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와 어떤 남자 | 자오메이 | 그렇게 중국인의 삶은 영속된다
독서로 쌓인 피로는 독서로 푼다
긴장감을 조성하고 사고력을 소모시키면서 기분 좋은 정신적 피로를 누적시키는 모리 히로시(森博嗣)의 추리소설을 연달아 읽어온 탓인지 신경을 조금은 안정시킬 필요를 느낀다. 과도한 운동 뒤에 적당한 스트레칭으로 근육의 피로를 풀어주는 것처럼 고된 지적 노동 뒤에도 적당한 스트레칭은 필요하다. 그렇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모리 히로시의 추리소설이 다른 추리소설에 비해 사고력을 추동시키는 요소가 강하더라도 논문(혹은 연애편지?)처럼 엄청난 두뇌 작업을 필요로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던 부위로 운동하고 나면 꽤 뻐근한 것처럼 머리를 쓰는 일도 마찬가지다.
뇌의 무수한 모듈(혹은 기능) 중에는 성격, 감각, 인지, 운동신경, 감정 등 평소에 자주 발동되는 모듈과 논리, 추론, 유추 등 그렇지 않은 모듈들이 있을 것이다. 자주 쓰이지 않는 모듈이 갑작스러운 활동에 동원되고 나서 뻐근해졌다면 적절한 조치로 피로를 풀어줄 필요가 있다. 운동으로 생긴 피로는 스트레칭으로 풀어주듯, 독서로 생긴 피로는 독서로 풀어줘야 제맛이다.
이때 장르는 반드시 구별할 필요가 있다. 같은 장르의 소설만 고집하는 것은 뇌의 같은 모듈만 계속 혹사시키는 중노동과 마찬가지로서 해당 모듈을 지치게 하는 주원인이다. 적당한 운동은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지만, 과도한 운동은 육체의 수명을 단축한다. 마찬가지로 적당한 독서는 치매 예방에도 도움이 될 정도로 뇌 건강에 좋지만, 지나친 독서는 정신을 황폐시킨다. 한 장르만 죽 섭렵하여 생긴 뇌의 피로는 다른 장르로 눈을 돌림으로써 풀어준다는 것이 나의 독서 지침이다. 참고로 한 장르만, 그것도 삼류소설 같은 수준이 낮은 책만 주야장천 읽다 보면 아몰레드 디스플레이에 잔상이 남는 것처럼 독서력이 고정될 수 있으니 (이때엔 삼류소설 수준으로) 주의해야 한다.
아무튼, 추리소설, 문학, 교양 도서(역사, 과학, 사회, 정치, 문화, 철학 등등) 등 여러 장르의 책을 읽는 것은 뇌의 여러 부위를 고루 자극해준다는 점에서 (아마도 이런 이유로 치매 예방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바람직한 지적 운동이니, 너도나도 책을 권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또한, 이런 바람이 내가 되지도 않는 문장들을 씨부렁대며 리뷰를 쓰는 중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잇따른 추리소설 읽기로 말미암아 흥분한 신경을 잠시 차분하게 가라앉힐 겸 찾은 책이 바로 자오메이(赵玫)의 『우와 어떤 남자(巫和某某先生)』이다. 살인을 저지르고 나서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그럴듯한 동기를 가공하듯, 나 역시 책을 읽고 나서야 그 책을 찾은 이유를 둘러대고 있는 것 같아 왠지 모르게 찝찔하다.
<잔디 위에 누워 독서? 간단해 보이지만 막상 실천하기는 어려운> |
내가 살아보지 못한 또 다른 나의 삶
자오메이의 단편 모음집 『우와 어떤 남자』는 문화대혁명, 강압적인 사회주의 운동, 그리고 중국 • 베트남 전쟁 등 서슬 퍼런 역사의 칼부림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중국인들의 단말마 같은 호흡이 녹아있는 책이다.
잔인한 역사의 유린 앞에 체념으로 담담하게 맞선 중국인들의 슬프고 감동적이며 때론 꿈꾸는 듯한 시적인 이야기는 장밋빛처럼 찬란하기보다는 오래된 사진처럼 퇴색하였고, 크림빵처럼 달콤하기보다는 카카오처럼 쌉싸름하다. 슬픔과 상심과 비애와 증오심으로 점철된 인고의 세월을 ‘체념’이라는 스스로 터득한 삶의 지혜로 꿋꿋하게 이겨내 온 중국인들이 인생의 조각조각 하나를 소화해나가는 양식은 우아하고 고상하다고 할 순 없지만, 달관한 자의 우수에 찬 여유와 내일을 향한 본능을 품은 자의 소소한 열정이 깃들어 있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맛은 없지만, 핼러윈데이에 약간 못 미치는 스산함과 오뚝이를 연상케 하는 삶에 대한 쓸쓸한 애착은 여기저기서 치이고 차이느냐 잔뜩 독이 오른 현대인의 거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주는 묘약이다.
『우는 어떤 남자』는 한 무리의 배들이 거친 파도에 휩쓸려 여러 갈래로 흩어지는 것처럼 역사의 파도에 휩쓸린 인민의 삶은 서로 다른 궤적을 그려 나가면서 삶의 변화무쌍함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곱씹는다. 『우는 어떤 남자』는 ‘삶’이라는 한 단어 속에 고밀도로 응축된 무수한 다양성, 무수한 양식, 무수한 의미의 한 단면을 포착한다. 그것은 내가 살아보지 못한 생소한 타인의 삶이지만, 내가 살아볼 수도 있었던 가능성을 일절 배제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내 삶의 일부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성우의 착 가라앉은 굵은 목소리처럼 차분하지만, 중력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지상으로 곤두박질치는 낙엽처럼 쓸쓸함이 물씬 풍겨 나오는 문장은 열심히 탐정 노릇에 골몰하느냐 피로해진 나의 심신을 달래주기에 충분하다. 문장과 그 사이사이에 점점이 스며든 중국인의 영혼을 읽고 있노라면, 우울한 나의 마음도 그들의 희로애락에 따라 요동을 치느냐 약간은 기운을 차리는 듯하다.
<저 할아버지는 그 질풍노도 같은 시절을 어떻게 기억할까? > |
그들의 삶 속에 숨은 줄기세포
중국인은 고달팠던 혁명의 상처가 다 아물기도 전에 ─ 늘 그래왔던 것처럼 ─ 역사의 강요로 과거와 단절당했다. 그 어수선함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들은 경제 개혁 시대로 떠밀린다. 정치적 변화는 요지부동한 상태에서 경제만 개혁한다는, 그 혼란 속에서 그들이 통과의례처럼 겪게 되는 좌절, 절망, 체념, 사랑, 이별, 가난 등을 아무런 의도가 느껴지지 않는 담백한 이야기로 진솔하게 묘사한 작품이 『우와 어떤 남자』이다.
어떤 의도를 느끼기 어려운 소설이니만큼 약간은 밋밋하게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런 만큼 문학적인 순수함은 매우 뛰어나다. 마치 앳된 소녀처럼 청순하고 전통 한옥처럼 정갈한 소설이라고나 할까나? 아무튼, 세속적인 이야기로 세속적인 앙금을 씻겨낼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순문학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다.
인류사에 없었던 통한의 역경과 시련으로 썩어 문드러지다시피 한 중국인의 삶에 딱지가 어떻게 지고 새살이 어떻게 돋아나는지, 역사가 인민에게 하사한 파국적이고 파괴적인 삶이 어떻게 영속적인 삶으로 거듭나는지 등은 중국의 역사와 소설을 읽을 때마다 신기하면서도 대단하게 느껴지는 면이다. 누군가는 이러한 인류의 바퀴벌레 같은 질긴 생존력에 치를 떨기도 하지만,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인내와 어떠한 최악의 상황이라도 현실로 담담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체념이야말로 인류가 존재할 수 있었던, 그리고 앞으로도 존재해나갈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이다.
자오메이의 단편들은 중국인의 슬픔, 좌절, 상처를 담담하게 풀어냄으로써 그 속에 숨은 삶의 줄기세포를 살짝 보여준다. 그렇게 중국인의 삶은 영속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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