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로 가는 길 | 에이미 스탠리 | 한 여인의 요동치는 생명력이 느껴지는
한 여인의 운명을 따라가다
린센지(林泉寺) 가문의 둘째이자 큰 딸인 쓰네노(常野)의 이야기. 50년에 걸쳐 다른 자식 아홉 명을 전부 합친 것만큼 많은 근심을 안겨주게 될 몹쓸 딸의 이야기. 시골의 안정된 삶을 버리고 낯선 대도시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삶을 선택한 한 여자의 이야기. 시대가 요구하는 여자의 삶을 포기하고 자기 삶을 선택한 한 여인의 이야기. 네 번 이혼당한 여자, 괘씸한 자식, 고집 센 여자, 잘 속는 백치 같은 여자, 가족과 마을로부터 의절 당한 여자, 낙담을 밥 먹듯이 경험한 불행한 여자, 기술 • 연줄 • 돈도 없이 옷 한 벌과 희망만으로 에도를 향한 꿈을 좇아갔던 여자의 이야기. 숱하게 많은 상심으로 점철된 이야기. 숱하게 많은 좌절로 점철된 이야기. 숱하게 많은 불행으로 점철된 이야기. 그럼에도 끝끝내 고집을 꺾지 않고 자기 삶을 살아간 한 여자의 이야기. 다른 시대에 사는 사람으로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할 그토록 많은 선택에 직면했던 이야기. 그녀가 죽은 후, 그녀를 모르는 수많은 시골 사람이 상경 후 겪게 될 청운의 꿈을 깡그리 짓밟는 밑바닥 인생의 전초전 같은 이야기. 에이미 스탠리(Amy Stanley)의 『에도로 가는 길(Stranger in the Shogun's City)』 같은 이야기.
편지로 남긴 삶
도시를 선택한 대가로 쓰네노는 가족과 고향을 잃었다. 잘 살았는지 못 살았는지를 떠나 에도에서 살겠다는 꿈은 이뤘지만, 아이를 가질 기회는 잃었다. 그녀는 세월이 흐른 뒤 교과서, 사전, 위키백과 등에 이름과 생몰 연도까지 깔끔하게 정리되는 극소수의 유명 인사들과는 달리 우리들처럼 세상에 거의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자연이 점지한 본성에 따라 유전자를 남길 때, 글을 쓸 줄 알았던 그녀는 차디찬 셋방에서 종이처럼 얇은 벽 너머로 뻔뻔하게 들여오는 소음과 어제오늘처럼 비참한 하루가 될 것이 뻔한 내일을 부단히 외면하면서 가족에게 편지를 썼다. 그녀의 편지는 고지서, 영수증, 청원과 통지문, 전출입 신고서, 인구 등록, 사망 신고서 같은 쓰네노 일가가 남긴 각종 문서와 함께 니가타시 공립 문서관에 보관되었고, 웹사이트에도 공개된다.
문득 마지막으로 종이 편지를 써 본 적이 언제였던가를 떠올려 본다. 아마도 군대에 있을 때이니라. 가족이 아닌 여자 친구와 주고받은 시답잖은 편지들. 젊음과 추억과 꿈과 함께 진즉에 잃어버린 편지들. 생소한 일과에 쫓기고 고참 눈치 보는 불안해하는 졸병 시절에 잠잘 귀중한 시간을 쪼개가며 편지를 쓴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쓰네노가 고단한 몸을 이끌고 소중한 등잔 기름과 먹과 종이를 낭비하면서 필사적으로 편지를 쓴 복잡한 사정 중에서 한두 개 정도와는 부합하지 않을까.
쓰네노는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을 잃고 싶지 않은 절박한 마음, 늪에라도 빠진 것 같은 현재의 처지에서 영영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은 절망감, 그리고 (그녀가 글쓰기의 심리적 치료 효과를 알 리는 없었겠지만 아마도 나처럼 경험적으로 알게 된) 글쓰기로 얻을 수 있는 정서적 • 정신적 안정을 위해, 어떻게든 삶의 안정을 찾고자 악착같이 편지를 썼을 것 같다.
아무튼, 그녀가 지천명을 코앞에 두고 사망한 이후 대략 170여 년이 흐른 지금 그녀가 남긴 편지는 다른 시대의 삶을 간접 경험하고 한 사람이 낯선 부류의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는 삶이 어떠한지를 흘끗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역사가들이 외면한 사료 아닌 사료가 되었다. 디지털 시대에선 발굴할 수 없는 귀중한 문화유산이 되었다.
쓰네노가 남긴 이야기, 우리가 남길 이야기
그녀가 남긴 편지로 소설처럼 흥미로우면서도 허구에선 느낄 수 없는 실화만의 짠함을 느끼게 해주는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 있고 그 무엇으로 어떤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을까?
자기 이야기 없는 독백 같은 글, 맥락 없이 감정과 분노와 느낌만 담긴 즉흥적인 감상들, 허영과 가십거리로 날염한 글 등등 ‘디지털 시대의 디지털 쓰레기’라 불리는 SNS에 실린 자료로 『에도로 가는 길』 같은 한 개인의 전기를 사회사와 엮어 완성할 수 있을까? 과거 어떤 시대보다 넘쳐나는 자료, 하지만 진위를 확인하기 어려운 자료들을 분석할 미래의 역사학자는 골머리 좀 썩혀야 할 것이다. 디지털 자료를 정리하고 분석하는 번거롭고 복잡한 일은 AI가 대신 해줄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선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디지털 자료는 앞으로 몇 번 겪게 될 세계 대전이나 언제가 발명될 EMP 폭탄 한 방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위험도 있지만, 종이로 쓰인 편지와 달리 이메일로 주고받은 편지는 보안 때문에 열람할 수도 없다.
순탄한 인생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교과서에 남을만한 뭔가 엄청난 인생을 산 것은 아니었던 쓰네노의 전기가 늦게나마 완성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남긴 편지와 각종 문서를 작성하고 보관하는 것을 업으로 삼은 쓰네노 일가의 집념 덕분이다. 타인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SNS와는 달리 가까운 사람끼리 주고받는 편지에는 공공연하게 말할 수 없는 솔직한 심정과 사정을 남길 수 있다. 가족 • 친구 • 친지와 주고받는 편지를 종합하면 그 사람들의 사회적 연결 관계를 파악할 수 있고, 어떤 이야기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판별하는 것도 가능하다. 필체, 편지지 종류, 편지지 상태 등도 그 주인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요즘은 편지를 잘 쓰지 않을뿐더러 설령 편지를 남기더라도 유품으로 소중히 간직하는 사람도 드물다. 설령 그렇더라도 그것이 몇 대를 이어가기는 쉽지 않다. 누군가 자식 없이 죽게 된다면, 그 누군가가 간직하고 있던 몇 대를 모은 편지는 기계적으로 처리하는 유품정리사에 의해 소각될 확률이 높다. 문맹자는 거의 없고 인구는 전례 없이 폭증한 지금 평범한 사람들이 남긴 수많은 문서를 보관할 장소는, 관리할 인력은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인구도 적고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도 적고 체계적으로 집안 문서를 관리하는 사람은 더더욱 적었던 시대여서 그런지 쓰네노 가족의 경우는 그들이 남긴 문서가 고스란히 국가에서 운영하는 문서보관소에 소장되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다행한 일이다.
이메일을 사용하는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편지를 고집하는 것은 자원 낭비에 비효율적이고 귀찮은 일이지만, 그럼에도 편지를 고집하거나 문서 보관을 우표수집처럼 취미나 업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것이고, 그 사람들이 남긴 아날로그 유산을 국가가 외면하지 않는다면 상당한 세월이 지난 후 또 다른 ‘에이미 스탠리’에 의해 21세기의 ‘쓰네노’ 이야기가 탄생할지도 모르겠다. 혹시 모른다. 먼 훗날 누군가 당신의 이야기를 읽으며 예상 못 한 감회에 젖어 들게 될지.
에도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이야기
쓰네노는 한 개인으로서 빛나는 삶을 살지는 못했다. 쓰네노뿐만이 아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거의 모든 사람, 그 시대 이전에 살았던 거의 모든 사람, 그리고 그 이후 살게 된 거의 모든 사람이 아등바등 바득바득 살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다. 쓰네노처럼 본의 아니게 남긴 글이 후세에 의해 읽히고, 그렇게 불특정 다수의 기억 속에서 제2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일종의 영생을 얻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런 면에서 쓰네노는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쓰네노의 이야기는 그녀 혼자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모든 대도시가 그랬던 것처럼 에도가 대도시로 성장하는데 견인차 구실을 한 것은 사무라이 같은 지배 계층이 아니다. 달콤한 거짓 같은 꿈을 믿고 무작정 상경했지만,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어 이렇다 할 뭔가는 남기지 못한 무수히 많은 ‘쓰네노’들이다. 한국으로 치면 무수히 많은 ‘영자’들. 도시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대들보이면서도 자신들을 하찮은 존재로 인정하고, 동경하는 도시를 자신들이 흘린 눈물과 피로 건설해 나가고 있다는 자랑스러운 사실을 망각한 채 살다가 죽어갔던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 그들 하나하나는 이렇다 할 뭔가를 남기지 못했지만, 그들은 에도라는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
만약 그들이 글을 쓸 줄 알았더라면, 그래서 쓰네노처럼 고향에 남은 가족 • 친지들과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더라면 그들이 남긴 이야기가 쓰네노와 완전히 같을 수는 없겠지만, 그들과 쓰네노 이야기의 교집합이 차지하는 부분은 생각보다 클 것이다. 그들도 쓰네노처럼 매 순간 모험 같은 에도의 삶에서 의식 깊은 곳에 있는 인내와 집념으로 외롭고 비천한 삶을 버텨나갔을 것이다. 그래서 『에도로 가는 길』은 쓰네노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에이미와 스탠리와 쓰네노가 몰랐던 또 다른 ‘쓰네노’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쓰네노의 삶에 담긴 우리의 모습
우린 쓰네노가 가족 • 친지들과 주고받은 편지로 그녀가 에도의 삶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한, 그녀가 한적한 시골을 고향으로 둔 일부 운 좋은 도시인들처럼 늙으면 고향에 가고 싶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녀는 가족 모두가 기대했던 누이와 딸로 다시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죽음만은 가족 가까이에서 맞이하기를 바랐다는 사실도. 피는 물보다 진했던 것이리라.
하지만, 그녀는 페리 제독이 미시시피호를 타고 일본에 개항을 요구하는 밀러드 필모어 대통령의 서신을 가지고 에도로 향하고 있을 때, 그 당시로는 정확히 진단할 수 없는 열병으로 고단한 생을 마감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붓을 내려놓았을 때쯤,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을 때쯤, 자신이 선택한 삶이었지만 반항적이고 고집스러웠던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면서 어떤 상념에 젖어 들었을까? 충분히 가치 있는 삶이었다고? 아니면 도시를 선택한 것이 후회스럽다고?
그녀가 가족이 요구했던 대로, 사회가 요구했던 대로, 시대가 요구했던 대로 순종적인 삶을 살았더라면 좀 더 오래 살았을 수도 있다. 그랬더라면 시대가 급변하는 것도 목격했을 것이고, 말 못 한 고민처럼 속으로만 간직했던 에도를 세키카와 관문을 에둘러 여행하거나 개구멍으로 몰래 통과하면서 열흘 걸려 갈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안정적이지만 변화 없는 시골의 삶, 불안정하지만 변화무쌍한 도시의 삶, 두 삶 중 어느 것이 가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삶에 가치를 매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애초에 세상에 태어나는 것 자체가 우리의 선택과는 무관한 일이기 때문이다. 불공평하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 이후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가치를 매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우사인 볼트와 달리기 시합을 하는 것만큼이나 의미 없다.
자신을 백치라고 무시했던 남동생 기센이 죽었을 때 쓰네노는 동생의 차갑게 식은 시체를 염한 다음 매듭 없이 꿰맨 무늬 없는 겉옷을 입혔다. 지난 생의 업에 묶이지 말라는 의미였다. 쓰네노도 그랬었고, ‘쓰네노’ 같은 사람들도 그랬었고, 작금의 우리도 의도 했던 것, 의도하지 않았던 것 모두 포함해 무수히 많은 업에 얽매여 있다. 알면서도 속고 마는 투자사기처럼 우린 희망 고문 속에 살다가 미련만 남긴 채 쓸쓸하게 죽는다. 쓰네노가 그랬던 것처럼, ‘쓰네노’ 같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에도라는 두꺼운 필터를 통해 질박하고 곡절 깊은 한 여인의 요동치는 생명력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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