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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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엽 감는 새 연대기 | 무라카미 하루키

태엽 감는 새 연대기 | 무라카미 하루키 | 예측 불가능한 삶, 흐름에 굴복하지 않는 삶

책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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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뭔지 모르게 재밌게 읽히는 책

「태엽 감는 새 연대기」는 하루에 백 페이지씩 읽으면 열흘, 이백 페이지씩 읽으면 닷새가 걸리는, 그야말로 ‘연대기’라는 제목에 걸맞은 어마어마한 분량이지만, 열흘이고 닷새고 간에 책을 읽는 그 시간만큼은 인생에서, 그리고 뇌에서 ‘지루함’이라는 단어를 마리아나 해구에 수장시킨 것처럼 시종일관 재미나게 읽은 소설이다. 그런데도 (여자의 매달 찾아오는 그날처럼, 혹은 이제 막 형량을 선고받은 죄수처럼 기분이 엉망이어서인지) 막상 마지막 책장을 덮었을 때 옌롄커(閻連科) 책 리뷰 작품을 읽었을 때 같은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절절함이라던가 오장육부를 쥐어짜 내는 듯한 애틋함 같은, 그런 영혼을 쥐어짜 내는 듯한 감동이나 온몸을 찌르르하게 훑고 지나가는 여운은 인상적이지 못했다.

누군가는 ‘감동’이나 ‘여운’이 부족하다고 해서 ‘별로’라고 깎아내릴 수도 있겠지만, 「태엽 감는 새 연대기」는 그런 편견을 가진 사람에게 꼭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어질 정도로 뭔가 인상적인 감동 없이도 뭔지 모르게 재밌게 읽히는 책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의 의도적인 구상 때문이든, 아니면 독자의 무감각한 성향 때문이든) 감동이 절제되었을 때의 묘미를 절실하고 분명하게 체험할 수 있는 작품이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는 점에서 「태엽 감는 새 연대기」는 특이한 작품이다.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처음이라 이런 특성이 작가 전 작품에 걸쳐 고루 나타나는 개성인지, 아니면 「태엽 감는 새 연대기」만의 특징인지는 모르겠지만, 독자의 감정을 지나치게 한쪽으로 쏠리게 하는 부담 없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자신을 관조하는 경지로 이끌어 주는 듯한 사색적인 분위기가 꽤 매혹적이다.

내가 보기엔 감동이 적절하게 절제된 덕분에, 그래서 쓸데없는 감정의 동요가 없었던 덕분에 읽는 재미는 배가 되었다고 생각되는데, 여기엔 리듬감 있는 문장도 톡톡히 한몫했다. 사뭇 간결하게 흐르는 듯하던 문장은 잠시 한눈파는 사이 장황해지기도 하고 때때론 장인이 솜씨를 뽐내듯 절묘해지기도 하다가 정신을 차리면 언제 그랬다는 듯 새침하게 담담한 문장으로 되돌아와 있는 것이 읽는 재미를 만끽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사실 독자의 감동을 우려내려는 목적이 너무 티 나는 노골적이고 진부한 이야기야말로 삼류 및 상업 소설의 전형이기도 하다. ‘감동’이나 ‘감흥’ 같은 것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만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작가의 둘도 없는 재능이자 좋은 작품이 되는 밑거름이라는 점에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태엽 감는 새 연대기(ねじまき鳥クロニクル)」야말로 ‘이야기가 있는 세계’, ‘이야기다운 이야기’로 그윽한 정취를 자아내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빙 이미지 크리에이터

누군가에게 독서는 현실 도피처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나를 전기의자에 앉혀놓고 “‘이야기가 있는 세계’와 ‘이야기가 없는 세계’는 무엇이 다르냐?”, “‘이야기다운 이야기’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라고 심문해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나의 한없이 부족한 필력 탓이기도 하지만, 어떤 이야기는 묵직하게 와닿는데, 어떤 이야기는 바람처럼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것 같은 독서 체감의 정도나 깊이는 독자의 경험이나 취향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 독서 목록을 보면 알겠지만, 난 비현실적이고 비현재적인 것들을 좋아한다. 내가 즐겨 읽는 범죄소설, 추리소설, SF소설 등의 장르소설은 모두 현실에선 거의 일어나지 않을 법한 사건을 토대로 구축된다. 그다음으로 즐겨 읽는 시대소설이나 역사 • 과학 도서 역시 현재에서 동떨어져 있거나 일상과는 거의 상관이 없는 책들이다.

왜 이렇게 현실과 현재에서 유리된, 혹은 현재를 살아가는 데 거의 보탬이 되지 않는 책들을 즐겨 읽는가는 내가 눈앞을 직시할 수 있는 깜냥과 삶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현재적인 책에선 위안과 휴식을 얻기보다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과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세상을 향한 분노 같은 것들이 우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고로 난 독서를 통해 현실을 잊고 다른 공간으로 도피함으로써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현재의 삶을 외면할 수 있는 안식처를 찾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현실 도피적인 경향을 무난하고 무탈하게 충족시켜 주는 것이 독서라 할 수 있겠다.

그런 면에서 「태엽 감는 새 연대기」는 더더욱 안성맞춤이다. 끝없이 길고 무수한 샛길로 가득한 이야기는 마치 인생의 복잡다단함을 표현하려는 듯하지만, 각각의 에피소드는 전혀 일상적이지 않으며 등장인물들 역시 범상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판타지에 한 발 정도는 푹 담근 듯한 기묘하고 신비로운 이야기들은 비현실적인 느낌이 강하지만, 일관성이 없고 예측 불가능한 흐름은 매우 현실적이기도 하다. 아주 오래전에 읽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소설들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담백하게 흘러가던 이야기가 느닷없는 사건 난입이나 변덕스러운 상황 전환으로 난데없는 긴장감과 전율을 발작적으로 전해주기도 한다.

뭔지 모르게 복잡하고, 뭔지 모르게 단순하기도 한 것 같은 기묘한 소설이지만, 숨 쉬는 듯한 문장과 툇마루에 앉아 조촐하고 고즈넉한 정원을 감상하는 듯한 고독하고 적막한 흐름은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그저 넋 놓고 문장을 청소기처럼 빨아들이고 있는 무아지경의 나를 연출해 낸다.

예측 불가능한 삶, 흐름에 굴복하지 않는 삶

어느 날 집에서 기르던 고양이가 사라진다, 이상한 여자로부터 알 수 없는 전화가 걸려 온다, 태엽 감는 듯한 소리를 내는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러고 나서부터 시작된 오카다 도오루의 기묘한 나날들은 꿈과 현실이 교차하고, 역사가 현재를 침범하고, 선문답 같은 예언이 등장하는 등 충분히 환상적이고 넉넉히 비현실적이다. 흐름이 정체된 공간에서 시간마저 변색하고 탈색되어 현실 감각을 왜곡하는 듯한 「태엽 감는 새 연대기」의 옅은 세피아 색 에피소드들이 (사색으로서의 현실 도피처를 갈구하는 나의) 마음에 드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그래서 재밌게 읽은 것도 사실이지만,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사이를 속수무책으로 방황하면서도 끝끝내 집을 나간 아내를 포기하지 않는 도오루의 애착과 아내의 정체성을 차근차근 찾아가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자의식에 대한 탐구 역시 당혹스럽도록 매력적이다.

학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 분야에 뚜렷한 재능을 가진 것도 아니면서도 실업자의 삶을 꽤 느긋하게 꾸려나가는 도오루에게 폭죽처럼 연달아 터지는 기괴한 일들은 결코 평범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는 잃어버리는 것에 익숙하고 빼앗긴 것을 포기하는 데 익숙해진 현대인들처럼 상실의 삶을 살아가는 대신 사회가 강제한 일관된 흐름을 깨면서까지 자신만의 길을 고집한다. 그것은 예측 불가능한 삶이야말로 자유의지에서 비롯한 진정한 삶이라는 신념의 표출이자, 흐름에 굴복하는 것이야말로 자유의지가 말살된 노비의 삶을 선택했다는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소수의 엘리트에 의해 운영되는 현대 국가 체제에서 개인의 정체성이란 오로지 ‘스펙’으로 대변될 뿐이다. 오카다 도오루처럼 어중간한 사람들은 엘리트들이 계획한 흐름에 동화되지 않으면 기본적인 의식주도 해결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고립되어 존재 가치가 희미해지기도 한다.

“평범한, 혹은 평범 이하의 능력을 갖춘 사람들은 왜 존재해야 하는가, 왜 살아가야 하는가?”, 아주 잘 나가는 사람이 아닌 이상, 한 번쯤 고민해 봤을 법한 질문이지만, 이런 질문이 더없이 유치하고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줄 정도로 명확한 답변은 아직 얻지 못했다. ‘진정 이 사회를 이끌어가고 지탱해 나가는 것은 도오루나 사부(さぶ)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다’라는 ‘하나님을 믿으면 천국 간다’만큼이나 실없고 허망한 위안을 들을 뿐이다. 어쩌면 우린 현재를 전쟁과도 같은 치열한 경쟁 세계라고 인지함으로써 그저 살아있다는 것에 만족해야 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태엽 감는 새 연대기」는 그저 꿈같은 이야기를 꿈같지 않게 또렷하고 맥락이 있는, 그래서 나름의 정체성을 품은 이야기로 진화시켰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 몽환적인 이야기 속에서 인간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탐색한다는 점에서 매우 영민하고 기민한 소설이다.

빙 이미지 크리에이터

마치면서...

끝으로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염세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성향에 물들어 가는 개인적 경험 때문인지, 아니면 감정적인 요소를 최대한 억제하려는 작가의 의도적인 작품 구상 때문인지, 아무튼 읽는 내내 이상하리만치 차분하게 읽은 소설이다. 분노, 경악 등 감정의 동요를 불러일으킬 만한 몇몇 에피소드가 하늘에 뜬 태양처럼 분명히 존재했지만, 그런 감정들은 기세를 떨치기도 전에 곧장 소설 전체에서 은은하면서도 묵직하게 풍기는 담담하고 신비로운 분위기에 밀려나 무덤 속에 잠든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막막하고 아득한 뭔가가 돼버린다.

사실 「태엽 감는 새 연대기」에 등장하는 사람들과 나는 ‘호모 사피엔스’, ‘아시아인’이라는 점 외엔 딱히 공통점이 없다. 그들과 난 언어도 다르고, 교육 수준도 다르고, 걸어온 삶의 이력도 다르고, 살아가는 양식도 다르고, 직업도 다르고, 경제 능력도 다르고, 사회적 지위도 다르고, 세상을 해석하는 가치관도 다르다. 그러니 아무리 그들의 얘기를 들어도 진정한 이해를 바랄 수는 없다. 하지만, 오카다 도오루가 「붕괴: 스타레일」의 개척자라도 되는 양 달랑 야구 방망이 하나만 들고 사다코가 쉬고 있을법한 컴컴한 우물 속으로 기어 내려가 진정한 자아와 삶에 대해 천착을 거듭하듯, 난 읽고 쓰는 삶의 유일한 지적 활동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 나와 내 삶과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이 모든 것들이 세상에 어떻게 반영되고 어떻게 무시되는지를 암담하게 사고할 뿐이다.

그러고 보니 도서관 출입 이후 1980년대 이후를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 • 범죄소설 • SF소설 같은 장르소설이 아닌) 일본 현대소설은 이 책이 처음인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만 익숙한 작가명 때문이 아니라 단지 세 권짜리를 한 권으로 통합해 재출판했다는 것이 신기해서 대출한 책인데, 읽는 내내 수목원의 깨끗하고 포근한 잔디밭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듯한 편안하고 부담 없는 마음이 나를 공상과 환상의 에덴동산으로 이끌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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