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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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 산들의 꼭대기 | 삶의 부조화를 중재하는 우아한 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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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 산들의 꼭대기 | 츠쯔젠 | 삶의 부조화를 중재하는 우아한 텍스트

안쉐얼이 저녁에 자신과 함께해주는 게 있다고 말하자 단단히 놀란 슈냥이 재빨리 물었다. 누가 함께해주는데? 안쉐얼이 말했다. “밤에 달과 별이 있잖아. 그것들은 발이 길어 창문을 넘어올 수 있어. 넘어와서는 나랑 같이 베개를 베고 잠자는 내 곁에 있어 준다니까. 만약 달과 별이 없는 밤이면 어쨌든 바람은 있잖아.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가 바로 나와 말하는 소리야.” (p45)

감히 경이롭다고 말할 수 있는….

현실을 제대로 투영한 문학이라면 한없이 아름다울 수만은 없다. 현실에서 일어날법한 소재에 작가의 허구적 상상력이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여기에 맛 좋고 모양 좋은 떡을 만들듯 정성을 다해 이야기를 빚고 윤기 자르르한 기름으로 빛깔을 더하며 감칠맛을 더한다. 그렇게 해도 슬픔과 불행이 반을 차지하고도 남는 현실의 어두운 이면을 외면할 수도, 감출 수도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중생의 번뇌를 외면할 수 없고, 예수님이 고통받는 영혼의 울부짖음을 외면할 수 없는 것처럼 작가는 속세의 때에 절어 살 수밖에 없는 민중의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만약 작가가 민중의 고통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독자에 대한 배신이자, 작가로서의 사명감을 저버리는 일이다. 문학 속에 삶의 애증과 애환이 진득하게 녹아있지 않다면, 그것은 김빠진 맥주이자 사이다며 팥소 없는 찐빵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진실한 문학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그저 그런 삼류 소설 더미 속에다 처박아 놓고 심심할 때마다 불쏘시개로 쓰면 제격이다.

문학이 민중의 슬픔과 불행을 자신의 무한한 품으로 포용할 수 있을 때, 그것을 읽는 독자는 민중의 슬픔과 불행이 녹녹하게 녹아있는 ‘문학’이라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삶을 통해 무한한 정신적 위안거리를 찾을 수 있으며, 그렇게 현실의 번뇌로부터 한걸음 떨어져 한시름 놓을 수 있을 때 비로소 타인의 슬픔과 불행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포용을 배운다. 라고 나는 감히 주장하고 싶다.

어떤 작법이 되었든지, 텍스트 속에서 민중의 삶이 진실하고 우아하게 녹아내리는 작품은 독자를 때론 비극 배우의 주인공처럼 비탄에 빠지게도 하고, 때론 첫날밤을 기다리는 새신랑처럼 기쁨에 들뜨게도 한다. 한마디로 울다가 웃게 만들며 엉덩이에 뿔 나게 한다. 그러나 때론 삶의 애증과 애환, 탐욕과 이기심, 살인과 폭력, 질투와 시기심, 조롱과 멸시 등 사람을 슬픔과 불행 속으로 빠지게 하는 이 모든 악마적인 것들이 문학적 상상력 속에 매우 잘 버무려져 있음에도 독자를 비탄에 빠트리지 않고, 그렇다고 마냥 기쁨에 들뜨게도 하지 않는, 한편으로는 임종을 앞둔 노인네가 지난 세월의 숱한 희로애락을 회상하는 것처럼 어딘지 모르게 초월적인 소설이 있다. 그야말로 인류가 우주와 자연을 바라보며 느껴왔던 것처럼 경이로움을 느끼게 하는 소설들이 있다. 언어의 연금술사 셀마 라게를뢰프(Selma Lagerlof)의 소설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The Saga of Gosta Berling)』가 그러했다면, 츠쯔젠(遲子建)의 『뭇 산들의 꼭대기(群山之巔)』도 그러하다고 이 자리를 빌려 감히 내세우고 싶다.

삶의 갖가지 부조화를 아우르는 마력의 문장

엄동설한에도 기어코 곰방대에 태양 불로 불을 붙여 피우는 담배를 피우는 도축업자 신치짜, 탈영병이라는 오명과 일본인 아내를 얻었다는 비난을 짊어지고 사는 신카이류, 정령에서 하룻밤 사이에 인간 세계로 추락한 비석 제작자 안쉐얼, 사람들은 사람을 죽인 손이라고 무서워하지만 정작 자신은 세상의 죄를 없앤 깨끗한 손이라고 확신하는 사형을 집행하는 사법경찰 안핑, 든든한 뒷배를 두었음에도 자연과 고향을 사랑하는 일념으로 진장(鎭長)이라는 한직에만 머무르려는 탕한청, 도시에서의 화려한 삶을 포기하고 보건소에서 근무하며 장애인이 된 대학 친구를 기꺼이 돌보려는 탕메이, 장례식장에서 염습한다는 이유로 안핑의 손처럼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손을 가졌지만 자신의 손은 두꺼운 입술 같은 인간 세상에서의 마지막 입맞춤이라고 믿으면서 반신불수가 된 남편을 수발드는 리쑤전, 말(馬을) 사랑하는 소문난 결혼 예복 제작 명인 슈낭, 계모의 목을 싹둑 잘라버린 것도 모자라 마을 처녀를 후다닥 강간하고 냅다 산으로 도망친 신치짜의 양아들 신신라이 등등 『뭇 산들의 꼭대기』의 중심이 되는 가상의 마을 룽잔진은 마치 인간 세상의 다사다난한 삶을 압축한 것처럼 다양한 삶의 굴절과 음영을 드리우는 온갖 군상들로 북적거린다. 마을 사람들이 여기저기 기운 신카이류의 옷을 보며 비웃자 “기운 건 옷의 꽃잎이야. 꽃잎마다 이야기가 있다고. 네가 알긴 뭘 알아!”라고 핀잔을 준 것처럼 『뭇 산들의 꼭대기』는 룽잔진 마을 사람들 삶 속에 울긋불긋하게 기워진 털털한 이야기들로 기워져 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장관을 이루는 울긋불긋한 단풍을 바라보는 것처럼 기우고 기워진 그들의 이야기가 한없이 아름답다고만은 할 수 없는 것이, 그들의 이야기에는 애틋한 사랑도 있고, 풋풋한 정도 있고, 훈훈한 용서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질투와 시기, 이기심과 탐욕, 욕정과 혼란, 증오와 미움, 부패와 비리 등 이 모든 것들이 고부간의 사나운 갈등처럼 아슬아슬하게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룽잔진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보고 있노라면 때론 처량한 한탄을 쏟아내기도 하며, 때론 근심 어린 혼란에 빠지기도 하며, 때론 물큰한 감동을 자아내기도 하며, 때론 강렬한 비탄에 잠기게도 하며, 때론 방긋 미소를 짓게 한다. 그야말로 톡 쏘면서도 새콤달콤한 마늘장아찌처럼 인생의 신산한 맛이 이야기 속에 절묘하게 절여져 있는, 요지경 같은 세상의 축소판이라 할만하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깊은 우울과 절망의 나락 끝으로 추락하는 대신 마치 엄마 품속에 안긴 것처럼 포근하고 따스한 뭔가에 자신이 홀리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작가 츠쯔젠의 기가 막힌 문장력이 빚어내는 기가 막힌 조화 때문이다.

『어얼구나 강의 오른쪽(額爾古納河右岸)』에서 북방 소수민족의 기개 넘치는 삶을 아랫목에 앉아 좌우로 흔들흔들 상체를 움직이면서 자신의 이야기에 운을 맞추는 할아버지가 앙증맞은 손을 화롯불에 호호 데우면서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운 손자에게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처럼 신비롭고 몽환적으로 묘사했다면, 『뭇 산들의 꼭대기』에서는 생존본능을 열렬히 자극하는 ‘현실’이라는 혹독한 환경이 잉태할 수밖에 없는 삶의 갖가지 부조화, 즉 개발과 자연, 미신과 과학, 전통과 변화, 권력과 개인, 비밀과 진실, 사랑과 배신, 회개와 용서 사이의 갈등과 마찰로부터 불거져 나올 수밖에 없는 갖가지 삶의 우환을 찰밥처럼 찰지고, 참깨처럼 고소하고, 공짜 술처럼 맛 나는 수려한 문체로 아우르고 구슬리며 더할 나위 없이 조화롭고 아름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람 몸속에 흐르는 피처럼 식지 않는 따스함을 잃지 않은 채 중재하고 있다.

群山之巅 At the Peak by 迟子建 Chi Zijian
<룽잔진은 이런 마을일까?>

전통이 구습으로 천대받기까지

전통적인 장례법을 고수하려는 룽잔진(叫龙盏) 노인들이 꽉 막힌 것일까? 아니면 장례법을 획일적으로 강제 적용하려는 정부가 융통성이 없는 것일까? 여전히 전통과 이 전통을 뒤집어엎으려는 외부로부터의 변화가 서로 옳다며 우격다짐하는 룽잔진 사람들의 삶은 지킬 전통이라는 것을 이미 대부분 잃어버린, 혹은 전통이 문명의 망치에 아스러져 가는 것을 바람에 흩날리는 눈을 보듯 그저 속절없이 바라보아만 하는 사람들에겐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생각해보면, 과거의 전통을 밝고 오른 오늘날의 새로운 전통이란 것도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세대들에 의해 타파해야 할 낡은 전통으로 몰리기 마련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돌고 도는 것인데, 우리는 전통을 내팽개치는 데는 마치 비정규직 사원을 내치는 것처럼 냉혹하기 가차 없다. 나 역시 언제나 전통을 고수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전통과 현대적 삶이, 그리고 자연과 문명이 아슬아슬하게나마 공존하는 룽잔진 사람들의 다채로운 삶을 보면, 전통이 전통으로 인정받기까지에는 몇 세대 이상의 긴 세월이 필요했음에도 그 전통이 사라질 때만큼은 바람에 휩쓸려 허공으로 사라져버리는 한 줌의 재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왜 우리는 전통을 버리는데 이다지도 미련이 없는 것일까. 라고 생각해 본다.

수백 권 중에서 한번 만나볼까만 한 책

형량이 너무 무거운 것이 아니라 너무 가볍다고 항소할 만큼 죽은 남편에 대한 죄책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리쑤전을 기꺼이 묵묵히 기다리는 안핑은 좋은 여자를 기다리는 일은 천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하는 혜성을 기다리는 일과 같다고 말한다. 좋은 책을 만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천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하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적게는 몇십 권, 많게는 백 권은 읽어야 한두 권 정도 만날 수 있다. 물론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에 달린 문제이기는 하지만, 책을 선택할 때 외적인 요소(인터넷 검색, 인터넷 서점 등)보다는 내적인 판단력에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나로서는 츠쯔젠이라든지, 라게를뢰포라든지, 옌롄커(閻連科)라든지, 이런 좋은 작가들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다분히 운도 따라주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나 도스토옙스키처럼 책을 가까이 않는 사람도 그 이름만큼은 알법한, 그래서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작가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읽는 책 대부분이 주사위를 굴리는 것과 다름없을 정도로 나의 무지, 그날의 기분, 그리고 내 눈에 띄었다는 우연이라는 삼위일체의 부끄러운 조합에서 비롯된 선택이지만, 아무튼 책을 읽는 사람에겐 좋은 책을 만난다는 것은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이나 반갑고 기쁘고 흥분되는 일이다. 사실 신화, 전설, 역사, 현실, 현실의 재구성, 현실의 각색 등 이 모든 것들은 작가의 필력으로 또 다른 현실이 된다고 하지만, 그렇게 창조된 현실에 사람의 삶을 더욱더 풍부하고 윤택하고 만드는 진정성이 없다면, 그것은 빛을 잃은 별과 다름없다. 그것은 영혼이 없는 육신이며, 생기를 잃은 꽃이다. 그런 책은 잠시 지루한 시간을 덜어줄 수는 있겠지만, 정신의 빈곤을 채워줄 수 있는 마음의 양식으로까지는 나아갈 수 없다. 그래서 한 권의 좋은 책을 간절히 만나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을 꼭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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