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자 | 피에르 르메트르 | 그가 채용 시험에 베레타를 들고 간 이유는?
내 이름은 알랭 들랑브르이고, 나이는 쉰일곱이다. 전에는 간부급 회사원이었으나 현재는 실업자다. (『실업자』, 16쪽)
소설 『실업자: 신은 나에게 직장을 주어야 했다(Cadres Noirs by Pierre Lemaitre』의 저자 피에르 르메트르와 그리고 책 내용과는 상관없지만, 주인공을 간단하면서도 뭔가 의미심장하게 소개하는 앞의 인용문은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吾輩は猫である by 夏目漱石)』의 유명한 첫 구절을 연상시킨다.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나쓰메 소세키 지음, 임희선 옮김, 생각처럼, 5쪽)
주인공 알랭(Alain Delambre)은 일본의 이름없는 고양이가 대체로 얌전하게 지내면서 인간사를 통찰했던 것과는 반대로 스스로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한 개인사를 한 시대의 역사로 승화시킨다. 그가 겪는 실업 문제는 그 외에도 다수가 겪고, 그 원인과 여파가 불황의 고리에 매달려 있다는 점에서 엄밀히 말하면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누구가 겪고, 또 누구나 겪을 수 있다는 이유로 개인적 문제로 미루어버린다.
아무튼, 알랭은 다시 일자리를 찾으려고,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예전의 그 위치를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하지만, 알랭은 일반적인 실업자처럼 사회적 지위나 소득의 적고 많음에 개의치 않으면서 오직 일자리만을 찾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예전에 자동차를 두 대나 굴리던 한창 잘 나가던 시기의 그 자리, 또는 그와 비슷한 자리만을 찾으려고 했고, 거기서 그의 비극은 시작된 거일지도 모른다. 대공황 시절 급격한 사회적 경제적 지위의 추락이 실제 자살로 이끌었던 것처럼 알랭은 자신의 추락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견딜 수 없는 굴욕이자 극복하고 이겨내야 할 하나의 장애물로 받아들인 것이다. 왜냐하면, 노동에 기초를 둔 소비사회에서는 직업과 그가 가진 경제적 능력이 그 사람의 인격이고 얼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중상층이 그러하듯, 이들은 현재의 수입과 그 수입이 지속할 것이라는 순전히 자신들만의 예측으로 미래의 행복을 끌어다 쓰는 실수를 범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측하지 못한 실업은 한때 꿈처럼 달콤했던 장기 대출의 가면을 벗기고 악마로 탈바꿈하게 하여 한 가족의 파멸을 불러오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그가 채용 시험에 베레타를 들고 간 이유?> |
알랭은 온갖 잡부의 일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예전의 그 자리를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리고 4년 만에 절호의 기회가 온다. 그런데 그 기회란 것이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다. 한 대기업이 지사의 정리해고를 맡을 냉정하고 과감한 간부를 선발하는 자리인데, 그들은 이 계획에 참여하는 알랭 같은 지원자들과 회사 간부들에게는 철저하게 비밀에 부친 채 미리 사전에 모의한 인질극에 휘말리게 한다.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에 노출시킴으로써 간부들의 자질과 기업 가치에 대한 충성도를 시험해보겠다는 것이다. 인질극이라는 마지막 채용 시험까지 올라온 알랭을 포함한 네 명의 지원자들은 인질극 상황을 이끌어가면서 회사 간부들을 테스트하고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능력도 테스트 된다.
이런 비윤리적이고 비인간적인 채용 시험에 알랭의 아내 니콜은 격렬하게 반대하지만, 알랭은 거짓말까지 섞어가며 아내를 진정시킨다. 알랭은 채용 시험 준비를 위해 ‘개자식’이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딸의 아파트 구입 자금을 빌리고, 그 돈으로 전직 경찰관인 인질극 전문가를 고용하여 조언까지 받는다. 한편으론 탐정을 고용하여 선발 대상 간부들의 경력이나 사생활 등 가능한 모든 정보를 모으며 채용 시험을 준비한다. 이처럼 필살의 심혈을 기울여 채용 시험을 준비하던 그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 실탄이 장전된 베레타를 들고 묵묵히 채용 시험장으로 향한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손에 권총을 들게 하였을까?
일본 추리소설의 한 부류인 사회파 미스터리를 연상시키는 『실업자』는 피에르 르메트르의 다른 작품처럼 어느 정도의 긴장감과 재미가 보장되는 소설이다. 초반에는 약한 불로 한약 달이듯 느슨하게 유지하다가 알랭의 손에 베레타가 쥐어진 순간부터는 더비 경기(Derby Match)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스며 나온다. 이런 절정을 한 차례 더 겪고 난 후인 중후반부터는 조금 싱거워지고 다시 느슨해지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럼에도, 흥미진진하고 구성도 꽤 튼튼한 추리/범죄소설이다. 여기에 사회파 미스터리처럼 실업자의 비애와 기업 윤리의 추락 등 사회적 문젯거리도 심심치 않게 다루었다. 그리고 마지막의 씁쓸한 결말은 많은 사람에겐 위안이 되면서도 실제로는 소수만이 체득할 수 있는 진리, 즉 돈만으로는 결코 행복을 살 수 없다는 진부한 사실을 허무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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