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해가 지다 | 옌롄커 | 미학적 가치가 자아내는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존엄성
원제: 夏日落 by 閻連科
자오린이 말했다. “빌어먹을, 지는 해를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풀어지는 것 같군그래.” (『여름 해가 지다(夏日落)』, p261)
금서 전문 작가라는 불명예인지 명예인지 알 수 없는 알쏭달쏭한 호칭을 달고 다니는 중국 작가 옌롄커(閻連科)의 『여름 해가 지다(夏日落)』는 군대 사회의 일상화된 부정 • 부패, 그리고 병영에서 일어난 총기 도난 사건과 한 병사의 자살 사건으로 빚어지는 출세 지향적인 중대장과 지도원 간의 암묵적 갈등과 긴장을 통해 중국 사회에 만연한 가식과 위선을 폭로한 비교적 짧은 분량의 소설이다. 한편으로는 소설 속에서 자살한 병사의 이름 샤를뤄(夏日落: 여름 해가 지다)의 뜻처럼 황하고도(黃河故道)에서 지는 석양의 아름다움을 수준 높은 미학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감성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샤를뤄가 무엇 때문에 자살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지만, 그가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 쓰여있듯 샤를뤄는 석양이 하늘을 가르는 미세한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고요해서 누구라도 그곳에 도착하기만 하면 마음이 백지장처럼 깨끗해질 것 같은, 그곳의 지는 해(日落)의 장엄한 아름다움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은 듯하다. 그런데도 그는 자살을 선택했다. 여름 해에 의해 뜨겁게 달구어진 대지는 해가 지면 서늘한 기운에 가늘게 몸서리를 치고, 사람의 뜨뜻한 피도 결국엔 우물물처럼 식는다. 여름 해가 질 때 태어나 여름 해가 질 때 세상을 떠난 샤를뤄를 통해 저자 옌롄커는 쳇바퀴처럼 돌고 도는 인생의 무상함을 말하고 싶었을까. 생존의 의미를 잃어버린 한 인간에 대해 역설하고 싶었던 것일까.
<샤를뤄가 극찬한 황하의 절경은 이런 모습이었을지도...> |
자살 사건으로 출세에 대한 희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짐으로써 삶의 목적을 유실한 중대장과 지도원은 샤를뤄가 극찬한 여름 해자 지는 장관을 감상하며 자살 사건으로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던 지난날의 응어리가 자신들도 모르게 풀어짐을 느낀다. ‘우리가 살면서 뭘 더 바라겠나? 자기 인생의 몫을 살아내는 것뿐이지’라는 지도원의 체념 아닌 체념의 말처럼 그들은 다시 삶을 환기시키고 자신들을 추스른다. 한 사람에겐 죽음의 이정표가 된 여름 해가 지는 경이로운 광경이 또 다른 사람에겐 나침반이 되어 목적 없이 표류할뻔한 삶의 방향을 잡아준 것이다. 생존의 의미를 잃어버린 인간에게 여름 해가 지는 장관은 죽음이라는 영원한 안식을 주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으론 위안과 동정심을 자아내는 등 모순적인 의미로 표현되고 있다. 생존의 의미를 잃어버린 인간을 묵과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회유하며 제 갈 길로 보내려고 하는 『여름 해가 지다(夏日落)』의 이중성은 비록 삶의 목적과 의미를 상실한 인간일지라도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존엄성만큼은 놓치지 않으려는 옌롄커의 남다른 의지는 아닐까.
매일 나누는 인사처럼 군대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를 신랄하게 비난하기보다는 똥을 싸면 으레 밑구멍을 닦듯 천연덕스럽게 꾸며대는 것도 묘미이지만, 여름 해가 지는 황하고도의 아름다운 운치에 푹 빠져 일상과 경쟁에 지친 노곤한 마음을 깨끗이 비울 수 있는 잠시 쉬어 가는 짬을 주는 것도 이 작품의 또 다른 묘미이다. 한마디로 매일 입지는 않지만, 잊을만하면 요긴하게 쓰이는 유행을 타지 않는 옷처럼 두고두고 곁에 두고 위안을 얻고 싶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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