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거래 | 한사오궁 | 피처럼 붉고 약처럼 쓴 실존적 궤적
나는 이웃들을 잘 모른다
나는 이웃들이 꼬박꼬박 하루 세 끼를 잘 챙겨 먹는지, 아니면 나처럼 기능성 소화장애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소식(小食)하는지 잘 모른다. 나는 이웃들이 어느 고단한 노동자처럼 침대에 눕자마자 곪아 떨어지는지, 아니면 나처럼 시무룩한 얼굴로 밤을 지새우는지 잘 모른다. 나는 이웃들이 매일 황금빛 똥을 통쾌하게 싸지르는지, 아니면 나처럼 좌변기에 앉아 오만상을 찌푸리며 기를 모으고 있는지 잘 모른다. 내가 이웃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엘리베이터 앞 3평 남짓한 공간의 정체된 공기를 수시로 붉게 물들이는 김치찌개 냄새로 짐작하건대 ‘김치찌개를 어지간히도 좋아하는 사람들이로구나’라는 것 정도, 현관을 나설 때마다 뭐가 그리 신나는지 참새처럼 조잘대며 존재감을 과시하는 조그만 아이 두 명이 있다는 것 정도, 그리고 야심하고 조용한 밤을 화들짝 깨울 정도로 현관문 닫는 소리가 짜증 나도록 크다는 것 정도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사는 바로 앞집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것도 이 정도인데, 옆동네 앞동네 윗동네 아랫동네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사정이 이토록 불명하니 옆 나라 중국 사람들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금시초문인 것은 ‘괄시’와 ‘간섭’은 여전히 부덕이지만, ‘무시’와 ‘소외’가 소소한 미덕으로 자리 잡으려는 현대에선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웃들을 알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로 여길까? 그런데 왜 난 가까운 이웃들에 대해선 득도한 스님이 처녀를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무심하면서도 멀기만 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일생에 걸쳐 한 번도 마주할 일이 없는 중국 사람들에 대해선 호기심의 토네이도가 몰아치는 것일까?
우리 각기는 다른 삶을 살아왔다
많은 사람이 부러워하고 한편으론 시샘하는 곡절 없는 평온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일지라도 그것을 순순히 인정하는 당사자는 드물다. 사람들이 자신은 타인보다 조금 더 친절하다고 착각하듯, (타인이 보기엔 어떠하든 간에) 자기 삶이 타인보다 더 신산하고 고달프면 고달팠지, 절대 평탄하거나 순조롭지만은 않았다고 자랑하듯 과장한다. 당신이 여기에 찬물을 끼얹거나 재라도 뿌리고 싶다면, 욕 한 바가지와 함께 공습해 오는 침 세례 정도는 견뎌낼 각오 정도는 해야 할 것이다.
사람이란 돈과 지위와 지식과 기술 같은 겨룰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가지고도 경쟁하지만, 누구의 삶이 더 고달프니, 누구 인생의 우여곡절이 더 감동적이고 극적인지 같은 하등 쓸데없는 것에 대해서도 죽냐 사느냐 따지고 드는 천성이 경쟁적인 동물이다.
하지만, 이 조그만 땅을 공유하는 그들이 제아무리 자기 삶이 타인의 삶보다 힘겹고 어려웠다며 곡진하게, 때론 눈물로 하소연해도 그들과 나는 언어, 문화, 사회를 공유하는 사람들이라 그래도 서로 통하는 것이 있으니,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비탄에 젖거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탄식을 칙칙폭폭 내뱉을지언정 일부러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들어야 할 정도로 호기심은 생기지 않는다. 내가 보기엔 부모를 교통사고로 잃었거나 비행기 사고로 잃었거나 부모를 잃었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라는 점에서 그들 삶의 곡절이나 신산함에 딱히 창의적인 면은 없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인류사에 둘도 없는 독보적인 대사건이었다. 한국의 60 • 70년대를 살아온 사람도 경제적인 핍박뿐만 아니라 ‘개발 독재와 민주화’라는 정신적인 핍박에도 시달려야 했던 나름의 곡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세가 인류사에서 금시초문이었을까? 한국의 사례가 다른 사회에 본보기나 참고 정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한국의 사례에 보편타당성이 있었다는 말이다.
문화대혁명에서도 보편타당성을 찾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천착은 학자들의 임무이고, 실제로 한사오궁(韓少功)은 『혁명후기(革命後記)』에서 자신이 찾은 오묘한 답을 제시하지만, 이것을 덥석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많은 역사학자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문혁은 혼란스럽고 파괴적이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문혁을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없는 대사건이라고 인정한다면, 문혁을 겪은 중국인들의 인생이야말로 구구절절 파란만장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고 몇십 년씩 사는 동안 긴긴 세월은 덧없이 흘러간다. 우리가 기억하는 사람은 몇이나 되고, 또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하물며 우리는 그들을 기억해야 하는가? 나의 얄궂은 호기심은 무심하게도 내 눈앞에서 울고 웃는 생생한 이웃들을 제쳐놓고 문혁의 상처를 안고 살았던 70 • 80년대의 중국인들을 향한다.
나라를 잃고, 동족끼리 전쟁을 벌이고, 쿠데타와 민주화 운동이라는 나름의 곡절 있는 현대사를 겪은 한국인으로서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혁명적인 삶을 견뎌온 그들의 삶을 기억하고 싶다. 일일이 그들 하나하나를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들을 뭉뚱그린 『귀거래(歸去來)』 같은 문학으로 기억할 수는 있다.
이런 나의 불한당 같은 호기심은 타인의 불행에서 저속한 재미를 찾는 천박한 취미로 보일 수도 있지만, 굳이 변명하자면 “사람의 본성을 빼놓고 (문혁이나 대약진처럼 모두가 인정하는) ‘파괴적인 역사적 사건’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라고 말하고 싶다.
그들 모두는 문혁의 피해자이자 가해자?
혁명이 승리하면 세탁기, 텔레비전, 로봇이 생겨 사람들이 다 행복해지고 집 안에선 고모가 할 일이 없어진다고 말했다.
고모는 깜짝 놀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그렇게 좋은 게 있다고? 그럼 사람은 죽는 일만 남게?”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 깊은 곳에 담긴 경세적(警世的)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여자 여자 여자」 중에서)
고모의 말속에 담긴 경세적 의미를 지식청년(知識靑年, 이하 지청)들은 우스갯소리로 넘겼을지 몰라도 신중하고 주도면밀한 혁명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혁명은 사람들이 할 일이 없어 지루해 죽는 일이 없도록, 그냥 죽는 날만 기다리는 무료한 삶이 되지 않도록 참으로 많은 것들을 준비해 놓았다. 자아비판, 인민재판, 숙청, 정풍, 공작, 선전, 노선 등 ‘정치 올림픽’을 마련해도 될 정도로 갖가지 사상 • 대중 운동을 일사불란하게 선보인 혁명은 세탁기, 텔레비전, 로봇을 기다리는 인민에게 밀고, 감시, 선동 등 삶의 이면에 숨겨진 사악한 재미를 선물했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건대, 인류사에서 혁명은 파괴 • 불행의 대명사였을지 망정 행복의 대명사는 절대 아니었다.
그것은 한사오궁도 비껴갈 수 없는 진리였다.
문혁 초반, 한사오궁의 아버지가 정치적 압박과 비난에 시달린 끝에 자살했다. 이 비극 하나만으로도 그가 (어느 역사가의 편협하고 무성의한 설명처럼) 선과 악이라는 단순한 흑백논리로 문혁을 이해했더라도, 또는 『귀거래』가 문혁이 개인에 가한 폭력을 고발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상흔 문학으로 남았더라도 그를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사오궁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자기 인생에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지각 변동을 일으킨 사람들을 탓하고 원망하는 보편적인 길을 선택하지 않고, 그들의 맹목적으로 보이는 행위 이면에 숨은 진실을 설명하려는 다소 위험한 길을 선택했다.
한사오궁은 한 사람의 ‘지청’으로서 격렬함의 강도가 파도처럼 높낮이가 있었던 10년간의 ‘정치 올림픽’을 고스란히 경험했다. 그는 「귀거래」, 「웨란」에 등장하는 지청처럼 혁명 사상을 완고하게 밀어붙임으로써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간 가해자일 수도 있으며, 「서편 목초지를 바라보며」처럼 목초지에 황금이 나올 것이라 믿고 죽도록 땅을 파는 개고생을 한 피해자일 수도 있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다.
그의 문학이 호소하는 것은,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기도 하다가 어느 순간에 뒤바뀌어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또는 가난에서 벗어나겠다고 시작한 혁명이 오히려 노동력 좋은 우수사원을 빚더미에 올려놓는 등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등 혁명의 부조리함도 있지만, 그것보단 혁명적 타성에 젖은 사람이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을 어디까지 몰아붙일 수 있는지 그 배경을 제시하는 것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럼으로써 “동정심을 발휘하는 선의와 무정한 냉혹 모두 살아 있는 진실이” 되는 피처럼 붉고 약처럼 쓴 실존적 궤적으로서의 문혁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귀거래(歸去來)』는 순수 문학으로서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혹시라도 이 대단한 책을 앞에 두고 ‘문혁’을 잘 몰라서, 중국 현대사를 잘 몰라서 고민하는 독자가 있다면, 그런 걱정일랑 붙들어 매라고 말해주고 싶다. 어디서 어떤 글을 쓰든, 한사오궁의 매혹적인 문체가 어디 가겠는가?
구름 같은 중생을 향해 그윽한 눈빛을 반짝이며 가슴 깊이 터져 나오는 탄식에 입술을 깨문다. 마치 억울한 옥살이와 먼 귀양살이에서 돌아온 사람처럼. 인생의 모진 풍파를 다 겪은 사람처럼. 그렇다. 우리도 이런 태도로 사색해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혹 깨닫게 될지 모른다. (「임시시행조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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