 3개월간의 투병 끝에 지천명을 코앞에 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무작정 에도로 상경하고, 자신을 에도로 데려다준 남자에게 버림받고, 그래서 수중에 남은 것이라곤 입고 있던 옷과 약간의 돈 정도만 남게 되었지만, 그 약간의 돈도 생소한 도시 삶에 적응하는 데 탕진하다가 결국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신세가 된다. 마을 사람들의 신임을 받는 ‘린넨지’라는 정토종 절을 운영하는 가문의 한 사람으로서 유복하게 살다가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울 정도로 초라한 몰골을 한 하층민으로 전락한 그녀가 말년에 마치부교의 하녀가 되는 안정된 생활을 하기까지 갖은 고생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녀 사후 40년이 지난 도쿄의 극빈층 생활과 비교하면 어떨까? 그래도 최소한 먹고 자는 긴박한 문제만큼은 해결할 수 있는 하녀 생활이 비바람과 눈비에 고스란히 노출된 노숙과 각양각색의 밑바닥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합숙하는 기친야도를 전전하며 ‘오늘 하루는 또 어떻게 끼니를 때워야 하나?’ 하는 골머리를 앓는 것보단 나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쓰네노는 극빈층이라기보단 (극빈층 바로 위에 아슬아슬하게 부유하는, 그래서 부지불식간에 극빈층으로 떨어질 수 있는) 하층민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에도 시대만 해도 상갓집이나 부잣집, 사무라이 집의 하인으로 취직하면 먹고사는 문제는 얼추 해결할 수 있었는데, 메이지 유신 이후 시골에서 도시 유입 인구가 급증하고, 한편으론 새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많은 사무라이가 몰락해서 그런지 이런 하인 자리를 얻는 것도 하늘의 별 따기가 되어 버린 모양이다.
『도쿄의 가장 밑바닥』엔 ‘하인’이라는 단어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고, 대신 ‘하녀’가 몇 번 등장하는데, 미야베 미유키의 시대소설에 나오는 (하녀치곤) 기품과 절도가 있는 그런 봐줄 만한 하녀가 아니라 싸구려 음식점에서 일하는 추레한 하녀다. 음식점 하녀는 쓰네노와도 약간 인연이 있는 직업인데, 그녀 역시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싸구려 음식점에 잠깐 일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싸구려 음식점’에 대한 묘사가 기가 막힐 정도로 가관인지라 내 필설로는 도저히 함축할 수 없어 그 전문을 그대로 옮겼다.
악취가 몸에 밴 채로 김이 나는 주방에서 일하는 하녀, 너덜너덜한 흑갈색 옷을 입은 머슴, 된장통에서 기어 나온 듯한 몰골로 음식을 나르는 여자,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에 유령 같은 얼굴을 한 주부, 병세가 완연한 모습으로 식사하는 아가씨, 주정뱅이, 목소리가 굵고 탁한 남자, 무위도식하는 사람들로 온종일 요란한 소리가 터져나온다.
이런 저급한 음식점에서 음식을 사 먹거나 일하는 사람들의 처지를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고, 어떤 재료를 사다가 어떤 음식을 파는지도 굳이 알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만약 알게 된다면 그날 밥은 다 먹은 것이나 다름없게 될 테니까.
마치면서...
『도쿄의 가장 밑바닥』의 주인공들은 가난이 대물림되는 것도 원망스럽겠지만,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물귀신처럼 물고 늘어지는 빌어먹을 가난의 끝을 정녕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절망적이다. 그들이 짊어진 숙명과도 같은 가난의 끝을 보는 길은 오로지 죽음뿐이다. 사정이 그토록 절박하니, 저축할 돈도 부족하겠지만 설령 운이 좋아 여윳돈이 생기더라도 미래를 위해 저축하기보단 시름과 고달픔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는 유흥비로 탕진하는 것은 이해하고도 남는다. 그런 허름한 낙이라도 있어야 풍진 삶을 근근이 버텨나갈 수 있지 않겠는가.
아무튼,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그들은 무슨 낙으로 살았고, 어떤 기쁨과 슬픔과 괴로움을 맛보았으며, 무엇 때문에 희망을 품고 또 절망했는가. 당연히 정답은 『도쿄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질적으로, 그리고 양적으로 차이가 있을 뿐이지 희로애락에 연연하고 돈 앞에서 쩔쩔매고 권위 앞에서 굽실대는 것은 가진 자나 없는 자나 매한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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