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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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시마자키 도손 | 이상, 그것은 청춘의 특권

spring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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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시마자키 도손 | 이상을 품는 것, 그것은 청춘의 특권

Original Title: 春 by 島崎 藤村

독자는 청춘의 고뇌를 어떻게 보냈는가? 혹은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

시마자키 도손(島崎 藤村)의 『봄(春)』을 읽고 곰곰이 자문해본다. 그때 그 시절 무엇이 날 사로잡았었나, 고뇌라고 할 만한 고뇌가 있었던가, 어떤 꿈과 어떤 이상을 품고 살았던가. 나의 초췌한 뺨을 빈틈없이 몰아치는 초겨울의 건조하고 쌀쌀한 공기를 가르면서, 도서관에서 빌리지도 않을 이 책 저 책을 무심코 펼쳐 보이면서, 허망했던 지난날을 곰곰이 회상해본다. 그러나 딱히 이렇다 할 뭔가 떠오르는 것은 없다. 그렇다고 아무 생각 없이 보낸 것은 아닐 텐데 하고 되새김질해보지만, 그럼에도 머릿속은 관중이 빠져나간 축구장처럼 공허하다. 그 대신 『봄』에 등장하는 기시모토 스데키치를 청춘의 고뇌로 내세워본다. 비록 지금과는 상황이 다른 메이지 유신의 격동기에 살았던 기시모토지만, 그의 고뇌는 청춘이라면 한 번쯤 겪을법한 보편적 문제이며 청춘의 당면한 문제이다.

Spring by Shimazaki Fujimura

그는 약혼자를 가진 여자를 사랑한다. 여러 여자에게 끌리는 자신의 무정함을 부끄러워한다. 사물 깊숙이 숨겨진 뜻을 사고한다. 홍수처럼 밀려오는 격렬한 정신적 동요를 이겨내지 못한 그는 특별한 목적도 없이 집을 뛰쳐나와 방랑한다. 슬피 울면서 가슴 속의 고통을 잊으려고 한다. 까까중처럼 머리를 삭발하고 법의를 걸치며 진짜 떠돌이가 되어 굶주림과 피로에 지치기도 한다.

방랑을 끝내고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앞길의 방향을 정하지 못해 고뇌한다. 글쓰기로 정신의 동요를 잠재워보려 하지만 그마저도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도기에 그림을 그리는 직공도 하루 만에 포기한다. 타인이 전심전력으로 일하는 모습을 부러워하면서도 자신은 그러지 못한다. 집안은 기울고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하는 삶의 갈림길에서 우물쭈물하는 자신이 다른 친구들에게 뒤처지는 것 같아 조바심이 난다.

한때 나폴레옹 전기에 감격해 울며 야심을 키웠던 그는 결국 많은 것들에 흥미를 잃는다. 아무것도 할 마음이 없다. 이젠 자신의 성실함과 정직함도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청춘의 오만함은 결코 그에게 패배를 인정하게 하지 않는다.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끝까지 저항하고 버티는 그 강인함과 오만함이야말로 청춘의 고뇌이다. 그 고뇌 속에서 그는 변화하고 성장하며 성숙해진다. 모호했던 청춘의 공상은 서서히 현실로 초점이 맞추어지면서 조금씩 윤곽을 드러낸다. 그는 어른이 된 것이다. 그는 새로 얻은 학교 선생 자리를 찾아 열차를 타고 도쿄를 떠난다.

쓸쓸히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언제 올지도 모르는 공상의 세계를 꿈꾸며 그는 머리를 창가에 대며 생각했다. “아, 나 같은 인간이라도 어떻게든지 살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고 깊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봄』, p370)

기시모토가 공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방황하다 결국 현실 세계로 눈을 돌리면서 청춘의 고뇌로 얼룩진 인생의 봄은 그 쓰디쓴 행보를 마감한다. 하지만, 기시모토의 친구 중 일찌감치 결혼한 아오키는 혼자 세상과 싸우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청년이다. 그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타파하려고 고군분투하는 투쟁가이다. 그는 그 야심을 위해 한때 정치에도, 그리고 종교에도 몸담았다. 그리고 모든 것을 ‘파괴’할 마지막 도구로 선택한 것은 ‘글’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한 사람의 힘으로 파괴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하고 견고했다. 마침내 아오키는 우뚝 선 산처럼 요지부동인 현실의 철벽을 깨닫는다.

“인간의 힘에는 한계가 있어 一 나는 세상을 부숴 버릴 작정이었는데 도리어 나 자신이 부서져 버렸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야.” (『봄』, p164)

세상을 향한 혼자만의 고군분투를 벌이는 와중에도 조금도 머리를 쉬지 않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던 아오키는 결국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힘조차 모두 소비하고 만다.

일본 근대를 배경으로 한 문학이나 인문학 서적을 보면 당시 많은 일본 지식 청년들이 이상을 품고 그것을 어떻게 현실에 맞추고 적용해야 할지 고민했던 것 같다. 『봄』에 등장하는 청년들보다 한 세대 정도 뒤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미의식과 군국주의 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오오누키 에미코 지음, 이향철 옮김, 모멘토)를 보면 당시 가미카제 특공대로 선발된 수재들은 서구 문명에 적나라하게 노출된 일본을 걱정하며 자본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개인적 성취와 사회적 책임을 두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당시 젊은 지식인 사이에서 “모든 것이 파괴된 잿더미 속에서 다시 일어선 불사조”라는 문구가 유행할 정도로 이상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의 열정은 혈기왕성한 시절에 으레 치르는 잔병치레로 보고 넘어가기에는 심상치가 않았다. 심지어 어느 학도병은 일본의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는 뜻에서 패전을 환영하기도 했다.

어쩌면 새벽이슬처럼 순수하며 우주처럼 원대한 이상은 청춘만이 품을 수 있는 특권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사회로 첫발을 내디디며 현실에 오염되는 순간, 마음속에 품어 왔던 꿈은 물거품처럼 사그라지고, 한때 세상의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낭만적이고 원대한 청춘의 이상은 현실이라는 극히 미시적인 세계로 좁혀지면서 세속적인 처세술로 전락한다. 그렇게 청춘의 무대는 막을 내리고, 이렇게 한 번 내려진 무대의 막은 다시는 올라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 리뷰는 2016년 3월 12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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