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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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 유신 by 마리우스 B. 잰슨

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 유신 by 마리우스 B. 잰슨

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 유신 by 마리우스 B. 잰슨, 책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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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 두 번 읽다!

같은 책을 잇달아 두 번 읽게 되는 일은 무덤에서 시체가 기어 나오는 것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지만, 심장이 막 멎은 사람이 심폐소생술로 되살아나는 것처럼 흔한 일도 아니다. 보통 이런 이변은 책이 다루는 주제에 대해서는 호기심이 하늘을 찌를 듯 충만하지만, 내용이 어려워 일독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때, 혹은 롤러코스터를 여러 번 타듯 그저 재미있어서, 혹은 책의 모든 게 마음에 들어 조금이라도 더 다양한 지식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에, 끝으로 등장인물 중 누군가에 홀딱 반해서.

첫 번째의 경우는 천근만근 같은 졸음과 또다시 대적해야 하므로 굉장한 각오와 각별한 의지가 따라준다 해도 실행하기는 쉽지 않다. 나머지 경우는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선택하면 되는 것이라 별 어려움은 없는데, 바로 마리우스 B. 잰슨(Marius B. Jansen)의 『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 유신(Sakamoto Ryoma and the Meiji Restoration)』이 그런 경우다.

이해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메이지 유신’ 역사에 대한 (아마도?) 첫 인연이라는 애틋한 멋도 없지 않아 있다. 더군다나 지금까지 읽은 역사서에서 본 적 없는 반항아 • 풍운아 스타일의 낭인 출신 영웅인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에 홀딱 반한 나머지 마지막 장을 덮는 조촐한 의식을 끝으로 뒤도 보지 않고 돌아선다는 것은 나 자신도 용납할 수 없는 배신처럼 느껴진다. 그 정도로 료마의 활달한 기상, 불굴의 용기, 시대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열린 사상, 그리고 미래와 대의를 위해서라면 적과도 협력할 수 있는 관대함은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한다.

사실 인문, 과학, 정치, 사회 등의 소위 말하는 ‘교양서적’ 중에서 역사만큼 재미나는 이야기도 없다. 소설처럼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 유별난 흥미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드라마보다 더 극적이고 영화보다 더 비현실적인 일이 대수롭지 않게 거론되는 학문이 바로 역사다. 역사를 읽다 보면 ‘소설가의 상상력이란 것도 별거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스칠 정도로 대단한 일들이 대단치 않은 것처럼 벌어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세상은 요지경이란 말을 실감하고 싶다면 늦지 않았으니 지금 당장 역사를 펼쳐라.

사카모토 료마의 사진
<日本語: 上野彦馬写真館にて井上俊三が撮影。 English: Shot by UENO Hikoma at Ueno Hikoma Photo Studio.,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에도 시대물, 미야베 월드 제2막

소설가 미야베 미유키(宮部みゆき)의 에도 시대를 다룬 시리즈물 덕분에 결국 여기까지 오고야 말았는데, 어쭙잖게 ‘에도 시대’와 관련된 몇 권의 책을 읽고 나서 느낀 점은 미야베 미유키의 ‘미야베 월드 제2막’ 시대적 배경을 19세기 초반으로 설정한 것은 약간 치사한 의도가 있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텐메이(天明) 기근(1782~1788)과 텐포(天保) 기근(1833~1837) 사이, 즉 에도 시대 말기 중 가장 살기 좋았던 시기를 배경으로 선택한 것은 ‘따뜻한 인간의 정이 있는 사회를 향한 동경과 작은 것도 함께 나누고 도와가며 살았던 시대가 있었다’라는 것을 전하고 싶다는 작가의 소망에 가장 부합하는 시기가 바로 그때였기 때문이지 않을지 싶다.

그런 선택이야 전적으로 작가의 자유이고 창작 의지이므로 나로선 이의를 제기할 이유도 없고, 제기할 건더기도 없다. 중요한 것은 미야베 미유키 덕분에 『도쿄의 가장 밑바닥』, 『에도로 가는 길』, 그리고 오늘의 『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 유신』 같은 밑도 끝도 없이 훌륭한 책을 알게 되었으니 더할 나위 없이 고맙다.

도서관 출입 초기부터 ‘메이지 유신’ 같은 일본 근현대사에 관한 책 한두 권 정도는 읽어야겠다는 바람이 어렴풋하게나마 있었던 것 같았는데, 파도 파도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처럼 깊고 깊은 중국사에 밀려서 그런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렇게 가라앉은 듯 만 듯한 호기심을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이 마구 휘저어 놓은 격이다.

지사, 일본을 메이지 유신으로 이끌다!

서구가 산업 시대로 안착하기 전 청나라의 황금기인 강건성세(康建盛世) 때만 해도 청나라 국력은 가히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런 자랑스러운 전통과 유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19세기에서 20세기로 이어지는 근대화 시기에 아시아 1등 국가는 중국이 아니고 조선도 아닌 일본이 되고 말았다. 한술 더 떠 조선은 일본의 속국이 되었고, 일본 관동군은 중국을 침공하여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웠다.

청나라 • 조선 • 일본 모두에게 외세는 기피의 대상이거나 쳐부수어야 할 적이었고, 세 나라 모두 의무 • 충성 • 복종과 권위 • 계급 • 전통을 중시하는 유교 기반의 사상적 틀에서 세상을 이해했으며 기본적으로 쇄국 기반의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왜 일본만은 망국의 치욕을 피했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나라가 되었을까? 사카모토 료마와 (료마가 태어난) 도사번, 그리고 에도 시대 말기 양대 웅번이었던 조슈번과 사쓰마번을 중심으로 개항 전후 시기부터 메이지 유신까지의 과정을 세밀하게 탐색한 『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 유신』에서, 혁명적 변혁의 종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라는 기묘한 개혁을 완성하는 그 복잡다단한 전개 과정에서 답 일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중 일례로 양대 웅번이자 앙숙이기도 했던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동맹(삿초동맹)을 성사하는 큰 공을 세운 사카모토 료마 같은 낭인 출신 지사(志士)들의 활약이 있었다.

카츠라하마 공원에 있는 사카모토 료마의 동상
<ノボホショコロトソ, CC BY 4.0, via Wikimedia Commons>

새 사상, 새 지식을 흡수하고 실천하다

무력시위를 앞세운 외세의 개항 요구 앞에서 갈팡질팡하던 일본을 메이지 유신으로 인도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사카모토 료마의 사상적 관대함 • 융통성 • 수용성은 남달랐다.

료마가 검술 수련을 위해 에도로 향했던 1853년, 페리 제독이 개항을 요구하는 밀러드 필모어 대통령의 서신을 가지고 우라가(浦賀) 앞바다에 출현하던 그해, 쓰네노(『에도로 가는 길』 주인공)가 알 수 없는 질병으로 고생하다 죽은 그때까지만 해도 도사 지사들은 ‘요코하마 외국인 몰살 계획’을 세우며 즉각적이고 절실한 양이 전쟁을 외칠 정도로 세계 정세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고, 료마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양과의 전쟁이 임박했다고 느낀 료마는 만일 전쟁이 난다면 반드시 서양 오랑캐의 목을 베어 아버지 앞에 바치겠다는 각오를 고향으로 보낸 편지에 다짐하기도 했다. 무모하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도 약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근왕주의자, 양이주의자의 양이 전쟁에 대한 자신감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왕성했다.

도사번뿐만 아니라 미토번, 조슈번 등의 양이주의자들은 반외세주의적 광분과 공포에 휩싸였으며 이들은 발작과도 같은 비이성적인 충동으로 외세에 우호적인 관리들을 무수히 암살했는데, 이들은 이런 살인과 폭력을 천황의 심려를 덜어드리는 ‘야마토다마시(大和魂)’ 정신이 충만한 숭고한 임무로 포장하면서 자신들을 고취시키기도 했다.

료마도 이런 난폭하고 무절제한 분위기에 편승해 가쓰 린타로(勝麟太郞)에 대한 암살을 실행한다. 하지만, 갑자기 들이닥친 암살자들 앞에서 마치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태연했던 가쓰 린타로는 “날 죽이러 온 건가? 그 때문에 찾아온 거라면, 그전에 먼저 이야기 좀 하세나.”라고 영화 같은 대사를 날리고, 이후 펼쳐진 일본의 국운을 결정한 역사적인 대담으로 암살자를 승복시키고 만다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에피소드를 연출하는데, 아무튼 료마는 이를 계기로 가쓰 린타로의 사상에 감화되면서 방종하고 난폭한 지사에서 성숙한 식견을 갖춘 정치가로 거듭난다. 료마가 제안한 (훗날 메이지 유신 강령의 초석이 되는) 선중팔책(船中八策)엔 가쓰 린타로나 오쿠보 이치오(大久保一翁)와 같은 지식인들의 신지식을 흡수한 흔적이 역력히 드러난다.

주변을 둘러보면 알겠지만, 지금까지 고집해 온 사상을 버리기도 어렵지만, 그 사상과 대치되는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담대함과 융통성을 갖추기는 더더욱 어렵다. 료마가 살았던 격변기엔 무엇보다 이런 사상적 융통성이 중요했는데, 시대 흐름에 맞춰 기지와 임기응변을 발휘할 수 있는 밑거름이 바로 이 사상적 융통성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메이지 유신을 이끈 지사들은 ‘대의’라는 명분 아래 일본을 강력하게 만들 수단으로 서양 지식의 필요성을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생각한 바를 행동으로 옮겼다는 점에서 다케치 즈이잔(武市瑞山, 드라마 「료마전(龍馬傳, 2010)」에선 다케치 한페이타로 불림) 같은 골수 근왕주의자들과 달랐다.

대의를 위해서라면 적과도 협력할 수 있다

또한, 료마는 포부가 큰 사람답게 과거의 은원에 연연하지 않았다.

무리하게 개혁을 추진하다 근왕주의자, 쇼야, 보수파 등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반감을 산 끝에 암살당한 요시다 도요(吉田東洋) 사후 그를 대신해 도사 번의 개혁 정책을 추진한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郞)는 야마우치 요도(山內容堂)를 도와 도사 번 근왕주의자의 수장이자 료마의 옛 스승이라 할 수 있는 다케치 즈이잔을 포함해 다수의 근왕주의자(료마의 어릴 적 친구들도 포함)를 숙청하는 데 한몫한 료마의 원수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한편으론, 쇼지로 처지에선 아버지 사후 자신을 양육해 준 은인인 요시다 도요를 암살하고, 무분별하고 난폭하기만 한 근왕주의자를 적대시해 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손을 잡는다. 왜냐하면, 두 사람의 목적, 즉 일본을 근대적인 강력한 국가로 만들겠다는 대의는 같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국제적 위기는 분열된 상태로는 위기에 대처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두 사람의 일치된 사상은 단결된 강력한 국가를, 세계만방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국가를 건설하는 단 하나의 목적으로 귀결될 수 있었다. 두 사람뿐만 아니라 에도 말기에 활동했던 지사들이 품었던 ‘대의’는 대동소이했고 이를 실현한 수단이 달랐을 뿐이다.

고토 쇼지로와 첫 대담을 마친 후, 료마는 그가 비록 오랫동안 자신을 적대시해 왔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던 점에 경탄과 감사의 마음을 표시했다고 한다. 급변하는 세상에 바꿀 수 없는 과거를 붙잡고 늘어진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럴 시간이 있다면 머리를 맞대고 미래를 계획해야 하는 것이 응당 옳은 일이거늘, 이미 지나간 과거를 훌훌 털어버리지 못하고 끊임없이 다시 끄집어내며 반목을 즐기는 한국 정치인의 옹졸한 작태가 떠오른다.

또한 견원지간이었던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동맹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으로 따지면 전라도와 경상도가 동맹을 맺는 일인데, 어떤 일이 일어나야 전라도와 경상도의 동맹이 성사될 수 있을까? 한국인이라면 인정할 것이다. 두 지역의 화합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처럼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일어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대의를 위해선 사적 원한이나 은원 따위의 거추장스러운 과거는 깨끗이 청산하면 좋은 것이고, 그렇게 못 하겠다면 잠시 미루어 두는 것이 상책이지만, 알다시피 역사의 수레바퀴를 끄는 동력은 ‘대의’ 같은 긍정적인 힘만으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때론 원한, 증오, 복수 같은 부정적인 힘도 관여하게 된다.

AI 생성 이미지

애국지사의 표본 같은 삶

중국이 외세에 속절없이 짓밟히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사카모토 료마, 나카오카 신타로 같은 지사들은 “자손들과 외국에 부끄럽지 않은” 정부를 후세에 물려주겠다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인생을 바쳤다. 그들도 사람인 이상 권력, 명예를 추구하는 사심이 전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료마의 옛 친구인 곤도 조지로(近藤長次郞)가 영국에 가고자 영국 상인과 상담했다는 이유로 동료들로부터 ‘이기적’이라는 비난을 받자,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결했다는 일화에서 알 수 있듯 그들의 대의를 향한 열정은 백합 꽃잎처럼 순수했고 들끓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었다. 그들이 보여준 행동은 순수한 애국심과 확신에 찬 용기, 그리고 대의를 위한 헌신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신타로의 말대로 100년 동안 다시 오지 않을 대변혁의 시기였다. 유신이라는 연극의 마지막 막을 앞두고 보여준 그들의 숭고한 헌신은 개인과 가족보다 대의를 우선시했던 사무라이 정신이 보여준 마지막 충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반면에 메이지 유신의 왕정복고라는 반동적인 면은 사무라이 정신이 남긴 마지막 고집인지도.

사람의 앞일은 아무도 내다볼 수 없나 봅니다. 욕조에서 나오는 순간에 급소를 가격당해 목숨을 잃고 만 운 나쁜 친구도 있으니까요. 그에 비한다면 저는 정말로 운이 따르나 봅니다. 저는 죽음의 문턱까지 가 봤지만, 죽지는 않았어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죽을 운명이었지만, 죽지 않고 살아 있지요. 이제 저는 가쓰 린타로라는 일본에서 가장 훌륭한 분의 제자가 되었고, 날마다 제가 꿈꾸어 온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답니다. 마흔 살까지밖에 살지 못할지언정, 저는 이곳을 떠나 고향으로 내려갈 생각은 없어요. 형님께도 이 이야기는 해 드렸고, 형님은 기분 좋게 허락해 주셨답니다. 저는 고향과 조국을 위해 제 모든 것을 바칠 각오입니다.

가쓰 린타로를 지도자로 받아들인 후 료마가 (형제 중에서 료마와 죽이 가장 잘 맞았던) 누나 오토메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다.

메이지 유신을 얼마 앞둔 1867년 12월, 교토의 한 여관에 숙박하고 있던 료마와 신타로는 자객들의 습격을 받는다. 지난 삿초동맹 직후 있었던 데라다야 여관 습격 때 료마는 신문물을 받아들인 무사답게 육혈포로 대응하고 검술 달인답게 칼을 휘두르며 살길을 찾는 데 성공했지만, 이날은 그때만큼 운도, 실력도 따라주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자객들의 검 아래 목숨을 잃는다. 이때 료마의 나이는 32세, 신타로의 나이는 29세였다. 말이 씨가 된 것일까? 료마는 결국 마흔은커녕 마흔 문턱도 가보지도 못하고 요절했다.

정말 영화 같은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극적이고, 역동적이고, 가슴 벅찬, 그리고 조국과 대의를 위해 헌신했던 료마의 인생은 일본 국민이 이상적이다고 생각하는 모범적인 지사의 삶과 가장 잘 부합한다. 부풀려지고 과장된 거품을 제거한다고 해도 료마는 일본 국민의 제일가는 영웅이 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삶을 살았다. 당시 조선과 중국에 이와 견줄 수 있는 인물이 누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내리 두 번 읽어서 그런지 쓸데없이 길어지는 글의 마침표를 마지못해 찍어 누른다.

비록 보잘 것 없지만 광고 수익(Ad revenue)은 블로거의 콘텐츠 창작 의욕을 북돋우는 강장제이자 때론 하루하루를 이어주는 즐거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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