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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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나의 잉글리쉬 보이 | 가식과 권위의 압착을 뚫고 나온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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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나의 잉글리쉬 보이 | 왕강 | 가식과 권위의 압착을 지그시 뚫고 나온 지순한 우정

나도 왕야쥔처럼 옷차림에 신경을 쓰고 몸에 향수를 뿌렸다. 또 사랑스런 여학생들에게 보충수업을 해주었으며, 공부 잘하는 여학생들한테 팝송을 불러주는 게 인생 최대의 즐거움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내가 왕야쥔과 달랐던 건 남들의 구설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는 똑똑한 여학생을 좋아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오 나의 잉글리쉬 보이(英格力士)』, 503쪽)

오지 중의 오지에 온 상하이의 영어 선생

몽골어로 ‘아름다운 목장’을 뜻하는 우루무치. 그곳은 6월 초까지도 여름이 오지 않는 황량하고 광활한, 그리고 만리장성 안쪽에 사는 사람들은 버스도 없을 거라고 상상하는 오지다. 그런 문명의 사각지대 같은 그곳 학교에서 어느 날 갑자기 영어 수업이 시작되었다. 선생은 상하이에서 온 젊고 세련된, 기분 좋은 향수 냄새를 풍기는 당당한 자태에 맑게 빛나는 미소를 지닌 남자 왕야쥔이다. 그는 혈기왕성한 젊은 남자 선생답게 여학생에게 보충 학습을 해주는 것을 좋아했고, 중국 지식인들 대부분이 조국을 짝사랑했던 것과는 다르게 영어 수업이 생기면서 학교에서 쫓겨난 위구르어 선생 아지타이를 짝사랑했으며 유물론자가 아니므로 경건하게 신을 믿었다.

사람들은 그를 품행이 좋지 않은, 사상이 불순한 사람이라고 수군거렸고, 목숨보다 소중한 정치 생명을 보신하고자 그를 꺼렸다. 그러나 소년 류아이는 영어를 좋아했다. 영어를 가르치는 그 역시 좋아했으며 그의 진짜 친구가 되고 싶어했다. 하지만, 명문 칭화대학을 나란히 졸업한, 붉은 엔지니어가 되고자 기를 쓰는 고급 지식 분자인 류아이의 부모는 외동아들이 영어 선생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 못마땅했다. 아들이 자칫 잘못해서 프티부르주아의 퇴폐적인 생활에 물이 든다면, 아들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정치적 생명도 끝장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지금이 어떤 시기인가? 문화대혁명이 일으킨 회오리바람이 사람들의 육체와 정신을 여전히 휘젓고 다니는 지금, 반우파, 반동적 기술권위, 수정주의, 주자파 등 반동분자를 찾아내기 위한 감시• 밀고에 모든 사회적 역량이 집중된 위기와 위험, 고난의 시기가 아닌가.

호기심 많고 조숙한, 그래서 몰래 엿보거나 엿듣기가 일상이고, 깨끗한 나뭇잎으로 싼 훙사오러우 냄새가 풍기는 성숙한 여인의 몸과 개 오줌 냄새가 나는 순결한 소녀를 구분할 줄도 아는 류아이 는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우아하지도, 점잖지도, 교양인도 아닌, 오히려 다른 사람의 불행에 명절을 쇠는 것처럼 즐거워하는 천박하고 이기적인 부모의 지랄맞은 방해 공작에 끊어질 듯 끊어질 듯하면서도 영어 선생과의 교제를 간신히 이어간다.

Inglis by Wang Gang
<특색 없는 도시처럼 보이는 우루무치>

영어 선생을 통해 바라본 새로운 세상

어른 입장에선 부모 속을 꽤 썩이는 악동이랄 수도 있는 소년 류아이는 영어 선생 왕야쥔을 통해 이제껏 볼 수 없었던 ‘무한히 아름다우면서도 거대한 무언가’를 발견한다. 세상의 모든 지식과 사상이 들어 있을 것 같은, 우루무치에 단 하나뿐인 영어사전. 은근한 향수 냄새와 깨끗하고 단정한 옷차림, 단아하고 따뜻한 태도에서 풍겨오는 진짜 교양인의 모습. 그런 흩트림 없는 영어 선생의 외모 안에는 한 여자를 열렬히 짝사랑하는 순수한 열정과 사랑하는 여자의 알몸을 훔쳐볼 절호의 기회 앞에서도 단호하게 두 눈을 감아버리는 지순함까지 갖췄다. 영어 선생은 류아이가 지금까지 겪은 다른 어른들, 밖에서는 남의 이목 때문에 점잖은 지식인으로 처신하고 집에서는 괴물로 변하는 부모나 아빠 몰래 교장과 바람피우는 엄마, 권위를 이용해 젊은 여자를 겁탈하려는 판 주임 등 가식적인 어른들의 모습과는 천지차이였다. 그래서 그럴까? 영어 선생이 갖고 있던 모든 물건과 행동 하나하나는 류아이에겐 문명과 진보를 상징했다. 문명과 단절된 오지에 살던 류아이는 영어 선생과 영어를 통해, 영어 선생이 흘린 감정과 지식의 투명하면서도 혼탁한 눈물을 마시며 자란 덕분에 비로소 세상에 보는 새로운 눈을 가지게 된다. 류아이는 새로 얻은 안목으로 바라본 세상에서 ‘무한히 아름다우면서도 거대한 무언가’를 발견한다 . 한편으론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들의 단세포적인 우둔함과 무딘 감각, 아들이 언제까지나 순진한 아이로 남을 것이라는 나태하고 무책임한 부모의 태도에 실망하고, 권위적이고 가식적이며 이기적인 어른들의 세계에 혐오감을 느낀다.

우정을 위해 정치 생명을 던진 류아이

이러하니 사사건건 어른들의 세계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류아이는 아직 어리고 그래서 대항할 힘이 없다. 기껏해야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침묵시위를 벌이거나 좀 더 크게 일을 벌인다는 것이 잠시 가출하는 정도지만, 워낙 오지이다 보니 마을을 벗어나면 굶어 죽기 십상이라 그것마저 집에서 멀리 벗어날 수도 없다. 악의는 없지만, 충동적이라 본의 아니게 짓궂은 일을 종종 벌이기도 하는 류아이는 소심하여 자신이 벌인 일 때문에 애꿎은 사람이 호되게 당해도 진실을 말할 용기가 없었다.

그러나 영어 선생과 진정한 우정을 나누고부터 그는 장난꾸러기 소년에서 진지한 청년으로 성장한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좋아하는 여자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포기할 줄도 아는가 하면, 자신 때문에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옥살이하게 된 영어 선생이 비판대회 무대에 서고 무대 앞에 꽉 들어찬 군중은 비판으로 위장된 비난의 열기에 휩싸였을 때, 류아이는 영어 선생의 부르주아적 생활방식에 대한 비판이 빽빽이 적힌 원고를 공중으로 휙 던져버린다. 목숨보다 더 소중한 정치 생명을 끝장낼 수 있는 류아이의 이 경솔한 행동은 영혼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한 용기일까? 아니면 착란과 망상이 가져온 객기일까?

맺으면서…

소설 『오 나의 잉글리쉬 보이(英格力士)』는 문화대혁명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우루무치가 오지 중의 오지에다가 독립 분쟁이 끊이지 않는 지역이라 그런지 혁명의 열기가 그리 뜨겁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문화대혁명의 어둡고 고통스러운 모습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일반적인 상흔 문학과는 달리 다소 여유를 가지고 가볍게 볼 수 있는 작품이 왕강(王剛)의 『오 나의 잉글리쉬 보이(英格力士)』라고 할 수 있다. 아름답고 거대한 무언가를 동경하는 소년의 세계와 순수함을 상실한 어른들의 권위적 세계와의 대립을 그린 성장 소설로서 여지없는 개구쟁이인 류아이가 영어 선생 왕야쥔을 알게 되면서 내면의 꽃을 피우는 길고도 험난한 여정과 어떠한 역경도 갈라놓을 수 없었던 두 사람의 순수하고 견고한 우정이 석양이 드리우지는 톈산의 설봉처럼 아름다운 작품이다 .

성장한 류아이는 한 때 영어사전에 목매달면서까지 배웠던 영어 단어 대부분을 잃어버리고 오직 ‘love’와 ‘hate’만은 잊히지 않는다고 회고한다. 복잡하고 변화무쌍하고 다사다난하여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고 하지만, 만약 두 단어로 인간의 삶을 표현하라고 한다면 바로 ‘love’와 ‘hate’만큼 적합한 단어도 없을 것이다. 일상에서 흔히 사용되는 만큼 우리의 감정을 잘 대변해주는 두 단어에는 사람이 성장하고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love’와 ‘hate’에 웃고 울며 기뻐하고 슬퍼하면서 자신, 타인, 그리고 세상과 쓰디쓰면서도 황홀한 교감을 나누는 것이라는 인생에 대한 통찰이 응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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