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 | 조반니노 과레스키 | 예수님조차 두 손 두 발 들게 한 우리들의 괴짜 신부님!
주교가 웃으며 말했다. “불쌍한 노인을 즐겁게 해주느라 애썼네. 고맙네.” 돈 까밀로가 집으로 돌아와 예수님에게 모든 사실을 말씀드렸다. 예수님은 고개를 흔들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다들 정신이나 갔구나!”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 p312)
문학이 시대와 국경, 문화, 언어를 초월하여 읽힐 수 있는 것은 비록 문명 발전과 산업화 정도 여하에 따라 살아가는 겉모양은 다를지라도 사람들이 서로 좌충우돌 부대끼며 갈등과 대립이라는 빈번한 마찰을 빚어낸다는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어디를 가나 비슷비슷하다는 보편적인 인간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히 지칠 줄 모르는 시기와 질투, 한도 끝도 없이 쌓이는 원한, 끝없이 폭발하는 분노와 이 모든 파괴적인 감정을 지배하는 이기심은 인류사의 수많은 전쟁과 혼란, 무질서를 지속적으로 생산한 죄의 씨앗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인류는 자멸하지 않았다. 크고 작은 돌부리에 걸려 이리 튀고 저리 튀는가 하면 때론 천 길 낭떠러지로 몰리는 세기말적 위기를 몇 번 겪기도 하면서 험난한 여정을 걸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는 근근이 굴러왔다. 무엇 때문일까?
아마 너무 진부한 대답일지 모르겠지만, 허구한 날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와중에도 단단히 굳은 시멘트도 뚫고 나오는 풀 같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솟아 나오는 ‘정(情)’ 때문이지 않을까. 그중에서도 뭔가 그럴싸한 이유나 동기가 필요한 고운 정보다는 조건 없이 생기면서도 고운 정보다 더 질기고 너그럽다는 미운 정을 특별히 강조한다면, 그렇다면 뽀 강과 아페닌 산맥 사이에 펼쳐진 평야, 그 한 자락에 자리 잡고 흐르는 뽀 강을 배경으로 옹기종기 들어선 작은 마을의 유명한 원수지간인 공산주의자 읍장 뻬뽀네(Peppone)와 신부 돈 까밀로(Don Camillo) 사이의 위험천만하면서도 포복절도케 하는, 그러면서도 때론 눈물샘을 자극하는 감동 어린 이야기가 시대를 훌쩍 뛰어넘고 대담하게 국경을 넘으면서까지도 전해져 내려올 수 있었던 것도 어찌 보면 두 사람 사이의 ‘미운 정’이 두 사람 몸에 난 털만큼이나 잔뜩 박혔기 때문이지 않을까. 만약 그랬지 않았더라면 이미 그 작은 마을은 두 사람에 의해 초토화되었을 테니까. 또한, 미운 정이 두 사람을 고무줄처럼 밀고 당기는 와중에 어느새 몽클몽클 고운 정도 피어나니 두 사람의 이야기가 전 세계 수많은 독자를 웃고 울게 한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뻬뽀네와 돈 까밀로처럼 서로의 얼굴 앞에서는 몇 년 굶은 짐승처럼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하며 으르렁대다가도 돌아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로의 안위를 걱정하고 챙겨주듯, 시기와 질투, 분노와 원한의 파멸적인 감정의 기복 사이에서도 악착같은 미운 정을 피워낼 수 있는, 얼핏 보면 별로 대단한 것 같지도 않은 인류의 적응력이 분노와 탐욕을 이기지 못해 하루하루 구원과 죄악 사이를 넘나드는 우리의 무지막지한 삶이 무지막지하게 분쇄되지 않도록 응집력을 발휘해주는 조그마한 죔쇠로 작용하는지도 모르겠다.
뻬뽀네와 돈 까밀로의 밀접한 사이를 주제넘게 언급하며 ‘미운 정’에 대한 찬사 아닌 찬사를 늘어놓으면서 막상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Mondo Piccolo: Don Camillo)』(조반니노 과레스키 Giovannino Guareschi)의 주인공 돈 까밀로에 대해 한마디로 없이 넘어갔다가 신부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욕바가지만 얻어먹고 끝나면 천운이고, 아슬아슬하게 머리 옆으로 의자가 스쳐 날아가는 아찔한 상황으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고, 그날 꿈자리가 뒤숭숭했다면 기관총이나 박격포 세례까지는 각오해야 할 것이다. 덤으로 영적 사명을 수행하는 신부님의 특권으로 지옥행 표도 떼 놓은 당상이다. 나는 그만한 각오를 다질 배짱도 없거니와 지옥은 더더욱 싫기에 지금부터는 좋든 싫든 돈 까밀로 신부에 대해 몇 자 적어야겠다.
꽤 실력 있는 읍장에 골수 공산주의자인 뻬뽀네가 인민을 위해 일한다면 돈 까밀로는 하느님을 위해 일하는 진짜 신부다. 둘 다 솥뚜껑만큼 큰 손과 딱 벌어진 어깨를 가진 장사에다 입도 걸걸하다 보니 툭 하면 터지는 말싸움이 주먹질로까지 번지는 일이 비일비재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약과다. 성질이 불같은 신부 돈 까밀로는 긴 의자를 마구 휘둘러 대다가 교구 성당에서 잠시 쫓겨나는가 하면, 여세가 불리하면 떡 하니 기관총까지 대동하고 나선다. 어찌 되었든 상대가 75밀리 박격포를 쏘아대면 바로 81밀리 박격포로 대응하는,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지거나 당하고는 못사는 신부가 바로 돈 까밀로이다 보니, 예수님조차도 이런 구제 불능 같은 신부를 타이르고 훈계하는 일은 만만치 않다. 벅차다.
그렇다고 돈 까밀로가 예수님 앞에서라도 고분고분한가? 결국엔 들킬 것이 뻔하면서도 예수님 앞에서조차 뻔뻔하게 이리 속이려 들고 저리 거짓말하며 능청 떨고 구구절절 변명하는 돈 까밀로는 정말 못 말리는 괴짜 신부다. 타고난 사람의 심성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면 바로 돈 까밀로 신부를 두고 한 말이리라. 그럼에도, 그를 미워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사고를 치는 이유가 사적인 탐욕이 아니라 신실한 신앙심과 인민을 위한 마음, 그리고 봐줄 만한 약간의 인간적 나약함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그가 청소년 회관이나 보육원을 새로 짓거나 낡은 종을 보수할 기금을 마련하고자 공갈 • 협박으로도 모자라 약삭빠른 재주(?)를 조금 부려도 제단 위의 근엄한 예수님은 두 손 두 발 들 수밖에 없다. 하물며 우리라고 별수 있나. 그저 포복절도하며 뒹굴다가 때늦지 않게 정신 차리 배꼽을 온전히 지킬 수 있으면 그만이다. 또한, 그는 진정 인민을 위하는 일이라면 철천지원수인 뻬뽀네와도 손을 잡는 분별력 있는 인간적 결점을 보여주며, 어떠한 잘못이든 일단 무조건 오리발 내밀고 보는 현대인의 질 나쁜 처세술과는 달리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속죄함에도 전혀 인색하지 않다. 겉으로는 우람한 풍채에 기관총, 박격포로 무장한 과격한 신부처럼 보이지만, 그 속은 선량한 신앙심과 따스한 정으로 옹골진 인자한 신부가 바로 돈 까밀로인 것이다.
<어디를 가야 돈 까밀로 신부님을 만날 수 있을까> |
사정이 이러하니 신도 종교도 믿지 않는 나이지만, 돈 까밀로 같은 신부가 있는 성당이라면 종지기가 돼서라도 가까이서 살고 싶다.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 돈 까밀로처럼 차지고 즐겁게 호탕하게, 그러면서도 경건하게 참회하며 살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좋지 아니한가. 아무튼,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은 하루하루 살면서 쌓일 수밖에 없는 마음속의 이런 저러한 개운치 않은 앙금을 개운하게 씻겨주는 시원하고 상큼한 청량음료 같은 소설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간결하게 표현하자면 ‘사이다’ 같은 소설이다. 일은 잘 안 풀리고 몸은 지치고 마음은 울적한데, 그런데도 어딘가로 훌쩍 떠날 형편이 못 된다면, 여기 말없이 성호를 그으며 떡대처럼 쫙 벌어진 어깨로 양팔을 벌리고 서 있는 돈 까밀로 신부의 품으로 뛰어들어라. 그럴듯한 진리는 못 찾더라도 마음의 작은 평화 정도는 충분히 구하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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