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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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 소모전, 그것은 필연이었을까?

제1차 세계대전 | 피터 심킨스 외 | 소모전, 그것은 필연이었을까?

모든 참전국에서 생명을 구하는 의학 기술이 크게 발달했지만, 사람을 죽이는 전쟁 기술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발전했다. (『제1차 세계대전』, 635쪽)

전쟁은 전쟁 그 자체가 의미하고 발산하는 폭력과 광기, 그리고 첨단 기술의 실험장이자 그 기술들을 개발하고 현실화하는 원동력이라는 것 때문에 잔인하게도 역사적 제삼자 입장에선 흥미진진할 수밖에 없다. 제1차 세계대전도 이러한 사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뿐더러 여기에 인류 역사상 최초의 세계대전, 최초의 총력전, 전투 사상자 수가 병사자 수를 넘어선 최초의 전쟁 등 명예롭지 않은 몇몇 타이틀도 걸머쥐었다.

1차 대전이 각국의 정치적 • 외교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되었을지는 몰라도, 전투가 치열해지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사람들은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 복받쳐 오르는 분노와 증오의 지배를 받는 눈뜬장님이 되고 말았으며, 전쟁은 전쟁 그 자체로써 블랙홀 같은 거대한 흡입력을 지닌 괴물이 되어버렸다. 이로써 전쟁은 수단이 아닌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고 모든 참가국의 끓어오르는 피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증발시켜 버렸다. 우주의 물리 법칙이 빛을 포함한 우주의 그 어떤 존재도 빠져나갈 수 없는 블랙홀을 만들었듯이 인류의 이성과 광기가 뒤범벅된 역사는 전쟁의 소용돌이를 만들었던 것이다.

왜 1차 세계대전은 참가국들의 정신적 • 물질적 모든 에너지를 소멸시킨 소모전, 장기전, 물량전으로 치달았던 것일까.

1차 세계대전을 크게 서부 전선, 동부 전선, 지중해 전선 등으로 구분하고 그중에서 1차 세계대전 승패의 향방이 결정된 서부 전선에 가장 큰 지면을 할애한 『제1차 세계대전: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First World War: the War to End All Wars by Peter Jukes, Geoffrey Hickey, Michael Simkins)』에서 조명한 연합군과 동맹군의 전투 과정을 지켜보면서, 1차 세계대전이 소모전으로 장기화한 이유는 필연적이라기보다는 각 전선에서 임무를 수행한 장군이나 장교들의 전술적 미성숙과 총력전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한 자만, 전략적 목표와 전술적 목표 사이의 혼란과 국가적 전쟁 수행 능력의 준비 부족 등이 가져온 인재라는 생각이 든다.

최초로 전차, 화염방사기, 독가스, 비행기 등의 현대적 무기가 등장함에도 운송 수단에는 전근대적인 소나 말, 개 등의 가축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던 것처럼 각 전선을 지휘한 장군이나 장교들의 전술이나 전쟁 개념에도 여전히 전근대적인 요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처럼 근대전에서 현대전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서 근대전에나 적합한 구식 사고방식은 새로운 무기에 걸맞은 전술의 부재와 전술적 유연성에 악영향을 미쳤으며, 전투에서는 보병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바람에 많은 사상자 수를 가져왔다. 더군다나 국가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한 최초의 총력전이라는 국가적 부담이 탄약이나 식량, 징병, 수송 등의 전쟁 지원과 보급 측면에서 혼란과 미흡을 불러왔기 때문에 참가국들은 전쟁에 지리멸렬하게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전술의 미숙과 보급 부족은 영국군이 공세 초반의 공격기세를 중반까지 유지하지 못해 결정타를 날릴 기회를 빈번히 놓치는 고질적인 문제를 가져오기도 했으며, 러시아군은 무뇌아적인 작전 진행 때문에 쓸데없이 많은 사상자와 포로를 만들어냈다. 독일군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맞닥뜨린 매력적인 전술적 기회를 잡느라 원래의 전략적 목표를 놓쳐버리는 소탐대실(小貪大失)의 우를 범함으로써 여러 차례 결정적인 기회를 놓쳤다.

World War I

마지막으로 독일군이 동맹군이라서 그런 것일까? 전쟁의 참화를 좀 더 현실적이고 생생하게 전달하고자 참전 군인들과 참전국 시민이 남긴 기록을 살펴보는 것은 연합군 측에 한해서이다. 동맹군이든 연합군이든 전쟁에 참여한 모든 국가의 국민과 군인이 겪은 고난과 고통에는 당연히 차이가 있을 수 없지만, 아쉽게도 이 책은 그런 세밀함에는 연합군 측으로 기울어 있다. 그렇다고 눈에 거슬리는 편견이나 치우침이 이 책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동맹군 병사들이 남긴 기록과 동맹국 시민이 남긴 기록도 함께 살펴봤으면 비교 역사라는 측면에서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1차 세계대전 발발의 기원과 결과에 대한 개괄적인 서술과 세 명의 저자가 각각 세 전선을 기술한 피터 심킨스의 『제1차 세계대전』은 1차 세계대전 입문서로는 더할 나위 없이 괜찮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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