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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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아송 | 지식인을 게워 내다

The Odes of Songs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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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아송 | 옌롄커 | 지식인을 게워 내고 시경을 몰라도 매력적인 소설

나는 소리치고 싶었다. 소리내어 노래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방을 나서서 밖으로 나온 나는 수많은 연구실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모습을 보고 또 보다가 공중화장실에 가서 기지개를 켜며 소변 한 번 본 것이 전부였다. (p58)

솔직히 밝히지 못한 집필 목적

이 책이 중국에서 출판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2013년에 쓴 한국어판 서문에는 『풍아송(風雅頌, The Odes of Songs)』은 대학에 대해, 교수들에 대해, 오늘날 중국 지식인들의 나약함과 무력함, 비열함과 불쌍함, 물질, 금전, 권력에 대한 그들의 타협과 숭배, 이상과 욕망의 이율배반, 저항과 탈피의 불화, 기개와 교태의 갈등 같은 것에 관해 쓴 작품이라고, 그제야 작가 옌롄커(阎连科, Yan Lianke)는 자신의 작품이 지향하는 메시지를 솔직하게 밝혔다. 그러나 중국에서 이 책이 처음 출판되고 나서 벌떼 같은 비평과 비판, 쟁론에 부딪혔을 때 옌롄커는 한국어판 서문처럼 솔직하게 집필 목적을 감히 밝힐 수는 없었다. 그도 우리처럼 명확한 한계를 지닌 사람이자 마치 고수가 초수를 펼치듯 복잡다단하고 변화무쌍하게 펼쳐지는 사회적 그물망이 옭아매는 족쇄에서 벗어날 수도, 아니면 도도한 학처럼 마냥 외면할 수도 없는 나약한 동물인지라 차마 스스로 고립되는 길을 고집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는 그저 『풍아송』은 내 정신적 자서전이자 나에 대한 따돌림이고 비판이라고, 누가 봐도 궁색한 변명을 둘러댐으로써 또다시 자신의 작품이 ‘금서’ 목록에 추가되는 명예스러운 불행을 미리 방지할 수 있었다.

옌롄커, 스스로 지식인임을 부정하다

겸손해서 그런 것인지 진짜로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옌롄커는 책 뒷부분의 「저자 후기」에서 스스로 지식인임을 부정한다. 그러나 그의 필력이 가진 영향력과 오랫동안 노벨상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아온 중국의 대표 작가임을 고려해보면 (내 생각이지만 머지않아 그는 노벨상을 받을 것이다!) 그 역시 작가라는 지식인의 한 부류임을 부정할 수 없다. 고로 자신이 지식인이 아니라는 옌롄커의 부정은 지나친 겸손이다.

그렇다면, 왜 그는 자신을 지식인이 아니라고 부정했을까? 아마도 그 이유는 지식인으로서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시류에 영합하고 현실에 타협한 자신의 무능과 무능력, 그리고 비겁함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저자 후기」에서 밝히듯 『풍아송』은 자신의 무능과 무력감에 대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혐오감을 표현한 것이라는, 얼핏 보면 지식인으로서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자신의 잘못에 대한 책망이자 질타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거 유행처럼 중국을 휩쓸었던 정풍 운동의 덫에 걸린 지식인이 마지못해 토해내는 자아비판처럼 들리기도 하는 옌롄커의 변명은 누군가 시키지 않아도 지식인 스스로가 알아서 자신을 탄압하고 억압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시스템을 겨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편, 중국 문단의 문제아이자 금서(禁書) 전문 작가라는 수식어를 꼬리처럼 달고 살았던 옌롄커의 소설 『풍아송』이 금서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그가 시류에 영합하는 고만고만한 지식인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출판 후 폭우처럼 퍼부을 비난을 예감한 옌롄커가 그것에 대한 변명을 미리 「저자 후기」에 실었다는 것 자체가 그의 무력감을 방증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 지식인의 성찰로 모든 지식인의 성찰을 요구하다

하지만,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오랫동안 노벨상 후보로 거론된 세계적인 작가 옌롄커가 자신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소심하다 못해 무력하고 체면치레하느라고 허세를 부리고, 한편으론 질투에 집어삼켜 지는 옹졸한 지식인의 모습을 아무리 자신에 대한 성찰이라고 피력해도 그것을 (중국을 제외한 전 세계가)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질 리는 만무하다. 그의 영향력은 그의 의지와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미 중국을 벗어나 버릴 대로 벗어나 버렸고, 그의 문장이 미치는 파급력은 황하를 범람하게 할 정도로 막대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현실에서 그가 소설에 등장시킨 한 지식인의 비굴하고 무력하고 염치없는 모습을 자신의 이야기라고 빗대어 거침없이 형상화했다는 것은 중국 지식인에 대한 결연한 도전이자 겸허한 비판이면서, 한편으론 그들의 근원적 성찰을 촉구하는 강력한 메시지나 다름없다. 쉽게 말해 추기경이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고 속죄하고 있는데, 그 광경을 지켜보는 사제들이 어찌 뻔뻔하게 자신들은 눈처럼 깨끗하다고 시치미 뚝 떼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뿐만 아니라 참회하는 추기경을 보는 사제들의 심기는 어찌 불편하지 않겠는가? 아마 당시 『풍아송』을 읽은 중국 지식인들의 마음이 그러한 사제들의 좌불안석 불편한 마음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어쩌면 이것은 거대한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중국의 지식인이 지식인이라면 응당 지켜야 할 의무와 스스로 짊어진 책무에 충실할 수 없게 하는 강력한 무언의 압력이 중국 사회에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얼마 전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중국 인터넷에서 하루아침에 말살된 가수 리지(李志)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니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텍스트를 읽는 재미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그러나 꼭 이렇게 물귀신처럼 지식인을 물고 늘어지지 않더라도, 소설 제목이 의미하고 소설 속 주인공 양 교수가 연구하는 소재이기도 한 「시경(詩經, the book of Songs)」을 전혀 몰라도 『풍아송』은 시종일관 부드럽고 청순한 우윳빛 흡입력을 발산하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옥수수 껍질 벗겨내듯 작품에서 ‘지식인’이라는 거칠고 모난 껍질을 한 꺼풀 벗겨내면 차지고 노랗게 영근 옥수수알 같은 구수하면서도 달곰한 문장들이 읽는 이로 하여금 무한한 희열을 느끼게 한다. 과장되면서도 지나치지 않고, 원색적이면서도 운치 있고, 생동감이 넘치면서도 경박하지 않은 옌롄커만의 색깔을 지닌 독특한 문장은 예전 작품들에서 보여준 필력보다 더 원숙해지고 숙달된 경지를 보여준다. 그가 자유자재로 붓을 휘두르고 문장으로 천지를 호령하는 모습은 신이 들린 지휘자가 종이, 붓, 먹, 벼루를 진두지휘하여 하늘과 땅을 글로써 종이에 담아내고, 그럼으로써 세상의 이치와 역사와 삶을 설명하려는 것처럼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철학과 의지의 발로이다. 또한, 그의 문장에는 눈이 있고 귀가 있고 코가 있어 변화무쌍하면서도 오묘한 세상 만물의 미묘한 움직임이나 변화도 능히 잡아내기 때문에 보지 않으려야 보지 않을 수가 없고, 듣지 않으려야 듣지 않을 수가 없고, 맡지 않으려야 맡지 않을 수가 없다. 이렇게 그의 작품은 굳이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무게를 두지 않더라도 텍스트를 읽는 재미만으로도 충분히 독자를 무아지경에 빠트릴 수 있는 수준 높은 소설이자 진짜 문학이다.

Song of Elegance by Yan Lianke
<누구의 말대로 진정한 지식인은 모두 죽었는가?>

정말로 진정한 지식인은 모두 죽었는가?

사실 『풍아송』이 사유하고 고찰하고자 하는 지식인에 대한 비판적인 메시지는 별로 그렇게 와닿지 않았다. 이미 내 마음속에는 오래전부터 지식인에 대한 믿음과 존경과 공감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을 정도로 그들이 권력에 영합하고 권위를 추종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작위적이고 속물적인 작태에 신물이 났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좀 더 안다고, 배웠다고, 그래서 좀 유명하다고 우쭐대는 지식인 같지 않은 지식인들이 다양한 대중매체에서 설쳐대는 모습은 꼴사납기 그지없다. 그들이 대중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교수가 이제 막 입학한 신입생을 바라보는 것 같은 적당히 꾸며진 자애와 숨기지 않는 우월함이 번득인다. 더 가관인 것은 그들의 말이라면 무조건 진실이라고 믿는, 마치 약장수의 번지르르한 혓바닥에 놀아난 관객이나 사이비 교주의 간사한 능변에 이성을 잃은 신도를 연상시키는 대중들의 우매함이다.

어쩌면 누구의 말대로 진정한 지식인은 모두 죽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약삭빠른 사람들만이 생존할 수 있는 무한 경쟁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신이 할 도리를 운명이 부여한 의무처럼 기필코 완수하려는 정의롭고 책임 있고 용기 있는 지식인의 설 자리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부처님이나 예수님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품위 있는 교양과 자애로운 성정과 강직한 품격을 지식인에게 무리하게 강요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그들이 무슨 초능력이라도 타고 난 영웅이 아니라 우리처럼 그저 묵묵히 자기 삶에 충실해지려는 수많은 사람 중 한 사람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비록 지식인에게 실망을 금치 못했을지 망정 그렇다고 지식인의 필요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인간의 역사에는 위대한 지식인들이 존재했었고 그들이 문화, 사회, 정치, 경제 등 인류 문명에 끼친 긍정적인 영향력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자질 미달의 지식인이 설쳐대는 것이 문제일까? 그래서 크고 작은 뜻을 품은 진짜 지식인이 설 자리가 없는 것이 문제인가? 아니면, 지식인이 설 자리를 스스로 찾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가? 우리 사회가 지식인의 존재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것일까? 이것도 아니면 대중이 진짜 지식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일까? 한 번쯤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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