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인 남자가 돌아왔다 | 황세연
단편 + 단편 = 장편?
일단 황세연 작가의 장편소설 『내가 죽인 남자가 돌아왔다』는 유쾌한 기분으로 경쾌하게, 그리고 물 흐르듯 거침없이 읽을 수 있는 소설임을 밝혀두고 싶다. 그러나 난 불행하게도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그 유쾌함과 경쾌함의 100%를 만끽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죽인 남자가 돌아왔다』는 내가 불과 몇 달 전에 읽었던 『한국추리소설 걸작선』에 실린 「IMF 나이트」라는 단편에 살을 붙인 개작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짐작하건대 소설의 ‘범죄 없는 마을’이라는 배경은 (읽지는 않았지만) 작가의 또 다른 단편 「범죄 없는 마을 살인사건」을 떠오르게 한다. 고로 『내가 죽인 남자가 돌아왔다』는 앞의 두 단편을 조합하여 덧칠하고 수정하고 땜질한 개작으로 추측된다.
자신이 쓴 단편들로 짜장면을 만들든 죽을 끓이든 작가 마음이지만, 이미 출판한 두 단편을 짬뽕한 것을 마치 새로운 작품인 양 내놓은 것은 좀 성의가 없어 보인다. 써먹을 소재나 창의력이 바닥난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을 들게도 한다. 아무것도 모른다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긴 하지만, 이미 세상에 얼굴을 내놓은 적이 있는 단편들을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거의 그대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참신함은 제로다. 더군다나 이런 소설이 상을 받았다고 하니 다소 어이가 없고, 실망스럽다. 설마 심사위원들이 앞서 언급한 단편들의 존재를 몰랐을 리는 없을 테고, 아마도 상을 줄 만한 작품이 어지간히도 없었나 보다.
하지만, 이런 불만 같지도 않은 불만은 순전히 내 개인적인 사정에서 비롯한 개소리다. 앞서 언급한 두 단편에 감흥을 받고 살찐 엉덩이를 바라보는 듯한 탐욕스러운 기대감으로 『내가 죽인 남자가 돌아왔다』의 책장을 펼쳐 본 독자라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실망을 금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독자가 얼마나 될까?
지금부터는 재미있는 소설이니만큼 재미있는 이야기만 해보련다.
<사진 출처: 대전일보> |
범죄가 없다고 마음 편한 것은 아니다?
범죄 없는 마을? 이런 마을을 실제로 방문한 적이 없더라도 어디선가 말이 들어본 듯한 소리다(사이먼 페그가 주연한 「뜨거운 녀석들(Hot Fuzz)」이란 황당하게 웃기는 영화에도 등장한다). 아무리 세상천지가 범죄로 그득하다고 해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딘가에는 ‘범죄 없는 마을’ 한두 개 정도는 있을법하다. 하물며 세상천지가 범죄로 그득하지 않은 현실에서는 그보다 더 많은 ‘범죄 없는 마을’이 있을 것이라고 낙관할 수 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멀리 찾아가 볼 것도 없다. 한국에서도 불과 10여 년 전까지 ‘범죄 없는 마을’ 포상이 존재했다. 고로 『내가 죽인 남자가 돌아왔다』의 주요 무대가 되는 ‘범죄 없는 마을’ 중천리는 8년 연속 범죄 없는 마을에 뽑혔다는 충남 청양군 남양면 온암1리에서 착안한 가상의 마을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범죄없는 마을’ 포상 사라진다」 국민일보 기사 참고).
2017년 기준 온암1리 인구가 청양군에서 두 번째로 적은 38명인 것을 보면 ‘범죄 없는 마을’에 뽑힐 수 있는 나름 유리한 위치에 있기는 하다. 그러나 재미난 것은 이 포상이 사라지는 이유다. 앞에 링크한 국민일보 기사를 보면, ‘범죄 없는 마을’ 포상을 없애는 이유로 ‘5공 시대의 유물’이라는 시대적인 이유와 더불어 ‘농촌 지역에선 지정 • 비지정 마을 사이에 위화감이 조성되고, 선정되지 않은 곳에 불안감을 조성한다’라는 심리적인 압박감을 언급했다. 기사엔 포상과 관련해서 농민들이 받는 스트레스에 관해서는 더 이상의 언급은 없지만, 마을 인구가 적을수록 그만큼 유대감이 남달랐을 만큼 나 하나 때문에 포상을 못 받는 일이 생긴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불행이자 부덕이다. 물론 연말 보너스처럼 당연시 받아오던 포상금이 끊기는 것도 무척이나 애달프고 신경 쓰이는 일이다.
내 잘못이나 실수로 매우 중대한 일을 그르쳤다 해도 이로 인한 피해가 순전히 나 하나에만 해당하는 사항이라면 그나마 견디기 쉽다. 그러나 이것이 ‘너 때문에 꼴찌 했어.’, ‘당신 때문에 거래에 실패했어.’, ‘당신 때문에 실적이 떨어졌어.’ 등등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할 상황이라면 정말이지 대꾸할 말이 없다. 대꾸는커녕 그 엄청난 압박감과 자책감 때문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다. 다수와 관련된 큰일이 나 하나 때문에 도로 아미타불 되는 절망적 상황만큼은 사회생활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최악이다. 이것을 끝내 견디지 못하고 생을 끝내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사회적 동물인 우리로서는 오랫동안 의존해온 집단으로부터 소외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때에 따라선 이때의 두려움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등딱지에 붙은 불명예는 종종 그 가족에게까지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나 한 사람이 죽음으로써 가족이 집단으로부터 추출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대부분 사람은 기꺼이 그 죽음을 받아들인다. 또한, 범죄자들이 고향이 아닌 외지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경향이 높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하물며 ‘범죄 없는 마을’ 앞에 몇 년 연속이라는 찬란하면서도 한편으로 불안스럽기 그지없는 접두사까지 붙어 있는 상황이라면, 자칫 잘못하여 내가 마을의 오랜 영광을 한순간에 깰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은 태산과도 맞먹는다. 더더욱 불행한 것은 이러한 불안감을 365일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중천리 사람들은 밥 먹고 똥을 누고 오줌을 갈길 때조차 이런 불안감을 가슴 한편에서 완전히 떨쳐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런 심리적 압박감이야말로 간단하게 마무리 지을 수도 있었던 신한국(등장인물 중 하나)의 사건을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비극으로 만든 원인이지 않을까 싶다.
20년 세월을 느낄 수 있는 문장
황세연 작가의 『내가 죽인 남자가 돌아왔다』는 범죄소설에 추리소설을 더한 것이니만큼 스포일러를 최대한 억제하며 리뷰를 쓴다는 것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이 평소보다 약간 절름거릴 정도로 단어 선택 하나하나가 조심스럽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살얼음판 위라도 걷는 것 같다(아마 중천리 마을 사람들의 하루하루가 이와 비슷한 심정이지 않을까 싶다). 스포일러를 억제해서 써야 할 만큼 괴물의 아가리 속처럼 캄캄했던 사건을 차근차근 풀어나가면서 희뿌옇게 밝혀가는 시큼털털한 장르적 재미는 이 책을 추천하게 만드는 결정적 요소다.
나 같은 경우는 우연히 읽은 단편 하나가 소설의 재미를 반감시키시기는 배신자가 된 셈이지만(히틀러의 표현을 빌리자면, 등 뒤에 칼을 꽂힌 셈이라고 할까나?), 설령 이 사실을 알았더라도 「IMF 이야기」에서 보여준 알싸한 냉소적인 유머러스한 문장력이 탐 나서라도 이 책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대감은 여자 친구의 뽕브라를 눈치챈 순간처럼 허무하게 무너졌다. 약간의 유머는 그런대로 남아 있지만, 단편에서 만큼의 깊이는 없다.
아마도 집필 시기(대략 20년?)의 현격한 차이가 현격한 텍스트의 차이를 불러낸 듯하다. 「IMF 이야기」의 텍스트는 단편이지만, 작가의 성의가 심심치 않게 느껴질 정도로 옹골차지만, 『내가 죽인 남자가 돌아왔다』의 텍스트는 좀 느슨해진 느낌이다. 멀찌감치서 보면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포함한 전체 20장 중 나머지 19장은 흐림(Blur) 필터 처리된 것처럼 「아이엠에프 나이트」만 튀는 격이다. 장편이라 그런지 문장 하나하나에 세심하게 공을 들이기보다는 읽기 쉬운 텍스트를 지향하기로 마음먹고 쓴 글로 보인다.
<70년 동안 범죄가 없었다는 인도의 Katraw 마을(출처: moneycontrol)> |
통쾌한 반전 뒤에 숨은 텁텁함
재밌는 글을 써보겠다던 애초의 다짐은 허깨비처럼 사라지고 역시나 재미없는 글이 되고 말았다.
어찌 되었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미스터리, 자연재해로 인한 이틀간의 고립, 범인은 반드시 등장인물 중에 있다, 사건을 파헤치는 탐정, 오리무중에 빠진 동기, 반전, 여기에 IMF라는 사회적 요소까지. 서미애 작가의 심사평대로 『내가 죽인 남자가 돌아왔다』엔 장르소설의 미덕이 친근하게 아우러져 있다. 첩첩산중을 물 찬 제비처럼 경쾌하게 헤쳐 나가는 문장과 독자의 얼떨떨한 정의감에 안달이 난 답답한 감정을 해갈 시켜주는 통쾌한 반전을 곁들인 결말도 일가견 있다.
그리고 나름의 뒤끝도 있다. 소설 한 편을 마무리했다는 뿌듯함과 소설에서 얻은 감흥이 두루뭉술 합쳐진 기분 좋은 흥분이 아직 싹 가시지 않았을 때다. 다소 수그러든 흥분을 여유롭게 음미하며 책장을 덮고 나니, 과연 이러한 결말이 유쾌하기만 한 일인지 살포시 의문이 드는 것과 동시에 오싹함에 닭살이 돋는다(인과 관계를 논리적으로 따지는 사고(思考)보다 감정적 판단이 더 빨랐던 것이리라).
마을 사람들의 약점을 이용해 돈을 와장창 뜯어내려는 악덕 사채업자, 그리고 사채업자들의 사고사를 자신들의 범죄 행위를 은폐하는데 악용한 마을 사람들. 이 두 부류 중 누가 더 나쁜 사람들일까? 하는 의문이 퍼뜩 고개를 든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통쾌한 반전은 씁쓸한 반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사채업자들이야 원래 그런 사람들이라고 쳐도 마을 사람들의 행동을 일말의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니면 사람은 이기적인 동물이라는 진부한 진리를 다시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까?
요즘 읽은 책들에선 ‘이기적 유전자’의 시대는 저물어 가고, ‘이타적 유전자’의 시대가 오는 듯하니, 여기에 맞추어 해석하면 마을 사람들은 그저 좋지 않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을 위해 단지 협력했던 것일 뿐이다. 자연사의 70%가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라는 말이 맞기는 맞나 보다. 다만, 그 협력의 범위가 주로 가족 • 친족, 그리고 주변 사람들로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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