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최후의 도박 | 후나바시 요이치 | 추리 소설만큼이나 흥미진진한 논픽션
‘정치’로부터 멀어지는 이유
아마도 난 정치인이 좋아하는 부류의 국민일 것이다. 왜냐하면, 투표는 꼬박꼬박하면서 (지금까지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다) 정치 뉴스나 사회여론에는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왜 정치에 무관심한 국민이 되었느냐는 질문에 굳이 발명해본다면 심심치 않게 터지는 부정과 부패, 정치인들의 가없는 아귀다툼, 가진 자건 못 가진 자건 무조건 모르쇠로 일관하는 질이 좋지 않은 민족성 등이 나를 이 더럽고 야만적인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소외하게 만든다. 여기에 그동안 읽어온 역사서와 고전이 나에게 ‘정치’란 ‘두루 다스려 널리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막연한 이상을 품게 한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이런 이상주의적인 ‘정치’ 관념이 추구하는 본질은 과거와 현재가 서로 같다고 할지라도 염치고 체면이고 타협이고 관용이고 할 것 없이 개인적 야심을 추구하고 어떻게든 실속을 챙기려는 이해득실로 넘치는 현실의 정치와는 괴리감이 있을 것이고 그래서 난 이런 괴리감 때문에 딴 나라 세상의 일을 보는 듯한 상대적 거리감을 한국 정치에서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동안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면서도 의도적으로 정치 쪽 책은 피했다. 왠지 읽고 나면 ‘기분만 더 우울해지고 정치에 불신감만 더 증폭되는 것은 아닌지’ 하고 미리 겁을 먹기도 하고, 따분하고 지루할 것이라고 미리 짐작해서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사히 신문 칼럼니스트 후나바시 요이치(船橋 洋一)가 쓴 『김정일 최후의 도박(The Peninsula Question: A Chronicle of the Second Korean Nuclear Crisis)』은 그러한 소심한 우려가 전혀 쓸데없는 일이라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더불어 이 책은 북한 핵을 둘러싼 한국, 북한, 중국, 미국, 일본, 러시아 사이의 팽팽한 외교 문제와 6자회담을 둘러싼 내막과 허실 등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치를 다루고 있으므로 한국 사람에게는 진지한 관심과 아슬아슬한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책이다.
웬만한 추리 소설보다 재밌는 실화
북한의 핵 문제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채 여전히 진행 중인 국제적 골칫거리이며 우리의 안보와 직결된 문제이다. 또한, 잊을만하면 미사일을 쏘아 올리며 수작을 부리는 북한의 진의를 파악하는데 필요 충분한 실마리가 이 책 『김정일 최후의 도박』에 담겨 있으므로 그동안 정치/외교 쪽 뉴스를 꾸준히 접해온 안목 높은 독자에게는 기억력을 다져보는 복습의 시간이다. 더불어 신문이나 TV를 통해서는 알 수 없었던 6자회담 전후와 회담 중에 벌어진 각국 외교관들 사이의 웃지 못할 비화는 또 다른 흥밋거리다. 그리고 나처럼 정치/외교 문외한에게는 이 기회를 통해 기초적인 안목을 기를 수 있다.
이런 교육적이고 다소 상투적인 장점을 빼더라도 후나바시 요이치의 책은 훌륭한 범죄 소설만큼이나 재미있으며 긴장감 역시 웬만한 추리 소설에 뒤지지 않는다. 덕분에 책상 앞에 정좌하고 앉은 난 스탠드 불빛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삼아 각지고 잘 빠진 몸매를 뽐내는 글자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으며 덕분에 놀라운 집중력을 오래간만에 발휘할 수 있었다. 또한, 시종일관 책이 뿜어대는 흥미와 긴장감의 오라에 휩싸여 온몸을 찌르르 흩어가는 쾌감과 전율에 압도되어 즐거운 비명을 내심 마음껏 지를 수 있었다.
이처럼 놀라운 감흥을 안겨주는 이 책이 정말 실화인지 의심할 수도 있지만, 후나바시는 한국 • 미국 • 중국 • 일본 • 러시아의 전 • 현직 관리 158명과 재야 전문가들을 만나 직접 인터뷰했으며, “모든 형태의 대화를 통해 당사자분들께 물은 얘기를 중심으로 사실을 확인하고 평가 • 해석해 한반도 제2차 핵 위기의 현대사를” 썼다는 후나바시의 후기와 책 뒤편에 수록된 「인터뷰 명단」은 그러한 의심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후나바시의 북한 핵을 둘러싼 각국 입장의 다층 다각적인 충실한 분석은 논픽션에선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인 객관성을 확보하는데 충분했으며, 이런 점은 그의 설명에 설득력을 더해준다.
<North Korea's nuclear backpack - North Korea Victory Day-2013 / Stefan Krasowski / CC BY> |
재미있으면서도 어딘가 아찔한 외교 비화들
동북아시아의 국제 정치 변화 속에서 북한과 주변국들의 관계와 그들의 외교적 성공과 실패를 치밀하고 날카롭게 분석한 이 책에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동안 사정으로 일반에 공개할 수 없었던 비화도 들어 있다.
2002년 북일 정상회담을 실현할 수 있도록 일본 외교관과 물밑 작업을 했던 끝까지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신비에 쌓인 인물인 북한 측 외교관 ‘미스터 엑스’의 이야기, “처음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째부터는 한국과 일본을 반드시 참여시키겠다.”라는 파월 국무장관의 의중은 읽었지만, 외교 기밀에 속하기 때문에 대화 내용을 국회에서 밝힐 수 없어서 2003년 4월 북 • 미 • 중 3자회담에 한국이 빠진 것에 대한 의원들에 질문 공세에 시달렸던 윤영관 외교통상부 장관, 2003년 4월 3자회담에서 북 • 미 양국 대표단만 남겨 두게 해 거기에서 실무 협의를 하도록 시나리오를 몰래 꾸민 중국 측의 눈물겨운 노력, 2003년 8월 제1차 6자회담 도중 미국 대표 켈리 국무부 차관보가 전날 북 • 미 양자 협의에서 북한 대표 김영일 외무성 부상이 “핵 억지력과 운반 수단의 물리적 입증을 할 용의가 있다.”라고 위협한 것을 폭로하자 김영일이 “핵 억지력을 증강하고, 핵 억지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선언하고, 나아가 그것을 실증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라고 되받아쳤을 때, 듣고 있던 러시아 대표 로슈코프 외무부 차관이 옆자리의 부하직원에게 “자네가 담당하고 있는 나라(북한)는 제정신이 아니다.”라고 소곤거린 걸 로슈코프의 실수로 켜져 있던 마이크를 통해 그 속삭임이 회의장으로 흘러나가는 바람에 전체 회의가 완전히 난장판이 됐다는 이야기 등 재미있으면서도 어딘가 아찔한 외교 비화들이다.
마치면서...
역사적 변혁기를 맞이하는 동북아 정세라는 거시적인 안목에서 잠시 벗어나 오랜 역사를 함께 했던 한민족의 통일적 안목으로 좁힌다고 해도 북한의 핵 문제는 반드시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할 우리의 숙명이자 과제이다. 비록 후나바시 요이치의 이야기가 많은 사실을 말해주며 현재의 긴박한 상황을 확인해 주고 있지만 그럼에도 끝내 풀리지 않는 북한의 핵 문제와 독재 체제는 의문투성이다가 신뢰하기도 어렵다. 현재로서는 그러한 의문이 완벽하게 평화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한 통일도 어렵다. 김정은의 아버지 김정일은 2001년 1월 상하이 시찰을 마치고 단둥에서 신의주로 건넜을 때 돌연 신의주에서 하차해 잠시 상념에 잠겼다고 한다.
단둥에서 신의주로 건넜을 때 돌연 신의주에서 하차했다. 밤인데도 공장을 방문했다. 신의주를 경제특구로 만들겠다는 결의를 그런 형태로 보였던 것일까. 빌딩 위에서 압록강 저편 단둥의 야경을 보았다. 네온사인이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단둥 쪽을 잠시 지켜본 다음 몸을 돌려 북한 쪽을 보았다. 온통 칠흑의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김정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랫동안 그 어둠을 응시했다. (『김정일 최후의 도박』, p598)
평소 개혁 개방에 비판적이었던 김정일은 성공을 과시하는 빛과 자신의 실패를 분명히 드러내는 어둠이 빚어내는 극명한 대조 속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군 시찰을 할 때면 장병은 전원 총에서 탄약을 빼는 것이 의무화되어 있을 정도로 아무도 믿을 수 없었던 체제의 독재자였던 그는 그 어둠 속에서 과연 무엇을 보았을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인민을 굶주리면서까지도 그토록 핵을 고집하도록 했을까. 그는 원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원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것으로 미국과 한반도 주변국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리라고 낙관했던 것일까.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마지막 소원은 열차를 타고 평양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2000년 남북공동선언에는 경의선 철도 사업이 포함되었다. 2001년 8월 북 • 러 정상회담에서 나온 공동 성명에도 시베리아 철도와 남북 종단 철도를 연결하는 ‘철의 실크로드’ 프로젝트가 포함됐다. 일제강점기 때는 서울에서 런던행 기차표도 발매되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 그 ‘열차’를 탈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 ‘열차’를 못 타는 것까지는 괜찮다. 우리의 후손이 언제가 그 ‘열차’를 탈 수 있다는 희망만 있다면 그 정도는 참고 견딜 수 있다. 아니 참고 견뎌내야 한다.
나는 소망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그토록 간절하게 열망했던 그 열차를 타고 김정일이 빛과 어둠의 대조 속에서 쓸쓸하게 단둥의 야경을 바라보던 그 자리에 서는 것을.
지금은 핵이 사람을 배신하지 않고 그를(김정일) 배신하지 않는 궁극의 무기가 된 것일까. (『김정일 최후의 도박』, p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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