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씨 부자 | 라오서 | 유머 뒤에 숨은 한 지식인의 진솔한 자학
작품해설이 작품의 흥을 꺾는다?
오늘은 좀 유명한 고전 문학이다 싶으면 차례 끝에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작품해설’에 대해 좀 딴지를 걸어보고자 한다. 라오서(老舍)의 『마씨 부자(二馬)』 끝에도 작품해설이 어김없이 따라붙는데 (전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작품해설이란 것이 한껏 달아오른 독자의 감흥을 진탕 먹고 마신 술자리의 뒤끝처럼 어질러 놓는 경우가 종종 있다. 왜냐하면, 작품해설이 구태의연하고 고리타분하고, 또한 너무나도 상식적이고 학문적이기 때문이다. ‘해설’이라 그런 것일까? 너무 당연한 말을 구구절절 늘어놓기 일쑤다.
사실 내가 볼 땐 『마씨 부자』의 「작품해설」 난에 실린 긴 장광설 정도는 “중국인과 영국인의 다른 점을 비교하여 민족성을 드러내는 데 있다”라는 라오서의 『마씨 부자』 창작 동기 한마디로 압축할 수 있다고 본다. 인종 간의 갈등이 어떻다는 둥, 세대 간의 갈등이 어떻다는 둥 하는 그런 케케묵은 이야기를 길게, 그것도 교과서나 논문 같은 글에서나 볼 수 있는 문학적으로 전혀 세련되지 못한 딱딱한 텍스트로 읽는 것은 질색이다. 당신이 가르치는 제자들에게나 해줘도 시원찮은 이야기를 불특정 다수가 읽는 자리에서도 지껄이고 있으니, 이 사람들은 때와 장소를 가릴 줄도 모르는 파렴치한 자들이다. 자신의 지식을 타인에게 이해시키는 방법을 때와 장소, 그리고 상대를 헤아려 적절히 변용할 줄 모르는 고지식한 사람들이다. 아마도 이런 사람들은 똑같은 이야기를 똑같은 강단에서 매년 되풀이하고 있을 것 같다.
오늘의 관점에서 고전을 재평가한다는 「창비세계문학」의 취지에 혹했는데, 여전히 인종 • 세대 간의 갈등만을 들먹이고 있으니 (『마씨 부자』 시대에 살았던 영국인처럼) 지금의 중국을 무시하자는 심보인가? 아니면 앵무새처럼 배운 것 고대로 토해냈을 뿐인가? 혹은 옛날에 배웠던 것을 애써 떠올려보고, 그래도 기억이 안 나면 어딘가에 필기해 놓은 것을 찾아다 열심히 참고해 가며 쓴다고 쓴 것이 이 정도인가?
『마씨 부자』의 「작품해설」을 읽으면서 재차 확인한 사실은 한국 교수는 지독히도 글을 못 쓴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이 작문 교육을 등한시하는 점을 떠올리면 그들이 글을 읽을 사람의 수준이나 성향을 고려하지 않고 글을 쓰는 족족 논문 쓰듯 메마르고 건조한 글이 완성되는 것을 그들만 탓할 수도 없다. 나 역시 학창 시절에 제대로 된 작문 교육을 받은 기억이 전무후무하고, 그 결과 블로그에 글을 주야장천 써대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개선될 기미가 안 보이니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다. 그것도 노망난 노인네가 전위예술이라도 펼치듯 똥을 온몸에 덕지덕지 묻히고서 말이다.
특히 라오서 같은 달필가의 글을 막 읽고 난 후에는 문장력의 질적인 차이가 확연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술이 확 깬다고나 할까나? 아니면 술맛이 확 날아간다고나 할까나? 아무튼, 「작품해설」이 작품의 흥을 돋우기는커녕 그 기세를 꺾거나 읽고 싶은 마음을 일축하는 그런 글이 돼서는 아니 된다는 의미에서 주정 좀 늘어놓았다.
<드라마 「二马 (1999)」의 한 장면(출처: Douban)> |
‘계몽’은 ‘주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서두에 언급한 오만방자한 이야기를 든든하게 지원 사격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라도 숨겨두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오산이다. 그런데도 그런 글을 잘도 지껄이고 있으니 나 역시 어지간히도 주제 파악 못하는 천치다.
사막의 쥐똥만 한 오아시스라도 되고 싶지만, 결국 아무도 찾지 않는 쓸쓸하고 적막한 곳이 된 나의 블로그이니만큼 그런 되먹지도 않은 글을 마음 놓고 씨부렁거릴 수 있는 객기가 발동된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다. 나의 유일한 정신적 도피처이자 위안처인 블로그에서 남의 눈치 따위를 살필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이것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남들과 다른 색다른 리뷰를 완성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도 없고, 설령 그런 무기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 무기를 필설로 옮길 수 있는 재주는 없더라도 색다른 리뷰를 쓰겠다는 의지만큼은 남다르다는 것.
자, 그렇다면 난 라오서의 『마씨 부자』를 읽고 어떤 정취와 감흥을 느꼈는가?
당시 영국인이 외국인을 대하는 태도(특히 중국인)가 오늘 나의 글만큼이나 오만방자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 오만방자함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고, 나름의 배경이 있다. 외국인이 보기에 당시 중국인은 스스로 굴욕스럽고 치욕적인 삶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인 것처럼 보였다는 것과 국력이 쇠퇴할 때로 쇠퇴했다는 이유, 그리고 그런 이유를 빌미로 중국인을 싸잡아 무시하고 괄시하는 영국인은 당시 최강국이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약육강식이라는 제국주의적 논리가 시대적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이비 과학의 후광까지 업은 인종 차별이 당연시되던 개탄의 시대였고, 인종 차별을 받는 민족들은 그런 차별을 타파할 수 있는 능력도 의지도 없었고, 딱히 이렇다 할 방법도 없었다. 그들에겐 한마디로 암울하고 침울한 시대였다.
라오서나 루쉰(魯迅)은 자신들의 소설을 통해 중국인의 계몽과 부국강병을 쉼 없이 부르짖지만, 막상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에겐 그런 자각이 뚜렷하게 나타나진 않는다. 그들의 귀에 나팔을 꽂고 ‘계몽’이니 ‘국력’이니 ‘지식’이니 아무리 외쳐대도 마이동풍일 수밖에 없는 것이 샹쯔(祥子)나 아큐(阿Q)는 하루하루를 겨우 연명하는 극빈층의 사람들이고, 그 당시 중국인 대다수의 삶이 그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는 점에서 약소국의 비애는 극에 달한다. 어떻게든 빈곤의 악순환을 끊어야 그들이 먹고사는 일 외에 다른 일에도 신경을 쓸 여유가 생길 것인데, 그것이 안 되니 계몽이고 나발이고 다 부질없는 탁상공론처럼 들릴 것이다.
이처럼 라오서와 루쉰 작품의 오묘함은 당대 지식인을 대변하는 작가의 주장과 그 주장을 공허함의 극치로 몰아가는 특수한 경향에 있다. 즉 계몽을 외치는 지식인과 그런 것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주인공들의 극빈한 삶을 대비시킴으로써 지식인이 시국을 개탄하고 계몽을 부르짖는 것이 유행처럼 자리 잡았음에도 그런 주의 • 주장들이 대세를 역전시킬 행동으로까지는 옮겨가지 못했음을 한탄하는 지식인의 솔직한 자각과 성찰 말이다.
말과 글로는 뭐든지 다 해낼 수 있을 것처럼 그럴싸하게 포장할 수 있지만, 그것이 끝내 행동으로 옮겨지지 못하면 결국 탁상공론으로밖에 끝날 수밖에 없음을 라오서나 루쉰이 몰랐을 리가 없다. 그래서 그들 소설은 그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중국 지식인의 자기비판을 촉구하는 성명서나 다름없다.
글을 읽는 재미만으로도 추천 꾹!
한편으론, 라오서의 『마씨 부자(二馬)』는 ‘제국주의’, ‘식민지’, ‘인종주의’라는 시대적 색안경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매우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마씨 부자』는 「작품해설」에서 설명한 인종 • 세대 간의 갈등과 화합이라는 시대적 요소를 제외하고서라도 중국인이 (중국인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굴욕과 수모를 한껏 안겨준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런던으로 이주하여 겪게 되는 우여곡절만으로도 소설적 흥미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마씨 부자가 중국인들을 향한 편견과 오해를 당사자 앞에서조차 대놓고 드러내는 영국인들의 방약무인한 태도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고군분투하는 극적인 재미도 놓칠 수 없지만, ‘인종 차별’과 ‘제국주의’가 횡횡하는 음울한 시대적 상황으로 말미암아 자칫 비루하게 흘러갈 수 있는 분위기를 재치 있고 쾌활하게 처리한 물이 오른 유머 감각은 문장을 음미하는 문학적 재미를 자아낸다는 점에서 더더욱 놓칠 수 없다. 특히,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태연하게 버티고 선 인종적 편견과 문화적 차별, 그리고 세대와 이념 차이 등의 이런저런 갈등의 양상이 당사자들도 모르게 언행으로 미묘하게 표현되는 것까지 놓치지 않는 섬세한 필치는 라오서 문학의 정수다. 이런 격조 높은 문장력 덕분에 잊을만하면 계몽 운운하는 작가의 지나친 개입과 현대의 독자가 듣기에는 다소 따분한 설교에도 불구하고 『마씨 부자』는 시대와 국경을 막론하고 읽힐 수밖에 없다. 시대, 나이, 민족, 언어, 국가, 문화 등에 상관없이 제대로 읽힐 수 있는 소설이야말로 제대로 된 문학이다.
<드라마 「二马 (1999)」의 한 장면(출처: Douban)> |
일찌감치 스모그를 겪었던 런던
이외의 볼거리는 라오서의 필설이 진득하게 담아낸 (20세기 초 인류 문명의 진보를 상징하는 대도시) 런던의 진풍경이다.
외국인의 정신을 홀라당 빼먹는 도시의 분주함과 그 분주함의 정점을 찍는 혼잡한 차량 행렬,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성탄절 전야의 떠들썩한 분위기, 명절 선물을 우편으로 주고받는 실용적인 관습 등 마씨 부자가 살았던 런던은 작금의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간다고 해도 생활 양식에서만큼은 적응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최강국다운 문명의 이기를 자랑한다. 그랬던 영국이 이젠 국내총생산(GDP)에서만큼은 중국에 한참 못 미치니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한편 (직접 경험해보진 못했지만) 런던의 명물이라 할 수 있는 짙은 안개와 을씨년스럽고 우울한 날씨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라오서가 스모그로 의심되는 대기 오염을 좀 특별하게 짙은 안개 정도로 묘사한 점이 흥미롭다.
런던 전체에서 누런 연기가 나는 젖은 장작을 태우기라도 하는 듯 검누런빛의 안개가 끼기도 했다. 또 불그스름한 안개가 끼는 날도 있었는데, 그 정도로 안개가 끼면 사람들은 아예 사물을 분간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p221)
라오서가 런던대학에서 재직하던 시기(1920년대)엔 이미 ‘스모그(smog)’라는 말이 정의되어 있었다. 알다시피 스모그의 어원을 따지자면 20세기 초, 런던에 낀 농무로 목숨을 잃은 천여 명의 불운한 시민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듯 당시 런던은 이미 대기 오염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스모그’란 말이 나돌기 전부터 대기 오염의 심각성을 인지한 디킨스의 말에 따르면,
농촌 지역에서는 안개가 회색이었던 반면, 런던의 경우 도시 경계에서는 어두운 누런색이다가 도심으로 들어갈수록 갈색이 짙어졌고 도심에 이르면 (중략) 아예 녹슨 검정색이 되었다. (『비(Rain), 신시아 바넷』, p412)
라오서가 묘사한 불그스름한 안개는 스모그였다. 그것도 매우 심각한 정도의 스모그였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런던 스모그는 1952년 '런던 포그(London’s Great Fog)‘라는 이름을 얻으며 정점을 찍는다.
라오서는 런던에 체류하면서 스모그란 말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스모그 정도는 부국강병을 이루려면 응당 치러야 하는 작은 대가? 아니면 산업화의 부산물 정도로 치부했던 것일까? 라오서가 미세먼지 마스크를 안경처럼 일상적으로 착용하고 다니는 작금의 중국인들을 보면 어떤 말을 할지 자못 궁금하다.
천 년이 흐른다 해도 끝나지 않을 갈등
시원섭섭하더라도 이 백야 같은 길고도 지루한 장광설을 끝마쳐야 할 때다. 시간이 빠르게 지나건 느리게 지나건 모든 일은 끝이 나게 마련인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으로 『마씨 부자』에 대해 언급하자면, 소설을 읽으면서 내심 마씨 부자가 하는 일 모두가 잘 풀렸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고 자연스럽게 마음속에서 샘솟을 정도로 소설적 재미가 뛰어난 작품이다. 물론 라오서는 마씨 부자의 일을 온전하게 매듭짓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방관하지도 않았다.
아버지 마쩌런은 관리를 흠모하는 전형적인 중국인답게 한가함을 즐기는 사람 좋은 한량으로 남을 것이고, 이런 아버지를 내버려 두고 떠나는 아들 마웨이는 새 시대를 살아갈 자격을 스스로 갖추려는 열정으로 충만한 젊은이로 거듭나려고 한다. 현재의 안위에 만족하고 그것을 지키려는 사람,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변화를 모색하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사람, 그리고 이 두 부류 위에서 전지전능한 신처럼 변화를 주도하고 선택한 사람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사람. 이러한 구도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세대 간, 그리고 계층 간의 갈등을 자아내는 양상이다. 당신이 나이를 좀 먹은 사람이라면 이것은 누구를 탓하거나 누구를 지지해서 해결할 수 있는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쯤을 알 것이다. 마치 마씨 부자가 살았던 시대의 영국인들이 중국인을 개만도 못한 사람으로 취급하게 했던 그 복잡한 배경처럼 말이다.
영국인에 뇌에 각인되다시피 한 중국인에 대한 근거 없는 편견은 마씨 부자 같은 한두 사람이 어찌해 볼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두 사람도 결국 깨지지 않는 인종적 편견 때문에 사랑이라는 매우 보편적인 감정을 억제해야 하는 불행을 겪는다. 다만, 두 사람은 ‘중국인도 괜찮은 사람이 있구나’하는 지극히 당연한 관념을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남겨주는 덴 약간의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그 극소수의 사람들조차 따돌림당할까 봐 ‘중국인도 괜찮은 사람이 있구나’하는 진심을 감히 입 밖에 내지는 못한다. 인종 차별도 충분히 비극적이지만, 그것이 부당하다는 사실이 공론조차 될 수 없을 정도로 인종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무심함이 당시 중국 지식인들에겐 더욱 비극적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라오서의 해학적인 필치는 지식인으로서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자신의 무력함을 감추려는 자조적인 웃음일지도 모른다. 유머 뒤에 숨은 한 지식인의 진솔한 자학이 나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한편으론, 이제 좀 컸다고 과거에 받은 굴욕을 되갚듯 국력을 과시하는 작금의 중국이 볼썽사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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