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해독자 | 마이자 | 숙명처럼 암호해독자 세계에 이끌린 한 천재의 비극적인 삶
왜냐하면 어떤 암호를 제작하거나 해독한 사람은 그 경험에 정신을 빼앗기는데, 그렇게 되면 그의 정신은 폐기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룽진전은 훗날 블랙코드를 해독하는 임무를 맡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정신은 이미 퍼플코드에 속해 있으므로 블랙코드의 해독은 그가 스스로 정신을 분해하여 재조립하지 않는 한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p356)
내가 기대한 것과는 다른 소설이었지만!
이름만 조금 아는 정도인 마오둔문학상(茅盾文學賞) 수상은 그냥 넘어간다고 쳐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마크 트웨인, 빅토르 위고, 루쉰 등 세계적인 거장들의 고전 명작들로 엄선된 펭귄 클래식(Penguin Classics)에 선정되었다니, 아무래도 대단한 소설을 찾은 것 같다. 이것이 마이자(麦家)의 『암호해독자(解密, Decoded)』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다.
순간적으로 중국 문학의 두 거장이자 개인적으로 지극히 좋아하는 두 작가 옌롄커(閻連科)와 츠쯔젠(遲子建)을 떠오른다. 만약 오늘 만난 이 책이 나의 기대감 그대로 주옥같은 작가들의 주억같은 작품들의 대열에 당당히 올라설 수 있는 그런 소설이라면, 한적한 공원을 산책하다 누군가의 불행을 뒤로한 채 땅바닥으로 추락해 어떤 주인을 만날까 하는 기대감으로 홍조를 띠고 누워있는 신사임당초상화를 주슨 것처럼 횡재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장르소설로서는 형편없는 작품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마크 트웨인, 빅토르 위고, 루쉰 등 문학의 거장들과 견줄 수 있을 정도의 뛰어난 소설도 아니다. 무엇보다 격이 다르다. 문장의 품격, 이야기와 감동의 깊이를 가늠하는 절묘함이 부족하다. 뭔가 속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내가 순진하게도 너무 큰 기대를 품었던 것일까?
아니면, 내 안목이 쓸데없이 높아진 것일까? 아니면 더없이 형편없어진 것일까? 내가 보기엔 마이자의 『암호해독자』는 잘 쓰인 장르소설 정도일 뿐이다( ‘한 • 중 추리문학대회’에 그가 참가한 것만 봐도 그는 순수 문학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작가이지 않을까 싶다). 사실 독자의 저급한 취향을 저격한 삼류소설들이 판을 치는 와중에 이 정도의 소설을 만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대중의 인기를 얻은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인류 문명이 지속하는 한 영원히 기억될 고전 작품들도 수두룩한 펭귄 클래식에 이 소설이 선정된 것은 정말 의혹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중국의 소프트웨어 파워가 ‘펭귄 클래식’의 깊은 유서를 잠재울 정도로 성장한 것일까? 혹은, 영국 코쟁이들이 첩보물을 워낙 좋아해서일까? 아니면,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미치는 것도 마다할 뿐만 아니라 정력과 두뇌를 쥐어짜 암호를 해독하는 천재들의 비극적이고 오싹한 애국심 때문일까? 둔탁하게 돌아가는 나의 머리로서는 순수한 문학성을 지향하기보다는 대중을 겨냥한 상업성이 더 짙게 느껴지는 이 소설이 이렇게도 찬란한 찬사를 받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숙명처럼 비밀세계에 이끌린 한 천재의 비극적인 삶
되먹지도 않게 시작부터 약간의 혹평? 혹은, 약간의 실망감을 토로했지만, 많은 사람이 재미를 인정하고 수많은 상을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나름 잘 쓰인 소설이라는 말이다. 어찌 방구석에 틀어박힌 한낮 리뷰쟁이에 불과한 내가 그들의 고견을 뒤집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하니 하찮은 내 비평은 한 귀로 흘려들으면 그만이니라.
일단 다양한 장르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암호해독자’라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직업을 소재로 사용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혹할 수 있는 소설이다.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직업’이라고 소개는 했지만, 아마 현실에서는 CIA 요원이나 국정원 사람들보다 더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지 않을까 싶다. 솔직한 난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암호해독자’라는 직업의 존재조차 몰랐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몰랐다기보다는 그러한 직업이 있다는 것을 떠올릴 계기가 평범하기 그지없는 내 인생에서는 전혀 없었다고 보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만큼 평범한 사람들과 그러한 사람들의 일상으로 가득한 보통의 사회와는 완전히 격리된 채 비밀스럽게 살아가는 신비로운 사람들이 ‘암호해독자’다.
그들을 만나는 허가를 받아내기도 어렵겠지만, 설령 허가를 받았다 해도 그들을 만나기까지는 자그마치 검문소 3개 이상(그 유명한 브로드무어 정신병원도 단 두 곳의 경비초소만 지나면 된다)을 살 떨리는 기분으로 통과해야 할 만큼 그들은 삼엄한 경비 속에서 비밀스럽고 고독한 삶을 산다. ─ 최소한 내가 아는 바로는 ─ 지금까지 공개된 적이 없는 이와 같은 천재들의 은거를 속옷에 살짝 가려진 모델의 희뿌연 속살처럼 보일 듯 말 듯 묘사하는 감질나는 텍스트에는 작가의 경험(여담이지만, 옌롄커도 한때 군인이었다!)이 녹녹히 눌어붙어 있지만, 한편으론 그가 군대에서 서약한 맹세의 힘이 여전히 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짐작게 한다. 마이자는 그곳에 한번 발을 들여놓은 자는 간 곳, 본 것, 들은 것 모두 기밀에 속하므로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는다는 선서를 자신이 쓴 소설에서도 지키려는 듯, 얄밉게도 『암호해독자(解密)』는 베일에 싸인 암호해독 부대의 비밀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음모와 함정으로 가득한 암호해독 세계에 갇혀 사는 구역질 나도록 고독하고 미쳐버릴 정도로 불우한 한 천재의 일생만을 조명하고 있다.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자아낼 정도로 기괴하고 음침한 비밀 기관의 구조와 작동 방식을 (아마도?) 기밀 유지상 자세히 드러내지는 않기에 나 같은 호기심 많은 독자에겐 암호해독 세계의 그 모든 것이 구호만 요란하고 실체가 없는 공산당 선전 문구처럼 허무하게 느껴진다. 뭐라도 줄 것처럼 실컷 떠들다가 삐친 사람처럼 그냥 휙 돌아서 떠나버리는 것이 약이라도 올리는 것 같다. 고로 비밀스럽고 지능적인 음모로 가득한 암호해독 세계를 파헤치기보다는 암호해독 세계에 숙명처럼 이끌린 룽진전이라는 한 천재의 비극적인 생에 자연스럽게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거기에 도스토옙스키처럼 영혼을 투시하는 깊이가, 루쉰처럼 진실을 밝히려는 용기가, 톨스토이처럼 고뇌에 대한 성찰이, 마크 트웨인 같은 구수한 입담이, 빅토르 위고 같은 정열적인 생명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괜찮은 성실한 이야기꾼이 무진장 애쓰면서 어떻게든 이야기를 꾸려가려는 애처로움과 룽진전 자신의 불행한 인생만큼이나 이 이야기꾼에게 엮인 것이 불행해 보이는 천재의 비극적인 삶이 은은하게 자아내는 처량하고 서글픈 감정이 책장을 넘기는 손이 끝내 멈추지 않도록 해주는 유일무이한 힘으로 작용할 뿐이다. 한마디로 속 빈 강정 같다.
<해독은 스스로 정신을 분해하여 재조립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
소설에서까지 비밀 서약을 지킨 작가의 애국심
내 착각일지 모르겠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다른 사람이 쓴 것 같은, 혹은 뭔가에 쫓기어 급하게 휘갈겨 쓴 것처럼 이야기를 서두르는 것이 성의 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대중적인 소설은 너무 심오해서는 안 된다는 것에 공감하면서도, ─ 과대광고라고 비난할 정도는 아니지만 ─ 꽤 요란한 책 선전 문구를 흩어보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옌롄커와 츠쯔젠 때문에 문학적으로 너무 많은 기대감을 품은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이다. 덕분에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잡치는 기분으로 읽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자업자득이 아니면 무엇이랴.
내 생각엔 이 책이 에드워드 스노든(Edward Snowden, 미국 국가안보국의 기밀자료를 폭로한 내부고발자)가 했던 것처럼 폭발적이고 충격적인 폭로의 성격이 짙었더라면 더 흥미진진했을 것 같다. 하지만, 아쉽게도 작가는 애국자였고(혹은 보신?), 소설에서도 감옥 같은 곳에 스스로 갇혀 ─ 발광이든, 과로든 ─ 언젠간 무용지물이 될 뇌라는 것을 각오한 듯 미련 없이 모든 뇌세포를 불사르는 ‘암호해독자’들을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애국자이자 알려지지 않은 영웅이라 칭송한다. 만약 이 소설이 스노든이 그랬던 것처럼 폭로적인 성격이었다면, 애초에 출판되지도 않았을뿐더러 작가 마이자의 남은 삶도 분명 편안치는 않았을 것이다. 재수 없으면 매혈로 에이즈가 퍼진 사실을 폭로한 의사 가오 야오지에처럼 가택 연금에 처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작가의 사리 분별은 영명한 선택이다. 그는 자멸과 실속 사이에서 나름 현실적인 선택을 한 것이고, 또한 군대에 있을 때 비밀을 준수해야 한다 서약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니, 이 자리에서 암호해독 세계의 비밀을 폭로하지 않았다고 그를 막무가내로 나무라는 것은 역지사지에도 어긋나는 무정한 일이다.
작가가 암호해독 세계의 비밀을 폭로하지 않았다고 집요하게 푸념하는 나 자신이, 소설 『암호해독자』가 독자의 흥미와 관심을 충분히 유발했다는 증거이고, 이것은 앞에서도 말했듯 『암호해독자』는 꽤 괜찮은 장르소설임을 반증한다. 다만, 호기심만 풍선처럼 부풀려 놓고, 그것을 시원하게 해결할 뭔가를 내놓지 않은 것이 조금은 실망스러울 뿐이다.
얼마나 집착하고 몰두해야 미칠 수 있는 것일까?
내가 요즘 신경이 예민해져서인지, 아니면 기분이 좀 우울해서인지, 변변치도 않은 이해력으로 되먹지도 않게 소설을 너무 까다롭게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다. 곰곰이 생각하면 『암호해독자』가 대중적이고 상업성이 짙다고 해서 혹평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소설의 묘미이자 정수는 비밀 기관의 실체를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암호해독 세계가 돌아가는 기본 원리인, 다시 말해 천재가 다른 천재의 마음을 헤아리는 매우 높은 수준의 치열한 두뇌 승부가 어떻게 천재를 파멸로 몰아붙이는가 하는 암호해독 세계만의 비정함을 (내가 아는 한에서는 아마도) 최초로 공개했다는 점이다.
어쩌면 천재로서 타고난 비범한 재능을 국가의 안위를 위해 헌신할 수 있다는 것은, 비록 그 일이 가족에게도 밝히지 못할 매우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일이라 할지라도 영광스럽고 명예스러운 일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가물에 콩 나듯 태어나는 천재들이 마치 일용노동자처럼 한두 번 쓰고 버려진다는 사실은 나 같은 범인은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특히 한 사람이 암호 제작이나 해독을 한 번 이상은 할 수 없다는 철의 계율과 그 이유, 그리고 천재들이 암호 제작이나 해독 과정에서 심심치 않게 (주인공 룽진전처럼) 미쳐갔다는 사실은 그들이 받는 엄청난 지적 혹사와 정신적 스트레스를 간접적으로나마 폭로하고 있어 소름 끼친다. 우리는 한 가지 일에 얼마나 집착하고 몰두해야 미칠 수 있는지를 도무지 상상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실로 그러한 지난한 과정에서 이름도 남기지 못한 수많은 천재가 미쳐갔다는 점에서 천재와 미치광이는 정말로 한 끗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모든 것을 묵묵히 견디면서 임무를 수행한다. 보통의 영웅처럼 TV나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자랑삼아 떠들어댈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그 흔한 SNS에 남길 수 있는 일도 아닌데도 말이다.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애국심’과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다는 ‘만족감’ 밖에는 생각나는 것이 없다.
한쪽은 두뇌를 방치, 한쪽은 두뇌를 혹사?
오직 천재들만이 도전해볼 수 있는 ‘암호해독’ 세계의 비정함이 평소에 그렇게까지 머리 쓸 일이 없는 우리를 압도하고도 남는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이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우리의 머리는 그냥 폼으로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무한한 능력을 갖췄다고 자부하는 자신을 그저 머리나 기르고 모자나 올려놓는 장식품으로 달고 사는 한 사람에게 무한히 질렸는지, 오늘따라 유난히 나의 머리가 무겁고 거추장스럽고 잘 돌아가지도 않는다. 나의 머리가 그래서 때아닌 독립운동을 하려는 것인가? 그렇다고 그냥 떼어내 버릴 수도 없으니 참으로 곤란하다.
아무튼, 그들의 비정함은 우리 사회처럼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혹은 계급의 차이에서는 오는 비정함이 아니라, 한 번 암호해독에 성공한 사람은 그 경험에 정신을 빼앗겨 정신이 폐기된 것으로 취급할 정도로 기하급수적으로 두뇌를 혹사시키는 ‘암호해독’이라는 일에서 오는 비정함이다. 즉,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든, 자신의 지적 만족을 위해서든, 혹은 ─ 평범한 지능을 가진 우리로서는 백번을 죽었다가 깨도 이해할 수 없는 ─ 천재들 간의 불타는 경쟁심에서든, 암호를 해독한다는 일은 무림인이 스스로 무공을 폐기하여 불구로 만들듯 자신의 정신을 스스로 폐기시켜 미치광이 직전의 상태로 몰아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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