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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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한 배 | 파멸적 허무주의적인 삶을 살다

취한 배 | 다나카 히데미쓰 | 파멸적 허무주의적인 삶을 살다 요절한 자의 지독한 체취를 맡다

‘취한 배’는, 원래 랭보의 시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소설 속에 나오는 노천심의 시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한 고키치가 살던 군국주의 일본과 식민지하의 조선의 혼란스런 시대 상황을 상징하는 단어이기도 한 것이다. (『취한 배』, 「역자의 말」 중에서)

무정하고 무자비한 혼란스런 시대에 절망한 고키치는 구차한 바퀴벌레 같은 끈질긴 생존 본능을 이어나갈 수단으로 ‘술’과 ‘섹스’에 몰두한다. 그의 꿈이었던 문단은 전쟁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할 도구로 전락했고, 문단의 거두들은 이런 기회를 틈타 정계나 군부와 연계를 맺어 권력을 쟁취하려는 야심에 바쁘다. 고키치는 빈약한 조선 문단의 이런 추잡하고 야비한 뒷모습에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반감을 품고 있음에도 문단과의 가느다란 연줄만은 놓치고 싶지 않다. 술과 여자를 얻을 수 있다면 줏대없는 어중간한 인간이라고 비난받아도 상관없다. 술과 여자를 살 수 있는 돈을 얻을 수만 있다면 비록 양심에 어긋나는 일일지라도 충군애국에 절규하는 척하는 것도 문제없다.

적어도 술에 취해 있는 동안에는 다른 밝은 세상을 꿈꿀 수 있다. 후회스러운 과거와 현재의 추악함, 미래의 불안함 모두 잊을 수 있다. 세계 전쟁의 위기나 현실의 공포도 먼 나랏일처럼 착각되었다. 시간의 압박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헛된 공상과 초라한 이상을 단념하기 위해서라도 술은 더 필요했다. 이렇게 악착같이 술과 여자에 매달리는 자신을 고키치는 위장과 생식기뿐인 괴물이라고 이름붙인다.

세상의 시름을 잠시라도 잊으려고 술을 마신다. 그런데 해와 달이 바뀌고 계절이 지나도 세상은 여전히 암울하다. 술잔을 연거푸 들이댄다. 계절이 지나 한 해가 저물고 새해가 다가와도 세상은 나아질 기미도, 일말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이래서는 술을 끊을 수가 없다. 더 살 수도 없다. 죽어 버리면 되지만, 죽을 수가 없다. 아침 9시, 그날 사형 집행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사형수들이 확신하는 순간 하루 더 살 수 있다는 안도감에 기뻐서 미치광이처럼 소란을 피워대는 것처럼 아무리 실낱같은 희망, 아니 그저 막연하게 뭔가 일어날 것 같은 자위적인 예감이 적중하기를 고대하며 죽음을 얼버무릴 뿐이다.

Drunk Tanaka Hidemitsu

일본 근대소설 『취한 배』는 36세의 젊은 나이에 스승 다자이 오사무의 묘 앞에서 자살한 소설가 다나카 히데미쓰의 경성 체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로 주인공 고키치는 저자 다나카 히데미쓰와 동일 인물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창녀와의 동거, 수면제 중독, 살상사건, 체포, 자살미수, 정신병원 입원 등 숱한 추문으로 얼룩진 생애를 살다간 저자의 지독한 허무주의는 고키치를 통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제목 ‘취한 배’는 전쟁과 학살 등의 광기로 물든 세상을 이리저리 흔들리는 술에 취한 배에 비유하며 이런 어지러운 세상에선 술에 취하지 않고 맨정신으로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저자의 허무주의적 세상 인식에서 나온 발상인 것 같다.

다나카 히데미쓰는 일본인의 눈으로, 그것도 상당히 동정적인 눈으로 조선의 식민 상황을 묘사하고 있으며 반대로 일본의 군국주의는 맹렬하게 비난하고 있다. 또한, 저자처럼 신념과 현실적 욕망과의 갈등 때문에 어느 한 쪽을 확실하게 선택하지 못하는 양심적인 지식인의 고뇌와 가혹한 고문으로 어쩔 수 없이 전향한 다른 지식인들의 비참한 삶을 통해 당시 친일파로 전향했던 조선 지식인의 심심한 고충을 엿볼 수 있다. 질식할 것 같은 난세에서 시시각각 전해오는 나라 안팎 소식에 좌불안석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던 지식인으로서는 세상 물정 모르고 오로지 ‘밥’만 바라보고 사는 백성의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단순하고 한정된 삶이 부러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남보다 더 안다는 것은, 아는 만큼 책임감도 무거워지고 고민도 많아지는 법이니까 말이다.

마지막으로 소설 『취한 배』 속에는 중세 전설인 ‘날아가는 네덜란드인’이야기가 나온다. 폭풍우가 심한 밤의 험난한 항해에서 신을 모욕한 죄로, 그 선장은 영원히 바람 따라 바다를 떠도는 유령선의 선장이 되었다고 한다. 인간을 모욕한 죄로 전 세계는 토네이도에 휩쓸리는 인간과 인간의 피조물처럼 무력하게 전쟁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그 어디에도 진정한 휴식처는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질긴 생존력을 발휘하여 나름의 휴식처, 즉 살길을 찾는다. 전향하여 친일파가 되던가, 목숨을 걸고 독립군이 되던가, 권력이나 부에 아첨하던가, 아니면 좀 더 고상하거나 뜻이 있는 사람은 문학이나 정치에서도 찾을 수 있다. 고키치는 여자와 술에서 피난처를 찾았고 그 자금을 마련하고자 비굴한 짓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몸부림치는 그를 감히 그 누가 손가락질하며 비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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