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광유년 | 옌롄커 | 금서 작가의 비교적 쟁의가 적은 작품?
한 권을 읽어도 제대로 읽고 싶다면
갈증 난 사람이 벌컥벌컥 물을 들이켜듯 단숨에 읽히는 소설이 있고, 까슬한 미식가가 초밥 하나하나를 품평하면서 먹듯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는 소설이 있다. 전자에 속한 책들은 얼마 전에 소개한 천선란의 『천 개의 파랑』 같은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장르소설이 대표적이다. 가공식품이 화학 첨가물과 ‘맛’의 삼위일체인 달고 기름지고 짭짤한 맛으로 소비자의 입맛을 유린하고 전횡하는 것처럼 장르소설은 드라마 같은 감동과 범죄 같은 자극적인 소재와 독해력 향상을 불허하는 단출한 문장으로 독자의 독서력과 취향을 바이스처럼 고정한다.
이런 책들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바람 따라 일렁이는 처녀의 마음처럼 변덕스러운 식탐을 가진 우리가 어떻게 삼시세끼를 흰쌀밥만 먹고 살 수 있겠는가? 이런 소설은 겁나게 빨리 돌아가는 세상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지칠 대로 지친 우리의 심신을 잠시 세상으로부터 격리해 주는 한 줌의 달콤한 휴식이다. 소위 ‘라이트 노벨’이라 자칭하는 ‘로맨스, 판타지, 무협’ 등의 저질 삼류소설만 아니라면 나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런 소설은 값싼 재료와 조미료로 맛을 낸 인스턴트 식품처럼 얕은맛은 있을지언정 좋은 재료로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끓인 곰탕처럼 깊은 맛은 없다.
후자에 속한 소설은 늙은 소가 풀을 되새김질하듯 문장 하나하나를 음미하는 맛이 있다. 또한, 그 문장들이 일사불란하게 문맥을 이루었을 때 자아내는 선명하고 생동감 넘치는 묘사에 취하다 보면 책장을 넘기는 손은 자연스레 세상의 ‘빠름’으로부터 해방되고, 심신은 화두에 직면한 수도승처럼 상념에 잠기게 되니 이야기를 쫓아가는 것 외엔 다른 유흥거리가 없는 장르소설에선 결코 느낄 수 없는 문학적 정취가 있다. 바다처럼 깊고 우주처럼 그윽한 그 정취는 헤아릴 수 없이 깊은 만큼 힐링 효과도 더할 나위 없다. 대중소설이 눈물 한두 방울 찔끔 흘리고 잊히는 소설이라면, 진정한 문학은 벼락에 맞은 듯한 충격을 주고 평생 각인되는 소설이다.
내가 보기엔 『일광유년(日光流年)』을 비롯한 옌롄커(閻連科)의 소설이 바로 그러하다. 물건 하나를 사도 제대로 된 것을 사라는 말이 있다. 책 한 권을 제대로 읽고 싶다면, 옌롄커의 책을 추천한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은 이런 작품도 읽어야 견문을 넓히고 독해 능력도 한층 더 증진할 수 있다.
금서 양산 작가치곤 비교적 쟁의가 적은 작품?
작가가 서문에서 밝혔듯 『일광유년』은 옌롄커의 글쓰기 인생에서 비교적 쟁의가 적은 작품이라고 한다. ‘금서 작가’라는 경외와 풍자와 조롱이 비빔밥처럼 뒤섞인 야릇한 명성으로 유명한 그였으므로 ‘쟁의가 적다’라는 말은 왠지 『일광유년』이 그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하면 ‘싱거운’, 혹은 ‘온건한’ 작품은 아닐지 하는 지레짐작을 낳기도 한다. 사실 그의 글쓰기 중 많은 부분이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중국의 부조리한 현실과 직결 지을 수 있는 경우가 다반사였으므로 이런 지레짐작은 나름 합당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의 글쓰기는 체제 비판이라는 정치적 목적에 있다기보다는 경제 발전 앞에서 철저하게 소외당한 중국 농민의 고단한 삶을 좌시할 수 없는 그의 야릇한 성정에 있다. 옮긴이 김태성의 설명처럼 ‘인간에게 나타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상황과 현상들을 비현실적 재현을 통해 강렬하지도 않고 극단적이지도 않은 현실과 연결하는 것이 소설’인 것처럼 『레닌의 키스(受活)』, 『연월일(年月日)』, 그리고 『일광유년』을 통해 풍자적으로 드러나는 혁명 이후 중국 농민의 삶은 그가 왜 고난 서사의 ‘고수’라는 (이 역시 야릇한) 명성을 얻었는지 통렬하게 역설한다.
다만, 다른 옌롄커의 작품은 농민들이 당하는 수난과 고통이 상당 부분 체제의 부조리함에 결부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체제 비판적 읽기’가 가능했다면, 『일광유년』은 순수하게 자연과 숙명에 대치하는 농민의 삶을 조명했다는 점에서 ‘비교적 쟁의가 적은’ 작품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일례로 『일광유년』에서 일어나는 바러우 산맥 산싱촌 마을 사람들의 수난사는 대기근 시기와도 겹치지만, 이때의 기근은 메뚜기 떼와 가뭄에서 비롯한 순전한 자연재해로 묘사되고 있다).
<산싱촌(三姓村)(출처: 抖音百科)> |
욕망을 불살라 전진하는 풀뿌리 생명력
그렇더라도 산싱촌(三姓村) 마을 사람들 삶이 싱거워지려야 싱거울 수가 없고, 온건해지려야 온건할 수가 없는 것은 그들의 수명이 무를 반 토막 내듯 다른 지역 사람들의 절반밖에 안 된다는 숙명에 있다.
『레닌의 키스』에선 선천적 • 후천적 장애를 중심으로 농민의 수난사가 펼쳐졌다면, 이번엔 (아마도 흙과 수질 오염, 그리고 유전자 병목 현상으로 인한 유전 질환으로 추측되는) 최대 수명 40살이라는 생물학적 요인을 새로운 고난 서사의 소재로 등장시킨다. 이 40살이라는 생존의 한계를 어떻게든 극복하는 것이 산싱촌 마을 사람들의 최대 난관이자 촌장의 임무지만, 문명과 단절된 그들이 예측하기 어렵고 변덕스러운 자연 앞에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미 구둣발에 밟힌 상태에서 발등을 꿈틀대면 꿈틀댈수록 더 아픈 것처럼 그들이 피할 수 없는 운명과 연민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자연 앞에서 발악하면 발악할수록 고난과 수난의 역사는 마른 우물처럼 더욱더 깊어질 따름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장수를 열망하지만, ‘장수’의 정의조차 애매모호한 현실 앞에서 실제로 장수 다운 장수를 누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산싱촌 사람들은, 그리고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산싱촌 사람들은 곡기가 끊기는 춘궁기에 마을을 안개처럼 싸고도는 하얀 밀기울에서 죽음의 냄새를 맡고, 마오쩌둥처럼 완고한 운명 앞에서 달걀로 바위를 치듯 마을의 자원을 몽땅 쏟아부으면서 생존을 도모하지만, 그들의 기대와 바람대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도 없다. 세상은 이미 오래전에 산싱촌 사람들을 버렸는데, 그들만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사글세를 못 내 길거리로 쫓겨난 사람처럼 절망하고 낙담할지언정 굴복하지는 않는다. 기근이 온 천하를 덮쳐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고 자식의 시체를 미끼로 삼아 까마귀를 잡아먹을지언정 삶 그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다. 죽은 자가 산자 같고, 산자가 죽은 자 같은 극단의 극단으로 치닫는 미증유의 시련 앞에서도 꺾일지언정 뿌리째 뽑히지는 않겠다는 지독하리만큼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농민. 그것이 옌롄커가 고난의 서사와 고난의 행군을 통해 예찬하고자 했던 농민들의 억척스러우면서도 속되지 않고 과하지 않으면서도 부족하지 않은 욕망을 불살라 전진하는 풀뿌리 생명력이지 않을까 싶다.
어디선가 들려온 깊은 탄식 소리...
옮긴이 김태성은
하지만, 나의 평범한 몇 마디 문장으로 그의 발분지작적인 글쓰기를 표현한다는 것은 턱없는 일이다. 글쓰기를 잠시 중지된다. 키보드에서 두 손을 내려놓고 삐거덕대는 어깨를 뚝뚝 소리가 나도록 힘차게 돌리며 끙끙 고민해 보지만, 늘 그랬듯 적당한 말은 찾아내지 못했다. 황약사가 설치한 진법에라도 걸려든 것처럼 갑자기 글의 갈피를 잃어버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피로로 뻑뻑해진 두 눈과 운명에도 없는 글쓰기로 고생하게 된 뇌에 휴식을 주고자 침대에 누워 잠시 눈을 붙이는 것이었는데, 이때 어디선가 탄식 소리가 들렸다.
굳게 닫혀있던 내 입을 쩍 벌어지게 만든 이 갑작스러운 탄식 소리는 폐부를 쥐어짜 내기라도 하듯 절절했다. 글을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영혼의 수난을 졸렬한 필설로써 설명하려고 한 나의 경솔함을 질타하는 것 같기도 하고, 기를 쓰고 낱말 조각을 맞추는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처럼 흐뭇해하는 것 같기도 한 이 출처를 알 수 없는 탄식 소리에 시냇물처럼 졸졸 흐르던 잠이 꽈당하고 달아나 버렸다. 왠지 모를 냉기가 골수를 타고 흘러가면서 차가운 기운이 뼈로부터 혈관, 피부를 거쳐 전신으로 번져갔다. 맹렬한 한기 속에서 수도관이 동파되듯 혈관이 후드득후드득 얼어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무명소졸이 감히 그의 글을 논하는 이 조야한 자리에서조차 이런 신묘함을 발휘하니 옌롄커의 글쓰기는 가히 신기에 가깝다.
침대에선 노래 대신 틀어놓은 빗소리를 자장가 삼이 잠이 든 다롱이의 코를 고는 소리가 목에서 괄괄하게 흘러나오는 것이 마치 목구멍에서 끄집어낸 굵고 거친 삼베 같다. 다롱이 체취가 차가운 방 기운 속에서 양털처럼 비린 냄새를 풍기며 덩어리가 되어 떠다니고 있다. 매일 맡는 냄새지만 익숙해지기 어려운 늙은 개의 체취처럼 오늘 글도 참으로 곤란한 글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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