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2 | 이언 커쇼 | 무엇이 파괴와 절멸의 유산을 받들었나?
제대로 못 배운 술집 선동가에 고집불통의 인종주의자였고 자기도취와 과대망상에 젖었으며 민족의 구세주를 자처했던 사람이 철학자와 시인의 나라로 알려졌고 발달된 경제를 가진 현대 문명국에서 휘두를 수 있었던 극단적 형태의 개인 통치는 그 운명의 12년 동안 끔찍한 사건들이 펼쳐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p1,023)
나치 체제는 히틀러의 교묘한 전략? 아니면 우연?
히틀러는 교활한 악마다. 그는 그토록 많은 학살에 책임이 있으면서도 결코 소름 끼치도록 하얀 자기 손에는 피 한 방울 안 묻혔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을 ‘위대한 지도자’로 받드는 수하들에게 학살 명령을 직접 내릴 필요도 없었다. 그는 신처럼 하늘 높은 곳에 앉아 수하들이 자신이 추구하는 신념을 종교처럼 따르도록 단단히 혼을 빼놨으며, 히틀러를 따르는 수하들은 주인 앞에서 칭찬받고 싶어 하는 강아지처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히틀러가 좋아할 만한 행동을 스스로 찾아낸 다음 충실하게 실행으로 옮겼다. 한때 화가 지망생이었던 히틀러가 스케치하듯 대충 큰 그림을 그려놓으면, 그를 추종하는 수하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어떻게든 나머지 공간을 채워 넣는, 그런 형태였다. 그는 직접 명령을 내릴 필요도 없었고, 자신의 손에 더러운 것을 묻힐 필요는 더더욱 없었을뿐더러, 그래서 어딘가 일이 잘못되어도 독일 국민의 경외하는 ‘위대한 지도자’라는 강철처럼 견고하고 새 자동차의 후드처럼 매끄러운 명성에 흠집이 날 일도 없었다. 권력의 최고 정점에 선 히틀러의 후광이 비치는 범위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려고 수하들은 치열하게 경쟁했다. 그들은 히틀러의 총애가 보장하는 달콤한 권력의 한 조각을 받아내려고 히틀러가 좋아할 만한 일들을 알아서 계획하고 추진했다.
느슨하면서도 꽤 견고하게 지속했던 나치 체제와 히틀러 주위를 배회하는 권력 게임 시스템이 확답보다는 두루뭉술하게 넌지시 언급하기를 즐기고, 그런 식으로 결정을 회피하려 드는 히틀러 개인의 우유부단하고 폐쇄적인 성격적 특성에서 기인한 우연일까? 아니면 히틀러가 의도한 교묘한 전략이었을까? 만약 우연이었다면 1차 세계 대전 직후 정치계에 우연히 발을 들여놓으며 자신의 숨은 재능을 발견했던 것처럼, 두 번 시도된 폭탄 암살에서 크게 다치지 않고 멀쩡하게 살아남았던 것처럼 히틀러는 타고난 행운아다. 다만, 그것은 독일을 몰락으로 이끌고 전 세계를 참혹한 전쟁의 늪으로 물귀신처럼 잡아 끌어들인 악마의 행운이다. 반면에 그것이 히틀러의 의도적인 계획으로 나타난 전략적 결과였다면 그는 메피스토펠레스도 울고 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천재이며 악마 중의 악마다.
히틀러를 지지하는 그들은 ‘좀비’가 아니었다
아마 진실은 그 중간쯤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히틀러는 악마라는,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구분 짓는 것만큼 위험천만한 일은 없다. 그것은 전부 아니면 전무, 아리아인과 유대인이라는 선악 세력의 결전, 승리가 아니면 완전한 파멸이라는, 즉 모든 문제를 ‘흑백’의 단순 명쾌한 논리로 환원해 사람들의 정신을 단숨에 빨아들이는 재주가 탁월했던 히틀러의 전철을 따라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주창한 흑백 논리에 스며든 못 말리는 자기 파괴 경향이 어떠한 결말을 가져왔는지 명백하게 드러난 시점에서 또다시 흑백 논리의 유혹에 빠져든다는 것만큼 어리석고 바보 같은 일은 없다. 제아무리 그것이 단순하고 명쾌해서 많은 사람을 아주 쉽게 현혹하고 설득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극과 극을 가르는 흑백 논리가 가져올 자기 파괴적이고 공허한 결말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지만, 그런 식으로 히틀러를 꾸짖고 비난한다고 해서,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그저 그런 보통 사람들이었던 그 수많았던 독일 국민이, 문명의 혜택과 교육을 받으며 교양을 쌓을 수 있었던 선진 시민이, 특별히 악하게 태어난 것도 아니고 세상 모든 사람이 그러듯 자기 한 몸과 가족이 무탈하게 살아가는 것을 낙으로 알고 삼았던 평범한 사람들이, 히틀러의 뛰어난 언변술에 현혹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좀비처럼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완전히 얼이 빠진 상태도 아니었던 사람들이, 그런 평범하고 교육도 받을 만큼 받은 사람들이 좌파나 반체제 세력, 유대인 등 일부 사람들에 한해 막강한 파괴력을 발휘한 나치의 무자비한 탄압에 굴복한 것도 아니면서, 히틀러를 마치 하느님처럼 받들면서 전 세계의 힘센 나라들을 모두 적으로 삼고 싸우는 가망 없는 전쟁에서 왜 필사적으로 싸우려 했는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추천할 수밖에 없는 20세기 인류사의 역작
히틀러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라 불리는 이언 커쇼(Ian Kershaw)의 히틀러 전기 『히틀러 2(Hitler: 1936-1945 Nemesis)』는 이해관계가 나치와 직접적으로 얽히고설킨 대기업, 자본가, 정치인 등 기존의 권력 계층뿐만 아니라 고위 장성, 고급 관리, 변호사, 기업가 등의 상층 부르주아와 상인, 숙련공, 소농, 하위 공무원, 노동자 같은 중하류층에 이르는 다양한 계층과 남녀노소를 불문하는 다양한 연령층의 완전무결한 지지가 어떻게 단 한 사람의 의지와 결합하고, 더 나아가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가지고 주사위를 굴리려고 하는 한 사람의 손아귀에 어떻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고, 그럼으로써 지도자 신화가 탄생하고 그 신화가 독일과 전 세계를 지옥의 구렁텅이로 끌고 들어가는 모든 과정을 아우르며 통찰하는 전무후무한 책이다.
히틀러를 알고 싶고, 2차 세계 대전을 알고 싶고, 한 걸음 더 나아가 20세기 인류를 알고 싶으면 절대 빠트릴 수 없는, 히틀러가 인류에 미친 어마어마한 영향력만큼이나 두 권 합쳐 2천 페이지가 넘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책이다. 한 권의 무게가 무려 2kg이 넘으니 급할 땐 아령으로 써도 부족함이 없는 무게 때문에 괴력의 보유자가 아닌 이상 두 손으로 받쳐 읽기는 불가능하고, 웬만한 독서대로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두께도 무지막지하다. 2천 페이지 넘는 책을 일일이 스캔해서 전자책으로 만드는 위대한 과업을 고단하게 달성한 나 자신이 뿌듯하게 느껴질 정도다. 괴물 같은 책의 부피 때문에 섣불리 선택하기는 어려운 책이지만, 그럼에도 감히 추천할 수밖에 없는 20세기 인류사의 역작이다.
<Sonja Henie & Adolf Hitler, Unknown author / Public domain> |
그도 우리처럼 꿈을 꾸는 인간이었다는 섬뜩한 사실
아무튼, 나도 괴짜인 것이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패색이 짙어져 가는 상황에서 하루하루가 다르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망가져 가는, 그리고 린츠 재건축 모형을 보며 좋아하는 히틀러를 보면서 일말의 난감한 연민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만큼 히틀러의 일생을 다룬 커쇼의 문학적 필치가 뛰어났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히틀러는 생전에 고향 도시 린츠를 재건축하고 싶어 했다. 린츠를 재건축하는 공상은 종일 우울한 소식만 날아들며 히틀러의 골치를 지끈지끈 썩일 때, 그의 유일한 현실 도피처였다. 전쟁이 끝나면 고향 린츠로 돌아가 살려고 했던 히틀러는 암묵적으로 전쟁의 패배가 확실시되던 1945년 2월이 되어서야 린츠 재건축 모형을 보게 된다. 그리고는 어린아이처럼 마냥 기뻐서 어쩔 줄 모른다.
결코, 지어지지 못하리라는 것을 스스로 뻔히 아는 모형을 내려다보면서 히틀러는 몽상에 잠겼고 친구 쿠비체크와 린츠를 다시 짓는 꿈을 꾸던 젊은 시절의 환상으로 돌아갔다. 벌써 아득한 옛날이었다. 그러고는 가혹한 현실로 돌아왔다. (『히틀러 2(Hitler: 1936-1945 Nemesis)』, p948)
이때 히틀터의 외모는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전보다 더 수척했고 전보다 더 늙었다. 허리는 구부정했으며 걸음도 제대로 못 걸었다. 왼손과 왼팔은 수전증 환자처럼 수습 못 할 정도로 떨었다. 얼굴에서 핏기는 사라졌고 눈은 충혈되었으며 눈가는 축 처졌다. 입가에서는 치매 걸린 노인네처럼 때때로 침이 흘러내렸다. 홀로코스트를 일으킨 장본이었던 그도 때론 (자기도취적이지만) 꿈을 꾸는 사람이었고, (대부분 자업자득이지만)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 쇠약해지고 늙어가는 한 인간일 뿐이었다. 이런 히틀러의 마지막 모습이 혹시라도 관객의 동정을 살까봐, 히틀러에게 연민을 불러일으켜 그에 대한 역사적 판결을 완화시키려는 수작 아니냐는 비난의 화근이 될까 봐, 영화에서는 히틀러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기 어렵다.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으로 고민한 흔적이 역력히 없는 뻔뻔하고 거만한 얼굴로 등을 꼿꼿이 세운 채 벙커를 활보하고 다닌 의지의 사나이만은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짙은 패색이 안개처럼 전장에 무겁게 드리우고 패배가 눈앞으로 바짝 다가와도 승리에 대한 확신을 버리지 않았던 자기기만적이고 자기도취적인 낙관의 화신 히틀러가 간혹 최측근들 앞에서 우울하고 절망에 빠진 침울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면 믿어지는가? 하지만, 그런 모습은 찰나였을 뿐이고, 그는 곧 전쟁의 승리를 확신하는 의지와 투쟁을 불사르는 무대 위의 히틀러로 다시 돌아왔다. 어떤 모습이 진짜 히틀러의 모습이고 진짜 히틀러의 심정인지 우리는 영영 알 수 없지만, 말년에 그가 보여준 순진하고 어리석을 정도로 승리를 낙관하고 그러한 심지를 끝까지 지키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스트레스와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그것을 내색하지 않으려는, 그리고 기필코 한 줌의 권력조차 놓지 않으려는 의지는 정말이지 애처로울 정도로 눈물겹다. 그런 면에서 그는 정말 ‘의지의 화신’이었다. 한편으론, 부랑아, 낙오자 등 별 볼 일 없는 존재에서 세계를 처참하게 짓밟는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는 점은 가히 인상적이다.
마치면서...
이런 값싼 동정은 그저 한낱 스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저질 감상일 뿐, 히틀러가 잔악무도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없다. 그는 독일이 전쟁에서 지고, 그로 말미암아 독일 민족이 절멸하는 것조차 사회다윈주의 관점에서 해석했다. 철저하게 의도된 연기였든, 아니면 타고난 천성이었든 정치적 무대에서 그는 따뜻한 인간적 감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가 살인과 학살을 즐기는 사이코패스였든 아니든, 그는 유대인의 학살을 당연시했다. 그런데 이런 히틀러를 보면서 우리의 무관심과 침묵이 일으킨 ‘지속적인 테러(ENDURING TERRORS)’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을 떠올린다면 황당무계한 비약(飛躍)이 될까? 지금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기아로, 설사병으로, 홍역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보면서 ‘내가 과연 히틀러를 악마라고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무고한 인명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의 인생을 황폐화시킨 히틀러가 악마라면, 5초마다 아이들이 굶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관심과 침묵으로 일관하는 우리는 도대체 무엇인가? 히틀러로 시작해서 이런 말로 끝을 맺다니, 역시 하고 싶은 대로 막 나가는 리뷰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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