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로메다 성운 by 이반 예프레모프 | 시간에 대한 인류의 항거
번역이 아쉬운 작품
책 제목이 (개인적으로 인생 최고작 중 하나인)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銀河鉄道 999)」를 연상시킨다는 단순하고도 유치한 이유에서 이반 예프레모프(Ивана Антоновича Ефремова)의 『안드로메다 성운(Туманность Андромеды)』을 선택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점을 제외하고서라도 구소련과 미국의 ‘우주 경쟁(Space Race)’ 시대의 서막을 알리게 될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 올리기 직전에 완성된 구소련 SF소설(집필 시기: 1955~1956)이라는 점에서도 무척이나 기대한 작품이다. 하지만, 맛집으로 소문난 음식일지라도 먹다가 돌처럼 딱딱한 것을 자꾸 씹으면, 손님이 짜증을 내며 젓가락을 내팽개치듯, ‘명작’ 소리 듣는 것에 이골이 난 작품일지라도 독자가 문장을 야금야금 해독해 나가는 데 있어 ‘난독’이라는 장벽에 자꾸 부딪히면 (대출한 책이라 감히 찢어발기지는 못하고) 중도에 하차하고 싶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서두부터 난데없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이야기에 빠져들라치면 의미를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문장들이 헤살꾼처럼 등장하여 독서를 훼방 놓기 때문이다. 땅속에 금덩어리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 가득 찬 믿음으로 구덩이를 파 내려가던 광부가 자주 암벽에 부딪히면서 지치고 지친 끝에 땅속에 금덩어리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잃어가는 꼴이다.
애초 모든 문장이 일관성 있게 ‘난독’스럽다면, 원문 자체가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겠는데, 이게 또 그렇지 않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많이 읽은 작가라서 그런지 문장력은 기대 이상인데, 간혹 발작적으로 튀어나온 ‘미친 문장’ 때문에 이야기에 몰입하지 못하게 되니 소설을 작가의 의도대로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이다.
원문: Каждый отлет или приземление звездолета оставляли выгоревший, отравленный круг поперечником около километра.
영역본: Every take-off or landing of a spaceship left behind a circle, about a kilometer in diameter, of scorched and poisoned earth.
한역본: 성단선이 날아올라 가거나 지구에 접근할 때마다 직경 약 1킬로미터 정도로 불타서 평평해진 원을 남겼다.
구글: 우주선이 출발하거나 착륙할 때마다 직경이 약 1km에 달하는 불타고 독이 묻은 원이 남았습니다.
GPT-4o: 별선의 이륙이나 착륙 때마다 약 1킬로미터의 지름을 가진 불에 탄 독성의 원이 남았다.
이 문장 같은 경우, 사람이 번역한 것보다 구글 • AI 번역의 의미가 더 명확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위 문장의 경우 아예 특정 단어를 누락시켜 번역했다는 것이다. 바로 ‘отравленный(중독된)’이란 단어를 빼고 번역했는데, 앞뒤 문맥을 고려하면 이것은 ‘과학적 디테일’과 ‘과학적 엄밀함’이라는 작가의 의도를 거역하고 훼손하는 굉장한 오류다.
철학책처럼 내용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위와 같은 번역 오류 때문에 독서 흐름이 자주 끊기다 보니 결과적으로 묘하게 난해한 책이 된 것 같다. 옮긴이가 번역하다가 자주 부부싸움이라도 한 것일까? 알 수가 없다.
에이리언, 삼체, 아바타….
이런 점 때문에 읽기가 수월치 않았고, 그래서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기도, 작품 속으로 완전히 빠져들지도 못했다. 철학책을 읽는 것처럼 읽고 쉬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날림으로 읽은 듯한 기분이 대변을 보고 제대로 닦지 않은 것처럼 찝찝하게 남아 있다. 그렇더라도 그런 단점이 ‘『안드로메다 성운』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구소련 문학 사상에 기반한 공산주의적인 유토피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라는 등 작품의 전반적인 흐름조차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최악은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긴 하다.
‘인간 본성은 교육을 통해 사회가 원하는 방향으로 개조하거나 억제할 수 있다’, ‘노동이야말로 최고의 가치다’라는 등등 지금에 와서 보면 시대착오적이고 비현실적인 공산주의 유토피아적 배경을 깔끔하게 제쳐둔다면, 가까운 미래에 펼쳐질 SF 장르의 특징을 예지하는 듯한 몇몇 장면은 오싹한 기시감을 느끼게 할 정도로 인상적이다.
예를 들면, 미지의 행성에 불시착 후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전멸한 인류의 우주선과 그 우주선과 얽혀 있는 매우 오랜 시간 방치된 듯한 미확인 우주선, 피아노 건반을 연주하듯 계기반을 조종하는 우주선, 생존에 불리한 환경에서 고치 비슷한 것에 숨는 외계생명체 등은 영화 에이리언 시리즈를 연상시킨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안드로메다 성운』의 우주 항해사 니자 크리트의 붉은 머리는 엘리자베스 쇼 박사(영화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2012)」의 주인공)의 불타는 듯한 붊은 머리를 연상시킨다. 과거를 ‘분열의 시대’, ‘분절의 세기’라고 부르는 명명법과 과학적 엄밀함은 류츠신(劉慈欣)의 『삼체(三體)』를 연상시킨다(참고로 『삼체』에선 ‘위협의 시대’, ‘대이민의 시대’, ‘위기의 시대’, ‘고통의 시대’ 등으로 시대를 구분한다). 항성과 행성 사이의 구조와 역학 관계, 그리고 행성 구성 성분에 따라 생태계가 표현할 수 있는 색상이 다양하게 변할 수 있다는 설정은 영화 아바타에 등장하는 판도라 행성을 떠올리게 한다.
‘과학적 세밀함 • 엄밀함’의 예시 같은 작품
비록 개인적인 경험일지라도, 그리고 다소 억지스러울지라도 무의식 속에 침체한 기억을 ‘현재’라는 수면 위로 끄집어내는 강렬한 연상 작용은 『안드로메다 성운』이 후세의 SF 장르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창의성을 자극하거나 참신한 영감을 줄 소재로 가득한 의미 있는 작품들은 가치가 있는 밈이 유전되듯 오랫동안 살아남는다. 고전처럼 말이다. 인간의 상상력은 한계가 없다고 말하지만, 그 상상력을 자극하는 참신한 소재와 맞닥트리는 우발적인 사건들은 지극히 드물게 발생한다. 그래서 다양한 작품 읽기를 통해 좀처럼 활성화될 줄 모르는 상상력을 활활 불태울, 또는 종이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움직일 줄 모르는 펜촉이나 키보드 자판 위에서 시체처럼 굳은 손가락을 기사회생시킬 기발한 영감이나 소재를 얻고 싶은 작가 지망생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 작가들에게 『안드로메다 성운』은 충분히 추천할 만한 작품이다. 다만, 지금은 다소 관심이 시든 듯한 ‘유토피아적인 미래’에서 뭔가를 얻으려고 하기보다는 SF 소설에 ‘과학적 세밀함’과 ‘과학적 엄밀함’을 어떻게 반영해야 하는지를 제시한 훌륭한 예시로서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SF 소설에 ‘과학적 세밀함’과 ‘과학적 엄밀함’을 적용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은 작업이다. 왜냐하면, 시도할 엄두를 내려면 작가의 과학적 소양이 보통 수준 이상으로 받쳐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사물을 이해하고 관찰하는 방식 자체가 이공계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기본적인 조건들이 갖추어졌을 때 자신만의 과학적인 가설을 토대로 한 진품 SF 작품이 나올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과학적 세밀함’과 ‘과학적 엄밀함’은 보통 이공계 출신 작가의 작품에서 뚜렷한 성향을 나타내고 또한 그 결과도 만족스럽다. 참고로 내 블로그에 소개한 SF 작가 중 이공계 출신은 이반 예프레모프를 비롯해 류츠신, 하오징팡(郝景芳) 등이 있다.
실현될 수 없는 꿈, 그러나...
한때 막심 고리키 작품을 게걸스럽게 탐독한 나에게 아주 오랜만에 접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은 오랫동안 잊어버린 옛 친구를 만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헌신을 최고의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사회’, ‘집단 양육과 교육으로 공산주의 사회에 최적화된 개인을 양산해 내는 데 성공한 사회’, ‘이성과 합리주의가 감정을 지배하는 사회’, ‘[노동 = 행복]의 등식이 완성된 사회’, ‘나와 타인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 등 공산주의 유토피아가 이미 완성된 『안드로메다 성운』의 사회는 그리 낯설지 않았다. 그래서 그럴까? ‘참 좋은 사회네’하는 부러움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지만 ‘그런 완벽한 사회가 존재할 수 있는지’, ‘존재할 수 있다면 어떤 역사적 시련을 거쳐야 탄생할 수 있는지’ 등 당위성에 대해 의문은 품지 않았다. 마치 윤석열 대통령의 덜떨어진 작태를 보는 것처럼 그냥 그러려니 여긴 듯했다. 하지만,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그리고 반공 시대가 남긴 옹졸하고도 편협한 유산에 오염되지 않은 이념적으로 순수하고 관대한 독자라면 오히려 그런 점들이 신선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나날이 심화하는 빈부 격차, 전쟁과 기아를 은근하고도 끊임없이 부추기는 미국식 자본주의, 끝없이 밀어붙이는 과도한 경쟁, 팽배한 이기주의, 그리고 이 모든 병폐를 경제 성장이라는 허황한 동화로 정당화시키는 현실에 염증을 느낀 독자에게 공산주의 유토피아는 실현될 수 없는 꿈과 같은 아련하면서도 퇴폐적인 쾌감을 준다.
사람들이 공산주의는 실패했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 공산주의가 실패한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를 실현하고자 한 그 사람들이 실패한 것이다. 자본주의의 단점이 명확해진 작금에 그것을 보완하는 시스템의 하나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대체할 만한 무언가가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산주의 유토피아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는 사람에게 거절하기 어려운 좋은 질료다.
시간에 대한 인류의 항거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 『안드로메다 성운』에 안드로메다는 없다. 은하철도 999를 떠올리게 하는 ‘안드로메다’라는 단어에 현혹되어 이 책을 선택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과학적 엄밀함을 추구하는 SF 작가라면 지구와 약 254만 광년 떨어진 안드로메다은하를 친구 집 방문하듯 수월하게 여행할 방법을 뒷받침할 그럴듯한 과학적 가설을 제시하기도 어렵겠지만, 설령 기막힌 방법이 떠오른 덕분에 그런 여행이 가능하게 소설을 꾸려나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지구에 남은 인류가 기다려야 할 500만 년이란 시간을 어떻게든 극복해야 한다는 난제가 남는다(순간이동으로 우주 어느 곳이든 바로바로 왔다 갔다 할 수 있다고 설정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황당무계한 설정을 읽으려고 SF를 찾는 독자는 없을 것 같다). 또한, 인류의 역사는 ‘모험’과 ‘개척’이라는 단어로 해시태그 할 수 있는 데서 알 수 있듯, 이제 더는 개척하고 모험할 곳이 남아 있지 않는 지구를 떠나 베일에 싸인 깊고 먼 우주를 항해하면서 (완벽하게 정복된 지구에선 겪을 수 없는) 위험과 역경을 헤쳐 나간다는 설정만으로도 인류의 개척 본능과 모험 정신을 자극할 만하다. 또한, 과거 지구에서 인류가 이룬 파란만장한 개척사를 침을 질질 흘리며 되새김질할 만한 마뜩한 소재로써 이만한 것도 없다.
철이가 한 손엔 승차권을, 다른 한 손으론 메텔의 손을 잡은 채 은하철도 999를 타고 안드로메다로 향했듯 독자는 한 손엔 『안드로메다 성운』을, 다른 한 손엔 (만약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메텔에 견줄만한 무언가를 들고 (없으면 마누라 손이나 강아지 꼬리라도 잡고) 안드로메다로 항해할 것이다. 최종 목적지에 도착할지도 불투명하고 그곳에서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그 유구한 항해 중 어떤 위험이 기다리고 있는지조차 상상할 수 없는 인류지만, SF 장르의 묘미 중 하나는 미지의 세계를 멈추지 않고 용감하게 탐험하는 데 있지 그 세계를 정복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면, 시간의 장벽에 항거하며 불확실한 꿈을 향해 도전하는 인류의 그 순수함과 아름다움으로 『안드로메다 성운』을 읽을 수 있겠다.
비록 보잘 것 없지만 광고 수익(Ad revenue)은 블로거의 콘텐츠 창작 의욕을 북돋우는 강장제이자 때론 하루하루를 이어주는 즐거움입니다
0 comments:
댓글 쓰기
댓글은 검토 후 게재됩니다.
본문이나 댓글을 정독하신 후 신중히 작성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