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의 키스 | 옌롄커 | 역병 같은 글쓰기
혁명이 사산한 중국 특유의 부조리
공산주의 혁명은 인민을 잘 먹고 잘살게 하겠다는, 민심을 얻으려고 하는 위정자라면 본심이든 아니든 한 번쯤은 내뱉을 법한 대의명분을 연료로 폭발했다. 혁명은 대의명분을 요구하는 만큼 그에 걸맞은 대가를 요구한다. 혁명은 과업 완수에 방해가 되는 타도의 대상뿐만 아니라 뻔뻔스럽게도 혁명의 혜택을 누려야 할 인민의 피와 고통까지 요구한다. 이에 대해 혁명은 대의를 위한 아주 작은 희생일뿐이라고, 피가 멈추고 상처가 아물 때쯤이면 지상낙원에 살고 있다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얼마 전까지의 고달팠던 시간은 기억조차 하지 못할 것이라고 달콤하게 속삭인다.
타도의 대상 앞에선 염라대왕처럼 한없이 무섭지만, 수모와 핍박을 폭포처럼 받아온 인민 앞에선 부처님처럼 한없이 자애로운 혁명이 약속하는 미래는 분명 지상낙원이 맞다. 그렇지만 왜 그런지는 모르게 혁명이 한 걸음 나아가면 약속한 지상낙원도 한걸음 멀어지고, 혁명이 두 걸음 나아가면 약속한 지상낙원도 두 걸음 멀어졌다. 혁명의 입에서 꿀처럼 끈적이고 갓구운 삼겹살처럼 기름이 좔좔 흘러내리던 지상낙원은 달나라에서 옥토끼가 만들었다는 떡처럼 끝내 맛볼 수 없는 망상이었고, 대신 혁명 구호가 약속했던 지상낙원을 위해 흘린 인민의 피와 고름은 중국이 축구를 위해 쏟아부은 돈만큼이나 흘러넘쳤다.
그렇게 중국에선 토지 개혁이 단행되었고, 그렇게 대약진 운동이 시작되었으며, 그렇게 문화대혁명이 활개를 쳤다. 하지만, 현재 중국 축구의 절망적인 현실이 암시하듯 그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인민이 흘렸던 피와 고름을 비료로 삼았다면 적어도 5년은 흉작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정도로 인민의 육체는 만신창이가 되었으며, 인민이 흘린 눈물과 땀을 용수로 사용했다면 적어도 10년은 가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정도로 인민의 영혼은 피폐해졌다.
그리고 그렇게 중국 인민은 ‘혁명’이란 단어만 들어도 치를 떨게 되었으며, 누군가 똥을 싸다가 ‘끙’ 대신 ‘혁’이라고 신음하는 소리만 들어도 자신도 모르게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인민을 예기(禮記)에서 묘사하는 대동(大同) 사회로 이끌겠다던 사회주의 대국에 대한 자부심으로 충만했던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은 인민을 그 어떤 독재자도 실현하지 못했던 대지옥으로 처넣음으로써 사실상 예전 같은 위엄과 위상을 잃은 지 오래다. 대신 혁명이 피를 토하며 저주하고 반대하고 숙청을 일삼았던 자본주의가 뜻하지 않게 오늘날의 중국을 만들었다. 혁명이 광란처럼 몰아칠 때 자본주의는 추풍낙엽처럼 쓰러졌지만, 혁명이 막 사정한 음경처럼 수그러든 지금 자본주의는 지난날의 수모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혁명이 질퍽하게 싸지른 똥을 꽤 열심히 치우고 있다.
사정이 이 지경인데도, 중국공산당은 여전히 혁명의 신화를 고수한다. 만약 공산당의 정당성을 경제 발전에 예속시킨, 그래서 공산당의 실체 없는 혁명 권력에 자본 권력이라는 실체 있는 힘을 행운처럼 안겨준 덩샤오핑의 공로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옌롄커(閻連科)의 『레닌의 키스(受活)』는 혁명이 사산한 바다처럼 깊고 태산처럼 높아 필설로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을 것 같은 중국의 복잡하고 다양하고 무쌍한 부조리한 현실을 해학과 우화라는 효소로 소화한 작품으로써 중국에선 충분히 금지될 만한 소설이다.
‘읽기’에 굶주린 사람에겐 ‘옌롄커’는 즐거움
옌롄커의 거의 모든 한국어판 작품을 읽은 나로서는 집요하다 못해 병적으로 중국의 치부를 들쑤시는 옌롄커의 피고름 같은 소설은 이제는 신물이 날 만도 한데, 그게 그렇지 않다. 일단 한 번 책장을 넘기면 역병에 걸린 사람이 의사를 붙잡고 늘어지는 것처럼 도무지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다. 마치 내가 살고 죽는 천기가 이 책 어딘가에 숨겨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한 문장 한 문장이 절절하게 읽힌다. 때론 영화 호스텔 같은 역겨움에 헛구역질을 내며 가학을 즐기는 듯한 작가를 남몰래 비난하면서도 잠시 후면 언제 그랬냐는 듯 피 웅덩이에 핀 연꽃처럼 초현실적인 문장력에 취해 무아의 경지를 헤엄치고 있는 후줄근한 ‘문학 소년’을 발견한다. 정말이지 칠정(七情)을 역병처럼 전염시키고 마는 그의 역병 같은 글쓰기는 금단의 열매 같은 자학적인 쾌감이 있다.
이 책의 원제 受活(서우훠, 즐거움)처럼 배고픈 사람에겐 빵이 즐거움이고, 일하고 싶은 사람에겐 노동이 즐거움이고, 사랑에 굶주린 사람에겐 짝을 찾는 것이 즐거움이라면 나처럼 ‘읽기’에 굶주린 사람에겐 ‘옌롄커’가 즐거움이다. 비록 그에게서 알지 못하는 병증을 유발할 수 있는 역병이 전염되더라도,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엄청난 일들이 개방귀 뀌듯 일어나는 그의 작품은 역병만큼이나 무섭도록 중독적이다.
‘단절’과 ‘부재’의 아름다움
끝으로 『레닌의 키스(受活)』는 혁명 열병에 걸린 한 사람이 혁명과 단절된, 그럼으로써 태평성대를 보내는 한 마을에 어떻게 재앙으로 작용했는지를, 마치 ‘마오쩌둥은 중국의 재앙이었다’라는 식으로 재밌고 유쾌하고 슬프고 고통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이 소설을 출간하자마자 이십칠 년 동안 복무했던 군대에서 쫓겨났을 만도 하다. 오히려 쫓겨나지 않았으면 그것이 더 이상했을 것이지만, 그가 목숨을 부지한 것을 보면 그래도 중국이 많이 좋아지긴 좋아졌나 보다.
아무튼 서우훠 마을이 혁명과 단절된 채로, 혁명이 부재한 채로 있었더라면 마을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는 즐거운 삶을 누렸을까? 이 말을 좀 더 확장하고 확대 적용하면 인류의 행복을 약속한 미국식의 세계화가 정말로 인류에게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가져다주었을까? 얄궂게도 사람은 자신의 현재를 타인과 비교하며 평가한다. 모두가 가난하면 가난한 것을 모른다. 그래서 그들 모두 현실에 만족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으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어쩌면 다소 원시적인 삶으로의 회귀를 의미한다고 해도 세계와의 단절과 문명적인 것의 부재가 아이러니하게도 ‘세계화’와 ‘문명’이 약속한 행복을 가져오는 가장 빠른 길일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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