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행(白夜行) by 히가시노 게이고 | 끝나지 않는 여운
두 편의 영화, 한 편의 드라마의 원작
히가시노 게이고(東野圭吾)의 『백야행(白夜行)』은 재미난 수많은 그의 작품 중에서 한국에도 잘 알려진 소설이다. 이 원작을 기반으로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영화로 제작됐다. 노회한 사사가키 형사 역에는 배우 한석규, 우아한 품위 속에 천(千)의 얼굴을 숨긴 유키호 역에는 배우 손예진, 그리고 유키호의 그림자이자 분신인 료지 역에는 배우 고수가 열연한 원작과 동명의 박신우 감독이 맡은 영화는 2009년에 개봉했고, 일본에서 제작된 영화 <백야행> 에서의 유키호 역에는 <올웨이즈 3번가의 석양> 이라는 패전 후 50, 60년대 도쿄의 서민들의 삶을 필름에 담은 영화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준 호리키타 마키가 맡았다. TV 드라마는 일본에서 2006년에 방영됐다.
아쉽게도 TV 드라마는 볼 기회가 없었고(이 후기는 일본 드라마 <백야행> 을 보기 전에 작성했다.), 영화 두 편은 봤다. 원작에 충실한 것은 일본에서 제작된 영화였지만, 작품을 관통하는 주요 노선은 두 작품 다 원작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한국에서 제작된 영화에서는 손예진의 얄미운 연기가 정말 일품이었고, 하나의 원작으로 이렇게 많은 곁다리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원작이 가지는 작품성의 여부를 떠나서 책을 읽는 독자나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관객이나 시청자에게 어느 정도 재미는 보증한다는 이야기이다.
3권으로 구성된 작품이니만큼 이야기는 짧지 않다
줄거리 보기
작품의 두 남녀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유키호와 료지의 초등학교 5학년 시절에 일어난 전당포를 운영하던 료지의 아버지 살해사건으로부터 긴 이야기는 시작한다. 그러나 사건을 수사하던 사사가키 형사 등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사건으로 미궁으로 빠진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전당포 주인 살해사건의 용의자로 몰렸던 유키호의 어머니가 가스사고로 죽는다. 하지만, 이 사고도 석연치가 않다. 궁핍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유키호 어머니가 자살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자살로 위장한 것인지 말이다.
유키호는 아버지의 친척뻘이자 다도와 꽃꽂이를 가르치는 가라사와 레이코의 양녀로 들어가고, 이야기는 주인공들의 중학교 3학년으로 시절로 건너간다.
레이코에게서 배운 다도와 꽃꽂이로 갖추게 된 우아한 몸가짐과 그에 어울리는 아름다움으로 근처 남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인 유키호의 유일한 라이벌은 후지무라 미야코였다. 그런데 어느 날 유키호와 그녀의 친구 에리코가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외진 창고에서 알몸으로 손발이 묶이고 입에는 자갈이 물린 채 쓰러져 있는 미야코를 발견하고 유키호는 충격을 받고 학교에 나오질 못하는 미야코의 집을 방문하여 미야코를 위로한다.
단짝이 된 유키호와 에리코는 같은 대학으로 진학하고 같이 댄스부에도 가입한다. 그런데 댄스부장이자 재벌의 자손인 시노즈카는 다른 부원들처럼 아름다운 유키호에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화장도 안 하고 수수한 옷차림을 한 에리코에게 관심을 두고 접근한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연인이 되려는 찰나에 에리코는 중학교 때 동급생 미야코가 당한 일을 그대로 겪게 되면서 두 연인은 다시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된다.
유키호는 시노즈카 가즈나리의 절친한 친구이자 땅 부잣집 아들인 다카미야 마코토와 사귄다. 그리고 거짓으로 임신한 척 꾸며 마코토에게 짐을 지게 하여 그와 결혼하지만, 야망이나 자기 개발이 전혀 없는, 현실에 안주하는 마코토의 평범한 삶에 실망한 유키호는 이혼을 결심하고, 결혼 후 유키호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한 마코토는 두말없이 이혼을 받아들인다.
마코토와 순조롭게 이혼한 유키호는 새 목표를 세우고 가즈나리의 사촌형이자 시노즈카 제약회사의 뒤를 이을 시노즈카 야스하루에게 접근한다. 뚜렷한 증거는 없지만 유키호에게서 보이지 않는 위험을 직감한 가즈나리는 사립탐정을 고용해 유키호의 뒷조사를 의뢰하는 한편, 사촌형에게 유키호는 적합한 여자는 아니라고 설득하면서 사촌형의 재혼을 반대하지만, 결국 두 사람의 결혼을 막지는 못한다. 동시에 유키호를 조사하던 사립탐정은 행방불명이 되고, 가즈나리는 회사의 기밀을 빼돌렸다는 의심받아 한직으로 좌천된다. 그뿐만 아니라, 가즈나리와 같이 아빠의 재혼을 반대하면 야스하루의 15살 난 딸 미카는 어느 날 택배직원을 가장한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정원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모습으로 유키호에게 발견된다.
한편, 은퇴 후에도 오래전 전당포 살인사건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독자적인 수사를 계속해왔던 사사가키는 확실한 물증은 없지만, 유키호의 뒤에는 언제나 료지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사가키는 이러한 두 사람의 공생 관계를 문절망둥이와 대포새우로 비유하곤 한다.
19년에 걸친 사사가키의 끈질긴 추격은 마침내 결실을 보고, 료지에게 불리한 결정적인 단서를 획득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유키호의 그림자이면서도 결코 밖으로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료지를 과연 어디서 어떻게 잡을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을뿐더러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19년에 걸친 긴 이야기
그러나 한번 이 책에 눈을 돌린 독자는 마력처럼 흡입력이 강한 유키호와 료지의 이야기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는 없다. 처음 독자의 눈에 뚜렷하게 보이는 사실은 단지 유키호 곁에 있는 사람은 불행한 일을 당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차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드러나는 사소한 단서들을 조합할 수 있는 현명한 독자라면 유키호의 가면 뒤에 치밀하게 숨겨진 본 모습을 조금씩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어둠의 장막 뒤에 숨겨진, 절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유키호의 강력하면서도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철두철미한 의지는 늘 누군가에 의해, 바로 료지에 의해 비밀스럽고 치밀하게 시행되어왔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싹 끼치는 짜릿한 전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삶은 작품 제목 그대로 ‘백야행(白夜行)’이었다. 이에 대해 료지는 “내 인생은 백야(白夜)를 속을 걷는 것 같으니까.”라고 말하며, 유키호 역시 자신의 삶은 “태양 아래서 산 적이 없어.”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여기에 유키호는 알 수 없는 묘한 설명을 덧붙인다.
“내 위에는 태양 같은 건 없었어. 언제나 밤. 하지만, 어둡진 않았어. 태양을 대신하는 것이 있었으니까. 태양만큼 밝지는 않지만 내게는 충분했지. 나는 그 빛으로 인해 밤을 낮이라 생각하고 살 수 있었어. 알겠어? 내게는 처음부터 태양 같은 건 없었어. 그러니까 잃을 공포도 없지.”
얼핏 이 말을 쉽게 풀이해 보면, 유키호에게 태양 대신 빛을 준 사람은 언제나 유키호 뒤에서 그녀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준 료지인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한때 유키호의 절친한 친구였던 에리코가 가즈나리가 고용한 탐정 이마에다에게 끝내 하지 못한 말, 바로 그 ‘태양’은 료지가 아니라 시즈노카 가즈나리이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다. 탐정 이마에다도 유키호를 조사하다가 결국 그녀가 정말로 사랑한 사람은 가즈나리이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대학 시절, 가즈나리의 애인이 될 뻔했던 유키호의 단짝으로 보였던 에리코의 불행, 유키호가 처음 결혼한 남자도 가즈나리의 친구이고 재혼한 남자는 가즈나리의 사촌형이었다. 그래서 독자는 그녀가 정말 사랑하는 남자, 정말 가지고 싶었던 남자는 가즈나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그리고 유키호의 계모 레이코의 장례식 때, 유키호는 가즈나리와 단둘이 남자 가즈나리를 살짝 떠본다.
“남자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잘 몰라요.”
만약 유키호의 이 말이 진심이라면, 그녀는 진정으로 사랑하고픈,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할 수 있는 남자를 아직 만나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이 말은 은연중에 바로 그 순간 눈앞에 팔만 뻗어도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가즈나리를 염두에 두고 한 말로 풀이할 수도 있다. 아마도 유키호가 이때 진정으로 하고픈 말은,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자는, 오직 당신뿐이에요.”
이지 않았을까? 그가 아니면, 자신 때문에 아버지를 살해해야만 했던 료지를 사랑했을까? 이도 아니면, 애당초 태양 없이 자란 차갑고 어두운 그녀의 마음에는 따뜻한 사랑이 싹틀 여지조차 없었던 것이었을까?
이렇게 작품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에도 작품은 확실한 결말로 독자를 안심시키고 만족하게 하기보다는, 독자의 끊임없는 상상력을 자극하며 길고도 긴, 깊이 역시 알 수 없는 여운을 안겨준다. 이 여운은 느끼는 사람에 따라 뭔가 찜찜하고 영 뒤끝이 개운치 못한 껄끄러운 것일 수도 있으나. 어찌 되었든 수렁에 빠진 것처럼 책장을 덮어도 독자의 머리와 가슴은 쉽게 작품을, 아니 유키호의 곁을 떠나지 못한다. 이것이 이 작품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마력이자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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