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평전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
참고로 이 글은 「마오쩌둥 평전 | 만자에 달하는 글자로도 부족한 엄청난 인물」 에 이은 글임
역사를 즐겨 읽은 마오쩌둥
음식이나 공기와는 달리 책은 안 읽어도 얼마든지 잘 먹고 잘살 수 있다는 점에서 마오쩌둥 평전을 포함해 어떤 책이든 꼭 읽어야만 하는 책은 없다. 다만, 어떠어떠한 이유로 이 책을 읽어보면 어떻겠냐고 권장하거나 추천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내가 책 리뷰를 쓰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밥처럼 억지로 떠먹일 수 있는 것이 아닌 만큼 반찬 투정하는 아이를 달래는 엄마의 간절한 마음으로 좀처럼 책과 인연을 맺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을 살살 달래고 얼러 모든 사람이 책 한 권이라도 더 읽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묵묵히 리뷰를 쓸 뿐이다.
그렇다면, 왜 마오쩌둥 평전을 읽어야만 할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의 인생을 개괄하는 데 있어 빠질 수 없는 것 중 하나인 ‘탐독’이’다. 그는 역사(특히 진시황이나 한 무제 같은 중국 고대 통치자)와 난리와 폭동, 반역을 다룬 소설을 즐겨 읽었다. 혹자는 책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지만, (자랑할 것은 아니 되지만, 그래도 평균보다는 많다고 할 수 있는) 천 권을 넘게 읽어온 나로서는 그 말을 믿기는 어렵다. 다만, 책이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기보다는 읽는 사람의 특정 가치관이나 기질, 능력을 강화하거나, 아니면 여태껏 두드러지지 않았던 잠재된 기질이나 능력을 자극해 계발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편식하면 건강을 해치듯 독서도 편식하면 정신 건강을 해치고 편견이나 선입관에 빠질 수 있다. 또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그 사람이 읽는 책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물론 나의 경우로서 이것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천추의 한이자 한편으론 내 무능의 소치이지만, 오히려 마오쩌둥의 경우는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예라고 본다.
<1957년 마오쩌둥 / 侯波,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
그 사람이 읽는 책으로 그 사람을 읽을 수 있다
그가 즐겨 읽은 중국 고대 통치자에 관한 책들과 세계 영웅전 등은 그의 잠재된 지배 욕구와 권력욕에 연결 지을 수 있으며, 한편으론 그의 이런 욕구를 강화하고 정당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난리와 폭동, 반역을 다룬 소설이나 진시황과 상앙에 대한 책들은 폭력에 대한 거부감을 희석하거나 억제된 폭력을 해제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 진시황과 상앙이 펼친 공포 정치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써의 폭력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한때 폭력 혁명을 반대했던 그가 폭력 혁명을 열렬히 옹호하는 볼셰비즘의 길로 홀연히 돌아설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폭력이나 범죄를 다룬 책을 읽는다고 해서 모두 범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책을 읽는 사람의 주요 관심사를 나타내는 지표가 될 수 있고, 억제된 욕망의 무의식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발현이자 해소로도 볼 수 있다. 배고프면 밥을 찾아 먹으면서 그 배고픔을 해소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면 된다. 다만, 폭력을 행사할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또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의 강력한 힘에 지배되었을 때 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하는 가능성 면에서 그 사람이 평소에 어떤 책, 어떤 장르의 영화나 미디어를 주로 감상했는지 안다면 도움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한다. 물론 과학적인 것은 아니고 막 생각나는 대로 지껄인 것이니 심각하게 들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런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책을 읽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내가 책에 빠져든 계기나 상황을 떠올리면 독서는 우연적인 요소가 강하고 나름의 인연도 따라야 한다. 한편,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처럼 책도 읽고 싶은 것만 읽는다는 점에서 독서는 이기적인 행동이다. 그런 고로 독서는 평범한 사람을 위인으로 돌변시키기보다는 한 개인의 기질이나 능력, 가치관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확률이 더 높다. 이 와중에 운이 좋으면 잠재된 능력이나 기질이 발현되어 어쩌다 위인을 탄생시킬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다. 이것이 ‘어렸을 때 읽은 책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다.
물론 책의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그리고 감지할 수 있는, 혹은 감지할 수 없는 영향력은 나의 몇 마디 얕은 말보다는 훨씬 많고 다양할 것이다. 하지만,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다른 취미생활처럼 독서 역시 그 결과를 예상하거나 특정 결과를 기대하고 읽기보다는 책을 읽는 것 자체가 재미있어서 읽는다. 이것은 책을 읽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다. 그 외에는 모두 부수적인 효과다. 그렇기에 누구에게는 독서가 눈에 띄는 어떤 변화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누구에게는 그런 변화가 전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마오쩌둥이 1956년에 죽어야만 하는 이유
앞에서 거론한 천윈의 말로 돌아가 보자. 흥미롭게도 천윈의 가정은 마오쩌둥의 ‘은퇴’가 아니라 ‘죽음’으로 전제되어 있다. 1956년이면 마오쩌둥의 나이 이제 63이다. 그해 5월에 똥이 둥실둥실 떠다니는 더러운 주장강에서 마오쩌둥은 2시간 가까이에 걸쳐 약 10킬로 이상을 떠다녔을 정도로 건장했다. 이렇게 건강한 그에게 정계 은퇴가 아닌 죽음을 선고한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개인숭배 위에 공고히 다져진 그의 권위와 권력이 그가 은퇴한다고 해서 사라질 정도로 허술한 것이 아니었던 만큼 ─ 스탈린처럼 병적으로 남을 의심하고 음모를 꾸미고 계략을 실천하는 것을 좋아하는 ─ 마오쩌둥이 은퇴했다고 해서 국정에 간섭하지 않을 리가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곧 직함이나 직위와는 상관없이 그의 생존 자체가 ─ 그가 은퇴 후 꾸려질 것이고, 혁명 원로나 당 간부들이 원하기도 했던 ─ 집단 지도 체제에 여전히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염려한 것이리라.
고로 스탈린이 그랬던 것처럼 마오쩌둥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길은 오직 그의 죽음뿐이다. 천윈은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마치 인민을 감시하는 듯 톈안먼 광장에 걸려 있는 마오쩌둥 거대한 초상화와 또다시 일인 독재 체제로 돌입하려는 시진핑 시대를 보면 마오쩌둥의 지긋지긋하도록 끈적끈적한 그림자가 여전히 중국을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는 망상을 떨쳐내기 어렵다.
<천윈이 언급한 1956년, 마카오 중국 상공 회의소 회장과 만나는 마오쩌둥 / Unknown autho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
엄청난 일을 저지른 엄청난 사람...
정말이지 나의 책 리뷰 역사상 가장 긴 글을 쓴 것 같다. 공백을 제외한 글자 수를 반올림하면 만자가 된다. 뭔가 더 쓰라면 못 쓸 것도 없다. 그만큼 마오쩌둥은 대단한 인물이며, 『마오쩌둥 평전(Mao: The Real Story)』 역시 그의 찬란한 업적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는 독창적인 유격 전술로 일본 침략에 맞섰고 국민당과의 내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사분오열된 중국을 통일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혁명가다. 또한, 그는 미국과 소련이 한창 어깨싸움을 벌일 때 과감히 그사이를 비집고 들어감으로써 마침내 중국을 정치적으로 강대국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로 말미암아 중국인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을 식민지의 무기력한 노예로 전락시키고 제국주의적 수탈을 자행했던 유럽인이나 일본인을 선망이나 두려움의 눈빛이 아니라 자긍심과 자부심이 똘박하게 박혀 있는 또랑또랑한 눈빛으로 쳐다볼 수 있는 용기와 긍지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인민은 여전히 가난했다. 그들은 소리만 요란한 선전 구호나 기약 없는 먼 미래에나 실현될법한 유토피아로 구슬리는 사상과 이념으로 먹고사는 혁명가도 아니었고, 그랬던 적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그러고 싶지 않은, 천생이 밥을 먹고 사는 순박하면서도 풀처럼 질긴 생명력을 지닌 백성들이다.
제국주의와 내전의 풍파를 이겨내고 세계에 우뚝 선 중국이지만, 자부심과 긍지만으로 굶주린 배를 채울 수는 없었다. 배가 고프면 정신이 흐리멍덩해지고 정신이 흐리멍덩해지면 마르크스와 레닌이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사상’과 ‘이념’만으로 굶주린 배를 채울 수는 없는 법이다. 대약진 시기에 아사한 수천만과 기아로 고통받은 수억, 그리고 문화대혁명이라는 무대 위에서 연출된 수많은 사람의 비극과 파괴와 혼돈 속에서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강간당한 중국 인민의 고통과 괴로움, 그리고 슬픔을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면 당연히 마오쩌둥일 수밖에 없다.
『마오쩌둥 평전』에서도 분명하게 밝히듯, 그가 잘한 점도 엄청나지만, 그가 잘못한 점도 엄청나다. 엄청나게 넓은 중국의 대륙처럼, 엄청나게 많은 중국의 인민처럼 그는 엄청난 일을 저지른 엄청난 사람이다.
혁명가이자 독재자, 시인이자 폭군, 철학자이자 정치가, 남편이자 바람둥이였던 그의 다면적인 모습과 엄청난 삶의 규모는 내가 긴 리뷰를 쓸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나를 압박하고 구슬린다. 그의 삶이 의미하는바 역시 한두 가지로 설명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다의적이다. 무엇이 어떻게 그를 대단한 사람으로 완성시켰고, 그의 무엇이 여전히 중국인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아리송하지만, 쥐어뜯듯이 역사를 자신의 의지대로 창조하고 후벼 파듯이 역사에 자신의 이미지를 각인시킨 한 인간의 대단한 삶은 자극적인 역사가 제공하는 무궁무진한 매력과 더불어 한 인간의 삶이 얼마만큼이나 극적으로 뻗어 나갈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것과도 같아 오싹하면서도 무척이나 경이롭다.
마지막으로 『마오쩌둥 평전』에 (내가 아는 한에서) 한 가지 빠진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3선’ 문제다. 3선은 독일이 2차대전 때 굴을 판 산속으로 군수업체를 이동시켜 연합군의 공습을 피하려고 한 것처럼 미국으로부터의 안보위협에 대비해 미국의 공군력이 접근 불가능한 중국 서남부로 중국의 산업을 대규모로 이동시키는 계획이다. 실행은 덩샤오핑이 맡았으며 제3선의 비용은 1963년부터 1965년까지의 중국 예산의 40%, 1965년부터 1970년까지 5년 예산의 53%, 그리고 1970년부터 1975년까지 예산의 45%에 달했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로 진행된 大프로젝트인데(마오쩌둥의 여타 야심 찬 계획들처럼 결과적으론 깨진 독에 물 붓는 꼴이 되고 말았지만) 한마디 언급도 없다. 깜빡한 것인지, 아니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고 넘어간 것인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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