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 | 로버트 O. 팩스턴 | 자유를 제한하는 법은 또 다른 파시즘의 시작이다?
파시즘은 아직도 존재할 수 있는가? 제1단계의 파시즘은 대부분의 민주 국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좀 더 중대한 문제는 이것이다. 1단계 수준의 파시즘이 또다시 2단계에 이르러 뿌리를 내리고 권력을 장악할 수 있을까? (『파시즘』, 458쪽)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파시즘 해석이나 정의는 없다!
로버트 O. 팩스턴(Robert O. Paxton)의 『파시즘(The Anatomy of Fascism)』은 모든 사람을 남김없이 만족시킬 수 있는 파시즘 해석이나 정의는 없다고 본다. 그만큼 파시즘은 복잡하다. 그 복잡성은 죽음을 불사르면서까지 지켜야 할 확고한 철학 체계가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뿌리가 없기에 특정한 이념이나 사상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전술적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말과 행동을 바꿀 수 있다. 여기에 파시즘 특유의 운동성이 더해지면 ‘운동하면서 변화하는’, 그야말로 카멜레온처럼 변화무쌍한 이념 같지 않은 이념이 된다 .
그렇다면 『파시즘(The Anatomy of Fascism)』에서 정의하는 파시즘은 무엇인가. 파시즘은 ‘공동체의 쇠퇴와 굴욕, 희생에 대한 강박적인 두려움과 이를 상쇄하는 일체감, 에너지, 순수성의 숭배를 두드러진 특징으로 하는 정치적 행동의 한 형태이자, 그 안에서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은 결연한 민족주의 과격파 정당이 전통적 엘리트층과 불편하지만 효과적인 협력 관계를 맺고 민주주의적 자유를 포기하며 윤리적 • 법적인 제약 없이 폭력을 행사하여 내부 정화와 외부적 팽창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정치적 행동의 한 형태’이다.
파시즘의 일대기를 (1) 파시즘의 탄생, (2) 정치 제도 안에 뿌리내리기, (3) 권력 장악, (4) 권력 행사, (5) 파시즘 정권이 급진화나 정상화 중 한 가지를 선택하게 되는 장기 지속 기간 등 총 다섯 단계로 나누어 운동하는 파시즘의 역동성과 변화의 순간마다 사진 찍듯 선명하게 포착한 이 책은 ‘운동하면서 변화하는’, 역동성이 강한 살아있는 파시즘을 이해하려면 파시스트들의 그럴싸한 주장보다는 그들의 행동 자체로부터 추론해 내야 한다는 저자의 신념을 토대로 파시즘을 재조명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그럼으로써 파시즘이 지닌 고유한 매력과 그것의 복잡한 역사적 경로, 그리고 파시즘이 지닌 극단의 공포를 더욱 명료하게 설명하고, 이를 통해 파시즘이란 개념을 의미의 남용으로부터 구출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 책은 머리글의 제목 ‘파시즘 논쟁에 종지부를 찍는 결정판’이라는 거창한 수사에 전혀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파시즘에 대한 명쾌한 분석과 통찰을 담은 책이다. 고로 현명한 독자라면,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쯤이면 스스로 파시즘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내릴 수 있을 정도의 개념은 잡을 것이다. 비록 나는 그 정도까지의 진척은 이루지 못했지만, 단계적으로 철저히 해부 된 파시즘 조각들에서 ‘운동성’, ‘무체계적 이념성’, 그리고 ‘선택성’이라는 키워드를 집어낼 수 있었다
<우리는 '질서'와 '통제'를 위해 기꺼이 '자유'를 희생하곤 한다> |
‘운동성’, ‘무체계적 이념성’, 그리고 ‘선택성’
19~20세기를 대표하는 자유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사상은 로크, 마르크스, 엥겔스 등의 저명한 철학자들에 의해 집대성된 학문으로써 일관되고 논리 정연한 철학 체계를 구축했다. 그러나 20세기 인류를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트린 파시즘은 정교한 철학 체계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았음에도 1 • 2차 세계대전 사이 즉, 당시 세계 질서의 3대 이념인 자유주의, 보수주의, 공산주의가 서로 세력을 다투고 실패를 거듭하면서 질서가 무너지던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서는 데 성공했다.
세계 대전이나 대공황 같은 정치 • 경제 • 사회적 긴장과 위기가 파시즘이 태동할 수 있는 태생적 조건이라면, 대중 운동은 그 조건 속에서 파시즘이 싹을 틔울 수 있게 하는 거름이다. 그 어떤 정권도 대중 운동 없이는 진정한 파시즘 정권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대중 운동은 파시즘에서 필수 불가결하다. 이처럼 파시즘의 힘은 대중 운동에 있다. 여기에 파시즘 특유의 ‘무체계적 이념성’은 서로 다른 계급을 하나의 가치관 아래 묶어놓음으로써 대중 운동을 강력한 추진제로 거듭나게 하는 기폭제가 된다 .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파시즘이 운동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게, 즉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의 ‘선택’이 있었다는 것이다 . 독일과 이탈리아를 제외하고 스페인, 포르투갈 등에서의 유사 파시즘이 실패했던 가장 큰 원인은 강력한 보수 혹은 기득권 세력이 파시즘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들은 현재의 위기가 극단적인 파시즘을 ‘선택’할 만큼 절체절명의 위기로는 느끼지 않았을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파시즘 성공에 필수적인 최후의 본질적 전제조건은 파시스트 도전자들과 권력을 나눌 준비가 된 의사 결정자들이다. 그 의사 결정자들은 독일의 나치즘 체제에서 볼 수 있듯, 민주적인 선거로 선출된 의원도 예외는 아니다.
21세기, 파시즘의 대두 가능한 일인가?
‘선택’의 문제는 20세기 파시즘의 위기와 파국을 경험한 인류가 다시 파시즘에 빠져들 수 있느냐는 현실적 우려에서도 매우 중요한 키워드다. 팩스턴은 (약간 섬뜩하게도 들릴지도 모르지만) 제1단계의 파시즘은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민주 국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더 중대한 문제는 1단계 수준의 파시즘이 제도적으로 정착하고 권력을 장악할 가능성이다 . 테러와 난민 문제에 시달리는 자유주의 국가의 시민이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너무나도 쉽게 자신들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에 찬성하는 것을 우리는 익히 보아왔다. 초기 파시즘이 권력 장악을 향해 더 나아갈 것인지는 국가적 • 사회적 위기의 심각성 정도와도 부분적으로 상관이 있지만, 무엇보다 사람들, 특히 경제 • 사회 • 정치적 권력을 쥔 사람들의 ‘선택’에 달렸다는 팩스턴의 충고를 되새겨보면, ‘자유주의 제도’의 포기는 심각한 위험 신호이며 스스로 화를 불러오는 일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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