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샤오핑 평전 | 에즈라 보걸 | 공산당의 정당성을 경제 성장에 예속시킨 장본인
처음 정권을 장악했을 때만 해도 덩샤오핑은 이론적으로 민주주의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당내에 더 많은 민주적 토론이 있어야 한다고 격려했다. 그러나 시위자들이 더욱 많은 군중을 끌어모아 중국공산당 영도의 근본 체제를 반대하기 시작하자 그는 과감하게 이러한 도전을 탄압하는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한 성위원회 제1서기가 나중에 말한 것처럼, 민주주의에 대한 덩샤오핑의 시각은 엽공호룡(葉公好龍)과 마찬가지로 진짜로 용이 나타나자 그 역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덩샤오핑 평전』, p352)
계속해서 긍정적인 의미로 ‘민주’라는 말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민주 집중제(民主集中制)’를 견지했다. 일단 당이 결정하면 모든 당원은 이를 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덩샤오핑 평전』, p726)
중국의 경제 성장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어느덧 미국의 뒤를 바짝 쫓는 경제 대국으로 올라선 중국의 놀라운 고도성장 배경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중국 ‘개방 • 개혁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덩샤오핑(鄧小平)이다. 엄밀히 말해 개혁 • 개방은 4인방을 타도하는 데 앞장서고도 중국공산당 역사에서 사라진 비운의 인물 화궈펑(华国锋)이 시작했다고도 말할 수 있지만, 그 눈부신 성과는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 가난한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다, 일부 사람을 먼저 부자가 되게 하라 등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통속적인 구어로 실용주의 노선을 명쾌하게 설파하면서 (뭔가 그럴싸하게 들리는) ‘중국 특색 사회주의’ 이론을 들고나온 덩샤오핑의 영도하에 실현될 수 있었다고, 에즈라 보걸(Ezra F. Vogel)의 『덩샤오핑 평전: 현대 중국의 건설자(Deng Xiaoping and the Transformation of China)』은 말하는 듯하다. 정말 그런 것일까? 흥미롭게도 이와는 정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한 역사학자가 있다. 바로 프랑크 디쾨터(Frank Dikoter)인데, 그는 중국 현대사를 인민 중심으로 다룬 역작인 ‘인민 3부작’ 중 마지막 저서인 『문화 대혁명(The Cultural Revolution)』을 통해 충격적인 가설을 제시하고 있다. 디쾨터는 자신의 책을 통해 중국의 경제 개혁을 이끈 위대한 원동력은 덩샤오핑이 아니라 평범한 보통의 인민들, 그중에서도 농민들이 스스로 궁색한 삶을 개척하고자 하는 의지의 발로로써 일으킨 소리 없는 자본주의 물결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디쾨터의 책은 뭉뚱그려 희생자라는 암울한 통계 수치 정도로만 조명을 받아왔던, 중국 역사의 어렴풋한 배경 같은 존재로만 인식됐던 인민을 새로운 시각과 새롭게 공개된 자료를 동지 삼아 역사의 중심으로 한 단계 끌어올린 역작이니만큼 중국 현대사에 관심 있는 독자에겐 반드시 권하고 싶은 그런 책이다.
아무튼, 한 사람의 전기임에도 1978년 이전까지 덩샤오핑이 살아온 70년이 넘는 이야기는 비교적 적은 분량이 할당되었고, 나머지는 덩샤오핑이 마오쩌둥(毛澤東)의 뒤를 이은 2대 핵심으로 급부상하여 무소불위의 권위를 휘두른 말년을 다루고 있다. 덩샤오핑의 말년은 (우연이건 아니건) 중국의 개혁 • 개방의 찬란한 도약 시기와 일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덩샤오핑 평전』은 중국의 개혁 • 개방의 구상과 진행, 그리고 그 성과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를 얻을 수 있는 책이지만, 그 업적을 오로지 한 사람의 영웅적인 의지로 돌리고 있다는 점이 조금은 개운치 못하다.
공산당의 정당성을 경제 발전에 예속시키다
사실 덩샤오핑은 개혁 • 개방에 대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계획이나 구상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최고의 영도자로서 개혁 • 개방에 활력을 불어넣는 데 필요한 많은 일을 주관했다. 이제 막 기지개를 켜는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었던 베트남과 소련과의 국경 분쟁, 그리고 (결국, 피를 보고 말았지만) 톈안먼 민주화 운동을 단호한 판단과 강력한 지도력으로 해결하면서 국가 발전에 필수적인 안정과 평화를 가져왔으며, 장기적인 안목과 유연한 외교력으로 미국과의 수교 및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통해 4개 현대화 노선에 필요한 기술과 자본을 끌어들이는 데 공헌했다. 또한,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처럼 잔인하고 파멸적이지 않은, 교활함마저 감쪽같이 숨겨버리는 우아한 방법으로 개혁 • 개방에 방해되는 인물들을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고 더불어 보수파와의 마찰도 유연하게 피해 가는 특유의 적응력 높은 변칙적인 통치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성과만 뚜렷하다면 일부 당원들의 정도가 미약한 부정과 부패는 눈감아 줄 정도로 오로지 경제 발전을 가속하는 데만 집중했는데, 이는 공산당은 경제 발전을 통해서만 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한 그의 신념을 반영한다. 그가 1992년 남순강화 때 많은 인민의 지지와 환호를 받은 것처럼 개혁 • 개방의 효과를 톡톡히 본 인민들도 분명히 존재했지만, 반면에 또 다른 수많은 인민은 개혁 • 개방 초기부터 심화되는 빈부 격차, 도를 더해가는 당원들의 부정 • 부패, 질적으로는 낮았을지라도 그나마 사회주의 국가라는 이름을 들먹일 수 있게 만들었던 기존 복지 시스템의 해체, 프롤레타리아 국가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열악한 노동 환경, 도시 집중화로 말미암은 열악한 주거 환경, 환경오염 등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이를 덩샤오핑이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먼저 부자가 된 자가 다른 이들을 도와 같이 부자가 될 수 있도록 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희망으로 앞선 문제들을 후세에게 넘겼다. 그는 공산당의 정당성을 오로지 경제 발전에만 예속시킴으로써 그의 뒤를 이은 영도자들도 성장주의에 목매달 수밖에 없게 만든 셈이다.
하지만, 일찍이 산업혁명을 겪은 서구 세계가 저성장 체제로 진입했듯 고도성장은 무한정 지속할 수는 없다. 그리고 내 정보획득력이 부족해서일지도 모르지만, 아직 부자가 (강제적인 고율의 세금 징수가 아닌) 순전히 선의적인 의도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다수의 부자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다. 개혁 • 개방 정책을 중국에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덩샤오핑은 중국이 부자로 향하는 길을 개척한 것은 틀림없지만, 그 많은 부의 대부분은 중국 정부, 기업, 사업가, 관리 등 극히 일부가 독점하며 (그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비판하는) 서구 자본주의보다도 더 극심한 빈부 격차를 낳았다. 덩샤오핑은 중국이 부자가 되면 그 부를 어디에다 어떻게 써야 할지 개략적으로도 제시하지 못했다. 또한, 어느 정도 부를 쌓은 다음에야 의료 보험, 연금 제도 등 경제적 정의를 실현할 사회주의 정책을 1순위로 올려놓아야 하는지 등의 사회주의 국가의 초석이 되는 묵직한 과제들은 손도 대지 않은 채 고스란히 후세로 미뤘다. 그래서 영민하게도 덩샤오핑은 일찌감치 사회주의 고급 단계를 100년 이후의 목표로 연기해 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백만의 백만장자와 1억 명의 중산층에 가려진 12억은 둘째치고 극빈층 1억의 인민들은 여전히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티며 살아가는 중국의 현실을 고려하면, 그 100년 동안 앞에서 제기된 문제 등으로 고통받고 신음하게 될 수많은 인민의 삶을 국가의 안정과 당의 권위를 위해 마땅히 희생된 톈안먼 광장의 열사들처럼 진보와 발전이라는 대의를 위한 값비싼 희생으로 치르겠다는 뜻과 다름이 없다.
<저 사진의 주인공이 바뀔 날이 올까?> |
우울한 중국인
중국은 '2016 세계 행복 보고서'에서 부유한 국가답지 않게 초라하게도 83위를 기록했다. 작가 량샤오성의 냉정한 진단처럼 중국인은 우울한 것이다. 부와 행복이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경제력이 보장되어야만 최소한의 인간적 품위를 지킬 수 있는 삶을 지탱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런 자긍심이 삶의 만족도와 행복에 크나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생각하면, 중국 정부는 부자지만 그 울타리 안에서 사는 인민들은 경제적으로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인민들의 불평 • 불만이 단지 경제에만 한정된 것일까? 앞서 제기한 문제점들에 미흡한 법치와 인권, 그리고 여전한 언론 감시와 통제, 급증하는 노동자들의 시위 건수(하지만, 절대 공개되지는 않는)가 더해지면 앞으로 '세계 행복 보고서' 순위에서 중국이 추락할 여지는 충분한 셈이다.
이것은 경제 성장에만 공산당의 정당성을 부여한 덩샤오핑의 특권계급 독재 하의 불도저식 개방 • 개혁 정책도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는 의미다. 덩샤오핑이 마오쩌둥이 남긴 지속적인 계급투쟁과 대중 선동이라는 과거의 혁명적 유산을 극복함으로써 개혁 • 개방의 길로 중국을 인도하며 수렁에 빠진 국가를 구출해낼 수 있었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급격한 고도성장의 부작용이 점점 더 심각하게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는 현재의 중국은 덩샤오핑의 개혁 • 개방이 남긴 성장지상주의를 극복하고 또한, 덩샤오핑이 후세로 미뤘던 ‘민주’, ‘자유’, ‘인권’ 등 인민의 기대와 삶의 질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보편적 문제를 정의롭고 공정하게 다룰 수 있을 때 현재의 수렁을 빠져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초급 단계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 상당히 부담스러운 분량의 책이며 무미건조하게 업적이나 행적만 기술한 부분은 눈꺼풀을 무겁게 짓누르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에즈라 보걸의 『덩샤오핑 평전』은 현재의 중국을 만든 덩샤오핑의 지도력을 흠모하거나, 혹은 정치가나 리더를 꿈꾸는 사람들이 눈여겨 볼만한 덩샤오핑 특유의 기만적이고 변칙적인 통치술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저서 중 하나다. 그리고 중국 경제가 본격적으로 성장 추진력을 받기까지의 개혁 • 개방 정책의 부단한 정치적 과정을 비교적 세밀하게 다룬 수작이다. 또한, 대체로 덩샤오핑의 치적과 경제를 중심으로 다뤄져 있지만, 중국의 개혁 • 개방 정책과 사회주의 시장 경제를 이해하고 그 문제점과 앞으로의 발전 과정을 논하는 데 있어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역사를 한 사람의 영웅적인 전기로 대체하려는 것 같아 여전히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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