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와 이발사 | 에트가 힐젠라트 | 인류의 크나큰 슬픔을 애써 웃음으로 달래려는
>내가 하는 말은 모두 사실이야.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라고. 그들은 떵떵거리고 잘 살면서 신과 세상을 비웃고 있어. 또한 '정의'라는 개념 자체를 조롱하고 있지! (『나치와 이발사』, 553쪽)
유대인 '이치히 핀켈슈타인'? 혹은 대량 학살자 '막스 슐츠'
막스 슐츠(Max Schulz), 순수 아리아 혈통을 물려받았음에도 개구리 눈알에 매부리코, 소시지처럼 두툼한 입술에 엉망인 치열, 고로 유대인은 아니지만 누구보다 유대인처럼 생긴, 그래서 금발에 푸른 눈, 오똑한 콧날, 섬세하게 굴곡진 입술과 가지런한 치아를 가진 같은 날에 태어난 유대인 친구 이치히 핀켈슈타인(Itzig Finkelstein)과 대조되는 막스 슐츠. 태어난 지 7주 만에 거리에서 가장 길고 튼실한 고추에 순결을 잃고, 그 고추 임자에게 몽둥이찜질 세례를 받고 자란, 유대인처럼 보이지만 절대 유대인은 아닌 막스 슐츠. 분명한 아리아인임에도 멍청한 머리통을 물려받은, 그러나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읽는다고 친구 이치히를 따라 학업도 쌓고 이발 수업도 착실히 받은 덕분에 시도 짓는 괜찮은 이발사가 된 막스 슐츠.
그분의 연설에 감동해서, 시대의 조류를 따라, 친위대의 별 볼일 없는 피라미가 되어, 그저 윗사람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대량 학살범이 된 막스 슐츠. 전쟁에서 지고 폴란드 숲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그 추운 겨울날, 다른 동료와는 다르게, 폴란드 빨치산에게 목이 잘리지 않고, 고추도 잘리지 않은 상태에서, 더군다나 전리품으로 유대인 금니까지 톡톡히 한 몫 챙긴 채, 유유히 독일로 돌아와 암시장 상인이 된 막스 슐츠. 전쟁이 완전히 끝나고, 대량 학살자로서 자신의 이름이 툭하면 신문에 실리고, 수배당하고 위험에 처하자, 스스로 손목에 아우슈비츠 수용자 번호를 새기고, 수용소에서 죽인 친구 이치히의 이름을 빌려, 어느 유대인보다 유대인 역사에 통달한 유대인이 된 막스 슐츠, 혹은 이치히 핀켈슈타인. 패전 후유증에 시달리는 독일을 떠나, 개척차가 되어, 해방 투사가 되어,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다음, 결혼도 하고, 모범적이고 성실한 이발사로 거듭 태어난 이치히 핀켈슈타인, 혹은 대량 학살자 막스 슐츠.
<대량 학살자가 된 이발사, 막스 슐츠> |
독일에서만큼은 환영받지 못한 작품
에트가 힐젠라트(Edgar Hilsenrath)의 『나치와 이발사(Der Nazi und der Friseur)』는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에서 1백만 부를 판매했음에도, 막상 저자의 모국 독일에선 3년 동안 예순 군데가 넘는 곳에서 출판을 거절당한 우여곡절이 있는 책이다. 출간 당시는 70년대 중반, 인류사 최대 비극인 홀로코스트가 남긴 국가적 트라우마가 여전히 독일에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고, 작품의 주인공처럼 가해자들은 6백만의 삶을 송두리째 짓밟았음에도 보란 듯이 잘 살아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 대부분은 이치히 핀켈슈타인, 혹은 대량 학살자 막스 슐츠처럼 죄책감에 고통받거나 양심의 가책에 짓눌리지 않은 채 천수를 누리다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
즉, 대부분의 대량 학살자들이 막스처럼 그 어떠한 재판이나 사회적 제재도, 혹은 야유나 비난 등의 손가락질조차 받지 않은 채, (직접적인 가해자는 아니지만) 일말의 책임감으로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는 독일 국민 사이에 섞여 유유히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는 충격적인 『나치와 이발사』의 내용은 그 당시 독일인뿐만 아니라 현재 『나치와 이발사』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상당히 불편하다. 거기다 이 책은 한 술 더 떠 대량 학살범 막스를 유대인보다 더욱 유대인 같은 유대인으로 둔갑시켜, 그것도 평범한 유대인이 아닌 이스라엘 건국에 한몫을 해내는 영웅적인 유대인으로 탈바꿈시킨다.
이로써 막스 같은 대량 학살자가 활개를 치도록 내버려 둔 독일을 풍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대량 학살자를 이스라엘 건국 영웅으로 치켜세운 유대인 사회를 조롱한다. 다른 홀로코스트 문학에서는 진지하고 심각하게 다루는 소재를 에트가 힐젠라트는 『나치와 이발사』에서 냉소적이면서도 익살스럽게 비꼬는 것도 모자라 한 번 더 비틀어 모종의 희극적 소재로 화학 변화시켜버린다. 이러하니 가해자들이 여전히 사회에서 한 몫을 담당하고 있던 당시 독일에서 가해자 처지를 대변하는 듯한 이 책의 출간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량 학살자 ‘막스’는 정말 자신을 무죄라고 생각했을까?
막스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론 자신은 그저 명령에 따라 몽둥이를 휘두른 것뿐이라며 발뺌한다. 잘못을 뉘우치지도 않고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도 전혀 느끼지 않는다. 뻔뻔하게도 막스는 트로츠키처럼 (1937년 4월, 망명 중인 트로츠키는 멕시코 코요아칸(Coyoacan)에서 스탈린이 자신을 소비에트 체제 전복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기소한 것에 대해 모의재판을 열어 무죄를 선고받았다) 스스로 재판을 열어 변론에 변론을 거듭한 끝에 결국 자신에게 무죄를 선고하기도 한다. 막스는 정말 자신을 무죄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죄책감에 무너져 내릴까 봐 그렇게 해서라도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고 싶은 것일까. 사회적 • 물리적 환경의 변화들은 절대적으로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항상 관찰자의 입장에 따라 단지 상대적으로만 지각된다는 ‘바탕 교체’ 효과를 떠올려보면, 보통의 사람들이 파리나 모기를 죽이면서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듯, 히틀러와 나치의 집요한 선전 • 선동이 가해자들의 가치관을 교묘하게 조작함으로써 일탈을 가능케 했고, 나치의 조직적이고 분업적인 학살 수행은 학살을 마치 공장에서 제품 생산하듯 반복적인 단순 노동으로 전락시킴으로써 가해자들의 죄책감을 제거해 버린 것이 된다. 이것은 후쿠자와 유키치(Yukichi Fukuzawa)가 중국인, 대만인, 조선인 등을 개 • 돼지보다 못한 짐승이라고 선동함으로써 훗날 벌어진 난징대학살의 사상적 근거를 제공한 것과 비슷하다. 고로 나는 최소한 『나치와 이발사』에 등장하는 막스만큼은 정말 자신을 무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마치면서
홀로코스트를 다룸에도 책의 분위기는 절대 무겁거나 섬뜩하지 않다. 가해자들에 대한 비판이나 비난도 없다. 막스를 통해 보듯 뉘우치는 사람도 없고 죄책감에 시달리며 번뇌하는 사람도 없다. 죽은 사람은 무슨 수를 써도 살아서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하니 산 사람은 행복하게는 못 살아도 과거의 속박에서는 벗어나 사람답게 살아야 할 것 아니냐고 항변하는 듯하다. 죽은 사람을 위해 6백만의 나무를 심는다고 해도, 혹은 가해자들을 추적해 끝끝내 복수한다고 해도, 얄궂게도 막츠의 말처럼 그것은 산 사람들을 위한 일이다. 그런 짓을 백 번 천 번 한다고 해도 희생자들의 영혼을 달래 줄 수는 없다.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영원히 잠들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 잘못도 없이 죽은 그들을 위해 산 사람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자체가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인류의 크나큰 슬픔이라는 사실에, 이 책은 애써 웃음으로 달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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