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의 비극 | 프랑크 디쾨터 | 기만, 조작, 개조, 그리고 할당제로 완성된 대공포 시대의 서막을 열다
Original Title: The Tragedy of Liberation: A History of the Chinese Revolution 1945-1957 by Frank Dikötter
해방 이래로 무수히 많은 시간의 학습 모임을 통해 당의 방침을 앵무새처럼 흉내 내고, 올바른 대답을 내놓고, 동조하는 척하는 방법을 배운 터였다. 일반인들은 어쩌면 위대한 영웅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상당수가 훌륭한 배우였다. (『해방의 비극: 중국 혁명의 역사 1945~1957』, p401)
마오쩌둥(毛澤東, MaoZedong) 밑에서는 경제전문가로, 덩샤오핑과 함께할 때는 신중하고 점진적인 개혁가였던 천윈(陈云, Chen Yun)은 마오쩌둥이 1956년에 죽었더라면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칭송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새로운 황제들 The new emperors(해리슨 E. 솔즈베리 Harrison E. Salisbury』, 박월라 • 박병덕 옮김, 다섯수레, p331). 이 말에는 마오쩌둥이 1976년에 죽음으로써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대중선동 실험이었던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을 무려 10년이나 지속시켰다는 엄연한 사실이 중국 인민과 중국 공산당, 그리고 마오쩌둥에게 불행이었다는 뜻이 은연중에 깃들어 있다. 그렇다면 해방 후부터 (문화대혁명의 전초전 격이었지만 사상자는 압도적으로 많았던) ‘대약진’이 시작되기 전인 1956년까지 중국의 인민은 과연 행복했을까? 제국주의 침략과 내전에 휘말렸던 해방 전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았을까?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역사학자 프랑크 디쾨터(Frank Dikötter)의 『해방의 비극: 중국 혁명의 역사 1945~1957(The Tragedy of Liberation: A History of the Chinese Revolution 1945-1957)』은 지금까지는 반론을 제기할 사람이 많지 않아 보였던 천윈의 의견이 사실은 공산당의 ‘기만’과 ‘조작’, ‘선전’, 그리고 여기에 하나마 더 보탠다면 가혹한 ‘할당제’로 이루어진 대기 중의 뜬구름 같은 망상, 혹은 기만으로 가득 찬 또 하나의 ‘선전’이었음을 고발한다.
<1954년 주더, 마오쩌둥, 천윈, 저우언라이(중난하이) Unknown author / Public domain> |
최근 몇 년 사이에 공개된 중국 공산당 기록 보관소의 비밀경찰이나 당원들의 비밀 보고서나 비밀 서류, 사상 개조 운동에서 발췌된 자백서, 농촌의 반란을 둘러싼 사실 조사, 대공포 시대의 희생자들에 관한 세부적인 통계 자료, 공장과 소규모 작업장의 근로 환경에 대한 조사, 일반인들이 제출한 항의서 등 이전까지 기밀로 취급되던 수백 건의 문서들과 혁명을 직접 겪은 목격자의 증언으로 완성된 『해방의 비극』은 사탕발림이나 다름없었던 공산당 선전 속에 묻힌 통탄할만한 인민의 역사를 폭로한 글이다. 해방 후 공산당 집권 초기 10년은 최소 500만 명 이상의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고,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 20세기 최악의 폭정들 가운데 하나였다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모습은 앞서 말한 천윈의 의견과는 달라도 완전히 다르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공산당의 기만전술, 거짓 선전, 사상 개조, 선동과 천 명당 한 명 정도는 희생되어야 한다는 잔인한 할당제와 함께 이름만 바뀌면서 반복되는 정풍 운동은 해방 후 자유와 평등, 평화, 정의 등 보편적인 가치를 기대했던 인민에게 이름하여 ‘대공포 시대’를, 인류 역사상 어느 민족도 누려보지 못한 가혹한 시련을 선사했다. 이로 말미암아 평화와 화애를 중시하는 전통적 사회 질서는 무너졌고, 그 자리에는 감시와 의심, 밀고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팽배하는 등의 모든 인간적 관계가 철저하게 붕괴된, 그리고 생산물 대부분을 정부에게 빼앗기고 굶주려야 하는 ‘신농노제’ 사회가 들어섰다.
혹했던 선동당했던 실속 없는 토지 개혁에 발을 들여놓은 인민은 본의 아니게 ‘피의 숙청’에 동참하게 됨으로써 공산당과 피의 계약을 맺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대공포 시대’에는 침묵할 자유조차 없었다. 자기비판을 하든, 타인을 비판하든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만 했다. 선인들의 가르침 중 하나인 중도는 허용하지 않는 흑백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침묵조차 반동이었고 반혁명이었다. 말 한마디, 표정 하나, 몸짓 하나가 누군가의 눈에 거슬리면 세심하게 구축된 정신적 아우슈비츠라고 불리는 노동 수용소로 끌려가 사상 개조를 당해야 했다. 변하기를 거부한 사람들은 자살을 선택했고, 사상 개조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원래의 자신이길 포기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고 고통을 겪고 공포에 떨고 있을 때 공산당 선전 속의 중국은 언제나 천국이었다. 이것이 과연 위대한 업적인지 천윈에게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해방이 어떻게 인민을 짓밟고 어떻게 그들의 삶을 파탄의 지경으로까지 몰고 갔는지 비탄 어린 목소리로 설명하는 『해방의 비극: 중국 혁명의 역사 1945~1957』을 통해 그 ‘천국’의 실제 모습이 적나라하게 폭로된다. 지금까지 본 중국 현대사와 관련된 그 어떤 책도 이 책만큼 인민의 삶을 세심하게 살펴본 적이 없었고, 가까이 다가간 적도 없었다. 읽다 보면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의 과대망상적인 냉혹한 이상주의에서 비롯된 인재였다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떨쳐버리기가 어렵다. 그래서 더더욱 천윈에 의견에 동조하기 어렵다. 혁명이 폭력을 동반하고 피를 흘려야 한다는 역사적 당위성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그 희생이 더 나은 세상에 이바지했을 때 비로소 혁명의 정당성을 말할 수 있다고 한다면, 1949년의 해방과 혁명의 정당성이 재고될 날도 언젠가는 오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그들의 희생은 인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공산당을 위한, 그리고 선전과 현실 속 괴리 사이의 엄청난 틈새를 감시와 의심의 장막으로 가린 채 강행되는 무지막지한 연극의 소모품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렇다면 프랑크 디쾨터의 지적대로 그 엄청난 ‘대공포 시대’에도 살아남은 대다수 인민이 훌륭한 배우였다는 의견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다. 혹은 중국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은 목숨을 건 연기력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하루하루 삶을 연명했던 혁명 세대들의 피를 물려받았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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